단설 [생강차] ------------------- 1 갓밝이(黎明). ------------------- 1 나는 그를 분명 싫어했지만 그것을 잊을정도로 아름다운 사람이였다. 황제가 내린 화려한 비단옷을 입고 창가에 홀로 앉아 물끄러미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 하루 일과인 남총(男寵)이였다. 조금도, 마치 그림처럼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거친 바람속에서 머리가 날려도, 폭우속에서 머리가 젖어도 그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를 사기 인형이라 불렀다. 움직이거나 떨어뜨리면 깨어져 버리는 사기로 만든 하얀 인형. 그래서 바라보기만 해야하는 사기 인형. 인형은 간혹 손목까지 오는 소맷자락을 내려 손을 가리는 일을 되풀이 할 뿐. 환관들과 이야기 하는 법도 시종들과 놀이를 하는 법도 없었다. 비가와도 눈이 와도 항상 그렇게 앉아있었다. 그런 사기 인형을 황제는 매우 총애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항상 어두웠다. 어린 나는 그것을 매우 이상하게 생각했다. 어차피 그는 남자이니 후계자를 낳을 수도 없다. 그러니 더러운 권력싸움으로 인한 고민도 없을 테고 황제의 총애가 그렇게 각별하니 늙고 추해져도 궁 밖으로 내 쳐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무슨 걱정이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는 항상 어두운 표정이었다. 그리고 손을 가리는 동작을 되풀이할 뿐. -정안족의 옷은 손을 가리는 옷입니다. 한족의 옷은 그렇지 않으니 꺼려하는 것이겠지요.- 그 말에 너무 우스웠다. 어차피 여진족에게 회유되었으면 정안의 풍습은 다 잊어야 되는 것 아닌가. 그 후 난 그의 손에 흥미를 가졌지만 항상 가리고 있는데다가 그가 있는 건곤궁(乾坤:하늘과 땅) 황제의 비궁이여서 왕자인 나조차 함부로 드나들 수가 없었다. 결국 난 그를 정면에서 볼 기회조차 없었고 항상 볼수 있는 것은 멀리 창가넘어로 보이는 사기인형이 앉아 하늘을 바라보는 장면이였다. . 어느날이였던가. 밤늦도록 이복동생의 궁에서 놀다 어둠 속을 틈타 내 궁으로 돌아가는 때였다. 허락되지 않는 건공궁의 앞을 지나쳐 돌아가는 길에 황제의 헐떡이는 소리가 들려왔고 고개를 돌려 눈에 들어온 저 너머의 정자에서 아버지와 그가 몸을 합치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 형들이 여인들과 동침하는 것을 처음 본 때에도 그저 웃기기만 했던 나였지만 그날 밤 그 장면은 소름끼쳤다. 황제가, 내 아버지인 그가 정말로 짐승과 같이 보였다. 마치 평원의 늑대가 양을 사냥을 하는 듯한 굶주린 광기. 왕의 몸부림에 제 몸을 가누기 힘들어 땅을 짚고 있는 그가 정말로 불쌍하게 보였고 항상 표정이 어두웠던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고통스러워 하는 표정에 말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정도로 측은심이 밀려왔다. 그러던 중 갑자기 그는 몸부림을 쳐 황제를 떨쳐내었다. 비틀거리면서도 자신의 손을 피하는 그에게 분노한 듯 황제는 그에게 몇 차례 폭력을 휘둘렸다. 그는 사기인형이라 저렇게 때린다면 깨질텐데. 그때 그의 소매자락이 정자의 난간을 부여잡았다. 그리고 뛰어내렸다. 달을 등지고 하얀 속옷 바람으로 떨어지는 그가 마치 새와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순간 만큼 자유스러워 보여 알수 없는 느낌에 감동받아 뒤로 물러났다. 지금 생각하면 난 그때 그것이 매우 아름답다고도 생각한 것 같다. 그때는 아름다움에 딸린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 전혀 신경쓰지 못했다. 황제의 외침과 물소리에 나는 서둘러 내 궁으로 달려갔고 두근 거리는 가슴을 안고 잠들었다. 다음날 그의 시체를 호수 건호(乾浩하늘호수)에서 건져 내었을 때 나는 그 동안 궁금했던 그의 손을 보고자하는 어린애 욕심에 건곤궁으로 몰래 숨어들어갔지만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손은 옷자락에 감추어져 있었다. 그래서 그의 손은 영원히 비밀로 남고 말았다. - 단설의 역주는 인용과 부분별 개인견해가 들어간 글입니다.(맹신(盟信)당황. 도용씁쓸)--- 주: 남총(男寵)=연동(娟童)권위자의 남자 첩. 야합을 하는 동성의 상대. 남총의 기록은 당시 권력자, 왕, 제후를 중심으로 아주 약간 남아있다. 대부분 권력자, 왕이 아름다운 미남자를 사랑한다는 내용인데 대표적으로 초왕 공왕과 안릉, 위왕과 용양,을 들수 있다. 동성 연애의 시작은 두가지 형태로 나뉘는데 부르는 말인 남총과 연동에 따라 나눌수 있을것 같다. 전자 공왕과 안릉은 군주가 장수를 신임하여 사랑한것이고 후자 위왕과 용양은 사내가 미동을 사랑한것이다. 전자 안릉은 당시 유명한 장수로 그 모습과 실력이 매우 뛰어나 공왕이 총애하게 된다. 이때 둘의 야함기록에 관한글이 전해지는데 (동자고전.하지만 이것은 소설에 불과하다.)에 안릉이 힘들어하자 공왕이 그만두는 일이 생긴다. 그러나 안릉은 자신이 신하임을 들어 공왕을 만족시켜주게된다. 여기서 볼때 당시 남총이란 의미는 여성인 후궁(첩,비빈)과는 사뭇 다른 의미를 지닌 야합의 상대라 할수있을 것이다. 위의 이야기로 남총은 왕의 권세를 타는 것이 아닌 스스로 의 권력을 지닌 제후를 왕이 총애하거나 견제하는 한가지 방법이였다고 본다. 실제로 안릉은 남총이 아닌 장수로써 생을 마감한다. 후자인 위왕과 용양은 안릉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용양은 그 모습이 매우 아름다웠으나 천민(평민) 축의 사내였다. 위왕은 그의 모습을 매우 아끼고 그가 원하는 것을 다 이루어주어 용양은 황제의 총애를 힘입어 권세를 가지게 된다. 그의 권세가 하늘을 찌를 무렵 한 측근이 말하길 그대의 미모가 사라지게 되면 총애도 식을것이니 살아남기 위해선 왕의 신임을 얻으라 충고한다. 그에 용양은 황제에게 죽은후에도 자신의 사랑을 맹세하여 기뻐한 황제에게 작위(관직)을 받고 훗날을 도모하게 된다. 이 경우 남총이 후궁(첩,비빈)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쓰인 것 인데 처음 용양은 연동이였다가 황제에게 작위를 받은 후에 남총이 되어서이다. 연동은 단지 동성적 야합을 즐기기 위한 관계인 상대를 가리키는 말이였다. 남색은 후계자의 문제가 없는 관계였기에 쌍방의 계급이나 직위를 막론하고 서로를 구할수가 있었다. 이때 보통 여인과 같은 여린 아이가 주로 상대가 되었기 때문에 연동(娟童)이라 칭해진것 같다. 여기서도 연(娟)은 아름답다는 뜻도 있지만 여인이 사내에게 봉사하다는 순종의 뜻도 있음으로 연동은 여인의 역활을 했을것이다. 청나라때는 연동을 계부(契夫)라하고 상대는 계형(契兄)이라 칭하는데 이때 계형은 계부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이것으로 보아 연동은 자신의 권력이 없는 단순한 야합의 시종이였다고 생각한다. 가장 손쉬운 연동의 고사는 여도지죄 (餘桃之罪)고사에서 볼수 있을것이다. 이때 역시 미자하의 행동에서 권력자가 아닌 평민이란것이 들어난다. 남총이라 부르는 상대는 스스로 거절할수 있는 위치에 있던 권력자로 서로 임의의 합의하에 연애를 하는 상대를 말하고 연동은 스스로 거절할수 없는 위치에 있던 속인으로 상대에 매여있던 신분인것은 아니였을까. 2 “정안(定安) 은 끈질기기도 하군. 이제 그만 금에 충성을 다할 때가 아니던가.” “하지만 쉽사리 사라질 나라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 역사가 자그마치 서한에서부터 지금 우리 금나라까지 800여년에 달하고 있습니다. 이젠 사라진 나라라고 우습게보다간 나중에 후회할 것입니다. 레이첸형님” “흥.태진, 너야말로 그들을 너무 대단히 보다간 아랫것들이 우습게 여길 것이다.” 거친 평원에 잘 어울리는 갈색피부의 사내가 몸을 일으켰다. 탄탄한 구릿빛의 피부는 그가 초원의 사내라는 것을 보여주는 듯 했지만 끼고 있는 장신구나 의복은 초원에 어울리지 않는 호사스러운 것들이었다. 이제 막 서른이 되었을만한 얼굴. 옆에 서있는 태진이라는 자와 비교되는 근육질의 몸집을 가지고 있다. 몸에 딱 달라붙는 하얀 저고리와 검은 털가죽의 조끼가 잘 어울리는 붉은 머리의 쾌남이다. 한참을 초원을 보던 그가 중얼거렸다. “이상하군. 이젠 우린 초원에서 양을 치는 거친 야만족이 아니지만... 난 초원을 바라보고 있으면 가슴이 이렇게 뛰어. 너는 어떠냐?” “형님다운 말씀이시지만은 적어도 궁에서는 그런 내색 보이시면 안 된다는 것을 아시죠?” “...쳇, 그래보았자 우리 여진족은 말을 타는 민족이다.” 레이첸은 툭 내뱉고는 검은 준마에 올라탔다. 190이 넘는 키를 가진 그에게 어울리는 거대마였다. “자, 성으로 돌아갈까. 나긋나긋한 한족 계집의 향수로 오늘 밤을 달래보자” “절대 안 됩니다. 태자로 책봉되시기 전까진 절대로 왕의 눈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신다면...” “망할. 너까지 나에게 왕위에 대해 이런 저런 말 따위 늘어놓지 마라. 난 그냥 이렇게 말을 탈수 있으면 족하다.” “형님!” “게다가 아비란 그 노인네, 얼마 살지도 못하는데 뭐가 두렵단 말이냐?” “형님! 제 말은 그게 아니라...!” 하지만 레이첸은 말의 배를 힘차게 찼다. 빠르게 시야에서 멀어지는 이복 형을 바라보며 태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거란을 치고 들어온 여진족은 금을 세웠다. 야만인, 생고기를 먹는 돼지들이라고 부르짖었던 한족들도 잠시, 태조이자 자신의 아버지인 아골타의 지독한 폭정 덕분인지 왕성의 번화한 거리에는 이미 한족의 복장을 한 자들은 찾아볼 수 없었다. 분명 하얀 얼굴을 봐서는 한족이 분명할 텐데 머리를 길게 내려땋고 여진의 옷을 입는다. 레이첸은 실소했다. 왕궁은 어떠한가. 분명 거친 갈색의 얼굴은 여진족이라는 것을 말해주는데도 비단옷에 분을 발라 한족처럼 보이게 하는 미친것들. “다들 미친것들인 거야.” 도성 안에는 말을 타고 다닐 수가 없다. 하지만 뻔히 그것을 알고 있는 관료들도 광장을 당당히 말을 타고 가로지르는 자신을 바라보기만 할뿐이다. 그것은 레이첸이 왕족임을 알아서가 아닌 그가 여진족이기 때문이다. 여진이 왕좌를 차지했지만 아직 도성의 하부 관리들은 한족이거나 한족과 거란족의 혼혈들, 그리고 매우 보기 드물지만 정안족들도 있었다. 때문에 지금의 관리들은 있으나 마나하는 존재들이었다. 한족들은 자신들이 선비라고 했던가. 그들은 자신들이 강한 자들에게 고개 숙여 목숨을 구걸하는 비굴함을 못 본체 하는 건가. 더러웠다. 태조인 아골타가 왕좌에 앉자 고위직에 앉아있었던 거란족들은 모두 숙청되었지만 한족들은 달랐다. 그들은 금은보화와 귀한 비단, 자신의 아름다운 딸을 왕에게 받쳤고 목숨을 구걸했다. 레이첸은 저절로 사나운 인상을 지었다. 아버지의 후궁은 무려 40여명이 넘는다. 아무리 여진족의 사내가 두 명 이상의 부인을 둘 수 있다고는 하나 계속되는 한족들의 처녀 공세에 그 넓은 궁이 꽉 찰 지경이었다. “흥.” 슬금슬금 자리를 피하거나 못본척하는 한족들을 보며 레이첸은 비웃음을 지었다. 그때 그의 눈에 들어오는 여인이 있었다. 온통 새 하얀 통 넓고 땅에 끌릴 정도로 긴 저고리에 주름치마. 검은색 동정. 두 번 이상 돌려 묶은 허리띠. 짤랑거리는 금꽃과 푸른 옥 귀걸이. 여인이면서도 발 폭을 넓게 해서 천천히 하지만 빠른 속도로 걷는다. “...정안족..이군.” 우리는 그들을 정안족이라고 부르지만 한때 만주지역의 거대 강국이었던 고구려인의 잔존들이다. 분명 고구려는 당에게 멸망되었다고 하지만 그들은 발해를 세우고 당에 맞섰고 정안국을 세워 송나라와 싸우고 흥료국을 세워 거란과 싸웠다. 도무지 이해 할 수 없을 만큼 끊임없이 다시 일어나는 민족. 아마도 어디선가 그들의 한 무리들이 이번엔 자신의 나라 금과 싸우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오싹 하군.” 여인은 아마도 장을 보기 위해 나온 것 같았다. 긴 머리를 깔끔하게 하얀 손수건과 옥으로 감싸 깨끗이 올린 뒷목이 보였다. 하얀 얼굴. 단아함과 고귀함이 배어나오는 새까만 눈. 그리고 붉은 입술. 정안족은 다들 이렇게 생긴 것일까. 예전의 그도 꼭 이렇게 생겼었지. 레이첸은 흐릿한 기억을 떠올렸다. 죽음, 물방울이 떨어지는 옷자락. 그리고 검은 눈. 슬픔. 공포. 죽음. 자유. “...?” 여인은 자신의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렸다. 레이첸과 눈이 마주친 여인은 살포시 그 하얀 이마를 찌푸리고는 손이 보이지 않는 긴 저고리로 입을 가리며 정안족의 특유의 걸음으로 자신의 옆을 지나쳤다. 옷자락으로 가린 저 손을 어떻게 생겼을까. 한족의 여인처럼 붉게 물들인 야들야들한 애교 넘치는 손일까? 아니라면 여진의 여인들처럼 양을 치고 가죽을 다듬는 거칠고 투박한 손? 갑자기 레이첸은 그 여인이 손이 너무나 보고 싶어졌다. 아니, 그 여인의 손이 아닌 정안족의 손이 보고 싶어진 것이다. “너 거기 서라.” “...” “거기 서라했다 정안의 계집!”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 계속 발걸음을 재촉하는 여인에게 레이첸이 외쳤다. 물론 여인은 반항할 것이다. 앙탈부리겠지.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마구잡이로 끌고 근처의 음식점으로 끌고 들어가자 눈치 빠른 주점의 주인과 사람들은 재빠르게 모두 사라진 후였다. 여기서 무슨 일이 생기던 자신들은 모른다는 거겠지. 비겁한 놈들같으니라구. “이 무슨 무례란 말이오. 대낮에 아녀자의 길을 막는 것도 모자라 희롱하려 들참이오?” “흥 넉살은 좋군. 하지만 어차피 계집은 다 똑같은 법이지. 어서 벗어라. 대가는 충분히 주마. “ “...” “뭐하는 거냐?! 내 말을 못 알아듣나? 그렇다면 내가 직접해주지.” “물러서라! 오랑캐놈!” 힘으로 끌고 오는 동안도 다른 계집처럼 마구 소리치거나 앙탈부리지 않아 조금 의아하면서도 맥이 빠졌다. 뭐 이런 계집이 다 있나? 정안의 여자는 다 그런 건가? 옷을 벗는 자신을 노려보며 훈계를 들려 하다니. 정신이 나간 것이 아닐까. “얌전히 굴어!” “놔라!” 더 발악해봐라. 그래야 정복하는 맛이 나거든. 하지만 여인은 그 이상의 불필요한 비명은 지르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내 손을 떼어내기 위해 정말로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저 침대에 누워 안돼 안돼 소리 지르는 한족 여자와는 달리 안 될 것을 알면서도 힘으로 막아보려는 것에 실소가 나오며 동시에 소름도 끼쳤다. 이것이 정안족의 기질인가? 작은 여인이었지만 혼신의 힘을 다한 듯 쉽사리 옷을 벗길 수도 입을 맞출 수도 없어 레이첸은 화가 났다. 주먹으로 한대 때려볼까 하는 생각에 몸을 일으킨 순간 챙 하는 금속성이 들렸다 “이런!” 여인이 재빠르게 레이첸의 허리에 있던 단검을 빼들었다. 레이첸은 아차하며 뒤로 물러나고 싶었지만 여인을 타고 누른 몸을 올리는 것이 단검을 휘두르는 것보다 느린 것은 확실했다. 여인은 주저 없이 단검을 레이첸의 얼굴을 향해 찔려왔고 레이첸은 거의 반사적으로 여인의 팔을 꺾으며 그대로 단검을 그녀의 가슴에다 찔러버렸다. 순간 눈앞에 확 붉어지며 불쾌한 느낌의 뜨거운 것이 얼굴에 튀었다. “...빌어먹을... 지독한 계집이군.” 죽일 생각 따위는 없었다. 정말이었다. 단지 손을 보고 싶었는데.. 레이첸은 아직은 피에 적셔지지 않는 여인의 옷자락을 찢어 얼굴을 닦았다. “...하얀색이군....” 찢겨나간 소맷자락 사이로 보이는 여인의 손은 하얀색 이였다. 하얀 손... 밀가루로 만든 인형과 같은 하얀 손. 분명 그때 죽은 아버지의 후궁도 이런 하얀 손을 가지고 있었을까. 그는 사기 인형이였으니 이랬을까. 레이첸은 욕설을 내뱉으며 이젠 시체가 된 여인에게서 등을 돌리고 앉았다. 혼란스러웠다. 정안은 왜 자기나라를 찾고 싶어 하는 것일까. 요나라부터 시작된 그들의 회유 정책은 그저 헛돈을 뿌리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들을 멸망시킨 당나라도, 대립한 모든 나라는 정안을 회유하려고 했다. 하지만 정안은 회유되지 않았다. 그 어떤 나라에게도. 그 어떤 민족에게도. 까마귀 무리사이에 홀로 고고하게 서 있는 백로 같은 듯한 민족. “...더럽히고 싶은 거겠지...” 굴복시켜보고 싶은 것이다. 저 순백의 민족이 내 발밑에 머리를 조아리며 충성을 맹세하는 것을 보고 싶은 욕심인 것이다. 안될 것을 잘 알면서도 800여 년 동안이나 스친 모든 나라들이 발을 동동 구르는 것이다. “빌어먹을...” 레이첸은 문득 등 뒤를 바라보았다. 이미 죽은 고깃덩어리가 된 정안의 여인. 새빨간 피가 가슴부터 시작해 순백의 옷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마치 결혼한 신부의 성장 같은 붉은 옷이 되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붉은 피에 대비되어 하얀 손이 더 눈부시다. “..빌어먹을...” 레이첸은 또 다시 한번 내 뱉었다. 하지만 가슴속의 응어리는 풀리지 않는다. 답답하다. -- 단설의 역주는 인용과 부분별 개인견해가 들어간 글입니다.(맹신(盟信)당황. 도용씁쓸)-- 주 : 정안국(定安國) 발해가 멸망되고 난후 935년에서 970년간에 열씨(烈氏)에 의해 건국되어 손나라와 교류했던 고구려 부흥 국가중 하나. 고구려가 망한 후 많은 부흥 운동이 시작되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발해다. 하지만 발해는 거란에 의해 멸망하고 유민들은 한족들 사이로 들어가게 된다. 그즘 거란은 그곳에 동단국(東丹國)을 세우는데 927년 서쪽의 요양(遼陽)으로 나라를 옮기게 된다. 그러자 숨어있던 발해의 대씨(大)정권은 그곳 홀안성에 '후발해(後渤海)를 세운다. 하지만 대씨는 고급씨족이 아니였기 때문에 바로 올야(兀惹) 출신의 오씨(烏氏)에게 정권을 넘긴다. 여기서 기록에 975년 발해의 유민과 협공, 부여부를 탈환하려는 출병이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왜 발해를 잇는 후발해가 막상 발해 유민들을 끌어안지 못하고 따로 두어 협공이라는 외교적 문자를 올렸을까. 후발해는 고구려의 정통 왕가가 아닌 대씨정권을 중심으로 하는 나라였기 때문에 고구려 왕조의 부흥을 꿈꾸던 발해의 유민을 복속시킬수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를 뒷받침하듯 하나로 모였던 발해때와는 달리 후발해가 세워진 후 바로, 935년경(기록은 935~ 라고 한다.) 열씨(烈氏)가 서경압록부가 있던 압록강을 중심으로 발해 유민과 정안국(定安國)을 만든다. 이때 열씨는 자신을를 황제라 칭하지 않고 국왕으로 칭하는데 그것은 고구려 왕조의 옹립하는 발해 유민들과의 화합을 꾀하는 것이 아니였을까한다. 정안국은 그후 송나라와 교류를 맺으며 활동했지만 979년, 기록되어있지 않는 일로 나라가 와해된것인지, 후발해의 멸망의 여파를 탄것인지. 고려 경종 4년(979)년에 대부분의 정안국인들이 유민을 갔다고 전해진다. (고려 경종에 내려온 수만의 발해인들은 후발해인이 아닌 정안국 사람이라한다.) 이후 1029년 대연림(大延琳)이 흥료국(興遼國)을 세워 또 한번 부흥을 노려본다. 그는 발해유민을 다스리기 위해 만들어 졌던 거란의 동경요양부의 대장군이였다. 그는 동경유수(태수)를 살해하고 나라를 세운후 고려로 사신을 보내 거란을 막을 군사를 보내주길 희망했지만 거절당한다. 개인적으로 이때 고려가 군사를 보내었다면 우리나라 역사의 판도가 크게 달라졌을거라 생각된다. 아무튼 흥료국은 고작 1년간동안이지만 고려로 넘어가지 않은 유민들과의 강한 유대감을 형성한다. 적은 군사와 성벽으로 잘 싸웠던 흥료국이지만 다음해인 1030년 대장군 대연림이 거란에게 암살됨으로 그 운명을 마감한다. 흥료국의 대연림은 후발해의 대씨족과는 달리 황제의 대관식과 즉위식. 천경(天慶)이라는 연호를 사용하는데도 유민들과의 결합이 유독 단단하여 흥료국이 망한후 거란의 상경임황부(上京臨潢府) 강제 이주시켜 이간질을 했다고 한다. 후발해에 밀려났던 대씨정권. 거란의 관직에서 조용히 지내던 대연림이 대장군의 지휘를 버리고 갑자기 부흥 운동을 꾀한데는 무슨 이유가 있었을까. 군사적으로 불리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 고려에게 사신을 보내 거란을 막아달라던 이유는 무엇이였을까. 많은 유민들이 건너간 고려가 형제국인 흥료의 조건을 내친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정안국이 멸망했음에도 불구하고 남아있던 유민들의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고구려의 마지막 왕족이 남아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마지막 희망을 걸어보았던 것은 아닐까. 고구려의 뜻을 이어받는다 큰소리쳤던 고려는 고구려 정통 왕족의 부활이 두려워 흥료국을 내친것은 아니였을까. 거란이 과연 대연림의 암살에 성공했을까. 대연림을 암살한것은 사실 고려쪽이 아니였을까. 하지만 남아있는 기록은 없다. 하지만 발해가 멸망하도록 내어둔 고려는 그뒤 훈요십조 (訓要十條)까지 만들어 유목민족을 미워한다. 이유는 형제의 나라를 친 오랑캐라는 점이다. 이 무슨 장난이란 말인가. 아무튼 그후 1116년 정월에 고영창(高永昌)은 대발해국(大渤海國 혹은 대원大元이라고도 불렸다)을 세운다.고영창은 황제에 즉위하여 연호 융기(隆基)를 걸고 건국 후 10여일만에 요동의 50여주를 점령하는 거대한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금나라에 의해 다시 암살되어 가장 짧지만 부흥 국가중 가장 강대한 국가로 획을 남기고 사라진다. 이 이야기에서 고구려 유민들을 정안족(정안인)이라고 명칭한것은 수 많은 부흥 국가중에서 정작 고구려 유민의 후손인 발해인들을 포용한 국가는 정안국이기 때문이고 이 글의 배경이 흥료국이 망하고 얼마 지나지 않는 시점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 글을 매끄럽게 연결해 나가기 위해 만든 허구성을 미리 밝혀두고자한다. 현실에서는 1115 년, 아골타가 금을 세운후 1년 뒤인 1116년 대발해국 건립이된다. 하지만 이 글에서 대발해국은 1116년에 건국이 되지만 세간에 알려지지 않는 비국가로서 존재하게 된다. 이것을 제외하고는 사실을 기준으로 시간을 편성하였으며 차후 나오게 될 허구성에는 주를 달아 밝히겠다. 3 “...목(木)씨를 찾아라.” “예?” 등잔불이 아른거리는 어두운 방에서 서너 명의 상아빛의 옷을 입은 남자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들 앞의 약간 높은 단상에는 검은 두루마기를 입은 사내가 단정하게 앉아있었다. 나이는 30세 정도의 짙은 검은 눈매가 불길하게 매서운 사내였다. 부복한 자들 중 한명이 고개를 약간 들고 그에게 물었다. “ 목씨라면, 혹시 ...” “ 그렇다. 그 목씨이다.” “ 하지만 왕씨, 목씨는 고구려 땅이 망할 때 당나라 쪽으로 끌려가 몰살되었지 않습니까?” "..그럴까. “ 왕씨라고 불리는 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멀리 보이는 창문 쪽으로 다가갔다. 그는 잠시 하늘을 바라보며 달을 감상하는 듯 했다. 부복한 사내들이 그의 대답을 기다리기 지쳐할 때야 그가 입을 열었다. “금나라는 요나라보다 다루기가 힘들다. 그 이유를 아는가?” “...” “그건 우리 쪽의 귀족 씨들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인재가 없어.” “왕씨...” “물론 자네들은 예외이다. 지금까지 잘 해주었지.” “황송하옵니다.” “차라리 군대를 이끌고 싸우면 편하련만 지금의 우린 흥료 때의 전쟁으로 많은 장수들을 잃은 상태니, 정면 대결은 힘들다.” “왕씨! 우린 왕가를 위해서라면 이 목숨 기꺼이 버릴 수 있습니다.!” “...마유, 그 말은 날 더 슬프게 한다네.” 검은 머리의 사내는 다시 자리에 앉아 부복한 자들을 내려보았다. “희생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길을 선택하는 수밖에. 옛 고구려의 귀족 씨들이 당나라로 넘어가 처형된 것은 모두 아는 사실이네. 하지만 나는 이렇게 살아있지 않은가? 나 고하류사(高?類?: 붉은 깃과 흰 깃의 해오라기) 가 말이야. 어딘가 운을 타고 살아남은 귀족 씨가 남아있을 거라 생각하네.” “장군들은 난민들을 중심으로 찾아보시면 됩니다. 금나라 내부는 관직을 하고 있는 혈족들이 힘을 쓸 겁니다.” 가느다란 목소리의 40세가 넘어 보이는 마른 남자가 하류사의 뒤로 나타났다. 그는 하류사 뒤쪽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가느다란 눈은 삼백안으로 사나워 보이는 인상이 풍겼다. “목씨를 찾으라는 것은 목씨가 모셔왔던 명림(鳴霖 장마 소리)씨의 행방을 알기 위함입니다.” “명림씨라면... 대대로 우보의 관직을 맡았던 대 귀족 씨. 혹시 왕씨께서는 새로운 막리지를 얻고 싶은 것입니까?” “물론, 내게는 이 송백라 한명이면 좌보 우보는 물론 막리지까지 불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하류사가 빙긋 미소 지으며 말했다. 백라라 불린 그 삼백안의 남자는 하얀 부채로 입을 가리고 고개를 숙여 감사의 표시를 했다. “왕씨께서 절 그렇게 인정하신다니 미천한 소신이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만 대대로 우보를 맡아 오셨던 명림씨의 완벽한 지략도 지금 꼭 필요한 것입니다.” “하...하지만 명림씨라면 당의 침입후 바로 말살명령이 떨어진 귀족 씨 아닙니까?!” “목씨를 운 좋게 찾는다 하더라도 명림씨는...” “그렇게만 생각지 말아주십시오 장군들.” 백라가 장군들의 말을 잘랐다. “명림씨는 그 혈통이 매우 귀하다고 여겨왔지만 그것은 우보를 이어받은 명림씨에 한해서일뿐, 관직에 등용하지 않고 초야에 심취해서 살아간 명림씨도 다수 있습니다. 물론 당나라가 침입후 명림씨의 일족을 몰살시킨 것은 사실이나 가문과 정권을 버리고 산으로 들어가 버린 명림씨까지 찾아내어 죽였다고 보는 것은 무리라 생각합니다.” “그럼 어딘가에 명림씨가 살아있단 말입니까?” “하지만 초야에 들어간 명림씨가 우보를 맞은 명림씨보다 현명할까요?” 그 말을 듣고만 있던 하류사가 씩 웃으며 중얼거렸다. “난 정권에서 잘도 도망쳐 세월을 희롱하며 지낸 명림씨야 말로 현명한 놈들이라 생각했는데?.” “아무튼, 걱정되는 것은 명림씨가 자신의 성씨조차 모르고 있을 경우입니다.” “예?” 백라가 고개를 설래 설래 저었다. “우보에 오르지 않은 명림씨는 그야말로 신선놀음을 하며 살아갔습니다. 당나라의 침입이후 100년 가까이 흐른 지금 그들의 자손은 부모가 말해주기 전 까진 자신의 성씨를 모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다른 성씨를 자기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고. 예를 들자면 지금 여기 있는 장군들 중 명림씨가 있을 수도 있다는 거지.” 하류사가 장난스럽게 말 한 후 장군들을 내려보자 장군들은 기겁했다. “저..전 분명 기수 우(雩 기우제)씨의 자손이옵니다!” “전 옆의 우마유 장군의 사촌이니 우씨의 자손이 분명합니다!” “저도 창암 을(乙) 씨의 자손입니다!. 어머니도 창암 을(乙)씨이니 분명 을씨손입니다!.” “저...전 아저씨의 조카이니 눌현성 송(松소나무)씨 자손이 맞겠지요?” 가장 나이가 젊어 보이는 장군이 당혹스럽다는 듯 백라에게 묻자 하류사를 비롯한 장군들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백라는 머리가 아프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그래, 장군은 내 조카가 분명하오. 아무튼 목씨를 찾는데 최선을 다해주셨으면 합니다.” “하하하...모두들 들었지? 그럼 다들 나가보게.” 네 명의 장군이 방을 나가자 하류사의 자애로운 미소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특유의 검은 눈매를 굴리며 뭔가 생각을 하는 듯 했다. “ 군대로 치지 못할 정도의 머릿수 차이라면 금나라가 자멸할 때까지 기다릴 수도 없는 일이지 . 이쪽도 죽음을 타고난 인간이니 말이다. 백라.” “예. 병법에서도 3배 이상 가는 무리와는 맞서지 말라합니다. 결국 무기를 든 암살같은 극단적 방법이라는 건데...” “더 좋은 방법도 있지 않은가?” “예?” “미인계를 사용할 수도 있지.” 백라가 이해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등을 보이고 앉은 자신의 주인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 아골타는 색을 밝히는 왕이다. 이미 부인만 3명에 후궁은 수도 없지. 자식들만 해도 왕자만 27명이 넘지 않는가?” “...” “백라. 금의 첫 왕자가 왜 죽었는지 기억이 나는가?” “...왕자가 아골타의 새로 들어온 후궁에게 임신을 시켜 화가 난 아골타는 후궁을 굶겨죽이고 왕자를 사지로 몰아넣은 것입니다. 그 때문에 그쪽의 2대 군을 전멸시키는 이득이 있었지요.” “틀렸어” 백라는 눈을 찌푸렸다. “화내지 말고 들어봐. 그 후궁 말이야. 사실은 첫 왕자와 내연의 관계였던 여인이라고 하더군. 임신 시킨 게 아니라 임신된 것을 숨기고 후궁의 아버지가 왕에게 딸을 넘겨 버린거야. 왕은 그날 밤 여자를 벗겼는데 뭔가 아니었다는 거지. 그리고 사실을 알고는 후궁은 굶겨죽이고 그녀의 가족들은 참수형, 왕자는 독살시킨 후 충복들을 시켜 왕자의 기를 들게 해서 우리랑 싸우게 한거지. 즉 우리는 이용된 거야. 있지도 않은 왕자의 유령과 싸운 거지. 우리로써도 승전을 해 사기를 올렸으니 서로 이용해 먹은 것이라고 해야 정확하겠지만 말이야.” “...” “후궁에 대한 질투로 아들을 죽이는 왕이 되고 싶지 않아 수를 쓴 것이지. 여진족치고는 아골타 왕은 꽤 영리해. 아니라면 누군가 옆에 있는 것이겠고.” “저도 모르는 일이였다고 하고 싶지만 왕씨께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군요.” 백라가 일어나 왕의 앞으로 내려가 앉았다. “그것을 어떻게 알고 계셨습니까? 왕씨께 숨기려고 애쓴 것이 였습니다만.” “가끔은 한족 여인들을 만나러 가니까 말이야.” “...유곽에 자주 출입하시면 꼬리가 잡힐 겁니다. 조심해주십시오” “알겠네. 그보다 목씨에 대한 것, 자네 생각은 어떤가?.” “... 이미 왕씨께서 봐두신 분이 있으신 것은 아닌지요?” “...이번엔 정말 모른다네." “...” “정말이야.” “어련하시겠습니까.” “...정말이라니까?” “알겠다니까요.” "아무튼 미인계도 생각좀 해봐" "보낼만한 자만 권해주신다면 바로 보내드리지요." 하류사의 태평한 얼굴을 보며 백라는 화를 진정해야만 하는 자신이 멍청하다 생각했다. -- 단설의 역주는 인용과 부분별 개인견해가 들어간 글입니다.(맹신(盟信)당황. 도용씁쓸)-- 주: 고구려의 성씨. 왕족: 고(高) 귀족: 을, 주, 송, 목, 우, 연, 명림, 을지 씨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 귀족씨를 찾는 계념을 넣었기 때문에 각 귀족씨마다 그 관직을 내림받는다. 왕씨는 고(高 )씨이며 왕씨족인 계루부에 속한다. 창암 을(乙)씨(계루부,왕씨족) 부여성 주(舟배)씨 절노부,왕비족) 눌현성 송(松소나무)씨(순노부 옛 왕씨족) 패수 목(木)씨 (관노부) 기수 우(雩 기우제)씨(관노부) 위나암 연(鳶솔개)씨(계루부) 동황성 명림(鳴霖 장마소리)(절노부,왕비족) 졸본성 을지(乙支)씨(소노부) 위와 같고 관직은 아래와 같다. 창암 을(乙)씨 - 장수족 부여성 주(舟배)씨 -관리족 눌현성 송(松소나무)씨 -좌보 패수 목(木)씨 -관리족 기수 우(雩 기우제)씨-장수족 위나암 연(鳶솔개)씨-장수족 동황성 명림(鳴霖 장마소리)- 우보 졸본성 을지(乙支)씨-장수족 이에 따라 정안의 주 장군들의 부족은 아래와 같다. 왕씨는 고(高 ) 하유사/ 창암 을(乙)씨: 상장군 예사 부여성 주(舟배)씨:여관(이름 미상) 눌현성 송(松소나무)씨: 장군 을노/ 좌보 백라 패수 목(木)씨: 노인 정륜 /장수 만요(미등장, 양만익) 기수 우(雩 기우제)씨:상장군 마류 /마유 위나암 연(鳶솔개)씨:후소(미등장, 연후윤) 동황성 명림(鳴霖 장마소리) 명림 자휼/ 명림 자례. 졸본성 을지(乙支)씨:마기(미등장,우광덕) 물론 여기서 성씨에 대치한 한자는 내 맘대로다. 남아있는 기록이 없다. 4 왕성과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말로 달려 쉬엄 쉬엄 두 달이 걸리는 거리이니 이미 금의 땅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 곳이었다. 목래(牧萊:풀을치는 목장)라고 불리는 이곳은 이름그대로 소와 말을 기르는 일을 업으로 삼는 조그만 성이였다. 이곳의 성주는 수해(水海:바닷물)라는 태수(太守: 지방의 성주)였다. 그는 큰 키에 적당한 몸매를 지닌 다갈색의 머리의 평범한 중년 사내였다. 턱밑으로 짧게 기른 수염이 머리색과 같은 다갈색이라는 것을 빼면 어디서든지 흔히 볼수 있는, 그리고 바로 잊어버릴 수 있는 그런 사내였다. 아니 좀더 솔직히 말하면 그다지 잘생기지 못한, 여인들에게 호감을 줄만한 얼굴은 아니었다. 황제에게서 율도(率刀장군의 검)이라는 칭명을 받아 가지고 있었지만 성안 사람들은 그를 수해라고 불렸다. 그와 들어온 병사들이 그를 수해장군이라고 불렸기 때문이였다. 그래서 성안 사람들은 그것이 그의 본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할뿐이였다. 수해 장군은 자신의 출신을 말하지 않았지만 성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그가 정안족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장군답지 않게 길게 내린 소맷자락, 검은 동정에 흰 머리띠로 머리를 어깨 너머로 길게 늘어뜨리고 폭이 넒은 걸음으로 빠르게 걷는다. 전형적인 정안족의 모습이였지만 사실 수해는 한족의 생활풍습에 더 익숙한 듯 보였다. -하지만 정안족은 수씨가 없지 않은가? -성주님은 요나라 때부터 관직에 있던 분이네. 그때 성을 하사받으셨을 지도 모르지 -아무튼 먹고 살기 풍족하게 해주시니 성주님이 거란족이던 여진이던 정안이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좋은 한족 여인을 만나 가정을 꾸리면 참으로 좋으련만. 나이 30이 넘어간 그에게 성안의 관리들은 종종 결혼을 권하곤 했으나 그는 그저 웃어 보일뿐이었다. “내 근심이 덜어지면 할지도 모르니 다급해하지 말아주게.” 그 근심이란 성주의 어린 동생이었다. 그냥 어린 동생이 아닌 역시 목래의 군승(軍丞:부성주,태수의 보좌관)으로 부임한 선율(仙聿신선의 붓)이란 칭호의 관리였다. 그 역시 이름을 밝힌 적은 없으나 역시 함께 입성한 병사들은 그를 수하(水河 강물)라고 부르고 있었다. 성주 이름인 수해가 바다를 뜻하니 동생인 그를 강이라고 부르는 것일지도 몰랐다.그는 지병을 앓고 있었는데 각혈병이라던가 가슴병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그 때문에 성주가 어린 아우를 돌보기 위해 장가를 못고른다는 소문도. 입성에 웃지 못할 이야기를 남겨 단번에 유명해진 두 형제는 여타의 무성한 소문에 관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평화시에 부임된 것이 아닌 목래를 공성하고 하사받은 관리들이였기 때문에 처음엔 성안 주민들의 반기가 대단했다. 게다가 임명된 첫 해에 전염병이 돌아 처음부터 고된 입주식을 치루었다. 원성이 높은 목래의 성안에서 그들이 선택한 것은 토착귀족인 손노씨와의 화해였다. 태수와 사이 안좋기로 유명한 손노장군이 무슨 일인지 둘에게 협조해 위기를 넘기 이후로 목래는 탄탄히 기반을 잡아갔다. 수해는 전형적인 장수로 대담하고 힘있는 결정으로 목래를 돌보았고 그 대담함에 빠져나가는 세세한 것은 아우인 수하가 다스렸기 때문에 목래는 곧 전쟁의 후유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특히 수하는 어린 나이로 주민과 관리들에게 신임을 얻기 힘들었으나 장군 특유의 무관심에 있는 소소한 일들도 착실하게 살폈기 때문에 한족이 대부분인 성안 사람들조차 두 형제를 무척이나 존경하고 아꼈다. 어느정도 살기 좋은 이때 수하의 가슴병과 수해의 결혼문제는 목래 주민들의 유일한 걱정거리고 자리 잡아 가고 있었다. “ 목씨를 찾는다는 전서가 왔는데 왜 아무 말 하지 않는 거지요?” “ 아차!” 쨍그랑 소리가 나며 사기 찻잔이 차가운 성벽 돌바닥을 굴러 내려갔다. 누군가 소맷자락으로 찻잔을 집어 앞에 서 있는 갈색 머리의 중년인의 손에 올려주었다. “이런 옷이 엉망이 되었네.” “털어 드릴게요.” 작은 키의 소년이 긴 소맷자락으로 찻물이 튀긴 옷을 털어내었다. 한없이 푸른 가을 하늘 날 목래의 성벽 위에서 차를 마시고 있던 태수와 군승이었다. 공문을 핑계로 잠시 성벽위에서 관리들 몰래 휴식을 보내고 있던 중이였다. 하지만 멀리서 보는 다른 사람들은 성벽위에서 팔자 좋은 아비와 아들이 나란히 차를 마신다고 생각할것이다. 수해는 33살 이였고 수하는 18살이였기 때문에 나이탓도 있겠지만 힘을 쓰는 장수와 글을 읽는 관리의 분위기와 체격 차이도 있었다. 더구나 수해는 정안족치고는 덩치가 있는 편이였으나 수하는 오랜 시간 동안 앓은 지병으로 마른 편이였다. 저 멀리 농부은 우리는 당연히 부자관계로생각할꺼야. 수해는 찻잔을 흔들어 털어내는 동생을 바라보았다. 검은 눈동자에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전형적인 정안족이였으나 날카롭게 치켜 올라간 눈썹 때문인지 유난히 사나워 보이는 첫 인상. 속눈썹이 짙어 표정이 분명치 않은, 묘하게 창백하고 병자 특유의 신경질적인 분위기가 풍기는, 자신은 미인이 아니라고 박박우기는 동생은 분명 추물도 절대 아니였다. 형제인데 이렇게 다를까. 수해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자 수하가 고개를 들어 형을 바라보았다. 그 표정이 굉장히 진지해 기분이 좋아지지만 생긴 것처럼 고집도 세고 신경질도 잘 부리는 것을 떠올리면 고개가 돌려지는 것이다. “...미역 줄기라고 말하려고 했죠?” 매섭게 눈을 치겨 뜨며 수하가 묻는다. 수해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고개를 저어보였다.하지만 역시 의심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돌려버린다. 두 형제는 서로의 외모에 대해 마구 놀려대는 악취미가 있었다. 수해는 수하의 새까만 머리를 보고 미역 줄기라 놀렸고 수하는 수해의 튼실한 몸을 술 배 나온 곰이라고 놀렸다. 사실은 본인이 못 가진 것에 대한 부러움 이였지만 속 좁은 이 형제들의 치졸한 싸움의 결론은 수해는 술을 끊게 만들었고 수하는 턱에 겨우 닿도록 머리를 짧게 잘라버렸다. 어쨌든 결론적으로는 머리카락만 아까운 꼴 이였지만 둘 다 전혀 내색을 하지 않는 고집쟁이었다. “...형?” “어?” “미역 줄기가 아니면 무슨 생각을하는 거죠?” “아무것도.” 수해는 거친 자신의 손을 뻗어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치졸한 싸움으로 인해 아쉬울 정도로 짧게 잘라진 머리카락이 기분 좋을 정도고 매끄럽고 시원하다. 아까워라. 수해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허리까지 길게 늘어뜨린, 내심 숨겼지만 상당히 아꼈던 동생의 긴 머리가 떠올랐다. 머리로 놀리는 게 아니었어. 하필이면 왜 머리를 트집 잡았을까. 이놈 머리 기르려면 한참 걸릴 텐데. 갑작스럽게 머리를 쓰다듬는 행동이 별로 거슬리지 않았는지 수하는 수해의 쪽으로 좀더 다가와 형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어깨에 빈약한 동생의 무게가 전해져오자 수해는 인상을 구겼다. “...무거워요?” “아니 너무 가벼워.” “...?” “키는 계속 크는 것 같은데 왜 무게는 늘지 않나 모르겠구나.” “많이 먹고 있으니 무거워 질 거예요. ” “그래. 그래야지.” “...기대서 자도 좋아요?” “조금만이라면.” 그 말에 만족한 듯 수하는 품에 완전히 기대 눈을 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색색거리는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렸다. 수해는 그제야 긴장을 풀며 중얼거렸다. “이 놈, 어떻게 목씨를 찾는 전서를 받은걸 안거지... 바로 태워버렸는데...” 수해는 조심스럽게 수하를 안아들었다.세간엔 귀신보다 잠귀가 밝다고 소문난 동생이지만 내가 보기엔 전혀 아니다. 이렇게 업고 안아도 눈을 뜨지 않는걸. 가을이지만 이곳은 북쪽이라 바람이 차가워 수하에겐 안 좋다. 성벽에서 연결된 태수의 성으로 들어간다. 가족이라고는 단둘 뿐이라 태수의 성치고는 작은 이 곳조차 공허하다. 동생의 방은 자신의 바로 옆방이었다. 유난히 답답함을 싫어해 문을 때어내고 달아준 하얀 휘장을 걷고 동생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눕혔다. 그래도 깨어나지 않는다. 뭐가 잠귀가 있다는 거냐. 새근 새근 완전히 잠들어 버린 수하를 보며 수해는 그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싱긋 웃었다. 이 고집불통에 제멋대로인 망나니 같으니라고. “하지만 내가 항상 지켜 줄 테다. 넌 아무런 걱정할 필요 없어.” 조심스럽게 이불을 덮어주고는 잠든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예전에는 쉽사리 잠이 들지 못해 한참을 다독여야 했는데. 요즘 들어 쉽게 잠이 들고 깊이 오랜 시간을 잔다. 근간에 약을 잘 안먹는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혹시 그것때문은 아닐까. 수해는 항상 찡그리고 다녀 생긴 동생의 미간사이에 보이는 주름을 지긋하게 눌러보았다.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인상을 안쓰는 부드러운 표정의 동생은 참으로 순해보여 마음에 든다. 웃고 다니면 좋을 텐데. 이놈의 괴팍한 성격은 인상만 쓰고 다닌다. 나가기 전에 생각난 듯 윗옷을 살짝 들어 왼쪽 가슴 쪽을 들여다보았다. 가슴을 앓는 수하는 고통을 참기 위해서 가슴을 두들겨 항상 파랗게 멍이 들어있었다. 가슴의 멍은 조금도 지워지지 않았다. 아직도 가슴을 치는 거겠지. 하지만 어린 동생은 자신의 앞에서 괴로워하는 일은 없었다. 수해는 한숨을 쉬었다. 사소한 일에 철부지처럼 굴지만 사실 정작 홀로 감당하기 힘든 것은 혼자서 삭히는 바보 같은 버릇은 바로 자신 때문에 생긴것이다. 지금은 후회하고 후회하지만 이미 자라버린 동생은 변하기엔 늦었다. 잠시 마음이 상했지만 고르게 내 쉬는 숨소리가 좋게 들려와 수해는 머리를 수하의 가슴에 올려놓았다. 규칙적인 소리가 기분 좋게 들려온다. 내가 안아서 키웠다. 어머니가 떠나시고 남은 동생이 너무도 조그마해 걱정했었던 밤, 생각 외로 걸음마가 빨라 노을이 지는 마당에서 그 작은 손을 잡고 함께 걸으며. 전염병이 돌았을 때 한창 나가고 싶어 하는 철부지 동생을 호되게 야단쳐 방에 가두어 놓기도 했고 훌쩍이며 잠든 아이를 토닥이며 가슴 아파했던 것도 자신이었다. 강하게 엄하게, 그렇게 키우고 싶었다. 궁에서 돌아오면 마당으로 뛰어나오는 동생을 외면하고 내방으로 들어가며 그 아이가 홀로 서기를 기대했고 사소한 잘못도 크게 야단쳐 책임을 질수 있는 아이로 자라길 바랬다. -난 형처럼 장군이 되고 싶어요.- 그래서 꿈을 품었다. 이 아이가 훌륭한 장군이 되어 자신과 검을 나란히 할 꿈을. 꿈이 깨진 그날은 유난히 달이 밝았다. 검을 배우고 싶어 하면서도 쉽게 피곤하다고 칭얼대는 동생을 혼내주고자 했었다. 하얀 옷자락이 내 뱉는 피로 번져가는 모습. 하지만 정작 내가 놀란 것은 동생이 가슴을 앓는 것이 아닌 피묻은 손을 바라보는 초연한 눈동자였다. 나를 외면하는 그 검은 눈에 내가 모르는 일이 얼마나 많이 담겨있었던 것일까. 적어도 나는 그 아이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자신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치졸한 형으로써의 자부심일뿐. 나는 몰랐다. 동생은 죽어가고 있었다. 내가 왕성에서 돌아오는 해질 무렵까지 빈 방에서 홀로 죽음이란 것을 생각하며 나와 그리고 언제 올지 모르는 자신의 죽음을 기다리고 기다렸던 것이었다. 그때 동생은 고작 9살이었다. 사실 무서워 내게 매달렸던 것인데. 나는 그렇게 모질고 강하게 키우려는 욕심만 품었다. 내게 말하기조차 두려워 속으로 삭이고 있는 것인데 강해지고 있는 줄 알았다. 웃지 않아 철이 든 줄 알았는데 울고 있었다. 그날도 가슴의 고통보다 내게 들을 훈계가 두려워 피투성이가 된 체 날 피하는 아이를 안고 얼마나 울었는지. 그제야 알았던 것이다. 내가 그 아이에게 얼마나 모질게 굴고 있었는지. 10여년, 많은 노력 끝에 내 앞에서 이렇게 웃어주는 동생을 다시 찾을 수 있었지만 여전히 가슴 깊이 있는 것은 말하지 않는다. 게다가 간간히 보이는 동생의 까만 눈동자 속에 숨겨진 나에 대한 잠재된 두려움. 수해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언제부터인가... 이놈이 하는 몸짓 하나 하나에 시선이 따라가게 된 것은. 무심코 보여주는 웃음이나 믿음에 절대 배신하고 싶지 않다고 느꼈을때가 언제이던가. 이 아이에게만은 강한 장군으로 남고 싶다는 욕심은 어디에서 온건가. 그 시선이 닿는 곳에 언제나 내가 있고 싶다는 고집은 단순한 호기일까. 알고 있다. 그러기에 두렵다. 모든 것이 그저 하나남은 아우를 보호하는 마음에서 생기는 정이라고 얼마나 되뇌였던가. 혹시 내가 어릴적 아이에게 했던 호되고 못된 행동에 미안해 하는 감정을 잘못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미안해서 그러기에 떠나지 못한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닌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것과는 다른 감정이라는 것을. 어쩌면 내가 이 아이에게 호되게 했던 이유는 이 날에 돌아오게 될 나의 감정을 예상했던 것은 아닐까. 이 비정상적인, 절대로 있어서는 안되는 두근거림을 과연 내가 얼마나 더 길게 자제할수 있을까. 두렵다. 혹시라도 내 아이가 먼저 내 감정을 알아버려 날 혐오하게 될까봐 너무 두렵다. 결국 나에게 남은 것은 그냥 가슴에 소담히 쌓아 두어야 하는 일뿐이다. 그래야 지친 몸을 눕히기 위해 아이가 망자의 산으로 기별을 보낼때 나는 당당히 이 아이의 손을 잡아줄 수 있을 것이다. 형으로 하나 남은 혈육으로. 그것이 너무도 슬프고 가슴저려도. 그래도 이렇게 곁에 있으면 머릿속이 비어버리는 것을 느낀다. 수하의 향이 느껴졌다. 여인과는 분명 다른 쓰디 쓴 풀 냄새다. 어릴 때부터 먹은 약들이 가슴으로 가지 못하고 향으로 퍼지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꽃향기보다 사람을 더욱 취하게 만든다. 벌떡 침상에서 일어나 쫓기듯 방을 나간다. 시원한 바람이 부는 성벽으로 나가 바람을 들이켰다. 잊어보려는 듯. 하지만 그럴수록 코끝에 맴도는 쓴 풀의 내음에 수해는 한숨을 쉬는 수밖에 없다. 훗날 당당히 그 아이의 손을 잡아줄수 있도록... 하지만 자신 없음을 느끼고 스스로 피식 웃어버린다. -- 단설의 역주는 인용과 부분별 개인견해가 들어간 글입니다.(맹신(盟信)당황. 도용씁쓸)-- 주: 목래(牧萊)-목주(睦州) 뒤의 초지에 있는 지방성. 목주성은 칠 ·딱 ·솔 ·삼나무 등의 생산으로 풍족한 생활을 누린데 반면 목주의 외성인 목래는 말을 치며 농작을 키워야 했다. 목래는 화적에 불타지만 목주는 그 풍족한 죽석화목(竹石花木)을 노리는 재상 채경에 의해 방랍의 난이 일어나 망한다. (목래는 목주에 딸린 작은성에 이름을 붙여 가상으로 만든 것임을 알린다.) 주:태수(太守) 삼국시대에는 지방행정제도가 군국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군에는 태수를 두고, 국에는 상을 두었다. 태수와 상은 실질적인 동급의 지방장관이라 할 수 있다. 태수의 녹봉은 2천석. 태수의 아래에는 태수를 보좌하는 부태수에 해당하는 관직이 승과 장사가 있었다 주:군승=장사(長史) 진한(秦漢) 때 승상(丞相) 및 태위(太尉)의 속관으로둔 관직. 또 이와는 별도로 진나라 때의 지방관으로서 군수의 속관으로 이 관직이 설치되기도 했다. 그리고 한나라 때에는 변경에 있는 군의 군승(軍丞;부군수격)으로 이 직 위를 두었다. 5 “아저씨..가 아니라 백라님, 이런 일에 따라오시지 않아도 되는데 말입니다.” “그러게요. 백라께서는 왕씨의 곁을 지키시는 게.” “난 무도 자르지 못하는 겁 많은 글쟁이요. 어떻게 내가 지킨단 말입니까.” 한가하다는 듯 하얀 부채를 흔들며 백라가 웃었다. 얼핏 보기에는 한족의 사내 3명이 말을 타고 한가하게 산책에 나선 듯한 모습의 이 세 사람은 하류사의 명령을 듣고 길을 떠난 왕씨 직속 장군들이었다. 갈색의 준마를 타고 있는, 유생의 연녹빛옷이 참으로 안 어울리는 30후반의 사내는 상장군인 우산성 우씨의 자손 우예사였다. 그는 고구려 때부터 상장군에 위임하는 귀족씨였고 그의 아위(牙衛: 어금니) 다위(다?衛:뿔)는 한족과 거란에게 잘 알려진 맹군이였다. 좌보백라와 예사 대장군 옆의 푸른 옷의 젊은사내는 송을노라고 불리는 젊은 장군이었다. 귀족씨 송씨는 국상을 위임하던 귀족씨로 잘알려져 있었지만 실제로 송씨는 무과계열에 강한 귀족씨였다. 문무가 균등할수 있도록 정권을 나누는 법도에 따라 장군으로 성장한 송씨들은 상장군이나 대장군의 지위에는 닿을 수 없었지만 강한 장수들로 유명했다. 또 대장군에 못잖은 군대를 가질 수 있었다. 젊은 장군 송을노 역시 자신의 아버지인 송을소의 군대인 12영(領)을 가지고 있었다. 장군 을노의 아저씨가 되는 좌보 백라는 입버릇처럼 하류사에게 자신의 조카는 아직 어려 12영을 지휘할 수 없다고 말했으나 하류사는 송을노가 죽자 26세가 된 을노에게 장군 직위를 내리고 그에게 12영을 통솔하게 했다. 왕명을 거역할 수 없어 백라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항상 어린 장군을 못미더워했다. 이번에도 어린장군 을노가 신경 쓰여 따라온 것이었다. “그보다 왜 목래를 가는 것인가요?” “목래의 혈족은 수씨라고 불리기 때문입니다.” 상장군 예사의 질문에 백라는 가볍게 대답했다. “그것 뿐?” “관직에 있는 혈족들이 그를 만나보길 원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만나보기 전에는 모든 것을 추측하는 것뿐이지요.” “아아, 하필이면...” 장군 을노가 짜증을 부리자 상장군 예사가 무슨 소리냐고 물었다. “실은 목래쪽으로 금의 관리가 들어간다는 전서를 오늘 아침에 받았습니다. 행여 우리가 마주쳐 일이 커지지는 않을지...” “걱정 마시오. 장군 을노.” 백라가 자신의 조카를 바라보며 설명했다. “목래는 말을 기르는 곳으로 유명한 곳이오. 서한 때부터 말을 키워 조세를 내었던 곳이지요. 금나라가 세워진 이후 여진은 더 이상 말을 치지 않아 왕성조차 말이 부족하지. 그러니 목래에다 말을 달라는 수밖에. 이돌발적인 일이 아니니 긴장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요. 게다가 우리가 그들보다 2주 정도 먼저 도착하게 될 것이라 예상하고 있소.” “그리고 그들이 목래에 도착하면 우리는 떠나면 되는 걸세. 장군 을노.” “그렇군요. 정말로 마주칠 일은 없겠군요.” 장군 을노가 안심했다는 표정을 짓자 백라가 덧붙였다. “하지만 이번 관리를 통솔하는 자는 금의 15왕자 쉬첸이요. 알다시피 쉬첸은 14왕자 태진과 친하고 14왕자 태진은 4왕자 레이첸의 보호를 받고 있소.” “하필이면...4왕자라면 그 힘만 쎈 붉은 머리의...” “하하 장군 을노 그렇게 피곤해할 것 없소. 장군이 가진 12영은 4왕자 레이첸도 함부로 덤벼들지 못하는 강력한 군이요.” “그렇게 말씀해주시다니 감사합니다. 상장군님.” 상장군 예사의 위로에 다시 밝아진 을노에게 백라가 툭 내뱉었다. “흥, 머리가 달라졌으니 레이첸도 달라질지 모르는 일이지.” “아..아저씨!” “자자 그만들 해주십시오! 좌보님도 장군도.” “어린 조카에게 용기를 주시지 못할망정 어떻게...” “흥. 너에게 12영은 과분하다!” “좌..좌보님! 그만 하게 장군!” 산길은 세 명의 말소리로 떠들썩했지만 다행이 아무도 듣는 사람은 없었다. 금의 연경에 위치한 왕성의 성벽위에 여진의 상징인 붉은 깃발이 휘날리는 대전을 누군가 뛰어 가고 있었다. 화려한 비단의 옷자락을 펄럭거리는 모습에서 다급함이 엿보인다. “쉬첸!” “태진. 어쩐 일이야? 레이첸 전하와 사냥을 나갔던 것이 아니었어?” “가긴 갔었는데 레이첸 전하가 먼저 성으로 가셨어. 하지만 역시나 성에는 안 오셨더군. 지금 막 성을 나가 찾아보려다가 네 이야기를 들었어” “아아, 별것 아니야. 목래에 가서 말을 좀 가져오는 거야. 단순한거지.” 적금발에 가까운 머리카락을 허리끝까지 땋아 내린 쉬첸이 밝게 웃었다. 태진도 그의 웃음을 보고 안심한 듯 미소 지었다. 14왕자 태진. 15왕자 쉬첸. 둘은 같은 날에 태어난 배다른 형제였다. 14왕자 태진은 이름으로 알수 있듯 한족출신의 서후, 선헌 왕비의 아들이었고 15왕자 쉬첸은 여진족 출신의 계후 광의 왕비의 아들이었다. 계후의 아들인 쉬첸이 서후의 아들인 태진보다 배분이 높았지만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둘은 매우 막막한 사이로 지냈다. 아마도 동시에 태어나 같은 선생에게서 글을 배워서 그럴지도 모른다. 둘 다 친형제가 따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진솔한 사이로 성장할수 있었다. 장성한 그들이 옛날과 변한 것이 있다면 태진은 4왕자 레이첸의 마음에 들어 권력을 잡았다는 것이고 쉬첸은 어머니인 서후가 죽어 권력에서 밀려났다는 것이었다. “젠장, 내가 먼저 알았다면 네가 이런 일로 출궁하는 일은 없었을 텐데 왜 내게 말하지 않았어?!” “태진, 난 궁을 나가는 게 싫지 않아.” 쉬첸은 이복 형제에게 등을 돌리며 말했다. “넌 레이첸 전하와 궁을 자주 나가서 잘 모르겠지만 나같이 서열이 낮은 왕자들 대부분은 궁 안에서 갇혀 지내야 하는 신세라고. 이렇게라도 궁 밖을 구경한다는 것이 가슴이 두근거리는걸.” “하지만 조세 따위를 걷으러 왕자가 가는 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해?!” “태진. 왜 화를 내는 거야? 진정하라고.” 태진은 자신이 가장 아끼는 형제를 바라보았다. 여진의 피가 흐르는 그는 레이첸과 그 분위기가 비슷하다. 구릿빛의 피부. 연갈색의 눈동자와 머리카락. 자신과 같은 키와 몸집에도 불구하고 덩치가 커 보이는 것은 여진의 피가 흘려서일까. “목래는 이미 올해 조세를 납세한 상태야. 그런데 궁에선 말이 부족해서 더 걷어야 겠다는 거지. 하지만 순순히 내줄 리는 없잖아? 그래서 내가 가서 목래성주를 설득하려는 거야. 일반 관리가 가는 것 보다 왕자를 보내 기를 꺾어버리자는 황제의 생각이시지.” “...그렇지만.” “자자, 나 이만 나가 봐야해. 아, 그렇지! 나 아까 2왕자 전하의 궁전을 지나가면서 얼핏 들었는데 말이야, 너 곧 혼담이 있을 것 같은데 정말이냐?” “뭐?” “몰랐냐? 광한대부의 딸이라고 하던데...?” “뭐?! 야 잠깐 기다려!” “뭐, 이 몸께서는 네놈이 결혼하기 전엔 돌아오마. 걱정 말아라.” “쉬첸!” 금세 휘장 사이로 사라져 버리는 형제를 바라보며 태진은 화를 내었다. 왜 쉬첸은 권력에 흥미를 가지지 않는 것일까. 사실 태진은 쉬첸을 4황자 레이첸에게 자주 소개 시키려고 했지만 쉬첸쪽에서 핑계를 대며 물러서기가 대부분이었다. 게다가 사실 쉬첸은 계후의 태생. 여진의 피가 흐르니 원한다면 얼마든지 권력을 모을 수 있는 위치다. 권력이 없는 왕자는 다름 왕이 등극할 때 죽거나 내쫓긴다. 그래서 왕자들은 힘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쉬첸도 그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힘을 기를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알면서도 어째서.. 이해할수 없는 형제의 마음에 태진은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말을 더 걷어간다니, 그건 허락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하지만 15왕자가 직접 내려온다 합니다.” 홀에 늘어선 관리들은 서로 눈치를 살피며 성주의 옆에 앉아있는 그의 ‘근심‘을 살펴보았다. 오늘은 기분이 좋은 것인지 아니라면 화를 내고 있는 것인지 약간 상기된 , 그 특유의 사나운 얼굴로 홀에 부복한 관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태수는 태평한 표정으로 큰소리치는 군승을 바라본다. 저렇게 악을 쓰다 쓰러지면 어떡하지? 수해는 수하를 힐끔 힐끔 쳐다보며 생각했다. 사실 자신의 동생이기 때문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것이지만 수하는 신경질적에 고집도 세다. 초면에 다가가기 힘든 성격인 것이다. 의원이 수하의 신경질이 가슴에 좋지 않다며 주의를 주었지만 저렇게 지금도 화를 내고 있다. 뭐. 이번 왕자의 방문으로 인한 부담으로 하는 거짓 표정이겠지만 그래도 걱정된다. 군승, 수하의 거부에 관리들은 쩔쩔매다가 그중 가장 연장자인 관리가 용기를 내어 말했다. “올해는 말의 생산량도 크고 작지만 농사도 풍작이 되었습니다. 하물며 극성이었던 늑대들조차 목장을 넘보지 않으니 약간의 말을 차출하여 왕성으로 가는 것은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올해 말이 늘어난 이유는 요에서 금으로 넘어올 때 생긴 조세의 공백기로 인해 목래에 남아있던 어린 망아지들이 새끼를 낳았기 때문입니다. 도성에서 원하는 것은 망아지가 아닌 말이요. 성안에 남아있는 말들은 망아지가 있는 말들이 대부분인데 그 말들을 차출한다면 망아지의 절반은 살아남기 힘들 것입니다. ” “하지만 이번 망아자가 죽는다 하더라고 내년에 또 새로 태어나는 망아지들도 있으니 그다지 걱정할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지 않겠다는 듯 말대꾸를 하는 노관리에게도 수하는 여지없다. 거 참. 자신의 할아버지에게는 그리 야들 야들, 곱상하게 구는 놈이지만 일단 공무에 들어가면 눈에 보이는 것이 없나보다. “한꺼번에 많은 수의 망아지들이 죽으면 그것을 묻을 땅을 위해 밭을 줄여야 합니다. 그럼 내년 수확기에 문제가 생깁니다.” “재작년처럼 숲에다 버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재작년, 관료들께서 제 말을 듣지 않으시고 숲에다 망아지들을 버린 결과 늑대와 곰이 성벽까지 내려와 말을 잡아가는 일은 모두 잊으신 모양이군요. 올해 늑대가 없는 것은 작년에 죽은 망아지들을 모두 태웠기 때문입니다.” “그럼 올해도 태우면..” “수확기의 다 여문 벼들에게 그 많은 재를 뿌리란 말씀입니까?! 가을부터 겨울까지는 도성 안으로 바람이 붑니다.! 어찌 그렇게 우문하시단 말인가!” 수하가 소맷자락 앞에 놓인 책상을 소리 나게 쳤다. 관리들은 물론 수해까지 움찔할만한 소리였다. “원래 목래의 조세는 요나라 때부터 무조건, 년을 걸러 생산의 절반을 조세로 납세하게 정해졌습니다. 어느 도성도 한해 걸러 한번씩, 생산의 절반을 조세로 가져 가는곳은 없습니다. 목래가 말을 생산하기에 가능한 일인 것입니다. 목래는 나머지 반의 말을 가지고 내후년에 낼 조세와 빈약한 농지에 보충할 쌀을 사들이고 있습니다. 지금 말을 더 가져간다면 다음 조세는 어떻게 낼 것이며 그동안 백성들에게 뭘 먹일 생각인 것입니까!” “좋다. 거기까지.” 수해는 수하에게 손짓을 해 말을 막았다. 물러나라는 표정을 하자 군승인 동생은 고개를 숙이고 휘장넘어로 사라진다. 동생이 나간 것을 확인한 수해는 관리들을 보았다.관리들도 군승이 나간것에 안도의 표정을 한다. “수하의 말이 옳다. 자네들도 이해갔을 것이다. 하지만 자네들의 말도 틀린 것은 아니지. 왕에게 밉보이면 피곤한 일이 생기는 것은 뻔한일이다. 그래서 난 말을 주는 편으로 생각하고 있네.” 다행이라는 표정을 짓는 관료들을 바라보며 수해는 피식 웃었다. 단순한 것들. 어쩌면 나랑 똑같냐. 이러니까 태수인 나나 관리들인 너희들이나 수하의 손에 놀아나는 거다. “그래서 말인데, 수하 말대로 우리 쪽 말을 빼줄수는 없잖나. 그래서 말을 사들이기로 했다네” “예? 말을 사들이다니요?” 관리들이 어리둥절하자 수해는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했다. “그동안 조세 말고 다른 성에 넘긴 말들도 있지 않은가. 그럭저럭 사 모으면 어떻게 되겠지. 안 그런가? 그런데 문제가 있단 말이야.” “무슨 문제입니까?” “재정이 여유치 않아. 그래서 자네들에게 좀 걷어야겠네.” “예?!” 놀라 고개를 드는 관리들에게 수해는 상쾌하게 웃어주었다. “집에서 놀리고 있는 명마들을 한 마리씩 납세하도록.” -- 단설의 역주는 인용과 부분별 개인견해가 들어간 글입니다.(맹신(盟信)당황. 도용씁쓸)-- 주:위衛와 영(領)- 삼국의 군대 조직. 서로 비슷하며 아래와 같다. <지휘관>.... <부대이름> .......... <병력수> 1.상장군....군(軍), 위(衛)........... ? 2.대장군....군(軍), 위(衛)........... ? 3.장군 .....영(領)...................1000명 4.중랑장....영(領)...................1000명 5.낭장...... ? ...................... 200명 6.별장...... ? ...................... 200명 7.산원...... ? ...................... 200명 8.교위......오(伍).................... 50명 9.대정......대(隊)................... 25명 여기서 나는 알려지지 않는 군(軍), 위(衛)의 명수는 각각 10000명과 30000으로 정하고 글을 적어나가고 있다. 6 수군거리며 땅을 치는 관리들에게 폐관을 선언하고 홀을 나오는데 복도의 기둥사이로 제비가 날아간다. 전서가 왔나? 문대신 달아준 발과 하얀 휘장을 걷자 등을 돌리고 앉아 뭔가 보고 있는 수하의 모습이 보였다. “수하?” “형?” 책상을 친 손을 보고 있었던 듯 수하는 손목을 흔들어 옷자락을 내렸다. “손 다쳤니?” “아니 그냥 좀 저려서요. 그보다 이야기는 잘 됐어요?” “네가 그렇게 하고 나갔는데 별수 있니. 다들 가지고 오겠다고 하더라.” “잘됐네요. 어쨌거나 왕과는 싸우지 않는게 백성들에게 좋은 일이니까...” “...응” “전서가 왔었어요. 형이 할아버지께 두분을 마중나가라 하셨나요?” “그래. 혈족의 목씨를 찾는 것이라면 우리보다는 할아버지께서 더 적당할 듯 싶었다.” “..예.” 역시 쓸쓸하게 고개를 숙이는 수하의 옆에 앉지 못하고 그 옆의 침상에 걸터앉았다. 방안에서 나는 풀내음에 어제의 두근거림과 자신의 감정이 떠올라 얼굴이 확 달아오를 것만 같았지만 그 정도의 감정 속임은 아직도 능란하다. “그보다 왜 돈을 걷지 않고 말을 걷으라 한거니? 혹시 혈족들에게 줄 생각인거야?” “예.” 탁자에서 뜨거운 물로 차를 두잔 타서 수하는 수해 옆에 다가가 앉았다. “상장군 우예사께서 이리로 오고 있으니까요. 비록 우리가 금나라의 관직에 들어가 있다지만 혈족에게 뭔가 도움이 되어야겠지요. 형도 그렇지요?” “...어...그래” 어물어물하게 대답하며 시선을 돌리는 형을 수하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릴적 아침 식사에 잠깐 볼 수 있는 형의 얼굴을 머릿속에서 되새기며 하루를 보냈다. 왕성에서 돌아온 형은 자신을 봐주지 않았기 때문에 항상 밖으로 나가면 형을 못 알아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렸다. 제천 의식 때 형과 함께 간 나들이에서, 태양이 내리쬐는 궁성을 걸어가는 검푸른 장옷을 걸친 형의 모습은 너무나 낯설은 불안감에 주위를 구경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틈에서 행여 놓치면 다시는 못 찾을 것 같아 소맷자락을 부여잡았다가 얼마나 호되게 혼이 났던가. “...후후” “왜 그러느냐?” “아무것도요.” 무섭게 화를 내고 있는 형의 얼굴을 똑바로 본 것은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항상 그 불같은 눈을 마주보기 두려워 시선을 내리 깔았지만 그날만은 혼나면서도 다행이라 생각했다. 고개를 숙이고 자신을 보는 형의 얼굴을 외우기엔 훈계의 시간은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수하가 조용히 차를 홀짝이자 수해는 손을 내밀어 자신의 곁으로 당겼다. 버릇이 되어버린 듯 머리를 만지면 몸을 기대오는 동생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해 한다. 문득 아우가 자신을 올려본다. 그 맑은 눈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부드러워진 표정이 자신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해 얼른 어깨에 올린 손을 토닥이며 시선을 딴곳으로 가져간다. 물끄러미 형의 턱선을 바라보며 미소짓는다. 이렇게 눈을 뜨고 있는 형의 얼굴을 물끄러미 볼수 있는 날이 오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는데. 가슴 병을 들킨 이후부터 형은 자신과 오랜 시간을 보냈다. 동짓날 찬 바람때문인지 열이 올라 잠을 못자 뒤척이자 처음으로 형은 방을 건너와 날 안아 들고 방을 거닐며 등을 토닥여주었다. 마치 아버지가 그랬던것처럼. 처음으로 형이 날 조금은 좋아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바램이 들었다. 역시 토닥여주는 손길에 잠이 와버린다. 이상하게도 형의 옆에서 자면 너무 깊게 잠들어버린단 말이야. 하지만 지금은 자고 싶지 않은데. 공문도 정리해야 하고 관리들이 가져오는 말을 가두어둘 마굿간도 비워두어야 하고...약도 마셔야 하는데. 그러고 보니 한동안 약을 마시지 않았네. 하지만 마셔도 별 소용이 없으니 상관없어. “수하야” “...예?.” “... 왜 상장군이 목씨를 찾는 걸까?” “...왕손을 찾으려 하는 것이 아닐까요.” “왕손 고씨는 귀족씨인 목씨보다는 송씨나 명림씨...를 찾는 게 더 정확한 것이 아닐까?” “... 두 귀족씨는 말살되었잖아요...” “ 12영을 이었다는 장군이 송씨잖아. 게다가 그의 아저씨인 송씨도 있다는 ...수하?” “....수씨..형은......” “...응” 뭔가 더 말하려고 했지만 수하는 곧 새근거렸다. 하지만 수해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수씨는 정안족 목씨들이 자주 사용하는 한족의 성이였다. 수(水)는 목(木)과 그 형태가 비슷하다. 이런 식으로 송(松소나무)씨는 송(訟송사 )씨를 우(雩기우제)씨는 설(雪 눈)씨를 사용하며 귀족씨임을 숨기고 계속 망명을 했다. 혈족들은 대부분 이 성씨에 대한 것을 이해할수 있었기 때문에 서로 연락이 두절되더라도 다시 만날 수 있는 단서가 되기도 했다. 수해. 본명은 목자휼. 고구려 귀족 목씨의 자손이다. 하지만 수해 자신은 실제로 부흥전쟁에 참여한 일은 없었는데다가 철이 들을 즈음 그의 할아버지인 목씨 정륜이 요나라의 관직에 있었기 때문에 정안보다 거란이나 한족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자라왔다. 물론 천성적인 생김새나 의복 식성 등은 부정할 수 없었지만 수해는 지금의 생활에 꽤나 만족하고 있었다. 하지만 수하는 달랐다. 약한 몸과는 달리 정안족의 일에 관심이 많았고 혈족의 일이라면 도움을 주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아마도 몸이 조금만 건강했다면 지금쯤 상장군의 아위에 들어가 싸우고 있었을 것이다. “..자례?” “...으응...” 잠에 취해있으면서도 자신의 본명에 대답하는 동생이 귀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걱정되기도 해서 수해, 아니 자휼은 가슴을 졸였다. 이대로는 안 되겠느냐? 어린 동생아. 지금 우린 충분히 행복한데 왜 자꾸만 위험한 곳으로 걸어가는 것이지? 사실은 그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자신도 사라져가는 옛 땅과 기억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려왔다. 이런 황폐하고 먼지가 이는 한족의 땅이 아닌 가을이 되면 황금빛의 억새들이 허리를 감싸고도는 거대한 평원과 마을의 집마다 열리는 새빨간 석류, 날아다니는 잠자리와 제비. 둥글게 휘어진 처마에서 떨어지는 봄비의 찰랑이는 청아한 소리. 순백의 눈이 쌓이면 뽀득거리는 소리조차 시끄러운 새하얀 달의 밤. 다시 한번 그 행복했던 시절의 그곳으로 돌아가 새파란 신을 신고 긴 옷자락을 살짝 들춘 체 그 길을 걸어보았으면. 만개의 달에 소원을 빌고 사랑하는 이를 찾아 연못가로 나가 연꽃을 띄우는 일상이 다시 한번 돌아왔으면. 수해는 고개를 흔들었다. 알고 있다. 사실은 자신도 간절하게 부흥을 원하고 있다는 것을. 지금이라도 이런 관직 따위 털어버리고 창을 잡고 진흙에 뒹굴어가며 싸우길 누구보다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동생은 아팠다. 내색을 하지 않지만 그가 자신이 못 보는 어딘가에서 가슴을 부여잡고 피를 토하며 괴로워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 동생을 나두고, 아니 데리고서라도 전장으로 간다는 것은 안 되는 일이다. 요에서 금으로 넘어갈 때 잠시 요나라의 장군으로써 잠시 성을 비웠던 적이 있었다. 함께 가고 싶다는 동생을 관리들에게 붙잡게 하고 혼자 떠난 여진과의 전장에서 도무지 홀로 남아있을 아우의 걱정에 잠이 오지 않아 몇 달동안 밤을 설쳤다. 하지만 가볼생각은 하지 못했다. 적을 앞두고 떠나는 것은 도망치는 것이라 여겼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가 맡은 성벽은 그 견고함을 유지했고 지쳐버린 여진군은 결국 휴전을 제의했다. 그날 밤 밤을 도와 목래로 말을 달려 돌아가는 길은 왜 그렇게 길었는지. 소리 없이 들어간 성안에서 자신의 자리에 앉아 공무를 정리하는 동생을 보았다. 고작 몇 달 사이에 겨울의 달보다 하얗게 변해버려 금방이라도 어둠에 사라질 것 같은 모습. 간헐적으로 내뱉는 기침 때문에 입을 가린 옷자락이 붉게 물들어 가는 장면. 하지만 자신을 슬프게 했던 것은 초연하게 피에 물든 옷자락을 바라보던 어린 동생의 검은 눈동자였다. 곧 사냥당해 죽는 것을 알고는 마지막으로 고개를 돌려 자신의 둥지를 바라보는 사슴의 눈동자와 어찌 그리 비슷했을까. 그래서 자신은 요에 배신하고 금에 투항했다. 엄청난 비난의 말들이 자신에게 쏟아졌지만 고작 종이쪼가리에 적히는 장군의 명예 따위란 몇글자로 하나뿐인 동생의 목숨을 걸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마음을 하늘이 도왔던 것인지 요는 망했고 금이 새로 떠올라 별 다를 것 없이 하루하루가 이어져 나갔다. 하지만 평화롭기만 할뿐 자신이 원하는 그 결정적인 무엇인가가 빠진 듯한 공허감에 아우를 꼭 껴안는다. “자례야, 우리 산으로 들어가 농사나 지며 살까나...?” 잠이 든 동생이 고개를 끄덕이는 느낌에 피식 웃고 말았다. 언제까지나 이런 소소한 일상에 찌들지라도, 그래도 함께 할수 있다면 나는 괜찮다. 진한 향내가 물씬 나는 유곽에서 태진은 그가 찾던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형님.” “좀더 빨리 찾아올 줄 알았는데 좀 늦군.” 레이첸은 풍성한 기생의 가슴을 한번 움켜잡아본 후 겹쳐진 몸을 일으켰다. “나가라.” 나체의 한족인 듯한 기생이 얼른 옷으로 몸을 가리고 태진의 옆을 지나 사라졌다. 기생의 몸에 잔득 나있는 붉은 입술자국에 저절로 눈살이 찡그려졌다. “ 싸구려 여인들과 어울리시다니 형님의 의중을 잘 모르겠습니다.” “ 성안 어느 한족관리의 딸이야. 싸구려 여인은 아니지. 하긴 침대에서는 다를 것도 없었지만,” “ 성안으로 돌아가십시다.” “ 왜?” 대충 바지만 입고 탁자에 앉아 술잔을 채우던 레이첸이 실소하며 되물었다. “내가 성에 간다한들 뭐가 달라지나?” “황제께서 사냥을 나가시는 것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가서 두각을 나타내셔야지요.” “두각, 두각이라.” 작은 술잔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던져버리고 술병을 들은 레이첸은 태진을 손짓으로 불러 자신의 앞에 앉게 했다. “나는 4왕자다. 태진. 위로 왕자가 3명이나 있어.” “하지만 제 1왕자는 정안족과 싸우다 죽었고 3왕자는 한족 계후 출생이니 어차피 황제의 자리는 2왕자자와 당신이 유력한 후보입니다. 2왕자 체이첸님은 패기가 없으니 기회를 노린다면.” “그만. 너는 야망 있는 놈이다. 태진. 나도 이용해볼 생각인가?” 태진은 그 말에 움찔했지만 레이첸은 웃었다. “하긴 그 점이 마음에 들었지만.” 레이첸은 앞에 앉은 이복동생을 바라보았다. 그는 사실 3왕자 태천의 친동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친형제를 내칠 궁리를 하고 있는 사내. 그가 내게서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네 말이 맞다. 하지만 5왕자인 치첸도 만만하지 않아.” “그러니까 형님이 꼭 사냥에 참석하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군. 그럼 돌아갈까. 슬슬 여자도 지겨워졌다.” “ 말을 준비시켰습니다.” 대충 윗옷을 입고는 레이첸과 태진이 방에서 나오자 1층의 기생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레이첸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유곽을 나가버렸지만 태진은 한쪽구석에서 떨고 있는 여섯 명의 어린 기생들을 보았다. 그중에는 아까 방에서 보았던 여인도 있었다. 아마도 바보처럼 끌려와 몸을 내주고 책임져 주길 바라는 것이겠지. 태진은 말에 오르기 전에 함께 온 자신의 심복에게 속삭였다. “마무리해라.” 심복이 검을 들고 유곽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는 먼저 출발한 레이첸을 따라 말을 돌렸다. 레이첸은 얼마 가지 않아 말을 세우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태진이 가까이 가자 레이첸은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죽였지?” “...돌려보냈습니다.” “잘 했군.” 레이첸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성으로 말을 달렸다. 대로에 깔린 상인들의 수례가 엎어지고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지만 어떤 관리도 둘을 막지 않았다. 목래의 성이 조그맣게 보이는 마지막 숲길에서 일행은 멈추어 섰다. 50일이나 걸리는 긴 여행의 목적지가 보이자 긴장이 풀리기도 해서 잠시 쉬어가기로 결정했다. “하, 나는 만두가 제일 싫더라.” “에이, 나이답지 않게 무슨 투정이시랍니까? 어서 먹으세요. 장군 을노가 피식 웃으며 만두를 들고 짜증을 내는 아저씨를 달랬다. 날카롭고 냉정한 아저씨지만 먹는것과 싸우는 것에는 너무도 어린애 같아 가끔 웃음이 나왔다. 좌보 백라는 부채로 만두를 부쳐가며 중얼거렸다. “어째서 한족들은 국도 없이 매 끼를 먹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백라께서 함께 하실 줄 알았다면 준비를 더 해왔을텐데 말입니다.” 상장군 예사가 대답했다. 그들은 성안으로 들어가기 전 미루어왔던 식사를 하는 중이였다. 장군 을노가 배고파서 한발자국도 못 움직인다고 투정부린 일도 있었지만 정작 멈춘 이유는 지금까지 달려와준 말들이 탈진할 것 같이 비틀 거렸기 때문이였다. 만두 하나를 놓고 이런 저런 말을 다하던 백라는 끝내 먹지 않고 내려놓았다. 분명 배고프다는 얼굴을 하면서도 만두를 외면하는 그를 보고 두 장수는 소리죽여 웃었다. 짜락. “..?!” “누구냐?” 숲 속에서 누군가 걸어오는 소리에 두 장군은 먹던 만두를 던져버리고 검을 뽑아들었다. “경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나는 노인네요.” 실제로 가까이 다가오는 목소리는 지긋한 노인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두 장군이 의아하게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모습을 보인 노인은 정안의 옷을 입은 백발수염의 노인이었다. 나이는 70이 넘어 보이지만 등은 아직도 꼿꼿했고 눈동자도 맑아 풍채가 당당해 보였다. 노인은 두 손을 땅에 대고 고개를 숙였다. 큰절. 연장자에게 큰절을 받은 두 장군은 허겁지겁 검을 내려놓고서 맞절을 했다. 백라도 무릎을 꿇고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노인은 고개를 들고 세 사람을 둘러보았다. “성주에게 전서를 받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시다면 수해 성주가 보낸 노인장이십니까?“ 백라가 공손하게 물었다. 노인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목씨를 찾는다는 전서를 보내셨더군요.” “그렇습니다.” “세분은 절 모르시겠지만 상장군 예사님은 전에 뵈옵던 분이지요. 그 때문에 이렇게 먼저 말을 걸 수가 있었습니다.” 상장군은 노인의 말에 어깨를 으쓱해보였고 노인의 말에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백라가 고개를 갸웃하자 노인은 인자하게 웃어보였다. “노인장이 목씨 정륜이올시다.” -- 단설의 역주는 인용과 부분별 개인견해가 들어간 글입니다.(맹신(盟信)당황. 도용씁쓸)-- 고구려 관제와 행정 체계를 적어 놓는다. 황실/왕-계루부(종실)-내부 중앙조직/좌보와 우보. 이들은 지방 조직을 관리하고 조정을 책임지는 재상직책으로 8대 신제에는 국상으로 28제 보장제는 막리지란 이름을 따로 받는다.이후 관직은 이와 같다. 국상-막리지-의후사-오졸-태대사자-대사자-소사자-욕사-예속- 선인. 좌보/ 순노부(환나부 개명 9대 고국천제 이후)ㅡ> 동부 좌부. 소노부(소나부 개명 9대 고국천제 이후)ㅡ> 서부 우부. 우보/ 관노부(관나부 개명 9대 고국천제 이후)ㅡ>남부 전부 절노부(연나부 개명 9대 고국천제 이후)ㅡ>북부 후부 각부 조직/ 욕살- 지방 장관으로 한주의 대성주로써 작은 부속 성과 주를 다스렸다. 각부 조직은 아래와 같다. 정치/도사(소성주)-모달(장군)-말객(낭장)선인-좌위-사졸. 군사/대모달(대장군)모달-말객-선인-좌위-사졸. 이들 사이를 중립과 융화 시키는 참좌(참모진)이 있다. 불행히도 고구려의 내부, 황실의 종실의 작호는 전해지지 못한다. 남아있는 것은 고추가 라고 하는 대원군 급의 직위뿐이다. 7 황제의 사냥은 항상 호화스러웠다. 비단으로 몸을 휘감고 어울리지도 않은 보석을 주렁주렁 매단 자신의 아버지를 힐끔 보며 레이첸은 혀를 찼다. 하얀 분을 바르고 높은 신을 신은 저 사람이 정말로 자신의 아비란 말인가. 황제를 배웅나가는건지 수많은 여인들이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다들 후궁이 분명할텐데 어떻게 된 일인지 얼마전 사냥가기 전보다 배는 늘어난 기분이다. “뭔가 속이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가?” “...그럴 리가요 체이첸형님” “오래간만이구나. 레이첸.” 레이첸의 앞으로 누군가 걸어 나왔다. 가장 유력한 태자의 후보자. 한 어머니를 타고 나온 두 형제는 마치 쌍둥이처럼 꼭 닮아 있었다. 체이첸이 좀더 온화한 분위기가 풍기고 검은 머리가 아니었다면 처음 보는 자들은 둘을 구별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체이첸은 손을 들어 시종들을 물러가게 했다. “사냥을 나갈 생각인가 보구나.” “형님은 안 나가실 겁니까?” “나는 나가보았자 눈에 뜨일만한 실력이 있는 것도 아닌데 뭣 하러 나간단 말이지? 너나 나가서 잘 해야겠다. 치첸도 오늘 사냥에 끼인다고 하더구나.” 체이첸이 낮게 웃었다. 하지만 레이첸의 비웃음이 아닌 진실 됨이 담긴 웃음이었다. 체이첸. 2왕자. 여진이 피가 흐르는 사내로 이미 처와 자식이 있는 40대의 사내였다. 어릴 때부터 매우 총명해 황제의 관심을 받았던 유망한 왕자. 하지만 왕자는 여진족답지 않게 온화한 성품이었다. 전쟁을 달가워하지 않으며 사냥보다는 궁에서 책을 읽는 것을 즐기는 한족과 같은 여진피의 왕자. 동생인 레이첸과는 완전 반대인 성품이었다. 체이첸의 머리와 레이첸의 용기를 가진 왕자를 가지고 싶다. 황제는 자신의 왕비들에게 입버릇처럼 말했다. 얼마 후 황제는 바라던 5왕자 치첸을 얻었다. 치첸은 머리도 총명하고 용기도 뛰어났지만 성품이 매우 잔인하여 황제조차 그를 만나길 싫어했다. 바라던 아이지만 황제가 되기엔 위험한 놈이다. 황제는 그렇게 말하고 치첸을 도성에서 떨어진 곳으로 보내었다. 결국 1왕자가 죽은 지금 결국 체이첸과 레이첸, 둘 중 하나가 태자가 되는 것이었다. 3왕자인 태천은 한족 계후 출생이니 태자가 될리 만무했다. 황제는 왕가의 혈통은 반드시 여진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왔다. “그러고 보니 내 동생은 장가를 아니 가는가?” “형님, 형님이나 부인 잘 챙기시오.” 1왕자처럼 아버지에게 자신의 여자를 뺏기고 자신까지 망칠일 없게 하란 말이요. 체이첸은 알아들은 것인지 싱긋 웃어보였다. “나는 들어가겠다. 너는 황제를 모시고 갔다 오거라.” “젠장, 황제를 모시는 건지 후궁들 데리고 외출하는 건지 모르겠수다.” “하하.” 체이첸은 궁 안으로 사라졌다. 레이첸은 그 모습을 보며 미소지었다. 분명 적으로 간주해야 되는 2왕자이지만 그의 넉넉한 품성에는 자신도 늘 감탄하는 것이었다. “비슷한 얼굴인데 뭐가 이렇게 다르담...” 레이첸은 투정 아닌 투정을 부리다 문득 낯선 사람의 모습에 눈길을 돌렸다. 자신과 비슷한 몸집에 넓은 등. 보기 드문 금발이다. 여진족의 피가 흐른다는 증거. 하지만 낯선 모습인데. 하지만 그의 뒤를 따라가는 시종들은 궁 안 사람들이다. “치첸이군. 오늘은 정말 그 사나운 품성을 보게 되는 건가?” 레이첸은 그제야 몸을 일으키고는 기지개를 폈다. 사냥에 나가 머리를 내밀던 발을 내밀던 해야 하겠지. “좌보 송씨 백라입니다.” “상장군 우씨 예사입니다.” “장군 송씨 을노입니다.” 성안의 조그만 서점의 구석진 작은 방에서 세 명의 사내들이 노인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노인은 차를 내주며 미소지었다. “늙은이, 아직 죽지 않아 귀한 귀족 씨의 자제들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희야 말로 사라진 패수의 명장 목씨를 만나 영광입니다.” “제가 무슨 볼일이 있으십니까? 이런 이빨빠진 노인네가 무엇을...” “저희와 같이 도성으로 가주실수 있겠습니까?” 모든 것을 거두절미하고 백라가 물었다. 물론 노인장이 자신의 말을 거부할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원칙대로 하자면 왜 가는지는 알려주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안가겠다는 사람에게 왕씨의 생존여부를 알려주기엔 위험하다. 다행히 정륜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만 어째서인지 이유를 알아도 되겠습니까?” 백라는 다행이라는 인상을 쓰며 작게 말했다. “왕손 고씨 한분이 당신을 찾고 계십니다.” “예?” 정륜이라고 불린 노인은 매우 놀란 얼굴을 하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왕씨께서 살아계시는가! 정말로 왕씨께서 아직 살아계시는가?!”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아아, 이 얼마나 뜻 깊은 소식이란 말인가!” 정륜은 기쁜 내색을 감추지 않으며 외쳤다. “흥료성이 불태워 질때 나는 상장군의 다위 중 일군의 책사였소. 다행히 그 난을 피해 살아남을 수 있었지. 하지만 왕씨께서도 난을 피하셨을 줄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소!” “...장군 송을소가 어린 왕씨를 업고 탈출하셨습니다.” 백라가 담담하게 말했다. 자신의 큰 형. 송을소는 불속으로 뛰어 들어가 하류사를 안아들고 나왔다. 하류사는 무사할 수 있었지만 을소는 그 때의 화상으로 10여년을 고생하면서도 여진과 싸우다 죽었다. 그 뿐인가. 형수님도 을노의 동생인 을야도 불에 타 죽고 말았다. 많은 희생이 있었던 전쟁. 그리고 어린 조카 을노가 12영을 이어받았다. “아아, 송장군이 죽었구려. 하지만 그분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은 것 같소. 그렇다면 이 젊은 장군이...?” “을소장군의 아들 을노입니다.” 장군 을노는 고개를 숙였다. 정륜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늙은 몸이 옛 땅을 다시 찾은데 미력한 힘이라도 보탤 수 있다면 뭘 마다하겠소? 지금 당장이라도 출발합시다.” “예. 그 전에 이일에 도움을 주신 목래성주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안 그래도 성주는 당신들을 보려고 하신다오. 지금 일어납시다.” 정륜이 밝게 웃으며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서점을 나와 성벽과 연결해서 지은 태수의 향했다. 목래는 지방성 중에서도 그리 큰 규모는 아니였지만 말을 키우는 초지의 성답지 않게 그 성벽이 견고하며 망루에서 초원을 바라보는 병사들의 무기도 깨끗했다. 보통 초지의 성은 조건을 보지 않고 난공의 하나로 친다. 공성할만한 돌도 진을 칠 나무도 구하기 힘들다. 역시 성도 마찬가지여서 성벽에 사용될 돌이나 진흙을 외부에서 들여와야한다. 그래서 초지에 지어진 성은 허술하기 마련이다. 그래도 그 지역 특성으로 인해 허술한 성이라도 난공인것이다. 역시 이곳의 성벽도 그다지 단단한 것은 아닌 듯 해보였다. 백라가 그렇게 생각할 때 조카인 장군 을노가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성벽이 두겹입니다? 신기하군요?” “아아, 실은 성주는 놈이 이곳을 부수고 들어온 공성 장군이여서 말입니다. 부수고 하나 더 세워놓은 것이죠.” 정말로 성안쪽 아래로 고개를 내밀자 좀 얇지만 확실히 성벽이 한겹더 쌓아져 있었다. 백라가 감탄했다. “참 견고하게 지어진 성이군요. 초지에 성벽을 두개 세운 성은 처음입니다. 성주님이 굉장히 착실하신가봅니다. ” “허허, 착실은요. 그저 둘이서 싸우기만 좋아하는 두놈이 제대로 걸려 일만하고 있답니다.” “...두 사람이요?” 정륜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 손자들입니다. 자휼과 자례이죠. 둘은 태수와 군승으로 이곳에 부임하고 있습니다.” “...혹시 남매인가요?” 을노가 관심있다는 듯 물었다. 하지만 곧 아차 하며 입을 다물었다. 여진이나 거란이나 한족이나, 여인에게 관직을 주지 않는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정안은 여인들도 관직에 올리는데 말이다. “아뇨. 형제입니다. 아, 저기 있군요.” 정륜이 성아래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커다란 우리가 있었고 수십의 말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키보다 큰 말사이를 겁 없이 두명의 사람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하얀 옷이 멀리서도 혈족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듯 팔랑거렸다. “ 한족들이란 정말 욕심이 많다니까. 하나같이 명마들이군. 이 검은 말은 천리마야.” “ 언제 집수색 좀 해볼까요?” “ 그랬으면 좋겠다.” “ 흑마, 5년생... 딱 좋군요. 아아... 역시 도군이 내놓은 거에요. 이 사람 숨긴 돈이 얼마나 될까 몰라.” 마적부(馬跡簿;말의 출납 관리책)의 흑마(黑馬)란에 수하가 여지 없이 출(出) 이라고 적자 수해는 아쉬운 듯 말을 끌고 장부를 끄적이는 동생 앞으로 걸어갔다. 수하가 다가온 말에게 손을 내밀자 말은 손의 냄새를 맡아보더니 곧 목을 기댄다. 동생의 몸에서 나는 풀냄새가 초원의 향이라도 되는 듯 처음 보는 말이라도 수하를 밟아버리려고 하는 말을 아직 없었다. 오히려 너무 잘따라 난감할 정도였다. 말에게 질투를 부릴수도 없고. 고개를 부비적 거리는 흑마를 수해는 난감하게 바라보았다. 수하가 이제 됐다고 말하며 말머리를 밀치지만 말은 떨어지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때 등 뒤에서 크릉거리는 사나운 말 소리가 들려온다. 마굿간에서다. "...질투하는구나 저놈? 네 말 아니랄까봐." "...아휴. 조용히 해라 묵계! 네가 개냐?! 짖게?" 몇번 더 외치자 그제야 조용해진다. 키득 키득 웃는 형을 아우가 노려보자 수해는 헛기침을 하며 말을 돌린다. “ 수하. 이 말 내가 가지면 안 되나?” “ 관리들이 배 아파 할 텐데요.” “ 하지만 이 놈도 날 마음에 들어 한다고.” “ 그럼 형이 가진 말을 보내야 해요. 그래도 좋아요? " “ 아아... 그 놈도 마음에 드는데. 뭐 할 수 없지. 정든 놈을 택하는 수밖에.” 수해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말에게서 물러났다. 그런 모습을 본 수하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난 형의 그런 모습이 정말 좋아요.” “뭐? 뭐... 다들 그런 거지...정든 놈...뭐...” 어물어물 시선을 회피하는 형에게 수하가 장난스럽게 매달렸다. 수해의 큰 덩치 때문에 팔을 다 뻗어 안아도 손끝이 닿지 못했지만 그렇게 형을 안으면 흙냄새와 땀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그리고 그것이 마치 해의 내음이라 생각되 꽤나 좋아했다. 하지만 항상 이렇게 형을 안으면 왜 내 표정은 어두워지는 걸까. 형이 이젠 내치지 않을것을 알고 있지만 손끝이 가느다랗게 떨리도록 두렵다. 알수 없는 두려움이 밀려오는 것이다. “이 놈, 뒤에서 기습하지 마라. 오늘 말을 타고 돌아서 더럽단 말이다.” “아아 나는 언제 땀나도록 달려볼까나...?” 등 뒤에서 얼굴을 비비적거리는 것이 느껴지자 수해는 자신의 허리를 감싼 옷자락 속 수하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하필 이럴 때 주위에 있는 것들은 모두 말뿐이다. 위험해. 아주 위험해. 새근거리는 숨이 등줄기를 전율시키는 것 같다. 아아. 이놈은 왜 이리 손이 작은 걸까. 내가 긴장해서 떨고있는지 수하의 손이 가느다랗게 떨리는 것 같다. 바보 같이. 그냥 동생이 매달리는 것 뿐이다. 15살이나 어린 동생을 상대로 가슴을 두근거리며 손을 떨다니 나도 미쳤긴 단단히 미쳤군. “ 나 오늘 말 타고 조금만 놀아도 될까나?” “..그..그러면 안 되지! 혼자서는 안 된다고 했잖아.” “ 그럼 형이 나 태워서 100보만 걸면 안 되나?” “..수하!” 두근 두근, 터질 듯한 심장소리가 등에 기댄 아이에게들릴것만 같았다. 더 이상. 이 이상은, 절대 안돼. 인내심의 절정이다라고 느낀 수해는 수하의 손을 탁 떨쳐 내었다. 분명 자신의 얼굴은 새빨갛게 익어버렸을 것이다. 그대로 앞으로 몇걸음 나가 얼굴을 식히며 엄하게 말해본다. “오늘 그들에게 말을 넘겨주는데 한가하게 놀 생각을 하면 되겠나?!” “...잘못 생각했군요.” 아차, 울렸나? 너무 세게 내친건가? 하지만 아직 뒤를 돌아보면 안 되는데. 얼굴이 달아올라 있을거야. 아직은 안되는데. 하지만 ... 축 늘어져 버린 동생의 목소리에 수해가 안절부절못할 때 갑자기 수하가 앞으로 튀어나왔다. 놀란 수해와는 달리 수하는 환하게 웃으며 성벽위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할아버지!” 백라 일행을 본것이였다. 달려가려는 동생의 어깨를 잡아 멈추게 한 수해는 웃었다. "넌 저 장부 정리 안하면 오늘 출고가 안될텐데?" 볼이 통통불어 다시 마적부를 들고 말머리를 확인하는 수하를 보곤 수해는 옷을 갈아입기 위해 성으로 들어갔다. 8 목래성은 한족이 세웠지만 공성으로 인해 파손된 것을 고치면서 연결된 태수의 성을 수리했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드물게 성안 내부는 정안족의 풍습을 따르고 있었다. 벽마다 그림과 글로 꾸민 족자가 아닌 병풍이 늘어서 있었고 비단을 씌운 가리대가 아닌 하얀 휘장이 달려 있었다. 건너 건너 방마다 보이는 화려한 문양의 사각보 방석과 마음이 심해에 가라앉을 것만 같은 침향이 옛집을 떠올리게 해 을노는 힐끔힐끔 이곳저곳을 바라보았다. “특이한 일은 아니지. 관리들인 혈족은 특별한 이유가 아니라면 풍습을 따르거든.” 신기한 듯한 얼굴로 사방을 보는 장군 을노에게 노인 정륜이 말해주었다. 을노는 겸연쩍은 얼굴로 대답했다. “옛 기억이 나는군요. 흥료성 이후로 항상 한족의 집에서만 생활했던 터라... 이거 하나 하나 새롭고...뭔가 그리움도 있고요.” 아른하게 눈을 내리까는 을노를 백라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불쌍한 것. 흥료성이 아골타에게 공성된 후 자신의 형과 형수 나의 어린 조카딸이 죽었다. 가족을 모두 불살라 버린 전쟁에서 그래도 저 아이는 살아남았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큰 불을 보면 잠을 이루지 못하는 놈. 백라는 젊은 조카를 외면했다. “그러고보니...어디선가 쓴 풀냄새가...” “아아 그것은....” 상장군 예사가 민감하게 주위의 냄새를 묻자 정륜이 뭐라뭐라 대답한다. 하지만 을노에겐 멀게 들렸다. 묵묵히 익숙한 휘장들을 지나치며 을노는 불에 타 죽어버린 동생 을야를 떠오른다. 귀여운 내 누이. 지금 살아있다면 꽃처럼 아름다운 아가씨가 되어 있을 텐데. 내가 안아 올려 창문을 통해 마당의 석류나무를 보는 것을 참 좋아했는데. 하지만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꿈이었다. 을노는 스치는 창문밖에 석류나무를 보고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까르르거리며 동생이 창틀 너머로 자신을 들여다보며 안아 달라 조를 것 같았다. 아름다운 하얀 소맷자락을 자신을 향해 뻗으며 나무가 잘 보이도록 자신을 머리위로 올려 달라 할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이곳의 석류도 조금만 있으면 다 익겠구나. 하지만 산과라 먹지는... “...?” 바깥쪽에서 누군가 창문틀에 올라앉았다. 흰 머리띠로 고정시킨 검은 머리가 출렁거렸다. 아아, 저 뒷모습. 눈의 착각인가. 을야는 머리 올리는 것을 싫어해 항상 남자들처럼 머리띠를 하고 다녔지. 제천날마다 도망치는 동생을 따라다니며 머리를 올려주느라 얼마나 힘들었던가. 바람결에 찰랑거리는 검은 머리를 보자 자신도 모르게 어린 누이의 형상이 겹치는 것을 느낀다. 지금 이름을 부른다면 도망가버릴까? 아니면 내게 손을 벌리고 뛰어와 나무를 보게 해달라고 조를까. “..을야?” “...!” 황급히 창틀에서 물러 내려와 무엇인가를 뒤로 감추는 아이. 이쪽을 돌아보는 얼굴이 사나워 보여 순간 움찔한다. 긴 소맷자락. 검은 동정, 두 번 돌린 허리띠. 정안족이다. 하지만 을야는 아니다. 사나운 인상. 외소하지만 분명 사냥을 즐기는 사내아이구나. “...미..미안하다. 사람을 잘못 봤어.” “음..쿨럭!” 사과하는 을노를 보고 고개를 저으며 뭔가 말하려던 아이는 갑자기 목을 쥐고 기침을 한다. “..애야?" “쿨럭! 컥!” 갑자기 가슴을 치는 아이를 보고 놀란 을노는 창틀을 훌쩍 넘어 반대편에 주저앉은 아이에게 다가갔다. 심하게 기침을 하는데 어디 아픈 건가? “사람을 불러주마!” “아..아니 쿨럭! 등 좀..!” “?” 어리둥절했지만 등을 두들겨주자 몇 번 심하게 헛구역질을 하던 아이는 무엇인가 뱉어냈다. “...서...석류씨?” “아, 죽는 줄 알았다.” 황당한 표정의 을노에게 눈물까지 그렁그렁하게 맺혀버린 아이가 고개를 숙였다. 힘이 빠졌는지 인상이 부드럽게 풀렸다. 표정이 부드러워지니 얼굴마저 고와보인다. “고맙습니다.” “별로...그런데 너 등 뒤에 뭘 감추고 있니?!” “아무것도 아닌..엇!” 허무할정도로 쉽게 등뒤에 가린 그것을 빼앗았다. 연녹색의 사과 같은 열매. “이건 설 익은 석류잖아!. 익지 않은 석류를 먹으면 탈이 나는 것은 정안족이면 다 알아!” “조금은 괜찮습니다.” “이건 안석류의 열매다. 산과야. 식용이 아니라 약용이라고!” “여기선 담과의 석류가 자라지 않는답니다. 여긴 북쪽이라 단과가 익기 전에 얼어버리죠.” 담담하게 말하는 아이의 눈동자가 너무 새까매 을노는 화가 풀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에게 화를 내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이는 그런 을노를 흥미있게 바라보았다. “ 한족복장이지만 한족이 아니시군요. 단과와 산과를 구분하실줄 알고...” “ 너도 어딜 보나 정안족이구나.” “ ... 혹시 성주님을 보러 오신 정안의?” “ 아차!” 그제야 을노는 일행을 따라가지 않아 홀로 떨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당황하는 그와는 달리 아이는 을노가 던져 버린 석류를 주어왔다. “그거 먹지 말라니까. 탈난다. 그보다 여기가 어디지...?” “그건 제가 모셔다 드릴수 있습니다. 하지만 잠시만요.” 아이는 주어온 석류를 정원 구석에 작은 구멍을 파고 잘 묻었다. 토닥토닥 거리며 흙무덤을 다듬기까지 한다. 혹시 심는건가? “설익은 열매에선 나무가 자라지 못한단다.” “난 숨기는 거예요.” “뭘?” “내가 석류를 먹었다는 거. 그쪽도 비밀로 해주셔야합니다?” “누구한테?” “우리 형이요.” 을노는 그제야 뭔가 알아챘다. 혹시 이 아이가 아까 그 성벽 아래에 있던... “...너 누구니?” “수하.아 , 자례입니다.본명을 이야기하는 것도 정말 오래간만이군요. 그쪽은?” “...을노.” “그럼 을노. 이쪽으로.” 하얀 소매자락으로 한쪽복도를 가리키는 아이는 너무 어려보인다. 정말로 이 아이가 자례? 목씨 정륜은 자례라는 아이가 목래의 군승이라고 했는데... 너무 어려보여. 아니, 좀 말라서 나이보다 어려보이는 건가? 을노는 이것 저것 생각을 하며 아이의 뒤를 따라 긴 복도를 걸었다. 앞서 걸어가는 아이의 표정을 보니 매우 진지하다. 이렇게 보니 또 나이가 꽤 들어보이네. “자례는 형이 먹지 말라고 한 석류를 왜 먹고 있었니?” 아이는 잠시 미소 짓는 듯했다. 하지만 왜 그 뒷모습이 왜 그리 쓸쓸해보일까. 하지만 바로 밝은 소리로 대답한다. “....덜 익은 석류는 쓰고 시지않습니까??” “그래서?” “너무 쓰고 시어서 고민거리나 화 같은 것이 거짓말처럼 풀려버린답니다.” 싱긋 웃으며 대답하는 아이를 보고 을노는 미소 지었다. 아이다운 발상이군. 저렇게 웃으면 또 어린 아이 같아 보인다. “형 말을 듣지 그러냐, 자례는? 안색을 봐서는 그렇게 건강해보이지는 않는구나.” “하지만... 100보도 안된다니 화가.... 난 18이에요. 장가를 가도 되는 나이인데... “ “뭐?” 18이라니 그럼 아이가 아니잖아. 그런데 왜 저렇게 작아? 혹시 한족 혼혈인가? 반괴(半乖:배신으로 떨친 조각)인거야? 아닐텐데. 그렇다면 바로 내쳐졌을텐데. 을노의 생각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는지 자례는 계속 종알거렸다. 화난 인상이 무서울 정도다. “형이 장가를 안 고르고 있으니 나도 기다려야 하지만, 아 그렇다고 내가 장가를 고르고 싶단 이야기는 아니고... 아무튼 100보도 안된다니... 난 성장했는데 형안의 난 아직도 철부지인셈이겠죠.” “...그래?” “바로 그점이 싫은거에요. 난 도움이 되고 싶지 짐이 되고 싶지는 않다구요!” “...왜 나에게 화를 내는거야?” 아차하는 표정으로 자례는 무안해하다가 중얼거렸다. “미안합니다. 을노. 여긴 혈족이 없어 제 육친의 고민을 들어줄 사람이... 제가 그만 흥분했군요.” “아냐. 그럴때도 있지. 나도 한족 사이에서 생활하면 미칠 것 같으니까. 한족은 누이의 이야기를 하면 체통없다 그러고 아우의 이야기를 하면 어리다 욕하니까. 그들은 우리와 다르다는 것은 이해한다.” “감사합니다.” 그래도 미안한지 옷자락으로 입을 가리며 계속 중얼거리는 소년이 왜 자꾸만 자신의 누이와 겹쳐 보이는 것일까. 을노는 피식 웃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저런 동생이 있다면 징그러울 정도로 행복하겠군. 얼마나 행복할지는 내가 잘 알지. 그래서 놓아주지 못하는 것일지도. 그래서 아우인 이놈이 짜증나는 지도. 갑자기 복도로 바람이 불어온다. 바람속에서 초원의 자유로운 냄새가 배어나온다. 아니 초원이 아닌 이 향은.... “...네 몸에서 풀향이 나는구나?” “예? 옷을 갈아 입었는데도...” 말꼬리를 흐리며 고개를 돌린다. 그러고 보니 이 성안은 쓴 풀냄새가 가득하다. 어디서 나는걸까. 얼마 안가 붉은 석류가 수놓아진 휘장을 걷으며 자례가 조용히 속삭였다. “잠시만. 옷 좀 걸치고 나오겠습니다.” “...? 어라 네..” 방이니? 라고 묻고 싶었지만 자례가 입에 손가락을 올려 조용히 해달라고 표현해 삼켜버린다. “여기 서있으라고?” “...청소도 안했는데.” 방안으로 들어가자 가득찬 쓴 풀향에 인상이 저절로 구겨진다. 그래 이 향이다. 그런데 이게 무슨 냄새야 물어보기도 전에 방안속의 작은방으로 연결된 둥근 문틈 사이로 탕약기가 보여 스스로 납득하고 만다. 하지만 지독하게 쓴 풀냄새구나. 독이다. 독. “아 또 창문을 닫아놓았네.” 자례는 창문을 활짝 열고는 향에 불을 올렸다. 을노는 자신도 모르게 창문쪽으로 다가가 푸하, 하고 숨을 내쉰다. “많이 지독하죠?” “...그래.” 자례는 자신도 그렇다는 인상을 쓰며 장농을 뒤져 새하얀 창의를 꺼내걸친다. “어서 나가요. 옷에 냄새가 배면 지독하거든요.” “밖에서 약을 다리라하지 않고.” “가슴을 덥히게 하는 냄새라나요? 아무튼 어서 나가요. 토할 것 같다구요.” 휘장을 걷고 나가자 호흡을 길게 한다. 자신의 방이 무슨 감옥인듯한 모습에 웃음이 나온다. 킥킥 웃는 을노를 사납게 바라보다가 중얼거린다. “제 몸에서도 저 쓴내가 나죠?” “응? 아니. 그리 나쁘지 않아. 너에게 나는 향은 옅어서 괜찮아.” “감사해요. 그보다 준비되셨어요?” “응?” 자례가 손가락으로 바로 옆방의 문을 가리켜 보인다. “...설마?” “설마가 그거죠.” 문을 두두리기전 자례가 갑자기 을노를 바라본다. “왜?” “나 사실은 이제 화가 풀렸습니다. 그러니까 아까 그 석류이야기는 비밀로 해주시겠죠?” “뭐... 좋아.” “정말로 해줘야해요.” 자례는 신신당부를 하고 그와 안으로 들어갔다. 둘이 들어오는 소리에 태수의 포를 입은 한 중년 사내가 묻는다. “어디갔다 지금 오는거니.” “옷을 갈아입고 이분을 만나 같이 왔어요.” “동생 자례입니다. 한족에서는 수해라고 부르고 있지요.” 미리 와있던 백라와 예사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수해, 본명 자례는 형의 옆으로 다가가 혈족에게 큰절을 올렸다. 그 모습에 백라가 미소지으며 말했다. “하늘이 목씨를 버리지 않았군요. 찾기 힘들 것이라 생각했습니다마는 이렇게 한 가족을 만나 볼 줄이야.” 그러면서 늦게 온 자신의 조카의 허리를 옷자락으로 가려 안보이는 부채끝으로 콱 찌른다. 이놈 어딜 싸돌아다닌게야. 아프지만 내색하지 못하고 천장을 바라보는 을노를 보며 수해가 묻는다. “젊은 이분이 말씀하시던 12영의 을노장군?” “아, 늦었습니다.” 을노는 얼른 수해, 본명은 자휼이라고 했다... 에게 큰절을 올렸다. 정안족에게 보기 드문 갈색머리의 장군이였다. 자례와는 전혀 딴판으로 생긴 외모. 친형제 같지 않군. 백라가 을노의 생각을 자르며 입을 열었다. “ 말씀드렸지만 정륜님을 도성에 계시는 하유사 전하에게 모셔가고 싶습니다.” “ 예. 아저씨께서도 늘 그것을 바래오셨습니다.” " 여행이 길어질지도 모르고 전하의 안전을 위해 당분간 연락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 예. 알겠습니다." 수해, 즉 자휼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뒤늦게 이야기를 듣고 상황을 이해한 수하 , 자례는 옆에 앉은 정륜을 바라보았다. 헤어지기 싫다는 표정이 그대로 얼굴에 담겨 정륜은 미소지었다. “...돌아오시겠죠.” “...그럼. 내 너희를 두고 불안해 잠을 자겠느냐?” 정륜은 자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곧 돌아오마.” “...기다리겠습니다.” 하지만 역시 표정을 쓰다. “후, 엄청난 말들이군요. 이거, 조용히 가려고 해도 눈에 뜨이겠는데요?” 상장군 예사가 70여 마리의 명마들을 바라보며 감탄사를 흘렸다. 성주가 우리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것은 이 이유였나. 조금 늦게 나온 자휼이 작은 문서를 백라에게 건넸다. “내용엔 제가 이 말을 좌보님께 팔았다는 증명이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있으면 목주를 건너가실 때 아무런 세금을 내지 않으실겁니다.” “감사합니다. 그보다 성내에 이런 명마들이 나가는데 괜찮겠습니까?” “괜찮습니다. 우리 군승이 숨겨둔 돈이 있어서. 저 놈 나 몰래 차와 향을 거래하고 있는 것 같은데... 얼마간의 여유돈이 있나봅니다.” 자휼은 낮게 웃으며 조금 떨어져서 정륜과 이야기를 나누는 자례를 바라보았다. “동생분이 나이에 비해 상당히 총명하십니다. 그려.” “...예. 허나 저는 총명보다는 건강해졌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군요.” “안색이 창백하니 어디 안좋다는 것은 짐작하지만... 그보다 이쪽으로 왕자가 말을 가지러 온다는 것을 알고있습니다. 어떻게 하시기로 했는지요?” “뭐. 별 큰일은 없을 겁니다. 걱정 마시고 가져가셔도 됩니다. 안되면 되게 하는 것이 장수아니겠습니까?" 백라는 미소 지었다. 자휼이라. 이 자 역시 뛰어난 장수임이 틀림없다. 아마도 동생 때문에 여기서 묻힐 생각인 것이 분명했지만. 목래는 난공불락의 12개 성 중 하나다. 그 성을 요나라 때 공성에 성공해 장군에 봉해져 성을 하사받았다. 초지에서의 공성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는 일개 군졸도 아는 이야기다. "...장군께서는 이곳을 좋아하시는군요." "...뼈를 묻을 자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백라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고 있는 자휼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위험한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자례가 있는 동안만은. 석양이 깔리자 모두 말에 타고 작별인사를 했다. 어두워질 때 나갈 생각이었다. 자휼과 자례가 나란히 서 고개를 깊게 숙이며 정륜에게 배웅 인사를 했다. 그 모습을 보던 을노는 싱긋 웃었다. 아버지가 나가실 때 자신과 동생도 저렇게 인사를 했었다. 물론 자휼과 자례는 나이 차도 있고 해 할아버지를 배웅하는 아들과 손자의 모습이지만. “어이, 자례. 이거 받아라.” “?” 을노가 품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자례에게 던졌다. 작은 주머니였다. 무엇인가 궁금해 하는 표정을 짖자 자휼이 아우에게 다가와 왜 그러느냐 묻는다. 질투나네. 나도 저런 때가 있었지. 오래도록 그 우애를 챙겼으면 좋겠군. 을노는 자휼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럼 이만.” “살펴 가십시오.” 혈족들이 떠나자 자휼은 어린 동생을 바라보았다. 자례는 을노에게 받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입에 물고 우물거리고 있었다. 빤히 눈이 마주치자 자례는 입을 다물며 아무일 없다는 표정을 하다가 다시 내가 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다시 우물거린다. “ 뭔지는 몰라도 넌 함부로 먹으면 안 되는데?” “ ...말린 단과 석류에요. 형도 하나 먹어요? 자 입 벌려요.” “ 단과?” 여기선 단과는 자랄 수 없다는 생각이 스쳤지만 일단 입을 벌려 말린 석류를 하나 우물거리며 자휼은 자례를 데리고 성으로 향했다. 오늘은 일이 많았어. 노을도 내리니 쉬어도 될 시간이다. “오래간만에 먹어보는 단과 석류구나.” “응. 맛있어요.” “근데 왜 그걸 너에게 주고 갔지? 산과지만 우리 정원에도 석류나무가 가득 있잖아?” “산과라는 것을 알고 있던걸요. 먹지 말라고...” “...먹지 말라고?” 잠시 침묵이 흘렸다. 언제나 행동이 재빠른 것은 자례였다. 자례는 냅다 성안으로 뛰어들어갔고 그 뒤를 화가 난 자휼이 따라 뛰었다. “내 그렇게 덜 익은 석류 먹지 말라했는데! 거기 못서니 자례!” “100보도 안된다는 형이 나쁜거라구요!” “너 몇 개나 먹었어!” “하나도 먹지 못했어요!” 저녁을 지어올리는 시종이 의아하게 천장을 바라본다. 또 성주님과 군승님이 나비 잡기라도 하시나. 9 산의 새벽은 춥지만 따뜻한 술과 수많은 화로에 괴롭지 않다. 오히려 사냥을 나온것인지 술을 먹으러 나온것인지 모르게 점심부터 계속 술만 마시고 있다. 스스로 자신이 한심해 지며 커다랗게 나온 배와 살찐 허벅지를 바라보자 자괴감이 떠오르지만 이미 자신의 나이가 60이 넘었다는 것을 떠올리면 그리 나쁜 것 같지 않다. 앞에 앉은 새로운 첩이 술을 따른다. 붉게 물들인 손이 움질일때마다 어째서 핏자국처럼 보이는지 알수 없다. “안타까운 일이도다.” 황제는 혀를 찼다. “체이첸이 조금만 더 용감했으면, 레이첸이 조금만 총명했으면. 치첸이 조금만 자애로웠다면 짐의 이런 고민 따위 할 필요가 있었을까?” “너무 심려하지 마시옵소서.” 갖은 아양을 떠는 새 후궁이 너무도 귀여웠지만 한편으로는 지긋지긋했다. 갑자기 홀로 남고 싶은 생각에 황제는 손을 저어 자신의 막사에서 후궁이 나가도록 했다. 왜 이런 것일까. 지금의 황비들도 분명 한때는 사랑했기에 황비의 자리에 올렸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많은 후궁들을 거느리게 되었을까.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육체의 쾌락을 위해 밤을 보내게 되었을까.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이 옳다고 여긴적은 없었다. 하지만 나쁘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무릇 이나라에서는 천자에게 126명의 처첩을 가질수있다고 전하고 있다. 황후, 부인, 세부, 빈을 제외한 처첩의 수만 126명이다. 그러니 자신의 행동이 잘못된것은 아니다라고 여겼다. 게다가 내가 원한다면 누구라도 날 거부하지 않았다. 당연히 내가 황제이니 누가 날 거부하겠는가. ... 단 한명만 빼고. “...이름이 해루였지.” 오래간만에 술잔을 홀로 기울이며 황제는 기억속의 누군가를 떠올렸다. 술잔은 넘치는데 그 위로 나오는 김에 하얀 옷자락이 아른 거리는 것 같아 그만두지 못한다. 이름내린 부인들의 얼굴도 가물가물한데 20여년전의 그의 얼굴은 너무도 또렷하게 기억난다. 길고 찰랑이는 검은 머리, 하얀 머리띠를 따라가면 귀에는 옥과 금꽃의 귀걸이가 있었다. 그가 움직일때마다 짤랑거렸지. 고개를 돌리면 하얀 목선위로 보이는 검은 눈동자의 얼굴. 나를 보면 항상 어두워지던 표정. 그래 지독히도 내게 웃어준적이 없었지. 아니 딱 한번 있었군. 황제는 홧김에 술을 들이켰다. 하지만 취해지지도 않는다. 정찰 나가서 만난 정안족이였다. 그때 자신은 황제가 아니었다. 완안부의 왕이라고는 하나 당시 여진을 억누르던 요에 복속된 장군일 뿐. 그는 송나라의 관직에 있는 사내였다. 나는 내가 사는 완안부를 넓히고자 하는 욕심에 그의 성에 들어갔다가 잡혔다. 송나라와 요가 대립한 그때 그는 자신을 죽일수도 있었지만 초원으로 돌려보냈다. 생명의 은인이란 게 그런 거겠지. 그는 다시 돌아오지 말라 하였다. 하지만 그때 , 달을 등지고 서있는 그의 모습이 너무도 고고해 보여 나도 모르게 계속 뒤를 돌아보았다. ... 가지고 싶다. 그래서 난 완안부를 내것으로 만들었다. 요나라가 송과 대립하고 있는 것을 이용해 그의 성을 치고 소망했던 그를 잡아들여 억지로 범했다. 그때 그의 나이가 20정도였을 것이다. 나는 막 첫 왕자를 얻었을 때니 한25세 정도인가. 호화로운 침상의 등과 화분이 모조리 부서지는 싸움이 있었다. 엄청난 저항이였지. 황제는 이마의, 이제는 거의 안보이는 긴 흉터자국을 매만졌다. 왕이 되고 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입은 이 상처는 그가 낸 것이였다. 장수였다면 아마도 날 죽였을지도 몰랐다. 다행인지 그는 그저 책을 좋아하는 공자였기 때문에 간단하게 제압할수 있었다. 혀를 베어물까 두려워 천을 물리며 혼자만의 충족감에 날을 지세웠던 밤. “젊었지...” 황제는 웃었다. 정말로 아름다운 사내였다. 하지만 여인처럼 곱상하거나 여리여리한 것이 절대 아니었다. 계속 들어오는 한족출신의 첩과의 밤도 즐거웠지만 항상 마지막은 그를 찾게 되었다. 처음에는 미안함이 있었다. 잘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여진족을 몰아내고 황제가 되었다. 황제는 후계를 봐야 한다는 법도에 따라 그를 황비로 들인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 하였지만 황비보다도 더 훌륭한 궁전. 옷. 금은보화 ,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진귀한 것이면 무엇이든 모든 그에게 주며 내게 마음을 돌려주길 바랬다. 하지만 그는 웃어주지 않았다. 사소한 틈만 생기면 그는 궁을 탈출했고 그때마다 그를 잡아와 그의 다리에 족쇄를 채우며 묘한 희열을 느끼게 되었다. 내 것이다. 네 모든 것은 내 것이야. 그 고고한 이마가 찌푸려지며 자신을 받아들이는 고통에 정신을 잃는 것이 수없이 되풀이 될수록 그를 향한 욕망은 늘어만 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내가 원했던 것은 그의 몸이 아니였다. 나는 그의 모든 것을 가지고 싶었던 것이다. 그의 고귀함. 인자함. 웃음. 편안함을, 그의 모든 것을 내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였다. 내게 말을 하는 법도 내게 시선을 마주쳐 주는 일도없는 그의 마음을 어떻게 내 품안으로 끌어온다는 것일까. 나는 방황했다. 거대한 대륙의 주인이 되어도 끝내 가질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느끼고는 절망했다. 그는 손목을 그었고 목을 매달았다. 혀를 물기도 하고 독을 삼키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반드시 그를 살려내었다. 이렇게 보내줄수 없다.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하지만 만신창이가 되어가는 그를 바라보는 내 심정도 참담했다. -뭐든지 해줄수 있다. 어째서 날 원하지 않는거냐! 하지만 날 돌아보는 적이 없던 그 고매한 눈. 그의 눈에는 항상 이젠 없는 자신의 가족과 고향 생각 뿐이였다. 어느날 품어도 품어도 다른 곳에 가있는 듯한 그의 눈에 나는 처음으로 그에게 살의를 느꼈다. 어딜보고 있는것일까. 지금 이렇게 내 품에 안겨있으면서도 어딜 보고 있는것일까. 난 못한다. 널 누구에게도 줄수 없다. 그렇게 다른 곳을 꿈꾼다면 그것이 실현되기 전에 죽여버리겠다. 이 이상 누구의 것도 될 수 없도록. 검을 들었지만 차라리 죽이라는 듯 고개를 숙이는 그를 차마 내리칠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가 돌아갈수 있는 곳을 없앴다. 흥료성을 불태우며 내가 바랬던 것은 그들의 복종이 아닌 그의 고립이였다. “망할 놈들, 그렇다고 다 죽어버릴 것은 또 뭐냐.” 부복하라는 명령에 빤히 그 검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사천 여명의 생존자들. 하나같이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 하얀 얼굴, 마치 까마귀인 나 혼자 백로의 무리속에 뛰어들어 난동을 피우는 느낌이 들었다. 반면에 가슴두근거림도 느꼈다. 그래. 내게 무릎을 꿇어라. 800년이 넘는 긴 세월동안 모두가 바라보았던 그 고고한 백로의 조아림을 받는 것은 너희들이 초원의 들개라고 부르는 바로 나다! 하지만 아무도 부복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 죽였다. 마지막으로 죽었던 것은 조그만 소녀였다. 부들 부들 떨면서도 고개숙이지 않던 조그만 아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차라리 미쳐버려라! 그 소녀의 머리를 궁안으로 가져와 그에게 던졌다. 흥료성을 공성한 이야기와 싸그리 죽여버렸다는 것도 일러주었다. 마지막 잘라진 목이 바로 그 목이라는 것도. 그는 미치지 않았다. 소리없이 눈물만 흘렸다. 하지만 그 후로는 품어도 반항하지 않았다. 비단옷을 입었고 식사를 거르지도 않았으며 내게 술을 따랐다. 만족한 나는 그에게 묶어두었던 족쇄를 풀어주었다. 나는 그를 길들이고 싶었다. 내게 복종하면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싶었다. 그리고 그가 길들여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족쇄를 풀어준 날 그는 내게 안긴 후 처음으로 나에게 웃어주었다. 그리고 그 날 그는 뛰어내렸다. 채챙! “어째서?! 뭐가 잘못된 거였지?!” 황제는 술잔을 던졌다. 나는 그를 사랑했다. 그런데 왜 그는 날 사랑하지 않았던 것일까? 나는 그를 너무도 사랑했다. 그리고 지금도 사랑하고 있다. “지독해. 정말 지독해.” “시끄럽다.” “형 때문에 내가 제명에 죽지 못할 거예요. 먹은걸 다 토하게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러니까 가라앉게 이거나 먹으래도!” “...쌀 냄새가 구역질납니다.” 자휼은 화난 표정을 지으며 손에 들었던 미음을 침상 옆 탁자에 올려놓았다. 대신 약대접을 들었다. 자례는 누워서 이불을 코까지 덥고 눈을 감고 있지만 곁눈질로 자신이 약대접을 든 것을 보았을 것이다. 그래. 네가 정 안 먹겠다는 거지. “그러니까 설익은 석류를 누가 먹으라 하더냐!” “... 이젠 안 먹을테니...약은 조금 나중에...” “정말로 화내기 전에 먹거라.” “...오늘 속이 너...” “입 벌리지 못해!” 탕! 소리를 내며 일어선 자휼이 자례의 어깨를 끌어당겨 일으켰다.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키는 자례를 외면하며 약이 든 대접을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약을 안먹은지 얼마나 되었더라. 의원의 말로는 어제만 걸렀다고 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 왕자의 방문을 알리는 전서가 왔을때부터 자례에게 쓴 냄새가 가시는 것을 느꼈으니까. 나도 이러고 싶지 않다. 하지만 속이 아프다는 핑계로 계속 약을 안 먹는 것을 두고 볼 수도 없는 일이였다. 미움을 받더라도 네게 약을 먹이는 게 중요하다. 아무런 짓도 하지 않고 네가 그냥 망자의 산으로 떠난다면 난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테니까. 잡은 어깨가 떨고 있는 것을 애써 무시하며 자휼은 동생을 노려보았다. “혀..형?” “아이처럼 칭얼대지 마라! 입 벌려!” “나..나 정말 지금 속이 안 좋아...저...정말이...읍” 자휼은 난폭하다 싶을 만큼 약을 강제로 입에 들이부었지만 버둥대는 자례의 손에 대접은 침상 밑으로 떨어져 산산이 부셔져 버렸다. “자례...” 수하, 자례는 몸을 웅크리며 침상구석으로 물러났다.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자휼과 눈이 마주칠까 두려워 눈을 꼭 감은 체 귀를 막고 있었다. 그 옛날 어린 아우에게 화를 내면 그 날 저녁 방 구석에서 꼭 저렇게 앉아 울고 있었다. 그때는 우는 모습이 한심하다며 화를 내었었다. 그래. 결국은 또 상처 입힌 것인가.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자휼은 다시 약을 따랐다. 구석에 몰린 동생을 누르고 약을 눈앞에 들이밀었다. “ 아침까지 멀쩡했던 속이 왜 약을 먹을 때만 속을 썩인단 말이냐!" “..형. 나 정말로...” “자례! 제발 그만해라!” 힘들다. 왜 이 아이는 내맘을 몰라준단 말인가. 난 더 이상 나쁜 형이 되고 싶지 않다. 그러니 네가 져다오. 내가 더 이상 널 상처입히지 않게. 자례는 그 새까만 눈으로 자휼를 잠시 바라보더니 곧 몸을 추스르며 약대접을 건네받았다. 그제야 자휼은 한숨을 쉬며 침상에 걸터앉았다. 걱정된 것뿐이었다. 며칠째 동생이 약을 먹지 않는 것을 알고 있었다. 스스로 몸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자휼은 알고 있었다. 약이 독해서 먹으면 반나절 이상 잠에 취해 있는 것이 보통이였다. 그것을 싫어하는 것이다. 자휼도 힘없이 누워있는 자례를 보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 하지만 약을 먹지 않으면 병이 좋아지지 않는다. 산과 석류는 일시적으로 통증을 진정시키나 병에는 전혀 효과가 없다. 자례는 설익은 석류를 먹으면 탈이 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일시적으로 통증이 진정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래서 화를 안낼수가 없다. “자례야?.” 최대한 부드럽게 아우를 재촉하자 자례는 하얀 대접에 담긴 약을 묵묵히 바라보더니 천천히 다 마셨다. 너무 천천히 마셔서 보고 있는 내가 쓸 정도였다. 빈 대접을 내려놓고 몇 번 헛구역질을 하던 아이는 재빠르게 누워 등을돌려 눈을 감는다. “..저 졸려요.” “그래.” “나가실거죠?” “그게 좋다면.” 자휼은 자례를 눕히고 다독였다. 자례는 힘없이 웃어보였다. “네가 미워서 그런 것은 아니다.” “알고 있어요.” 자례는 심호흡을 하며 눈을 떴다. 붉게 충혈된 눈이 보기 싫다. 벌써 잠이 오는지 흐릿해진 시선이 자조적으로 웃는 것 같다. “약...당연히 먹어야죠, 부담 갖지 마세요.” “그래. 고맙구나. 잘 자라. 저녁에 들리마.” 자휼은 휘장을 걷고 나왔다. 힘이 다 빠지는 느낌이었다. 오늘 공무가 다 끝나면 의원을 만나야...하지만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기전 옆방으로 들어가는 의원과 마주친다. “성주님.” “...안 그래도 만나보려고 했소.” 백발의 한족 노인이 고개를 숙였다. “요즘 아우가 어떻소?” “수하님께서 치료에 많이 협조해주십니다. 곧 차도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만...” “...다만?” “약이 매우 독한지 미음을 넘기는 것조차 힘들어 하시는 데다가 오늘 아침에 심한 위통을 호소하셔서...” 탕캉! 손에서 하얀 대접이 굴러 떨어졌다. “성주님?” “...” “성주님? 왜 그러십니까?” -약...당연히 먹어야죠, 부담 갖지 마세요― 나는 도대체 10년 전과 뭐가 달라진 것일까. 여전히 나는 그 아이에게 호된 형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일까. 나는 언제까지 널 상처입히게 될까. -- 단설의 역주는 인용과 부분별 개인견해가 들어간 글입니다.(맹신(盟信)당황. 도용씁쓸)-- 주:황제의 총인(寵人) 황제의 비는 후라고 하고, 제후의 아내는 부인이라고 하며, 대부의 아내는 유인이라 하고, 선비의 아내는 부인이라 하며, 서인의 아내는 처라고 한다. 황제에게는 후, 부인, 세부, 빈, 처, 첩이 있다. 공후에게는 부인, 세부, 처, 첩이 있다. 이런 기록에 의거하면, 천자는 126명, 제후는 아홉 명의 처첩을 가질 수 있으며, 대부는 일처 이첩만을 소유할 수 있었다. 물론 여기에 남총이나 연동은 포함되지 않는다. 당시 중국의 혼인 풍습에서 알수 있듯 여인은 하나의 재산이였으며 남편의 권위에 걸맞게 치장되어지고 살아갔다. 그녀들은 후계자를 낳음으로 해서 자신의 재산적 가치를 높였으나 연동이나 남총은 후계를 낳을수 없었기에 재산적가치를 두기 어려웠다. 연동일 경우 추해지면 내쳐지기 쉽상이였고 남총인 경우는 헤어져 다시 자신의 일에 몰두해서 살아갔다. 참고로 당시 혼인 제도는 전방제(남편이 죽을 경우 그 형제에게 재가) 양첩제(언니가 시집가면 여동생이 첩으로 따라가는 것, 아가씨가 시집가면 몸종이 첩으로 따라가는 것) 이 있었다.이때 양첩제의 둘째 신부(잉, 이라고 칭했다)인 잉은 첩으로 세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상 황제에겐 252명의 정식 처첩이 있었다는 것이다. 10 탱탱하게 활시위를 당겨 달리던 노루를 향해 날린다. 빗나가는 법 없이 잔인한 소리를 내며 박히는 과녁을 보고 묘하게 기분 좋아진 레이첸은 다시 말에 올라 사라진 노루를 향해 뛰어갔다. 나무사이를 돌아 덤풀속으로 사라진 발자국을 찾아 말에서 내리고 덤풀을 걷자 등을 올리고 노루에 뽑힌 활을 뽑는 사내가 보인다. “듣던 대로 훌륭한 솜씨요. 4왕자.” “...” 흩뿌리는 화살은 자신과 그 놈의 화살이다. 마지막 화살을 날린 것은 저놈인가. 건방진 놈이군. 레이첸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말을 돌렸다. 설명대로라 하면 저 놈이 내 친 동생인 것이 분명한데 어쩌면 저렇게 정나미 떨어지는 놈일까. 자신의 붉은 머리도 특이하다고 생각했지만 저 놈의 금발도 유별나다는 생각을 하면서 레이첸은 새 사냥감을 찾아 천천히 말을 몰았다. 얼마 가지도 않아 등뒤로 말이 걷는 소리가 들리며 5왕자 친첸이 말한다. “이런. 형님은 이 아우가 맘에 안 드는 모양이요?” “활과 검을 다루는 것이 썩 마음에 든다.” 무뚝뚝하게 레이첸이 대꾸했다. “하지만 네놈은 맘에 안든다.” “저런. 난 형님이 꽤 맘에 들었는데.” “따라오면 벤다.” “...어련하실까.” 친첸이 등 뒤에서 웃는 것이 느껴졌다. 레이첸은 등뒤의 오싹함을 느꼈다. 검의 강함이 무서운 것이 아니었다. 기분 나쁜 분위기가 흐르는 놈이었다. 마치 이 쪽이 무슨 생각을 하는 지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저 눈동자. 밝은 갈색에 가까운 눈동자가 가느다랗게 자신을 노려보는 착각이 든다. “...최악의 사냥이군.” 레이첸은 창을 어깨에 걸쳤다. 갑자기 숲에 자란 나무가 감옥처럼 느껴졌다. 초원을 달리고 싶은 욕망에 레이첸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답답하다. 왜 이리 답답한거냐. “보시오 형님. 오늘 저녁은 내 막사에서 연회가 있으니 참석해주시오” “...” “먼저 가오. 기다리겠소.” 친첸은 말을 돌려 반대 방향으로 사라졌다. 말발굽소리가 사라지자 고개를 돌려 그놈이 사라진 방향을 노려본다. 뛰어난 놈인 것은 분명했다. 검으로 싸우면 누가 이길지 자신도 가늠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그 눈동자.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기분 나쁜 밝은 갈색의 눈동자. 애써 고개를 흔들어 그 눈길을 지워본다. 바스락. 눈앞에 흔들리는 덤풀을 창으로 반사적으로 올려 베어버린다. 뒤로 물러나기전에 눈위에 피를 뿌리며 쓰러지는 것은 아직 어린 노루다. 반점조차 생기지 않은 어린 노루. 과하게 휘두른 창에 베어지기 보다는 으스러져 보기 딱할정도이다. 금방 따뜻한 피가 마른 땅에 퍼진다. 붉다. 레이첸은 무심코 그 붉어진 피가 묻은 흙을 한웅큼 손으로 쥐었다. 따뜻하다. 손가락 사이로 가늘게 흘러 후두둑 떨어지는 그것을 가만히 바라본다. 그리고 아름답지. 그 이상으로 시끄럽고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도성도 이렇게 해가 지면 조용해 진다. 낮과는 너무나 상반된 이 거리는 으스스할 정도이다. 도성의 북문에 위치한 작은 기방에서 낮게 흐르는 여인이 흐느껴 우는 듯한 소리가 울린다. 조용한 거리를 휘감는 흐느낌을 따위 아랑곳 하지 않는 취객과 호객을 하는 여인이 걸어다닌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하류사는 맞은편의 거문고를 연주해주는 여인에게 웃었다. “경국지색 하나 건지면 좋겠는데 말이야.” “무슨 소리를 그렇게 하십니까?”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며 자홍이 술대를 멈춘다. 그녀는 한족의 여인이지만 비파를 타지 않고 술대를 들어 거문고를 타는 기생이였다. 하류사는 그녀의 소리를 매우 좋아했다. 그다지 잘타는 것은 아니였지만 모국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 중 하나였다. . 자신을 모시는 여관도 명악(明樂)이라 하나 여관에게 노래를 들려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여관은 악사가 아니니까. “네가 너무 아름답다고 하였다.” “어머나, 거짓말도 잘하셔라!” “그리고 네 소리도 아름답다고 생각했지. 그녀는 기분이 좋은지 하류사에게 다가와 술을 따랐다. 하지만 그는 먹지는 않고 내려놓는다. 자홍은 자주 찾아오는 한량을 바라본다. 잘생긴 얼굴. 게다가 기루에 출입하기엔 부담스러울듯한 고귀한 품성. 기방의 여인인 자신에게도 무례하지 않다. 그것이 조금 섭섭했다. 그는 내 소리를 듣기위해 올뿐 그 이상의 것을 위해 오진 않는다. 이사람이라면 손님이 아닌 연인으로써 지내고 싶었다. 하지만 감히 풍류쪽으로 시작한 자신이 따를 만한 사내가 아니라는 것은 느끼고 있었다. 이쪽에서 일하는 여인들은 사내보는 눈하나는 어느 명문가의 중매장이보다 정확한 법이다. 자홍은 좀 쓸쓸하게 한량에게 다가갔다. “오래간만에 오셔서 투정이라도 부리고 싶지만... 사실 자홍은 안심입니다.” “...무슨 일이 있었나?” “아휴, 한 미친 여진인이 관리의 딸들을 이곳으로 끌고 와 범했지 뭡니까. 게다가 그 여진인이 떠난 후에 누군가 들어와 그 아가씨들을 다 죽여 버리고 도망쳤어요.” “저런.” “한동안 얼마나 무서웠는지...죽은 딸의 관리들이 경을 칠 것 같았지만 그렇지도 않더라고요. 아마도 그 여진인이 중요한 관직에라도 있는 것인지?” “... 붉은 머리 여진인이던가?” “어머나! 어떻게 아십니까?” 그녀는 거문고의 술대를 머리에 찔러 넣었다. “붉은 머리의 여진이더랍니다. 기골이 장대해서 장군이라 생각하지요.” “..흐흠.” 그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가시려고요? 벌써?” “네 거문고 소리를 들으러 온 것이니 목적은 달성한 듯싶다.” “공자는 정말 매력 없는 분입니다.” “네 거문고 소리는 정말 매력 넘치는구나.” 하류사는 싱긋 웃고는 방을 나갔다. 홀로 남겨진 자홍은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기방을 나온 하류사는 조용하고 어두운 거리를 천천히 걸어갔다. 한명. 한명만 있으면 된다. 황제가 반할만한 그런 미인이라면 ... “제 2의 초선이 필요하다...” 하류사가 중얼거렸다. 황실은 아직 태조인 아골타가 잡고 있다. 하지만 아골타의 나이도 60이 되어가니 얼마 있지 않아 태자가 정해질 것이다 모든 것은 2왕자 체이첸을 죽이면 일은 간단하게 끝난다. 체이첸이 죽으면 3왕자인 태천이 반기를 일으킬 것이다. 황제는 그것을 4황자 레이첸에게 위임할 것이고 정세로 보아선 레이첸이 태천을 죽일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황제와 4왕자 레이첸 5왕자 치첸이다. “황제가 동탁이고 레이첸이 여포인가...” 일이 뜻대로 된다면 레이첸이 황제를 죽일 것이다. 이일로 레이첸은 역적으로 몰리고 그 일을 수습하는 일에는 치첸이 중심이 되겠지. 둘은 막상막하라 어느 편이 이기던 우리 쪽에서는 수월해진다. “...하지만 일단은 꿈인가.” 60이나 먹은 아골타는 아직도 죽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아직도 그 강한 힘을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은 그가 흔들릴때부터 시작되는 것인데. 하류사는 오래간만에 달을 바라보았다. 언제여야 내 고국에서 달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일까. 이국의 달은 무서울 정도로 차갑기만 했다. 을노가 목주의 병사에게 동전을 던졌다. “잠시 후에 돌아올거요. 그때까지 살펴주시오.” 병사들이 고개를 끄덕이자 넷은 목주의 성안으로 들어갔다. 목래의 주(州)인 목주는 거리상의 이유도 있겠지만 생활 방식으로도 차이가 심했다. 지방성인 목래는 거란과 여진에 밀려난 한족들이 많았고 지방주인 목주는 거란과 여진인들이 많았다. 여진과 거란의 거칠고 활기찬 습성이 목주의 성에도 배어버린 듯 조용한 목래와는 전혀 다른 성안의 모습이 보였다. “자자. 일단 식사부터 하고요. 그렇죠? 백라님?” “그랬으면 좋겠소 예사. 배가 고파 죽겠군요." 보통 여행자들이 처음 들어오는 동문으로는 숙식업이 발달하고 나가는 북문쪽으로는 풍류업이 발달한다. 서쪽과 남쪽은 주민들이 주거한다. 목씨 정륜의 안내로 곧장 동문의 길을 들어선 일행은 두리번 거리며 문패를 확인했다. “저기.” 정륜이 가리킨 문패는 토렴(土斂:땅에서 수확) 이라고 적힌 곳이였다. 예사와 백라가 반색하며 들어갔고 정륜이 따라들어가려다가 멍하니 있는 을노를 건들였다. “무슨 생각합니까. 장군?” “아, 예. 그냥 잠시...” 을노는 겸연쩍게 웃다 진지하게 목씨 정륜에게 말했다. “두 형제가 부러워 자꾸 머릿속에 남는군요.” “하하, 내 평생의 보물이지요.” 목씨 정륜은 만족스럽게 웃었지만 안색은 어두웠다. 넷이 들어가자 곧 종업원이 다가와 자리는 내주었다. 내민 주문표에 정륜은 단지 4라는 글자만 적어 주었다. 종업원이 돌아가고 나자 을노가 물었다. “ 안색이 않좋으십니다?” “...아이들 걱정이 되는군요.다 큰 아이들이지만...” “그러고 보니 자례군은 가슴을 앓는 것이 아닌가 했습니다만.” 잠자코 듣고 있던 백라가 끼어들었다. “좌보님의 말씀이 맞소.” “그렇다면 힘들겠군요.” “...그렇겠지요.” 백라는 안되었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내심 기쁘기도 했다. 동생이 죽으면 형은 자유롭게 되는 것인가. 그렇다면 좋은 장수를 얻을 일이니 기쁜 일이지. “...나쁜 놈.” “뭐라고 하셨어요? 아저씨?” “아무 말도 안했다.” 혈족의 슬픔을 바라는 우두머리라니. 이 얼마나 비참한가. 백라는 마음속으로 자례와 자휼에게 미안하다고 만 번을 외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조금 후에 나온 음식에 입을 다물었다. 신선로에 하얀 쌀밥이였다. 근처의 손님들이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생 채소를 기름에 볶지 않고 뜨거운 물을 풀어먹는 이상한 놈들이다. 하지만 간만에 본 제대로 된 음식에 넷은 아무말 없이 먹는것에 열중했다. 자휼은 신경질적으로 두 팔을 벌렸다. 시종이 가슴에 보자를 달아준다. 평소에 입지 않던 착수통신(窄袖筒身)의 금의 관복을 입으려니 몸이 불편해 자꾸만 뒤척이자 애써 단 보자가 떨어져 다시 달아야 한다. 게다가 관모를 쓰려면 머리를 올려야 하는데 자휼은 이것은 끔찍하게 싫어했다. 그동안 풀고 다녔던 버릇도 있겠지만 머리를 올리면 마치 자신이 장가를 고른 것 같은 느낌에 알수 없는 부담감이 들었다. -하지만 금의 관복은 송의 그것보다 단순하잖아요? 분명 자례의 말이 맞긴 한데 역시 이런 것은 불편하다. 새벽부터 시종과 끙끙거리며 관복을 정식으로 입은 자휼은 서둘러 하늘을 바라보았다. 역시 시간이 조금 남는다. 자휼은 이곳 저곳 몸이 조이는 느낌을 애써 털어보며 발소리가 나게 복도를 뛰어갔다. 그 놈 고집대로 문까지 때어버리고 걸은 휘장을 거칠게 걷자 의원이 고개를 돌린다. "아우는?" "잠드셨습니다." 침대 쪽의 반투명한 휘장을 걷자 정말로 눈을 감고 누워있는 동생의 모습에 다시 휘장을 내린다. "... 어제..는 괜찮았나?" "...이상하게 책사님이 약을 드셨더군요." 의원은 알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뜨끔한 것을 느끼며 다시 물었다. "...괜찮았나?" "...괜찮았습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자휼을 의원은 외면했다. 자휼은 머뭇머뭇거리며 침상에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하다 결국 일어섰다. "난 15왕자를 대접해야하네. 잘 돌봐주게" “군승님은 마중을 안나가십니까?” “내가 알아서 할것이니 그냥 자게 나둬.” 자휼이 나가자 의원은 탕약기에 부채질을 하며 중얼거렸다. "나가셨습니다.." “...그럼 난 오늘 안나가도 되는거군.” 휘장안에서 부스럭거리며 자례가 중얼거린다. “정말 안나가실겁니까?” “안나가는 것이..우욱!” 밤새 토악질을 하던 병자가 다시 헛구역질을 하자 의원은 얼른 문을 열었다. 토할 것도 없으니 헛구역질을 하는 것 같은데 그 원인이 문닫힌 방안에 가득한 약냄새라니, 이해하기 어렵다. 이 약을 다리는 이유는 가슴을 뜨겁게 하고 몸의... “못나가는 거지. 그보다 약좀 내려놓아라.” “...예.” 의원은 얼른 탕약기에서 약을 내려놓았다. 안그러면 바로 죽을 것 같다는 표정을 하는 병자에게 고집은 죽음이다. 성문에서 자휼은 자신의 몸에 밴 익숙해질만 하지만 전혀 그렇지 못하는 지독한 약 냄새를 털어내었다. 한족 의원이 지은 약은 계속 독해지는 듯하다. 성을 비울 수 있다면 정안족의 의원을 찾아보련만. 물론 지금의 의원도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그것이 별 효과가 없다는 것은 의원도, 자휼도 자례도 다 알고 있었다. 자례가 약을 마신다는 것으로 위안을 받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지만 그렇다고 이 일을 그만둘 수는 없었다. “오시는 길이 험하셨습니다. 왕자전하.목래 태수 율도입니다.” “목래성주의 환대에 감사하오.” 쉬첸은 생각보다 젊은 성주를 바라보았다. 당연히 부복할줄 알았던 그는 단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마주잡아 목까지 올려 고개를 간단히 숙이는 것이었다. 처음엔 그가 자신을 얕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여 기분이 안 좋았지만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 보이는 까만 눈동자에 그가 정안족의 피가 흐른다는 것을 눈치 챘다. 정안족은 다른 왕족에게 부복하지 않는 민족이었다. 쉬첸은 흥료성의 전투가 떠올랐다. 들은 바에 따르면 황제는 흥료성에 살아남은 정안족 4천여 명에게 '황제의 앞에 부복하면 살려준다.'라고 했다. 하지만 흥료성은 전멸 당했다. 단 한명도 부복한 사람이없다고 하는데 정말 분통 터지는 일이 였을것이다. 이 일로 완고했던 황제도 남아있는 정안족 관리들이 자신에게 부복하는 것을 포기했다. 물론 그 대신 그들은 지방관리로 도성에서 쫓겨나야 했지만. 결국 그들은 왕성에도 출입금지되었다. 쉬첸은 유심히 성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잘나지 않은 얼굴. 검은 눈동자가 아니면 한족 같은 분위기일 것 같았다. 고집세 보이지도 않는다. 그냥 평범한 장수 같다. 단지 그의 몸에 흐르는 정안족의 피가 그를 특별하게 만들고 있는 것일까. 문득 그가 홀로 서있는 것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성은 태수와 군승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던가?. “...군승은 어디로?” “...그는 병으로 시달려 차마 이 자리에 나오지 못했습니다.” “...저런. 태수가 걱정이 심하시겠소.” 쉬첸은 정말로 안 되다 표정을 지었지만 자휼은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았다. 구릿빛 피부의 자신보다 어린 여진 왕자를 위해 연회를 열었다. 하지만 머릿속으로는 아직도 자례의 약에 대한 생각이 가득 찼다. 왕자를 마중나온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도 같은 생각일것이다. 수확기라 한참 바쁠터이데 이렇게 불러내어 마중을 나오게 하는 일은 좋을 것이 없다. 게다가 의례적인 연회에 나온 무희와 악사들은 모두 민간인들이다. 이 기회를 좋게 생각하는 자도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뚱한 얼굴에 자휼은 쉬첸이 느끼지 못하게 중얼거렸다. 이런 연회 따위 빨리 끝내버렸으면 좋겠다. -- 단설의 역주는 인용과 부분별 개인견해가 들어간 글입니다.(맹신(盟信)당황. 도용씁쓸)-- 주:토렴(순우리말)밥이나 국수에 뜨거운 국물을 여러 차례 부었다 따랐다 하여 덥게함. 여기서 쓰인 한자 토렴(土斂:땅에서 수확)은 음만 따온 것이다. 정안족(발해유민)은 거란(요)여진(금)에게 계속 간섭받아야 하는 입장이였다.특히 부흥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정안인들은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뭉치게 된다. 그들이 한족사이에서 혈족간에 사용한 암호는 순고어를 한자로 음역한 문패로 서로간의 교류를 통하게 되는데 토렴같은 단순한 여관부터 경당의 역활을 하는 대장간 모도리(조금도 빈틈이 없는 아주 야무진 사람. ) 자객을 양성하는 개힘(본래 있는 힘이 아니고, 분위기나 기분에 휩쓸려서 일시적으로 나는 힘. ) 왕씨의 은신처를 뜻하는 흰두루 (성산(聖山) 백두. 금국은 영응산(靈應山이라 불렸다.) 등이 있다. 주:보자(補字)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옷 중앙에 있는 흉배를 이르는 말이다. 청나라시대의 관원 복장을 떠올리면 쉽다. 청의 복식 내용은 아래와 같다. 남자복식도 만주족과 한족의 복식이 함께 혼용되었는데 청대의 남자복식은 포(袍), 마괘(馬?), 오(?), 마갑(馬甲), 삼(衫), 고(袴)를 입었다. 모든 복식은 소매를 좁게 하고 몸통도 불필요한 여분을 착수통신(窄袖筒身)으로 만들었다. 이것은 주로 광활한 대륙의 기마생활에 편리하게 정착된 양식으로 볼 수 있다. 의금은 단추로 매게 되었고, 령구는 무령에다 령의를 더하는 식으로 변하였다. 청대에는 일상복에 직접 방형 또는 원형을 상의에 수놓는 특별한 보자의 양식을 취하였는데 이것은 보복(補服)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붙이는 보자의 양식은 명대의 것과는 차이가 있다. 보복은 청대 관복 중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포보다 약간 짧으며 대금, 수단이 평평한 것으로 앞에 보를 수놓은 것이었다. 즉 신당서(新唐書)와 남아있는 고분 벽화로 볼 수 있는 고구려, 발해의 의복은 넒은 소매자락 저고리(대수삼) 넓은 통의 바지(대구고) 등 통이 넒은 옷임으로 정안인은 금복을 입기 힘들었을 것이다. 왕은 오채복을 착용하였으며, 관인은 대수삼(大袖衫), 대구고(大口袴)를 입었고, 서인은 갈의(褐衣)를 입었으며, 부인은 군유(裙 )를 입었다고 기록되었다. 저고리는 직령 통수이며 허리띠로 둘러 여몄으며 깃과 소매끝, 도련 등에 선을 댔고, 바지는 통이 넓은 바지와 좁은 바지가 있었으며 대개는 바지부리를 묶었다. 평상시에는 유, 고, 상을 입었으며 의례시나 나들이때는 포를 입었다. 고구려 초기의 복식은 수(繡), 금(錦)으로 장식하고 대가주부(大加主簿)는 뒤가 없는 책을 쓰고 소가(小加)는 절풍변을 썼다고 한다. 귀인의 관은 골소다(骨蘇多)라고 하여 자라(紫羅)로 만들고 금은으로 장식하였으며 그 의복은 큰 소매의 삼(衫)에 대구고(大口袴)를 입고 피대(皮帶)를 매고 황혁리(黃革履)를 신었다고 한다. 또 부인 군유의 가장자리에는 선을 둘렀다. 하지만 신당서는 고구려를 고려로 적어 놓고 있고 고구려를 중국사로 넣은 예의 역사 위조 책중 하나이기 대문에 모두 믿을수는 없다 여긴다. 우리에게 삼국의 의복을 정확히 알려주는 것은 역시 고분 벽화일 것이다. 11 저녁 늦도록 아래층의 홀은 시끄러웠다. 연회가 안끝나고 있는 것이다. 자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침대 천장에 그려진 푸른 도깨비들을 바라보았다. 시끄러워서 잠이 오지 않는 것이 아니다. 지독한 냄새도 아까부터 열어놓은 창으로 다 나갔다. 갑자기 벌떡 일어나 입을 가리고 침대밑으로 고개를 숙인다. 행여 소리가 새어나갈까봐 소리죽여 속을 비워내지만 입에서 손으로 묻어나오는 것은 새빨간 핏덩이다. 피를 토한적은 있지만 핏덩이가 나온적은 없어 스스로 놀래하며 의원을 바라보자 의원은 딱하다는 듯 조용하게 말한다. “그동안 약을 안드셨기 때문에 가슴에 고인 피가 굳어버린겁니다.” “...더 나빠졌단 말인가?” “...약을 드십시오.” 의원이 옆방에서 다린 약을 따라 가져온다. 약대접을 받아든 병자는 그 쓴 향에 역시 몇 번더 헛구역질을 하면서도 먹어보려 시도를 해보나 역시 다 게워내고 만다. “다시...!” “됐다. 날 더 이상 괴롭히지 마라.” 속을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에 의원은 시종에게 문을 열라 손짓했다. 문을 열자마자 찬 새벽바람이 하얗게 방안으로 들어온다. 조금은 역겨운 약 냄새가 가시는 듯한 느낌에 자례는 정신이 조금 돌아오는 것만 같았다. 의원이 자신의 짐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물에 풀었다. “이걸 드십시오.” “...이게 뭐지?” “잠이 들게 하는 약입니다.” 잠시 고민하던 자례는 그 약을 마셨다. 쓰긴 하지만 항상 마시던 약에 비하면 달기까지하고 한가지 풀의 쓴맛이라 견딜만 하다. 마시자 알딸딸하게 입이 써지면서 눈앞이 아른 아른하다. 이게 무슨 약이라고? 의원에게 묻기 전에 졸린 것과는 다르게 잠이 와버려 눈을 감아버린다. 긴 연회가 끝나자 자신은 태수의 성 반대편에 있는 별채로 안내되었다. 작지만 깨끗한, 사실 왕궁에 비하면 초라한 방안에 옷을 벗고 누웠던 쉬첸은 창문사이로 들어오는 초원의 상쾌한 풀냄새에 성벽위로 나갔다. 따라오는 시종을 물리치고 한가하게 저 먼 초지를 바라본다. “목래는 좋은 곳이군. “ 성벽 밑으로 펼쳐진 거대한 목초지는 겨울이 오고 있는 지금도 매우 푸르다. 말을 키우는 곳이어서 그런가. 내려가 말을 내달려보고 싶은 욕망이 들게 한다. 도성과는 색다른 까만 밤하늘이 너무도 마음에 든다. “...?” 어디선가 속을 자극하는 짙은 풀냄새에 쉬첸은 고개를 들어 바람을 살폈다. 정면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쓰디 쓴 풀냄새가 실려 온다. 앞을 내어다 보니 맞은편의 등이 켜진 태수의 성이 보인다. 쉬첸은 잠시 고민했다. 나는 엄연히 이곳의 손님이다. 새벽 3시가 넘은 지금 불쑥 태수의 성에 들어가 본다면 좀 그렇겠지? 고개를 돌리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려던 쉬첸은 잠시후에 슬금 슬금 태수의 성쪽으로 향했다. 쓴 향이 뭔가 그리웠다. 자신의 어머니인 계후, 흠헌황후(欽憲皇后)는 매우 병약했다. 그래서 그녀의 곁에는 항상 쓴향이 감돌았다. 황제는 그런 어머니의 쓴향을 싫어했다. 그래서 그녀는 쓸쓸하게 죽어갔다. 그녀의 곁에 마지막까지 있었던 것은 아들인 자신뿐이였다. 활짝 피었을때는 그리 총애를 받아 계후까지 올랐던 여인이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왕의 총애에서 벗어난 어머니. 그것이 황제의 총인의 운명이라고는 하나 쉬첸에게는 큰 상처로 자리잡고 있었다. 성벽으로 들어간 태수의 성은 3층이였다. 위 아래를 번갈아보던 쉬첸은 그대로 3층의 방안을 살펴보았다. 점점 더 그 쓴향이 짙어진다. 조금 앞의 복도에서 누군가 휘장을 걷고 나온다. 의원인가. 약상자를 들고 있다. 쉬첸이 앞으로 나서자 의원은 자지라지게 놀란다. “누..누구요?! 이런 밤에!” “아, 난...뭘 그리 놀래는건가?” 쉬첸이 의원이 놀라 떨어뜨린 약상자를 주어올리며 중얼거린다. 의원이 성을 내며 흩어진 약을 주어모은다. 할수 없이 쉬첸도 몇 개 주어 주다 이상한 말린 쥐꼬리 같은 것을 줍는다. 이건 낯익은데. 눈을 가늘게 뜨고 기억을 더듬어보지만 의원이 냉큼 그것을 빼와 화를 낸다. “함부로 만지지마시오.” “아...그거 아는 건데...어디서 봤더라...그래. 그거 노박아니던가? 노박 나무 뿌리 말린거. 그렇지?” “다..당신 의원이요?” “아니 왕자.” 더 놀래하는 의원에게 쉬첸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누가 죽어가나?” 노박나무뿌리는 강한 마취효과가 있었다. 큰 상처로 천천히 죽어가는 자에게 죽음의 고통을 잊기 위해서 먹이는 약이기도 하다. 단지 구토를 없애는 증상으로 노박을 사용하는 것은 대단치 않은 일이였지만 노박의 뿌리만 사용한다는 것은 매우 조심할 일이였다. 노박의 뿌리는 마약의 해독으로도 쓰였다. 특히 양귀비로 만든 마약에 잘 들어 노박의 뿌리는 양귀비의 해약이라 불릴 정도다. “아니면 이곳 성의 누가 마약을 하나?” “절대 아닙니다!” 마약은 나라의 법으로 사형이다. 자지러지게 놀라는 의원의 시선을 따라가자 누군가 조용하게 둘을 바라보고 있다. “잠을 깨웠소 태수?” “이런 야밤에 주무시지 않고 여기서 무슨 볼일이십니까 왕자전하?” 자휼이 다가왔다. 자다가 일어난 듯 대강 입은 포 밑으로 보이는 속옷이 정안족의 옷이라 그의 느낌이 새롭다. “아니, 호기로운 것이 보여 그냥 묻고 있었을뿐이야.” “그는 군승의 의원입니다. 어떤 점이 의심가셨습니까?” “...군승의 의원이라고? 군승이 아프다고 했는데 마약을 하나?” “예?” 이번엔 자휼이 놀랐다. 저 표정은 거짓이 아닌데. 그리고 옆에서 발발 떨고 있는 의원도 거짓이 아니다. 쉬첸은 어깨를 으쓱했다. 자휼은 잠들어있는 동생의 머리를 높게 올려주었다. 이렇게 하면 마취에서 빨리 깨어난다고 한다. 의학에 전혀 지식이 없는 자신으로는 믿는 수밖에. “가슴병에는 양귀비가 들어가. 그래서 해약인 노박도 들어가는 거지. 의원이 잘못한 것은 아니군.” “군승님이 하도 괴로워 하셔서 ...마약보다는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자휼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자는 건지, 아님 마취되서 잠이 들어버린 건지, 분간이 안되는 동생의 얼굴을 쓰다듬다가 울컥 화가 치밀어 벌떡 일어나 의원을 노려본다. 하지만 왕자가 옆에 있어 성질대로 화를 낼수도 없어 그냥 조용히 노려보기만 한다. “...이건가?” 쉬첸이 따라져 있는 약대접을 들어 한모금 머금었다가 바로 뱉어낸다. “쓰군. 한족의 약은 모든 것을 다 넣으니까 그럴만 하지. 가슴병에는 정안의 민간요법이 명을 늘리는데 도움이 된다. 태수는 정안족이지? 그런데 왜...” “태수의 신분으로 이곳을 떠날 수 없어 한족의 의술에 군승을 맡긴것입니다.” “그래. 그럼 내가 몇가지 알고 있는데 해볼텐가?” 예상밖의 쉬첸의 제안에 자휼이 고개를 돌리자 쉬첸은 자휼의 옆으로 들어가 누워있는 군승을 바라본다. 머리가 굉장히 짧군. 이런것은 처음 본다. 아프다고 들었지만 이정도인가. 군승이 이리 아프다면 태수로써 이것 저것 생각할 것이 많았을텐데 오늘 연회에서 웃기 힘들었겠는데 잘도 웃었군. 노련한 태수야. 남자치곤 꽤나 곱상하게 생겼군. 묘하게 사람을 끄는 얼굴이야. 쉬첸은 찬찬히 자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아 그래. 이게 내가 아는 정안족의 얼굴이다. 성주는 정안족이라 했지만 별로 아니다 싶은 이유가 있었어. 태수는 갈색 머리여서 그랬던거야. 새까만 머리. 하얀 얼굴. 쉬첸은 머릿속에서 뭔가 떠오를 듯 가물거렸다. 어머니가 말한 남총에 관한 이야기였다. 왕궁에 정안족이 한명 있었는데 굉장한 미남자였지. 오죽하면 황제가 그를 가리켜 침어낙안(浸魚落雁)의 용모요 폐월수화(閉月羞花)의 아름다움이 깃들었다며 총애했을까. 이름이 있었지만 성안 궁인들은 그를 수화(羞花)라고 불렸다.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 간택되어 방황하다 파멸을 맞은 귀비의 호칭이란다. 그 이름 그대로 그는 불행한 죽음으로 끝내었단다. 황제의 그 화려한 총애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알겠느냐 쉬첸? 사랑이란 두 사람의 마음이 하나같아야 된단다. 연리지(連理枝)도 같은 나무가 아니면 생길수 없고 비익조(比翼鳥)도 한쪽날개만 펄럭인다면 날지 못하지. “...각혈로 호흡이 거칠고 가슴이 황급하게 뛸때 말피가 좋다. 급히 토혈하면 각혈을 할 때 백급(白及), 지모(知母), 패모(貝母), 고반(枯礬 )을 섞고 여기에 생강가루를 5푼 정도 넣어서 두번에 나누어 먹으면 토혈이 진정된다. 장기적으로 마실 탕약은 차전자(車前子질경이의 씨)를 다려 차와 같이 자주 마시면 회복하는 일도 있지.” 놀래하는 의원과 자휼을 보며 쉬첸은 별거 아니라는 듯 중얼거렸다. “어머님이 이 병을 앓으셔서 정안의 의원을 만나적이 있었다.” 레이첸은 고개를 들었다. 막사안으로 시종들의 안내를 받아 들어오는 자는 처음보는 얼굴이였다. 한족도, 여진도 거란인도 아닌 것 같은 이상한자다. 날카로운 매눈이 검어 특이하게 생각이 든다. “5왕자께서 4왕자님을 초대하십니다.” 치첸의 수하인가. 하긴 그놈은 저 멀리 변방의 성에 가있다고 했으니 그의 수하는 내가 아는 자가 없는 것이 당연할지도. 그 놈의 재촉에 거절할까 생각했다가 태진도 안따라와 혼자서 술을 마셔야 한다는 것을 느끼고는 그냥 따라나섰다. 조금 한가한 곳에 세워진 막사의 휘장을 걷자 모두들 기다리고 있었는지 나를 바라본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막사 안에는 장수들이 있을거라 생각했지만 다들 황제의 아들들이였다. 치첸이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양보한다. 상석인 듯 모피가 깔려있는 그곳에 내가 털썩 앉고 주위를 둘려보자 아까 그 치첸의 수하가 술잔을 올린다. 내가 받기만 하고 옆에 치우자 치첸이 덧붙였다. “영남의 귀한 화주입니다. 사양 말고 드시지요.” 17살, 첫 사냥에서 잡았다는 하얀 늑대의 모피를 어깨에 걸친 치첸이 청동 잔을 높이 들었다. 좌중에 모인 형제들 중 손윗사람은 자신 뿐인 듯 다들 자신을 기다리는 표정에 할수없이 잔을 들었다. 다들 잔을 비우는데 레이첸은 이상하게도 앞에 있는 금발의 친동생에게 묘한 위압감을 느껴 그대로 잔을 내려놓고 만다. “레이첸 형님은 화주를 싫어하십니까?” 치첸이 옆으로 다가와 물었다. 빙긋 웃는 그 가는 눈에 또 기분이 이상하게 뒤틀린다. “그다지 오늘은 취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하긴 황제가 있는 자리에서 취할수 없는 일이죠. 안 그렇소. 형님?” 치첸이 낮게 웃었다. 좌중에 앉아있는 손아래 형제들을 내려보며 치첸이 말했다. “모두들 즐길 수 있을 때 즐겨두시오. 얼마 있지 않아 태양이 바뀌면 절로 들어가야 할지모르지 않소?” “뭐, 저희들은 높은 자리 따위 원하지 않습니다.” “높으신 전하들 중 한분이 되시겠지요.” “어찌되었던 저희는 절로 들어가지 않겠습니까?” 낮은 서열의 형제들이 한마디씩 하자 치첸이 빙긋 웃는다. “나라면 땅으로 보내줄텐데?” 가시 있는 말에 좌중이 조용해지지만 치첸이 빙긋 웃으며 술잔을 비웠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잔을 다시 채우며 레이첸에게 묻는다. “이 아우의 말에 형님은 어떻게 보시는가?” “그 태양을 내가 잡는다면 제일 먼저 널 땅속으로 넣어주마.” 레이첸은 벌떡 일어났다. 이런 자리 정말 불쾌했다. 태진에게는 황제가 못났다니 금방 죽을 노인이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자신의 아버지였고 황제였다. 자신은 공자, 맹자니 그런 선비사상 따위는 모르지만 최소한의, 인간으로써의 예는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비와 아들의 관계. 형과 아우의 관계. 남편과 부인과의 관계, 뭐 그런것들. 훌쩍 막사를 나가는 레이첸을 보고 치첸은 실소했다. 하지만 술잔을 내려놓고서 치첸은 그의 뒤를 따라 나갔다. 밤의 달은 시리다. 막사를 나와 따르는 자신의 수하들과 천천히 걷던 레이첸이 이제는 차가워지는 바람을 느끼고 있을 때 뒤따라온 치첸이 말을 걸었다. “황제를 믿는 거요?” “...” “형님은 참으로 단순한 사람이군. 가장 태양을 잡기 쉬운 위치에 서 있으면서 고작 생각하는 게 그런 것이요?” “물러들가라” 레이첸은 짜증을 내며 손을 저었다. 레이첸과 치첸의 수하들이 뒤로 물러나자 아무말없이 둘은 조금 걸어 그들과 떨어졌다. 말소리가 안들린다고 여길정도로 멀어지자 레이첸은 뒤를 돌아보았다. “너는 누구의 아들이냐? 너도 나도 황제의 아들 아니더냐? 네가 지금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느냐?” “아비를 내치고 일국의 지배자에 오르는 일에 대해 말하고 있는거요.” “ 네..” 반역이다. 라고 말하려던 레이첸은 그냥 말을 잘랐다. 화가 나는 것도 아니고 슬픔이 느껴지는 것도 아닌 너무나 당혹스러웠다. 이런 뻔뻔한 놈을 보았나. 자식이 아비를 내친다. 그 말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동생을 바라보며 레이첸은 그를 보았을 때 느낀 오싹함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짐작할 것 같았다. 그 능력과 실력에도 불구하고 변방으로 내쳐진 이유를 알아버린 것 같았다. “...그래도 내 아버지는 분명하다.” “아들의 여자를 탐내 아들을 죽이는 자가 어찌 아비라고 할 수 있소?” “....뭐?” “형님은 참으로 정직하시오.” 하얀 달빛을 등지고 웃는 치첸의 웃음소리는 오싹했다. “어떻게 변방으로 밀린 나보다 궁 안 사정을 이리 모른단 말이오? 정말로 관심이 없는 것이요? 정말로 일국을 손아귀에 쥐어보고 싶은 욕심 따위 없단 말이오?.” 치첸이 손을 펼쳐 달을 가렸다. 그의 손안에 달이 온전히 가려진다. “그렇다면 날 따르시오 형님.” “뭐?” “내가 만인지상의 자리에 앉게 도우시란 말이오.” “미친 놈.” 레이첸은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 이놈을 베어버릴까 생각했다. 하지만 치첸은 여유 있는 모습으로 레이첸을 내려보는 것이었다. “ 왜, 내 너무 큰 것을 욕심내는 것 같소?” “ 네 정말 자신의 분수를 모르고 날뛰는구나.” “ 그렇다면 형님은 다음 황제의 자리에 누굴 생각하고 있는것이요? 패기없는 2왕자요? 한족의 피가 흐르는 3왕자요? 아님 본인이요? 그것도 아니라면 저기 막사에 앉은 이름도 기억 안나는 왕자요?‘ “시끄럽다!” 레이첸은 화를 내며 치첸을 밀치자 멀리 떨어진 수하들이 놀라 달려온다. 하지만 상관 없다는 듯 치첸은 껄껄거리며 웃었다. “ 난 형님을 보호하려는 것이요.” “ 네 놈!” 기어이 화를 참지 못하고 레이첸은 치첸의 멱살을 쥐었다. “정말 죽고 싶어 안달하는구나. 내가 지금 여기서 널 죽인다 한들 누가 뭐라할까?” “...그렇게 황제를 위한다면 자결하는 것이 좋을 거요.” “뭐?!” “형님은 이용하기 쉬운 성격이요.” 빡! 레이첸은 있는 힘을 다해 친첸의 복부를 향해 한방 먹였다. 무슨 이따위 놈이 있단 말인가. 배를 쥐고 주저앉는 치첸을 레이첸은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정말로 속을 알 수 없는 놈이다. 예의 치첸의 수하가 그를 부축하고 자신을 말리는 수하들의 손을 뿌리치며 레이첸은 화를 삭이며 내뱉었다. “ 모든 것이 네 머릿속에서 이루어진다는 망상은 피하는 편이 목숨을 보전할 것이다.” 하지만 주저앉은 치첸은 희미하게 웃는 것 같아 등골이 오싹하다. -- 단설의 역주는 인용과 부분별 개인견해가 들어간 글입니다.(맹신(盟信)당황. 도용씁쓸)-- 주:노박나무-쌍떡잎식물 무환자나무목 노박덩굴과의 낙엽활엽 덩굴나무 모든 부분이 약재가 되며 가을과 이른봄에 채취한다. 뿌리 껍질은 마취 성질을 품고 있으며 아편 중독시 즙으로 내어 마시면 아편 중독이 되었을 때 그 독기를 풀어주어 중독증이 서서히 약화된다.해독작용이 있어서 몸 속의 독기운을 없애주는 구실을 한다(산야초동의보감) 주:흠헌황후(欽憲皇后) 금의 태조 아골타 의 두번째 계후로 여진족 출신의 여인 여기서 기록이 남은 왕비들의 계보를 밝힌다. 황후 : 성목황후 당괄씨(聖穆皇后 唐括氏) 계후 : 광의황후 배만씨(光懿皇后 裵滿氏) 제 2계후 : 흠헌황후 흘석렬씨(欽憲皇后 紇石烈氏) 서후 : 선헌황후 복산씨(宣憲皇后 僕散氏) 주:연리지(連理枝)뿌리는 다르게 솟았으나 둥치에서 합쳐져 한 그루로 된 나무.지극한 효성을 뜻하는 말로 쓰였지만 웃날 남녀간의 사랑을 뜻하는 말이 됨. 주:비익조(比翼鳥) 암컷은 오른쪽, 수컷은 왼쪽 날개밖에 없어 날려면 한 쌍이 반드시 몸을 붙이고 날개를 나란히 해야 한다는 상상의 새. 역시 남녀간의 사랑을 뜻함 주: 백급(白及),외떡잎식물 난초목 난초과의 여러해살이풀 지모(知母)외떡잎식물 백합목 지모과의 여러해살이풀, 패모(貝母)외떡잎식물 백합목 백합과의 여러해살이풀. 절패모라고도 한다. , 고반(枯礬 ) 명반을 가열하여 흰가루로 한 것 주:쉬첸의 처방에 대해. 위에 나온 처방은 진짜이다. 차전자(車前子) 차전자(질경이의 씨)를 한 줌 3홉의 물로 달여서 차대신에 평소에 마시면 병의 회복이 빠르다. 지혈(止血) 각혈을 할 때 백급(白及), 지모(知母), 패모(貝母), 고반(枯礬 )각 돈을 섞고 여기에 생강가루를 5푼정도 넣어서 두번에 나누어 먹는다. 12 아침일까. 눈을 떴을때는 천장에 그려진 푸른 도깨비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다시 눈을 감고 뜨자 정지해있는 그들이 보여 안심하고 몸을 천천히 일으킨다. 몸을 돌리자 방안은 비어있고 자신은 홀로 누워 있다. “...창문이?” 신기하게도 창문이 열려 있었다. 비단으로 덧대기는 했지만 열려있다는 사실에 감탄하며 자세히 들여다 본다. 항상 약 냄새를 맡아 가슴을 따뜻하게 해야한다던 의원의 말에 왔다 갔다 하며 애써 열어논 창문을 꼭꼭 닫아놓던 자휼과 시종들이 저렇게 해놓았을리가 없는데. 조금 차갑지만 상쾌한 초지의 향기를 맡으며 일어나기는 이곳으로 부임한 후 처음이였다. 두통으로 인해 잠시 침대맡에 몸을 기대었던 자례는 곧 정신을 차리고 옷장으로 다가가 관복을 꺼내었다. 왕자가 성내에 있으니 정안의 복장을 하고 돌아다니는 것은 안된다. 불안해 보이는 짧은 소매자락에 잠시 주저주저한다. 차라리 좀더 아프다하고 갈때까지 나가지 말면 안되나. 하지만 자휼은 마적부의 관리를 단 한번도 해본적이 없다. 결국 허리띠를 풀기 위해 몸을 일으키다가 이상한 점을 느낀다. 허리띠의 매는 방향이 반대다. 천천히 풀면서 확인하니 오른쪽이 위로 가는 것이 정방향인데 이것은 왼쪽이 위로 올라간 역방향이다. 성안에서 역방향을 고집하는 사람은 단한명이다. 아무리 말해도 고쳐지지 않는 자휼의 막무가내 식의 접기와 묶기. 묶는 것은 반드시 역방향으로, 접는 것은 전통의 방석접기가 아닌 한족의 정방향 접기와 방석접기를 합쳐 두루두루 말아버린다. 아무리 화를 내고 알려주어도 고쳐지지 않아 포기해버린 형의 버릇. “...형이 들어왔었나?‘ 그제서야 생각해보니 어제 허리띠를 풀고 잤는지 매고 잤는지 기억도 안난다. 근데 왜 자고 있는 사람의 허리띠를 묶은건가? 이상하다는 생각에 나가려고 했던 기분이 싹 사라진다. 다시 허리띠를 매고 주섬 주섬 침대로 걸어가 눕는다. 형이 알아서 하겠지. 난 모른다. 애써 생각을 지우며 비단을 덧댄 창문사이로 보이는 익어가고 있는 석류가 본다. 산과라 그냥 먹지는 못하겠지만 보고만 있어도 풍족해지는 느낌에 기분이 좋아졌다. 갑자기 누군가 휘장을 걷고 들어올때까지. “일어났나? 그런데 왜 아직 누워있지?” 들어온 여진인은 마치 자기 방인 듯 의자를 끌어다 침대로 다가왔다.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구릿빛의 피부. 여진의 옷과 머리. 15왕자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왜 왕자가 이곳으로 오는 거지? 일단 일어나 옷매무시를 정리하며 일어나 옆으로 비켜 앉는다. “...누구십니까?” “글쎄.” 짐짓 모르는 척 해보았다가 상대방도 거짓으로 나오자 한숨을 쉬었다. “...15왕자 전하시군요.” “흠. 빨리 맞추네.” 자례가 무릎을 꿇고 인사를 하자 쉬첸은 뚫어져라 자례의 눈을 바라본다. 검은 눈동자다. 역시.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 이게 정안족의 모습이지. 태수는 혼혈같단 말이야. “사람을 불러 처소로 모시게 하겠습니다.” 정중하지만 방에서 나가달라는 말에 쉬첸은 고개를 저었다. “태수는 몹시 바쁜 사람인가 보군. 아침 인사 때 보고 하루 종일 못 보았어. 목래를 구경하고 싶었는데 말이야. 이도저도 안 되니 자네라도 내 말상대를 해줘야겠어.” “사람을 불러 성내 안내를 시켜드리겠습니다.” “벌써 혼자 갔다 왔다.” 한동안 침묵이 흘렸다. 그리고 그 침묵은 상당히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서로 상대방이 부담스러운 단계를 넘어 신경 쓰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 원래 그렇게 말이 없나?‘ “ 제가 무엇을 해드릴까요?.” “ 흠. 글쎄. 지금부터 생각해 보지. 옛날 이야기를 듣기엔 너무 컸고. 저녁시간은 아직 좀더 기다려야 하고...” 쉬첸이 의자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다과나 할까?” 어떻게 사양할까라고 생각하는 자례에게 쉬첸이 먼저 말한다. “사양도 지나치면 무례다.” “옷을 갈아입고 들리겠습니다..” “그냥 포만 걸치고 가자. 난 의례적인 것을 무시할 생각은 없지만 좋아하는 편도 아니거든.” 쉬첸이 씨익 웃어보였다. 그 웃음이 너무도 정직해 자례는 빤히 바라보았다. 이 사람 여진인인데도 불구하고 참 맑게 웃어주는구나. “왜? 내 얼굴에 뭐라도?” “아뇨. 실례했습니다.” “내 얼굴을 보며 욕할 정도는 못된다 너도.” “예?” “너 눈썹이 치켜 올랐던 것이 여우 같았거든 하하하!” 왕자의 무례하다 싶은 말장난에 잠시 벙하게 있던 자례는 불끈 오기가 솟았다. “그렇군요. 저도 전하를 처음 뵙고는 천장의 그림들이 내려온 줄 알았습니다.” 냉큼 말하고 일어나 포를 걸친다. 먼저 일어나 휘장을 걷고 나간다. 쉬첸은 따라 나가려다가 천장의 그림이란 말에 천장을 바라보지만 그림이 아닌 격살무늬가 짜 있을 뿐이다. 이상한 놈이네. 아니면 내가 저 바둑판처럼 생겼단 건가? 쉬첸은 어리둥절하며 방을 나갔다. 성벽에서 군승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냥 나오라고 했지만 먼저 나가 옷을 갈아입은 모양이였다. 왕궁안에서 태어나 자란 쉬첸에게는 그 모습이 굉장히 낯설었다. 손이 안보이게 긴 소매자락이 성벽의 바람에 날린다. 저러면 손을 어떻게 쓰는지 궁금할정도이다. 안의 포는 허리를 죄어 입지만 밖의 포는 허리를 풀어 놓아 입었다. 밖의 포는 땅에 끌릴정도이고 안의 포는 무릎아래까지 온다. 안은 순백으로 검은 허리띠를 매고 밖은 화려한 문양을 넣어 짙은 색의 단을 깊게 넣는다. 포를 보아서는 여인의 복장인지 사내의 복장인지 구분이 조차 안간다. 게다가 풀어헤친 머리에 하얀 머리띠를 했는데 그것은 상(喪:제사)을 당한 자들이 하는 것이 아닌가. 고개를 돌리는 귀에 부담스러울 정도로 화려한 금꽃과 푸른 곡옥의 귀걸이가 카라랑하고 작은 새소리를 낸다. 이해할수 없다. “옷이 특이하군.” “...정안족을 처음 보십니까 왕자 전하께선?” “그래. 처음이지.” “태수님도 정안족입니다.” “태수는 관복을 입고 날 만나니까. 아무튼 남자도 치마를 입는다니 신기한데.” “저희는 긴저고리라고 합니다만.” “그것 입고 뛸수는 있나? 손을 어떻게 쓰지? 머리띠는 상을 당할때나 하는 것 아닌가?” 자례는 그냥 약간 웃으며 입을 다물었다. 호기심 많은 왕자의 질문에 일일이 대답하다간 오늘 하루내내 그에게 잡혀 있을지도 모르니까. 별채로 두 사람이 들어오자 시종이 놀라며 일어났다. 쉬첸은 방안으로 들어가 침상에 걸터 앉고 자례는 탁자의 의자에 앉았다. “다과를 준비할까요?” “어...” 쉬첸은 기지개를 피다가 문득 눈을 뜨고 뭔가를 알아버렸다. 어라. 빙글, 재빠르게 바로 앉으며 웃는다. “아니. 내가 가져온 과자를 먹고 싶은데?” “...?” 왠지 심술굿은 미소에 자례는 미심적은 듯 인상을 찌푸렸지만 쉬첸은 탁자에 작은 상자를 내려놓았다. 예쁜 상자라 자례는 상자를 보며 꽃을 밖아 만든 화전이나 색을 입힌 떡이라고 생각했으나 쉬첸이 상자를 열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게 다 뭐지. 하얗고 노랗고 다들 길고 구불구불한 , 마치 벌래나 지렁이 같은 모양이다. 냄새도 마음에 안들어 고개를 돌리고 헛기침을 해보였다. 아침을 안먹어 배는 고프긴 한데 이걸 먹느니 차라리 굶는게 좋겠어. 자례가 생각하는 것을 눈치 챈 듯 쉬첸이 말했다. “호밀과 양의 토라크(torak?)를 묻혀 만든 것이지 벌레같이 생겼지? 하지만 맛은 좋다고.건강에도 좋아.” "토라크? 타락을 말하는 것입니까?" "타락은 잘 모르겠는데." 정말 무슨 애벌레 같이 생긴 과자군. 먹고 싶지 않아. 정말이야. 절대 안 먹어. 하지만 빤히 자신을 보는 쉬첸의 시선에 못 이겨 팔을 들었다. 소맷자락 끝을 다른 손으로 잡아 살짝 손가락만 나오게 한 후 머뭇거리다 집는다. 지독하게 먹기 싫은가 보네. 표정이 정말 재미있다. 독약이라도 삼키는 표정이다. “아!” “하하하! 좀 맵지? 하지만 익숙해지면 괜찮다고.” 얼굴이 빨게 져 차를 계속 삼키는 자례를 보며 쉬첸은 통쾌하게 웃었다. 너 날 놀렸어. 방안으로 돌아와 침대에 앉아 위를 바라보았을때 거기에 그려져 있는 것은 사천왕이였다. 험상궂고 돼지의 형상을 띤 도깨비 모양의 사천왕. -그렇군요. 저도 전하를 처음 뵙고는 천장의 그림들이 내려온줄 알았습니다. 그 말의 뜻은 이것을 말했던 것이다. 기지개를 피며 우연스럽게 바라본 천장의 그림에 당했다라는 느낌이 들어 순간적으로 복수할꺼리를 생각했던 것이였다. 얼마나 매운지 충혈 된 눈으로 자신의 방으로 가는 자례를 보며 조금 심했나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재미있었다. 껄껄거리며 웃는 왕자를 시종은 이상하게 바라보았지만 그 이후도 한참을 웃던 쉬첸은 조금 진정이 되자 병자에게 내가 너무 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내일은 사과해야지. “아, 일어났니? 너 몸은...” “...자..잠깐!” 자휼은 입을 막고 아래층으로 뛰어가 찬물을 찾는 동생을 어이없이 바라보았다. 한참 후 빨게진 얼굴로 올라온 동생은 마적부를 펼치고 마구마구 출자를 새겨넣어 대강대강 끝내보려는 모습이 역력했다. “왜 그러는 거니?” “어떤 말을 가지고 가든 알바 없어요.” 화가 난듯한 모습에 차마 어제밤 일을 말하지 못하고 자휼은 그냥 입을 다물었다. “어제 귀한 과자를 주셨으니 약소하지만 저도 다과를 준비했습니다." “...어.. 그런가?” 아침이 되어 자례의 방으로 갈 준비를 하고 있을 무렵 그가 직접 찾아왔다는 말을 듣고 놀랐다. 어제보다 혈색이 도는데다가 기분이 좋은지 싱긋 미소 진 얼굴로 인사하는 자례를 보며 쉬첸은 어제 일을 떠올렸다. 방심하면 안 되겠어. 자례가 가져온 과일은 연녹색의 사과 같은 과일이었다. 항상 잘 익은 과일을 봐오던 쉬첸에게는 설익어 보이는 그 푸른 과일이 매우 독특해 보였다. 많이 가져온 것도 아니고 단 두 개의 과실을 따로 접시에 담아 단도와 함께 자신과 쉬첸의 앞에 내려놓았다. 뭔가 정말 특별한 과일인가보군. 자례는 단도를 들어 과실이 반을 나누었다. 신기하게도 속은 새빨간 색이다. 보기에도 먹음직스럽다. 안에 들어있는 많은 씨를 정성스럽게 다 발라내는 모습을 보던 쉬첸은 웃음 지었다. 마치 새 색시가 생선이라도 발라주는 모습이군. 그러고 보니 오늘은 옷차림도 어제와는 달리 조금 밝아 보이는데. 연한 살구색 허리띠에 늘어뜨린 금꽃 장식이 움직임에 따라 짤랑이는 소리를 내었다. 소맷자락 끝에 감긴 단도 연한 살구색이다. 포라고 하는 치마처럼 긴 윗옷 가장자리에는 자신은 알수 없는 꽃 같은 것이 수놓아져져 있다. 짧은 머리지만 잘 빗어 하얀 머리띠로 넘겼다. 귀걸이도 했군. 역시 금꽃과 옥으로 된 것이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귀걸이와 허리장식의 금꽃이 옥에 부딪쳐 나는 소리가 음악같이 들린다. 즉 어떤 의미로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온 것 같군. 갑자기 쉬첸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앞으로 내준 과일의 정체가 의심스러워졌다. 쉬첸이 섣불리 과일에 손을 대지 못하는 것을 보고 자례가 의아하다는 눈으로 물었다. “왜, 그다지 과일은 즐기시지 아니하십니까?” “...그건 아니지만.” “그럼 도로 내어갈까요?” 쉬첸은 자신을 보는 자례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피하지 않는다. 젠장. 새까맣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뭔지는 모르지만 녀석 참 예쁜 눈을 가지고 있네. 좀더 마주보다간 홀려버리겠다. 쉬첸의 생각을 알았다는 듯 자례는 싱긋 웃으며 자신의 앞으로 놓인 조각낸 과일을 입에 넣었다. 아무렇지도 않는 표정. 표정을 주시해서 보는 쉬첸과 눈이 마주치자 생긋 웃어 보이기까지 한다. 아 모르겠다. 사실 보기에도 정말 맛난 과일 같다. 내가 너무 과잉 반응일지도. “...그럼.” 쉬첸은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 하나 집어 입에 쏙 넣었다. “...윽?” 쉬첸은 이틀내내 화장실 앞에서 살아야 했다. -- 단설의 역주는 인용과 부분별 개인견해가 들어간 글입니다.(맹신(盟信)당황. 도용씁쓸)-- 주:토라크(torak?) ‘말린 우유’라는 뜻의 몽골어 주 타락 토라크에서 나온 우유의 명칭 조선시대 왕이 먹는 음식중에 타락죽이란 말이 내려온다. (타락죽:곱게 갈아놓은 쌀에 물을 붓고 쑤다가 우유를 넣어 덩어리 없게 풀어 만든 것)우리나라에서는 삼국유사에 한우젖을 이용한 기록이 있고, 고려시대에는 국가의 상설기관으로 유우소가 설치되었다고 한다. 한우젖의 문화는 궁중이나 귀족문화권에 속한 것으로 보이며 매우 희귀한 것으로 쓰였다. 그때도 타락이라는 말을 사용한것은 알수 없지만 일단 우유라는 명칭의 가장 오래된 말이라 생각되어 사용하였다. 당시는 설탕이라는 것이 매우 귀한 것이였다. 아직도 목초지에 생활을 하는 족들은 우유에다가 매운 향료나 소금을 넣어 먹는 것이 전부였다. 북경의 요리를 떠올리면 쉬울 것이다. 북경은 요나라 유입이후 소수 민족의 요리를 많이 적용했다. 춥고 건조한 북방기후로 인한 고칼로리 음식이 발달했으며 튀김과 볶음요리가 주를 이루었기 때문에 찌고 삶는 것을 요리의 주 방법으로 삼았던 유민들에겐 적당하지 않았을 것이라 본다. 주: 자례의 머리에 대해, 신체발부 수지부모(身體髮膚 受之父母)가 유행처럼 버진것은 공자의 효경에서 비곳된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언제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이 효경을 중시 여겼던 것일까. 마치 유교 사상이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관념으로 생각하는 보수적 유교사상가들의 생각과는 달리 유교가 우리나라에 뿌리내리게 된것은 고작 17C~18C, 조선 후기에 예학이나 보학의 보급으로 인해서이다. 고려와 조선 초기만 하더라도 여성의 지위가 남성과 동일 했다. 신체발부 수지부모를 외우고 다니는 학자들은 미친 취급을 받았다는 것이다. 후기에 이르러 우리나라에 확립된 유교관은 공자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일명 할일없는 유교사학생들의 잘난척으로 발전해 버리고 만다. 중국 본토에서도 한국의 유교관념에 대해 전혀 이해를 못할 정도이니 그 어긋남이 심각하다 할수 있다. 결국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의 머리모양은 후기의 것으로 조선 초기까지 여인들에게 남아있는 머리모양은 1800여가지로 자르고 땋아내리거나 올려 묶는 수도 방법이 존재했고 그것이 전혀 별 다를 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중 우리가 알고 있는 단발은 삼국시대부터 유행한 머리모양으로 실제로 어린 아이들과 결혼을 하지 않는 미혼의 남녀사이에서 볼수 있었다. 여인과 사내 둘다 결혼을 하게 되면 머리를 올렸는데 사내는 이때를 위해 머리를 어깨까지 기르고 여인은 수건을 이용해 올려 기른다. 당시 중국은 사내는 머리를 올려 관모를, 여인은 오발선빈(烏髮蟬?)운계무환(雲?霧?) 의 미인을 중요시 여겼기에 정안의 풀어 내려 머리띠를 하는 것과 단발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였다. 13 새벽부터 목래는 시끌시끌했다. 왕자가 가지고 갈 말이 목래로 도착한 것이였다. 목주에서부터 말을 사온 자는 목래의 터주 장군인 손노였다. 노 장군이 피곤에 쌓여 말을 넘기고 돌아오자 자휼은 눈을 비비며 정신을 차렸다. “76, 77, 78...아, 방금 같이 들어갔나? 79인가?” “79,80,81,82, 됐습니다. 여기까지가 재공납될 말들입니다.” 자례가 붓을 들어 더 이상 말이 마굿간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다. 그리고 몇몇의 관리들과 함께 안장이 내려진 말허리에 먹으로 크게 공(貢)자와 붉은 주사로 목래(牧萊)라고 적어 어디서부터 보내진 말인지를 알린다. 국마(國馬)라는 표시를 하기 위해 긴 말꼬리를 절반으로 잘라버린다. 말굴레(馬勒마늑)으로 가죽을 쓰지 않고 색물을 들인 천으로 묶는다. 그렇게 단장된 말들은 한 마굿간으로 들어가며 마굿간의 문에는 노란 황지에 붉은 글자로 공봉(貢封)이라 적는다. 이후 말들은 약 한달간 다른 말들과는 달리 노동을 하지 않으며 달리는 연습을 시키고 마른 풀과 콩을 먹여 살을 찌운 후 왕성으로 보내진다. 공봉이라는 글자를 멋지게 휘날려 쓴 자례는 탁자에 엎어지듯 머리를 숙였다. 힘 빠지는 일이다. 몇 달전에 했던 일을 반복하는 것이 더 힘빠진다. 혈족에게 주는 말도 이렇게 안하는데 전혀 상관없는 밉상의 여진에게 주는 말에게 이렇게 해준다는 것이 사실 배아프다. 게다가 이번엔 두 번이다. 다시 일어날 생각을 안하는 자례를 툭툭치며 자휼은 웃었다. “수고했다. 우리 군승님.” “...그럼.”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손만 올린다. “상이라도 주셔야지요. 몇일간 호되게 일만한 군승은 포상휴가라도 얻고 싶습니다.” “오늘 약을 먹고 나온다면 말을 타고 가랑호수까지 나들이를 나가마.” “...생각해 보겠습니다.” 약과 나들이를 저울질하면 군승을 결국 몸을 일으켜 성안으로 들어간다. 자휼이 웃는다. “내가 말을 성문앞에 데리고 가 있으마.” 태수의 성으로 들어온 자례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침대 옆을 바라본다. 항상 그렇듯 거기엔 하얀 대접에 약이 담겨 있다. 대접을 들고 침대에 앉았다가 눈을 굴린다. 이거 안먹고 화분에 버리면 어떻게 될까나? 하지만 쓰게 웃고는 입을 대는데 뭔가 다르다. “...?” 쓴향이 옅어졌다. 약의 색도 매우 맑아져 마시기도 편하다. 이거 내 약이 아닌가? 두리번 거리며 따른 대접을 찾아보다가 아무것도 없음을 알고는 미심적어 하면서 다 마신다. 새로 지은 약인가. 먹기는 편하지만... 냉큼 마시고는 겉옷을 벗고 짧은 저고리를 덧입는다. 말이라. 정말 오래간만이군. 말을 키우는 곳의 군승이건만 이 외진곳에서 나가는 일이 드물어 말을 타는 일도 거의 없다. 차라리 전장을 떠돌아다니던 책사였을 때가 말을 타는 일이 많았다. 자례는 그것이 못마땅했다. 사내든 여인이든 정안인이라면 말을 타는 것을 즐겨야 한다 생각했다. 승마와 활과 춤은 사내의 도량이라고도 한다. 넓은 초지를 소유했던 과거는 사내와 여인 모두 승마에 길들게 했고 초지의 사냥은 활을 사용하게 만들었다. 매년 벌어지는 음력 10월에 하는 새밝춤(동맹東盟 고구려 제쳔의식)에 누가 성산의 단상에 올라 제사장인 왕씨와 춤을 추는 지, 그 날을 위해 춤을 연습하는 사내들은 드물지 않았다. 하지만 한족은 사내가 춤을 춘다는 것을 기괴하게 여겼기 때문에 정안의 사내들은 더 이상 모여서 춤을 추지 않았다. 어디선가 흥에 겨우면 쓸쓸히 달을 벗삼아 홀로 춤을 춘다. 아버지는 춤을 잘추던 '갈매달'이였고 어머니는 노래를 잘하던 '온녀'였다. 그들에게 태어난 자휼은 노래를 잘했고 자례는 춤을 잘추었다. 하지만 둘은 그것을 즐기지 못했다. 이상하게 바라보는 한족과 거란족의 눈길이 무섭기보다는 귀찮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둘은 자연스럽게 말타기에 열중하게 되었다. 하지만 자례의 몸이 나빠질수록 자휼은 말을 타는 것을 금지시켰고 자례에겐 너무도 심심한 하루하루가 가고 있었던 것이다. 무릎 위로 오는 짧은 저고리를 입고 바지 위를 검은 비단띠로 둘려 날리지 않게 단단히 매고는 성밖으로 나가자 자휼이 자신의 말인 흑염과 자례의 말 묵계를 데리고 기다리고 있었다. “너무 좋아하는구나.” “형은 이런 기분 모를걸요?” “무슨 말을 하는건가. 정안어인가?” 따각따각 뒤로 쉬첸이 나타나며 묻는다. 자례가 왜 왕자가 여기 있나는 식으로 자휼을 바라보자 그도 어깨를 으쓱한다. “난 밖에서 들어오는 길이지. 나가려는가?” “..잠시 초지를 둘러보러 가는 겁니다.” “그래?” 배탈에 시달린 쉬첸은 얼굴이 헬쓱하다. 자례는 짐짓 모르는 척 고개를 숙이지만 쉬첸은 마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속이 부글부글거렸다. 어렵게 씨익 웃으며 말을 건다. “군승도 나가나? 키가 작아 말을 못탈줄 알았는 데 낙마나 하지 마시게.” “황송합니다.” 가시돋힌 말을 딱 끊어버린다. 저 생긴 것보다 못난 놈 같으니. 쉬첸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시종과 도성쪽으로 들어가려다 문득 뒤를 돌아 본다. 군승과 태수가 그들만 알아들을수 있는 말로 웃으며 대화를 한다. 알수 없게 벨이 꼴리는 느낌을 받고 화가 나기 시작한다. 나는 그 고생을 했는데 너는 웃고 있어? 과격하게 말고삐를 잡아당기자 말이 뒷다리를 축으로 삼아 그 자리에서 둥글게 방향을 바꾼다. 그리고 전력 질주한다. 뭉개버릴까 보다. 자례가 돌진해 오는 말을 보고 놀라 몸을 움추린다. 자휼이 말을 돌려 재빠르게 앞을 막아서지만 아슬아슬하게 그 앞에서 쉬첸의 말은 허공으로 뛰어버린다. 힘있게 하늘로 뛰어들어간 말은 흑염과 묵계를 넘어 그 뒤로 얄밉도록 사뿐히 내려앉는다. 자휼은 놀라면서도 말을 다루는 쉬첸의 기술에 감탄했다. 하지만 쿵 하는 소리에 정신이 들어 바라보니 생애 최초로 낙마해버린 동생이 다리를 감싸고 인상을 쓴다. 당당하게 그 앞을 지나치며 왕자는 보란 듯이 키득거리며 웃는다. 자휼이 뭐라 하기도 전에 등을 돌리고 즐겁게 성으로 들어가려는 왕자를 보며 입술을 깨물던 아우는 소리없이 자신을 추어올리는 묵계의 얼굴을 쓰다듬어주고 손으로 왕자의 뒷모습을 가리킨다. 화난 주인의 표정에 묵계는 여지 없이 왕자의 뒤를 따라가 뒷발로 왕자의 말궁댕이를 힘껏 차버린다. “으악?!”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쉬첸 또한 낙마해 버린다. 어디 다치진 않았는지 씩씩거리며 일어난 쉬첸은 뒤를 돌아 말을 노려보지만 막상 사람이 안타고 있자 뒤를 바라본다. 하지만 자례는 기절했다는 듯 눈을 감고 일어나지 않는다. 자휼은 어설프게 웃었다. 이놈은 동물에게 사랑받는 놈이라고. 역시 묵계가 씩씩거리며 일어나는 왕자에게 머리로 돌진하자 도망가는 왕자의 소리에 기절한 척 하는 자례가 참을 수 없다는 듯 키득거리며 웃는다. 이번은 무승부다. 하지만 기분좋은 것도 잠시 낙마로 아픈 다리 때문에 취소된 나들이에 자례는 화를 내며 침대에 누워 이불을 머리끝까지 쓰고 저녁 내내 알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렸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자휼은 서고의 무너진 책걸이에 깔려있는 동생을 끄집어내며 말했다. 다친 구석은 안보인다. 좀 전에 왕자가 웃으며 서고를 빠져나가는 것을 보았다. 설마 그가 한건가. 하지만 동생은 잔 먼지에 기침을 하면서도 고개를 흔든다. 아니라는 건가. “꽤나 왕자와 친해진 듯싶구나?..어? 이거 무슨 상처니?” “그런 일이 있었어요.” 이마에 커다란 혹을 하나 달고 자례가 투덜거렸다. 이번엔 내가 당했다. 반격에 반격을 계속되는 신경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는 목래가 좋아 좀더 머문다고 했지만 사실 승부를 낸다는 치기로 이미 한달이 넘게 목래에서 지내고 있었다. 투덜거리면서 또 다른 생각에 잠기는 동생을 바라보며 자휼은 생각했다. 하지만 나쁘진 않아. 왕자는 생각보다 밝은 사람이었다. 아마도 권력에서 밀려난 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게다가 왕자는 자례의 약에 대한 고민을 덜어주고 있었다. 들리는 말에 따르자면 왕자의 생모가 가슴 병이 있어서 그 쪽에 대해서는 많이 알고 있는 듯 했다. 실제로 왕자가 처방해준 약을 먹는지 한달정도, 자례의 마른기침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어, 여기 있었군. 군승. 오늘 내 저녁식사에 초대해도 될까나?” “혼자 드십시오.” 다시 불쑥 나타난 왕자는 스스럼없이 동생에게 말을 건다. 항상 쌀쌀맞게 대하는 동생이지만 그것이 이 아이가 해주는 다정함이라고 느끼는 것은 나뿐일까. 이상한 감정이 든다. 조금은 쓸쓸해지는 것도 같고 안심이 되는 것도 같은 복잡한 감정. “그럼 지금 말 타고 한번 어때?” “사양합니다.” “그러지말고. 아니면 또 낙마할 것 같아 그러는거야?” “또 낙마할 줄 아십니까?” 지지 않겠다는 듯 허리띠를 졸라 매며 서고를 나가는 동생을 자휼은 복잡하게 미소 지었다. 이런 생각하면 좀 이상하겠지만 지금 이 느낌이 딸을 시집보내는 아비와 같은 마음이 아닐까 생각이 드는군. 광대한 초지는 말을 치기 때문인지 그다지 긴 풀이 나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말굽이 내리치는 땅마다 잔 먼지가 일어나며 마른풀이 뒤로 날린다. 흑갈색의 준마와 검정색의 명마가 초원을 달리고 있었다. 흑갈색의 말을 탄 적금발의 땋은 머리를 목에 감고 질주하는 자는 쉬첸이다. 말을 타는데 꽤나 익숙한지 아무렇지도 않게 자꾸 뒤를 돌아본다. 뒤를 따라오는 검은 말에 탄 사람의 사정은 그렇지 않다. 사색이 다 된 얼굴로 입술을 앙물고 달리고 있다. 하지만 곧 몸의 긴장을 풀면서 말의 고비를 늦추었다. 졌다. 자례는 기분이 쳐지는 것을 느끼고 힘을 풀었다. 저 덩치를 태우고 말은 힘들지도 않나 잘도 날아간다. 저만치 앞서가던 그가 허공을 향해 하하거리는 것이 보인다. 방정이다. 정말. 씩씩하게 다시 되돌아온 왕자는 신나 죽겠다는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 “그래도 오늘은 낙마는 안하는군. 늘었어.” “말을 놀라게 해서 낙마시킨 적이 없는 듯한 말투군요.” “간단한 묘기였다고. 말은 주인 따라 간다더니 둘 다 담이 없어서 놀라긴.” 하지만 쉬첸은 묵계에게서 거리를 두고 다니는 눈치였다. 하긴 말이 사람을 노리고 있다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뒷다리로 등이라도 치면 바로 등뼈가 아스라져 버릴텐데. 힝힝거리며 자신을 노려보는 묵계에게서 조금 떨어지며 쉬첸은 자례를 힐끔 보았다. 고집 센 저 놈은 내색은 안하지만 족히 두 시간을 달렸으니 속은 눕고 싶을 정도로 피곤해 할 것이다. “...쉬어갈까. 노을 구경도 할 겸.” “저녁식간에 가지 못하게 될 겁니다.” “뭐 어때?” 쉬첸은 이미 마음을 정했다는 듯이 말에서 내려 언덕위에 앉았다. 할 수 없다는 듯 자례도 말에서 내려 쉬첸의 뒤에 섰다. 얼마나 달려온 것인지 초지에 어울리지 않는 호수가 보인다. 앞에 보이는 갈대와 검은 물이 척 보기에도 깊어 보이는 호수다. "가랑(茄浪연줄기파도)호수. 목래의 중요 수원지입니다." "가랑이라. 이름 그대로 여름엔 이곳에 연꽃이 피나?" "예. 홍련이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지요." "왜 지금은 없지?" "연은 성안 주민들의 식량이 되니까요. 가을 추수가 끝나기 전에 호수의 연도 거두어들입니다." "아하. 아침 식사마다 나오는 연근말이군." 정치란 묘한 것이군. 이렇게 하나하나 식사꺼리까지 해결해야 한다니. 백성들이란 돌보아야 한다는 것인가. 어지간히 짜증나는 일이겠군. 장군들이 책사를 두는 이유를 알겠어. 그러고 보니 수하는 어느 정도의 책사일까? "넌 얼마나 뛰어난 군승이지?" "예?" "목래지휘가 수월하냐?" "...군승이 지휘라니...태수는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례가 눈을 깔며 시선을 회피했다. 하긴. 형이 장군이니 내림으로 해서 책사가 되었을지도 모르지. 혹시 기분 상하게 한것은 아닌지 모르겠군. 쉬첸은 자신의 옆을 가리켰다. “여기 와서 앉아라.” “안됩니다. ” “이런 벌판에서는 왕자든 황제든 그냥 사람일뿐이야.” “...” 몇번 더 계속 재촉하자 자례는 쉬첸의 옆으로 와서 앉았다. 역시나 멀리 떨어져서긴 하지만. “군승?” “예.” “이름은 뭐지?” “선율(仙聿)이라는 칭을 받았습니다.” “칭명 말고 네 본명.”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는 아이는 자신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여지 없이 드러낸다. 왜 이름을 묻는데? 하지만 그 끈질김에 진 자례가 말한다. “수하라고 합니다.” “수하라.” “이제 돌아가십시다.” “뭐가 그리 급하냐?” 자례는 몸을 일으켜 손짓으로 묵계를 불렸다. “빨리 돌아가지 않으면 다른이들에게 걱정을 끼치게 되고 성문을 폐문할 수가 없어 화적의 위험을 받습니다.” “거 참. 정말 냉냉할 정도로 정 떨어지는 이유구나.” 묵계가 완전히 다가오기 전에 얼른 일어나 물러나며 쉬첸이 말했다. “군승을 아끼는 태수의 눈치가 보여 나도 들어가련다. 너랑 다니면 뒷통수에 태수의 시선이 느껴 부담스러울 정도다. 태수는 널 무척이나 아끼는 모양이더구나?” “...혈육입니다.” “뭐?” “군승님과 저는 친혈육입니다.” 쉬첸의 경악스런 표정과는 달리 자례는 태평하게 말에 올라탔다. “잠깐! 정말인가? 정말이야? 그러니까 네 어미와 네 아비가 태수와 같다는 거냐?” “예.” “그런데 왜 그리 안닯았어?” 자례는 그말에 헛웃음을 지었다. 이 봐라 여진왕자야. 우리 형제가 닮던 안닮던 네가 신경쓸 문제가 아닌 듯 하다. 자례가 대답없이 말을 재촉하자 쉬첸은 따라 달리면서도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동안 태수가 보인 군승에 대한 지나친 관심과 배려는 둘이 친 형제라서 그렇다는 것인가. 하지만 전혀 안닮았다고. 이복형제도 아니고 친 형제란 말이지? “너 나 또 골탕먹이는거 아냐?!” 하지만 그는 눈을 치켜 떠 노려보기만 할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 -- 단설의 역주는 인용과 부분별 개인견해가 들어간 글입니다.(맹신(盟信)당황. 도용씁쓸)-- 주- 새밝춤=동맹東盟 고구려 제쳔의식 국사 시간이 모두들 배웠 듯 , 동이전(東夷傳)에 동이(東夷) 는 농사 절기에 하늘에 절을 하고 춤과 노래로 즐긴다. 이때 제천의식을 담당하는 제사장은 왕으로 제정일치의 부족사회의 모습이 나타난다. 제천의식은 크게 3가지로 나누는데 5월의 제천의식은 풍년을 기원하는 기원의 의미와 10월의 제천의식은 추수에 대한 감사의 의미를 나타낸다. 제천의식의 제사장이 왕인것을 본다면 왕과 관련된 커다란 행사에도 역시 동등한 의식이 거행되었을 것을 알수 있다. 이 경우 알린다는 뜻의 포고의 의미를 나타낸다. 기록상 남아있는 제천의식은 다음과 같다. 부여(夫餘) 영고(迎鼓, 마지굿) 은정월(殷正月, 음력 11월) 고구려(高句麗) 동맹(東盟, 새밝춤) 음력 10월 예(濊) 무천(舞天, 하늘춤) 음력 10월 삼한(三韓) 기풍제(祈豊祭)음력 5월 추수감사제(秋收感謝祭) 음력 10월 주:갈매달과 온녀:주몽이나 조의 선인처럼 춤을 잘추는 이와 노래를 잘부르는 이를 칭하는 이 소설 속의 가상 선인. 주몽이란 고구려의 태조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 '주몽'은 단지 활을 제일 잘쏘는 자의 칭호였다. 그런데 여기서 주몽(朱蒙)을 바로 풀이하면 붉은 옷을 입는 자라는 것인데 조의 선인의 검은 옷과 대립적인 것이 보인다. 그리고 나라의 색은 국색이지만 왕의 복식은 반드시 하얀 비단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당시 고구려를 지탱했던 5부 (절노부 순노부 소노부 계루부 관노부) 가 각각 부의 특징적 색을 지니고 있을 거라는 것을 염두하고 색을 정했다. 소노부:붉은색(고 왕씨족)-소노부는 전 왕씨족이다. 부족국가에서 활을 잘쏜다는 의미는 힘을 의미하기도 한다. 주몽이 아직 왕이 아니였을때 주몽이란 선인명이 있었기에 당시 왕씨 소노부가 붉은 색을 지녀 자신들의 권력을 나타내었다고 생각한다. 계루부:백색(왕씨족): 소노부에서 계루부로 왕씨의 자리가 교체된다. 계루부가 백색인 것은 왕복의 색을 그대로 적용한 것이다. 절노부:검정(왕비족): 왕씨족이 교체함에도 국색인 검은색은 변하지 않았다. 절노부는 당시 고추가로 불리는 왕비족으로 소노부 왕씨도, 계루부 왕씨에게도 권세를 누릴수 있었다. 부족국가는 모계사회로부터 시작한다. 변하지 않는 국색은 왕비족의 상징일것이다. 순노부:황색:순노부와 관노부는 오방색을 따라 맞추었다. 순노부가 황색이 된것은 당시 순노부의 터전은 대륙지역인 지금의 하얼빈과 창춘(지란성) 중간에 낀 지역이다. 땅을 상징하는 황색을 부여했다. 관노부:파란색. 관노부는 영역은 압록강의 하류인 살수와 패수 사이에 낀 지역으로 물을 상징하는 파란색이 잘 어울리게 되었다. 이것으로 아래와 같은 선인들의 명칭을 빼내었다. 주몽(주의 선인): 붉은 색:활 조몽(조의 선인): 검은 색:검 청몽(청의 선인): 푸른 색:춤 황몽(황의 선인): 노란 색:말 백몽(백의 선인): 하얀 색:신술,제사장,노래. 아래와 같이 고어를로 나타낼수 있는 것을 사용했다. 붉은색=고어/잇:잇꽃의 빨간 물감 검은색: 고어/ 매지: 매지구름(먹구름) 에서 따왔다. 푸른색:고어/진갈매:매우 짙은 검푸른색. 노란색=노랗다. 누렇다. 눌다. : 눋. 하얀색=고어/온:백색) 아래와 같이 정리했다. 주몽(주의 선인): 잇달/잇녀 조몽(조의 선인): 매지달/매지녀 청몽(청의 선인): 갈매달/갈매녀 황몽(황의 선인): 눋달 /눋녀 백몽(백의 선인): 온달/온녀 달과 녀는 아사달과 아사녀( 아무개남 아무개녀)에서 그대로 들여왔다. 14 찹, 차랍 차라랍, 하는 탈곡하는 소리가 성안과 밖을 채웠다. 얼마 되지 앉는 논도 아닌 밭에서 키운 쌀이지만 그래도 낟알 하나하나가 귀중하게 손과 손을 거쳐 수확해 간다. “장관이군.” 쉬첸은 성 안팎에 늘어선 두 손 가득 들고 들어오는 황금색의 벼들을 보며 감탄했다. 이런 광경은 처음이였다. 도성은 화려한 꽃으로 가득했지만 이렇게 황금 일색의 곡식과 초지의 풀들이 하늘에 날아올라 황금을 흩뿌리는 광경에 비교할 바가 아니였다. “목래는 초지로 경작지가 아닙니다. 이곳으로 오래 달려 동북에 있는 장강에 향하면 끝이 안보이는 곡창지대(지금의 장강중하류평원(長江中下流平原)가 나옵니다. 수백만석이 나오는 그곳의 추수행사의 모습이야말로 장관이라 할수 있지요.” 쉬첸의 뒤에서 성 아래의 추수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자휼이 말했다. “그런 곳도 있는가. 한번 가보고 싶군. 그보다 오늘은 수하의 모습이 안보이는데?” 자휼은 왕자의 입에서 동생의 호명이 나오자 잠시 놀란 눈을 했다. 하지만 곧 웃으며 대답한다. “오늘은 바쁠것입니다. 올해 수확한 이 쌀이 2만석이 넘지않으면 목래는 겨울을 버티기 힘듭니다. 군승은 그것을 확인할테니까요.” “이 작은 성에 2만석이라면 괜찮은 것이 아닌가?” “목래는 공납세를 말로 내어 다행히 쌀은 그대로 사용할수 있으나 초지인 이상 다른 성과는 많은 것을 사들입니다. 2만석은 적은 것이죠. 올해는 풍작이니 좋은 결과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만...이삭 하나에 죽고 살고 하는 시기가 있답니다.” 쉬첸은 갸웃했다. 다르구나. 뭔가 다르구나.나와 이 사람들은 별세계에 살고 있는 듯한 느낌에 잠시 외로워진다. 자휼이 다가온 관리와 다른 곳으로 가자 쉬첸은 이곳 저곳을 찾아헤메 커다란 쌀창고앞의 탁자에 뭔가 열심히 쓰는 자례를 발견했다. “어이.” 힐끔 왕자를 바라본 자례는 다시 고개를 돌린다. “아는 척도 안하는 거냐?” “오늘은 정말 바쁩니다. 불필요한 장난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한 두 가마니 틀어지는 것이 뭐 어때서 그래? “어림없는 소리!” 자례가 정말 화가 나는 듯 벌떡 일어났다. 그 사나운 표정에 쉬첸이 움찔 물러난다. “겨울나기를 한번이라도 해보신적이 있으십니까? 살을 깍아내리는 추위와 배고픔에 자식을 잡아먹는 것을 보신적 있으십니까? 계속되는 흉년에 흙을 물에 개워 마셔본적 있습니까?!” “...아..아니.” 촤르르륵 하는 맑은 소리가 울리며 하얀 옷자락이 획 가로로 휘저어 지자 책상에 세워져 있는 흑요석으로 만든 주판이 일렬로 늘어선다. 저게 뭔가 물어볼 세도 없이 화난 군승은 알을 튕긴다. “목래는 경작지의 6할을 주민들에게 돌려주고 4할을 주세(住稅:성안 세금)로 내니 2만석을 맞춘다 하더라도 8천석만이 목래의 세금으로 들어 올뿐입니다. 군봉(軍俸:군급)로 1할이 나가고 관봉(官俸관리급)2할이 나가고 성의 수리비용으로 1할이 나가고 공봉용 말을 먹일 풀과 콩, 관리비와 잡비로 1할이 또 나가니 남는 것은 4천석. 겨울을 나기 위한 땔감과 모피, 지붕을 수리할 나무와 약초는 그 가격으로 폭리를 취하는 상인이 없도록 태수관할로 지정해있는데 그것을 목주에서 사들이는 것이 도합 1만석!” 말소리에 따라 따닥따닥하는 돌소리가 요란해 정신이 어벙벙한 쉬첸에게 자례가 주판을 가리켜 보인다. 검은 알이 아닌 하얀 알이 두개가 올라와 있다. “결국 풍년이 들어도 2천석의 적자가 나는 재정입니다.” “...저..적자가 나면 어떻..” “목래는 목주 특세로 가구당 해를 걸러 망아지 한 마리를 거두니 그것이 4천석으로 매년 2천석이라 치고 겨울나기에 사용한 것의 절반인 오천석이 다시 들어오죠. 그럼 7천석이 되는데 이 중에서 신년행사와 말년 행사에 3천석씩 들어가고 국가의 축일에 보내는 공물로 매년 1만석 이상이 빠져나가야 하니 어찌 되었건 이겁니다.” 몇 번 더 따닥거린 주판은 9천석의 적자를 보여준다. 쉬첸은 이상하다는 듯 말한다. “주민들에게 주세를 더 걷으면 되잖아?” “다 굶겨 죽이란 이야기와 뭐가 다른지요?. 이곳은 농경지가 아니기 때문에 다른 곳 같이 4할만 돌려주어서는 살지 못합니다. 게다가 태수의 녹봉은 2천석이고 군승은 1천 5백석인데 그것조차 이년째 주세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럼 그 적자를 어떻게 감당해?” “연꽃과 향을 거래하지요.” 촤라락 다시 주판을 되돌린 자례는 왕자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허술하게 할수 없는 이유를 이해하시겠습니까?” “알았어. 하지만 여기 앉아 하는 것을 보아도 상관을 없겠지?” “편하실대로 하십시오.” 다시 머리를 뒤로 넘기며 들어오는 쌀과 내가는 쌀을 확인하는 모습을 바라본다. 인상을 스는 모습이 매섭지만 간혹 풀어지는 표정은 너무도 순해 자신도 모르게 웃고 만다. 두 얼굴을 가진 놈이군. 갑자기 누군가의 외침이 들리며 금싸라기 같은 벼의 잔풀들이 하늘로 날아올라가버린다. 초지의 모래 돌개다. 펄럭펄럭 거리는 목래의 깃소리가 요란하게 들린다. 팔로 눈을 가리고 잠시 모래바람이 거치길 기다리며 실눈을 뜨니 군승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이상하게 생각하고 눈을 크게 뜨니 그 자리에는 태수가 품안으로 군승을 끌어안아 모래바람에서 보호하고 있다. 휘몰아치는 모래 바람과 하늘로 오르는 금싸라기의 폭풍속에서 조용히 눈을 감고 어린 아우를 품안에 넣어 보호하는 태수와 가늘게 눈을 내리깐 품 안의 아우가 형의 팔에 두손을 올려 감싸 쥐는 모습에 쉬첸은 알수 없는 느낌을 받는다. 모르겠다. 이런 느낌. 모래바람이 체 가라앉기 전에 쉬첸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 잠깐 사이에 옷에 쌓인 모래와 풀잎을 털어내며 고개를 흔들지만 아까의 그 장면이 너무도 인상깊어 지워지지 않는다. 이상하게 눈물이 난다. “모래가 들어갔나...” 손으로 슥슥 문지르지만 이상하게 눈물이 나온다. 의미를 알지도 못하는 눈물이. “..이런 난처...” 왕씨가 숨어 살고 있는 화원에 들어온 백라는 어이없다는 듯 체 말을 잇지 않고 신경질적으로 부채질을 했다. “허허, 좌보님 진정하시오. 생각이 있으셨으니 그리하셨겠지요.” “세상에 어떤 왕이 적국의 병사로 들어간답니까!.” 목씨 정륜의 말에 백라는 꽥 소리 질렀다. 이 망할 왕, 이 철부지 왕씨 같으니라고. 어린 장군이 걱정되어 잠시 은신처를 비운 사이 이놈의 왕씨는 금나라의 병사로 들어갔던 것이다. 그것도 말단이다. “아이고 뒷목이야...” “앗 좌보님!” “아저씨!” 기어이 백라가 뒷목을 잡으며 휘청거렸고 상장군 예사와 장군 을노는 황급히 그를 잡아 눕혔다. 다행인지 목씨 정륜은 여관이 다른 방으로 모셔 쉬게 하였기 때문에 이 추태를 보이는 일은 없었다. 오늘 아침 드디어 도성으로 입성해 한시름 놓고 근처의 식당에 들어가 차를 마시며 숨을 돌렸다. 서너 명의 도성의 병사들이 여관으로 식사를 하기 위해 들어왔다. 신참인 듯 옷과 신이 깨끗했다. 먼저 왕씨를 알아본 자는 장군 을노였다. 을노는 눈을 깜박거리며 눈을 몇 번이나 비벼보았고 결국 자신의 시력을 탓하며 고개를 돌렸다. 두 번째는 상장군 예사였다 예사는 들고 있는 차를 다 쏟는 줄도 모른 체 병사의 옷을 입고 있는 왕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쪽을 알아본 왕은 싱긋 웃으며 손까지 흔들어보이곤 다른 병사들과 사라져버렸다. “...내가 죽으면 내 묘비명에는 왕씨 때문에 명이 단축되었다는 것을 꼭 적어주길 바라네.” “아저씨!” 을노의 목소리에 머리가 울리는 것을 느끼며 백라는 눈을 감았다. 정말 미치겠다. 추수를 끝낸 목래는 축재 분위기였다. 큰일을 끝낸 사람들만이 보일수 있는 자신감 있는 여유에 쉬첸은 외로움을 느꼈다. 이젠 슬슬 왕성으로 돌아갈까 생각했지만 이상하게도 점점 이곳이 좋아져 쉽사리 발을 때기 어려웠다. 창가를 내다보자 맞은편 태수의 성이 보인다. 휴식시간인지 3층의 마루에 군승의 무릎을 베고 편히 누워 있는 태수가 보인다. 편안하고 여유있는 모습에 보는 사람 또한 기분이 좋아진다. 수하 녀석, 향 거래가 잘 되었나? 어제 저녁에 성안의 시종들이 부산스럽게 새 병풍과 방석을 들여놓는 것을 보았다. “돌아가신다고요?” “그래. 여기서 머무를수는 없으니까.” 그 날 저녁 문안 인사로 들어온 둘에게 돌아간다는 말을 말하자 둘다 놀라는 눈치다. “왜 말이 아직 준비가 덜 되었나?” “그건 아닙니다만...” 말끝을 흐리는 자휼은 자례를 보았다. 자례는 이해할수 없다는 듯 쉬첸을 바라보다가 툭 내뱉는다. “추수제를 보고 가시지요.” “응? 추수제?” “추수를 끝낸 기념으로 작은 축제가 있습니다. 저희는 그것을 보고 가시리라 생각했습니다.” 자휼이 덧붙였다. 쉬첸은 잠시 생각하는 척은 했지만 마음으로는 반드시 남아서 보고 가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성안은 붉은 천과 악기소리로 요란스러워졌고 성벽을 지키는 병사들도 적당히 풀어져 즐겁게 이야기하는 모습이 보였다. “오늘 저녁부터 이틀간 계속됩니다.” 자례가 쉬첸과 성안을 돌며 일러주었다. 활기찬 성안에 스스로 흡족해진다. 자례 역시 기분이 좋은지 표정이 부드럽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아니, 기분이 좋아보여서.” 그러자 새촘하게 다시 인상을 써버린다. 무슨 뜻인가. 그렇게 보지 말란 말인가. 하지만 그 모습이 너무도 귀여워 웃고 만다. 화를 내며 먼저 달려가는 자례의 뒷모습에 , 묵계의 뒷다리를 생각하고 얼른 멈추나 역시 터지는 웃음은 어쩔수 없다. 왜 이리 상냥한 녀석인거냐. 네 녀석은. 빠져버렸다. 지지 않으려는 저 고집 센 성격에, 저 미간을 찌푸린 사나운 모습에, 깊이 생각에 빠지면 모든 것을 잊어버리는 단순함에 너무도 깊이 빠져 허우적 거리는 내 모습을 느낀다. 네 녀석을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곧 이마로 날아와 부딧치는 커다란 지화(紙化: 붉은 종이꽃)에 화를 내며 보복하기 위해 따라간다. 바로 따라와 던진 지화를 다시 던지자 화를 내며 허공에 매달아놓은 등을 때어내 던진다. 바로 연등 싸움이 벌어져버린다. 어릿광대에게 받는 즐거움이 아니다. 여인과 사냥에서 얻는 즐거움도 아니다. 과연 너가 주는 즐거움은 무엇일까. 결국 끝나지 않는 연등 싸움에 성안 주민들에게 성밖으로 내쫓긴 둘은 말타기로 승자를 가눈다. 그 동안 체력적으로 많이 좋아졌는지 먼저번처럼 쉽게 지치지 않는 자례를 보고 아차 하며 속력을 내지만 순식간에 앞지른 자례가 말을 돌려 더 이상의 경주를 하지 못하게 쉬첸의 앞을 가로 막는다. 돌발적인 행동에 놀란 쉬첸이 서둘러 말을 세우지만 전력으로 달리던 말이 쉽사리 멈추지 않아 스스로 덜컥하며 비키라 외친다. 아슬아슬하게 바로 앞에서 멈춘 쉬첸은 너무 놀라 잠시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 호흡을 가다듬자 화가 난다. “비키라고 했잖아!” “...말을 잘 타시니 멈출수 있을거라 생각했습니다.” 그 말에 화났던 속이 싹 풀어진다. 내가 이런 인간이였나. “많이 놀래신 표정입니다.” 처음으로 사나운 아이의 걱정스러운 표정이 보인다. 그 부드러운 인상에, 그 순한 표정에 자신도 모르게 두근거리는 가슴을 느끼며 애써 큰 소리쳐본다. “놀래긴! 내가 누구처럼 담없는 놈인줄 알아!” “...그렇군요. 괜한 걱정입니까.” 바로 화를 낼줄 알았는데 시선을 내리깔며 노을이 지는 쪽을 바라보는 모습에 놀라고 만다. 오늘 따라 뭔가 다르잖아! 왜 이러는데?! 하지만 이상하게 쓸쓸한 뒷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미안한 감정이 들어버린다. 헛기침을 하며 목소리를 다듬는다. “걱...걱정해 준 것은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 “뭐, 당신께서 잘못되면 목래에 큰 일이 생기니까요.” 바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와 짖궂게 웃는 모습에 더 당황하고 만다. 고단수로 속은건가. 카르릉 화를 내려는 쉬첸은 무시하고 말을 몰아 눈 앞에 보이는 가랑호수에 다가가 말에게 물을 먹인다. 검은 준마의 옆에서 목을 쓰다듬어주는 모습이 마치 그림속에서 나올만한 풍경이다. 그 모습을 물끄럼 바라보며 쉬첸은 기억해놓으려고 애쓴다. 궁 안으로 들어가면 이 자유로운 생활을 기억하며 보내게 될것이다. 지는 해를 무심코 바라보던 자례는 무엇인가 생각이 난듯 말을 타고 잠시 멀리 보이는 호수 끝으로 달려갔다.그리고는 천천히 말을 움직여 호수 끝에서 끝으로 걸어가는 것을 반복하는 것이였다. 마치 호수의 너비를 재어보는 것처럼. 한번 왕복한다음 잠시 생각하는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다시 한번 가본다. 어차피 호수둘래는 울퉁불퉁하니 저렇게 한다고 정확한 너비가 나올리는 없는데 벌써 수차례 그것을 반복하더니 해가 진 것을 느끼고 다시 이쪽으로 뛰어온다. "돌아가십시다. 축제에 늦겠습니다." "...그래. 그런데 뭘 한거냐?" "그냥 단순한 흥미입니다." 따각따각 말소리를 울리며 돌아가는 길은 지독히도 적막했다. 자례는 계속 무엇인가를 생각하는지 쉬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역시 638보인가..." "뭐? 무슨 소리하는거냐?"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닙니다라고 하지 말고 말해봐라. 궁금하잖아?" "...제게는 비밀도 없는겁니까?" "그렇게 거창한건가?" 쉬첸이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자례는 할수 없다는 듯 말했다. "단순한 내기입니다. 호수의 너비가 몇보인지 알아보는 것이죠." "정말 단순하군. 누구랑 그런 바보같은 내기를 했나?" "태수님과." "...바보같은 내기라는 것은 취소다." 하지만 쉬첸은 도저히 알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 정안족들은 알수가 없다니까. -- 단설의 역주는 인용과 개인적 견해가 들어간 글입니다.(맹신(盟信)사양. 도용씁쓸)-- 주: 장강중하류평원(長江中下流平原) 양쯔평원을 말하는 것이다 중국 3대평원으로 나머지는 동북평원(東北平原)·화북평원(華北平原)이 있다. 주:주세(住稅) 성안에 거주지를 세운 자에게 거두는 주민세를 줄임말. 성마다 차등이 있으며 성주의 임의 대로 조정할수 있다. 보통 주세는 4할이였다고 한다. 많아 보이는 것 같지만 이중 군봉과 관봉으로 ,구휼미와 겨울 나기를 위한 준비로 주민에게 절반 정도가 다시 돌아가는 것이다 . 하지만 나라의 주세, 태수에게 걷는 공납혐의 세금은 왕이 바뀔때마다 차이를 보임으로 주세는 항상 일정한 정도를 유지하기 힘들었다 생각된다. 결국 나라에서 세금을 올리게 되면 태수는 자신의 주민세에서 녹봉을 받을 수 없을 정도로 재정이 빈곤해 짐으로 주민세를 높일수 밖에 없었다. 태수의 개인 상업행위는 금지되어있는 것이 원칙이나 흉년이나 기근을 대비해 다른 장사를 하여 재정을 마련하는 자들이 여럿으로 그들은 대 부호에게 돈을 대어주고 원금을 불리는 수를 사용하기도 하고 나라에서 지정되지 않는 특산물을 생산해 내는 곳도 있었다. 목래 역시 풍족한 성이 아님으로 군승이 태수의 녹봉을 이용해서 연꽃과 향을 거래하는 것으로 나온다. 물론 이것은 당시로는 불법인 셈이다. 15 “늦었지 않니.” 벌써 태수의 성 앞의 번화가는 꽉 들어차 있었다. 한족의 복장을 한 태수가 붉은 허리띠를 매고 둘을 맞이한다. “추수제는 한족의 풍습입니다. 전하께서 즐겨주신다면 그들의 옷을 입어주시겠습니까?” “...미안하지만 여진족은 한족의 옷을 입는 것이 금지야. 하지만 이들이 한족의 옷을 입는 것은 뭐라 하지 않겠네.” “그러시다면. 자 상단에 오르십시오.” 쉬첸이 상단에 오르자 잠시 사라졌던 자례가 정안의 속포 위에 한족의 포를 입고 나타났다. 역시 붉은 허리띠를 매고 태수의 옆자리의 의자에 앉자 축제가 시작되었다. 무사자(舞獅子:춤추는 사자)가 동문으로 들어와 광장을 돌아 선과(仙果:여기선 종이떡)을 무는 것으로 시작된 축제는 경극과, 무희들의 춤과 노래, 광대들의 객기와 만담으로 이어진다. 이틀 내내 밤을 새어가며 술과 공연을 보느라 피로해진 쉬첸은 마지막으로 무사자가 북문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본후 축제가 파함을 알리자 서둘러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잠이 들었다. 어쩐지. 태수와 수하는 번갈아 가며 잠을 자기 위해 들어가던데. 끝나는 날이 되어 몸이 끔찍이 피곤하자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자신은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고 오기를 부려 지금 몸이 물젖은 솜 마냥 피곤하다. 뭐라 축제의 감상을 떠올리기도 전에 잠이 들어버린다. 따닥따닥따닥... 얼마나 잤는지 잠이 깨어 눈만 떠보니 밖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뭔가 둔탁한 나무를 두드리는 소리같기도 하고 딱따구리가 나무를 파는 소리 같기도 하다. 신경쓰지 않고 더 자려고 눈을 감지만 들려오는 소리의 높고 낮음과 가락이 새의 그것이 아니란 것이 느껴져 다시 눈을 뜬다. 하지만 모르는 척 다시 눈을 감는다. 피곤하다. 더 자련다. 하지만 이어지는 북소리에 인상을 구긴다. 두 소리다 매우 작아 남들은 모르는 듯 한데 왕성에서만 자란 주제에 여진족이라는지 밤귀가 매우 밝아 그 소리가 다 들려버린다. 둥둥둥둥둥... 안일어난다. 안일어난다 난 안일어난다. 점차 빨라지는 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고 긴장하다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자기 소리가 끊어져 버린다. 어라? 뭔가 결정적인데 서 끊긴 느낌에 저절로 눈이 떠진다. 결국 삐걱거리는 몸을 일으켜 비실비실 창문 밖을 본다. 그러고 보니 보름달이 보인다. 오늘이 음력 10월인것이다. 여진인은 달에 매력을 느낀다지. 늑대와 같은 사내들이니 달의 영향을 받는 것이다. 달을 한참동안 보고 있던 쉬첸의 귀에 낮게, 그리고 느리게 아까의 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돌리자 맞은편 성벽의 망루에 누군가 서 있다. 여인의 치마폭보다 넒은 통을 가진 새 하얀 옷을 회색 허리띠로 졸라맨 사내가 망루의 위에 달려 있는 목어(木漁나무잉어)를 두들리고 있다. 넓은 통 때문에 목어를 치기 위해 올린 팔복이 드러나며 빛난다. 강한 선을 가진 팔에 자신도 모르게 감탄한다. 빠르게 느리게, 물흐르는 듯, 떨어지는 듯 밀리는 듯 울리는 목어의 단조로운 소리를 깊게 울리는 북소리가 따라간다. 한족의 비음석인 소리와는 다른 그 강한 울림과 몸을 진동시키는 듯한 흐름에 묘한 흥분을 느끼며 소리가 나는 쪽을 유심히 바라본다. 몇 번더 강하게,크게,높게,울던 소리는 점차 잔잔하게 흐르다가 다시 끝까지 올라가며 여운을 남기고 멈추어진다. 먼저 목어의 소리가 멈춘다. 그리고 찬찬히 북소리가 멈춘다. 목어를 치던 그가 단단한 채를 허공에서 부딪친다. 고운 여자의 음성이 아닌 낮으면서도 힘있는 사내의 노래가 자신은 이해할수 없는 언어로 노래한다. 역시 북과 같이 그 높고 낮음이 선명한 노래다. 보름의 달을 등지고 깊게 울리는 낮은 사내의 목소리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처음이였다. 거친 것 같으면서도 곱게 울리는 미성. 낮은 저음이 사람의 마음을 울린다. 망루를 나오는 자의 머리카락을 보고 놀라고 만다. 태수구나. 어깨를 넘는 다갈색의 머리를 풀어 머리띠로 넘기고 하늘을 향해 노래하는 자는 태수였다. 참으로 아름다운 목소리구나. 태수의 목소리가 저렇게 미성이였다니. 크고 강하게 노래하던 것이 끝난건지 길게 뽑은 마지막 소리로 더 이상 입을 열지 않는다. 잠시 달을 바라보던 그가 크게 웃으며 이번엔 아까와 다른 노래를 부른다. 즐겁고 흥얼거리는 추임이 많은 노래다. 크게 웃던 태수가 망루에서 누군가를 끌어낸다. 멈추지 않는 그의 노래에 답래하듯 같은 노래를 따라 부르는 자가 모습을 드러내기 전 이미 쉬첸은 수하일꺼라 생각했다. 낯익은 목소리였던 것이다. 망루를 나오는 자의 새하얀 팔을 본 쉬첸은 헉소리도 못내고 얼굴을 붉혔다. 수하가 맞긴 했지만 예상하지 못한 모습에 입을 벌리고 만다. 긴 옷자락은 제비꼬리처럼 어깨부터 두개로 나뉘어 맨팔을 여지 없이 들어내고 있었다. 항상 옷자락속에 감추어져 있던 것이라 그런지 봐선 안될 것을 본 느낌이다. 빙글 돌아 나오는 정면은 더욱 민망하다. 속에 아무것도 안입은 듯 크게 벌려진 앞섭에는 목부터 허리띠까지의 맨살을 들어낸다.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가 웃는 소리에 다시 고개를 돌린다. 아슬 아슬하게 성벽 난간 위로 올라간 수하가 한뼘도 못되는 난간을 디디고 서서 춤을 춘다. 부드러우면서 무겁게 빙글 도는 몸이 쓰러질 것 같아 다리로 시선을 돌리니 역시 정강이 아래로도 어깨와 같이 나누어져 있다. 넒은 통에 하늘거리는 바지 사이로 맨발인 하얀 다리가 그대로 보인다. 노란 달을 등지고 검은 너울을 뒤집어 쓴채 아슬아슬한 난간에서 춤을 추는 모습이 여인의 춤과는 다른 것이 분명하면서도 아릿하게 감정을 자극한다. 크게 휘두는 동작에 활처럼 휘어지는 몸이 행여 성아래로 떨어질까봐 조마조마 하면서도 차마 가서 말리지 못하고 오히려 멈출까 두려워 진다. 낮으면서도 힘있는 사내의 목소리에 맟추어 추는 춤은 춤이라기엔 무술같기도 하여 넋을 읽고 바라본다. 하늘을 향해 서로 마주보며 춤과 노래를 즐기던 형제의 모습은 자유롭다. 달의 정 중앙에 온 춤꾼의 선이 그대로 비추어져 환상을 보는 듯하다. 난간을 디디며 걸어가는 새하얀 팔과 다리가 달빛을 받아 새파랗게 빛나며 시선을 부여잡는다. 춤꾼과 즐거움을 나누는 노래장이 역시 그 울림에 환하게 빛난다. 하늘을 향해 웃으며 함께 도는 춤은 자신이 끼어들 수 없는 그 무엇을 상징하는 것 같아 가슴이 쓰리다. 그 순간 쉬첸은 그에게서 받는 즐거움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이틀 후, 저녁 무렵 성주의 방으로 들어가자 현을 다루는 자례와 노래를 부르는 군승의 모습을 보고 잠시 기다린다. 낮은 울림이 여인이 흐느끼는 소리와 같아 묘하게 애달픈 기분이 되어버린다. 이쪽을 알아보고 둘다 행동을 멈추자 쉬첸은 성안으로 올라갈거라는 말을 전한다. 선선히 둘은 고개를 끄덕이며 준비해준다. 쉬첸은 자휼과 자례를 번갈아 보며 꿈같은 보름달의 밤을 기억해보려 한다. 하지만 엄한 표정의 태수와 평소와 다름없이 목에서 발끝까지 새 하얗게 가린 수하는 역시 새촘한 표정으로 문서를 챙길뿐이다. 꿈이였을지도. 모든것이 준비된 날 아침, 마지막 배웅으로 태수에게 인사를 하고 군승을 바라본다. 어떤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나 군승은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그의 고민을 풀어준다. 하지만 무엇인가 말을 하고 싶어 머리를 굴린다. 너 왕성에 갈 생각 없니? 하지만 쉬첸은 그 말을 그대로 삼켰다. “...이곳에 살아서 좋겠구나.” “좋은 곳입니다.” 자례가 미소 지었다. 이곳을 좋아했다. 비록 타국이지만 형이 가꾸어 놓은 이곳을. 그 미소에 가슴두근거림보다는 묘한 실망감과 아픔을 느꼈다. 데려가고 싶다. 관리가 아닌, 시종도 아닌, 후궁도 아닌, 친구도 아닌, 지금의 이 관계로. 하루의 일에 같이 웃어주고 가끔은 화도 내고 짜증도 받아주는 이 관계로. 가끔 보이는 내리깐 눈동자에 가슴 두근거리며 동경할 수 있는 이 관계로. 우연히 스치는 옷깃에 뜨거워지는 얼굴을 할 수 있는 이 관계로. -알겠느냐 쉬첸? 사랑이란 두 사람의 마음이 같아야 된단다. 연리지(連理枝)도 같은 나무가 아니면 생길수 없고 비익조(比翼鳥)도 한쪽날개만 펄럭인다면 날지 못하지. “... 즐거웠네.” “살펴가십시오.” 데려가지는 않겠다. 이곳에서 행복할 수 있도록. 그 타고난 성품으로 눈 감을 수 있도록. 네게 좋은 기억으로 남을 수 있도록. 50일의 오랜 시간말을 달려 낯익은 향기와 낯익은 말투의 낯익은 성문을 보는 순간 쉬첸은 울컥 눈물이 나오려 했다. 너무나 많은 것을 보고 놓고 와버렸구나. 하지만 다시 찾으러 갈수도 없다. 다시 간다면 더욱 많은 것을 놓고 올테니까. “기다렸어. 황제께서 일을 잘 마무리 했다고 칭찬하시더군.” 태진이 다가와 뭐라 말하며 웃어주나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다시 갈수는 없을것이다. 마음속의 허전함을 달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뭔가 이상해 . 아주 이상해. 정말 이상하구 말구. 태진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하늘을 보며 알수 없는 노래를 흥얼거리는 쉬첸을 바라보았다. 성공적으로 말을 데리고 왔다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 이후로 좋아하던 사냥도 안하고 검을 익히는 것도 아니고 하는 짓이라고는 하늘을 바라보며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뿐이다. “거문고다.” “뭐?” “궁 안에 거문고를 다루는 악사가 있나?” “무슨 소리하는 거야 정말!.” “그러니까 이런 음의 노래인데 말이지. 생각보다 공백이 많이 들어간 노래가 박자 맞추기가 까다로운데, 잘 들어봐.” 콧노래를 부르는 쉬첸을 보며 태진은 기가 막혔다. “정신 차려! 지금 난 심각한 문제를 의논하고 있다고!” “응? 아아... 무슨 문제였지?‘ “벌써 두 번이나 말해준 거잖아 혼인 말이야 혼인! 아, 결혼 할거냐고!” 태진이 화를 내며 뭐라 소리치는 것을 보며 쉬첸은 다른 생각에 잠기고 있었다. 그 노래가 무엇이였을까. 춤은 흉내낼수 없다. 하지만 노래는 배울수 있지 않을까. 목소리가 안되어 가락은 어물 어물하기만 하다. 하지만 가끔 자레가 연주하던 그 울림 깊은 악기로는 가능할 것 같다. 성으로 돌아와 이것저것 알아본 결과 그것은 정안족의 악기라고 했다. 왕궁에는 정안족을 들일 수 없다. 하지만 왕궁 내에서 그 악기를 하는 사람을 건질수 있지 않을까. “...거문고라...” “쉬첸!” 태진은 결국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맙소사!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거지. 마치 사랑에 빠진 여인처럼 노래나 흥얼거리... “...거야?” “뭐?” 태진의 앞뒤 잘라버린 말에 이번엔 쉬첸이 이상하다는 얼굴을 했다. “아하, 어쩐지 오래 머문다고 했지.” “태진?” “어련하실까. 누구야?” “무..무슨 소리야?” “이런 이런, 쉬첸. 나까지 속일필요는 없어.” “무슨 소리하는지 모르겠어!” 쉬첸은 방을 나가버렸다. 태진은 소리 죽여 웃었다. 얼굴이 그렇게 사색이 되어 거부한다면 누가 그 말을 믿겠어? 때아닌 때에 2왕자의 부름을 받은 레이첸은 어리둥절 하게 물었다. “간의대부(諫議大夫)의 딸?” 레이첸은 고개를 갸웃했다. 누군지 알 리가 없지만 앞에 앉은 체이첸의 기대어린 눈빛에 모른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그래. 듣자하니 매우 아름답고 얌전하다고 하더구나.” “음...아..저...” 혼인이라니. 아 그러니까 지금 존경하는 형님께서 이 아우에게 중매를 서시는 것 같은데. 이거 난감하옵니다. “네 나이도 이제 32세다.” “...31세가 아니었습니까?” “아무튼 부인이 없는 20세 이상의 왕자는 너와 태진 그리고 또.. 한명.. 쉬첸이던가.. 아무튼 세 명 뿐이다. 그래서 황제께서 이번에 다 보내시기로 마음먹으신 것 같다. 일단 너부터다. 하기사 셋만 간다면 27명중 20명이 가는 것이니 속 편할만 하지.” “아아, 하지만 형님 이 동생에겐 멋진 첩이 2명이나 있는데요?” 비빈. 성년식을 치루고 난후 야합을 알려 주기 위해 뽑히는 궁녀들을 말한다. 물론 첫날 그 이후로 다른 여인들을 찾으러간 레이첸에겐 그들의 얼굴조차 기억 안 나지만. “사내에게는 부인이 꼭 있어야 하지. 한번 만나보는 것은 어떠냐?” “형님, 사실 전 아직...” “들여보내라.” 헉? 레이첸이 놀라기도 전에 방문이 열리며 한 무리의 여인이 들어왔다. 척 보아하니 옆의 두 명은 시종이고 늙은 여자는 유모 아니면 어머니겠다. 그럼 중간의 저 여자가 예의 그 맞선 상대인가. 그럭저럭 생겼네. 아담한 키에 버들허리 붉게 물들인 작은 손. 꽤나 예쁘장한 얼굴. 나이는 그럭저럭 20정도? 얼굴도 비빈들보다는 훨 예쁘군. 아니, 사실 지금까지 만나본 여인들 누구도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미인이다.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숙이는 얼굴. ...입술이 빨갛다. 분을 바른 하얀 얼굴 때문인가. 아니라면 그녀는 특별한 주사를 바르는 것일까. 선홍빛의 입술이 아름답다. 꼭 내가 죽였던 그 여인처럼 붉은 입술. “좀 어리지 않습니까?” 레이첸은 체이첸에게 투덜댔지만 눈은 웃고 있었다. 그리고 두 달 후 4왕자 레이첸은 부인을 맞게 되었다. 부인은 간의대부 한씨의 외동딸로 레이첸은 그녀를 화선(化?)부인이라 이름지었다. 화선은 항상 꽃이 수놓아진 옷을 입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화선은 정부인이 아닌 그 아래의 가부인 역할의 세부(稅婦)로 들어갔다. 간의 대부는 그 말에 몹시 노했지만 왕자가 그 이상의 여인을 찾지도 않고, 둘이 금술이 좋다는 말과 왕자를 낳은 즉시 부인으로 올린다는 말을 듣고 물러나갔다. 그리고 다시 두 달 후 14왕자 태진이 공부시랑(工部侍郞) 양씨의 둘째 딸과 혼인을 했다. 하지만 15왕자 쉬첸은 혼인을 거부하고 있었다. -- 단설의 역주는 인용과 개인적 견해가 들어간 글입니다.(맹신(盟信)사양. 도용씁쓸)-- 주:무사자(舞獅子):중국의 사자춤을 달리 이르는 말이다. 이 외에도 사무(獅舞), 사등(獅燈),으로 불리기도 한다. 중국의 사자춤은 힌색을 주로사용하는 한국과 달리 항상 붉은 색을 사용하는데 이것은 사자가 귀신을 쫓고 길상을 가져다 준다는 중국의 미신에서 비롯된것이다. 주:목어(木漁)나무를 깎아 잉어 모양으로 만들고 속을 비게 파 낸 불구(佛具).한국에서는 둥근 것을 목탁이라 하고 긴 것은 목어라고 구분하여 부른다. 목어는 음악과 재례보다는 모임과 알림의 뜻으로 사용되었지만 근대에 와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고 간혹 큰 행사에 법고와 함께 그 소리를 내는 모습이 보인다. 주:본문의 자례의 갓밝이 춤복, 본문에 춤복은 "춤무덤에서 피리를 부는 사나이"라는 벽화를 보고 그려낸 것인데 본인의 잛은 머리로는 이것이 어느 무덤의 출처인지 정확히는 알수 없으나 황해도 안악군 대원면 상산리에 있는 고구려의 벽화고분안악 3분 중 2호의 비천상에 끼어있는 그림으로 추측하고 있다. 군무상(群舞像) 의 벽화로 유명한 무영총의 그것을 참조하지 않는 것은 그림의 복장이 고구려 후기에 생성된 것이기 때문에 부족국가의 유물인 제천의식에 어울리지 않다 생각하였다 (고구려 초기는 백색과 검은 색의 단조로운 문양이 유행하였지만 후기에는 화려한 색체와 화려한 문양이 두드러진 복장이 보여진다.당의 영향이라고 한다.) 춤무덤의 피리부는 사나이는 천인으로 , 옷의 형태가 날렵하게 갈라 바람을 표현했지만 본문에서는 벽화 그대로 사용하였다. 중국의 시성 이백(701∼762)은 생전에 고구려춤을 보고 ‘고구려’라는 시를 읊었다다고 하는데 그 내용이 절풍모에 금화를 꽂고/백마처럼 천천히 도네/넓은 소매 휘저으며 훨훨 춤을 추니/마치 해동에서 새가 날아온듯. 이다. 주:간의대부(諫議大夫) 황제에게 간하고 정치의 득실(得失)을 논하던 고문관. 진(秦)나라 때 간대부(諫大夫)라 부르던 것을 후한 시대에 간의대부(諫議大夫)로 개칭하여 황제의 고문과 응대 등을 맡은 관직. 의랑과 함께 광록훈에 속하며, 6등관이었다. 주:공부시랑(工部侍郞) 공부는 영조, 공작에 관한 일을 맡아보는 관청이며, 시랑은 성의 차관에 해당한다. 한대에는 임시직이었다. 주:비빈(非嬪) 황제가 혼인을 치루기전 밤 기술을 알려주기 위해 동원되었던 여인. 황제 즉위 전 태자(太子) 신분에 있던 이들은 정식혼례 전에 부황(父皇)에게서 성교육을 받는다. 서진(西晋)시기 혜제(惠帝)는 13세에 혼례를 치르기 전 이미 부황의 후궁과 성애(性愛)를 실습하고 아이까지 낳기도 했다. 청대(淸代)에는 태자의 혼전 성 실습이 명문화한다. 정식혼례를 치르기 전 태자의 나이보다 다소 많고 품행과 용모가 바른 궁녀 8명을 선발해 성애를 실습토록 했다. 이러한 교육의 목적은 "황제가 정식 혼례한 뒤 신방에 들어갔을 때 성을 잘 몰라 체통을 구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것 '후궁의 금지옥엽(後宮的金枝玉葉)에 관한 중앙일보의 기사이다 (잠깐, 여기서 후궁의 금지옥엽은 옛 고서가 아닌 기록을 모아 만든 책이다. 덜컥 믿지 말자.) 중국의 성에 관한 이야기책에 비빈에 관한 이야기가 언급되어 알고있었으나 부왕의 후궁과 밤을 지낸다는 법은 조금 충격적이다. 새엄마와 잠을 잔다는 이야기 아닌가. 하긴 전방제(남편이 죽을 경우 그 형제에게 재가)를 떠올리면 화재거리는 아닌것 같기도 하다. 16 그 동안 많이 불편했다는 듯 여관의 도움을 받아 얼른 꽉 조이는 옷을 벗었다. 크게 한숨을 내쉬며 윗 옷을 벗고 깨끗하게 정리된 힌 속포를 걸친다. 얇으면서도 폭이 넓은 허리띠로 허리를 감싸 돌린 후 진 푸른 단이 둘려진 반팔의 포를 걸치고 검은 허리띠를 맨다. 마지막으로 화려한 푸른 색바탕의 은사로 수 놓아진 연꽃문양의 땅에 닿을 정도로 긴 바깥포를 걸치고 상단의 자리에 앉는다. 여관이 차를 내어오고 뒤로 돌아가 그 동안 본의 아니게 땋았던 머리를 풀며 뜨거운 물수건을 대어 다시 길게 핀다. 세심한 손길이 닿은 곳은 살랑 거리는 긴 머리가 땅에 드리워진다. 오래간만에 돌아온 평소와 같은 일상을 눈을 감고 음미해보기도 전 누군가 밖에서 크게 외친다. 좌보다. 들어오라고 말하자마자 미닫이 문이 바람처럼 열리며 얼굴이 붉게 상기된 좌보가 들어온다. 그 모습에 찻잔을 내려놓고 왕씨가 미소짓는다. “이어지는 혼사에 나라가 들썩거리는구먼. 말단인 나에게 휴가가 나올 정도라네.” “..네..네..왕씨.!” “칠 생각인가? 백라, 그 부채 내려놓고 이리 앉게.” “도대체 무슨 생각입니까!” 백라가 다섯 달 만에 보는 왕씨의 얼굴에 기뻐하기보다는 화부터 내며 외쳤다. “무슨 생각이기에, 아니 어째서, 왜! 정말! 소신 왕씨의 눈앞에서 피를 토해야 하겠습니까!” “그럴 필요는 없네.” 하류사가 피식 웃으며 백라를 진정시켰다. 여관이 참빗으로 깔끔하게 내리 빗은머리에 머리띠를 매어주고 물러나자 고개를 돌려 열린 문으로 이쪽을 보는 몇몇 수하들 속에 못보던 늙은 노인에게 시선을 멈춘다. “...일은 잘 되었나보군.” “목씨 정륜입니다. 왕씨를 뵙고 인사 올리옵니다.” 정륜이 깊게 부복하자 하류사는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방안으로 들어오라 손짓했다. 그가 들어오자 이번엔 백라에게 나가라고 손짓한다. 화난 표정이면서도 일단 고개를 숙이고 방안을 나가자 여관이 문을 닫아버리고 그 자리에 앉아 문을 지킨다. “오느라 얼마나 노고가 많으셨습니까? 젊은 왕씨가 늙은이를 괴롭히는 것은 아니였을지요.” “아아, 전하. 신의 모든 것은 전하를 위해 있는 것이옵니다.” 당치않다는 정륜의 말에 하류사는 미소지었다. “고개를 드시오. 목씨 정륜.” “제가 어찌 전하 앞에서...” “내가 목씨 얼굴을 보기 원하기 때문이요.” “...황송합니다.” 정륜이 천천히 고개를 들자 하류사는 그를 군주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목씨는 대대로 우보를 위임한 명림씨를 호위하던 장군씨였다. 늙었지만 기골이 강해보이고 눈에선 연륜이 느껴진다. 하지만 마주치는 시선을 피하는 눈동자에선 두려움도 느껴진다. 뭔가 꺼리거나 숨기는 것이 있다는 건가. 왕의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정륜은 얼른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 하류사는 고개를 돌리고 여관을 바라보았다. “여독은 풀렸을 것으로 아오.” “예. 신 명령만 내리신다면 어디든지 뛰어들어가 적장의 목을 베어올수 있나이다.” “자네를 전쟁터로 끌고 갈 생각이 아니오.” “그렇다면 제가 무엇을?” “자네가 모시던 명림씨의 행방을 말해주시오.” 순간 정륜은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고개를 돌린 왕씨의 눈에는 아무런 감정이 담겨 있지 않다. 무슨 뜻일까. 명림씨는 이미 다 죽고 말았지 않은가.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어째서 내게 그것을 물어보는 것이란 말인가. 정륜은 몸을 덜덜 떨면서도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저..전하 명림씨는 이미...” “명림씨를 모셨지?” “예.” “모시던 명림씨가 당에 끌려갔는가?” “그렇습니다.” “안되었군. 그렇다면 시체의 목을 잘라와 어디에다 배양해드렸는가?” 시체를 중히 여기는 정안족이지만 잦은 전쟁으로 부모 형제의 시신조차 수습하기 힘들어지자 목이라도 베어와 고향에 묻는 일이 퍼지고 있었다. 매우 꺼려했던 왕실조차도 시신의 목을 베어와 상을 치룰 정도다. 그 말에 눈동자를 돌리는 정륜은 등이 무거워진다. 여전히 다른 곳을 바라보는 왕씨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전혀 모르겠다. ...“그렇다면 그들의 자식들은?” “...” “한두개가 아니였으니 목을 가지고 오긴 힘들었겠군.” "..." "아니라면 수습도 못했는가? 천하의 명림씨는 헛된 가신을 키웠구나?" “아아 전하!” 정륜은 하류사의 앞에 부복했다. 심하게 떨고 있는 어깨가 울고 있다는 짐작을 하게했다. “소신을 너무 나무라지 마옵소서. 단지 그때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게 다였습니다. 명림씨께서 너무도 마나님을 살리고 싶어하셨고 저는 아기씨들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에... 조금도 제게 사심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고하라.” 특유의 감정 없는 냉정한 목소리로 하류사가 중얼거렸다. “한 치 거짓도 없이.” 눈이 내리기 시작하는 목래는 지극히 평화스럽고 조용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얼마 있을 동지로 관리에게 내린 휴가 때문인지 조용했던 태수의 성은 더욱 고요하다. 여인의 흐느낌 같은 현의 울림이 고요함을 울린다. 조용히 그 음에 따라 노래를 흥얼거리던 태수가 작게 열어논 창문사이로 무엇인가를 보고 노래를 멈춘다. 갑작스럽게 끊긴 노래에 현을 만지던 군승 역시 손으로 현을 눌려 음을 멈춘다. 하늘을 높게 나는 검은 제비의 모습이 보이자 자휼은 일어나 창을 열었다. 완연한 겨울바람이 방안으로 휘몰아쳐 들어왔지만 상관없었다. 재빠르게 자휼의 어깨에 내려앉는다. 술대를 향로에 꽂은 자례도 형에게 다가와 제비를 바라본다. “할아버지의 소식인가요?” “...아니, 아니. 전혀 다른 이야기다. 왕성에 있는 혈족이 보낸거야.” 실망감을 감추지 않고 자례는 한숨을 쉬었다. 벌써 몇 달인가. 정륜이 도성으로 올라 간지 반년이 되어가는데 연락한번 없다. “...큰일이라도...” “걱정 말아라. 강하신 분이잖니.” 자휼이 어깨를 들썩이자 제비는 자례에게 날아갔다. 자신에게 날아온 제비의 추킴에 앞 다과상에 놓인 잣을 하나 물려준다. “무슨 내용입니까?” “도성의 이모저모. 4왕자와 14왕자가 결혼한 것은 우리도 아는 것이고...아, 15왕자가 결혼을 안 하려고 한다는군.” “...쉬첸?” “뭐 궁에는 안 어울렸던 사내니 초원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는지 모르지.” “..하긴.” 자례가 고개를 끄덕였지만 자휼은 알 수 없는 불길함에 잠시 전서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애써 무시하며 화로에 그것을 던져 넣었다. 화르르하는 마지막 비명과 함께 종이는 타들어간다. 좀더 먹고 싶은 표정을 지으며 잣그릇에 날아 앉은 제비가 고개를 갸웃해보인다. “형? 제비를 다시 날릴 건데 답장은요?” “일단은 없다. 넌?” “...저도 ... 없습니다.” “...할아버지에 관한 것을 물어볼까?” “정말요?” 바로 밝게 대답하는 자례를 보며 자휼은 피식 웃었다. 둘은 제비를 다시 날리고 난 후 문을 굳게 닫아 바람을 막았다. “여진인이 제비를 모르기에 다행이지 이거 원 한겨울에 제비가 날아다니니...계절 감각이 없어져.” “덕에 전서는 잘못 전해지는 법은 없지 않습니까.” 제비를 전서로 쓴다. 제비가 철새라는 것을 알고 있는 정안인들은 한겨울엔 제비를 보아도 사냥하지 않았고 산을 넘어가는 것을 도왔다. 겨울에 날아다니는 제비는 혈족들의 소식을 담은 전서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길들이기 힘든 새지만 무척 영리해 길을 잃는 일이 없는 새였다. “할아버지는 언제나 돌아오실까.” “...술대 타는 네 솜씨가 늘었는데 들어줄 사람이 없다 불평하는 거냐?” “...형도 참.” “아니면 나는 들어도 뭐가 뭔지 모르니 연주하기 싫다는 것이냐? 그리고 향로에 술대 넣지 말라 했지. 타버린단 말이다.” “하지만 예쁜걸요.” 자휼은 향로의 술대를 뽑아 탈탈 털어 다시 동생에게 돌려준다. 술대를 돌려 받은 자례는 앞에 놓인 7줄의 악기에 다가갔다. 흥료성이 현 황제에게 몰살당하고 난후 보기 힘든 거문고였다. 자례는 참으로 소중하다는 듯 손으로 현을 스쳐보았다. 자휼이 만들어준 선물이었다. 비록 외형은 굉장히 투박하고 거칠었지만 꽤나 신경 써서 만든 듯 검은 색이 띠는 금통은 일반 오동나무가 아닌 석상동(石上棟)이다. 절벽 틈이나 바위틈에서 자라는 귀한 오동나무. 그 나무들 중에서 지상에서 7척이 떨어진 곳을 잘라 둥근 나이테가 아닌 곧은 나무 무늬만이 가능하다. 괘마저 각각 다른 나무로 만들고 누에고치의 실을 15개 꼬아 80줄을 만들어 다시 네 개로 , 네 개를 합쳐 하나의 현이 만들어진다. 제대로 된 현을 만들기 위해 자휼이 성을 비우고 혈족의 악사를 찾는 동안 전염병이 돌았다. 여행에서 고생한 것은 말로 할수 없었지만 그래도 거문고가 완성되어 자휼이 돌아왔을 때는 성안 인구의 4분의1이 죽어있었다. 그 일 이후로 자휼은 성을 비우는 일을 하지 않았다. 결국 완성된 거문고로 연주한 첫 곡도 죽음을 애도하는 장송곡이였으니 이것저것 사연이 많이 담겨버린 거문고였다. 자례가 검은 대나무로 만든 술대를 잡고 익숙한 곡을 튕겨내었다. 어릴적에 자주 들었던 곡이다. 얼굴도 아릿한 누군가 흥얼거리던 곡. 많이 좋아해 따라 불렸던 기억. 그리고 어느날 부터인가 들리지 않게 되어 끝까지 배우지 못한 노래. “...그런데 이곡이 무슨 곡일까요?” “...나도 몰라.” 그냥 귀에 익은 노래에 자휼은 자례의 연주에 따라 곡을 흥얼거렸다. 조용한 겨울날 동굴속의 낙수물 같은 소리. 울리는 것은 몸과 마음을 다독이고 편안한 눈을 가지게 한다. 하지만 자휼은 오늘따라 이상하게 불안한 마음이 가시질 않았다. 자신의 예감이 꽤나 정확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자휼은 노래를 멈추었다. 아우가 이상하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았지만 팔짱을 끼고 물끄러미 방석끝에 달린 술을 노려본다. 무엇인가 벌어지려 하는가. 왕성의 문을 나서자 마자 을노는 재빠르게 말에 올랐다. “달려라 달려!” “...좀 같이가세나!” “빨리오시라구요!” 장군 을노의 말에 상장군 우씨 마류가 붕대에 감긴 팔을 들어보였다. 얼마 전 송과 금의 전쟁으로 인해 다친 상처다. 왕씨는 비밀리에 송의 대 군벌 악씨와 동맹을 맺고 있었다. 때문에 상황에 따라 몇몇의 장군들이 기마병을 이끌고 송의 기병으로 들어갔다 나오길 반복하고 있었다. “좀 쉬었다 가지.” “..하유. 어쩔 수 없군요.” 둘은 말의 속도를 늦추었다. 늦게 소식을 들은 마류는 그 여유에 질문을 던졌다. “그러니까 그들이 명림씨라?” “예. 당시 가신들은 죽이지 않았지 않습니까? 명림씨의 부인을 자신의 부인이라 하고 내왔다는...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요.” “...둘 다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했을까.” “...글쎄요. 마나님은 얼마 후에 세상을 뜨셨다고 하시니...” 노장군답게 마류는 그들을 걱정하는 말을 했지만 을노는 약간 설레고 있었다. 그들을 다시 만날 수 있다. 어쩌면 함께 모여 일을 하게 될지도 모르지. 말을 잘타는 우리로는 30일 안으로 목래에 닿을 수 있다. 20일이나 단축되는 셈이지. 하지만 그 예상과는 달리 도성의 외각에서 그들은 검문을 받았고 그들이 지닌 짐 중 한족의 무기도 아닌 거란의 무기도 아닌 그들의 환도 덕에 관청에 끌려 들어갔다. “우리는 성내 밖의 출입증이 있는 자들이니 우리의 짐을 수색할 권리가 없소!” 을노가 외쳤지만 관리는 그냥 고개를 저으며 관청으로 들어가 버릴뿐이였다. 옥에 갇혀 버려 분통터저 하는 을노에게 마류는 느긋하게 벽에 기대며 위로해주었다. “...걱정 말게. 혹시 아나. 이럴 때 우리의 예의 병사 복장의 그분께서 나타나 풀어주실지도 모르지 않나. 마유에게 듣자하니 나 없는 동안 굉장한 일이 있었다지?” “아휴, 그분께서 병사놀이 하신거요? 아무튼 바랄걸 바라십시오. 백라님의 감시에 얼마동안은 꼼짝도 하지 못하고 계시니까요.” 둘은 관청 지하 감옥의 금이 간 벽을 바라보며 한숨쉬었다. 17 즐거운 얼굴빛으로 태진은 한가롭게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쉬첸의 등뒤로 걸어갔다. “안녕.”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온 거야?” “당연히 했던 말 또 하려고.” 짜증나는 얼굴로 외면하는 쉬첸에게 태진은 바싹 다가가자 쉬첸은 얼른 일어나 밖으로 나간다. 하지만 태진은 바로 따라 나와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걱정 마. 오늘은 조금 다른 말을 할 거야.” “어어, 그렇다면 이젠 좀 높은 관리들 딸들이라도 말해볼 생각이냐?” “그것도 좋지만 오늘은 너에게 좋은 충고하나 해주려고.” “...뭘?” “결혼하니 엄청 좋다. 쉬첸.” “...뭐가 달라진 이야기냐. 임마.” 쉬첸이 방으로 들어가자 역시 방안으로 들어와 중얼거린다. “정말이야. 아침에 눈떠서 내 옆에 누군가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지 몰라?” “됐다.” “...목래에서 얼마나 귀한 아가씨를 보았는지는 모르지만...” “아니라고 했잖아. 너야말로 했던 말 또 하고 또 하고! 지겹다!” 버럭 화를 내며 자신을 밀치는 쉬첸의 손을 잡으며 태진은 놀린다. “그럼 뭐야? 매일 같이 할 줄도 모르는 악기를 딩띵거리며 헤헤 웃는 너는 뭐냐고?”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것은 아냐!. 그냥 좋을 뿐이야. 그냥 ...동경 같은거라구!” “넌 왕자야. 네가 동경하다니 말이 되냐?” “상관 하지마.” 손을 내빼는 쉬첸을 따라가다가 벽에 걸린 지도를 보고 멈춘다. 저기가 목래인가. 빨갛게 표시된 지점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문득 설득보다 쉬운 방법이 떠오른다. “목래는 조그만 성이지. 거길 뒤져보면 간단하 나올걸. 어때? 내가 널 위해 힘을 써줄까?” “뭐?” 형제의 알수 없는 말에 고개를 돌리자 지도를 바라보는 태진을 보고 깜짝 놀라며 황급하게 지도를 때어내 둘둘 만다. 그 모습에 태진은 더욱 웃는다. “혹시 유부녀냐? 그렇다면 한번 즐기고 다시 갖다놓으면 될 것 아니야? 어차피 왕자..윽!” “이 자식! 그딴거 꿈도 꾸지 마!” 쉬첸은 있는 힘껏 태진의 정강이를 힘껏 찼다. 깡충거리며 아파하는 형제를 보며 쉬첸은 씩씩거렸다. “내 인생은 내것, 네 인생은 네것. 알겠어? 그 좋다는 네 부인에게나 가봐!” “너 그러다 욕구 불만 된다?” “흥!. 네 놈 머릿속에는 그거밖에 없으니 내 맘을 이해할리 없지. 가서 부인에게 졸라봐. 대낮부터 한번 해달라고.” “안 그래도 하고 나왔는데?” 그 말에 쉬첸은 정말로 화났다는 듯 옷자락을 털며 안으로 들어가 문을 소리내어 닫아버린다. “아하하하!” 태진은 밝게 웃었다. 역시 어떤 형제보다도 네가 제일 정이 간다. 왕자답지 않은 솔직함이 내 맘에 들었을지도 모르지. “...그러고 보니... 며칠 후 저놈 생일이군.” 근사한 것 하나 마련해 주어야겠어. 태진은 빙글 웃으며 아직도 저린 다리를 쓰다듬었다. 바로 그의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와 깊은 생각에 빠져버린다. 결코 웃을 일이 아니다. 이번 왕자들의 혼인 문제는 황제가 내린 것이다. 선을 보았던 여인이 마음에 흡족하지 않다며 물리는 것도 한두번만 가능한 일이다. 결국 노여움을 받으면 혼인이고 뭐고 바로 궁안에서 내쳐지거나 도사가 되어 절간으로 들어가야 할지 모른다. 내 좋아하는 형제를 그렇게 만들수야 없지. 태진은 등을 돌려 자신의 궁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거야 원...” 앞뒤가 꽉 막혔으니 좌진으로도 우진으로도 살길이 막막하다. 졌다는 것을 느끼고 왕씨가 장기를 내려놓자 여관이 웃으며 따라 내려놓는다. “지셨습니다.” “그 누가 여관의 재기에 이겨볼까. 아무튼 여전하시오.” 여관은 미소지은 표정으로 장기를 거둔다. 그 모습을 감상하던 하류사는 잠시 고개를 돌려 밖을 바라본다. 역시 문 근처에 좌보가 이것 저것 정리하며 자신을 지키고 있는 것을 본다. 이거 몇일간은 꼼짝도 못하고 잡혀있겠군. 다시 고개를 돌리자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온실에서 키운 나비들이 여관에게 날아가 곱게 올린 머리끝으로 앉는 것이 보인다. 살랑살랑하는 날개짓이 마치 비녀로 장식한 듯 유려해보인다. 귀한 여인이시지. 세상 어떤 사내라도 한번쯤 돌아보고 싶은 여인이지. 품성과 외모, 향기까지 어느것 하나 빠질 것 없이 진실로 귀한 여인이시다. 나라가 멀쩡했다면 대장군이나 그보다 더한 집안의 마나님이 되어 관직뿐이 아니라 여인으로서의 행복또한 찾았을 것을. 가끔가다 화원의 꽃을 구경하기 위해 들어오는 한족이나 거란의 어린아이들과 놀아주는 그녀의 모습은 매우 즐거워보였다. 이제 한 30이시던가. “한판 더?” “절대. 왕씨는 이길 수 없는 시합을 하지 않는 법.” 하류사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여관이 차를 준비하기 위해 잠시 나가자 다시 창문을 바라본다. 여전히 백라는 눈에 불을 키고 감시중이다. 그러던 중 갑작스럽게 그에게 제비 몇 마리가 황급하게 날아든다. 자신들을 재촉하며 앞으로 나서는 제비들을 밀치며 하나하나씩 읽던 그는 밥달라는 제비들의 요청을 뿌리치고 안으로 사라진다. “여관, 잣이나 물려 주셔야겠습니다?” “예.” 여관이 내려가는 소리와 백라가 올라오는 소리가 들리자 하류사는 미소지었다. “왕씨, 전서구에서 14왕자가 한족 장군의 군대를 요청했다는 글이 왔습니다.” “목적지까지 알려졌나?” “목래입니다. 어떻게 할까요?” “어쩌긴 어째, 가서 명림씨를 빼와야지.” 전서를 다 읽은 하류사가 기지개를 피며 일어났다. “목씨 정륜은 어떠하신가?” “고뿔들리신게 좀처럼 좋아지시질 않고 있습니다.” “...” 잠시 고개를 갸웃한 왕씨는 전서를 화로에 넣어버린다. “목례에 전서를 보낼까요?” “안된다. 보아하니 기습할 생각인 것 같은데 미리 준비하고 있다면 우리쪽이 들킬 위험이있다.” “그러나...” “뭐가 걱정이던가? 목래에 대해 알아본 것이 있는가?” “예?” “그들, 난공 12성의 영웅서에 들어간 인재들이니 스스로 빠져나오길 기다리면 될것이야.” 하류사는 잠시 생각하더니 계속 이었다. “하지만 목씨 정륜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말게나. 늙은이에게 좋지 않을거야.” “...예.” “그리고 우리쪽에서는 왜 태진 놈이 군대를 일으켰는지 알아나 보지.” 왕씨의 말에 백라가 고개를 숙이고 나가자 기회라는 듯 재빠르게 옷을 갈아입는 하류사였다. 제비에게 잣을 물리고 올라온 여관이 그 모습을 보고 물었다. “나가시려구요?” “못본척 하시게.” "힘듭니다." 어깨를 으쓱한 여관이 뒤로 물러나자 내려간줄 알았던 좌보가 눈을 매섭게 뜨고 자신을 본다. "...알았다. 알았어." 하류사는 다시 옷을 벗으며 차를 홀짝였다. 때 아닌 출전에 한족의 부인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묻는다. “어디로 나가시는 겁니까?” “별 것 아니야. 잠시 외출하는 왕자를 모시는 것이니 걱정하지 마라.” 여인은 고개를 숙이고 나가지만 계명은 책을 뒤적이며 목래가 어디에 붙은 곳인지 찾고 있었다.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 곳이다. 한참을 뒤적여 찾은 곳은 너무도 작아 대 세력가인 자신은 모를만한 외지의 작은 성이였다. 허탈하게 웃으며 책을 던지고는 검을 차고 집을 나선다. 따라나오는 서너명의 부인과 첩에게 들어가보라고 말하며 자신의 수하와 책사 둘과 함께 이미 도성 밖에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군인들에게 향한다. “목래라, 들어본적이 없다 했더니 목주에 근처의 개미만한 성이더군. 삼군을 끌고 간다는 것은 할일없는 짓이다. 일군만 데리고 간다.” “하지만 계명장군님. 목래는 난공 12성중 하나지 않습니까? 그러니 삼군을 데리고 가는 것이 옳습니다.” 삼군을 데리고 가길 원했던 책사가 대답한다. 하지만 계명은 웃기만 한다. “난공이라지만 누군가 공성했기에 그것이 저놈의 땅이 되었다가 이놈의 땅이 되었다가 하는 것이다.” “...” “뭐, 지금은 이곳 저곳 돌아다니는 것도 힘든 때이니 외출하는 것으로 치자.” 계명은 환하게 웃었다. 세달 후에 태어날 아이 때문에 기분이 좋은 듯 하다. 부인이 아닌 첩에서 얻는 아이지만 첫 아이인만큼 기분이 좋은 듯해 책사들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는 힘을 기르고 있는 사내다. 그러니 이곳 저곳 돌아다니며 사람을 모을수 있다면 어떤 부름도 마다하지 않았다. 지금 데리고 있는 수하들과 책사도 그렇게 얻은 사람들이였다. 저 멀리 마차를 타고 한가롭게 산책을 나온 듯한 왕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계명은 인상을 찌푸렸다. 공성하기 위해 가는 지도자가 저런 식의 허술함을 보이다니. “가는데 얼마나 걸리지?” “행군이니 가는데 80일은 걸립니다.” “난 80일 안으로 돌아오고 싶다.” “불가능합니다.” 계명의 말에 태진은 불쾌감을 표현했다. “그렇게 할수 있는 것이 장군인줄 알고 있었는데?” “...그러시다면 기병만을 이끌고 가야합니다. 하지만 공성하는데 기병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럼 기병먼저 도착하고 보병을 나중에 오도록 하게 해라. 어쨌던 80일 안으로는 돌아온다.” 태진의 말에 계명은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전쟁의 전자도 모르는 왕자같으니라구. 네 놈이 전장의 지휘자가 된다면 금의 앞날도 뻔하다. 하지만 계명은 씨익 웃어보였다. 일단 도성과 멀어진 목래의 전투에 들어가면 어차피 그는 내 손에서 움직여야 할것이다. 이런 점에선 햇병아리 왕자가 더욱 편리하긴 하지. 하지만 왕자의 얇으면서도 예리한 눈을 보았을때 계명은 약간의 불길함도 느꼈다. 저런 눈을 가진 지도자는 자신에게 불리하면 그 누구든 내칠자이다. 신용을 두기 어렵지. 이 싸움에서 스스로 살아남을 계책 정도는 준비해가야겠어. 계명은 기병만을 이끌고 먼저 왕자와 함께 달리게 하였다. 하지만 스스로는 보병들과 함께 느린 속력으로 걸어갔다. 의아하게 생각한 한 장수가 물었다. “어째서 전하의 옆으로 달리시지 않습니까?” “철부지 왕자에게 쓴 맛좀 보여주련다.” “예?" “얼마 가지 않아 흔들리는 마차에 못이겨 천천히 가자고 할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우린 보명과 기병 모두를 챙겨갈수 있지.” 얼마 가지 않아 계명의 말대로 태진은 흔들리는 마차를 질색하게 되었고 그들은 천천히 목래로 향했다. 하지만 계명 스스로 너무 늦지 않도록 신경쓰고 있었다. 90일 후에 첫 아이가 태어난다. 그러니 난 반드시 90일 전에는 돌아올것이다. 그래서 군은 35일 만에 목주를 지나칠수 있었다. 철컹하는 소리가 들리며 옥문이 열렸다. 반쯤 잠들어있던 장군 을노와 상장군 마류가 몸을 일으켰다. “역시 이곳에 계셨던 것입니까?” “조카야?” 상장군 마류의 조카인 마유장군이 옥으로 들어와 그들을 일으켜 세웠다. “나가십시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분께서 벌써 외출을 하시나봅니다?” 을노의 말에 마유는 고개를 저었다. “나오시다가 좌보님께 들켰지요. 제가 호위를 맡고서야 나올수 있었답니다.” “어떻게 우리일을...” “제비가 날아와서요.” 옥을 나가는 얼마간의 보석금을 치룬 후 그들의 짐을 돌려 받을 수 있었다. 서둘러 나온 그들 앞에 한가롭게 내리는 눈을 구경하던 사내가 고개를 돌린다. 모두들 고개를 숙였다. 하류사였다. 을노의 예상과는 달리 병사차림이 아닌 사복 차림이었다. 하류사는 피식 웃었다. “서둘러 달려가셔야 할 걸세.” “마류님, 아저씨 대신 제가 갑니다.” “마류 장군은 날 호위하게. 빨리 달려야 하니 젊은 장수들을 보내지.” 그 이상의 말이 없이 왕씨가 등을 돌리자 마류는 조카에게 자신의 말 고삐를 넘기고 왕씨를 따라나섰다. 마유와 을노가 말을 타고 외각의 성을 나가자 마유가 작게 말한다. “전서가 왔네. 목래가 전쟁 중인 것 같더군.” “예? 언제요?“ “자네가 옥에 있다는 전서는 오늘왔고 목래에서 전쟁에 관한 전서를 보낸 것은 어제일이야 . 군이 목래로 향했던 일은 한달 전에 도착했지만 막상 그 말을 전달할 자네를 찾을수가 없었지 않은가? 아무튼 지금이라도 서둘러 달려가 두 사람을 빼오라는 왕씨의 명이시네” 말을 마친 마유가 자신의 말을 재촉했다. 힘껏 달리며 을노와 마유는 목래에 도착할 시간을 계산해보았지만 아무리 밤낮을 향해 달린다 한들 30일은 걸린다. 이를 악물고 달리는 두 사람은 아무런 생각을 할수 없었다. -- 단설의 역주는 인용과 개인적 견해가 들어간 글입니다.(맹신(盟信)사양. 도용씁쓸)-- 왕자들의 뒷이야기. 중국은 왕자들도, 공주들도 많았다. 하지만 황제가 되는 것은 단 한명이다. 그렇다면 그 이후의 왕자듶과 공주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진시황의 뒤를 이은 호해왕자가 태표적인 케이스이다. 그는 아직 갓난 아이에 불과한 형제와 공주, 절로 들어간 도사급의 형제까지 모조리 숙청해버린다. 왕자만이 아닌 힘없는 공주들까지 모조리 죽인다. 단 홀로 남아 황제의 자리에 올라 진나라를 말아먹고 만다. 보통 황제뿐이 아닌 왕,일개 성주나 가문의 장자라도, 대를 이을 자가 정해지면 그 이후의 형제들은 모두 집안에서 나가는 것이 도리였다. 이때 집을 나가는 유형이 어떤가. 공주들은 시집을 가면 된다. 이때 시집을 가는 것도 대부분 정해져 있었는데 정략결혼이라고 할수 있는, 지방의 세력 호족과 결혼하는 것이 대부분이였다. 고급 관료들과 결혼하는 일은 극히 드문 것이였다. 외척의 피해를 이해한다면 고관들에게서 며느리를 얻는 경우는 있어도 공주를 주는 경우는 힘든 일이였던것이다. 하지만 드라마나 영화는, 소설에서는 이것을 무시하기 일수다. 결국 왕실과 종친을 함으로써 지방에 내쳐진 상황을 무마시키려 했던 정치적 결혼이 대부분이였다. 그러나 이때 호족이 반란을 하게 된다면 시집간 공주는 물론이고 그녀이 아이까지 호족가에서 죽음을 당한다. 또한 왕실측에서 반란을 진압하였어도 공주는 호족의 여인이 되었음으로 역시 죽는다. 이렇게 저렇게던 왕실의 여인들은 시집후의 편안 삶을 누리는 것은 운에 따르는 듯 하다. 왕자들은 대부분 호족이나 도사가 되었다. 나이가 많아 장성한 왕자는 가족을 이끌고 먼 지방의 호족으로 정착을 하거나 태자가 정해지는 순간 먼 전선에 배치되었다. 가족이 없는 젊은 왕자는 머리를 깍고 절로 들어갔다. 왕자들은 결혼과 동시에 지방 호족세력으로 끼어들어가 왕성에서 벗어나는 것을 택하기도 했는데 이때 왕자의 처가는 지방에서도 알아주는 고급호족으로 왕자의 신분을 이길수 있는 가문을 선택했다. 왕자가 자신이 왕자라는 것을 잊고 처가의 흐름에 빠져흐를수 있게했다. 하지만 운이 나쁘다면 새 황제가 즉위한후 대부분의 왕자들은 최전방으로 배치되 의도적인 죽음을 맞이하거나 사약을 내리거나 자결을 원하는 첩치를 내렸고 그것들이 내려오면 그들은 당연히 따라야 했다. 만약 사약이나 병역을 거부하게 된다면 그것은 반역으로 사형에 해당되었다. 단, 왕자의 처가나 마나님은 재가 할수 있었다. 어떤 경우, 황제는 왕자가 죽고 난 후의 부인을 도사로 만들어 궁으로 들여오거나 새 남편을 중매섰는데 이것은 당시 왕자의 처가가 강권의 호족인것을 보여주는 단면이기도 하다. 18 챙그랑... 챙그랑... 자휼이 눈을 뜨자 창호지를 덧댄 창문이 다른 때와 달리 너무도 하얗게 빛났다. 조용히 일어나 창문을 열자 온통 하얀 눈으로 깔린 성안이 보인다. 어제 그리 조용하다 했더니 눈이 내리는 것 때문이였나. 처마에 걸린 풍경이 계속 날카로운 소리를 낸다. 자휼은 그것을 올려다 보았다. 솜씨하고는. 몇해전인가 한겨울 고뿔로 못나가는 아우가 신경질을 부리며 동판을 칼로 갈아가며 겨울내내 만든 풍경이였다. 몹시 화가 나있던 것인지, 아니면 원래 이놈이 저런 것에는 솜씨가 떨어지는지 끝에 단 풍경의 종이 물고기 모양인지 나비 모양인지 통 가늠할 수가 없다. 자휼은 처마 끝을 순서대로 바라본다. 풍경은 다 합쳐서 3개다. 첫해는 너무 아파 만들지 못했었고 그럼 저 달 모양이라고 짐작되는 것이 2년에 만든것이고 지금 이 물고기인지 나비인지 알수 없는게 3년의 것이고 마지막의 저 ... 정말로 정체를 모르겠는 저것이 작년에 만든것이군. 올해는...? 자휼은 잠시 고개를 갸웃하며 반문했다. 올해는 어쩌지? 가만히 서 있는 태수에게 매우 조용한 새벽이었다. 성안에는 하얀 눈이 깔려있었고 아직 아무도 일어나지 않는 듯 길가에는 발자국 하나 찍혀있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잠시 나가고 싶은 충동이 든것은. 소리 없이 옷을 입고 성 밖을 나간 태수는 한참 후에 돌아와 자신의 옆방으로 들어갔다. 휘장을 걷자 이젠 역겨운 풀 냄새 대신 침향이 풍긴다. 아직 자고 있는 아우를 보고 깨울까 말까 고민하다 부드럽게 등을 쓰다듬자 잠시 후에 거짓말처럼 눈을 뜬다. “...형?” “쉿. 옷을 걸치고 나와 봐라.” 자례는 잠이 들깬 눈으로 이미 옷을 다 입고 자신을 내려보는 형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굿간에 무슨 일이 생긴것일까. 아니면 동파를 입어 쌀창고가 무너졌나? 대강 옷을 입고 문밖으로 나가자 자휼은 따뜻한 모피를 아우에게 걸쳐주었다. 아우는 이상하다는 듯 물어본다. “..어디...멀리 가요?” “그래. 성이 깨어나기 전에 잠시 밖으로 다녀오는 거다. 왜 그런 표정 짓니?” 자례가 뚱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자 자휼이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좋아할줄 알았더니만. 그제서야 활짝 웃으며 아우가 말한다. “거짓말을 하나 했죠. 이야, 목래 군승, 부임 5년만에 겨울 영지를 돌아보는구나.” “그 군승이 부임 매년 걸리던 고뿔이 올해 이상하게 그냥 지나간 것도 기념해 놓거라.” 하지만 별로 신경쓰지 않는 다는 듯 베시시 웃으며 먼저 아래층을 돌아 마굿간으로 들어가는 아우를 붙잡는다. “내 말로 갈 꺼다.” “제 말을 꺼내...” “아니. 이놈 흑염(黑炎:검은 불꽃)만이 할 수 있어.” “...?” 스쳐지나가는 주인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자신의 검은 말 묵계(墨桂)에게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자례는 자휼의 말인 흑염에게 올랐다. 역시 흑염은 명마라 둘이서 타도 끄덕 없다는 듯 씩씩하게 고개를 돌려 보인다. 쌓인 눈으로 인해 말굽소리가 눈 속으로 사라지며 둘은 성문을 빠져나왔다. 스치는 바람이 너무 시려 저절로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지만 새하얗게 변한 평원을 머리가 휘날리도록 달리는 것이 너무도 마음에 들어 미소짓는다. “조금 춥지만 좋지?” “...귀가 떨어져 나갈 것 같아요. 후후” “저런. 우리 유능하신 군승님이 귀머거리가 되면 안 되지.” 자신의 품으로 동생을 기대게 해 꼭 안아주자 정말로 춥긴 한지 덜덜 떨고 있는 몸이 느껴졌다. 조금 이른 외출이였나 하는 감도 오지만 그래도 오늘같은 겨울이 두 번 다시 오기 힘들테니까. 좀더 달리자 목래의 수원지인 광대한 가랑 호수가 보인다. 자휼이 묵계를 멈추며 말한다. “다 왔다.” “... 가랑 호수에서 할일이 있으신가요?” “ 부임 후 처음이더라. 호수가 이렇게 완전히 얼어버린 것은.” “예?” “이랴!” 자휼의 명령에 말은 주저 없이 호수로 달려 들어갔다. 자례는 기겁을 했지만 호수의 물은 꽁꽁 얼어있는지 튼튼한 지면의 역할을 해주고 있었다. 호수 중앙으로 말을 달리게 한 자휼은 갑자기 말고삐를 낚아채었고 그대로 멈춘 말은 쭉 미끄러져 내려갔다. 움찔하며 고삐를 잡아당기는 아우에게 말한다. “걱정 마. 이놈은 넘어지지 않는다.” “그래도...” “하늘을 올려다봐라. 호수라고 생각하면 즐기지 못하니까.” 자례는 그 말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귀를 스치는 바람의 방향에 따라 눈을 머금은 구름이 빠른 속도로 지나간다. 달리지 않고 미끄러지는 말의 등은 흔들리지 않는다.마치 하늘을 날고 있는 듯한 묘한 기분. “내게 몸을 완전히 기대라. 어깨에 힘을 빼봐.” 자례의 어깨에 힘이 풀린다고 느끼자 자휼은 고삐를 놓았다. 말도 즐거운 듯 이리 저리 방향을 바꾸어가며 호수를 미끄러져 내려갔다. 마치 하늘을 날고 있는 듯한 묘한 부양감에 기분 좋은 꿈을 꾸는 것 같다. 움직이지 않도록 허리에 돌린 형의 팔에 손을 얹고 회색 하늘을 올려보던 자례는 웃고 말았다. 이야, 이런 날도 오는구나. 역시 오래 살고 볼일이야. "재미있지?" "예.그런데..." "기억하고 있니? 우리가 이곳으로 처음 부임해서 한 내기말이다." 흠칫. 좋았던 기분이 단번에 바뀌어 버린다. 이 놈의 형은 잊으면 안될 것은 다 잊는데 잊어 줬으면 하는 것은 절대 잊어버리는 법이 없더라. 짐짓 모르는 척을 해본다. “...잘 모르겠는데요.” "왜 있지 않았니? 호수 너비를 재는 것 말이다. 분명 나는 638이고 넌 635라고 했었지." 자례는 정말로 생각이 안난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어떻게 잊겠는가. 단순한 말다툼으로 이어진 내기. 이 내기를 확인하기 위해 호수를 왕복하다 입성식을 잊은 두 사람을 기다리다 지친 관리들이 호수로 몰려나왔었다. 자휼은 말을 몰아 호수 끝으로 갔다. 눈이 소복히 쌓인 호수가 눈앞에 펼쳐진다. 자휼의 손이 자신의 어깨 넘어로 뻗어 고삐를 잡았다. "잘 세어라. 638인지 635인지." "..." "고개들고." 마지못해 고개를 들었지만 자례는 안 세어도 이젠 알수 있었다. 638보다. 틈이 나면 와서 재어보았고 쉬첸과 왔을때도 여러번 재확인해보았다. 1보. "그때 말이다. 내기의 내용이 뭐였더라?" 30보 "네말을 그대로 사용하자면 '빨리 장가나 가버려서 나 좀 편안히 죽게해줘'였지?" 135보 "...쓸대없는 것은 잊지도 않는군요. 형님은." 268보 "돌보아 왔던 동생에게 듣는 이야기로는 너무 야속한 말이여서 말이다." 380보 "그리고 내가 내걸었던 것은 뭐였더라?" 465보. "...기억 안나요." 503보 "너는 중요한것은 기억하지 않는다니까." 530보 "내가 맞으면 ..." 554보 "내가 장가를 못 고르는 이유를 알려준다고 했지?" 590보. "자례야?" 603보. 심각할정도로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자례는 가슴을 눌렀다. 아픈것이 아니다. 이상할정도 불안해서 두근거리는 거다. 자휼이 걱정스럽게 보고 있는 것을 알지만 그렇다고 해서 말은 멈추지 않아. 눈을 감는다. 더이상 걸음수를 바라보고 싶지 않다. 하지만 매정한 말굽의 소리는 텅빈 초원을 울린다. "워!" "?" 갑작스럽게 자례가 고삐를 당겨 말을 멈추었다. 기분좋게 걷고 있던 명마 흑염이 갑작스런 신호에 급히 발걸음을 멈춘다. 자휼이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왜 말을 세우는 거야?" "...형." 알고 싶지 않다. 알고 싶지 않아. 왜 형이 장가를 못고르는지, 좋은 여인을 만나지 않는지는 어렴풋이 느끼고 있다. 날 두고 갈수가 없는거다. 얼마 남지 않은 동생을 남기고 떠나지 못하는 거다. 그래 모두 내 탓이겠지. 알고 있었다. 처음 피를 토했을 때 나는 형의 짐이 될꺼라는 것을.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정말로 열심히 공부했다. 장군으로써 안된다면 글쟁이로라도 도움이 되고자 했다. 믿음을 주고 홀로 설수 있다는 것을 보여줘 자신을 부담스럽게 여기지 않게 하고 싶었다. 어느때인가 내가 떠날 때 적어도 형이 혼자가 아닌것을 보고싶었다. 하지만 몸은 뜻대로 되질 않았다. 결국 형의 발목을 잡고 말았다. 처음에는 자살도 생각했다. 목래의 공성이 막바지에 이를 때 자연스럽게 전사한다 한들 누가 말릴까. 하지만 두려웠다. 죽음이 아닌 더이상 자휼을 볼수 없다는 것이 참을수 없는 공황상태로 이끌었다. 그렇게 몇년인가. 그런데 지금와서 형의 입에서 나 때문이라는 말이 나온다면 참을 수 없을 것이다. “자례, 형은...널...” 갑작스럽게 귓가에 들려온 말에 자례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형의 얼굴이 이렇게 가까이 있었나? 시선을 돌리려는 자례의 얼굴을 자휼의 따뜻한 손이 부드럽게 올려 잡았다. “나는 ...” "...말이.." "응?" “ 호수가... 모르겠어요?” 그제야 자휼은 급히 꽁꽁 언 호수를 내려보았다. 규칙적으로 흔들리는 얼음호수의 바닥. 군의 단위가 몰려오고 있다는 것. 바람에 실려 오는 가느다란 먼지. 눈이 내리지 않은 먼 곳에서 왔다는 것. 좌우로 흔들리는 말라버린 풀은 그들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준다. “군대가?!” “성으로 돌아가요!” 자례의 말에 자휼은 급히 말을 돌렸다. 무슨 일이 생기려는 거지? 자휼은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불길함이 일순간에 터진 듯 요란한 심장소리를 느꼈다. 사라질 것 같다. 아침마다 시작되는 영원할 것이라 여겨왔던 일상이 어느 날 한순간의 신기루처럼 그렇게 사라질 것 같다. 오늘 아침 여전히 옆방에서 곤히 잠들어 있는 동생은 어느 때와 다름 없었다. 하지만 눈을 깜박이는 사이 잠든 아이가 사라질 것만 같아 두려워 눈을 돌릴 수 없었다 왜 그럴까. 내가 떠나지 않는 한 넌 날 떠나지 않을 텐데 왜 이런 불안함이 생기는 것일까. 용기를 낸 것이 아니다. 그저 가슴속의 막막한 두려움에 못 이겨 이곳으로 밀려왔다. 내기를 핑계삼아, 겨울의 시린 추위를 방패삼아 가슴속의 응어리를 털어버리고 싶었던것일까. 아니라면 왕자의 방문으로 인해 내 치기 어린 질투를 알아버리고 조급해 진 것일지도 모르지. 자휼은 품에서 바람을 피하는 동생을 내려보았다.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목래 관리로서의 얼굴. 하지만 왜 그 얼굴에 안도감이 여려 있는지, 그 미묘한 표정을 눈치챌 수 있는 내 존재가 지금은 너무도 서글퍼 품안의 동생을 꽉 안아본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태수이며 이 아이의 하나 뿐인 혈육이다. 그리고 그것이 시간이 지날수록 너무도 힘들다. 19 늙은 병사는 눈을 비볐다. 분명 저 초원에서 뛰어오는 검은 명마는 태수님의 말이 분명한데 도대체 언제 나가셨단 말인가? 조금 더 가까이 달려 오자 군승님도 있는 것 같다. 정말로 눈이 잘못된것일까. 한 겨울에 군승님께서 성 밖으로 외출을? 하지만 황급히 뛰어온 태수는 자신을 향해 외친다. 문을 열라는 신호일테지. “징을 울려라! 성문을 올리고 여인들과 아이들을 내성으로 대피시켜라!” “예? 아...!” 성문을 지키던 늙은 병사는 그제서야 저 멀리 초원의 수평선 위로 아른거리는 무엇인가를 발견하고는 사색이 된 얼굴로 망루로 뛰어갔다. 순식간에 시끄러워진 마을을 내려다보며 자휼은 부리나케 군복으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오래간만에 입는 옷이 이질적이여서 신경질을 부리자 그 소리가 옆방에 들렸는지 아우가 들어와 옷 시중을 들어준다. “형, 나...” “안돼. 넌 여기서 성의 질서를 유지한다.” “하지만!” “물론 성 위로 올라오는 것도 안돼. 알아들었지?” “...예.” 자례는 할 수 없다는 얼굴로 쉽사리 포기했다. 자휼의 갑옷 입는 것을 도와주며 조용히 웃는다.. 결국 난 성위로 나가 지휘하게 될 것이다. 특히나 저들이 왕의 군사라면 형의 지략가지고는 안될 것이 분명했으니까. “...게다가 전쟁을 앞둔 장군의 심기를 거슬릴 필요도 없지. 라고 생각하고 있지 너?” “응? 아아.” “뭐, 네 말도 사실이다. 일개 군을 치기엔 우리 쪽이 열세지.” 자휼은 자신의 방에 걸려 있는 검 중 가벼운 검을 자례에게 던졌다. “함께 성위로 올라가 지휘한다.” “분부대로.“ “단 몸이 이상이 있다 느껴지면 바로 피한다. 알았지?” “예” “좋아. 예전에 알려주었던 검을 잃어먹었다고는 하지 않겠지. 넌 강하지 못해도 약하지도 않 다.” “어떻게 잊겠습니까.” 지독하리만큼 호된 훈련 이였는데. 자례는 능숙하게 검을 뽑아 손목을 이용해 한바퀴 돌린 후 정확하게 검집에 돌려 넣었다. 하지만 너무 오래간만이라 무겁긴 하군. 먼저 갑옷을 걸친 자휼은 방을 나갔다. 성주가 나가자 시종들이 자례가 갑옷을 입는 걸 도와주려고 방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자례는 머리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괴고 창문사이의 바람을 쐬고 있었다. 638가 맞아. 오늘은 다행히 그 전에 멈추었지만 ... 다음은? 다음은 나도 알수 없지. “책사의 포도 가져와라. 군승으로는 벅찰 것 같다.” “예.” 자례는 아직 올려 묶기엔 짧은 머리를 하얀 수건으로 감쌌다. 일단 나중에 생각하자. “목래라, 참으로 촌스러운 곳이군. 따뜻한 모피를 두른 태진이 마차의 휘장을 걷고 나와 구운 벽돌로 만든 성을 바라보았다. 아마도 진흙으로 만든 벽돌을 쌓은 것이 분명하다. 어떻게 저것이 저렇게 세워지지? 궁금해 하는 때에 노련해 보이는 중년의 장군이 마차 앞으로 다가와 부복했다. “전하, 성문은 닫혀있고 목래의 기가 올라있는 것을 보아...” “적으로 간주한다 이거군. 그러고 보니 목래의 성주는 정안족이라지?” “예. 하지만 성주 수장군은 요나라부터 한족의 관직으로 살아온 자입니다.” “누가 강한가?” “예?” “너와 저 성주 중 누가 강한가 묻는 것이다.” “...잘 알겠습니다.” 장군은 뒤로 물러났다. 철부지 같으니라구. 장수의 뛰어남과 어리석음은 힘으로 가리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역시 한족에서 알아주는 명문이지만 지금은 고작 14왕자의 말에 군사를 움직여야 하는 비참한 신세다. 무슨 말을 해서 왕자를 깍아내려도 자신은 지배당하는 민족이고 그는 지배하는 민족인것이다. 속으로는 그를 욕할지라도 보이는 곁으로는 공손히 따라야 한다. “정안인은 황제에게도 부복하지 않아도 된다지.” 변방으로 밀려났다고는 하지만 마지막까지 자신의 신념을 지킬 수 있는 정안족이 부러웠다. 비록 이런 초원에서 말을 쳐야 한다지만 저렇게 자신의 마음대로 성을 지키고 다스리는 목래의 태수가. “...고고한 민족이로다. 분할정도로.” 자신의 눈앞에 도깨비 문장의 푸른 갑옷을 입은 목래의 성주가 성벽위로 모습을 드러내자 계명은 중얼거렸다. 참으로 고고한 민족이로다. 하지만 그 고고함으로 인해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난세에는 영웅보다는 간웅이 그 이름을 길게 남기는 법이니까. 이마에 손을 얹어 새 하얀 눈의 빛을 가리며 자휼이 중얼거렸다. “기에 선(宣)자, 14왕자의 기군. 그런가? ” “...예. 14왕자 선헌왕비의 아들 태진입니다.” 자휼은 뒤에 서 있는 자례를 돌아보지 않고 물었다. “...덤벼들까?” “반드시 덤비게 만들어야 합니다.” “이대로 버티는 것은 어떤가? 어쨌거나 우린 성이고 저쪽은 벌판이야. 얼마 버티지 못한다.” 자례가 조금 앞으로 나와 활이 미치지 못하는 안전지대까지 피한 군사들의 배치를 보며 말했다. “왕자를 호위하는 기도위(騎都尉)의 병사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왕자가 공식적으로 나온 것이 아닌 몰래 나왔다는 이야기입니다. 비공식적으로 나온 왕자가 2개 군을 끌고 있는 장군을 데리고 이곳까지 질주했다라... 게다가 병사들은 지금 막사와 목책을 짓고 있어요. 이건 명백히 잠시 들려보려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 “만약 왕자의 신분을 이용해 문을 열라한다면 열어야 합니다. 안열면 반역이 되니까요. 하지만 늑대를 집안으로 들일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결국 덤벼들게 만들어 버텨야 한다는 거구나. 왕성으로 소식이 전해지기 전까지.” “예” 자례가 바람의 방향을 살피는지 자휼에게 등을 돌렸다. “그런데 자례?” “예?” “...이 일이 끝나면...” “...” “가랑 호수에 다시가보지 않겠니?” "...얼음이 녹을지도 모릅니다." " 넌 궁금하지 않는가 보구나?" 자례가 잠시 멈칫했다고 본 것은 착각일까. 성벽에 늘어선 관리들과 병사들은 자신의 믿음직한 태수와 영리한 책사 출신의 군승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자례는 천천히 몸을 돌려 자휼을 바라보았다. 입을 열어 뭔가 말하려고 하는 눈빛이다. 시선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흔들리는 눈동자가 마음을 드러내는 듯하다. 그 입에서는 거절이 나올까 승낙이 나올까. “그만.” 자휼이 먼저 그의 입을 막았다. 됐다. 일단은 앞의 일부터 해결하자. “싸움 전 미안한 것을 물은것 같구나." “....관리들은 저번 15왕자에게 들어간 말이 왕성으로 입고되었는지 재확인해보시오. 일단은 왜 목래를 치는 지 이유를 알아야 할 테니.” 자례가 숨을 돌리며 참으로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관리들이 서둘러 내성으로 들어가자 자휼에게 눈짓한다. “저도 잠시 들어가 확인해보겠습니다.” “그렇게 해라.” “오래 걸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들은 오늘 우리를 치지는 않을겁니다. 행군에 지쳐 있을테니까요.” “그럼 기다리지.” 등을 돌리는 하얀 포를 걸친 동생의 모습이 책사로 있을때의 시기를 떠올려 미소짓는다. 그땐 너는 참 아이였는데 말이다. 벌써 저렇게 커버렸구나. “헛헛헛...” “왜 그러십니까 태수님?” “잠깐 옛기억이 떠올라서 말이다.” “지금 이런 때에 무슨 회상이랍니까?” 손노장군이 인상을 쓰며 묻는다. 하지만 터진 웃음은 그대로 멈추지 않아 근처의 병사들이 눈이 휘둥그래져 태수를 바라본다. 한참을 낄낄거린 태수는 헛기침을 하고 근엄한 표정을 짓지만 이미 늦었다는 장수들의 얼굴을 보고는 입을 연다. “아니, 저 놈이 백포를 걸치니 예전 일이 떠올라서 말이다.” “무슨?” “그러니까 그게 언제 일이더라... 거란과 싸울 때인데...” 적군을 앞에 두고 하는 태수의 옛날 이야기에 장수들이 망루에 모여들었다. 조금 조금씩 병사들도 모여든다. “지금 상황과는 반대 된 상황이였지. 평원에 두 진영이 진을 쳤는데 난대 없는 기습으로 거란에게 진영을 빼앗겼어. 당시 군승은 막 전장에 투입되었기 때문에 서툰 면이 없지 않아 있었거든. 지금이야 요리조리 잔머리를 굴리지만 그때는 정도(正道)가 아니라면 할 생각조차 못했으니까.” 한밤에 일어난 기습에 당황하는 군사들을 이끌고 조속히 퇴군을 지휘하며 생각보다 큰 피해 없이 피할수 있었다. 문제는 그 이후 일어난 일이였다. 진영을 수습하고 쳐들어오는 군사를 홀로 막다보니 가장 위험한 선두에 서느라 동생을 다른 장수들에게 맡겼던 것이 문제가 되었다. “방장군이 죽었어?!” 다시 세우고 있는 진영에서 자휼은 크게 화를 내었다. 믿었던 장수건만. 아깝게 죽었다는 느낌도 안들고 그에게 맡긴 아우만 떠오른다. “책사는?! 내가 데리고 온 책사는!” “그...그것이...!” 마구 화를 내는 자휼에게 다가가지는 못하고 장수들은 멀찌감치 떨어져 무언가 날아오지 않기만을 바랄뿐이였다. 듣고 있던 장수들과 병사들은 자휼이 얼마나 화를 내었을지 충분히 짐작이가 잠시 동안이지만 그때 자휼의 옆에 있어야만 했던 장수들에게 묵념을 했다. “아무튼, 진정하고 동생을 찾아 나서는 수 밖에 없었어. 난 일단 근처를 수색하다가 뺏긴 진영쪽으로 들어갔지. 그리고 동생을 찾았는데 정말로 어이없는 곳에서 찾았거든.” “어딘데요?” “거란 장군의 막사였어. 그의 부인과 함께 있었지.” “예?!” 바둥바둥거리며 자례는 통통한 부인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감힘을 쎴다. “난 아이가 아니라니까요!” “어머어머, 여보, 이 아이가 또 투정을 부려요.” “그러니까! 아이가 아니라 난 책사란 말이야!” 마냥 귀엽다는 듯 품에 꼬옥 껴안는 중년 부인의 품이 답답한지, 바둥바둥 거리지만 빼꼼하게 담배만 배어무는 거란 장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듯 지긋이 웃을 뿐이다. “이건 비밀인데 그때 군승은 거란말을 못했거든.” “예? 지금은 거란, 한족, 여진어, 고려어까지 하시잖아요?” “그 이후에 배운거지. 아무튼 그래서 난 군승을 인질로 잡혔던 거지. 결국 아무일도 못하고 다시 돌아와야 했다. 하지만 계속되는 싸움떄마다 몰래 들어가 군승을 살펴보았지만 아무래도 어린 아이가 하는 말이 거짓이라고 생각되었는지 전쟁의 여파에 휘말린 불쌍한 어린아이라고 생각했나봐.” “하긴 군승님은 외소하니까.” “맛있지? 야만인들이라 아이에게 먹이는 것이 부실했나봐요. 이렇게 말랐어요.” “아, 이거 맛있네. 더 없어요?” “여보, 이 아이 성으로 데려가면 아들로 삼고 키울꺼에요. 좋죠?!” “그럽시다. 귀여운 아이니까.” “이건 맛없는데. 말린 감껍질 같이 써. 그럼 이건 뭐지?” “황제께 말씀드려서 호적을 얻게 하면 될꺼에요. 아휴, 이름을 뭐로 할까요?” 부인은 이것 저것 골라보는 자례를 끌어당겨 안았다. 답답해 하면서도 어련히 부디끼고 나면 떨어지겠지 하며 자례는 그냥 참았다. “그래서 군승은 명실공히 거란 장수의 아이가 되어버렸단 말이야. 게다가 나날히 그 상황에 익숙해지는 모습이고 말이야. 결국 군승이 그곳을 스스로 나오기전에 싸움을 걸수가 없었다. 그래서 대치 상태만 계속되다가 결국 휴전상태에 도달했지.” “그럼 군승님은요?” “물론 휴전 협정을 맺고 진영을 물리는 날...” “태수님은 오른 팔을 잡고 부인은 왼팔을 잡아당기는 바람에 양팔이 나가 일년을 고생했지.” 들려서는 안되는 목소리에 다들 화들짝 놀라 뒤를 바라보니 커다란 인상을 쓰면서도 웃고 있는 군승의 모습이 있다. 다들 헛기침을 하며 뒤로 물러서는데 자휼만은 고개를 젓는다. “그렇게 말하면 되나. 그때 네가 입고 나왔던 옷하고 양쪽으로 땋은 머리하며...” 탑하는 소리와 함께 군승이 재빠르게 태수의 입을 막는다. 싱긋 웃으면서 태수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 다가댄다. “그 일을 이야기 하시면 저 역시 비오는 날 돼지 우리에서 헤험치신...” 텁하는 소리가 들리며 이번엔 태수가 군승의 입을 막는다. 둘은 암묵적인 합의 하에 동시에 팔을 때며 헛기침을 한다. “자자 다시 제자리로.” “앗? 태수님 끝까지 책임지셔야죠!” “몰라, 몰라. 다 잊었어.” 태평하게 중얼거리며 태수는 눈을 감고 군승은 잊었던 물건을 챙겨 다시 성안으로 들어간다. 이래저래둘에 대한 궁금증이 하나 늘어버린 장수들이였다. 20 한나절 동안 그동안 왔던 문서와 공문을 찾아가며 행여 무엇인가 거스른 일이 없는지 꼼꼼하게 확인하던 관리들이 결국 두손을 들고 말았다. “맹세컨대 우리에겐 단 한구석의 오점도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린 단한번도 공납을 체류한적도 없으며 화적과 거래를 한일도 없고 군사를 늘린 적도 없습니다.” 역시 문서를 들고 허점을 찾던 군승은 그다지 흡족하지 못한 얼굴로 문서를 내려놓았다. “그렇게 따진다면 목래의 허점이 없는 것이 아니다. 아니, 한 두가지가 아니지.” “예?” “군승인 내가 차와 연꽃을 거래하는 것은 불법이다. 추수제를 지내는 것 또한, 목래가 한족의 옷을 아직도 입고 다니는 것 또한, 아직도 한족어와 한문을 사용하니 그것도 불법. 하지만 이 것의 지휘는 목래태수에게 달린 것이다. 태수의 해직이나 감봉 이유는 될 수 있어도 공성의 이유가 될 수 없지.” “그렇다면...” “나는 못찾겠다.” 군승은 문서꾸러미를 책상에 소리나게 올려 놓았다. 그리고 뒤도 안돌아보고 바로 성벽위로 올라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태수에게 고개를 저었다. 역시 태수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은 듯 고개를 갸웃했다. “이유가 없이 싸우려고 왔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이야기야.” “하지만 저로서는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우리가 모르는 이유가 있겠지.” 이미 별이 뜬 하늘을 보던 자휼은 성문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서 진을 친 군사들을 막사에서 나오는 불빛을 바라보았다. 낮의 신경전을 빼고는 조용한 대치 상태였다. “성문을 열어라.” “목래는 목주의 자치구요. 목주의 허가증과 황제의 칙서를 보이시지요.” “기에 적힌 것이 안 보인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분명 칙명에 의해 이 작은 성에 군에 해당하는 병력을 들여보내시길 원하신다는 것입니까?” 이틀째 해가 지는 저녁. 마지막 세 번째 입성 요구를 거절하자 사절은 등을 돌리고 자신의 진형을 향해 달렸다. 그 모습을 보며 자휼은 옆에 앉은 자례에게 찻잔을 내밀었다. 겨울이여서 성벽 위는 거의 얼음장 수준이다. 손자 병법에 전초전은 승세를 잡는다는 말이 있다. 적이 처음 어떤 식으로 나오는 가에 따라 승패를 좌우한다는 것이다. 지금 걱정되는 것은 자례다. 눈에 보일 정도로 몸이 좋아지긴 하지만 이런 찬바람을 계속 쐬면 좋을 리가 없을것이다. 가슴을 앓는 아우는 찬바람은 독보다 험하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 아우이긴 하지만 군승인 아이를 쉬라고 등 떠밀 수도 없다. 평시에 군승은 성의 평화를 나타내지만 전시에 군승은 성내 권력의 혼란을 야기한다. 하지만 책사는 반대다. 평시의 책사는 권력의 혼란을 꾀하나 전시의 책사는 스스로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적에게 위협이 된다. 자례도 그것을 알고 있기에 백포를 걸친것이다. 성안에는 머리쓰는 이가 있으니 함부로 덤비지 말라. 는 뜻일지도. 그리고 파랗게 질린입술로 아무 말 하지 않고 동이 트길 기다리고 있다. 벌써 몇 시간인가. 이미 해가진지 오래고 달도 저물려고 하는 것 같다. 왕군만 아니었다면 그냥 들어가라 했을 텐데. 솔직한 심정으로 왕군을 혼자서 상대하기는 힘들다는 것을 알고있다. 하지만 저대로 두면 내일은 하루 종일 열에 올라 힘들 것이다. 장군은 그의 책사에게 손을 뻗는다. “이리 와라.” “수 많은 눈이 이곳을 눈여겨 보는데 책사가 장군의 품에 안겨 있으라고요? 그리는 못합니다.” 고개를 저으며 좀더 물러나는 아우를 따라가 손을 잡는다. “사람들 눈 신경 안 쓴지 오래다. 신경썼다면 널 어찌 안아 길렸겠니?” “...하지만” “내 눈앞에서 그렇게 떠는 꼴은 못 본다. 그리 고집 피운다면 들어가서 쉬라 하겠다.” 그래도 망설이는 아우를 끌어당겨 품안에 넣어 다독인다. 얼핏얼핏 불편한 기색을 보이는 것도 잠시 곧 편안하게 자리를 잡는다. “다독이지 마세요. 잠들면 낭패입니다.” “그러지.” “목래는 형제가 다스린다 하더니 그 말이 사실인가보군.” 태진은 따뜻하게 데운 술을 한잔 마시며 성벽 위의 두 우두머리를 보았다. 분명 저렇게 같이 앉아있으면 따뜻하긴 하겠다. 하지만 눈꼴 신 형제애군. 그는 옆에 같이 앉아 있는 계명에게 물었다. “사내들이 저렇게 있는 게 역겹지 않나?” “정안족은 혈족에 관한 애정이 특별하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계명 장군은 저런 식으로 보호받은 적이 있었나?” “저는 정안족이 아닙니다.” 찬 바람이 불어 왕자와 장군의 사이를 휘돌았다. 태진이 몸을 일으켰다. “내일 저녁에는 궁에서 보내고 싶다.” “아침에 공격하겠습니다.” 태진은 물러가라는 손짓을 했다. 계명 장군은 잠시 멈칫하다 물었다. “전하께서 찾으시는 것에 대해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15왕자 생일 선물. 아, 성내의 여자들은 죽이지 않게 각별히 신경 써라.” “...예” 허망한 눈으로 계명장군은 돌아섰다. 웃기는 왕자 같으니라구. 지금 이 사태에 대해 전혀 파악을 하지 못하는구나. 지금 우리는 자국의 성을 공격하는 행위를 하고 있다. 이것은 명백히 반역이란 말이다. 믿는 세력이 있는것이냐? 아무리 작은 성이지만 이 일을 어떻게 무마시키려는 것인가. 설마 저 성을 몰살시키려는 것인가? 단 한명도 살아남지 못하게? “...하긴 그것이 정확한 방법이지.” 내일을 위해 잡생각을 떨치려던 계명은 성위를 올려다 보았다. 저들은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까? 지금 얼마나 큰 위험에 봉착했는지 알고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은 불길한 것이구나. 잠들지 않겠다던 말과는 달리 고개를 꾸벅이는 아우를 어깨로 부축하며 토닥인다. 아무리 생각하도 내가 생각하던 불길함이 오늘 이것이 아닌 듯 하다. 고개를 숙여 눈을 내리깐 아우를 바라본다. 갑자기 눈을 뜬 아우는 자신을 밀치고 일어난다. “온다.” “기병과 보병이군...공성하려는 생각이라면 바보다.” 자휼은 중얼거렸다. “공성하려면 문을 열어야지. 쯧. 기다린 보람도 없이. 애야 들어가자 잠이나 자자.” 하지만 물끄러미 적의 진격을 바라보는 아우는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있다. 무슨 생각을 그리하는지 자신의 말이 안들리는가 보다. 한참 후에 자신을 돌아보는 얼굴표정이 너무도 딱딱해 팔을 들어 아우의 손을 잡는다. “이곳은 초지다. 공성에 쓸만한 나무도 돌도 없다. 공성이 가능하리라고 생각하니? 너도 알다시피 이곳은 공성되지 않는다.” 자휼의 말에 얼굴을 풀며 웃는다. “...우린 공성에 성공했잖아요.” “저쪽에는 네가 없잖아.” “겨울, 그리고 눈. 게다가 토담으로 만든 성. 그리고 내가 저쪽의 책사라면?” “...나 방금 정말로 겁먹었다.” 자휼은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넌 저쪽편이 아니잖아. 그렇지?” “그럼요. 저는 항상 당신의 책사죠.” 군사들이 말과 무기를 준비해 대열을 이루는 것을 본 둘은 손노장군에게 지휘를 부탁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기를 가지고는 이곳에서 공성을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밤을 꼬박 지새운 장군과 책사가 여기서 힘쓸 일은 없다. 성내의 군사들과 휘하 지휘들이 성벽에서 활을 준비하는 것을 보고는 둘은 입을 가리며 서둘러 잠을 청하기 위해 성내로 들어갔다. 한창 열이 오를 시기는 정오다. 그때까지는 잠을 자두는 것이 좋겠지. 하지만 역시 표정이 딱딱한 아우를 보고 자휼은 위로했다. “여긴 난공12이다. 여길 공성한 우리가 영웅서에 오를 정도로 이곳에 힘든곳인데 왜 그리 표정이 어두우니?” “잠을 못자서 그래요.” 애써 표정을 풀며 웃지만 가슴속의 답답함을 털어놓지 못한다. 그게 문제입니다. 우리가 공성한 방법이 영웅서에 적혀 있겠지요. 게다가 저들이 하는 행위는 반역이에요. 과연 14왕자가 이 일을 어떤 식으로 마무리를 지을지... 미숙한 제겐 극단적인 방법만 떠올라 걱정이 되는군요. “잠을 자면 좋아질겁니다.” “그래 어서 자자.” 평소와는 다르게 태수의 성입구에 보초병들을 확인하며 둘은 방안으로 들어가 각각 눈을 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끄러운 병기 소리가 밖을 울리지만 둘에겐 들리지 않을 정도로 깊게 잠든다. “힘들구나. 이런 초지에서 공성을 한다는 것은.” 계명은 막사안의 탁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차마 당당하게 소리쳤던 일이 떠올라 불가능하다는 말을 내하지는 못한체 속으로 짜증만 내고 있었다. 누가 강하고 약하고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저쪽은 성이 있고 이쪽은 없다. 병서에는 성은 2만의 군사를 대신한다고 했다. 게다가 공성에는 최악의 환경인 초지에 겨울. 원군도 없는 상태에서 단기간에 공성에 성공시킨다는 것은 무리다. 잠깐 눈을 붙이고 다시 나와 성벽을 보니 성주도 책사도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쉬고 있을 테지. 그것은 절대로 공성이 성공되지 못한다는 자신감이다. 어떤 성이라도 적병보다는 성주가 가장 잘 알고 있다. “...역시 할 수 없는 건가...?” 그렇게 자신 만만하게 왔던 길을 패전하고 돌아가란 말인가? 그럴 수 없다. 난 게명장군이다. 한족의 뼈대 있는 명문가란 말이다. 저따위 정안의 장군에게 질리 없다. 계명은 자신의 책사들에게 화를 내었다. “뭐든지 말해보거라! 아무런 생각 따위 없으면서 어찌 책사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것이냐!” “하지만 장군, 병법에도 이런 상황에서 공성한다는 것은...” “시끄럽다.! 안되는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너희들 아니더냐! 저쪽은 장군도 책사도 나오지 않고 있다. 우릴 얕보는...!” 장군은 멈칫했다. 분명 저녁때도 성벽위에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출전하는 새벽까지도 보았다. 막상 전투가 시작되자 사라진 것이다. “...왜?” “예?” “왜 전투가 시작하자 사라진 것이지?” “그건 밤새 성벽위에 있었기 때문에...” “왜 밤새 성벽에 서있었지?” “그건...” “....공성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우리가 어떤 태세로 나오는지 지켜본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행한 작전으로 공성이 불가능 하다는 것을 알고 들어가버린거다. 그렇다면 태수는 공성 방법을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우리가 자신이 알고 있는 방법으로 나오는지 지켜본 것이다. “성주가 정안인이라고 했지? 어느 때부터 관직에 있었나?” “성주 수해 장군은 그 아버지 되는 수물장군부터 요나라에 종사한 자 입니다.” “그렇다면 목래의 저 성은?! 저 성은 인계된 것인가 하사된 것인가?!” “..그것은 찾아보아야...하지만 목래에 대해 나온 책자도 여러가지일테고...” “다 찾아라! 그래, 네가 이곳에 오기전에 말한 영웅서를 뒤져봐. 인계된 것이 아닌 하사라면 그에 따른 모든 전쟁 기록을 알아내라!” 아버지로부터 인계되었다면 알아내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황제에게 하사되었다면... 보통 공성에 성공한 장군에겐 공성된 성을 하사하기 마련이다. 즉 전쟁 기록을 뒤져본다면 어딘가에 저 성을 공략한 방법이 있다는 거다. 계명장군은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군인으로써 승리를 갈망하는 욕구였다. 반드시 저 성을 차지하고 말테다.! -- 단설의 역주는 인용과 개인적 견해가 들어간 글입니다.(맹신(盟信)사양. 도용씁쓸)-- 21 그 고요함에 자휼은 눈을 다시 감았다가 퍼뜩 지금이 전시라는 것을 느끼고 몸을 일으켰다. “...?” 텅 빈 아우의 방을 잠시 이상하게 생각하던 자휼은 성벽으로 나왔다. 역시나 자례는 성벽에서 적 진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늘을 보니 새벽 3시정도 된 것 같다. 하지만 새벽부터 잠을 자서 정오에 잠시 일어났다가 저녁을 먹고 다시 잠들었으니 충분히 잔 것 같아 자휼은 잔소리는 안하기로 마음먹었다. “뭘 보고 있는 거니?” “...저쪽에서 뭔가 알아낸 것 같아요.” 자례가 하얀 손가락으로 적의 진영을 가리켰다. 희미한 달 그림자속에 돌을 날리는 포차의 그림자가 보였다. “영리한 책사, 아니라면 노련한 장군이겠군요.” “... 내일은 힘들어지겠구나.” “날씨가 따듯해지길 바라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하얀 달빛은 매서우리만큼 맑았다 내일도 서리 낀 바람이 몰아치리라. 자례는 손톱을 깨물었다. 초지, 겨울, 눈. 그리고 매서운 추위. 자휼이 요의 황제에게 목래의 공성을 명해 받았을 때 꼭 이때쯤의 시기였다. 지금의 적들처럼 난감했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사방에 보이는 것은 새하얀 눈뿐이었고 밖에서 보는 목래성은 너무 높았다. 다행이라면 자례의 능숙해진 처사 방법이랄까. 눈을 뭉쳐서 물을 부어 밤새 얼린 후 포차를 이용해 성벽을 부순다. 석빙계(石氷計). 이것으로 목래 공성에 성공했고 자휼은 목래를 하사받았다. “우리가 생각해낸 꾀에 우리가 당하게 생겼구나.” “..목래에 부임되고 나서 전 항상 석빙계를 깰 방어법을 생각했었죠.” “그래. 그래서 네 말대로 성벽을 한 겹 더 쌓았다. 그래도 석빙계에 성벽이 무너질까?” “날씨가 너무 추워요. 목래의 성벽은 흙과 물로 만든 것입니다. 이런 추위에는 바위에도 금이 가기 쉽죠. 장군님, 그때 내가 두 번째 성벽에 쓸 벽돌에 마른풀과 밧줄을 엮어 넣어달라고 하였는데 그렇게 하셨습니까?” 자례가 자휼을 비스듬히 바라보았다. 공성되자마자 추위에 못이긴 자신은 이듬해 여름이 올 때까지 침대에 누워있었고 그 때문에 성벽 증축을 하나도 못 보았다. 성벽 증축을 지휘한 것은 자휼이었다. “...어, 그게 말이지. 사실 나도...” 난공 불락이라고 부르던 목래 공성에 성공한 장군으로 유명해진 자휼이 이리저리 왕성의 축하에 불려 다니느라 성벽의 증축에 신경을 못 썼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그럼 누가 성벽 증축 관리를 했습니까?” 자례는 힘 빠진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고 성내를 돌고 돌아 당시 증축에 관련된 관리들을 찾아야만 했다. 다행히 증축은 예정대로 마른 풀과 밧줄을 넣어 완공되었다는 말에 자례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 정도라면 외벽은 파괴되더라도 내벽은 안에 섞인 풀과 밧줄로 인해 무너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도성 쪽에서 이쪽 일을 하루 빨리 알아주길 바라는 수밖에...!” “어차피 겨울이라 저쪽도 오래 버티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성벽도 오래가지 못하죠.” “제비를 날려야겠다.” 자례는 조용히 자신의 방으로 사라졌다. 제비를 날려 관직에 있는 혈족들이 힘을 써주길 바라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자례는 앞뒤가 맞지 않는 이번 전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생각했다. 왕이 목래를 공격한 것일까? 아니면 왕자의 독단으로 생긴 전쟁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고위 관직의 누군가가 이곳을 모함한 것일?? “...모두 다 이유가 마땅치 않아.” 조세는 단 한번도 체납된 적이 없으며 작고 큰 궁중 행사에 공물이 안 간적도 없다. 왕궁에게 미움 받을 일은 애초에 만들지 않았다. 있다면 현 황제 아골타에게 부복하지 않아 정안족 관리 모두가 옥에 갇혔던 것. 하지만 흥료성 이후 아골타는 정안족에게 부복 받는 것은 포기하고 모두 풀려나 변방 관리들로 물러났다. 15왕자 쉬첸 역시 목래와 연관된 불상사는 없었다. 행여 그가 이곳이 마음에 들어 자신이 취하고 싶은 걸까?. 하지만 아무리 목래가 말을 친다고는 하지만 왕자가 탐낼 만한 성은 못된다. 그러기엔 너무 작은 성이다. 이렇게 좁고 추운, 초지 빼고는 볼만한 풍경조차 없는 삭막한 지방이다. 게다가 공성을 온 14왕자 태진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아는 바가 전혀 없다. “어디보자...” 1왕자는 죽었다. 2왕자 체이첸은 영리하나 패기가 없다고 들었다. 3왕자 태천은 한족계후 출생이라 실권이 없다한다. 4왕자 레이첸은 용맹은 뛰어나나 지략이 어둡다 했다. 유배되어 있다는 5왕자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다. 하지만 어쨌거나 배분 높은 왕자들과 원수진 일은 없다. 그러니 원한 관계의 일은 아닐것이다.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15왕자 쉬첸. 덜 익은 산과 석류를 먹여 배탈 나게 만들었으며 헛개천에서 삭은 다리를 건너게 만들어 헤엄치게 만들었고 갈대밭을 속옷차림으로 뛰게 만들어 잎에 베이게 만들었으며 마시는 차에 소금을 탄 적도 있는데다가... “...설마.” 하지만 자례는 슬쩍 문 쪽을 바라보며 자신의 혼잣말을 누가 듣지는 않았는지 확인해 보는 것이었다. “15왕자와 14왕자는 절친한 형제애를 자랑한다더군.” “읍!” “왜 그러니? 사래들린거냐?” 자휼은 자례가 먹던 죽을 떠먹었다. 뜨겁지도 않고 간이 짠것도 아닌데 왜 저러는 거지? 가슴을 두드리며 기침을 하던 자례가 진정됐는지 고개를 흔들었다. “어..어디서 그래요?” “오늘 목주에서 온 전서에서 적혀왔다. 그리고 왕자가 독단으로 행동한 것은 사실이더구나.” “...” “왜 말이 없니? 전시 중의 식사가 맛있다고는 하지만 그 콩죽이 마음에 든 거냐?” “으응,아 그런가?” “그래?” 전시에 군사들과 함께 먹게 되는 콩죽이나 만두는 한마디로 맛 정말 없는데. 동생은 이게 마음에 들었나 보다. 자휼은 성벽 아래의 공터에 걸린 거대한 솥을 바라보며 동생에게 겨울 간식은 이걸로 먹일까 하는 단순한 생각을 했지만 막상 자례는 심각하게 이 공성이 쉬첸의 보복이 아닌가 하는 고민에 빠져들어야 했다. 둥둥둥. “출전인가?” “전하, 소신 지금 출전하여 성을 탈환하고자 하옵니다.” “뭐, 장군을 믿겠네. 어제부터 무슨 짓을 하는가 했더니 훌륭한 석빙이군.” 태진이 모피로 몸을 감싸고 앞에 있는 석빙들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역시, 한족 명문가의 장군이로군. 내가 자네를 선택한걸 잊지 말아주길 바라네.” 계명은 부복을 받은 태진은 싱긋 웃으며 막사로 들어갔다. 계명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장군은 전장에서 살아야 한다는 말의 뜻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구나.” 매서운 추위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성벽에 늘어진 백색과 검정색의 태수기가 보인다. 이제 곧 그 기는 자신의 푸른 기로 채워지게 되리라. 석빙계. 책사들이 늙은 군인과 기록으로 찾은 목래성의 공성방법은 자신으로써는 상상하지 못했던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 방법이 정확했던 것인지 어제 새벽부터 성벽위에는 푸른 도깨비 갑옷의 성주와 하얀 옷이 책사가 이쪽 진영을 바라보고 무언가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물론 쉽지는 않을 것이다. 이 석빙계를 생각해낸 책사가 하얀 옷을 입고 성벽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어쩌면 그는 자신이 만든 석빙계를 방어할만한 무엇인가를 이미 생각해놓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렇게 가슴이 두근거리는 거다.” 계명 장군은 장군 기를 흔들게 했다. 북이 울렸다. 포차가 돌과 눈을 짓이기면서 앞으로 나간다. 전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시작이군.” 자휼은 먹던 죽을 성벽위에 임시로 만들어놓은 사령탁자에 올려놓았다. 따라 일어나는 자례에게 자휼은 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부터 내 아우는 책사. 네 형은 태수이자 장군.” “알겠습니다. 장군님.” “이번엔 방성(?城)이오. 책사의 총명함을 빌어 성을 지켜봅시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여 상관에 대한 예를 취한 자례는 지휘권을 위임받는다는 장군검을 받아 들었다. 자휼이 고개를 끄덕이자 자례는 검을 들고 장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성주께서는 성문쪽으로 다가가 중차(重車)에 대비해 성문 앞에 참호를 파는 것을 지휘하십시오. 나머지 장수들은 세 패로 나누어 일진은 동쪽으로 이진은 서쪽으로 운제(雲梯)를 막는다. 일진 한 장군이 동쪽을, 이진은 채장군이 서쪽을 막으시오. 하지만 운제가 올라오기 전까진 활로만 대항할 것이오.”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건장한 두 한족출신의 장군들이 두 손을 모았다. “싸움 도중에 성벽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더라도 병사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기선을 잡아주길 바라오. 성벽은 이중이오. 외벽이 무너져도 성은 함락되지 않소.” 하얗게 수염이 센 늙은 노장이 자례에게 물었다. “삼진은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삼진은 성내의 우물과 창고가 손실되지 않도록 방어 하나 푸른 기가 올려지면 지체 말고 성문으로 모여 주십시오.” “책사께서는 저는 늙은이로 취급하시는 겁니까? 섭섭하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손노장군. 당신은 노장. 저에 버금가는 노련함이 있는 분이오니 제 뒤에 배치하여 저의 불안함을 막고자하는 것입니다.” “허허, 총명하신 책사께서 저에게 당신을 보호해 달라고 하시는 겁니까? 좋습니다.! 노장 목래의 ‘근심’거리가 하나 사라지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노장군은 호쾌하게 웃었다. 목래의 두 가지 근심거리. 하나는 성주의 결혼이요, 하나는 책사의 가슴 병이니 둘 중 하나가 사라지는 것을 원치 않다는 이야기다. 자휼이 다가오는 포차(抛車)를 보며 물었다. “만일 성벽이 무너지면 어떡해야 하는가?” “뒤에 있던 삼진의 병사들과 성주께서 달려가야 합니다. 삼진은 돌파해오는 적들을 베고 성주 의 병사들은 성을 무너뜨리십시오.” “성을 무너뜨려?” “8척 정도의 구멍이 생기게 성벽을 허물어주십시오.” 자례는 아래로 보이는 포차들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왕자는 왕칙이 아닌 자의로 군사를 일으켰소. 속전속결로 끝내고 싶어 할 것이니 적당한 입구가 생기면 포차를 더 이상 사용하지 않을 것이오. 괜히 포차를 남발하게 해서 성벽에 큰 피해를 입혀 입구가 많이 생기게 되면 병력이 분산되어 방성에 도움이 되질 않소. 그럴 바에는 차라리 이쪽에서 입구를 만들어주는 편이 유리하오.” 노장군은 절묘하다는 듯 두 손을 마주쳤다. “과연...게다가 8척이라면 포차나 화구는 못 들어오면서 병사들은 편히 드나들 수 있는 크기요. 유인계군! 그렇다면 입구는 어느 방향으로 만들어 놓는 것이?” “북풍이 들어올 수 있는 북쪽으로 내어주십시오.” “그렇다면 성안으로 찬바람이...” “하지만 북풍을 이용해서 하룻밤사이에 얼음벽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목래는 좋은 책사를 지녔구려! 그럼 노장은 삼진으로 출발하겠소이다!” “하나만 더.” 자례는 좌중을 돌아보고 신중하게 말했다. “이번 전쟁은 예전의 공성이 아닌 방어전이오. 즉 우린 이길 필요가 없소. 자진해서 무리한 위험에 뛰어들지 말아주시오.” 그 말을 끝으로 자례는 장군검을 내려놓았다. 명령 하달은 여기까지다. 검을 들고 말한 이것은 군명이며 이것을 어길 시에는 군법에 처벌받는다. “봄에 말을 지킬 사람이 부족하면 3년 뒤 조세가 걱정스럽다는 선견지명 책사의 당부일세. 모두들 알아들었겠지? 그럼 가자!” 장난스럽게 말을 돌린 자휼은 장군들이 흩어지는 것을 보고는 자례를 바라보았다. 자례는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방성전. 성벽을 통괄하고 명령을 내리기 위해선 책사는 성벽위에 머물러있어야 한다. 군사가 많거나 큰 성이라면 내성에서도 가능하겠지만 목래는 작은 성인데다가 군사들도 부족하다. 성벽 위로는 석빙이 쏘아 내릴것이고 활과 검을 든 군사들이 운제를 통해 개미 때처럼 달려들 텐데. 성벽에서 물러나라 해주어야... 하지만 자휼은 쓴 입을 다물었다. 동생은 책사다. 나는 장군이고. 언제까지나 동생을 내가 돌볼 수는 없는 일. 못내 돌려지지 않는 등을 돌리고 성벽 아래로 뛰어 내려간다. 그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본 자례는 장군기가 걸린 성벽의 망루에 서서 다가오는 군사들을 바라보았다. “우아아아아!” “목래를 공성한다.!” 장군기 뒤로 서 있는 계명이 검을 뽑아들고 소리쳤다. 길게 늘어선 창을 가진 군사들이 성을 향해 달려온다. “내 활을 다오” “예!” 혈족 특유의 각궁을 재빠르게 어깨에 매고 활을 당겼다. 끼릭거리며 오동나무로 만든 활이 휘어지는 소리가 자례의 귀에 들려왔다. 장군기 뒤에 있는 백마를 탄 장수를 겨누어 보았지만 바람에 휘날리는 깃발들이 자꾸만 표적을 가린다. 게다가 아직 멀다. 잠시 머뭇거리며 재차 기회를 노리다가 성위의 병사들이 자신의 신호를 기다리며 활을 재고 있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애써 장군을 맞출 생각을 지운다. 끼긱거리는 팽팽한 활줄의 긴장음이 성벽 아래에서 참호를 파는 병사들의 등에 소름이 돋게 만든다. 땅이 떨리는 발 구르는 소리와 적 군사들의 함성 소리가 손가락에 긴장감을 불어넣어 당장이라도 활을 놓아버릴 것 같다. 앞으로 조금만. 앞으로 조금만 더 기다린다면 사정권에 닿는다. “쏴라!” 성문에 가장 가까이 온 병사로 돌려 활을 놓았다. 그 순간을 맞추어 성안에서는 활이 비 오듯 쏟아진다. 하지만 죽은 병사들의 시체를 엎고, 밟고 지지 않겠다는 듯 달려오는 적군들을 바라보며 자례는 무의식적으로 활을 다시 재었다. 지면 안 된다. 절대로 지면 안 된다. -- 단설의 역주는 인용과 개인적 견해가 들어간 글입니다.(맹신(盟信)사양. 도용씁쓸)-- 주:중차(重車)성벽을 부수는 무기로 흔히 볼수 있는 형태는 수례중앙에 거대한 쇠막대를 끼어 만든것이다. 이것은 동서양을 고대와 현대를 막론하고 사용되는 중요 병기라 한다. 주:포차(抛車) 돌, 화살등 파괴를 목적으로 하는 모든 것을 던질수 있게 만든 수례이다. 기름이나 뜨거운 물을 던지기도 한다. 흔히 생각하기 쉬운 공성병기 중 돌을 날리는 것은 비루라 따로 칭한다. 주:운제(雲梯)성벽을 기어오르는 사다리 대나무로 만든 긴 사다리, 갈고리를 매어 만든 밧줄형 사다리, 짚을 많이 엮어 만든 유연한 널판지 같은 사다리, 등등 시대와 장소에 따라 운제의 형태와 모양은 다르다. 목래에 쓰인 운제는 두번째인 밧줄형으로 초지의 싸움이라 따로 운제를 만들 재료가 없고, 간편히 들고 다닐수 있는 그것을 사용한다 생각한다. 주:참호, 성문이 돌파될 것을 염려해 선두의 병사들을 함정에 짜뜨려 문으로 들어오는 병력을 분산시키는 방법이다. 목래는 특이한 성구성으로 근벽에 상가를 두었기 때문에 있어야 할 참호가 없었다. 때문에 성문 안쪽을 파낸것이다. 삼국시대에 관한 공병기와 전투 방식은 후에 나오는 이야기에서 다룰 기회가 있길 바라고 있다. 22 카랑! 도끼를 든 병사가 성에 걸쳐진 운제를 찍어 잘라버렸다. 아악 하는 비명소리가 멀어져 가며 둔탁한 추락음이 들려왔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사방에서 울리는 비명소리와 칼의 마찰음에 아무것도 들리지가 않다. 날카로운 금속성의 소리에 귀가 멍멍해 옆에 있는 병사의 비명소리조차 안들리는 형편이다. 또 하나의 운제가 눈앞에 걸쳐진다. 도끼를 높이 들지만 내리치지는 못한다. 그제야 병사는 자신의 가슴을 뚫고 나온 창의 날을 느끼지만 너무 늦었다. 운 좋게 들어온 적병은 도끼를 든 병사를 죽이고 뒤를 돌아 운제를 찍기에 바쁜 다른 병사의 등을 노린다. 등이 창으로 찍어 달라 말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 자신도 모르는 사이 날아온 활이 왼쪽 눈을 관통하여 머릿속에 박혀버린다. 휘청거리는 적병을 또 다른 병사는 발로 밀어버리고 그는 다시 살아 올라왔던 성벽을 시체가 되어 내려간다. 그리고 또 다른 병사가 아직 죽지 않은 그를 밟고 성벽을 타고 오른다. “군승님! 석빙으로 인해 성벽에 무리가 가고 있습니다!” “성벽이 무너질 수도 있소. 날이 냉정하여 작은 석빙에도 금이 갈 것이오. 하지만 장수가 흔들리면 아랫 사람들은 공포를 느끼는 법. 스스로 쌓은 성벽을 두려워하시면 안 되오.!” 자례가 소리치며 또 다른 활을 활줄에 걸고 당기자 팅하는 강한 비명소리가 들린다. “웃!” 무리하게 사용한 활줄은 마지막 비명을 내지르면서 끊어지고 말았다. 마지막을 고되게 한 주인의 팔에 새빨간 선혈이 흐르도록 할퀴면서. “우아악!” “...!” 눈앞으로 피를 뒤집어 쓴 마귀와도 같은 형상의 창을 든 병사가 자신을 향해 달려온다. 검, 검을 뽑아야 하는데 몸은 잘 움직여주지가 않는다. 뽑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몸은 생각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눈앞에 피와 진흙으로 얼룩진 창날이 다가오자 자신도 모르게 손으로 그것을 잡아버린다. “이익! 놔라!” 창을 빼려는 행동에 손에 피가 고여 성벽위로 뚝뚝 떨어지지만 놓을 수는 없다. 놓으면 죽는다. 그렇다고 이렇게 있을 수는 없다. 파칙! “윽!‘ 둔탁한 소리와 함께 눈앞에 어른 머리만한 석빙이 날아와 병사의 목을 강타한다. 피가 터져 목과 얼굴에 튀는 것이 느껴진다. 눈을 뜨니 이상하게 목이 구부러진 채로 성벽과 석빙에 찡긴 병사가 보인다.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닌 듯 다리와 팔을 심하게 떨고 있다. 하지만 그가 가엽다거나 미워하는 감정이 있기도 전에 뒤에서 지르는 비명소리에 들고 있던 창을 돌려 뒤로 뛰어오는 적을 베어버린다. 쿠륵! “외성이...!” 천둥이 치는 소리에 성벽으로 몸을 내밀었다. 귀 옆으로 화살이 날아오지만 무섭다는 생각은 이미 예전에 사라졌다. 외성이 무너지고 있다. 괜찮다. 무너지리라 예상했던 것이다. 밑을 내려보니 참호를 파던 병사들이 재빨리 몸으로 내성의 힘이 외성을 치지 못하도록 지탱하는 것이 보인다. 저것이면 됐다. 곧 내성이 뚫릴지도 모른다. 순간 순간 최선을 다하는 수 밖에. 자례는 자신과 적병들의 피가 뚝뚝 떨어지는 창을 버리고 검을 뽑아들고 계속 올라오는 운제를 내리쳤다. 빡! 마치 돌덩이와 돌덩이가 부딪쳐 깨지는 소리가 나며 내성에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휼은 귀를 기울였다. 어느 쪽이지? 동쪽? 서쪽? “혼란스러워 하지마라! 스스로 쌓은 성벽을 믿으라! 성벽을 두려워하지 말고 성벽에 몸을 밀착해라! 외성을 지탱시켜라!” 말을 탄 자휼이 크게 소리쳤다. 참호를 파던 병사들이 서둘려 성벽으로 몰려가 다닥다닥 붙는다. 천둥이 치는 소리가 울리며 잠시 목래가 흔들리는 듯한 충격이 온다. 눈 속에서도 먼지가 날린다. “외성이 무너졌다!” 채 말을 멈추기도 전에 성벽 위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중차가 온다!” “성문을 막아라!” 자휼의 명령에 힘센 군사들이 성문으로 몰려들었다. 곧 중차가 성문에 강하게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으랏차, 으랏차. 쿵. 쿵. 에야, 에야. 마치 노랫소리 같군. 자휼은 적병이 몰려 들어올 그 상황에서 적군과 아군의 힘을 모으는 함성이 마치 명절의 노래 같아 잠시 감상해본다. 한번 밀려올 때마다 성문이 삐걱거리는 소리와 문을 몸으로 막아선 병사들이 튕겨 나오기를 반복했다. 끼기긱거리는 듣기 거북한 소리가 울리며 성문의 빗장에 금이 가는 것을 확인한다. “참호 속에서 모두 나와라. 문을 열 것이다!” “알겠습니다.!” 참호를 파던 병사들은 흙투성이가 된 체 기어 나왔고 자휼은 활을 준비시켜 곧 뚫릴 문을 겨냥하게 했다. 성벽에서 병사들이 올라오지 못하고 있다 . 자례가 잘 막고 있는 거다. 나라고 네놈들에게 성문을 내어줄것같으냐. 어림없다. 초원의 오랑캐들아. “활을 재어라!” 끼끽 거리는 소리가 모두의 귀에 울린다. 성문사이로 적군의 함성이 울려올 때 마다 움찔거리는 어깨를 보며 자휼은 자신도 각궁을 들어 메겼다. 쿵. 쿵. 빠찍하는 거대한 소리가 나며 성문에 구멍이 뚫렸다. 양 쪽 병사들의 함성이 성안을 울린다. 처음 들어오는 적병은 활을 쏘지 않아도 참호속으로 빠져 버리고 그 뒤로 들어오는 공병기(攻兵)가 참호속으로 빠져 문을 막는다. 활을 쏘는 것은 지금 부터다. “1주 당겨라!” 반다리로 앉아 성문을 노리고 있던 궁수들 중 첫줄이 활을 당긴다. 계명은 책사들의 말(言)을 듣고 말(馬)에 올라 성을 자세히 살폈다. 외성이 무너져 곧 공성기를 들여 한번에 무너뜨리려고 했는데 성벽이 하나 더 있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하지만 자신의 눈에도 무너진 외성벽 사이에 그와 같은 높이의 내성벽이 하나 더 있다는 것이 확실히 보인다. “과연! 이것은 실로 재벽책(再壁冊)이라 할수있겠구나! 정말 순간순간마다 놀라게 만드는 영웅이로다!” “어찌하면 좋을까요? 장군님?!” “포차를 계속 던져라.” 계명은 등뒤를 돌려 자신의 장군기를 가리켰다. “북풍이 분다! 하늘이 우릴 도우는 것이다! 성벽은 깨질 것이다!” 모두들 지시를 내리기 위해 달려가자 계명은 전쟁이 시작할 때부터 눈을 때지 않고 따라가던 하얀 옷의 책사를 바라보았다. 운제를 내리치고 있다. 영웅서에 적힌 영웅이고 지금도 살아있다면 노련한 늙은이거나 중년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여기서 보기에는 굉장히 젊은 것 같다. 게다가 책사라면 막사 안에서 탁상공론하는 거라 여겼던 자신의 생각을 놀라게 하는 활솜씨와 지휘력. 지금 검을 휘두르는 모습도 어설퍼 보이지 않는다. 가지고 싶다. 장군이라면 누구나 유능한 책사를 가지고 싶어 하기는 당연하다. 저런 유능한 자가 이런 말을 치는 곳의 책사로 있기에는 아깝다. 저런 가신이 있다면 지금, 한족이 왕가가 사라진 지금, 정통성을 주장할수 없는 난세인 지금, 대세를 일으켜 야망을 꿈꾸기에 가능하지 않겠는가? 생포해야겠다. 정안족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지? 하지만 난 해보이겠다. 저 고고한 민족을 내 손안에 넣고 복종시키고 말겠다! “장군님?!” “잠시 갔다 오겠다!” 계명이 창을 들고 목래쪽으로 말을 달렸다. 책사들은 그를 말리려다가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하고 그만 두었다. “쉽지 않을텐데.” “뭐가 쉽지 않겠나. 어떤 새든 새장이 바뀌려고 하면 도망가는 거지.” 뒤에 남은 책사들이 중얼거린다. “하지만 새장에 들어가면 죽어버리는 새들이 있지.” “주인을 물어뜯어 나오는 새도 있고.” 성문 진입도 힘든 상황이였다. 계명은 장수들을 앞으로 내달리게 해 문을 뚫게 했다. 성문이 열리길 기다리던 장수들은 지휘자의 모습을 보자 놀라며 앞으로 내달린다. 간신히 성안으로 들어갈 틈이 생기자 말을 재촉하려 하는데 누군가 먼저 성밖을 튀어나와 입구를 막는다. 검은 갈기마가 사납게 주위를 돌며 소리지르자 말도 사람도 움찔거리며 물러난다. 푸른 도깨비 문양의 갑옷에 계명은 그가 태수임을 알아차렸다. 저놈을 죽이면 전쟁은 끝난다. 그렇게 생각한 계명이 등 뒤의 활에 손을 내미는 순간 누군가 자신을 향해 돌진한다. 깜짝놀라는 것도 잠시 그는 자기 대신 활을 맞고 쓰러져 버린다. 놀란 눈으로 활이 날아왔다 생각되는 방향을 보니 예의 그 하얀 백포를 날리며 성위의 그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 인상을 쓰려고 했으나 바로 자신을 향해 검을 휘두르는 태수에게 밀려 뒤로 밀려난다. 뭐라 뭐라 알수 없는 말로 태수가 성위를 향해 외치니 같은 말로 책사도 외친다. 화를 벌컥 내는 태수에게 역시 역정을 내며 책사는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그 화를 풀려는 듯 자신에게 달려드는 모습에 서둘려 검을 뽑았다. 망루수(望壘守)가 외쳤다. “대장군이 온다!” 근처의 병사가 다시 외친다. “대장군이 온답니다!” 몇 번더 전달된 말을 들은 자례는 성 아래를 향해 외쳤다. “성문을 봉쇄하지 말고 열어라! 머리를 사로잡아라!” “...뭐라고? 안들려!” 적병을 베어 넘기며 자휼이 성위를 바라보았다. 뭐라뭐라 아우가 외치고 있는데 그 소리가 여기까지 들릴턱이 있냐. 사실 작게는 들리지만 뭐라 하는지는 모르겠다. 결국 몇 번을 말해도 못 알아듣자 화가난 표정으로 성벽위로 모습을 감춘 아우가 잠시 후 떨어진 투구를 자휼의 등짝에 명중시켰다. “아! 왜 그래?!” “나가서 백마를 탄 중년인을 잡아!” 백마 탄 놈을 잡아? 라고 되물으려다가 다시 투구를 찾으려고 고개를 숙이는 아우를 보고 얼른 틈새 난 성문 사이로 빠져 나간다. 이리저리 둘러보나 백마는 잘 보이지 않는데 슉 하는 각궁 특유의 바람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리니 싸우는 병사 무리의 반대편에 백마를 탄 누군가가 보인다. 활로 맞추었나? 하지만 명중되지는 않았는지 활을 재려는 계명을 보고 앞을 막으며 싸움을 건다. 움찔하며 피하는 자의 얼굴은 자신보다 연상의 사내 얼굴이다. 한족이군. 검을 휘두르자 재빠르게 몸을 숙이며 검을 뽑는다. “이 바보야! 이거 하나 못맞추냐!” 하지만 성벽위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다. 몇 번 검을 부딪치던 자휼은 검신에서 울리는 짜릿함에 계명이 손쉽게 당할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이거 안좋은데. 나 성안의 최고 권위자다. 첫 공성에 내가 부상을 입는다면 그것은 병사들의 사기에 문제가 된다. “자례, 다시 쏴라!” “...화살이 없어요!” 캭! “너 그동안 향판 돈으로 차(茶)만 샀지! 전쟁 끝나고 이중 장부 검사다!” “연 댓살이 없다고 화살에 쓸 대궁을 가져간게 누군데 그래요!” “너 정말 그럴래!” “알아서 살아들어와요!” 휙 성벽위로 사라지는 아우에게 캭하고 화를 내며 몸을 부딪친다. 질 리가 없는 것은알고 있지만 저 괘씸한 아우같으니라구. 화를 마구 내며 칼을 휘두르자 어리둥절한 상대방은 몇 번 마주친 검을 거두고 진영으로 도망간다. 별 미친 놈 다 봤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가 미친 척 좀 했다. 왜?! 후퇴하는 병사들을 바라보면서 자휼은 크왕하고 소리쳐보였다. 23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전에 화가 난 왕자의 부름을 받았다. “...뭔가? 큰소리 당당하게 치더니 오늘 밤도 여기서 지내야 한다는 말인가?” “황송하옵니다만, 목래의 장군과 책사가 그리 만만치 않습니다.” “하루 종일 싸우고 와서 하는 말이 그게 다란 말인가?” 태진은 귀찮다는 듯 술잔을 내려놓았다. 꽤나 오랫동안 술을 마시고 있었던 듯 얼굴이 붉었다. 술시중을 들고 있는 여인은 생김새로 보아 궁녀인 것 같다. 궁녀를 데리고 나왔나. 한가로운 여행을 오셨군. “돌아가서 내일을 기약하도록.” 꾸중을 듣는 장군치고는 얼굴색이 밝았다. 씩씩하게 걸어 나가는 계명장군을 보고 태진은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좋은 일이 있는 것 같은데 내색하려고 하지 않는군. “한족은 약았지...” 태진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러는 자신도 한족 아니던가? 계명은 갑옷을 벗으며 물을 적신 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왕궁에서 이렇게 떨어진 왕자는 문제가 안된다. 지금 큰 문제는 저 목래이다. “나원 별 미친 놈을 다...” 허허 쓴웃음을 지으며 생각한다. 검도 휼륭하고 기백도 뛰어난 젊은 장수다. 보기에 나보다 대여섯살은 어릴 것 같던데. 거 성격한번 더럽더라. 그 놈이 태수였지. 그리고 그와 말하던 자가 책사이자 군승이지. 군승은 자신의 생각보다 매우 어린 것 같았다. 그리고 날 노리고 있었어. 뭐라 하는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보기보다 꽤 통하는 구석이 있는 놈들인 것 같다. 사실 태수는 아닌 듯 모르게 자신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지도자의 자리에 있어야 하는 놈이다. 회유하긴 어려운 타입이지. “...함께 들여 오는 것이 편하겠지만.” 풍파는 바라지 않는다. 그리고 태수의 성격을 보니 자존심도 상당한 놈이라 굽히고 들어오지 않을것이다. 태수는 죽이고 책사를 잡는다. “...힘들겠지만.” 자휼은 고개를 돌렸다. 등을 보이고 있는 군승에게 화를 내고 싶어 뚜벅뚜벅 다가갔다가도 옆으로 도열한 장수들이 제발, 이런 때에 그러지 마십시다라는 간곡한 부탁에 한숨을 쉬며 다시 멀어졌다가 가까워 졌다가 멀어졌다가를 반복한다. 결국 태수가 아무말도 하지 않고 등을 돌려 태수의 성으로 들어가버린다. 한참이 지나자 누군가 헛기침을 한다. “들어가셨는데요.” “어휴.” 흐늘흐늘 몸의 긴장을 풀며 그 자리에 주저 앉아버린다. 손노장군이 자례를 붙잡고 일으켰다. “성벽을 보수 하는 것은 우리들이 할테니 태수님 말대로 군승님은 들어가서 쉬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지만 성벽의 보수는 군승인 나의 담당이니 할 것입니다. 그 후에 모두들 돌아가서 쉬죠. 내일은 이렇게 막무가내로 쳐들어 오지 못할것입니다. 저쪽도 진영을 정리해야 할테니.” 하지만 몇걸음 가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며 잔 기침을 한다. 한동안 보이지 않았던 마른 기침에 덜컹, 하고 장수들이 모여든다. “쿨럭! ... 아침이 되... 쿨럭! 아침이 되면 성벽을... 쿨럭!” “...드..들어가 보시는 것이 좋겠소!” 기어이 노장군 손노가 자례의 등을 떠밀었다. “하지만 ...바람을...쿨럭, 쿨럭!” “바람을 이용해서 성벽을 고치라는 것이 아니요?” “눈으로...쿨럭!” “눈을 뭉쳐 틈사이에 매꾸라는 말도 전에 들어 알고 있으니 가서 따뜻한 화롯불에 몸이나 녹이시오! 제발!” 자례는 주위에 서 있는 장군들과 관리들을 보았다 모두들 걱정스러운 표정이다. 그제야 옷을 추스르며 일어났다. 걱정을 끼쳤구나. “그럼 실례를...저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어서 들어가시오! 가서 따뜻한 차나 한잔하고 바로 자란 말이오! 알아들었소?!” “...감히 노장군의 말을 거역할 수는 없지요.” 자례가 시종의 안내를 받아 내성으로 사라지자 장군들은 한숨을 쉬었다. “이거, 난 사실 군을 앞두고서도 공성 될 거란 생각은 안 들지만 이 와중에 군승님이 어떻게 될까봐 걱정스러워 미치겠군.” “차가운 바람은 독이 될 텐데...” “군승님도 그렇지,이 정도의 공격에 우리가 성을 내줄 것도 아니고..” “그만하게. 상대가 상대인지라 두분 다 걱정하고 계시는게야.” 노장군이 말을 끊었다. “상대는 왕자일세. 게다가 들은 바에 따르면 꽤나 큰 후광을 업은 왕자라던데 고민 안하실 리가 있는가?” “...그렇긴 하지만...” 장군들은 고개를 들어 불이 꺼지지 않는 성주의 방과 책사의 방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것이 었다. 태수의 성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잠시 근처의 바위에 앉아 쉬었다. 곳곳에 석빙으로 무너진 돌담과 길을 바라보자니 마음이 상한다. 오래 걸렸는데. 이곳에 정착하고 여기까지 가꾸느라 힘들었는데. 마지막이라 생각했다. 이곳이 내가 만들 수 있는 마지막 둥지라 생각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이유도 알수 없는 공성으로 수년간의 노력이 단 한순간에 파괴되고 만다. 결국 모든것은 이렇게 잊혀지는 것일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인다. 발밑은 진흙투성이다. 눈과 뒤섞인 그것에는 분명 오늘 죽고 쓰러진 병사들의 피도 들어있을테지. 생각할수록 막막하고 답답해서 가슴을 치지만 이 이상 내가 할수 있는 일이라고는 없다. 갑자기 향긋한 냄새에 고개를 드니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은 자휼이 그 앞에 서서 자신을 바라 보고 있다. 하지만 형, 난 잊혀지고 싶지 않아요 아무말도 없이 손을 내밀어 아우를 데리고 성안으로 들어간다. “목욕하고 옷 갈아입고, 내일을 걱정해라.” “...예.” “오늘은 네 옆에 있어주마.” “...내일은요?” “내일은 네가 내 옆에 있어라.” “...모레는요?” “그때는 태수랑 군승이랑 망을 보고...” 그리고 그 다음은요? 그 다음은 어떻게 되나요? 어두운 복도를 돌아 올라가며 형의 손을 꽉 잡는다. 먼 옛날에 두 형제는 두성을 다스렸습니다. 작지만 행복하게 살던 어느날 적이 쳐들어와 그들은 큰 위기를 맞게 되었지요. “어둡니?” 아뇨. 하지만 그 이야기의 끝은 궁금해요. 손을 잡는 자신을 당겨 옆으로 오게 한다. 수백번, 수 천번도 더 오른 계단인데 갑자기 발길이 채어 앞으로 휘청거린다. 앞으로 쓰러지기 전에 얼른 손을 당겨 일으킨다. “걸음마까지 다시 배우려는 게냐?” “...그럴리가요.” 다시 올라가려는데 아우는 따라오지 않는다. 뒤를 돌아보지만 무슨 생각하는지 알수 없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아우의 모습은 낯설다. 무슨 생각을 하는걸까? 울 것 같은 표정 에 잠시 멈칫한다. “...업어주세요.” “뭐?!“ 무슨 황당한 소리를 하는 거냐고 반문하지만 아우는 매우 진지하다. 잠시 머뭇거리던 자휼은 등을 돌린다. 덥썩 업혀오는 동생의 무게는 가볍지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답답함이 등의 짐을 무겁게 만든다. “무슨 생각이냐.” “그냥 한번 해보고 싶었어요.” “이놈, 오늘은 피곤하단 말이다.” “...그래도.” 먼 옛날에 두 형제는 두성을 다스렸습니다. 작지만 행복하게 살던 어느날 적이 쳐들어와 그들은 큰 위기를 맞게 되었지요. 그래서 두 형제는 힘을 모아 적을 무찌르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형.” “응?” “우리는 옛이야기에 기억될까요?” “...벌써 남았잖아. 살아있는 영웅인데 뭘 더 바라냐.” “영웅이라...영웅은 옛날 이야기처럼 끝나면 안되니까...” 먼 옛날에 두 형제는 두성을 다스렸습니다. 작지만 행복하게 살던 어느날 적이 쳐들어와 그들은 큰 위기를 맞게 되었지요. 용감한 형은 적들을 무찌르고 성을 지켰습니다. 형은 영웅이 되었습니다. “...그럼 나는?” “뭐?” 먼 옛날에 두 형제는 두성을 다스렸습니다. 작지만 행복하게 살던 어느날 적이 쳐들어와 그들은 큰 위기를 맞게 되었지요. 용감한 형은 적들을 무찌르고 성을 지켰습니다. 형은 영웅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우는 얼마 지나지 않아 죽고 말았답니다. “...별론데.” “무슨 소리하는거냐. 아까부터?“ “역시 영웅이 되었습니다...로 끝나는게 좋겠어요.” “뭐?” 애가 열이 올라서 헛소리를 하는건가, 자휼은 점점 미끄러지는 아우를 추켰다. 목을 두르는 팔이 뜨겁다. 활시위로 다친 팔의 붕대가 붉게 물들어가 걱정스럽다. “...하지만 형은 날 잊지 말아요.” “어이구, 그냥 자라,자. 목욕은커녕 옷도 못갈아입고 잘 분위기구나.” 날 잊지 말아요. 서럽도록 짧은 시간이지만 누군가에게 기억된다는 것은 큰 위로가 되요. 세월이 흘러 누군가 옛 이야기 속의 형을 기억해 내면 이야기 속 형의 기억에 내가 들어있다는 것으로 충분해요. 결국 오랜 시간이 지나 모든 것이 지워지더라도, 새 먼동이 터와 자신의 모든 것이 처음부터 시작된다 할지라도 그 밝음 속에서 언젠가 옆에 있던 날 기억해주세요. “...아냐, 형은 바보라 .... 잊어버릴꺼야.” “너 당장 내리고 싶냐!” “...후후” 그냥 잊어요. 내가 기억할께요. 달도 없는 복도를 걸어가면서 귀를 기울이자 색색거리는 아우의 숨소리가 들린다. 알수 없는 소리만 중얼거리더니 잠이 든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얼마만인가? 이렇게 업고 토닥이며 걷노라니 옛 기억이 떠오른다. 항상 걸음마 연습은 노을이 질 때만 했었다. 해를 잡으러 가자. 저 빨간 해를 잡으러 가자. 열심히 마당을 걸어가다보면 이미 해가 진다. 지쳐 꾸벅이는 동생을 안아 올리고 토닥이면 바로 잠이 들곤 했지. 칭얼칭얼거리지도 않고 바로 새근 새근 잠들어 다음날 나보다도 일찍 일어나 내 머리를 잡아 당기곤 했었다. 기억하고 있을까? 너무도 어린 때라 기억하지 못하겠지. 그래도 괜찮다. 비록 지금 네가 기억하고 있는 내가 모진 모습이라지만 그래도 괜찮다. 내가 기억할테니까 너는 잊어도 좋다. 숨을 들이키자 아른하게 풍겨오는 풀 내음에 머리가 비어버린다. 오늘은 왜 이리 방이 멀지? 어디선가 갈대가 흔들리는 소리가 들리며 노을이 지는 것 같다. 해를 잡으러 가자. 해를 잡으러 가자. 붉은 해를 잡아 하늘 개의 입에 넣어 주러 가자. 해를 잡으러 가자. 해를 잡으러 가자. 해를 잡으러 가자... 24 새벽녘까지 뒤척거리다 눈을 떴다. 악몽을 꾼 것 같다. 답답하고 어지럽고... “...현실인가.” 어깨에 걸쳐 두꺼운 팔이 목을 누르고 있다. 옆으로 눈동자만 굴려보니 자휼이 좁은 침대에서 자례를 밀어낼까 두려웠는지 아니면 추웠는지 목을 감싸쥐고 누워있다. 턱턱 거리며 팔을 때어낸 자례는 어젯저녁 몸을 씻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고 이미 차가워졌지만 옆방의 커다란 나무통에 들어가 대강 씻고 나온다. 어차피 오늘 또 더러워 질테지만 미역을 감는 것은 좋아했으니까. 새 옷을 입고 침대에 가서 자휼을 보지만 아직 일어날 생각을 안하는 것같다. 창문을 덧댄 비단을 들추어보니 아직 밖은 까맣다. 겨울이라 그런가. 나가는 것은 미루고 차를 타며 생각에 잠긴다. 우리가 불리해. 어느 면에서 보나 저쪽은 이쪽하고 끝장을 내려 온 것이 분명하다. 자국의 성을 공격하는 것은 반역의 행위다. 그것을 왕자가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큰일이다. 그런데 떳떳히 자신의 기를 올리고 공성하러 왔다. 누군가를 업고 있을수 있지만 과연 반역을 한 자를 감쌀만한 세력가가 누가 있단 말인가? 결국 완전히 일을 무마시키기 위해서는 목래를 완전히 없앨 수밖에 없다. 즉 저쪽에서는 애초부터 이곳을 없애기 위해 왔다는 것이다. “...비약이 심한데...” 그러니까 여기서부터 막히는 이유, 바로 왜 목래를 없애려고 하는 것이냔 말이다. 목래를 공성해버린다면 왕성의 말은 어느 성이 공납한다는 것인가. 물론 말을 생산하는 곳은 많다. 하지만 목래의 명마는 이름 높은 한혈마(汗血馬:피땀 흘리는 말)가 생산되는 곳이다. 생산되는 모든 말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고관의 들은 이곳의 한혈마를 얻길 희망한다. 그러니 없애기에는 그 중요도가 있다. 그렇다면 그 한혈마를 원하는 것인가? 그것도 말이 안된다. 한혈마는 혈통으로 생기지 않는다. 10만의 무리중 중 단 한마리는 명마라고 한다. 그 말은 반드시 명마가있다는 이야기가아니라 그만큼 희귀하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미 두차례나 말을 공봉한 이 성에, 고작 망아지와 늙은 말이 남은 이곳에 한혈마를 찾으려 와? 차라리 그렇다면 말을 달라고 공문을 줄 것이지. 누가 안준다 하더냐. 하긴 없어서 못줬겠다. 그럼 이렇게 싸움이 일어났으려나. 짜증을 부리며 다구를 정리한다. 머리가 아플정도로 이야기의 정리가 안된다. 아무튼 약을 올리면 안돼. 어쨌거나 저쪽은 왕족이다. 일순간 돌변해 왕자로써 성문을 열라고 할 수 있는 위치야. 지금 방어하고 있다지만 사실 우리는 열어줄 수밖에 없어. 화를 돋우면 결국 우리에게 그 화가 돌아온다. 하지만 그렇다고 늑대를 말우리로 들여보낼수 없다. “...머리가 아파.” “얼마나 아프기에 내 말소리도 안 들리는 거니? 나 차 한잔 다오.” 자휼이 침대 맡에 앉아 턱을 괴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좋은 아침이다.” “좋은 아침입니다.” 언제나처럼 아침인사가 오고 가지만 표정을 그리 좋지 않다. 차를 마시던 자휼이 묻는다. “너 무슨 생각을 할까하고 생각하고 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데요.” 옆에서 차를 홀짝이던 자례가 아무렇지도 않는다는 듯 말한다. “하지만 장군은 근심되십니까?” “당연하지.” 차를 내려놓으며 자휼은 일어났다. “저 놈들은 반드시 들어올 방법이 있다. 그래서 네가 그게 언제일 것인지, 그때를 위해 이 전쟁을 이겨야하는지 져야하는지 고민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데.” “...이긴다면 왕자를 죽였다는 살인죄를 쓰게 됩니다. 어디로 보나 빠져 나갈수가 없군요.” “그런 상황이니 네가 맡은 것이지. 생각해봐라. 최악의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이다.” 고개를 숙이고 찻잔의 물을 가만히 바라보던 자례는 한참 후에야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습니다.” “정말 없니?‘ 자례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다시 찻잔을 노려보았다. 맑은 녹색의 시원햔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힌다. 곰곰이 생각하던 자례는 잠시 머뭇머뭇거리다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말해봐라.” “...아닙니다.” 자례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형에게 미소지었다. “좀 더 생각하고 말씀드리지요.” “좋아. 그보다 오늘은 저들도 진영을 가다듬을 때니 넌 나오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너 어제 열이 올라 칭얼거리더라. 그러니 넌 잠을 더 자두는 것이 좋아. 명령이다.” 자휼은 벗어둔 자신 포를 걸치며 휘장을 걷었다. “나와서 들키면 내일도 못나간다.” 팔랑 거리며 휘장이 닫히자 자례는 조용히 침상에 구석으로 올라 앉았다. 어떻게 하지. 나로서는 이곳을 살릴 방법을 모르겠어. 항복하더라도 왕자가 살기 위해선 이곳은 없어져야 해. 쥐도 새도 모르게 왕자를 없애버릴까. 그러기 위해선 저 군대를 모두 죽여야 한다. 완전히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 하지만 그들이 이곳으로 오기전에 목주를 거쳐 왔다면 분명 어느날인가 꼬리가 잡힐것이다. 우리쪽에서 왕자의 밑으로 들어가는 방법도 있겠지만 형은 그렇게 하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말할 위인이고 만약 그것이 가능했다면 이미 때를 놓친 셈이다. 이미 한바탕 했으니. 결국 나로써는 이곳을 살릴 방법을 모르겠다. “왕자를 죽이고 시간을 번 다음 빠져나가는 방법도 있지.” 하지만 그 후는? 남은 관리들과 장수들은? 그들은 살인죄를 쓰고 죽을 것이다. 과연 왕족을 죽인 관리가 부임했던 목래가 무사할까? 많은 수를 데리고 간다 한들 도망자 신세니 평탄할 리가 없어. 그런 생활을 자신이, 아니 내 몸이 견딜수 있을까? “하하하.” 덧 없게 웃다가 다시 진지하게 표정을 바꾼다. 난 목래를 구할 방법은 모르지만 내가 원하는 소수의 사람을 구할 방법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나머지는 죽어야 해. 그럴수는 없지. 어떤 생각을 하더라도 이래저래 머리만 아플 뿐이였다. 결국 자례를 이불을 돌돌 말아 번데기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손노가 망루로 올라오는 자휼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은?” “그게 그거지요.” “아아, 이쪽도 좋을것이 없어” 자휼은 털썩 망루에 준비된 사령탁자에 주저 앉았다. 저 멀리 있는 적진영을 바라보는 눈이 충혈되어 있어 그나마 연장자인 손노가 다른 장수들을 대신해 묻는다. “군승님은요?” “어제밤 종일 칭얼대기에 좀더 자라고 하고 나왔다. 다 큰 놈이 악몽을 꾸는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그놈 떨어질까봐 밤새 놈의 허리를 붙잡느라 나도 피곤해.” “어흠. 군승님은 아직 주무신다고 하시네.” 손노가 재빨리 말을 바꾸어 장수들에게 전달했다. 그리고 둘이 형제인 것은 알지만 말이 좀 그렇습니다라는 표정으로 자휼을 노려보나 막상 그것을 듣는 장수들은 다들 익숙해져서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들이다. 하지만 처음 태수의 말투로 군승과의 생활을 들을때는 얼마나 당황스러웠는지. “손노, 손노.” 자휼이 손짓해서 노 장군을 자기에게 다가오게 만든다. 소근 소근 둘이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장수들은 궁금해 하지만 차마 다가가진 못한다. “군승이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내게 말하려 들지 않는군. 자네가 가서 한번 떠봐.” “지금 저에게 형제를 이간질 시키라구요!” 손노의 말에 장수들이 단박에 그들을에게 시선을 집중한다. “그게 아니라 좀 알아봐달라고!” 냅다 자휼도 소리치고는 손노를 태수의 성으로 내보내 버린다. 신경을 써서인지 배가 고파서인지 속이 쓰리다. 성 밑에서 끓이고 있는 콩죽을 보고는 문득 자례가 그것을 잘 먹던 것이 떠 올라 막 내려간 손노에게 저것 좀 들고가라 외친다. “태수님이 이걸 보내요?” 자례가 콩죽을 든 대접을 받아들며 당황스럽게 말한다. 나 이거 사실 안좋아한단 말이야. 엊 그제 일로 자휼이 오해하는 것 같다. 아무튼 준 것을 버릴수도 없어 조금씩 떠먹다가 손노가 안나가고 자신을 멀뚱히 바라보기에 묻는다. “왜그러십니까, 손노님?” “저도 모릅니다. 성주님이 여기서 당신에게 압박을 가해보라 하시더군요.” “예?” 먹던 것을 내려놓고 손노장군을 마주보자 그도 어깨를 으쓱한다. “당신께서 뭔가 생각만 하고 안 말한다하시던데요.” “...장군님. 내일 당장이라도 왕자가 성문을 열라한다면 목래는 신하의 도리로 문을 열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 목래는 불타오르고 말겁니다.” “...문을 안연다면 그것 역시 반역죄가 되는 것이군요.” “결국 목래는 불타오르고 맙니다.” 노장군 답게 손노는 안정을 유지하며 헬쓱해 보이는 군승을 바라보았다. “고민될 것은 또 뭐있습니까? 그냥 같이 죽어버립시다.” “...노장군에겐 저번 달에 태어난 손녀가 있지 않습니까.” “저런. 내 깜박 잊었군. 허허허 불쌍한 것.” 노장군의 천연덕스런 표정에 자례도 미소지었다. “그럼 군승님은 그것을 걱정하고 계셨소? 군승님 답지 않구만. 허허허” “만약 여기서 반드시 살아남는 사람들을 정한다면 누구가 되겠습니까?” 그제야 손노의 표정이 굳어졌다. “기회는 있습니까?” “말을 달릴줄 아는 소수여야 합니다. 많아야 서너명. 하지만 이들을 살리려면 이곳에 남아 죽 어야 하는 사람도 있지요.” “그래서 고민하고 계셨습니까? 그 누구를 살려야 할지 몰라서? 제가 골라드릴까요?” 손노는 손쉽게 대답했다. “성주님과 군승님이 살아 나가십시오.” “그건 안됩니다.” 자례는 정색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 압니다. 하지만 둘다 빠져 나간다면 그 공백이 커 추격을 받게 될겁니다. 태수와 군승중 한명은 남아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태수님과 장군님이 이곳을 빠져 나가십시오.” 이번엔 손노가 고개를 저었다. “나보다 앞날이 창창한 절은 장수들이 있습니다. 그러니 이 다 죽어가는 저보다는...” “노장군보다 인맥이 넓은 분도 없습니다. ” 자례는 침중하게 말했다. “만약 이곳을 나가 2군을 빌려 오실수 있다면...” “...있다면?” “왕자를 죽이고 버는 약간의 시간동안 목래를 스스로 와해 시킬것입니다.” “하지만...” “가호적을 만들어 최대한 많은 수의 주민들을 다른 성으로 입적시키고 장수들은 산속으로 은닉하게 하며 성을 스스로 불태우고 목주에서 화적의 피해를 보았다 성에 알리면 어느정도 수습할수 있을겁니다. 왕자의 일도 화적을 내세우면 어느정도 수습될지도 모르지요. 어차피 왕성에서 사람이 나와 이곳을 시찰하려해도 최하 50일은 걸릴테니까요” 자례의 단호한 말에 손노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오늘 오후에 떠나도록 합니다.” “하지만 군승님.” “예.” “만약 제가 2군을 못끌고 오거나 너무 늦으면 어떻하시려고 그럽니까?‘ 자례는 다시 수저를 들어 아까보다 식은 콩죽을 떴다.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는다. 너무 늦 어버리면 어떻게 하냐고? 여기서 가장 가까운 목주성까지 13일이니 오며 가며 26일, 가서 이야기 하는데 일주일, 목래가 저들을 상대로 한달을 버틸수 있냐고 묻는겁니까? 못할 것도 없지요. 하지만 그전에 전쟁에 지친 왕자가 문을 열어달라고 할 확률이 높습니다. 자례는 다시 한수저를 떴다. “그렇게 된다면 태수님을 부탁합니다.” -- 단설의 역주는 인용과 개인적 견해가 들어간 글입니다.(맹신(盟信)사양. 도용씁쓸)-- 주:한혈마(汗血馬):돌을 밟으면 자국이 나고, 전견박부(前肩膊部)에서 피와 같은 땀을 흘리며, 하루에 1,000리를 달린다고 하여 이와 같은 이름이 붙었다. 중국 전한(前漢)의 무제(武帝) 때 장건(張騫)의 서방 원정에 의하여 그 존재가 알려졌다. 뒤에 페르가나[大宛國]에 그 명마가 있다는 것이 알려졌으나, 페르가나는 이것을 한(漢)나라에 헌상하기를 거부하였으므로 BC 104년 이사장군(貳師將軍) 이광리(李廣利)가 페르가나에 원정하여 양마(良馬) 수십 마리, 중마(中馬) 3,000여 마리를 얻어 개선하였다. 무제는 '서극천마(西極天馬)'라 하여 노래를 지어 칭송하였다. ..라는 말이다. 하지만 한혈마 역시 일반 종과 명마로 나뉘는데 한혈마의 명마로 유명한 위나라의 왕쌍(王雙)이라는 장수의 말이였다. (삼국지의 명마 중 하나이다.) 위의 설명대로 한혈마는 대륙으로 수입되어 그 혈통을 개량 하여 보급했다. 목래는 한혈마를 키우는 곳으로 나온다. 25 “손노만 보낸다. 난 안가.” “하지만 장군님.” “어떤 장군이 이런 시기에 성을 나간단 말이냐? 그건 안돼!” 자휼이 노기어린 소리를 외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점심, 공성전이 없었던 하루라 손노장군 이 내어놓은 양과 소로 사내들이 고기를 구웠고 여인들이 그것을 썰어 나누었다. 모두들 맛있게 먹고 서서히 정리하기에 이르렀다. 자례로서는 먹지 않는 고기라 먹는 시늉만 하다가 상단에서 식사를 하는 자휼을 바라보고는 잠시 생각 후 일어나 다가간다. “제 이야기를 들어주십시오.” “...그래. 말하고 싶어진거니? 네가 하는 이야기라면 무엇을 듣지 않겠니.” 자휼이 손에 들었던 뼈를 내려놓고 미소지었다. 잠시 머릿속을 정리하던 동생은 갑자기 모국어로 말한다. “양동작전(陽動作戰:미끼)을 사용하고 싶습니다.” “주공법(主攻法)은 무엇으로 생각하고 있지?” “양동작전(兩動作戰:협공)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절로 누구를 보낼생각인데?” “손노 장군을 보낼 것입니다.” 뭐라뭐라 알수 없는 말로 이야기를 하는 두 사람을 올려다 보며 그래도 열심히 귀를 귀울인다. 간혹가다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튀어나오기도 하니까. “그리고 장군님도 함께 가시는 겁니다.” “그건 안돼.” 고분 고분 고개를 끄덕이던 자휼은 단호하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상 아래에서 이야기가 잘 안된다는 것은 이해했는지 손노가 둘을 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럴 것을 예상했다는 듯 별다른 내색하지 않고 자휼의 화가 조금 가라앉자 다시 말을 꺼낸다. “손노장군이 군사를 빌려 온다 하지만 그 이후 목래와 양동(兩動)할수 있으려면 성주님이 가 셔야합니다.” “네가 가라.” 자휼이 물에 적신 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일어나 등을 돌렸다. 더 이상 말하기 싫다는 듯 시선을 돌리는 자휼에게 다시 말을 건다. “그럼 저 대신 여기서 한달동안 2군을 상대로 성을 지키실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러 상황에서 내가 성을 나가는 것은 도망치는 것과 뭐가 다르다는거냐? 난 싫다.” “제가 가고 싶어도 13일을 전력으로 달려 목주에 도착하고 다시 전력으로 달려 돌아오면 군 을 지휘하긴 커녕 누워있어야 할겁니다.” “...젠장. 알긴 잘 아는구나.” “가주십시오.” 한참동안 하늘을 노려보던 자휼은 고개를 끄덕였다. 난 널 믿어왔고 지금도 믿고 있으며 앞으로도 믿을 것이다. “실망시키지마라.” “...예.” 계명은 가만히 성벽위를 올려다 보았다. 어제부터 성주도 책사도 보이지 않는다. 무슨 일일까. 탁,탁,탁 손가락으로 탁상을 치며 생각에 잠기나 떠오르는 생각 따위는 없다. 도망쳤나? 하지만 책사들이 가져온 영웅서 내용을 볼땐 이렇게 쉽게 도망갈 것 같지 않아. 자결하면 자결했지. 그럼 죽었나? 그럴 것도 같지 않다. 그렇다면 벌써 성안에서 사신이 와서 항복을 했겠지. 그냥 쉬는 건가? “...속 좋은 놈들이구만.” 이래저래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 몰라라 편히 쉬고 있다는 것인가. 내가 저쪽이였다면 발을 굴렸을 것 같은데 말이다. “... 내가 저쪽이였다면...?” 계명은 자신의 책사를 불렸다. 두 명의 백의 중년인들이 모여들자 묻는다. “자네들이 목래의 책사라면 어떻게 하겠나?” “그야 어떤 것을 선택했냐에 따라 달라지겠지요.” “다 말해봐.” “저 한몸 살아 남기 위해선 야밤도주를 하는 것이 확실하지 않습니까.” “자존심을 버린다면 항복을 할수도 있겠지만...이미 일전을 한 후라 그것도 쉽지 않겠고.” 이것 저것 던지는 말에 계명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그런게 아니야. 자네들이 정말로 목래의 책사라고 생각해 생각해보게. 약관의 나이에 영웅서에 올라간 굉장한 인물이란 말이야. 게다가 성에서 오년정도, 막 기반이 잡혔을 때라 성에 정도 많이 들었을테고. 작은 성이니만큼 주민들을 버리기도 쉽지 않을거란 말이야.” “그렇다면...” 곰곰이 생각에 잠기는 그들에게 좀더 상황을 설명한다. “진다면 공성했다는 증거를 없애기 위해 반드시 죽어. 이기더라도 왕자를 치니 반역으로 역시 죽어. 이겨도 죽고 져도 죽어. 그런데 아무것도 안하고 그냥 죽음을 기다리기에는 젊어. 그렇다면 이 상황에 어떻게 하겠는가? 게다가 석빙계를 떠올려봐. 재벽책도. 앞 뒤 십년을 보고 움직이고 있어.” “글쎄요...” “불가능한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말해봐. 아마도 저 놈은 할수 있을 것 같으니까.” 계명이 차를 따르자 둘중 한명이 중얼거린다. “...이곳을 치겠습니다.” “...어떻게? 게다가 치면 반역이야.” “하지만 목주는 지방 호족들이 사는 곳입니다. 그러니 목래와 연관있는 자들도 있을테니 원군을 빌린다면...” “목래가 미끼가 되고 누군가 목래를 빠져나와 군을 이끌고 저희 뒤를 치면 우리로써는 갇힌 꼴이니... 하지만 불가능합니다. 그 이야기는 왕자를 포함한 우리 모두를 몰살시키겠다는 것이니까요.” “왕족을 몰살시키면 그 역시 살인죄와 모독죄, 반역죄까지 들어 성을 죽입니다. 그러니 결국 죽는 것은 마찬가지란 이야기죠. 단지 시간을 조금 벌 수 있을뿐입니다. 하긴... 이 이야기가 왕성에 닿으려면.. 적어도 50일 이상의 시간을 벌수 있으니... 중요한 사람들은 모두 도망가기엔 충분하죠. 하지만 주민들은... 게다가 모두 수배되는 죄인이 될터이니...일이 커지는 셈이 죠.” “...아니. 모두들 중요한 것을 잊고 있군. 우리는 왕자가 있다. 공성이 아니라 방문이라하고 당장이라도 문을 열게 할수 있어. 그러니 군을 빌려오는 것이 공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 놈이 모를 리가 없어...하지만 자네들 말도 일리가 있군.” 가만히 듣고 있던 계명은 눈을 감았다. “작전을 바꾸지. 목래를 방문하자.” 새벽이 되자 흑염을 끌고 성안을 조용히 빠져 나왔다. 근처의 텅빈 마굿간에 들어가 몸을 숨긴다. 하지만 역시 착찹한 심정을 내심 숨기지 않고 계속 성을 뒤돌아 본다. “성주님, 걱정되신다면 한시라도 빨리 목주로 가야 합니다.” “알아.” 초지라 몸을 숨기기조차 어렵다. 전력으로 달려 추격자들을 내치는 수 밖에. -무사히 가실수 있도록 도와드릴겁니다. 두 번째 공성인 장군전 시작되는 시점에 말을 달리시면 됩니다. -그럴필요는 없다. -초지라 마땅하게 몸을 숨길 그늘도 없습니다. 저들을 우회하면 시간이 걸리니 적진이 비었 을 때 출발하십시오. 그것이 양동(陽動:미끼)인 목래의 역할입니다. 크릉. 스스로 쌓이는 홧증에 자휼이 이리 뒤척 저리 뒤척인다. 아무래도 뭔가 이상하다. 이상하다. 이상하다. 저 놈이 이런 식으로 날 성에서 내보내는 일은 처음있는 것이다. 물론 공성도 처음이지만, 아무튼 꺼림칙한 것은 여전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어린 아우라고는 하지만 생각하는 것은 내 머리를 뛰어넘었으니 신중하지 않으면 낭패본다. 물론 날 나쁘게 만들지는 않을것이다. 난 그 아이를 믿는다. 절대로 날 위험에 빠지게 할만한 아이가 아니다. 그러니까... 동이 터오고 있음을 느끼고 자휼은 눈을 감았다. 해가 떠오른다. 오늘은 내가 해를 잡기 위해 달려야 하는 것이냐, 아우님아. 상쾌한 초지의 아침을 즐기기엔 바람이 너무 차다. 북쪽이여서 그런가 몸이 얼어붙을 것같은 추위다. 막사에 내린 이슬은 얼어붙어 크게 치면 막사가 산산히 조각날것 같다. 멀리 성을 바라본다. “빈곳을 눈으로 매꾸었어. 겨울 바람에 금방 얼어서 얼음성벽이 만들어 졌군. 어쩐지 북쪽으로 난 구멍을 넓히더라니.” “어떻게 할까요. 장군님?” “...오늘은 성주가 안 보이는군?” 계명장군은 벌떡 일어나 말에 올랐다. 장막 옆에 있는 장군기를 스스로 들고 성문 앞으로 뛰어나갔다. 활을 겨누는 것이 보이지만 홀홀 단신으로 뛰어온 자신에게 활을 쏘진 않을 것이다. “군승은 들어라!” “...관등소속을 밝히라고 하시오. 누군지는 알겠지만...” 약을 마시며 자례가 옆의 장군에게 말했다. “관등소속을 밝혀라!” “난 금나라 선군의 고군(固?:계명의 칭호)장군이다!” “...군승님.” 할 수 없다는 듯 자례는 천천히 일어나 성벽 위로 몸을 내밀었다. 손을 올리고 고개를 숙이며 자례는 작게 중얼거렸다. 들리던 말든. “목래 군승 선율(仙聿)이요. 고군장군을 뵙소이다.” “고군(固?) 계명이오. 살아있는 영웅을 만나니 영광이오. 선율 수하.” 영웅서에 호명까지 기제되었던가 아니면 나도 모르게 호명을 말해주었던가? 자례는 고개를 갸웃했다. 보통 이곳에서는 이름이란 세 가지이다. 하나는 부모가 지어준 아명이자 본명. 둘은 스승이나 친우가 지어주는 호명. 마지막은 주군이나 황제가 내리는 칭명. 평민은 본명만을. 귀족이라면 아명과 호명까지 가지는 것이 보통이였고 관리로 출세한자는 칭명까지 가지는 것이었다. 어떠한 이름을 부르는 것에 따라 친분도도 알 수 있었다. 물론 본 명이 절친하고, 호명이 일반적이며 칭명은 직업적인 관계인 것이다. 자례도 마찬가지로 본명인 자례, 목래성안 사람들에게 받은 호명인 수하, 목래 군승으로 부임시 황제에게 받은 선율, 의 세 가지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적군에서 군승를 불렀으니 당연이 칭명인 선율로 나갔던 것인데 그것을 받는 고군이란 칭호의 장군은 단번에 호명으로 부른다. “...기분 나쁘다.” 정말 싫다라는 표정을 옷소매로 반쯤 가리며 수하는 성벽 아래의 장군을 내려보았다. 자휼보다 약간 연상의 한족 남자다. 대장군이군. 지금 쏴버릴까보다. 하지만 홀로 온 사절을 쏘는 것은 목래에서의 군승인 자신의 신망(信望) 무너뜨리는 일이다. 그렇게 되었다간 가호적을 주고 사람들을 다른성으로 돌린다 한들 내 말을 믿을까. “잘 들어보시오, 선율 수하. 지금 우리가 올리고 있는 깃대는 알다시피 왕자의 기요. 그런데 왜 성문을 막고 우리와 대적하는 것인지?” “우린 왕자의 기를 보았을 뿐 왕족의 옥체는 보지 못했소. 우리에겐 목래를 지킬 의무와 권리가 있으니 스스로 판단하여 성문을 여닫을 수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오?” “그렇다면 왕자께서 친히 나오시어 문을 열라 하신다면 열겠소?” 그 말이 나올 것 같았지. “왕손을 모신다는 것은 목래의 영광이오. 하지만 전날의 공성에 대해, 왕족을 호위하는 기도위도 없이 단신으로 이곳까지 행차하신 것에 대해 해명을 해주셔야 이번 공성에 대해 황제께 보고 드릴 것이오.” “...하하하!” 때 아닌 계명의 웃음에 자례는 인상을 썼다. 계명은 통쾌하게 웃고는 외쳤다. “시간을 끌어볼 생각이오? 현명하기 이를 데 없군! 내 책사와 좋은 친구가 되고 싶소!” “...사양합니다.” “성벽을 물로 수선해버렸더군. 정말 감탄하는 바요.” “그쪽도 좋은 책사를 가지신 것 같더이다.” “물론. 하지만 당신만하겠소?” 계명은 들고 있던 장군기를 성문 앞에 땅에 힘껏 박았다. “내 좀더 부드러운 방법으로 공성하기로 마음 정했으니 군승은 몸을 챙기시오” 계명이 멀어지고 장군들이 간절하게 자례를 보았지만 자례는 성문 앞에서 펄럭이는 장군기를 노려볼 뿐이었다. 이곳에 날 믿고 남은 장수들에게 미안한 일이지만 성과 함께 운명을 같이 해주셔야겠네. -- 단설의 역주는 인용과 개인적 견해가 들어간 글입니다.(맹신(盟信)사양. 도용씁쓸)-- 주:1)양동작전(陽動作戰:)적으로 하여금 아군의 작전기도(作戰企圖)를 오인케 하거나 판단을 곤란케 하기 위하여, 또는 아군이 결정적인 작전을 기도하고 있는 지역으로부터 적의 관심과 행동을 다른 곳으로 전환시킬 목적으로 수행하는 기만적 전술. 주:2양동작전(兩動作戰:)협공, 군을 두무리로 나누어 포위하듯 싸우는 방법. 공성시 원군을 요청할때 사용되는 주 작전중 하나다. 26 두 번째 공성전이 시작되었다. “...지지 않게 하시옵소서.” 정오, 아무도 없는 동쪽으로 큰절을 두 번 한후 일어난 군승은 눈을 지긋이 손으로 누르며 감정을 자제한다. 곧 시종이 옷을 챙겨주기위해 들어오지만 고개를 저어 물린다. 혼자다. 조금 더 텅 빈 성안의 고요함을 느끼던 군승은 잠시 후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위의 이불을 걷는다. 감추어두었던 곳의 비밀 상자가 들어나자 그것을 열어 또 다른 장군검을 꺼낸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만들어 주신 검이다. 원래 쌍검으로 좌검 빨간 술을 자휼이 가졌고 우검 푸른 술을 자례가 받았다. 자신이 책사로 마음먹게 되는 순간, 자휼이 자신의 붉은 술을 장군검으로 대신 사용하자 10년이상을 봉인해두었던 검이였다. 자휼이 성을 나가기 전에 자신에게 장군검을 주고 지휘권을 넘겨주었지만 가지고 가도록 했다. 다시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르니까. 그러니까 미련이 남는 물건을 가지고 가게 하는 것이 좋아. 장군검도, 흑염도 그렇게 보내어 버렸다. 그래서 네가 다시 빛을 보게 되는구나. 하지만 이런 날일줄은 몰랐지. 검을 꺼내고 편안한 정안의 복장에 책사의 포만 가볍게 걸친후 성벽위로 나간다. 이미 적진영은 앞으로 나와 기다리고 있다. “...외 영(領) 정도 되는가” “2진 정도입니다. 1000명이죠.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법에 따라 같은 수를 내보냈습니다.” “진장(陣壯:진영의 장수)을 살펴보겠다.” 자례가 성벽에서 내려와 활짝 열린 성문으로 나갔다. 이미 목래쪽에서도 천명의 병사가 나가 대기중인 상태다. 고개를 돌리자 두명의 장수가 달려와 고개를 숙인다. 진장이다. “1진장 계부입니다.” “2진장 노고입니다." “...노고? 손노장군의 손자인...?” “그렇습니다.” 고개를 드는 장수는 매우 젋다. 자례는 잠시 시선을 돌렸다가 묻는다. “몇살이냐?” “19입니다.” “2진장을 바꾼다.” 자례가 다른 장수들을 둘러보자 발끈한 노고가 외친다. “어째서입니까? 제가 어리기 때문입니까?! 하지만 제 나이가 군승님보다 많다고 생각하는데요?” 무례한 발언에 장수들이 인상을 찌푸리며 뭐라 무마시켜보려 하지만 군승은 태연하게 어린 장수를 바라본다. “공성은 책임은 아무에게도 묻지 않으나 평지의 전투는 장군전이라 하여 승패의 책임을 장수에게 지게 한다네. 그리고 군승으로 나는 첫 장군전에서 패전하고 싶지 않아.” “패전 시 군법에 의해 벌을 받겠습니다.” “패장은 사형이다.” “그래도 좋습니다.” 당당하게 말하는 노고는 아무래도 손노를 닮은 것 보다는 그의 마나님을 닮은 듯해 웃어버리고 만다. “좋아. 1진장이 앞으로 간다. 2진장은 날 호위한다.” “군승님도 장군전에 나가십니까?” “참관이다.” “장군전이 시작되는군.“ “그럼 우리는 달릴때군요.” 자휼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말에 오를 기미는 아니였다. 손노가 계속 재촉하자 마지못해 말에 오르지만 꽤나 안절부절한다. “ 아 정말 이러시깁니까?” “내가 없으니 참관은 자례가 하겠군. 저들이 장군전의 규율을 지킬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위험하지않을까?” “...이야, 저기 보십쇼. 저거 내 손자녀석 아닙니까? 녀석 날 닮아서...” “뭐야? 그 새파란 놈이 진장으로 나간거야?!” 자휼이 화를 부리며 그쪽을 바라보자 손노는 퍽 하고 흑염의 엉덩이를 발로 차 달리게 만들었다. 예상과 달리 태진은 참관하길 원했다. 계명은 그를 뒤로 두고 앞으로 진을 쳤다. 곧 북이 울리고 첫 장군전이 시작된다. 둘다 창을 들었으니 마상시합이 될것이다. 흥미롭게 싸움을 바라보던 태진이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 묻는다. “그렇다면 저기 하얀 옷의 놈이 참관이니 목래안에서 제일 높은 놈이란 거군.” “그렇습니다. 대대로 장군전의 참관은 대장군이 하게 되어있지요.” “여기서 저기까지 활이 맞추어지나?” 태진의 말에 계명은 인상을 썼다. 금방 풀었지만 말이 안되는 소리다. “전례상 그것은 안되는 일입니다.” “글쎄. 지금 하고 있는 것도 이미 전례라는 것을 무시하고 있다 생각하는데.” 함성 소리가 들리며 북이 울린다. 싸우던 두 장군이 물러난다. 병사가 달려와 고한다. “패전입니다.” “패장은 사형이다.” 계명이 날카롭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상대 진영을 본다. 하지만 앉아있는 책사는 2전까지는 바라지 않는 듯 장수를 내보내지 않는다. “...제가 나가보겠습니다.” “패장은 사형이야.” 검을 들고 나가는 계명을 보고 태진이 웃으며 말한다. 자신도 나가겠다는 노고를 한대 칠까 하다가 앞서 나오는 사내를 보고 들었던 손을 내린다. “...저쪽의 머리께서 나오는군.” 자신도 일어나 앞으로 나간다. 따라오려는 노고를 남게 하며 어느정도 떨어진 곳까지 마주나가자 계명이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성 아래에서 또 뵙소이다.” “피차 서로 아끼는 장수의 머리를 내주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오.” “어째서 태수가 안보입니까?” “그쪽도 신경전을 펼칠만한 여유있는 상황이 아닌 것을 알고 있으니 장군전은 그만둡시다.” “다시 한번 공성전을 하기엔 우리 둘다 화살이 여의치 않소.” 화살이란 말에 이틀전 웃지못할 사건이 떠올라 자례는 입을 다물고 만다. “그런데 알고 있소? 그때 내 대신 당신의 활을 맞은 자는 내가 아끼던 장수요.” “지독히 운이 없었군.” “그 장수가? 아니면 자네가?” 계명이 칼을 들었다. 천천히 뽑아들자 목래측 진영에서 활을 재어 자신을 겨눈다. 덩달아 계 명의 진에서도 활을 세운다. “장군전(將軍戰)을 해주시오.” “나는 군승일뿐이오.” “그랬지.” 차캉하는 소리가 울리며 동시에 칼을 뽑아든 둘은 힘 겨루기에 들어간다. 계명은 힘으로 자례는 기술로 서로의 단점을 보완하며 싸운다. 양 진영 다 예상했던 자들과는 다른 장수들이 나와 싸우자 놀란 장수들과 병사들이 일어나 고개를 한껏 내민다. 계명 자신도 자례를 죽일 생각은 없고 자례역시 공격하지 않고 방어만 하니 승부가 나지 않는다. “무승부로 할생각인가?” 하지만 군승은 대답하지 않는다. 젠장, 저런 거추장스런 옷을 입고 잘도 움직이는군. 사실 저 긴 옷자락이 자꾸만 시야를 가려서 행여나 정말 커다란 상처를 입히게 될까봐 함부로 찌르지 못하겠다. 한족의 검은 찌르기고 정안의 검은 베는 검이니 원래부터 상성이 다른 검으로도 역시 승부가 나지 못한다. 검을 밀어 서로 떨어지자 호흡을 고르던 둘은 서로를 바라본다. “장군은 날 죽일생각이 없는 것같군.” “그렇소.” “그렇다면 그만 둡시다.” 팍 소리를 내며 검을 땅에 꽂아 아닌 듯 모르게 몸을 기댄다. 하늘이 노랗다. 당장이라도 쓰러지고 싶다 몇합이나 싸웠지. 4합정도? 기록이다. 노랬던 하늘이 하얗게 되다가 점점 푸른 색을 되찾아 간다. 물러나자. 그렇게 생각하고 계명을 보자 눈부심과 함께 몸이 뒤로 물러난다. 등뒤로 장수들의 외침소리가 울린다. 제 정신을 차리려고 고개를 자꾸 흔들며 쓰러지는 몸을 검에 기댄다. 오른쪽 어깨가 뜨겁다. 고개를 드니 계명이 검을 흩뿌린다. 피다. 눈으로 피가 흩뿌려진다. “미안하지만 우리쪽 패장은 즉결 처분이오. 그러니 내가 이겨야 겠소.” “...네...전례를...” “나도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왕자가 워낙에 까탈스러워 말이오.” 뒤로 쓰러지려는 몸을 지탱한다. 큰 상처는 아닌 것 같은데 크게 베어져 그런지 피가 마구 흐른다. 계명은 검을 집어 넣고 손을 내밀며 다가온다. 내가 끌려가면 목래는 끝장이다. 아니 그렇지 않아도 목래는 끝장이지만. 북이 울린다. 내가 여기 있는데 누가 북을 울렸지? 눈을 뜨자 계명이 뒤로 물러난다. 그가 멀어지는 것을 보며 몸을 가누는데 누군가 손을 뻗어 자신을 부축한다. “패장은 사형이다.” “...왜 여기 있어요?” “노고를 대신 보냈다.” “....그 어린 장수를 2군장군으로요?” “그 새파란 것을 진장으로 임명한 바보가 할말이 아니다.” 자휼은 아우를 안아올려 진영으로 돌아갔다. 눈을 가늘게 뜨고 형의 얼굴을 보니 단단히 화가난 얼굴이다. 그 낯익은 얼굴에 반가움 보다도 화가 난다. 왜 돌아왔습니까, 왜 돌아왔습니까... 태진은 피식 웃어보이며 자신의 막사로 돌아갔다. 남은 계명은 화를 억누르며 검을 던졌다. “빌어먹을 새장이로다!” 형제라기에 때어놓기 힘들꺼란 생각을 했지만 저 놈의 태수란 작자는 정말 자신의 동생을 싸고 도는구나. 오냐, 네 놈이 가진 새 그리 고운지 몰라도 이렇게 싸고 돈다면 그 깃 한번 재대 로 구경해 보겠는가? 진영의 북소리에 고개를 드니 보고 싶지 않는 태수가 서 있었다. 거리상 내가 유리하다는 느낌에 손을 뻗자 피식 웃는 얼굴로 활을 들어 자신을 겨누었다. 물러나지 않았다면 활을 당길기세였다. 미쳤는가. 거기서 날 쏘았다면 장군전은 당장 집어치우고 보병전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진에서 떨어져 나와있는 군승은 데리고 갈세도 없이 반드시 죽게된다. 그런데 놈은 정말로 쏘려고 했다. “미친 놈이지 않는가!” 계명은 화를 버럭냈다. 씩씩거리며 화를 삭히려 노력한다. 그래. 그래도 성주가 원군을 요청하러 나가진 않았구만. 그렇다면 이 기회에 확실히 새장을 없애버리고 새만 가져와야겠다. -- 단설의 역주는 인용과 개인적 견해가 들어간 글입니다.(맹신(盟信)사양. 도용씁쓸)-- 주 : 영(領), 전에 올린 삼국 군대 조직표 참조. 주 : 장군전( 將軍戰) 보병과 기병의 다수 대결이 아닌 개인의 우수한 장수로 상대방과 일전을 벌여 승부를 내는 싸움의 방법. 이라고 설명하면 될까나. 장군전은 현제의 전투 방법에서는 사라진 것으로 지금 보기 힘든 예이다. 삼국지에서 보기 쉬운 이 장군전은 불필요한 사상자를 줄이는 방법에서도 효과를 발휘했지만 전략상으로도 매우 요긴한 것이였는데, 상대방의 장수들을 볼수 있고, 간단한 방법으로고 사기를 올릴수 있으며, 장군전을 치르는 공백시간을 이용해 진열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또한 머리로써는 장수들의 나태한 위치와 실력을 가다듬을수 있는 기회였고 장수들로써는 머리에게 자신의 용기와 힘을 보여줄수 있는 좋은 리셉션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중요한 장군전은 시간이 흐를수록 그 제약이 많이 생겼는데 이것을 전례라 하며 깨치지 않는 것이 정의와 장수의 도라고 생각했다. 장군전을 치루는 두 장수에게 기습을 가하지 않는다. 또한 이 기회를 노려 암습을 하지 않는다. 장군전을 승패는 각 참관자에게 따른다. 초기 패장은 사형이였지만 이후 조건부 유형이 많이 생겼다. ...가 지배적이며 장군전의 두 장수는 암기와 비술을 사용하지 않는다, 일 합이 끝나고 떨어진 장수들은 재합에 동의를 둔다 , 등의 여러가지 잡다한 것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장군전으로 전쟁의 승패가 결정되지는 않았으며 신경전과 지략적인 시간 벌기로 많이 사용되었다. 미끼 작전을 사용하며 자휼에게서 눈을 돌리게 하기 위해 자례는 장군전을 준비한것이고 계명은 두 우두머리를 보기 위해 장군전을 준비한 것으로 서로 다른 속셈인 것을 알수 있다. 장군전을 치루는 장수들에게는 패장인 경우 수치와 죽음이였지만 승장일 경우 적군에게도 맹위를 떨칠수 있었고, 명예와 부를 받았다. 또한 자신의 진영이 패한 경우도 장군전의 승장은 적군에게 회유를 받는 것이 보통이며 그 회유에 승락하는 것도 도리였다. 27 의원은 깨끗한 마(麻)를 길게 잘라 어깨를 감쌌다. 다행히 깊게 스친 정도라 생명에는 지장이 없겠지만 상처 크기가 넓어 흉이 크게 남을 것 같다. 의원의 말을 들은 장수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자휼은 화난 눈초리로 동생을 내려보았다. “패장은 사형이다.” “태수님!” “군승님은 장수가 아니지 않습니까! 게다가 전례를 어기고 기습을 한 상대는 저쪽입니다.” “그럼 싸우질 말았어야지! 꿇어라 군승!” 군승이 불편한 몸으로 찬 돌바닥에 무릅을 꿇자 장수들이 우르르 일어나 부축하려 한다. 하지만 자휼은 벌떡 일어나 장수들을 막았다. “군승 선율!” “예.“ “패전의 책임을 물어 군승의 직위를 박탈하고 관봉을 압수한다!” “받들겠습니다.” “감히 장군검을 꺼내어 지휘권의 혼란을 주었으니 일주일간 도형(屠刑:감금)에 처한다!” “...그건!” 채 말을 잇기 전에 화가난 태수는 책상을 치며 말을 끓어버린다. 억지입니다. 게다가 지금 절 잡아넣으시면 어떻게 저들을 감당하시려고 그러십니까. 장수들도 그것은 마땅치 않다는 상소를 하려고 하지만 화난 자휼은 두개의 장군검을 가지고 태수의 성안으로 들어가버린다. 어찌할바를 몰라, 어떤 표정도 짓지 못한다. 뭘 어쩌시려구요. 혀를 차며 몸을 일으키자 장수들이 울쌍으로 묻는다. “어디가시게요?” “못들었습니까? 도형이랩니다. 감옥에 갑니다.” “군승님까지 정말로 이러시면 어쩝니까?!” “직위 박탈이오. 난 군승이 아니오. 하긴 도성에서 정식 명령이 있기전까지 임시 근신이지만...” 자례는 고개를 까닥까닥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아무래도 손노가 말을 실수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저렇게 화가 난 것인가. 실제로 자신은 자휼을 속여 성을 버리고 나가게 한 것은 사실이였다. 하지만 둘다 죽어버린다면 목씨는 어떻하란 말인가. 비록 왕씨부이거나 왕비족도 아니지만 염언하게 5부의 존재인데 둘다 죽어버리면 어떻하나. “아이 참.” 정말로 아이같은 신경질을 부리며 총총히 도형을 받으f러 간다. 생각하는 장소로는 딱이지 뭐. 처겅하는 소리를 내며 검을 뽑아든다. 날을 살펴보니 다행히 나간곳은 없는 것 같아 자신의 검날과 자례의 검날을 서로 갈려 대강 갈아버린다. 마른 비단으로 검을 닦고는 다시 푸른 술은 침대 밑 비밀 함에 봉인이다. 그래도 내심 화가 풀리지 않아 붉은 술을 탁자에 내던지고 주인없는 침상에 훌쩍 누워버린다. 화가 났다. 그래, 솔직히 화가 많이 났다. 처음은 그 아이가 나를 속이고 성밖으로 빼돌린것에 대해, 두 번째는 그 진지한 거짓말에 홀라당 넘어간 내 바보같은 짓에. 그리고 뻔뻔하게 내 아이에게 손을 내미는 한족에게도 너무나 화가 났다. 하지만 자례가 잘못한 것은 아닌데. 그 아이는 지금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가능성 있는 것을 택한것이다. 너무 과했을수도 있어. 시간이 흐르자 조금 마음이 풀려 자리에서 일어난다. “전하께 들어갈 음식인가?” “예.” 계명은 상위에 올려진 음식들 중 기름진 고기들을 걷어내었다. 이상하게 여기는 시종을 물러서게 하고 자신의 책사에게 음식을 수행하라 명한다. “음식에 대해 여쭈어보거든 여기선 안 된다고 해라. 무슨 말인지 알지?” “잘 알겠습니다.” 계명은 막사 너머로 들어가는 상을 보고는 미소지었다. 저 건방진 왕자는 이런 곳에서는 얼마 못 견딜 것이다. 그 후엔 살살 구슬려 성문을 열라고 하면 되는 거다. “꽤나 완고한 성격이던데... 어떤 식으로 구슬려볼까?” 계명은 다리를 쭉 벋으며 술잔을 기울였다. 귀를 기울이니 태진이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듯 하다. 지금부터 입성첩(入城牒)을 쓰는 것이 좋겠군. 눈을 지긋이 감고 그 첫 문구를 떠올려본다. 사양했는데도 불구하고 장수들은 옥에 어울리지 않는 탁자와 등, 화로를 챙겨준다. 시종은 몸을 덥히라 술을 가져오고 옥지기는 이 황송한 손님에 차마 문을 걸어잠그지 못하고 저 멀리서 그냥 바라만 본다. 탁자에 앉아 오래전부터 비어있던 곳의 벽을 뚫어지라 바라보며 머리를 굴리는 자례는 한숨만 내쉰다. 차라리 이렇게 될바에는 손노가 성공하여 되던 안되던 진실로 왕자를 죽이고 도망쳐야 한다. “...끔찍하군.” 고된 생활이 될것이다. 지금부터 가호적을 만들어야 하고 주민들에게 목주 외의 다른 성으로 이주 시켜야 한다. 하지만 이들 대부분은 새 성에 적응하지 못하고 화적이나 난민이 되어버릴것이다. 혈족에게 전서를 보내어 화적에 관한 거짓을 진실로 치장시켜야하고 무엇보다 보병전을 치루고 난후 왕자의 군사들의 시체를 일일이 뒤로 돌려 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적당한 목래 병사의 시체도 몇구 껴넣어야 할테고 ... 완전 시체놀이가 되는 것이다. 게다가 도성으로 화적에 관한 이야기를 보내... 50일이다. 최저 50일에 그 모든 것을 해낼수 있을까. 내가 무슨 와룡봉추라도 된단 말이던가. 그저 일개 지방성의 군승일 뿐인걸. 한숨을 쉴 수는 없다. 지금부터라도 해보는데 까지 해보는 수 밖에. 벌떡 일어나 가호적을 만들 종이를 가지러 가기 위해 문이 활짝 열린 옥을 나오자 옥지기가 얼른 고개를 숙인다. “뭐가 불편하십니까?” “종이를 가지러 잠시 올라가야겠네. 괜찮겠는가?” “물론 뭐가 안되...” “도형중인줄 알았더니 시찰 나온거냐?” 갑자기 들리는 말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태수가 자신을 바라본다. 뭐라 말하려다가 고개를 돌려 일단 다시 옥으로 들어간다. 태수가 따라 들어가 옥을 보고는 웃고 만다. “즐길만한 도형이로구나.” “가호적을 만들 물건들이 필요합니다.” “...왜?” 자휼이 되묻자 자례는 눈을 깔았다. 손노가 이야기 한 것 같지는 않군. 그럼 뭐 때문에 화가 난것이지? 내가 패전해서인가? 아무튼 내가 거짓말을 한 것은 모르는 모양이다. “양동작전을 행한 후 주민들에게 나누어줄 가호적말입니다.” 자휼은 아무말도 하지 않고 탁자에 걸터 앉았다. “어깨는 어떠냐?” “별거 아닙니다. 패장이 가지는 상처이니 아프다 말하기 부끄러운 일 아닙니까.” 내미는 손을 피하며 정말로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의 동생은 늘 돌보아 왔던 어린애가 아닌 한명의 사내가 되어버린 듯 해 쓸쓸함이 몰려온다. 이젠 어딘가에 있을 자신의 반쪽을 찾아 날아가버릴테지. 시종이 가져다 놓은 술을 따라 한잔 마신다. 따뜻한 술이 목을 넘어가자 긴장이 풀린다. “...언제부터 혼자 서게 되었느냐...” “...예?” “이리 앉아라.” “태수님.” “네 형이기도 하다.” 자휼은 동생의 손을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아직도 이렇게 조그만데 이 작은 항아리에 들어있는 것은 분명 자신보다 커다란 용이여서 스스로 항아리를 부시고 승천하려고 몸부림친다. 그것을 막을수 없는 자신은 일개 인간이여서 한이 맺혀버린다. 그것을 알기에 내가 이 아이를 무의식적으로 가두어 두고 있는지 모른다. “이곳에서 자면 안 됩니다.” “알고 있다. 네가 널 이런 찬 곳에서 재운 적이 있었니?” “...하지만 난 형에게 기대면 잠이 들어 버리는걸요.” “하하하.” 장난스럽게 짧은 머리를 쓰다듬던 자휼은 진지하게 말했다. “넌 머리가 긴 것이 더 보기 좋다.” “예?” “형은 네 머리를 참 좋아한단다.” “제 영리함 말씀입니까?” “요 녀석, 말 돌리지 마라.” “형님이야 말로 술을 끊으시더니 술 배가 어디론가 가버리셨군요.” “또 기습이다.! 그렇게 안기지 마라!” “하하하!” 팔로 허리를 감는 자례를 억지로 밀어내던 자휼은 와락 동생을 껴안고 작게 중얼거렸다. 답답한지 몸을 뒤척이는 동생을 마치 어린애 보듬듯 어깨를 토닥이며 몸을 흔든다. 역시 곧 진정이 된 듯 몸을 기대어온다. 동생은 어릴 때부터 이런 토닥임에 약했다. “머리가 허리를 넘어가면 동백에서 짠 기름으로 머리끝에서 위쪽으로 발라 아래로 빗어준단다. 그러면 엉키지 않게 되지.” “...그렇게 되기까지는 앞으로 오랜 시간이 걸릴 텐데요.” “...그렇지 않을 거야.” 이상하다는 듯이 자신을 올려다보는 동생을 외면한다. “입성첩이 왔다. 내일 정오다.” “올것이 왔군요.” 자례는 잠시 눈을 감고 손톱을 깨물며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연다. “시간을 끌어 봅시다. 어차피 양 측 모두 져줄 생각 따위 없습니다. 저쪽의 공성기구도 거의 부셔졌으니 손노장군이 올때까지 버티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저도 죽고 이겨도 살아나기 힘드니 해보는데까지 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난 왕자에게 성 문을 열어줄것이다.” “..!“ “넌 목래에서 새 군주를 모시는 거다. 넌 책사 출신이니 장수와 달리...” “싫습니다! 무슨 소리 하시는 겁니까! 제 말을 이해 못하시는군요! 우린 어차피 죽습니다!” “우리가 아니지 않느냐!” 그말에 아우는 너무나 당황한 표정을 한다. 마치 울 것 같은 그 까만 눈으로 표정이 그런 말은 하지도 말라는 듯, 몇 번 목울대를 삼키더니 조용히 말한다.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저는 당신을 따라서..” “그만해라! 아직도 내게 매달리는 것이냐! 내가 더 이상 네게 무엇을 해주어야 한단 말이냐?!” 자휼이 신경질적으로 일어섰지만 무엇인가가 옷깃을 잡아당기는 느낌에 고개를 숙였다. 자례가 옷깃을 손으로 부여잡고 땅을 바라보고 있었다. “...놔라.” “하나 남은 혈육이 죽음으로 향해 가는 것을 어찌 보고만 있으라 하십니까?” “하나 남은 혈육마저 죽음으로 따라오겠다는 것을 보는 나는 어찌하겠느냐?” “차라리 도망가십시오...차라리...그러시다면 따라가지 않겠습니다.” 죽음이란 허망한 것으로 절 막바지까지 몰아넣지 말아주십시오. 적어도 내가 먼저 당신의 죽음을 슬퍼하는 일은 없도록 해주십시오. 이기적이라는 것은 잘 압니다. 제가 당신이 말씀하신 것처럼 당신에게 매달리는 것조차 잘 압니다. 하지만 당신이 아니라면 제가 더 이상 매달릴 수 있는 곳이 어디 있다는 말씀입니까. “내게 성을 버리고 달아나라는 말이냐? 그러고도 네가 목래의 책사더냐?!” “그러기 전에 당신의 아우입니다.!” “그걸 알기 때문에 이러는 것이 아니냐!” 자휼이 천장이 울리도록 악을 썼다. 아무리 진정하려고 애를 써도 손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난 할 수 없다. 너마저 죽는 것은 볼 수 없다. 차라리 내가 가련다. 옷자락을 크게 휘둘러 손을 떨치고 자휼은 서둘러 창고 문 쪽으로 걸어갔다. 자례는 퍼뜩 자휼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알 것 같았다. 여기다 가두려는 거다. 내가 허튼 짓을 못하게. “형!” “하루면 될 것이다. 여기서 머리나 식혀보거라.” “전시에 하나뿐인 책사를 가둘 생각입니까!” “내 아우이기도 하다.” 옥문을 닫는 자휼은 무표정했다. 자례가 재빠르게 일어나 닫히는 문 사이에 손을 넣고 문이 완전히 못 닫히도록 밀었다. 힘으로 문을 닫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문 사이의 손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자휼이 화를 내었다. “손을 빼라! 무슨 짓이냐!” “못 가둡니다! 전염병도 돌지 않는데 왜 가두는 겁니까!” “내가 못닫을줄 아느냐?!” “그럼 닫아요!” 순간 질끈 눈을 감은 것은 양쪽 다였다. 손의 통증에 놀란 자례는 뒤로 넘어졌고 밀었던 자휼도 손에서 전해져 온 와득거리는 느낌에 뒤로 물러났다. 떨리는 손으로 자휼은 빗장을 걸었다. 문틈으로 흐르는 피 따위 내가 신경 쓸 것 같으냐. 바보 같은 고집에 몸 다치는 것 따위 두려워하지 않는구나. 귀를 가만히 기울였지만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열어야 하는 걸까? 많이 다쳤나? “...저 괜찮아요.” 문 너머로 자례의 목소리가 들리자 자휼은 식은땀이 흐르는 이마를 문에 기댔다. 다행이다. 28 태진은 짜증이 밀려오고 있었다. 벌써 며칠 째인가? 하루 이틀이면 될 줄 알았던 것이 벌써 일주일째다. 따뜻한 부인 양씨의 품이 그립기도 하고 추운 겨울바람 때문에 마시는 술에 취하는 것도 이젠 싫증난다. 태진은 계명장군을 불러 화를 내었다. “입성첩에 대해 물어도 되나?” “입성첩은 무사히 들어갔습니다. 전하. 곧 답이 올겁니다.” 성주가 돌아온 것을 확인한 계명은 태진에게 달려가 공성과 입성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다. 적당히 속마음을 감추고 왕자의 위신을 높이는 계명장군의 말에 태진은 솔깃해졌고 입성으로 성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허락했다. 하지만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바로 입성이 되지 않자 답답해 짜증이 밀려오는 것이였다. “저들이 글을 모르나, 눈이 멀었나. 참으로 길기도 하이.” “곧 올것입니다. 왕족의 입성첩에 거부하는 것은 그것 또한 반역이 되니까요.” “내가 이곳에 올때 뭐라 했는지 기억하는가?” “80일 안으로 해결하라 하셨지요.” 태진은 고개를 으쓱해보이고는 나가라 손짓했다. 자휼은 입성첩을 책상에 올려놓고 고개를 괴었다. “나는 연다.” “그일은 신중을 기해야 하지 않을까...요” “태수님, 그만 군승님을 풀어주시는 것이...”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자휼에게 큰 소리쳤던 것은 군승과 손노뿐이라, 둘 다 없는 대청에서 감히 큰소리가 나오지 못한다. 그들에게 지지 않을세라 자휼은 딱 부러지게 말한다. “연다고 했다. 이미 결정되었으니 준비하라.” 자휼은 더 이상의 말은 듣고 싶지 않다는 듯 휘장을 걷고 안으로 들어갔다. 성을 넘기는 절차는 복잡하나 단순하다. 타국의 성일 경우는 모든 것이 공성 장군에게 달려있다. 보통 태수를 죽이고 관리들 항복을 받거나 역시 죽이고 해당 국가에게 성을 인수했다는 인쇄를 보낸다. 그후 자국에 공성 소식을 보내 승전의 보상을 받는다. 대부분 공성된 성을 하사 받기 마련이다. 이때부터 긴 전쟁여행을 끝내고 태수로 부임하여 고정 세력이 된다. 그 후 지방 호족이 되어 편안한 노후를 보내게 되는것이다. 하지만 자국의 성을 넘겨받는 경우는 다르다. 일단 전 태수를 해임시키는 절차만 따진다 하더라도 세달 이상은 훌쩍 넘어간다. 해임이 된다 하더라도 그에 따른 관리들에게 죄를 묻는 절차, 도성으로 성을 다시 공납하는 절차, 그리고 다른 군주를 뽑고 위임하고 수령하고 인계하는...까다로운 이 절차에 성주들은 차라리 군승이나 다른 호족들에게 성을 넘겨주는 것을 택한다. “...그런 것을 할 리가 없지. 완전히 없애 버리려고 들 텐데....” 마른풀에 몸을 기댄 자례는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이렇게 갇혀있다 한들 나도 죽을 운명이라는 것을 말했어야 하는 건데. 이게 무슨 꼴인가. 어둠 속에서 혼자 술잔을 기울이여 성이 항복하기만 기다리고 있다니. 오른손이 쓰리다. 문틈에 끼었을 때 뼈가 부러진 것일까. 통증이 느껴지기 보다는 무감각해지는 느낌에 자례는 옷자락을 찢어 오른손을 대강 매었다. 답답한 느낌에 문 쪽으로 다가가 두드려 보았지만 아무도 없는 듯 인기척 따위는 들리지 않았다. 설마 정말로 문을 열어주지는 않겠지. 내심 믿어보지만 불안하다. 정말로 문을 열어 늑대를 들여올 생각인가. 그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모두 죽는단 말이다. 차라리 끝까지 바둥거려 보는 것이 후회가 남지 않을 것 아니던가. “입성첩에는 목래를 목적없는 방문이라 했으니 별 다른 절차는 없이 입성의 기본 절차와 태수가 마중 나오면 성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게 다인가?” “그러하옵니다. 일단 왕자의 신분으로 들어간다면 평범한 방문이 되시는 거니까요. 그 이후의 일은 태수가 알아서 할것입니다. “흥. 이런 추위에 나를 이곳에서 자게 한 것을 용서할 것 같은가!” “고정하시옵소서. 그보다 어찌 하시겠습니까? 목래, 어차피 공성으로 인한 여파로 살려둘수는 없습니다.” “원한는 것을 추려내면 바로 태수를 죽여라. 이후는 모두 불태우라. 화적의 일로 돌리게 끔 자네가 책임지고 알아서 하라.” “알겠습니다” 태진은 화려한 수가 놓여진 푸른색 보자가 달린 보복(補服)을 입는다. 방문이니 갑옷을 입고 가는 것은 전례상 거부되는 일이라는 책사들의 말에 옷을 갈아입는 중이였다. 물론 태진은 전시 중에도 갑옷을 입고 있진 않았지만 계명을 비롯한 휘하의 장수들은 간단한 무장 위에 비단 행장(行裝)을 덧 입었다. 정오가 되자 성문이 활짝 열렸고 백마를 탄 태수의 사신과 목래의 호족이 함께 와 따뜻한 술과 축시, 향을 받쳤다. 입성을 환영한다는 뜻이다. 그것을 받은 계명은 자신을 비롯한 아끼는 심복들로만 이루어진 작은 부대를 편성하여 태진을 모시고 입성했다. “이렇게 간단하다니. 장군이란 별 볼일 없군.” “감히 누가 전하의 명을 거역하겠습니까.” 계명은 적당하게 태진의 비위를 맞춰 고개를 숙이면서도 성안의 곳곳을 둘러보았다. 일주일 동안 성안으로 던진 석빙으로 인해 많은 부분이 손상되었을 거라 생각했지만 성안이 건물과 거리는 매우 깨끗했다. 이상하다고 생각해 이리 저리 둘러보다가 그 이유를 깨닫는다. 성을 이루는 법칙을 완전히 무시한 성안 배치이다. 벽벽촌주(僻壁村住) 근벽상주(近壁商住) 중벽무주(中壁無住), 중벽주주(仲壁主住), 원벽군주(圓壁軍住) 성벽 바깥 가장 자리에는 마을을 놓는다. 성벽 바로 안쪽에는 상점을 놓는다. 성의 가운데에는 관리청을 놓는다. 성을 둘러 군사를 놓는다. 성 안쪽으로 마을을 생성하지 않는다. 마을의 인원은 순식간에 불어남으로 성안에 배치하면 태수와 주민간의 마찰이 생겨 민란이 일어난다. 성문 근처로 성안의 큰길과 상점과 여관을 놓는다. 먼 그들은 출입이 용의하고 마을근처의 활발한 상업활동이 가능한 근처에 둔다. 단 성밖으로 놓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장사에 내는 세금을 걷지 못한다. 길을 오는 여행객과 장사꾼들을 내성까지 끌어들이지 않는다. 이동하는 자들을 내성까지 끌여들이는 짓은 위험한 짓이다. 밀정일 가능성도 있고 내부의 중요한 문제들이 새어나간다. 이 때문에 장사꾼을 통솔하는 관리는 성벽에 그 관리소를 친다. 성의 가운데는 공터를 두어 어떠한 거주자도 두지 않는다. 이곳에서 행사나 포고를 관리한다. 실제로 중벽을 두는 이유는 외성과 내성을 구분짓기 위해서이며 외각으로 두른 군사의 이동과 모임이 원활하기 위해서이다. 공성시 화공법에 의해 내성이 타버리면 외성까지 불이 번지지 못하게 하는 처사이기도 하다. 성안의 가장 요점지에 태수의 성과 관리들, 호족들의 귀족세력을 둔다. 이때 요점지는 공성의 공격에서 벗어난 지점, 들어오기는 힘들지만 나가기는 쉽게하고 산을 등뒤로 놓는다. 동서 남북을 재어 어느 곳에 치어 위치 하지 않게한다. 관리들에게는 편리하나 주민들에게는 위압감을 주기 위해 축대를 높이 지어 올린다. 이때 축대는 성안을 내려볼 수 있게 만들고 성벽의 망루보다 낮게 만든다. 성벽을 둘려 군대를 놓아 화급한 적에 태수의 명령없이 바로 대응할수 있게 만든다. 이때 역시 장수들의 반역을 저지 하기 위해 상급 장군은 내성에 주거하고 하급장수들은 외성에 주거하여 도모를 막는다. “...완전히 무시한 배열이군.” 이대로라면 이곳은 벽벽상주(僻壁商住) 근벽무주(近壁無住) 중벽촌주(中壁村住), 중벽군주(仲壁軍住), 원벽주주(圓壁主住)가 된다. 말을 치니 성안에서 거래하기 힘들다. 그러니 성밖에 상가를 세운다. 성벽을 둘로 세워 벽의 거리가 예상보다 넓게되어 지반이 무너지거나 공성의 피해를 예상해 근벽을 비워둔다. 안전한 중벽에 마을을 들여오고 그것을 둘러싸 군대를 만든다. 관리 호족들은 둘로 세운 성벽위에 주거를 짓고 마을을 내려본다. “백성을 다스리는데 자신이 있다는 구조군.” 실제로 부복한 사내들의 대부분이 어제까지만 해도 싸우던 병사들이라 눈을 매섭게 뜨고 자신과 병사들을 노려본다. 싸움이 끝나 좋아하는 분위기가 아니라 더 못싸우는 것이 한 맺힌 눈이다. 내성 안으로 들어가자 관리들과 태수가 마중 나와 있는 것이 보였다. 모두들 부복하는데 앞에 선 한 장정만이 부복하지 않는다. 저놈이 목래 성주군. 정안족이라 했으니 부복할 리가 없다. 무엇보다 입고 있는 넓고 긴 윗옷에서 이질적 위화감이 풍기는 정도이다. “목래 태수인가?” “예 전하. 신 목래 태수 율도(率刀)라고 하옵니다. 왕림하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시끄럽다! 성안으로 들어가겠다!” 태진은 옷자락을 털며 성안으로 들어갔고 게명은 부하들에게 왕자를 호위하도록 시켰다. 계명은 성안 안내를 하기 위해 들어가는 목래 태수 율도, 자휼을 가로막으며 이상하다는 투로 물었다. “어째서 책사가 안 보이는가?” “내 책사를 어째서 장군이 관심을 보이시오?” “군승이기도 하지 않은가?” “그 군승이 어제 당신에게 패전했다는 것은 기억하시오?” 지나쳐 가는 자휼의 어깨를 계명은 꽉 부여잡았다. 어리둥절히는 관리들 시선을 무시하고 계명은 다시 물었다. “책사는 네 동생이라 들었는데?” “그렇소. 내 동생이요.” “미친놈이라 생각했지만 네, 설마 목을 잘라버린것이냐?” “잘랐다면?” 자휼이 계명의 손을 밀쳤다. 불쾌하다는 표정을 드러내며 키도, 몸집도 비슷한 계명과 눈싸움을 한다. “잘랐다면 네가 어쩔것이냐!” “...친 동생을...” “어줍잖은 놈에게 건내주는 것보다는 내 손으로 끝을 내주는 것이 좋다고 하지 않겠느냐?” 관리들이 둘의 말을 따라가지 못하고 허우적거렸다.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태진은 이미 안쪽으로 사라졌고 둘만 남아 으르렁 거리고 있는 참이다. 서로 칠 것 같은 표정으로 주위를 긴장하게 만든 것도 잠시 자휼은 어깨에 닿는 손에 뒤를 돌아보았다. “왕자를 따라가십시다.” 익숙한 목소리에 자휼은 한숨을 내쉬었고 계명은 고개를 돌렸다. 편안한 표정의 자례는 창백해 보였긴 했지만 머리도 다시 빗었고 옷도 갈아입은 상태였다. 단지 입고 있는 책사의 정복 아래로 보이는 옷이 백색 동정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그건 상을 당했을 때나 입는 옷이 아니던가. “멀리서 보았을 때보다 어려보이시구려?” 계명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자례가 자휼을 끌었다. 계명은 그런 자례를 호기 있게 바라보았지만 제지하지는 않았다. 자휼은 즉시 자례가 술에 취해있는 상태라는 것을 알았다. 똑바로 걸으려고 애쓰는 모습에서 소름끼치도록 자신을 통재해보려는 눈동자에서 자휼은 굉장한 불안감을 느끼고는 조용히 동생을 끌어당겼다. 앞서 걷는 성주와 책사는 아무 말 없이 서로를 외면했다. “...그 술을 다 마셨느냐?” “제가 말도 아니니 마른풀을 씹을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네놈이 술배 나온 곰이 되겠구나.” “후후후.” 상황에 맞지 않게 형의 입에서 나온 농담에 자례는 낮게 웃었다. “다시 가두시려거든 과자나 넣어주세요.” “술 냄새가 난다.” “..나면 그들이 어찌하겠습니까?” 자례는 자휼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태수는 죽습니다.” “...성문을 열었을때 나는 네가 자진할거라 생각했다.” “저 혼자요? 그럴수는 없습니다. 같이 가야죠. 누구 좋으라 혼자 갑니까?” “...그렇구나.” 가볍게 넘기는 자례의 말에 자휼은 미소지었다. 입가에 잔잔하게 미소를 띠며 자례는 지나가는 복도의 앙상한 나뭇가지를 바라보았다. 이게 마지막인 것 같다. “ 묘책을 내놓아보아라. 책사.” “...전 피곤합니다.” “안다.” “그럼 이제 쉬어도 될 때가 아닐런지요?” “그래.” 두 형제는 말없이 계속 걸었다. 바람이 분다. 북쪽의 망자의 산에서 불어오는 하얀 바람이 둘 사이를 휘돌았지만 더 이상 춥게 느껴지지 않았다. 뒤따라오던 계명은 두 사람 사이에서 묘한 긴장감을 느끼고 불안감에 시달린다. 도무지 저 두 정안인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이지 이해할 수가 없다. 29 이상한 집구조에 어리둥절 하다가 시종이 내어 놓는 방석에 앉았다. 마치 맨 바닥에 앉는 듯해 자꾸만 뒤척거리게 된다. 지방성이라 다른 것인가. 이거 영. 이상한 느낌인데. 호위를 위해 서 있는 장수들에게 위축되는 느낌이다. 아무튼 고개를 돌리고 태수를 바라본다. “어째서 부복하지 않는가?” 태진의 말에 계명이 고개를 돌렸다. 부복할 리가 없지 않은가. 계명은 속으로 혀를 찼다. 얼핏 보아도 둘은 정안족인 것이 분명한데 황제에게도 부복하지 않았던 그들이 너 같은 건방진 왕자 앞에 부복할쏘냐. “황제의 칙령으로 부복하지 못해도 전하에 대한 존경심은 각별하옵니다.” 황제가 인정했으니 왕자 따위가 화를 내도 헛짓이라는 말이군. 태진은 그 말을 꺼낸 자례를 노려보았다. “목래의 군승인가. 성위에서 봤을 때보다 더 어린 것 같군.” “인사 올리겠습니다. 목래 군승 선율(仙聿) 이라 하옵니다.” “목래 성주가 율도(率刀)라 했지? 둘 다 율자 돌림이군. 율은 무슨 자를 쓰나?” “저는 장수 율을 쓰고 군승은 붓 율자를 씁니다.” “신선의 붓에 장군의 검이라. 단순한 말장난일지도 모르지만.” 태진은 물끄러미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전혀 안 닮았군. 혹시 이복형제인가?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아니지. 계명을 바라보니 편안한 모습이다. 들어올때 이미 현을 다루는 여인을 걸러 내라는 명령을 했다고 속삭였는데 잘 되고있나 모르겠다. 아무튼 그의 말대로 시간이나 끌어볼까. “내가 이곳에 온 이유를 알고 있나?” “실은 전혀 모르옵니다.” “그런데 왜 공격했지?” 그거야 그쪽에서 먼저 막사를 치는 둥 공격자세로 나와서 방어한 것 아닙니까. 어떤 바보가 자신의 성안에 군대를 순순히 맞이한단 말입니까. 하지만 자례는 은근슬쩍 눈치를 주었고 자휼은 어설프게 말을 흐렸다. “군대가 몰려오기에...” “검은 뛰어난지 몰라도 머리는 안돌아가는 것 같군. 그럼 책사? 신선의 붓이라는 거 한번 보여 보라. 마침 내 좋은 형제가 생일이 다가오는데 한 문장 써보게. 문장은... 음...그래, 음양화이후우택강(陰陽和而後雨擇降)이라 적어봐라.” “예?” 난감한 표정으로 자례가 되묻는다. 자휼이 작게 묻는다. “왜? 무슨 뜻인데?” “신혼 초야에 침대 맡에 걸어놓는 글이에요” “뭐?” 왠 뚱딴지 같은 문구인가, 둘다 난색을 하고 있는데 눈치 빠른 시종들이 붓과 종이를 가져왔다. 하지만 자례는 인상을 쓸 뿐 붓을 들지 않았다. “왜? 내키지 않는가? 음란 패설 같다 이건가?” “...그것이 아니오라...” 태진의 비아냥거림이 심해지자 자례는 하는 수 없다는 듯 소맷자락을 걷었다. 자휼은 그제야 자례가 붓을 들지 않으려는 이유를 알았다. 대강 동여맨 붕대에서는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괜찮다고 하더니. 하긴 그것을 믿은 내가 잘못이지. 자휼은 잠시 동안이지만 자례를 노려보았고 자례도 그것은 느낀 듯 어깨를 움찔해보였다. 눈치 하나는 굉장한 녀석. 붓을 들었으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듯 첫 자도 적어 나가지 못하자 태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보고 있는 자휼도 쓰는 자례도 등에 식은땀이 흘렸다. “뭐 하나? 항명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전하.” “아니면 거란인은 따라도 여진인은 안된다는 건가?!” “그럴 리가 없사옵지 않습니까!” “어디다 눈을 바로 뜨는 게야!” 자례는 입술을 깨물며 공손히 고개를 숙여 시선을 내렸다. 일부러 화를 내는 거다. 꼬투리를 잡는 거야. 하지만 순순히 개죽음을 당할쏘냐. 억지로 손에 힘을 주어 한자 한자 써내려가지만 떨리는 손은 어쩔 수가 없다. “이걸 글자라고 쓰나? 다시.” 자례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다시 종이를 깔고 쓰는 것을 반복했다. 쓰는 사람도 미소 짓고 시키는 사람도 웃는다. 얼마나 실없는 일을 반복했는지 모른다. 툭. 검은 먹과는 다른 새빨간 점이 하얀 화지에 꽃을 피웠다. 손에서 피가 흐른다. 늦어도 손을 좀 보고 나올 것 그랬나. 자례는 새 종이를 깔게 한다. 여전히 미소를 띠며. 하지만 자휼은 그렇지 못했다. 또 다시 종이를 갈아버린다. 잠시 동생은 창 밖을 보고 입을 가리며 잔기침을 한다. 그리고 다시 붓을 든다. 자휼은 동생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자례는 가만히 정면을 응시하다 한숨을 내쉬며 붓을 내려놓는다. 피식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뒤로 물러난다. “그렇군요. 부질없는 짓입니까?” “...수고했다.” “무슨 짓이냐! 누구 마음대로 붓을 접는거야!” 태진의 호령소리에 자휼은 자례를 부축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여워하는 태진에게 자휼은 손을 벌리고 앞으로 다가갔다. 계명이 검을 빼들고 앞을 막아섰고 태진은 불편했던 자리에서 일어나 불같이 화를 내었다. “네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것인지 알고 있느냐!” “원하시는 일은 하는 것이 아닐까 싶소. 여진의 왕자.” “전하께 무례하다!” “나는 여진족이 아니다. 네 놈은 잘 모르겠지만.” 계명은 미간을 꿈틀거렸다. 아까부터 이 놈 내게 시비를 거는 것 같은데 왜냐? 물론 서로가 적대 관계인 것은 분명하지만 이것은 좀 심하다. “쿨럭!” 마음을 진정시키며 계명은 눈을 돌렸다. 소맷자락으로 입을 막고 기침을 하고 있는 군승. 내가 왜 여기까지 들어와 이 따위 모멸감을 당해야 하는가. 여기까지 와서 아무것도 건지지 않고 돌아갈 수는 없다. 계명은 검을 집어넣고 태진을 향해 부복했다. “전하, 이놈은 감히 왕자 전하의 존엄성을 얕보았으니 응당 죄를 물으셔야합니다.” “네게 맡기겠다.” “태수와 군승을 옥에 가운다!” 자신의 군사들이 들어와 두 사람을 끌고 나갔다. 하지만 자휼에게 받은 치욕감에 계명은 손을 떨었다. 네 놈이 얼마나 고결하게 죽는지 지켜보마. 결국 너도 나도 힘에 빌붙어야 하는 비굴한 존재임을 알게 해주겠어. 하지만 위축되지 않는 모습으로 방을 나가는 태수의 모습은 짜증이 올라오게 만든다. “도형을 같이 받아주시니 황송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잠깐 나왔던 옥에 다시 갇히자 자례가 마른 풀이 깔린 바닥에 앉으며 웃는다. 쓰게 시선을 돌렸던 자휼은 결국 등을 치던 아우에게 져 다가갔다. “손을 좀 보자.” “별 것 아닙니다.” “별 것 아니니까 보는 거다. 크게 다쳤으면 보지도 않아.” 그 말에 자례는 작게 웃었다. 구르듯이 자휼의 품에 기대어버린다. 역시나 손은 뒤로 가리면서. 억지스레 손을 앞으로 돌리는 형을 조용히 바라본다. “아까 놀랬습니다. 우리 형님, 대단한 강짜시군요.” “이놈, 내 심장소리를 들어봐라 아직도 벌렁벌렁 거린다.” “형님이 안 말했다면 제가 붓을 왕자에게 던졌을걸요.” “...넌 그러지 않았을 거다.” 넌 그러지 못했을 거다. 이렇게 일이 끝날 줄 알면서도 너 스스로는 절대 계기를 만들지 않을 놈이다. 소심한 것일 수도 아니면 다른 이유일수도 있지만 넌 그렇게 못하는 놈이다. “어디보자. 손수건이 ...” 자휼이 가슴근처를 뒤적거리더니 하얀 손수건을 꺼내었다. 정성스럽게 손을 매어주자 한결 마음이 놓인다. “어떻게 될까..목래는?” “왕손이라 할지라도 자국의 도성을 상대로 전쟁을 한 것은 용서받지 못할 일입니다. 왕자가 무사하기 위해선 증거는 모두 사라져야 합니다.” “목래는 작은 성이지만 어떻게 모두 사라지겠느냐?” “...초지의 성은 불에 약한 법입니다. 지금은 겨울이라 성벽정도는 건질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도성에서는 목래가 그렇게 된 이유를 ...!” “이곳은 도성에서 멀리 떨어진 곳입니다. 화적에게 당하던 반란 족에게 당하던 아주 당연한 지형이지요. 게다가 말을 기르니, 그럴듯한 구실이 되지...쿨럭!” 고개를 돌리고 마른기침을 하는 아이를 감싸 안았지만 동생은 자꾸만 밀쳐낸다. 반대편의 구석으로 가 속옷만 걸친 몸을 두 팔로 감싸며 자례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형님, 이곳은 춥군요.” “겨울이니... 게다가 명색의 옥이 아니더냐.” “...졸립니다.” “ 혼자 잠들지 마라. 이리 와라.” “ 아니요. 다가오지 마십쇼. 피로 더럽습니다.” 자휼이 일어나 가까이 다가가자 자례는 손을 들어 거부했다. 고집 센 놈. 그 고집에 밀린 자휼이 떨어져 앉자 자례는 차가운 벽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죄송합니다. 아우가 못나 형님까지...” “내가 못나 너 하나 챙기지 못하는 것이다.” 한동안 침묵이 계속되었다. 죽게 된다. 자휼은 두려움을 느꼈다. 죽는다는 것을 이렇게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이 인생에 몇 번이나 있을까. 수많은 전쟁에서 싸우면서도 죽는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옥에서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면서 그것을 느낄 줄이야. 그러고 보니 동생은 좀 다를지도 모르겠군. 자례는 그저 눈을 감고 편안한 표정으로 기대있을 뿐이다. 저 아이에게는 죽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을 테니. 그런 자휼의 생각을 알아차렸는지 자례는 눈을 떠 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다시 눈을 내리깔고 조용히 말해준다. “두려워 마십시오. 형님. 인간이라면 모두 하늘로 넋을 올리는 법입니다.” “... 그래.” “화를 내실 것 같지만 저는 같이 가니 위안이 되는 것 같은데요.” 조용히 말하는 그 말에 묻어두었던 쓸쓸함이 나타나는 것 같아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다가가 동생을 안아주지만 역시 자신을 밀친다. “옮습니다.” “어차피 죽는다면 옮는게 무슨 상관이냐?” 문득 자신도 그렇다고 생각했는지 어느정도 이해하는 눈빛을 보이지만 역시나 밀쳐버린다. 고집센 놈 철컹거리는 소리에 자휼은 고개를 돌렸다. 익숙한 그림자가 옥으로 다가온다. 못 보던 병사다. 아마도 계명의 병사인 듯하다. 병사는 둘을 둘러보더니 다시 나가려고 한다. 순찰인가. 고개를 돌린 자휼과 달리 자례가 그를 불렸다. “뭐냐?” “부탁하나 들어주시오.” 자례는 귀에 걸린 금꽃과 옥의 귀걸이를 하나 빼어내어 병사에게 건넸다. 얼핏 보기에도 유려하고 고급스러운 물건이라 꽤나 값이 나갈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고 품안에 귀걸이를 숨기는 병사에게 자례는 작게 말한다. “ 동편 마구간 끝자락에 검은 말 두 마리가 매어져 있소. 하나는 붉은 마구를, 나머지는 푸른 마구를 한 흑마요. 그것들을 지금 성 밖으로 내보내주지 않겠소?” “...성 밖에는 우리 군사들이 있는데?” “성 문밖으로 보내주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병사는 소리 없이 나갔다. 약간은 걱정스럽게 그 뒤를 보던 자례에게 자휼이 묻는다. “흑염과 묵계를 놓아줄 생각이구나.” “말 못하는 미물들에게 무슨 죄가 있습니까? 좋은 주인을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 그놈들에게 정이 많이 들었는데...” 흑염과 묵계는 야생마였다. 목래로 와 얼마 지나지 않아 데리고 온 말이 마구간에서 죽자. 자휼은 성을 나가 흑염을 엎어 매치고 끌고 왔고 자례는 함정을 파 묵계를 잡았다. 생긴 것은 비슷했지만 성격은 주인을 닮아 흑염은 단순하고 폭력적이며 묵계는 잔꾀가 있는 영리한 말이였다. 길들이려고 노력한 날들이 떠올라 자휼은 웃고 말았다. 하지만 자례는 착잡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장군들을 만날 수 있다면 조언을 해주고 싶은데...” “왜?” “죽기엔 아까운 장수들이 많습니다. 호기부리지 말고 새 군주를..,” 철컹! 또 한번의 문소리에 둘은 고개를 돌렸다. 당당하게 옆의 옥에 들어가는 자는 노인 1진장이였던 계부 장군이였다. 자례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포옥 내쉬었고 자휼은 난감하다는 듯 계부를 보았다. 하지만 계부는 당당하게 자휼에게 부복하며 인사하는 것이었다. “주군께서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얼마나 걱정했던지...” “어째서 자네가?” “같잖은 한족의 장수가 저에게 머리를 조아리라 하기에 ...” “계부장군.” 자례가 창살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계부 장군을 1진장으로 임명하게 해 승전하게 한 이유는 장군의 실력을 저들에게 보여주는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착으로 회유를 권고하더이다.” “제 말을 이해하시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러기엔 너무나 많은 은혜를 입었습니다.” 계부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여기서 죽어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생깁니다. 두 분께서는 목래를 잘 이끌어주셨습니다. 그것으로 만족하답니다.” “...짧은 기간이었습니다.” “비록 십여 년에도 미치지 못하는 기간이지만 모두들 즐거웠습니다.” “...다른 장수들도 그러합니까?” “보다시피 제일 먼저 끌려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날 오후도 못되어 줄줄이 들어오는 장수들을 보며 자휼은 알 수 없는 행복감과 지휘자만이 가질수 있는 자존심으로 즐거웠다. 반명 자례는 땅이 꺼져라 한숨만 쉴 뿐이었다. “ 하하 군승님, 그런 표정하지 마십쇼.” “그러시게 말입니다. 우리 다같이 함께 저승길 가는데 왜 그런 표정 지으십니까?!” “시끄럽소!” 배시시 웃는 장수들을 외면하며 자례는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도대체 장수들은 목숨 귀한 줄 모르구려!” “허허, 지금 여기서 가장 귀한 목숨은 책사님 아니오?” “그러게 말입니다. 아직 장가도 아니 가셨고 게다가 반오십도 넘지 못하셨지 않습니까?” “난 하루하루가 충실하게 지나갔단 말이오. 하지만 자네들은 그렇지 못했지 않은가! 술 마시고 활 쏘고 아니면 사냥가고... 다시 투항을 물어오면 다들 투항하시오!” “책사 말이 옳다. 다들 투항해라.” 자휼이 웃으며 자례의 말에 동의하자 장수들은 인상을 썼다. “성주님은 왜 투항안하십니까 그려?” “장가도 못 가신데다 사냥도 못하고 도장만 찍으셨지 않습니까?” “난 성주다. 성주가 투항하면 무슨 재미가 있겠나?” “그럼 책사님은요?” “이놈?” 자례가 자휼을 노려보며 허튼말 하지 말라 주의를 주었지만 계념치 않고 자휼은 자례를 한 팔로 끌어 당겼다. “이놈은 내꺼다. 그러니 순장(殉葬)이다. 알겠나?” “내가 어떻게 형님 겁니까!” 자례가 결국 버럭 화를 내며 철썩 소리가 나도록 자휼의 이마를 때렸다. 아파하는 자휼을 밀어내며 화를 내었다. “그놈의 자신만 좋은 성격은 죽을 때까지 고쳐지지 않는다 했지만 정말이군요!” “...그럼 투항할건가?” “...이... 뱃속에 너구리를 가지고 사는 늙은이 같으니라구!” “난 늙은이란 소리를 듣긴 젊다?” 화난 표정의 자례가 자휼에게서 등을 돌렸다. “아무튼 죽어도 형님 따라 죽는 것이 아닙니다. 순장이라니. 내가 형님의 노비라도 된다는 겁니까?” “엇흠. 성주께서는 우리도 그 순장계열에 끼어주시지 않겠습니까?” “그건 곤란한데. 관리를 순장하는 것은 황제가 죽었을 때만 가능한거라네.” 자휼은 농담을 가볍게 넘기며 웃었다. 하지만 진지한 표정으로 등을 돌린 자례에게 말하는 것이다. “순장 따위가 아니다. 내가 어찌 널 넣어 달라 할 수 있겠느냐.” “...” “하지만 네가 원한다면 나는 함께 들어갈 수 있다.” “아이고. 성주님 그거 청혼입니까?! 노골적이십니다 그려.” “아무리 사태가 궁하다지만 그냥 총각귀신 되십쇼. 근친은 하늘의 죄입니다!” “이놈들! 사실 부러운 거지?! 하지만 너희는 이쪽으로 건너오지 못한다. 그림의 떡이라는 것이다. 하하하” “이봐라! 거기 간수! 환합주나 한잔 떠와라!” 별 미친 주문 다 보겠다는 표정을 간수들을 보며 자례는 머리를 부여잡았고 자휼은 장군들과 낄낄 웃는 것이었다. 이런 게 좋다. 죽음을 기다리며 불안에 떨기보다는 당장만이라도 웃으며 불안을 잊는 것이 좋다. ------ 단설의 역주는 인용과 개인적 견해가 들어간 글입니다.(맹신(盟信)사양. 도용씁쓸)-------- 주:음양화이후우택강(陰陽和而後雨擇降) 하늘과 땅사이에는 음양의 두 기가 조화하여 비를 내린다는 뜻으로 부부가 화합하여 비로소 집안이 번영함을 비유한 말. (출처 大?禮天具篇) 음란한 말은 절대 아니다. 이 글에서 태진이 비꼰것 뿐이다. 주:순장 고대 국가에서, 왕이나 귀족이 죽었을 때, 신하나 종 등을 함께 매장하던 일. 일반적으로 남편이 죽으면 부인을 묻는 것, 주인이 죽으면 시종을 묻는 것으로 나누어진다. 도성에서는 많은 칙명으로 인해 폐지 되었지만 일부 지방에서는 오래까지 남아있었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주술적인 면으로 순장을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단순히 사회적 재산에 따른 풍습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일부, 순장이 멈춘 이유는 고대 사회가 발전하면서 필요불가결한 노동력때문이라고는 하나 , 원인은 아직 학자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되고 있다고 한다. 동양뿐만이 아닌 세계 각국의 순장은 거의 동일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것도 화제다. 우리나라에서도 순장의 모습은 여기저기에 남아있는데 가야의 순장은 유명하며 고대 삼국 초기에는 순장이 존재하였다하고( 하지만 이경우 전자, 부인을 묻는 것이 아닌 시종을 묻는 것으로 사료된다. 고대 삼국은 중국과는 달리 여인의 지위가 남성과 동등했고, 부인만 따로 쓰는 외묘도 나오고 있다.) 신라의 진흥왕이 502년에 순장을 폐지했던것으로 보아 꽤나 오랬동안 풍습이 이어졌던 것 같다. 고려장도 어느면에서는 순장의 풍습이 전해진 것이 아닐까. 30 달이 높이 뜨고 저물어갈 무렵 옥 안의 장수들은 내일 걱정은 접어둔 체 모두 단잠에 빠져들었다. 자휼은 물끄러미 장수들의 얼굴을 보았다. 해가 뜨면 어떤 식으로든지 결말이 날것이다. 그것이 죽음이라 할지라도. 하지만 모두들 감사하네. 자네들 덕에 이곳을 고향으로 느낀다네. 계속 불만을 중얼거리던 자례의 목소리가 어느 순간에 잦아들었다. 그 고요함에 공포를 느낀 자휼이 급히 다가가 목의 맥을 짚었다. 그냥 잠든 것인가. 자휼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동생을 보듬어 안았다. 악몽을 꾸는 것인지 미간을 잔뜩 구긴 체 잠든 동생을 다독거렸다. -내가 어떻게 형님 겁니까! 왜 내 것이 아닐까. 널 여기까지 키어온 것이 나인데 어째서 내 것이 아닐까. 아니 안 되는 걸까. 이렇게 품에 넣어 다독일 수는 있지만 어째서 내 것은 아닌 것일까. 그 화난 얼굴을 보고 신경질을 내며 칠 수도 있지만 어째서 내 것이 아니란 말인가. 그건 이 놈이 나와 너무 가깝기 때문이다. 차라리 전혀 모르는 타인이었다면 이렇게 되진 않았을까. 아니라면 더욱 아파했을까. 아니라면 이놈을 가슴에 담지 못했을까. “... 아침입니까?” “아니다.” 자례가 실눈을 뜨며 주위를 살펴보았다. 눈을 비비며 일어나 옷을 추스른다. 곧 아침이 오고 다시 한번 조사를 할 것이다. 검은 머리를 손으로 빗어 내리는 모습에 자휼은 모를 듯한 이상한 감정에 휩싸였다. “...형?” 장수들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 자휼의 눈빛에 이상함을 느꼈는지 자례가 다가와 묻는다. “어디 편찮으십니까?” “애야.” “...?” “가랑호수에는 두 번 다시 못가겠지?” “...?” “지금 내 말을 들어주지 않겠느냐?” “...싫습니다. 그 강. 내가 맞추었는지 모르는 일 아닙니까?” 자례는 고개를 저으며 물러났지만 자휼은 벌떡 일어나 자례의 어깨를 잡았다. “내가 맞았는지도 모르는 일 아니더냐? 그리고 두 번 다시 가랑에는 갈수 없으니 지금 들어다오!” “왜 이러십니까. 싫다고 하지 않습니까!” “들어봐라, 난...!” “계부장군! 계부장군!” 동생의 비명소리에 놀란 자휼이 자례의 입을 손으로 막았지만 잠귀 밝은 계부가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뭡니까? 뭡니까 책사님?” 계부는 창살 너머를 건너보았다. 뭔가 이상한 분위기에 싸우고 있었던 것 같은 모습이다. “왜 그러신 겁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자례가 형의 품을 빠져나오며 반대편 벽에 붙었다. 지금의 소란에 다른 장군들까지 부스스 거리며 일어났고 자휼은 안타까운 마음보다는 화가 나는 것을 느꼈다. 왜 안 들으려고 하는 것이냐. 이게 마지막이라는 것을 너도 알고 있으면서 왜 안 들으려고 하는 것이냐. “이게 마지막이라면 무엇을 두려워하겠느냐. 네게 더 이상 무슨 잘못을 저지를 수 있겠느냐. 내 죽어 내가 지은 업 대문에 망자의 산에 오르지 못해 영원히 구천을 헤맨다 한들 지금 이심정보다 더할까.” 장군들은 일순 소란을 멈추고 조용해졌다. 잠든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성주는 진지하기 보다는 침통한 표정을 지우지 않고, 벽 그늘에 들어가 버린 책사는 옷자락만 보일뿐이다. “인간의 운명이란 어찌 이리 장난과 같아, 왜 하필 너와 이런 인연으로 만나게 되었는지 분통터지는 일이 아닐 수 없더구나. 곱씹고 곱씹어 보아도 이리 악연일수는 없더라. 왜 하필 네가 내 아우이며 내가 네 형인지 너는 생각해 본적이 있느냐?” 네가 스쳐지나가는 길손이면 좋으리. 차라리 내가 네가 거느리는 시종 하나였다면 얼마나 좋으리. 아무것도 모른 체 만나 부끄러움에 얼굴 붉히며 손을 맞잡고 달에게 소원을 비는 다솜스런 연인이라면 얼마나 좋단 말인가. 그것이 사치라면 차라리 만나지 말 것을. 스처지나가는 길손으로 더 이상 아무런 인연 없는 바람 이였으면 좋았을 것을. “그러나 하늘이 그렇게 정해주었다면 한낱 인간인 나로서는 어찌할 수 있겠느냐. 내 스스로가 그 운명을 감당하는 수밖에. 숨기고 누르고 지웠던 욕심이지만 마지막이라는 지금에 있어서 더 이상 내가 쌓아왔던 고민을 망자의 산까지 가지고 가긴 싫다.” 갑작스럽게 기침소리가 들린다. 황망히 다가가니 토혈하는 동생이 서있다. 입가에서 흘러나온 기다란 붉은 뱀이 옷자락을 휘감는다. “괜찮으냐?!” “쿨럭! 쿨럭!” 어떻게 해주어야 하나. 그러고 보니 난 자례가 피를 토하는 것을 챙겨본 기억이 없다. 저 작은 몸에서 끊이질 않고 피를 뱉어낸다. 아니 피가 아닌 핏덩이를 뱉어낸다.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고 혼절해버린 동생을 부축하며 자휼은 황망한 눈으로 장군들이 갇힌 옥을 바라본다. “...놀라셨나봅니다. 그냥 재우십시오. 탈진한거 같으니 조금 있다가 다시 정신이 드시겠지요.” “정말 그런 건가?! 사실인가?!” 악을 쓰는 자휼에게 계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도 이런 적이 있으셨습니다. 괜찮으실 겁니다.” “언제?!” “성주께서 늑대사냥을 나가셨다가 실종된 날입니다.” “...” “많이 놀라시거나 긴장하시면 그런다고 의원이 말했지만.. 어째서 이런 상황에 그런 말씀을...” 계부의 탄식에 자휼은 고개를 들었다. 왜? 내가 무슨 말을 했는데? “책사님의 병은 천형이 아닙니까.” “...아니야! 난 그런 말을 한 게 아니야!” 맙소사. 네 말은 그런 말이 아니야. 네 병을 원망한 것이 아니야. 널 원망한 것이 아니야. 병 든 널 길러야 했던 날 원망했던 것이 아니야. 나는 내가 원망스러웠던 거야, 네가 내 동생이란 것에 내 감정을 숨겨왔던 날 용서할 수가 없었던 거야. 널 원망한 것이 아니야. -그놈의 자신만 좋은 성격은 죽을 때까지 고쳐지지 않는다 했지만 정말이군요. “자례야, 그것이 아니야. 아니란 말이다! 눈을 떠라!” 문소리가 나며 병사들이 들어와 미친 듯이 군승을 흔들어대는 태수를 보고 멈칫했다. “어린 놈은 죽었나?” “자결인가?” “네 이놈들! 어디다 대고 망발을 하느냐!” 장수들이 불같이 화를 내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비웃음이었다. “태수는 나오라. 심문이다. 아니라면 강제로라도 끌어내야 하나?” 자휼은 피가 나도록 벽을 주먹으로 쳤다. 지금 나가면 죽음이다. 그런데 이렇게 갈수는 없다. 내 억울하여 이렇게 갈수는 없다. 하지만 성주로써의 자부심은 더 이상의 굴욕을 당할 수 없게 만들었다. 장군들이 오열하는 가운데 자휼은 동생을 편히 눕히고 마지막으로 검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몸에 밧줄이 감기자 오히려 죽음에 대한 공포는 사라졌다. 하지만 안타까움. 억울함. 가슴속의 한이 머리끝까지 밀려와 가슴이 너무나 답답해졌다. 이렇게 가면 어떡한단 말인가. 이렇게 상처 입히고 떠나는데 내 어떻게 내세에 인연을 바라겠는가. 자휼은 눈가가 뜨거워지는 느낌에 고개를 돌리고 당당하게 옥문을 나갔다. “나중에 보세.” 그 한마디에 많은 것이 담겨있다는 것을 아는지 장수들은 흐느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빠르게 말을 재촉하면서 장군 을노는 계속 욕을 담았다. 세상일이 어떻게 돌아갈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하지만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이리 거짓말처럼 돌아갈수 있단 말이던가. “을노! 연기가...!” 마유장군의 말에 을노가 고개를 들었을 땐 목래성이 있는 방향에서 검은 재와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검은 재가 멀리 떨어진 이곳까지 날아와 시야를 방해한다. 초지에 새운 성이 태워질 때 생기는 독특한 검은 비. 마구 달려 목래성이 보이자 이미 성은 불태워지고 있었고 반대편에서 한 무리의 군대가 철수하는 것이 보였다. “을노, 달려라! 가서 확인한다.!”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는 을노에게 소리치며 마유장군은 목래로 달렸다. 성문에 다다랐지만 뜨거운 불의 요새가 되어버린 터라 들어가긴 무리다. 불을 두려워하는 말들이 문 앞에서 멀어지려고 바둥거렸고 을노와 마유는 어찌할 줄을 몰라 기둥이 무너져 내리는 성을 바라보아야만 했다. 어디선가 익숙한 말의 비명소리가 들려 을노가 뒤를 돌아본다. “...저 말! 태수의 말입니다.” “뭐?” 마유가 고개를 돌리자 언덕 위에서 검은 명마 두 마리가 불타는 성을 보며 울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을노는 재빠르게 언덕위로 올라 말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말이 성을내며 회를 치는 것이 보여 놀랬지만 잠시 후 을노가 두 마리의 말을 이끌고 성문으로 다가왔다. “뭘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가?!” “희대의 명마들은 주인을 살린다 하지 않습니까! 달려라!” 을노가 채찍으로 흑염과 묵계를 치자 두 마리의 말은 불타오르는 성문을 곡예를 부리듯 뛰어넘어 성안으로 들어갔다. 그에 놓칠세라 을노는 자신의 말을 재촉했고 말은 앞선 말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이 사람!” 뒤에 남은 마유가 외쳤지만 을노는 곧 불기둥 사이로 사라졌다. 불을 두려워 하는 장수인데 저렇게 겁 없이 불타오르는 성안으로 뛰어들어가다니. 오죽 급했을까. 마유는 따라 들어가려고 하지만 그의 말은 불길을 피해 자꾸만 물러난다. 어디로 가야 하는 건가?! 어디로 가야 하는 건가?! “빌어먹을 놈의 불! 난 불이 싫어!” 을노가 흥분된 목소리로 외쳤다. 망할 놈의 불 같으니라구. 이놈이 내 어머니를, 꽃 같은 내 누이를, 친구들과, 고향을 앗아갔다. 그러면서도 불속을 달리는 자신에게 실소를 멈추지 못했다. 벌써 성벽은 불덩이가 되어 무너지고 있다. 빨리 나가지 않으면 오늘 나 역시 불에 의해 명을 달리하리라. 두 마리의 검은 말들은 내성 안으로 뛰어들었다. 혹시 태수의 방인가? 을노는 태수의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연기로 뒤덥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천장부터 내려오는 휘장에 불이 붙여 화려하고 아름답게 불의 춤을 춘다. 두 마리의 말들이 여기서 계속 푸릉거리자 을노는 자신의 말에서 내려 이곳저곳을 눈여겨보았다. 순간 이상한 것을 밟고 아래를 바라보았다. 인간의 귀다. 오싹해진 을노의 앞에 불타오르는 기둥이 쿵 소리를 내며 쓰러진다. 놀라 뒤로 물러나는 순간 그 뒤로 자휼이 보였다. 이미 왼쪽의 옷이 불이 붙여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타오르고 있다. “늦었어... 제길!” 좋아했다. 그들을. 내가 못 이룬 행복을 작지만 소담하게 갖고 살아가는 그들에게 얼마나 위안을 받았는가. 그런데 여기서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는가! 연기보다 그들마저 잃었다는 쓰라림에 눈이 뜨거워진다. 타악! 갑작스런 소리에 놀란 을노가 눈을 뜨니 묵계가 앞발을 들어 기둥을 차고 있다. 저 말이 무슨 짓인가! 하지만 바로 그 뜻을 알 수 있었다. 재빠르게 입고 있던 포를 벗어 자휼을 감쌌다. 불이 꺼지긴 했지만 살이 익는 냄새에 구역질이 날 것 같다. 흑염이 안절부절 못하며 자신의 주인을 내려다본다. 살아있을지도 몰라.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을노는 흑염의 등에 자휼을 태웠다. 흑염은 즉시 방을 빠져나간다. 을노가 말을 타고 나오는 순간 뒤에서 뜨거운 불길이 날름거리며 거대한 기둥이 덮친다. “으악!” 간신히 피했다고 생각되었지만 앞서가던 흑염이 뒤를 바라보며 울부짖는다. 이상하게 생각한 을노가 뒤를 바라보았다. 허공으로 힘없이 발길질 하는 말의 다리가 보인다. 이미 기둥에 허리가 두 동강이 나있다. 저것은 죽은 말의 몸짓인가. 묵계는 떨어져 내리는 기둥을 피하지 못하고 그곳에 누웠다. 힘없이 발길질을 하며. 주인을 업고 달려가며 울부짖는 흑염의 외침에 을노는 어린아이처럼 울고 말았다. 그래. 너도 네 동생을 잃었구나. 말 못하는 미물이라 하나 어찌 그 슬픔이 크지 않겠느냐. 불길이 날름날름 모든 것을 삼켜버린다. 그 거대한 욕심에 누워버리는 것은 누구란 말인가. 31 낯익은 휘장을 보며 자례는 긴장이 확 풀리는 것을 느꼈다. 꿈이었나. 모든 게 꿈이었나. 천천히 일어난다. 깨끗한 잠옷에는 피를 토한 흔적 따위 없고 방안 가득 좋아하는 침향이 흐른다. 비치는 휘장 사이로 아침 햇살이 들어오려 애를 쓰고 탕약기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난다. “....?” 진실로 꿈이었나. 휘장을 걷기 위해 오른손을 들자 붕대가 감겨져있다. 꿈이 아니야. 모든 건 꿈이 아니야. 그런데 어째서 난 이곳에 있는 거지? 황급히 방을 나가 옆방인 성주의 방으로 뛰어 들어간다. 이곳은 어디지? 분명 누워있던 방은 내방이었건만 문을 나선 이곳은 전혀 모르는 곳이다. 황당하다는 얼굴로 다시 자신의 방안으로 들어가 보지만 찻잔이며 쓰다만 종잇장 하나하나 모두 내가 쓰던 것이다. 아니 다른 것인가? 창을 열자 앙상한 가지를 움츠린 석류는 어딜 가고 꽉 들어선 도성의 길과 집들이 보인다. “...학!” 심하게 가슴이 두근거리며 역겨운 느낌이 위로 올라온다. 가슴을 두드리며 진정하려고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현실에 경악하고 만다. 이곳은 목래가 아니야. 여긴 어디란 말인가. 장수들과 형님은? “어머나, 정신이 드셨습니까?” 누군가 뒤에서 호들갑을 떨며 들어온다. 경계심에 뒤로 물러나자 그는 섭섭하다는 듯 울상이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데다가 둥근 얼굴에 수염 자국이 없고 높은 목소리. 선명한 녹색의 옷은 아마도 환관인가.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자례는 노기를 띤 얼굴로 화병을 들어 그에게 던졌다. 창캉하는 요란한 소리가 나며 환관이 땅을 구른다. “아이구구! 너무하십니다. 나리! 소인이 무슨 잘못을 했습니까!” “이곳은 어디냐?! 넌 누구냐? 내가 왜 여기 있는 것이야?!” “아이고, 저는 나리를 모시라는 분부만... 아아, 이 귀한 유리가, 남쪽의 국화가...” 자례는 그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침상의 하얀 이불의 마지막 장을 걷어낸다. 역시 내 침대가 맞다. 침대의 밑면은 비밀 서랍이 있었고 거길 열자 장검이 하나 들어있다. 책사로 임명받았을 때 봉인해둔 장군검. 형이 되돌려 놓았을 것이다. 자례는 검을 뽑아들었다. 카랑거리는 날카로운 여인의 비명소리와 같은 비음이 방안을 울린다. “여기가 어디냐!” “나리, 절 죽이실 겁니까? 저는 단지...” “그럼 어쩔 수 없지.” 자례는 주저 없이 검을 내리쳤다. 서걱이는 뼈가 갈리는 소리가 손으로 느껴지며 환관의 목과 몸이 따로 뒹굴어 버린다. 경망스럽게 튀기는 피에 흰 옷자락이 물들지만 상관없다. 시체를 돌아 방을 나왔다. 손을 들어 바람을 살피니 오른쪽으로 바람이 분다. 그렇다면 반대쪽이 남쪽이다. 어떤 성문이라도 남쪽으로 향한 문은 항상 만들기 마련이다. 이런 집에도 마찬가지다. 전혀 알지 못하는 복도를 돌아 나가며 문을 찾았다. 낯선 방안. 알 수 없는 구조. 생소한 낮은 천장에 현기증이 날 것 같다. 알 수 없는 독특한 짐승의 냄새가 속을 자극한다. 이상할 정도로 사람이 없다. 너무 굽어진 복도 때문에 길을 알 수가 없을 정도다. 필사적으로 바람을 살피고 해그림자를 보아가며 드디어 문처럼 보이는 곳에 다다르자 놀란 얼굴의 병사 서너 명이 벌떡 일어난다. “이곳은 어디냐?” “... 어떻게 나왔지?!” “이곳이 어디냔 말이다!” “일단 잡아라!” “웃기지 마라!” 하얀 얼굴에 귀신같은 표정을 지으며 자례가 검을 든다. 주춤거리던 병사중 하나는 문을 열어 나가고 남은 병사들은 검을 빼들지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상처 입힐 생각은 아닌 것 같다. 난 포로로 잡힌 것인가? 누구에게? 황제에게? 왕자에게? 아니면 어떤 미친 장군이란 말인가? 무의식적으로 내치는 검에 피가 튀기고 비명소리가 울린다. 뒤로 도망가는 병사를 멍하니 바라본다. 지금 내가 무엇을 하는 건가. “그래 다 죽이니 화가 풀리는가? 정말로 사나운 것은 확실하시군.” 자례가 뒤를 돌자 외우고 싶지 않았던 얼굴이 들어왔다. 무례한 한족같으니라구. “생명의 은인에게 그런 표정하다니 가슴 저리오, 수하.” “누가 네게 그 이름으로 날 부르라고 하였느냐!” “진정하시오. 당신에게 해를 끼칠 생각이 없소. 내 말을 먼저 들으시오.” “여긴 어디지?” “여긴 황제가 거주하는 도성 장안이요.” “...목래는?!” 그 말에 계명은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목래는 불탔소. 이미 삼일전의 일이요.” “뭐?” “4일 내내 주무셨소. 물론 기억나지 않겠지.” 자례는 또 다시 울컥이는 비릿한 내음에 입을 막았다. “살수 있을 거란 생각은 애초에 안하는 듯 하구나.” “한낱 검을 휘두르는 사내지만 그 정도는 알고 있소.” 자휼의 말에 태진은 피식 웃었다. “그렇다면 이것저것 하는 것이 번거롭겠지. 들어라. 난 이곳을 불태울 생각이다. 그러기 전 한 가지 네게 확인해 볼게 있어 이리로 다시 부른 것이다.” 찬 바람이 부는 성벽, 아직 보수조차 되지 않아 이곳저곳에 금이 가고 쓰러진 시체들의 피가 아직 남아있는 곳에서 자휼은 무릎을 꿇고 태진을 노려보았다. 옆에 선 계명이 희미한 웃음을 띠며 자휼을 바라본다. 그 웃음에 기분이 나빠 자휼은 차라리 눈을 감았다. “15왕자가 이리로 왔었지? 그때 그의 시중을 든 여인이 누구냐?” “...?” “내 형제의 가슴에 불을 지른 여인네가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자휼은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부릅떠 태진을 노려보았다. “네 놈! 수많은 인명을 유린하면서 이곳까지 온 것이 고작 그런 이유란 말이더냐! 왕씨로써 할줄 아는 것이 고작 그따위 생각이란 말이더냐! 하늘이 널 왕씨로 내린 것에 이런 식으로...!” 자휼은 말을 다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야 했다. 머리를 가격한 충격에 눈앞에 캄캄했다. “죽이진 말라. 아직 물어볼게 있다.” 태진은 계속 말했다. “성안 여인들을 살펴보았지만 이거, 멀쩡한 여인하나 없는 곳이 아니냐. 이거 괜히 시간 낭비한 꼴이 된단 말이다? 앞으로 그놈의 생일이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말해준다면 편히 가게 해주마.” “네 놈들의 한가한 술놀음 내기 따위 난 알지 못한다.” “흥. 자비를 베풀었건만.” 태진은 소리죽여 웃었다. “현을 연주하는 여인이라면 응당 손가락이 단단한 법이다. 이런 손바닥만한 곳에서 그런 여인을 찾는 것은 쉬운 일.” 현? 자휼은 멈칫했다. 그때 병사중 하나가 다가와 계명에게 소곤거렸다. “ 왕자님. 여인들을 다 추스렸으니 이곳을 떠날 차례입니다.” “그전에 이놈을 어떻게 죽여줄까에 대해 생각중이다. 목을 베면 너무 간단하지 않은가. 사지를 말에 매어 달리게 할까? 아니면 피부를 벗겨내고 소금물에 담글까? 기름에다 끓일까?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손가락을 다 잘라내어 피를 흘리게 할까?” “... 기둥에 묶어 자신이 다스리던 성과 운명을 같이하게 하소서.” “왕족의 인자함을 보여주자는 것이냐.” 태진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그렇게 해라.” “예.” 계명은 병사에게 손짓해 자휼을 끌어내리게 했다. “내 마지막 인정으로 자네 방에서 죽게 해주지.” “... 네 놈 정말로 성안의 모든 것을 태울 생각이란 말이냐?” “ 어차피 작은 성. 부담스러울 것도 없다.” 자신의 방으로 끌려 들어가는 순간, 잠시 동안이지만 자휼은 동생의 방이 엉망이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성주의 방의 기둥에 단단히 몸을 묶이자 계명은 병사들을 잠시 물러나게 하고는 그 앞에 앉아 물끄러미 자휼을 보았다. “정안족이란 스스로 무덤을 파는 놈들이다. 어째서 자신에게 내려진 기회를 차버린단 말인가.” “... 네 놈은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당연히 알고 싶지도 않다. 저길 보아라.” 계명이 가리킨 곳에는 낯익은 물것이 있었다. 거문고. 그러고 보니 마지막날 현을 들었던 것이 언제더라? 제비를 받은 그날이던가? 자례녀석 또 저걸 치우지 않았구나. 그러고보니 고작 일주일도 안한 전쟁이지만 이상하게 오래전의 이야기처럼 여운을 남긴다. 다시 그 현을 들을수 있을까? 향로에 꽂아놓은 술대는 타버리지 않았겠지? “알고 있나? 15왕자가 결혼을 안 한 이유는 현을 다루는 여인과 사랑에 빠져서라는 소문을? 그래서 4왕자의 권력을 업은 철부지 14왕자가 이곳에 덤벼든 것이다. 이곳에서 현을 가진 여인을 차출했지만 영 아닌 것 같아서 성을 뒤져 보았지. 뜻밖에 네 방에서도 저런게 나오는군. ” “...” “우습군. 사람마다 취향은 다른 것이라 생각이 들지만 이런 수염 난 사내가 그리 사랑스럽다니.” 계명은 크게 웃었다. 엄청난 오해에 자휼은 기가 막혔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누구 좋으라고 내가 아니라 한단 말인가. “널 15왕자에게 데리고 가면 크게 상을 얻을까? 하지만 힘없는 왕자를 업어보았자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이냐. 안 그러냐? 너도 장군이라면 내 맘을 알겠지?!” “ 네 놈... 용이 되고 싶어 하는구나” “왜, 그럼 안 된단 말이냐? 초원의 들개들이 황제라 거들먹거리는 이때 정통 황족의 피가 흐르는 내가 안 된단 말이냐?!” “네 놈은 왕이 될만한 거목이 아니다.” “잘 아는군.” 계명은 매력 있게 웃으며 자휼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자휼은 몸을 피하고 싶었지만 너무나 단단히 묶여 있는 터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숨소리가 귓가에 들리자 몸이 오싹해진다. 너무나 더럽고 불결하다는 생각이 머리끝까지 올라 몸서리쳐진다. “왕이 될만한 재목이 아니라서 인재를 찾고 있다. 어떠냐. 너도 내가 귀여워 해 줄 테니 내 밑으로 들어오지 않겠냐? 행여 내가 그 어린 왕자보다 널 만족시키지 못할까! 아하하!” “네 이놈! 저리... 악!” 전신을 움츠리게 만드는 고통에 자휼이 비명을 질렀다 계명이 뒤로 물러나 입에서 무엇인가를 뱉어내었다. 귀다. 방금 전까지 자휼의 왼쪽에 붙어있던 그 귀다. 반쯤 남은 귀에서는 피가 흐른다. 칼로 베이는 상처보다 아찔한 통증에 자휼이 괴로워하자 입가의 피를 닦아내며 계명이 웃는다. “미안하지만 난 여인이 좋다. 그러니 넌 여기서 죽어줘야겠다.” “...후...후후...내 장수들이 널 실망시켰더냐?” 눈을 부릅뜨고 비웃는 자휼의 말에 계명은 멈칫했다. “하긴 호랑이를 섬기던 장수들이 어찌 개 따위에게 고개를 숙이겠느냐. 왜? 그것이 그렇게 분하더냐? 그렇게 화가 나더냐?! 하하하!” “...” “왜 떠는가? 하하 여기서 당장 죽여 버리고 싶은 것을 참고 있나? 사양말로 그 검으로 날 치게. 내 자네의 그 아양 따위 못 받아줄 위인이 아니지!” “호기부리는 것도 여기까지다. 그리고 그렇게 호락호락 단칼에 보내줄 것 같으냐. 고통스럽게 살아 불타서 죽거라.” 계명은 억지로 미소 지었다. “듣자하니 네놈 동생을 참으로 아끼는 것 같은데 아직 내 수중에 그가 있다는 것을 잊었느냐?” “흥, 그 아이는 능지처참을 해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을 놈이다. 독을 품고 있는 아이니 물리지 않도록 하는것이 좋을걸?” “알려줘서 고맙군. 그렇다면 말라죽을 때까지 괴롭혀 네놈 곁으로 보내주마.” “...네 이놈 내 동생을 건들이지 마라!” “왕이 될만한 재목이 아니라서 인재를 찾고 있다하지 않았나? 호랑이와 개 따위를 분간하지 못하는 장수들은 필요 없다! ” 저 놈 자례를 이곳에서 데리고 나가려고 하는구나. 순간 자휼은 두 가지 감정이 교차하는 것을 느꼈다. 안도감과 실망감. 동생이 살아나간다는 것에 당연 기뻐해야 하지만 어찌... 계명이 등을 돌렸다. “여기서 살아있는 체로 네가 이룬 것들과 함께 재가 되어버려라.” “장군님! 이젠 여길 나가셔야 합니다.! 불길이 빠르게...” “시끄럽다! 초지이니 당연하지 않은가!” 다급하게 들어온 병사에게 소리를 지른 계명은 힐끔 자휼을 바라보더니 서둘러 방을 나갔다. 자휼은 고개를 숙였다. 피곤이 엄습해왔다. 어디선가 무거운 공기가 머리를 짓누르는 듯 하다. 가느다랗게 여인들의 비명소리와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무력한 사내들의 가슴만 애태우는 듯 들려오고 성이 불타오르는 소리가 그 한맺힌 노래 가락속의 리듬을 타고 올라가 검은 연기로 사라져버린다. “...하여 내 왕자에게 간청했지만 그리 허술하신 분이 아니여 목래는 불타고 말았소. 상심되는 것을 이해하오. 목래는 두 분이 키우셨다는 말을 들었소이다. ” “...” “바람이 아직 차니 들어가시오.” 얼이 빠진듯한 표정의 자례가 무척이나 걱정된다는 듯한 계명의 얼굴을 외면하며 물는다. “태수께서는?” “...죽었소.” “...어떻게?” “내가 목을 베었소. 원래 목래와 함께 불타오를 것이었지만 ... 편하게 가게 했으니 위안으로 삼으시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자례에게 천천히 다가가며 계명은 정말 안 되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대의 형이 가며 나에게 당신을 부탁했소.” “거짓말하지마라!” 자례는 다가오는 계명에게 검을 겨누었다. “내 형님은 그럴 분이 아니다. 스스로가 부담되어 날 죽일지언정 남에게 날 부탁할만한 분이 아니야!” “만약 내가 사심이 있다면 그 검을 그 자리에 놓아두었을 리 없지 않소? 난 당신의 미움을 받고 있소. 그런데 이렇게 홀홀 단신으로 검을 가진 당신에게 다가올 리가 있소?” 하지만 자례는 뒤로 물러나며 손가락마디를 집으며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역술까지 사용할 수 있는가. 계명은 게슴츠레 눈을 뜨고 자례의 표정을 주시했다. “...아아!” 소중한 것을 잃는 괘, 업을 얻는 패에 자례는 불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계명이 부드럽게 말을 걸었다. “들어가서 쉬시오. 책사.” “...내가 쉬어서 뭘 하지?” 갑자기 자례는 검을 돌려 목과 어깨사이에 얹었다. 그 행동에 놀라 계명이 소리질렸다. “무슨짓이오!” “어째서 하늘은 천형을 주고 업까지 지워줄려 한단 말인가!” 서걱하는 소리가 들리기 전에 계명이 손이 칼날을 뿌리쳤다. “...과연 독을 품었군.” 계명은 날카롭게 배어져 피가 흐르는 자신의 손을 보며 중얼거렸다. 쓰러진 책사의 목에서도 피가 나오지만 다행히 스친 것 같다. “이대로 죽을 수 있을 것 같으냐. 그렇게 하진 못한다.” 계명은 자례를 들쳐 업고 다시 집안으로 들어갔다. 널 살리기 위해 왕자에게 얼마나 머리를 조아렸는데 이렇게 쉽게 죽여줄 것 같으냐. 넌 죽을 때까지 날 위해 그 영특함을 사용해야 할 것이야. “살아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야. 하지만...” 마유는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평원을 바라보았다. 평원이 아닌 호수다. 눈이 소복이 쌓인. 눈을 대강 치우고 얼음위에 올려 화상부위에 눈을 올려놓아 열을 식힌다. 큰 화제에서 살아남은 을노의 지혜였다. 그 역시 팔 다리에 입은 화상으로 눈 사이에 앉아있었다. “살아있는 것이 다행아닙니까. 죽지만 않으면 됩니다.” “하지만 이 사람...” 왼쪽 귀는 누가 먹어버렸는지 반밖에 남지 않았다. 바람이 부는 방향이었는지 왼쪽 반신은 눈뜨고 보지 못할 정도로 익어, 아니 녹아버렸다. 머리는 거의 다 타버렸고 왼쪽 눈은 녹아내린 살점에 사라졌다. 왼쪽 팔은 굽힌 체 굳어버려 곧 죽을 노인의 팔이 되어버렸고 왼쪽다리는 잘라내야 할 것 같다. 더욱 기괴스럽게 오른쪽 얼굴은 바람의 도움을 받아 피해를 입지 않았는지 매우 정상적이라 괴물의 반과 인간의 반을 합한 모습이다. 그것이 더욱 괴기스럽다. “차라리 죽는 것이 좋았을지도...” “그런 소리 하지 마십시오. 장군! 살아있으면 언젠가 복수할 날도, 행복을 느끼는 날도 있는 것입니다!” 을노가 눈 속에서 벌떡 일어났다. “...제 아무리 흉한 모습이 되었다 한들 살아나기만 하면 된단 말입니다.” “...미안하이. 을노.” 마유가 중얼거렸다. 그래, 아무리 흉한 모습인들 살아나길 바라는 사람은 있기 마련이네. 바로 자네가 겪은 일이니 내가 뭐라 위로하겠는가. 하지만 성이 모두 불타버렸는데 그를 기다릴 사람이 있겠나? 홀로 살아남을 것을 저주하지는 않을까. 을노 자네가 그랬던 것처럼 말일세. 복수에 불타 몸을 버리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을 정도로 이 사람은 강할까. 하지만 마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얼음 조각을 낀 겨울의 삭풍은 망자의 산으로 불어간다. 혼자가기 구슬퍼 누구를 데려가랴 저렇게 운단 말인가. 쓸쓸한 생각이 목래의 재를 멀리 날려버렸다. ------------------- 2 대다(慾心). ------------------- 32 왕성의 겨울은 심심하다. 바둑이나 장기에 지치면 할일이 없어진다. 특히나 세력을 가지지 못한 왕자들은 더욱 그렇다. 공주들은 춤과 자수, 노래로 사계절 모두 즐기는 여가거리를 생각해 내지만 머리 딱딱한 사내들은 그렇지 못하다. 화선은 수가 놓여진 옷을 입는 것을 좋아했지만 수를 놓는 것은 싫어했다. 한때는 수도 즐겨했지만 레이첸이 자신의 고운 손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는 손에 단단한 살이 밖힐까 바늘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여인의 맵씨는 손에서 나온다고 손을 사용하지 않는 놀이는 거의 없다. 태진의 세부가 된 후로 화선을 노래를 즐겨했다. 그녀는 얼굴도, 목소리도 매우 아름다워 곧 궁안의 보물이 되었다. 정비가 아니므로 화선이 먼저 레이첸을 찾아기진 못했지만 그녀가 그를 찾지 않아도 될 정도로 레이첸은 그녀를 자주 찾아왔다. 그때마다 그녀는 꼭 물어보았다. “왜 소녀를 사랑하십니까?‘ “사내가 여인을 사랑하는데 이유가 있을 리가 있나?” “제 손을 좋아하시는 것이 아니구요?” “흥, 네 손뿐만이 아니라 너 보다 더한 여인이 어디있겠느냐?” 이 큰 사내가, 이 강한 사내가 보기와는 달리 자신만을 찾아온다는 사실이 좋았다. 성혼 전의 이야기야 많이 들어 어머님께서 매우 걱정하셨지만 그와는 전혀 달랐다. 소문과는 전혀 다른 사내였다. 다 큰 아기라고 할까. 누군가가 꼭 필요한 사내였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결정되었다면 평생 따라올 사내였다. 상처를 입어도 버림을 받아도 따라올 그런 사내. “전하, 절 버리시면 안됩니다.” “무슨 소리냐?” 막 침대위로 올라가던 차에 사랑스러운 어린 아내의 말에 되묻는다. “저는 전하를 버리지 않으니까요.” “...정말로 날 버리지 않을것이냐?” “그럼요.” 레이첸은 화선의 하얀손에 입을 맞추었다. 어린 아내. 하지만 나보다 더 많은 것을 생각하고 있는 듯 하다. 솔찍히 부담스런 고관의 고명따님이고 내가 차지하기에는 너무 미인인데다가 총명하다. 하지만 그녀도 날 좋아하고 나도 그녀가 좋으니 이런 것을 복이 터졌다고 하던가. “네가 날 버리지 않는다면 나도 널 버리지 않겠다.” “앗, 전하!” 몸을 활처럼 휘며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듯 떠는 다리를 부여잡고 몸을 합친다. 고통스러워하는 표정도 잠시이고 곧 황홀하다는 표정으로 목에 매달리는 손이 하얗다. 새 하얀 손. 레이첸은 그 손을 끌어내려 입을 맞춘다. 잠시 동안의 감상에 여인은 미소 짓는다. 하지만 그 후는 몸의 즐거움을 따라 움직일 뿐이다. 평소와 같으면 가슴에 얼굴을 기대고 그대로 새벽이 올 때까지 잠이 들던 레이첸인데 오늘은 바로 몸을 일으킨다. “오늘은 벌써 일어나십니까?” “아아, 14왕자가 생일이다. 한번 가봐야지.” 레이첸은 옷을 걸치고 어깨 뒤로 손을 넣어 그 길고 풍성한 붉은 머리를 옷자락 밖으로 빼어낸다. 붉은 장막처럼 반곱슬의 머리가 뒤로 날린다.화선부인은 속옷을 대강 걸친 후 레이첸에게 다가와 빗으로 긴 머리를 빗겨주었다. 기분이 좋은지 반쯤 눈을 감는 레이첸을 보며 화선은 미소 짓는다. 레이첸은 고개를 들어 어린 부인에게 입을 맞춘다. 총총히 딴 머리를 뒤로 넘기며 방을 나섰다. 저 멀리서 화선이 손수건을 들고 손을 흔든다. 정비로 맞이할 것 그랬지? 참한 모습에 싱긋 미소지어주다가 등을 돌려 걷는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14왕자 태진의 측근들은 모두 쉬쉬거리지만 분명 이놈이 일주일 이상 성을 비웠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레이첸은 알고 있었다. 자신이 유력한 황제의 후계자라는 것을. 관심 없는 듯 이리 저리 배회하고 다니지만 자신의 위치를 잘 알고 있었고 그 위치를 이용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또 이용당한다는 생각 따위는 해본 적이 없었다. 태진 그놈도 재미있지. 내 권력을 이용해 장난을 치는 것쯤이야 봐줄 수 있다. 그놈은 영리하고 야망이 있다. 내가 필요할 때 스스로 성장해 날 도울만한 놈이다. 왕성은 너무 넓어 말을 타고 외성으로 건너가 북이 울리는 14왕자의 남궁으로 들어가자 잔치 분위기가 물썽하다. 여기저기 14왕자의 생일날 직접 모습을 드러내기엔 높은 관직의 관리들이 여기저기 보인다. 그럴 수밖에, 레이첸이 어떠한 뇌물이나 부탁을 받아주지 않으니 고관대작들이 손을 쓸만한 상대는 태진뿐이다.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것이다. “어서 오십쇼. 형님.” “일단 생일을 축하한다.” “형님이 이곳까지 들려주신 것이 영광이외다.” 레이첸을 문에서 맞아들이는 태진은 기분이 매우 좋아 보인다. 그리고 그 옆에는 조금 떨떨한 표정의 왕자가 한명 있다. 처음 보는 것 같은 얼굴에 고개를 갸웃해보인다. 그를 보는 것을 알아차린 태진은 소개했다. “나와 생일이 같은 15왕자 쉬첸입니다. 광의계후님의 아들입니다.” “아아...광의계후님이라면...그 노총각?” “예?“ 레이첸의 서슴없는 말에 쉬첸은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별것 아니라는 듯 레이첸은 웃었다. “어느 계집에게 반했는지 몰라도 한심한 놈이다. 왕족이면 왕족답게 굴어라.” “저..전하!” “하하, 아마도 오늘로 쉬첸의 긴 독신 생활은 마감될 것입니다.” 태진의 자신 있는 소리에 쉬첸은 고개를 돌려 태진을 바라보았다. 무슨 꿍꿍이냐. 오기 싫다는 사람 억지로 불러다 놓고는 술만 마시게 하고 이젠 별로 관계되고 싶지 않는 고왕자에게 인사까지. 쉬첸은 정오만 지나면 속이 안 좋다는 핑계를 대고 이곳을 빠져나갈 생각을 했다. 내 궁으로 돌아가 조용히 차나 마셔야 겠다. 하지만 쏟아지는 인사치례에 빠져나가기가 힘들었다. “14왕자 전하와 15왕자 전하의 생신을 축하드립니다.” “천수무강하소서.” 미희들의 춤과 노래, 음식,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금은보화들이 가득 수중에 들어오지만 쉬첸은 이런 연회 따위는 자신과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기회만을 노리던 쉬첸에게 드디어 태진과 조용히 말할 기회가 생겼다. 레이첸 왕자가 그만 쉬겠다고 말하며 자신의 궁으로 돌아갔고 그 후 화장실을 간다며 자리를 뜬 태진을 본 쉬첸은 자신도 배가 아프다는 표정을 하며 일어났고 부리나케 태진을 따라잡았다. “이봐! 난 돌아간다.!” “어어, 웬일로 따라오는가 했더니 그런 건가?” “너 많이 취했다. 태진.” “아아 사랑하는 내 형제.” 태진은 쉬첸에게 매달렸다. 독한 술 냄새에 쉬첸은 하늘을 보며 욕을 했다. “정신 차려라! 난 돌아갈 테다. 차나 한잔 하자고 불러 놓고선 뭐하는 거냐!” “그러지 말라구. 내가 널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잖아.” 늘어지는 목소리로 말한 태진은 껄껄거리며 웃다가 고개를 흔들며 애써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별 효과는 없는 듯 혀가 꼬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그래, 가고 싶다면 가야지. 하지만!” “하지만 뭐!?” “내 생일 선물을 받아주게! 내가! 지금 네 성으로 보냈으니까! 하하하!” “...?” “가서 네 것 찾아서 쌓인 것을 마구마구 풀라구!” “...? 너 주정하냐?!” “주정? 아하하하하 이 친구야, 내가 주정하는 줄 아냐!” 그러면서 비틀비틀 걸어가는 태진을 쉬첸은 한숨을 쉬며 바라보았다. 점점 변하고 있어 저 자식은. 예전의 그 장난끼 많던 어린 아이가 아니야. 쉬첸은 그대로 발길을 돌려 말을 타고 자신의 궁으로 빠져나왔다. 어차피 시종하나 거느리고 오지 않아 누구도 자신을 눈여겨 보는 자가 없었다. 멀리서 또 다른 마음으로 태진의 행동을 살피고 있었던 계명 빼고는. 계명은 두 왕자가 자리를 비우는 그 순간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급한 일이 있다며 방문첩을 내 놓은 후 성문을 빠져나와 집으로 향했다. “다녀오셨습니까.” 하인과 시종, 부인과 첩이 나와 계명을 맞이했다.계명은 부인을 한번 안아주고는 너무도 피곤하다는 얼굴을 하며 모두 물러가게 했다. 홀로 남은 방에서 계명은 거의 눕다시피 탁자에 기댔다. “아아 피곤하다. 14왕자 주제에...어쩌다 내가 발목 잡혀서는...” 중얼거린 계명은 생각났다는 듯 손가락을 튕겼다. 얼른 다가와 고개를 숙이는 환시종에게 묻는다. “그는?” “오늘도 그저 벽을 보고 앉아 있을 뿐입니다.” “고집하고는...” 계명은 연회복장을 벗어던졌다. 간단한 포를 걸치고 겨울이라 나뭇가지만 남은 정원을 감상을 하며 천천히 뒤채로 들어간다. 첫날엔 죽으려고 해서 애를 먹었지만 이상하게도 저녁부터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돌변했다. 슬픈 표정을 짓는 것은 여전했지만 더 이상 죽으려고는 하지 않았다. 북쪽을 향해 향을 사르고 두번 절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겨 알아봤더니 정안족은 죽은 자에게 대한 절이 두 번이라나. 보통 황제에게 두 번 아니던가. 그럼 그들은 황제에게는 어떻게 절하는 걸까. 세 번인가? 아참, 정안은 황제에게 부복하지 않지. “...” 역시나 북쪽을 난 창을 열어두고 하늘을 보는 그가 시선에 들어온다. 내가 들어온 것을 알 텐데도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찬 바람은 몸에 독이 된다고 들었는데 방이 냉랭합니다.” 대답은 기대하지 않는 혼잣말이였다. 창문을 닫고 따뜻한 차를 따라 건넨다. 하지만 찻잔을 받기보다는 고개를 젓는다. “날 여기서 풀어주시오.” “그건 안 됩니다. 게다가 여기서 나가신들 어디로 갈만한 곳이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풀어주신다면 나갈곳이야 없겠습니까?” 그 이상의 별 다른 말없이 자례는 고개를 돌려버린다. 죽지 않았다. 형은 살아있어. 나는 형의 생일을 알지 못한다. 내 생일을 통해 형의 것을 추측해내는 것뿐이야. 하지만 목래의 장군별은 아직 지지 않았다. 창을 통해 본 자신의 별 옆에 있는 장군별은 희미하지만 아직 떨어지지는 않았다. 죽은 것은 아마도 내가 소중히 여기던 무엇인가? 그런데 그것이 무엇인가. 여기서 나가기만 하면 혈족을 찾아 도움을 구하면 된다. 모든 것은 여기서 나가야해. 하지만 이 한족 장군은 만만치가 않다. 자유롭게 나두는 것 같지만 선이 분명해서 이 집에서 벗어날수가 없다. 이 일이 계속된다면 미쳐버릴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난 이곳에서 갇혀 보내진 않을 것이다. 내가 용서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가. 내가 가꾸어 온 모든 것을 한순간에 잿더미로 만든 그 놈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은가. 내게 주어진 시간의 절반 이상을 바친 마지막 둥지를 밟은 놈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은가. 죽여 버리겠다. 죽여 버리고 말겠다. 너도 나처럼 상실감에 휘말려 피를 토할 수 있게 해주겠다. 자례는 앞에서 무엇인가 말하고 있는 계명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 사람은 이용할만한 위치가 아니야. 14왕자는 거대한 권력자의 보호를 받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분명 한족 명문가인 계명조차 그 권력에 복종할만한 자. 그것이 누구인가. 황제일리는 없다. 죽은 1왕자도 아니겠지. 그럼 2왕자인가? 3왕자? 아니라면 계후 중 누군가인가? “왜 그러시오?” 이게 무슨 짓인가. 사람을 살리고자 익히고 선하고자 외웠던 것들로 사람을 죽이려고 한다. 단순히 자신을 만족시키기 위해 사람을 이용하고자 한다. 그것을 알면서 그렇게 하려고 한다. 이것이 바로 간신(姦臣)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하늘이 두려워진다. 하늘이 힘을 내리는 것은 그 것으로 만인을 도우라는 구호의 뜻이다. 그 힘을 자신만을 위해 사용하면 그것이 죄인 것이다.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른 많은 힘을 가진 사람들이 그 것을 잊고 자신을 위해 힘을 사용하여 어떠한 결과를 가지고 왔는가. 자신뿐만이 아닌 멸족을 당하며 후세에 이르러서도 그 어리석음을 비난받는다. 그래서 내가 업을 받는 것인가. 무엇인가 두려운 것을 떠올렸는지 심하게 몸을 떠는 자례를 보고 어리둥절한 계명이 천천히 손을 뻗어 어깨를 잡았다. 하지만 잡았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허공에 떠있는 무엇인가를 보고 있다. 하지만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다. 계명은 의원을 불렸다. 33 귀한 침향이 올랐다. 하얀 병풍이 둘러진 작은 방에 하얀 옷을 입은 두 사람이 서 있고 상주가 절을 한다. 몸이 불편한지 그가 절하는 것을 옆에서 누군가 돕는다. 길고 조용한 상주의 절차가 끝나자 모두 상복을 벗고 작은 방으로 모인다. “힘을 내시게.” “그다지 그렇게 상심하지도 않습니다. 준비하신 분이 가신 거라 생각합니다.” 을노가 차를 따라 모두에게 돌리고 아직 몸을 굽히기 힘들어하는 자휼에게는 직접 차를 건넸다. 자휼은 성한 오른 손을 들어 사양을 표시했다. “아직 따뜻한 차를 마시기엔 목이 힘듭니다.” “아아.” “목래의 일은 들었소. 참으로...” 좌보 백라가 중얼거렸다. 에잇, 이럴줄 알았다. 왕씨 말대로 그들이 무사히 나오길 기다리는 것이 아니였어. 당장 가서 데리고 와야 하는 것이였는데. 상장군 예사도 처음 갔을 때의 단란했던 목래를 떠올리고는 한숨을 쉬었다. 을노와 함께 자휼을 구해온 상장군 마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앞에 앉은 자휼을 바라보았다. 우그러든 한쪽 팔은 옷자락 속으로 가리고 머리를 내려 왼쪽얼굴을 가렸다. 절뚝거리기는 하지만 다행이 두 다리도 붙어있게 되었다. 아직 완전히 화상이 저물지 않아 몸을 움직이는 것조차 쓰려 할 텐데도 내색하지 않는다. 기적이었다. 저 정도의 화상을 입고서 멀쩡한 정신으로 되살아났다. 차라리 미쳤다면 편했을지도 모르는 것을 그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자신의 흉측한 모습을 감당했고 도성으로 돌아와 자신을 모시고 이제까지 친 자식처럼 길려준 목씨 노인 정륜의 상을 당했다. 자신을 잃지 않는 것이 용하다 모두들 입을 모았지만 상장군 마유만은 그렇지 않았다. 그의 눈에 독기가 오르는구나. 아무렇지 않다고는 하지만 간간히 하늘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황제가 사는 곳을 왕궁을 바라보았고 그 눈동자에 시리도록 푸른 독기가 서리고 있다. 당연히 억울하겠지. 얼마나 억울할까. 그 억울함을 모르는 것이 아니지만 저런 독기는 자신도 망치고 둥지도 망치는 법이다. 마유는 고개를 저었다. 왕씨께서 알아서 하시겠지.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던 자휼이 말했다. “왕씨도 부재중이시고, 괜찮으시다면 도성을 구경해도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내가 안내하지요.” 을노가 말했다. 다른 장군은 백라를 보았다. 백라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장군의 몸이 괜찮으시다면 이런 좁은 곳에 계실 것이 아니라 도성을 둘러봐 기분 전환이라도 하시지요.” “감사합니다.” 자휼이 을노와 방을 나가자 마유가 백라에게 물었다. “좌보께서는 어째서...” “그만합시다. 상장군께서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 모르는 것은 아니외만 일단은 내게 맡기시오.” 그러자 마유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라졌다. 백라는 한숨을 쉬고 또 다른 상장군 예사는 둘 사이에서 어떤 말이 오가는지 짐작할 뿐이었다. 사실 부를 필요가 없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몸을 떨던 것도 잠시 바로 정신이 돌아왔는지 손을 내치고 혼자 탁자에 앉았다. 뒤에 온 의원은 누가 환자 인지 몰라 어리둥절하게 있다가 계명이 손가락으로 자례를 가리켜서 그에게 다가가는 정도였다. 진찰을 위해 계명이 나갔다 들어오자 자례는 침대에 누워 잡고 있었고 의원은 짐을 챙기고 있었다. 계명이 나가려는 의원에게 환자에 대해 물어보자 의원은 대단치 않다며 지병은 걱정해야겠지만 안정된 상태이고 단지 열이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 것 뿐인가?” “향수병일수도 있고... 무엇보다 이런 좁은 곳에서 나가지 못하니 정신적으로 불안한 것입니다. 열이 있긴 하지만 그것은 지병에 의한 것이니까요.” “어떻게 하면 좋겠나?” “잠시 외출을 하셔도 좋으실 겁니다. 겨울이라 찬바람은 안좋겠지만 그렇다고 방안에만 있는 것은 가슴을 앓는 환자에게 오히려 안좋습니다. 기분 전환도 중요하죠.” 의원을 보낸 후 계명은 고민했다. 나가게 하라고? 그것이 쉬운 일인 것 같은가. 저렇게 연약하게 보이지만 사실 이를 감춘 호랑이 새끼란 말이다. 약간의 기회가 있다면 놓치지 않고 산으로 뛰어 들어갈 만한 놈이다. 자신을 가두고 있던 사육사를 물어버리고 말이야. 계명은 실소가 터져 나왔다. 어쨌거나 네놈이 호랑이 새끼이던 용의 새끼던 내 손안에 잡혀있다. 사육당할 때 사육사를 죽이면 자신도 죽는 것이 당연하다. 그리고 내가 기르는 것은 그 정도의 원리는 모를 리가 없는 영리한 호랑이 새끼다. “거기 누구 있나?” “예 나리 무슨 일이십니까?” “나갈 것이니라. 오늘은 그 높으신 왕자전하의 생신이니 불꽃놀이라도 할지 모르지 않는가?” “그렇다면 마차를...” “아니 말을 준비해라. 그리고 밧줄도.” 시종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러났다. 계명은 향을 껐다. 정신이 맑아지면 일어나겠지. 생색을 내며 외출하는 것도 좋지 않은가. 쉬첸은 자신의 궁으로 돌아오자마자 홀의 의자에 앉아 몸을 뻗었다. “아아, 내 평생 이렇게 피곤한 생일은 처음이군.” “전하, 차를 올릴까요?” “오냐. 당장 다오” 환관이 총총거리며 방을 나가자 쉬첸은 비단옷을 벗기 시작했다. 쩔렁 쩔렁 거리며 보석들이 바닥에 떨어지지만 신경 쓰지 않는다. 어차피 시종들이 치울 것이다. 옷마저 휙 던진 후 쉬첸은 서둘러 자신의 침상 위로 올라가 죽었다는 듯 누워버렸다. 그러면서도 입에서는 무엇인가를 중얼거린다. 생각하면 기분 좋은 가락. 그렇지. 이번에 받은 것들 중에서 침향이 들어있는 물건이 있었는데 그것을 목래에 보내야겠다. 그 놈이 그 향을 굉장히 좋아했으니까. 쳇, 가난한 지방성의 군승 주제에 황제도 귀하다 말한 침향을 아무렇지 않게 피우는 녀석. 고관들도 침향을 못 피우게 되어있는데 그것을 알까? 내 생각에는 아마도 그것을 모르고 피우는 것 같지만 말이야. “아 그러고 보니...” 뚱한 성주도 그렇고 그놈도 그렇고 그 넓은 초지가 그리워진다. 언제 다시 한번 가볼 기회가 있을까. “저기 전하.” “뭐냐? 난 오늘 너무 피곤하다.” “그럼 14왕자전하께서 보내신 선물을 어떡할까요?” “상하지 않는 거라면 지하에 넣어. 나중에 보마.” “...하..하지만 ” “왜?” “보내주신 것은 여인들인데요...” “뭐!” 쉬첸은 소리를 꽥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여자를 보냈어? 그제야 쉬첸은 태진이 말한 뜻을 알 것만 같았다. “...내 것을 찾아?” 쉬첸은 불길함에 환관이 안내한 방을 벌컥 열었다. 십여 명의 여인들이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궁의 비단으로 치장했지만 이질적인 분위기. 불안해하는 모습. 나이도 두서없고 생긴 것도 두서없다. “...하?” “14왕자께서 보내..” “하?!” 쉬첸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여인에게 물었다. “어디서 왔는가!” 부들부들 떠는 여인을 제치고 다른 여인에게 다가가 같은 질문을 되풀이 한다. “소...소녀들은 목래에서 왔습니다.” “그럴리가! 성주가 너희들을 보내었는가?!” “...으... 모르옵니다.” “무슨 소리냐!” “전쟁이....” 쉬첸은 답답함에 벌떡 일어나 문을 나갔다. 태진에게 직접 물어보는 게 빠르겠다. 흠칫거리며 피하는 사람들 덕에 앞을 가로막혀 답답해하는 불상사는 없었다. 자휼을 본 사람들은 서둘러 자리를 피하거나 도망쳤다. 을노는 그런 사람들의 행동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하자 자휼은 간단하게 포를 뒤집어 써 모습을 가렸다. “괜찮습니다. 그럴 만도 하지요. 저 역시 거울을 보고 살지 않지 않습니까.” “...그래도.” 자휼은 아무소리 없이 앞으로 계속 걸어갔다. 을노가 뒤를 따라 급하게 걸었지만 불꽃을 보기위해 모인 사람들이 꽉차 곧 그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당황스러웠지만 곧 그가 사라진 방향으로 달렸다. “실례합니다. 어느 곳이 왕성입니까?” “저쪽이우.” 노인은 별 실없는 사람 다보겠다는 듯 사라졌다. 자휼은 노인이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다. 바로 눈앞에 거대한 성이 보인다. 목래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크기. 하지만 육체와 정신은 차분히 가라앉는다. 내 동생은 어디에 있지? 손가락으로 왕성의 거대한 궁전들의 외관을 따라 움직인다. 15왕자는 어디에 있나? 그리고 너는 어디에 있지 계명? 입가에 미소가 걸린다. 그 흉측한 모습 때문에 오싹한 느낌의 미소다. 살아남은 이상 기대하게 만들어주겠다. 사실 그것을 너도 기대하는 것이 아니던가? “복수를 하려하는가? 하지만 힘들 텐데.” “?” 놀란 자휼이 뒤를 돌아보자 한족 복장의 누군가 다가온다. 짙은 검은 눈매의 매력적인 남자다. 당당한 풍채가 고개를 숙이게 하는 남자. “한족 장군들은 동쪽에 밀집되어 있지. 자네가 찾고 있는 장군도 그곳에 있겠지.” “...” “그런데 어떻게 복수할건가? 보아하니 검을 제대로 들 수나 있으면 다행인 것 같은데. 그가 외팔이 병신의 복수에 호락호락 당할 인물인가?” “당신 누구요?” “나?” 그는 싱긋 웃으며 부채로 입을 가린다. “기루에 가던 할일 없는 한량일세. 어때? 함께 가지 않겠나?” “사양하오.” “그러지 말고. 현을 잘 타는 여인이 있다네. 분명 마음에 들어 할 거야.” 자휼은 그의 안내를 받아 한 기루로 들어갔다. 그리 큰 기루는 아니지만 안은 화려하다. 그가 들어서자 한 여인이 반갑게 맞이한다. “어머나 나리가 오셨습니까?! 애야, 홍화야!” “예. 어머나?” 이층에서 붉은 꽃을 머리에 꽃은 여인이 그들을 보고 반갑게 웃는다. “오래간만입니다. 공자.” “뭐 그렇게 되었나.” “제 방으로 들어가시지요.” “그래. 아참 오늘은 술 말고 차를 다오.” 셋은 이층의 작은 방에 들어갔다. 붉은 휘장으로 가려진 침상이 보인다. 공자라고 불리는 사내는 서슴없이 그곳에 걸터 앉고 손짓으로 자휼을 불려 옆에 앉혔다. 자홍이라는 여인은 차와 다과를 가지고 와 그들에게 넘긴 후 침대 밑에서 악기를 꺼낸다. 거문고다. “오늘은 친우분이 함께니 소녀의 음악을 들으려 오신 거겠지요.” “언제 다른 것을 보려 왔단 말이더냐?” “아이, 몰라요!” 낄낄거리며 자홍이란 기녀의 장난을 여유 있게 받아친 그는 차를 따라 자휼에게 건넨다. 자휼이 거부하자 혼자 마신다. 자홍은 바닥에 앉아 머리에서 술대를 빼내 현을 다듬는다. “...” 동생은 술대를 향로에 꽂아 두었다. 모양이 예쁘다는 알 수 없는 말을 하면서. 그럴 때 마다 나는 항상 향로에서 그것을 뽑아 옆에 두었고 그것을 본 동생은 다시 꽂아 두었었다. 그래서 동생 방에 올 때마다 술대를 보고 그 아이가 언제 들어왔었는지 짐작하곤 했었다. 그녀가 가진 거문고는 그다지 좋지 않은 물건인지 소리가 맑게 퍼지지 못하지만 오래간만에 듣는 기억서린 소리에 자휼은 물끄러미 그녀의 손을 바라보았다. 같이 온 그는 창문을 활짝 연다. 창밖에는 개천이 보인다. 별이 떠오르고 있다. ------ 단설의 역주는 인용과 개인적 견해가 들어간 글입니다.(맹신(盟信)사양. 도용씁쓸)-------- 주: 거문고 현금(玄琴)이라고도 한다. 오동나무와 밤나무를 붙여서 만든 울림통 위에 명주실을 꼬아서 만든 6줄을 매고 술대로 쳐서 소리낸다. 소리가 깊고 장중하여 예로부터 ‘백악지장(百樂之丈)’이라 일컬어졌으며, 학문과 덕을 쌓은 선비들 사이에서 숭상되었다. 지금도 줄풍류[絃樂靈山會相]를 비롯하여 가곡반주·거문고산조 등에서 출중한 멋을 나타내고 있다. 기원은 《삼국사기》에, 중국 진(晉)나라에서 보내온 칠현금을 제이상(第二相) 왕산악(王山岳)이 본디 모양을 그대로 두고 그 제도를 많이 고쳐 만들었다고 한다. 이때 100여 곡을 지어서 연주하였더니 검은 학이 날아들어 춤을 추었기에 현학금(玄鶴琴)이라는 이름이 붙었고, 뒤에 ‘학’자를 빼고 ‘현금’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1932년 지안현[輯安縣]에서 발굴된 고구려의 고분벽화에 거문고의 원형으로 보이는 악기의 그림이 발견됨에 따라 거문고는 진나라 이전의 고구려에 이미 그 원형이 있었다는 설이 유력시되고 있다. 또 거문고라는 명칭도 현학금에서 나온 것이 아닌 ‘고구려금’, 즉 ‘감고(가뭇고)’ 또는 ‘검고(거뭇고)’의 음변(音變)으로 보기도 한다. 거문고는 신라에 전하여져서 옥보고(玉寶高)·속명득(續命得)·귀금(貴金)·안장(安長)·청장(淸長)·극상(克相)·극종(克宗) 등의 계보로 전승되었으며, 극종 이후 옥보고로부터 약 1세기가 지난 뒤부터 세상에 알려져 널리 보급되었다. 주:술대 술’이나 ‘시’라고도 하며, 길이 24㎝, 지름 7㎜ 정도의 볼펜 크기의 막대로 거문고나 향비파를 연주할 때 오른손에 끼워서 줄을 퉁기는 막대이다. 재료는 주로 바닷가에서 나는 검은색의 단단한 해죽(海竹)을 사용해서 만들며, 화리(華梨)를 붓대 모양으로 만들어 둥글게 다듬어 만들기도 하였다. 또 자문죽(紫紋竹)으로 만들기도 한다 우리나라 말에 게서타다 라는 말의 뜻이 ' 감정을 실어 거문고 따위를 타다 ' 라고 하는데 옛 고어는 감정과 행동을 동시에 나타내는 말이 많았던 듯 싶다. 34 팔이 꽉 당겨지는 느낌에 자례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게 무슨 꼴인가. “오래간만에 나오셨는데 기분이 별로시오?” “...가축이 된 느낌에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소.” “저런, 어찌 가축이 가축에 타고 다닌단 말이오? 이런 혼란스러움에 행여 길을 잃을까하는 나의 배려를 그렇게 일축하지 말아주시오. 보시오. 내 팔에도 매었지 않소?” 계명이 태연하게 자신의 팔을 들어보였다. 단단히 동여맨 비단 줄이 마구를 통과해 자례의 팔에 매여 있다. 한 마리의 말에 두 사람이 탄 것도 거북스러운데 팔을 움직이면 말이 뒤척여 더욱 곤란하다. 이 상태로 라면 말에서 내리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마구가 조여 말이 마구 날뛸 테니까. “자자, 화내지 말고 좋은 구경하나 합시다. 오늘은 왕자들이 생일이니 흔히 볼 수 없는 불꽃놀이를 볼 수 있을거요.” “보고 싶지 않소.” “그러지 마시오. 겨울의 낙이라고 하는 거요. 하하하!” 혼자서 즐겁다는 계명의 웃음에 자례는 눈을 감았다. 네 놈의 죽는 꼴도 봐야 시원하겠다. “저쪽으로 갑시다. 평소에는 안가는 방향이지만 저기에서 가장 잘 보이거든.” 자례는 아무 말 없이 뒤집어쓴 포를 깊게 눌렸다. 네 하고 싶은 데로 해라. 난 모르겠다. 라는 행동에 계명은 말을 몰아 한가한 곳으로 갔다. 따각따각 움직이는 말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자례는 퍼뜩 고개를 들어 뒤를 바라보았다. 그 동작에 놀라 말이 휘청거리자 계명은 재빨리 말을 진정시켰다. “왜 그러시오?!” 분명히 들었는데. 분명히 있었는데. 시끄러운 사람들의 환호소리에 뒤섞여 분명히 들렸는데. 잘못들은 것 같지 않았다. 분명 그것은 자휼의 목소리였다. 피곤하고 쉰 목소리였지만 그것은 형의 목소리다. 하지만 뒤에는 그저 불꽃놀이를 즐기러온 사람들이 흘러갈 뿐이다. 계명은 말을 진정시키며 자례가 보는 방향을 바라보았지만 아무것도 느낄수가 없었다. 뭔가를 본 것 같은데 나로써는 알수가 없다. 하지만 잠시후 다시 추욱 늘어지는 표정에 어리둥절 하고 만다. 작고 화려하게 꾸민 붉은 방에서 터지는 불꽃을 감상하던 그가 자휼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 복수하고 싶소?” “...당신 도대체 누구요? 나에 대해 어떻게 알고 있지?” “혈족의 일이라면 퍼지고 돌기 마련 아니오?” 자휼은 그제야 여린 등불 사이로 앉은 그의 눈이 매우 검다는 것을 눈치 챘다. 원래 검은 눈매를 지녔다고 생각했지만 가만히 들여다본 그의 눈동자는 매우 검다. 그리고 무섭다. 마치 거대한 어둠속에 갇혀 버릴 것 같은 어둠. 자휼은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저런 것을 기백이라 하는가. 눈 하나만으로 사람을 좌지 우지 하는 사람이구나. “혈족이시던가...” “그런 거요. 보기보다 둔하시오.” 그는 차를 다시 한잔 따라 들었다. “내가 하는 말 그냥 한번 들어보시겠소? 하도 재미있어서 잊지 못하고 있답니다.” 그가 손짓하자 여인은 연주하던 현을 멈추고 밖으로 나간다. “한족의 정통황가는 모두 사라졌지만 황족의 먼 친척들은 살아남은 것은 알 것이오. 그중 계명이란 놈이 있는데 꽤나 영리해 현 황실을 오고가기를 쉽게 알고 때를 잘 알아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것을 취하고 해가 될 것은 서둘러 버리는 영리한 놈이오. 그런 놈이 어느 날 밤 몰래 병사들을 차출하여 일개 군의 병력을 만든 후 어디론가 가버리더군.” “...” “때를 같이해 왕가의 혈손들 중 가장 머리 쓰는 14왕자도 사라졌소. 그런데 14왕자는 결혼한지 얼마 안 된 새서방 아니겠소? 도대체 무슨 연유로 밤에 사라졌던 것일까? 근사한 첩이라도 얻었단 말인가? 아무튼 세 달 후에 돌아왔긴 한데... 난데없는 여인들을 데리고 들어오더라. 이거 정말 저잣거리의 연애담 아닌가요?” “...공자는 그런 이야기에 신경 쓸 분이 아닌 것 같소.” “아니, 난 사실 신경 많이 쓰지요. 재미있거든.” 싱긋 웃으며 말한 그는 잠시 달을 보았다. “또 계명이란 놈도 집안으로 누구를 끌어 들인 것 같은데... 혹시 당신은 역술을 알고 있소?” “역술?” “점을 쳐 미래를 보고 별로 자신이 길흉을 알아내는 것이지. 나는 약간이나마 알고 있소. 보통 이런 것은 여인들이 더 잘 하지만 ...아무튼 북쪽의 두 장군별이 모두 흔들리더니...” 천천히 하늘로 손가락을 올린다. 그리고 그 손가락을 다시 자휼에게 향한다. “하나는 장안으로 옮겨오지 않겠소? 그렇다면 남은 하나는 어디로 갔을까... 궁금하지 않소?” “...”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계명장군의 집으로 가더이다.” “...” “마치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표정이군?” “내 보기엔 당신은 역술을 알고 있는 것 같지 않소. 당신 도대체 누구요!” 그때였다. 방문이 와락 열리며 숨찬 두 명의 장군이 들어왔다. 굉장히 화난 표정으로 들어와 일단 문을 닫고는 공손하게 부복하나 말투는 아니다. “공자! 여기서 또...!” “...어라? 자휼장군?” 고개를 슬쩍 든 장군 중 하나가 자휼을 알아보았다. 상장군 마유와 을노였다. 자휼은 그제야 무언가를 알 것 같은 예감에 얼른 침상에서 내려왔다. 펄럭펄럭 한가롭게 부채를 흔들던 그가 부채를 내려놓는다. “두 장군은 점점 날 찾아내는데 익숙해지는 것 같군.” “전하, 제발 이런 식으로 사라지신다면 저희는...” “...왕씨였습니까?!” 자휼이 급히 부복하자 하유사는 그의 굽어진 등을 바라보다가 역시 창밖의 달을 내다본다. “그래. 내가 왕씨네.” 팔목이 쓰리다. 앞서 당당하게 걸어가는 계명의 뒷모습을 보며 자례는 강한 살인충동을 느꼈다. 무기가 없구나. 손에 묶인 줄로 목을 휘감아 죽일까. 하지만 그렇게 하기엔 내 쪽에서 체격이 외소하다. 자례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아는지 모르는지 계명은 손목을 당기며 재촉했다. “어서 들어갑시다. 바람이 차니 좋지 않소.” “...윽!” 재차 재촉하는 당김에 자례가 신음을 흘리자 계명은 멈추어 섰다. 자례의 팔목이 새빨갛게 부어있는 것을 보고 엄살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덥석 안아든다. “이번엔 짐짝 취급이오!” “이렇게 곱게 안아가는 짐짝 보셨소?” 방안에 이르자 살짝 내려놓고는 창문을 닫아버린다. 밧줄을 검으로 잘라버린 후 계명은 문을 잠글 자물쇠를 찾았다. “피곤하실 테니 잠드시오.” “장군” “...?” 정말로 지긋지긋하다는 듯 자례가 이마에 손을 얹더니 한숨을 쉬며 말한다. “장군은 내게 무엇을 바라는 것이오?” “외출이 마음에 드셨나보군. 그래. 이제 날 생각해 보시기로 하셨소?” 계명은 나가려던 문을 닫고 방안으로 들어왔다. 탁자에 앉자 자례가 묻는다. “내가 장군이 원하는 길을 제시한다면 날 풀어주겠소?” “..글쎄요.” 계명은 차를 준비하며 미소 지었다. 그럴 줄 알았지. 얼마나 버티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결국 사람이란 자신을 알아주는 군주에게 오는 법이지. 계명은 차를 따라 자례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자례는 손으로 차를 밀었다. 뭐 오늘은 그 정도로도 좋다. “좋소. 풀어드리겠소이다.” 자례는 빤히 계명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고개를 돌렸다. “...장군은 용이 되고 싶으신가요?” “사내로 태어났으면 누구든 용의 자리에 오르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소?” 핵심을 찌르는 자례의 질문에 계명은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그렇게 까지바라지는 않지만 혹시 이 비상한 머릿속에 황실을 무너뜨릴 계획이 있는 것일지도 모르니까. 자례는 손톱을 물며 생각에 잠겼다. “난 용의 자리를 오르게 하는 방법은 모르오. 용은 하늘이 정하는 것이오.” “그렇다면?” “하지만 장군께서 왕성의 정세를 읽어주신다면 상황에 따라 현 왕가를 무너뜨릴 계책은 마련해 드릴 수 있소.” “좋소. 내가 아는 것을 말해드리지.” 계명은 약간은 흥분된 기분으로 등불 심지를 올렸다. “그보다 잊지 마시오. 내가 계책을 말한다면 난 자유요.” “아아 그렇소.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그보다 먼저 듣고 싶은 것이 있소.” 자례가 계명의 말을 막았다. “목래 공성에 대해서 알고 싶소.” 너무나 마신 이유인가. 아픈 머리를 감싸며 태진이 일어났다. 옆을 보니 부인 양씨가 누워있다. 옷을 걸치고 나가니 환관이 다가와 고한다. “뭐? 쉬첸이 왔어? 하지만 머리가 아파서...” “머리 아픈 것은 나다!” 쉬첸은 화난 목소리로 환관을 떠밀며 방으로 들어왔다. 익숙치 않은 사내 목소리에 놀란 부인 양씨가 벌떡 일어나 이불로 몸을 가리고 뛰어나가자 태진은 소리 내어 웃었다. “아니, 왜? 마음에 안 들었나?” “도대체 어떻게 한거지? 목래에 무엇을 요구했길래!” “요구하다니!” 태진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창을 활짝 열었다. 차가운 겨울 바람이 들어와 방안의 뜨거운 열기를 단번에 식혀 버린다. 태진은 등을 돌려 쉬첸을 바라보았다. “나는 왕자야! 그런데 내가 요구해? 감히! ” “태진!” “목래? 그 따위 성 내가 불태웠다. 그게 어디가 어때서?” “뭐라고?” “신경 쓰지마라. 뒤처리는 내가 하니까.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어” 부드럽게 태진이 사랑하는 형제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하나 경악스럽다는 표정으로 물러선 쉬첸은 신경질적으로 소리치고 만다. “넌 변했어! 왕자? 웃기지마. 지금의 넌 심술보만 커진 아이라구!” “그러는 너는 왕자의 탈을 쓴 거렁뱅이와 뭐가 같아!” “뭐라구!” 쉬첸은 태진의 멱살을 부여잡았다. 그와 동시에 태진도 쉬첸에게 덤벼들어 둘은 목을 잡고 엎치락 뒤치락 하며 방안의 물건들을 내치었고 그 소리에 놀란 환관들이 달려와 두 사람을 때어놓았지만 씩씩거리는 두 왕자들의 우애는 심각한 금이 가버린 듯 해 보였다. “네 놈을 좋은 놈이라 생각했던 내가 어리석었다!” “내 궁에서 소란 피우지 말고 나가주시지!” 쉬첸이 고개를 돌리고 방을 나갔다. 태진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입에서 욕이 계속 나왔다. 빌어먹을 놈. 뭐가 어때서냐. 태진은 신경질을 부리며 다시 침상위로 엎어졌다. 안그래도 그 일로 신경쓰이는 일이 많아 요즘 피곤했다. 계명의 입을 막는 것부터 하며 목주의 성주에게 편지를 보내 화적이야기를 꾸며내느라 힘들었단 말이다. 그런데 너는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이 하는 말이라곤 고작 내가 철부지 왕자라는 것이냐? 쉬첸, 넌 내가 소중하지 않는가? 목래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나보다 그 쥐꼬리만한 성을 사랑하게 되었는가? 태진은 신경질적으로 비게를 던져버렸다. 그 투정에 해가 중천에 뜨도록 아무도 태진을 깨우지 못했고 태진은 오래간만에 혼자서 생각하는 시간을 가질수 있었다. 그러나 화를 내며 자신이 궁으로 돌아온 쉬첸은 자신을 맞이한 환관을 밀치고 자신의 방안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잠궜다.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해라!” “예, 예.” 쉬첸은 절망적으로 두 손으로 벽을 내리쳤다.애써 냉정을 유지하려 애를 썼다. 죽었을까? 모두 다 불태웠다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없어? 왜 내겐 그 소식이 하나도 전해지지 않았지? 그야, 나는 아무 힘없는 장식의 왕자이니가 그렇지. “미친 놈!” 쉬첸은 또다시 벽을 쳤다. 이럴 수는 없다. 이렇게 할 수는 없다. 네 놈이 얼마나 큰 권력을 업고 있다 한들 그럴 수는 없다. 너도 나도 그럴 권리는 없다. 우리는 그저 황제란 아버지를 가진 아이들이란 말이다. 이삭 하나 싹 틔울 줄 모르는 어린 아이들이란 말이다. 하지만 너는 그 이삭이 싹을 안틔운다고 해서 뽑아버리는 망나니가 된 것을 모른단 말이냐. 네 말이 맞다. 나는 왕자의 탈을 쓴 거렁뱅이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내가 쓴 탈은 너와 같은 왕자란 탈이다. “공성했다면 장군이 필요했겠지. 그 정도 알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야!” 쉬첸은 환관을 불렸다. “월기교위(越騎校尉)를 불러라. 긴히 물어볼것이 있다.” 새벽이 오려는지 등잔불이 옅어진다. 희미한 새벽의 창을 느끼며 계명은 마지막 차를 마시고 자례를 보았다. “자,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여기까지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잘 알아들었소. 생각해보지요.” 자례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등을 돌렸다. 나가라는 그 뜻에 계명은 순순히 일어났다. “그럼 언제든지 기다리겠소이다.” 계명은 방을 나와 문을 잠갔다. 긴 이야기였다. 물론 아는 것을 모두 다 말한 것은 아니었다. 책사란 것들은 간약해서 주인의 약점을 잡아 움직이려고 한다. 그러니 모든 것을 말하는 군주는 어리석을 수밖에. 특히 목래의 이야기는 적절히 자신을 보호하며 이야기를 진행시켜야 했기에 진땀이 흐를 정도였다. 자례는 이야기에 맥락이 이상한 점이 있으면 바로 지적했고 그것을 설명하느라 시간을 보내야했다. 아무튼 자신의 이야기에는 허점이 없어 보여 적이 안심하며 계명은 하늘을 보았다. 이젠 새벽이다. 오늘은 성으로 나가지 못하겠군. 한숨자고 외군으로 직접나가야 겠다. “만약 그가...” 만약 그가 정말로 현 황조를 뽑아버리는 계책을 말해준다면 나는 어떻게야 하는가. “...아깝지만...” 죽여야 한다. 그런 거대한 계책은 홀로 알고만 있어야 되는 법이다. 아깝지만 그것이 살아날 길이다. 고금을 막론하고 나라를 세운 공신들은 주인보다 뛰어나면 항상 반란을 꾀하는 법. 나라를 강하기 위해선 혼란기엔 공신들을 등용하고 황금기엔 공신들을 멀리 보내야 한다고 누가 말했더라? 계명은 고개를 갸웃했다. 어차피 그는 가슴을 앓고 있으니 얼마 안가 죽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좀더 써먹을 수 있지 않을까. “안되지...” 그를 호랑이 새끼라고 말한 자는 나다. 게다가 그의 형을 죽이게 사주한 것도 나다. 진실은 언젠가는 밝혀질 것이고 그런데도 살려 둔다면 어떤 식으로든 보복하러 올 것이다. 계명은 싱긋 웃었다. 군자란 크게 생각해야 하는 법. 타악! 자례는 성한 왼손으로 벽을 때렸다. “네 놈...” 고통을 줄여주기 위해 자휼을 죽였다고 말했을 때부터 거짓을 말할 것이라는 생각은 했다. 하지만 별은 거짓을 고하지 못한다. 자휼은 살아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자휼을 마지막으로 보았다는 것은 거짓이 아니다. 왕자가 태수를 죽이는 것을 보았을정도로 경험이 높지 않았다. 계명이 내 짐에서 검을 빼지 않았던 것은 왜였을까. 정말로 형이 계명에게 날 부탁했단 말인가. 그래서 검을 놓아두었다는 것인가. 그건 아니다. 장군검은 허랫검은 절대 아니지만 그렇다고 역사에 남을 명검도 아니다. 그럴 수밖에 이것은 아버님이 직접 만들어 형제에게 각각 한자루씩 나누어 주신것이다. 아마도 탐이 안나서 였을테지. 계명정도라면 검을 포기하는대신 내가 생각할 혼란을 계산했을수도 있다. 내가 정신을 잃었을 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지독히도 자신만 생각하는 형이다. 날 누군가에 부탁할 리가 없다. 목래에서도 형은 성문이 열릴때 내가 자살할꺼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장군전에서도 계명이 물러선 이유는 아마도 형이 무슨 짓을 했기에 그랬을 것이다. 아마도 활을 들어 계명을 쏠지, 나를 쏠지 고민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형은 자신의 것에 욕심과 애착을 가지는 사람이다. 그리고 나 역시 동생이라기 보다는 그의 인형으로 키워졌다고 생각안할 수가 없다. 그런 형이 날 부탁할 리가 만무하다. “...서글프잖아..” 형은 자신의 것에 욕심과 애착을 가지지만 나는 동생으로 길려주었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내가 신경쓰일 수밖에 없어서 계명에게 나를 부탁했다. “그건 거짓말이고.” 아침이 와 방이 환하게 되었지만 자례는 손톱을 깨물며 벽을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 단설의 역주는 인용과 개인적 견해가 들어간 글입니다.(맹신(盟信)사양. 도용씁쓸)-------- 주:월기교위(越騎校尉) 팔교위의 하나로 도성밖에 주둔하는 군대를 통솔하는 관직. 팔교위는 교위(校尉), 절충교위(折衝校尉), 전군교위(典軍校尉) 월기교위(越騎校尉) ,성문교위(城門校尉) 사예교위(司隸校尉),장수교위(長水校尉)이 있고 내용은 모두 둔병(屯兵)을 담당하는 외군임무이다. 원래는 관직에 딸린 보위였지만 차차 무관직으로 변하여 한직(閑職)이 되었다. 녹봉 2천석. 35 붉은 안쪽 장옷을 입고 순백 비단의 긴 포를 걸친다. 백색의 주작이 수놓아진 백색의 허리띠를 맨다. 금꽃과 푸른 옥으로 된 귀걸이를 하고 왕자는 붉은 보석이 박힌 머리띠를 제왕은 검은 끈의 흰색 깃으로 금꽃을 꽂아 꾸민 왕관을 쓴다. “오래간만에 입는군” 하류사가 오래간만의 왕씨복에 눈을 감으며 생각에 잠긴다. 이 옷을 입은 자신을 바라보면 죽어버린 아버님과 자신이 겹쳐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독한 아비였다. 자신의 대로써는 안되는 것을 알고 날 키우기 위해 채소 장사를 한 왕씨였다. 그러면서도 나는 손에 물한방울, 흙한줌 안쥐어보고 키웠다. 덕에 자신은 오래전 사라진 왕씨의 인맥을 잇는 인재로 키워질수 있었지만. 그렇게 키워진 내가 과연 올바른 길을 걷고 있는 것인지 물어볼수 없게 그는 죽었다. 자진이였을까. 아니면 ... “왕씨,” 상념을 깨며 좌보 백라가 붉은 옷의 예복을 입고 머리를 숙인다. 특별히 회색의 비단옷을 벗고 검은 옷을 입은 여관이 부드럽게 문을 연다. 문이 열리자 수많은 장수들이 기다렸다는 듯 부복한다. 얼핏 보아도 삼백은 되어 보이는 그들의 지극한 공경 속에 하류사는 걸어 높은 단상으로 올라가 앉는다. 부복한 그들의 낮은 등에 하류사는 자신이 왕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등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느낀다. 내가 왕이기 때문에, 그들이 공경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왕으로 살아가야 한다. “고개를 들라.” 모두들 공손하게 부복을 풀며 자신의 왕을 향해 고개를 숙인다. 오늘은 새해. 자신의 주인에게 간단하나마 신년 인사를 드리기 위해 저 북쪽의 끝에서부터 장안까지 힘든 여행을 하고 온 장수들이다. 오는 도중에 죽은 장군들도 있을 것이다. 정안족의 무기는 한족의 무기와는 달라 항상 눈에 띄기 마련이다. 무사히 왔다 하더라도 그 중 장안을 무사히 빠져나갈수 있는 장수는 얼마나 될 것인가. 그런 위험을 가지고도 적진 한복판까지 오는 장수들을 하류사는 군주의 인자함이 담긴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았다. 백라가 따뜻한 술을 올리자 하류사는 받아 일어나 장수들을 향해 건배한다. “모쪼록 올해도 무사하길.” “망극하여이다. 부디 왕씨께서도 옥체 보존하소서.” 이 한마디를 듣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는다. 나라가 건재했다면 술과 음식의 춤과 노래로 떠들썩한 연회 속에서 술과 덕담의 오고감이 있었을 것이다. 각자의 부인들을 데리고와 서로 그 아름다움과 덕을 자랑하며 수가 놓여진 주머니를 서로 교환하고 물론 하기 싫은 복잡한 신년을 맞이하는 왕의 효시도 쏴야 할 것이었고 왕실에 대한 의례와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는 복을 기원하는 밀알주머니 등 여러 가지로 복잡한 하루겠지만 망국의 신년은 이렇게 쓸쓸히 지나가는 것이다. 술 한 잔 따라 함께 마셨으면 좋으련만. 하지만 장안에서 이런 300명의 쟁쟁한 장수들이 이런 꽃과 나비를 파는 화원에 모여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엄청난 위험을 감수하고 있는 것이다. 서둘러 떠나게 하는 것이 그들을 위한 행동. 하류사는 건배한 술을 홀로 마시고 다시 그들의 부복 속에 자신의 방으로 건너갔다. 여관이 고개 숙이며 따라 들어오고 백라는 돌아가는 장수들에게 일 년 사이에 변한 장안의 지도와 시간상 고하지 못하는 중요한 이야기를 적은 서신들을 받는다. 잠시 앉아 그들이 하나 둘 빠져 나가는 모습을 본다. 하류사가 보고 있는지 아닌지도 모르면서 장수들은 문을 나서기 전 집을 향해 큰 절을 하고 떠나간다. 여관이 왕의 화려한 왕관을 벗겨주려다가 손을 멈추고 함께 창을 바라본다. 잠시 후에 하류사는 여관에게 묻는다. “내가 왕씨인가?” “...왕씨가 당신이십니다.” 살폿하게 웃으며 미소짓는 여관에게 또 한방 먹었다는 느낌과 동시에 미소짓는다. 열린 창으로 신년의 새 바람이 불어온다. 또 시작되는 것이다. 새로운 일년이 . 내년에는 부디 저들과 술한잔 나누며 효시를 쏠수 있게 하소서. 그 하늘로 향해 올리는 화살에 답례를 해주소서. 징소리가 크게 울리자 황제가 모습을 드려냈다. 아골타가 깊게 몸을 옥좌에 눕히자 왕자들이 가운데로 나와 부복한다. 아골타는 뻔히 알면서도 한번 세어본다. 하나 둘 셋... 이십삼. 어라. 작년보다 하나 늘었네? 아직 5살 정도 된 어린 왕자가 형들 사이에 껴있었다. 23왕자다. 작년만 해도 유모의 품에서 울기만 하던 아기였는데 이젠 혼자 서서 신년인사를 할수 있게 되었나 보구만. 아골타가 고개를 끄덕이자 2왕자의 신년 인사로 왕자들의 신년 새배가 시작되었다. 그들이 가면 유모들이 어린 왕자들을 안고 와서 신년인사를 하고 그 이후 계후들이, 그 이후 공주들이, 연달아 신년인사를 드리러 올것이다. 아골타는 하품을 한번 했다. 오늘은 하루 종일 의자에만 앉아있어야 하는군. 붉은 천과 화려한 종이꽃 장식으로 꾸민 궁전 안을 쉬첸은 재빠르게 걸어 다니며 따라오는 환관에게 물었다. “다음은 누군가?” “에... 계후님들까지 인사드렸으니... 이젠 2왕자 전하께, 그 다음은 ...” “5왕자까지만 신년인사를 하고 나머지 왕자에게는 신년 선물을, 공주들에게는 향을 선물하도록 하자.” “하지만 10왕자까지는 인사드려야 합니다.” “안돼! 난 바쁘다. 어머니에게 분향도 드려야 하지 않느냐!” 환관이 뭐라 하기도 전에 쉬첸은 2왕자의 궁으로 들어섰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신년인사를 하러왔는지 복잡한 궁 앞은 꽤나 시끄러웠다. 이렇게 기다리며 시간을 허비할 수 없는데... 하지만 관례라는 것은 순서가 있는 법이다. 갑자기 사람들을 헤치며 한명의 환관이 나와 외쳤다. “2왕자 전하께서 아우 전하들을 먼저 뵙고자 하십니다.” 그 소리에 고관들이 인상을 구기는 것이 보였으나 쉬첸과 다른 몇몇 왕자들이 재빠르게 일어났다. 혼란스러운 접대방을 나가 긴 복도를 지나자 맑은 바람이 불어온다. 2왕자 체이첸은 그 높은 배분에도 불구하고 한족의 선비 같은 생활을 하고 있기로 유명하다. 역시 2왕자의 궁치고는 매우 정갈해보였다. “어서들 오게.” 체이첸이 예복을 입고 그들을 마중했다. 이미 홀에는 많은 왕자들이 앉아있었다. 거의 다 모인 것 같군. 쉬첸은 그리 생각하며 자신의 자리를 찾았다. “...흥!” 휙 하니 고개를 돌리는 저 놈의 옆자리가 내 자리다. 쉬첸은 감정을 자제하며 14왕자 태진의 옆자리에 앉았다. 서로 고개를 돌리고 있지만 마주한 등이 뜨거워서 일어나버리고 싶다. 모두 모인 것 같지만 체이첸은 누군가를 더 기다리는 듯 자리에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상석에서 책을 보고 있다. 그러고 보니 상석 아래의 4왕자와 5왕자의 자리가 비어있다. “늦었습니까?” 안내하는 환관을 밀치며 연회장으로 들어오는 왕자가 있었다. 붉은 머리에 건장한 체격. 화려한 복자가 부담스러운 모습이다. 2왕자 체이첸과 그 얼굴이 너무도 닮아 평소 그들의 얼굴을 보기 힘든 배분 낮은 왕자들은 자신의 눈을 의심할 지경이었다. 기다리던 아우의 등장에 체이첸이 읽던 책을 내려놓으며 웃었다. “아우가 안 오니 시작할 수가 있나. 신년에는 시간을 금같이 여기게” “아하하, 형님 벌써 덕담이십니까?” “둘다 지각하는구만. 5왕제도 어서 오게.” “그동안 달라진 것이 없어 적이 안심입니다. 형님. 여기는 여전히 정갈하군요.” 5왕자 치첸이 잠시 궁의 정갈함을 감탄하고는 체이첸을 따라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레이첸은 치첸이 자신의 옆에 앉자 고의적으로 몸을 뒤척이며 기분 나쁘다는 내색을 보였다. 하지만 막상 당사자인 치첸은 피식 웃을 뿐이었다. 체이첸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책을 접었다. 손벽을 치자 환관들이 술을 돌린다. 체이첸도 술잔을 받고는 일어나 아우들에게 축사했다. “자 그럼 신년에도 왕제들의 건강과 학식의 증진을 기원하네.” “망극합니다. 2왕자 전하께서도 강병 하십시오” 술이 한잔씩 돌자 왕자들이 체이첸에게 신년 선물을 올렸고 체이첸 역시 준비한 선물을 돌리며 덕담을 주고받았다. 여진족은 신년인사에 가까운 친족들에게 모피를 나누며 겨울 동안 헤어져 있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정식이지만 금을 세운 이후 그런 전통은 사라지고 한족의 화려한 연회풍습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워낙에 형제들이 많은지라 체이첸은 간단히 안부만을 받으며 지나쳤다. 사실 맏 왕자인 자신조차 처음 보는 왕자들이 있어 난감했다. 술을 돌리던 체이첸은 술을 벌컥 벌컥 들이키는 레이첸에게 술을 끊으라는 덕담을 해주고 방을 둘러보다가 아까부터 관심을 가지고 있던 적 갈색머리의 왕자에게 다가갔다. 보석이나 비단, 향과 다르게 그 왕자만은 붓을 가지고 왔다. 붓은 넘치고 흘렸지만 여진의 피를 이은 왕자가 붓을 선물한다는 것이 기억할만 해서 체이첸은 그를 눈여겨 보고 있던 터였다. 처음 보는 얼굴. 젊다. 태진의 옆에 있는 것을 보아하니 15왕자이거나 16왕자 정도 될 것이다. “신년에는 하시는 일 이루시길 바라네.” “황공합니다. 형님께서도 이루시길 바랍니다.” “이름이 뭐지?” “쉬첸이라고 합니다. 광의 계후의 3왕자입니다.” “아아... 광의님의 자제이신가. 우린 초원의 피를 잇고 있군.” 쉬첸은 그 말에 어리둥절했다. 앞에 서 있는 2왕자는 얼굴은 레이첸을 닮았다하지만 여진족에서 보기 힘든 검은 머리와 흰 피부를 가졌다. 게다가 지금까지 보여준 행동이나 언행은 여진족이라기엔 너무도 부드럽고 삐침 없어 한족의 피를 가진 왕자보다 더욱 한족 같다. 물론 2왕자는 여진의 피라 들었지만 오늘 보고는 그 말에 의심을 품던 차였다. 하지만 체이첸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쉬첸에게 고개를 갸웃해보였다. “좋아하는 현자가 있으신가?” “예?” 쉬첸은 그 말에 당황하다 곧 무슨 말인지 이해하고 대답했다. “예. 노담의 말을 좋아하옵니다.” “노담... 이이(李耳) 노자를 말씀하는 거군.” 체이첸은 매우 흡족한 듯이 그 말을 되씹더니 환관에게 손짓해 무엇인가를 가지고 오게 했다. 그것은 비단으로 만든 책이었다. “이것은 노담의 덕경(德經)을 옮긴 책일세. 내가 신년 선물로 자네에게 주니 읽어보게.” “이렇게 귀한 것을...” “노담이라.. 보통 초원의 피를 이은 자들은 이해 못하는 현자지.” “목동이 무위(無爲)의 도를 알면 양을 치지 못하니까요.” “그러하네.” 여진의 왕자들은 사상을 싫어했다. 그들은 초원에서 달리는 민족답게 스스로 몸을 움직이는 것을 좋아했고 앉아 문자를 읽거나 글을 쓰는 것을 질색으로 여겼다. 실제로 아골타가 금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글이 아닌 검이었기에 왕자들이 사상을 천시 여겨도 아무런 제지가 없었다. 그 중 유별나게 체이첸은 글과 사상에 빠진 왕자였다. 형제들 중 아무도 자신을 이해 못해 쓸쓸함을 항상 가지고 있었던 중 쉬첸의 존재는 까마귀 무리속의 백로와 같아 보였다. “쉬첸 아우께서는 내 궁으로 자주 오시게. 좋은 글이 있다면 나누는 것도 좋겠지.” “황송하옵니다.” 쉬첸 본인은 아무런 생각이 없었지만 힘을 노리던 왕자들은 그가 권력 중심에 끼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2왕자의 총애를 받다니. 모두들 떨거지 왕자의 행운을 질투했지만 막상 옆자리에 앉은 태진은 복잡한 감정에 술잔만 내려보았다. 난 2왕자를 내치고 4왕자를 왕위에 올릴 것이다. 권력을 노리지 않는 너만은 지독히 위선적인 나에게도 애틋한 형제로 지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너는 2왕자의 칼날이 되어버리려고 한다. 정말로 영원히 틀어져 버리는구나. 쉬첸. 태진은 홧김에 술잔을 들이켰다. ------ 단설의 역주는 인용과 개인적 견해가 들어간 글입니다.(맹신(盟信)사양. 도용씁쓸)-------- 주: 노자의 덕경 (德經) 흔히 노자의 도덕경으로 알고 있는 책이다. 전체의 81개의 주제를 도경에서 37장까지, 주로 도에 관하여, 이후 81편까지 덕에 관해 말하고 있다. 실제로 이 도덕경은 노자가 지은 것이 아니라 도덕경의 본문과 유사한 판본이 전국시대 말에 이미 전해지고 있었던 것으로 도덕경은 제자백가의 원천이라고 할 초기 고대의 지혜 및 원도가에 해당하는 여러 유파들로부터 각각 일정량을 빌려온, 격언과 경구의 집대성이라고 할 수 있다 제 29장 무위(無爲) 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장차 천하를 쟁취해 다스려 보겠다고 욕심을 내는 일이 있다면 내가 보기에는 그러한 욕심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천하는 자연의 도가 만든 것이므로 그러한 욕심은 불가능할 뿐이다. 욕심을 내고 시도하는 자는 패할 것이고, 놓치지 않으려고 틀어쥐고 있는 자는 잃을 것이다. 그러므로 만물은 앞에서 나아가기도 하고 뒤에서 따르기도 하며, 내쉬기도 하고 들여쉬기도 하며, 강하기도 하고 약하기도 하며, 위에 실리기도 하고 아래로 떨어지기도 한다. 이와 같으므로 성인은 심한 것을 거두며, 사치를 멀리하고 검소하며, 태만하거나 오만함을 멀리한다. 이 이야기에서 양을 치는 자가 무위의 도를 알면... 의 내용은 무위의 본질의 내용보다는 무위의 반대 계념중 하나라 할수 있는 속박, 욕심, 인위,등의 이유를 중심으로 말한것이다. 36 신년의 첫 눈이 내렸다. 그 순백의 나비들이 자신을 향해 내려오는 모습이 마치 천녀와 같아 무심코 밖으로 나가 그들을 맞이하게 만든다. 팔랑 팔랑, 자휼은 성한 손을 내밀어 그것을 받았다. 하얗다. 시리도록 깨끗함과 푸른 청초함에 미소짓지만 허락되지 않는 온기로 바로 녹아버리고 만다. 알수 없는 씁쓸함과 처연함이 고개를 숙이게 만든다. 이것은 아우와 같아. 손을 대기 전에는 그 이상으로 아름답고 화려할 수밖에 없지만 막상 대면 신기루와 같이 사라지게 되어버린다. “손을 대면 안된다....” 가만히 힘을 빼고 정원에서 떨어지는 순백의 나비들을 온몸으로 맞이한다. 어떤 나비들은 자신을 피해 도망가지만 어떤 나비는 스스로 내 어깨와 머리로 내려 앉아 긴 겨울 여정을 이야기 한다. 힘들었어요. 여기서 쉬어도 되나요? 손을 대지 않으면 스스로 날아와 그 긴 이야기를 나누려 한다. 그 슬픔을, 그 고됨을 내게 이야기하고 싶어 스스로 날아와 달아나지 않는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내가 내 온기를 나누려 욕심을 부린다면 서글프게 눈물만 남기고 사라질 뿐. 이것은 내 아이와 어쩜 이리 같단 말인가. “자휼장군?!” 큰 소리가 정원을 울린다. 후두둑 소리가 들리며 누군가 자신에게 뛰어와 눈을 털어낸다. 게슴츠레 한쪽눈을 뜨고 앞을 보니 좌보 백라다. “이게 무슨...몸은 괜찮으시오?” “예. 이젠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냥 눈을 구경했습니다. 찬 바람도 즐길겸...” “무리하지 마시오.” 백라는 걱정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다. 큰일 난줄 알았다. 멍하니 눈을 맞으며 서있는 모습이 세상 다 산 사람 같아 놀랐다. 저렇게 어두운 안색으로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일까. 하지만 눈을 털어내는 자휼은 괜찮다는 표정이다. “무슨 일입니까?” “전하께서 자네를 부르신다네. 하지만 힘들다면...”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자휼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 사라지자 백라는 아까 떨어뜨린 문서를 다시 집어 든다. 손에 든 문서들이 젖을 세라 총총걸음으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쉴 곳을 잃은 순백의 겨울 손님들만 외롭게 정원에 쌓이고 있을 뿐. 정원은 고요함으로 울린다. 최상층으로 올라가자 회색 비단옷을 입은 여관이 바느질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고개를 숙여인사하자 싱긋 웃은 여관은 실을 단도로 잘라 묶은 후 자휼을 따라오게 한다. 왼쪽 방문을 안내한 여관은 들어가보라 고개짓을 한다. 스스로 문을 열고 들어가자 등을 돌리고 않는 왕씨의 모습이 보인다. 세찬 찬바람이 불어와 여관의 옷자락을 마구 내치며 도망간다. 서둘려 여관은 방문을 닫고 사라지고 자휼은 조금 앞으로 들어와 부복한다. “부르셨습니까?” 대답없는 왕씨에 고개를 살짝 들자 활짝 열린 창에서 눈꽃이 뒤섞인 바람이 불어와 자휼은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왕씨도 고개를 돌렸다. 바람을 타고 하류사의 긴 검은 머리가 철렁이며 앞으로 쏟아진다. “자네 동생은 얼마나 총명할까?” “...?” “이리 앉게.” 하류사가 옆을 가리키자 자휼은 불편한 몸을 숙이며 공손히 옆에 앉았다. “고개를 들어도 좋다. 오늘은 왕씨가 장군에게 물어볼 것이 있으니.” “그리 경망한 짓을 할 수는 없사옵니다.” “...좋다.” 하류사는 창문을 닫았다. “많이 기다렸을 것이다. 네 아우를 다시 데려오라는 명령을. 아니 그런가?” 자휼은 깊게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하지만 어찌 그 마음을 모를 텐가. 새벽까지 불이 켜있는 방문에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계속 왕성쪽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서 그의 생각이 고스란히 녹아들어있다. “장군도 알았겠지만 나는 장안에서 머물고 있다. 백라가 대강의 지리를 알려주었겠지. 그러니 경거망동한 행동이 일족에게 얼마나 치명적이 될 것인지는 잘 알리라 믿는다.” 왕성을 둘러싼 외성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사옥은, 한족으로 변장하거나 정안족으로써 사는 혈족들의 은신처였다. 이어지지 않는 한 건너 건너의 가옥을 연결하면 황성의 동문을 둘러 싼 활 모양이 된다. 동문은 대로로 뻗은 문이기 때문에 전쟁시에 차지하면 매우 유리하겠지만 성안에서의 공격을 가장 먼저 맞는 곳이기도 하다. 양날의 칼인 것이다. “신은 위험한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다.” 하류사가 차를 따랐다. “자네 동생은 계명장군의 집에 있다. 아직까지는 위험하지 않아.” 자휼이 작게 안도하자 하류사가 다시 물었다. “그래, 자네 아우는 얼마나 총명할까?” “... 무슨 말씀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계명은 자네 아우를 죽일 거다.” “예?!” “당연한 것이 아닌가? 계명은 먼 황손이다. 그만한 재능과 혈통이 있다면 큰일을 논해볼만하지. 그래서 별 볼일 없는 14왕자의 진군 요청에 쾌히 승낙한거야. 아마도 사람을 모으는 사냥을 하고 있는 것일테다.” -네 놈... 용이 되고 싶어 하는구나 -왜, 그럼 안 된단 말이냐? 초원의 들개들이 황제라 거들먹거리는 이때 정통 황가의 피가 흐르는 내가 안 된단 말이냐? 자휼은 계명과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는 분명 사람을 모으고 있다 하였지. “사람을 모으고 있다면...어찌 위험할까요? 이용하려 하니 안전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자네 아우가 얼마나 총명한지 물어본 것일세. 장군들의 말이 자네와 아우는 닮지 않았다 했지만 피는 속이지 못하는 법. 그 역시 화를 내고 있을 것이야.” “그렇다면 계명의 집에 계속 있으려고 할까?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갇혀있을 만한 아이인가? 자신의 둥지를 불태운 원수의 집에?” “...아닙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유롭고 싶어 할 것이네. 문제는 그 방법이야. 가장 쉬운 방법은 자해일세. 하지만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을 보면 그 방법은 제외시킨 것 같고...” “...” “다른 하나는 계명을 설득시켜 자유를 얻는 것인데 그것이 그리 쉽겠나? 자네가 알 것이네. 목래의 조그만 성 따위 우습게 보는 그가 14왕자의 눈을 속이며 몰래 그 아이를 데리고 간 이유를.” “아우는 요의 영웅서에 이름을 남긴 놈이니...장군이라면 다스리고 싶어 할 인재이겠지요.” “그것은 자네도 마찬가지다. 율도와 선율, 난공불락 12성 목래를 꺽은 영웅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은가. 계명이 그것을 모를 리가 없지. 알기 때문에 같은 장군인 자네는 죽이고 아우는 데리고 간 거야. 그 정도의 머리를 쓰는 놈이라면 큰일을 벌일지도 모르지.” 자휼이 입술을 깨물었다. 용서하지 않겠다.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 내 동생에게 손을 대었다간 용서치 않겠다. “그렇다면 그와 계명은 거래를 하는 했을 것이다. 그 거래가 과연 무엇일까?” “...?” “내용을 짐작하기 힘들지만 어쨌건 말을 하면 죽어. 말을 못해도 죽는다.” “예?! “나라면 그렇다는 것이다. 자네는 자네가 죽인 자의 동생을 자유롭게 풀어줄 수 있겠는가? 하물며 그는 책사출신이야. 그가 하는 말의 대부분은 판세를 꺾거나 뒤집는 이야기다. 도성에서 일하는 계명에게 판세를 꺾는 이야기라면 하나뿐이지.” “...금을?” 하류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금나라를 몰락시키는 방법을 알려줄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이런 거대한 일을 알고 있는 그를 자유롭게 풀어준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나라면 즉시 죽여 버릴걸세.” “...!” “또한 말을 못한다면 14왕자를 속이는 부담을 가지기엔 별 볼일 없는 책사 아니던가? 그러니 차라리 죽이는 것이 이득이지.” “...그럼...” 거래하지 못하면 빠져나오지 못한다. 하지만 거래를 성공시켜도 죽고 못해도 죽는다. 이따위 거래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장수인 자휼로써는 도저히 이해 할수 없는 일이였다. “어떻게 생각하나? 자네 동생이 내가 생각하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생각이 드나?” “..하.” 자휼은 눈을 굴렸다. 자례는 총명하다. 내 동생이라 스스로 인식하지도, 표현 못했지만은 영웅서에 올려질 만큼 총명한 아이다. 그러니... “그렇습니다. 알고 있을 아이입니다.” “그렇다면 기다리는 수밖에 없군. 어찌되었건 죽는다는 것을 알고도 계명에게 미끼를 던졌다면 자네 아우 나름대로의 대책이 있는 것이겠지.” “그럼!” 이렇게 계속 기다려야 하는 겁니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 체 적장의 집에서 불안에 떨게 내버려 두어야 하는 겁니까? 아직 어린 아이인데, 아직 내 품에서 길러야 하는 아이인데. 자휼의 마음을 읽은 듯 하류사는 빙긋 미소 지었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자네가 얼마나 속을 썩이겠는가. 아우의 일은 그 아이에게 맡겨야 하나 소소한 복수 정도는 허락하네. 기다리는 시간을 지루하지 않게. 목래를 공성한 것은 14왕자이지. 하지만 지금 당장 14왕자를 죽이면 4왕자까지 건드리는 꼴이야. 그건 좀 위험하네.” “그렇다면?” “듣자하니 목래에서 끌려온 여인들이 15왕자에게 보내졌다는데 짐작되는 것이 없는가?” 그 말에 자휼은 눈을 감았다. 그 말만은 듣고 싶지 않았었다. 좋은 사내라 생각했다. 비록 초원의 피를 이었다고는 하나 그 행동거지가 정안족과 비슷하여 마음을 놓았었다. 동생의 좋은 친구라 생각했고 약에 대해선 매우 감사하고 있었다. 혈통과 직위를 떠나 가볍게 때로는 진지하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친우가 되지 않을까 했다. -알고 있나? 15왕자가 결혼을 안 한 이유는 현을 다루는 여인과 사랑에 빠져서라는 소문을? 이런 것이었나. 왕자와 자례가 어울릴 때 느끼던 그 씁쓸한 마음은. 나는 알고 있었던 건가. 왕자가 아우에게 품고 있는 연정의 느낌을, 나는 알고 있었나. 하지만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어떻게 쌓아왔던 신뢰를 무너뜨릴 수가 있는가. 가볍게 떠나갔던 것은 그렇게 다시 오려던 것이었나? 왕자의 신분을 이용해 결코 허락되지 못할 것을 앗아갈 생각 이였던가. 그 행동 하나하나가 전부 거짓이었단 말인가! 자휼은 극한 배신감을 느꼈다. 자신이 당한 모든 것과 동생이 당할 상황에 감정을 추스릴 수 없을 정도였다. 아니다. 그럴 사람이 아니야. 그는 맑은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한 행동이 전부 거짓이라 여기기는 너무나 진실한 사내였다.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게다가 만약 그가 사주해 자례를 데리고 간 거였다면 계명이 그 ‘현의 여인‘이 나라고 착각할 리가 없지 않은가. 쉬첸이 자례를 지목해 주었을 테니. 그래 그는 아니야. 자례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결국 힘들게 생각을 정리한 자휼은 입을 열었다. “그는 이일에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군. 돌아가 보게.” 하류사가 고개를 돌렸다. 자휼이 천천히 방을 나왔다. 얼굴을 타고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낀 자휼은 소맷자락을 얼굴을 훔쳤다. 여관이 그를 보고는 손짓으로 아래층을 가리켰다. 내려가라는 뜻인가. 자휼이 내려가는 동안에도 여관은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명림씨는 명림씨란 말인가...” 하류사가 중얼거렸다 15왕자를 죽이면 14왕자가 보복한다고 나설지도 모르나 최근의 정보로는 둘 사이가 많이 안 좋아졌다고 했다. 이것은 기회다. 14왕자에게서 원군이 될지도 모를 인재를 하나 떨쳐 놓은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란 언제 어떻게 그 마음이 돌려질지 모르니 지금 상황에 15왕자를 죽이려고 했는데. 적절히 분노를 조절해 그에게 일임할 생각이였는데 그는 의외로 냉정하다. 하지만 아쉬울 것은 없다. 더 큰 일에 뛰어들만한 인재라는 것이 아닌가. “...어린 쪽도 기대할만 하겠군.” 손을 들어 얼굴을 감쌌다. 오늘은 조금 피곤하다. 팔을 쭉 뻗으며 가죽 조끼를 입어 단추를 끼운 레이첸은 퉁퉁 부은 얼굴로 자신을 따라오는 태진을 보았다. “얼굴이 왜 그렇게 부어있나? 오래간만에 사냥을 나온 것이 그리 불만이냐?” “그럴 리 없지 않습니까?” “그럼 즐거운 사냥이 되게 해라.” “...2왕자 전하와.” “그만 그만.” “왜 그리 생각하시는 겁니까!” 태진은 역성을 부렸다. “어째서 용이 되고 싶지 않다고 하시는 겁니까! 그 기회와, 그 능력과, 그 적통이 합당한데 어째서 그런 말씀입니까!” “잊은 모양인데 2왕자도 있고 3왕자도 있다.” “누누히 말씀 드렸지만 3왕자는 한족의 혈통이니 제외되는 것이 당연하고 2왕자 전하는 황제의 눈에 차지 않으니...!” “너 5왕자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 “...예?” 갑작스런 레이첸의 질문에 태진이 무슨 소리냐는 얼굴을 했다. 레이첸은 전통을 흔들거리면서 중얼거렸다. “그 놈이 말하더구나. 자신이 용이 될 터이니 나보고 자신을 도우라고.” “예?!” “난 용이 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하지만 그 자식이 용이 되는 것은 허락할 수 없을 것 같다.” 황제와의 사냥에서 보여주었던 그놈의 이야기나 분위기는 정말로 일을 저지를 놈만 할수 있는 그런 여유가 있었다. “무서운 놈이다. 바라보고 있으면 나도 오싹하지. 내가 바라는 이상을 알려줄까? 난 2왕자가 황제가 되길 바란다. 그리고 난 그것을 도울 생각이다. 형님이 왕이 되면 난 가솔들과 가신들을 데리고 초원으로 나가 자유롭게 살 것이야. 어떠냐. 근사하지 않으냐?” “...제가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것을 알려드릴까요?” 태진이 손가락을 꼽았다. “첫째, 당신은 이미 거론되고 있는 태자의 후보이기 때문에 조만간 당신을 옹호하는 세력이 형성될 것입니다. 둘째, 2왕자에게도 그 세력이 모일 테니 당연히 두 세력은 왕자분들이 아무리 친하게 지내시던 가신들 스스로 싸울 것입니다. 셋째, 누가 왕이 되던 간에 떨어진 세력들은 찬탈을 노리고 싸울 테니 왕위에 오르신 분은 당연히 한분을 제거할겁니다.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셨습니까?” “...체이첸 형님은 그럴만한 분이 아니야.” “원하는 것이 아니라도 따를 수 없는 것은 대세라 합니다. 황제가 되어서도 거부할수 없는 것이죠.” “아아, 난 역시 그 자리가 어울리지 않다. 네가 말하는 것도 이해안간다.” “그러니까 왕이 되지 못한다면 적어도 5왕자까지는 반드시 죽음을 당할 겁니다. 그래서 다들 왕이 되려 하는 겁니다. 이해 안가십니까?!” “그래.” 레이첸이 씩 웃었다. “어찌 되었건 넌 불리할 것이 없다는 입장이란 걸 이해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제가 왜 당신에게 집착하시는 지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레이첸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려 하얀 설산을 바라보았다. 37 1왕자가 황제와의 다툼으로 죽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우리 혈족이라면 그 내막을 짐작하고 있는 일이야. 그럼 다음 태자는 2왕자인가. 3왕자는 한족이라고 했다. 황제는 여진족의 혈통을 우대하니 2왕자와 다툼이 생길 것은 4왕자뿐이다. 4왕자는 어떤 왕자인가? 끝자락의 14왕자에게 권력을 넣어주는 자이니 세력을 이룰만한 위치라고 단정 지을 수 있다. 즉 2왕자와 겨룰만하다. 2왕자와 4왕자를 붙여놓는다면 좋아할 왕자가 누구일 것인가? 5왕자는 어떤 자인가? 계명은 그는 간약하여 변방으로 밀려나 실권에서 벗어났다고 했다. 실권에서 벗어난 왕자라면 응당 고관의 자제들과 혼인시켜 외가의 세력에 묻어버리는 것이 상책인데 5왕자의 부인은 지방 성주의 딸이다. 성주의 딸은 군사를 모아 줄 수 있는 위치이고 성주는 돈을 대줄 수 있다. 그 것으로 보아선 5왕자는 영리한 것 같다. 섣불리 두 왕자를 싸움에 몰아넣다가는 3왕자가 치고 올라올지도 모른다. 3왕자가 한족이라고 하지만 배분이 배분인 만큼 욕심을 안부릴리 없다. 아니라면 2왕자와 4왕자를 싸우게 만들고 3왕자를 죽인다면 자연스럽게 5왕자가 왕위를 가지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황제가 절명할 순간에만 사용할 수 있는 계책이다.” 자례는 벽에서 시선을 때고 침상에 누웠다. 황제는 아직도 건재하다. 그러니 지금 생각은 전부 헛일이다. 맙소사, 정말 피곤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내가 이곳을 나가는 것이다. 여진족의 왕가가 어떻게 되던 무슨 상관인가. 단지 나가기 위한 계명과의 거래 재물이 되는 것이다. 어쨌건 내가 말하던 안 말하던 계명은 날 죽이고 말 것이다. 그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만약 나를 살려두고 부려먹을 생각이었다면 애초에 거래를 하지 않아야 했다. “...날 이용할 수 있다 생각하나.” 여기서 나가는 방법은 알고 있다. 15왕자는 목래 공성에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 목래에서 데리고 간 여인들을 15왕자에게 보냈다고 했으니 그 우직한 왕자는 무슨 일인지 당장에 알아볼 것이고 명색의 왕자인 그가 공성 장군에 계명이 들어갔다는 것을 못 알리가 없다. 여기서 계명에게 목래에 관한 것을 부인하게 만들기만 해도 그 끈덕진 15왕자는 가택을 뒤지라 하거나 직접 찾아올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 내가 살아나가는 것 보다 계명을 살려둔 체 나갈 경우 항상 따라붙을 위험이다. 형을 찾기 위해선 혈족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그의 시선을 몸에 두르고 다닐 수는 없다. “...죽이고 나가야 한다.” 죽이고 나가야한다. 하지만 나는 지금 그에게 갇힌 상태다. 죄인이 간수를 죽이면 굶어죽는 법이다. 그러니 때를 잘 맞추어야 한다. 하지만 그 때를 어느 시점에 맞추어야 하는 거지? 기회는 내가 만들지만 성사는 하늘이 해준다. 인간이 재아무리 발버둥친다 한들, 하늘의 당할수 있을손가. 유능한 책사라면 하늘의 성사를 유도하는 기회를 만들어 내는 것. 어느 편에 성사를 맞추어 주신단 말인가. 하늘은. 더 많이 생각하고 싶었지만 며칠간 잠을 못잔 탓인지 슬슬 생각의 끈이 흐려지면서 자례는 그대로 잠이 들었다. 나가서 형을 만난다면 그 못된 이마를 찰싹 찰싹 때려줄 것이라고 다짐하면서. “계명이라고? “ 쉬첸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월기교위를 내보내었다. 그 정도면 됐다. 이름을 안다면 출궁시켜 이것 저것 물어보면 될것이다. 기회가 좋군. 태진은 왕자와 사냥을 나갔다. 뭐라 뭐라 궁시렁거리면서도 그놈은 2왕자를 내치지 못할 놈이니까 당연하지만. 무엇인가 해결되었다는 안도감에 책상을 정리하던 쉬첸은 문득 못 보던 책에 손을 돌렸다. 2왕자 체이첸이 준 비단 책 노자의 덕경이다. “...” 이것은 기회다. 나 역시 태진처럼 권력의 칼이 되는 기회인거야. 하지만 쉬첸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태진처럼 되고 싶지 않다. 만약 운이 좋아 성주나 수하를 찾는다면... 하지만 어떻게 찾는다지? 그리고 막상 찾아도 내가 과연 태진의 손에서 그들을 지킬수 있을까? 내게 과연 그럴 힘이 있나? 권력이 없으면 왕자는 굶지 않는 거렁뱅이일 뿐이야. 손이 떨린다. 아니야 난 태진처럼 되고 싶지 않아. 조그맣겠지만 스스로 울타리를 만들고 사랑하는 사람과 양을 치며 살고 싶어. 양을 지키기 위해 선잠을 자는 사랑하는 이를 품에 보듬어 주고 싶다. 내가 과연 그럴 힘이 있는 걸까. 미간을 찡그리며 입가만 웃어보이던 아이는 강한 형을 가지고 있었다. 태어났을때부터 강한 자는 없다고 했다. 그의 형도 얼마나 큰 노력으로 강해졌을까. 하지만 나는 그럴수 없어. 내게 스스로 강해지는 기회는 이미 지나버렸다. “...아닌가.” 기회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 어떤 것을 포기하는가에 따라 내게 권력이 들어올 수 있는거야. 즉 이것이 내게 둘도 없는 기회가 되는지 모른다. 이제 알 것 같다. 왜 사내가 강해지고 싶은지를. 왜 여인이 어머니가 되서 강해지는 지를. 연인을 찬사하는 시를 외우고 백년 가약을 맺어 그 옆에 존재하고 싶은 지를. 이렇게, 가슴 속에서 지난 기억만 떠올리는 것이 괴롭고 답답하다는 것을, 그래서 연인을 보호해야 하는 사내의 강함을 원하는 마음을 이젠 이해할수 있을 것 같다. 하늘은 지킬 것이 있는 자를 성장시켜주는 것일까. 아니라면 지킬 것이 있는 자 스스로 성장해야 하는 것일까. 쉬첸은 잠시 미간을 찡그리고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차가 식을 무렵에 쉬첸은 계명을 부르라는 지시를 내렸다. “왜 15전하께서 날 출궁하신거지?” 이상하다는 얼굴로 계명은 심부름을 온 환관에게 들리도록 말했다. 어차피 그가 알고 있다는 생각은하지 않았지만 왕자가 나중에 환관에게 자신의 반응을 물어볼때를 염두한것이였다. 나는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으니 왕자의 갑작스런 호출에 당황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물론 왜 부른지 어렴풋 알고 있었다. 목래에 대해 물을 것이 있다는 것을. 정작 왕자가 마음에 두고 있던 태수는 내가 죽였지 않은가. 그러니 응당 공성장군인 날 부를 것이라 생각했다. 그보다 15왕자가 꽤나 담이 쎄졌나 보군. 이미 화적(火賊)의 일로 공소가 올라간 일을 물어보려 하다니. 황제의 결제 도장이 찍히는 순간 그 일에 대해 반목하는 자는 황제에 대한 모욕으로 치부된다. 재조사는 황제의 칙명 하에 시작하는 것인데 이름없는 왕자 주제에 알고 싶다 이건가. 문제는 시기였다. 하필이면 14왕자가 사냥을 나가 언제 들어올지 모르는 이때 부르다니. “...그렇다면야...” 계명은 몸을 일으켜 뒷채으로 나갔다. 이런 일에 써먹는 것이 책사 아닌가. 문을 열자 그 소리에 놀란건지 침대 구석에서 벌떡 일어나는 수하가 보인다. 눈이 빨게져 어리둥절 계명을 바라본다. “자고 있었나? 이런 날씨 좋은 날 낮잠이라니....” “...무슨 일로?” “15왕자에게서 사람이 왔는데 과연 내가 가야하는지 의문이 들어서 말이오” “왕자가 부르는데 안 갈수가 없는 일 아닙니까. 당신도 이미 갈 것을 정하고 왔을 것입니다. 목래에 대한 일을 물을 것이니 지금 내게 왕자에게 어떤 대답을 해야 되는지 물으러 온거지요” 자례는 눈을 비볐다. 막 잠이 들려는 참이었는데. 정신을 가다듬고 잠들기 전에 어디까지 생각했었는지 떠올린다. 그 멍한 표정에 계명이 의심스럽다는 듯 바라본다. “그렇군. 딱 여기까지 생각했었구나.” “?”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좋을 겁니다. 지금 14왕자가 성을 나가 그 사이를 노려 장군을 심문해볼 생각이군요.” “그렇다면 핑계를 대고 나가지 말까?” “영구히 원수를 지어도 될만한 상대입니까 15왕자는?” “그렇진 않아. 그는 계후 태생이니 처첩들 태생보다는 위험하지.” 그렇지. 쉬첸은 광의 계후 태생이였어. 그렇다면 스스로 몸을 보존하는 힘을 기를수 있는 위치군. 그 어벙벙한 왕자가 그런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가만히 다음 대답을 기다리는 계명의 눈치에 딴 생각을 멈추고 말해준다. “그렇다면 가서 성은 불태워져 그 재가 홍련호수까지 날아가더라 하십시오.” “홍련호수?” “15왕자가 알고 있는 목래의 경계선입니다. 목주에서 목래에 할당해준 영지의 끝자락이죠. 그렇게 말하면 포기할겁니다. 어느 정도의 피해를 입었는지 짐작이 갈 테니까요. 위로의 말도 잊지 마시고...” “그런가. 그리고 자네가 말한 그 계책은 어떻게 되었지?” “오늘 왕자와 대담을 일러주시면 생각해보지요.” “알았다.” 계명은 서둘러 나갔다. 남은 자례는 꾸벅거리면서 계명의 발자국 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침상에 쓰러지듯 누워 잠을 청하는 것이었다. 검을 들어 이리저리 휘둘러 보다 고개를 갸웃하고 다시 발검자세를 취한다. 하지만 또 다시 같은 행동을 되풀이 하고는 역시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한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을노가 물었다. “예전과 검을 쥐었을 때의 느낌이 다른가요?” “왼쪽은 심하지만... 오른쪽은 별 다를것이 없다 여기네. 하지만 몸의 한쪽이 힘을 지탱시킬 수 없으니 휘두를 때 그 힘이 끝에 닿지 않아. 보게.” 자휼이 검을 들어 앞의 나뭇가지를 돌려 베었다. 능숙한 동작이다. 하지만 나뭇가지는 힘에 밀려 멀리 날아갈 뿐 베어지지는 않았다. 장군 을노는 다시 나뭇가지를 집어와 자신의 앞에 두고 잠시 정신을 집중하더니 멋지게 베어내었다. “나무가 유달리 단단한 것은 아니라는 게 증명된거군.” “생각은 했었지만 한쪽을 못 쓴다는 것은 치명적이군요.” “날 때부터 양손을 써왔으니 당연한거겠지. 그보다 이렇게 된다면 난 자네와 같은 장군으로 불릴 자격이 없는 것 같은데?” “그런 말 하지 마십쇼.” 을노가 신경질 적으로 머리를 긁었다. 젊은 장군 을노에게 백라는 일은 맡기는 편이 드물었기 때문에 을노는 도성에서 생활하는 시간이 많았다. 덕에 상처를 위해 요양중인 자휼과 많이 친해질 수 있었고 자휼이 그보다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형으로 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실이 그러한 걸.” “...자휼은 원래 1검이십니까?” “응?” “저는 사실 3검이거든요.” “...난 전혀 그런거 모르는데?” 자휼이 어리둥절하지 을노가 당황스럽게 말했다. “원래 우리는 이도(二刀) 이상 아닙니까?” “그런가? 그러고 보니 아버님은 쌍검을 쓰셨지. 그게?” “음, 자휼은 어릴 때부터 한족과 살아와서 12도를 배울 기회가 없었나보군요.” “그게 무엇이지?” “검과 검의 술을 이어 한번에 두개 이상의 검을 휘두르는 것을 말합니다. 원래는 왕족의 재천의식에 사용하는 춤이었다 하온데 점점 일반화 되면서 장군들에게 ‘24반 무예‘로 내려왔지 않습니까?” “..전혀 몰라” “흠.” 을노는 잠시 고개를 갸웃하더니 웃었다. “자휼은 경당에라도 가서 수련하셔야겠군요.” “경당?” “일반 자제들에게 호신을 가르쳐주는 국가의 수련학교입니다.” “...그런 것도 있나.” “정말 아무것도 모르시군요. 우리 장군께서는.” “그렇군.” 바람이 거세지자 둘은 검을 거두고 방으로 향했다. “제가 전하에게 자휼의 수련을 허락 받겠습니다. 저도 일이 없으니 도와드리고요.” “..? 자네가 날 도와주다니?” “전 이래 뵈도 조의선인(早衣仙人) 입니다.” “...조의선인은 또 뭐야?” “아이구!” 을노는 하하 웃었다. 하긴 그는 한족과 길려졌으니 그럴만도 하지. 혹시 자례도 이런가. 그런 날카로운 얼굴로 이런 어버버한 태도라... 피식 딴 생각을 하던 그의 눈에 문득 자휼의 허리띠가 눈에 들어온다. “자휼, 허리띠를 잘못 하셨습니다.” “응?” “오른쪽이 위로 올라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자휼의 위는 왼쪽이군요.” “아아... 이거 쉽게 고쳐지지 않는군. 자례도 포기한 일이니 자네는 고치려는 시도조차 하지 말아주게.” “예?” 자휼은 쓰게 웃었다. 그 흉한 얼굴이 웃으니 소름끼치지만 어지간히 익숙해진 을노는 신경쓰지 않는다. “이상하게 이것은 뜻대로 되질 않아서 말이야. 아이가 그렇게도 자주 일러주었건만...” “...보고 싶으시군요 자휼은.” “...그런 것 같아. 아니 그렇다네.” 보고싶지. 무심히 허리띠의 끝자락을 만지는 오른손 위로 허상(虛像)의 작은 손이 올라온다. 어깨위로 두 팔이 걸처지고 이어진 두 손이 자신의 허리띠를 풀어 눈앞에 두 허리띠 끝자락을 보여준다. -오른쪽으로 묶는 거라구요. 오른쪽을 밑으로 넣어 왼쪽으로 위를 교차해 만들어진 틈으로 아래의 오른쪽 끈이 올라와 들어간다. -두번 고리는 아까와 반대지만 역시 오른쪽이 들어와요. 끈을 잡은 손이 움직인다. 자연스럽게 오른쪽이 아래로 왼쪽이 위로 향한 그것의 틈을 역시 아래의 오른쪽 끝이 들어와 매듭을 만든다. 허상의 손이 두 허리띠를 놓는 순간 한쪽은 아래로, 다른 것은 위로 올라와 있던 허리매듭이 자연스레 출렁이며 사이좋게 아래로 늘여진다. -다시 해볼까요? “...아니.” “예?” 을노는 뒤를 돌아본다. 등을 돌려 먼 하늘을 바라보는 자휼은 세찬 바람을 등지고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같이 들어가려 하다가 그만두고 조용히 사라져준다. 어찌 모르겠는가. 그토록 알려주었는데 어찌 바른 매듭짓기를 모르겠는가. 단지 내 스스로 바른 매듭 짓기를 안하는 것이다. 아이가 그것을 이유로 날 한번 더 돌아봐 주는 것이 좋아서. 다가와 허리띠를 고쳐 주는 그 짧은 순간이 좋아서. 사소한 것으로, 공무와 관련되지 않는 일상의 소소한 사건을 서로 나눌수 있다는 것이 좋아서, 그래서 하지 못하는, 아니 안하는 것이다. 수십번을 반복해서 보여주는 아이의 성의에라도 바른 매듭을 짓는 것이 당연하련만. 마음이 그래서일까 버릇대로 나는 어긋 묶기를 해버리고 만다. 다음엔 배우지 않아도 손이 이모양이니 네가 해주겠지. 문득 자신의 신세가 무척이나 처량해졌다고 느껴 헛기침을 한다. 겨울이라 그런가. 애써 생각을 삭히며 방으로 걸음을 옮긴다. ------ 단설의 역주는 인용과 개인적 견해가 들어간 글입니다.(맹신(盟信)사양. 도용씁쓸)-------- 주: 화적(火賊) 유적(流賊)의 한 무리이다. 유적이란 떼를 지어 여러곳으로 노락질 하러 다니는 도적들의 무리를 말한다. 유적은 그 지도자와 시대에 따라 많은 무리로 나누어 졌다. 대표적인 것이 중국 후한의 황건적(黃巾賊)이나 원말의 홍건적(紅巾賊)을 들수 있다. 황실에서 볼때 이들은 엄연한 유적(流賊)의 한 무리이며 도적의 무리라고 칭하고 있다. 남적, 마적 비적, 산적, 해적, 등 역사에 많은 적(賊)이 있지만 목래를 쳤다는 화적, 우리가 가장 잘 쓰는 이 화적의 유래는 어디서 왔을까. 한국의 화적은 바로 조선의 명화적에서 나온 말이다. 임진왜란·병자호란을 겪은 뒤 국토는 황폐화되고, 민생문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삼정(三政)이 극도로 문란해져 살길이 막히자, 농민들은 자연히 유민(流民)·도둑이 될 수밖에 없었다. 명화적은 횃불을 들고 부호가를 습격하였기 때문에 ‘화적’이라고도 하였다. 30∼40명씩 떼지어 다녔으며 말을 타거나, 포(砲)를 쏘기도 하였다. 즉 중국에서 화적이란, 명사의 일종으로 불한당의 뜻의 단어로, 우리가 생각하는 커다란 도적의 무리를 지칭하는 것만은 아니였다. 하지만 이 이야기 목래를 친 화적은 명화적이 당연 아니고, 성에 불을지르고 달아난 모종의 도적무리로 상소 되었기 떄문에 화적(火賊)이 된것이다. 주: 경당 혼인하기 이전의 지방 평민층 자제들이 모여 경전을 외우고 사격술을 익히는 문무 겸수의 사설학숙(私設學塾)이었다. 38 그날 아침은 왕씨의 부재로 소란스러웠다. 종이를 사온 좌보는 화를 내며 화원을 뒤지고 다녔고 그에 반해 여관은 나비에게 꿀을 먹이며 여유있게 나비장을 돌보았다. 그 소란스러움과 백라의 신경질에 자휼과 을노는 도성으로 나와 그동안 이야기 했던 경당에 가기로 결정했다. 그다지 오래 걷지 않아 서문의 한가한 골목에 있는 작은 대장간이 보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농기구와 마차를 만드는 대장간이었다. 이름은 모도리(募堵利). 자휼은 문 위에 걸려 있는 현판의 글을 계속 되뇌었다. “모도리... 대장간의 이름으로는 딱이네. 이것저것 망가진 것을 모은다라...” “그것뿐입니까?” 을노가 웃으며 묻는다. 그 웃음에 자휼은 고개를 갸웃했다. “또 있나?” “모도리. 우리말로는 약간의 빈틈조차 없는 완벽함을 이르는 것을 말합니다. 보통 검을 만드는 장인에게 붙이는 속어입니다.” “...그래?” “정말로 문제 있습니다. 자휼은. 우리네 혈족들이 사는 곳의 현판에는 한자와 국어의 동음이의어를 사용한 것이 대부분입니다. 우리들 아무데나 들어가는 것 같지만 사실 전부 혈족들에게만 가고 있는거라구요. 다른 도성에 가서도 혈족들을 쉽게 찾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겁니다.” “국어 공부도 좀 해야 할 것 같군.” “일단 들어가지요” 자휼이 대장간을 들어가 천장에 달린 종을 쳐 사람을 불렸다. 곧 건장한 체격의 사내가 가죽 앞치마에 칼을 문지르며 나왔다. “무엇을 고쳐드리리까?” “고쳐야 할 것은 많지만 일단 모도리를 만나고 싶네.” “...모도리라. 저 놈을 따라가면 근사한 것으로 드릴 것이요.” 사내는 어깨를 으쓱이며 눈짓으로 웃어보인다. 을노도 고개를 숙이며 웃는다. 둘은 다른 사람의 안내를 받아 작은 듯해 보이던 대장간을 넘어 계속 들어갔고 작은 창문이 달린 집으로 안내를 받았다. 안으로 들어가자 그곳에는 서너 명의 젊은이와 중년인과 백발의 노인이 있었다. 예고없이 찾아왔지만 그들은 자휼 일행이 들어가자 싱긋 웃어보이고는 자리를 내주었다. 조금은 어벙한 표정의 자휼이 엉거주춤 앉았고 을노는 자리를 사양하고는 문 앞에 앉았다. 백발의 노인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래서 서로 도와 태평성대를 이룰 때 생긴 태양을 당기고 달을 당기는 현묘지도(玄妙之道)라는 정신이 정안족이라 불리는 우리의 토대인 것이다. 15대의 미천제 13년 제가승 제도를 만드심 이후로 우리에겐 오술이 내려온다. 오술은 궁, 권, 창, 검, 마,에 이르는 오술은 장군도에 이르러...” 이거 아무것도 이해가 안가는 걸. 뭔가 엄청난 이야기를 하는 건 알겠는데...자휼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지만 노인은 엄숙하게 계속 수업을 진행시켰다. 긴 유래가 끝나자 젊은이들은 중년인과 함께 검을 들고 연습에 들어갔다. 노인은 그제야 손짓을 해 을노와 자휼을 불러들였다. “어인일로 조의 선인께서 하찮은 모두리의 집까지 오셨습니까?” “감당치 못합니다. 조의선인이란 말은 접어두소서.” 고개를 숙이는 노인에게 손짓으로 만류하며 을노는 자휼을 소개했다. 간단한 이름과 장수라는 내용의 소개에 노인은 질문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웅서에 들어간 일족이구만. 유명하지. 그 힘이 어찌 사무랑에 미치지 못한다 하겠습니까.” “...사무랑이 뭐지?” “국가에 무술적 공훈을 세운 영웅에게 왕씨께서 내리는 호칭입니다. 장수로 매우 영광스런 것이죠.” 소근 소근 물어오는 자휼의 질문에 을노가 재빨리 대답해주었다. 그리고 노인에게 계속 이어 말한다. “사실 자휼은 혈족에 대해 미지합니다. 게다가 불의한 사고로 반신을 잃어 그 힘을 다 펼치지 못해 모두리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힘을 얻고자 합니다.” “감히 모두리 따위가 그런 큰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아아 그런 말하지 마시고...” 이상하게 이 날카롭게 생긴 노인은 을노를 골려주려는지 톡톡 말을 튀긴다. 그 말에 꼼짝도 못하고 이리 휘고 저리 휘는 을노의 모습을 바라보며 이상타 생각하지만 상대가 연장자인지라 얌전히 앉아있는다. 한참 후 자휼을 제자로 들이겠다고 약조를 받아낸 노인과 대화를 마치고 모두리를 나올때 자휼은 잘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모두리는 검을 만드는 사람이라 하지 않았나? 그런데...” “진짜 모두리는 우릴 안내해주었던 중년인입니다. 처음 본 자는 검을 가지러온 장수였을 겁니다. 그래서 절 알아보았던 것이죠. 검술을 도성 안에서 익힌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 하지만 대장간의 소리에 검의 소리를 숨길 수 있죠. 모두리는 검을 만드는 곳이기도 하며 도장이기도 하고, 경당의 역활도 하며 장수들의 모임 터이기도 합니다.” “...많이 배우는 군.” 잠시 멋쩍은 듯 웃던 을노가 말한다. “사실 아까 그 노인분은 저의 작은 스승님입니다.” “응?” “유견이라 하시는 분입니다. 유유의 장백검은 들어보셨을겁니다. 그 유유님의 12대 손이시죠. 굉장하신 분이였습니다. 저도 그 분께 수행을 받고 싶었으나 저는 11대 손 그분의 형님인 유선님의 제자이죠.” “왜 유견님께 받지 않았지?” 을노는 좌우를 둘려보더니 심각하게 말했다. “그 분 너무 까다롭거든요.” 계명은 15왕자의 궁을 둘려보았다. 계후의 태생이라 안쪽에 위치한 궁으로 배정이 되었지만 작고 협소하다는 느낌이 든다. 따로 정원을 가꾸는 것도 아니고 그냥 작은 화단이 있는 정도의 작은 외궁이다. 장식이 화려하거나 원예가 호화스럽지도 않다. 그냥 평범한 외궁일 뿐. 14왕자와 배분적 차이는 근접하지만 생활은 전혀 다르군. 하긴 그것이 힘이 있고 없고의 차이겠지. 문득 울리는 발소리에 뒤를 보니 누군가 한무리의 시종들이 따라 들어온다. 자신보다 늦게 왔으면서 먼저 고하는 모습에 호기심을 가진다. 누구의 시종들인가. 환관이 낀 것으로 보아 궁안 사람이다. “2왕자 전하께서 14왕자 전하를 저녁 식사에 초대하신다는 서신입니다.” 뭐야? 예상치 못한 왕자의 초대에 계명은 고개를 갸웃했다. 언제부터 15왕자가 2왕자와 친분이 있었던 거지? 하지만 더 이상 생각하기도 전에 15왕자의 부름에 계명은 왕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텅 빈 방에 부복하고 있자 발을 친 옆방에서 적금발 머리의 여진 왕자가 자신을 나와 내려다본다. “계명이옵니다.” “목래의 공성은 훌륭했다고 들었소.” 바로 물어보는군. 목래를 공성한 것은 화적들의 일이라 상소되었다. 그런데 저렇게 묻는 것은 예상보다 많이 뒤적여 본 모양이군. 그렇게 그 수염달린 태수가 사랑스러웠나. 여진족이란 알수가 없군. “들으신 바와 같이 목래는 화적들의 불길에 그 흔적을 찾기 힘들었습니다.” “그래, 그 잿더미에서 여인들만 추려 오느라 얼마나 힘들었겠소.” “...불길이 거세 체 진화되지 않은 상태로 퇴군하였으니 양해해 주소서.” “불길이 얼마나 거세였는데 그러신가?” 비아냥거리는 왕자의 말에 화를 뭉치며 계명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했다. “전하께서도 알고 계시는 홍련호수에 잿더미가 내려앉을 정도였습니다.” “...홍련?” 쉬첸은 잠시 생각을 하는 듯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오늘 2왕자 전하를 만나야 하기 때문에 여기서 그만 파하겠소.” “언제든지 소신을 부르신다면 달려올 것입니다.” 계명이 나가곤 난 후 쉬첸은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 자신을 모시러 온 환관들이 어서 2왕자 궁으로 떠나야 한다고 말했지만 기다리라고 외친 후 계명을 만난 터 였다. 지금도 밖이 시끌시끌 하지만 좀 더 기다리는 것이 대수냐. “홍련?” 목래에 그런 지명이 있었나? 홍련이라니. 홍련이라...? 홍련 호수? 연꽃. 그래, 그런 호수는 있었지. 그 뭐였더라...? -이름 그대로 여름엔 이곳에 연꽃이 피나? -예. 홍련이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지요. “가랑 호수군!” 쉬첸은 손을 딱 부딪쳤다. 가랑 호수군. 그래. 홍련이 피는 호수라고 했어. 가랑 호수가 간혹 홍련호수라고 불리기도 하나 보군. 그런데 계명이 어떻게 그 호수에 연꽃이 피는 것을 알았지? 겨울이여 호수도 다 얼었는데다 호수의 연은 가을에 거두어 들인다고 했다. 그러니 그 호수에 연이 피던 금이 열리건 알 수 없는 거야. 누군가 살아있나. 그리고 그것은... “이봐라! 2왕자 궁으로 가야겠다!” 쉬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리저리 둘러볼 것도 없이 손에 쥐고 다니던 영웅서를 집는다. 강해져주지. 하늘은 지킬 것이 있는 자를 성장시켜주는 것일까. 아니라면 지킬 것이 있는 자 스스로 성장해야 하는 것일까. 나는 스스로 성장하겠다. 그리고 지켜보이겠어. 눈이 내린다. 새 하얀 설산으로 부족해 나무에 눈꽃을 내리고 지나온 발자취마저 사라지게 하는 심술궂은 눈이 내린다. 그 달갑지 않은 손님을 향해 손을 뻗은 레이첸은 중얼거린다. “신년이 지났는데...” “고작 일주일 지났지 않습니까. 적어도 2월까지는 눈이 내리는 것을 아시면서...” “이것 봐라.” 고개를 내미는 태진에게 레이첸은 방금 죽인 노루를 가리켰다. 새 하얀 눈의 수의를 타고 새 빨간 꽃이 피어난다. 무엇을 보라하는 것인지 몰라 의아한 표정을 짓는 태진에게 레이첸이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비웃는 것도 같은, 차가운 얼음의 냉소가 깔린 여유있는 붉은 웃음. “아름답지 않으냐?” “...가끔 형님은 사람을 겁주시는데 뭔가 있으십니다.” “이상하지? 하지만 난 이것을 사랑한다. 이 새하얀 눈을 더럽히는 붉은 피, 그리고 이렇게 할수 있는 내자신을 자부하지.” 그 붉은 웃음에 태진은 스스로 약간 뒤로 물러난다. 저 사내는 가끔 놀라게 할만큼 잔인한 모습을 보인다. 나 스스로가 오싹 할정도로. 하지만 레이첸은 하얀 눈을 사심없는 손으로 저었다. 손바람에 눈이 흩날려버린다. 갈길을 잃고 산산히 흩어진다. “그렇지 않느냐? 요 새하얀 것이 자신을 고고하다 칭하며 근접할 수 없게 한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럽히고 손안에 넣어 주무르고 보고 싶은 충동질이 드는 것은 나뿐이던가?” “...그건 나쁜 심보군요. 세상엔 건들지 말고 보기만하라 만든 것도 있습니다.” “왜 보기만 할 것을 만드는 것이냐? 사람은 보면 만지고 싶고 만지면 가지고 싶은 것이다. 그것은 이치야. 그런데 왜 보기만 해야 한다는 것이지?” “자제라고 하는 것이겠지요. 그것이 있기에 상하가 있고 좌우가 있을수 있어 나라가 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태진의 설명에 레이첸은 크게 웃었다. “역대 황제들이 그 놈의 자제를 몰라 망해갔더냐? 내가 못 가진 것을 가지려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에 스스로 망조를 한거다. 그건 욕심이 아니라 욕망이라고 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 큰소리 친 레이첸은 갑자기 손을 태진의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태진의 가느다란 눈과 레이첸의 갈색 눈이 마주 친다. 그리고 조용히 속삭인다. “네 맘에 숨겨있는 그것처럼.” “지금 형님이 노루를 죽인 것처럼 말입니까?” “...후후후” 아무말 없이 레이첸은 태진에게 몸을 돌려 노루의 몸에 손을 얹자 흘리는 피 때문인지 급속도로 차가워지는 것을 느낀다. 레이첸은 그 몸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만약 이놈이 날 따른다면 죽일 리가 있겠느냐? 내게서 벗어나려 발버둥쳐서 가두어 놓은 것이다.” “산에서 사는 것들을 어떻게 가두어 길들인다는 말씀이십니까.” “...넌 모른다.” 레이첸은 실소했다. 하지만 태진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창가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던 황제의 노루. 가두어 놓는 데는 성공했지만 길들이지는 못했다. 그래서 죽은 것이다. “...아니 죽인 것이다.” “예?” 결국 죽인 것이다. 내게서 도망치려고 하니 죽이는 수밖에. 하지만 그렇게 죽인다고 마음이 편하겠는가. 가둔다는 행위 역시 연정의 또 다른 모습 아닌가. 야생에서 힘들게 겨울을 보내느니 총애하는 주인 곁에서 편안히 먹고 쉬고 사랑 받는 것이 좋지 않은가. 황제는 자신의 노루를 사랑하지 않았어. 바보같이. 애써 잡아와 놓고서 자신의 욕망을 위해 길렸으니 노루 스스로 죽어가는 수 밖에 없던 것이다. “내게 그런 기회가 있다면 난 다를 것이다.” “...?” 어리둥절한 태진을 보며 레이첸은 노루의 시체에 걸린 화살을 뽑아내었다. 뽑힌 화살을 흩뿌리자 금세 눈에 붉은 꽃이 피어난다.그 작고 큰 화려한 율동에 감동받아 물끄러미 바라본다. 하지만 떠오르는 옷자락 속의 손. 내가 죽인 정안족의 여인의 하얀 손. 그리고 새빨간 피. 지워지지 않는 그 여인의 손. 죽음과 피의 연상 레이첸은 고개를 흔들며 일어났다. 이젠 지워져라. 왜 잊혀지지 않는 것일까. 이상할 정도로 생생한 자신의 기억이 스스로 괴롭힌다. ------ 단설의 역주는 인용과 개인적 견해가 들어간 글입니다.(맹신(盟信)사양. 도용씁쓸)-------- 주 : 모도리 조금도 빈틈이 없는 아주 야무진 사람. 주 : 사무랑 국가에 무술적 공훈을 세운 선배를 에게 내리는 영웅 칭호. 선배란, 사냥과 가무, 무예 등의 여러 경기에서 승리한 사람으로 조의 선인중이나 일반인들 중에서도 뛰어난 무술을 선보이는 자들이였다. 이들은 국가에서 급료를 받아 생활하면서 무예와 학문을 갈고 닦았다. 선배는 머리를 박박 깍고 검은 옷을 입었으므로 전형적인 무사를 연상시킨다 한다. 주 :조의선인 조의선인(早衣仙人)이란 '검은 빛깔의 조복(早<검은 비단 조, 검을 조, 사실은 白밑에 十또는 七임>服) 을 입은 선인'이란 뜻으로 선배 또는 선비라 불렀다. 선배는 고구려의 10월 제사에 모인 군중 앞에서 무예를 선보인 데서 비롯되었고 선인(先人 또는 仙人)은 선배의 이두(吏讀)식 표기이다. 조의선인은 선비제도라는 특별한 교육체계에 의해 양성되는 문무겸전의 인재들이다. 이들은 대체로 유년의 어린 나이에 선발되어 신체발달에 부응하는 매우 정교한 지적, 정서적, 신체적 훈련과 교양을 통하여 보다 완벽한 심신의 능력을 갖게 된다. 조의선인은 누구보다도 사물과 현상을 깊이 인식하고, 그것들이 부딪치는 문제의 실상을 정확히 파악하며, 이를 해결할 심리적, 물질적 능력을 갖도록 조련된다. 을파소나 명림답부, 을지문덕 등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이들도 모두 조의선인들이었고, 우리 문화전통에서 말하는 선비란 바로 이들이 가지고 있는 덕성과 실천력에 뿌리를 두고 있다. (다물:"되물린다"라는 뜻으로 단군조선시대의 태평성국으로 복고하겠다는 의지를 뜻함) 단군조선의 국자랑(國子郞) 혹은 천지화랑제도가 고구려에 와서는 조의선인 제도로, 백제에서는 무절(武節-일본의 사무라이(武士)로 이어짐)로 발전했으며, 신라에서는 화랑도로 이름이 바뀐 것이다. 39 누군가 들어왔지만 도저히 눈을 뜰수가 없었다. 일어나야 된다는 것을 알지만 몸은 물먹인 솜마냥 축 늘어난다. 안 일어나면 죽는다는 각오로 벌떡 일어나지만 휘적휘적 다시 침대 기중에 머리를 기대며 노랗게 변한 세상을 보는 눈을 깜박인다. 예의 없는 장군 같으니. 잠들면 깨우고 잠들면 깨우는구나. 지금 고문하는 거냐. 당연히 탁자로 나오길 기다리는 계명을 노려보려고 하지만 이미 눈에는 힘이 풀린지 오래다. 덜 깬 잠을 머리를 흔들어 떨쳐버리며 탁자에 가서 앉자 계명은 기다렸다는 듯 말을 꺼낸다. “오늘 왕성에 갔더니 그에게 2왕자의 초대가 권고되더군. 고작 며칠사이에 ·15왕자가 2왕자와 친분이 생긴 것 같은데 ...목래의 일이 크게 번지지 않을지 걱정이야.” 침착하지만 내색으로 당황스런 계명의 말에 자례는 끝내 피식 웃었다. 스스로 차를 따라 혼자 마신다. 그 여유있는 모습과 웃음에 계명은 화를 낸다. “왜 웃나?!” “안 웃게 생겼소? 당당하게 공격할 때는 언제고 지금 와서 목래의 책사인 내게 공성한 것을 걱정하니 지금 이 내가 안 웃게 생겼소? 인생은 새옹지마라더니 그것이 장군 꼴이군! 하하하!” “뭐라고!” 계명이 화를 내며 자례를 노려보았다.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없는 미운 놈 같으니. 내 두고봐라. 네가 네 그 영리함으로 네 죽을 자리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죽이리라. 문득 자례는 웃음을 멈추고 역시 멍한 눈으로 생각을 하더니 말했다. “왕자가 홍련 호수를 알덥니까?” “이해하더군. 그보다...” “왕자를 집을 모셔 차를 대접하고 목래의 일을 사과하십시오.” “뭐?” 왕자를 불러들여 일을 크게 만드는 것이 편리하겠군. 그는 일단 내가 죽었다고 거짓 고했으니 여기서 왕자를 보는 것 만으로도 계명을 옭아버릴 수 있다. “15왕자가 2왕자를 업은 이상 14왕자의 4왕자와 걸 맞는 권력을 가질 것이 분명합니다. 장군이 둘 사이에 낀다면 지금 상태론 버림 받기 십상이오. 그전에 둘 사이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렇지.” “집안으로 불러 목래의 공성이 원치 않았던 것이라는 걸 밝히고 변방으로 밀려나는 것이 상책이오.” “...나보고 지금 지방의 군주가 되어 인생을 마치라는 것인가?” “...그렇다면 지금 죽던지.” 자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 창문을 열었다. 석류나무대신 늘어진 도성의 거리에 잠시 한숨을 쉬고는 머릿속으로 석류의 가지를 떠올리며 스스로 위안삼는다. 하지만 초지의 풋풋한 바람이 아닌 도성 특유의 비릿한 바람에 인상을 찌푸린다. “황제가 건재하니 지금은 어떤 왕자도 힘을 가질 수 없고 혼란을 틈타 관리들이 세력을 키울 수도 없는 시기요. 이럴 때 변방에 가서 군사나 먹이는 것도 좋지 않겠소? 그 옛날 유비가 삼국을 통일할 때 가장 못난 짓이 형주를 취하지 않은데 있소. 그의 책사인 공명이 그에게 세 번이나 형주를 가질 것을 권했으나 작은 성인 형주를 그는 탐탁치 않고 형제가 다스리는 성이라 핑계를 대어 취하지 않았소.” “...” “하지만 결국 집의 중요성을 안 유비는 기십 년이 넘은 후에야 형주를 가졌죠. 그 후에야 그것을 기반으로 집을 키울 수 있었지. 하지만 그 때는 너무 늦어 유능한 장수들은 모두 죽어갔고 그 자신도 대업을 이루지 못하고 떠났소. “...” “어떠한 명군이라도 집이 없다면 식객과 뭐가 다를까. 아시겠소?” “...하.” 계명은 혀를 내둘렸다. 정말 아깝구나. 이런 자가 스스로 내게 머리를 숙이고 들어온다면 내 진실로 그를 귀하게 여길 텐데. 뭐가 아깝다 주저 하겠는가. 하지만 창을 내다보는 책사의 눈은 저 멀리 딴 곳을 바라보고 있다. 누가 그랬던가. 내가 가지지 못하는 호랑이 새끼를 풀어주면 언젠가 자신을 물어 뜯으러 온다고. “내 당신말대로 하리다. 내일 당장 그렇게 하지.” 자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창문을 내다보았다. 내일인가. 여기서 나가는 것이 내일인가. 계명이 일어나 창문을 닫는다. 찬바람은 좋지 않다고 말하며. 하지만 그 속내에 품고 있는 날카로운 비수를 알기에 조용히 고개를 돌리며 속 숨을 내쉰다. 실패하면 안돼. “곰은 그 무거운 몸을 왼다리 하나에 놓아 하늘을 치는 법, 다리를 벌리고 가슴을 정면으로 하게. 가슴으로 하늘을 떠받고 손으로 하늘을 우롱하는 것이 들어치기의 기본.” 유견이란 노인은 목검으로 자휼의 다리와 가슴을 쿡쿡 찔려대며 자세를 교정시켰다. 다른 사람은 화상을 입은 곳에 스치기만 해도 미안해 하는데 이 노인은 전혀 그런 구석도 없이 팍팍 잘도 찔러댄다. 찌르면 뭐랄까, 악 소리내는 아픔보다는 짜르르하는 전신으로 아찔한 통증이 신음을 만들어내, 차마 소리내지도 못하고 땀만 뻘뻘 흘린다. 어설프게 자세를 교정하는 자휼이 못마땅한지 노인은 계속 잔소리를 한다. “어디서 그런 엉성한 자세로 검을 잡는단 말인가. 양손으로 잡는 것은 창이야! 오른손이 앞으로 가게 잡는 것은 봉일세! 어디서 오랑캐들의 일도를 배워가지고선!” 딱! 하는 소리와 눈에 불이 반짝하는 것을 느낀다. 머리를 쓰다듬을 때도 없이 노인의 말에 오른손을 위로 했다가 왼손을 위로 하며 갈팡질팡하자 저 멀리 보이는 중년인이 고개 숙여 웃는 모습이 보인다. 창피하기도 하지만 그보다 노인의 목검이 두려워 얼른 자세를 고정시켜 보나 얼마나 까탈스러운 노인인지 끝내 못마땅해하는 눈치가 분명하다. “자신이 불행하다 생각하는가? 팔 하나 남았으니 검을 배울 수 있는 것이 다행이라 생각해야지! 어허! 엇다가 한눈을 파는 게야! 이러고서 영웅서에 실렸다니 의심스럽다 하지 않겠나!” 딱! 아이구. 아우야, 형님 여기서 죽는다. “난 항상 술보다 차를 더 가까이 할줄 아는 형제와 이야기 하고 싶었지.” 체이첸이 손수 차를 따르며 쉬첸에게 말했다. 적당하게 데워진 다기에서 맑은 물소리가 청아하게 들려온다. 간단한 식사를 끝낸 둘은 노자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 잠시 멈추고 차를 마시는 중이였다. 한가함에 쉬첸은 기회를 봐 체이첸에게 영웅서에 관련된 이야기를 꺼냈다. “영웅서?” “한족은 나라에 큰 공을 이룬 자들 중 재능 있는 자들을 뽑아 추앙하는데 그 사람들의 업적을 엮은 책을 영웅서라고 합니다.” “그런가. 재미있겠군.” “제가 가지고 왔는데 한번 보시겠습니까?” 선뜻 반색하는 체이첸에게 영웅서를 건내자 좋아하며 받는다. 짐짓, 지나가는 투로 말한다. “저 역시 그다지 흥미가 없었지만... 사실 이 영웅서에 적힌 인물들과 우연히 연이 닿아 읽고 있었지요.” “사내가 시대의 영웅을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쉬첸아우는 복도 많군.” “혹시 난공불락 12성에 대해 아십니까?” “조금은 알지. 관심은 없지만 나도 정치에 대해선 알고 있어야 하니 말이야. 계회성, 방영성,.. 그런 것이었지?” “그리고 목래라는 곳이 있습니다. 초지에 왕성으로 말을 보급하는 요충지온데 글쎄 얼마 전 화적에 당해 성이 불태워졌다고 하더군요.” “저런.” 체이첸은 안됐다는 얼굴을 했다. “그렇다면 3년 뒤의 말 값이 매우 오르겠군.” “아마도 폭리를 취하는 상인들이 판을 칠 것입니다. 전 목래의 성주는 말 값을 일정 수준으로 지켜왔던 유능한 사람이지요. 바로 제가 아는 영웅서의 영웅이랍니다.” “그런가? 어떤 사람인가?” 체이첸이 관심을 기울이자 쉬첸은 영웅서를 가리켰다. “영웅서에는 그들의 칭명과 함께 난공 목래를 공격한 비책과 그 업적만을 평가합니다만은 제가 만난 그들은 매우 다감(多感) 사람들이였습니다.” “영웅에게는 알려지지 않는 숨은 면목이 있기 마련이라더니, 아우는 그들과 친분이 깊나보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아우는 단지 이 옥으로 만든 우리를 채우는 단순한 사내일뿐입니다.” 쉬첸의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체이첸은 미소짓는다. “하지만 우리 모두 그 누군가가 용이 되는 그날 이 지긋지긋한 옥으로 만든 우리를 빠저나가 자유롭게 살수 있을것이오.” “저는 그렇지만 형님은 여기서 용이 되시겠지요.” “...글세.” 체이첸은 미소를 거두고 딱딱하게 얼굴을 굳힌다. “항간에서는 내가 용이 될것이라 말하며 내게 손을 뻗지. 하지만 나는 그 손을 잡지 않아. 모두가 걱정하는대로 내가 왕이 된다면 나는 한족과 손을 잡고 진나라때 유실된 고서적과 예절을 복귀시킬 걸세.” “진심이시군요.” “그래.” “그리고 황제께서 형님의 그것을 알기에 마음을 기울이지 못하시는 겁니다.” 무뢰한 듯한 말에 체이첸은 쉬첸을 바라보나 이런 감정 싸움에 화를 낼만한 소인은 아니라 빙긋 웃는다. 하지만 아까와는 다른 위압적인 분위기가 풍긴다. 그제야 쉬첸은 체이첸이 완력을 자랑하는 레이첸과 매우 흡사한 용모와 몸을 가졌다는 것을 알고 스스로 놀란다. 그 위압적인 몸이 허리를 세우고 인상을 쓰며 자신을 노려보다 속내가 들킨 것 같아 뜨끔하다. “그래. 황제께서는 내색하지 않지만 내게 마음이 없으실것이야. 하지만 대대로 장자가 가업을 물려받는 전례에 따라 대세가 내게 기울고 있는 것이지. 용케 아우는 알아차렸구만? 혹시 자네는 용이 되는 것에 관심이 많았던가?. 아니면 날 용으로 세워 그 등에 타고 싶은겐가?” 날카롭고 직선적인 질문에 쉬첸은 은은하게 고개를 저었다. “저는 단지 초원에 나가 양을 치며 가족을 꾸리는 아비가 되고 싶습니다.” “모든 사내는 그런 말을 하지.” “다들 살아 나가고 싶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용이 정해지고 나서 왕자들이 모두 죽임을 당하거나 유폐되는 것은 아니야. 일부는 권력을 지고 움직이기도 하지. 자네도 권력을 지고 싶은 것이 아닌가?” “형님, 저는...” 내 사람을 지키기 위한 힘만 있으면 족합니다. 갑자기 입을 멈춘 쉬첸은 못미덥다는 눈으로 바라보자 쉬첸은 허탈하게 웃음지었다. 그거, 힘이라는거, 생각보다 가지기 힘든 것이구만. 새삼스럽게 태진놈이 굉장히 위대해 보이는 이유는 뭘까. “사람이라는 것은 옹졸해서 꽃이 붉다 여기면 모든 꽃은 붉다 여기기 마련이고 물이 차갑다 여기면 차는 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덥니다.” “그래서?” “제가 뭐라 말씀드려도 형님이 절 소인으로 보고 계시다면 제말은 모두 간악하게 들릴것이 아닙니까. 저는 단지 사람을 추천하러 왔었을 뿐입니다. 물론 그것 역시 제 욕심이라 하실수 있겠지만.” 그 말에 체이첸이 고개를 갸웃한다. “무슨 소리냐?” “저는 반드시 제가 원하는 이와 양을 치며 말을 달리고 싶습니다. 그러니 형님이 용에 오르셔서 절 자유롭게 풀어주길 바라고 있습니다. 적어도 형님께서는 호해(胡亥)와 같은 어리석은 일로 피를 부르진 않으실 것 같아서 입니다.” “왜 날 믿는가? 난 널 믿지 않고 있는데?” “형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살아 남기 위해 형님을 그렇게 만들려 하는 것이지요.” 그제야 체이첸은 부드럽게 인상을 풀었다. “미안하이. 1왕자가 죽은 후 내게 너무 과중한 부담을 주는 일이 생겨 쉽사리 사람을 믿기 힘들어 그러니 너그럽게 이해하게.” “어찌 이해하지 못하겠습니까.” 빙긋 웃는 쉬첸은 스스로 자신이 한말을 되씹어 보고는 혀를 내둘렸다. 정말 내가 한 말인가. 내가 생각해도 등꼴이 오싹한 상황을 잘도 빠져나왔구나. 그 사나운 자례의 말투와 지혜를 은연중에 배워 왔는가. 한숨 놓고 차를 한모금 마시며 진정시킨다. 자신이 한 말과는 달리 가슴이 뛰는 요란한 소리에 얼굴마저 붉어질 것 같다. “그래, 내게 무엇을 부탁하려 왔었지? 누구를 추천할 생각인가?” “목래의 두 영웅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전하. 기필코 전하를 용의 자리에 올려드리리라 확신합니다.”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내 아니 만나볼수가 없군. 하지만 만나보고 등용할 것이네. 생각없이 가신을 늘려 다른 왕자들에게 위압을 주긴 싫으니까.” “...등용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뭐?” “...전하 저...” 머뭇 머뭇 쉬첸이 주저한다. 무슨 어려운 말을 하려 하는가. 등용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보통 천거를 하는 이유는 벼슬을 얻게 하여 관직에 두어 그로 인해 소식과 정보를 얻으려 함인데. 체이첸이 참을 성 있게 기다리자 조금 후 체념의 한숨을 내쉰 쉬첸이 말한다. “아닙니다. 단지 그들이 정안족이라 왕성에서 지내기는 불가능 하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게다가 왕성의 빠른 시간에 발 맞출수 있을 만큼 건강이 좋지 않기도 하고...” “...그렇군.” 체이첸은 알았다는 듯 미소지었다. 내게 천거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내게 보호를 요청하는 것이였던가. 어쨌거나 내게 위험스러운 일은 아니다. 게다가 목래의 영웅은 나도 한번쯤은 만나보았으면 하는 자들이 아니였던가. 체이첸은 책상의 서랍에서 출입패를 꺼내어 쉬첸에게 밀었다. “내게 데리고 오게. 정안족이라지만 한번 정도는 내 힘으로도 될터이니. 한번 만나보고 어떤 주에 부임시킬지 결정하기로 하지.” “알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단 내게 천거를 했고 승낙했으니 내 사람일세. 내가 원한다면 그들에게 자네의 과도한 관심을 줄여야 할것이야.” “그렇게 명령하지 않으실 것을 압니다.” 활짝 웃는 쉬첸의 얼굴이 매우 신선하다고 느끼며 체이첸은 황자의 여유답게 웃어준다. ------ 단설의 역주는 인용과 개인적 견해가 들어간 글입니다.(맹신(盟信)사양. 도용씁쓸)-------- 주 : 천거 , 비슷한 말로 추천과 소개가 있다. 셋은 미묘한 차이가 있는 듯 하다. 셋다 <중계인을 통해 서로 필요한 사람끼리 만나 일을 행한다.> 라는 것에는 벗어나지 못하지만 어떤 경우인가에 따라 중계인의 책임은 달라졌다. 소개인 경우 가벼운 뜻을 지닌다. 추천받는 사람과 추천되는 사람을 동등하게 보고 만나게 한다. 이 경우는 소개받는 입장에서 중계인에게 소개인을 부탁할수도 있었다. 중계인은 원하는 사람의 청을 받아 지인을 소개시켜주는 것으로 이후의 둘의 이해관계에 따른 책임을 지지 않았다. 추천은 소개보다는 약간 무거운 뜻으로 추천받는 사람을 중심으로 본다. 중계인은 추천받는 자를 고려해 그에 어울리는 것을 추천한다. 이 경우 꼭 사람이 아니더라도 된다. 이 경우 중계인은 자신이 추천한 모든것에 책임을 지었다. 추천받은 사람은 추천받은 모든 것에 대해 중계인에게 불만을 요구하거나 환불, 따위를 요청할수 있었다. 이 경우 성별의 구별이 없이 추천을 가능했고 사람을 추천하는 경우 중계인이 양측 둘중 하나와 연관이 있는 자로 처신에 신경썼다. 추천은 혼인관계에 잘 사용되었는데 여인을 추천하는 것은 남자의 인척이 대부분이고 남자를 추천하는 경우는 중매인이나 여인의 인척이였다. 천거는 직업적은 관계로, 어떠한 자리를 두고 그에 걸맞는 인재를 추천하는 것을 천거라 한다. 관직의 자리를 놓고 하는 것이 대부분이였으며 여인을 해당이 못되었고 관리의 자리에 오를수 있는 사내의 추천 방법이였다. 전거는 주종의 관계가 분명했다. 이 경우 천거를 받은 자는 목숨이 3개라고 했는데 하나는 자신의 목숨이요, 하나는 자신을 천거한 사람이요, 하나는 천거로 모시게 된 주인이라 했다. 이 말은 천거라는 것은 중용(重用)되는 것을 알려주는 듯 하다. 원한다면 주인을 죽일만한 위치였지만 그 일을 들킨다면 중계인까지 말려 들어가 죽임을 당했다. 그러므로 천거는 함부로 남발되지 못하는 일이였다. 천거되었다고 모두 주종관계에 들어가는 것이 아닌 주인쪽에서 그 능력이 합당치 못하다 생각하면 거절할수 있었다. 하지만 종의 관계에 있는 사람이 직접 거절하는 것은 불경에 해당되어 중계인을 통한 거절의 의미를 전달했다. 또한 천거된 사람은 전의 주인과의 관계를 끊고 새 주인과의 충성서약을 했는데 그것은 절대적인 일이였다. 또한 천거의 경우 주인은 자신의 권리에 따른 힘과 지위를 그 사람에게 부여했으며 그를 보호하는 책임도 가졌다. 새 가족을 들인다고 생각하면 쉽다. 40 혼자서 자신의 검들을 정성스럽게 손질하고 있는 조카의 뒷 모습을 본 백라는 그에게 다가갔다. 뒤에서 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 지 정성스럽게 칼만 바라보는 그 모습에 화를 내야 하는지 자리를 피해주어야 하는 것인지 종잡을수가 없어 난감하다. 자랑할 것은 그렇게 많은 놈이면서도 어째서 내 눈에는 항상 어리고 탐탁하지 않게 보이는 것일까. 천여명의 사내 중에 당당히 으뜸으로 뽑힌 선인이다. 게다가 다스리고 있는 12영도 아직까지 문제 따위는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내게는 이 아이가 항상 어리게만 보일까. 헛기침을 하자 뒤를 돌아보며 조카가 웃어보인다. 일어나 자리를 양보하는 을노에게 차를 건내며 백라가 물었다. “자휼의 수련은 잘되나?” “글쎄요. 유견님이십니다. 그리 쉽게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뜻을 넣은 웃음을 지으며 을노가 대답했다. 백라는 차를 권하고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애야. 어린 조카야.” “그 어리단 말 좀 빼주십시오. 아저씨.” “천년만년이 지나도 안 되는 일을 바라지 말고 네 생각하기엔 자휼의 아우가 살아올 것이라 생각하느냐? 넌 나보단 그들을 잘 알 것 같아서 말이야.”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못 미더운 놈. 아마도가 뭐냐 아마도가?” 백라는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왕씨가 자휼에게 아우의 일은 스스로가 해결할 수 있도록 놓아두라는 명령을 내렸던 것으로 안다. 하지만 얼마 전 자신에게 내린 명령은 계명장군의 집을 찾아 멀리서 감시하라는 것이었다. 은신처를 발각시키는 것을 염려해 목래의 공성소식조차 숨겼던 왕씨가 갑작스럽게 도성 안의 활동을 지시하는 것이였다. 이래적인 일이라 불안감이 생긴다. 원래 왕씨는 좌보인 나보다 영리한 사람이었다. 무섭도록 총명한 분. 망국의 왕족이라는 것에 힘들어 할만도 하련만 단 한번도 내색한 적이 없었다. 왕의 자리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고 살아간 왕이란 역사를 통틀어 얼마나 될 것인가. 온화할 때는 더 없이 부드럽지만 냉정할 때는 하늘이 무서울 정도로 비정해지시는 분. 그래서 왕씨였다. 그래서 따를 수밖에 없다. “좋은 쪽으로 흘러들어가야 하는데...” “시장의 도박내기라도 하셨습니까? 붕어 몰기라도?” 백라는 아무 말 없이 방실 웃는 조카의 머리를 힘껏 쥐어박았다. 모도리의 넒은 공터를 아침부터 점심나절까지 계속 달렸다. 화상으로 인해 동작이 부자연스럽기도 했지만 목래의 긴 휴식기 동안 몸이 허술해진 것은 사실이라 유견의 지적에 아무말 없이 몸을 만들고 있는 중이였다. 하지만 타버린 반신은 발을 디디는 것도 몸을 잔 고통으로 짜릿하게 만들었고 자꾸만 왼쪽으로 몸이 쏠리는 것을 이기지 못할정도였다. 스스로 화상으로 입은 타격이 얼마나 큰지를 뼈져리게 느끼고 있었다. 걷는 것이나 평시의 행동같은 것은 고통스럽긴 했지만 참을만 했는데 정식으로 무랑의 재 훈련에 들어가자 미칠정도로 힘들다. 몸을 풀어보라는 유견은 말과는 달리 반나절 이상을 뜀박질만 시키고 있었다. 추운 삭풍에 눈까지 내리는 이때지만 그것이 무색하게 땀을 흘리던 자휼은 지쳤다는 듯 땅에 주저 않았다. 딱! 예상했던 머리의 통증에 손을 올리기 조차 버겨워 인상만 써보인다. 머리위에서 유견의 목소리가 울린다. “벌써 지치다니 이런 허약한 몸으로 어떻게 큰일을 한단 말인가?! 요즘 애들이란... 쯧쯧.” 유견이 혀를 차며 방안으로 들어가 버리자 자휼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는 듯 그대로 눈 속에 누워버렸다. 지독하다 저 늙은이. 어떻게 늙으면 저렇게 될 수 있는 거냐. 나는 저리 늙고 싶지 않다. 헉헉거리는 가슴과는 달리 머리는 잘도 돌아간다. 누군가 자휼에게 손을 내밀어 일어나길 권한다. “들어가셔서 옷을 갈아 입으시고 식사를 하셔야지요.” “...그냥 자렵니다.” 모두리의 사범이라는 중년인이 고개를 저었다. “허기진 상태로 새벽수행을 견디지 못 하실 텐데요?” “새벽 수행?” 자휼이 정신이 번쩍 난다는 듯 고개를 들자 중년인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1반문을 나섰으니 오늘부터 2반문을 들어가신겁니다. 새벽수행을 하시는 거지요.” “...이...이렇게 얼마나 지내야합니까?” “보통은 24반, 12문까지 합니다. 하지만 유견님이 맡으신 분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망자의 산에 도착할 때까지 하지요.” 을노, 내가 여기서 살아 나가면 자넨 죽었어. 자휼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사범은 피식 웃음을 띤 얼굴로 그를 일으켰다. “유견님이 좀 독하시지요? 하지만 그분께서 가르침을 주신 분들은 모두들 아직까지 살아 계시답니다. 그보다 더 좋은 위로의 말은 없을 것 같군요.” “...수련 중에 죽은 사람은 없습니까?” “...그건 비밀이지요. 아무튼 유견님께서 돌아오시기 전까지 뭐라도 좀 먹읍시다.” “어디 외출하셨습니까?!” 자휼이 반갑다는 눈초리로 외쳤다. 얼마나 즐거운 소리인가. “유견님의 아우분인 유번님이 방문하셨답니다. 유번님은 저 먼 곡양의 모도리에 계신 분이지요. 그보다 두 분은 항상 차만 마시고 헤어지시니 이렇게 시간을 보내다간 옷은커녕 밥도..” 그말에 자휼은 벌떡 일어나 방으로 뛰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이 방과는 안녕이구나. 자례는 찬찬히 방안의 모든 서랍을 열어보며 아쉬운 물건들을 살펴보았다. 계명의 말대로 목래가 불타버렸다고 한다면 그곳에서 남은 것이라고는 이 방안뿐이다. 이곳을 나가려 그리 애를 썼지만 다신 볼수 없는 옛 모습에 우울해 지는 것이였다. 서랍장 하나하나 마다 걸린 붓하나 마져 아끼던 것이라 상황이 이렇지만 않다면 모두 가져가고 싶은 욕심이 든다. “ 아 그렇지.” 자례는 향로에서 술대를 뽑아내었다. 그 동안 술대는 단 한번도 향로에서 뽑힌 적이 없었다. 자휼이 없으니 누가 뽑아놓겠는가. 하지만 미련하게도 아침에 눈을 떴을때 항상 술대를 확인하게 된다. 마치 지금의 상황을 부정하고 싶은 듯, 술대가 뽑혀 향로 옆에 누워있을 것 같은 미련이 남아 스스로를 슬프게 만든다. 톡톡 털어낸 술대를 작은 주머니에 넣었다. 그런데 거문고는 어떻게 되었을까. 정말로 타버린것일까. 이젠 영영 못 보는 건가. “... 어리석었다. 현이라도 끊어 가지고 다닐 것을...” 하지만 이미 없어진 것에 대한 후회보다 하릴없는 짓은 없다 했다. 옷장을 뒤져 옷을 꺼낸다 . 어떤 것을 입어야 할지 몰라 옷장만 뒤적인다. 관복도 있고 한족의 옷도, 항상 입고 있는 정안의 옷도 다 들어있다. 그런데 무엇을 입고 여기를 나간단 말인가. 잠시 망설이다가 수가 놓여진 옷을 제치고 목래에서 평시에 저녁휴식때 입던 간단한 힌 옷을 꺼낸다. 눈에 띄일필요는 없을 것이다. 내 생김만으로도 혈족들은 나를 의심하지 않을것이다. 물어 물어 할아버지인 정륜을 찾아 가는 것이 좋겠지. 서랍을 열어 검은색의 허리띠와 흰색의 머리띠도 꺼낸다. 한 쪽 남은 귀걸이를 보자 문득 두 마리의 말이 떠오른다. 그 병사 정말로 흑염과 묵계를 풀어주었겠지. 그렇다면 지금 새 주인을 만나거나 초원을 달리고 있을 것이다. 특히나 묵계는 잡아놓고 실컷 달리게 하지 못했으니 지금쯤 저 멀리의 땅까지 가고 있을지도. 계명장군의 집에 있느라 입고 있었던 한족의 옷을 벗고 자신의 옷을 입자 가슴이 이상하게 아려온다. 더 이상 돌아갈수 없는 곳에 대한 마지막 발악인 듯 해 스스로 씁슬해진다. 머리띠를 두르고 어깨까지 길어진 머리를 정리하고는 한쪽만 남은 귀걸이를 한다. 소맷자락 끝이 바닥에 끌리지 않도록 옷을 매만져 허리띠를 두 번 돌려 매자 예전보다 길어진 끝동에 조금 말랐나싶어 얼굴을 손으로 만져본다. 그리곤 옆 탁자에 놓여진 만두를 하나 집어 입에 넣는다. 오늘 나간다. 다시 하유사에게 붙잡혀 와 스스로는 무료한, 백라의 말대로는 알찬,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던 그는 아침부터 자신을 찾아온 궁안의 밀사에게 되물었다. “15왕자가 계명의 집으로?” “예, 게다가 2왕자에게 출입패도 받은 것 같습니다.” 왕씨는 말에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밀사를 물리고 등뒤에 바느질을 하며 앉아있는 여관에게 들리는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마치 노래와 같이 흥얼거리면서. “나가는 이가 오셨던가?” “유번님이 오셨지요.” “나갈수 있는 이도 계셨던가?” “유견님이 계셨지요.” “보낼수 있는 이는 어디계신가?” “아랫층에 앉아있지요.” “여관의 바느질은 끝났을까?” “여관의 소일거리는 영구히 끝나지 못하지요.” 하류사는 미소지으며 등뒤를 바라본다. 역시 살풋한 미소를 지은 여관에게 붓과 종이를 가져다 달라 부탁하고는 짧고 간단하게 두개의 서신을 따로 적어 밀봉한 후 좌보를 부른다. 당장 달려오는 좌보를 오래간만에 앞에 앉혀놓고는 수를 쓴다. “지금 즉시 계명의 집 주위에 사는 혈족들을 대피시키고 왕성으로 연결되는 가장 작은 길에 소수의 궁수들로 매복을 해라. 하지만 성안으로 뛰어가되, 계명으로 집으로 달려가지 말라.” “예.” "시간을 알수 없는 오후, 성문 밖에서 첩시(牒矢:소식을 알리는 화살)가 보이면 그 길로 지나가는 마차를 공격해라. 하지만 마차를 안을 쫓지 말라. 그리고 지금 모도리에 있는 자휼을 불러와라." “예” 하류사는 고개를 돌렸고 그것으로 백라는 뭔가 물어보고 싶은 작은 틈을 놓치고 말았다. 결국 아무소리 없이 방을 나와 아래층으로 내려가 사람을 부르며 생각했지만 나오는 결론은 하나였다. 가장 작은 길이라니. 작은 길에서 궁수라. 15왕자를 암살하려는 것이다. 자휼을 부르는 것은 그에게 그 일을 시킬 생각인가. 하지만 전에 15왕자에게 감정이 없다고 자휼이 말하지 않았나. 그러니 그가 그를 암살하기에는... “...대피는 왜?” 백라는 고개를 갸웃하지만 왕씨를 섬기는 좌보답게 의심스러워 하면서도 왕씨의 명령을 충실하게 이행하는 것이였다. 하류사은 백라가 완전히 복도에서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여관을 통해 아래층에서 검을 소재하고 있을 을노를 불러들였다. 역시 좌보는 을노를 데리고 가지 않았기 때문에 젊은 장수는 서둘러 달려와 부복한다. 짐짓 왕씨는 매우 난처하다는 듯 침중한 목소리로 말한다. “내 유번님께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벌써 모두리의 유견님께 가셨더군. 그 분은 도성족으로 자주 들리시기 불편하시니 장군이 이 서신을 유번님께, 그리고 이 서신은 유견님께 드리게.” 을노가 재빠르게 튕겨 나가자 하류사는 기지개를 피며 일어난다. 편안한 표정으로 백라가 화원의 문을 빠져 나가는 것을 확인하고 미소지은 후 여관에게 말한다. "오늘 왕씨는 병사놀이를 즐기고 싶다는데." "여관은 왕씨가 병사놀이를 하시는 것을 싫어하지요." 하지만 회색옷자락을 들고 일어난 여관은 나갔다가 잠시후에 성안 관졸의 옷을 가지고 온다. 왕씨가 두 팔을 벌리자 그 앞에 무릎을 꿇고 허리띠를 풀러준다. "왕씨는 잠시 나가시네. 그런데 누군가 바로 고하려 여관에게 다가왔다네." "그렇습니까." "무랑은 계명장군의 집에 15왕자가 방문해 목래의 군승을 마차에 태워 왕궁 안으로 들여간다는 정보를 주었지. 여관은 왕씨에게 그 소식을 전하고 싶어할까?" "그렇군요. 잘 알아들었습니다." 여관이 왕씨의 머리를 총총하게 땋아 내린다. 별로 마음에 든다는 얼굴은 아니지만 끝을 붉은 종이로 단단히 엮어 묶는다. 관복을 다 입은 왕씨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면서 뒤로 물러난다. 나가려는 왕씨를 배웅하며 여관은 묻는다. "나가신 왕씨는 어디로 가실까요?" “뭐, 오래간만에 현을 들으러 갈까나.” 등을 돌리는 왕씨에게 여관은 깊게 허리를 숙이며 배웅한다. “편히 다녀오십시오” 회색 비단의 등을 바라보던 왕씨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화원을 빠져나온다. 오늘은 바쁜 하루가 될 것이다. 그대로 조금 떨어진 남문쪽의 술집으로 들어가자 병졸로 행세하며 사귀었던 병졸들이 반색하며 그를 맞이한다. “어디갔다 온건가!” “도둑놈 같으니라구, 이러고도 봉급을 받을 생각인가? 하하하!” “자네는 배짱도 좋단 말이야, 이렇게 많은 날을 공치고서도 당당히 관복을 입고 있구만?” “하하, 엄한 할아버지 밑에서 꼼짝없이 갇혀 있었다네.” 호기롭게 웃은 하류사는 술을 산다. 공 술에 모인 그들과 몇잔을 걸치던 하류사는 마침 생각났다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앗차,요즘 방화범이 돌고 있다던데 말이야?” “그래. 아마도 유적의 잔당이 아닐까 생각되는데 벌써 포목 상가가 둘이나 털리고 불타버렸다네.” “전에 없었던 방화라 모두들 긴장하고 있다네. 그러니 자네도 꼬박 꼬박 얼굴좀 내밀게나.” 하류사는 싱긋 웃어보였다. “정말로 갑자기 방화범이 나타나다니 이거 무서워서 관복을 입고 다니겠나?” “이 사람, 웃기지 말게!” “그런데 말이야...” 짐짓 궁금하다는 듯,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얼굴로 묻는다. “최근에 화적으로 인해 피해를 보았다는 곳도 있던데... 어디더라...?” “나 알고 있다네. 내 친구녀석 하나가 이번에 목...목...목주던가? 아무튼 그쪽으로 갔다 왔거든.” “그런가? 무슨 일이 생겼다던가?” 장단을 맞추어 주자 자신만이 알고 있는 사실에 그는 우쭐하며 자랑스럽게 설명한다. “그 목주성에 유적무리가 들어와 성을 장악한 모양이야. 때마침 외출한 왕자를 호위하던 그놈이 들어있던 부대가 그곳을 지나친것이지. 왕자 전하는 그 모습을 보시고 목주를 도우라 명령하셨고 그들은 성안의 화적 무리와 한바탕 했다더군. ” “그래서?” “아 그런데 이놈의 화적때가 백기를 들었다고 하지 않나? 그래서 왕자 전하와 그...그 고군장군인가? 아무튼 장군과 성안으로 들어갔다가 큰일이 날뻔했다는 군! 이놈들이 거짓 항복을 하고 두분을 인질 삼으려 했다는 것이야!” “저런! 그래서 왕자 전하는 어찌 되었나?” “허허, 조용히 해보게. 그러나 한족의 명문가인 고군장군은 용맹하게 왕자 전하를 모시고 불타오르는 성안을 빠져 나오셨다지. 성은 전멸이라던가? 몇몇 여인들이 살아남았는데 고군 장군은 여인들을 품지 않고 왕자전하에게 바쳤다고 하는군. 역시 명문의 한족의 피가 아니겠는가!” “암, 그렇고 말고!” “여진인이 득세한다고 하나 언젠가 한족이 다시 일어날 것이야!” 얼큰하게 취한 한족의 병사들이 서로 동조하자 같이 웃어주었던 하유사는 한가지 질문을 한다. “혹시 그럼 이번 방화범은 목주에서 온 화적의 잔당이 아닐까?” 그말에 모두들 숨을 죽인다. 그럴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혹시 고군 장군이나 왕자전하를 노리고 있는 것을 아닐까? 이미 술과 이야기에 취한 그들은 대단한 사실을 알아챈 것 마냥 , 그 위기감을 혼자만이 아는 것 마냥, 흥분하여 모두들 일어선다. 모두들 한족의 영웅을 지켜야 한다는 영웅심리에 들떠 장군들이 모여사는 골목으로 우르르 몰려가기로 결정한다. 잠시 화장실을 간다는 핑계로 빠진 하류사는 잠시 후 다시 돌아왔을때 거나하게 취해 골아 떨어진 병사외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음을 알고 혼자서 술잔을 비운다. 싸구려 곡주라 인상을 쓰게 지은다. 한족은 간단하게 움직일수 있어 보람 따위는 기대하기 힘들단 말이야. ------ 단설의 역주는 인용과 개인적 견해가 들어간 글입니다.(맹신(盟信)사양. 도용씁쓸)-------- 주: 고구려의 검술. 고구려의 검법 이름은 장백검법이라 하는 무예이다. (참고로 신라는 현존 하는 최고의 검술인 본국검도, 백제는 백제신검이라 한다.) 장백산맥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백두산을 안고 있는 산맥으로써 옛날 많은 인재들이 입산 수도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동양 무술의 총 발상지라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고구려의 강력한 국가를 형성하는데 무술연마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고구려 시대에 수많은 외침을 막은 전공도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한 장백산맥 일대에서였으며 지형적으로 무사들의 총 집결지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고구려 장수 밀우(密友)도 장백검의 일인자였으며, 장백검이라는 이름이 지금까지 전하여지고 있는 점으로 보아 그때의 검술의 수준이 어느 정도였는가는 짐작하고도 남는다.백두산석 마도진(白頭山石 魔刀盡)이라는 시에서 느껴지듯이 장백산과 검술인과의 인과 관계는 깊었으며 남이(南怡)장군의 그 기개는 장백산과 그맥을 같이 하고 있음직하다. (퍼옴, 전에 따로 스크렙해둔 것이 어디에 있는지 알수가없다.;) 41 언제나처럼 출궁을 하고 맡은 손쉽게 분량의 일지를 채운다. 평시 대기에는 장수들의 문서 일은 그다지 많은 분량이 아니기에 쉽게 처리할 수 있었다. 점심을 먹고 출궁을 하여 다섯시간 정도 일지를 채운 후 집으로 돌아온다. 오늘도 변함없는 하루를 보내는 중 어느 정도예상했던 일이 터진다. 15왕자가 자신의 집을 방문하고 싶다는 내용의 서신이였다. 계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공성을 한 것을 알고있으니 자세한 내막을 듣고 싶다는 서신이였다. 내일 정도 모시겠다 말하고 자세한 내용을 적은 서실을 환관을 들려 보낸다. 바삐 돌아가는 환관의 모습을 보며 약간 불안한 예감이 든다. 자례는 왕자에게 사실대로 고하고 스스로 죄를 받아 지방성으로 내려가 힘을 키워야 한다고 했다. 그 말이 현실로 이루어 지고 있다. 그렇다면 역시 지방으로 내려가는 것은 불가결한 문제군. 괜히 태수를 죽였나. 그냥 살려 둘 것 그랬나. 아니, 그랬다가는 더 큰 일이 났을 지도 모른다. 영웅을 얻기는 어렵다. 얻었다면 응당 그에 반하는 손해도 감해야 하는 것이겠지. 후회는 안한다. 왕자를 맞이할 준비 때문에 평소보다 일찍 퇴궁하자 집에서도 새로운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것도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첫 아이를 가진 첩이 친정으로 돌아가 아이를 낳고 싶다는 것이였다. 계명은 쉽게 고개를 끄덕였고 왕자의 일로 복잡스러워지기 전에 가보는 것이 좋겠다 생각했다. 조금 늦은 저녁이였지만 친정으로 보냈고 남은 가신들에게 왕자를 맞을 준비를 시켰다. 평소 보다 늦은 저녁을 먹다 문득 뒷채의 그가 떠오른다. 잠시 창을 열어 불이 켜진 그곳을 확인해본다. 아직도 생각중인가. 무슨 말이 나올지 궁금하게 만든다. 사실 말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그는 정공법으로도 얼마든지 왕실을 무너뜨릴수 있을 것 같다. 비책보다는 정공법에 강한 느낌이다. 아니, 길게 살지 못할 사람이니 큰 것을 바라는 것이 좋은가.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고개를 흔들고 만다. 사나이는 초지 일관. 바람부는대로 휩쓸리는 사내는 큰일을 이루지 못하는 법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옷과 집안 청소등을 바라보았던 계명은 물끄럼 하늘을 바라보았다. 정오가 다 되어 간다. 왕자를 점심에 초대했으니 두시간 정도 남았다. 시종 아이 하나가 계명에게 조르르 달려와 무엇인가 말한다. “뭐? 지금?” 계명은 이상하다는 듯 되물었다. 이제까지 생각했던 그가 갑자기 오늘에 와서 계책을 말해준다니. 하지만 왕자가 올때까지 시간을 충분하다. “곧 간다 하거라!” 계명은 서랍에서 단검을 꺼냈다. 차캉하는 소리가 울리며 잘 갈린 날이 보인다. 소리도 나지 않게 끝낼 수 있다. 간단한 일이지. 단지 날짜가 문제다. 왕자가 오는 이날에 ...계명은 잠시 이것이 계책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보았지만 오늘 이야기해서 그에게도 나에게도 좋을 것도, 나쁠 것이 없었다. 계명은 서둘러 뒤채로 들어갔다. 그가 간만에 방안에 향을 피웠는지 풍요한 침향이 후당을 울린다. “부르셨소?” “오늘 생각해 온 그것을 일러 드리려고 합니다.” 계명은 맞은 탁자에 앉으며 자례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옷을 갈아입었군. 살구색 동정이 잘 어울린다. 여인이나 쓸만한 색인데도 하얀 피부 때문인지 그 색이 조화롭다. 귀걸이와 검은 머리가 하나로 움직인다. 찻잔을 가지러 가는 걸음걸음마다 가느다랗게 흔들리는 허리가 위태할 정도로 얇아 보여 손으로 잡아줘야 할 것 같다. 그거 참 정안족의 복식이란 이해할 수 없군. 어째서 사내들의 허리에 포를 세 겹으로 묶어 굵고 강하게 보이지 않는지 모르겠어. 저렇게 입는다면 계집과 사내의 구분이 힘들지 않은가. 머리까지 여인이고 사내고 같은 시기에 한꺼번에 올리고 내리는 주제에. “내가 한잔 드리죠.” “...” 자례가 차를 따라 잔을 그에게 밀었다. 계명이 차를 받자 자신도 한잔 따라 손이 보이지 않는 옷자락 사이로 받쳐 들었다. “장군께서 말하신 정황이 진실이라면...” 그렇긴 하지만 사람을 아름답게 보이게 하는 복장인 것은 분명하군. 머리띠 대신 꽃으로 치장해도 좋겠어. 포에는 새겨진 저 과일 모양의 수도 괜찮지만 붉은색 모란도 아름답겠지. “장군?” “응?” “제가 방금 무슨 말을 했는지 아십니까?” “...미안하군. 오늘 왕자가 오는 날이라 심란해서 그렇소.” 자례는 힐끗 피워둔 향을 보았다. 두개 반이 탔다. 지금은 10시가 조금 넘었다. 그렇다면 아직 조금더 시간을 끌어야 된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황제가 건제한 이 시기에 힘을 얻기 위해선 지방으로 나가 힘을 길러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아아, 미안하군. 그 다음을 말해주시게.” “그 다음은 왕자들의 세력분산입니다. 일단 2왕자와 4왕자의 두 세력이 중심이 될 텐데...” 스스로 서로가 기준하는 것을 두고 시간을 재어가며 자신의 일을 이루기 위해 때를 기다린다. 편안한 방안에 서로의 날을 세우고 이를 감추지만 누가 이길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여인들은 집에서 떡을 만들게 했고 조금이라도 큰 사내들은 밭으로 일을 하러 밭으로 나갔다. 장수들과 그에 못지않은 장정들을 모두 말에 태워 도성 밖으로 급히 나가게 했다. 힘이 있거나 능력 있어 보이는 자들은 모두 나간 것이다. 이 것을 평시의 ‘대피‘라고 한다. 그 일이 일사천리로 잘 풀려 나가는 것을 확인한 백라는 짙푸른 옷으로 갈아입은 궁수들과 왕성으로 향하는 가장 작은 길에 매복한다. “수가 적은데 괜찮을까요?” “괜찮아. 어차피 작은 길의 매복은 수가 많을수록 힘들다. 어디 그럼 나중에 도주할 곳을 살펴보러 갈까.” 백라는 입김을 내뿜으며 작은 길 안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번쩍거리며 나무 위쪽으로 화살촉이 빛을 날린다. 그 것을 지적하나 실은 그보다 마음 쓰이는 곳이 많아 편치 못하다. 이쪽의 일에 손을 떌수가 없었음으로 자휼을 부르는 명령엔 마유장군을 보낸터였다. 자휼을 직접 만난다면 이 일에 대해 넌지시 경계심을 줄수도 있건만. 하지만 자휼은 생각보다 영리하고 냉정하다. 감정에 쏠려 일을 크게 만들지는 않을것이다. 백라는 애써 모도리쪽의 생각을 지웠다. 원래 유견을 두려워 하는 것이 아닌 듯 있어 모도리에 출입이 드문 을노가 다시 들어왔을 때 모두들 이상하게 생각했다. 갑작스럽게 들어온 을노는 각각의 노인에게 왕씨의 서신을 전달했고, 공손히 부복하며 서신을 받쳐 든 그들은 자신의 것을 풀어 보았다. 한참 동안 서신을 되뇌고 있던 유견과 유번은 동시에 자리에 일어났다. “을노 장군은 날 따라 움직이시오.” 유견이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아차, 하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일단 유견을 따라 을노가 몸을 움직였다. 유번은 바로 일어나 밖으로 나가며 모도리에 있는 활을 하나 챙겨갔다. 그 모습에 을노는 유견에게 다가가 말했다. “서신의 내용이 무엇인데 유번님께서 활을...” “왕씨가 내린 서신의 내용을 감히 말해드릴까?” “..그건 아니지만.” “장군은 날 도와 이곳이 짐을 추리고 도성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만곡이라는 산으로 갈 것이오.” “예? 만곡이라 하심은...” “알어, 알어! 위험한 곳이니 날 호위하는 거요. 어서 짐이나 챙기라니까!” 유견의 신경질에 을노는 급히 짐을 챙기면서도 어리둥절 하는 것이었다. 얼마 챙기지도 않는 유견과 을노는 둘다 모두리의 마차를 끌고 나왔다. 유번은 성문길에 마차를 세우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성문을 지나치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유견과 을노는 그대로 성문을 빠져나왔다. 마차를 몰며 을노는 성을 빠져나가는 혈족 몇몇을 보고 그 의아함이 더 커지는 것을 느꼈다. 왕씨께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 헉헉거리며 마당을 돌고 있던 자휼이 마유의 등장에 걸음을 멈추었다. 빨리 뛰어온 듯 마유는 땀을 흘리며 자휼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무슨 일일까. 아까 두 노인네가 을노와 함께 나가던데. 텅빈 모도리에 무슨 일로 상장군이 오신걸까. “여기까지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마유장군.” “어서 왕씨를 뵈올 준비를 하게. 지금 당장.” “예?” “나도 좌보님의 명령을 받들고 이곳에 자네를 부르러 온것일게. 나머지는 나도 모르는 일이니 자네가 가서 스스로 알아보게나.” 자휼은 서둘러 한족의 옷을 걸친다. 마유는 흑염을 달래 마당으로 끌고 나온다. 보아하니, 모도리에서 나가는 것이군. 하지만 이것을 좋아해야 하는 것인지 아쉬워해야 하는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그 힘든 수련에서 벗어나는 것은 좋은데 이대로 가려니 포기하는 것 같고... “저 마유 장군. 아무래도 전 여기서...” “누가 자네 보러 수련을 그만두라 했는가? 잠시 왕씨를 만나려는 것이야.” “...” 좋다 말았다. 마음이 두근거리는 것을 어쩔수가 없는 것이였다. 쉬첸은 애써 근엄한 표정을 지으려고 했지만 벌써부터 요란한 심장소리에 정신이 없었고 머릿속에는 다시 만나면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2왕자에게 자신을 천거한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것인지 주체할수 없는 질문들이 날아다닌다. 아니지. 건강할까. 목래의 공성으로 어디 다친곳은 없을까. 자휼은 무사할까. 살아있는 것은 자례겠지. 그렇다면 자휼은 죽은 것일까. 그 마음 약한 그놈 얼마나 힘들어 하고 있을까. 내가 가면 위로가 되어 줄수 있을까. 아니지. 자휼이 죽었다면... 혹시 내게 기대주지 않을까. 하지만 바로 자조적인 미소가 지어진다. 그럴 리가 없다. 어떤 형제들이였는데. 아마도 자휼도 살아있을 것이다. 그래서 자례도 살아있는 것이겠지. 어떤 일이 있어도 내게 기대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그의 것이니까.” 자휼이 자례의 것이든. 자례가 자휼의 것이든. 피는 물보다 진해서 타인인 나로써는 감히 끼어들 여지도 없는 형제들이니까. 그리고 그것이 너무나 서글픈 현실이니까. 품안에 2왕자가 내어준 추천패가 무거워진다. 그랬지. 내가 나가서 널 왕성으로까지 데리고 올수 있다하지만 나의 힘으로는 널 책임질수 있지 못하다. “...2왕자를 믿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자례, 네 스스로 그에게서 빠져나와 자유를 찾길 바래야 하는 것일까. 내가 하는 짓이 어쩌면 널 더욱 힘들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의도는 선하다 하더라도 결과는 그렇지 않는 일이 얼마나 많단 말인가. 하지만 아무것도 안해주고 떠나보낸다는 것 역시 후회될 일이야. 어찌되었건 내 손에서 널 보호할 수는 없을 것 같아 마음이 쓰리다. 조금 더 힘이 있었다면 이런 고민 따위는 하지 않았을까? 내 평생 힘을 원하는 태진을 이상하게 여겨왔는데 이렇게 간절하게 힘을 원하게 되다니, 정말 모를일이야. 마차를 모는 이가 거의 다 왔다고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를 듣자 방금 전까지 생각했던 모든 것이 날아가 버리고 또 다시 가슴이 두근 거린다. 새 장난감을 받은 어린 아이처럼. 처음으로 머리에 꽃을 달아본 소녀처럼 두근거리는 가슴에 모든 근심이 날아가버린다. “제 생각은 여기까지입니다.” “그렇군.” 다시 한번 죽이기엔 너무 아까운 책사를 바라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수 없는 눈동자가 가만히 자신이 찾잔을 바라보고 있다. 그 안에 삶의 진리라도 들어있는 듯 조용히 풀의 피를 우려낸 그것을 노려본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정말로 나가고 싶은가? 이대로 여기에 머문다면 내 자네를 중히 여길 텐데...” “..후후후.” “?” “한족은 어찌 그리 속이 무섭단 말입니까.” 천천히 아닌 듯 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계명에게서 점점 멀어진다. 적당한 거리만큼 벌어지고는 계명을 빤히 바라본다. 믿지 않는 다는 눈길이 닿는 곳에 넣어둔 단검이 자신이 몸을 찌르는 착각에 움찔한다. “이제 제가 당신께 받아야 하는 것이 있는 것이군요?” “...자넬 회유하고 싶었지.” 알고 있다면 더 이상 어떤 말도 시간만 죽이는 꼴이 된다. 계명은 품에서 검을 꺼내들고 한발 다가선다. “하지만 다시 한번 말해볼까. 정말로 내게 남을 생각이 없는가?” “책사란 간약해서 군주의 약점을 잡아 움직이는 법입니다. 약점을 잡힌 군주는 현명하지 못하는 법. 장군은 이미 내게 많은 약점을 보이셨소.” “내 정말로 회유하고 싶었다!” 검을 빼들고 그에게 다가가자 그 역시 천천히 움직여 창가로 다가가 향로를 바라본다. 무심코 보는 그 시선에 자신도 향로에 시선이 간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아무렇지 않은 듯 조용히 속삭이는 말이 더욱 그 심중을 알기 어렵게 만든다. “향이 다 탔군.” “...도망가지 않을 생각인가?” “도망? 장군은 지금 날 이런 좁은 새장에 가두어 놓고 날갯짓을 해보란 말이요?” 자례는 하늘을 보며 실소하더니 서랍을 열었다. 작은 단도. 풀느 날이 잘 서있는 단도다. 이상하군. 서랍을 다 뒤져보았는줄 알았는데 저런 단도가 아직 남아있었나. “...무기는 버렸는 줄 알았는데.” “장군의 시종들이 꽤나 용해서 이것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더군요.” “그럼 나와 싸워 보기라도 하겠는가? 그 가느다란 팔로 무엇을 해보겠다는 것이지?” 어깨를 으쓱이는 계명을 보며 자례는 웃었다. “잊으셨소? 당신이 다시 가져간 장군검은 내 것이오.” “그랬지. 탁상공론을 하는 글쟁이가 아니었다는 것을 내 깜박했군. 하지만 너 따위가 날 어찌 하기는 무리다.” “날갯짓은 못해도 할퀼 수는 있겠지요.” 계명은 갑작스럽게 탁자를 뒤엎었다. 몸을 돌려 재빠르게 그를 벽으로 몰았지만 생긴 것과는 달리 강단이 있어 기합으로는 쉽사리 몰려지지가 않는다. 소리한번 크게 치면 울어버릴것같은 모습이지만 속에는 눈이 퍼런 호랑이가 들어있는가. 쉽사리 잡지 못하는 사냥감보다 즐거운 것이 또 어디있겠는가. 호탕한 웃음마저 나온다. “내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죽이기 아까운 놈이로다!” “장군에게 그런 말을 들어도 기분 좋지 않소!” 아슬아슬하게 목을 스쳐 지나간 계명의 검을 밀치며 자례가 외친다. 사람을 불려 잡게 하면 일이 수월해질 텐데. 이야기가 이야기인지라 모든 사람을 물리친 후였다. 그 생각을 눈치 챘는지 자례가 피식 웃었다. “이제 아셨소? 그럴 때는 심복을 부르는 것이라오. 그래서 심복이요. 아니라면 장군께서 스스로 너무 뛰어나 심복 따위 없을지도 모르지." “네 이놈!” 계명이 다시 한번 칼을 휘둘렸다. 역시 아슬아슬하게 피해버리는 자례를 보며 계명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너는 어째서 공격하지 않느냐?” “...중요한 손님을 맞을 분의 복장을 더럽히긴 아쉽지.” “...?!” “그리고 내 실력으론 장군에게 상처는 입혀도 이길 정도는 안 된답니다.” “이...!” 화가 난 계명이 옆의 화병을 자례의 어깨를 향해 던졌다. 난대없이 화병이 날아올줄은 생각도 못했는지 정통으로 맞아 억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손을 댄 어깨에 금방 붉은 기운이 비친다. 계명은 자례에게 다가와 팔을 꺽고 머리카락을 움켜쥐어 고개를 숙이게 한다. 하얀 목이 길게 아래로 늘여진다. “내 기억하기론 내가 입힌 상처가 여기 아니었소? 아직 상처가 벌어져 있을 텐데?!” “...이...” “아프시겠지. 걱정 마시오. 곧 편하게 해드리지!” 계명이 휘장을 하나 때어내기 위해 휘장을 손에 감아 당겼다. 단검에 휘장을 감아 자신에게 피가 튀기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휘장이 단단히 밖혀 쉽사리 되지 않는다. "익! 왜 안떨어져?!" “장군님! 장군님! 여기 계십니까?” “...뭐냐?!” 계명이 신경질적으로 외치자 알달한 목소리의 시종이 외쳤다. “전하께서 오셔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조금만 기다려라!” “하지만 화를 내고 계십니다! 어서 불러오라 하시는데요.” “...이...” 목을 살짝 찌르기만 해도 될텐데. 하지만 휘장이 없으면 필이 옷에 피가 튈테고.. 거참 시간 한번 굉장하실 때 마쳐 오시는 손님이로다. 계명은 자례의 머리를 풀었다. 손을 놓는 그 순간에도 지금 죽일까 하는 심정이 앞서지만 재빠르게 옷매무세를 고치며 방을 나간다. “방문을 걸어 잠궈!” 멀어지는 계명의 발소리를 들으며 자례는 투덜댔다. “너무 늦잖아. 누가 왕손 아니랄까봐...정말 죽을 뻔 했네.” 이마에 식은땀을 훔치며 중얼거리는 것이다. 42 마차에서 턱을 괴고 기다린지 한참만에 계명이 달려온다. 일단은 짜증났다는 표정을 지어보인 후 그의 인도에 따라 마차에서 내린다.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전하” “초대해주어 기쁘게 생각하지.”. 계명은 쉬첸은 방으로 인도해 차를 내오라 시켰다. 쉬첸은 가만히 계명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뭔가 서둘러서 온 것 같은데 무슨 일일까. 가늘게 눈을 뜨고 다시 바라보지만 무엇인가 서두른 내색이 보인다. 담담한 표정이지만 옷자락이 많이 구겨져 있는 것을 보아 달려온 것이 분명하다. 어떤 말부터 시작해야 자연스러울까. 가만히 생각하고 있는데 코를 울리는 향이 맡아진다. “...자네 이 향을 쓰나?” “예? 향이라면 누구든지 사용하는...” “아니 이건 좀 다른데?” 쉬첸이 일어나 계명의 뒤로 돌았다. 계명의 몸에서 나는 향이 아니다. 그렇다고 방안에서 울리는 향도 아니다. 이것 마치... 밖에서 불어오는 것 같은데. 쉬첸은 창을 열었다. 역시나 좀 더 짙은 향이 창문으로 들어온다. “이건 침향 아닌가? 궁중에서 사향과 침향은 황제의 어전에서만 피운다는 법도를 모르는 겐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뭔가 착각하신 것이 아닐는지요?” 계명이 벌떡 일어나 창을 닫는다. 이런 망할. 그러고 보니 그가 피우는 향이 침향이었다. 한동안 안 피워 잊고 있었다. 자리에 앉길 바라는 계명의 얼굴에 자리에 앉으면서도 무엇인가 의심스러운 내색을 한다. 침향이다. 자례가 침향을 피우지. 살아있는 것은 자례인가. 홍련호수라고 했을 때 이미 자례라는 것을 짐작하긴 했었다. 문제는 어디냐? 명색의 왕자의 신분으로 장군의 집을 이곳저곳 뒤져볼 순 없었다. 자례, 네가 알아서 나와야 할 것 같다. 아무리 내가 왕자라지만 계명정도 되는 명문가의 집을 뒤지는 것은 힘들다. 무엇보다 그는 아직 지은 죄가 없어. “이왕이면 있는 곳도 상세하게...” “예?” 고개를 젓는 쉬첸의 말이 이어지지가 않자 무척이나 불길한 예감에 휩싸인다. 설마다. 설마하니 쉬첸이 그를 찾으러 온 것은 아니겠지. 이 왕자는 모두가 죽은줄 알고 있으니 말이다. 오늘 왕자가 온 것은 마지막 공성 이야기가 듣고 싶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니 사실대로 말하고 난 지방으로 근신을 하면 되는 것이다. 아무 말이 없는 상황이 답답해 창문을 조금 열자 뒤에서 쉬첸이 놀란 목소리로 묻는다. “저기 불이라도 났나?” 정말로 쉬첸이 가리킨 곳에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맙소사. 저긴 그 놈이 있는 곳이다. 수를 쓰는 건가. 계명은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안채에서 향이라도 태우나 봅니다.” “향 안피운다고 하지 않았나?” “아랫것들이 장난을 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무튼 하인들을 보내겠습니다. 불이 났을지도 모르니.” “그렇군! 불이 났을지도 몰라. 이곳은 황성의 뒤쪽이니 불이 번지면 곤란하다. 즉시 진압해야지. 이봐라!” “그러실 필요...!” 계명이 다급하게 막았지만 쉬첸은 자신의 병사에게 불을 끄라 시켰다. 물론 정말로 불이 났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무엇보다 자신은 불 구경차 안채까지 들어갈수 있는 기회가 아니던가. 계명은 진정하려고 애를 썼다.별일 없을 것이다. 안쪽으로 가다 말겠지. 열린 창으로 가느다랗게 새어나오는 연기가 불이 난것과는 달라 왕자에게 돌아가자 말해보지만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왕자는 불쑥 나가 문을 열어본다. 하지만 빗장을 걸어버린 문은 열리지 않는다. “문을 열어보게.” 쉬첸의 말에 계명은 열쇠가 없습니다라던가, 아니라면 전병병자가 살고 있다던지의 이유를 생각해본다. 하지만 쉬첸은 이유를 기다리는 법 없이 발로 문을 차버리자 파직하는 소리와 함께 나무와 비단으로 만든 문에 구멍이 뚤린다. “거기 안에 누구 있나? 아, 문에 대해선 미안하이.” 호위병이 가진 검으로 빗장을 내리치고 문을 열자 한가하게 차를 마시던 방안 손님이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고개를 가볍게 숙여 인사한다. 그 모습에 환하게 웃는 쉬첸이 다가가 손을 내밀어 일으킨다. “아아! 이게 얼마만인가!” “...늦어” 반갑게 달려드는 쉬첸에게 자례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손을 내뺀다. 빤히 계명을 바라보자 열이 바싹 오른 계명은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본다. 하지만 이 상황에 어떤 수를 써보겠는가. 입가에 조롱하는 듯한 미소가 띄워진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는 쉬첸은 마냥 좋아 정원의 작은 정자로 나가 자례를 앉혔다. 한가롭게 이런 저런 사담이 오고 가는 왕자와 자례를 보며 계명은 황을 왕자에게 이 상황을 해명할 이유를 필사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묘수는 없다. 저놈 일부러 기다렸던 것이다. 어떤 방법인지는 모르지만 왕자가 이리로 오도록 유도했던 것이 분명하다. 어떤지 들어와 얌전하다고 생각했더니 나갈 방법을 구사하고 있던 것이였나. 게다가 오늘 이라니. 혹시 날 죽여볼 생각인 것이냐? 하지만 그리 호락 호락 당할 것 같은가. 불같은 시선으로 쉬첸의 등뒤로 자신을 넘겨보는 어린 아이의 시선을 맞부딪친다. 뜨겁다. 누군가, 어느 쪽은 반드시 없어져야 하는 마지막 싸움인가. 이런 중요한 싸움에 장군이라는 나는 하나의 아군도 쓰지 못하고 고작 책사인 저놈은 거대한 방패막이를 가지고 날 농락하려 든다. 하지만 막상 쉬첸은 계명과 자례의 신경전을 못 느끼는 듯 마냥 반가워하자 계명과의 눈싸움에 지친 자례가 헛기침을 한다. 어차피 중요 패는 이쪽이 아니던가. 왕자가 어떻게 나오는 가에 따라 지칠때로 지친 이 싸움이 끝나게 된다. “흠!” “응?” “으흠!” “응?” 이 왕자는 바보라고 생각했지만 정말 바보인가. 지금 날 보고 웃을 때가 아니야. 아니, 왜 웃는데? 이 일에 대해 계명에게 해명을 바래야지. 뻔하게 당신에게 거짓말을 했으니 왕족 우롱죄 죽이란 말이다. 그게 안되면 날 죽이려고 했으니 살인죄를 적용하던지 아무튼! 아무리 기다려도 바보같은 웃음만을 짓는 쉬첸을 보고는 신경질을 부리며 쉬첸에게서 떨어져 앉고는 보란 듯이 계명을 바라본다. 그제야 쉬첸은 계명에게 말했다. “장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내 목래에 가본일이 있어 알고 있네. 이 자는 목래 책사야. 살아있는데 왜 죽었다고 했는가?” 자례는 쓰러지고 싶었다. 정말 바보 왕자 같으니라구, 왕손을 우롱한 죄로 참수해야 앞으로 내가 편이 움직일 수 있단 말이다! 내가 뭣하러 좁은 방에서 술래잡기를 했는데, 지금 당장 이 놈의 반역죄라도 말해줄까?! 이 놈이 실은 당신네 왕가를 몰살하고 역적을 해보려는 것을 말해줄까? 하지만 자례의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쉬첸이 전혀 딴소리만 하자 자례는 할 수 없다는 듯 잠시 생각하더니 계명을 대신해 말했다. 간단하게 죽이려면 반역을 도모한 것을 말하면 되지만 지금 반역죄를 걸고 넘어가면 난 또 다시 황성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럼 일이 더 복잡해지지. 여기서 나가는 것도 이리 힘든데 궁은 얼마나 어려울까. 그렇다면 다른 방법을 쓰자. “실은 전하. 전하가 가시고 얼마 안가 14왕자에게 목래가 공성이 되었습니다. 이유도, 원인도 모르는 것으로 말입니다. 공성 후 저 역시 죽을 입장이었으나 다행이 계명장군께서 도와주시어 이렇게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아아 그렇다면 내가 큰 오해를 하고 있었나 보군.” 오해는 무슨 오해인가. 이 바보 왕자같으니라구. 정말 눈치코치 하나 없구나. 허탈한 표정을 숨기기 위해 자례는 고개를 돌렸고 계명은 계명 나름대로 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애를 쓴다. 왜 그가 날 보호하는 거지? 그는 날 죽여야 하는 입장인데. 아마도 오늘 내게 비책을 말해준 것은 왕자에게 내가 역적모의를 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날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였던가? 그냥 오해인가. 그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가? 그럴 리가 없다. 그는 책사다. 책사란 간악해 주인의 약점을 잡아 움직이는 법이다. 약점은 잡혔다. 그렇다면 날 어디로 움직이게 할생각인가. “많이 말라버렸구나. 수하. 고생이 심했던 것이냐.” “그 동안 밀린 이야기를 해드리고 싶습니다. 전하.” “천천히 이야기해도 좋다. 일단 장군도 이리 앉으시오.” “아닙니다.” 계명은 어색하게 자례의 옆자리에 앉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검을 들고 서로를 죽이려 했는데 지금 나란히 앉아 대담을 해야 하다니. 계명은 혼란스러웠다. 아무렇지 않은 듯해 보이는 저 어린 얼굴은 무엇을 생각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제가 차를 내오겠습니다.” 계명은 핑계를 대고 자리를 빠져나왔다. 작은 방에 홀로 들어가 서성이며 이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애를 썼다. 분명한 것은 저놈이 왕자를 이곳으로 이끈 거야. 어떤 방법을 썼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거야. 그래서 아침에 향을 피우고 창문을 열었던 것이다. 이상한 것은 왕자가 오면 자신을 빼내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저 놈과 왕자는 친분이 있었던 것 같군. 빌어먹을! 놈은 어차피 이곳을 빠져나갈수 있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어! -책사란 간약해서 군주의 약점을 잡아 움직이는 법입니다. 약점을 잡힌 군주는 현명하지 못하는 법. 장군은 이미 내게 많은 약점을 보이셨소. “제기랄!” 계명은 책상을 내리쳤다. 그 말을 했을 때 알아차렸어야 하는데! 아침에 나올때 그때 목을 그었어야 했다. 한 순간의 결정이 얼마나 많은 것을 좌지우지하는지 난생 처음으로 느낀다. 그래 네놈이 날 죽여야 하겠다는 것이겠다. 하지만 아직도 네 놈이 내 손에 있다는 것을 모른단 말이냐! 아직은 내가 널 기르는 것을 모른단 말이냐! “요는 여기서 나가기 전에 죽이면 되는 것이다. 당연한 것이 아니던가.” 그는 가슴병을 앓고 있었다. 전쟁과 타지의 생활에 힘들어 피를 토하고 죽는 것도 좋겠지. 계명은 서랍 속에 숨겨둔 상자를 꺼냈다. 계명은 시종에게 차를 가져오라 했다. 이상하다 생각했다. 항상 문 앞에서 왕씨의 출입을 감시하던 백라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평소보다 한가해 보이는 화원을 지나 윗층으로 올라가도 아무도 없는 조용한 분위기가 계속된다. 일단 왕씨의 문앞에서 무릎을 숙이고 고한다. “자휼입니다. 부르심을 받고...” “자휼 장군님? 전하께서는 외출하셨습니다.” 안에서 여관의 목소리가 들린다. 문이 살짝 열리며 여관이 고개를 내민다. 왕씨의 책상을 정리하고 있었던 듯 안으로 보이는 방안은 약간 부산스럽다. “마유 장군께서 왕씨의 부름을 전달하셨습니다만... 제가 늦은 것입니까?” “예. 방금 전의 일이라...아까도 중요한 이야기를 들고 온 무랑도 돌아가야 했답니다.” 여관은 옷자락을 들고 나와 방문을 닫았다. 차분하게 앉아 마주 앉아 이야기한다. 그 단아한 모습에 스스로 경외심이 들어 약간 물러난다. “장군 자휼. 왕씨를 찾아 봐주시겠습니까?” “제가 그리해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제가 부탁드리는 것이니까요. 왕씨께 말을 전달해 주십시오. 15왕자가 계명의 집에 들어가 혈족을 궁으로 데리고 간다라고.” “...!” 고개가 번쩍 들려진다. 방금 뭐라고 했지? 이상하게 가슴이 뛴다. “기루는 이미 찾아보았답니다. 아마도 강가에...장군?” “죄송합니다!” 자휼은 벌떡 일어나 여관에게 인사하는 둥 마는둥 하고는 등을 돌렸다. 서둘러 방을 내려가는 자휼을 보며 여관은 잠시 시선을 내리깔았다가 눈을 감았다. 재빠르게 방을 나와 마구간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는 흑염을 불렸다. 도성에서 말을 타면 안 된다는 것은 알지만 절뚝거리는 자신의 걸음으론 제 시간에 계명의 집에 닿기는 힘들었다. “어서 가자!” 흑염은 오래간만에 달린다는 것이 좋은지, 안달한 주인의 마음을 안 것인지 홰를 치고는 마구 달리기 시작했다. 쉬첸은 창 너머의 정원을 바라보는 자례에게 말을 걸었다. 시선을 마주치지 않는다. “목래의 이야기는...” “전하.” 자례가 몹시 슬프다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괜찮으시면 목래의 이야기를 떠올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가...” 상처를 건드렸나 하는 심정에 쉬첸이 힐끗 자례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많이 말라 보이는 얼굴. 고생이 심했구...? “뭐야! 아무렇지도 않다는 그 태연한 표정은?!” “누가 슬프다고 했습니까? 생각하기 귀찮은 거라고요.” 자례는 피곤하다는 듯 미간에 손가락을 짚으며 중얼거렸다. “여기 와서 한 일이라곤 생각하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또 목래를 떠올리라고요? 제 머리가 터지는 것을 보고 싶으십니까? 지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목래까지 떠올릴 겨를이 없단 말입니다. 나중에 말씀드릴 테니 지금은 좀 쉬게 해주세요.” “...” “왜 그러십니까?” “그 사나운 성격도 하나도 변하지 않았군. 난 기뻐!” 덥썩 안아오는 쉬첸을 밀쳐버릴까 하다가 어쨌든 내가 이용한 것도 있다고 생각한 자례는 토닥토닥 형이 자신을 그렇게 해주듯 왕자를 다독였다. 쉬첸이 떠오른 것이 있는지 황급히 고개를 들고 말했다. “그렇지, 너에게 해야할말이 있다.” “복잡한 이야기라면 잠시 후에 듣고 싶습니다.” “별로.” 그러자 자례가 고개를 돌려 자신을 마주본다. 얼마만인가 이 얼굴을 보는 것이. 말랐짐나 예전의 그 신경질적인 표정이 그대로 남아있다. 빤히 그 얼굴을 감상하고 있자 스 사나운 표정이 더더욱 사나워 진다. 아차 하는 그 순간 기다리기 지쳤다는 듯 휙 고개를 돌려버린다. “아아, 미안 미안. 잠시 딴생각을 했다.” “왕자께서는 저를 놀리시고 있군요.” “설마. 난 단지 2왕자전하에게 널 천거했다는 말을...” “뭐라고요!” 고개를 확 돌리며 벌떡 일어나 자신을 노려본다. 그 반응에 놀라 쉬첸은 뒤로 물러난다. 불쑥 쉬첸을 따라 앞으로 몸을 내민 자례는 날카롭게 외친다. “왜 날 천거했습니까? 누가 천거해달라 부탁했습니까?!” “잠깐, 그렇게 크게 반응할 일이 아니잖아!” 쉬첸은 자례의 두 손을 잡아 다시 앉게했다. 씩씩거리는 자례도 시선을 돌리더니 감정을 추스린다. 진정되었다고 느낄 때 쉬첸이 조용하게 말했다. “나 사실 목래의 일이 어찌 된것인지 자세히 알진 못해. 하지만 아무래도 내가 아는 형제가 벌인 일인 것 같더군.” “...태진 왕자와 아는 사이십니까?” “그래. 내가 좋아하는 형제지. 그 놈은 나와는 달라. 4왕자의 권력을 등에 업은 놈이니까. 아무튼 그놈에게서 널 때어 놓기 위해선 더 큰 힘을 네 등에 업게 할 수밖에 없었다. 난 네가 아니라서 이런 단순한 방법밖에 몰라.” “...전하.” “원하지 않는다면...네 힘으로 2왕자의 밑을 빠져나와라.” 진솔하게 미안한 표정을 짓는 쉬첸의 얼굴을 보자 마음이 풀리면서 미안하다는 느낌이 든다. “신경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속이 좁아 전하의 심중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미안하다. 난 그다지 강하지 않아.” “아닙니다. 전하는 충분히 강하십니다. 절 구해주셨으니까요.” “그래? 도움이 되었다니 기쁘구나.” 하하거리며 웃는 쉬첸에게 화를 낼수도 없어 자례도 살짝 미소지어 보인다. 장수는 스스로 설수 있지만 글쟁이는 혼자 설수 없는 존재이다. 장수의 천거는 높은 이상을 꿈꾸게 하지만 글쟁이의 천거는 속박을 의미한다. 더군다나 형의 책사로 남길 원하는 욕심을 가진 자신에게 천거라는 것은 억지로 떨쳐 놓겠다는 것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스스로 빠져나올수 있다. 어떤 어느 상황이서든지 나는 빠져나올 수 있다. 자신을 스스로 믿으면서도 천거했다는 소리에 놀라는 자신에게 혀를 차며 자례는 진실하게 쉬첸에게 사과했다. 스스로 빠져나올수 있다. 무엇보다 황성으로 안가면 되지 않겠는가. 태진이 나를 노리고 있다 하지만 황성으로 들어가지 않고 이대로 형을 찾아 은신하면 별 다른 일은 없을 것이다. 자신에게는 좋은 말년이 되겠지만 시간을 타는 장수인 형에겐 몹쓸 짓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형을 놓아주고 싶은 마음 따위 없다. 생각보다 자신은 욕심쟁이인 것이다. 그렇게 형에게 상처를 입었지만 그래도 형이라는 그 사람을 끝내 놓지 못한다. 그것이 혈육이라는 끈일까. 43 “차를 가지고 왔습니다.” 계명이 다기를 내려놓고는 자리에 앉아 찻잔을 돌렸다. 계명과 자례는 둘 다 바늘 끝처럼 신경을 곤두세웠으나 정작 쉬첸이 눈치를 채지 못해 정원의 이야기나 날씨의 사소한 이야기였다. 쓸대 없는 일로 해가 지고 있어 초조한 것은 자례도 마찬가지다. 계명이 차를 다시 따랐다. 세 번째 잔이다. 보통 세 번째 잔부터 위험하지. 자례는 잔을 입에 대기만 할뿐 마시지는 않았다. 그렇게 지루한 시간이 흘렸다. 안돼. 해가 지면 문패를 보기 힘들고 그렇게 되면 혈족을 찾기 어려워. 그렇다고 이곳에서 하루를 더 보낸다는 것은 계명에게 날 죽이라는 것과 마찬가지고. 이 사내는 생각보다 단호한 타입이라 왕자가 있다 하더라도 암살 시도를 해볼인간이니. 그렇다면 내가 먼저 움직여야 하는가. “ 아 이런... 차가 다 식었군.” 자례는 벌떡 일어나 건너편의 다기에 손을 뻗었다. 긴 옷자락으로 쉬첸의 잔을 의도적으로 쓸어 엎어버린다. 달칵하는 소리가 들리며 옷을 버린 쉬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차 하는 쉬첸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어보인다. “ 아, 이런.” “저런. 새 옷을 준비할까요?” 계명이 쉬첸의 옷을 터는 틈을 타 자례는 자신의 잔과 계명의 잔을 재빨리 뒤바꾸었다. 쉬첸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면서 자례를 보챘다. “이만 일어나지?” “그럼 이 잔만 다 마시고 갈까요?” 자례가 빙긋 웃으며 계명과 바꾼 잔을 들자 계명도 웃으며 잔을 들었다. “오해가 풀려 기쁩니다. 전하.” “변방에서 고생하실 장군을 위해.” “...” 셋은 동시에 잔을 넘겼다. 쉬첸이 계명과 마지막 인사를 하자 자례는 이렇게 헤어져 아쉽다는 눈으로 계명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보였다. 마주 인사하며 바깥문으로 배웅하던 계명은 자례을 살폈다. 영리한 놈 같으니라고. 잔을 바꾸는 것을 못 볼 줄 알았나? 하지만 네 잔에는 독이 없었다. 독이 들어있던 것은... “아참.” 뭔가 중요한 것을 잊었다는 듯 자례가 갑자기 등을 돌려 계명을 바라보았다. “장군. 아까 제가 잔을 쏟았을 때 장군의 잔에 이상한 것이 보여 제 잔으로 바꾸어 드릴까 싶었습... 콜록, 콜록!” 갑자기 심한 기침을 하며 몸을 숙이자 계명은 옳거니 하고 자례를 부여잡았다. 그래, 이대로 죽어버려라. 얼른 죽어. 고개숙인 목이 가늘어 손으로도 얼마든지 뿌러뜨릴수 있을 것 같다. 마침 쉬첸은 마차가 오는 것을 보는지 이곳을 안본다. 저 목을 졸라서 죽여버릴까. 하지만 조금만 기다리면 된다. 자례의 몸을 부축하며 계명이 조용하게 묻는다. 화를 숨긴 온화한 목소리로. “괜찮은가?!” “물론 괜찮지요.” 거짓말처럼 갑자기 기침을 멈추고 싱긋 웃더니 그가 계명에게 귓속말을 속삭였다. “그런데 장군의 잔도 비어있지 않아 그냥 두었습니다.” “뭐!” “약점을 잡힌 군주는 현명하지 못하다는 말을 넘겨들으셨더군요. 그래, 숨이 가빠오시고 두근거리십니까? 저 멀리 당신이 죽인 망자들이 기다리나요? 그 안에 제 형도 포함되어 있답니까?” “네 이..!” "아니, 계명 장군이 몸이 편찮으신가 봅니다!" 자례가 크게 외치며 재빨리 계명을 밀쳤다. 계명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자례를 노려볼뿐 말을 잇지 못한다. 호흡이 거칠어지는 모습을 내려다 보는 저 어린 아이의 눈은 이미 장성한 사내의 눈빛이라 크게 실수 했다는 것을 알아버린다. 사람을 죽이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는 사내의 눈이구나. 품안에 보호하는 어린 아이가 아니야. 마지막까지 내 사람이 되지 못한 안타까움인가. 아니면 솟아 오르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함인가 무릎을 꿇고서도 마지막까지 사내의 눈을 가진 어린 아이를 노려본다. 하지만 냉정하게 그 눈을 마주치는 아이는 슬핏 미소까지 보여 오싹하게 아름답다. “장군? 왜 그러지?” 무슨 영문인지를 몰라 다가오는 왕자의 앞에 피를 토하면서도 자신을 노려보는 마지막까지 그 아이에게서 눈을 떄지 않는다. 하지만 아이는 쉬첸의 뒤를 돌아 그 모습을 숨긴다. 마지막으로 본 눈빛은 매우 사나운 호랑이의 눈이였다. 갑자기 정신을 잃은 장군은 상태가 좋지 않은 듯 시종들이 그를 부축해 들어가갔다.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쉬첸과는 달리 자신은 드디어 끝났다는 안도감이 들어 한숨을 쉰다. 그 한숨이 계명을 걱정하는 것이라 생각했던 것일까. 쉬첸이 자례에게 묻는다. "장군이 왜저러지? 아무래도 한번 들어가보는 것이 좋겠군. 수하. 먼저 마차에 올라..." "들어가면 안됩니다!" 자례는 냉큼 쉬첸의 옷자락을 부여잡았다. 지금 들어가면 당신이 계명장군을 독살했다는 의심을 받습니다. 하지만 쉬첸은 계명이 독을 마셨다는 내막을 모른다. 하지만 말해줄수도 없어. 그렇게 된다면 내가 자신을 이용했다는 것도 알것이다. 나는 상관이 없지만 이 좋은 사람은 상처를 입을테지. 말을 멈추자 자신을 보는 쉬첸의 의아한 눈동자에 자례는 순식간적으로 얼어붙었다. 어떻하지? 어떻하지? "수하?" "..." 갈색 눈동자. 그 선량한 눈빛이 지금은 고문과 같다. 난생 처음으로 사람을 속이는 것에 죄책감이 몰려들어와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들어가게 한다면 이 사람에게 누명을 씌워 죽이게 될것이다. 그는 자신을 보호할 힘도 없는 왕자인데. 그렇게 죽일수는 없어. 그리고 난 이 사람이 죽길 바라지 않아. "왜? 어디 아픈거야? 또 가슴이 답답해?" 그렇지. 난 아프지. 순간 자례가 뒤로 휘청이자 쉬첸은 아차하며 자례를 얼른 안아들었다. "수하야! 수하!" 기절했나. 쉬첸은 계명장군의 집을 한번 보고는 수하를 보았다. 당연히 수하가 먼저다. 장군은 내일 물어보면 될것이다. 별일 없겠지. 집안에서 그리 건장했는데 말이야. 앞에 온 마차에 수하를 안고 타 병사들에게 서둘러 궁으로 돌아가라 명령했다. 평소엔 위험하다 안가는 작은 길로 마차를 몰아 금세 성에 닿기 위해 달린다, 흔들리는 마차안에서 행여 머리를 부딪칠까 자신의 무릎에 머리를 올린다. 안색이 창백하나 생각보다 호흡은 차분하고 열도 그다지 심하지 않아 내심 안심한다. 졸도 정도일까. 바로 눈 앞에 그리던 사람을 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닿게 된 것은 조금 후였다. 천천히 그 사실을 곱씹어보자 또다시 어린 소년처럼 가슴이 두근거린다. 생각보다 길어진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망설여가며 뒤로 넘겨준다. 몇가닥 넘기지 않았지만 놀라 손을 치우고 만다. 자례가 눈을 뜬것이다. “수하? 너 괜찮으냐?” “형을 찾으려 가야합니다.” “뭐?” “오늘 정말 감사합니다. 마차를 세워라!” 머리를 정리한 자례는 가차없이 팔로 마차의 기둥을 친다. 그 소리를 들은 마부는 서둘러 마차를 세우고 세워진 마차에 어리둥절한 호위병들도 선다. 쉬첸이 뭐라 하기도 전에 자례는 문을 열고 마차를 나간다. 그 모습이 너무도 단호해 차마 옷자락을 잡아 세우지도 못하고 단지 소리친다. “잠깐 기다려! 어디로 갈건대?!” “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여기보다는 좋은 곳으로 가겠지요.” 허공을 보며 중얼거리던 자례가 뒤를 돌아 쉬첸은 바라보며 싱긋 웃어준다. 정말로 눈가를 풀며 웃는 미소에 쉬첸은 깜짝 놀란다. 왜 갑자기 보여주지 않았던 웃음을 짓는 것이지? 불길한 예감에 자신은 인상을 찌푸리고 만다. 화사하게 웃음을 지으며 자례가 깊게 허리를 숙인다. "오래도록 무병하시길 기원합니다." “안돼!” 자신도 모르게 소리치고 만다. 놀란 표정을 짓기도 전에 떠나가려는 이의 어깨를 부여잡고 외친다. 스스로 삭히고 있는 마음속의 진실을 외치고 만다. 내 곁에 머물러 주오. 그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니 내 곁에서 떠나지만 말아주오. 그 절실한 마음이 통하지 못했는지 자례는 쓸쓸하게 고개를 흔든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만약 목래의 일을 마음에 두고 계신다면 절 보내주세요. 그리고 완전히 잊어주세요. 목래가 불타던 날에 성주도 그의 책사도 죽었답니다.” “...수하.” 좀더 다가가고 싶지만 지는 해를 등진 아이를 그 언젠가 한번 보았던 것 같은 느낌에 뒤로 물러난다. 검은 눈동자. 한올 한올 바람을 타는 검은 머리카락. 그 언젠가 말을 달리던 소리와 풀의 향기가 나는 듯하다. 그랬지. 분명 목래에 있을 때도 난 이 아이를 데리고 갈 마음을 품지 않았었던가? 하지만 그때 난 이 아이를 그곳에 남겨두었다. 그 태어난 선한 품성으로 갈수 있도록. 그리고.. “내가 너의 좋은 기억으로 남았으면 했다.” “왕자전하께서는 항상, 그리고 언제까지나 좋은 기억으로 남으실 것입니다.” 진솔한 검은 눈동자에 가진 분명한 거절의 표현을 알아버린 듯해 쉬첸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래. 이걸로 됐다. 하지만 너무 섭섭해 울음이 나올것 같다. 차라리 웃는게 좋겠지. “좋아. 그렇다면 이젠 만날 수 없겠지?” “모든 길은 하늘과 맞닿아있다고 하였습니다. 마지막 어느 날엔 만나겠지요. ” “...공자군. 하지만 이젠 공자는 싫어질 것 같다.” 쉬첸이 품안에서 작은 동패를 하나 꺼내어 자례에게 주었다. “앞서말한 2왕자의 가신패이며 왕성의 출입패다. 내가 천거에 관한 이야기는 내가 마무리짓겠다만... 혹시 언젠가 내가 필요하다면...” “...전.“ "그냥 받아주지 않겠나? 나머지 말은 듣지 않겠다. 이건 명령이야." 장난스럽게 덧붙이는 말에 자례는 피식 웃으며 패를 받았다. 처음이다. 의미를 부여한 물건을 받는 것은. 그것도 나 자신으로부터. 이 것으로 인해 왕자를 기억하게 될까. 여진인이면서도 혈족과 같은 친밀함을 보여주었던 이 진솔한 사내를. 먼저 등을 돌려주는 배려에 자례는 그의 등에 고개를 깊게 숙여 감사를 보낸다. 잊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그 말은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는 의미도 된다. 이것을 마지막으로 해달라는 자신의 부탁이기도 하다. 그것을 알고 있기에 이렇게 등을 돌리기가 힘든것이겠지. 잠시 눈을 내리깔았지만 등을 돌려 걸어가 버린다. 헤어지는 것이다. “전하?” “...그래. 너무 지체했다. 우린 성으로 가자.” 하지만 말과는 다르게 쉬첸은 쓸쓸한 마음에 오래도록 그 자리에 서있었다. 이것이 마지막이군. 이것이 마지막이야. 허탈한 마음을 어디다 달랠수 있을까. 한동안 노을지는 모습을 생각없이 바라보던 왕자는 궁안으로 들어가도 혼자라는 것을 느낀다. 혼자다. 언제나 나는 혼자인 것이야. 어머니가 가실때도 그렇고 태진과 싸울때도 그렇고 저 아이를 보내면서도 혼자구나.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애써 다른 기억에 매달려보지만 생각나는 기억이라곤 푸른 초지의 돌성안에서 있었던 소담한 추억뿐. 매우 간단한 일이다. 단지 각자의 출입패를 들어 보이기만 해도 말에서 내리지 않고 도성을 지나칠수 있다. 자신이 왕자인지, 왕자의 가신인지 자세히 모르면서도 병사들은 머리를 조아린다. 하층민이란 권력자에게 복종하면서 스스로 살길을 찾아 나가기 마련인지 아무도 말리지 않는다. 태연하게 따각거리며 도성을 들어오는 두 사람은 한가하게 중얼거렸다. “돌아가시면 황제께서 어디에 갔다 왔는지 물으실 겁니다.” “뭐 어때? 사냥 갔다 왔다고 해도 괜찮다. 어차피 나에게 글에 관한 기대는 하고 있지 않으니까” 레이첸이 하하 웃었다. 평소에 법과 질서를 어기는 일은 질색으로 여기는 태진이지만 말을 타고 도성을 지나치는 것은 좋아하는 눈치다. 모두들 비켜주며 두려워 하는 모습을 즐기는 것이다. 내 성질도 그다지 좋지 않지만 태진 놈도 그리 좋은 것은 아니지. 어떻게 보면 나보자 더 잔인한 놈이 아닌가.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던 레이첸이 내성의 문을 통과하는 순간 윗 성벽이 요란하다 따닥거린다. 머리위로 잔먼지가 떨어져 내려 신기하게 위를 올려다 보지만 이미 아무것도 없다. 태진이 이상하다는 듯 묻는다. “방금 말이었지요?” “그래. 누가 말을 타고 성 윗길로 순식간에 지나갔다. 거참 나 같은 놈이 또 있나보군! 하하” “웃으실 게 아니라 잡아서 혼을 내야 합니다. 도성 안에서...” “이봐, 태진 우리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우리는 왕족입니다.” “왕족은 새 다리라 걷지 못한다더냐? 허튼소리 하지마라.” “형님!” 화를 내는 태진을 무시하며 계속 걸어가다 한무리의 성안 병사들이 몰려 가는 모습에 고개를 돌린다. 거나하게 술에 취한 듯 보이는 병사들은 앞을 다투어 어디론가 몰러간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그 방향을 바라보니 아릿하게 연기가 오르는 느낌이다. “저기 연기가 난다.” “예?” 레이첸이 가리키는 곳을 보았지만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잘못본 것이 아닌가 하고 의문품나 그가 가리킨 방향이 낯익은 곳이라 한번 더 생각한다. “저기는 장군들이 모여 사는...” “쯧. 불조심해야지. 가서 거들어줄 힘없다. 빨리 가자.” 레이첸이 고개를 돌리고 경쾌하게 말을 모둠발로 걷게 만들어 태진을 뒤로 남겼다. 하지만 태진은 불이 난 쪽을 계속 바라보았다. 저기, 분명 저기 근처가 계명 장군의 집이였는데? “형님 저는 저곳에...” 뒤를 돌아보았지만 이미 레이첸은 없다. 기다리지 않고 먼저 앞으로 달려간 것이다. 오히려 잘됐다는 생각을 하며 태진은 말을 돌렸다. 어차피 그쪽으로 가도 황성으로 향하는 길은 있다. 정문에서 레이첸과 다시 만나 들어가면 되겠지. 그 짧은 시간에 레이첸이 또 무슨 일을 벌이겠는가. 조금 멀리서 귀를 기울이던 레이첸은 태진이 다른 곳으로 간 것을 확인하고는 기지개를 피었다. 저 자식 또 무슨 일을 저지른 것 같군. 뭐, 별일이야 있겠나. 레이첸은 혼자서 황성으로 가는 큰길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노을이 지고 있어 그런지 사람들이 분주하게 집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저녁 시간이라 비어버린 시장 길은 한가하다. 그곳을 지나치는 레이첸은 머릿속에 누군가 떠올랐다. “...” 이곳이다. 이곳에서 그 정안족의 여인이 장을 보고 있었어. 그 뒷모습이 정말로 아름답기보다는 신비스러웠지. 내가 어기까지 왔을 때 그녀는 인상을 쓰며 날 지나쳤어. “건방진...” 걸음이 사뿐 사뿐거리지. 길고 높은 보폭이 춤을 추는 것 같은 ... “...손은 하얗고...피는 붉지...응.?” 사람들이 가게 문을 내리며 흩어지는 부산한 때 레이첸의 눈에 길의 막바지에 서 이리로 걸어오는 자가 눈에 들어왔다. 하얀 소매자락과 검은 허리띠가 보나마나 정안족일 것이다. 걸어오는 것도 사뿐사뿐. 레이첸은 잠시 자신의 말에 걸린 노루의 뿔을 바라보았다. 길들여지지 않으니 죽이는 수밖에 없다는 자신의 말을 떠올리며 레이첸은 말에서 내렸다. 아직도 가슴에 피를 흘리며 죽은 그 여인이 지워지지 않는다. 꿈도 꾼다. 어린아이도 아닌데 놀라 일어나버리는 날들. 피투성이 얼굴로 눈을 떠 자신을 노려보는 꿈은 너무도 생생해 잠들기 두려워 한다. 바보같이. 정말로 바보같이. 레이첸은 말옆으로 몸을 숙이며 완전히 시야가 가려지길 기대했다. 그 정안족의 얼굴을 보면 그 여인이 떠올라 오늘밤 괴로워 할 것이 분명했다. 점점 다가오는 그를 외면하며 땅을 바라본다. 얼른 지나가라. "...향?" 쓴 향이 나는 느낌에 고개를 갸웃한다. 기분 나쁜 향은 아니다. 광대한 초지에 있는 듯한 생 풀의 향이 풍긴다. 이 얼마만에 맡아보는 초지의 향인가. 놀라 고개를 들려다 움찔하고 자제력을 발휘한다. 안돼지. 고개를 들면 안되지. 짤랑 짤랑. 다 지나가 안심하고 얼굴을 드는 순간 낯익은 소리에 자연스럽게 고개가 돌려졌다. 그것은 귀걸이 소리다. 금꽃과 옥으로 장식된 귀걸이. 떠오르는 것은 피투성이가 된 하얀 손. 그리고 옛날 그의 새 하얀 손. 그리고 식어가는 노루. 하얀 손. 그리고 죽음. 슬픔. 공포. 아차, 하는 순간 무슨 일인지 고개를 돌린 정안족과 눈이 마주쳐 버린다. “왁!” “..?!” 바람으로 인해 손등에 스친 옷자락에 놀라 힘껏 그를 떠밀어버린다. 상대방은 너무나 돌발스런 레이첸의 행동에 비명 소리도 못 내고 바로 땅으로 주저 앉아버린다. 왜 자신이 땅에 주저앉아야 하는지 이해할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깜박이다가 얼른 일어나 옷자락을 털어낸다. 아닌 밤에 홍두깨라고 이해할 수 없는 행인의 행동에 자례가 중얼거렸다. “이게 무슨...” “빌어먹을!” “..?” 화는 내가 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고개를 들어 상대방을 바라보나 그는 귀신이라도 봤는지 재빠르게 고개를 돌리고 말을 재촉해 사라진다. 웃어야하는지 울어야 하는지 분간도 안가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일어나 등을 돌려 반대쪽으로 걸어간다. 그런데 갑자기 발걸음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리니 아까 그 여진인이 다시 씩씩거리면서 돌아온다. 가까이 다가올수록 그 덩치에 감탄한다. 여진인은 몸이 참 좋아. 다리가 좀 짧지만 말이야. 그가 자례를 노려보더니 고개를 돌리며 툭 내뱉는다. “괜찮으냐? 너?” “... 여진족의 길 인사법은 좀 특이하군. 괜찮습니다.” “흥. 그럼 가라!” 젠장. 얼굴이 화끈거린다. 이게 무슨 망신인가. 달을 가렸던 구름이 다시 나오자 새까만 머리에 달빛이 소복하게 내려앉는다. 시린 바람이 머리를 타고 돌며 옷자락을 휘감아 돌아 얼굴로 올라온다. 짤랑 짤랑하고 귀걸이가 울린다. 마치 망자를 맞이하러 나온 사자처럼. 이해할수 없는 불길함을 느끼는 상대에 레이첸은 움찔하며 뒤로 물러난다. 뭐 이런 놈이 있는가 저 조막만한 몸으로 나에게 위압감을 느끼게 하다니. 천천히 고개를 올려 자신 바라보는 상대의 얼굴에 경악한다. 황제의 노루야. 갑자기 물방울이 떨어지던 머리카락이 떠오른다. 하얀 옷자락 속에 얼핏 비추던 하얀 손. 죽음. 영원한 비밀. 하지만 눈을 다시 감았다 뜨니 전혀 모르는 낯선 사람일 뿐. 사납운 표정이 잘 어울리는 나와 인연따위 없는 정안의 아이일뿐. “아니, 거기서 뭐하는가!” “...?“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던 여진인의 시선을 맞받아치고 있던 자례는 늙은이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하얀 수염을 기른 한 노인이 마차 위에서 자신을 향해 손짓을 하고 있다. 전에 만난 적이 없는 초면이다. 하지만 그의 옷에서, 머리에서, 몸 전체에서 혈족이라는 믿음이 나온다. 마치 자신의 할아버지처럼. 늙은이는 다급하게 손짓한다. 금방이라도 마차를 달리게 할 것 같다. 그야말로 홀리 듯 노인에게 다가가게 된다. “어서 와라, 늙은이를 기다리게 하지마라!” “기다리십시오!” “자..잠..!” 재빠르게 노인이 있는 곳으로 뛰어가는 그를 제지하려고 손을 뻗지만 얇은 옷자락마저 손아귀를 부드럽게 빠져나가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허망함에 뒤를 돌아보지만 아무도 없다. 마치 모든 것이 한순간의 꿈처럼. "..." 차가운 물방울과 하얀 옷자락. 언제나 하늘을 바라보던 공허한 검은 눈. 물방울이 떨어져 몸을 산산히 부셔버리는 소리가 귓가에 울린다. 그 높은 소리가 귀를 마구 울린다. 그의 옷자락에서, 물방울이 계속 떨어지는 것이다. 다리에 힘이 풀리는 느낌에 레이첸은 얼른 말에 올라탔다. 그럴리가 없지. 그는 죽었으니까. 내가 그의 시체를 보았으니까. 그러니까 그일리가 없지. 달의 환상일것이다. 초원의 사내들은 달의 영향을 받으니까. 게다가 오늘은 만월이다. 거대한 보름달을 올려다본다. 힘을 불어넣는 듯한 그 달의 빛에 잠시 동안 눈을 감고 음미한다. "신정의 첫 보름이라..가만 그렇다면 날짜가..." 한 달 후면 황제, 자신이 아버지의 생신이 오는군.그리고 축하연 다음 보름이 바로 내 생일인가. 그렇다면 벌써 난 33세야. 시간 참 빠르구나. 44 “뭐 하고 계신 걸까요.” “어? 뭐야?! 너 아직 안잤냐?!” 등을 돌리고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쪼그려 무엇인가 열중하던 사내가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을 보고 아이가 들어오려던 방을 멈칫하며 문턱에 서버린다. “그렇게 놀라실필요 없잖아요.” “뭐야뭐야, 아무리 너라도 그렇지 들어올때 기침소리 한번 내고 들어오는 것은 예의아니냐!” “평소엔 기침 소리내면 잡아먹을려고 하시면서....” 천연덕스럽게 천장을 바라보며 어물어물거리는 자례에게 잽싸게 등을 돌리며 손에 들었던 것을 서랍에 마구잡이로 넣어버린다. 그것을 보며 자례는 인상을 찌푸린다. 뭔지는 몰라도 저럼 구겨지고 장마에 옷장의 나무냄새가 베어버릴텐데. “형, 뭔지는 몰라도 잘 정리해놓으셔야죠.” “시끄럽다. 너야말로 문턱에 올라서지 마라. 복떨어진다.” “들어가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몰라서 서성이고 있는걸요.” 그제야 자휼은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오라 몸짓한다. 살짝 웃으며 방으로 들어오려는 자례를 보다가 손에 무엇인가 잡힌다. 고개를 돌려 그것을 확인하고는 놀라 외치고 만다. “들어오지마!” “예?” “아냐 아냐... 들어와.” “...예.” “아냐! 기다려!” 멈칫 멈칫, 한발 들어온 방안에서 어쩔줄 모르다가 다시 문턱에 올라서버린다. 씩씩 화가 났다는 인상을 쓰며 외친다. “장난치지 마세요!” “아, 이거 워낙 작아서... 됐다. 정말 들어와.” “됐어요. 좋은 저녁보내세요.” 동생은 허리까지 오는 머리를 출렁이며 몸을 돌려버린다. 재빠르게 따라잡으려 하지만 바로 옆방이 아이의 방인지라 자신의 방으로 사라지고 만다. 제 고집에 문짝을 때어내고 휘장을 걸었으니 못들어갈 걱정 따위는 할필요 없지만 그래도 휘장앞에 서서 물어본다. “나 들어가도 좋으냐?” “예.” 성큼 휘장에 손을 대자 안에서 앙칼진 소리가 들린다. “잠깐만요!“ “뭐? 그...그래.” 하지만 바람이 불때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어 헛기침을 한다. 그래도 소식이 없는 방에 다시 물어본다. “이제 들어가도 좋으냐?” “....그런 것 같아요.” 다시 휘장에 손을 가져가지만 또 자례가 안된다는 말을 한다. 그 꿍한 보복에 화가 나버린 자휼은 큰 소리가 나도록 휘장을 가르며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반쯤 기대 있던 자례가 놀라 벌떡 일어난다. “급해보이지 않구나. 네, 지금 형을 놀리는 것이냐?!” “그...그런 것은 아니에요. 방이 더러워져서 바닥을 훔치고 있었어요.” “그런 거짓말을 누가 믿겠느냐! 이 한밤 중에 군승이 방청소를 하고 있다고 하면 모두들 잘도 믿겠구나! 그래, 열심히 청소할것이지 왜 내방에 들어온것이지? 청소를 도와달라는 것이냐? 하긴 내일이 천중절(天中節)이니 청소는 해야겠지!” 속이 상한 자휼은 등을 돌려 방을 나가려 했다. 화들짝 놀란 자례가 자신의 소맷자락에 매달려 하소연을 한다. 너무나 당황스런 표정이 스스로 거짓인 것을 밝히는 듯해 보기 싫다. “정말이에요! 난...!” “잘들어라. 너와 내가 형제라고 하지만 엄염히 너는 아이이고 난 어른인 것이야. 내가 너에게 하는 행동은 너가 나에게 해서 안되는 것이 많다는 것을 왜 모르느냐! 나는 이 성의 태수이고 너는 날 보좌하는 군승인데 어찌 이렇게 거만하단 말이냐!” “아니에요! 정말로 장난을 치려한 것이....!” “놓지 못하겠느냐!” 화난 표정의 자휼의 호통소리에 말이 끝나기도 전 움찔하며 뒤로 물러난다. 시선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몰라 고개를 숙인다. 사시나무처럼 떠는 두손으로 옷자락을 부여잡는다. 자휼은 인상을 찌푸렸다. 자례의 저런 기죽은 행동과 표정이 너무나 싫었다. 평소에는 연배의 장수들에게 그리 당당하게 소리치고 처세하더니만 어째서 내 앞에서는 저리 어린 아이처럼 구는가. 왜, 어째서, 나에게는 다른 이들처럼 밝고 당당하게 지내주지 못하단 말인가. “...잘못했습니다.” 허리를 깊게 숙여 잘못을 비는 아이가 너무도 싫어져 휘장을 걷고 나온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큰 소리가 나게 문을 닫는다. 들어오지 말라는 무언의 경고로. 머리가 아파와 자리에 앉아 잠시 머리를 누른다. 밤도 깊어 갔으니 잠을 자야겠다고 생각하나 바닥에 굴러다니는 창포의 뿌리껍질에 한숨을 내쉰다. 아까 마구 집어 넣었던 서랍을 다시 열어 꺼내 책상에 올려놓는다. 창포뿌리를 깍던 중이였다. 비록 하룻동안의 부적이지만 천중걸이를 만들어 주고 싶었다. 이런 것을 좋아하는 아이니까. 사실은 정말로 이 천중걸이가 효과가 있어 아이에게 낀 병마(病魔)를 때어내기 은근히 바랬다. 그래서 어렵게 구한 창포뿌리로 밤을 새어가며 깍고 있었던 것인데... 바보같이. 왜 숨겼나 몰라. 그것은 자신도 이해할수 없는 행동이다. 하지만 뭐랄까.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 그 아이에게 만큼은 언제나 당당하고 강한 형이 되어주고 싶다. 아우가 바라는 이상의 장수가 되어 주고 싶다. 그래서 그런것일까. 자휼은 깍고 있던 천중걸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젠 소용없는 것이 되어버린 듯한 느낌에 허탈하게 웃는다. 여기, 이쪽만 깍아내리면 끝나는데 아쉽구나. 하지만 미련없이 성벽위로 나가 그것을 던져버린다. 소용없다. 이런 짓따위. 가야 하는 사람은 가버리기 마련이다. 흑염은 과연 명마였다. 자휼은 몸을 깊게 숙여 바람을 피했다. 성벽위가 무너질 정도로 따각거리는 경쾌한 소리를 내며 얼마 지나지 않아 계명의 집앞에 도착한다. 하지만 곡소리가 들릴 뿐이다. 문 앞에 상을 당했다는 종이를 붙이기 위해 나온 하인에게 묻는다. “15왕자전하께 드릴 말씀이 있어 황궁에서 내려왔소. 전하는 어디계시오?” “전하께서는 좀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이 앞의 작은 길로.” “벌써? 그럼 전하꼐서 혹시 젊은 사내를 데리고 가셨소?” “뒷채에 있던 손님을 모시고...” 하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자휼은 하인이 가리킨 작은 길을 향해 달려갔다. 남은 하인은 아무 말없이 상을 당했다는 종이를 잘 보이도록 문앞에 붙였다. 막 들어가려는 차에 한무리의 병사들이 몰려온다. 하인은 놀라 문을 막았다. 주인이 죽었다는 것을 지금 막 알렸는데 벌써 문상인가? 하지만 자신의 주인정도라면 이런 병사들의 문상은 받지 않는다. “뭐야?!” “이럴수가! 이봐! 누가 죽은것인가? 왜 상을 당한거지?!” “정말로 계명장군이 화적에게 암살당해버린것인가?” “어서, 어서 빨리 관청에 알려야지!” 마구내뱉는 말에 지독한 술냄새가 풍겨 하인은 화가나 안에 있는 사람들을 불러 이들을 내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이를 태우자 마자 유번은 마차를 몰았다. 폐문의 시간이 지났지만 문을 완전히 닫기 위해선 얼마간 시간이 걸리니 운이 좋다면 성을 나갈수 있다. 다행히 성문은 아직 닫히지 않았고 마차는 손살같이 성을 나가버린다. 성문이 닫히기 전 성을 나가는 마지막 마차다. 한숨을 돌리게 되자 유번은 마차의 속력을 줄였고 그제야 옆에 태운 아이를 바라보았다. 왕씨가 문서에 인상착의에 대해 간단히 적어주었지만 생각보다 어린 느낌이다. 그리고 말랐군. 지병이 있다고 했는데 그래서 그런가. 시선을 느낀 아이가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묻는다. 생긴 것은 매우 사납지만 가정교육은 잘 된 아이구만. 마음에 드는데. “늙은이께선 저를...” “그래. 잘 알지. 고생했다. 계명장군은 밑에서 용케 잘도 빠져나왔구나.” 그 이야기에 소리 없이 고개를 돌린다.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것인가. 그다지 않좋은 일이 있었던 것이 분명해 측은심이 든다. 아직 어린 아이인데. 게다가 병도 있는 어린 것이 얼마나 고생이 심했을까. 저절로 표정이 부드러워져 말을 건다. “난 유번이라고 하는 늙은이다. 그 분께 널 부탁받았지.” “그 분?” “아아 좀 늦었지 않느냐. 서신에는 5시 정도면 네가 나올 것이라기에 안심했더니만... 하마터면 성문을 통과하지 못할 뻔했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도성에서 멀리 떨어진 마을로 간다. 내 마을이지. 넌 내 모도리에서 지낼 거야.” 유번은 자례에게 활을 넘겨주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활을 받은 아이에게 말한다. “활을 쏠 수 있겠지? 첩시(牒矢:소식을 알리는 화살)를 보내라.” “누구에게 말입니까?” 반문하면서도 자례는 마차의 쇠마구리에 촉을 튕겨 화살에 불을 붙였다. 흔들리는 마차지만 하늘로 향하는 화살이니 걱정할 것 없다. 하늘로 날아간 화살은 허망한 불꽃처럼 사라진다. 힘차다기 보다는 땅이 울릴젇도로 힘찬 말굽소리에 쉬첸은 고개를 들었다. 도성 안에서는 말을 탈 수 없게 되어 있는데 누가 이렇게 말을...?. 쉬첸이 마차의 휘장을 걷고 밖을 내다보는 순간 비호같은 흑마가 마차의 옆을 스쳐 지나가며 머리가 당겨지는 느낌이 든다. 피가 머리에 몰리는 느낌도 잠시 아찔하게 등과 허리에 충격을 입고 바닥에 내동댕이 쳐진다. 신음하는 것도 잠시 본능적으로 몸을 일으켜 자신을 노려보는 말의 주인을 바라보나 달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놀란 병사들이 다가오기도 전에 그가 먼저 쉬첸에게 다가와 자신의 땋아내린 머리채를 손으로 휘어 잡는다. 목이 당겨진다 생각한 순식간에 자신의 눈앞으로 시퍼렇게 날이 선 장검이 눈앞에 들이밀어진다. 자신도 모르게 헉 소리를 내며 몸을 뒤로 빼고 싶지만 허공으로 떠있는 두 다리는 몸을 움직이기게 무리라는 것을 알려준다. 마차를 호위하던 수 명의 병사들이 놀라 외쳤다. “전하!” “네 이놈! 그 분이 누구라...” 그 말이 안 들린다는 듯 자신을 잡은 그가 낮게 중얼거린다. 검은 말이 사납게 다리를 놀리고 잡힌 왕자의 신음소리 때문에 병사들도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고 어물거린다. 말에서 왕자의 머리를 잡은 자의 얼굴은 달빛을 뒤로 받아 보이지가 않는다. 하지만 그 분위기만으로도 억하는 심정이 든다. 뭔가 대단히 분노하는 것이 느껴진다. “난 널 믿었다.” “..!” 쉬첸은 당겨지는 머리 힘을 주며 반항하다 너무나 낯익은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달의 역광에 자세히 보이진 않지만 이 목소리는 ... “한 명의 무사로써 널 믿었다. 그런데 어째서...” “태수? 살아있었...” “어째서!” 태수가 살아있다니 그래서 수하가 왕성으로 들어가지 않을 것이였을까. 그렇다면 수하는 태수가 살아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아무튼 지금이라면 수하도 이 길에서 얼마 못 갔으니 불러서 황궁으로 들어가서 얼마간 보호를 받는 것이... 갑자기 자유롭게 되는 느낌에 안도하는 것도 잠깐 등을 밀리고 앞으로 넘어진다. 자신을 바라보는 병사들의 표정이 경악스럽다. 눈 앞에 기다란 달 그림자가 진다. 사내라면 어떤 그림자인지 알수 있는 그것을 믿지 않으려 하지만 귓가에 마지막 소리가 울린다. 그럴리가. 그럴 리가 없다. 태수가 왜 날 죽이려 하겠는가. 이건 잘못된것이야. 오해가 있는 것이다. 그를 달래 수하를 데리고와 태진의 손이 못닿는 곳을 찾아 보내주어야 한다. 그들은 나와는 다르니까. 태어날때부터 갇혀 살아야 하는 나와는 다른... 서걱! 푸른 하늘을 지고 자유롭게 살던 자들이니 자유스런 곳으로 보내주겠어. 갑자기 눈앞이 새빨간 색으로 변한다. 이게 뭐지? 손과 옷이 젖는 느낌, 그리고 지독한 졸음의 욕구. 안되는데, 이렇게 되면 두 사람은 누가... 목에 서늘한 느낌이 왔다고 느낀 것도 잠깐, 쉬첸은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채 하고 싶었던 말 한마디 못해보고 젊은 왕자는 그렇게 목을 내주었다. 신년 25세. 호(呼)는 쉬첸, 자(者)는 천구(泉久). 금국의 15왕자 계후, 광의 왕비의 아들로 젊은 나이에 죽어 막타(寞他)라는 묘비명을 가지나 그가 땅에 입관되기까지는 죽고나서 두달 남짓한 시간이 흘려야 했다. 백라가 하늘로 날아간 첩시를 보고는 손을 들었다. 작은 숲길의 나무에 몸을 가린 궁수들이 활을 만진다. 말 소리에 모두들 긴장하며 활을 잰다. 하지만 모습을 보인 자는 예상치 못한 자라 백라는 숲에서 튀어나왔다. “자휼!” “좌보님?” “어째서? 어째서 이곳에? 왕씨가 부른다는 전갈을 받지 못했는가? 모도리에 마유 장군이 가지 않았는가? 그 피는 뭔가? 다쳤는가!” “...이야기가 깁니다. 그보다 여기서 벗어나야 합니다. 병사들이 따라오고..” “좌보님! 황궁의 병사들입니다!” 한 궁수가 날카롭게 외치며 나무에서 뛰어내려 좌보를 끌고 숲안으로 들어가 숨겼다. 자휼도 재빠르게 숲길로 숨었지만 덩치가 큰 흑염은 숨을 수가 없어 조금 떨어진 곳까지 걸어가게 했다. 쉬첸을 호위하던 병사들은 눈에 불을 키고 자휼을 따라 달려왔다. 하지만 조금 멀이서 풀을 뜯는 말은 보이지만 그 암살자는 보이지 않는다. 그럴리가. 이런 단시간에 멀리 갔을 리가 없다. 한명은 황궁으로 가고 나머지는 근처를 수색한다. 모두들 조용히 그 모습을 바라보는데 황궁쪽으로 가는 병사를 본 자휼이 일어나 따라가려 해 백라는 재빨리 그를 말렸다. “왜그러는가? 그냥 두게! 황궁과 연관이 되면 일이 커지게 되버려!” “저자를 막지 않으면...!” “...막지 않으면?” 백라는 아까부터 생각하던 불길함에 되물었다. 설마 아니겠지. “자네 설마... 이 피는...” “....제가 15왕자를 죽였습니다." “이...자네 어떻게! 이런 맙소사!” 혼란스러워하는 표정이 명백했지만 단호하게 입을 다문 자휼의 표정에서 갑작스런 충동심에 살해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보여 백라는 더욱 당황스러웠다. 애초에 쉬첸과 자휼은 사이가 않좋았는가. 하지만 왕씨가 쉬첸을 죽이라 마음을 보이셨을때 자휼은 거절했다고 들었는데 어째서 지금와 왕자를 죽였단 말인가. 백라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럼 저 앞에 왕자가 죽어있겠군.” “예” “병사는 모두 몇 명이지?” “열한명이였습니다.” “그럼 한명이 황궁으로 가고 여기에 8명이 있으니...왕자의 시신을 지키는 병사는 둘이겠군.” 백라는 손짓으로 궁수중 한명을 시신을 지키는 병사에게로, 한명은 황궁으로 가는 병사를 따라가게 했다. 자휼이 고개를 저었다. “좌보님, 제가 한 행동이니 제가 책임지게 해주십시오.” “무책임한 소리하지 말게! 자네의 욕심에 도성안의 모든 혈족들을 죽일 생각인가! 애초부터 책임을 느꼈다면 왕씨의 말씀대로 자중했어야지!” “...죄송합니다.” “그보다 마차안에 자례가 없었군.” “예. 없었습니다.” 그럼 도대체 왜 왕자를 죽였단 말인가! 백라는 좌절했다. 어리석은지고! 어째서 이 현명한 장수가 그런 실수를 저질렸단 말인가! 하지만 이미 엎지른 물을 담을수는 없는 것임을 경험에서 잘 알고 있었다. “자네 여기에 머무르면 안 되네. 흑염을 조용히 부를수 있겠지. 이 자를 따라 북문에 난 비밀 문으로 도성을 빠져나가게. 나가서 난곡이라는 산으로 들어가게. 그곳은 지세가 험해 군대도 피해가게 만드는 곳이야. 일단 그곳에서 지내고 있으면 연락을 하지.” “알겠습니다.” “난곡에는 숨어온 혈족이나 산적들이 있으니 조심하거나 도움을 청하게.” 고개를 끄덕인 자휼이 흑염을 데리고 병사와 함께 북문으로 사라지자 백라는 병사들에게 공격명령을 내렸다. 여기서 증거를 인멸해 버리는 것이다. 자휼이 빠져나가는 시간을 버는 것이다. 어둠속의 화살은 치명적이라 외마디 소리를 지르면서 황궁의 병사들은 허무하게 길가에 쓰러져 버린다. 모두 죽은 것을 확인하고 백라는 길가로 나와 하늘을 바라보았다. -시간을 알수 없는 오후, 성문 밖에서 첩시(牒矢:소식을 알리는 화살)가 보이면 그 길로 지나가는 마차를 공격해라. “하지만 따라가지 말라 했으니 15왕자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왜...?” 왜 의미 없는 활을 쏘라 하신 걸까. 갑자기 분통 터지는 일이 떠오른다. 이런 일이 예전에도 한번 있었지. 그래, 또 당했구나. 왕씨는 자휼을 이용하는 것에 나를 ... “결국 나에게 뒤처리를 하라는 것인가!” 백라는 급히 몸을 돌려 모인 궁수들에게 외쳤다. “모두들 황궁까지 이 길로 달려가 흔적을 남긴후 모두들 남문으로 사라져 천중제때까지 도성출입을 하지 말고 자중한다.!” “예!” 고개를 끄덕이며 명령을 받은 궁수들은 발자국을 남기며 왕궁쪽으로 달려 사라졌다. 백라는 그 모습을 보며 매우 분노했다. “어째서 이용하시는가!” 백라는 스스로 치밀어 오르는 화를 이기지 못해 기루골목으로 하류사를 찾기 위해 뛰어갔다. 어째서 혈족을 이용하시려 하는가. 그 슬픔을 달래주시려하지 않고 이용하려 드신단 말인가. 어째서 백성이 원하고 있는 왕씨로 남지 않으려 하신가. 자홍은 오래간만에 온 공자를 반갑게 맞이했다. 넉넉한 미소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 얼굴이 좋아 스스로 감정을 주체할수 없을 정도이다. 방으로 모셔 차를 대접하며 어느때와 달라보인다 여긴다. 왜 그럴까 의아하게 공자를 바라보며 대화를 한다. “도성이 시끄럽습니다. 그동안 어딜 갔다 오셨습니까? 어머나? 그리고 보니 옷이였구나! 그 옷... 공자, 언제 성의 병사가 되신 거죠?” “잠시 장난 좀 친 거다. 혹시 갈아입을 옷이 있는가?” “자홍이 공자를 위해 못해들릴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방을 나갔다 돌아온 자홍은 잘 개어진 한족의 옷을 들고 들어왔다. 옷을 벗자 자홍이 다가와 옷시중을 들어준다. 여관처럼 품위있고 완벽한 손놀림은 아니지만 정성스럽게 해주는 손길이 보여 이 여인에게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한다. 몸을 파는 여인 특유의 웃음과 애교가 있는 여인이지만 진지함도 있다. 옷을 갈아입은 하류사가 길게 숨을 내쉬며 침상에 걸터 앉았다. “참으로 긴 하루였다.” “한량에게는 하루가 아니 긴 날이 있습니까?” “네 말이 맞다.” 재치 있는 그녀의 말에 하류사는 웃었다. 창가로 다가가 하나 둘씩 켜지는 집안의 노란 등불을 감상했다. 도성이 잠들지 못하고 깨어나는 것이다. 오늘 왕자가 죽고 장군이 죽었다. 계명씨는 몰살되지만 왕자는 한달 남짓 살아 움직이겠지. "현을?" "좋지." 내일은 매우 소란스러운 하루가 될 것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 성실한 좌보께서 얼마나 당황했을까. 마차 대신 다른 놈이 뛰어드는 바람에 말이야. 영리한 좌보는 이 상황을 이해하고도 남지. 그가 꼬치꼬치 묻기 전 불같이 화를 내주어야겠어. 풀죽은 그를 데리고 경치 좋은 곳에 가서 바람이나 쏘이는 것도 좋지. 최근 좌보도, 화원도, 나도 너무 힘들게 신경을 곤두 세웠으니. 하류사는 현을 다루는 자홍을 바라보았다. 앞으로 얼마간은 시간을 타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항상 하얀 포만 입었던 아이가 푸른 포에 붉은 허리띠를 맨 모습은 신선했다. 천중절(天中節)이기 때문인가. 하긴 자신도 붉은 옷에 푸른 허리띠를 매었으니. 아침 일찍 시작한 조회는 평소의 회의라기 보다는 연회분위기다. 자휼은 미리 준비한 붉고 검게 물들인 오선을 관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한족 관리들은 예상외의 선물에 어리둥절한 표정이지만 반갑게 받는다. 군승에게도 줘야지. 마지막까지 들고 있던 부채를 만지작 거리며 군승을 바라본다. 하지만 어제의 여파인가 군승은 무표정하게 자식이 있는 관리들에게 장명루(長命累)를 나누어준다. “이건 어디다 쓰는 것입니까? 실입니까? ” “어린아이들 손목에 묶어 명을 늘리는 기원을 하는 것입니다.” 자례의 설명에 손노가 크게 웃으며 말한다. “그럼 전 다발체 주셔야겠습니다. 제가 손주녀석들이 꽤나 많아서 말입니다?” 빙그레 미소짓는 표정에 뭔가 쓸쓸함이 보여 자휼은 고개를 돌려버리고 만다. 잠시후에 손노과 관리들이 준비한 대나무잎으로 감싼 떡이 나온다. 손노는 쑥으로 만든 인형을 군승에게 주며 무병장수를 기원해주었다. 평소보다 긴 조회가 끝나자 성안 주민들의 천중절 행사를 보려 나간다. 여름의 문턱에 들어선 하루는 그렇게 급히 지나가 버린다. 벌써 저녁이 되어 버린 하늘을 올려다본다. 손에는 아직도 군승에게 주려던 부채가 쥐어져 있다. 저녁식사 시간에 주려고 했지만 아무말없이 조금 떨어져서 조용히 명절음식을 먹던 아우에게 차마 살갑게 부채를 건내줄수 없었다. 이게 아니였는데 이렇게 지내려고 한 것이 아닌데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린것인가. 물론 부채도 주고 내 아이에게는 천중걸이도 해주려 했는데. 비록 하루만의 부적이라지만 그래도 해주고 싶었는데 같이 머리를 감으려 나가고 신주도 빚어 동지에 마시려고 했는데. 허탈한 웃음만 나온다. 천중절은 인간이 귀(鬼)를 두려워 하지 않는 유일한 날이라 했던가. 그래서 즐겁다고. 하지만 이게 뭐란 말인가. “이쪽으로 달려 곡양산에 이르기 전 난곡이 나옵니다.” “감사하네.” 궁수를 뒤로 놓고 자휼은 달을 등지고 달렸다. 그러고 보니 보름이구나. 벌써 그렇게 시간이 가버렸는가. 신년이 왔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말이다. 그러고 보니 이번 신년은 나 혼자 지냈구나. 아이는 어떻게 지냈을까. 흑염은 땅을 후리며 달리는데 자신은 아무런 미동도 느끼지 못하겠다. 그래. 내 아이는 어떻게 지내고 있단 말인가.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린것이지? 내가 무엇을 잘못한 것일까 “태수님.” 밤 하늘을 감상하던 고개를 돌리자 엷은 비단과 모시로 만든 옷을 입은 아이가 조금 떨어진곳에서 자신을 바라본다. 그 모습을 보자 천중절이 끝났다는 느낌이 온다. 이젠 봄이 끝났다. 여름이 오는 것이다. 아이는 머뭇머뭇 자신을 바라보기만 할뿐 다가오진 않는다. 잠시 생각하던 자휼은 손짓으로 다가오라 한다. 천천히 다가오는 아이에게 밤 하늘을 가리켜 보인다. “별이 참 예쁘구나.” “예. 내일은 날씨가 맑겠습니다.” “그러냐. 곧 비가 내려야 모를 심은 밭에 뿌리가 내릴텐데 말이다.” “예.” 별 다른 말없이 하늘을보던 중 아까부터 하고 싶은 말이 있던지 머뭇머뭇 하던 아이가 결국 포기하고 만다. 그만 방으로 들어가자는 태수의 말에 울쌍을 짓는다. “왜 그러느냐?” “저, 아직도 제게 화가 나셨숩니까?” “...그래. 하지만 네가 미운 것은 아니다. 넌 내 소중한 아이이니까.” 그 말에 만족했다는 듯 아이는 미소짓는다. “죄송합니다. 앞으론 처신에 신경쓰겠습니다. 저 그리고...” “왜?” “이거, 늦었지만 드리고 싶었습니다.” 두 손을 모아 자신에게 내미는 것을 바라보자 눈가가 아릿해져 버린다. 천중걸이구나. 그래, 천중걸이구나. 너도 만들고 있었느냐. “붉은색으로 하고 싶었는데...제가 미숙해서 검은 색으로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받아든 천중걸이를 자세히 보니 무엇인가 자국이 생겨 검은 색으로 물들인 것이 살짝 보인다. 잠시 이것이 뭘까 생각하다가 아차 하며 아이의 손을 낚아채어 본다. 화들짝 놀라 뒤로 몸을 빼지만 손을 잡혀 그만 둔다. 길게 베인 왼손에 붕대를 감아놓았다. 감은 붕대에 살짝 붉게 피가 비친다. “언제 다쳤니!” “예? 저, 그게...” 시선을 피하며 빠르게 생각하는 모습에 가슴이 덜컹 내려앉아버린다. -방이 더러워져서 바닥을 훔치고 있었어요 두근 두근 가슴이 터질것만 같다. 왜 나는 아이를 믿지 못했던 것일까. 어째서 이렇게 되어버리는 것일까. “얼마 전에 다쳤어요.” 그것은 거짓말이구나. 힘없이 어물어물 해버리는 말투에 눈물이 나와버릴 것 같다. 모진 형이다. 절망스럽게도 모진 놈이구나. 나는. “많이 늦어서... 이젠 소용없겠지만 그래도 천중절이니 이걸 해드리고 싶었습니다. 올 한해 마(魔)와 귀(鬼)를 이겨내시는 길(吉)을 기원합니다. 태수님.” 미소짓는 아이는 자신이 바라보기엔 눈이 부시다. “...올해는 더위먹지 말도록... 길(吉)을 기원하마.” 그 미소에 손에 들고 있던 부채를 건내줄수 있는 용기가 생긴 것일까. 아침부터 들고 다니던 부채를 건내는 손길이 뜨겁다. 아이는 놀란 표정으로 부채를 보다가 환하게 웃으며 부채를 받는다. 달보다 더 환한 웃음으로. 관례의 형식적 선물인 부채에 저리 기뻐할수 있을까. 내가 너라면 그렇게 웃을수가 있을까. 두 손으로 받은 부채를 소중하게 가슴으로 보듬어 안고 고개를 살짝 숙이며 내리깐 눈으로 미소짓는다. “감사합니다.” 수백번, 수 천번 들은 감사의 한마디지만 이렇게 뼈아프게 가슴을 애일까. 스스로 가슴을 파먹을 듯한 그 한마디를 중얼거린다. 감사합니다...라고. -- 단설의 역주는 인용과 개인적 견해가 들어간 글입니다.(맹신(盟信)사양. 도용씁쓸)-- 주 : 천중절(天中節)음력 5월 5일. 수릿날 ·천중절(天中節)이라고도 한다.고려가요 《동동(動動)》에는 단오를 ‘수릿날’이라 하였는데 수리란 말은 상(上) ·고(高) ·신(神) 등을 의미하며, 수릿날은 신일(神日) ·상일(上日)이란 뜻을 지닌다. 여자들은 단옷날 ‘단오비음’이라 하여 나쁜 귀신을 쫓는다는 뜻에서 창포를 삶은 물로 머리를 감고 얼굴도 씻으며, 붉고 푸른 새 옷을 입고 창포뿌리를 깎아 붉은 물을 들여서 비녀를 만들어 꽂았다. 남자들은 창포뿌리(창포 걸이)를 허리춤에 차고 다녔는데 액을 물리치기 위해서라고 한다. 중국의 옛 풍속을 전하는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에 따르면 단오에는 약초를 캐고, 재액을 예방하기 위하여 쑥으로 만든 인형 ·호랑이를 문에 걸었으며, 창포주 ·웅황주(雄黃酒)라는 약주를 마셨다. 주 : 장명루(長命累) 아이들의 건강을 비는 마음으로 오색실을 땋아 팔찌로 만들어 손목에 묶어준다. 장명루는 잡귀를 쫓아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뜻으로 만들어 졌으며 끊어질때까지 하고 다녔다. 45 곡양촌에서 조금 더 도성에 가까운 큰 마을에 방이 붙었다. 긴 내용과 보기 힘든 한자로 만든 장문이지만 주 내용을 털어보면 간단한 것이였다. <장군 계명은 자국의 성인 목래를 개인적 감정으로 인해 공성한 죄로 3족을 멸한다.> 유번은 그 방을 두번 정도 읽고는 발을 돌렸다. 길을 따라 마주치는 사람들은 그 방을 보지 않는다. 사실 이곳의 사람들은 그것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계명이 누군지, 그들의 집이 어떻게 되던 상관이 없는 이야기다. 하루하루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들과 생기는 작은 행복과 사소한 걱정이 더 중요한 이야기다. 그것을 군주는 모르기 때문에 마찰이 일어나는 것이다. 역시 그렇듯 저런 무시무시한 방이 붙었음에도 불구하고 장을 활기차다. 유번은 좋은 술과 생선, 말린 우엉을 샀다. 평소 유번을 알아왔던 장사꾼은 이상하다는 눈으로 묻는다.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오늘따라 장을 많이 보십니다?” “좋은 일이라, 글쎼. 가족이 늘긴 했지.” “어허? 여인이라도 얻으셨나요?” “이 나이에 무슨... 허허 새 아이가 생겼다네.” “부인이 계셨습니까?‘ “아니, 손자녀석이 돌아왔지.” “그거 즐거운 일이군요!” 그는 말린 우엉에 넣어 먹으라고 토란을 몇 개 넣어준다. 시골 인심이라는 것이 아니라 돌아왔다는 말은 그 만큼 기쁜 말이다. 험한 일에서 살아 왔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유번은 좋게 받고 두시간 정도 마차를 달려 작은 곡양촌의 모도리로 돌아왔다. 뒤로는 그 산세가 험하다는 난곡이 위치해 있고 앞으로는 곡양산이 두르고 있어 요새로 삼기 최적이나 성의 중요한 조건인 수원지가 없어 커지지 못하는 작은 마을이였다. 다 합해 30여 가구가 좀 넘을까. 그나마 촌락지에서도 조금 떨어진 곳의 작은 집에 마차를 멈춘다. 마차에서 내리자 마자 집에서 무엇인가가 튀어 날아가는 것을본다. 제비군. 전서가 왔었나. “동자야.” 그가 문을 열고 들어가며 다시 한번 불렸다. “자례야” “아, 벌써 다녀오셨어요. 어르신?” 쪼로록 키 작은 어린 소년이 짐을 받아 들고 들어간다. 유견은 눈이 내린 마당을 가로지르며 문득 조금 열려 있는 작은 방을 바라본다. "동자야. 공자는 안에 계시냐?" "예, 어라 또 문을 열어 놓았군요? 나원 문단속 하나 못하다니..." 쫑알 쫑알 거리며 동자는 부엌으로 들어가버린다. 유견은 조금 열린 문을 조용히 닫자 안에서 누군가 다시 밀어낸다. "...안주무셨나?" "예. 들어오시는 소리를 듣고 나오는 참이였습니다." 자례가 고개를 숙여 유견을 맞았다. "잘 다녀오셨습니다." "음." 동자가 마당의 파를 뽑아 다시 부엌으로 쪼르르 들어간다. 물소리가 들리자 유견이 조용하게 말했다. "나는 이미 붙여논 방에서 알았다만은... 그래, 전서에는 네가 바라던 것이 적혀 있었느냐?" 자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눈을 내리깔았다. 유번의 모도리는 매우 작아 방 두개 딸린 작은 기와집에 마구간보다 작은 대장간이 딸린 것이 다였다. 워낙 작고 외진 마을이라 검을 맡기러 오는 자도 없고 간혹 식칼을 갈아주거나 농기구를 손봐주는 것이기 때문에 충분하다고 유번이 설명했다. “일진이 나쁘면 가끔 사냥 온 정신 나간 것들이 이곳으로 와서 창을 벼리거나 화살을 사려고 하지. 나 원. 이런 작은 마을에서 바라는 것도 많아.” 집안에는 유번과 한족 고아인 어린 시동, 그리고 자례 셋이서 조용히 살고 있었다. 유번은 마을사람들에게 자례를 자신의 손자라고 소개했고 마을에서 신임이 있던 유번 덕에 자례는 아무 탈 없이 마을 속으로 스며들어갈 수 있었다. 유번은 필요 없는 말은 하지 않는 타입이라 자례는 자신이 여기까지 온 연유를 듣지 못했지만 잠시 동안 다른 것은 접어두기로 했다 집안일을 해본 적이 없는 자례의 어물어물거리는 꼴이 보기 싫은 시동은 아애 그를 밀치고 혼자서 말린 우엉을 삶아 소금과 파를 넣어 볶고 생선을 굽자 자례는 방으로 들어와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빗어 단정하게 했다. 처음으로 할아버지, 아니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던 목씨 정륜의 묘를 보러 가는 날이었다. “네 놈 뭐하냐!” “아..아닙니다! 아무것도 안했습니다.!” “그럼 왜 그리 놀래?!” 불같이 호통을 치는 유견의 목소리에 자휼을 놀래 졸던 몸을 벌떡 세웠다. 눈앞에서 왔다 갔다 거리는 것은 유견의 목검이고 딱 소리가 나면 아픈 것은 내 머리다. 딱딱거리는 소리에도 한가하게 풀을 뜯는 것은 명마 흑염이다. 말은 수련 안 해도 되니 정말 부럽구나라고 헛생각을 하는 순간 머리가 또 울린다. 이런 도깨비 같은 노인이 있나. 성을 빠져나와 달린 난곡이라는 산으로 들어갔다. 너무도 험한 산에 스스로 지쳐갈 무렵 저 멀리 꼭대기에서 불빛이 보여 안심한 마음에 달려갔다. 조그만 초가에 김이 무럭무럭 오르고 작은 방에는 불이 켜있어 사람이 사는 곳 같아 도움을 청하려고 말에서 내리는 순간이었다. “네 놈 늦어!” “왁!?” 벌컥 열리는 문에는 귀신도 도깨비도 아닌 유견이 우락부락한 얼굴로 앉아있었다. “어...여길 어떻게...” “네 놈 기다리고 있었다. 냉큼 가서 차 좀 끓여 와라!” 타악하고 문을 닫혀버리는 소리에 자휼은 뭔가 엄청나게 억울함이 느껴졌지만 다시 한번 들리는 호통소리에 부엌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렇게 한달...” 밥 짓고 빨래하고 나무하고 심지어 반찬을 만들며 기본치기만 하루에 수천 번을 연습하고 산행에 폭포수행, 새벽길 뛰기, 아버님조차 시키지 않았던 호된 훈련에 하루하루 힘들다고 소리라도 치고 싶지만 저 괴물 같은 늙은이와 단둘이니 이것을 어디다 호소하란 말인가. 들리는 것은 하루 종일 검의 도를 외우는 소리다, 하긴 그 소리도 잘 들어보면 즐겁다. “타거타거 죽타거,풍타해타 송타진,무풍허풍 진풍타...” “애야 목이 컬컬하다.” “예예. 마진석진 송진풍, 태풍자풍 천신풍..” 자신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부엌으로 달려가 차를 내오는 행동에 절망스럽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애야." "예" 유견이 차를 내온 자휼을 불러 전서를 넘겼다. "이것이 사실이냐?" "..." “거참, 그 당당하던 계명가가 사라졌구나.” 자휼은 고개를 끄덕였다. 유견은 아무말없이 전서를 화로에 잘 넣어 태웠다. 조금 시간이 지난 후 이상하다는 듯 자휼이 물었다. "스승님." "왜?" "어째서...왕자가 죽였다는 것을 왕궁에서 비밀로...?" 전서에는 계명가가 끝났다는 말 뿐 쉬첸의 이야기는 없었다. 하지만 없다해도 알수 있는 것이 아닌가. 바로 내가 죽였으니. 왕자가 죽었는데 아무런 소문이 없다는 것도 이상하다. "...허. 네 놈은 운이 좋았던 것이야. 아니라면 그 왕자가 지독히 운이 없었거나." 유견이 고개를 저었다. "얼마 후에 황제 아골타의 생일이 온다. 그런데 그것을 얼마 앞두고 왕자가 죽었으니... 황제의 큰 경사를 치를 이때 그런 흉사를 앞서 치룰수 있는 줄 아는가? 그래서 숨겨 버린 것이야. 아마도 그 경사가 끝나면 바로 왕자가 죽었다는 것을 알릴것이다." "그렇다면...왕자의 죽음은 어떻게 해명합니까?" "왜 해명하겠나? 뭣하려 해명해? 제 생일상 맞춘다고 아들 놈 시체를 골방에 두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해명을 해? 아서라. 첫아이까지 독을 먹여 독살한 아비에게 뭘 바라는 것이냐. 며느리를 탐내 아들의 시체에 활을 쏜 아비다." 차를 마시며 자휼을 보자 굉장히 떨떠름한 얼굴이다. "왜? 또 물어보고 싶은것이 있느냐?' "...아닙니다. 그저 ... 제가 너무 목래안에 갇혀 있었나 생각했습니다." "목래에 뼈를 묻고 싶었느냐?" "...그럴 생각이였습니다만은..." "네 그 아우는 어찌되었느냐?" "예?" "마차에 없었다면 계명놈이 데리고 있었다는 이야기 같은데, 전서에 계명은 멸족되기전 그의 집이 불타버려 안의 사람들이 타 죽었다고 되어있지 않느냐?" 자휼이 고개를 숙이고 아무말 하지 않자 유견은 딱하는 듯 말을 걸었다. "그래 간밤에 네 아우 혼령이 나타나 형님 억울하오, 내 원한 갚아주오라고 말하고 사라지기라도 한것이냐?" "스...스승님!" 유견이 껄껄 웃으며 화로를 가까이 잡아 당겼다. "걱정말아라. 아마 잘 지내고 있을것이다." “예?" 혹시나 하는 생각에 자휼이 고개를 들자 유견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네가 한 일이 혈족에 의해 처리되었으니 그 아이도 그럴것이라 생각이 들뿐이야." "그럴까요?" "물론 못난 형때문에 불난 집에서 고생 좀 했을지도 모르지만, 혹시 아느냐 먼저 나와 버렸을수도 있고..." "....먼저?..." 자휼은 얼마전의 그날을 떠올렸다. 사실 죽일필요는 없었다. 그래 죽일 필요까지는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믿었던 사람에 대한 극한 배신. 그리고 두번 다시 찾을수 없을지도 모르는 불안. 하나 남은 혈육에 대한 내 집착. 한순간에 내 스스로 마음을 흔들어 칼을 내리치고 말았다. 그래 사실은 죽일필요까지는 없었던 것이다. "이제 그만 정신을 다스리거라. 부고소식이 아직 없으니 살아있는 것이 분명하다.네 자신을 다스리지못한다면 어찌 다시 장수로써 일임하겠느냐?" "...송구스럽습니다." 고개를 숙였지만 머리속이 빙빙 돈다. 믿었던 사람에 대한 극한 배신. 그리고 두번 다시 찾을수 없을지도 모르는 불안. 하나 남은 혈육에 대한 내 집착. 하지만 내가 쉬첸의 목을 자른 것은 그가 내 아이에게 마음을 주고 있다는 것에 대한 질투. 그리고 아이가 정말로 쉬첸을 따라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마차에 자례가 타고 있어도 난 쉬첸을 죽였을거다. 분명해. "자중하겠습니다." "믿어보겠다." "..." 자중해야지. 이러다 그 녀석이 정말로 내 맘을 알아버리면 어쩐단 말이냐. 그럼 안돼지. 하지만 정말로 두려운 것은 그 아이를 못 놔주도록 커지는 내 집착. 아우가 날 떠나려 하면 난 그아이를... "...!" "왜 그려느냐?" "...아..아닙니다." ...죽여버릴지도 몰라. 이게 무슨 감정일까. 이런게 은해라고 할수 있을까. 이런게 다솜이라 할수 있는가. 이건 그저 내 소유욕은 아닐까. 모은 두 손이 떨리는 것을 느낀다. “좋은 곳에서 가셨군요.” “나도 여기서 가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하곤 하지.” 유번은 너무 깊어 초록색으로 보이는 호수가 펼쳐진 산위에서 중얼거렸다. 자례는 바람에 날리는 머리를 뒤로 넘기며 생각에 잠겼다. “형이... 상주를 섰습니까?” “물론 가신의 상에 상주를 선다는 것은 안 되는 일이지만 네 형은 ...” “저도 그랬을 것입니다.” 자례는 뽀득거리는 눈을 손으로 뭉치며 중얼거렸다. “저도 제가 명림씨라는 것에 대한 자각이 생기지 않습니다. 이상하지요. 목래는 타버렸고 할아버지마저 돌아가셨고 형을 만나보지도 못했는데 아직도 내 마음은 목래에 가있습니다.” “...아직 어리니까. 게다가 자네나 형이 지금 당장 우보를 내림받아야 하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그렇군요.” 뭉친 눈덩이 위에 작은 눈덩이를 올린 자례는 손가락으로 눈, 코, 입을 쿡쿡 눌러가며 두 개를 더 만들었다. 가장 큰 눈사람에게는 솔잎으로 수염까지 달고 감상하던 자례는 작은 나뭇조각으로 그 옆의 눈사람에게 칼까지 쥐어주고는 가볍게 손을 털며 일어났다. “그만 돌아가실까요?” “그럴까. 죽은 자도 기념해야하지만 우린 살아있으니 점심이나 먹으러 가자.” 흔쾌히 웃으며 일어나는 유번은 자례의 손을 잡고 산길을 내려갔다. “너 사실은 형이 보고 싶지?” “예.” “...조금은 아닌 척 좀 해라. 기르는 사람 섭섭하게...” “하나도 안보고 싶어요.” “그런 생판 거짓말은 말고.” 유번은 피식 웃고는 어두워지려는 산길을 내려갔다. 봄이 왔지만 아직 눈이 녹지 않아 미끌미끌 거리는 산길을 내려가기란 그리 쉽지 않았다. 몇 번을 휘청거리던 유번의 등 뒤를 불안하게 따라가던 자례의 눈에 얼핏 무엇인가가 스쳐 지나갔다. 저 멀리 이곳을 바라보는 듯 하면서 스치는 저 하얀 것은... “유번님.” “왜? 말 걸지 마라 미끄러진다.” “매구입니다.” “뭐?!” 자례가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하며 몸을 낮추고 정면을 가리켜 보였다. 어슴푸레 내리는 어둠 속을 뚫고 유견이 그곳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한참을 그렇게 있자 내린 눈이 움직이는 착각에 빠질 정도다. 아니, 정말로 눈이 움직인다. “허! 하얀...” “조용히.” 파란 눈을 하고 있다. 그것은 도깨비불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죽은 망자의 혼이라고도 불리기도 한다. 지루하다는 듯 몸을 천천히 풀며 일어난다. 새하얀 털이 단 하나의 흠집 없이 매끈하다. 천천히 등을 돌리며 사라지는 그것은 곰의 몸집을 가진 뿔이 달린 하얀 여우다. 그리고 그녀를 따라가는 공작과도 같은 순백의 9개의 꼬리. 정안족은 그것은 매구, 한족은 그것을 구미호라고 부른다. 그녀가 이쪽을 돌아보자 자례와 유견은 공손하게 눈 위에 부복했다. 매구. 아홉 개의 꼬리가 달린 영물로 고구려 왕가의 수호 영물이다. 왕씨 중 출중한 자를 골라 옥좌로 안내하고 그 자격이 정당치 못한 자가 옥좌에 앉게 된다면 옥좌 앞을 가로막고 내려가지 않는다는 영물. 한족은 그것을 구미호라 불렀다. 실제로 매구의 생김새는 여우와 흡사했다. 그 곰과 같은 거대한 몸집에 대호라고도 불리기도 했다. 그들은 매구가 매우 난폭하고 사나우며 인간을 잡아먹고 가축을 헤친다고 했다 . 하지만 실제로 매구는 영물로 그 어떤 것도 먹는 일 없이 없었다. 산에 사는 영물이라면 당연 가축을 지키는 수호신의 역할, 그 생김새 때문에 다른 요물들의 누명을 쓰는 영물이다. -자닝...자닝하여... “?!” 유견과 자례는 낮고 울리는 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하지만 눈앞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직도 놀란 유견이 더듬더듬 말했다. “...지..지금 매구였군. 정말로 매구였어! 맙소사, 아직도 매구께서 있다니! 아직도 있다니!” “...” “우리 정말로 본 것이지? 매구였네. 구미호 따위가 아닌 매구였어! 그녀가 말을 하는 것을 들었지? 너도 봤잖니! 이거 왕씨에게 말씀 올릴 일이다.! 그녀가 뭐라 했더라..그..” “...자닝...자닝하다 말하셨습니다.” “그래! 그렇게 말씀하셨지! 자닝, 자닝... 자닝? 그 자닝?!” 유견이 인상을 쓰며 자례를 돌아보았다. 자례도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더듬더듬 중얼거렸다. “...그 꼴이 너무나 참혹하여 차마 보기 어렵다...?” “그 자닝인가!?...매구께서 어째서 그런 말을...!” 해가 지고 있지만 두 사람은 찬바람이 불어올 때까지 그 자리에 꼼짝도 안하고 서있었다. -- 단설의 역주는 인용과 개인적 견해가 들어간 글입니다.(맹신(盟信)사양. 도용씁쓸)-- 주: 매구- 천년 묵은 여우가 변하여 된다는 괴이한 짐승. 우리가 흔히 구미호라고 알고 있는 이 매구는 영화에서 보는 공포스러운 존재가 아니였다. 뱀과 잉어가 변하는 이무기처럼 여우가 변하는 매구는 영물로 추앙받았다 한다. 특히 고구려에서는 하얀 구미호 온매구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등장한다. 물론 정사가 아닌 사기지만 가장 유명한 것이 유리왕의 통치시 나타난 하얀 매구이다. <왕이 옥좌에 오르려 했으나 홀연히 나타난 하얀 여우가 옥좌에 앉았다. 꼬리가 아홉달린 그것은 옥좌를 가로 막고 왕이 단상에 올라오지 못하게 막았다. 왕이 그것을 물리치라하자 신하들은 그것은 나라를 지키는 영물이라하며 왕을 말렸다. 하지만 왕은 스스로 활을 들어 그것을 세번 쏘았으나 옥좌엔 아무것도 없었다. 갑자기 통곡하는 울음소리가 궁안에 진동하여 모두들 나가보니 궁전의 지붕에 그것이 올라 북쪽을 향해 세번 울고 하늘로 날아갔다. > 이 사건 이후 유리왕은 병이 들어 죽는다고 되어 있다. 이와 같이 우리에게 매구는 요사스런 존재가 아닌 영물이였던 것이다. 우리나라에 실제로 구미호가 들어온 것은 얼마 안되는 일이고 구미호라는 가상의 동물의 탄생 배경은 은나라 주왕(紂王)의 농락한 달기로, 영왕이였던 주왕을 허물어뜨린 그 교태를 아홉마리의 여우에 비할바가 못된다한 그 말이 구미호라는 말을만들었다. 즉 구미호는 교태를 잘 부리는 아름다운 여인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포락지형이라던가 주지 육림같은 엄청난 대 공사를 일으켜 구미호(달기)라는 말이 공포의 존재가 된것이 아닐까. 간을 빼먹는 이야기는 임신한 여자의 배를 갈라 속을 보던 달기의 이야기에서 비롯한것이라 생각이 든다. 물론 달기에 관한 모든 이야기들이 주나라의 멸망을 정당화하려는 당시 사학자들의 거짓말이라는 설도 있다. 참고로 고구려는 초반의 제정일치 사회로 왕씨가 사람들이 이능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이 자주 나온다. 지금 생각나는 것은 새를 다스리는 능력을 지녔다는 동명성제와 둘째 황후 송양의 차녀 송씨가 낳은 황녀가 그랬다는 걸로 기억된다. 둘이 죽었을때 궁에서 봉황이 나타나 북쪽으로 날아가버렸다는 이야기도 사사에 등장한다. 주: 자닝하다 - 약한 자의 참혹한 모양이 불쌍하여 차마 보기 어렵다. 순수 고어. 46 못내 마음에 안든다는 표정으로 두 왕자는 빙고를 바라보았다. 하얀 벽돌을 깔아 빛나는 궁안의 길 중앙에 버티고 선 그들은 찬 바람을 맞아가면서도 피할 생각은 없는 듯 하다. "빙고(氷庫)가 출입금지되었군. 저곳에 무엇이 있는지 너는 알지?“ "..." 레이첸의 질문에 태진은 아무말도 하지않았다. 저 곳에 무엇이 들어있느냐고? 귀한 과일들과 축일때 사용할 고기들이 들어있겠지. 그리고 한쪽에는 관에 놓인 내가 좋아했던 형제의 시체가 놓여있을 것이다. 지지리도 못난 놈 죽을 날도 어떻게 이런 날로 골랐단 말이냐. 아직 너와는 화해도 못했는데 이렇게 가버린단 말인가. 아쉬움에 태진이 한숨을 쉬자 레이첸은 태진은 두고 자신의 궁으로 발길을 옮겼다. 하지만 태진은 따라가지 않았다. 지금은 다른 생각에 잠겨 철부지 4왕자의 일에 매달리고 싶지 않았다. "..." 손가락을 꼽으며 날짜를 세던 태진은 절망했다. 약 한달 뒤가 황제의 축일. 그 한달 못되는 뒤가 레이첸의 축일. 그리고 그 후 2왕자의 축일이 있다. "그 뒤가 1왕자의 기일이다. 맙소사. ..." 저 놈이 빙고에서 나와 흙으로 돌아가려면 적어도 네달 이상은 저곳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배분이 낮은 왕자가 죽었을 경우는 황제의 축일앞으로 기일을 정하지 못하고 자신보다 높은 배분의 왕자의 축일이나 기일 앞으로도 기일을 정할수 없다. 빙고라서 시체가 손상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황제는 15왕자의 죽음을 숨기라 말했다. 그래서 15왕자의 궁은 조용하다. 울음소리도 조등도 없이 마치 주인이 있는 것처럼 조용히 돌아가고 있을 뿐이다. 텅 빈 궁인데 누군가 있는 듯 매일 식사가 들어가고 청소를 하며 음악이 울린다. 차라리 부인이라도 있다면 덜 했을 터인데. 태진은 자신의 궁으로 향했다. 가던 도중 2왕자의 환관들이 15왕자의 궁으로 가는 것을 본다. 비밀이라고는 하지만 2왕자는 오늘 쉬첸이 죽은 걸 알게 되겠군. 자신의 궁으로 돌아오자 자리에 털썩 앉아 한참을 침묵하던 그는 결국 눈을 뜨고 책상 앞에 놓여진 검을 들었다. 계명의 집이 완전히 불타기전 병사들이 가지고 나온 검이다. 본 순간 낯익은 느낌에 그것을 자신이 가지고 돌아왔다. 오래되고 거친 느낌. 보관상태도 그리 좋은 것은 아닌 것 같다. 좋은 검이긴 한데 명검이라 하기엔 좀 부족하다. 역사에 기리 남을 검은 아니다. 견고함과 세월의 흐름이 보이는 명검이다. 분명하다. 이것은 그놈이 가졌던 것과 같다. 달린 술만 색이 좀 다른 것을 빼면 검집의 박쥐문양까지 똑같이 그려있다. 검집에 그려져 있는 박쥐는 한족이나 초원의 민족에게 볼수 없는 것이다. “...그 놈 살아있는 것이 아닌가?” 마지막까지 속을 썩이던 목래의 주인이라는 놈. 이것은 그놈의 검이랑 똑같았던 기억이다. 계명이 넘겼던 장군검은 바로 이것이였다. 그렇다면 이것은 그의 장군검인가. 계명이 그냥 전리품으로 가져온것이였나? 문제는 이검이 계명 정도의 장군이 탐낼 만한 그런 검은 아닌것 같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이 검이 계명의 집에 있었을까. 우연한 결과로 치기엔 우습지 않은가. 칼을 내려놓으며 태진이 몸을 깊게 의자에 기댔다. 공성에 대해 쉬첸에게 문책을 받은 계명이 쉬첸을 암살하고 그것을 성안 병사들에게 틀키자 집안에서 독을 먹고 자살했다고 밝혀졌다. 전날 쉬첸이 계명에게 초대를 받았다는 것은 이미 황궁에도 알려진 사실이였다. 어떠한 다툼이 있었고 그 이유로 계명은 쉬첸을 죽이고 자살했다. 무리 없는 이야기였다. 실제로 쉬첸의 마차는 공격을 받아있었고 그 수는 한두명이 아니였다. 암살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듯 그를 호위했던 병사들까지 모두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남아있는 발자국들은 왕성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그 때문에 더 이상의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왕족이 죽은 일도 불미스러운 일인데 그 살인자가 왕성으로 도주했다는 사실은 형제끼리의 다툼이나 욕심을 의미하여 황제가 조사를 중단시켰기 때문이다. 그래서 쉬첸의 죽음은 영원히 미궁으로 빠졌다. 아마도 축일이 다 지나고 나면 쉬첸은 급살내지는 지병으로 죽었다고 백성들에게 알릴것이다. 하지만 태진은 스스로 생각할때 계명이 쉬첸을 죽였다는 것은 무리가 있어보였다. 좋게 생각하자면 쉬첸이 목래의 공성에 대해 계명에게 캐물었고 별수 없이 다 말해주고는 뒤로 번질 여파를 생각해 쉬첸을 죽이고 스스로 자살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계명은 자살할 만큼 내 심복이 아니었다. 그는 야망이 있는 위험한 놈이었고 난 그의 그 야망을 이용한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말이 안 된다. 나쁘게 생각하자면 한도 끝도 없지만 가장 생각하기 쉬운 것은 4왕자를 노리는 자가 보좌격인 나에게 경고 차원으로 계명을 죽이는 경우다. 목래의 공성을 약점삼으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살해장면을 계명의 집에 들린 쉬첸에게 들켜 그까지 죽였을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암살계획을 세울만한 상대라면 3왕자나 5왕자 뿐인데 신년인사에 2왕자의 힘을 업은 쉬첸을 그렇게 죽인다는 것은 억지다. 그것은 2왕자에게 도전하는 것이 아닌가. 단순히 나나 4왕자에게 경고를 주는 차원을 벗어난 것이다. 잘못된다면 도리어 모든것을 덥어쓰게 되는 것이니까. 아니라면 정말로 목래의 그놈이 살아서 복수를 하는 경우도 있다. 아무튼 살아난 그놈이 계명을 죽이고 그곳에 온 쉬첸까지 죽였을 경우다. “그건 말도 안 된다. 그놈이 귀신도 아니고...” 차라리 군대가 달려들었다고 하면 이해가 가련만. 정안족의 군대가 반기들 들었다라면 쉽게 설명되련만. 무슨 일인지 그날 근처의 정안족들은 작은 명절이라도 지내고 있었는지 사내들은 성밖으로 나가고 계집들만 집안에 남아 떡을 만들고 있었다. 계명은 자신의 잔에 독을 타서 먹었고 그 후에 왕성으로 오는 가장 작은 길의 중간에서 쉬첸은 칼로 목이 잘려서 발견됐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를 호위하던 병사들은 활에 맞은 시체로 발견됐고. 이건 도저히 혼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발자국도 다섯명정도의 무리였다. 즉 준비되어있었던 살인인데 쉬첸이 외출할것이라. 그것도 평소에 전혀 왕래가 없던 계명의 집에 나간다는 것을, 올떄 작은 길로 돌아왔다는 것을, 그 누가 알고 미리 계획을 세운단 말인가. 각각 따로 다른 사람이 죽였다고 생각하면 단순하겠지만 어느 한날에 어느 동시에 어느 연관도 없고 어느 적도 없는 그들이 그렇게 한꺼번에 죽었는데 안 찜찜할 리가 없다. “...모두 연관이 있다면 나인가...” 태진은 머리도 식힐 겸 정원으로 나갔다. 머리 아프다. 이런 골칫거리를 해결해 줄만한 놈 어디 없나? 잠시 자신의 궁에 앉아 문을 노려보며 태진이 들어오는지 확인했다. 태진이 안들어올것이라는 확신이 선 레이첸은 재빨리 서랍에 구겨두었던 옷을 꺼내 입고 서둘러 궁을 나갔다. 궁 밖으로 나가는 사람은 잡는 법이 드물기 때문에 쉽사리 빠져나온 레이첸은 환하게 웃으며 소리쳤다. “생각을 많이 하면 그다지 몸에 좋지 않은 거지!” 도성을 빠져나와 한참을 전력 질주하던 레이첸은 문득 허기를 느끼고 다시 도성근처의 한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간단한 요깃거리를 시키고 식당을 둘러보자 한 무리의 사냥꾼들이 보인다. 그들의 건장한 체격과 무엇인가 비밀인지 소곤거리는 폼이 호기심을 만들어 레이첸이 그들에게 다가갔다. “보시오, 형씨들. 무슨 이야기인지 나도 들어도 되겠소이까?” “...사냥꾼이요?” “뭐, 그럭저럭 밥을 먹고 살아가는 인간이올시다.” “그럼 안 되오” 딱 잘라 말하는 그들을 보며 레이첸은 어리둥절했다. 그 중 뚱뚱한 자가 조용히 말해주었다. “곡양산으로 짐승들이 마을로 내려온다는 소문이오.” “산짐승이 마을로 내려온다?.. 곡양산에 호랑이 때라도 생겼단 말입니까?” “그럴 수도 있지. 아무튼 근간에는 곡양산으로 가면 위험할 것 같소.” 사냥꾼들은 서로 눈짓하며 자리를 일어났다. 가기 전에 그 뚱뚱한 자가 뒤를 돌아보며 레이첸에게 경고했다. “호기로 갔다가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소. 곡양은 옛날부터 곰이 나타나기로 유명한 산이오.” 레이첸은 그들에게 웃어주고는 자신의 자리에 앉아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이번엔 곰사냥이나 한번 가볼까. 혼자서 힘들다니 , 하지만 산을 미리 보아두는 것은 괜찮겠지. 그러다가 조금 들어가도 어쩔수 없고 그러다 보면 사냥도 할 수 있고.. 뭐.. 결국 몸이 근질 근질한 것을 느낀 레이첸은 체 다 먹기도 전에 일어나 식당을 나가 말을 달렸다. 하류사는 그냥 미소 지으며 창을 내다보았다. 아직 눈이 내리지만 이곳은 아름다운 꽃들이 만개하며 온실에서 키운 나비를 유혹한다. 반년마다 거주하고 있는 곳을 옮기지만 지금 살고 있는 곳의 위장은 화원이었다. 진귀한 꽃들과 나비를 잡아 종이 등에 넣어 파는 일. 워낙 세심한 일일까. 고상한 공자들이 아니라면 여인들이 주로 오는 곳이기 때문에 제일 안전한 곳이기도 했다. 무척이나 지루한 곳이기도 하고. 문가에 앉아 바느질을 하고 있는 여관을 바라보다 하류사는 일어났다. " 여관, 나 잠시 나갔다 오겠다." "호위장수를 불러드리겠습니다. "아니, 그럴일은 아니다 단지 백라가 오늘 들어오면 여행준비를 해놓으라 하라. 돌아오면 바로 출발할수 있도록." "... 시간을 타실 생각이십니까. 이곳이 한가로와 지겠습니다." 여관의 대답이 떨어지자 하류사는 미소지었다. 하류사보다도 자신의 아버님 보다도 자신을 이해해주고 믿어주었던 것은 흥료성에서부터 책상을 정리해주는 이 여관이였다. "여관께서 또 고생좀 하셔야겠지" "그렇군요." 그녀가 한족의 옷을 내오며 웃었다. 이젠 손을 올려도 목깃을 세워드리기엔 힘들 정도로 커버린 왕씨지만 자신의 마음속에는 어린 소년일 뿐이다. 명을 받고 나갔다 돌아온 환관은 홀로 들어와 소근 소근 무엇인가를 속삭였다. 품안의 무엇인가를 꺼내 준다. 모두들 나가게 하고 그것을 읽는다. “...아까운 동생을 잃었다.” 체이첸은 힘없이 중얼거렸다. 나는 정말로 복도 없구나. 늦게나마 말동무할 동생을 찾았다고 생각했더니만 고작 이렇게 죽어버린단 말인가. 또 할일 없이 무료하게 혼자서 책만 들여다보는 생활이 되는 건가. 쓸쓸하게 책상을 쓰다듬던 체이첸은 문득 쉬첸이 주고 간 영웅서를 들여다 보았다. 그러고 보니 천거 받기로 한 자도 물건너 간것이군. “...목래라 하였나...” 책을 넘기며 목래 편을 본 체이첸은 두 번 정도 읽고선 사람을 불렸다. 공손히 다가온 환관이 머리를 조아리자 체이첸은 조금 밝아진 얼굴로 말했다. “구관들을 모아 목래의 태수에 대해 알고 있는 자들을 찾아오라.” 내가 왜 이제까지 그런 생각을 못했던 것일까. 나와 같이 책을 읽고 이야기해줄 사람을 내가 불러오면 되는 것이다. 왕성사람들에게는 세력다툼 때문에 가까이 하지 못하지만 저 먼 지방의 군주는 괜찮지 않을까. 게다가 이젠 슬슬 심복을 키워 세력을 늘려야 하는 때인지 모른다. 나는 장자니 황제가 되지 못하면 반드시 죽는다. 아무리 선비라 하지만 그것을 잊은 것은 아니다. 체이첸에겐 가족이 있었다. 부인들도, 자식들도, 가신들도. 그는 그들을 좋아했고 그들을 지키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보다 신중했다. 아니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체이첸은 깊게 생각에 빠져들었다. 분명 자신은 쉬첸이 나갈 때 천거된 이에게 주라 자신의 가신패를 넘겨주었다. 하지만 쉬첸의 시체에 그것이 나왔다고 적혀있지는 않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디로 간것인가. 누군가 가져갔다면 낭패다. 물론 그 패를 입궁 금지 시키면 되는 일일지도 모르지만, 그 패를 입수한 다른 왕자들이 엉뚱한 일을 벌일때는 자신이 수습하기 힘들어 질지 모르는 것이다. 패를 찾아야해. 하지만 명성이 태자라고 하니 황궁을 나간다는 것조차 다른 왕자들과는 다른 ‘큰일’이다. 결국 누군가를 시켜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에게 그런 일을 맡길만한 인물은 없는 것 같다. 선비라면 많지만 이런 일에 선비를 쓰기엔... 사람이 필요하군. 체이첸은 등을 벽에 기대며 숨을 내쉬었다. 이런 일을 해결해줄 사람이 필요해. 매서운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누군가 두개의 나무통을 연결한 물지게를 지고 와 깨진 얼음사이의 물을 길었다. 양쪽어깨에 걸치지 않고 한쪽 어꺠에만 걸쳐 매고 험한 계곡을 올라가면 벼랑끝에 지어진 작은 오두막이 있었다. 방 두 개에 부엌만 딸린 그곳에 오른 사내는 손에 물지게를 내려놓고 잠시 하늘을 보며 허리를 핀다. 꽤나 힘든 일인지 땀이 흐르지만 차가운 바람에 피부가 얼얼해 버리고 만다. 반면, 방안에서 따뜻한 화톳불에 도토리를 굽고 있던 유견이 무릎을 탁 쳤다. “오늘은 길조다. 이런 이런, 귀한 손님이 오실 것 같다. 애야! 차나 끓여라!” “예예!” “불도 더 때라! 춥다. 늙은이를 얼려 죽일 생각이냐!” “아닙니다!” 안 그래도 계곡에서 떠온 물을 큰 항아리에 담으며 자휼이 대답했다. 차잎을 꺼내면서도 자휼은 손님이 올것이라는 생각은 안하고 있었다. 유견이 저런 말을 벌써 일주일째 말하고 있었다. 아마도 누군가를 기다리는 모양이다. 한손으로도 도끼를 내리쳐 장작을 패는 것은 익숙해져서 쉽사리 한 묶음의 장작을 패어 부엌으로 가져가 아궁이에 발로 차 넣었다. 처음 왔을 때 도끼질을 할 수 없어서 냉방에서 둘 다 오돌 오돌 떨던 기억에 자휼은 소리 내지 못하고 웃었다. 늙은이 고집하고는. 그렇게 추워하면서도 내 손으로는 안하겠다며 오기를 부리다 둘 다 감기에 걸려 얼마나 고생했는가. 어떻게 보면 자휼이 반신을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유견의 고집이 단단히 작용했는지 몰랐다. 지독하다고만 생각했던 수련도 어느 정도 가자 차차 몸에 익숙해져 견딜만해지고 스스로가 느낄 만큼 성한 반신(半身)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다. 말은 험하게 하지만 유견도 자휼을 아끼는 터라 처음 생각했던 수련중의 비명횡사는 없었다. “게다가 이 것. 재미있다.” 자휼은 차잎을 솥에 넣고는 마당으로 내려와 눈 속에 박혀있는 두 자루의 진검 중 하나를 들었다. 외 검을 쓰는 것은 이젠 힘들지 않다. 전에는 없었던 균형 감각이 생겨 외검을 쓰는 것은 오히려 쉬웠다. 요즘 배우는 것은 이검이다. 쌍검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두 검을 줄로 고래 힘줄을 넣어 짠 술로 이어 그 당겨짐과 놓여짐을 적절하게 이용해 한손으로 두 검을 다루는 것이다. 왕씨가 24반 12문까지 익혀 십이검을 할 수 있다고 하는데 한번 꼭 보고 싶다. “벌써 이검인가?” “...왕씨?” 자휼이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얼른 부복했다. 사박거리는 발걸음소리가 들리며 조금 떨어진 나무사이로 하얀 모피를 입은 왕씨가 걸어나왔다. 깊이 쌓인 눈에 긴 옷자락을 손으로 올려가며 왕씨는 이곳 저곳을 둘러보았다. “도성보다 이곳이 춥군. 이곳은 언제나 추워.” -- 단설의 역주는 인용과 개인적 견해가 들어간 글입니다.(맹신(盟信)사양. 도용씁쓸)-- 주 : 빙고- 우리나라의 석빙고와 마찬가지.겨울에 얼음을 채빙하여 태양열과 직사광선이 들어가지 못하게 하여 여름에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든 창고 주 : 고구려 복수 검- 이것은 고구려이 무사들은 허리에 3개의 검을 차고 다녔다. 라는 데서 사용한 것이다. 당시 중국에서 사용된 것은 외검술이였고 고수려와의 전쟁때 장수들이 새개의 검을 휘두드는 것에 두려워 했다는 글이 전해진다. 이때 중국은 검(劒:직선으로 뻗은 칼)이였고 고구려는 도(途: 휘어진 검)을 사용했다. 경당의 다른 말은 '24반 무예'인데 무예도보통지에서 24가지의 무예를 선보이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려지고 있다 한다. 47 방이 기분 좋게 뜨겁다. 유견이 화로를 뒤적였다. 빨간 불씨들이 화들짝 놀라 숨을 들이켰다가 다시 숨어버린다. “내 기대를 어기지 않고 조용히 생활하고 있는 듯 해 마음이 놓이는군.” “왕씨, 도성의 일에 관해서는...” “아서라.” 자휼이 변명의 말을 늘어높기 전 유견이 말을 끊었다. 한가하게 차를 마시는 왕씨에게 고개를 숙이며 유견이 대신 말한다. “이놈의 치기 정도야 예견하고 계실것이라 생각합니다.” “흐음. 노익장은 장수가 마음에 드시는 모양인가.” 하류사는 피식 미소지으며 차를 내려놓았다. “도성의 일에 대해 책임을 묻기 위해 나온 것이 아니야. 그냥 산책일세.” “호위도 없이 이곳까지 말입니까?” “나도 이곳에서 수련하지 않았던가. 조용하고 수련에는 좋은 곳이지.” 유견의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피해가며 왕씨는 자휼에게 말했다. “장수에게 아우의 소식을 말해줄까하기도 했지만.” “동생을요?” 자휼은 고개를 들었다. 하류사는 뜨거운 차를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계명의 집을 나왔다. 지금 외각의 유번과 함께 지내고 있지.” “왕씨께서도 참. 이런 놈에게 그런 소식을 알려주었다간 지금까지 쌓아온 공든 탑이 무너진단 말입니다.” “후후 늙은이는 날 용서하시오.” “제가 감히... 그렇다는 말이지요.” 말과는 달리 유견도 좋아하는 눈치였다. 보아하니 자휼이 그동안 꽤나 칭얼거렸던 모양이다. 하류사는 자휼에게 물었다. “보러 갈 텐가?” “...!” 생각하지 못했던 직설적인 질문에 자휼은 당황했다. 왜 왕씨가 그것을 내게 물어보는 것일까. 보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닌가. 전쟁통에 잃은 아우를 찾았는데 만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던가. 가야지. 어서 가서 한번 보아야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내가 가서 봐야지. 당장이라도 가야지. 가고 싶다는 욕망이 꽉 차 올랐지만 이상하게도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왜 그런지 스스로 답답해 할정도로 이유가 떠오르지 않는다. “...왜? 안 가련가?” “잘... 모르겠습니다.” “하긴. 둘 다 성장했으니 이젠 서로 갈 길을 가도 될 시기야.” 이해한다는 듯 하류사가 빙그레 웃으며 차를 마셨다. 스스로도 이해할 수가 없어 갸웃하는 자휼을 앞두고 안보이게 미소짓는다. 어찌 모르겠는가. 홀로 지낼 때는 모르는 것이다. 하지만 막상 나서려고 하니 떠오르는가.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되었다는 것이. 형제라도 잘 봐주기 힘든 모습이니 어찌 나서고 싶겠는가. 쉬첸을 죽이지 않겠다고 말했을 때는 무척이나 냉정하다고 생각했고, 뜻대로 쉬첸을 죽였을 때 우직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은 세심한 면도 있군. 재미있는 장수야. 조금 있자 스스로도 이유를 발견한 듯 표정이 변한다. 사색이 되어버리는 자휼의 얼굴을 들여다 보자 생각하고 있는 것이 그대로 들어나 이 장수는 모략에는 익숙치 않다는 것을 알아챈다. “...안 만나겠습니다.” 힘들게 입을 땐 자휼은 대답한 후에도 갈팡질팡하는 마음에 두서를 잡지 못한다. 너 정말이야? 안 만날 것인가? 지금 안 만난다면 다음에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바보 같은 짓 하지 마. 어서 다시 말해. 가서 보고 말을 걸고 안아보고 얼굴을 쓰다듬어 주어야 마음이 놓이겠다고. 어서 지금.. “그럼 사는 곳이라도 보고오지 않겠나?” “예?” “그래도 혈육이니 사는 곳이라도 한번 보지 않겠냐는 것이야. 멀리서라면 ...” 하류사가 따뜻하게 미소지어보였다. 어차피 자네도 만나고 싶은 거 아닌가. 그 모습이 꺼려진다면 가끔 가서 볼 수 있는 곳은 알려줄 수 있지. 자휼은 고개를 숙였다. 왕씨인가. 그래 왕씨인가. 사람 마음을 잘 알아주시는 구나. 그래서 왕씨인가. 그래서 우리가 이 분을 모시는 건가. 왠지 뭉클한 가슴에 자휼은 애써 딴 생각을 하려고 노력했지만 눈이 뜨거워지는 것이었다. 유견도 헛기침을 하며 이 상황을 태연히 넘기려 노력했다. 녀석, 다 큰 자식이 동생보고 싶다고 울긴. 하긴 나도 이 나이지만 유번놈이 보고 싶구먼. 유번은 신중하게 붓을 들어 몇 자 쓰고 난 후 잠시 생각하고 고개를 저으며 종이를 화로에 던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리 좋은 일은 아닌 것 같다. 고구려가 사라지고 그 잔존들이 발해를 세우고 지금의 정안국까지 이르렀다. 이런 때에 매구의 출현은 길조다. 아직도 긴 전통이 건재하며 왕의 적임이 확실한 자, 지금의 왕씨 하류사를 지키러 온 것이 아닌가. “그런데 하필... 자닝하다라 말씀하시다니.” 비참함이 이를대없어 눈물이 고인다는 말이 아닌가. 군사를 모으고 힘을 기르는 이때에 그런 말씀을 내리신다면 그것은 패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유번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이 일을 비밀로 해야 할 것 같다. 자례는 함부로 발설할 것 같지 않으니 됐다. 문제는 영물인 매구가 살고 있는 곡양산의 짐승들이 자리를 피하는 일이다. 영물이 사는 곳이니 산짐승들이 자리를 피해주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나라가 건재했다면 그곳을 ‘매구두리‘라 하여 산짐승들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 신성시 여기며 출입이 통재되겠지만 지금은 안 된다. 이곳은 우리의 땅도 아닌 한족의 땅도 아닌 저 멀리 초원의 개들의 땅이 아니던가. 산 짐승들이 나간다는 것에 호기심을 가진 사냥꾼들 몰려올지도 모른다. 영물의 출현으로 인한 짐승들의 이동은 요물들이 나타났을 때와 같아 별 이상한 놈들도 몰려와 굿을 해댈지 누가 안단 말인가. “하필 매구께서도 곡양산에 들어 가셨단 말인가. 난곡 같은 곳이라면 얼마나 좋아! 바로 옆 산이련만. 옮겨가시면 안 되시나...” 말도 안되는 하소연을 늘어높던 유번은 번뜩 머릿속에 형인 유견이 떠올랐다. 같이 왕씨의 전서를 받았으니 어디로 갔을지도 모르지만 혹시 아는가, 떠나간 것이 아닌 도성의 모도리에 아직 있을지도? “자례야! 동자야!” 유번은 서둘러 책장위의 물건을 쓸어 모아 정리했다. 성안 모도리에 가서 형과 이야기 좀 해야겠다. 저 끝까지 초지가 펼쳐진 그 곳의 말위에서 손가락을 꼽으며 레이첸은 생각했다. 성에서 나온 지 이틀이다. 그렇다면 황제의 경축일이 앞으로 24일 남았다. 24일 중에서 7일 정도는 진상할 선물을 준비해야 하고 3일은 행사의 예행연습도 있을 것이고 여흥으로 준비하는 왕자들의 검무에도 연습 한번 해야 하니 3일은 또 빼야한다. “쳇. 가는데 꼬박 4일이 걸리니 가서 엉덩이도 붙이고 오기 힘들겠군.” 레이첸은 투덜거렸지만 어쩔수 없는 일이였다. 태진에게는 황제가 곧 죽을 늙은이라 말해왔지만 자신도 알고 있었다. 그 나이에도 무섭도록 건재한 황제의 권력과 힘을. 내가 이렇게 막무가내로 지내고 있지만 자신 역시 황제에게 크게 트집을 잡힐 일은 하지 않았다. 죽은 1왕자처럼 자신도 언제 아비에게 죽음을 당할지 누가 아는가. 그는 친 자식을 자신의 욕망과 맞바꾸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죽였다. “나는 그것을 잊지 않는다. 어리바리 당하지는 않아.” 레이첸은 말의 배를 찼다. 힘차게 달리는 말위의 찬 바람이 머리를 시원하게 식혀준다. 그래서 내가 말을 타고 달리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다. 곡양까지는 전력으로 달려 4일이다. “흠, 그러니 공자, 이것이 풀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걸 밟으면...” 종알종알 동자가 자례의 뒤를 따라오며 대장간의 물건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유번이 예정에 없던 도성으로의 회출에 자례와 동자가 대장간을 지켜야 했다. 물론 유번은 내가 돌아올 때까지 많아야 한명 식칼을 갈기 위해 올지도 모르니 그땐 미리 갈아 논 칼을 빌려주라 했지만 동자는 그렇지 않았다. 안 그래도 유번과 둘이서 잘 지내온 터에 난데없이 들어온 자례를 경계하는 눈치였다. 아마도 자신의 자리를 뺏겼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자례는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동자의 말에 귀 기울이는 척을 했다. 그 마음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서 웃어 넘길 수가 없었다. 물론 속으로는 웃었지만 저 어린 아이가 상처를 입을까봐 소리내어 웃지 못했다. 하지만 자신보다 무거운 망치를 들고 시범을 보이겠다는 동자의 모습에 자례는 헛기침을 하며 황급히 뒤로 돌아 입을 막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자례의 행동에 동자가 큰 망치를 질질 끌고 다가와 물었다. “여길 봐야, 아실 것 아닙니까. 어딜 봐요?” “...검이구나. 이거.” 자례가 대장간의 헌 쇠가 쌓인 곳에서 긴 장대 같은 것을 끄집어내었다. 먼지를 털고 이리 저리 살피니 분명 날을 세우지 않았지만 검이 분명하다. 날을 세우면 비수정도가 될 것 같다. “그건 유번님이 쓰고 남은 철을 뭉쳐 놓은 막대라구요. 아무리 글밖에 모른다고 하지만 어떻게 막대랑 검도 구분 못하고...” “너도 보거라.” 자례가 키를 낮추어 그 쇠막대를 보여주었다. “봐라. 검은 녹도 아니고 청동의 푸른 녹도 아닌 빨간 녹이 피었지? 이건 강철이라는 뜻이다. 납이나 구리가 들어가지 않은 순수한 철이란 이야기야. 게다가 녹이 핀 방향이 일정하지. 왼쪽에만 피고 오른쪽에는 피지 않았잖니?” “그쪽만 비가 맞았나보죠.” “아니지. 녹이 슨 이곳이 집게를 지고 녹이 안 슨 이곳이 날로 세우려다가 만 것이다. 망치질을 많이 하면 녹이 잘 안 슬거든. 크기를 보니 식칼보다는 작지? 단검이나 비수였을 거다. 게다가 녹이 슨 것을 보니 분명 자산의 강철 같구나. 자산은 철의 유명지란다.” “...거짓말?” “정말.” 자례는 옷 위로 입고 있던 포를 벗었다. 소매를 걷고 대장간에 걸쳐진 가죽 앞치마를 걸치며 동자에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내 칼은 누군가의 목숨 값과 바꾸었구나. 여기선 칼을 살수 없을 테니 하나 만들어볼까?” “...공자 대장장이에요?!” 동자가 놀란 얼굴로 되묻자 자례는 하얀 수건으로 머리를 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예전에 내 아버님은 검을 만드실수 있었다 하더구나. 형과 내 칼도 아버지가 만들어 주셨단다. 오래전 일이지만 네가 도와준다면 나도 할 수 있을지도 몰라.” “음. 좋아요! 여긴 내가 필요하죠. 공자가 뭘 알겠어요?” 짐짓 생색을 내는 동자가 밉지 않아 자례는 또 고개를 돌리고 소리 없이 웃었다. 하지만 여러모로 귀여운 아이다. 나도 동생하나 있었으면. 하지만 바로 실소가 나온다. 있는 형조차 잘 챙기지 못하는 주제에 말도 안되는 동생타령이라니. 천벌을 받는다. 하지만 팔을 걷는 동자가 귀여워 아이의 행동을 빤히 들여다 보며 미소짓는다. 앞서 걷겠다는 왕씨의 말에 두사람은 기겁을 하며 말렸지만 먼저 출발한 왕씨의 빠른 걸음에 두 사람들 뛰다싶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익숙한 산행인 듯 왕씨는 허벅지까지 내린 눈을 헤치며 빠르게 산길을 걸어갔다. 산을 뒤로 돌자 반나절 만에 곡양촌이 보이는 언덕에 도착할 수 있었다. 헉헉 거리며 숨을 고르는 두 사람이 언덕위의 차가운 공기에 뜨거운 숨소리를 얼리고 있을때 왕씨가 손을 들어 마을을 가리켰다. “마을 뒤로 뻗은 저 산이 곡양산이요. 예로부터 짐승들과 과실이 열리는 보물산이라고도 하지. 나도 수련을 하다 질릴 때면 저 산에 가서 사냥을 했다오. 자휼도 그렇게 해보게. 좋은 경험이 되지.” “예.” “아이구, 왕씨 저 놈은 사냥하기 전에 죽습니다. 곡양은 곰산아닙니까.” 곰산? 자휼이 등골이 오싹함을 느끼자 하류사는 웃었다. “뭐, 경험이 되는거니까.” 자휼이 앞으로 나가 내려본 곡양촌은 고작해야 이십여 가구가 될까 말까한 매우 작은 마을이었다. 집도 드문 드문 때어져 있어 말 그대로 산락의 유민들같은 생활을 하고 있는 듯 했다. “이 곳은 따로 촌장이 없지. 스스로 자급자족되니 누구의 다스림도 필요 없다네.” “예” 자휼이 마을을 지나가는 한가로운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너무 멀어서 자세히는 보이지 않지만 자례는 아니다. “동생은 이곳의 유일한 대장간이자 만물상인 곡양 모도리에서 지내고 있다네. 곡양모도리는 저쪽이야. 건너편 언덕으로 가야 보이지.” 하류사가 자휼과 건너편 언덕으로 걸어갔다. 마을과는 약간 떨어진 곳에 작은 촌집이 그림처럼 잘 보인다. 한참을 내려보았지만 아무도 안 살고 있는 듯 인기척은 없다. 김은 모락모락 풍기지만 마당은 새 하얀 눈으로 덮여 아무도 지나치지 않는다. 자휼이 이상하다는 유견에게 물었다. “유번께선..” “그래 내 아우다. 아, 저기 누가 나오는군.” “...!” 유견의 말대로 누군가 처마밑으로 나와 큰길을 본다. 누구를 기다리는 것일까? 자례인가? 아니 잘 모르겠어. 너무 멀어. 하지만 아닌 것 같은데. 너무 가늘어. 대장간에 수저라도 사러 온 여인이 아닐까? 자례는 저것보단 강한 선을 가졌는데. 머리수건을 한 것으로 보아 정안족 여인이 아닐까. 그럼 유번님의 며느리라도 아니라면 딸이라도... 오늘은 더 이상 못하겠다. 자례는 그만 하기로 했다. 망치질을 더해야 날이 튼튼해 질 터인데 계명에게 입은 어깨의 상처가 지독히 아물지가 않아 얼마 되지 않는 망치질에 상처가 벌어진 것 같다. 인상을 점점 찡그리는 자례의 모습에 동자가 먼저 옷자락을 잡아 그만 두게 만들었다. 동자는 저녁을 준비하겠다면서 안으로 들어갔지만 자례는 방으로 들어가기 싫었다. 앞치마를 벗고 손을 씻는 동작이 매우 느리다. 어떤 일을 해도 기운이 없고 충실치 못하다. “...” 머릿속이 딴생각이니 어떤 일인들 흥이 날리가 없다. 이곳에 얼마나 있었나. 그리고 얼마나 더 있어야 하나. 그 질문들의 끝은 항상 도대체 형은 언제 볼수 있나로 끝이 난다. 지겹도록 수 없이 생각한 질문의 끝은 항상 같은 답이 나와버려 더욱 짜증이 밀려온다. 힘들다. 내가 이렇게 어리광쟁이였나. 정말로 몰랐다. 목래가 불탄지 고작 다섯 달, 반년 정도 지났을 뿐인데 지독히 외로워 어쩔 줄을 모르겠다. 팔들 머리위로 올려 머리수건을 풀어 내린다. 소맷자락도 내리고 옷자락을 털며 큰 길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큰길을 바라보는 것은 위로가 된다. 저 너머 어딘가에 형이 살아 있을 거라 생각하면 위로가 된다. 그리고 언젠가 내가 저 길을 건너 형을 찾으러 갈수 있다는 희망이 되고 , 어쩌면 한순간의 꿈처럼 깨질지라도 저 너머의 길에서 형이 걸어와 날 보고 반갑게 해우하는, 하지만 지금 이순간 역시 그것은 그저 허탈함이 가득한 꿈이다. 저항 없이 찰랑이며 내려오는 머리가 보인다. 하지만 자례는 아닌 것 같다. 머리가 아직 짧을 텐데. 고작해야 어깨에 닿을까 말까 할 텐데 저건 좀 길어 보인다. 게다가 팔을 모으고 큰 길을 바라보는 모습이 신경질적인 분위기의 녀석과는 다르다. 뭔가 지독히 쓸쓸하고 외로운 느낌이 드는 뒷모습이다. “그 아이가 아닙니다.” 자휼은 뒤를 돌아 하류사를 바라보았다. 하류사는 다시 보라는 듯 눈짓을 하지만 자휼은 고개를 숙였다. “제 동생은 저렇게 약하고 여린 아이가 아닙니다.” “목래는 불에 타서 하늘로 사라졌는데 자네는 아직도 목래를 보고 있나?” “예?” “자네에게만 시간이 흐르는 것은 아닐텐데.” “하지만...” “아니라면 자네 동생은 자네가 생각하던 동생이 아닌가?” “예? 무슨...” 하류사의 의미 있는 말에 자휼은 다시 뒤를 돌아보았지만 큰길에 나와 있던 그는 이미 방으로 들어간 듯 보이지 않았다. 멍하니 마을을 내려다 보는 자휼을 등지며 하류사가 유견에게 말했다. “나는 돌아갈 것이네. 그대들은 좋을 대로 하시게.” “왕씨, 돌아가실 때 만이라도 호위를...!” “필요 없어. 나도 무사이네.” 만류하기도 전에 하류사는 빠르게 눈 속으로 사라졌다. 유견의 재촉에 자휼은 눈속의 발자국을 따라 얼마간 따라갔지만 발자국이 안 보이는 맨땅에 이르자 걸음을 멈추었다. 내 감히 왕씨를 거스르기도 싫었거니와 무엇보다 마음이 딴 곳으로 가있어 따라가기 힘들었다. 돌아가서 확인해 볼까. 아닌 것 같다. 아무리 반년이 흘렸다지만 내가 내 동생을 못 알아볼까. 왕씨의 말대로 나도 변했으니 동생도 변한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원래 동생은 저러한대 내가 그 아이를 내 멋대로 보고 있던 것일까. 그렇지 않아. 그 아이가 얼마나 오기가 있는 아이인데. 몸이 작기는 했지만 그래도 강한 아이였는데. 아까 그처럼 가는 아이가 아니었는데. 많이 아파했고 너무나 오랫동안 앓아 말랐지만 저렇진 않았는데. 아닐지도 몰라. 정말로 나는 부정하고 있는 거다. 내가 지금 현제의 상황을 부정하고 있는 거다. 내 모습도 동생의 모습도 다 부정하고 있는 거야. “...거기서 돌 두꺼비라도 되 볼 작정이냐?” “스승님.” “돌아가자.” 어느새 따라왔는지 유견이 자휼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자휼은 아무런 느낌도 못 느낀 체 앞서 걸어가는 유견의 뒤를 따라 올라갔다. 그렇게 하루를 꼬박 걸었다. 빠르게 달려왔던 낮과는 달리 느리게 눈길을 걷는 두 사람은 새벽 별이 뜨는 것을 볼수 있었다. 어둠을 여는 여명을 느낀 유견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아직 보이지는 않지만 소리로, 느낌으로 자신의 뒤에서 걸어오는 것이 확실한 자신의 아이를 불러본다. “애야.” “예” “너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내 등이 오싹해 더 이상 걸을 수가 없구나.”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라고 말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자휼은 애써 목울대를 울리도록 침을 삼켰다. “어...어찌 해야 할지, 제 자신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무섭습니다.” “...” 유견이 뒤를 돌아 자휼을 마주보았다. 흉측한 반신은 감정을 표현하기 힘들지만 나머지 반신은 그렇지 않다. 어둠이 그의 처연한 눈동자의 빛만 알아보게 하는지 그 지독한 우울함이 전해져 온다. “저의 마음은 아직도 목래의 성주인데... 모든 것이 너무나 빠르게 변해버리고 있어 어찌 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아니, 목래를 잃은 것에 대한 후회는 없습니다. 원래 제 것이 아니니 돌려주었다고 생각합니다.전 단지....” “...” “마지막 남은 내... 혈육마저 변해버린다면....” “...” “전...제가 누군지 모를 것 같습니다.” “자휼아.” “...아니,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많은 것을 생각하지 마라. 넌 아직도 목래의 일과 네 자신의 일을 받아들이기 힘든..” “아닙니다. 스승님!” 자휼이 절규하며 유견의 어깨를 와락 부여잡았다. “아닙니다!... 아니란 말입니다!... 제 자신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제 자신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내 스스로 행해야 하는 일을 모르는 철부지 되어 험한 운명속으로 걸어갈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 혈족의 일에 빠져들어 더 큰 전쟁의 일개 병사가 되는 것을 후회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아이를 향한 내 감정이 그대로인 것이 두렵습니다. 내 동생은 어서어서 자라 내 도움을 필요치 않아 하는 것이 두렵습니다. 그 아이가 나와 헤어져도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 두렵습니다. 그렇게 내 동생을 보내주어야 하는 시간이 온 것을 느끼면서도 제 감정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 두렵습니다. 내가 아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제 욕심에 그리하지 못하는 제 감정이 두렵습니다. 그것으로 제 자신과 싸울 것을 생각하니 두렵습니다. 그리고 결국 패배할 것이라는 것을 알아 더욱 두렵습니다. 그래서 상처받을 내 아이가 두렵습니다. 언제나 내게 상처받고서도 다시금 내게 매달리는 그 아이에게 다시 상처를 주는 일이 반복되는 그것이 날 괴롭게 합니다. “...이해하지 못하십니다. 스승님은.” 유견은 흐느끼는 어린 제자의 어깨를 어설프게 토닥거렸다. 그래 내가 뭘 이해하겠는가. 48 말등에 기대 하늘을 올려다 보던 건장한 사내는 눈을 감았다. 온화하게 표정을 가다듬어 보이지만 화가 나있다는 찡그린 미간은 펴지지 않는다. 한가하게 긴 꼬리를 흔들거리는 말과는 달리 레이첸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젠장할! 나는 왕자다. 하지만 왕자도 이런 곳에선 아무것도 못 먹는다! 이럴 줄 알았으면 활이라도 많이 챙겨올걸! 이거 아무것도 없는 눈밭이군!” 레이첸은 혼자서 마구 중얼거리며 화를 내었다. 발을 구르고 두 손을 머리 위로 돌리며 분통을 호소하지만 괜찮다. 어차피 아무도 보지 않으니. 배는 밥을 달라 아우성인데 근처에 있는 것이라고는 눈 밭. 레이첸은 등에 달린 활을 세어보았다. 딱 7개다. 원래 활 한 묶음은 27개다. 이것 밖에 남지 않은 이유를 대자면 어제의 일일까. 한참을 말을 탄 레이첸은 배고파 이리 저리 둘러았지만 아무것도 없어 당황했다. 하지만 하늘의 도움인지 마침 지나가던 철새무리에 덜컥 활을 쏘아대서 두 마리를 맞춘 후 구워 먹어 허기를 달랬다는 이야기인데 문제는 그 두 마리를 맞추는데 활을 20개나 썼다는 것이 문제다. “이 놈의 불같은 성격...” 고쳐야 하는데. 첫발이 안 맞아 화가나 마구 날렸던 활들이 눈물나게 그립다. 활이라도 주워 올 것 그랬나. 하지만 화살은 거추장스런 마구의 장식들과 함께 불쏘시게도 들어간지 오래다. 어쨌거나 지금 이 철부지 왕자에게는 고민할만한 상황인 것이 분명하다. 여기서 곡양산으로 가는데 이틀, 다시 도성으로 돌아가는 것도 이틀이니 양자 어떤 것을 선택하던 이틀을 굶어야 한다. “....그건 싫은데. 철새들이 또 안지나가시나.” 힐끗 고개 돌리는 눈에 들어온 하늘은 맑기만 하다. 겨울이라 정말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풀뿌리는 있겠지.” 하하하 거리며 웃던 레이첸은 심각하게 하늘을 바라본 후 천둥소리를 내는 자신의 배를 감싸며 두 시간만 더 기다리고 새가 안 날아온다면 정말로 땅을 파겠다는 각오를 다지는 것이다. 말도 주인이 먹을 것을 찾아주지 않을 것을 아는지 스스로 이곳저곳을 헤치며 풀을 찾기 시작했다. 눈으로 꽃을 피우고 얼음으로 나무기둥을 잡은 숲 안의 깊은 곳이 있었다. 그 곳에서 얼음을 부수면서 쏟아지는 물줄기가 실얼음을 흩뿌리며 쏟아지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오싹 해보여 자휼은 뒤로 물러나 한쪽 팔로 반신을 쓰다듬었다. 반면 당당하게 앞으로 나간 유견이 폭포를 내려보며 말했다. “폭포 물은 마시는 것이 아니다. 자연의 힘은 인간의 그것보다 강해 그 힘을 마시는 것으로 대신한다면 자연을 우롱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바람을 쏘이며 저 먼 이면의 땅을 감지하는 것처럼 폭도로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요.?‘ 자휼이 이를 딱딱 부딪치며 애써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유견은 피식 웃으며 어린 제자의 등을 쳤다. “이놈! 내가 노망이 든 줄 아느냐? 이런 겨울에 저 물 맞고 네 고뿔이라도 들면 내가 장작을 패야 하는데? 말이 그렇다는 이야기다. 앞으로 떠오는 물은 저 아랫물로 떠오란 이야기야. 실제로 이 폭포 바로 아랫물은 돌조각이 떠올라 먹을만한 물이 아냐. 미련퉁이 한족이나 이 폭포 물에 삭신 쑤시게 하지. 난 그 딴 것 모른다.” 유견이 맨손으로 호기 있게 권(拳)을 몇 번 시범하며 말했다. “자고로 힘이란 적당한 운동과 정갈한 음식. 주인을 보호하는 충성과 연인을 사랑하는 단심에서 우러나오는 충력이 바로 우리 혈족의 태산(兌?: 산을 휘어버리다.)이란 힘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한족들은 한계에 부딪쳐 나온 그 힘을 진정한 힘이라 생각하며 한겨울의 얼음 목욕도 불사하는데 그것도 효과는 있습니까?” “한계에 다다르며 자신을 괴롭히며 나오는 힘은 고획(苦獲)이라 하며 그 힘은 그런 수련을 안 한 우리에게도 있다. 그 힘의 정체가 무엇인지 아느냐?” “...뭡니까?” “발악이다.” 얼빠진 얼굴의 제자를 보며 유견은 낄낄댔다. “참고로 말하자면 고획은 ‘발악‘이라고 하지만 ‘개힘‘이라고 한다. “개힘이라함은?” “그것은 본래 있는 힘이 아니고, 분위기나 기분에 휩쓸려서 일시적으로 나는 힘을 뜻하느니라. 넌 국어도 못하지? 장수 을노가 가기 전에 내게 국어 공부도 좀 시켜 달라 하더구나.” “으음. 예.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혈족들의 문패의 개힘은 어떤 곳일까?” 얼음물에 안 들어가도 된다는 말에 긴장을 푹 놓고 있던 자휼에게는 뜨끔한 질문이었다. 자휼은 애써 머리를 굴렸지만 딱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이놈아. 돌 굴러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그래 돌 굴렸더니 뭔가 나왔느냐?” “그다지...” “쯧. 개힘은 자객들을 키우는 곳이다.” “예?” “뭘 그리 놀래냐. 자객들은 평소엔 일반인과 같이 아무렇지 않게 지내다가도 필요할 떄만 그 임무를 위해 일시적을 돌변하지 않느냐. 네가 알고 있는 장수들 중에서도 개힘을 지나온 장수가 있을지도 모르지. 개힘 안에 자객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거기서 수련을 할뿐이지.” “...아아” “개힘은 모든 성에 있는 것은 아니다. 자객을 키운다는 특성상 개힘은 도성 안에선 있을 수가 없지.” “개힘의 안에 무기나 미로 같은 것이 숨겨 있기 때문입니까?” “... 개힘 안에 왜 무기가 있냐?” “예?” 자휼의 벙한 얼굴에 유견이 정색을 했다. "암살이 무엇이냐?" "...그야...반대 세력의 주요 인물을 몰래 죽이는.. 것이 아닐까요." "그건 분신 자살이지!" 유견이 못마땅하다는 듯 말했다. "애야. 한족은 그 수가 많아 암살하려 들어간 자객하나 죽는 것 정도 쉽게 볼지 몰라도 우리네들에게는 절대 안되는 말이다. 않그래도 자식도 많이 두지 못하는 데 어딜 그렇게 보낸단 말이냐. 우리들에게 암살이란 말 그대로 어둠속에서 사라지는 것. 누가 누구를 죽였는지도 모르게 하는 것이다. 암살의 성공은 자객이 무사히 살아나올떄 완성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그리 쉽지는...무기는 자객을 노출시키니 어찌 할수 없이 자객은 위험을 부담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자휼의 말에 유견은 고개를 저었다. “자고로 암살이란 무기를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근간의 모든 암살들은 극단적인 흐름의 변화를 꾀했기 때문에 무기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철이란 모든 생물에게 불길함을 느끼게 하기 때문에 그 위험이 크다. 암살이란 무기를 가지고 하지 않는 것을 암살이라 하는 것이 원칙이다. 알겠느냐?” “그렇다면 무엇으로 암살을 꾀합니까?” “사람이란 말 한마디로도 죽일 수도 있는 것이다. 너는 아직 장수도 되지 못했으니 개힘은 꿈도 꾸지 말아라. 그보다 춥다. 아휴! 추워라!” 유견이 서둘러 집으로 달려가자 자휼은 그의 뒤를 따라 달리다 외쳤다. “오늘 수업은 끝입니까?!” “모른다 이놈! 네 놈이 어딜 놀러가는 내 알바 아니다.! 오다가 나무나 해 와라!” 유견의 말에 자휼은 웃었다. 서둘러 뛰어가면 내일 정도에야 볼 수 있겠군. 스승의 배려에 자휼은 반대쪽으로 뛰어 갔다. 동자가 건네주는 종이를 칼날을 세워 내리쳐보았다. 미끄러지는 소리와 함께 사악 베어진다. 하지만 잘라진 단면은 그리 흡족하지 못하다. 그야 당연한 것이 망치질을 하다가 어깨가 아프면 계명생각에 화를 내고 간간히 떠오르는 형의 생각에 멍하니 서 있었으니 제대로 될 리가 있나. “다 만들어졌다.” “에게? 검이 이게 뭐예요? 볼품없이...” “원래 대장간에서 만드는 부분은 칼날뿐이야. 손잡이나 검집은 공방에서 만드는 것이 상례지. 하지만 이곳에 공방이 없으니 이 이상은 나도 모른다.” “그럼 이걸 어따 써요?” “손잡이 부분에 막대를 끼우면...” 자례는 날을 한번 돌려보았다. 별로 아니다. 내리치는 힘도 강하지 못한데다가 담금질도 많이 하지 못했다. 이런 것은 검이라고 부르지는 못한다. “...쓸만한 식칼이 되겠지. 동자야 이거 너 주마.” “에에?!” 동자의 경악스런 표정과 잔소리를 뒤로 한 체 자례는 얼른 나왔다. 역시 나는 아버님처럼 검과 글과 힘에 만능이 되진 못해. 머리나 써야지. 칼이나 힘은 영 아니군. 자례는 귀를 막은 채로 부엌의 큰 솥에 올려놓은 물이 따뜻해졌는지 확인했다. 간만에 목욕을 할 생각이었다. 부엌의 문을 조금 열어놓고 커다란 궤에 덥혀진 물을 부어 몸을 담그자 어깨의 상처는 아리지만 다른 곳은 편안해진다. 한숨을 내쉬는데 밖에서 잔소리를 해대는 동자의 목소리가 들려 몸을 움추린다. 유번님이 슬슬 도성에 도착했을 때다. 그러면 오늘로부터 4일은 지나야 돌아오실 수 있다. 그 동안 뭘 하고 있지? 손톱을 씹으며 곰곰히 생각해본다. 내가 살아남아 할 것이 무엇인가. 왜 내가 계명을 죽이면서까지 이곳으로 나온것인가? "...형을 찾아야지." 유번은 내색하고 있지는 않지만 어느정도 형의 소재를 알고 있는 듯 하다. 지금은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지만 때가 된다면, 더 이상 기다리기 힘들어진다면 그때 유번에게 물어보는 것도 좋다. "그리고 태진..." 그도 잊지 않는다. 내 여기서 계속 잠자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네 놈이 한 짓이 어떤 것인지 알게 해주겠다. 공들여서 키운 자식을 눈앞에서 죽이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게해주셌다. 조금 꺼리는 것이 있다면 태진과 쉬첸은 우애가 깊다 하던데.. "그렇지. 쉬첸은 공성에 아무런 연관도..." 더듬 더듬 찬장을 손으로 살펴보자 신년에 떡을 만들기 위해 겨울에 따서 말린 솔잎과 국화가 들어있는 사기 그릇이 잡혔다. 조금 들어 물에 풀자 솔잎 특유의 박하향과 국화의 짙은 향이 물의 증기에 따라 올라온다. "...없는 것은 아닌 것 같고..." 도대체 언제 우리 성안의 여인에게 추파를 던지거냐, 이 망나니 사내야. 매일 말만 타고 장난치기만 좋아하는 줄 알았더니만 할 것은 다 하고 있었군. 그랬다면 정식으로 여인에게 자신을 선을 보여야 하는 것이 아닌가. 꼴에 궁안에서 끙끙대니 별 이상한 왕자가 꼬여 별짓 다 하지. 나쁜 마음은 아니지만 이거 꽤 괘심하다. 만나면 좀 골려줘야겠어. “몸 불겠네, 빨리 안 나와요!” “응?” 깜박 잠이 들었는지 퍼뜩 어둠속에서 고개를 들자 눈앞에 동자가 예의 그 칼을 들며 부엌문을 열었다. 화들짝 놀라며 몸을 가리는 자례는 보고 동자는 혀를 내밀었다. “거 삐쩍 마른 몸 볼 것도 없는데 뭘 가리세요? 그럴러면 문이다 잠그고 해요. 왜 그리 문단속이 소홀한지...빨랑 방으로 들어가서 옷이나 갈아입어요.” “넌?” “난 밥도 할줄 모르는 공자 밥이나 먹일 거예요. 칼도 새거 생겼으니까요.” 예의 그 칼을 아이는 빼어들고는 바구니에서 붕어 한마리를 꺼내 그 머리를 내리쳤다. 쿵 하는 소리와 붕어머리가 데굴데굴 발 밑으로 굴러오자 자례는 으시시함을 느끼고 옷을 걸친 후 마루로 나갔다. 차가운 공기가 물기어린 몸에 닿자 부르르 떤다. 물기 어린 머리카락을 한줌 쥐어 힘을 주자 주르륵 물이 쏟아져 나온다. 손으로 몇 번 더 짜내다가 문득 머리카락이 어깨를 넘어오는 것을 느끼고 놀란다. “많이 길어버렸네...” 잘라야 하나. 방안에서 빗을 가져와 가지런히 정리한다. 역시나 꽤 많이 길어져 있다. 잘라버릴 생각으로 서랍을 뒤져 단도를 꺼내고 머리를 휘어감아 칼에 대려는 순간 잠시 멈칫한다. 이제는 머리에 대해 놀릴 사람도 없는데 번거롭게 자를 필요가 있나. 사실 긴 머리보다 손이 더 가는 것이 짧은 머리다. 불편하지 않냐고 물어보는 이들에게 편하다고 대답했지만 아침에 일어나면 엉망이 되어있는 머리를 보며 한숨을 쉬던 날들이 얼마나 되었던가. 자례는 칼을 내리며 머리를 풀었다. 길러볼까. 다시 길러볼까. 머리띠를 해서 뒤로 넘기면 참 편한데 말이야. 사실 자신의 생각보다 마음을 깊히 울리는 말은 형의 장난이다. 네 머리를 참으로 좋아한다...라는. 장난으로 넘겼지만 사실 그때 기뻤다. 형이 자신의 머리를 가지고 놀린 것이 그저 장난이였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어 마음이 편해졌다. -머리가 허리를 넘어가면 동백에서 짠 기름으로 머리끝에서 위쪽으로 발라 아래로 빗어준단다. 그러면 엉키지 않게 되지.- “...동백인가.” 겨울이라 그것을 구하기 어렵지는 않다. 근처의 방앗간에 물어본다면 기름을 짜기 위해 나오는 사람들을 통해 구해볼수 있을 것이다 . ------ 단설의 역주는 인용과 개인적 견해가 들어간 글입니다.(맹신(盟信)사양. 도용씁쓸)-------- 주:권(拳) 밴 손으로 하는 무예. 주:개힘 -본래 있는 힘이 아니고, 분위기나 기분에 휩쓸려서 일시적으로 나는 힘. 49 한가하게 밥을 짓기 위해 나온 여인은 아궁이의 물을 올려놓았다. 솥을 올려놓고 생선을 굽기 위해 솥뚜껑 뒤집어 생선을 올려놓고 소금을 가지려 광에 들어갔다. 귀한 소금단지를 열어 그릇에 덜어오던 여인은 아궁이 근처에 웅크리고 있는 것에 놀라 뒤로 넘어졌다. 소금을 덜어낸 그릇이 공중으로 날아가자 여인은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소금!” “뭐? 소금?!” 벌떡 일어나 재빠르게 떨어져 내려오는 소금을 잽싸게 받아낸 그는 입에 물고 있던 생선을 소금에 찍어 다시 입에 넣었다. 기가 막힌다는 여인을 보며 레이첸이 손을 털고는 물었다. “더 없나?” “기가 막히네. 당신 여기가 주점으로 보여요?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들어와!” “흠. 미안하오. 하지만 그 동안 먹은 게 없어서 말이야.” “없어요! 안 그래도 그건 우리 아저씨 주려고 숨겨둔 귀한 건데, 나가줘요! 거참 오늘 운도 없네!” “그럴지도. 아무튼 이거 받아요!” 레이첸은 여인에게 동전을 던졌다. 얼만지는 모르지만 생선 살돈은 되겠지. 여인이 뭐라 외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레이첸은 바로 그 집 담을 넘어 기다리던 말을 탔다. 여인의 말이 맞아. 주점을 찾아 밥이나 실컷 먹자. 하지만 맞은편에 다가오던 소를 모는 중년인은 레이첸의 질문에 말도 안된다는 대답을 해주었다. “우리 마을은 주점 따위 없는데?” “하?” “다들 가족이 있고 부인이 있고 밭을 가지고 있는데 왜 주점이 필요하답니까?” 그리고 난생 처음 레이첸은 주점이란 마을마다 꼭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스쳐 지나가려는 중년인을 붙잡고 다시 한번 묻는다. “그럼 술이라도?” “기루말이요? 예끼, 이보쇼! 다들 부인도 있는데다가 키울 자식들이 딸려있는데 어느 누가 기루에 가서 돈을 뿌린단 말이오?! 보아하니 근처 도성에서 오는 젊은인가 보군. 저렇게 세상 물정 몰라서야...” 혀를 차며 중년의 남자가 레이첸이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자 그 불같은 성격이 발끈해버리고 말았다. 힘껏 소의 등을 때려버리자 놀란 소가 뛰어 가버린다. 중년인이 놀라 소를 따라가야 하는지 레이첸에게 화를 내야 하는지 몰라 두리번 거리다가 소리쳐 화를 낸다. “이 망나니 같은놈!” “네 이놈! 내가 감히 누구라고 그따위 말을 하는게냐!” “어쭈? 젊은 놈이 어디서 눈을 부라려!” “이놈이!” 레이첸이 사내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워낙 신장의 차이가 심해 대롱대롱 매달린 사내는 나 죽는다고 크게 외쳤고 놀란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씩 나와 둘의 그 흉한 싸움 과정을 보고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 뭐야? 싸움인가?” 막 도착해 숨을 돌리던 자휼은 갑자기 시끄러워진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아무래도 저 커다란 덩치의 산적이 마을 사람을 구타하는 것 같다. 저런, 저런 바보같으니라구. 이런 병사도 없는 촌구석에서 혼자서 마을 사람을 구타하는 것은 산적의 소굴에서 나 죽여 달라는 것과 같다. 역시나 마을 사내들이 마구 달려와 덤비자 꼼짝 못하고 포박된다. 아무리 거구라 할지라도 못당하는 머리수가 있기 마련이다. “바보같은 놈. 한족들이란 뭉치면 무식해진단 말이다.” 보아하니 머리색이 검은 색이 아닌 것으로 보아 여진족이거나 거란족일 것 같다. 자휼은 피식 웃으며 반대 편 언덕으로 걸어가 대장간 안을 내려다보았다. 점심을 먹는 모양이다. 예의, 내 동생이라고 추측되는 그가 어린 아이와 상을 겸해 앉아있는 것이 보인다. 추울 텐데 문을 열어놓고 먹는 것을 보아 분명 반찬은 생선이다. 고기를 안 좋아하니 냄새도 싫어하는 것이 당연할지도. “풀만 먹고 어떻게 지낸다지...” 어래? 그럼 저 애가 정말 내 동생인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는데 갑자기 그가 고개를 획 돌려 자신을 쪽을 바라본다. 화들짝 놀란 자휼은 원래 그곳에 서있는 나무인양 꼼짝도 하지 않아보지만 바보같은 짓이라는 것을 느끼고 긴장을 푼다. 아무리 눈이 좋아도 저기에서 날 알아볼 리가 없다. 위에선 나도 저쪽이 잘 안보이는데 밑에있는 저쪽은 오죽하랴. 대장간문이 흔들린다. 싸움에 모인 사람들이 대장간으로 몰려온 것이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자 사람을 만나는 것을 자제하고 있는 자례는 재빨리 옆방으로 건너갔고 동자가 쪼르르 문을 연다. 유번을 찾는 마을 사람들을 보며 동자는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말한다. “유번님은 도성으로 손님을 맞으러 가셨습니다.” “이거 큰일이네. 이 사람 도성에서 온 것 같은데 마을에서 소란을 피워서 말이다. 동자야, 네 집 광에 이사람 좀 가두어 두면 안 되겠냐?” “안 되어요! 보아하니 한족도 아니고, 정안족도 아니고, 히구. 덩치를 보아하니 분명 산적아니에요?” “잠깐. 작은 공자도 가셨냐?” “작은 공자는 안에 계시지만이 아니라 같이 가셨지요!” 얼른 중간에 말을 바꾸지만 어린 아이의 말장난에 속을 어른들이 아니다. “계시지만이 아니라는 또 뭐냐?” “없다고요.” “어제는 있었잖아? 같이 대장간에서 ...” “음! 잠깐 나갔지요.” 자례는 귀를 기울이며 웃고 말았다. 애야 거짓말이란 생각보다 어려운 것이다. 그런 것은 거짓말이 아니라 농담이라 하는 거야. 계속 몰린 동자는 뺴액 울음을 터트렸고 웃음을 참던 자례는 그제야 허둥지둥 서둘러 방을 나갔다. 방문을 열자 마을 사람들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한다. “무슨 일입니까?” “계셨소? 작은 공자?” “등물을 하느라 잠시...” “아아 그랬구먼. 그렇게 말하지 않고.” “낮에 등물이라 제가 부끄러울까봐 신경을 써준것입니다. 그보다...” “아, 이놈좀 봐달라고... 미친 놈인지. 백주 대낮에 어르신을 잡고 싸우는 놈이오.” 자례는 마을 사람들이 끌어오는 자를 보았다. 머리가 붉고 덩치가 크다. 그리고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하다. 마을 청년들에게 눌려 있던 그가 이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고개를 든다.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며 소리지른다. “우왓!? 정안의 귀...신이 아니라 비켜!” 미친 소처럼 마구 날뛰며 사람들 뒤로 도망가려는 그를 보고는 자례는 심각하게 끌고 온 사람들에게 조용히 물었다. “혹시 정신이..?” “머리가 좀.. 자신이 4왕자라고 하는데...이곳 광이 마을에서 젤 튼튼하지 않습니까?” “누가 정신이 나갔어!” 레이첸은 그 소리에 정신이 번뜩 난 듯 와락 대들며 외쳤다. 여행을 많이 다녀보았다면, 적어도 서민들과 어울렸다면 이럴때 마을 촌장을 찾아가 도움을 구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는 걸 알만도 한데 레이첸은 그저 혈기 왕성한 왕자로 그동안의 여행이란 줄래줄래 성밖으로 돈쓰러 다니는 것과 다를바가 없었다. 여기서 내가 왕자라 한들 모시러 나올 인간들도 없거니와 그저 미친사람 취급해 몰매맞기 십상이라는 것을 전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무튼 광으로 ...” “뭣! 날 광으로?! 이놈들 내가 성으로 돌아가면!” 딱딱 소리가 나도록 이빨을 드러내는 레이첸을 보고 놀란 동자가 자례의 뒤로 숨었다. 자례도 조금 이상한지 뒤로 물러났다. 악을 써대며 광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자례는 고개를 갸웃했다. 보아하니 자신이 왕자라고 믿는 것 같은데 그거 참 재미있게 미쳤군. “아니라면 최고로 위험하게 미쳤거나.” 마을 사람들을 내보낸 자례는 눈을 찡긋하며 동자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 식사를 계속했다. “...광에 미친놈을 넣고 밤을 보낸단 말이냐.” 자휼은 혀를 차며 집을 내려다보았다. 광이 튼튼해 보이긴 한데 미친놈이란 워낙 유견이 말한 발악이던 개힘이던 부리기 마련 아닌가. 슬슬 해가 지는 것을 느끼며 몸이 달아오른다. 너무 늦게 가면 유견이 불같이 화를 낼 것이다. 만곡으로 출발해야 하는데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나무만 해가면 봐주지 않을려나.” 결국 자휼은 조금 더 어둠이 내리면 그 집으로 내려가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광에 신경이 쓰인다기 보다는 사실은 아이를 확인해 보고 싶었다. 아니 사실은 좀더 가까이에서 보고 싶었다. 어둠이 내리자 모든 문에 빗장을 거는 동자가 보였고 잠시 후에 슬금 슬금 자례가 나와 뒷 담장의 쪽문의 자물쇠를 열어놓고는 살금살금 다시 방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조금 후에 방에 달린 작은 문도 열어놓는다. “...자례가 확실하군.” 자휼이 피식 웃었다. 유달리 자례는 갇혀 지내는 것을 싫어했다. 어릴 때도 그리 밖으로 나들이 가는 것을 좋아해서 많이 혼냈지. 막사에서 지낼 때도 목래에서도 항상 작은 문 하나라도 열어놓는 습관이 있었다. 의원이 찬바람을 걱정해 밤새 닫아놓으면 얼마나 신경질을 내었는지 그날 하루 종일 성안이 떠들썩했다. 결국 자신도 그 고집에 져서 자례의 방문을 때어버리고 발을 쳐주었을 정도니까. 조금 기다려 동자의 방에 불이 먼저 꺼지자 자휼은 맨땅을 골라가며 모도리로 향했다. 낮은 담장을 넘을까 하다가 뒤로 돌아 자례가 열어 논 문으로 집안으로 들어갔다. 자례가 들어간 방문을 바라보자 잘 준비를 하고 있는지 이불을 펼치는 모습이 그림자로 보인다. 등불 앞에 앉았다. 귀걸이를 푼다. 그래 하나만 남았구나. 잠시 들여다보는 듯 귀걸이를 들고 있더니 작은 서랍에 넣는다. 머리띠를 풀어 잘 개어 책 사이에 포개 놓는다.. 앞에 놓인 빗을 들어 머리를 다시 다듬는다. 위의 장옷을 벗어 장걸이에 눕혀 걸은 후 허리띠를 ... “...밖에 동자니?” “...!” 자휼은 급히 몸은 숙였다. 내 동생이라지만 정말 눈치하나는 대단하구나. 다행이 눈치 채지 못했는지 방을 나오지는 않는다. 안도의 숨을 쉬려는데 갑자기 둘다 놀라는 소리가 울린다. 탕탕! “젠장! 배고파서 더 이상 얌전히 못 계시겠다! 이봐라!” 망할 미친 놈. 간 떨어지게 하네. 자휼이 화를 내었지만 바로 열리는 방문 소리에 집을 뛰쳐나가야 했다. 오늘 정말 간 떨어진다. 자례는 등불을 들고 광쪽으로 다가갔다. 열쇠가 없어 작은 창살문으로 안을 들여다보니 무척이나 화가 난 듯한 사내가 문을 발로 차고 있었다. 저 성격하고는. 하지만 배가 고프면 그럴만도 하지. 그가 죄인은 아니니까 이런 식으로 대하면 안되는 것이겠지. “좀 식었지만 전병을 드시겠습니까?” “응? 으..악!?” 레이첸은 등불로 기괴하게 보이는 자례의 모습에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그가 고개를 갸웃한다. 젠장맞을. 귀신인줄 알았다. 아까 그 정안인이구나. 내 인생 왜 그리 정안족과 인연이 질기냐. 레이첸이 창살로 가까이 다가가자 그는 약간 뒤로 물러난다. 굉장히 사나운 인상의 놈이다. 날카롭게 치겨 올라간 눈썹과 묘하게 병약한 기운이 정말로 귀신같아 보인다. “전병이 뭐지?” “여진족이군요.” 자례는 그제야 그를 자세히 보고 중얼거렸다. 붉은 머리가 인상적이다. 어라, 붉은 머리를 내 어디서 한번 하지만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았다. 순간 레이첸도 왠지 앞에 있는 정안인이 어디선가 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저 신경질적인 눈썹이 어디선가... “밀 빵과 비슷한 것입니다.” “난 이틀 동안 풀뿌리만 씹었단 말이다! 그런데 밀빵? 젠장! 이곳으로 오는 게 아니었어!” “지금은 동자가 자니 그 이상의 음식은 없습니다.” “네가 해!” “저는 간혹 설탕을 소금으로 넣고 물대신 술을 넣어 국을 만드는데요.” “...빌어먹을, 아무거나 줘!” 자례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부엌으로 가더니 전병을 가지고 와 창틀로 넘겨주었다. 창틀이 좁았기 때문에 자례는 등을 내려놓고 두 손으로 접시를 내밀었다. 레이첸은 물끄러미 자신의 눈앞에 있는 옷자락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이 옷자락 안에 손이 있는 거지. 그렇지. 이렇게 눈앞에 있네. 바로 눈앞에 있네. 탕하는 소리와 함께 접시가 안쪽으로 밀려들어가며 레이첸이 자례의 손을 꽉 잡아 당겼다. “...? 뭐합니까” “잠깐만. 옛날부터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 “이거 이상한 사람이군! 여진족이란...!” “정안족이야 말로 손에 뭘 숨겨둔 거냐!” 밖에서 안의 소란을 듣고 있던 자휼은 다투는 소리에 놀라 안을 들여다보았다. 뭔가 저건. 자례가 창틀 너머로 한손을 집어넣고.. 가 아니라 안에서 당기는 건가. 발칵 들어가려다가 자신이 몰래 훔쳐보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다시 뒤로 물러나온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안절부절 못하며 그 모습을 지켜본다. 자신도 남자라 하지만 옷 아래의 손을 더듬는 느낌에 불쾌감을 느낀 자례는 벽에 기댄 장작을 들어 창틀사이로 힘껏 밀어 넣었다. 퍽하는 둔탁한 소리가 나더니 손이 자유로워지자 얼른 손을 마구 턴다. 거머리가 기어간 느낌이다. 그럼 그렇지. 저놈이 생긴 것과는 달리 얼마나 독한데. 자휼은 소리 없이 웃었다. 누군지 몰라도 안됐다. 아 그게 아닌가? 웃을 때가 아니잖아. 자휼은 고개를 돌려 다시 상황을 살폈다. “...아...거...빌어먹을. 정안족이란...그놈의 손 뭐볼게 있다고 가리고 다녀! 손이 금으로라도 만들어졌냐?!” “거 참...손을 잡지 않나, 밀치지를 않나, 여진족이란 알 수 없군.” 자례가 휘적휘적 걸어가 우물에서 물을 길어올려 손을 닦았다. 레이첸은 화가 나면서도 물소리에 행여 손이 보일까 창틀에 고개를 내미는 것이다. 어라 아무래도 저 모습을 많이 본 것 같다. 파란 달빛에 검은 머리가 희게... “너 도성에서 봤던 그...! 야! 너 도성에 있었었지?! 야!” 하지만 자례는 안 들린다는 표정으로 손을 털며 방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젠장. 눈이 쓰리다. 아까 그가 던진 나무에 눈을 맞았다. 손으로 더듬어본다. 상처는 없는데 꽤 아프군. “도성에서 본 그 아이구만?” 레이첸은 스스로도 알 수 없는 괴이한 표정을 지었다. 울 것 같기도 하고 웃는 것 같기도 한 표정. 뭐 이런 일이 다 있나. 도성에서 4일이나 떨어진 곳에서 또 같은 인물을 만날 확률이 얼마나 되지? 귀신에 홀린 듯한 기분과 시간이 역행하는 느낌에 머리가 아프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도 않아 차가운 밤공기와 시린 달빛에 마음이 차분해진다. 스스로 놀라며 레이첸은 얌전히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상한 하루다. 50 아침일찍 찾아온 마을 노인은 그가 타고 온 말이 간밤에 늑대에게 쫓겨 마을 밖으로 나가버렸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마을 근처에서 주인을 찾아 헤메던 그 거대말을 잡아두려고 했지만 성격이 사나워 모두들 놓아 두었더니 화를 입은 모양이다. 자례는 동자와 함꼐 그것을 전해 주어야 하는지 망설였지만 동자의 강력한 뜻으로 잠시 그것을 접어두기로 했다. "미친사람 또 미치게 만들거라구요." "알았어. 일단 아침부터 갔다주렴." “싫어요. 저 사람이 날 물면 어떡해요? 전 공자보다 어리고 약하다구요.” “...알았다.” 동자가 징징거리자 하는 수 없이 자례가 아침상을 받아들고는 광으로가 창살 쪽에서 두드렸다. 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다. “이보시오” “...왜?” “아침을 가져왔는데 열쇠가 내게 없습니다.미안하지만 이곳으로...” “왜?” 벌컥 창틀로 고개를 내미는 레이첸의 얼굴을 보고 자례는 놀라 뒤로 물러났지만 곧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뒤로 돌아버렸다. 왜 그러지? 레이첸이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등을 돌린 자례는 잠시 하늘도 보았다가 땅도 보았다가 산도 보면서 뭔가 생각하는 눈치다. 잠시 그러던 자례는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상위의 접시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손을 건들지 말아주시오.” “왜?” “거머리가 기어가는 듯 기분이 굉장히 안 좋소.” “생긴 것 같이 독설가군.” “그런 말은 너무 많이 들어서 별로요.” 그릇을 하나씩 넘겨받으며 레이첸은 자례를 계속 바라보았다. 이상하구나. 처음에는 황제의 그와 닮았다고 생각했었는데 전혀 아니야. 하나도 닮지 않았어. 손동작 하나하나가 달라. 그가 힘없는 노루였다면 이건 이를 드러내지 않은 늑대 같군. 그런데 왜 닮았다고 생각한 걸까. 아냐 닮았어. 뭔가 닮았다고. 모습이 아니라 무엇인가가... “날 그렇게 보지도 말아주시오.” “왜?” “전신에 구더기가 낀 듯해 토할 것 같소.” “생긴 것 보다 더 독설가군.” “그 말은 처음이요.” 자례는 저분을 넘기곤 몸을 돌리자 레이첸이 외쳤다. “이봐, 미안하지만 말 상대 좀 해주지 않겠나? 심심해 죽을 것 같거든?!” “동자야, 새장 가져다가 광 옆에다 걸어주어라.” “생긴 것보다 더 비정한 놈이군!” 자례는 설래설래 고개를 흔들며 방안으로 들어가 문을 꼭 닫았다. 그리고는 배를 움켜쥐고 키득거리는 것이다. 잠시 후에 새장을 든 동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하, 저 사람 눈 좀 봐, 한쪽이 파래! 팬더같아! 깔깔깔!” 꿀을 푼 얼음물에 동백과 말린 과일을 넣은 겨울 화채그릇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생긴 것도 화려하다. 단것이 심심한 겨울에 먹기 딱 좋다. 하지만 그다지 먹고 싶지는 않은 듯 그 색만을 바라본다. 조금 기다리자 여지 없이 누군가 달려와 열린 문앞에서 부복하여 인사를 고하고 화난 목소리로 외친다. “왕씨께서는 이 좌보를 이용하셨습니다!” “안다, 알어.” 하류사가 귀찮다는 듯 중얼거렸다. 올것이 왔구만 하는 눈치이다. 백라는 화가 났다. 자신이 화를 낼줄 알고 있었는지 돌아와 보자 왕씨는 어디론가 사라진 후였고 막 화가 사라질 무렵에야 한가롭게 화원에 들어왔다고 들었다. 백라가 왕씨의 소식을 듣고 화원으로 돌아갔을 때 이미 왕씨는 도성 밖의 먼 곳으로 휴식을 가버린 후였다. 친절하게 ‘좌보도 오시게.’ 라는 말을 남기고 말이다. 보자마자 말을 타고 달려온 백라는 씩씩거리며 이층으로 올라와 본격적으로 예전일에 관한 분을 풀생각이였다. 하지만 정작 그 주인이 자신을 바라보지 않자 백라는 다시 하류사의 앞으로 걸어가 좌복한다. “어째서 위험한 일을 하시는 겁니까?!” “그게 내 일이지.” 또 다시 고개를 돌리자 백라는 지지 않겠다는 듯 다시 반대편의 하류사 앞으로 걸어가 좌복한다. “일이 조금만 틀어졌더라면 자휼장군은 물론이고 도성 내의 모든 혈족의 생명이 위태로웠습니다!” “그래서 대피시킨 것이다.” 또 다시 하류사가 반대편 창가로 걸어가자 이번에도 백라는 일어나 따라가 좌복했다. “원치 않은 자를 자객으로 삼으셨습니다. 그가 이 일을 안다면 어찌하겠습니까?” “좌보, 좌보, 우리 좌보님.” 하류사는 일어나 방안을 가로지르며 고개를 저었다. 역시 따라가 좌복하는 백라를 무시하며. “나는 여기에 쉬러왔으니 자네도 한가히 풍경을 즐기며 지내주었으면 하군. 보게, 여기는 벌써 눈이 녹기 시작했지 않나?” “왕씨께서는 우리에게 단 하나뿐이신 주인이십니다. 부디 그런 식으로 고개를 돌리지 말아주십시오.” “...” “왜 당신을 모시는 자들을 위험으로 내모시는 겁니까... 어째서 당신을 보호하는 자들을 내치시는 겁니까...!” “...” 하류사는 다시 몸을 돌렸다. 좌복한 백라의 옆을 스친다. 다시 따라가기 위해 몸을 일으키려는데 갑자기 머리가 무거워진다. 누르고 있다. “..?” “왕씨 앞에서 감히 그 감정을 내세우지 말 것.” “...왕씨.” 머리를 누른 손가락에 점점 힘이 들어가 머리가 땅에 닿은 이마가 시리다. “왕씨 앞에서 감히 고개를 들어 자신을 내세우지 말 것.” “...” “왕씨 앞에서 감히 눈물을 보여 심기를 흐리게 하지 말 것.” “저..전하” “왕씨 앞에서 감히 그 대답을 요구하지 말 것.” “요...용서하십시오.” 갑자기 머리가 가벼워진다. 하지만 고개를 들지는 못한다. 눈앞에 보이는 옷자락조차 두려워져서 그냥 꼼짝도 못하고 그렇게 부복한다. 눈을 감아도 등위로 왕의 무거운 시선이 느껴진다. 사락사락거리는 옷자락 소리가 들리며 하류사가 의자에 앉아 부복한 백라를 내려다보았다. “건방진 것. 언제부터 좌보가 왕씨에게 경거망동을 하게 되었는가?” “용서하십시오!” “네 언제부터 왕씨에게 가르침을 내려주려 한단 말인가?” “전하 신은...!” “네가 말하는 신(臣)이란 왕씨 위에 군림하던 것이더냐?” 낮은 목소리에 손이 떨려오고 몸이 굳어간다. 주인이 노여워하는 것이다. “왕씨라는 것이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너희들이 보호하고 있으니 당연히 너희를 위해 숨을 쉬어야 된다 생각하는 것이 왕씨란 말이냐!” “...” “내가 너희들을 책임지고 있기에 너희들이 날 보호하는 것을 잊은 것이냐!” “..전하!” “너희들은 무엇이냐?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기 위해 내 곁에 있는 것이냐? 아니라면 모두 위에 군림하는 내 곁에 있다는 명예에 흡족하여 따르는 것이더냐?” “...” “너희 신(臣)이란 백성들보다 그 헤아림이 지극하여 내게 주어진 책임을 덜어주기 위하고자 만들어진 것이 아니더냐? 행여 왕씨에게 있을 실책을 방지하고자, 그 책임을 과중하게 하지 않고자 만들어진 것이 신(臣)이다! 왕씨에게 책임을 물어 그 죄를 따지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신이 죽을죄를 지었나이다.” “그럼 죽어라!” 단호하게 떨어지는 하류사의 말에 백라는 번쩍 눈을 떴다. 내 잊고 있었다. 이런 분이라는 것을. 가볍게 보이면서도 자신이 왕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 분이라는 것을 잠시의 분노로 잊고 있었다. 그래, 왕씨의 말대로 내가 좌보라는 위치이고 그래서 눈앞에 보이는 작은 것에 휩싸이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 그것을 어겨 분노를 일으켰던 것이니 그것은 좌보로써의 모든 책임을 잊은 중죄다. 백라가 고개를 들고 옷을 단정하게 매만졌다. 왕씨에게 절하고 북쪽으로 향해 한번 고개를 숙여 망자의 산에 기별을 보낸다. 허리 뒤에 꽂힌 단검을 들고는 왕씨를 바라보았다. 하류사는 냉냉한 검은 눈매로 좌보를 내려다보았다. 냉정하신 분. 그래서 우리네가 당신을 따르는 겁니다. 일말의 희망을 당신에게 걸었음을 잊지 말아주십시오. 소리도 없이 검을 뽑아들자 푸르게 빛나는 검 날에 하나 남은 조카의 얼굴이 아른거린다. 녀석. 너무 슬퍼하지 말았으면. “용서하십시오. 먼저 가는 우둔한 아랫것을.” 손에 힘을 주어 목을 긋는다. 얼굴에 뜨거운 피가 튀기며 목이 아린다. 쿵하고 쓰러지는 소리에 하류사가 한숨을 쉬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우리 좌보는 어린아이...” 그는 매일 아침 마당에 앉아 열린 해가 질 때까지 문으로 큰 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누구를 기다리는 듯 했다. 누구를 기다리는 걸까. 입김을 하얗게 불면서 큰길을 바라보는 눈매가 너무 새까매 보고 있으면 마치 그 눈으로 빨려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비록 그가 전혀 상대를 안 해준다 하더라도. “이봐!” “...” “말 좀 해라, 말 좀 해” “...” “야!” 레이첸이 광속에서 소란을 피우던 말든 그것을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처음에는 정말로 미친 사람처럼 발광했던 레이첸도 하루만 지나자 그러는 것도 시들시들했는지 창틀에 고개를 기대고 밖을 내다보았다. 볕이 잘 드는 마당이군. 작지만 손질은 잘되어있네. 한참동안 큰길을 보던 그가 무엇인가 떠올랐는지 부엌에서 커다란 바구니를 가져온다. 빛이 드는 곳에 그것을 놓고 위에 흰 천을 깔았다. 그리고 방안에서 커다란 주머니를 안아와 그것을 열어 안에 들어있는 새빨간 것들을 꺼내 곱게 펼친다. “...?” 무엇인가 하고 고개를 내빼지만 그는 마당 돌탁자에 한가롭게 앉아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고개를 비틀며 바라보자 바구니 옆만 살짝 보인다. 하지만 바람이 조금 불자 차가운 얼음바람에 잘 어우러지는 향기가 풍겨온다. 뭔가 날 듯 안날 듯 하는 미묘한 향, 얼음의 특유의 물향같기도 하고 단과일의 향같기도한 향이 풍겨온다. 날 듯 안날 듯. 분명 어디선가 맡아본 향인데 기억이 나지 않는 향이다. 이게 무슨 향이지? 갑자기 세찬 바람이 마당을 휘돌자 바구니속의 그것들이 하늘로 올라간다. 재빠르게 자신에게 스쳐가는 그것을 손을 하나 낚아챈다. 손을 펼치자 새빨간 꽃잎이 말려있다. 이것이 무엇이냐 묻기 위해 고개를 들다 놀라고 만다. 아아, 꽃바람이 부는구나. 이런 한겨울에 새 빨간 꽃바람이 분다. 붉은 꽃바람이 하얀 옷자락과 검은 머리카락을 하늘로 날려버린다. 바람의 무례함에 화가 난 그가 인상을 쓰며 한손으로 눈을 가린다. 새 하얀 눈, 빨간 꽃비 속을 걸어가는 전설속의 선녀와 같다는 생각이 지나간다. 인상을 쓴 모습에 묘한 기분이 든 것은 처음이다. 바람 속에서, 날아가는 꽃잎을 따라 시선을 돌리는 모습이 인간 같지 않고 마치 요물 같아 소름끼쳐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난다. 바람이 그치자 마당은 순식간 붉게 변해버렸다. 그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더니 인상이 부드럽게 펴지며 옷자락을 살짝 들고 꽃잎을 밟지 않게 조심하며 몇 걸음 걷는다. 몸을 숙여 꽃잎을 한개 주어들은 그를 바라보다 문득 정확히 눈이 마주쳐 놀란다. 레이첸은 뭐라도 잘 못한 듯 손을 내밀었다. 손안에는 아까 잡은 붉은 꽃잎이 덩그러니 놓여있다. “뭐...뭐지 이건?” “동백.” 역시 조심스럽게 걸어온 그가 옷자락사이로 간신히 보이는 하얀 손가락이 손안의 꽃잎을 재빠르게 집어간다. “소...손...이...으!” 하지만 바로 손을 털자 다시 옷이 펄럭이며 내려간다. 제 정신이 들어 안타까움에 크윽 거리며 바르르 떠는 레이첸과는 달리 자례는 꽃잎을 하나하나 주워 다시 바구니에 담는다. 자꾸만 장옷이 바닥에 끌리자 옷을 벗어 마당의 빨랫줄에 올려놓는다. 거참, 끈기 하나 엄청나군. 저걸 다 주어 모을 생각인건가. 앉았다 일어났다 간혹 지붕 위나 항아리 위의 꽃잎 때문에 단상에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모습이 부산스럽게도 보이지만 정적으로도 보여 춤을 보는 느낌이 든다. “...” 정안족은 원래 저런 슬픈 눈을 가지고 태어나는 걸까. 사나운 인상에 잘 몰랐던 그의 눈도 내리깐 모습은 너무 순해 보여 차라리 슬픈 눈이다. 나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그런 눈. 남에게 말할 수 없는 슬픈 사연을 숨겨 논 것일까. 그래서 누구도 들여다 볼 수 없도록 저렇게 까맣게 가려버린 것일까. 해가 질 때까지 그는 마지막 하나까지 주워 모았다. 다 주어 담은 바구니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가 다시 큰길을 바라본다. 지친 듯 천천히 숙여지는 고개에 아무런 상관없는 나조차 저절로 비통해져 고개를 돌렸다. 정말 빌어먹을 민족이다. ------ 단설의 역주는 인용과 개인적 견해가 들어간 글입니다.(맹신(盟信)사양. 도용씁쓸)-------- 51 눈을 깜박이는데 낯선 천장그림이 보인다. 쥐와 고양이, 닭과 개로 표현된 사천왕의 그림이 서로가 서로를 쫓아 빙글 빙글 돈다. 비 현실적인 감각에 잠시 현기증을 느껴버린다. “정말로 우둔한 아랫것이군. 그래 망자의 산에서 뭐라 하던가?” 침대 옆의 의자에서 하류사가 깨어난 백라에게 물었다. 그제야 서로를 쫓던 그림들이 동작을 멈추고 그림으로 서둘러 돌아간다. 갑자기 닥친 현실감에 백라가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금세 목의 통증을 느끼고 손을 대자 칭칭 감긴 붕대가 보인다. 조심스럽게 목을 움직여 보나 꽤 아리고 쓰리지만 그다지 걱정할만한 상처는 아닌가 보다. “...왕씨” “좌보가 무도 못 썬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것이 정말일 줄이야.” 하류사가 피식 웃었다. “보시게 좌보. 사람이란 목을 긋는다고 다 죽는 것이 아니라네. 이곳을 이렇게 배어야만 죽을 수 있는 거야.” 귀밑 근처의 목에서 턱선으로 손을 올리며 하류사가 말했다. 어리둥절한 백라에게 하류사는 차를 건넸다. 뭔지는 몰라도 움찔하며 공손하게 받아드는 좌보를 하류사는 따뜻하게 바라보았다. “우리 좌보께서는 정이 많아 힘들어하고 계신 걸 나도 알고 있다네.” “아닙니다.” “내 어찌 그대 마음을 모르겠는가. 단 한명의 혈족이라도 보이는 것 한명마다 소담한 행복을 찾아주고 싶은 그 마음은 좌보만이 가지신 은혜이네.” 하류사는 잠시 말을 멈추고 기다렸다. “나 역시 그러고 싶지 않겠는가. 이미 너무 많은 희생을 치루며 여기까지 왔는데 나라고 그런 소담한 행복을 가지고 싶어 하지 않을까. 눈앞의 상처에 보듬어 주고 싶은 마음은 왕씨라고 무엇이 다르겠는가.” “저희는 단지...” 백라가 걱정스럽게 중얼거리자 하류사는 그의 턱을 손으로 올려들어 자신을 마주보게 했다. 아직 두려움이 담긴 눈을 미소지은 얼굴로 다독여 주며 하류사는 조용히 말했다. “내 어찌 명림씨의 아픔을 모를까. 내 어찌 내 백성의 힘듬을 외면할까.” 부드럽게 목의 붕대를 만져주며 하류사는 뒤로 물러났다. 왕의 깊고 어두운 눈매에 슬픈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하지만 내 눈앞의 소소한 아픔을 하나씩 다독인다면 무고하게 죽어간 혈족들과 하늘이 내게 지워준 책임을 다 이루지 못할 것이야.” “...왕씨.” “그들의 아픔을 다독이며 함께 울어주는 것은 내가 아닌 바로 좌보, 자네들과 같은 신(臣)이라네. 나는 그저 커다란 성의 문지기일 뿐이야.” “어째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왕씨께서는...” “좌보.” 하류사가 하늘을 가리켰다. 청아한 겨울 하늘은 파랗다 못해 하얗게 질려있다. “하늘이 내게 내린 왕씨의 책임은 내 백성의 슬픔에 책임을 지라는 것이 아닐세. 자네들 스스로 소담한 행복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강한 ‘나라’라 불리는 울타리를 만들어 지키는 것이 바로 왕씨인 나에게 주어진 역할이네.” “...” “행복은 그 곳에서 자네들 스스로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야. 순리대로 슬픔이 오면 그것을 받아들이고 떠나보낼 수 있는 것은 내가 아닌 그대들 스스로인 것일세. 나라는 내가 지키되 나라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내가 아닐세. 이해하시겠는가?” “그렇습니다. 신이 잘못생각하고 있었사옵니다.” 그렇다. 왕이란 강한 울타리 안에서 자신의 아이인 백성들을 보호하는 것. 그것이 하늘로부터 받은 책임인 것이다. 하지만 어떤 일이 생기던지 힘에 부치면 나랏님을 원망하는 것이 백성이다. 그리고 그 수많은 원망을 묵묵히 한 몸으로 받아내는 것이 왕씨이다. 하지만 그 수많은 백성들을 어찌 다 다독인단 말인가. 행복이란 스스로 만들어 내야 하는 것임을 잊은 백성들과 순리를 거스른 존재들을 때문에 왕은 신을 만들고 신은 왕을 대신해 그들을 통치하는 것이다. 왕은 신을 믿고 신은 왕을 따르고 백성은 신을 따르는 믿음이 있기에 나라가 성립되는 것이다. 하지만 신은 왕을 대신하나 왕의 책임까지는 떠맡지 않는다. 하지만 현명함의 댓가인 존경은 맡는다. 모든 일에 대해 책임만을 지어야 하는 운명이 바로 왕씨인 것이다. “내 실책이 없다하지 않겠네. 나라가 함락되었다는 것은 내 실책.” “왕씨, 나라가 넘어간 것은 선대의...” “내 직접적인 잘못이 없더라도 왕씨의 자리에 올라선 이상 그것은 내 책임, 그것을 받았기에 자네들이 날 왕씨라고 부르는 것이네.” 하류사는 한숨을 쉬었다. “자네는 이미 달릴 수 없는 마차에 활을 쏘았지. 그것은 내가 자네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야. 그 온화한 성품과 현명함이 자휼을 구했지. 내가 자네를 이용한 것은 자네라면 그렇게 할 수 있다 여겼기 때문이야. 아시겠나.” “신을 그렇게 믿어주시다니...” 하유사는 식어버린 차를 한모금 마셨다. 눈앞에 어떠한 애달픈 사연에도 흔들리지 않아야한다. 작고 소소한 인정은 파멸을 불러온다. 내가 알고 있는 작은 행복을 지키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 것이 왕씨 아니던가. 나라를 지켜 강한 울타리를 만들어 주는 것이 왕씨이다. 그 안에서 행복이란 각자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명군의 치세이다. 많은 역사 속에서 명군이란 폭군으로써의 일을 얼마나 숨길 수 있는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던가. 그리고 내가 그것을 해낼 수 있기 때문에 내가 왕씨인 것이다. “하지만 눈앞에서 죽어가는 아이를 보면 달려드는 것이 인간이 아니겠는가?” “...?” “곡양촌 유번의 모두리로 가보시게.” “...예?” “그도 형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야.” 하류사는 인자하게 웃어보였다. 좌보의 환한 표정을 뒤로 하며 하류사는 정원으로 나갔다. 그래. 내가 죽이지 않는 자도 책임을 지어야 하는 것이 왕씨인 것이야. 단 한명이라도 더 살릴 수 있다면, 조금이라도 희생을 줄일 수 있다면 내 자식이라도 죽음으로 내몰아야 하는 것이 왕씨인 것이야. 그리고 그 모든 책임을 지어야 하는 것이 왕씨인 것이야. “바람이 매우 차군.” 방안에서 백라가 아픈 목을 감싸쥐고 부리나케 짐을 꾸리는 모습을 지켜보며 하류사는 빙긋 웃었다. 이따금 소담한 행복에 겨워하는 것은 날카로운 자네에게 도움이 되기도 하지. 부디 즐겨 다녀오시게나. 태진이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치며 화를 내었다. 황제의 축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내가 쉬첸의 일로 바쁜 틈을 타 4왕자는 또다시 성을 나가버렸다. 어디를 갔는지 아무리 찾아도 없다. 필히 도성 안을 빠져나갔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넒은 땅덩어리에 어디부터 찾는단 말인가. “도성 안에는 없는 것 같군 도대체 어딜 가버린건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자인지 모르겠다. 어떻게 보면 상황을 타 잠자고 있는 용처럼도 보이고 어떻게 보면 너무나 우둔한 곰처럼 보인다. “하긴 용이라면 내가 가누기 힘들었을 테지만...” 그래도 이것은 너무하지 않은가. 태진은 환관들을 불려 도성을 다시 한번 찾아볼 것을 명령했지만 사실 찾을 것이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생각보다 잘 어울리는 새까만 옷을 입은 을노가 유번을 안으로 모셨다. 예상외의 인물이 모도리에 있자 유번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을노에게 눈짓으로 물었다. “유견님은 ... 음 도성 안에 안계십니다.” “그래서 을노께서 여기 모도리의 임시 선생이?” “미흡하지만 일단은 도성 안에 있는 선인(仙人)중 제가 유일이라.” “잘하셨소. 그럼 왕씨를 만나뵐 수 있겠습니까?” 이말에도 을노는 고개를 저었다. “왕씨께서는 잠시 도성을 벗어나 여행을 가신다 하셨습니다.” “그러시던가. 그럼 좌보님을 만나실수 있겠소?” “좌보님도 수행차 따라 나가셨습니다.” 유번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럴 것 같았지만 ....물론 만난다고 매구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지만 그래도 없다니 뭔가 서운하다. “벌써 일어나십니까?” “맡고 있는 아이가 기다리니 속히 가봐야지요.” “...?” 을노가 고개를 갸웃했다. 유번도 어리둥절했다. 을노는 모르는가. 하긴 자신도 이 번 일에 대해선 아는 것이 거의 없다. 그냥 목래에서 살아남은 혈족이니 보호하고 있으라는 것이 다였으니. 둘이 모도리의 문쪽으로 걸어가 서로 작별 인사를 나누는데 갑자기 문이 확 열렸다. 예상치 못한 찬바람에 유번과 을노가 동시에 인상을 썼지만 상관치 않고 누군가 당당하게 들어와 외친다. 앞도 뒤도 빼먹으며 . “갑시다!” “어라 아저씨 돌아오셨나요? 목은 왜 그러십니까?!” “좌보께선 왕씨를 수행가신 것이 아니었소?” “갔다가 돌아왔습니다. 유번님, 잘 되었군요. 지금 곡양으로 달려가 맡고 계신 아이를 만나 보아야겠습니다.” 목에 칭칭 붕대를 감은 좌보 백라는 서둘러 두 사람을 문 밖으로 끌어냈다. “저도 갑니까. 아저씨? 전 이곳을...” “가야지. 지금 난곡을 넘어 자휼과 만날 수 있는 사람은 너뿐인 것 같은데. 네가 그의 소식을 전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예?” “유번님께 여쭈어 보거라.” 백라가 말에 오르자 어리둥절한 을노가 유번을 보았다. 그는 어깨를 으쓱인다. “조의선인은 내가 맡고 있는 아이를 알고 있나보군.” “예?” “자례다.” 백라가 먼저 말해주며 말을 달렸다. 그 뒤를 따라 유번이 달리기 시작했고 한참 후에야 놀란 표정의 을노가 말을 달렸다. “아무리 봐도 정말 사납게 생겼다. 너.” “...그렇습니까.“ 땍땍거리는 것도 아니고 그냥 아닌듯 그런듯 적당히 무시하는 듯한 자례의 행동에 화를 내며 버럭 소리를 지르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못한다. 성격이 워낙 그런 성격이라 점심 때 난 화가 저녁때는 풀려버리는 것이다. 특히나 새에게 모이를 주기 위해 저녁 무렵에 밖으로 나와 새장을 보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면 그냥 다 잊어버리기 십상이랄까. 오늘은 무슨 일이 있나? 아침 일찍 새장을 들여다보던 자례가 옷을 갈아입었다. 레이첸은 뚱하게 그 모습을 보았다. 뭔가 좋은 일이 있나? 나들이라도 가나? 저건 도성 안에서 보았던 그 차림새다. 잘 어울리는군. “오늘은 기분이 좋아 보이는데?” “...” 아무 말 하지 않은 것에는 익숙해 졌다고. 자례는 고개를 돌려 마당에 올려진 탁자의 눈을 쓸고는 앉았다. 동자가 화로를 내와 탁자에 올리자 그것을 친구 삼아 책을 읽는다. 오늘은 눈이 살짝 내리는데 안에서 기다리지 않고. 레이첸이 가만히 바라보니 책을 읽으면서 고개를 계속 들어 문 쪽을 바라보는 게 역시나 오늘도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하다. 누구를 기다리기에 저렇게 목을 늘인다지? “...흥” 지극정성이네. 그걸 나에게 쏟아봐라. 내 당장 왕성에 돌아가면 평생 놀고먹게 해줄 텐데. 비꼬면서도 자신도 그가 기다리는 자가 무척이나 궁금해져서 자신도 창살에 고개를 내밀고 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날 해가 떨어지도록 아무도 오지 않았다. 레이첸도 허탈했지만 저 녀석은 그것이 얼마나 더할까 하는 생각에 밖을 보니 어두워지는 하늘을 보며 그저 무표정하게 서 있는 그가 보인다. 눈이 더 내릴 것 같은데 저렇게 서 있으면 감기 걸리겠다. 안 그래도 건강해 보이는 놈은 아니다. “이봐. 들어가서 쉬어라. 누굴 기다리는지를 몰라도 그놈은 안와.” 그러자 처음으로 자례가 레이첸을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한다. “오실 겁니다. 조금 늦는 것뿐이에요.” “올 인간 이였다면 벌써 왔겠다. 며칠째 그게 무슨 짓이냐?” “...며칠 째라뇨?” “내가 왔을 때부터 계속 누굴 기다리고 있잖아?” “...” 자례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고 방안으로 들어가 문을 힘없이 닫았다. 유번님을 기다린 것뿐이다. 오늘 정도엔 오실 것 같았으니까. 그뿐이다. 그렇게 표가 났나? 지금이라도 올 것 같다. 사실 저 문을 열고 이곳저곳 살피며 날 불려 이곳을 나가 목래로 돌아가자고 할 것 같다. 너무 늦었다며 내 손을 잡고 말을 달려 그 광대한 초지로 돌아가 예전의 나태한 일상으로 돌아가 잦게 싸우며 이해하며 지낼 수 있을 것 같다. 한낱 꿈이라는 것을 알지만 아무래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사실 지금이라도 어디선가 날보고 있을 것 같은 느낌에 잠을 잘 수가 없다. 꼭 그럴 것만 같다. 아니 그럴 것이다. 바보같은 생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마지막까지 포기 못하는 자신의 고집에 스스로 고개를 흔들었다. 천하의 고집쟁이 같으니라고. 52 하나 둘 눈송이가 따뜻한 코에 내려 앉아 시리다. 흑염은 고개를 흔들어 눈을 털어내었다. 아까부터 무릎을 꿇고 눈 위에 앉은 주인은 자고 있는지 꼼짝도 하지 않는다. 몸을 붙게 옆에 앉아 체온을 나누어주지만 밤이 깊어서 걱정스럽다. 입으로 주인의 어깨를 친다. 몇 번을 치고 나서야 꼼짝도 하지 않던 주인이 고개를 든다. 주인의 머리와 어깨에서 후두둑 눈이 떨어져 내린다. “...그래. 돌아가자. 나무도 이미 했으니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주인의 말을 듣고 벌떡 일어나 힘차게 몸을 흔든다. 기쁘게 주인의 주위를 돌더니 마을 쪽으로 내려가려고해 자휼은 놀라 흑염을 붙잡았다. “아니야! 산으로 돌아가야지!” “...?” 흑염은 자휼의 만류에 못내 다시 돌아오면서도 이상하다는 듯 주인을 바라본다. “저기는 가면 안돼....아직은 안돼.” 자휼은 흑염을 쓰다듬었다. 삐졌는지 자신을 태우지 않고 걸어가려는 흑염의 뒤를 따라가는 머릿속에는 걱정이 가득하다. 처음엔 광속의 미친 사람이 걱정되어 왔지만 오늘 흩어진 꽃잎을 줍던 자례의 행동에 뭔가 자포자기한 듯한 생각을 느껴 불안해졌다. 나를 기다리는 것일까. 분명 나를 기다리며 큰길을 내다보는 것일까. 그런 것일까. 그럴 것이다. 나도 알고 있다. 그러겠지. 날 기다리겠지. 걱정이 된다. 저렇게 찬 바람을 맞으며 계속 큰길을 내다보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약은 챙겨 먹고 있는 걸까. 잠을 잘 잘까. 잠자리를 많이 가리는 아이인데. “...난 뭐하는 걸까?” 흑염이 고개를 들었다. 자휼은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흑염아, 네 주인은 지금 왜 수련을 하고 있는 걸일까? 무리 아우님모시고 저 멀리 달아나서 살까?” 싸우기 싫은 것은 아니다. 단 그것은 내게 저 아이가 없을 경우겠지. 어차피 전장에 나가보았자 저 아이 생각하면서 어영부영 지낼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지금 수련도 시간낭비야. 정말로 그냥 떠나버릴까.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기에 자휼은 피식 웃었다. 내가 좋아도 저 아이가 반대할것이다. 게다가 목적이 없기는 왜 없는가. 죽이도록 미운 놈들이 있는데, 이렇게까지 만들어 놓은 놈들은 다 없애버리겠다. 내가 어떻게 되던 간에 보복을 하겠어. 특히나 태진 놈에게는 갚을게 많지 않은가? 머리를 감았는지 물기가 어린 머리채를 마른 수건으로 털던 자례는 마당의 탁상에 앉았다. 아직 젖은 머리를 손으로 대강 빗고는 작은 병을 열어 손에 붉은 물방울을 몇 방울 떨어뜨리고 머리끝에서 위로 여러 번 매만진다. “그 꽃?” 레이첸이 낮잠을 자던 중 그 미묘한 향에 깨어나 중얼거렸다. 창살을 내다보니 자례가 무엇인지 뭔가를 찾는다. 향기는 어디서 난거지? 꽃은 안 보이는데. 향에 대해선 무지한 레이첸은 그냥 고개를 갸웃해보였다. 그보다 젖은 머리로 이곳저곳을 찾는 것으로 보아 분명 빗을 찾는 거다. 빗질할 때는 손이 보이겠지! 벌떡 정신이 든 레이첸을 실망시키려는지 빗을 찾을 수 없었던 자례는 방안으로 들어갔다가 잠시 후에 완전히 정리된 모습으로 나타났다. 맥빠지는 표정으로 레이첸이 고개를 숙였다가 곧 자례가 식사를 가지고 오는 소리에 다시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아무말도 없는 아이지만 그렇다고 아무말도 안할내가 아니다. “...향기가 좋군. 네 쓴 향과 잘 어울리는 데?” “...감사합니다.” “사람 몸에서 풀 향이 나려면 어떡하면 되지?” “...몸에서 나는 게 아닙니다. 옷에 약 냄새가 밴 겁니다.” “아니, 네 몸에서 나는 향이다. 처음에 봤을 때도 그랬지. 넌 기억 안 나냐? 난 널 기억한다. 그 사나운 인상도 그렇지만 그 쓴 향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 “오랫동안 약을 먹은 자에게 배는 것입니다.” “어디 아픈가?” 대답 없이 고개를 돌리는 자례에게 레이첸이 작게 외쳤다. “이봐! 방으로 그냥 들어가라. 너 지금 네 얼굴색이 어떤지 알고 있나?” 하지만 자례는 다시 탁상에 앉아 큰길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이었다. 오늘도 여전히 누군가를 기다리는 그 모습으로 그렇게 앉아버린다. “너 왜 그리 불안해하는 거냐?” “예? 제가 뭘요?” 자휼은 장작을 쌓다말고 고개를 돌렸다. 손을 돌리자 마자 쌓았던 장작이 우르르 무너져 내린다. 발과 손으로 톡톡 차서 다시 올려놓지만 역시 쓰러지는 것은 못 막는다. 완전히 무너진 장작더미를 유견이 그것 보라는 듯 눈짓을 했다. “그러니까...” “...?” 자휼의 안달한 몸짓에 유견이 고개를 살짝 들었다. 이럴때는 저 큰 아이가 어린아이같아 보인다. 말하지 않아도 무슨 말을 할지는 알고 있지만 꼭 들어야 하는 자신도 나쁜 성격이라 생각한다. “산책 좀...” “...또 이틀 후에나 오려고? 요즘 산책이 잦구나.” 하지만 유견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방으로 들어갔다. 무언의 허락에 자휼은 멀리 살만 찌고 있는 흑염을 불렸다. 아침부터 그 ‘좁쌀‘이라 이름 붙인 동자는 방앗간에 가서는 엿이라도 얻어먹는지 돌아오지를 않는다. 여전히 그림처럼 꼼짝 하지 않고 이쪽은 봐주지도 않는 자례를 보기도 지쳤다. 말 많은 여인이 귀엽다고 생각되는 것은 혼자라는 느낌을 주지 않아서인가. 그래서 돈 많은 늙은 것들은 어린 여자들을 찾는 건가. 좁은 광에는 처음보는 물건들도 많이 얼마간은 호기심을 감당할수 있었지만 이젠 이것도 저것도 지겹다. 레이첸은 한숨을 쉬었다. “아아 일국의 왕자가 여기서 이렇게 갇혀 지내다니... 황제가 알면 얼마나 웃을 일인가 하하하!” 레이첸이 피식거리며 중얼거리자 자례가 처음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반응에 놀란 레이첸이입을 다물자 자례가 잠시 망설이다가 다가온다. 처음으로, 해가 쨍쨍한 오전에 가까이에서 본 그의 얼굴에 알수 없는 이질감이 들어 레이첸이 먼저 시선을 돌렸다. 냉냉한 목소리로 그가 물었다. “증명해보시오.” “뭘?” “당신이 왕자라는 것을.” “응? 글쎄... 호는 레이첸, 자는 서공(曙珙) 황제의 4왕자. 위로 형도 많고 동생은 수도 없고 ...” “4왕자?” 순간 자례가 눈살을 찌푸렸지만 레이첸은 자례가 말을 걸어준 것이 기쁜지 가볍게 말했다. “나도 이 광속에서 생각한 것인데, 도저히 이곳에서 날 증명할 방법이 없어. 예를 들어 내가 사실을 말해도 상대방이 사실을 모른다면 내가 사실을 말하던 거짓말을 말하던 누가 알겠어? 도성의 병사들조차 내 얼굴을 모르는 데. 아, 하나 있기는 한데 확인하려면 시간이 걸려서...” “...그렇군요.” “나 원, 아무래도 다 좋지만 얼마 후에 황제의 축...으악!” 갑자기 소리치는 레이첸에 놀라 자례가 뒤로 약간 물러났지만 사색이되어버린 레이첸은 광문에 걸린 창살을 붙잡고 외쳤다. “내가 여기 와서 얼마나 있던거지?!” “광속에서 보름을 보내셨소.” “보름?! 그렇게나? 젠장! 날 여기서 내보내라!” “내겐 그럴권한이 없습니다.” “빌어먹을!” 쾅하는 소리가 나며 문이 흔들렸다. 보기보다 튼튼한 문이라 심하게 흔들리기만 할뿐 열리진 않는다. 그것을 알고 있기에 자례는 그냥 내버려 두었다. 지치면 그만 둘테지. 역시 몇 번 더 쾅쾅거리고 곧 멈춘다. 조용해진 광을 보고 자례는 새 차를 타서 한잔 마시기로 했다. 찻잔을 막 드는 순간 큰 목소리에 깜짝 놀라 잔을 떨쳤다. “내가 여기 오기 전 경축일을 24일 앞두고 있었어. 오는 길이 4일, 여기서 보름을 보냈다면 10일 남았는데 도성까지 가는 길이 4일 걸리니 겨우 6일 남았다는 거다! 진상할 선물을 찾는 것도 버거운 시간이야! 날 여기서 어서 내보내라!” “...” 안된다는 듯 자례가 작게 고개를 저어보였다. 혼자서 안달하던 레이첸이 품안에서 작은 동패를 꺼내 자례에게 보였다. “이건 왕성을 드나들 수 있는 출입증이다. 글을 읽을 수 있다면 알겠지! 난 돌아가야 해!” “...!” 안보려고 했지만 이미 동패는 눈에 들어왔다. 절대 생각하지는 않으려고 했건만 벌써 머리가 저게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인하고 있다. 저 동패 쉬첸이 내게 준 것과 완전히 같군. 결국 저건 진짜야. 자례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싫다니까. 이젠 절대로 이 민족 틈에는 끼어들지 않겠어. 이 초원의 늑대들이고, 한족이고 지긋지긋해. 그냥 혈족들 사이에서 죽은 듯 조용히 살아갈거야. 레이첸이 다급하게 창살을 잡고 뭐라 외치지만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이 남자 미친 것이 아닌 것은 알고 있었지만 진짜 왕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정말인가? 게다가 4왕자인가. 어라? “...4왕자?” “그렇다니까! 내가 진짜로 4왕자이니까...!” 태진에게 힘을 넣어준 그 4왕자인가! 그 빌어먹을 태진의 배경인가? 이번엔 자례쪽에서 사색이 되어 벌떡 일어났다. 도저히 이런 상황을 이해할수 없다는 표정에서 레이첸이 달랬다. “걱정마라, 내 여기서 있었던 일은 모두 묻어두겠다. 그러니 어서 풀어다오!” “...열쇠가.” “그렇다면 찾아봐!” “...내가 왜 그래야하지요? 동패가 거짓일줄 누가 압니까?” “뭐?! 이봐! 기다려라! 이봐! 젠장! 이걸 도성에 보내면.. 그러니까 내가 시간이 걸린다 했던거라구! 이봐!” 자례는 서둘러 방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심장이 두근거린다. 터질 것만 같다.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를 쓴다. 정말인가. 뭔가 좋은 기회인듯도 하고 엄청난 위기상황인것도 같은, 머리가 어지러워 도저히 상황이 분간이 가지 않는다. 방안이 좁아보이고 답답하다. 현기증에 벽에 기대앉는다. 하긴 그동안 너무 찬바람을 많이 쐬었지. 울컥하는 느낌이 올라오며 입을 가리기도 전에 피를 토해내었다. 기침할 힘도 없이 계속 피를 토해내자 마치 내장을 입으로 꺼내놓은 듯한 통증에 바닥을 긁는다. 갑자기 밤이 온다. 이상할 것도 없다. 또 정신을 잃는구나. 이번에 눈을 감으면 다시 뜰 수는 있는 걸인가. 아니 다시 떠야한다. 아직 못한 것이 너무 많으니까. 누가 방으로 들어왔다. 찬 바람이 분다. 누구지? 53 “그래, 그래 오늘은 내려갈 거다.” 자휼이 집이 보이는 언덕에서 중얼거렸다. 말에서 내려 흑염과 같이 언덕을 내려간다. 집 앞에 다가오자 흑염이 긴장한 것인지 즐거운 것인지 큰 소리를 내며 발을 구른다. “쉿, 조용히 해라.” 이 놈이 특별히 똑똑한 것이 아니다. 아마도 자례의 몸에서 나는 풀 향기가 짐승들에게 호감을 주는 모양이다. 그래서 나는 이놈을 끌고 와야 했지만 자례는 함정을 파고 묵계를 끌어들였다. 마치 꽃띠라 나비가 날아오듯 그렇게 묵계는 잡혔었지. “...그러고 보니 묵계의 이야기도 놈에게 해주어야 하는구나. 별로 안 좋은 이야기만 가지고 들어가는 느낌이다.” 할아버지의 죽음. 묵계의 죽음. 명림씨의 이야기. “...” 쉬첸의 죽음을 이야기해야 할까. 내가 죽였다고 해야 하는 걸까. 아직 난 준비가 되지 않았다. 아직 어떻게 동생을 다시 봐야 하는지 모르겠어. 물론 동생이 내 모습에 놀라 힘들어하거나 두려워할 것이라 여기진 않는다. 힘들어하는 것은 나다. 자례는 내가 어떤 병신이 되던 변하지 않을 테니. 그 점을 알기에 힘들다. 하지만 늘 저렇게 큰 길을 바라보며 눈바람을 맞는 모습을 보기에는.... “...?” 갑작스럽게 자례가 방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버린다. 왜 그러는 거지? 작은 문이라 흑염은 밖에 나두고 혼자서 들어가니 광속에서 그 미친놈이 왁왁 소리 지른다. “뭐?! 이봐! 기다려라! 이봐! 이봐! 젠장! 난 안미쳤다구!” “...” “넌 또 뭐냐? 이 놈의 집구석은 정상인 놈들이 하나도 없군!” 확실히 미친놈은 아니군. 여진족인가. 붉은 머리가 인상적이다. 그를 무시하고 방문 앞으로 가 안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아무소리도 들리지가 않는데. 머뭇머뭇 정말로 힘들게 고민하다가 방문을 두드린다. “...자..례야?” 방문이 벌컥 열릴 거라는 생각은 안했지만 그래도 무슨 반응이 있을 줄 알았는데. 다시 방을 두드려본다. 아무런 기척이 없어 이상해 다시 방문을 두드린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네. 이 문 꼭 닫혀있군. 방안의 작은 문도 닫혀 있었는데 방문도 닫혀 있다니. 이 방은 지금 밀폐되어있다. 자례의 말을 빌리자면 갇혀 있는 것이다. “자례야? 애야?” 불안감이 엄습해 벌컥 문을 열어젖힌다. 왈칵하는 피비린내에 인상을 찌푸리고 만다. 얼른 들어가 쓰러진 동생을 안아 든다. 몸이 차갑다. 역시. 생각했던 상황에 몸은 떨려오지만 마음은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피를 흘리면 탈진해서 쓰러진 거라고 했어.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진정해라 자휼. 하지만 떨리는 손은 어찌할 수가 없어 주먹을 쥐고 힘을 준다. 목에 손을 대어보니 불규칙적이지만 분명 맥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부엌으로 들어가 물을 떠온다.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 피를 토한 자에게 무엇을 먹이는 것은 위험하다고 의원이 말했었다. 그다지 병에 대해 아는 것도 없는 나로서는 피를 닦아내어주는 것이 최선이다. 요를 피고 피가 묻은 겉옷을 벗겨 편히 눕힌다. 스치는 머리카락에 동백향이 풍겨 가슴 한구석이 아릿한 느낌을 받는다. 뭐랄까 옛 기억의 잔향이라고 할까. 키도 컸구나. 손에 묻은 피를 닦아내다가 문득 그것을 느낀다. 동생은 성장했어. 내가 없어도 성장하고 있구나. 결국 내가 없어도 성장할수 있는 거야. 알 수 없는 실망감과 지독한 외로움이 느껴져 자휼은 고개를 들고 크게 숨을 쉬었다. 바보같이 어린아이처럼 섭섭함을 느끼는 것인가. 성장 못하는 것은 내 자신인 것인가. 나 스스로도 성장해야 하는 건가. 순간 자신의 손을 꽉 잡는 손에 펄쩍 뛸 정도로 놀라며 자례를 내려본다. “자례야?” 깨어난 것은 아니였다. 가위에 눌린 것처럼 인상을 찌푸린다. 악몽을 꾸고 있는 듯해 깨우려고 하지만 몸을 흔들어 이름을 불러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저 잡은 손에 힘이 더 들어갈 뿐. “?” 물수건으로 흐르는 땀을 훔치지만 그 이상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몰라 너무나 난감하다. 처음엔 뭔가 꿈을 꾸는 것 같은데 이젠 그냥 열이 나서 힘들어하는 것도 같아 종잡을 수가 없다. 악몽이라면 당장 깨우면 되겠지만 열이 나서 자는 아이를 깨우면 안 되지 않는가. “...의원에게 뭐라도 배워놓을걸.” 스스로가 한심하다고 느껴 자휼은 신경질적으로 물수건을 접어 이마에 올렸다. 하긴 내가 직접 돌봐야 하는 때가 올 줄은 몰랐다. 결국 이 아이가 죽을때까지만이라도 목래의 생활에 변화가 있으리라 생각지 못했으니까. 아니 그렇게 하려고 했다. 뛰어난 의원을 모실 줄은 알았지만 막상 내가 할줄 아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저 주어들은 찬바람과 피로에 관한 이야기뿐. 그러고보니 나는 참으로 이 아이의 병에 대해 아는 것이 없구나. 가슴병이라 들었지만 어느정도 아픈건지. 어느정도 살수 있는것인지. 난 아무것도 몰라. 아니 알고 싶지 않아 묻지 않았다는 게 정확할지도. 바보같이 내가 알지 않으면, 내가 모르는 체로 있으면, 예정대로 끝나지 않을것이라는 희망이 있었다. 정말 어리석은 망상이지만 나약한 자신은 믿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어리석다는 소리를 들어도 기르는 아이의 죽는 날짜를 안다면 나는 미쳐버릴것이 분명했다. 하루 하루 그 해가 짧아서 초초하고 안달하며, 주어진 시간에 내가 바라는 것을 이루기 위해 이아이를 닦달할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결국 아이가 망자의 산으로 가는 그날이 가까이 오면 편히 보내지 못하겠지. 단 하루만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어 추하게 몸부림 치게 될것이다. “....너도 그것을 알아서 내색하지 않는것이냐.” 나는 몰라도 너는 분명 네가 죽을 날을 알아보았을텐데 말이다. 그래도 여전히 하루하루를 태평하게 보내는 것은 너가 나보다 강하기 때문일까. 아니라면 이 지독히 못난 내가 화를 낼까봐 내색하지 못하는 것이냐. 입이 씁쓸해진다, 조심스헙게 이마에 내려온 머리카락을 걷어내면서 미간을 찌프린 얼굴을 바라본다. 하나도 변하지 않아 이 상황에 기쁜 마음마져 든다. 갑자기 자신의 손을 잡고 있던 손아귀의 힘이 강해져 의아해한다. “자례야? 너 내말이 들리느냐? 애야?” 그게 아니야. 뭔가 참고 있는 것 같은데. 무의식적으로도 뭔가 참고 있어. 고통인가? 알수없는, 물을수도 없는, 답을 낼수 없는 질문에 스스로 노여워진다. “애야, 참지 마라. 도대체 왜 그러는 거냐!” 말하지 않는다면 난 모른단 말이다. 어째서 그렇게 참는 것이냐. 이젠 그냥 풀어놓아도 된다. 네가 그렇게 참으면 내 얼마나 억장이 무너지는 줄 알고 있느냐. 내 잘못이다. 모질게 힘든 일만 혼자서 삭이는 네 바보같은 버릇은 내 과한 욕심이 만든 것이다. 하지만 아이야, 내 노력을 너도 알지 않느냐. 10년간 네게 담긴 내 두려움을 지우기 위한 내 노력을 너도 알지 않느냐. 지금까지 내게 보여준 웃음은 모두 거짓이었단 말이냐? 아직도 그렇게 혼자서 삭이는 것이냐? 이러지 마라. 네 형은 너보다 나약하다. 혼자지냈을때는 그보다 시간이 더디갈수 없었건만. 지금은 정말로 잡을수 없이 시간이 흘러가 벌써 어두워지는 것을 느낀다. 차츰차츰 안정되어가는 아이를 보고 안도하는 것도 잠시이다. 문득 아이가 잡고 있는 손이 시선에 들어온다. 자신도 화들짝 놀라고 싶지만 이미 익숙해져 버린 자신의 손이다. 자휼은 잠시 생각에 잠겼으나 답을 내리기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챙캉하는 금속성의 소리에 레이첸은 놀라 벌떡 일어났다. 무슨 소리지? 버릇처럼 창살 쪽으로 고개를 내밀었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널 풀어주겠다.” “...?” 모습은 보이지 않는데 말소리만 들리자 레이첸이 소리쳤다. “뭐냐 네놈은? 말만 있으니 귀신이냐?” “방안의 아이를 돌보아주었으면 한다.” “...? 너 아까 그 외팔이냐? 젠장! 모습을 보여 봐!” “부탁을 들어주겠는가?” “미쳤냐!” 레이첸은 창살이 흔들리도록 내리쳤다. “난 바쁘다. 시간 안에 도성으로 못 들어가면 내 목숨이 달랑거리는 이 시점에 사람 무시하는 저놈을 돌볼 시간 따위 내겐 없다! 문을 열어라 어서!” “이 마을은 말이 없다.” “그게 뭐! 이 마을에 말이 있던 없던!” 내가 타고 온 말은 어딘가에 있단 말이다. 레이첸의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말소리가 들렸다. “네 말은 늑대에게 쫓겨 마을을 나갔다. 내가 그것을 보았지” “이놈! 네 놈 무엇이냐!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느냐!” 불같이 호령을 내리지만 스스로 생각해도 우습다. 내가 황제면 어떻고 농부면 어떤가. 난 갇혀 있고 저놈은 밖에 있는데. “이곳을 맡고 계신 분이 말을 가지고 있다. 그 분이 오시면 그 말을 타고 가라. 그것이 빠를 테니.” “...쳇!” 그동안 어차피 여기에 있어야 한다는 이야긴가. “좋아 좋아. 알았으니 문을 열어라!” 하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다. 몇 번 더 소리치던 레이첸은 설마 하고 문을 세게 차자 덜컹하고 너무나 쉽게 열려버린다. “...어허허허?” 황당함에 웃음마저 나온다. 재빠르게 마당을 둘러보지만 아무도 없다. 단지 뒷문으로 길게 나있는 발자국만이 그가 유령이 아니었음을 알려줄 뿐. 아무튼 광에서 나왔다는 사실에 레이첸은 재빨리 몸을 놀렸다. 일단 말이 정말로 없는지 확인해보자. 레이첸은 급히 마을 쪽으로 뛰어갔다. 사방이 문으로 막혀있어. 자례는 답답함에 한쪽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 문을 밀어보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다. 당황함에 다른 문도 밀어보지만 마찬가지다. 숨이 막히는 답답함에 자례가 신경질적으로 문을 몸으로 밀쳤다. 한지와 댓살로 만들어진 문이 분명한데 어째서 흔들리지도 않는 거지? 어디선가 우는 소리가 들려 오싹함에 뒤를 돌아본다. 아까는 보지 못했던 가구들이 들어차 있다. 방이 더욱 좁아졌어! 누가 우는 거지? 누가 방안에 같이 있는 거야? 구석에 누군가 울고 있어. 다가가 침대와 벽 사이를 바라본다. ....뭐지? 애야? 천천히 구석에서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아이는 나다. 놀라 방안을 다시 보자 이방은 옛날 형과 살았던 흥료성의 집이다. 놀라기도 전에 어린 자신을 바라보았다. 어린 자신은 내가 안보이는지 텅 빈 방에서 훌쩍이며 울다가 지쳤는지 잠이 들어버린다. 자신을 동정해도 되는 걸까? 자례는 아이를 구석에서 꺼내 안아들었다. 불쌍하게. 조금만 더 잘 보살폈더라면 이런 기억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죄책감이 가득해서 아이를 토닥여준다. 훌쩍이던 아이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잠이 든다. 몸을 조금만 뒤척여도 깜짝 깜짝 놀라는 행동에 꼼짝도 할 수가 없다. 팔도 다리도 저리지만 그래도 움직이지 못한다. 모든 것이 내 잘못이라는 생각이 든다. 절대로 싫어하는 것이 아니다. 지독히 사랑하고 있다. 어떻게 미워할 수 있단 말인가. 단지 강하게 크길 바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아이가 알까. 혹시 날 미워하지는 않을까. 걱정되는 마음에 가슴이 답답해진다. 하지만 미워해도 된다. 원망해도 된다. 그래도 나는 널 버리지 않을 것이다. 단 하나 남았다. 우린 둘뿐이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널 지키고 싶은 내 마음을 언젠가는 알아주리라 생각한다. ...이건 내 감정이 아냐. 갑자기 어린 자신이 눈을 뜬다. 자례는 흠칫 놀란다. 어린 자신의 눈동자에 비친 자는 자신이 아닌 형이다. 전염병이 돌던 때 검은 옷을 입고 다녔던 형의 모습이 뚜렷하게 비친다. 눈동자에 비친 형이 천천히 커지면서 다가온다. 어느새 어린 아이로 변한 자례는 두려움에 몸을 웅크리자 커다랗게 변한 형이 소리친다. 강하게, 강하게! 너무나 크게 들리는 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형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어린아이가 되어 열심히 앞으로 내달리며 도망간다. 하지만 발은 움직이지 않아. 도깨비처럼 뿔이 난 형이 칼을 들고 뒤에서 다가오고 있다. 어서 못 달리겠니? 너는 왜 항상 어리광만 부리려고 하는 거니? 새파랗게 잘 갈아진 검이 머리위로 올라갔다. 쉭 소리가 나며 감아버린 눈앞에 빨게 진다. 덜덜 떨며 눈을 뜨자 눈앞에 피를 토하고 죽어버린 자신이 보인다. 형은 어디에 있지? 저 멀리 검은 어둠 속으로 형이 빠르게 걸어가고 있다. 형. 형.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종종걸음으로 빠르게 달려가지만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다. 속이 답답해지고 눈앞의 모든 것이 소용돌이친다. 가슴이 끊어질 것 같은 통증에 주저앉고 싶지만 그랬다간 형을 영원히 따라 갈수가 없다. 날 따라오지 마라. 난 네가 너무 귀찮아. 왜 하필 너 같은 게 내 동생인거야? 악연도 이런 약연이 없어. 순식간에 형은 사라진다. 암흑 속에 덩그러니 홀로 남겨졌다. 혼자다. 두려워 귀를 막고 눈을 감는데 어디선가 누군가 걸어온다. 눈을 뜨니 목래성주 때의 형이다. 여전히 나는 어린아이인데. 형을 불러야지. 하지만 갑자기 내장이 끊어지는 통증이 오며 피를 토한다. 계속 계속. 주위에 피의 못을 만든다. 하얀 옷이 검붉게 물들고 몸을 가누지를 못해 쓰러진다. 아찔한 시야 속에서 형이 걸어와 자신을 본다. 왜 하필 너와 이런 인연으로 만나게 되었는지 분통터지는 일이 아닐 수 없더구나. 곱씹고 곱씹어 보아도 이리 악연일수는 없더라. 왜 하필 네가 내 아우이며 내가 네 형인지 너는 생각해 본적이 있느냐? 냉정하게 말한 형은 뒤를 돌아 사라진다. 그래도 붙잡고 싶다. 하지만 입이 열리지가 않아. 피로 만들어진 연못이 점점 깊어져 늪이 되는지 점점 몸이 가라앉는다. 이렇게 죽는 건가. 이렇게 죽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무섭다. 갑자기 몸이 일으켜진다. 누군가 품에 앉고 토닥인다. 괜찮아.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내가 네 곁에 항상 있을 테니 편안하게 잠들어라. 형인가. 이 목소리는 형인가. 힘들게 뜬 눈에 들어오는 것은 너무나 흉측한 괴물의 모습. 점점 녹아내려 뼈가 들어난다. 하지만 소리치며 도망가고 싶지 않다. 잠들어라. 저승사자인가. 저승의 신은 정이 없다 하는게 정말인가. 모습은 괴물이지만 목소리만은 형의 다정한 그것이라 녹아내려 뼈가 들어난 앙상한 몸에 안겨든다. 그리고 자신도 함께 녹아들어 사라진다. 자신이 뱉어낸 피에 서로 빨려 들어가듯 녹아 사라진다. 54 물소리와 찬바람이 분다. “헉!” 방안이다. 꿈이었던가. 눈앞에 누군가 불쑥 고개를 내민다. “어이, 정말로 살아 있는 거냐?” “...?” 커다란 손이 얼굴 위로 올라오자 극한 공포감을 느낀 자례는 힘껏 그 손을 내쳤다. 짝하는 소리와 함께 레이첸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손을 거두었다. 자례는 몇 번 더 눈을 깜박이다 몸을 뒤척이며 일어나려했다. 레이첸이 도와주기위해 손을 뻗자 역시 손을 내밀며 무언으로 거절한다. 힘들게 혼자서 일어난 자례는 벽 쪽으로 기어가 기대었다. “너 괜찮나?” “누가 광문을 열어주었습니까?” “...몰라.” 레이첸이 더 알 수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자례는 잠시 눈을 감고 정신을 가눈 후 방을 둘러보았다. 방은 깨끗하게 정리해져 있다. 이불을 펼친 기억이 없는데 옷까지 벗고 누워있었던 모양이다. 대야와 물수건이 보인다. 물은 붉다. 누군가 닦아내었나. “동자가 돌아왔습니까?” “좁쌀은 오지도 않았어.” “그럼 누구입니까?” 자례가 보는 방향을 따라간 레이첸도 그것을 보고 또 한번 어깨를 으쓱한다. “몰라.” “...” 자례가 대야 쪽으로 팔을 뻗자 레이첸이 그것을 밀어주려고 일어나자 역시 거부한다. “젠장, 다 죽어가면서 뭘 그리 고집부리기는.” “...” “아무튼 이상한 놈들이야. 그 고집은 다들 그렇게 기찬..” 아무 말 없이 붉은 물속에 손을 반쯤 담근다. 따뜻하다. 물을 갈아 온지 얼마 안됐다는 이야기인데. 그럼 레이첸인가. 아니라는 표정이지만 수건을 보면 대강은 알 수 있지. 반듯이 잘 개어진 물수건을 바닥에 놓고 펼쳐본다. 여진과 거란은 습관적으로 한쪽으로만 접는다. 그들의 옷은 모피나 짧은 옷이 대부분이기에 한쪽으로만 접어도 구김이 없다. 옷의 보관을 긴 통에다 넣는 그들의 특징이다. 한족은 어떤가. 그들은 옷을 잘 개지 못한다. 그들은 옷을 발처럼 생긴 나무걸이에 걸쳐놓는다. 그들이 갠 것들은 대부분 가로 한번 세로 한번의 정 방향이다. “...유번님이 돌아오셨습니까?” “뭐? 아까 나 문 열어준 그 사람 말하는 건가? 그 사람 참..” 정안족은 방석 접기를 한다. 가운데 박하나 담뱃잎을 두장 정도 두고 아래쪽부터 오른 방향으로 모서리를 가운데로 모아간 후 아래서 위로 위에서 아래로 내리는 것이 보통이다. 그렇게 길게 접어 옷을 넣는 장에 눕혀 보관한다. “...?” “왜 그래?” 펼치는 손이 떨린다. 아래 두 모서리는 방석 접기다. 하지만 위쪽 두개는 정방한 접기. 이렇게 접는 사람을 한명 알긴하지. 아무리 말을 해도 끈질기도록 이런 식의 마구잡이로 접는 사람을 한명 알긴 하지. “이봐?” “...” “이봐? 이봐 어딜 나가는 거야?! 이것 봐, 넘어지잖아!” “그 손으로 날 만지지마라!” 사납게 노려보는 핏발 선 눈동자에 놀란 레이첸은 뒤로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사람이라도 잡아먹겠다는 눈이군. 어떻게 저런 얼굴에서 저런 표정이 나올수 있는 것인지. 비틀거리면서도 기어이 일어나 방문을 왈칵 열었다. 눈이 내린다. 눈이 내린다. 마당에서 뒷문으로 나있는 발자국을 소복하게 지워버리며 눈이 조용히 내린다. “...형님?” 마당으로 내려서 멍하니 하늘을 보던 자례는 문득 발밑의 발자국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이봐, 들어와라!” “....왜?” “...뭐?” 한참을 발자국을 바라보던 자례가 공허하게 대답했다. 고개를 돌려 레이첸을 바라보는 눈에 초점이 없어 오싹해진 레이첸은 더 이상 다가가지 않았다. 눈으로 점점사라지는 발자국을 보던 아이의 눈이 갑자기 빛이 돌아온 듯 하더니 마당을 뛰쳐나간다. 아차하며 레이첸도 허겁지겁 따라 나간다. 저런 옷차림으로 이런 날씨에 .... 맙소사 맨발이잖아, 저럼 죽어. 저 놈이 미쳤나? “이봐!” “기다리세요, 기다리세요!” “이런 젠장할! 이봐 너나 기다려!” 무릎까지 쌓여있는 눈 속을 푹푹 상처 내어가며 앞으로 내달린다. 나도 이 눈길이 힘겨워 자꾸만 쳐지는데 뭔가에 홀린 듯 저 놈은 빠르게 눈길을 헤치며 언덕을 오른다. 알 수 없이 주문처럼, 기원처럼 기다리라고 반복하며. “서라! 서라고 명령하잖아! 제기랄!” 악을 쓰며 마구 눈길을 뚫고 간 레이첸이 팔을 쭉 뻗어 간신히 자례의 허리를 낚아챘다. 앞으로 가던 힘 때문인지 앞으로 넘어가는 그의 허리를 팔로 감자 화가 났는지 막 소리를 지르며 팔을 때어내려 한다. 그 힘이 정말 당황스럽게 강해 자신도 모르게 팔을 놓아버릴 것 같아 자신도 악을 써댄다. 맙소사, 이 작은 아이 좀 보게. 정말 사람 잡겠네. “안돼! 가버린단 말이야! 놔!” “진정해! 진정해라, 저긴 아무도 없어.!” “아니야, 저곳에.. 놔! 제발 놔! ” “해가 진다! 숲으로 들어가면 죽는단 말이야!” “놔! 콜록! 크흑!” 새 하얀 눈에 금세 화려한 꽃이 피어난다. 동시에 힘없이 늘어지는 몸이 내 팔에 부셔질 것 같아 스스로 팔을 거두고 눈 위에 눕힌다. 기절했나? 아니다. 반쯤 눈을 뜨고 있다. 무엇인가를 보고 있는 듯, 항상 그렇듯 저 멀리를 바라보는 눈. 제기랄, 내가 왜 여기서 이딴 짓을 해야 하지. 그러면서도 레이첸은 자신의 모피를 벗어 덮는다. 아무튼 조금만 진정되면 업고 내려가리라. “...해..” “...응?” “...답답해.” “뭐?” “사방이...막혀...이런...건 너무 싫어.” 멍하니 하늘을 보며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너무 낮고 어두워 오싹해진다. “여긴 어두워” “이봐! 이봐!?” “막혀버렸어...” “하?” 환상을 보고 있는 것인가? 두리번거리던 레이첸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고 혀를 찼다. 난 이런 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혀 모른단 말이다. 혹시 환상을 보는 거니 눈을 가리면 안보이지 않을까? 손으로 눈을 가리려고 얼굴을 보니 그 새까만 눈동자가 투명하게 빛난다. 소리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이 하늘에서 내리는 눈보다 깨끗하다 느껴 손을 감히 대지 못한다. 빌어먹을 민족같으니라구. 그,래 너희들 너무 잘나 손도 못 대시겠다. “형?” “...?” 기다리는 사람이 형인가. 혈육을 기다리는 것이었나.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아픈 놈을 두고 나가버린 놈이 괘씸하게 여겨진다. “이봐... 형은 곧 올 거야. 너 같은 놈이 기다리는데 누가 안돌아오겠냐.” “...여긴 너무 어두워...추워요...형? 문이... 열리지가 않아...” “...이...야 여긴 밖이야! 문이 없어. 아직 날도 환해. 정신차려봐!” “...문이...” “젠장! 미친 건 내가 아니라 너다!” 레이첸은 재빠르게 자례를 업었다. 급하게 다시 내려가며 중얼거린다. “그러니까 내가.... 아 젠장! 눈이 왜 이리 많이 내려! 걱정마라, 잘 될 거야. 이렇게 죽진 않겠지? 이봐! 그만 중얼거려! 난 네 형이 아냐! 방에 들어가면 좋아질 거야! 이봐?! 내 이야기 듣고 있어? 생각해봤더니 그냥 아무 말이나 하는 게 좋겠다! 이봐!?” 힘없이 옆으로 떨어지는 그를 추켜 업자 짤랑하는 소리가 들리며 무엇인가 눈 속으로 떨어진다. “빌어먹을! 뭐야 또?!” 레이첸이 소리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 속에 무엇인가 있다. 낯익은 것인데. “아차! 안되지” 레이첸은 한손으로 그것을 집어 들었다. 출입증이다. 그것을 잃어버리면 궁 안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레이첸은 그것을 얼른 품안에 넣었다. 그러고 보니 난 이럴 때가 아니라 궁으로 돌아가야 하는데...왜 내가 이 송장 뒤치다꺼리를.. 그렇지, 말! 말 때문이었지. 말은 정말 없었어.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이런 일을 하는 것은... 하지만 등위의 무게를 느끼고는 얼른 언덕을 내려간다. 가볍군. 빌어먹을, 가볍군. 젠장. 내가 시체를 지고 가는 것은 설마 아니겠지? 이렇게 쉽게 죽지는 않겠지. 그렇겠지? 살아나야지. 처음으로 사람이 죽는 다는 것에 불안감이 엄습해 온다. 사람을 죽여보지 못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내 등위에서 안면이 있는 누군가가 죽는 것은 처음이다. 인간으로써 무엇인가 중요한 상실감을 알아버릴것만 같은 고통에 레이첸은 고개를 흔들어 다른 생각을 하려 애를 썼다. “자례!” 누군가 크게 외치며 자신에게 달려온다. 하얀 수염의 노인과 마른 중년인이 집 문앞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누구지? 젊은 사내인데. 한족의 옷이다. 하지만 한족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보니 정안족이다. 게다가 그 표정을 보아하니 네 놈이 이 아이의 형이 되냐? 오호라? “당신 누구요!” 자신을 경계하며 등에 엎힌 아이쪽으로 팔을 뻗는 그자의 걱정된 얼굴이 왜이리 뻔뻔해 보이는가. 머릿속에 뭔가 불타오르는 느낌에 주먹에 힘이 꽉 들어가며 한손으로 업혀진 이를 받치고 다가오는 젊은 사내를 향해 주먹을 날린다. 퍽! 하는 둔탁한 소리가 들리지만 비명소리는 안 들린다. 대신 손이 반대편으로 밀려나간다. 놈이 맞아주는 대신 주먹을 맞부딪친 것이다. 이 놈 봐라? 재빠르게 그는 레이첸의 손을 부드럽게 밀치며 등 쪽의 아이에게 다가간다. 하지만 레이첸을 바라보는 눈을 사납다. 시비를 걸지 말라는 분명한 경고의 눈이다. “자례! 아아...유번님! 아저씨!” “넌 이 아이의 그 잘난 형님이시냐?” “뭐?” 그는 이상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는 냉큼 아이를 안아들고 집으로 뛰어 들어간다. 뭔가 큰 오해를 하는 듯한 놈의 표정에 화는 나도 자신이 아닌 누군가 있다는 안도감에 긴장을 풀며 집으로 들어가자 마른체구의 중년인과 늙은이가 아이를 부축해서 들어간다. 난 모른다. 이제. 항상 그가 앉아있던 마당의 탁자에 걸터앉자 열린 문으로 큰길이 보인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볼 것이 없는데 그는 여기서 뭘 그렇게 기다리고 있던 것일까. 잠시 후 문이 열리며 아까 보았던 그 젊은 사내가 나와 말한다. “아까는 죄송했습니다. 아이를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난 한 것도 없어. 그냥 저 놈이 미쳤다고 숲으로 뛰어가서 잡아온 것 분이야. 기껏 저놈을 살린 병신이 불쌍해서 말이야.” “...예?” “몰라.” 레이첸은 귀찮다는 듯 머리를 감쌌다. “내가 아냐. 외팔이가 있었어. 그놈이 나가기 전에 광을 열어주고 저 놈을 부탁했을 뿐이야.” “...외팔이?...저기!” “뭐?” “...아닙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들었습니다. 도성의 분 같은데 이곳에서 저희가 도움이라도?” “...그래!” 레이첸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는 듯 벌떡 일어났다. “말이 있나? 말을 빌려줘! 난 지금 당장 도성으로 가야해!” “원하시는 말을 가지고 가십시오.” 그가 가리키는 곳에는 세 마리의 말이 물을 마시고 있었다. 다갈색의 준마를 끌어오자 말은 가기 싫은지 자꾸만 버둥댄다. “그 놈은 제 말입니다. 성안에 도착하시면 성문 앞에 풀어놓아주시겠습니까?” “알았다. 그렇게 하지.” “무사히 도성으로 모셔다 드려라. 고구(呱九). 도성에서 다시 만날 테니 걱정하지 말아라.” 사내가 말을 쓰다듬자 말은 얌전해진다. 신기하다고 여길 사이도 없이 시간이 없는 레이첸은 말에 올랐다. 막 달리려다가 잠시 불이 켜진 방문을 바라본다. “...곡양산, 곰사냥 왔다가 날 잡아먹게 생겼구나. 잊지 않겠다.” 말은 힘껏 달려 빠르게 곡양촌을 떠났다. 55 마을사람들은 그가 미친사람이라 말했다.완전히 비어버린 집을 보고 마을을 뒤지다 멀리 언덕에서 내려온 그를 보았을 때 모두들 자지러지게 놀랐다. 미친사람에게 자례가 다친줄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좀더 내려오자 백라는 아까보더 더욱 놀라며 을노의 등을 후려쳤다. “아앗! 왜그러십니까! 지금 가면 미친 저자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지 않습니까!” “4왕자다!” “예?” 백라는 그 날카로운 삼백안을 빛내며 다시 한번 말했다. “저자는 4왕자다. 틀림없어!” “이런!” 유번이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허리에 걸린 검을 뽑으려 하자 을로가 팔을 들어 제지했다. 등이 아직 아파 죽겠다는 표정이였지만 침착하게 자신의 아저씨를 바라보며 물었다. “정말로 확신하십니까?” “그래. 4왕자는 도성을 자주 외출하기 때문에 알지.” “세상에는 같은 얼굴이 3개라고 하지 않나.” 유번이 끼어들어 말했지만 을노가 고개를 저어 백라의 대답을 대신했다. “아뇨. 좌보님의 눈은 우리중 가장 정확하십니다. 그렇다면 어찌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좌보님?” “...음.” 백라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분명 저자는 4왕자다. 붉은 머리와 저 덩치를 잘못볼 리가 없지. 그런데 어째서 이곳까지 와서 자례를 업고 내려오는 것인가.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믿자면 그가 마을에서 행패를 부려 유번의 모도리에 가두어 두었다고 했다. 그 사이에 자례와 4왕자가 친해져서 광을 열어주었나? 하지만 절단되었던 자물쇠의 단면은 매끈했다. 자례가 그정도로 힘이 있다 생각하지는 않아. 그렇다고 왕자 스스로 나왔다고 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즉 제 3자가 있는거야. “제 3자가 있다.” 그말에 을노가 빠르게 검을 뽑아들고는 백라의 앞을 가로 막았다. “두분은 들어가 계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잠시만.” 그 제3자가 왕자측의 사람이라면 어째서 왕자가 직접 자례를 업고 내려오는 것이지? 왕자보다 높은 신분이라는 건가? 그건 말이 안된다. 황제는 도성에 있으니까. 아니면 호위장수인가. 즉 갇힌 레이첸을 그장수가 구출했는데 자레가 쫒아가다 장수가 죽고 자례가 다친건가. 그건 말이 안된다. 방안엔 이미 병자가 누워있던 흔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더 믿기기 힘든 일이지만 레이첸이 다치는 바람에 자례가 제3자에게 부탁해서.., 그것도 말이 안되는데. “을노. 가서 데려와라!” “예?” “연계성이 없으니 모두 무효다! 그냥 모르는 척이다! 어쨌건 제 3자는 적이 아닐테니까. 아니면 이미 죽었다.” 백라의 말에 을노가 뛰어가 자례를 안아들었다. 레이첸의 주먹질과 화난 목소리에 을노는 몹시 경계했지만 그가 아무런 생각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눈치채고 일단 자례만을 안고 돌아왔다. 방안으로 들어온 그들은 다시 자례를 눕혔고 백라의 귓말을 들은 을노는 레이첸이 원하는 말을 주고 도성으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잠시후 백라의 말을 타고 레이첸이 마을을 나간 것을 확인한 을노는 다시 마을로 돌아왔다. “좌보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왕자는 혼자서 나가던데요. 정말로 혼자 이곳으로 왔나봅니다.” “쯧. 도성에서도 망나니 짓을 하는 왕자이니...” 유번이 혀를 찼지만 백라는 좀더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앞뒤가 들어맞지 않아. 하지만 그는 일단 이 일을 접어두기로 결정했다. “그보다...” 을노가 자례를 들여다보았다. 유번이 조용히 하라 눈짓한다. “잠들었소. 아주 깊게 들어가 버린 것 같아. 깨우지 않는게 좋겠어.” “...내일 일어나면 자휼에게 데리고 갈 겁니다.” 백라의 말에 을노가 기뻐했다. “만나면 굉장히 좋아할 겁니다!. 그런데 자휼은 지금 어디에 있나요?” “일이 있어서 난곡에 들어가 있다네.” “에? 난곡이요? 그곳에는 유견님이...” “형님이 난곡에 계시던가? 왜 안 말해주었나? 그럼 둘이 같이 있는 건가?” 유번이 여러 가지를 묻자 백라는 손을 들어 말을 막았다. “지금 제가 말해 드릴수 있는것은 유견님은 자휼과 난곡에, 그리고 지금 우리는 그의 아우와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내일 난곡으로 떠날 것입니다. 을노 자네가 유견님이 있는곳을 알고 있다고 들었네.” “예. 하지만 아저씨, 난곡은 지세가 험해 지금의 자례가 갈만한 곳이 못됩니다.” “아침까지 일단 기다려보자.” 백라는 그렇게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단호한 표정에 유번과 을노가 입을 다물었다. 병자를 돌보는 것은 을노가 하기로 하고 남은 두사람은 다른 방으로 들어가 깊게 잠들었다. 을노 역시 꾸벅꾸벅 졸다 자례의 옆으로 누웠다. 도성에서 이곳까지 이틀간 쉬지도 않고 자지도 않으며 달려왔다. 아무리 말을 잘타는 민족이라지만 연이어진 긴장과 피로에 그들은 매우 깊게 잠이 들었다. 새벽이 틀 무럽 유견은 잠자리가 뒤숭숭해 뒤척거리다 결국 밖으로 나왔다. 옆방을 열어보니 역시 비어있다. 이 녀석 오늘도 안 들어오려나? 물을 마시기 위해 부엌으로 들어가던 유견은 깜짝 놀라 억 소리를 내었다. 불 아궁이 근처에 괴물 같은 이가 앉아서 불을 들여다보고 있다. “이...이놈! 간 떨어지는 줄 알았지 않느냐!” “...깨셨습니까?” “언제 돌아왔느냐?” “방금 돌아왔습니다.” 불길에 얼굴색이 변하는 반신이 끔찍스럽다. 둘만 있더라도 항상 머리를 내려 가리고 있었는데 오늘은 왜 머리를 묶었나? “무슨 일이 있었느냐?” “아뇨” “아우에게 무슨 변괴라도 있는 것이냐?” “...” 하지만 제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불길만 바라본다.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던 자휼이 혼잣말처럼 물었다. “스승님” “왜?” “과거는 어떻게 하면 바꿀 수가 있나요?” “이놈아, 과거를 누가 바꿀 수가 있냐?” “역시...” 자휼이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 힘없는 등에서 유견은 불길함을 느꼈다. “어디 가는 게냐?!” “머리를 식히고 돌아오겠습니다.” 하얗게 폭포의 물이 부셔졌다. 평소라면 시리다고 느꼈을 그것이 이번만은 감사하다. 첨벙소리가 나도록 머리를 물속에 집어 넣는다. 역시나 물은 차갑고 시리다. 머리가 깨지는 느낌이 올 때까지 자휼은 숨을 참고 물속에서 가만히 있었다. 숨이 막 차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고개를 번쩍 들자 하늘이 하얗게 보인다. 머리에서 물이 흘러 옷을 적신다. “....” 그래도 답답하다. 다시 한번 머리를 물속에 담갔다가 다시 그것을 반복한다. 그래도 아니다. 과거는 변화할 수 없다. 그 누구도 바꿀 수 없다. 나는 노력했다. 나는 노력했단다. 그래도 과거는 변하지 않아 나는 호된 형이고 너는 언제나 가여운 아우구나. “네 이놈!” “푸하?” “죽으려거든 다 빠져 죽어라!” 유견이 화난 표정으로 옷의 목을 잡아 당겨 자휼을 물가에서 잡아당겼다. 벌겋게 화가 난 얼굴로 유견이 힘껏 자휼의 뺨을 때렸다. 아프기보다는 얼얼한 기운에 자휼이 성한 뺨을 만졌다. “네...내가 키운 아이는 강한 아이다! 자진하는 아이는 없단 말이다!” “스승님” “바보같은 것! 이럴 바에는 차라리 내 눈앞에서 썩 사라져라!” “스승님! 죽으려는 것 아니었어요!” 씩씩거리며 팔을 휘두르는 유견에게서 얼른 도망치며 자휼이 외치자 유견이 의심스럽게 바라본다. “머리를 식혔을 뿐입니다. 정말입니다.” “빌어먹을!” 유견이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험한 말을 외치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힘들다! 나는 늙었단 말이다! 네 놈 가르치기 힘들어 지금 곧 망자의 산에 기별을 넣어야 할 것 같다. 이놈!” “스승님.” 자휼은 유견의 옆에 앉았다. 어찌 모르겠는가. 유견이 자신을 얼마나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최근 심란한 내 자신을 알면서도 유견이 묵묵히 바라보는 것은 그 이유인 동생이 내게 얼마나 중요한 부분인가를 이해하기 때문이란 걸. “죄송합니다. 못난 제자 때문에...” “알면 업어라 이놈! 산길을 뛰어 내려왔더니 허리가 돌아가 버린 것 같다!” “예. 당연하지요.” 한손으로 유견을 훌쩍 업자 생각 외로 가벼워 한번 놀란다. 이 노인장 엄청 괴팍한 성격과는 달리 노인의 몸은 가벼워 측은심이 드는 것 같다. 한발 한발 가는 발걸음이 무겁다. 유견은 가볍지만 그가 자신을 생각하고 있는 마음의 무게를 느끼는 것일까. 숲의 밤은 너무나 어두워 감으로만 산길을 오른다. 구름속에 가려졌던 달이 나와 그나마 앞이 보여 둘 다 안도한다. “달이 떠서 그나마 시야가 보입니다.” “다행이구나. 외 눈알의 네 놈에게 그 이상 큰 복이 더 있으랴.” “그렇습니다.” 달의 미묘한 푸른 빛이 숲의 가시 그림자를 만들어 낸다. 문득 자신의 앞을 바라본 자휼은 앞서 가는 장정과 업힌 아이를 본다. 아니지, 저것은 나고 아이는 스승님이다. 하지만 고개를 돌리고 다시 눈을 떠도 장정이 아이를 업고 걸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뛰어 내려가 안아들었을 것이다 그가 먼저 동생을 붙잡지 않았더라면. “....후” “무거우냐?” “전혀요.” 그 멀리에서도 동생은 나를 알아보았다. 아니지, 알아볼 리가 없다. 그냥 느낀 거다. 저 멀리 언덕에 올라 있는 그림자가 나라는 것을 느낀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앞에 나설 수가 없었다. 난 그럴 수가 없었다. 이번에 만나면 내가 또 무슨 상처를 네게 줄까. 이번엔 네게 무슨 짐을 지워줄까. 힘들지만 정말로 힘들지만 조금 후에, 내가 널 더 이상 상처주지 않을수 있도록 성장한 후에, 네가 스스로 그만큼 성장한것처럼 나도 성장한 후에. 그래 그 후에 만나자구나. 고개를 돌리며 눈을 다시 뜬다. 그래도 앞서 가는 그림자는 장정과 아이. 결국 소리 없이 눈물을 흐른다. 뚝뚝 떨어지는 눈물이 눈앞을 가리는데 그래도 앞서가는 그림자는 장정과 아이. 56 눈을 떴을 때는 낮인지 밤인지 구분을 하지 못할 시간이였다. 일어나려고 허리에 힘을 주었지만 얼른 일어나지지 않아 결국 손으로 땅을 짚어가며 일어났다. 왜 그리 일어나기 힘들었는지 방안이 설명해주고 있었다. 분명 이 사람은 장군 을노였지. 을노가 대자로 누워 그 팔과 다리로 자신의 몸을 누르고 있었다. “...” 일단은 화풀이로 팔과 다리를 함부로 밀자 턱턱하는 소리와 함께 한바퀴 굴러간다. 하지만 깨지 않는 것을 보아 꽤나 노곤한 것 같다. 기억을 더듬어 그가 언제 왔는지 생각해 본다. 아마도 새벽에 왔는가 싶은데 어째서 이곳까지 왔는가. “...광.” 번뜩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4왕자가 떠올라 벌떡 일어나 광으로 나간다. 모든게 꿈인 듯 싶다.하지만 광을 활짝 열려있다. 이미 떠나갔는지 옆방을 열었을 때는 돌아온듯한 유번과 백라가 곤하게 잠들어있었다. 자례를 머리를 괴며 마당의 탁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가버렸구나. 하지만 말이 없었을 텐데? 마당을 둘러보자 말이 두 마리나 보인다. 그 중 한 마리는 낯이 익다. “유번님의 말이군. 사람이 돌아와서 말을 탈수 있었군. 지독히 운이 좋은 사내다.” 갑자기 입안의 텁텁함과 비릿함을 느껴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올려 마시는 김에 아침단장을 한다. 찬물로 계속 얼굴을 씻어 내리며 허탈감을 없애보려고 노력해본다. 그가 안돌아갔다 하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어. 그러니 그가 가버린 것에 대해선 그만 생각하자. “...젠장!” 촥하는 소리와 대야의 물이 함부로 튀긴다. 물을 내리친 주먹은 아프지는 않으나 가슴은 쓰리다. 정말 왕자였다. 자례, 너 바보같으니라구, 어째서 그의 진위여부를 한번도 살펴볼 생각을 안해본 것이냐. 이 한적한 곳에, 그를 보호해줄 아무런 것이 없는 이곳에 그는 내 손에 있었다! 계명이 전해준 말에 따르자면 태진은 매우 조심성이 있어 성 밖 출입이 드물다했다. 게다가 가까이 하는 심복의 수도 적어 목래 공성에 심복을 사용하지 않고 계명을 부른 것이다. 가장 실세라고 할 수 있는 4왕자를 미는 것을 보아 그는 앞을 내다볼 수도 있는 사람이다. 즉 두 번 다시 이런 기회가 있긴 어려울 것이다. “어리석다. 어리석다.” 자신도 모르게 자꾸만 물을 치며 화를 푼다. 자신의 굴속에 들어가 있는 호랑이 새끼보다 죽이기 위험한 것이 없다고 한다. 호랑이 새끼가 무서워서가 아닌 그 굴 안에 언제 갑자기 어미 호랑이가 들어올지 몰라서이다. 태진은 굴속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는 호랑이 새끼다. 그 호랑이 새끼를 꼬여 밖으로 내올 수 있는 어미 호랑이를 잡았던 것이었는데... “...?” 갑자기 하늘이 빙글 한다. 아차. 너무 성급하게 일어났구나. 그대로 눈 위에 쓰려져 버린다. 바로 서질 못할 뿐이다. 피를 많이 토해서 그런 거니 누워있으면 괜찮아진다. 하지만 속 터지는 왕자의 일에 자꾸만 몸이 일어나려고 한다. 하다못해 이야기라도 많이 했으면 조금이라도 얻어냈을 것이 있었는데. 그러고 보니 난 그가 왜 이곳에 왔는지 조차 모른다. 분하다. 분하다. 너무 분하다. 갑자기 몸이 흔들린다. 눈을 뜨니 마른 중년의 남자가 부축한다. “벌써 일어나셨습니까...?” “어라? 기절한거 아니었소?” “목은 왜 붕대가...” “정신이 들었으면 몸이나 가누시오. 난 힘없는 글쟁이라...” 둘은 휘청 휘청 누가 누구를 부축하는지 알 수 없이 간신히 마당의 탁자에 앉았다. “죄송합니다. 고개를 가누기 힘들어...” “알았소. 그냥 엎드리시오.” 바로 자례가 팔을 베게 삼아 탁자에 엎드려버린다. 빈혈인가. 눈에 초점이 안 맞는 것을 보니. 겉옷을 가지고 나와 자례에게 걸쳐준다. 몸은 축 늘어져 있는데 정신은 깨어있는지 중얼거린다. “감사합니다.” “...내 말은 들리오?” “예.” “그럼 나 조금 중요한 이야기를 해도 되겠소이까?” “아뇨.” 자례가 애써 고개를 들었다. “조금만 있으면 좋아질 테니 기다려 주십시오.” 백라는 막 하고 싶었던 말을 다시 다물었다. 쩝. 말하고 싶은 것이 산더미 같은데... 하지만 다시 고개를 숙인 자례는 아예 잠이 들어버렸는지 새근새근 어깨가 들썩여버린다. 아직 겨울이라 강가에는 얼음이 남아있었지만 그래도 가족들의 옷가지를 빨러 나온 여인들은 추워하면서도 열심히 옷을 살펴보고는 물에 담가 빨아낸다. “저기, 저 마님 또 왔네.” “그러게 말이야.” 여인이 입는 색으로는 처음일지도 모르는 회색 비단의 포를 걸쳤다. 정안족이라는 뜻인지 머릿수건으로 올린 머리에 은은한 분위기의 성숙한 여인이었다. 아가씨 같지는 않고 그렇다고 아이가 있는 여인같지도 않아 빨래터의 사람들은 그녀를 ‘마님’이라 불렸다. 실제로 마님이라 불릴만한 여인이 직접 빨래를 하기 위해 나오진 않겠지만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이나 행동에서 평민이라기엔 고급스런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몰락한 귀족가문의 여인이라 치기에는 입고 있는 옷이 호사스럽고 귀족의 마님이라기엔 빨래를 하기 위해 여기까지 온다는 것은 심하다. 기녀라 하기엔 기품이 넘치고 귀족이라 하기에는 행동이 다정스럽다. 빨랫감이 많은 것도 아니다. 한 벌 이상 가져오지 않는다. 남자의 비단옷이여서 아마도 새색시라고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오늘도 긴 옷자락을 걷어 올리고 조심스럽게 옷을 물에 담가 세심하게 옷자락을 헹구어낸다. 그 모습도 꽤나 정갈해 지나가는 젊은 사내들이 멈추고 바라보는 일은 다반사였지만 오늘따라 저 멀리 다리에서 그녀를 바라보는 한 사내가 도무지 다리를 건너가지 않는다. “이봐요, 마님. 저기 봐.” “자네에게 빠져 버렸나봐?” 슬쩍 눈치를 주는 여인들의 말에 그녀가 고개를 들어 다리를 바라보고는 서둘러 옷을 건져 올리고 다리 쪽으로 걸어간다. 호기심 많은 여인들과 남모르게 그녀를 흠모하던 사내들이 다리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여인은 다리에 서서 자신이 다가오는 것을 보는 사내에게 은은하게 웃어 보인다. 가볍게 고개를 숙인 그녀는 다정하게 말을 건넨다. “돌아오셨습니까?” “아아, 좋은 여행이었지. “ 하류사는 싱긋 웃으며 그녀와 나란히 다리를 건넜다. 두런 두런 대화하는 모습이 저 멀리의 아낙들에게는 좋게만 보인다. “에구, 역시 결혼했네?!” “남편이 잘나보인다. 좋겠네?” “남편은 한족인가?” “정안족이야.” 마른 여인이 일어나 허리를 피며 말한다. “정안족이 아니라면 저렇게 나란히 걸어갈 리가 있어?” 그러자 부럽다는 표정으로 여인들은 그들을 본다. 한족의 남자들은 부드럽지만 여인을 장식품으로 안다. 그래서 부부라도 여인은 남편의 뒤를 따라온다. 그래서 여인이 추해지면 버림받는다. 여진족의 남자들은 거칠다. 그들은 여인들과 깊은 정을 나누지 못한다. 부인도 자신이 가진 재산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여인들은 이혼을 할 때 자신이 만들어 논 재산을 가져갈 수 있다. 정안족의 남자들은 무뚝뚝하다. 그들은 부부이기 전에 친구 관계를 지속한다. 그래서 배신하기 어렵다. “사랑한다는 말을 안 해줘도 좋으니 정말로 나만 바라봐주었으면 좋겠다네.” “너도 정안의 사내와 연분을 맺으렴.” “아서라, 혈족과의 혼인만 하는 사내들에게 뭘 바라니?” 등 뒤에서 까르르거리는 여인들을 뒤로하고 여관과 왕씨는 은신처인 화원으로 돌아갔다. “물이 찬데 강가로 나가지 마시지요.” “하지만 비단은 찬물로 헹구어야 되니까요.” 여관이 빨래를 말리기 위해 다른 방으로 들어가자 하류사는 물끄러미 그녀의 뒤를 시선으로 쫓는다. 다시 고개를 돌리고 화려한 정원을 감상하던 하류사는 미소 지었다. “여관, 우예사 장군을 불러주시겠나?” “예사께선 모도리에 을노 장군님 대신 가 계십니다. “그럼 우마유는?” “지금 불러드리지요.” 여관이 나가는 옷자락 소리를 감상한다. 곡양에서 먼 휴양지까지의 조그만 여행이였다. 하지만 알수 없는 피곤함이 몰려와 하류사는 잠시 눈을 붙였다. “그것보세요. 무리죠.” “하루 종일 잠자는군.” 을노의 말에 백라는 딱하다는 듯 방안을 들여다보았다. 벌써 4번째 일어나서 백라의 말을 듣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며 다시 잠들고 다시 일어나서 듣기를 반복하고 있다. 계속 말이 끈기고 자례도 앞 이야기를 이어서 생각하지 못하니 계속 원점이다. “좌보께서는 너무 안달하지 마시오. 영웅서에 들어갔다고는 하나 아직 머리도 못 올린 어린 아이 아닙니까.” “아까 온 할머니께서도 피를 흘려 제 정신이 아니라고 말했지 않습니까?” 을노가 빙긋 웃으며 둘에게 차를 내왔다. “그나마 계속 일어나려고 하는 것은 아저씨께서 중요한 말이 있다고 했기 때문이겠지요.” “저런 상태니 오늘 안으로 자휼을 만나기는 틀렸구나.” “듣는다면야 일어나려는 할 테지만....” “그럼 이따가 다시 일어나면 그 말이나 해보아라. 어차피 우리는 왕씨 직속이니 이곳에서 오래 머물기는 힘들지 않느냐.” “제가요?” 백라의 말에 을노는 놀란 듯 눈을 떴다가 자례가 잠든 방으로 들어갔다. 지루하도록 잠든 자례의 얼굴을 보던 을노는 지난 이들이 떠올랐다. 목래, 푸른 초지. 조용하게 살고 있던 두 형제. 마당의 산과 석류, 불. 하늘에서 내리는 검은 비. 그리고 목래의 성이 무너지는 모습. 허공을 휘적이던 검은 말의 다리. 그리고 동생. “...” 그 과정이 흥료가 망했던 모습과 별 다를 것이 없어 을노는 소침해졌다. 모두 상처를 입어가며 살아가는 것에 불만인 것이 아니다. 그저 상처 입은 것은 당연하게 여겨야 하는 모습들이 스스로 가여워져 그런 것이다. “을야야...” 생긋 웃으며 등에 매달리던 조그만 자신의 여동생이 떠오른다. 지독히 개구쟁이지만 그만큼 여린 마음을 가진 녀석. 소심했던 을노에게는 항상 달 같은 존재였던 어린 누이. 그 아이가 있었기에 스스로 성장할 수 있었다. 내 나이의 반밖에 안되는 어린 누이를 돌보았기에 좀더 강해질 수 있었다. 자상하셨던 어머님과 누이와 내가 스스로 커갈 수 있도록 자유스럽게 풀어놓으셨던 아버님. 내가 장군이 되겠다고 경당에 들어가자 누이는 쪼로록 내게 달려와서 물었었다. -오라비야, 애, 오라비야, 너 장군이 될 거라며? -왜 그럼 안 되나? -어째서 장군이 하고 싶으나? -우리 을야랑 울 어머니를 지키고 싶어 서지. -...오라비는 장군보다는 낭군님이 좋다. -장군되고 낭군도 되면 되지. -내 오라비는 장군이 되기엔 너무 착한걸. -...낭군은? -당연 내 오라비가 낭군이 되면 을야가 시집가지. 그것도 모르나! 까르르 웃으며 볼을 잡아 늘리고 도망치던 누이. 얼얼한 뺨을 부여잡고 누이를 따라 뛰던 하루. 모든 것이 영원할 줄 알았다. 분명 이 들도 그랬을 것이다. 작게 투덜거리며 서로 화를 내고 푸는 그런 일상이 계속될 것이라 여겼겠지.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되진 않는다. 그걸 나는 배웠다. 지금은 이들도 배웠겠지. 부디 그러길 바란다. 지금 잡을수 있는 작은 행복이라도 놓치지 않도록. 그러길 바란다. 바스락거리는 옷자락소리에 을노가 고개를 들었다. “앗, 깼다! 이봐 자례, 갈거냐 안갈 거냐?!” “...예?” 아차. 너무 급했어. 이해할수 없는 질문에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던 그는 다시 눈을 감았다가 조금 후에 안간힘을 내며 뜬다. “...하루가 지났습니까?” “아니. 아직 반나절이 좀 넘었어.” “...어쩌지. 아직 졸려요. 좌보님에게는 제가 깨었다는 말...하..지” “잠깐, 잠깐! 또 잠들거야? 내 말 좀 들어봐 그러니까, 자휼을 ” “이 근처...그...렇...?” “뭐?” 자례가 스스로 자신의 뺨을 손으로 찰싹 쳤다. 아프겠다는 느낌에 보는 을노가 움찔한다. 막상 본인은 조금 정신이 들었는지 입을 연다. “이 근처에 형이 있을 거란 말입니다.” “으응. 그래.” “난곡입니까?” “응? 응.” “가서 보고 싶습니다. 정말로 그렇습니다.” 자례는 물끄러미 을노를 보았다. 잠시 정신이 반짝한 느낌이다. “하지만 지금 저는 난곡을 넘어갈만한 상황이 아닌 것 같습니다. 폐를 끼치겠지요. 더 이상 혈족에게 기댈 수만은 없습니다.” “그럼 안 만날 거냐?!” “아뇨” 자례가 눈을 감았다. 을노가 안절부절못하다가 손가락으로 톡 이마를 건들이자 다시 눈을 뜬다. “형이 와주었으면 합니다.” 또 한참 침묵해 을노가 다시 손가락으로 톡 이마를 건드려보지만 반응이 없다. 한 번 더 해볼까. 톡. 톡. 톡. “아휴!” “미...미안해!” 자례가 꽥 짜증을 내며 매섭게 눈을 뜬다. 을노가 얼른 손가락을 뒤로 감추었다. 깨물어 버릴라. “난 미치지 않았어요” “미안, 미안!” “형은 날 보고 도망쳤습니다.” “?” “내가 그리 악연이라면....” 자례가 신경질적으로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차라리 오지 말든.” “?” “괜스래 잊지도 못하게...포기도 못하게...만들....” 조금더 뒷말을 기다렸지만 자례의 숨소리가 차분하게 변하더니 역시나 잠들어버린다. 을노는 어리둥절하면서도 일단 자리에서 일어났다. 막 방문을 열려는데 이번엔 자례가 벌떡 일어난다. “왜? 이번엔 뭐..? “앞에 말 취소입니다!” “...?” “미안해요. 다시 앉아 봐요.” “아무래도 잠 다 깬 것 같은데.” “시끄러워요!” 앙칼진 소리에 을노는 당장, 벌떡 앉았다. 저 성격하고는, 내 누이 뺨친다. “미안합니다. 원래 토혈하고 나면 좀 날카로워져요. 용서하십시오” “다시 소리치면 난 나갈 거야.” “예.” 차분하게 호흡을 가다듬듯하더니 자례가 조용하게 말했다. “전서를 보내어... 제가 다리를 다쳐 움직일 수가 없으니 형이 찾아왔으면 한다는 것을 전해주십시오.” “다리 다쳤니?” “아무튼요. 그리고 제가 무척이나...” ”무척이나?“ “...보고 싶어 한다고...아니오. 이 말은 하지 마십시오” 어리광을 피운다고 할 거야. 영원히 당신에게 매달린다고 하겠지. 자례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내일 정오에 떠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전서는 보내지 마십시오” 57 유견은 아무 말 없이 입에 물고 있던 도토리를 꽉 깨물었다. 딱하는 소리가 나며 조용한 방안을 울린다. “사냥을 가겠다고?” “예.” 자휼이 찻잎을 고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견은 화로를 뒤적였다. “왜?...라고 물을 것 같았느냐? 그래, 갔다 오면 정신이 들것 같으냐?” “그러길 바라고 있습니다.” “좋아. 가라.” 유번이 시원하게 대답하고는 새로운 도토리를 꺼내들었다. 뜨거운지 얼른 꺼내서 방바닥에 굴리는 모습을 보고 자휼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것뿐입니까?” “그럼 더 뭘 바라는 거냐?” “왜 있지 않습니까 스승님..제자가 뭔가 마음을 정리하려 여행을 가면...” “...?” “비법이나 귀물을 전해주는...” 딱! 얼추! 재빠르게 손으로 이마를 가로 막아보지만 그 소리는 목검의 소리가 아닌 유견 입속의 도토리가 부셔지는 소리다. “비법?” “예.” “음...그럼 이렇게 하자.” “...?” “네가 떠난 후 하루 뒤 내가 널 따라 나가겠다.” “...?” “일주일 동안 내가 널 찾거나 붙잡으면...” 유견이 다시 군 도토리를 꽉 깨물었다. 역시 목도소리가 아닌 것을 알고 있지만 그 익숙한 소리에 자휼은 몸이 움찔한다. “새벽에 ‘개힘’ 좀 해야 할 거다.” “스승님!” “자 그럼 출발.” “아뇨, 생각했더니 그냥 정신 수양이 좋겠습니다. 안 간다니까요!” “시간은 흐른다 제자야.” 정색을 하며 말을 바꾸던 자휼은 태연스러운 유견의 대꾸에 벌떡 일어나 방을 뛰어나갔다. 그 뒷모습을 본 유견은 웃으며 외쳤다. “흑염은 안 된다! 발로 걸어라!” 투덜 투덜 거리면서도 자휼이 재빠르게 뛰어 사라지는 것이 들렸다. 좋은 일이다. 저 아이가 뭔가 새로운 탈출구를 생각한 것이 아닌가 싶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도 요즘 떠는 청상이 보기 힘들었는데. 내가 찾았을 때는 예전과 같이 목표가 있는 놈으로 변해 있었으면 좋겠구만. “문을 열어라! “ 레이첸이 도성 안을 말로 휘저으며 도착한 왕궁의 문 앞에서 외쳤다. 병사들이 나오자 주머니에서 출입증을 꺼내들었다. 한 장수가 나와 출입증을 확인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2왕자전하의 가신패이다. 문을 열어라!” “빨리 열어라! 급하...뭐?” “예?” “방금 뭐라고...?” “공께서는 2왕자 전하의 가신패...” “이리 내봐!” 레이첸이 장수에게서 자신이 주었던 패를 빼앗아 확인했다. 정말로 패는 4왕자인 자신의 것이 아닌 2왕자의 것이다. 이건 내 출입증이 아니야. 잘못 들고 나온 걸까? 그런데 왜 형님의 패가 내게 왔단 말인가. 출입관이 패를 잘못 갈랐나? 그럴 리가 없어. 황급히 주머니를 뒤지자 또 하나의 패가 나온다. 그래 이것이 내가 가지고 나온 것이다. 그럼 이것은 뭐지? 두개의 패를 들고 어리둥절하게 서 있는 레이첸이 의심스러워 보였는지 장수와 병사들이 다가온다. “어째서 공은 패가 두개나...” “닥쳐라! 지금 내가 누군 줄 알고 그러는 것이냐!” 레이첸이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 거렸다. “나는 4왕자 레이첸이다. 성문을 열어라!” 장수는 그의 말에 당장 부복한다. 거 참 도성이 더 편리하구만. 이렇게 말로 다 해결되는 것 좀 봐. 레이첸은 일단 자신의 패와 2왕자의 패 두개를 다 챙겨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초지의 향기고 뭐고 그 험한 고생을 하다 돌아오니 깨끗한 황궁이 눈물나게 반갑다. “형님!” 자신의 궁에 도착하자마자 옷을 갈아입기도 전에 바람같이 나타난 것은 태진이였다. “어디 갔다 이제야 오시는 겁니까? 도대체 보름이 한참 넘도록 아무런 소식을 주지 않으시다뇨!” “그럴 일이 있었다. 내가 없는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지?” “황제폐하의 탄생 축하연이 얼마 남지가 않았지 않습니까. 이루 말할 수 없는 일들이 오고 갔지요!” 태진의 당연한 말에 레이첸은 화를 냈다. “젠장! 이럴 계획은 아니었는데! 일은 어떻게 돌아갔지? 아니 그보다.... 그보다 일단 난 진상품부터 챙겨야 한다.” “그건 제가 준비해놓았습니다.” “응?” “소동호수 진주를 최상급으로 한 상자 준비해 놓았습니다. 삼일 전 행사를 연습했는데 순서는 이것과 동일합니다.” 태진이 두루마리를 하나 레이첸에게 넘겼다. 펼치자 소상하게 기록된 순서는 누가 깃을 들고 가는지에 대해 시작해서 축사의 내용까지 적혀있었다. “고맙구나! 역시!” “그리고 왕자 대련에 관한 것입니다만.” “왜?” “3왕자가 대련을 포기해 형님께서는 5왕자와 겨루시게 되었습니다.” “뭐?! 나랑 친첸?! 왜! 어쩌다가?!” “당사자가 없으니 누가 감히 5왕자에게 뭐라 하겠습니까. 게다가 황제께서 은근히 두 분의 대결을 바라시는 눈치입니다.” “아아, 정말 곰사냥 갔다가 날 말아먹는구나!” “곰사냥?” “그런 게 있다! 하필이면...” 레이첸이 옷자락을 다듬는 환관들을 물리치고 탁자에 앉아 차를 따랐다. 벌컥벌컥 마셨다. 잔을 던지다시피 내려놓고는 늘어지게 앉아 중얼거렸다. “친첸은 어떠하더냐?” “어떤 것을 물으시는 겁니까?” “그 놈 연습이라도 하디?” “5왕자는 저 멀리 북쪽 끝의 작은 성에 있습니다. 이 아우가 무슨 재주가 있다고 거기까지 들여다본단 말입니까?” “알아봐. 그 놈이 연습한다면 나도 해야 한다.” “당신께서 경계하시는 모습도 신선합니다.” 태진이 피식 웃자 레이첸은 고개를 저었다. “너도 그 놈 우습게보지 마라. 뭔가 속을 알 수 없는 놈이야.” “글쎄요. 말 많은 놈 치고 제대로 된 놈을 못 보아서 말입니다.” 태진이 웃으며 방을 나가자 레이첸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탁상의 과일을 입에 넣었다. 오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먹기만 할 테다. 그 집 음식은 영 아니었어. 게다가 밤에는 얼마나 추운지. 문득 레이첸은 화선부인이 떠올랐다. 환관을 손짓해 불려 이른다. “오늘 밤은 화선부인을 들이겠다. 여관에게 말해라” “예” 오래간만이군. 그리웠다고. 아무튼 다신 곰사냥을 하러 가진 않을 것이다. 그날 밤 여관의 인도로 궁으로 들어오는 화선을 보고 레이첸의 즐거우면서도 피곤했다. 눈치빠른 화선은 잠자리를 원하지 않았다. “왜?” “피곤해 보이시니까요.” “흐음. 그런가.” 화선은 시종을 시켜 향유를 가져오게 했다. 레이첸이 그것이 무엇인지 궁금해하는 모습이 어린애 같아 화선은 싱긋 웃었다. 화려한 사기그릇의 뚜껑을 열자 진한 매화향이 퍼진다. 코를 자극하는 향에 레이첸이 고개를 들었다. 의아한 표정이였다. “그게 무엇이냐?” “향유라는 것입니다.” “....꽃으로 만드나?” “그렇습니다. 매화입니다. 이것은.” 레이첸은 팔을 뻗어 사기 그릇을 들고 자세히 보다가 향을 맡았다. 이 향은 아닌데. “이 향말고 다른 것도 있나?” “예? 그럼요. 여러 가지가 있지만 화선은 매화를 씁니다.” 화선이 화사하게 미소지으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향은 내면의 모습이라 합니다. 사람의 체향은 그 사람의 염(念)에 따라 변화한다고 하지요.” “그런거 느껴본적 없는데?” “전하는 화선에게서 사랑스러운 향이 나지 않으신가요?” 약간 삐진듯한, 하지만 충분히 단정한 애교에 레이첸은 웃고 말았다. “그래 네게서 단 과자 냄새가 나지.” “어머나, 전하가 원하시는 것은 과자입니까?” 낮게 웃는 화선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래, 내면의 모습이라. 그렇다면 너는 매화가 되고 싶은거냐? 왜 하필 매화냐?” “흐흠. 맞추어 보십시오.” “아아, 그런 장난은 지쳤는데...” 레이첸은 곰곰이 생각하다 말했다. “화려하게 지고 싶으냐?” “...” 그 말에 화선은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 “아뇨, 화선은 화려하게 지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그럼? 매화가 또 뭐가 있더냐. 질때 아름다운 것 빼고는 잘 모르겠는데.” “매화는 배반하지 않는답니다.” “뭐?” “화선은 평생 한사람만 사랑하고 싶습니다.” 지긋이 레이첸의 어깨를 주무르며 화선이 중얼거렸다. “화선이 사랑하는 사람도 배반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러냐.” 약간은 졸린듯한 목소리로 레이첸이 중얼거리자 화선은 매화향을 덜어내어 그의 어깨에 발랐다. 화선의 손길이 편안한 듯 레이첸은 곧 잠이 들어버렸다. 화선은 레이첸의 커다란 어깨에 작은 얼굴을 기대며 작게 속삭였다. “하지만 전하께서 절 배반하셔도...저는 그러지 않을것입니다.” 사랑하니까요. 당신을 사랑하니까요. 비록 대신들의 추천과 황제의 명령으로 당신과 부부가 되었지만 그래도 당신을 사랑하니까요. 비록 당신에게 스치는 수 많은 총인들에서 하나가 된다 한들, 제가 당신을 배반할수 있겠습니까. 제가 당신을 사랑하니까요. 어느 정도 잠을 잔것인지 등이 무거운 것을 느끼고 눈을 떴다. 고개를 약간 돌려보니 화선이 자신의 등위로 엎어져 자고 있는 것이 보인다. “바로자지 않고...” 어린 부인을 마치 여동생인 듯 안아내려 침대에 눕히자 부스스하게 눈을 뜬다. “더 자라.” “날이 밝아오는거죠?” 화선이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좀더 자라는 레이첸의 말에 약간 삐진 듯 말한다. “신첩은 정비가 아니니 새벽까지 함께 있을 수가 없습니다.” “말에 가시가 있구나. 가시달린 말엔 지쳤다.” 레이첸은 고개를 들어 머리채를 휘어 뒤로 넘겼다. “아이를 낳아라. 그렇게 되면 네가 나의 정부인이 되는 것이다. 내게 너 말고 두 여인이 더 있다는 것을 알지 않느냐. 먼저 후계자를 낳는 여인을 정부인으로 삼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닐까.” “비빈은 총인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궁안에는 저 혼자 당신의 부인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 말 진심이십니까?” “응?” “그럼 저는 오늘부터 정부인이 되는거군요.” “...?” 화선이 돌아서서 싱긋 웃었다. 자신보다 10살이나 어린 부인의 웃음은 매우 귀엽다. “화선은 잉태했습니다.” “...정말?” 레이첸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배를 바라보았다. 아닌 것 같은데. “그렇게 보시면 싫어요. 아직 그럴 때도 아니고요.” “그...그런가? 그런가... 하하하!” 레이첸은 그녀를 덥석 안아 올렸다 빙글 돌리더니 무릎에 앉혀 사랑스럽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화선은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다. “아무튼... 오늘은 아침이 오기 전에 전 제 궁으로 가봐야합니다.” “어째서? 오늘 당장 첩지를 내려 널 정부인으로 만들겠다.” “흥.” 화선은 재빠르게 레이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문을 열고 새침하게 말하며 사라진다. “그럼 첩지가 내리길 기다리지요” “아아, 이봐라. 화선부인을 궁으로 모시고 가라!” “예? 전하, 화선부인은 여관이 모시게 되어있습니다만...” “그런가? 아무튼 몸조심하고!” 송구스럽다는 환관의 말에 레이첸은 다시 외쳤다. 아직 실감은 안나지만 나도 아버지가 되는 건가. 그러니까 체이첸 형님처럼 아이에게 글을 가르... 글은 좀 그렇고 칼은 좀 알려주기 쉽겠군. “이야!” 창문을 열며 떠오르는 태양에 레이첸은 힘껏 기지개를 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침을 막 먹으려는 순간 태진의 찾아왔다. 좋은 표정이라는 질문에 레이첸은 신나게 화선의 이야기했다. 하지만 이야기를 들은 태진은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 “화선부인이 임신을요?” “그래.” “...” “어째 축하해줄 것 같지 않구나?” “왕자가 아이를 가지면 제후가 됩니다. 그 말은 왕궁에서 나가 외부 성으로 가야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가지. 뭐” 태진은 한숨을 쉬었다. 탕하고 탁자를 치며 일어나 화를 내었다. “형님, 어째서 결혼한지 5년이 넘는 왕자들조차 아이를 가지지 않는지 생각해보지 않으셨습니까? 제후가 되어 왕궁을 나가면 다시 환궁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2형님은 아이를 낳았잖아. 그래도 궁에 있는데?” “2왕자는 관례상 태자의 위치에 있으니 그렇지요! 2왕자와는 형님과는 다릅니다! 당장 3왕자가 아이를 가지자마자 궁을 나갔지 않습니까? 그렇게 입 벌리고 좋아할 일이 아니라고요” 하지만 레이첸은 히쭉 웃으며 중얼거렸다. “나가라면 나가는 거다. 뭐가 문제냐.” “왕궁을 나가는 것은 권력에서 밀려나는 것입니다. 5왕자가 왜 궁에서 나갔는지 잊으셨습니까? 권력을 주지 않기 위해 궁에서 내보낸 거지 않습니까!” “그럼 나보고 어쩌라고? ” “일단은 비밀로 해야 합니다.” 태진의 말에 말도 안된다는 듯 레이첸이 실소했다. “하지만 배가 불러오면 ...” “영원히 비밀로 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일단 도성에서 그리 멀지 않으면서 조공을 풍족하게 낼 수 있는 곳을 골라 놓아야겠지요.” “성을 고른다고 갈수 있나. 빈 성이여야지.” 이번엔 태진이 코웃음을 쳤다. 그 특유의 자만심 넘치는 도도한 눈빛으로 레이첸을 바라보았다. “비게 만들어야 하는 겁니다. 형님.” 거칠게 창문을 열자 성벽 아래로 장안의 거대한 가옥들이 줄을지어 저기 멀고 먼 산악까지 뻗어있는 것이 보인다. 광대한 땅. 넓은 하늘. 하지만 이것을 가지는 것은 단 한명이다. 내가 그 단 한명이 되지 못한다면 최소한 그 다음이 되겠다 태진은 창가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인상을 찌푸리는 레이첸을 돌아보았다. 아니라면 내가 그 단 한명이 될 것이다. 뜻과는 상관없이 싱긋 미소지어보이는 태진은 두근거리는 자신의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광활하게 뻗어나가는 맑은 하늘의 구름 때를 바라보았다.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 3 가치노을(白頭波). ------------------- 58 하루 종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도 타지 않았고 따라오는 무사도 없었다. 장검을 차지도 않았고 그저 단검 세 자루와 화살을 많이 넣은 전통을 매고 있었다. 사냥하는 정식 복장이다. “...” 곰은 아닌 것 같군. 약간의 실망감이 오지만 다시 발자국을 손가락으로 재어본다. 가운데 손가락보다 두 마디가 길다. 이런 동물은 몸길이가 약 5미터가 넘는다는 것이지. “...범인가?” 범치고는 몸이 날렵한 느낌이다. 그렇다면 늑대인가. 아니면 여우? 계속해서 발자국을 따라가며 이상한 것을 느꼈다. 마치 유령 같은 발자국이다.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그 간격이 뛰어가는 거리를 훨씬 웃돈다. 마치 사라졌다가 나타났다가를 계속하는 ... 날고 긴다하는 내 실력으로도 이곳까지가 한계다. 앞을 보니 벼랑이다. 맞 벼랑까지는 해 그림자로 보아 50여 미터. 아무리 5미터가 넘는 동물이라도 뛰어 넘어가긴 무리다. 여기서 날아갔다는 이야긴가. 하지만 날개달린 것이 땅을 걸어 다닌다는 지금까지 소리는 못 들었다. “요물인가.” 더 이상 쫓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한 그는 홀가분하게 몸을 일으켰다. 올려 묶은 황금머리카락이 흔들거린다. 편안하게 바위 위의 눈덩이를 대강 치우고 앉아 지는 노을을 바라본다. 아무런 생각 없이. 편안하게. 요물이라면 해가 질 때까지 여기 있는 것은 위험하지. 손을 올려서 바람의 방향을 가늠하고는 절벽 아래도 고개를 내민다. 저 멀리 작게 함께 온 장수들이 개미처럼 보인다. 원칙대로라면 자신은 왕자고 호위무사인 가도위들과 왔어야 하지만 이미 그런 것에서는 멀어진지 오래다. 풀쩍 눈으로 사뿐하게 뛰어 내려가며 다리에 무리가 안 가게 천천히, 하지만 신속하게 아래로 내려간다. 내일은 함께 온 장수들과 낮에 본 노루사냥이나 해야겠다. 이상하게 산의 아래로 갈수록 산짐승들의 발자국이 많아진다. 이 산의 동물들이 하산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무엇을 피해서. 멀리, 더 멀리. 아래로 내려와 몸을 추스르고 당당하게 막사를 친 곳으로 걸어가자 두 명의 장수와 병사들이 급히 그를 마중 나온다. “친첸전하.” “산 위는 아무것도 없군.” 오래간만에 산맥을 타고 곡양, 보물산까지 사냥을 나온 5왕자였다. 땀과 눈 녹은 물에 젓은 머리를 흔들자 금색 머리카락이 화사하게 부셔진다. “오늘은 눈이 심하게 내릴 것 같구나” “예. 일단은 아침에 상태를 보시고 준비하시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친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하늘을 보았다. 많이 쏟아질 것이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아무것도 건지지 않고 가는 것은 아쉽지. 친첸은 아무 말 없이 장수를 따라 자신의 막사로 들어갔지만 내일 눈이 오던 말던 몇일간 더 머물며 사냥을 하기로 이미 마음을 굳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한 발걸음이 들이고 누군가 막사앞에서 멈춘다. 그가 먼저 말을 하기 전에 친첸이 술을 따르며 말했다. “들어와라 마고.” “사냥은 그다지 성과가 없으셨나봅니다.” 휘장을 걷고 한 사내가 들어왔다 어디서든지 흔히 볼수 있는 평범한 사내였다. 평범한 체구에 한족인듯도 하고 밝은 갈색 머리에 여진족인듯도 하나 딱 잘라 어느 쪽이다 할수 없는 묘한 분위기의 사내였다. 매우 날카로운 매눈을 가진 그는 친첸의 앞에 앉았다. “하지만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전하.” “뭐. 여기까지 왔으면 뭐라도 하나 잡아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데. 운이 좋다면 진상품 때문에 헛돈 쓸일도 없을테고.” 친첸이 마고에게 술잔을 하나 건내주었다. “곡양은 보물산이라고 한다. 진귀한 짐승들이 많이 있지. 그래서 사냥 온것이야. 괜한 시간을 낭비하려는 것이 아니니 이번에 네가 뭐라 하던 난 돌아가지 않아.” 마고는 고개를 몇 번 젓고는 술을 따라 스스로 마셨다. “그리고 어째서 4왕자와 대전을 청하신건지요.” “그야 나는 그놈이 마음에 들거든.” “장난으로 하시기에는 강한 왕자 아닙니까.” “뭐 이정도의 위험이 있어야 싸울 맛이 나지 않나.” 활짝 웃으며 말하는 친첸과는 달리 마고는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무심하게 표정 변화가 없는 사내였다 .마치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듯한 공허감이 맴도는 분위기가 서늘하고 어두웠지만 친첸은 그냥 고개를 돌렸다. “돌아가서 쉬게.” “예.” 마고가 일어나 나가버리자 친첸은 다시 한잔 따뜻한 술을 따르며 중얼거렸다. “재미없는 자식...” 전날 심하게 내린 눈으로 말을 달리기엔 산은 너무 험했다. 그래도 가겠다고 우기던 백라와 유견은 언덕위까지 올라갔다가 결국 단념하며 마을에 남아있기로 결정했다. 백라는 발을 동동 구르며 안타가워했다. “나는 꼭 가서 해야 할말이...!” “아저씨도 참. 자례가 저 지경이니 전 자례를 업어야 한다고요. 그럼 아저씨가 유견님을 업어야 하는데 할 수 있으세요?” 을노가 백라에게 더 이상 말하지 말라는 듯 묻자 백라는 부채로 입을 가리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하지만 유견은 형을 만나야 한다며 시비를 걸 분위기를 보이자 을노는 이번엔 유번에게 물었다. “아니면 유견님이 백라님을 업으실래요?” “...아니” 결국 투덜투덜 거리면서도 백라와 유견은 남아있기로 했다. “눈이 녹으면 바로 따라가겠다. 거기서 기다려라.” 백라의 비장한 말이 끝나자마자 머리를 하나로 땋아 내려 묶은 자례가 방안에서 나왔다. 밖의 분위기에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이였지만 곧 유번과 백라에게 고개숙여 인사했다. “다녀오겠습니다.” “조심해라. 에이 차라리 눈이 녹으면 같이 가는게 좋을텐데. 을노 잘 봐주어야 하네. 우리 손주.” “예예. 여부가 있겠습니까. 걱정마십쇼.” 하지만 유번의 당부가 무안하게 마당으로 나온 자례는 발을 때자마자 바로 눈에 미끄러져 넘어지는 것이었다. 다행이 눈이 깊게 쌓여 큰 상처는 입지 않았다. 일어나서 옷을 툭툭 털어내며 다시 일어나며 걸어가는 걸음이 불편해 보여 유번과 백라는 무사히 산위로 올라갈 수 있을지 걱정이 태산 같았다. 그들이 을노를 빤히 바라보자 을노는 어깨를 으쓱였다. “알았어요. 알았어요. 엎고 갈게요. 그러려고 했었다고요.” 둘의 걱정에 눌린 을노는 자례를 번쩍 엎고는 마당을 나섰다. 두사람의 배웅을 뒤로 하고 언덕을 힘차게 오르는 을노의 등에서 자례가 물었다. “정말 괜찮겠어요?” “응. 생각보다 넌 굉장히 가볍고 어제 푹 잤으니까. 유견님의 은신처는 여기서 하루거리에... 게다가 가는 중간 중간에 빈 집이 있으니 쉬어가면 가능해.” “하지만 난곡인데...” 결국 난곡의 입구에 들어서자 너무 험한 산새에 등에 업힌 자례가 불안할 정도였다. 자례는 스스로 걸어가길 원했고 을노는 업고가는 것보다 부축해서 가는 것이 빠르다는데 동의했다. 내려와 걷는 자례는 부축하다가 문득 정말로 아이의 걸음이 불안정 한 것을 느끼고 놀랐다. “너 정말 다리를 다쳤구나?” “그럼 거짓말인줄 알았어요?” “당연히 네가 가기 싫어서 그러는 줄 알았지!” 을노가 급히 옷자락을 걷어 다리를 보니 지금은 그다지 부어있지 않지만 계속되는 산행에는 힘들 것 같다. 다행히 뼈에 금이 간 것도 아니고 살짝 접질린 것 같다. “이 바보야! 그럼 네 형을 오라고 하는 편이 더 좋잖아! 이게 무슨 고생이야!” “그럼 안돼요.” 단호하게 말하며 자례가 을노에게 털썩 기댔다. 헉헉 거리면서도 끝까지 가보려는 욕심이 눈동자에 비추어져 을노는 웃지도 못했다. “어차피 그렇게 많이 아프지도 않고 걸어 갈만해요.” “지금에야 그렇지. 앞으로 두고 봐라,” “...장군은 동생이 있었죠?” “왜?” 을노가 의아하게 자례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알았지? 이 아이에게 내가 동생의 이야기를 한적이 있었나?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그런 일은 없었다. 무엇보다 목래에서 헤어진 이후 지금이 처음 만나는 것이 아닌가. “이름이 을야죠? 목래에서 날 보고 을야라고 한 적이 있어요” “기억하냐? 그런 것 까지?” 쩝하며 고개를 돌리는 을노를 보며 자례가 피식 웃었다. “좋은 형이 되었을 것 같네요.” “응? 그런 것도 아니었어. 나보다 많이 어린 누이였는데 나보다 똑똑하고 강해서 말이야. 내가 그 아이에 많이 기댔지. 그 아이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 아닌가해. 그 아이를 챙기면서 내가 성장했다할까?” “...귀찮다는 느낌은 없었나요?” 그제야 의아한 표정으로 자례를 보았다.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거지. 당연히 누이를 귀찮다고 여길 리가 없잖아. “전혀. 단 한번도.” “우리 형은 절 귀찮다고 생각해요. 악연이라고 했죠.” 자례가 아무렇지 않는 표정으로 말했다. 을노가 떠억 하는 표정으로 인상을 썼다. “그럴 리가 없지. 네가 잘못 안거지.” “그래서 내가 가야해요. 형은 내게 안 돌아와요.” 그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과 담담한 목소리에 지독한 쓸쓸함을 발견하고는 을노는 자례를 끌어당겨 안아주었다. 을노의 어꺠에 머리를 기댄 아이는 공허하게 하늘을 바라본다. 불쌍한 마음이 들어 을노는 아이를 달래본다. “형은 그렇지 않을 거야. 목래에서 그의 눈은 진심이었으니까. 널 많이 좋아하는데 표현을 잘 못하는 거겠지. 장수들은 원래 그래. 나도 그랬고.” “정말 그럴까요?” “그럼. 세상 어느 형제가 서로를 미워하겠니. 너는 네 생각보다 많은 보호를 받고 자라는 거야. 너도 형을 미워하면 안 된다.” 그말에 자례가 피식 웃었다. “저는 형을 미워하지 않아요. 아주 좋아하는 걸요. 하지만 내가 하는 일은 모두 형을 힘들게 만들어요. 그래서 형이 절 미워하는 것이겠죠.” “아우가 주는 힘듬은 힘들다 생각하지 않아. 그것이 혈육이지.” 을노의 확실한 말에 자례는 미소지었다. “형도 그렇게 생각해주었으면 좋겠어요.” “그렇다면 가서 물어보렴.” 을노가 씨익 웃으며 다시 자례를 일으켜 산실을 올랐다. 험한 산에 생각보다 걸음이 느려진 둘은 밤이 어두워 질때까지 원하던 곳까지 갈수는 없었다. 결국 을노는 밤길을 걷는 것보다는 쉬어가기를 결정했고 둘은 근처의 빈 집을 발견했다. “오늘은 저기서 쉬어가자. 내일 저녁에는 도착할 수 있을 거야.” “예.” 들어간 방은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은 듯 보였다. 냉방에 거미줄까지, 얼핏 보기엔 흉가에 가까웠지만 어차피 하룻밤이니 신경쓰이진 않았다. 하지만 을노는 못내 창백해진 자례가 걱정스러운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이 너무 차다. 나무를 가져와 대강 덥혀보지.”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자다가 떨려고 그러지? 미안하지만 난 자면 누가 업어가도 모르기 때문에 널 봐줄수가 없다구.” 장난스럽게 하하 웃던 을노는 허리에 묶은 세개의 검중 하나를 풀어 자례에게 던졌다. 재빠르게 한손을 내밀어 검을 받아내자 을노가 미소 지었다. “검을 쓸 줄 알지? 필요는 없을 테지만 가지고 있어.” “예.” 을노가 방은 나가자 자례는 받은 검을 한손으로 흔들어 검을 튕겨내었다. 좋은 검이다. 검 날에 자신의 얼굴이 선명하게 비춘다. “...이런.” 얼굴이 말이 아니네. 잠시 이리저리 눈을 굴리다가 을노가 지고 온 짐에 시선이 갔다. 열어보자 역시나 동자가 만든 밀 빵이 들어있었다. 하나 입에 넣어 물었지만 맛은 느껴지지 않는다. 모래 씹는 듯한 느낌에 토해버리고 싶지만 왜 그런지 그냥 삼키게 된다. 먹고 싶지 않으면서 먹는 자신이 웃겨 실소하다가 목에 걸렸는지 잔기침을 한다. “콜록! 콜록!” 강하게 되고 싶은데. 하지만 그것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 형보다 강하게 될 수는 없었어. 그래서 영리해졌다. 전사하시기 전날 아버님은 어린 날 안고 말씀하셨지. -형이 좋으니? -예. -그렇다면 형보다 강해지기 어렵거든 영리해지거라. 그럼 너희는 떨어지지 않을 거다. 아니에요. 아버님. 우리 형제는 떨어지기로 약속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날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어요. 입을 막았던 손을 보지는 않고 주먹을 쥐어 가리지만 느낄 수는 있다. 점점 다가오는 죽음을 향한 징조가. 저에겐 시간이 없어요. 어떻하면 이 시간안에 제가 원하는 것을 이루고 가는 것일까요. 아버지. “...내가 뭘 원하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피가 떨어지는 손을 꽉 움켜쥐고는 고개를 숙인다. 결국 자신이 이룰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느끼고 절망해한다. 59 아무튼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는 노인이라니까. 자휼은 물가까지 전력 질주 했다가 바위를 지지대 삼아 나무로 뛰어올랐다. 일단은 산 밑까지 내려와서 시간을 끌다가 재빠르게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계획이다. 이렇게 물가쪽으로 발자국을 남긴다면 물을 건너간줄 알것이다. “지금은 쉬어야지.” 해가 이미 졌다. 난곡이 아니라도 해가진 산은 위험하다. 나무를 타고 조금 떨어진 곳에 내려온 자휼은 부리나케 반대 방향으로 달려갔다. 마른 땅을 밟지만 발자국은 남을 테니 조금이라도 멀리 덜어져야 한다. 아까 본 빈집으로 가려다가 잠시 멈칫했다. 유견이 충분히 자신의 행적을 이해할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마지막 결정을 바꾸고 근처 나무로 뛰어 올라갔다. 그게 더 안전할 것 같았다. 유견으로부터 , 산짐승들로부터. 눈을 감으려다가 가지 사이로 난 하늘을 보니 별이 참 많다. 검은 하늘에 반짝 반짝 예쁘기도 하지. 게다가 조금만 있으면 보름이라 달이 더 환하다. “...” 아 이런. 또 생각이 그쪽으로 가는구나. 그 아이가 멀지 않는 곳에 있어서야. 자꾸만 곡양촌 쪽으로 시선을 돌리게 된다. 그러고 보니 시간도 남는데. 여기서 곡양촌까지는 세 시간도 안걸 리는 거리인데... 아니지. 가면 이번엔 무슨 일이 있으라고... 그래도 그렇게 방안에 두고 나온 후 한번도 못 봤는데...좋아졌겠지. 설마 무슨 일이 생겼을까. 하지만... 한동안 뒤적뒤적 거리던 자휼은 결국 재빠르게 나무에서 내려와 곡양촌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이러는 자신이 어쩔수 없는 바보라고 생각하면서. 소란스러운 인기척에 기대고 있던 등을 세웠다. 을노가 돌아왔다고 생각했지만 한두명이 아닌 생소한 소리에 자례는 몸을 긴장시켰다. 소리 없이 칼을 엄지로 튕겨내고는 조금 열어둔 문 사이를 바라본다. 군조차 피해가는 난곡에 무슨 사람들이 저렇게 몰려다니는 것일까? 하지만 더 생각하지 않아도 그들의 거친 행동과 대화에서 그들이 산적이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차라리 산짐승이면 더 좋았을 것을. 재빠르게 짐을 대들보 위로 던져 올리고 문이 달린 벽 쪽으로 단단히 붙었다. 머리수가 턱 없이 불리하다. 하필이면. 방문으로 나가기는 늦어 창문을 바라보지만 너무 작아 나갈 수가 없다. 방안에 갇혀버렸군. 어떡하면 좋지. 자례는 다시 방문사이로 마당으로 들어오는 자들을 살폈다. 검은 피부색. 한족이나 정안족은 아니다. 대부분이 곱슬의 검은 머리. 갈색 눈동자. 키는 작은 편이지만 몸집이 매우 좋다. 거란인이다. 요의 잔병들인가? 자례는 검을 재빨리 천장의 대들보에 안보이도록 올려놓았다. 어차피 싸워도 이렇게 머릿수가 차이나면 살아나긴 힘들다. 그렇다면 완전히 숙이고 나가는 수밖에. 들어올테면 와라하는 심정으로 자례는 그렇게 자리에 털썩 앉았다. 죽기밖에 더하겠어 라는 가벼운 생각을 품었다가 얼른 머리를 흔든다. 그러게 되면 안되지. 형을 만나야 하는데 말이야. 게다가 정말로 아무것도 못이루고 죽을수는 없어. 다행히 방까지 들어오지 않고 그들은 마당의 마른 자리에 털썩 털썩 앉는다. 약간은 취한 듯한 목소리와 행동을 보니 이미 일을 끝내고 오는 것 같다. 갑자기 울타리위로 젊은 사내가 훌쩍 뛰어올랐다. “아아, 자자 시끄럽다. 시끄러워.” “하하, 귀한 집도련님이라 역시 이런 소란스러움은 싫으신가봐? “ “장난치지 마라 너!” 한쪽 눈을 앞머리로 모두 가려 얼굴을 자세히 보지 못하겠지만 젊은 사내다. 지금은 보기 힘든 한족의 반머리를 한 모습을 보아 한족같다. 모두를 내려보며 그가 외쳤다. “오늘 모두들 수고 했다. 그렇다면 전리품을 나누어야겠지?” “악운이 또 머리 쓴다! 하하하” “정신 바짝 차리지 못하면 또 아무것도 못가지고 간다!” 누군가 크게 웃자 모두들 따라 웃었다. 울타리에 걸터앉은 사내도 웃었다. 다른 사람은 모두 거란족인데 비해 그만은 한족이다. 아니, 자세히 보면 한족 같지만 사실 거란족의 피가 섞인 혼혈 같다. 거들먹거리며 울타리에서 동료들을 내려보던 그는 고개를 저었다. “설마. 이번에는 정말로 공평하게 나누어주지.” 커다란 자루를 끌어내와 보석이 박힌 청동 잔을 하나 꺼내들고는 말한다. “이것은 청동이니 시장에 팔면 돈 되지 않으나 칠보가 박혀 있다. 한족의 고리대금 놈들의 빚 갚는데 최고지. 그렇다면 이건 자네 것이지?” 악운이라고 불린 사내는 술잔을 아직도 취기가 여린 사내에게 던졌다. 불만 없는 듯 하하 웃으며 술잔을 받아 품에 넣는다. “자 다음 이 부채는 우리는 필요없다 여기지만 한번은 들어본 풍류화백, 그 유명한 당건의 친필 서명이 담긴 부채로써 도성의 호사가들에게 판다면 1만금은 호가하지. 그렇다면 이것은 자네 것이겠지?” 그나마 반반해 보이는 거란인이 날리는 날아오는 부채를 낚아챘다. 역시 씩 웃으며 품에 넣는다. 같은 방법으로 십여 명에게 물건을 분배한 악운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것을 골랐다. 그것은 옥으로 만들어진 굉장히 긴 목걸이였다. “난 이거.” “목걸이?” “그야 혼기가 찬 나로서는 근사한 여인 하나 건지기 위한 것이니 딱이지?” 그의 말에 모두들 웃었다. 그러나 악운은 그저 실웃음만 짓고 있을뿐이였다. “나 참. 우리에게도 밤손님이 생기나 보군.” 의아해 하는 동료들을 제치고 울타리에서 내려오더니 자례가 앉아있는 방안으로 곧장 와서 문을 왈칵 열었다. 방 중앙에 앉아 있는 자례에게 악운이 비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부터 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네.” “...알고 있으면서 말하지 않았다는 것은 구경시켜 준 것이 아닌가 했는데.” “흥. 정안족이군” 타인의 기척에 모두가 칼을 뽑아들었지만 악운은 손을 들어 제지했다. “무기도 없고 아직 어린 아이다. 무기도 없고. 무기를 쓸필요는 없어.” 악운은 자례의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우리도 무심코 지나친 폐가니 우릴 기다린 것은 아닌 것 같고 어쩌다가 이곳에 오게 되었는가 어린 선비?” “...“ “난곡은 군도 못들어 오는 험한 곳으로 유명한데 그 작은 몸으로 여기까지 잘도 올라왔군. 정말로 혼자 왔나?” “...” “우리가 누군지는 알고 있는건가? 배짱도 좋아?” “...” “쟁여아해어화?(爭如我解語花)” 다른 이들은 무슨 말인가 하여 둘을 바라보았지만 자례는 눈을 매섭게 치켜 더 악운을 바라보았다. “실례군요.” “미안. 미안. 말이 없어서 해본 말이다. 아무튼 효과는 있는 것인가보군.” 악운은 손들 들어 모두를 바라보며 물었다. “여기서 달빛을 즐기고 계시던 신선같구만. 자 그럼 어떻게 할까?” “죽여!” “신선이든, 우리를 보았으니 죽여야지!” “그만 그만.” 악운은 모두를 진정시켰다. 빙긋 웃으며 치장스런 동작으로 팔을 벌린다. 춤을 추는 듯한 동작을 가진 사내다. “이런 새 하얀 연꽃이 달을 벗 삼아 방안에 있는 것은 님을 기다리는 거라네. 지금 죽인다면 그 님께서 얼마나 슬퍼하시려나? 원귀는 이렇게 생기는 거라지요.” 달을 보며 통쾌하게 웃던 악운은 갑자기 하늘로 검을 치켜들었다. “기다리는 자가 오면 같이 죽인다. 모두 숨어!” 재빠르게 이곳 저곳으로 숨어버리는 사람들을 자례가 물끄러미 바라보자 악운은 방문을 반만 열고 자례의 등 뒤로 돌아가 앉았다. 뒤를 돌아보려는 자례의 어깨에 칼을 올리며 조용히 말한다. “신선께서는 달빛을 감상하시게. 난 신선의 뒷모습이나 감상하려네.” “널 보면 들어오다가 나갈 텐데.” “...너 정안족이지?” “느끼는 데로” “그렇다면 혹시 ... 아니다.” 실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던 그는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등이 갑자기 무거워지더니 어깨의 칼이 바닥에 내려진다. 칼대신 대신 머리를 자례의 목에 기대며 중얼거렸다. “우린 어제 밤에 힘들게 뛰어다녔다고. 실례지만 신선을 비게 삼아 그 좋다는 도화원 구경 좀 하고 오겠습니다.” 정말로 자려는지 등이 더 무거워진다는 것을 느끼며 자례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걸 콱... 손만 뒤로 돌리면 그의 검을 잡아챌수 있을것 같다. 하지만 마음대로 움직이기엔 아까 겨누어진 검이 걸린다. 이 사내, 가벼운 듯 하면서 진중해 보여 섣불리 나설 수가 없다. 몇 번 칼을 집어들지 고민하던 자례는 결국 그것은 무리라고 결론내렸다. “...” 마당은 한가롭고 하늘의 달은 하얗게 빛나 세상이 고요하다. 설마. 장군 을노, 쉬첸처럼 멍청하게 굴어 날 피곤하게 하지 않겠지. 물론 그가 좀 어리버리한 면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그래도... 에이, 몰라. 이왕 이렇게 된 거 달구경이나 하자. 이번엔 을노가 알아서 구해주겠지. 단 하나 모난 구석 없는 달을 자례는 선망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어찌 되었건 이 상황에 자신이 할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을 느끼자 등뒤에 누가 기대 자고 있건간에 신경이 안쓰인다. 다 차면 스스로 기울고 더 이상 기울대 없으면 스스로 차오른다. 스스로 차고 기우는 것을 자만스럽게, 서글프게 받아들이지 않고 포용한다. 스스로 다 차면 그것을 만월이라 하여 그 완성이 더할 나위 없고 스스로 다 기울면 그것을 그믐이라 하여 더 이상 그 흔적조차 남지 않는다. 하지만 그믐이 없으면 달은 다시 차지 못한다. 차오르기 위해 기우는 것이다. 사람도 이와 같이 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스스로 기울고 차는 것에 거스르지 않고 그것은 다소곳 받아들이는 운명에의 복종. 하지만 그렇지 않기에 모든 이들은 달을 선망하는 수밖에 없다. 그 운명을 받아들이는 겸허한 자세를 동경한다. 나 스스로 차오르는 것에 대해 자만하거나 뽐내본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차올라 스스로 기울게 되는 것은... 너무나 서글퍼 어찌 할 수가 없습니다. 조금만 기울게 되는 것을 .... “...그렇다면 다음 만월이 떠오르지 못하게 되는 것일까요.” 빙긋 웃어본다. 역시 달은 선망하지 않을 수 없다. 수 많은 지도를 펼치고 표시를 해나가던 누군가 고개를 젖히고 기지개를 폈다. “여기는 생산품이 좋기는 한데... 너무 멀어.” 태진은 잠시 머리를 집고 생각에 잠겼다. 가까우면서도 실세 있는 도성. 물론 전혀 없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왕자의 신분으로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거기장군(車騎將軍) 이나 녹상서사(錄尙書事) 의 성 뿐이다. “...” 머리를 잘 쓰는 놈들은 말로써 한 성을 좌지우지 할 수 있다고 큰소리친다. 그렇다면 내가 원하는 거기장군에게 내려진 도성을 비게 할 수 있을만한 놈도 있을까. “말도 안된다.” 그러다간 누구라도 목이 달아날테니까. 골치 아파지는 머리를 식히기 위해 창문밖의 풍경을 내다본다. 잘 가꾸어진 정원의 나무들이 아직 녹지 않는 눈이 쌓여 하얗게 보인다. 그러고 보니 난 항상 스스로 해결해왔어. 조금쯤은 여유있는 놈을 골라 부려도 될터이만. 하긴 내가 하는 일이 좀 위험한 일이긴하지. 허리를 핀 태진은 잠시 고민하다 오래간만에 도성 밖을 나가보기로 했다. 레이첸은 한동안 화선부인의 처분을 놓고 끙끙댈 터이니 얼마간은 도성 밖으로 나가지 않을 것이다. 게디가 황제의 축일에 관한 일은 모두 끝내놓은 것이니 이제 날짜만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즉, 얼마간은 시간의 여유가 있다. 내 개인 생활이겠지만.” 외출을 준비하다 문득 빙고에 잠들어있는 형제가 떠올라 다시 머리가 아파온다. 젠장. 바보같은 놈. 어쩌다가 그 지경이 되어버린거냐. 그러기에 내가 말했지 않은가. 힘없는 왕자는 거렁뱅이랑 다를바가 없다고. 너는 그 보다 더 못하게 죽은 것을 이젠 알고 있는 건가. 애써 죽어버린 형제에 대한 기억을 떨치며 태진은 밖으로 나갔다. 심복 둘만을 따라오게 한 후 황성을 나가자 잠시나마 머릿속이 빈듯한 느낌에 편안해진다. 함께라면 더 좋았을지도 모르지 쉬첸. 추운 날씨에도 부산스러운 도성을 거닐며 태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나 신경쓰인다. ------ 단설의 역주는 인용과 개인적 견해가 들어간 글입니다.(맹신(盟信)사양. 도용씁쓸)-------- 주 : 거기장군(車騎將軍) 기병을 통솔하는 무관직이다. 총사령관 격인 대장군(大將軍) 아래 표기(驃騎), 거기, 위(衛), 전(前), 후(後), 좌(左), 우(右)의 일곱 장군이 있는데, 거기장군(車騎將軍)은 둘째로 높은 관직이다. 원래 한무제(漢武帝)때 비롯된 공신(功臣)의 명호(名號)였으나 후한시대에 표기장군(驃騎將軍) 다음가는 무관직이 되었다. 1만석 주 : 녹상서사(錄尙書事) 궁정의 문서를 맡던 관직으로 후한 장제(章帝) 때 태부(太傅)와 태위(太尉)에게 이 직무를 겸하게 하여 시작된 관진이다. 화제(和帝) 이후 상설 기관이 되고, 그 관위(官位)는 삼공(三公) 위에 있었다. 즉 어린 황제가 즉위할 때마다 그를 대신하여 집정하고 재상직을 겸하였다. 현대의 내각총리(內閣總理)와 같은 직책이다. 60 을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까와는 달리 저 집 반짝 반짝 빛나는 것이 뭔가 달라진 느낌인데 말이야. 눈이 녹고 있어서 근처에서 마른 장작을 구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조금 멀리 나갔다 온 것이 화근인가. 다시 들어가면 욕먹을 정도로 곳곳에 보이는 반짝이는 것들이 살기를 뿜어내며 자신을 위협해보인다. “저거 아무리 봐도 매복한 병사들의 활 끝처럼 보이는데 말이야.” 이런 곳에 병사들이 몰려와 날 죽이려고 할리도 없고. 저렇게 태연하게 달구경하며 배시시 웃고 있는 자례도 이해가 안가고. 을노는 일단 마른 장작을 근처 나무 위에 올려놓았다. 고개를 숙이고 그림자처럼 집으로 다가가 지붕을 쳐다보고는 마당을 본다. 지붕의 눈은 녹지 않았다. 방안에 사람들이 모여 있다는 것은 아니다. 마당은... 나 원 발자국이 가득하군. 적어도 열대여섯은 되겠어. 그렇다면 산적인가. 조금 더 자세히 보자 자례의 등 뒤로 누군가 앉아있는 것이 보인다. 누구지? 한족 같은데. 뒤에서 자고 있는 건가. 아니 기절한 건가. 같이 포로가 된 건가? 아니면 산적? “거 참, 표정을 봐선 알 수가 없잖아. 자례. 울던지 웃던지 하라고.” 아무렇지 않는 다는 듯 무심하게 달을 바라보는 자례를 보곤 을노는 피식 웃어버렸다. 보름도 아닌 상현달인데 뭐가 볼것이 있다고 그리 바라보나. 뭐 그러고도 남을 놈이니 별수 없지. 을노는 집 뒤를 돌아 작은방의 창문을 살펴보았다. 너무 작아. 사람이 들어가기엔 무리다. 아마도 그래서 자례가 방을 나오지 못한 모양이다. 그럼 지붕은? 잠시 뒷걸음 치고는 사뿐하게 도약해 키 큰 몸을 담벼락에 올린다. 조용히 소리가 나지 않도록 나무를 타고 지붕으로 내려간다. 아무리 살짝 지붕위로 내려왔다 하지만 오래된 폐가의 지붕이 삐꺽하는 소리가 안날리 없다. 잠시 그 소리에 움찔해 가만히 있는다. “...” 악운은 그대로 눈만 떴다.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온 것이다. 하지만 기대고 있는 아이는 움직이지 않는다. 아까부터 전혀 미동도 하지 않는다. 굉장한 인내가 아니면 이 아이도 자고 있는 것일지도. 바닥에 내려놓았던 칼을 세워들고는 조용히 귀를 기울인다. 함부로 움직이지 마라. 내게는 인질이 있으니까. 문으로 달려오지 않는 것은 칭찬해 주지. “...바보.” “...?뭐?” 조용하게 자례가 내뱉는 소리에 순간적으로 자례에게 신경을 쏟은 순간 타당 하는 소리가 울리며 지붕의 볏짚과 벽돌들이 떨어져 내린다. 악운은 아차 하며 벌떡 일어났다. 일어나면서도 인질을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앞으로 넘어지며 자례의 어깨를 잡아끌어 피한다. 하지만 자신보다 빠른 그림자는 잽싸게 아이의 손을 잡아 자신의 뒤로 끌어 당긴다. “더 이상은 안돼. 이 아이 어깨를 다쳤거든.” 뒤쪽으로 사뿐하게 아이를 숨기고 동시에 검을 내밀어 악운의 목을 겨눈다. 신속하면서도 결정적인 행동에 악운은 졌다는 듯 두 손을 들며 칼을 내렸다. “멋진 연인이로다.” “연인은 아니지만 보호자는 보호자니까.” “예. 예. 하지만 이젠 어떻게 할 거지요? 멋진 보호자님? 나는 친구들이 많지만 자네는 한명인걸. 게다가 소중한 자네 아이도 데리고 가야지” “누가 아이냐? 그리고 보호할 필요는 없는 아이야.” “...?” 을노가 검으로 악운을 구석의 방안으로 몰자 자례는 악운이 기댄 목이 아픈지 손을 토닥거리며 대들보에 숨겨둔 검을 꺼내들었다. “이런, 호인(好人연인)이 아니라 호인(虎人호랑이)인가?” “호인(虎人호랑이)인가 호인(狐人여우)인가?” 엄지손가락으로 검을 튕겨 열며 자례가 중얼거렸다. “결국은 망인(望人멀리,미리보는 자) 망인(妄人거짓된 자)인가?” “...” 자례가 검을 뽑아들었다. 자휼이 검을 겨눈 상태로 자례에게 밖으로 나가자는 눈짓을 했다. “우린 바쁘다. 여기서 너희들과 시간을 보낼 여유가 없어. 가만히 보내준다면 우리도 조용히 나가겠다.” “...뭐, 어차피 그러려고 했다고.” 그 말에 자례가 피식 실소하자 악운은 정색을 했다. “정안족이라면 난 죽이지 않아. 안 그래도 인연이 닿아 있거든.” “모르는 소리 하는군. 아무튼 안전한 곳까지 따라 나와 줘야겠다.” “예, 예. 너무 미워하지 마시라고요. 그럼 제가 먼저 나가야 겠지요?” 실실 웃으며 악운이 을노에게 다가왔다. 그 모습에 을노는 인상을 구겼다. 이놈 정말 느끼하다. 뭐가 이런 놈이 다 있나. 지금 상황이 위험한 것은 알겠는데 자꾸만 이놈 때문에 상황판단이 흐려진다. 갑자기 등 뒤에 있던 자례가 뽑은 검을 들어 을노를 밀며 악운을 내리쳤다. 놀라기도 전에 악운이 재빠르게 양손을 교차하며 뒤로 물러난다. 두 손에는 한자가 조금 넘는 중검이 들려있다. 실실 거리던 것은 방심하게 하려던 것이였는지. 악운은 또다시 피식피식 웃었다. “어떻게 아셨을까 호인(好人연인)께서” “당신은 망인(妄人거짓된 자)이니까요.” 갑자기 악운의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드는 얼굴이 무섭도록 진지해졌다고 느끼는 순간 챙! 하는 소리가 들리며 자례와 악운이 방으로 뛰쳐나가며 검을 부딪친다. 을노가 급히 그들을 따라 나가려고 했지만 뒤를 바라보며 웃는 악운의 눈이 아까와는 전혀 다른 오싹한 기분에 본능적으로 몸을 숙이며 검을 휘두르자 강한 금속성과 함께 무엇인가가 떨어져 나간다. 뜨끔했던 을노가 소리친다. “소도? 이놈 암기까지?!” “망인(妄人거짓된 자)이니까요! 기본 아닙니까?!” 뭐라 더 말하려고 하나 악운은 덤벼오는 자례 때문에 서둘러 뒤로 물러나며 검을 부딪친다. 암기에 화가난 을노가 씩씩거리며 악운에게 달려가려 했지만 숨어 있던 거란 일당이 덤벼들자 걸음을 멈추었다. 검을 뽑아 대치상태를 유지하다 잘 갈아둔 날이 시퍼렇게 달빛을 반사하는 것을 보고 한숨을 쉬며 다시 집어넣는다. 그의 행동에 놀란 산적들이 물었다. “뭐냐! 왜 검을 집어 넣는 거냐!” “그게... 아끼는 거라서. 하하” “이놈이!” “자례야! 검 날에 상처 입히면 안돼!” 을노는 재빠르게 들보에 손을 올려 지붕위로 올라가 뒤뜰의 나무사이로 들어가 버렸다. 우르르 을노를 따라 대부분이 따라사라졌다. 자례 쪽으로도 악운을 돕기 위해서인지 두어 명이 다가온다. 그 모습을 본 자례는 악운을 뒤로 튕겨내며 다가오는 거란인을 향해 검을 향하며 무섭게 노려본다. 그 사나운 표정에 찔끔했는지 멈춘 그들에게 악운이 웃으며 외쳤다.. “가서 저놈이나 잡아!” 아찔한 소리가 귓가를 울리며 이번엔 자례가 튕겨나간다. 밀리는 다리가 아파 죽겠으나 내색하면 약점이 되어버려 이를 악물며 무표정으로 버틴다. 몇 번 더 밀리고 몰아붙이기를 반복하면 싸우는 자들은 달빛이 너무 밝다고 느낀다. 신경이 날카로워 지는 것이다. 이후 부터는 실수하는 자가 먼저 진다. 선제공격도 위험하다. 잠시 대치 상태에서도 뒤뜰도 들어간 다른 사람들의 금속비명소리와 베어 넘어지는 소리, 달리는 소리 등이 매우 시끄럽다. 사납게 서로를 노려보는 그들은 신경쓰지 않으려 애를 쓴다. 갑자기 사방이 조용해진다. 악운과 자례는 둘 다 몸을 숙이고 아닌척 신경을 뒤뜰에 집중한다. 누가 이긴 거지? 잠시 후 누군가 작게 비명을 지른다. “악!” 을노다. 자례가 어쩔수 없이 그 소리에 눈동자를 돌리자 악운이 무섭게 소리치며 두 검을 교차해 덤벼든다. 힘으로는 버틸 수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자례는 뒤로 황급히 물러났다. 그가 나보다 위야. 그렇게 느낀다면 상대의 검을 끝까지 받아주지 않아도 된다. 밀어오는 검을 부드럽게 넘겨주며 그대로 땅에 누워버리자 제풀에 앞으로 굴러 자세를 바로잡는다. 일어난 그는 피식 웃음을 띤다. “이런, 호인(好人연인)이 아니라 호인(豪人:영웅)이시오! 상황판단이 아주 좋으시구만!” “...” “사람은 얼굴만 봐서 모르는 거군. 내 좋은 것을 배웠습니다.” 아니, 저 사람 검은 상당해. 정식으로 싸웠다면 내가졌을 것이다. 그가 중도이고 내가 장도 였기 때문에 비길 수 있었던 거야. 그 말이 맞는다는 듯 자신의 숨소리와 심장소리는 거칠어져 말도 하기 어려운데 악운은 여유 있게 몸에 묻은 흙을 털어낸다. 다시 그 상태로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데 긴장을 깨고 누군가 중얼거린다. “아아 넘어져 버렸어.” 을노다. 지저분해진 옷자락을 털던 을노는 아직도 둘이 대치 상태에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다시 집어넣은 검을 뽑아든다. 승자는 을노였던가. 악운이 어깨를 으쓱하며 외쳤다. “정말로 운 없는 달이군! 달만이 날 위로하는 밤이오. 아아, 천하의 악운, 여기서 인생을 마감하는구나.” 말과는 달리 시종일관 미소지은 얼굴로 외친다. 빠르게 검을 튕기며 헛간의 지붕위로 올라가 상현달을 보며 중얼거렸다. “내 사랑하는 연인 달이여! 내 슬픔을 저들에게 일러주시오. 부디 다름에 만날 때는 좋은 친구로 만날 수 있도록.” 악운이 정중하게 손을 모으고 그들에게 인사를 하자 갑자기 자례가 피식 웃었다. 이상하다는 듯 악운이 고개를 들자 망설임 없이 을노가 손에 든 검을 크게 휘두른다. 술에 연결된 다른 검이 헛간까지 늘여져 헛간의 기둥을 돌아 다시 을노의 손으로 돌아온다. 악운이 뭔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을노가 힘껏 두 검을 잡아당기자 그대로 고래 힘줄이 들어간 술에 밀려 헛간의 기둥이 쓰러지고 만다. “...뭐..뭐야?..어?...앗? 악!” 헛간은 무너지며 무심하게 달의 연인을 깔아 버렸다. 먼지가 가라앉길 기다리다가 자례와 을노가 다가가 확인해본다. 지붕더미에 깔려 먼지투성이가 된 그에게 을노가 혀를 차며 말해주었다. “쯧쯧, 폐가의 헛간은 위험하다네. 제일 먼저 삭는 곳이 아닌가.” “달님도 망인(妄人거짓된 자)은 사양하시나 봅니다.” 제대로 낙상한 고통에도 그는 피식피식 웃으려다가 등의 통증에 눈을 찌푸린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잔지프라기와 먼지로 뒤범벅된 얼굴을 손으로 쓸어낸다. 잠시 후 그는 눈을 떠 둘을 올려다보았다. 왼쪽은 검은 눈, 오른쪽은 밝은 갈색 눈이다. 을노가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눈 색이...” “금은요동(金銀妖?)이군. 당신 악운이라고 했나?” “그걸 왜 묻소이까. 호인(好人연인)?” 자례는 신경질적으로 검을 집어넣었다. 기가막히다는 듯 하늘을 보며 실소한 자례는 화난 표정으로 내뱉었다. “악(岳)가의 후손이군.” “뭐? 양양(襄陽)의 악(岳)?” “이런 이런...우리 아버지는 유명한가 보네.” 먼지를 털며 일어나는 악운은 진지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손을 모았다. “양양(襄陽) 악가(岳家)의 장군 악비(岳飛) 아들 악운(岳橒)입니다.” “마..맙소사. 정충보국(貞忠保國) 악비의 아들이란 말인가?” “동맹이었던 호북의 군벌이기도하지요.” 자례가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쓰린 발목을 쓰다듬었다. 기지개를 피며 털조끼를 걸친 유견은 이쪽저쪽으로 팔다리를 풀었다. 간밤에 눈이 오지 않아 발자국이 아주 잘 새겨져 있으니 전혀 걱정할 필요 없이 자휼을 잡으러 출발하면 되는것이다. 요놈. 이제 잡으러 가겠다. 밖으로 나가 걸음이 사라진 방향을 보니 곡양산 방향의 반대이다. 이상하군. 곡양으로 가서 동생을 볼 것 같았는데. “...머리 쓰냐. 쯧.” 발로 자휼의 발자국을 지운 유견은 천천히 곡양촌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쪽으로 안갔다 하더라도 내가 늦으면 또 그쪽으로 달려갈 것이고 운 좋으면 지금 그 언덕에서 놀고 있겠지. 어차피 그쪽으로 오게 될 걸 뭐하려 발자국 따라 고생해가며 따라간단 말인가. 하지만 얼마 가지도 않아 익숙한 사람들과 마주쳤다. 저기 힘들게 헥헥 거리며 올라오는 마른 남자는 어째 도성에서 많이 뵌 분같고, 저기 저 잊지 못하는 나랑 닮은 얼굴은 ... “형님?” “어라? 네 여길...? 좌보님께서도?” “어이구, 여긴 두 번 오기 힘든 곳이오.” 헉헉거리며 백라가 눈 바닥에 주저앉았다. 자휼의 그 형제애에 전염이라도 됐는지 유견은 반가운 얼굴로 유번의 손을 덥석 잡았다. 하지만 유번은 냉큼 손을 내쳐버리곤 혀를 차는 것이다. “왜 이러우? 형님? 징그럽소. 얼마 남지 않은 노인들이 뭐하는 짓이오?” “...아무튼 네 놈은 귀엽지도 못해서.” 쯧. 혀를 차며 유견이 뒤로 획 돌자 유번이 외쳤다. “보소. 힘이 넘치는 것 같은데 좌보님 좀 업고 가요. 난 힘들어서 못하겠수다.” “알았다. 알았어.” “아닙니다. 그냥 부축만 해주십쇼.” 한사코 싫다는 백라의 말을 들어 유견은 좌보의 팔을 잡아 끌어 집으로 인도했다. 따뜻한 방에 들어가자 좋다는 얼굴을 하며 인상이 풀어진 백라를 화로에 다가가 한숨 돌렸다. 하지만 유번은 이쪽 저쪽 바라보다 이상하다는 듯 유견에게 물었다. “먼저 온 자례랑 을노 장군은?” “뭐?” “어제 을노장군에게 자휼의 아우를 동행해 이곳으로 올려보냈습니다만.” “자휼은 엊그제 갑자기 사냥을 나간다 하며 나갔고 그 이후 아무도 이곳으로 올라오지 않았는데요.” 유견의 말에 백라가 허탈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이런. 우리가 먼저 왔나. 하긴 자례가 있으니 어디서 쉬었다 오는지도 모르지. 어리둥절한 유견에게 유번이 설명했다. “두 형제를 만나게 해주라는 왕씨의 명령이 있었나봅니다. 이렇게 가까운데 있는 줄 알았다면 나라도 데리고 올라왔을 것을. 형님도 참. 바로 뒷산에 있는데 아우에게 기별이라도 넣어주시지 않고. 이 아우는 도성까지 형님 찾으러 갔다가 좌보님을 모시고 내려왔소.” “음... 이유가 있어 자휼 놈은 여기 숨어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연락을 못했구나.” “이유?” 그 말에 백라가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피곤에 졸려지는 몸은 입을 무겁게 만든다. 유견이 대신 말했다. “내가 말하리다. 좌보님. 그러니까 그놈이 왕자를 죽였다.” “예?” “아직 공개되지는 않았더구나. 아무튼 그놈 그래서 이곳으로 도망온것이야. 함부로 나갈 위치가 안 되는 거지. 그래서 나도 여기서 꼼짝을 못하고 있었다.” “그보다 자휼의 수련은 어떻습니까?” 백라가 다른 방향으로 말을 돌리자 유견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그 놈 아주 머릿속에 딴 생각만이 가득 차서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있소. 물론 바탕은 있던 놈이라 지금 2검까지는 할 수 있소만 어디 그것으로 끝을 보겠소이까. 아무래도 머릿속엔 그, 누구와는 다른 귀여운 동생 놈이 춤이라도 추고 있나보오.” “거 형님. 뭔가 말에 가시를 넣어 씹는 듯한데?” “그래, 안되냐?” 으르렁거리려는 두 형제를 때어놓으며 백라가 물었다. “그렇다면 잘됐군요. 자례를 이곳으로 데려와 자휼군과 함께 지내게 하죠. 유번님도 이곳에 올라오시기 전에 유견님을 만나보고 싶으시다 하셨지 않습니까?” “내가 언제!” 얼굴을 휙 돌려버리는 유번에게 덤벼들려는 유견앞에서 백라가 죽는 시늉을 하자 유견이 씩씩거리며 진정하려 노력했다. “그건 힘들 것 같은데. 그 녀석. 자주 가긴 하지만 듣자하니 한번도 안 들린 모양이니 신경 쓰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 함께 있으면 도망갈지 누가 아나?” “예?” “놈, 동생 놈에게 자기 모습을 보여주기 두려워 한다는 거요.” 백라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도성 안에서조차 마음대로 돌아다녔던...” “혈육이니 신경 쓰이는 모양이지.” “혈육이라면 신경 쓰지 않아야 정상이지 이 덩둘아!” 유번이 헛헛 웃으며 이야기에 끼어들자 유견은 버럭 활르 내었다. “뭐 덩둘? 이 놈의 가드락! 형님 무서운지 모르고 기어오르는구나!” “뭐 가드락?! 내 나이가 몇인데 가드락이야!” 크아악 거리며 서로의 수염을 잡는 무서운 노인들 사이를 재빠르게 기어 나오는 백라는 무하나 제대로 썰지도, 자결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글쟁이였다. 이래서 두 노인장들의 왕래가 드물었던 거구만. ------ 단설의 역주는 인용과 개인적 견해가 들어간 글입니다.(맹신(盟信)사양. 도용씁쓸)-------- 주 : 덩둘하다 : 매우 둔하고 어리석다. 주 : 가드락거리다/---대다 : 경솔하고 버릇없이 굴다. 경망스럽게 젠체하다. 경망스럽게 도도히 굴다. 61 시종 따위는 데리고 오지 않았다. 친첸은 스스로 옷을 입고 허리끈을 조였다. 발목을 보호하는 모피를 대고 묶는 손이 능숙하면서도 빠르다. 장수 한명이 다가와 물었다. 밝은 갈색머리를 한 날카로운 매 눈의 사내다. 친첸과 비슷한 몸집에 나이도 비슷해 보인다. 모습처럼 오랜 관계인 듯 그는 부담 없이 왕자에게 물었다. “친첸전하. 어느 산으로 가시겠습니까?” “난 북쪽.” “그러기 전에 대장간에 들려 활을 다시 살펴야 할 것 같습니다. 근처에 촌락이 하나 있다고 들었습니다.” “활이 왜?” “병사들이 전통에 천을 씌워 놓지 않았습니다. 깃이 얼어 날아가지 않습니다.” “...바보군.” 친첸은 일어나 얼어버린 전통에서 화살을 하나 꺼내었다. 깃에도 얼음이 끼어 딱딱하다. 손에 힘을 주어 얼음을 떨쳐 버리려고 하자 깃까지 얼어 바삭거리며 부셔진다. 몇 개 더 확인해본 친첸은 몸을 일으켜 모인 장수들에게 묻는다. “전날 누가 전통을 책임졌느냐?” “저입니다.” 정직해 보이는 중년 장수가 손을 들자 친첸은 혀를 찼다. “소보(昭甫)가? 도통 실수를 안 하던 자네가 왜 이런 일을 저질렀는지. 아무튼 활을 못 쓰게 되었군. 이래선 얼음을 녹인다 하더라도 깃이 제대로 세워지지 못한다.” “죄송합니다.” “병사들을 훈계시켜라.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예.” 고개를 숙이는 소보장군의 머리를 물끄러미 보던 친첸이 갑작스럽게 활을 들어 그의 머리를 겨누었다. 깃이 망가지면 멀리 있는 것을 맞추긴 어렵지만 이런 근거리는 쉽다. 하지만 날카로운 눈의 장수가 팔을 들어 활을 내린다. 이 일을 눈치채지 못한 소보장군이 병사들을 훈계하기 위해 물러나자 친첸이 마고에게 짧게 말했다. “건방진 놈” “소보는 정직한 사내입니다. 정직하며 충직한 자를 죽이는 것은 재앙을 부르는 법입니다.” “그래서 네 놈이 건방지다는 거다. 마고.”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마을로 가서 활을 다시 보시겠습니까? 아니면 창으로 멧돼지 사냥이나 할까요?” 마고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친첸에게 다시 물었다. 자신이 아무리 노려보아도 아무런 감정의 변화가 없는 마고에게 지친것인지 질린 것인지 친첸은 그냥 고개를 돌렸다. 마고역시 아무말 하지 않자 친첸은 아무 말 없이 활을 던지고 창을 하나 들었다. 그 모습을 본 마고가 장수들에게 외쳤다. “마을로는 가지 않는다. 창을 챙겨 몰이사냥을 할 것이다! 모두 준비해라!” 단검과 창, 간단한 밀 빵을 챙긴 친첸은 마고에게 소리쳤다. “마고, 넌 남쪽으로 간다.” “...혼자서 괜찮으시겠습니까? 여긴 난곡과 맞닿은 곳입니다.” “산 짐승들은 위험하지 않다. 사람이 위험하지.” 친첸은 의미 있는 말을 던지고는 혼자서 북쪽을 향해 걸어갔다. 다른 장수들이 마고에게 물었다. “괜찮으실까요?” “고집 센 분이니 안 따라가는 것이 좋겠네. 북쪽은 인가와 가까운 곳이니 괜찮을 거야.” “그럼 마고님은 ?” “남쪽으로 가야지. 그렇게 말씀하셨지 않은가.” 마고는 남은 장수들과 함께 남쪽으로 출발했다. 항상 있는 사냥이라 모두들 익숙해 졌지만 그래도 모시는 자를 홀로 남기고 다른 방향으로 간다는 것은 위화감을 느끼는 법이다. 마고는 잠시 뒤를 바라보았다가 다시 앞을 향해 걸어갔다. 어차피 이곳에 온 것은 아무도 모르니 암살의 위험 따위는 없다. 게다가 암살 따위 당하실 분도 아니다. 눈을 뜨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유의 기척이 들렸다. “부르셨습니까?” “오게. 마유.”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와 하류사에게 다가가지만 왕은 꼼짝을 하지 않고 창을 내다보았다. “늑대 우리에 들어간 제비에게서 연락이 왔더군.” “예.” “4왕자가 아이를 가졌다는데.” “예.” “앞으로 어떻게 될지 자네 의견을 듣고 싶어.” 마유는 고개를 숙였다. 내 뜻을 말하라는 것이 아니다. 왕씨의 생각에 의견을 묻는 것이다. 하류사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턱을 괴고 중얼거렸다. “4왕자는 내가 볼 때 왕위를 노릴만한 유력한 놈이야. 물론 위치만이지. 놈은 위를 바라보지 않아. 하지만 그 옆에 14왕자 태진이 위를 바라본다. 둘이 합쳐져 있기 때문에 위험한 놈이라 말할 수 있는 거지. 그런데 4왕자가 아이를 가지는 바람에 제후가 되어 왕성에서 나가게 되었다. 머리가 집을 나가는데 꼬리가 안나갈수 있을까?” “태진이 따라나설 것이란 이야기십니다.” “그렇지.” 하류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머리보다 영리한 꼬리인 태진이 과연 자신의 머리를 아무 곳에나 잠자리를 펴줄 것 같지 않아. 지금 쯤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을 테지. 하지만 금이 세워진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시기인 이때, 도성 근처의 성은 모두 개국공신들이 자리 잡고 있어 손을 댈 수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태진이 쉽사리 포기할까?” “태진은 위를 바라보는 자라 하셨지 않습니까?” “절대로 포기 할 리가 없어. 아마도 들어선 놈을 내치고 들어갈 놈이다. 여기서 가장 큰 문제는 그런 성을 두개, 그것도 근접한 거리에 두어야 한하는 것이지. 제후의 성에 왕자가 머문다는 것은 제후에게 반란의 기운이 있는 것으로 볼 테니까 하나는 태진이, 하나는 레이첸이 가질 것이다.” “매우 어렵겠군요. 두개의 성, 근접한 거리에 도성근처라.” “그리고 꼬리는 역시 꼬리일 수밖에 없는 거지.” “...예?” “지금쯤 자신의 머리에 한계를 느낄 것이란 이야기다. 이럴 때야말로 의심 많은 꼬리 곁으로 누군가 붙일만한 기회라 생각하는데.” 마유는 잠시 말을 끊었다. 역시 꼼짝도 하지 않고 자신의 말을 기다리는 왕씨를 바라본다.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 창밖에는 무엇이 있을까. 좀더 기다리다 마유는 말을 꺼냈다.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태진이?” 눈동자만, 그 깊고 검은 눈매의 날카로운 시선만 움직여 마유를 본다. 움찔한 마유는 자신이 무엇인가 잘못한 것이 아닐까 생각하지만 전혀 그런 것 같지 않다. “아닙니다. 붙어야 하는 제비가 말입니다.”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해서 물어본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적당한 장수를 못 고르겠어. 그 놈 곁에 붙어있으려면 적당히 똑똑해야하고 적당히 강해야해. 그런데 지금 그런 장수는 없군.” 적당한 장수들은 모두 죽어버렸거나 지금 막 자라나고 있는 신생장수들이다. 아직 체 피지도 못한 그들을 뽑아 버릴 수 없다. 성장하여 그것이 범이 되는지, 개가 되는지, 아니라면 용이 탄생할지, 모르는 일이니까. 그렇게 시급한 일이 아니다. “그러시다면...?” “하지만 그들을 이용할 수 있는 기회가 이번 말고 다시 오지 않을 것 같아 아쉽군. 사람을 붙일 수가 없다면 적어도 바깥에서라도 감시가 수월한 곳으로 옮겨주고 싶은데...” “...성을 만들어 주시겠다는 거군요.” “그래. 우리 쪽에서는 도성 근처의 성하나, 둘 비우게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가.” 갑자기 하류사가 몸을 일으킨다. 옷자락소리에 마유가 고개를 약간 들자 왕씨의 몸에서 팔랑 팔랑 수많은 나비가 날아간다. 나비가 앉아있었나. 그래서 꼼짝하지 않으신 건가. “오래도록 앉아 나비를 즐기는 것도 즐겁지.” 하류사는 기지개를 피며 창문을 닫았다. 미쳐 못나간 나비 한마리가 문가에서 하늘거린다. “시기란 백만의 군사를 대신해주기도 한다..” “어디로 하실 겁니까?” “그걸 이제부터 생각하려고 하는데 우리 좌보님이 늦으시는군. 여관에게 오늘 난곡으로 제비를 날리게 했으니 조만간 돌아오시겠지.” 하류사가 손가락을 들어 나비를 따라간다. 도망치던 나비도 얼마 지나자 힘이 드는지 손바닥에 앉아 날개를 쉰다. “봄이면 성은 빈곤하고 부산스럽지만 군은 활동하기 쉬운 때다. 4군 정도를 뽑아놓으라.”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유가 고개를 숙이며 물러났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동시에 하류사는 펼쳤던 손을 세차게 주먹을 쥐었다. 손바닥으로 빠져나온 날개가 파닥파닥 거리는 것도 잠시 곧 조용해진다. “...시기를 놓치면 안 되지. 나도, 나비인 너도.” 바닥으로 오색의 날개가 따로 따로 팔랑거리며 떨어진다. 너무도 아름답고 비장하게 떨어진다. 죽음으로만 보여줄 수 있는 비무(悲舞)다. 물끄러미 그 모습을 보는 하류사의 검은 눈매는 아무런 감정이 담기질 않았는데 회색 비단의 여관은 조용히 들어와 슬픈 눈으로 나비를 주워나간다. 한참동안 집을 내려다보고 있던 자휼은 이상하게 여기고 고개를 갸웃했다. 다들 나갔나? 혹시... 자례에게 문제가 생긴 건가? 아무리봐도 집안에는 동자 외의 어떤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벌떡 일어나 마을로 구르듯 내려갔다. 헉헉거리며 문에 다다르자 밀어본다. 문은 열려있다. 잠시 망설이다가 문을 두드리니 잠시 후에 조그만 아이가 나온다. 아이는 자휼의 이곳 저곳을 바라보고는 무섭다는 듯 문속으로 반쯤 숨은후에 묻는다. “무슨 일이에요?” “아...저기 ...” 전에 왕씨께서 뭐라 하셨더라. -유번께선 자네 스승인 유견의 동생일세. “그래, 유번님을 만나려고 하는데?” “주인님께서는 잠시 여행을 떠나셨어요. 뭐라 전해드릴까요?” 점점더 문쪽으로 들어가버리는 동자를 보고 자휼은 그만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어린아이에게는 확실히 무서워 보일것이 분명하다고 스스로도 느꼈기 때문이다. “너도 잘 지내렴.” “?“ 어리둥절하는 동자를 뒤로 하고 자휼은 급하게 다시 언덕으로 올라갔다. 잠시 여행이라. 그 말은 상이 나지 않았다는 뜻이니 동생은 무사한거겠지. 안도의 한숨 내쉬다 문득 고개를 드니 눈앞에 선명한 자신의 발자국이 보인다. “아차!” 잊고 있었네. 나 지금 시험 치르고 있는 거지. 등골이 오싹한 느낌이 번뜩 들어 황급하게 산으로 뛰어올라간다. 새벽에 개힘이라니 그 폭포에서 얼어 죽으라고. 난 못해. 헉헉거리면서 어느정도 난곡으로 돌아오자 호흡을 가다듬으며 머리를 굴린다. 유견님은 분명 내가 이곳으로 올 거라 생각했을 거야. 물론 그 점을 내가 생각 안한 것은 아니지만 몸은 그렇게 움직여 주질 않는 걸 어떡하란 말인가. 자휼은 눈앞에 보이는 언덕 아래로 몸을 숨겼다. 휴, 하는 한숨을 내쉰다. 아마도 유견은 분명 이쪽으로 오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멀어져야 하겠어. 이 곳과 반대인 서쪽으로 갈까하다가 망설인다. 혹시 유견이 자신의 이런 계산까지 읽고 있고 있지는 않을까 한다. 잠시 주저하다가 전혀 상관없는 북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북쪽숲은 난곡에서 가장 큰 절벽이 있는 곳으로 사람들이 잘 오지 않는 곳이다. 당연히 조용한 곳을 좋아하는 큰 짐승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밤에는 들어가질 말라 유견이 경고했던 곳이였다. 북쪽으로 들어간지 얼마 되지 않아 근처에서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 신경을 곤두세웠다. 이상한 소리군. 북쪽에서 사냥을 하는 사람은 못 보았는데. 바로 짧지만 분명한 비명소리가 들려 자휼은 일단 그쪽으로 뛰어갔다. 검을 가지고 있으니 괜찮을 거야. 새끼를 가진 호랑이나 휴면기의 곰이 아니길 바라는 수밖에 없지. 아찔한 정신에 친첸은 눈을 감았다 떴다를 반복했다. 하지만 쉽사리 정신이 들지 않는다. 그 만큼 충격이 컸다. 귀가 윙윙 울리는 소리에 고개를 흔든다. “제기랄.” 손에는 아직도 나뭇가지가 잡혀 있다. 운도 지지리 없군. 하필이면 썩은 가지를 잡았다 이거지. 아차, 이럴 때가 아니지. 애써 몸을 일으키자마자 쉭쉭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온다. 옆에 떨어져 있는 창을 잡아 몸을 일으키고 거대한 나무를 등에 져 방패로 삼는다. 이 정도면 정면에서 오는 공격은 막아낼 수 있다. 몸을 낮추고 앞을 노려본다. 풀숲에서 뭔가 튀어나왔다. 쉭쉭거리는 입에서 침이 흘러나오고 날카로운 송곳니가 두개 올라와있다. 멧돼지다. “한낱 짐승 주제에 날 어찌해보려고?!” 친첸은 돌격해 오는 멧돼지에게 힘껏 창을 던지고 단검을 빼들었다. 창은 정확히 등에 맞았지만 멧돼지의 속력은 줄지 않는다. 그대로 돌격해 내게 부딪친다면 상처가 크다. 정면 공격을 막을 수 있다는 말은 취소다. 친첸은 상황판단을 한 그 순간 재빠르게 몸을 피했다. 그대로 나무에 밖아 버리면 좋으련만 몸을 돌리는 속도도 빨라 욕이 튀어나온다. 얼른 일어나 앞으로 뛰어 도망간다. 낮은 나무가 있다면 올라가는 것이 좋겠다. 하지만 그런 나무는 좀처럼 없다. 모두 다 거대한 나무들뿐. 뒤를 돌아보니 바로 뒤까지 따라 붙은 멧돼지가 보인다. 등골이 오싹하나 기분 나쁘지는 않다. 오히려 묘한 쾌감이 느껴진다. 공포가 즐거운 것이다. 쌓인 눈에 익숙하지 못한 다리가 지치자 뒤에서 충격이 올 것을 대비해 몸을 움츠린다. “...?” 아무런 일이 벌어지지 않자 고개를 돌린다. 왜 그러지? 멧돼지가 없다. 이상하다고 여긴 친첸은 몸의 긴장을 풀며 뛰어 온 길을 되돌아가보았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바로 멧돼지가 다른 사람을 따라 가고 있는 것이 보인다. 큰일이군. 아마도 아까의 나와 같은 생각을 한 것인지 나무를 등진다. 바보로군. 저렇게 하고 난 도망쳤단 말이다. 타당하는 소리가 숲을 흔들며 나무에 피었던 눈꽃이 떨어진다. “...!” 맙소사 힘으로 버티고 있군. 미쳤나? 힘으로 당할 수 있을 리가... 하지만 생각과는 다르게 그는 점점 멧돼지를 밀어내고 있었다. 그 괴력에 놀란 친첸은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자신보다 마른 체구에 몸도 그다지... 나보다 작은 것 같은데. 게다가 외팔이잖아. 어떻게 저런 몸에서 괴력이.. 목과 손에 힘줄이 불거져 나올 정도로 힘을 쓰던 사내가 잡고 있던 어금니 하나를 갑자기 돌렸다. 빠각하는 소리가 들리며 멧돼지가 미친 듯 뛴다. 그래도 어금니를 놓지 않던 그가 막판에 힘을 주어 그것을 뽑아버리고 뒤로 물러나자 멧돼지는 그 고통에 몸부림치더니 입에 피를 흘리며 마지막으로 돌격해온다. 사내는 검을 뽑아들고는 마주 달려가 측면으로 스쳐 지나간 후 몸을 돌린다. 얼핏 몇 걸음 더 걷던 멧돼지가 목에 피를 뿜으며 쓰려져 버린다. “...멋지군.” 친첸의 감상과는달리 허탈하게 자리에 앉아 성한손으로 자신의 어깨를 친다. 친첸이 그에게 다가가자 그는 친첸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며 경계한다. “굉장하군. 그런 몸에서 그런 힘이 나오다니. 놀라워.” “...새끼가 있는 어미였소. 먹을 것을 구하는 사냥꾼들도 어미는 건들이지 않소.” 자휼은 피가 흥건한 손을 눈에 문질렸다. 찜찜하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라지만 저 멧돼지도 그저 새끼를 지키기 위해 싸운 것뿐이다. 마지막까지 덤벼들지 않기를 바랐는데. 검을 털자 피가 눈 속으로 흩뿌려진다. 왠지 서글프다. “어쨌거나 자네는 내 생명의 은인이니 보답하고 싶군.” “그렇다면 다음엔 새끼 있는 어미를 사냥하지 마시오.” 자휼은 검을 다시 집어넣으며 중얼거렸다. “어미가 죽었으니 그 새끼들도 무사하지 못 할 테요. 결국 ...” “내가 어미와 새끼를 다 죽였다는 건가?” “죽인 것은 나요.” 자휼은 앞으로 걸어갔다. 친첸은 그제야 그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외팔이는 아니군. 한쪽 팔을 못쓰는 것뿐이야. 다리까지 절뚝이는데... 게다가 자세히 들여다보니 가린 반쪽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진 것 같다. 이런 이런. 완전히 불구가 아닌가. 사냥꾼 같지 않군. 그렇다고 병사나 장군 같지는 않아. 그냥 산을 동반해 살아가는 촌락민인가. 그렇게 보기엔 아까 검을 사용하는 법이나 그 힘이 놀랍다. 친첸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지 그는 검을 눈에 문질러 닦더니 몸을 일으켜 어디론가 가려고 한다. 친첸은 그의 팔을 잡아 멈추게 했다. 가까이에서 본 그의 성한 눈에서 정안족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품는다. 동시에 마고와 비슷하다는 느낌도. “왜 잡으시오? 나는 바쁘오.” “내 목숨을 구해주었으니 꼭 보답을 하고 싶네.” “필요 없소.” “그러지 말고 이걸 받아주게.” 친첸이 가지고 있던 단검을 풀어 자휼에게 건넸지만 자휼은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오. 난 여진인과 엮이고 싶지 않소.” “...정안족이군.” 반신에다가 갈색 머리에 가까워 몰랐는데 검은 눈동자에서 그가 정안족이라는 것이 확인한다. 정안족 치고는 꽤나 건장한 몸이군. 물론 우리 여진인에 비할 바가 안되지만. 일순 자휼의 몸을 살피던 친첸은 다시 권유했다. “그렇게 매정하게 내 맘을 물리지치 말게. 내 작은 성의를 받아 주는 게 어려운가?” “미안하오.” 자휼이 휘적휘적 앞으로 절뚝거리며 걸어가자 친첸은 알 수 없는 오기가 생겼다. 그를 따라 걸으며 다시 한번 권유한다. “좋아. 받지 않아도 좋네. 하지만 자네 이름은 알려주게.” “다시 만날 일도 없을 테니 이름 따위 필요 없소.” “이보게!” 친첸은 자휼의 어깨를 잡았다. “나는 빚지고는 못사는 성격이네. 그런데 검을 주어도 싫다 하니, 지금 나로서는 갚을 여건이 안 되는구먼. 그러니 이름이라도 알아 훗날을 기약해야겠네.” “이름을 알아도 난 방랑하는 유객이니 인연은 힘드오.” “거 참.” 친첸은 다시 자휼의 앞을 막아섰다. “그래도 좋아. 이름을 알려주게.” 몇 번이나 친첸을 피해 이리저리 발길을 돌리던 그가 얼굴이 점점 파랗게 된다생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얼마 가지 않아서 옆구리를 쥐고 바닥에 주저앉는다. 아파하는 그에게 다가가며 치첸이 다시 물었다. “어디 다쳤는가?” “아니...” 몸을 돌리는 그를 잡아 옷을 들추어보니 새파랗게 멍이 들어 부어있다 아까 멧돼지와 힘겨루기를 하다 스친 것인가? “내게 기대게, 일행이 있는 곳까지 가면 될 것이야!” “필요 없소, 게다가 난 지금...” “금방 보내주겠네. 은인을 이렇게 버려두고 갈수 없지!” 친첸이 강력하게 말하며 자휼을 부축하고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잠시 자휼은 뒤를 돌아 유견의 모습을 떠올렸지만 일단 내려가서 붕대라도 감고 다시 올라오는 것도 좋다고 생각했다. 62 농부출신 사내지만 그 어머니의 보국교육으로 인해 난세의 영웅이라 불릴수 있었던 사내. 여진이 금을 세우고 거란의 송을 몰아내자 송의 잔존세력들은 남과 북으로 피신했다. 그들은 남송과 북송을 세웠으나 금은 그것을 용서하지 않아 계속 군사를 보내었고 아직도 그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유능한 장수였다. 긴 침묵을 깨고 이상하다는 듯 을노가 중얼거렸다. “내가 듣기로는 악비는 이미 독살당해서 호북의 동맹을 깼다고 들었는데? 아직 살아있었나?” “하하, 잘 알고 계시군요” 악운이 어깨를 으쓱했다. “맞습니다. 아버지는 독살당하셨습니다. 금의 압박의 이기지 못한 송의 관리들이 아버지를 독살했습니다. 어머님도 그때 돌아가셨구요. 다행히 난 그때 난 할머님 밑에서 자라 화를 피할수 있었지요.” “그렇다면 지금 호북은 누가 지휘하지?” “하하 비밀입니다만 저희 할머님이 지휘하십니다. 일단 아버지는 살아계신걸로 되어있지요.” “뭐. 그 대단한 마나님께서라면... 호북은 안전하겠군.” 을노의 이해에 악운이 자례를 치켜 올렸다. 생각보다 가볍지만 길이 험해 만만하지 않다. 게다가 아까 이를 드러내며 싸웠던 것을 모두 잊어버렸는지 업히자 마자 바로 잠들어 버린 것 같다. 속편한 연인이로다. 을노가 앞의 눈을 먼저 헤쳐 가며 다시 묻는다. “그런데 어째서 산적 따위를 하고 있는 것이야? 자네는 호북의 후계자 아닌가?” “...에이. 일단 아버님이 죽었으니 장례는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 “제가 대신 죽었다고 했습니다. 전 이미 죽은 사람이라 거기서 살수는 없었죠. 할머님께서는 제게 좀더 나이가 들면 아버지의 역을 하며 호북을 이어 받으라 하셨습니다.” 주룩 또다시 미끄러지는 아이의 몸을 다시 추킨다. 너무 작아서 자꾸만 등에서 미끄러진다. “할머님께서는 조용한 시골에 절 보내주셨는데...누군가 눈치를 챘더군요. 저에게도 암살자가 왔죠. 결국 금나라로 도망오긴 했는데... 살기도 막막하고...그렇다고 할머님의 보호를 받을수도 없고... 뭐 을노장군도 아시지 않습니까. 망국의 서러움을.” “...” “하지만 ....정안은 요동에 큰 성을 하나 가졌다고 들었는데?” “아아, 대원(大元) 말인가. 그래, 일단은...” “을노 장군.” 죽은 듯이 악운의 등에 업혀 있던 자례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그는 한족이니, 혈족으로 여기시면...” “아아 그렇군. 내 실수야.” 을노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다물었다. 그런 태도에 악운이 섭섭하다는 듯 눈웃음쳤다. “뭡니까. 절 믿지 않으신다는 거군요. 섭섭한데요. 내 등에 업고 가는 사람이 날 못 믿어하다니.” “속상하게 생각하지 말게. 자네가문이 남송을 등지고 우리와 손을 잡았던 것을 잊고 있지는 않네. 하지만 요동 문제는 혈족 중에서도 일부만 알고 있는 중요한 것이야. 내가 잠시 실수한것이지.” “그럼 내 등에 있는 연인도 모른답니까?” “자례도 몰라. 아마도 자네가 알고 있는 정도는 알겠지. 그냥 내가 중요한말을 하는 것 같아 막은 거야.” “호인(好人연인)이 아니라 호인(豪人:영웅)이였지.” 악운이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보다 얼마나 더 가야 합니까? 이거 등은 가볍지만 발이 무거워 힘들어지는데요.” “자네 때문에 발목이 더 부었으니 책임을 져야지. 그리고 거의 다 왔네.” “거의 다 왔으면 내려주십시오” 자례가 고개를 들었다. 악운은 잠시 을노를 바라보았고 을노가 고개를 끄덕이자 자례를 땅에 내려놓았다. 땅에 내려온 자례는 옷을 털더니 악운에게 말했다. “악운은 돌아가십시오. 여기부터는 제 개인적인 문제라 알려드리고 싶지 않군요.” “문 앞까지 와서 물 한잔 안주고 내쫓기야?” “다음에 정중하게 인사를 먼저 받는다면 차를 내드리지요.” 자례의 말에 악운은 어깨를 으쓱했다. “알았어. 알았어.” 하지만 악운은 바로 등을 돌리지 않고 두 손을 모으고 무릎을 땅에 대고 인사했다. 큰절. 어리둥절하면서도 자례는 어린 나이고 을노는 동년배라 몸이 자연스럽게 맞절을 하기 위해 숙여진다. 고개를 숙이면서도 자례는 이게 아닌데. 라고 중얼거렸지만 몸에 익혀진 인사는 쉽사리 바꿀 수가 없다. 악운은 생긋 웃으며 진지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럼 다음의 인연을 바랍니다.” “악운께서도 살펴 내려가십시오.”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어째서 한족인 악운이 정안족의 인사를 하는 것이야. 자례는 혼란스러워 하면서도 같이 웃어보였다. 이래서 어떤 것이든 몸에 배이면 무섭다는 것이다. “그런데 말입니다. 을노장군님.” “…?” “을씨가 아니겠지요? 아마도 성씨가 따로 있는 것이겠지요?” “그렇지. 정안은 을씨는 없네. 을지씨는 있지.” “그렇군요. 그렇다면 을노장군의 성씨는 무엇인지 알아도 괜찮겠습니까?” “눌현성의 송씨네. 소나무씨라고도 하지.” “...송이라... 혹시...” “..? “ “...아닙니다.” 악운은 벌떡 일어나 활기찬 표정을 지었다. “그보다 하산하실 때 조심하시길. 보물산 곡양에 아무래도 여진의 귀족 씨가 사냥을 온 모양이 덥니다.” “자네 혹시 거기서 ...? " “아뇨. 아직요. 하지만 가볼 생각입니다. 모두들 무장을 한 것으로 보아 어리바리한 인물은 아닐 것 같으니 조심하십시오.” “자네야 말로 조심하게.” “저야 일인걸요. 그럼.” 손을 흔들며 뛰어 내려가는 악운을 보고는 둘은 한숨을 쉬었다. “정말 이해 못하겠는 장수군.” “혼란스러운 사내입니다. 결국은 망인(妄人거짓된 자)이 아니라 망인(望人멀리,미리보는 자) 이였던 것이죠.” “아까 너무 한 것이 아니었을까.” “아뇨. 동맹군이었기는 하나 혈족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그를 믿을 수 있는 확증이 생기기 전까지는 안 됩니다. 그가 악비의 아들이라면 이해할겁니다.” 자례는 절뚝이며 을노의 어깨에 손을 얹어 기댔다. “을노께서 아시는 비밀은 혼자만 간직하셔야 하는 중요한 것입니다. 장군께서는 왕씨 직속이라 주위 사람들이 같은 비밀을 전부 알고 있어 잠시 잊으신 것 같은데 장군이 아시는 대부분의 이야기는 그 누구도 모르는 비밀입니다.” “...그렇구나.” “물론 내게도 하지 마십시오.” “넌 혈족이잖아.” “그래도 요와 금의 관직을 받았던 몸입니다. 믿으면 위험할지도 모르는 과거죠. 장군의 비밀은 혈족에게도 하시면 안 됩니다. 왕씨께서 직접 말씀해 주시는 것이 아닙니까.” “알고 있다. 하지만 넌...” 절대 그럴 아이가 아니야. 하지만 을노는 그냥 말하지 않았다. 네가 위험해서가 아니야. 너도 자휼처럼 혈족의 일에 깊게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닐까. 뭔가 지금 앞길에 불길함을 느끼고 있는 것이니? 자례를 부축하고 천천히 걸어갔다. 이대로 이십여 분만 걸으면 자휼을 만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너도 네 형도 이미 혈족의 일에 깊게 들어가고 말았어. 피하기엔 너무 늦었다. 자례. 결국 화선을 부인으로 올리는 일은 무산되고 말았다. 태진이 그렇게까지 말하니 어쩔수 없었다. 아침에 첩지를 내릴까 말까 하며 두 번이나 사람을 불렀지만 결국 물리고 말았다. 화선이 엄청 화를 내겠군. 이럴 땐 난감하단 말이야. 책을 뒤적 뒤적이던 레이첸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게 책은 안어울린다니까. 이름만 쓰면 되는 것 아닌가. 무료한 시간이 흐르며 할일없는 하루가 또 시작되었다. 배분이 낮았다면 높은 왕자들에게 가서 잘보이는 노력이라도 하건만, 1왕자는 죽었고 원체 2왕자와 친하고 3왕자는 제후가 된지 오래이다. 그렇다고 다른 왕자들이 자신을 찾아오기엔 자신에 대한 소문이 무척이나 살벌해 아무도 오지 못한다. 하긴 그것이 편하긴 하지만. 시종을 물리치고 자신의 궁을 이리저리 거닐며 화병이나 수석을 돌려보거나 바로 놓던 레이첸은 문득 화병에 그려진 여인을 보고 누군가를 생각해낸다. 통통하고 귀여운 여인. 언제인지도 기억나지 않는 옛날에 만난 비빈. 그렇지. 화선에게도 못가는데 오늘은 간만에 예전의 비빈이나 한번 볼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궁 안을 한가롭게 거닐던 레이첸은 연못근처까지 왔다. 그냥 지나치려고 하다가 문득, 흔들리는 물을 바라보니 누군가 떠오른다. 그러고 보니... 건곤궁(乾坤)은 어떻게 되었지? 이름 그대로 하늘과 땅을 가리켜, 황제의 개인 처소로 이용되었던 궁전. 황궁에 세워진 많은 궁전중에서도 유독 그 화려함과 정교함을 뽐내는 궁전. 거니는 길은 북해의 하얀 자갈이 깔리고 연못 건호(乾浩)는 뱃놀이를 즐기며 진주와 수정으로 그 강바닥을 이룬다. 정원과 연결된 성안에 만들어 논 숲 곤료(崑聊)에는 진귀한 동물들이 가득했다. 정원은 사철 내내 꽃을 피웠고 나비가 그 위를 날아다니는 모습을 자신을 신선이라 느끼게 만들었다. 황제의 개인처소는 누구의 소유도 될 수 없는 것이였지만 황제는 그에게 주었었다. 그 뿐인가, 그에겐 나라를 살수 있을만한 보석이며 비단들이 내려졌지만 단 한번도 그것을 사용하는 것은 못 보았다. 뭔가를 원하는 일이 없었던 이상한 사내. 시간이 가기만을 기다리는 것만 같았다. 난 그 무료함을 싫어했다. 숨을 쉬는 인형 같은 그의 정적이 죽음보다 숨 막혀, 그를 싫어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이쪽에서 소리쳐도 꼼짝하지 않는 그 철벽같은 모습이 너무도 속이 상해 그를 미워했다. 아무리 절경인 산이라 할지라도 메아리가 없다면 오르고 싶은 마음이 있겠는가. “...건곤궁으로 가볼까.” 레이첸은 자신의 성을 나가 다른 궁으로 길게 뻗어 있는 회색돌로 잘 만들어진 길을 걸어갔다. 그가 죽은 후 건곤궁은 그대로 봉쇄가 되었다. 일설에는 그의 원귀가 그곳을 돌아다닌다는 소문이 있었고 건곤궁 입구를 지키는 병사들도 속옷을 입은 사람의 그림자가 이곳저곳을 돌아다닌다는 이야기를 하곤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얀 그림자를 보고 뛰어 들어갔던 병사들이 물에 빠져 죽은 시체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물론 황제는 화를 내며 입단속을 시켰지만 소문이라는 것이 입단속을 시킨다고 조용해지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아무튼 원귀 덕인지 소문 덕인지 건곤궁을 노리던 황후나 왕비들도 모두들 조용해졌고 그대로 봉인된 건곤궁은 그 이후 열리지 않았다. 적어도 그렇게까지 알고 있었다. 혼자 터벅터벅 걸어 건곤궁 쪽으로 향해 걸음을 옮긴다. 건곤궁은 궁 안에서도 가장 깊숙이 있어 한참을 걸어가야 한다. 한참을 걸어 건곤궁의 문을 볼수 있었지만 소문처럼 누군가 경비를 서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한참을 그대로 서있자 병사 몇몇이 조금 떨어져 근처를 지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무래도 원귀 이야기가 건곤궁을 지키고 있는 모양이군. 조금 더 기다리자 교대하는 병사들이 보였다. 아무리 봐도 몰래 들어갈 틈은 없어 아쉽지만 그냥 돌아섰다. 돌아걸어가지만 흔들리는 바람에 짙은 꽃향이 흘러온다. 겨울이라지만 건곤궁은 어느 때라도 꽃향이 풍기는 곳이니까. “...동백이던가.” 이 향은 동백이지. 그래. 꽃바람. 지독히 맛없던 음식과 성격 냉랭한 녀석도, 좁쌀도. “출입패...!” 레이첸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출입패 건이 있었지. 나 그것을 물어보려고 했었다. 아차 하며 레이첸은 다시 뒤를 돌아 이번엔 2왕자의 궁쪽으로 향한 길을 뛰어갔다. 또 잃어버린 것은 없는지 머릿속을 굴렸지만 지금 생각나는 것은 출입패 뿐이다. 건곤궁은 다음에 보지.뭐. 어깨와 허리를 돌아 단단하게 붕대를 조이는 손길이 굉장히 익숙하면서도 날카로워 자휼은 등을 긴장시킬 수밖에 없었다. 자신과 비슷한 밝은 갈색머리의 이 남자는 작지만 매 눈을 가지고 있다. 한족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여진족 같지도 않다. 그렇다고 거란족 같지도 않는데... “다 됐습니다.” “수고했다. 마고.” 친첸이 대신 대답하자 자휼은 얼른 일어나 윗옷을 걸쳤다. 마고라는 그 사내가 물러나고 이곳까지 자신을 끌고 온 사내가 자휼에게 차를 건넸지만 자휼은 고개를 저었다. 역시 거절할 것 그랬군. 친첸이란 이 사람, 아무래도 왕궁과 관련이 있는 자 같다. “이 사람은 마고일세. 내 친한 소꿉친구라고 할 수 있지. 그러고 보니 자네 둘, 머리색도 그렇고 키도 비슷한 게 많이 닮아 보이는군?” 그 말에 둘은 물끄러미 서로를 바라보았다. 정말 닮았다. 얼굴이 닮았다는 것이 아니다. 묘하게 둘의 분위기가 비슷하다. 머리색이 비슷해서인가. “비슷한 머리와 눈을 가져 그런가 봅니다.” 마고가 대답하며 먼저 시선을 돌린다. 마고 역시 검은 눈매를 가지고 있다. 자휼이 고개를 끄덕이며 간단하게 인사했다.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저런 날이 어두워졌는데 쉬어 가시지 않고?” “아뇨.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 자휼이 장막을 걷으며 나와 버리자 마고와 친첸이 따라 나왔다. 자휼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별을 말하자 친첸이 다시 한번 자휼을 막아섰다. “이것을 받아가게.” “...” 역시 자휼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친첸은 목에서 작은 목걸이를 빼내어 자휼에게 던졌다. 무심코 날아오는 것을 낚아챘지만 다시 돌려주려고 하자 친첸은 바로 막사로 들어가 버렸다. 결국 주지도 받지도 않는 애매한 상황이 되자 마고가 말했다. “내가 마중을 나가지요.” 마고라는 사내가 자휼과 숲 쪽으로 걸어갔다. 한참을 걸어 막사와 어느정도 떨어지자 아무 말 없이 걷던 그가 물었다. “무랑이라는 것은 지나가는 사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알면서 왜 당신의 주인에게 말하지 않았지요?” 마고는 그냥 자휼을 바라보았다. 자휼은 그 시선을 외면했다. 그를 계속 바라볼수록 이상한 감정이 든다. 이상하다. 이상하다. 이 사람 도무지 어떤 혈족인지 알 수가 없구나. 기분 나쁘면서도, 경계심이 들면서도 이상하게 안도감도 생긴다. 너무나 상반되는 감정이 혼란스럽다. 결국 자휼은 아까부터 생각하고 있던 것을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신 혹시...?” “... 과연. 내게도 정안족 특유의 분위기가 풍기나 보군요. 비록 절반이지만.” “혼혈?” 자휼이 더욱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혼혈이라니. 정안족의 혼혈이라니. 그것은 어려운 일이다. 여인이든 사내든 다른 혈족과 결혼을 하는 것은 비난을 받는 짓이다. 사내는 다른 혈족의 여인을 취하지 않고 여인은 다른 혈족의 아이를 낳지 않는다. 그것이 정안을 특별하게 만드는 하나의 전통이다. 마고는 고개를 갸웃해보였다. “당신도?” “..나? 난... 바...아니, 아니오.” “...그렇군. 그럼 여기서 이만.” “아, 잠깐! “ 자휼이 그를 향해 무엇인가를 던지자 마고는 재빠르게 낚아챈다. 그것은 친첸이 자휼에게 준 목걸이였다. 자휼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뒤를 돌았다. 마고는 잠시 목걸이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등을 돌려 사라졌다. 자휼은 그가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그는 내게서 자신과 같은 공통점을 찾아내고 싶었는지 몰라. 내가 순혈통이라 실망했을지도. 등을 돌려 사라지는 그의 등은 아까처럼 이상한 분위기가 흐른다. 당장이라도 부셔질 것 같은, 터저버릴거 같은 불안감이다. 반괴(半乖:배신으로 떨친 조각)라고 불린다. 정안족의 혼혈들은 정안족에 포함될 수가 없고, 그렇다고 다른 반쪽의 피에 속할 수도 없다. 어디에든 그 소속이 불분명해 많은 제약이 따르는 불행한 태생. 스스로 잘나 성공하거나 다른 피에 들어가야 한다. 정안족은 혈족에게 둘도 없이 다정다감하지만 반괴에게는 한없이 냉정하다. “...고생했겠군.” 혀를 차던 자휼은 숲 깊숙이 들어갔다. 아직 유견과 내기 중임을 잊고 있지 않았다. ------ 단설의 역주는 인용과 개인적 견해가 들어간 글입니다.(맹신(盟信)사양. 도용씁쓸)-------- 주 - 악비 자 붕거(鵬擧). 농민 출신이지만 금(金)나라 군사의 침입으로 북송(北宋)이 멸망할 무렵 의용군에 응모하여 전공을 쌓았으며, 남송 때가 되자 무한(武漢)과 양양(襄陽)을 거점으로 후베이[湖北] 일대를 영유하는 대군벌(大軍閥)이 되었다. 당시 중앙에서는 재상인 진회(秦檜)가 화평론(和平論)을 주장함으로써 주전파(主戰派)인 군벌이나 이상파(理想派)의 관료들과 분쟁 중이었으나 1141년, 군벌끼리의 불화를 틈타 그들의 군대를 중앙군으로 개편하였다. 이때 중앙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은 악비는 무고한 누명을 쓰고 투옥된 뒤 살해되었다. 이런 형식적인 이야기 보다는 등에 진 정충보국이라는 문신으로 유명한 한족 영웅 악비는 중국의 중화사상을 대표하는 영웅으로 70년대 출생한 중국인들의 일본배척 중화 사상의 영웅이다. (우리나라로 따지자면 반공시대의 이승복( 공산당이 싫어요) 정도 되는 것인듯 하다.) 단설의 현 배경은 1119년 정도 되는 시기로 사실 악비는 살아있는 것이 시점이나 이 이야기에서는 악비가 이미 재상 진회에 의해 독살되었다 설정하고 그의 어머니가 호북을 지휘한다고 나온다. 그리고 그의 아들 악운이 훗날 아버지의 역활을 대신한다. 나라내정에서도 외부의 적에게서도 미움과 위협을 받아가면서도 끝까지 호북에서 군을 거두지 않아 결국 지키던 나라에 의해 암살당한다. ( 이 부분만 보면 완전 중국판 장보고라 할수 있을 만큼 비슷하다.) 따로 한족인을 설정하기 보다는 흐름을 따라가기 위해 악비를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즉 당시 금에 반감을 가진 세력은 정안족만이 아닌 쫒겨난 여진족(송), 밀려버린 한족, 그리고 소수민족 등, 많은 나라들이 있었을 것이고 그들이 서로 연합해 금에 대항하는 일도 있었을 것이라는데 손을 들었다. 악비의 정병은 악가군(岳家軍이라 하는데 금에게 대항할때 악가군만이 싸운 것이 아닌 유광세(劉光世)·한세충(韓世忠)·장준(張俊) 등 군벌의 병력을 모았다고 한다. 정안의 마류 장군( 마유장군의 아저씨) 이 이 악가군의 기마병을 지원하고 있으며 그의 한족명이 장준(張俊)으로 송나라의 군벌로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마류장군에 대한 이야기는 아래에 등장했었다. <장군 을노의 말에 상장군 우씨 마류가 붕대에 감긴 팔을 들어보였다. 얼마 전 송과 금의 전쟁으로 인해 다친 상처다. 왕씨는 비밀리에 송의 대 군벌 악씨와 동맹을 맺고 있었다. 때문에 상황에 따라 몇몇의 장군들이 기마병을 이끌고 송의 기병으로 들어갔다 나오길 반복하고 있었다. 단설 (丹雪) 16 갓밝이(黎明)중에서 > 63 언덕을 올라서자 바로 마당이 펼쳐졌다. 모도리보다 작은 집이였다. 이미 백라 일행이 올라 온 듯 마당에는 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혀 있었다. 인기척을 내기도 전에 마당에서 반갑게 자신에게 달려오는 것은 흑염이였다. 흑염은 발을 구르며 자례의 주위를 돌았다. 자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옛 친구에 반가워 하며 그 긴 목을 껴안았다. 흑염도 안면있는 자례가 좋은지 자꾸만 자례에게 몸을 부딪쳤다. 몇 번 더 쓰다듬어 준 후 자례는 흑염을 밀어냈다. “네 아우는 어디있니?” 하지만 흑염은 그냥 푸릉거렸다. 자례는 의아하게 마당을 둘러보았다. 흑염과 묵계는 함께 달리기를 좋아했다. 목장에 풀어 놓으면 아닌 듯 하면서도 꼭 붙어다니는 형제말이였다. 그런데 어째서 내말인 묵계가 안보이는 것일까. 자례의 의아함을 느낀 듯 을노가 고개를 저었다. "...다른 말 하나는 죽었다. 미안. 난리통에 구할 수가 없었다." "그런가요... 하지만 흑염을 살려 주신 것으로도 감사해요." 섭섭한 감정과 다시는 묵계를 볼수 없다는 상실감이 생기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답한다. 사실은 형을 만난다는 사실에 미안하지만 묵계의 이야기를 뒤로 놓는다. 인기척을 느낀 백라가 방문을 열었다. 유번은 자례에게 유견을 소개시켰고 유견은 흥미있게 공손하게 절하는 자례를 바라보았다. “나 원. 그 놈이 아우 걱정을 할만하구만. 너 어디 아픈게냐?” 덥썩 손을 잡아 자신의 앞으로 잡아당긴 유번은 자례의 왼쪽허리에 오른손을 대고 꽉 힘을 주었다. 유견의 행동에 놀라면서도 누른 곳이 아픈지 인상을 찌프린다. 백라와 을노가 유번을 말리려했지만 그는 상관없이 위쪽으로 손을 올리며 꾹꾹 눌러보았다. “눈은 아파죽겠다 하는데 몸은 참는 모양을 보니 네 형이나 네놈이나 속이 꼬인 것은 똑 같구나.” 유견이 자례의 눈을 들여다보며말하자 유번이 버럭 화를 내며 유견의 손을 쳐내었다. “내 아이에게 손대지 마시오 형님!” “네가 언제 이런 손자를 두었다더냐?” 피식 웃으며 말한 유견은 방안으로 들어가자는 눈짓을 했다. 차를 타기 위해 집주인인 유견이 일어나자 자례가 따라 일어났다. “됐다. 내가 할것이야.” “제 나이가 아직 어리니 도와드리겠습니다.” 둘이 방안에서 나가는 것을 유번은 탐탁치 않게 노려보았지만 을노가 오던 길에 있었던 이야기를 하자 곧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방안에서 산적을 만난 이야기를 하는지 조금 소란스러운 것을 느끼고 자례가 잠시 고개를 들었다. 부엌으로 나온 유견은 솥에 물이 있는지 확인해 보고는 자례에게 차를 꺼내게 했다. “생각처럼 네 몸은 나쁘지 않다. 그러니 그런 죽을상은 그만두어라.” “...예?‘ “헛헛, 유번놈이 말하지 않더냐? 네 얼굴말이다.” 유견이 자례에게 차상자를 건내받으며 유견이 웃었다. “잘도 참았구나, 그 꼬질쟁이가 말이다. 말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렸텐데.” “제 얼굴이 심기를 흐리게 합니까? ” “그야 여기 이렇게 적혀 있지 않느냐. 곧 죽을거라고.” 손가락으로 자례의 이마를 툭치며 유견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오랜 병마에 시달리면 생각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침울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무리 네가 가슴병을 앓고 있다고는 하나 내가 보기엔 내일 당장 죽을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러니 조금은 밝은 표정을 짓는 것이 어떠냐? 암울한 표정을 하면 자신이 자신을 사랑할수 없고 남도 널 사랑할수 없는 것이다.” 유견은 자례의 가슴을 가볍게 쳤다. “가슴에 얼마나 많은 죄를 담고 있느냐?” “....그렇습니다.” “그것은 네 형도 마찬가지가 아닐 듯 싶구나.” “예?” 의아한 표정을 짓는 자례에게 유견은 어깨를 으쓱했다. “자휼 녀석은 사냥을 나갔다. 곧 알아서 들어오겠지. 좀 기다리면 될것이야.” 자례는 허탈감에 고개를 숙였다. 유견이 차를 타서 방안으로 들어갔지만 자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부엌에 남아 아궁이 앞에 앉아 몸을 웅크렸다. 따뜻하다. 정말 따뜻하네. 방안보다 좋다. “... 정말 하나도 맞지가 않는다니까.” 중얼거리며 고개를 숙여 무릎사이에 파묻었다. 하나도 맞질 않는다. 모든게 어긋나기만 하는 것 같아 너무도 짜증이나 주체하기 어렵다. 이래서 그랬던가. 이래서 내가 형과 헤어지기 싫어했던 것일까. 이렇게 만나기 힘들 것이라는 걸 무의식 중에 느끼고 있는 것일까. 형은 내가 보고 싶지 않은가. 조금은, 사실 많이 야속해지는 느낌에 혀를 찬다. 하지만 우울해지는 것은 자신이고 저 멀리 사냥을 나간 형은 돌아오지 않는다. 내 표정이 그렇게 절망적인가. 근처 물항아리의 뚜껑을 열고 가득 찬 물에 얼굴을 비추어 보지만 전과 다를바가 없다 느낀다. 하지만 틀린말이 아니다. 최근 들어 원하는 일이 많아져 내가 누릴수 있는 짧은 시간을 원망하고 있었으니까. 그것이 우울해 보였던 것일까. 달칵하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리니 을노가 따뜻한 차를 들고 문가에 서 있다. 아무말 없이 옆에 앉아 차를 자례에게 내밀었다. “실망했구나?” “예. 하지만... 그보다 좌보님께 악씨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나요?” “아, 뭐. 대강은.” 말을 어무리면서 아이를 바라본다. 웅크려서 차를 홀짝이는 자례를 보니 갑자기 강아지 머리를 쓰다듬듯 하고 싶어진다. 피식 웃으며 을노 역시 차를 한잔 따라 마셨다. “일단은.” “그럼 이제 슬슬 부르시겠군요.” “응?” 얼마 지나지 않아 둘을 부르는 소리에 둘 다 옷을 털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씩씩거리며 등을 돌리고 앉은 두 노인과 초죽음이라는 얼굴의 백라가 창백하게 앉아 둘을 바라보았다. 아마도 또 유견과 유번이 한바탕 싸움을 한 모양이다. 유견이 헛기침을 하며 자례에게 부드럽게 물었다. “그래, 네가 그 놈의 아우이냐?” “내 아이에게 손대지 마오!” “왜 애가 너 애냐!” “아아, 제발 그만하십쇼!“ 백라가 신경질적으로 벌떡 자리에 일어나는 순간 파닥 파닥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을노가 문을 열자 문 앞에 고개를 갸웃하는 빨간 볼의 제비가 앉아있다. “왕씨의 전서입니다.” 을노의 말에 모두 제비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지만 정작 제비는 찻잔으로 다가와 먹을 것이 담기지는 않았는지 살펴본다. 을노가 다리에 매어져 있는 종이를 풀러 확인한 후 백라에게 내밀었다. “아저씨께 온 글입니다.” “...?” 백라가 글을 읽는 동안 유견이 화로 속에서 익은 도토리를 하나 꺼내들어 껍질을 깨자 제비는 좋다고 유견의 어깨로 날아간다. 뜨거운지 발로 도토리를 바닥에 굴려가며 콕콕 쪼아댄다. 모두들 제비의 재롱을 보고 있을때 백라가 약간 침중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왕씨께서 도성으로 돌아오라는 명령이십니다” “벌써요? 좀 빠른 호출이시군요.” “도성 쪽으로 무슨 일이 생긴 모양입니다.” 백라는 전서를 화로에 넣어 태웠다. “자례. 너도 도성으로 간다.” “예?” “왕씨께서 널 보고자 하신다.” 그 말에 을노가 대신 말했다. “하..하지만 아저씨! 자례는 자휼을 못 보았는걸요.” “바로 간다고 하지 않았다. 일단 도성까지 가는 기간을 제외하면 삼일정도는 시간이 남아. 그동안 볼 수 있게 네가 힘써라.” “예?” “나가서 찾아오라는 이야기다.” 백라의 말에 자례가 끼어들었다. “저도 나가서 찾겠습니다.” “자네는 여기 남아서 도성까지 갈 체력을 기르는 것이 좋아.” “저는 그렇게 병약하진 않습니다. 그리고 흔적을 쫓는 것이라면 을노장군보다 제가 더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니. 그건 안돼.” 자례는 고개를 들어 백라를 보았다. 왜 내가 따라간다는 것을 말리는 것이지? 실제로 아프기는 하지만 도성까지의 여행이 고될 정도는 아직 아니다. 그런데 왜... 다들 그런 꺼림칙한 표정으로 날 보는 것인가? “제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 “...그렇군.” 백라가 단단히 마음을 먹은 듯 비장하게 자례를 노려보았다. 자례도 조용히 백라를 마주보았다. 하지만 입을 열려는 백라의 마음과는 달리 아무소리도 하지 못하겠는 것이다. “에이, 차라리 내가 말하겠소!” 유견이 백라를 뒤로 밀치며 자신만만하게 자례를 보았다. 하지만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는 어린 아이의 눈을 본 순간 마음이 흔들려 버리는 것이다. 그 모습에 을노가 모두를 제치고 말했다. “됐습니다. 제가 칼을 지겠습니다.” 을노가 헛기침을 하며 자례를 마주보았다. “...음. 그러니까. 형을 마지막으로 본 것이 언제였지?” “목래의 감옥이 마지막이었습니다.” “응, 그렇구나. 그런데 말이야, 네 형은 그 후에 좀 안 좋았어.” “...?” 자세한 설명을 하기 꺼려하는 을노를 돕기 위해 백라가 한마디 했다. “좀이 아니라 사실 좀 많이 안 좋았지.” “내가 보기엔 좀 많이가 아니라 아주 많이지.” 뒤이어 유견도 말을 붙였다. 을노가 조용히 하라는 눈치를 주며 다시 진지하게 말했다. “조금 화상을 입었는데...” “조금이 아니라 좀 많이라니까.” “좀 많이가 아니라 아주 많이라니까?” “아 거, 그러시다면 어르신들이 말씀하시구요!” 을노가 소리치자 유견과 백라는 딴 곳을 바라보았다. “그래. 화상을 입었어. 좀 심해. 아니 아주 심해. 그래서 네가 보기에...” “보기에?” “...좀 ... 아 정말. 그러니까...” “좀이 아니라 아주 많이 많이야.” “유견님 조용히 하세요.” 자휼을 본적 없는 유번과 그 이후 본적이 없는 자례만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뭔가 알고 있다는 셋은 왁자지껄 말다툼을 시작하더니 곧 작은 방안을 시끄러워졌다. “조용!” 자례가 꽥 소리 지르자 얼추 놀란 셋이 동작을 멈춘다. “됐습니다. 제가 보고 판단하지요.” 자례의 단호한 말에도 셋은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자례는 자신의 찻잔을 들고 방을 나가 아궁이 앞에 웅크리고 앉았다. 조용하고 따듯하니 이곳이 생각하기엔 좋을 듯 했다. 귀를 귀울이니 방안에서는 도란 도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 하나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을노가 나간다면 나도 따라 나가 형을 찾아내야지. 하지만 험한 길의 피곤함과 방금 전까지 싸웠던 몸은 노곤함에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흔들며 잠을 청했다. 예상외의 손님에 2왕자는 고개를 들었다. “잘 지냈소? 형님?” “네가 이런 냄새나는 책방에 무슨 일이냐?” “뭐, 이럴 때도 있는 것이요.” 레이첸은 툭툭 옆의 책을 손가락으로 쳐보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역시 관심은 없는 듯 하다. 체이첸은 피식 웃었다. “자 내 방으로 가자. 차라도 주마.” “기다리고 있었죠.” 체이첸은 레이첸을 데리고 방안으로 가자 시종들과 환관들이 부산스럽게 술과 안주를 내왔다. 레이첸이 편안하게 맞은편의 탁자에 앉으며 웃었다. “제 덕에 형님의 술통이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놈, 안 그래도 된다.” 체이첸은 서둘러 책상을 치웠다. 잠시 후에 술잔이 나오자 한잔씩 돌려가며 사소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체이첸이 묻는다. “그래, 왜 여기까지 무슨 일로 왔지?” “음? 그러고보니 왜 왔더라?” “이 놈아.” 정말로 생각이 안난 다는 듯 레이첸이 고개를 갸웃하자 체이첸은 그냥 웃고 말았다. 껄껄거리는 소리에 레이첸은 끙끙대면서 머릿속을 헤맸지만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상하다 뭔가 중요한 것이 있어 이곳까지 달려왔는데 형을 찾아 그 퀘퀘한 서고를 돌아다녔더니 모든 것을 잊고 말았다. 레이첸이 자기만의 생각에 빠지자 체이첸이 먼저 말을 걸었다. “그보다 나 부탁하나하자.” “뭘요?” “너는 성밖 출입이 자유롭지? 사람 하나 찾고 싶은데 영 쉽지가 않구나.” 체이첸이 책을 하나 꺼내자 레이첸은 일단 인상부터 썼다. “걱정마라 네게 읽으라고 하지 않는다.” “그럼요?” “내가 읽어주마.” 체이첸은 낮은 목소리로 영웅서를 읽어주었다. 옛날 이야기를 듣는 듯 흥미 있게 고개를 끄덕이던 레이첸은 이야기가 끝나자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그래서요? 그 두 영웅들은 행복하게 살았답니까?” “이건 옛날 이야기가 아니다. 이 둘은 아직 생생하게 살아있는 자들이고.” “오호? 믿기지가 않는 걸요.” “사실 나도 그렇지만 만나보았다는 놈이 있으니 욕심이 가는 거야.” “...만나본 놈?” 체이첸이 말실수를 했다는 듯 고개를 돌렸지만 레이첸은 끈질기게 물어왔다. “누구요? 누가 그들을 추천했는데요? 누구?” “아 정말. 아니야. 아니라고” “아닌 것 같은데? 누굴까. 형님께 다가갈 수 있는 정도라면 꽤나 권력이...” “됐다. 15아우다.” 이번에는 레이첸이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형님, 15, 그 놈은 죽었잖아요?” “너 알고 있었니?” “아마도 처음 알고 있던 무리 중 하나일걸요.” “그래...” 체이첸은 눈을 내리깔았다. 생각보다 황궁안의 소식이 빨리 빨리 퍼지고 있는 듯하다. 혹시 내 궁안에 외부의 첩자가 숨어있다거나 다른 왕자들의 심복들이 위장해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든다. 하지만 체이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레이첸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그보다 죽은 놈에게 어떻게 들었어요?” “죽기 전에 들은 거다.” “그렇지만 이미 본 놈이 죽었는데 무슨 수로 옛이야기의 영웅들을 찾는단 말입니까?” “아주 없는 것은 아니야. 쉬첸이 성을 나가기 전에 내가 그 아이에게 내 출입패를...” “앗! 바로 그거다!” 레이첸이 손뼉을 쳤다. “그거야! 그것 때문에 왔었지!” “응?” “나 형님의 출입패가 있소.” 옷자락을 뒤지던 레이첸은 지금 입고 있는 옷이 사냥갈 때 입던 옷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환관을 시켜 자신의 궁에 가서 패를 찾아오게 했다. 체이첸이 더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무슨 패?” “출입관이 형님 패를 내 패에 섞어 놓았나 봐요. 제가 들고 나갔던 것이 형님...것이라고 하기엔 좀 그랬지만... 아무튼 내게 있어서 돌려 드리려고요.” “저런. 그런 게 뒤섞이다니, 출입관이 피곤했나.” 체이첸은 머릿속으로 재빠르게 패를 잃어버릴 가능성이 있는 가신을 떠올렸지만 딱 나타나는 자는 없었다. 정말로 출입관이 실수한 모양인가. “뭐, 이런 일은 처음이니 관대하게 넘어가자고요. 그보다 무슨 말을 하려다가?” “아, 그러니까 쉬첸이 출입패를 가지고 나갔지. 그런데 시체엔 그것이 없었어. 돈이 되지 못하는 것이고 백성들은 그것이 어디다 쓰는지도 모르니 가져갔을리도 없고.” “하긴 그냥 철조각아니요. 이름만 거창하지. 가다 잃어버렸을까요?” “내 생각에는 그를 만나 패를 건낸 후 돌아오는 길에 당한 것 같다.” 체이첸이 술을 한잔 받고는 잠시 새장을 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결국 그 패를 찾아내면 영웅이거나 살인자이거나 둘 중 하나겠지.” “허? 내 출입패는 50패가 넘어요. 형님의 출입패는 더할 텐데요?” “난 300패인데, 괜찮아. 표마다 번호를 나누어 주거든. 쉬첸에게 준 패는 15번이였다. 1번은 내 비의 외가에 주었고 2번은 내 서랍 속에 3번부터 27번까지는 필요하다면 형제들에게 주고 있으니까.” “그거 편리한데요?” 좋은 것을 알았다는 듯 레이첸이 웃자 체이첸은 그것이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1왕자가 죽어서 그런지 내게 유난히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는구나. 덕에 잔머리만 굴리게 된 것이지.” “그럼 혹시 패의 번호에 따라 차별하는 것은 아니오?” “어떻게 알았느냐? 실은 그다지 만나기 싫은 자의 패 번호를 기억했다가 그 패가 들어온 날은 사냥을 나가기도 하지. 후후,40번대 이후는 그런 놈들이지. 아무튼 15번이 요즘의 일착 번호이다.” 환관이 들어와 패를 올렸다. 레이첸이 먼저 패를 뒤집어 번호를 확인했다. 미간의 짙은 눈썹이 확연하게 찡그려지더니 체이첸에게 묻는다. “형님, 정말로 15번 이였소?” “왜?” 레이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체이첸이 볼 수 있도록 패를 뒤집어 들었다. 그 곳에는 15라는 숫자가 적혀있었다. 64 아주 소심하게 부엌문을 열어 본 을노는 아궁이 근처의 바닥에서 쪼그리고 누워있는 자례를발견했다. “자례야? 너 자냐?” 깨어있어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몇 번 더 불러본 다음 다행이란 뜻의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자고 있다. 오늘 피곤했겠지. 하긴 거기가 가장 조용하고 따뜻하긴 하겠다. 붉은 그림자가 아른거리는 얼굴이 생각 외로 편안해 보여 조용히 문을 닫았다. 쪼그리고 누워버린 폼이 좀 불안해 보이지만 편한 표정이니 괜찮겠지. 잠시 망설이다가 행여 또 산적들이 올라와 난동을 부릴까 싶어 부엌의 빗장을 잠궈버린다. 어차피 아침이 되면 안에 있는 사람들이 일어나 열어줄테지. 아니라면 내가 들어와 열어줄수도 있고. 조용히 마당으로 나와 달을 보며 시간을 가늠한다. 오늘은 상현달이다. 이런 날 숲은 으스스한데 여기는 험하기로 유명한 난곡이다. 되도록이면 숲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은 것이 본심이지만 여기까지 올라왔으면 보람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을노는 허리띠를 고쳐매며 자휼을 찾아 나설준비를 했다. 소리 없이 손을 흔들어 배웅하는 백라와 유견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을노는 머리를 질끈 올려 묶고는 일단 아래쪽으로 미끄러지다시피 내려갔다. 이 험한 산에서, 이 한밤에 사람 찾기라. 운이 좋다면 빨리 찾을 수도 있지. 좋게 생각하자. 사박사박 반쯤 얼어버린 눈 위에 발자국을 깊게 남겨 뒤돌아 올 길을 생각하려 하다가 얼마 가지 않아 살짝 걷는다. 자례가 따라오면 곤란하지. 일단은 유견이 말해준 곡양촌 쪽으로 향하기로 정한다. 소리없이 속도를 내어 밤길을 걷자 자신이 밤손님이라도 된듯하다. 문득 몇 시간 전의 싸움이 떠오르며 악운도 생각난다. -보물산 곡양에 아무래도 여진의 귀족 씨가 사냥을 온 모양이 덥니다. “...“ 귀찮은 일은 질색인데. 설마 일이 꼬이진 않겠지. 설마. 잡생각을 떨치고 열심히 뛰어 곡양촌 쪽으로 가는중 무엇인가 자신을 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깜짝 놀란다. 분명 자신의 발소리에 겹치는 미묘한 소리가 울린다. 누군가 추격하고 있는것일까. 등골이 오싹하게 다른 이의 시선이 느껴져 결국 발을 멈춘다. “...누구냐?” 몸을 낮춘 후 검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하지만 그 순간 바로 그 시선이 사라지고 만다. 하지만 다시 몸을 세우고 조금 걸어가면 누군가 따라오는 것이 분명하다. 이 밤중에 어떤자가 날 따라온단 말인가. 행여나 자례인가 싶어 다시 걸음을 멈춘다. “...자례냐? 장난치지 말거라?” 사실 좀 무서우면서도 담담하게 뒤로 뛰어가 나무 뒤를 바라보나 아무도 없다. 갑자기 으쓸한 기분이 들며 두렵다. 사람은 무섭지 않으나 귀신은 무섭다는 게 을노의 지론이었다. “...” 잠시 뒤를 노려보고있던 을노는 냅다 앞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에이 모르겠다. 뛰어서 멀리 떨어지면 되겠지. 하지만 전력으로 달리는데도 불구하고 그 누구는 재빠르게 따라온다. 아니 사실은 자신보다 더 빠른 속도다. 여유 있게 자신을 따라오는 것이다. 오기가 생겨 점점 속도를 올리고 일부러 길이 험한 곳을 향해 달리지만 따라오는 자는 쳐지지 않는다. “...이런 일도 생기는군.” 감히 나에게. 을노는 태평한 얼굴의 눈을 치켜떴다. 아저씨는 나를 어린조카라 여기며 항상 어린아이 취급을 하신다. 하지만 난 당당히 천여 명의 무랑중에서 선출된 조의선인이며 금나라도, 요나라도 두려워했던 12영의 대장군이다. 그런데 지금 내게 시비를 거는 것인가? 감히 나에게? 몸을 낮추고 범과 같이 속도를 높여 뛰던 을노는 젖은 나뭇가지를 붙잡아 뛰던 반동을 이용해 날쌔게 나무위로 올라갔다. 조용히 뒤에 따라올 누군가를 기다리며 검의 울림이 나지 않도록 옷자락으로 검 손잡이와 검집 사이를 감싸고 뽑는다. 사악하는 소리도 조용하게 검이 뽑히자 등 뒤로 돌려 달빛을 빛내지 못하게 감춘다. 누군가 온다. “...?!” 천천히 발소리가 느려지며 결국 나뭇가지 사이로 누군가 걸어들어와 시야에 잡혔다. 하지만 을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감았다 떴다. 새하얀 옷자락을 펄럭이며 다가온 것은 자례였다. 검은 머리를 시린 바람에 찰랑이며 산책이라도 나온 듯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자례!” 을노는 검을 다시 검집에 눕히며 나무에서 뛰어내렸다. 사뿐하게 뛰어내리자 자례가 한걸음 물러났다. 을노는 화가 난 목소리로 자례에게 인상을 썼다. “장수의 뒤는 그런 식으로 따라오는 것이 아니야! 내가 널 적으로 간주하고 나무에서 활이라도 쐈으면 어쩔 생각인거냐? 옛말에 호랑이의 입안에 손을 넣는 것이나 장수의 뒤를 바싹 따라 붙는 것이나 성하기 힘든 일이라고 했다! 게다가 넌...” 한참을 설교하려는데 천천히 고개를 드는 아이의 눈과 마주치고 저절로 말이 멈춘다. 뭔가 다르다. 저건 아이의 눈이 아니야. 뭔가 쓸쓸함이 깃들던 아이의 눈이 아닌 욕망을 감추고 있는 여인의 눈이다. 본능적으로 을노는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새하얀 옷자락. 발밑으로 깔린 장옷의 옷자락마저 순백. 그러고 보니 입고 있는 옷이 처음 보는 옷이다. 산의 눈이 녹고 있어 길은 진흙투성이인데 어떻게 땅에 끌린 옷자락이 저렇게 깨끗할까. 하지만 눈 앞에 있는 아이는 평소와 같이 미소 지을 뿐이다. 미소짓는 얼굴은 예전과 다를 바가 없어 더욱 혼란스럽다. 하지만 마음이, 육체가 눈앞에 있는 아이가 진짜가 아님을 알려준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은 분명 내가 알고 있는 아이라 필사적으로 탈출구를 찾는다. 자례는 발목을 다쳤던 걸로 기억하는데 어떻게 날 따라왔지? 그제야 이쪽이 자례가 아님을 확신한다. 순식간에 등 쪽이 서늘해지는 느낌에 서둘러 뒤로 물러나나 자례가 먼저 고개를 돌리고 달을 향해 걸어간다. 사뿐사뿐 춤을 추는 듯한 고운 걸음으로. “거..거기 서라!” 공포심에 밀리면서도 일단 그를 불러 세우나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계속해서 숲 속 깊이 들어간다. 하얀 옷자락이 사라지는 것에 다급해진 을노는 자신도 모르게 따라 들어간다. 너무 깊이 들어가면 아무리 나라도 길을 찾기 어려워. 아닌데. 저건 자례가 아니야. 그러니 따라가면 안된다. 하지만 어느쪽이 옳던 간에 눈에 보이는 것은 아이가 험한 산속으로 들어가버리는 모습. 을노는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도 알수 없다는 듯 화를 내며 아이를 따라 뛴다. 너무 깊게 들어가면 자신도 돌아오는 길을 찾기 힘들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이를 따라 전력으로 이 험한 난곡의 산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보름의 주술로 가득찬 숲으로 뛰어 들어간다. 문을 열고 영업의 시작을 알리는 문패를 걸자마자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덩치크고 강해 보이는 한량들이 나비를 담을 종이등을 들고 속속히 들어왔다. “어서들 오십시오.” 고용된 한족의 여인들이 그들을 맞이한다. 그들 중 몇몇은 여인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원하는 비단망으로 된 포충망을 들고는 나비를 잡으러 화원속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몇몇은 원하는 나비가 없는지 화원 중앙에 서 있는 가게안으로 들어가 본다. 진귀한 꽃과 새, 가득찬 나비들의 날개가 환상적으로 흔들리는 큰 홀에서 서너명의 한족 여이들이 나비를 키울 상자를 만들고 있다. 사내들이 들어오자 그중 한명이 일어나 문쪽으로 가 인사한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나는 요동의 삼색나비를 원하는데...” “...요동의 삼색나비요?” 어리둥절한 여인은 잠시 기다리라 말한 후 이층으로 올라가 주인에게 이 사실을 말한다. 따뜻한 차를 마시고 있던 회색 옷의 마님이 미소 지으며 계단을 내려와 손님들을 맞이한다. 공손히 인사하는 장정들은 보기보다는 예절에 대해 배운 듯 하다. 회색 옷의 마님역시 고개를 숙인후 조용히 말한다. “요동의 나비는 아직 날개를 말리지 못했습니다.” “아직 그런 때인가? 하지만 꼭 가지고 가고 싶소.” “정원으로 나가 다시 한번 찾아보시지요? 일찍 눈을 뜬 아이가 있을지 누가 압니까?” 부드럽게 밖을 향하는 소맺자락을 따라 몇몇은 나가 다시 찾아보지만 남은 세 명은 고개를 흔든다. “차라리 고치를 가져가 키우는 것이 좋겠군요.” “정 그러시다면 절 따라오십시오.” 그녀가 그들을 인솔해 밖으로 나와 화원 뒤로 있는 별채로 들어갔다. 별채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층을 올라 조용해지자 그들은 여인에게 깊게 고개숙여 보인다. “여관께서는 무양하셨군요.” “오래간만입니다.” 여관도 싱긋 웃으며 눈 앞의 휘장을 걷고 문을 연다. 살짝 고개를 끄덕여 그들에게 안으로 들어가도 좋다는 뜻을 보인다. 그들이 조심조심 안으로 들어가자 휘장으로 가려진 상단에 누군가가 느껴진다. 장수들이 휘장앞에서 공손하게 부복한다. “부르심을 받고 달려왔습니다.” “그래.” 삼색의 날개를 가진 나비를 손가락으로 희롱하던 하류사가 창문을 열어 나비를 풀어주었다. 추운 하늘에 놀라 잠시 근처의 눈위에 앉던 나비는 잠시 머뭇거리나 곧 하늘을 향해 날아간다. 어차피 너무 이른 때 부화한 나비라 얼마 날지 못하고 추위에 얼어 죽을 것이다. 나비가 사라질때까지 바라본 하류사는 창문을 닫고 휘장을 걷으며 나왔다. 부복한 장수들을 내려보며 생각을 정리한다. 하지만 이미 그들이 오기 전에 결정한 것이라 번복은 없다. 단지 자신의 결정을 자신에게 되묻는 것일뿐. “요동의 성에 들릴것이다..” “예?” “출발 전까지 모도리에서 머물고 있어라.” 말을 마친 하류사는 바로 휘장 너머로 사라졌다. 밖에 있던 여관이 장수들에게 나가라는 고개짓을 하고 왕씨의 모피옷을 들고 휘장을 걷고 사라진다. 방을 나온 장수들은 놀란 표정으로 서로에게 말했다. “요동으로 들어가신다고 들었는데 잘못 들었나?” “나도 그렇게 들었네.” “무슨 일인지 모르겠군.” 전면전을 피하고 있는 왕씨이지만 10여년전 갑작스럽게 군사를 모으고 요동을 쳤다. 요동은 남쪽의 거대 도성으로 모두들 불가능하다 말했지만 왕씨는 그 고집을 꺽지 않았다. 피를 흘릴것이지만 차후 그 보답이 있을 땅이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희생을 치루며 왕씨는 요동성을 탈환했다. 이미 한족과 거란족의 손을 거친 요동성은 이미 예전의 그것이 아니였다. 하지만 왕씨는 이곳에 주요 관리들과 장수들을 이주시켜 제2의 흥료국의 발판을 만들기 시작했다. 관리들은 당시 요동의 주인이였던 송의 철종왕이 다시 탈환 전쟁을 진행할것이라며 걱정했지만 이주는 계속되었다. 관리들은 제 2의 흥료성의 비극이 되풀이 되지 않을까 하며 아직 나라를 만들기엔 시기상조라 거듭 고했지만 왕씨의 고집을 꺽을수는 없었다. 하지만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던 사건이 터져 송은 요동을 되찾으려던 전쟁을 포기하고 말았다. 그 사건이 바로 선인태후의 죽음이였다. 송의 철종이 어린 탓에 섭정을 하고 있던 선인태후의 죽음으로 송은 급격한 변화를 맞아 요동을 되찾으려는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리고 왕씨가 선인태후에게 자객을 보냈다는 것은 여관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였다. “날이 찹니다. 왕씨.” “그래.” 여관이 모피를 등에 올려주자 하류사는 미소지으며 여관을 마주보았다. “고영창님께서 놀라시겠습니다.” “내가 즉위식이라도 할생각인줄 알겠지. 하지만 그럴 생각은 없다.” “뭔가 걸리시는게 있나봅니다. 우리 왕씨께서.” 하류사는 아무말 없이 미소지었다. 결국 요동에 가국(假國)인 대원(大元)을 세웠지만 막상 하류사는 단 한번도 그 곳에 들어간 적은 없었다. 그 곳에는 유능한 장수들과 관리들의 대부분이 들어가 생활하고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왕씨은 없었다. 가황(假皇) 체제. 대부분 중요한 일은 전서를 통해 되거나 현 가황(假皇 거짓 황제)으로 있는 고하류사의 먼 조카인 고영창이 해결하고 있었다. 영창은 아직 어려 그곳을 다스리기엔 무리가 있었으나 대신 하류사는 그쪽으로 대부분의 관리들을 들여보냈기 때문에 대원의 운영은 부담 없이 잘 되고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황체제가 가능한 것은 아직 하류사가 대원의 정식 국명과 연호, 하늘에 올리는 제천의식이자 대관식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철종이 죽고 뒤를 이은 휘종이 나라를 말아먹기 시작하자 관리들은 하류사가 요동으로 돌아와 즉위식을 할 것을 강력하게 희망했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즉 대원은 아직 가국(假國)인 것이다. “조심하십시오.” “왜?“ “왕씨께서 가황에게 너무 많은 시간을 주신 것이 아닐까 이 여관은 걱정하고 있답니다.” “...걱정마시게.” 하유사는 부드럽게 웃어보였지만 속으로는 여관의 판단에 동의하고 있었다. 가황체제는 비밀이다. 알고 있는 것은 상급 관리들 중에서도 극소수이다. 결국 요동의 대부분의 정안족들은 영창이 하류사라고 알고 있는 것이다. 왕씨는 모습을 숨기니 어느날 돌아가서 자리를 바꾼들 큰 어려움은 없다. 편리해 보이지만 가황체제는 왕씨자신에겐 큰 위협이 되는 방편이다. 가황인 고영창 역시 멀지만 왕씨가의 사람이기 때문에 오랜 시간 왕씨의 자리에 앉으면 그 자리에 탐을 내기 마련인 것이다. 그것을 막기 위해 가황 영창을 모시는 자들은 하유사의 심복들이다. 하지만 사람 마음이란 얼마나 변화 무쌍한가. 무엇보다 영창이 자신이 요동을 정복할 때 나섰던 하류사라고 우길 경우 이야기가 복잡해 지는 것이다. “걱정할 필요는 없어.” 약속을 하는 듯한 왕씨의 말에 여관은 미소짓는다. 걱정할 것은 없다네. 어차피 가황이란 편히 죽지 못하는 자리니까. 봄은 오고 있는데 여전히 찬바람이 불어와 어깨를 움츠리게 만든다. 하류사는 멀리 보이는 눈을 머금은 구름을 노려보았다. 언제 봄이 오시려나. 65 “이야, 모두들 얼굴들이 화려한걸.” 악운은 낄낄대며 모두를 둘러보았다. 하나같이 얼굴에 멍이 든 것이 큰 상처는 아니지만 맞았을때는 꽤나 아팠을 것이다. “그러는 자네는 짐꾼이되어 산을 오르더니 볼일은 보았나?” “아아. 그래.” 악운은 고개를 돌려 더 이상 그에 관해 말이 나오지 않게했다. 하지만 곧 빙그래 웃음짓고는 일행을 달래는 것이였다. “뭐. 뜻하지 않았던 손님을 받았지만 이미 들어온 손님도 잘 대접해야겠지?” 눈길에 미끄러져 허리가 아프다는 일행을 제외한 일행을 이끌고 예의 그 막사를 향했다. 수분 걷자 큰 불을 둘려싼 막사가 보인다. 악운은 조용히 하라는 눈짓을 하며 막사를 살폈다. 얼추 보았을 때는 그냥 부잣집 도련님정도가 사냥을 나온 것이라 생각했는데 막사의 배열과 보초병, 무기를 놓는 위치가 군의 그것이다. 이건 부잣집 도련님이 아니군. 그렇다면 장군들이 사냥이라도 나온 것일까? 하지만 있는것이라곤 욕심과 자신감뿐, 겸손이라고는 모르는 장군들이 서로 모이는 경우는 극히 드문일이였다. 막사는 다섯 개. 적어도 다섯명이상의 수장이 있다는 것이다. 장수들이서로를 불편해 하면서도 이렇게 함께 나올 정도라면 큰 지휘자를 모시고 나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저 막사중 지휘관이 들어있는 쪽은 어디일까. 군에서 사령막사는 가장 안쪽의 중앙에 위치하지. 그렇다면 저 막사인가. 따라오려는 일행을 밀어내고 혼자서 몸을 낮추며 가까이 다가간다. 눈의 차가움도 잊은체 바닥에 눈보다 더 납작 엎드려 막사안을 들여다 본다. 금발의 사내와 밝은 갈색머리의 묘한 분위기의 사내가 있다. 둘은 술을 마시지만 아무소리도 하지 않는다. 말안하고 술마시기 내기라도 하는가. 참으로 심심하게 사는 사람들이군. 예상했던대로 여진족의 부유층인 듯하다. 하지만 불행히 막사안에는 그다지 가져갈만한 것이 안보여 실망하고 만다. 옷차림은 꽤나 고급스러운데 가져온 것은 별로 없군. 그냥 돌아가려다가 저 금발이 왠지 신경 거슬린다. 알 수 없게 경계심이 드는 것은 왜일까. 한참동안 악운이 움직이지 않으니 동료 한명이 기어와 묻는다. “이봐, 악운. 어떻게 할 거야?” “...취소한다.” “뭐” “아무래도 기분이 이상해. 오늘 밤은 취소할거야. 돌아가자.” “에이...” 한숨을 내쉬는 동료의 얼굴은 만신창이이다. 을노는 그들을 죽이지는 않았지만 얼마동안은 대낮에 거리를 활보하지 못할 정도로 때려준 것 같았다. 그런 얼굴들에 악운은 웃음을 겨우겨우 참으며 엎드린 상태로 조심조심 뒤로 물러난다. “마고!” 갑자기 금발의 사내가 앞에 앉은 다갈색의 사내 앞에 잔을 소리 나도록 내려놓는다. 고개를 들어 막사를 보자 마고의 날카로운 매 눈과 마주친다. 자례 못지 않는 귀기어린 눈빛에 또 한번 오싹함을 느끼고 몸을 벌떡 일으켜 뒤로 물러난다. “들켰다! 모두 피해라!” “놓치지 마라!” 마고가 막사 바닥에 눕혔던 창을 발로차 위로 올리며 외친다. 악운이 활을 쏘려는 병사들에게 눈을 뭉쳐 던져 시야를 방해했다. 하지만 뒤로 뛰어 도망가는 동료 하나가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쓰러진다. 가슴을 관통한 창에서 피가 배어나오기 시작한다. 슬퍼하거나 도와줄 겨를도 없이 족족히 쓰러지는 동료들을 바라보며 악운을 이를 악물었다. 마고라고 했나. 태연하게 창을 들어 사냥을 하듯 동료의 등짝에 창을 꽂아넣고 있다. 부랴부랴 다른 장수들도 창과 칼을 들고 달려오는 것이보인다. 여기서 죽는가? 천하 악비의 아들이 결국 여기서 죽는가! “그럴 순 없지.” 악운은 동료를 포기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미안한 마음이 들기전에 일단 자신은 꼭 살아남아야 한다는 욕심이 앞섰다. 빠른 다리는 손쉽게 장수들의 포위망을 벗어나 술속으로 자신을 숨겨준다. 안도의 숨을 내쉬기도 전에 마고라고 했던 사내가 자신못지 않는 빠른 다리로 달려오는 것을 본다. 놀라 움찔하며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여버리자 아슬아슬하게 창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제기랄!” 욕지거리를 해도 이 상황이 바뀌는 것이 아니다. 오늘 정말 일진 사납구나. 그 정안족들부터 시작해서 이제는 목숨을 건 달리기라. 헉헉거리면서도 타고난 몸의 탄력이 그를 따돌리고 있는 느낌에 안도한다. 그럼 그렇지. 여기서 내가 죽을 리가 없지. 난 할일이 있다. 더 이상 추격자의 발소리가 안 들리자 악운은 바위틈으로 들어가 한숨을 돌렸다. 이러기에 상현달에 일을 벌이는 게 아니었어. 상현달은 기분나쁘다니까. 나 원, 바보같이... “...거기까지냐?” “..!” 멀리서 울리는 목소리에 몸을 숨기기도 전에 팍하는 진동이 몸을 울린다. 순간 미인의 눈썹 같은 달이 보인다. 달. 아름다운 달. 선망하지 않을 수 없지. 하지만 그것이 내 님보다 고울까 싶다. 그래. 난 내 님의 얼굴도 확인해 보지 못한 총각이니 여기서 죽으면 꼴사나운 몽달귀신이 되는 것이다. 그리할 수는 없다. 오기로 쏟아지려는 몸을 일으킨다. 가슴이 아프고 눈앞이 아찔하며 귀가 울린다. “여차! ” 몸을 일으킨 악운은 비틀거리면서도 자신을 올려다보았다. 높은 언덕위에서 활을 날린 모습 그대로 악운을 내려다보고 있던 친첸은 흥미롭다는 듯 미소 지었다. 강단은 있는 놈이군. 뭐하는 놈일까. 하지만 피를 토하는 것을 보니 폐 쪽으로 활을 맞은 것이 분명하다. 역시 얼어버린 화살은 쓸 것이 못된다. 나는 심장을 노렸건만. 친첸은 손에 들었던 활을 허공에 버렸다. 쓸모를 잃어버린 활은 절벽 깊숙하게 떨어져내린다. 여유 있는 친젠의 시선과는 달리 악운은 죽을 지경으로 아팠다. 뒤는 절벽이다. 올라오는 바람 소리를 들어보니 밑은 물가인 것 같다. 악운은 친첸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는 예의 여유있는 태도로 고개를 갸웃하며 자신을 내려본다. 저 놈에게 죽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여기서 버틴다면 아까 그 마고라는 사내가 이족까지 따라와 창으로 날 꼬치로 만들어 버릴것이다. 그럼 그냥 떨어빌까. 빌어먹을. 저 금발. 이상하게 불길하더니만. 장수들이 몰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제기랄. 네 놈들 손에 죽기는 싫다. 차라리 내가 죽겠다. “허튼짓 하지 마라.” 천천히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자는 이상하게 슬퍼 보이는 눈을 하고 있다. 마고라고 했던가. 내 눈은 속이지 못하지. 자네 뭐가 그리 슬픈가? 슬프다 못해 화가 나는가?. 악운은 피가 흐르는 입을 소매로 훔치고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뒷걸음쳤다. 순식간에 몸이 허공으로 내딛는데도 역시 기분은 좋다. 하늘이 보이고 세찬 바람이 온몸을 감싸는 것을 느끼며 악운은 눈을 감았다. 절벽으로 뛰어내린 그가 사라질때까지 마고는 아래를 바라보았다. 친첸이 자신의 옆으로 다가오자 이상하다는 듯 묻는다. “왜 죽이지 않으셨습니까?” “눈이 마음에 들어서.” 친첸의 말에 마고는 아무 말 없이 등을 돌리고 병사를 해산시켰다. 약간은 기분이 안좋은 듯한 마고의 등에 친첸은 뒤를 따라 걸으며 중얼거린다. “화가 난 모습이군.” “저는 아무런 표정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말이다.” 하지만 마고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진영으로 돌아가 버린다. 그 모습을 보는 친첸은 약간 신경질적으로 뭐라 중얼거리지만 들리지는 않는다. 건방진 놈. 성질 같아서는 없애버리고 싶지만 네 능력이 차마 아까워 그러지 못하겠다. 게다가 내가 네놈을 죽일수 없는 것을 알고서 건방떠는 듯해 더 기분이 그런걸. 하지만 갑자기 등을 돌려 자신을 바라보는 마고의 날카로운 눈을 보면 기분이 착 가라앉는다. 화가 났던 것도. 슬픈것도 잠시 모든 것을 잊고 그 눈동자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일순간에 다시 감정이 가라앉아버려 입을 다시며 자신의 막사로 돌아온다. 죽일 수는 없다. 저 놈은 내 불같은 성질을 묘하게 조절해주고 있어. 별수 없지. 이런 것이 업보라는 지도 모른다. 체이첸은 화를 내야 하는지 울어야 하는지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열심히 생각하는 것 같던 레이첸은 포기했는지 어깨를 으쓱이며 새로 술잔을 채운다. 조심 조심 체이첸이 말을 건다. “역시 생각이 안나?” “그러니까 형님, 기다려 보라고요.” “그 기다리라는 것이 벌써 몇잔째야!” 결국 화를 못참고 체이첸이 화를 버럭내었다. 역시 선비라고는 하나 몸안에 흐르는 피가 레이첸과 별다를 바가 없나보다. 체이첸은 탁자를 탁탁두드리며 화를 내었다. “나갈 때 하나였던 패가 돌아올 때 두개였다면 하나는 네가 주워 온 것이 아니냐? 어서 그 무거운 머리 굴리지 못해!” “거 참...” 체이첸의 날카로운 눈초리를 흘끔 바라보며 레이첸은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생각나는 것은 전혀 상관없는 것들. 예를 들자면 전병의 재료는 밀가루에다 율뮤를 섞었다거나 그 창고의 호미자루가 네자루였다거나 어디다 쓰는지 알수 없는 모래푸대의 크기따위다. 역시 어쩔수가 없다는 듯 한숨을 푹내쉬자 체이첸은 답답한지 인상을 썼다. 아 형님의 저 표정은 정말 군주의 노여움 같군. 꽤나 진중해서 마음에 들어. 내 모습과 형의 모습이 많이 닮아 있으니 나도 인상을 쓰면 저런 표정일까? 머리가 붉어 산적처럼 보일지도.. 앗, 내가 딴 생각하는 것을 알아차린 것 같다. 레이첸은 얼른 선수를 첬다. “잘 기억이 안나요.” “너 딴 생각한거 아니냐?” “설마요.” “좋아. 그럼 어디로 여행 갔었는지 내게 이야기해 봐라.” “... 그건 좀 싫은데.” “왜?!” “고생만 하다 와서...” “레이첸!” “와우! 형님 지금 표정 정말 멋지오!” 체이첸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내가 바보지. 이놈에게 진지함을 바라는 내가 멍청이이던가. 답답함에 스스로 가슴을 치는 체이첸과는 달리 레이첸은 씩 웃었다. “농담입니다. 기억나요. 하지만 누구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눈밭에서 주웠거든요.” “눈밭에서 주워?” “그러니까 제가 그 놈을 업...” “..?” 잠시 레이첸의 표정이 굳어지더니 얼른 어무린다. “크흠! 사냥을 나갔다가 ...느....가 아니라 사슴을 따라 뛰다 발길에 채어 주웠던 것이 그것입니다.” “그래? 그럼 거기가 어딘가?” “예?” “누군가 그곳까지 가져갔기에 거기 있었을 것 아니야? 그럼 그곳에 아직 머물러있을지도 몰라.” “다른 곳으로 갔을지도... 모르잖아요?” “어쨌건 내 사람을 보낼테니 말만하거라.” “잘...모르겠는데요. 말이 닿는 곳까지 뛰어간 곳이라.” 어물 거리는 레이첸을 보고 체이첸이 이상하다는 눈치를 하자 레이첸은 다시 말했다. “생각나면 말씀해드리지요. 그보다 전 패를 건네 드렸으니 이만...” “레이첸! 앉아라!” 큰 소리에 찔끔하면서 도로 앉자 체이첸이 진지하게 자신과 너무나 닮은 얼굴의 동생을 노려본다. “네가 다녀와.” “예?” “다시 갔다 오라고.” “예?!” 레이첸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아..안됩니다. 할일이 많다고요! 정말이에요!” “처음듣는 소리구나. 네가 할일도 있고.” “게다가 축일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성을 비울수도 없는 일 아닙니까? 가는데 4일 걸리는 곳인데!” “역시. 어딘지 알고 있지? 4일거리라니 꽤나 멀리 나갔다 왔구나?” 당했다는 생각이 머리를 치고 지나가 체이첸은 신경질을 부렸다. “...으 형님.” “아, 너무 부담 갖지는 말고.” 체이첸이 손을 들어 뻔히 거절할 레이첸의 입을 막았다. “내 사랑하는 아우가 힘들다면 많은 것을 바라고 싶지는 않아. 너도 이미 부인을 두었으니 뭔가 새로 생기는 일들이 많을테고. 그것을 이해한다.” “아 그렇다면...” “하지만 네가 친형제인 내 부탁을 거절하지 않을거라고 생각하고 있단다.” “형님!” “물론 강요하겠다는 것은 아니야.” 레이첸이 벌떡 일어나 어깨를 으쓱였다. “도대체 찾아 오라는 것이요? 가지 말라는 것이요?” “단순하기는.” 혀를 차며 체이첸이 말했다. “반드시 찾아와. 무슨 일이 있어도 찾아와. 하늘이 무너져도 찾아와. 꼭 이렇게 말해야 하는가?” “...선비들이란. 나원.” 레이첸은 화난 표정으로 방을 나갔지만 체이첸은 그가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 볼것임을 의심치 않았다. 66 여관은 안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비빈(備嬪:결혼 전 상대)은 전하의 여인이 아닙니다. 이제 성혼하여 부인이 계신 이상 비빈을 만나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럴줄 알았다. 물러가라.” 중년여인이 한숨을 내쉬며 방을 나갔다. 소시적부터 레이첸의 여인들을 관리하고 있던 그녀는 이번엔 이 혈기좋은 왕자가 무슨 문제를 일으킬지 걱정부터 앞선다. 여관이 나가자 레이첸은 무릎을 첬다. “그럴줄 알았어. 여관에게 묻는게 아니라니까.” 하지만 창고에 갇혀있던 동안 이것도 저것도 못해봤는걸.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가 문득 차를 내가는 궁녀를 보고 잠시 눈을 반짝이나 역시 고개를 돌려버리고 만다. 아무리 궁하다지만 왕자의 신분으로 궁녀나 건들이게 생겼나. 게다가 궁녀는 황제의 것이다. 끙끙거리며 고민하는 레이첸은 두 번 다시 보기 힘든 모습인 듯해 보였다. 결국 그 모습을 보다못한 가까운 환관이 걱정을 물어왔고 레이첸은 그의 도움을 받아 두명의 비빈중 한명이 아직 궁에 남아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다행히 그날 오후에 차를 만드는 다과소에서 그 비빈을 찾을수 있었고 소리 소문없게 그날밤 비빈을 궁에 들이는데 성공할수 있었다. 물론 여관이나 화선이 알게 된다면 매우 화를 낼 일이였지만. “무슨 생각하십니까?” 비빈이 레이첸에게 손을 얹었다. “고민거리가 있어서 그런다.” 비빈은 다시 옷을 입었다. 그 모습을 보고 레이첸이 묻는다. “왜 옷을 입어? 아직...” “비빈은 야합(夜合) 이상의 여인이 되지 못합니다. 고민거리를 제 앞에서 하신다는 것은 체통에...” “됐어 됐어. 어찌 보면 내 첫 여인은 네가 아니냐?” “전 단지 전하의 야합 지도를 위한...” “넌 욕심도 없냐?” “...예? 둥근 얼굴의 비빈이 놀란 얼굴로 되묻는다. “어찌 보면 두 번째 여인이지만 첫 비빈이 아버님의 여자였으니 사실상 넌 내 첫 여인이지. 뭔가 넘보고 싶은 것이 없단 말이냐? 그저 다른 궁녀와 같이 일을 하고 내가 부르면 이곳으로 오는 변변한 네 궁조차 가지지 못했는데 이 생활에 만족하느냐는 것이다.” “부인이 이미 계시지 않습니까? 저는 전하의 비빈이 되었다는 사실로도 황공합니다.” 레이첸은 허탈하게 웃었다. 뭐랄까. 화선이든 그 촌구석의 놈이든 여관이든, 고집세고 쌀쌀맞은 놈들만 상대했더니만 어쩌면 멍청할수 있다 말할수 있는 이 비빈이 매우 귀여워보인다. 예의 노인이 젊은 여자를 찾는 이유를 떠올리고는 자신은 아직 늙지 않았다며 중얼거린다. 비빈의 허리에 팔을 감으며 물어본다. “오늘 일도 과했을텐데 날 상대하느라 피곤하겠구나.”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전하!” 소스라치게 놀라는 비빈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역시 이렇게 애교있는 여자가 좋다니까. “원하는 것이 있다면 하나 들어주지.” “아닙니다.” “이런 기회가 두 번오기 어렵다는 것은 너도 잘 알겠지. 원하는 것이 있다면 지금 말해라.” 머뭇머뭇 고민하던 비빈이 고개를 푹숙이고 중얼거린다. “저는 단지...” “뭐?” “단지 전하께서 제후가 되시어 왕궁을 떠나실 때 비빈을 거두어 주셨으면 합니다.” “...그것 뿐?” “그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여자란 알 수가 없다니까.” 레이첸은 침상에 누워 실소했다. “누구는 정비가 되려고 바동거리는데 누구는 따라만 와도 좋다고 하고...” “화선님께서는 세부로 들어오셨으니 당연한 것이 아닙니까?” “그럼 너랑 화선과 뭐가 다른 거냐? 너도 내 비빈으로 간택되었을 정도라면 꽤나 이름 있는 집안의 여자란 이야기잖아.” “...” “게다가 넌 내가 처음이었지. 다른 비빈은 아버지가 주신 여자고. 그 여인은 궁 안에서 보이지가 않던데 어디로 갔나 몰라.” “...” “넌 알고 있는 것이 아니냐?” “모릅니다.” 새침하게 입을 다물어 버리는 모습에 레이첸은 여자는 다 똑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고개 돌린 비빈은 문밖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 이 만남은 사실 허락되지 못하는 것이다. 들킨다면 자신도 궁밖으로 내쳐질지 모른다. 자신도 비빈이지만 첫 비빈을 만나본적은 없다. 하지만 알고는 있다. 아마 그녀는 죽었거나 절로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아니라면 레이첸의 아이를 배어 궁에서 쫓겨나 어느 집의 양녀로 들어가 아이를 키우고 있을지도 모른다. 갑자기 레이첸이 가슴에 기대는 바람에 비빈의 생각은 깨어졌다. “넌 이름이 뭐지?” “저는 그저 비빈입니다.” “그런 거 말고. 궁녀로 들어올 때 받는 궁호도 말고. 네 이름말이다. 네 진짜 성과 이름. 아명말이야.” “...” “이름도 없진 않겠지? 아니라면 내가 사람을 시킬까?” “...윤소라고 합니다.” “윤? 너 혹시 강양(姜壤)의 윤(玧)씨 여자냐? 이름 소는 뭐지?” “그저 계집이름 소(?)입니다.” “저런. 이렇게 예쁜데. 아깝군.” 레이첸은 빙글 돌아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귀여울 소(?)자로 하자. 앞으로 너는 소처(?妻)라고 하겠다.” 멍하니 그 말을 듣던 비빈, 소처는 그렁그렁하게 눈을 적셔버린다. 차마 울음소리는 내지 못하고 자리에 엎드려버리는 여인을 보며 레이첸은 또다시 어리둥절했다. “왜? 처는 마음에 안드냐? 하지만 화선이 부인이라고는 하지만 세부(稅婦)의 지위에 있기 때문에 넌 세부는 될 수 없다.” “비빈에게 너무 과분한 자리입니다. 처라니요. 첩이 되지도 못하는 비빈에게...” 울먹거리는 소처를 안아들자 품에 쏙 들어온다. 물론 화선의 미모에 당할 여인은 아니다. 예쁘기야 화선보다 더 예쁜 여인은 황제의 여인중에서도 몇 없을 것이다. 하지만 외모와 걸맞은 그 앙칼진 성격도 좋긴 한데 이런 식의 가냘픈 여인도 좋단 말이야. 어차피 태진이 새 성을 알아볼 때까지는 화선을 부르지 못하니 소처와 함께 지내야겠군. 많이 예쁘진 않지만 귀엽고 상냥하고 여자다우니 좋아. 소처를 배에 올리고 입을 맞추자 그녀는 웃어 보이면서도 이상하다는 듯 묻는다. “전하의 고민은 해결되신 거예요?” “아차!” 레이첸은 또 다시 미간을 찌푸리고 생각에 잠겼다. 맙소사. 거길 다시 간다고? 또 광에 갇히면 어쩌라고. 아니, 왕자로 갔다가는 내가 거기서 부린 추태에 어떻게 얼굴들고 다니라고. 아 난 못해. 난 안해. “이럴 때 태진 놈은 어디로 사라진 거야.” 레이첸은 세안 물을 떠오는 환관에게 화풀이 겸 버럭 화를 내었지만 그래도 문젯거리는 해결되지 못한다. 얼마나 뛰었는지 물을 뒤집어 쓴 듯 땀이 흐른다. 그동안 다리살이 붙었나. 이 정도에 지칠 리가 없는데 몸이 너무도 무거워 자꾸만 다리가 쳐진다. 마치 앞서 가고 있는 자에게 다가갈수록 앞에서 밀어내고 뒤에서 잡아 당기며 위에서 내리 누르는 듯한 느낌이 든다. 물동이를 이고 바윗덩이를 밀며 수례를 끌고 가는 소같군. 하지만 놓칠세라 힌 옷자락을 따라 빠르게 달린다. 멈칫 힘들게 고개를 들었을때 앞서 가던 이가 뒤를 돌아 자신을 쳐다보는 것을 보고 놀란다. 웃었어. 묘하게 웃었어. 마치 ... 홀리는 듯. 꽃이 나비를 홀리는 듯 그렇게 웃었어. 을노는 힘들게 걸음을 멈추었다. 저건 자례가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그 아이는 저런 식으로 사람을 꼬이게 하지 않아. 게다가 나 분명 부엌의 문의 빗장을 치고 나왔는데 어찌 저 아이가 나왔을까. “넌 누구냐!” 을노가 버럭 소리쳤다. 목소리가 계속 울려 산을 휘돈다. 휘잉 거리는 바람과 메아리 속에 자례가 걸음을 멈춘다. 헉헉거리며 물러서는 을노와는 달리 고개를 갸웃하며 그가 더 이상 안따라올것임을 확인했는지 자례쪽에서 을노에게 사뿐 다가온다. 역시나 다가오는 발걸음이 얼마나 가벼운지 새 하얀 눈에 발자국마저 찍히지 않는다. 을노는 뒤로 물러나 손을 들어 가까이 오지 말라 경고했으나 고개를 갸웃하는 익숙한 얼굴을 보자 차마 해를 입힐수가 없다. 마음속에서 혹시나 진짜 자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모질게 검을 들이밀지 못한다. 천천히 하얀 옷자락에 있는 손을 올려 을노의 얼굴에 가져다 댄다. 서글픈 얼굴로 너무나 추워보이는 얼굴과 찬손에 안타까워서 을노는 자신도 모르게 그 손을 잡아준다. 이상하게도 달이 점점 커져만 가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귀를 울리는 비음이 귀를 울린다. 꿈을 꾸는 듯 나른하게 아릿한 환상에 잠긴다. 따뜻하군. 일순간 눈앞이 붉게 변한다. 뜨거워. 후드득거리는 붉은 핏방울이 사방으로 떨어진다. 순식간에 자신의 주위에 붉은 꽃이 수백 수천송이가 피어버리며 봄을 부른다. 공허하게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을노에게 퍼득 정신이 든 것은 그 직후였다. 얼굴과 옷이 이미 피로 흠뻑젖어있다. 놀라 뒤로 물러나며 이리저리 몸을 뒤적이지만 다행이 다친곳은 없다. 그렇다면 이게 무슨 피지? 멍하게 허공을 노려본다. 검은 하늘에 달이 없다. 아니야. 지금은 아직 달이 있을텐데. 이상하다 생각하며 아래를 내려다보니 어깨부터 허리까지 난도질당한 것 같은 자례가 쓰려져 있다. 검은 머리에서 하얀 얼굴로 피가 흘러 초점 없는 멍한 눈동자에 고인다. 붉게 변해버리는 눈을 보고 경악을 하며 비명을 지르려고 하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소리 없이 악을 쓰며 하늘을 올려다본다. 어떻게 된거지. 뭐가 어떻게 된거냐. 아릿한 환상을 깨는 구슬소리가 들려온다. 먼곳에서 들려오는 구슬소리. 을야의 목걸이 소리 같기도 하고 저 먼 산속의 풍경소리같기도 하다. 찬바람이 불어와 피로 젖은 옷을 매섭게 걸려버린다. 그제야 바람이 부는 소리가 귀에 들어오고 함박눈이 아닌 눈보라가 오고 있음을 안다. 주위를 둘러 지금까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확인한다. 언덕 위로 보이는 달이 아직도 상현달이라 의아하게 노려본다. “...을야?” 달이 사라진 것은 그 앞에 앉은 조그만 소녀의 둥근 어깨때문인가. 조금 떨어진 언덕에서 자신을 바라보곤 있는 작은 소녀는 내 누이다. 꽃 같은 누이. 지켜주고 싶었는데. 지켜주고 싶었는데. 이 몸이 어찌 된들 그 고운 마음, 진실한 웃음을 지켜주고 싶었는데. 하지만 을야는 냉정하게 자신을 바라본다. 그 서슬 섞인 시선에 을노는 가슴을 부여잡는다. 그렇게 보지 말아라. 제발, 날 용서해라. 어쩔 수가 없었다. 널 구하고 나올 수가 없었어. 그렇게 을노를 냉대하던 을야가 비스듬히 고개를 돌리며 달을 본다. 눈이 잘못된 것일까? 내 작은 소녀가 성장하는 것 같다. 바람을 타고 흐르는 머리카락이 점점 길어진다. 이마를 타고 내리는 피에 눈을 감았다 다시 뜨니 화사한 달보다 아름답게, 말 그대로 꽃처럼 커버린 누이가 달을 바라본다.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을노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름답구나. 정말 아름답구나. 고개를 돌리며 자신을 바라보는 누이의 눈이 파랗게 빛난다. 천녀의 후광처럼 새 하얗게 부셔지는 갈기. 아름답구나. 정말 아름답구나. 조용히 일어난 누이는 자신을 내려다본다. 마치 연인처럼. 마치 어머니처럼. 천천히 언덕에서 뛰어내린다. 날아오르는 것처럼 사뿐하게 내려온 누이는 자신에게 다가온다. 사뿐 사뿐. 발소리도 나지 않게. 날아다니는 것만 같다. 천천히 다가온 누이는 따스하게 미소 지으며 자신의 손으로 얼굴을 쓸어 자신의 눈을 감긴다. -가냐른 가늘라... 간잔지런하니 거분하이 주럽 떠으냐. (여린 어린 아이야, 피곤에 눈시울이 가늘게 처지니 마음에 짐이 되지 아니하게 편안히 쉬어라.) 을노는 차분하게 눈이 감기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잠시후 무사의 수련된 자제력이 그에게 정신을 돌려주었을 때는 아무도 없었다. 상현달의 저주인가. 돌아보는 언덕은 새하얀 눈이 쌓여 청초하기만 하다. 눈앞에 죽어있는 꼬리 세 개인 여우는 아직 식지도 못하고 피를 흘리고 있을 뿐. 자례는 눈을 떴다. 방금 등골이 오싹했어. 악몽을 꾼 것 같지는 않은데... 몸을 지탱하며 일어나는 손이 부들부들 떨려 두 팔로 자신을 감싸 안는다. 일어나 상황을 보니 등골이 오싹 할만 하다. 여긴 어디지? 잠이 덜깨 한동안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가 난곡으로 올라왔다는 것을 기억해내었다. 아궁이의 불이 조금 죽어있자 장작을 가져다가 던져 넣고는 다시 아까와 같은 자세로 쪼그리고 눕는다. 불이 커져가자 흙으로 만든 바닥은 따뜻하고 약간 뜨거운 불길에 닿는 어깨의 상처는 아릿하게 아픔이 덜하다. 딸각. “...?” 다시 잠이 오려는 듯 아른 했던 정신이 밝아진다. 누가 밖에 있다. 신속히 일어났다가 현기증에 다시 누워버린다. 얼마지나지 않아 또 다시 일어나 주위를 더듬는다. 아차. 검을 안가지고 있어. 그랬지. 검은 방안에 있어. 이런 바보 같은, 요즘은 실수투성이구나. 전장이였다면 이미 죽은 목숨이야. 눈을 가늘게 뜨고 부엌 아래 틈 사이로 보이는 그림자에 집중한다. 악운인가. 따라온 건가. 아니면 또 산적의 무리들인가. 다시 몸을 긴장시키자 손이 떨린다. 피곤에 지친 몸은 더 자고 싶다고 몸부림 치는데 정신은 너무도 긴장해 내몸이 아닌것같은 이질감이 생긴다. 더듬었던 손에 찻잔이 잡힌다. 조심히 그것을 움켜쥔다. 그리고 몸을 일으켜 구석으로 몸을 숨기며 더듬더듬 부엌의 이것저것을 만져본다. 어딘가 칼이 있을 것이다. 부엌이니 과도라도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어둠 속에서 그것을 찾기는 너무나 힘들어 다른 방법을 떠올리려고 하나 이미 너무 늦었는지 문에 건 빗장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빗장? 누가 부엌에 빗장을 걸어 놓았나? 생각과는 달리 몸은 다시 아궁이 근처로 돌아가 누워버린다. 불기운에 몸의 긴장은 좀 풀리지만 정신은 바늘 끝처럼 날카롭다. 문이 열린다. ------ 단설의 역주는 인용과 개인적 견해가 들어간 글입니다.(맹신(盟信)사양. 도용씁쓸)-------- 주 : 궁녀에 대해 대부분 외곡된 지식을 믿고 있는 것 같다. 특히나 '궁녀는 왕의 성적 노리게' 라고 잘못알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실제로 궁녀는 단지 왕이 할렘을 채우는 여인들이였을까. 유학의 남존여비사상이 판을 치던 조선 후기말에 궁녀는 물론이고 여인들에 대한 지식들이 많이 손상되어 모두들 과거의 여인들은 모두 애를 낳는 기계로 여기는 것 같아 안타깝다. 궁녀는 엄연한 '관직'이였다. 사내들이 '명부'에서 일하고 여인들이 '내명부'에서 일하는 평등한 관리들이였다. 관리들이 일정시험을 보아 차출되는 것과 같이 궁녀도 일정한 시험을 치르고 가능했다. 초기 궁녀는 평민이 아닌 관리들의 딸이나 귀족의 딸로 구성된 '엘리트 여인 집단'이였다. 물론 왕자도 황제도 그들을 함부로 성적 대상으로 삼을수 없었다. 초기의 그들은 결혼을 할수도 있었으며 재혼역시 가능했다. 단 황제의 여인이 된다는 것은 여인에게 최고의 지위였기때문에 황제의 잠자리를 거절하지 않는 궁녀의 모습이 현 소설이나 사극속의 성적대상이 되어버린 궁녀의 시작이 아닐까 싶다. 후기 유학의 성행으로 여인들이 정숙이란 굴래를 쓰고 외부로 나가는 생활을 제한하게 되자 점차 여인들의 관직은 뒤로 밀리게 된다. 특히 이미 결혼한 여인들과 황제와 불미스러운 일이 없도록 궁안에서 일하는, 특히 황제 측근의 여인들을 미혼으로 구성하게 된다. 하지만 이 일이 더 큰 문제가 많았던 듯 싶다.(;) 더구나 우리나라에서는 외곡된 남존여비사상의 여파로 궁녀로 집을 나가면 왕에게 시집을 가는 것이라 단정짓고 그녀의 평생을 홀로 살아가게 만들었다. 궁녀에게는 출궁할수 있는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궁녀에게 정을 두면 사내에게 벌을 내리는 법으로 출궁한 궁녀까지 왕의 여인으로 죽게 만들었다. 더군다나 궁중의 법도를 나몰라라 하는 폭군이나 망왕은 궁녀들을 음탕한 노리개로 만들었고 그에 따라 궁녀에 지원하는 현명한 여인들이 줄어들었으며 그러다보니 모자란 궁녀의 수를 일반인에게 차출했다. 궁녀들은 점점 직위가 낮은 여인들의 비중이 많아져 그에 따라 '엘리트 여인 집단'이 아닌 단순한 잡일꾼이나 성적 노리개로 변해버리고 만것이다. 궁녀에 대한 외곡된 사실은 통신상에 여전히 사실로 돌아다니고 있다. 특히나 근래 나온 책자역시 조선시대만을 중심으로 다루어 우리가 알고 있는 궁녀라는 것은 매우 초라하기 이를대 없다. ( 더 알고 싶은 사람은 스스로 알아보시라.) 하지만 소설의 배경은 1110년으로 아직 많은 유학의 영향이 없었던 당시 우리나라(고려초)로는 남녀가 평등했다. 여인이 호주가 될수 있었고 재산을 똑같이 분배했으며 재가와 연애가 자유로왔다. 당시 황제인 아골타가 첩과 비를 둔 것을 보아 거란은 어느정도 유학의 영향을 받았다 할수 있다. 하지만 정안은 남녀평등의 사회구조로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다. 이유는 정안의 뒤를 이은 고려가 남녀평등구조이기 때문에 이점을 넣었다. 하류사의 여관은 귀족씨의 여인으로 궁녀들을 둘수 없는 왕씨의 곁에서 모든것을 도맡아 하고 있다. 글에서 알수 있듯 여관의 직위는 하류사보다 확실히 낮으나 그가 그녀를 함부로 대하는 모습은 찾아볼수 없다. 실제로 여관이야 말로 좌보나 우보에 버금가는 대가의 역활을 하고 있는것이다. 하지만 여관은 대가의 역활만이 아닌 잠자리나 세탁 요리같은 시종의 일도 하고 있기 때문에 관직을 받은 여인이란 의미의 여관으로 부르고 있다. 후에 나올지도 모르겠지만 여관은 정식으로 관품을 등용받지 못해 그 직위가 따로 없고 왕의 심복으로 가까이 있는 그녀에게 사람들이 여관이란 칭호를 붙여준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황궁의 여관은 하나의 관리명이라 한다. 황궁의 여관(女官)은 다른 궁녀들과는 다른 황제의 밤일에 관해 대비하고 준비하는 관리이다. 그녀들은 황제의 모든 여인들에게 황제와의 시간을 균등하게 나누었으며 모시고 있는 총인이 생리중이거나 병환중일때는 다른 총인의 여관에게 이를 알려 황제를 다른 곳으로 모시게 했다. 흥미로운 것 하나는 황제가 성적 주기인데 보름달밤에는 어리고 젊은 여인과 잠을 자나 이때 가능하다면 사정을 하지 않는다. 그후 달이 가물어 그믐이 되면 반드시 황후와 잠자리를 가져야 했다고 한다. 이는 달이 없는 밤이 음기를 조성한다.. 어쩌구 저쩌구의 오양음행설에 관한 이야기로 그믐밤의 음기를 받아 황후에게서 훌륭한 후계자를 얻기 위한 방법이라 한다. 67 “아...” 자휼은 옆구리를 쥐고 그 자리에 잠시 멈추어섰다. 아까는 몰랐지만 점점 뜨거워지는 느낌과 더불어 무거워지는 느낌이 든다. 마치 혹을 하나 붙이고 걸어가는 느낌이다. 붕대를 단단히 감아두었기에 망정이지 걷지도 못할뻔했군. 신음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키지만 역시나 얼마 가지 못하고 나무에 기대어 쉬게 된다. 곰에게 빗맞아도, 호랑이에게 부딪쳐도 ,멧돼지에게는 박혀도 죽는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가보다. 몇 번더 걷는 시도를 하던 자휼은 더 이상의 산행을 무리라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다. 스승님께 돌아가야겠다. 하지만 돌아가는 것도 여의치 않다. 커다란 나무에 등을 기대고 하늘을 올려다보니 미인의 눈썹이라는 상현달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 알 수 없는 오싹한 느낌에 자휼은 시선을 돌렸다. 새까만 밤하늘에 총총하게 떠 있는 하얀 별이 긴장을 풀어주긴 커녕 공포감을 부추긴다. 안되겠다. 기어서라도 돌아가야지. 오래간만에 무리한 힘을 주었던 전신이 비명을 지르고 있어 천천히 절뚝거리며 걷는다. 애써 모도리까지 올라오자 허탈감이 넘친다. 굴뚝에 모락 모락 김이 오르는 것을 보아 유견은 아직도 출발하지 않는듯하다. 뭔가 속았다는 느낌이 들어 화가 난다. 흑염이 잠에서 깨어 자신에게 다가와 몸을 부비끼자 손으로 머리를 밀어내고 신경질적으로 유견의 방문을 연다. 하지만 깜짝놀라 얼른 다시 닫는다. 아니 어째서 사람이 늘었지? 잘못 찾아왔나? 하지만 마당에 태평스럽게 서있는 흑염을 보고 다시 열어 확인해본다. 세명 중 백라의 얼굴을 구별해내고 고개를 끄덕인다. 아마도 일이 있어찾아온 모양이다. 왕씨를 보좌하는 저들이 이렇게 움직이면 왕씨는 누가 지키나. 하는 생각이 들어 조금 걱정된다. 놀라 잊고 있었던 가슴의 쓰린 통증이 상황을 이해하자마자 쓰리다. 따뜻한 물을 마셔 몸을 덥힐 생각으로 부엌으로 가니 무슨 일인지 빗장이 걸려있다. 어리둥절하면서 일단 빗장을 풀어 문을 연다. 털컥거리는 소리와 자물쇠를 문에 걸려놓은 채 부엌으로 들어가자 아궁이의 불에 덥혀진 공기가 따뜻하게 감싸온다. 몸이 저절로 풀리는 것을 느끼며 자휼은 솥의 뜨거운 물을 마실생각으로 아궁이쪽으로 다가갔다. “...?” 누군가 아궁이 근처의 공간에서 누워잠을 자고 있었다. 자휼은 잠시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리가. 그럴 리가 없지. 하지만 꿈에서도 잊지 못하는 그 모습이 바로 눈앞에 그렇게 자고 있다.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흔들던 자휼은 그것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고 더욱 당황한다. 그리고 넘어지듯 몸을 숙여 자고 있는 아이를 품에 넣고 다독인다. 반년만이구나. 다시 만나기에 반년이나 걸렸어. 기뻐하는 자휼과는 달리 갑작스럽게 누군가에게 일으켜져 안긴 자례는 깜짝놀라고 말았다. 누군가 들어왔을 때 그가 익숙하게 부엌그릇을 만지기에 유견인줄 알고 일어나지 않았다. 그가 자신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다 생각할것이 미안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유견의 자신의 마음을 읽는 듯해 부담스러웠기도 했다. 하지만 들어온 이자는 갑자기 자신을 바라보더니 와락 껴안아버리는 것이다. 처음엔 너무도 황당해 잠시 멈칫했지만 정신이 들자 몸에 힘을준다. 하지만 자신을 품에 넣고 놔줄 생각을 안한다. 방에 있는 사람들이 행여 이 소란에 깰까봐, 혹은 을노가 장난을 치고 있는것같아 몸을 비튼다. “저..저기...” 악의는 없는 행동같아 크게 소란을 피지는 않지만 그래도 찜찜하긴 매한가지다. 도통 모르는 자와 살을 부딧기는 일은 여인이든 사내든 멋쩍긴 마찬가지인것이다. “을...을노?” 더듬더듬 상대방의 어깨에 손을 얹어 밀어내려다가 무심코 이상한 느낌이 나는 팔에 맨손이 닿는다. 사람 피부같지 않는 그 미끈덕한 느낌게 소스라치게 놀라 힘을 주어 상대방을 밀어낸다. “윽!” 신음소리와 허리를 깊게 숙이며 뒤로 물러나는 자를 두려운 눈으로 바라본다. 상현달의 미미한 빛조차 들어올수 없는 곳이라 눈살을 찌푸리며 안간힘을 써 상대를 알아보려 애를 쓴다. 자휼은 갑작스럽게 자신을 밀어내는 자례의 손길에 놀라 팔을 풀었다. 마침 밀어낸 곳이 멧돼지에게 스친 곳이라 정신이 아질하도록 고통이 온다. 주춤주춤 물러나 잠시 고통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고개를 든다. “왜...” 왜 밀어내는 거니.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는다. 마주보는 아우는 더 이상 나를 친근하게 바라보지 않는다. 찡그린 눈에 곧 공포가 어리고 혐오감에 다가오고 싶어하지 않을테지.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동정심으로 한마디 하겠지. 지금 저기 서있는 젊은 정안의 사내는 그저 불에 탄 불구자를 구경하고 있는 것이다. 도성에서 생활하면서 수백번, 수천번은 받았던 시선이지만 지금, 이순간 저 아이에게 받은 단 한번의 시선에 그동안 묵묵하게 받아왔던 자신안의 무엇인가가 끊어져 버린다. 아무리 애를 써도 보이지 않아 자례는 조금 앞으로다가갔다. 보이지는 않지만 그가 웃는 느낌이다. 문쪽으로 걸어가는 그의 모습이 상현달의 미미한 빛에 쌓여 하얗게 흐려진다. 잘 모르겠지만 걸어가는 그의 절뚝거리는 모습에서 자신이 뭔가 잘못했다는 느낌을 받는다. 뭐가 잘못한지도 모르면서 자신도 이해할수 없게 저절로 허리가 깊숙이 숙여진다. “죄송합니다.” 심장소리가 두근두근거려 터질것만 같다. 뭔가 괜찮다고 말해주길 기대하며 고개를 숙이고 있지만 그는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 혹시 사과를 바랬던 것이 아니였던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잘못한 것은 없다. 그가 먼저 자고 있던 나를 끌어당겼고 원인도 모르는 포옹 때문에 자신은 그를 밀어낸것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머릿속에서 모든 것을 정리하면서도 왜 자신이 저자에게 고개를 숙이는지에 관해서는 끝내 이해할수 없어 숙인 고개를 갸웃한다. 못내 저쪽에서 무엇인가 말을 해주길 기다리지만 끼익하는 문의 마찰음이 들리며 그가 발을 끌며 나가고 문이 닫힌다. 좁은 부엌에 덩그러니 혼자남은 것을 깨닮은 자례는 고개를 들었다. 타닥거리며 아궁이가 마지막 불씨를 토해낸다. 뭔가 알수 없는 허탈함에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잠시 망설이며 검붉게 물든 노란 짐승의 시체를 뒤집어본다. 신기하게도 꼬리가 셋이다. 모양을 보아하니 여우를 닮은 것이 요물인 모양이다. 발로 툭차 죽은 것을 확인하며 을노는 짜증을 부렸다. “왜 하필... 그런 모습으로 와서는.” 사람 속을 긁어놓는 거야. 투덜투덜 거리는 것도 잠시, 바로 언덕을 바라본다. 상현달의 마법으로 본 꿈같이 그리운 이의 추억을 더듬는다. ... 을야였지. 정말로 고이 자랐다면 그렇게 성장했을까. 너무나 아름다웠다. 살아 생전 또다시 내가 그런 여인을 볼수 있을까. 감히 손을 댈수 없을 만큼, 감히 올려다 볼수 없는 그 고귀함의 아름다움. “...” ...하지만 뭐라고 했는지 이해하지는 못했어. 그 말은 고어인가. 정신이 없어서 외우지도 못했다. 알아 들은 것은 방언인 가늘라뿐. “가늘라... 가늘라... 갓난아이나 어린 아이를 뜻하는 것이였지.” 을노는 손으로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 아이는 차가운 손이였다. 하지만 기분나쁘지 않았어. 오히려 편안했다. 고개를 흔들어 현실로 돌아온다. 을야는 죽었다는 것을 마음속으로 되내이며 애써 냉정해지려고 애를 쓴다. 분명 을야는 죽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었이였을까. 단지 을야를 닮은 여인이였을까. 이 험한 계곡에 그런 여인이? 게다가 언덕을 날아왔는데? 아래를 살피니 역시나 발자국도 없다. 게다가 그 눈동자... 그건 인간의 눈동자가 아니였어. 짐승의 그것도 아닌... 설명할수 없는 묘한 느낌의 눈동자였다. 어쨌건 이 요물이 날 해하려고 한 것을 막아준 것 같군. 달의 환상이 그것을 내 누이로 보게 한지도 모르지. 아무튼 인간은 아니였던 것 같다. 얼핏 눈이 부신 느낌에 고개를 돌리니 계곡의 틈 사이로 겨울해가 올라온다. “이런 날이 밝았잖아.” 을노는 땅을 발로 차며 화를 내었지만 해를 멈출수는 없었다. 정말로 귀신에 홀려 하룻밤을 보내버린 듯하다. 백라에게 이말을 한다면 화를 낼터이다. 분명 꿈을 꾸었다 하겠지. 미친사람 취급할지도 몰라.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여명을 감상한다. 해가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자 기지개를 핀다. 새벽까지 내달린 몸이 매우 피곤하고 요물의 피로 뒤범벅된 옷과 몸에서 비린내가 풍긴다. 일단 돌아가야해. 자휼도 어쩌면 돌아와 있을지도 모르지. 돌아서려던 을노는 땅에 있는 요물의 시체를 넘어갔다. 하지만 얼마 안가 걸음을 멈추고 그것을 바라보았다. “가지고 가야하나...” 결국 을노는 그 것을 어깨에 걸쳐매었다. 걸음이 휘청할 정도로 무겁다. “우랏차!” 외마디 소리를 내며 씩씩하게 앞으로 걸어간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반가운 사람을 만난다. 그것은 험한 산새에 굴복하지 않고 당당히 내려오는 명마 흑염이였다. 그리고 곧 그 명마의 주인도 뒤를 따라 모습을 들어내었다. 산이 험해 말과 사람이 따로 내려오고 있는 것인가보다. 을노보다 자휼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을노. 여기서...” 아무말도 하지 않고 난대없이 을노가 여우를 닮은 그것의 시체를 자휼에게 내던졌다. 얼떨결에 자휼도 한 팔로 그것을 끌어 안아 받았다. 하지만 후두둑 떨어지는 핏방울에 손이 젖는 물컹한 느낌의 그것에 놀라 바닥에 떨치고는 의아하게 묻는다. “왜 나에게 저걸 던지...” 하지만 을노가 검을 빼들고 덤비는 것을 보고는 뒤로 물러난다. 무슨 짓이지? 그냥 장난인가? 장난을 치는 줄 알고 뒤를 돌았다가 아슬아슬하게 앞으로 내쳐지는 검을 보고는 자신도 검을 뽑는다. 멧돼지에게 당한 상처가 쓰려 휘청거리면서도 용케 이리저리 잘 피한다. “뭐하는 건가?!” 창하는 맑은 소리가 아닌 탕캉하는 거친 쇳소리가 울린다. 둘다 강한 힘으로 검을 휘두르는 전장에서나 볼수 있는 살인의 소리이다. 그 소리에 긴장한것인지 흥분한 것인지 흑염이 발길질을 하며 안절부절한다. “을노!” 억세게 검을 밀어버리자 을노가 밀려나간다. 멀리 밀려나간 을노는 검을 세워 다가오지 말라는 뜻을 밝히고는 물끄러미 자휼을 본다. “무슨 짓이야?” “...이번엔 진짜군.” “뭐?” “죄송합니다.자휼. 간밤에 이상한 일이 있어서 그랬어요.” 을노가 어깨를 으쓱이며 검을 들어보이고는 검집에 넣었다. 자휼이 을노를 바라보니 정말로 무슨일이 있었는지 그의 몸은 피투성이이다. “그나저나 강해지셨는걸요? 대단합니다.” “...다시는 그러지말게.” 자휼은 검을 집어넣자마자 옆구리를 감싸쥐고 자리에 주저앉는다. 을노가 놀라 다가가자 손을 내저어 괜찮다는 표시를 한다. “혹시 제가 다치게...” “아냐.” “집으로 돌아가십시다! 어르신들이 상처를 봐주실겁니다. 아참.” 을노가 밝은 얼굴로 덧붙였다. “아우님께서도 와 계신답니다.” “....허.” 기뻐할줄 알았던 자휼이 헛웃음을 친다. 비웃음과도 같은, 허탈한 그 웃음소리에 진한 쓰라림이 묻어나온다. 자휼은 의아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좀더 기뻐하실줄 알았습니다.” “...그래. 기뻐하고 있네.” 자휼은 힘들게 몸을 일으켜 흑염의 등에 팔을 걸치고 일어난다. 하지만 집과는 정반대로 걸어간다. 을노는 이해할수 없다는 듯 잠시 멍하니 서있다가 얼른 뒤따라가 말한다. “자휼, 은신처를 옮기셨습니까? 제가 알기로는 이쪽이 아니라 반대쪽이 아닙니까? 어제 오후에 왔을때 분명 저 위의 은신처에 유견님이 계셨는데요.” “그래.” “그런데 왜 이리로 가십니까?” 하지만 입을 다문체 묵묵히 걸어간다. 도무지 말이 통할 것 같지 않는 모습이다. 피곤에 짜증이 밀려오지만 을노는 되도록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자휼, 그쪽이 아닙니다. 저쪽입니다.” “...” “보십쇼. 그림자가 왼쪽으로 지니 지금 자휼이 가는 방향은 북쪽이 아닙니까?” “...” “자휼.” “그만하게!” 버럭 소리지른 자휼은 성난 얼굴로 을노를 밀쳐버렸다. 얼마나 세게 밀었는지 아니라면 을노가 많이 피곤한 것인지 뒤로 벌렁 넘어져 버린다. 그대로 넘어진 상태로 멍하니 앉아있던 을노는 버럭 화를 내며 일어난다. “무슨 짓입니까! 돌아갈겁니까 안돌아갈겁니까! 무슨 애처럼 삐지고...!” “안돌아가!” 지지 않는 큰목소리로 자휼이 맞받아 외친다. “안돌아간다!” “어째서요? 자례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놈 몸도 불편한데 당신을 만나기 위해 난곡을 올랐어요! 성의를 보아서라도 얼굴을 한번봐야 할것이 아닙니까?!” “소용없다 그런말!” “자휼도 많이 보고 싶어하지 않았나요?!” “보고 싶었다!” 나뭇가지에 쌓인 눈이 덜어져내린다. 바람이 지나가고 겨울 해가 천연덕스럽게 어둠을 몰아낸다. “그럼 왜 안돌아가십니까?” 자휼은 을노를 노려보았다. 그렇게 눈싸움을 한지 얼마나 되었는지 햇살에 눈이 아프다. 긴장을 깨고 자휼이 중얼거린다. “난 더 이상 목래의 태수도, 그 아이의 상냥한 형도 아니야.” “...?”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을노를 바라보는 자휼은 무표정했다. “하지만 그 아이는 내게서 그것들만 원하는군. 원하는 것만 보고싶어하는 그 아이를 내게 어떻게 참으라는 거지?!” “자휼!” “빌어먹을! 돌아가! 지금까지 잘 버텨왔으니 앞으로도 그러겠지! 가서 전해, 태수 자휼은 이젠 더 이상 어디에서도 없다고! 더 이상 날 비참하게 만들지 말라고!” “무슨 소리입니까 자휼!” 결국 가라앉혔던 화를 다시 낸다. “당최 둘다 무슨 생각입니까? 나 모르는 사이 가서 싸웠습니까?! 자휼들은 형제잖아요. 가서 대화로 다시 한번 풀어보라구요! 이대로, 이대로 끝인겁니까?! 섭섭하지도 않아요?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렸지 않습니까!” “됐어. 난 돌아가지 않아.” “그럴수는 없습니다. 자휼. 돌아가십시다. 가서 자례를 만나야합니다.” “우리 형제의 일에 끼어들지마!” “...!” 자휼의 단호한 말에 을노는 뒤로 물러났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의 을노를 얼른 고개를 돌린다. 내색하지 않지만 떨리는 손이 그가 분노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분명 그에게 안좋은 소리였을 것이다. 그는 우리 형제에게 도움이 되려고 애쓰는 혈족인데. 역시나 잠시후 을노는 딱딱한 표정으로 자휼을 응시한다. “알겠습니다. 자휼의 말에 따르죠.” “...“ “하지만 자휼, 기억해야 합니다. 그 누구도 영원히 곁에 남아있지 못한다는 것을.” 등을 돌린 을노가 땅바닥에 구르고 있는 여우시체를 다시 매고 홀로 반대쪽으로 걸어간다.뒤도한번 돌아보지 않고 화난 걸음으로 빠르게 사라진다. 자휼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촐싹쟁이 흑염도 무슨 일이 생긴 것을 눈치 챘는지 조용하다. 68 산의 새벽은 춥다. 흘러내리는 계곡물에 몸을 담그는 것도 시간이 오래라면 목숨이 위험해진다. 물속에 사는 것들조차 그 추위에 바닥에 가라앉아 떠오르지 않는 계절이다. 흐름조차 미비한 계곡의 끝자락에 얼음이 깨지는 소리가 울린다. 첨벙이는 소리와 살얼음이 부셔지는 소리가 어우려진다. 젖은 겉옷을 벗어버리고 힘겹게 물가로 나와 눈위에 주저앉는다. 검은 머리가 얼어붙어간다. 후들후들 떨리는 손으로 젖은 머리를 뒤로 넘긴다. 핏발이 선 두 눈은 검은색과 갈색이다. 여기가 어디지? 어디까지 흘러온거지? 흐릿한 눈에도 이미 달이 지고있다는 것을 느끼고 죽음의 공포감에서 실없이 웃는다. 그대로 뒤로 누워 아무렇게나 되라는 듯 하늘을 보며 하얀 입김을 뿜는다. 살아남았구나. 질긴목숨이라 중얼거리며 악운은 신음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정말로 질긴 목숨이로구나. 화살촉이 남아있어 움직일때마다 아프지만 덕에 필요 이상의 피를 흘리지 않았던 것 같다.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한 악운은 이를 악물고 눈앞에 흔들리는 불빛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한걸음 한걸음이 너무도 피곤하다. 상처의 아픔보다 물살에 저항하며 땅으로 나왔던 것이 더 치명적이였다. 쓰러져 드러눕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난 할수 있다 되내이건만 몸은 정신을 따라가지 못하고 드러눕는다. 과한 운동으로 몸은 피곤한데 땀은 나지 않고 정신이 흐릿해질 추위만 몸을 감싼다. 귓가에 바람소리가 들린다. 여기가 끝인가. 흐릿해지는 시선이 끝을 알린다. 더 이상 어떤 생각도 할수 없이 악운은 깊은 어둠속으로 빠져들었다. 잠시후 물을 뜨러온 한 장정이 그를 발견하고는 달려왔다. 귀를 가슴에 대어보고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한 후 얼른 그를 업고 마을로 달려간다. 바람이 불어온다. 자신의 검고 긴머리가 출렁이며 새까만 물결을 그려낸다. 고개를 돌려 바람이 부는 방향을 바라본다. 광대한 초지가 끝이 안보이도록 넓게, 드넓게 펼쳐져있다. 속이 확 트이는 느낌의 시원하고 청아한 바람이 자신을 부드럽게 감싸며 어우른다. 귓뒤로 머리카락을 넘기나 한올한올 풀어진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날려 시야를 가린다. 다시 눈을 떴을땐 진한 향내와 무거워진 몸에 의아해한다. 그런 자신의 앞에 길조를 나타내는 검은 옷을 입은 관리들이 부복한다. 무슨 일이지. 하류사는 잠시 좌우를 살펴보고는 스스로 납득한다. 즉위식인가. 걷기 힘들정도 길고 화려한 왕씨의 예복이 길게 끌린다. 짤랑이는 귀걸이와 허리장신구에 달린 금으로 만든 용조각들이 저마다 자신의 말을 들어달라 아우성친다. 비현실적으로 천천히 검은 비단길을 즈려밟으며 걸음을 옮긴다. 옥좌가 왜이리 먼가. 아무리 계단을 올라도 옥좌가 보이지 않는다 단지 끝없이 펼져친 계단뿐. 올려보라, 공경하라 만든 왕씨의 자리이건만 왕씨인 자신도 오르기 힘들어 이상하다 여긴다. 눈은 지긋이 감고 잠시후 다시 떠 그 깊은 눈매를 날카롭게 빛낸다. 거짓말처럼 눈앞에 옥좌가가 나타난다. 그 웅장함을 그 무거움을 보여준다. 천천히 다가가 앉기위해 몸은 약간 돌릴때 누군가 자신의 손을 잡아 끌어당긴다. 무례한 것임을 느끼지만 내색하지는 않는다. 얼굴을 돌려 손을 잡은 사람을 바라보니 그것은 자신의 어머님이다. 그녀는 한계단 아래에서 하류사를 바라보며 웃음짓는다. 손을 펼쳐 자신의 가슴으로 안기라 미소지어보인다.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던 하류사는 기분 좋은 , 그러나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젓는다. 당신은 이미 망자의 산으로 오르신지 오래입니다. 순간 그녀는 잠시 동작을 멈추고 하류사를 바라본다. 조금은 당황했다는 그녀의 시선이 흔들린다. 무거운 왕관에도 불구하고 관에 걸린 검은 옥줄을 손으로 걷어 맨얼굴로 그녀를 바라본다. 제가 보고싶으셨습니까. 그녀는 더 이상 손짓하지 않는다. 단지 약간 고개를 갸웃한 상태로 하류사를 응시할 뿐. 곧 그녀는 안개처럼 사라진다. 때가 되면 저도 가겠습니다. 어마마마. 그녀가 사라진후에도 그곳을 응시하던 중 등에 소름이 돋으며 위협을 느낀다. 서둘러 등을 돌려 옥좌쪽을 바라본다. 그리고 수천, 수만의 이빨이 달린 거대한 검은 입이 자신을 향해 덥쳐오는 것을 본다. 아주 느릿느릿 이빨의 모양 하나하나를 볼수 있도록 아주 느리게 자신을 향해 온다. 하지만 몸을 꼼작할 수가 없다. 눈동자를 굴려 주위를 살펴보지만 수많은 대신들은 단상아래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있을뿐 아무도 자신이 어떤 상황인지 모른다. 움직여라! 예복에 딸린 검을 뽑기위해 안간힘을 쓴다. 손에 힘줄이 불거지고 얼굴에 땀이 흐른다. 그렇지만 간신히 미비한 움직임을 할수 있을뿐 몸의 마비는 풀리지 않는다. 빠르게 움직이는 것보다 아주 천천히 모든 것을 볼수 있게 오는 공포가 사람을 더욱 미치게 만든다. 그 흉측한 이빨이 자신의 이마에 닿는다. 갑자기 눈앞이 하얗게 변하더니 새파란 빛이 자신을 감싸고 돌아 그 자신이 옥좌로 앉는다. 일순간 마비가 풀려 몸을 휘청이며 중심을 잡는다. 탈진한것처럼 몸이 피로하지만 옥좌에 앉은 그것을 노려본다. 놀라는 동시에 번쩍 눈을 뜨며 현실로 돌아온다. 천장에 늘어진 휘장을 보고 자신이 방에서 잠을 자고 있었던 것임을 기억해낸다. 일어나고 싶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너무도 피곤해 일어날수가 없다. 몇 번 뒤척이나가 그냥 누워있기로 정한다. “...여관.” “...예.” 옆방에서 여관이 대답한다. 하류사는 그 목소리를 확인하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지금 현실에 있는 것이 확실하다. 흐르는 땀을 옷자락으로 훔치며 정신을 가다듬는다. 이상한 꿈을 꾸었다. 왕의 꿈은 넘겨 집어서는 안된다. 나는 왕이기 전에 제천의식의 제사장이기도 하다. 몸의 긴장을 풀기위해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고는 반복한다. 두근거리던 심장이 차분하게 변하는 것은 순식간이다. 분명 그것은 왕좌였다. 고대로부터 내려온 긴 좌형의 흑단목으로 만든 왕씨의 왕좌. 그런데 그곳에는 매구가 버티고 서 있었다. 선대로부터 구전되는 수호영물 매구는 왕씨를 보호한다고 들었다. 매구는 왕씨를 보호하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라 했었다. 그런데 어째서 왕자에 타고 앉아 자신이 왕자에 앉는 것을 막았던 것일까. 매구는 왕씨보다 앞서 걷지 못한다. 앞서 앉지 않고 앞서 일어서지 못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매구가 그를 왕씨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 꿈이라지만 자신의 영물이 스스로 주인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 심히 불쾌감을 느낀다. 하지만 날 공격하지는 않았다. 책망하는 눈빛이 아니였어. 그 눈은 마치... 어머니의 눈같았다. 인간 뿐이 아닌 모든 동물의 어미가 지닌 그 걱정스러운 눈. 어떠한 강자라도 그냥 지나칠수 없는 어미의 눈이였다. 무슨 뜻일까. 좀더 생각하다 눈을 감는다. “...여관?” “예. 듣고 있습니다.” “요동으로 가는 것은 취소하겠다.” “잘 알겠습니다.” 하류사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뱉었다. 긴장을 풀자. 조금 더 쉬는 것이다. 천천히 숨을 고르게 다듬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숙면으로 빠져들자 옆방에서 일어나있던 여관 역시 다시 자리로 돌아가 눕는다. 정말로 벌떡 일어났다. 지금까지 이렇게 빨리 몸을 일으킨 적은 없었다. 느슨해진 머리끈에 자꾸만 내려오는 머리카락을 머리위로 대강 올리며 주위를 살핀다. “...?” 잠들었었나? 주위를 둘려보니 아무도 없다. 그저 타오르는 아궁이와 그 옆으로 누워있는 자신. 무엇인가 잊어버렸다는 상실감에 인상을 쓰는 순간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어 일어났니?” “을노.” 피투성이 손을 천에 문지르며 을노가 아침 웃음를 지어주었다. 핏자국이 얼핏보이는 옷자락에 시선을 고정시킨다. 옆을 보자 붉은 털을 가진 무엇이 누워있다. 산짐승의 가죽을 벗기던 중이였나. 얼른 일어나 머리나 옷을 정리할사이도 없이 실례하는 것을 알면서도 을노에게 다가간다. “형을 찾았나요?” “글쎄다.” 을노는 물항아리에서 물을 따라내었다. 손을 담그니 금방 핏물이 되어버린다. 아침 식사 전까진 손을 깨끗이 닦고 싶다는 생각이 들며 손을 감잎에 문지른다. “...을노.” 자례가 다가와 자신의 피투성이 손에 하얀손을 얹었다. 무언의 부탁이 담긴 얼굴에 을노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 형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수가 없군. 도무지 모르겠어. “만났다.” “그럼 돌아오셨나요?” “아니. 자휼은 다시 떠났어.” “예?” “모르겠다.”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돌리고 다시 손을 헹구며 곁눈질 한다.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열린 문틈 사이의 햇살을 바라보는 자례가 보인다. 위로해줄까. 그가 급한 일이 있어서 갔다고 해줄까. 다음을 기약할수 있는 좋은 소리를 해줄까. 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그런 눈가림 말이 통하는 어린 아이가 아니야. 스스로 알아서 다독여야지. 자휼의 말대로 나는 이 형제에게 필요 이상의 간섭을 하고 있는지도 몰라. 하지만 안타깝다. 영원하지 못하다. 영원할 수가 없다. 흥료성의 누이와 생활이 영원할꺼라 믿었던 그 꿈이 산산히 깨어졌다. 그리고 누군가 먼저 떠날 때 망자의 산 아래까지 자신을 데려다 줄것이라 여겼던 누이는 먼저 가버렸다. 그래서 지금 내가 할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것을 알려주고 싶은 것이다. 내가 먼저 겪어 버린 상실감을 그들에게까지 겪게 하고 싶지 않는 욕심일 뿐인데 그것조차 이렇게 어렵다니. 벌써 목래의 생활을 잃었지 않은가. 이젠 둘 중 하나가 먼저 가버리고 나서 남은 자의 상실과 아픔, 자책속에서의 하루하루가 남았을 뿐이야. 그런데 왜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가. 스스로 짜증이 밀려와 단도를 냅다 도마위에 박아버리며 중얼거린다. “제발 정신들 좀 차려.” “을노?” “아침먹고 도성으로 출발할거다.” “하지만 아직...” “조용!” 을노가 단호하게 손을 내밀어 자례의 대꾸를 막았다. 억울한 표정이였지만 연장자의 큰소리에 자례가 뒤로 물러나며 입을 꼭 다물었다. “너가 더 잘 알겠지만 왕씨를 모시는 나로써 더 이상 너의 개인적 편의를 봐줄수는 없다. 유견님과 유번님을 곡양 모도리에 모시고 돌아간후 너와 좌보님, 나는 도성으로 간다.” “...예” 수긍을 하지만 명백히 할말은 있다는 라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자례가 고개를 돌린다. 을노는 앞치마를 벗었다. 그리고 아궁이 앞에 가서 손을 녹인다. “저것을 마무리 해라. 털이나 벗기면서 생각을 정리해봐.” “예. 그전에 자휼, 형이 아무런 말도 없이 떠난 것은 아니겠지요.” “...왜?” “제가 이번엔 무슨 잘못을 했기에 절 보지 않으시겠다 하시던가요.” 피가 흐르는 단검을 들고 빤히 자신을 바라본다. 을노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을 회피하다가 그것 역시 이 형제의 일에 끼어드는 행동같아 망설인다. “자휼은...” “예.” “네가 원하는 것만 보고 싶어한다고 말하더구나.” 멈칫. 이해할수 없다는 눈으로 자례가 고개를 갸웃한다. “그것 뿐입니까?” “그리고 더 이상 목래의 자휼은 없으니 자신을 비참하게 하지 말라했다.” “...그렇습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자례는 생각보다 별로 충격입은 모습이 아닌 것 같아 안심하고 아궁이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자례가 소매를 접어 올렸다. 단검을 뽑아들어 가죽의 피해를 최소로 줄이는 배쪽을 쭉 가른다. 죽은 지 오래라 피는 나지 않지만 딱딱해진 시체를 편히 가르는 소리에 을노는 혀를 찼다. 화를 내고 있구만. 고개를 괴고 소리를 듣는다. 찌익하고 가죽을 발라내기 위해 칼로 흠을 내고 손으로 잡다당기는 소리가 들린다. 피에 젖은 단검을 물에 행구어 가죽에 피가 묻지 않도록 조심하며 계속해간다. “고기는 먹지 않을것이니까 버려도 된다.” 특유의 피비린내가 나자 을노가 말했다. 다시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이상하게 생각하고 벌떡 일어난다. 단검을 물에 헹구는 자례의 손을 낚아챈다. 후두두둑 핏물이 떨어져 부엌바닥을 적신다. “이 바보가...” “살짝 비었어요. 이것가지고 제가 바보라는 것인가요?" 얄밉게 말하는 자례를 한대때려 줄까하다 마른천을 당겨와 손을 누른다. 하지만 금새 피로 물든다. 하얀 손에서 흐르는 핏물은 점점 그 색이 진해져만 간다. 한방울씩 물에 뒤섞여 빠르게 손아귀에서 빠져나간다. 마치 잡을수 없는 그 무엇처럼. 69 다시 물에 손을 헹군다. 하지만 금세 핏물이 올라온다. 을노는 화를 내며 자례의 마른 천으로 자례의 손을 감았다. “정신을 어디다 두고 하는거냐!” “왜 형이 내게 그런말을 했는지 생각했어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자례는 무덤덤하게 말한다. “알수 없군요 자휼. 나는 정말로 형을 좋아하는데, 형에겐 그것이 짐으로 여겨지는 모양입니다. ” “그렇지 않아.” “스스로 성장하려고 노력했는데 그것이 흡족하지 않았던 걸까요. 형의 도움없이 스스로 서기위해 노력했는데 고작 결과가 이것이란 말인가요.” 빤히 자신을 바라보며 대답을 구한다. 하지만 을노가 알 리가 없다. 자조적인 표정으로 자례가 고개를 돌린다. 아무말도 하지 않지만 머릿속은 복잡할것이다. 다시 가죽을 벗기는 손길이 느릿느릿하다. 을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지. 을야가 무사히 컸다면 나도 저런 일이 있었을까. 서로를 좋아하면서도 두려워하고 이해하려 노력하면서도 항상 오해로 끝나고. 마음속 깊은 생각을 끝내 말하지 못하는 저런 바보같은 짓을 되풀이하게 되었을까. “바보같이... 다 말해버려라.” “...무엇을?” “네가 형에게 느끼는 것이나 원하는 것이나 모두 말해라. 넌 이상하게 속으로 삭이기만 하는구나. 그것 안좋은 것이다. 너 스스로를 속이고 타인을 조롱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니?” 자례는 잠시 손을 멈추었다. 낮게 조소하더니 을노를 바라본다. “다? 내 감정을 솔직히?” “그래.” “안됩니다.” “왜?‘ 을노가 딱하다는 듯 말했다. “내가 볼때 너도 자휼도 서로를 미워하거나 싫어하지 않아. 목래에서 사이가 좋았잖아? 왜 지금은 그렇게 지내지 못하는 것이냐?” “지금 상황에 어떻게 그럴수가 있습니까!” 자례가 결국 버럭 화를 내었다. “더이상 목래의 여유로운 태수도, 깐깐한 군승도 없어요! 이유도 없이 성을 잃은 태수와 주인을 잃어버린 책사가 존재하고 있다구요! 병든 아우를 동정하던 형도 없고 그를 위로하려 웃던 아우도 없어요! 여기 있는 것은 그저....!” “....그저 뭐?” “....” "그래, 그저 뭐냐?" 처음으로 말문이 막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결국 스스로 지쳐 그 자리에 주저앉고는 머리를 감싼다. “을노는 우리 형보다 더 엄해요.” “네 형이 자애로운 것이겠지. 그래 여기 있는 너는 무엇이냐? 형을 만나기 위해 고생길에 들어온 아우인가?.” “...그래요.” “거짓말이구나 그건.” “예?‘ “너 이제 얼마 안남았지?” 자례의 굳어지는 표정과 달리 을노는 아무렇지도 않는 듯 물었다. “유견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알았다만... 너 혹시 네 죽을 날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더냐?” “...그런거 알 리가 없잖아요.” 을노는 일어나려는 자례의 팔을 잡아 앉혔다. 뿌리치려는 자례에게 을노는 무표정하게 마주보았다. 기백에 눌린것인지 자례가 다시 앉자 을노가 말했다. “형을 만나면 뭘하고 지낼거지?” “....굉장히 사적인 이야기군요.” “너 역시 우리 형제의 일에 관여하지 말라고 말하려는 것이냐?” “예?” 이해할수 없다는 의아한 눈동자지만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있다. 항상 부드럽게 웃던 을노라 지금의 표정은 공포스럽게 느껴진다. 자신도 모르게 뒤로 주춤물러나게 만든다. “난 너를 잘 모른다. 같이 지냈던 것은 자휼이니. 자휼은 단지 널 다시 만나길 원했을뿐이지 그 이상을 바라지는 않았다. 하지만 너는 다르구나.” “...선인의 직감이십니까?” “그리고 나는 그것이 너의 수명에 관련된 것 같은데.” “어째서요?" “너 형을 찾아내 안정시키려는 것이 아니냐? 새로운 가족이라도 만들어주고 싶은 것이 아니냐?” “글쎄요.” “그것이 네가 알고 있는 그 시간까지 너무 짧아 바둥거리고 있는 것이 아니냐?” “...” “과연 자휼이 그것을 원한다고 생각하느냐? 자휼 역시 널 위해 시간을 내어주고 있는 것을 모르겠니? 아마도 자휼은 네가 남은 시간을 자신에게 사용하는 것을 원하지 않을거야." “....그만해요.” "너희 둘다 서로 자신이 원하는 결말을 내기 위해 서로에게 짐을 지워주고 있는줄 모르느냐?" 깜박깜박 눈을 움직여 눈물이 나오지 않게 하려 애를 쓴다. 좋은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역시 선인인지 마음을 들켜버린 듯 싶다. 유견도 그렇고. 혹시 유번님도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내 마음이 나약해져 버렸나. “난 형을 좋아해요. 형이 날 싫어해도, 난 형이 좋아요.” “형이 널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도 넌 알고 있어. 그러기때문에 죽고 나서 형이 혼자가 되는 것을 걱정하는 것이지? 자휼이 쓸쓸해질 것을 알기때문에.” “아니, 그건 정말로 모르겠어요. 그게 아니라... 그렇게 생각했는데 아니였어요.” 깜박깜박 몇 번을 더 하다가 결국 머리를 숙여버린다. 어릴때는 싫어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귀찮아 한다 여겼고 그런 형에게 미움받을까 두려워하며 지냈다. 병이 들었을때 형이 자신을 돌보는 모습에 자신을 조금쯤은 좋아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형을 귀찮하고 있다는 걱정도 들었다. 형을 따라 전장을 돌아다니며, 비록 장수가 아니지만 어엿하게 장성한 한사람의 몫을 하게 되자 스스로 마음이 편해졌다. 대등해진 느낌. 더 이상 짐이 되는 것이 아닌 정말로 그의 동생이 된듯한 느낌이였다. “목래에서 즐거웠어요. 바보같이 내가 즐거우니까 형도 즐겁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나는 그곳을 지키고 싶었어요. 을노의 말이 맞아요. 내가 죽기 전에 형이 목래에서 다른 가족을 찾길 원했어요.” “...” “그런데 그게 아니래요. 즐거운 것은 저 하나였던 것인가요. 형은 그 동안 저 때문에 힘들었다고... 내가 자신의 동생이 된 것이 악연이라 했어요.” 측은심에 머리를 쓰다듬어주지만 고개를 젓는다. “이젠 내가 어떻하면 좋죠? 저는 지금까지 형을 위해 움직였었는데...스스로 서본일이 없는데...이제와서 형이 나 스스로 걸어가라하니...제 멋대로야!” 갑자기 벌떡 일어난 자례는 다시 칼을 들고 홧김에 쫙소리나도록 가죽을 발라낸다. “그래, 혼자서 잘해봐라. 내가 혼자 못살줄 알고?! 흥이다. 흥. 그 칠칠맞은 성격으로 얼마나 잘사는지 꼭 보고 말겠어!” 순식간에 변한 분위기에 을노는 잠시 멍하게 자례를 바라보았다. 씩씩거리는 아이는 화난듯 하다. 황당한 웃음이 나오기도 전에 유견이 부르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린다. “가보세요. 내가 정리할수 있어요.” “그래.” 을노가 부엌을 나가자 순식간에 정막이 찾아온다. 밖에서 유견이 을노에게 뭐라 소리치는 것이 가뭇하게 들리는데 점점 그 소리가 멀어져간다. 듣기위해 귀를 귀울이지만 들리는 소리는 알수 없는 울림뿐이다. 귀가 아프게 울리고 눈이 아파온다. 뚝뚝거리며 칼을 든 손에 눈물이 방울져 내린다. 보고싶습니다. 당신에게 매달린다하신들 그저 저 멀리서라도 한번만 단 한번만 보고 싶습니다. 눈물에 미끄러진 칼이 또 하나의 손가락을 베고 지나간다. 하지만 아프지는 않는다. 단지 지독하게 귀에서 울리는 소리에 고개를 흔들뿐. 마고는 고개를 들었다. 바스락 거리는 소리에 창을 들었다. 몸을 긴장시킨다. 말? 말 특유의 타박거리는 소리가 들리며 곧 검은 말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낸다. 일반 말보다 큰 몸집에 단번에 명마라는 것을 알수 있는 휼륭한 말이다. 그 검은 말은 이리저리 주위를 둘러보다 마고를 발견하고는 홰를 친다. “엇?!” 자신에게 달려드는 말을 피해 몸을 날리려는데 뒤에서 누군가 소리친다. “그만 둬!” 거짓말처럼 그 말은 씩씩거리면서도 뒤로 물러난다. 말뒤로 다리만 보이는 그가 중얼거린다. “거기 괜찮소?” “그런 것 같소.” 일어나서 앞에 선 그를 마주하고는 서로 놀라 어깨를 으쓱한다. “또 만나는군요. ‘무랑’.” “허, 아직도 만곡에 있었습니까?” 자휼은 쓰린 옆구리를 쥐고 흑염을 불렀다. “좋은 말이군요. 당신것입니까?” “성격이 사납지만 잘 달리는 놈이죠.” “말을 데리려 올라갔던 것이였습니까?” “뭐...크!” 촐싹거리며 움직이던 흑염의 엉덩이에 등을 치이자 상처가 아파 신음한다. 자휼은 화난 표정으로 흑염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때려 물러나게했다. “상처가 생각보다 큰 것이 아닐까요. 어떠십니까? 다시 저희 막사로 돌아가지 않으시겠습니까?” “난 여진인들과...” 연관되고 싶지 않소. 하지만 말을 끊어버린다. 저 마고라는 사람은 분명 반괴, 정안의 혼혈이라 했었다. 내가 이말을 한다면 그를 여진인이라 하는 것과 다름없으니 미안한 일이지. 마고는 자휼의 생각을 알아버렸는지 피식 웃고는 다가가 부축해준다. “그럼 말도 못타는 이상태에서 마을로 내려가실 생각입니까? 저 마을은 외지인을 재울만한 곳도 없던데 어쩌시려구요? 아니면 저 마을에 사십니까?” “신경쓰지 않아도 되오.” “하지만 저 마을엔 이런 상처를 치료할만한 사람도 없지 않습니까.” 자휼은 마고를 밀어내었다. “내 생각이 지나친것인지 모르겠지만, 당신이 모시는 사람이나 당신이나 날 끌어가려고 애를 쓰는 것 같군.” “당신의 힘이 굉장히 마음에 드셨다고 하더군요. 그분께서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 사냥을 나오시는 분이니까요.” “....뭐하는 사람이지?” “모시는 자에 대해 왈가 왈부하는 것은 실례라 알고 있습니다만.” 마고의 말에 자휼은 재빠르게 등을 돌렸다. “그렇다면 나는 이만 가보지.” “당신은 가지 못해요. 그 상처, 저 촌락으로 가도 고치지 못하다는 것을 당신도 알고 있어요. 이곳에서 제일 가까운 도성까지 말을 타고 이틀이니 그곳으로 가지도 못하지요.” “그렇다면 어쩌라구?” 신경질적으로 자휼이 다시 마고를 바라보았다. “이보게. 나는 근간에 여진족에게 엄청난 상처를 입었네. 더 이상 그들과 얽히고 싶지 않단 말이네. 이 상처로 죽던 살던 내가 결정할 일이야!” “그렇다면 여진족을 구하다 생긴 상처니 목숨까지 넘겨주게 생겼군요.” “...허!” 빤히 자신을 바라보는 마고의 덩치는 좀 말랐지만 자신과 거진 비슷했다. 반괴라 그런지 특유의 알수 없는 분위기를 풍기며 마고는 품안에서 무엇인가를 꺼내들었다. 친첸이 자휼에게 준 목걸이였다. 자휼은 산위로 올라가기 전 배웅한 마고에게 던졌었던 그 목걸이. 지금 다시 보니 그것은 늑대의 이빨같았다. “그거 아직 자네가 모시는 그 사람에게 주지 않았는가?” “자존심이 강하신 분이니 화를 내실것이 뻔해 제가 몰래 버리려고 했지요.” “...” “어떠십니까. ‘무랑’. 여진족에게 입은 상처라면 그들에게 치유받는 것이 마땅하다 생각지 않으십니까?” 마고는 목걸이를 던졌다. 자휼은 반사적으로 날아오는 것을 받았다. “저와 함께 기산성(起山)으로 가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기산성?” “예. 무랑에게 해가 될일은 전혀 없을 것입니다.” “자네 주인은 그렇다 치고 자네는 왜 날 데려가려 하는가?” “...글쎄요.” 마고는 처음으로 미소지어보였다. 어설프고 서글퍼보이는 웃음이라 을노는 마치 그가 울고 있다 느꼈다. 그리고 그 미소가 자례의 미소와 많이 닮아있다는 것도. 빠르게 아우의 환영이 그에게 스쳐지나간다. “기산성은 작지만 활기찬 곳입니다.” “그런데?” “하지만 혈족은 단 한명도 없지요.” 반괴의 입에서 나오는 혈족이라는 말에 자휼은 묘한 느낌을 받았다. 우리대로 치자면 반괴는 혈족이 아니다. 하지만 그가 반괴이기 때문에 정안인이 아니다라고 말해주기엔 그의 미소가 마음에 걸렸다. 아우의 미소를 닮은 그 미소를 짓는 자를 모질게 내칠수가 없었다. “바보같군...” 그 아이에게서 상처받아 떠나온 것도 잊고는 웃는 모습하나가 비슷하다는 이유에 모질게 대하지 못한다. 대답을 기다리는 마고의 표정에 자휼은 물었다. “자네는 내 모습이 꺼려지지 않는가?” 마고는 대답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랑’은 제가 반괴라 꺼려지십니까?” “...잘 모르겠군.” 바람이 세차게 불어와 옷자락을 펄럭였다. 흑염이 저 멀리 산위를 바라보며 운다. 나는 모르지만 아마도 이 바람에 아이의 쓴 풀향이 느껴지는 것일까. 그리운 눈으로 안절부절하며 산위를 바라본다. 어서 다시 산위로 오르자는 듯 자신의 등을 입으로 밀치며 발을 구른다. “자네를 따라가지.” “알겠습니다. ‘무랑‘” “...수해라고 부르게.” “저는 마고입니다.” 못내 아쉬워하는 흑염이 자꾸만 산위와 주인을 번갈아본다. 어째서 주인이 그 향기에서 멀어지려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주인의 옷자락을 입에 물려 하지만 시린 바람은 그것을 방해한다. 흑염은 잠시 산위를 바라보며 크게 울고 앞서 걷고 있는 주인을 따라 걸어갔다. 70 태진은 이해할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이미 오래전부터 기다리고 있었던 듯 탁자 위는 빈 술병이 두개나 있었다. 태진이 안주를 들고 나가는 시녀에게 병을 치우게 만들고 비스듬하게 누워있는 레이첸의 앞에 앉았다. “제 궁에서 형님을 보게 될줄을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어디갔다 왔을까.” “이상하십니다 형님? 무슨 일로 아우의 행선지가 궁금해지셨나요? 형님이 말씀하신 5왕자가 어디로 갔는지도 알아보고 또 간만에 바람도 쐬고 그랬습니다.” “흥, 네 그렇게 날 믿고 궁밖출입을 자주하면 언젠간 큰일날 것이다.” 태진의 어리둥절한 얼굴에 레이첸은 재빨리 일어나 앉았다. “부탁이 있다.” “얼굴은 부탁이 아니라 명령같은데요.” “곡양으로 사람을 보내 누군가를 데리고 와라.” “곡양?” 태진이 고개를 끄덕인다. “형님께서도 벌써 아십니까?” “뭘?” 모르는군. 곡양은 얼마 전 5왕자의 성으로 보낸 사람이 올린 서신에 적혀 있던 지명이다. 5왕자는 곡양으로 사냥을 나갔다고 했었어. 태진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사냥을 나갔다 하면 레이첸도 사냥을 나갈 것 같아 바로 말하지 않는다. “전혀 모르는 곳이군요?‘ “도성 동문으로 나가 북쪽으로 4일 정도 달리면 되는 거리야.” “오호라. 그럼 보름간의 부재는 그곳이였습니까? 왜, 근사한 여인이라도 만나신겁니까?” “그렇게 비꼬지 말고.” 레이첸은 머리가 아프다는 듯 눈을 감았다. “난 두 번 다시 그곳으로는 안갈것이다. 하지만 누구를 좀 데리고 와야 하는 일이 생겼다.” “무슨 일입니까? 저는 나가있는 동안 형님께서 열심히 검연습을 하고 계실줄 알았죠.” “그것도 그것이지만...아휴! 내 두 번 다시 곰사냥을 하나봐라!” 레이첸은 신경질 적으로 술을 따라 벌컥 들이켰다. 태진이 말리기도 전에 레이첸이 씩씩거리며 선수친다. “들어라. 곡양산 아래에 조그만 마을이 하나 있어. 몇가구 안돼. 그 중 마을에서 떨어져 곡양산 맞은편의 있는 산 아래 지어진 집이 하나 있다.” “그래서요?” “그곳에 사는 젊은 사내 놈을 잡아와.” “그게 다입니까? 산 아래 지어진 집에 사는 젊은 사내? 허, 마을 청년들 모두 끌고와도 책임지실수 있습니까?” “잠깐... 아픈 놈이야. 아니, 생긴건 비리비리한데 성질은 굉장히 사나워. 그래,정안족이야.” “그건 안되는 말씀입니다!” 벌떡 태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제의 명에 의해 황성으로 정안족을 입궁시킬수 없습니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부복하지 않는 건방진 놈들이라 모두 지방으로 내쳐진 것을 잊으셨습니까?” “한족 복장으로 입혀가지고 와. 그런건 잘 알면서 왜그래?” “그러다가 황제를 만나면요? 옷을 바꿔입었다 한들 그놈들의 자존심이 어디로 간답니까? 과연 고개를 넙죽 숙여줄까요? 그 놈들은 한족과 다릅니다. 옷을 갈아입힌다고 해서 속까지 변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저는 절대 반대입니다.” “아, 그게 안된다니까. 나도 데려오기 그놈 데려오기 싫어. 하지만 내가 데리고 있을것이 아니라 체이첸형님이 데리고 오라는 거야. 그래서 나도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고.” “2왕자가요?” 멈칫 태진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피식 웃는다. “자세히 말해주세요.” “나도 잘 몰라. 체이첸형님이 이젠 영웅서에 흥미를 가졌는지... 아무튼 이야기가 길어...15놈이 문제가 된것같은데...그래서 15번째 패가...거, 빌어먹을 곰사냥.” “...?“ 중얼 중얼, 자신만이 알아들을수 있는 말을 편한대로 나열하는 레이첸을 보고 태진은 웃고 말았다. 차근차근 물어봐야 겠군. 괜찮아. 어차피 성을 비울때 이런일은 예상하고 있었으니 다행이지. “처음부터 합시다. 2왕자에겐 왜 가셨습니까? 아니면 부름을 받았습니까?” “형님의 패 때문이야. 그게 내게 있어서 돌려주러 갔었지.” “외출하실 때 2왕자의 패를 가지고 나가셨나요?” “그럴 리가 없지. 난 내패를 가지고 나갔지. 뭣하러 번거롭게 형님에게 패하나 달라고 하겠나?” “그럼 어떻게 2왕자의 패를 가지게 되었죠?‘ “그게... 아마도 그 놈이 가지고 있었던 것 같은데 내가 그것을 내것이라 생각하고 주어온것같다.” “그놈?” “그래. 내가 말한 그 비리비리한 정안족말이야.” 태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2왕자가 정안족과 통하고 있나? 이거 잘만 이용하면 좋은 이야기거리가 되겠는걸. “그래서 패를 갖다주러 2왕자에게 가신거군요.” “그래. 갔더니 형님은 내게 영웅서를 읽어주고는 그 영웅서에 나온 놈이 자신의 15번째 패를 가지고 갔다 하더군. 그런데 내가 주어온 패가 15번이였던 거지.” “그래서 그 영웅을 만난 형님에게 그를 성안으로 데리고 오라고 했던 거군요.” “그래. 그런데... 아 정말. 난 그 곡양촌에 다시 가고 싶지 않다.” “좋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그 영웅이 어떻게 2왕자의 패를 가지고 있었는지도 아십니까?” 혹시 그 전에도 몰래 정안족을 왕성으로 끌여 들이는 것일까. 그렇다면 이건 명백히 황제에 대한 반역이다. 정안족의 왕성 출입금지는 황제의 칙명에 의해 생긴것이니까.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레이첸은 예상과는 다른 대답을 해준다. “아 그게, 15놈이 그 놈에게 주었을거라 하더군.” “예? 쉬첸이요?” 태진은 예상하지 못한 인물의 등장에 고개를 들었다. “쉬첸이 2왕자에게 영웅을 성안으로 들이기 위해 패를 빌렸던 모양이야. 뭐, 잘은 모르지만 그렇겠지. 체이첸형님은 호락호락 하지 않으니 왕성에서 정안족 한명쯤 잘 숨길수 있다 생각했는지도 모르고. 아무튼 그 목래의 영웅이 어지간히 마71 음에 들었던 모양이겠지. 패를 내준 것을 보...” “목래?!” 털컹하는 소리를 내며 의자가 뒤로 물러났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태진이 레이첸을 노려본다. 어리둥절한 레이첸은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래. 사계(四節) 중 겨울(冬), 난공(難攻) 12성 목래의 석빙계였어. 왜 그래?” “아...아닙니다. 그보다 그 영웅서 저도 볼수 있을까요?” “왕궁 서관에 보관되어 있겠지. 왜? 벌써 일어나는 거냐?” 태진은 황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늘어진 레이첸도 붙잡아 일으킨다. “그 일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보다 연습이나 하시지 않구요. 5왕자는 열심히 연습중이라는데 말입니다.” “뭐? 그래? 그럼 나도 할까.” 정신이 퍼뜩 든 표정으로 레이첸이 자신의 시종을 끌고 궁을 나가는 것을 배웅한 태진은 서둘러 서관쪽으로 달려갔다. 서관을 정리하고 있던 비서랑(秘書郞) 들이 놀라 부복했다. 씩씩거리며 온 태진은 인사도 받지 않고 손을 내밀었다. “영웅서.” “몇권말입니까?” 고개숙인 비서랑이 묻는다. “뭐?” “영웅서는 시대와 지형, 육공과 수공, 사계로 분리되어 있는 100여권이 넘는 전서입니다.” “젠장!” 태진은 가득차 있는 비단과 종이로 만들어진 책, 대나무로 이루어진 죽간을 바라보며 화를내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다른 비서랑에게 다시 물었다. “사계중 겨울, 난공12성에 관한 것도 있나?” “아, 그거라면 아직 완성된 책은 아닙니다만 이쪽에서 여진자 필본을 뜨고 있습니다.” “가져와라.” 관리가 길게 펼쳐진 종이를 가지고 오자 태진은 근처의 탁자에 앉아 목래편을 뒤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태진은 필본을 갈갈이 찣어 버리고 서관을 나섰고 관리들은 그 종이조각을 다시 모으며 한숨을 쉬었다. 왕성은 원래 한족의 것이였고 모든 문서는 한자로 되어있었다. 그것을 지금 여진자로 모두 옮기고 있다. 모든 것이 황제인 아골타의 한족 억압정치와 관련이 있었지만 황제의 아우인 히우루(완안 희윤)가 만든 같지도 않는 여진 문자인 여진자 때문이였다. 웃기는 사실은 이 여진 문자인 대자(大字)가 사실 거란문자를 모방한 것이라는 거다. 결국 거란문자와 별 다를 것이 없는 그것을 다시 여진 대자로 바꾸니 얼마나 짜증나는 작업인가. “돌겠군.” 서관을 책임지는 종사(宗事)는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한족이 왕궁에 들어오면 한자로 거란이 왕궁으로 들어오면 거란문자로, 여진이 왕궁으로 들어오면 여진대자로. 책은 계속 그 문자를 바꾸어 필본된다. 그렇다고 당장 그 문자를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모두들 자신에게 익숙한 것으로보니 대부분은 한자를 본다. 그러니 무슨 짓이란 말인가. 이게. “정안족이 왕궁으로 돌아오면 가림토(加臨土)로 바뀌야 할지도 모르겠군.” “정안족은 여진이나 거란이랑은 달리 글쟁이도 많아 우리들은 내쳐질걸요.” “말이 그렇다는 거야.” 어쨌든 그들은 다시 귀한 종이를 펼치고 필본을 계속 해나갔다. 따뜻한 공기가 기분좋아 악운은 피식 웃었다. 누군가 팔다리를 주무르고 있는데 그것이 너무도 기분이 좋아 눈을 뜨고 싶지 않다. 하지만 누군가 머리를 세게 치는 느낌에 놀라 눈을 떴다. “일어났네요.” “이봐, 자네 괜찮은가?” “...아?” 이곳은 어디지?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자신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린다. 대부분이 노인들과 장정들이다. 기억을 더듬어 자신이 왜 여기에 있는지 기억해내려고 한다. 하지만 냉큼 앞자리에 앉은 작은 꼬마가 말한다. “당신 한겨울에 왜 수영을 하고 있었어요?” “동자야, 수영이 아니라 빠진것이겠지.” “그래, 그리고 가슴에 상처가 있는걸.” 그렇게 말한 장정은 상처난 가슴을 툭툭친다. 그 찡한 아픔에 악운은 버럭 소리쳤다. “아프다구!” “아 미안미안.” 장정은 멋쩍게 뒤로 물러난다. 악운은 그제야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는지 이해한다. 고개를 돌려 아마도 집주인같은... “이봐. 꼬마야 네가 주인이냐?” “주인님이 외출중이니 현재는 제가 관리하죠.” 동그랗게 눈을 뜬 동자를 어깨를 으쓱이며 자랑한다. 고맙다고 인사하려는 마음이 달아나 버린다. 누군가 죽을 떠와 그에게 가져온다. 그러자 동자가 앙칼지게 외친다. “자자 이제 모두들 나가세요. 여기는 대장간이지 원숭이 구경하는 시장바닥이 아니라구요!” 하나둘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나가며 악운에게 몸조리 잘하라는 인사를 한다. 그들의 표정에는 하나같이 이 혹한 겨울에 계곡에서 살아나온 그를 신기하게 생각하는 것이 들어난다. “원숭이가 맞구만.” “헤에? 죽 안먹어요?” “아니. 고맙다.” 악운은 일어나 앉아 가슴쪽의 상처를 살핀다. 워낙 몸이 튼튼한건지 실제로도 그다지 큰 상처가 아니였는지는 모르지만 견딜만 하다. 방을 둘러보자 젊은 사람이 살고 있는 방이라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정안족...” “어? 어떻게 아셨어요? 주인님은 정안족이세요.” 동자가 시끄럽게 떠들어대지만 악운은 그 작은 얼굴을 밀어내고는 벽을 바라보았다. 길고 넒은 하얀 옷자락에 검은 동정 정안의 옷이다. 당연히 정안족이 사고 있다고 생각하기 마련이지. “모두 나가셨냐?” “예. 덕에 이곳에만 빈방이 생겨서 당신이 이곳으로 옮겨 왔어요. 아휴 , 대장간이 여관도 아니고 광부터 방까지 손님이 왔다 갔다 하네요.” 동자는 알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다. 악운은 죽을 떠먹으며 방안을 살펴보았다. 깨끗하게 정리된 방이라 방주인이 깔끔한 성격이라는 것을 알수 있었다. 그리고 방안에 풍기는 미묘한 이 향. 악운은 이리저리 코를 킁킁거리다가 작은 서랍을 열어본다. 동자가 놀라 외쳤다. “무슨 짓이에요! 공자의 물건을 함부로 만지지 말아요!” “역시. 동백향이라.” 서랍안에 들어있는 동백향수가 담긴 병을 들고 흔들어 본다. “여기사는 공자, 검은 머리에 작은 키의 사내지?” “흥. 정안족은 보통 그렇게 생겼잖아요.” “칼을 세자루 찬 사내와 산에 올라갔잖아?” “어... 공자를 알아요?” “묘한 인연이네.” 악운은 향수를 다시 서랍에 넣고 밀어넣었다. 몸이 풀리는 듯 상처가 아린다. 잠시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악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송으로 돌아가야겠다. 할머님을 만나야겠어. 슬슬 장난을 칠때가 지난 것 같군. 눈을 감자 자신을 향해 뛰어오던 그 알수 없는 묘한 분위기의 사내와 가슴에 상처를 낸 붉은 머리의 사내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배로 갚아줘야겠지.” 그의 혼잣말에 동자를 고개를 갸웃하고는 방을 나가는 것이였다. ------ 단설의 역주는 인용과 개인적 견해가 들어간 글입니다.(맹신(盟信)사양. 도용씁쓸)-------- 비서랑(秘書郞) 궁중의 도서 및 문서를 담당하던 관직. 비서는 원래 천자가 비장하는 서적이라는 뜻이다. 비서 낭중도 같은 같은 관직이었으며, 명문 자제로써 임용하였는데, 보통 관리의 첫출발은 비서랑으로 들어가는것이 통례였다. 71 무거운 공기를 타고 아침식사가 대강 끝나자 모두들 짐을 챙겼다. 짐이라고 해봐야 검과 을노가 잡아온 꼬리가 셋달린 여우가죽만 들고 내려가기로 했다. 어차피 혈족 누군가, 아니라면 자휼이라도 다시 그 집으로 들어갈때가 있을테니 남겨둔 것들은 유용하게 쓰일것이다. 모두들 몸을 추스르는 동안 자례는 약간 멍한 표정으로 여우가죽을 손으로 쓸어보이며 딴생각에 잠겨있었다. 을노가 그 옆으로 가서 앉았다. “마음을 결정했니?” “아직은...” “혼자 선다하더라도 넌 병자이니 치료가 필요해. 그렇다면 난 네가 도성에 정착해 왕씨의 옆에서 일하는 것이 좋다 느끼는구나. 넌 자휼처럼 여행할 수 있는 몸이 아니니까.” “그렇긴 합니다만...” 평소와는 달리 자꾸만 말꼬리를 빼는 자례의 뒷모습은 불안하고 두려워보인다. 그것을 증명하듯 손가락은 상처투성이다. 여우가죽을 벗기라고 했더니 자신의 손가죽을 벗기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내려가자 부르는 백라의 말에 을노는 여우가죽을 자례에게 넘겼다. “네가 가지고 내려가라.” “몸도 성치 않는 아이에게 왜 짐을 떠 맡기는가? 이리 주게 내가 하지.” 유번이 대신 받아들려고 하자 을노는 고개를 저었다. “짐이 필요한 것은 유번님이 아닌 자례일겁니다.” “...뭐?” 짐이 필요해. 지금 당장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고민을 잊기 위한 짐이 필요해. 자례는 그것을 받아들었다. 을노가 자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내려갈때는 아무 생각할 필요 없다.잡념은 험한길을 힘들게 하니까.” 사박사박하는 발자국을 남기며 모두들 빠른 걸음으로 난곡을 등지기 시작했다. 곡양의 모도리까지만 가면 말을 타고 떠날것이니 조금은 다리를 피곤하게 하는 것도 된다. 을노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길을 만드며 빨리 빨리 걸었다. 유번이 쉬어가자라는 말도, 백라가 힘들다는 말도 모두 들렸지만 청각을 끄는 소리는 자신의 바로 뒤에 따라오는 자례의 숨소리였다. 잘 따라오네. 아니 힘들게 따라오는 건가. 아무튼 지금은 날 따라오는데 아무 생각이 없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걸음을 멈추면 간간히 들리는 한숨소리에 짜증이 난다.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상상이 가는 바람에 더욱 빠르게 내려가는 것이다. 하루 걸리는 거리를 해가 지기도 전에 촌락이 보이는 언덕에 도착했다. 유견과 유번도 이마의 땀을 훔쳐 내었고 백라는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아 두 손으로 허벅지를 두드렸다. 을노가 뒤를 돌자 비를 맞은것처럼 땀에 젖어있는 자례가 헉헉 거리며 멍하니 땅을 바라보고 있었다. “잘했다. 이젠 이리 줘라.” “...예” 후들 후들 떨리는 팔이 짐을 넘겨준다. 그것을 받으며 을노는 눈을 내리깔았다. 잘했다. 이제는 네 짐, 내가 받아주마. 그러나 잊으면 안된다. 네가 지고 온 짐의 무게를. 그리고 그것을 옮겨 지는 나를. 내가 네 짐을 짐으로 해서 너가 다른 이의 짐을 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았으면 한다. “자. 이젠 집으로 들어가 쉬십시다.” 유번이 밝게 말했지만 백라는 잠시 망설이더니 말했다. “시간이 생각보다 늦어졌습니다. 저희는 말을 찾은다음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그런...아쉬운걸.” “자례도 가는가?” 유번의 안타가운 말에 자례는 잠시 눈동자를 굴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말을 끌어오겠습니다.” 말을 가져오기 위해 을노가 마을쪽으로 내려갔다. 묵묵히 침묵이 계속되었다. 바람이 모두의 머리를 날릴때 이리저리 언덕위에서 아래를 내려보던 유견이 불쑥 내뱉었다. “바로 이 자리야.” “무슨 소리요? 형님.” “그 못난 제자가 망부석처럼 앉아있던 자리가 바로 여기야.” 형의 이야기에 자례가 고개를 들었다. 유견이 자례를 눈으로 불렀다. 천천히 다가가자 유견이 자리를 피해준다. “네가 곡양으로 온 것을 알고는 그놈, 시간날때마다 이곳으로 달려왔지. 그때는 무엇을 하는지 잘 몰랐는데 여기서 보니 그놈이 뭘 하고 있었는지 알겠구나.” “...” 유견이 비켜준 자리에 자례가 천천히 들어섰다. 위태한 언덕끝자락이다. 여기서 무엇을 하길래 망부석이 되었다는 것일까. 하늘은 맑고 깨끗하나 차가운 맞바람도 불어온다. 이해할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례가 유견을 바라보자 유견은 언덕 밑을 손짓했다. “...!” 을노가 문을 두드렸다. 동자가 조르르 달려와 문을 열자 을노는 뭐라 이야기를 하고는 마당에 매어져 있는 말 세 마리를 끌고 집을 나온다. 동자는 그가 나간후 문을 잠그고 마당을 가로질러 방안으로 들어간다. “아주 잘보이지?” “...예.” 아주 잘보입니다. 그 자리에서는 유번의 모도리가 한눈에 들어왔다. 안에 사람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정도로 아주 자세히 보인다. 가죽을 벗기면서 흘렸던 눈물이 또 나오려는지 눈이 뜨거워진다. 등을 돌려 모도리에서 시선을 돌린다. 더 이상 보았다간 울어버릴 것 같다. 자신을 바라보는 유견에게 혼잣말을 하듯 낮게 말한다. “전 제가 잘못본줄 알았어요. 꿈인줄 알았죠.” “...” “형이였군요.” “그래.” “유견님.” 자례가 잠시 감정을 가라앉힌후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예전의 그말...믿어도 됩니까? 제가 알고 있는 시간이 잘못됐다는 그말이 진심이십니까?” “그래. 넌 더 오랜 시간을 보낼수 있다.” “감사합니다.” 허리를 숙여 감사의 뜻을 알린다. 다시 고개를 든 자례는 다시 예전의 날카로운 표정으로 돌아와있었다. 자례는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백라에게 말했다. “도성으로 가 왕씨를 뵙겠습니다.” 백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번은 안타가운 표정으로 자례를 안아주었다. 을노가 말을 가지고 와서는 자례의 말을 듣고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유번님, 제말을 그때 4왕자가 가져가서... 유번님의 말을 제가 대신 가져가도 되겠습니까?” “그래. 그리고 이 말은 누구것이지?” 유번은 처음보는 거대마를 가리켰다. 푸릉푸릉 사나운 표정의 말을 유번의 손가락을 물려는지 입을 벌린다. “4왕자가 두고간 말이라 합니다. 늑대 때문에 마을을 나갔다고 하는데 어제 마을로 돌아왔다고 하더군요. 모도리에 묶어 놓고 있었다 합니다. 뭐, 그가 내말을 가져갔으니 대신 타고 있어도 되겠지요.” “사나워 보이는데.” 백라의 말이 무섭게 그 검은 말은 딱소리를 내며 이빨을 드러냈다. 워낙에 큰 말이라 고삐를 잡아도 사람이 끌려갈 정도다. 그 모습을 보고 백라는 재빨리 자신의 말에 달려가 올라탔다. “을노 자네가 그 사나운 말을 타. 자례가 유번님의 말을 타고.” “아 잠깐만요. 혹시 제가 ...” 푸릉거리는 거대말에게 자례가 다가갔다. 유번이 냅다 자례를 끌어당겼지만 유견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니 자휼의 말과 같은 종같은데? 혹시 네가 저 말을 탈수 있을지 모르곘구나.” “같은 종은 아닙니다만 말은 목래에서 많이 다루었으니까요.” 처음엔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거나 물려 덤비던 그 검을 말도 천천히 손을 뻗어 콧잔등에 올려놓자 냄새를 맡고는 순해진다. 자례가 마음에 들었는지 고개로 자례의 등을 떠밀어보고는 그 옆에 선다. 놀란 을노가 감탄한다. “이야. 놀라운데 과연 말을 치던 곳의 관리라 이거냐 자례?” “그것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아직까지 절 싫어하는 말은 못봐서요.” 살짝 웃으며 말한 자례는 그 검은 말에 올라탔다. 그 검은 등에 오르자 자신의 말이 떠오른다. 죽어버렸다고 했지. 조금은 쓸쓸하게 등을 쓰다듬던 자례는 고개를 들자 깜짝놀란다. 죽어버린 자신의 말 묵계보다 덩치가 큰 말이라 땅과의 거리차이가 생소하다. 위태위태하게 흔들리는 자례를 보고 을노가 걱정스럽게 묻는다. “정말 출발해도 되겠나?” “아, 예. 좀 천천히요.” “뭐, 정안인은 금방 말에 익숙해지니 괜찮을 겁니다.” 을노는 유번의 말을 타고 고삐를 당겼다. “이만 출발합니다. 유견님은 도성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그래. 자휼의 소식이 들리면 내게 바로 오게.” 셋이 달려가는 모습을 배웅한 유견과 유번은 멀뚱하게 서로를 바라보았다. “귀엽지 못한 아우야, 나도 도성으로 가야하는데 말이다.” “말 없수 형님.” 이 작은 마을에는 말 한마리 없었기 때문에 꼼짝 못하고 갇혀 버린것이다. 잠시 한숨을 쉬던 유견은 물었다. “...얼마동안이나 이 재미없는 마을에서 지내야하나?” “저 애들이 다시 올때까지. 별수 있소?” 유번은 태연하게 모도리쪽으로 걸어갔지만 유견은 망연자실하게 하늘을 올려보았다. 시끄럽게 굴며 자신을 구경하던 궁안사람들이 일순간에 조용해졌다.레이첸은 이상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든 사람이 부복하는 모습을 보고 얼른 뒤를 돌아 무릎을 꿇고 허리를 숙인다. “황제폐하.” “칼솜씨 하나는 여전히 뛰어나구나.” “과찬이십니다.” 황제는 몸을 힘들게 움직여 정원에 있는 탁자에 앉았다. 늙어서 힘이든다기 보다는 황제가 되고 나서 찐 ‘권력살‘ 때문에 몸을 움직여 하기 귀찮아하는 것이다. 하긴 여간해서는 궁을 나가는 법이 없으니 저렇게 찔만하다. 하지만 사냥이라도 좀 자주자주 나가지. “황제는 사냥도 함부로 나가지 못해.” “예?” 레이첸은 고개를 들었다.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고 있다는 표정이다. 당황해서 고개숙이는 레이첸에게 황제, 아골타는 한숨을 내쉬었다. “네 놈이 좀만 더 약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 “생각하고 있는 것이 그대로 얼굴에 드러나다니...넌 장수는 되어도 지도자로는 부족하다.” “알고 있습니다. 욕심을 부리고 있지도 않고요.” “그래서 문제라는 것이다.” 아골타는 혀를 찼다. 바보같은 놈. 황제가 자신의 궁을 찾아왔다. 그렇다면 자신을 높여보이기 위해 뭐라도 해봐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 놈은 정말로 권력에는 별생각이 없는 듯 하다. 시종들이 차를 내오자 아골타는 손을 들어 레이첸을 마주 앉게했다. 아골타의 가도위장수 하나가 레이첸이 가지고 있던 검을 받아 둘에게서 멀리 떨어진다. 아들이라도 황제에겐 위험인물이 되는 것이다. “어쩐일이십니까? 이곳까지.” “그냥 한번 와봤지. 왜? 이상하냐? 어릴때는 너도 날 자주 찾아오더니 철들고서부터는 도무지 내게 오지 않는구나.” “그야 성인이 되었으니...” 황제를 자주 찾아간다면 다른 형제들이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다른 형제의 눈치를 보고 있는가보구나? 거 참. 그런 것을 생각하는 것을 보면 네가 아주 둔한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아니 도대체 아까부터 제 마음을 어찌 아십니까?” 당황한 표정으로 레이첸이 물었다. 그 황당한 표정에 아직도 어린왕자시절의 순수함이 보여 아골타는 오래간만에 크게 웃었다. “그야 네 이마에 적혀있으니까 그렇지.” “예?” “체이첸놈은 머릿속에 도통 뭐가 들었는지 꿈같은 소리만하고... 태천놈은 제후가 된후에는 제일에 바쁘고...네놈이 제일 한가하구나. 하하하!” 아골타는 호쾌하게 웃었다. 그 모습에서 젊은 시절이 강하고 당당했던 장수의 모습이 남아있어 레이첸은 빙그래 미소지었다. 역시 지금은 아니더라도 이 사람의 과거를 난 존경할 수밖에 없다. “그러고보니 5왕자와 네가 내 생일날 검무를 보여준다던데 그게 누구생각이냐?” “그건...” “친첸의 생각이구나.” 대답할사이 없이 아골타가 먼저 말하고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넷째아들을 노려보았다. “너 친첸에게 질 것 같으냐?”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연습하고 있었습니다.” 레이첸이 씩 웃으며 검을 가진 가도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만약 싸우게 된다면지고 싶지는 않습니다.” “오냐, 넌 고집하나는 있는 아이니까 꼭 이기거라.” 아골타는 몸을 일으켰다. 시종들이 얼른 옷자락을 털기 위해 다가온다. “지지말아라. 그놈에게 지는 것은 치욕적인 일이다.” “알겠습니다.” 레이첸이 고개를 숙였다 들자 이미 아골타는 저 멀리 걸어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무슨말씀을 하셨습니까?” “태진. 언제부터 여기에 와있었나?” “아까부터요. 황제께서 오셨기에 그냥 저 뒤에 있었습니다.” “별말 없었다.” “하지만 표정은 굳어계시는군요.” “아 젠장. 정말로 나는 이마에 다 써있나?” 투덜거리며 검을 다시 잡는다. “친첸과 연관되지 말라는 이야기였다.” “예?” “그런게 있다. 너 역시 친첸과 너무 깊게 연관되지 말도록해라.” “...왜요?” 태진이 다시 묻자 레이첸은 짜증나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잔소리가 그리 많아? 뻔하잖아. 황제가, 그가 친첸을 왜 저 멀리 보냈는지 잊은거냐?눈치빠른놈이 왜 이건 모르는 척하는 거냐?” “그 성품이 사납기는 하지요.” “바보같구나.” 레이첸은 잠시 생각하더니 태진에게 아주 가까이 다가갔다. 뒤로 물러나려는 태진의 귀에 레이첸이 속삭인다. “황제는 그가 살아있는 동안 친첸을 가만두지 않을 생각이야.” 72 아침부터 분주하게 제비들이 화원을 드나들었다. 쉴세없이 들어오고 나가는 제비들을 보고 여관은 2층 창문을 열어놓고 창틀에 잣을 뿌려놓았다. 제비들은 스스로 오고가며 창틀의 잣을 주어먹었다. 수 많은 서신중 하나를 들고 하류사가 웃음지었다. “영창이 많이 실망한 모양이군.” “많은 준비를 하고 있었을테니까요. 왕씨께서 급작스럽게 취소하신거니...다들 실망했을것입니다.” “여관께서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시나?” 하류사가 스물네번째의 서신을 화로에 넣으며 여관을 바라보았다. 대필을 위해 팔을 걷고 먹을 가는 여관은 잠시 미소지었다가 고개를 젓는다. “대원으로 가신다면 아마도 전 잠을 이루지 못했겠죠.” “그래. 대원을 너무 오래 비웠어. 고영창도 이젠 철이 들때야.” “왕씨.” 여관이 그 고운 미간을 찌푸리며 조용히 말했다. “아무리 충신이라 한들 가황(假皇:가짜황제)의 자리에 오래 앉아있으면 그 마음이 변하기 마련입니다. 그가 못된 것이 아니라 그 자리가 그렇게 사람을 만드는 법입니다. 어떠십니까. 이제 슬슬 정말로 대원으로 돌아가셔서 가황에게 그 짐을 내려주시고 즉위식을 하시는 것이.” “...아직 일러.” 지금 움직인다 한들 아골타에게 경고만 해줄 뿐이다. 지금은 시간을 기다려야해. “하지만 여관의 말씀도 옳군. 아무래도 내가 돌아갈때를 준비해야 하는 것이겠지.” 하류사가 새로 날아온 스물다섯번째의 제비의 서신을 벗겨내며 말했다. “그렇게 하려면 내게 사람이 필요해. 그리고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지.” “명림씨 말씀이시군요. 어째서 화원에 있던 명림자휼에게 의논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머리가 굳어있어.” 작게 접힌 전서를 피며 하류사가 웃었다. “내가 생각하는 일을 맞길정도로 영리하지는 않았다. 난 적어도 좌보보다 영리한 놈을 기다리고 있는거야.” “기세좋은 호랑이를 말입니까? 아니면 호랑이를 낚을 미끼를 말씀이십니니까?” 그말에 하류사가 고개를 돌려 여관을 바라보았다. 여관은 지긋이 눈을 내리깔고 허리를 피고 있을뿐이였다. 마치 그 다음의 대답을 기다리듯이. 하류사는 스물다섯번째 전서를 화로에 넣으며 말했다. “여관은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듯 하군.” “잊으셨습니까? 저는 당신의 참좌입니다.” “그랬었지.” “참좌로써 한 한말씀드릴까요?‘ “좋다.” 여관은 눈을 뜨고 잠시 허공을 노려보았다. 깊은 생각에 잠긴 눈이 새까맣게 빛난다. “무리하지 마십시오.” “노력하지.” 고개를 끄덕인 하류사는 스물여섯번째 제비를 맞이했다. 기다리고 있던 그 제비다. “명림씨가 도성으로 올라오는군. 저런, 그리고 또 하나의 명림씨는 사라져버린 모양인데.” “벌써 무리하고 계시군요.” “조금은 봐주시는 것도 좋지 않습니까 여관.” 하지만 여관은 한숨을 쉬며 새 종이를 깔고 답신을 적어내려갔다. “이곳에서 잠시 쉬어가자.” 을노의 말에 모두 말을 멈추었다. 이미 어둠이 내려오고 있었다.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니 아직도 눈이 채 녹지 않은 광활한 벌판이다. 이틀동안을 달려오면서 어지간하게 피곤해있던 그들은 불평없이 마른쪽으로 가서 주저않았다. 허리가 뻐근할정도로 오랫동안 달려온 것 같다. 을노는 근처의 나뭇가지와 마구안에 있는 불쏘시개를 사용해 불을 피웠다. 작지만 없는 것보다는 따듯해 자례와 백라가 불근처로 모여들었다. 전날 들린 마을에서 가져온 밀빵을 나누어 먹으며 내일 달릴 체력을 보충한다. 자례는 자리에 앉아 허공을 바라보며 허리를 쭉 폈다. 두두둑하는 소리가 들리며 인상을 쓴다. 아이가 고개를 돌리고 을노에게 묻는다. “얼마나 더 가야 합니까?” “이틀정도 더. 금방 도착할꺼야. 오늘은 자고 가자.” 피곤했는지 백라는 이미 불가에 누워 자고 있었다. 하지만 자례는 쉽사리 잠이 오지 않는지 이젠 완전히 어두워진 하늘을 올려다보며 달이 뜨길 기다린다. 갑자기 등쪽이 따뜻한 느낌에 고개를 돌리니 자신을 여기까지 태우고 달린 거대말이 자신의 뒤로 앉아 바람을 막아준다. 을노가 그 모습을 보고 미소지었다. “영리한 말이구나.” “그래요. 아까 제가 졸고 있을때 속도를 낮추더군요. 사람을 이해하는 것같습니다.” “이름을 지어주거라.” “예?” “네 말은 죽었잖아. 그러니까...” “하지만 이 말을 다른 주인이 있지않습니까. 사람을 이해하는 말치고 주인을 바꾸려는 말은 없어요. 말이란 개와 같아 길들이면 충성하는 동물이거든요.” “하지만 여기까지 널 태우고 왔다는 것은 어느정도 네가 마음에 들었다는 것이 아닐까?” 을노의 말이 맞는지 그 검은 거대말을 머리를 자례의 어깨에 올린다. 편안한 표정이다. 자례는 말의 콧잔등을 쓰다듬었다. 분명 주인을 놓치고 산을 헤메어 털도 엉망이지만 꽤나 좋은 말임이 틀림없다. 게다가 ... “꼭 흑염하고 닮았군요.” “그러고 보니 그렇네. 흑염하고 아주 비슷하구나.” “저런. 흑염의 성질까지 닮았다면 제가 부리기엔 힘든데 말입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아는것인지 말은 투정을 부리며 고개를 돌린다. “그럼 이름을 묵계라고 할까요.” “죽은 말이름을 다시 붙이는 거냐? 묵계와는 전혀 닮지 않았어.” “더이상 좋은 이름도 생각나지 않는걸요. 너도 묵계가 괜찮지 않느냐?” 자례가 검은 말에게 묻는다. 말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다시 어깨에 머리를 올린다. 그 모습에 을노가 어깨를 으쓱하다가 멀리서 달려오는 말소리를 느끼고자리에서 일어났다. 불가에서 조금떨어져 저 멀리 보이는 말들을 바라본다. 자례가 따라와 물었다. “뭐가 보이세요?” “글쎄. 아직은...하지만 저 일정한 간격을 보아서는 병사인 것 같다.” “몇명입니까?” “1대(隊:군단위 25명)다. 밤중에도 달리는 것을 보아하니 밀사같은 것이 아닐까.” “이 밤에...” “잡아볼까?” 을노의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백라가 벌떡일어났다. “안돼! 무슨 짓하려고?!” “어라 아저씨 깨어나셨습니까?” “함부로 밀사를 잡지마라. 뒷감당도 못하면서...” “예,예.” 을노가 불가로 다시 돌아와 풀조각을 모아 넣자 백라는 안심한 듯 다시 자리에 누웠다. 하지만 자례는 달려가는 그들이 사라질때까지 바라보았다. 저들 곡양쪽으로 달려가고 있는 것 같은데. 유견과 유번은 서로 눈치를 보고 비게를 노려보았다. 하나밖에 없다. 둘중 누구하나는 비게 없이 자야하는 것이다. “아우님. 형님이 너무너무 피곤해서 이제 곧 죽을 것 같은데?” “형님, 이 불쌍한 아우가 형님 찾아 도성까지부터 난곡까지 여행하느라 비게를 안비면 형님보다 먼저 갈 것 같소.” “이 엄살꾼같으니라구!” 유견은 냅다 비게에 손을 뻗었지만 유번이 더 빨랐다. 잽싸게 비게를 품에 안은 유번은 배째라는 식으로 벌렁 들어누워 이불을 머리까지 올렸다. “잘자오.” “야 임마! 넌 형님 아우도 없냐!” “같은 날 태어난 주제에 바라는 것도 참 많소이다.” “찬물도 위아래가 있는 것 모르냐!” “아 그것 참 ! 먼저 나왔다고 유세요!” “이놈이!” 방안에서 투탁거리는 두 노인들의 싸움소리가 들려오자 악운은 킬킬거리며 웃었다. 원래 많은 식구가 살던 곳이 아니기 때문에 두명의 손님을 대접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나마 병자인 악운에게 자례가 쓰던 방을 내어주고 나자 꼼짝없이 유견과 유번은 함께 자야하는 처지가 되었던것이다. 오늘도 역시 부족한 침구로 한바탕싸우던 두 노인들이 지쳐 비게를 중앙에 두고 무승부로 끝을내며 잠들었다. 악운은 자신의 옆에 누워있는 동자를 보았다. 저 조그만 녀석 성질이 깐깐해서 여간쟁이가 아니다. 6여년동안 도적으로 지낸 버릇인지 타인이 쓰던 물건에 이리저리 흥미를 보일세면 이 조그만 녀석은 꽥소리를 질러 놀라게 만드는 것이였다. 어지간하게 전 주인에게 정이 들었는가싶다. “잘 잤는가?” “예,어르신.” “그려.” 유견이 퀭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새벽이 밝아오는 마당에는 유견 혼자만이 탁자에 나와 졸고 있었다. “왜 나와 계십니까?” “말소리가 들리면 강탈하려고.” 농담기 없는 말에 악운은 허허거리며 웃었다. 하지만 정말로 어디선가 말소리가 들리는 것같다. 말소리가 들리지 않냐고 묻기도 전에 유견이 벌떡 일어난다. 고개돌리는 그 얼굴이 매우 밝아 웃음이 나온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유견이 표정을 굳히며 탁자에 엎드려 귀를 가져다 댄다. “뭐하십니까?” “자네도 해봐.” 유견을 따라 해보자 말소리가 들린다. 규칙적이고 대열을 맞추어 오는 정확한 소리다. 자신이 말하기도 전에 방문이 왈칵열리며 유번이 외쳤다. “병사가 온다?!” “그래, 내말이 그거지! 자네 혹시?!” 유견이 악운을 바라보았다. 집안에 왔더니 떡하니 와있던 손님. 다행히 산위에서 을노가 먼저 그와의 사건이야기를 해주었기에 망정이였다. 호북군벌이라는 말을 믿고싶지는 않았지만 악운의 저 금은야동(오드아이)은 그가 악씨임을 증명했다. 유번이 마당으로 나와 유견에게 물었다. “그가 악비의 아들임을 알 리가 없어. 그렇다면 혹시...” “뭐? 혹시 뭐?” “4왕자의 보복일지도.” “뭐?!” 유견은 정색을 하며 외쳤다. 무슨말인가 갑자기 여진황가는 왜 끼어드는 것인가. 악운도 고개를 갸웃하며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무슨 소리야?” “형님이 산위에 있을때, 내가 좌보님과 을노와 이리로 오고 있을때, 4왕자가 이곳에 머물고 있었던 모양이야.” “왜?!” “몰라! 마을 사람이야기로는 미친놈인줄 알고 우리집 광에 가두어놓았다고 하던데...” “뭐야!” 유견은 서둘러 방안으로들어가 검을 꺼내왔다. “싸워야지 그럼! 이대로 죽을수는 없지!” “진정해라 형님아. 레이첸은 우리가 그를 알아본 것을 모른단 말이야. 게다가 사람을 다시 보낼 것 같지도 않았어. 자례를 간호한 것같았는데!” “무슨소리야! 아무것도 이해가지않아!” “아 시끄러!” 유번은 유견을 밀치고는 악운에게 물었다. “자네, 난곡에서 귀족에게 쫓겼다고 했지? 그가 자네가 살아있다고 생각해서 군을 보냈다고 생각하나?” “아뇨. 누구라도 거기서 떨어졌다면 죽었을거라 생각할겁니다.” 하지만 그 날카로운 눈을 가진 놈과 붉은 머리의 여진인이 떠오르자 고개를 갸웃한다. “아뇨, 그럴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자네 어서 피하게!” 유견의 말에 유번이 웃었다. “어디로?! 몸도 성치 않는 놈이 말도 없이 어떻게 피해?!” ”하지만 이대로 죽일수도 없는 일아닙니까!“ “아뇨.” 악운이 둘에게 끼어들었다. “제가 보기엔 절 알아보기가 힘들 것 같습니다. 그러니 평시와 같이 행동한다면 그다지 큰 무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요행을 바라는 것인가.” “빨리 결정해라 아우님!” “왜 이런 것은 나에게 맡기는데! 찬물에도 위아래가 있다며!” 또다시 주먹을 걷는 두 노인의 싸움을 말리던 악운이였다. 결정을 할사이도 없이 25명정도되는 병사들이 열을 맞추어 마을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난대없는 병사들의 방문에 촌락의 사람들이 하나둘씩 나와 이곳 저곳을 바라보았다. 병사들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수군거리는 마을사람들을 뒤로하고 대장간쪽으로 말을 달렸다. 유번이 유견을 밀어내고 문밖을 몸을 내민순간 이미 자신의 집이 포위당했다는 것을 느끼고 당황했다. 악운을 잡으러 온것인가? 뭐라 말할틈도 없이 병사들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대정(1대의 지휘관)이 묻는다. “이곳에 사는 정안인을 잡으러 왔다.” “정안인?! 내가 정안인이오.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이오?” “늙은이 말고.” 대정은 유번을 밀치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씩씩거리는 유견과 지친 악운, 멀뚱히 서있는 동자가 대정을 마주보았다. 잠시 대정은 유견과 유번의 얼굴이 헷갈렸는지 뒤를 돌아 유번을 보고는 유견을 확인해보았다. 그 모습에 유견이 다시 물었다. “무슨 일이오?” “늙은이 말고. 너 거기 젊은 놈.” “...왜요?” “정안인이냐?‘ 척 보아도 정안인이 아닌 것이 보이지만 일단 물어와서 악운은 헛헛웃으며 말한다. “보다시피 한족의 피가 강한 거란인이올시다.” “이 집에 젊은 정안인은 없나?” “없소.” 동자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냉큼 유번이 걸어와 말한다. “이곳은 원래 내 집이오.난 동자와 둘이서만 살고 있소. 이들은 도성에서 온 나의 친척과 지인이요.” 하지만 대정은 악운과 동자를 빤히 바라보더니 악운을 가리켰다. “너 따라와라.” “왜요? 죄없는 사람을 왜 병사들이 와서 끌고간답니까?” 악운이 뒤로 물러나며 묻자 대정은 인상을 구겼다. “우리도 모른다. 단지 우리는 너를 데려오라는 분부를 받았을뿐이다.” “누구에게서?” “낭성태수님께서 분부하셨다.” 대정이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자 병사 서너명이 악운에게 다가와 팔을 붙잡는다. 도망가버릴까하는 생각을 하다가도 유견과 유번이 있는 것을 보면 입맛만 다시게 된다. 저들에게 피해가 갈지도 몰라. 게다가 낭성이라. 곡양에서 가장 가까운 도성아닌가. 그곳에서는 화적일을 한적이 전혀 없으니 꺼릴 것도 없다. 악운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소. 그렇다면 가지요. 하지만 난 말이 없소.” “말을 가지고 왔으니 가자.” 악운은 유견과 유번에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했습니다.” “이거 탐탁치가 않는데...” 유견이 중얼거리자 유번이 작게 물었다. “자네, 이것 저것 생각해보고는 가는거지? 괜히 무리하지 말게.” “그럼요. 낭성까지가서 말이나 빌려 전 제가 가야하는 길로 가야겠습니다.” “그런가.” 재촉하는 병사들 때문에 악운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다시한번 작게 고개숙이고 병사들과 문을 나섰다. 곧 말소리가 들리고 악운과 병사들이 떠나가자 마을은 다시 조용해졌다. 멍하니 그들이 사라진 쪽을 바라보는 유견에게 유번이 말한다. “그래도 이젠 비게가지고 싸울일은 없게 되었구만.” 73 유달리 정안인인것이 분명히 들어나는 자례덕에 성문지기와 말싸움끝에 들어온 도성은 여전히 번잡스러웠다. 셋은 말을끌고 쉴틈도 없이 하류사가 있는 화원으로 달려들어갔다. 여관이 마침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바로 왕씨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가 한참만에 나와 들어가라 눈짓한다. 셋이 모두 일어나지만 여관이 고개를 젓는다. "좌보께서만 들어오시랍니다." 어깨를 으쓱이며 백라가 들어가자 여관은 여유있는 웃음을 지으며 지쳐보이는 자례에게 다가갔다. 자례가 고개를 숙이며 존경의 예를 표한다. "몸은 형님과 닮지않았지만 그 행동은 아우님도 형님과 똑같구나." 움츠려드는 아이에게 손을 내밀어 머리를 쓰다듬는다. "네 스스로 행복을 찾아야겠지."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래." 흡족한 대답인듯 웃어보인 여관은 을노에게 미소지으며 아래로 내려가 기다리라 말했다. 그들이 내려가자 그녀는 다시 방안으로 들어가 왕씨옆에 앉는다. 예상했던대로 방안은 조용하고 아무런 말이 건내지지 않는다. 그저 조용한 적막이 감돌뿐. “오늘은 이만.” 백라가 막 입을 열어 보고를 하려는 순간 하류사는 손을 들어 백라의 입을 막더니 짧게 말한다. 그리고는 그대로 일어나 휘장사이로 사라졌다. 어리둥절한 백라는 일어나 남아있는 여관에게 물었다. “왕씨께서 무슨 안좋은 일이라도?” “글세요.” 여관은 특유의 여유있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백라는 답답했다. 난곡에 보낸 서신에는 그렇게 서둘러 명림씨를 데리고 환성하라는 것이였는데 막상 사흘밤낮을 달려 도착했지만 왕씨는 저 한마디로 일축했다. 여관이 일어났다. “좌보님께서도 쉬십시오. 달려오느라 힘드셨지요.” “예, 하지만...” “왕씨께서는 요동으로의 여행을 취소하셨으니 언제든지 보실수 있습니다.” 백라를 남겨두고 여관마저 휘장사이로 사라지자 어쩔수 없이 일어나 방을 나온다.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외진 작은 방에는 피곤해 비슷틈히 앉아있는 을노와 벽에 기대있는 자례가 보였다. 백라가 들어가자 얼른 일어난다. “됐어. 왕씨께서 오늘 보지 않으시겠다는군.” “그렇습니까.” “아니, 빨리 오라하셨지 않습니까?” 을노의 의아한 질문에 백라는 어깨를 으쓱했다. 을노가 좀더 말하려고 하자 자례가 손을 들어 말을 막았다. 몹시 피곤한지 안색마저 파리해져 둘에게 중얼거린다. “죄송하지만 쉴곳을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조용하고 내일 낮까지는 잠만잘수 있었으면 좋겠군요.” “그렇지. 아저씨, 자례가 많이 피곤해 해요.” “나도 알아. 자례를 데리고 유견님의 모도리로 가라. 당분간 유견님이 비우시니 선인인 네가 모도리를 지켜야 하잖느냐. 자례도 네가 보살피렴.” “알겠습니다.” 백라는 머리를 쥐고 그 자리에 앉아 한숨을 쉬었다. 자례와 을노가 고개를 숙여 인사했지만 손을 건성으로 흔들어보인다. 을노와 나온 자례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모도리까지 오래 걸어야 하나요?” “조금. 하지만 금방이다. 걱정마. 마차를 타고 갈거야.” “말들은 어쩌고...” “어차피 왕씨가 곧 부르실테니 그때까지 여기에 두는 것도 상관없다.” 을노는 화원을 나가 거리를 돌아다니는 우마차를 하나 잡았다. 마차에 타자마자 금세 눈을 감아버리는 자례를 보고는 천천히 가자며 마차를 출발시킨다. 마차가 나가는 것을 본 왕씨는 등을 돌려 여관을 보았다. 여전히 여관은 평소와 다름없이 한칸 뒷방에 앉아 차를 타고 있다. 하류사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이제 곧 봄이 오시겠군.” “...봄이 오시겠군.” 조용히 여관이 자신의 말을 되새긴다. 한참을 침묵으로 일관하던 하류사는졌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무리하지는 않는다.” “....무리하지 않는다라...” 여관은 묵묵히 방바닥을 바라보다 눈을 감는다. “아직 어린아이같더군요. 그 아이.” “보기엔 그렇지. 하지만 스물이 가까워지는 놈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고 계시지 않지 않습니까.” 처음으로 여관이 강한 목소리를 내었다. “그만두십시오. 그런 생각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데 그러는가?” “어차피 피지 못한 꽃이라면 꺽어버린다는 그 생각을 모를줄 아십니까?” “그렇다면 앞으로 만개할 꽃봉오리를 곧 질 꽃 대신 꺽어버리란 말인가?” 왕씨의 냉냉한 목소리에 여관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고개만 저었다. “얼마남지 않았다면 즐겁게 살다가게 해주시면 안됩니까?” “얼마남지 않았다면 앞길이 창창한 다른 자를 위해 희생하는 것도 좋다 생각하지 않는가?” “태어나 짧은 시간을 살아가는 아이에게 마지막까지 힘든 일을 시켜주려하십니까?” “태어나 짧은 시간을 살아가는 아이에게 무엇인가를 이룰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안되는가?” “그 아이가 아니라도 다른 장수들이 못할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 아이가 아니라면 다른 장수들은 상관없다는 것인가?‘ 여관이 눈을 가늘게 뜨고 왕씨를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여유있는 얼굴로 여관을 내려보는 왕씨는 웃고 있다. 그 웃음이 더욱 화가 나 여관은 입을 꼭 다물고 찻잎을 골랐다. “여관.” “괜찮습니다.” 차분해진 목소리로 여관이 말했다. “저는 참좌입니다. 왕씨께서 제 의견을 들어주신것만으로도 괜찮습니다. 그 의견을 수용시키기 위해 설득하는 대신들과는 전 다르니까요.” “하지만 난 누구보다 우리 참좌의 의견을 수용하네만.” 하류사는 여관에게 다가와 찻잔을 받아들었다. “그래서 저들을 보낸거야. 무리하지 않을 방법을 지금 찾고 있다네. 그때까지는 부르지 않겠어.” 여관은 왕씨를 올려다보았다. 차를 마신 왕씨는 잔을 다시 건낸다. “안그러면 무리하고 말테니까.” “왕씨...” “황궁안에 들어있는 제비에게 전서를 보내 2왕자와 14왕자를 감시하라 해라.” 하류사는 창문을 닫았다. “아무래도 일이 여기서 끝날 것 같지 않아.” 악운은 어리둥절하게 방안에 앉았다. 낭성까지 올때는 무슨 범죄자인 듯 대우 받았지만 막상 낭성에 도착하자 낭성태수가 직접나와 마중하는 것이였다. 낭성태수는 악운을 귀빈으로 모시며 편히 쉴수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주었다. 생각지도 못한 대우에 불편해진 악운은 피곤하다며 준비해둔 호사스러운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가 밖이 조용해지자 방을 나와 성벽위로 올라가 밖을 보고 있었다. 이대로 도망갈까하다가도 행여 곡양촌의 유견과 유번에게 피해라도 갈까봐 그러지도 못하고 안달하는 사이 하루가 지나버렸다. 이틀째에도 지극한 대접에 온몸이 근지러웠던 악운은 결국 삼일되는 날 낭성태수와 만남을 청했다. “무슨 일로 날 보자 하십니까?” “그런 존칭도 과분합니다. 낭성태수님은 왜 제게 이러시는 겁니까?” “허허 그야 당신께서 더 잘 아실것이 아닙니까?” “뭘요?” 하지만 태수는 힌 수염을 쓰다듬으며 웃기만 할뿐이였다. “자고로 영웅은 자신의 모습을 숨긴다지만 이 늙은이에게까지 그런 거짓말을 할 필요가 있을까요?” “저는 도대체 무슨영문인지...그렇다면 전 언제까지 이곳에서 있어야 하나요? 가봐야 할곳이 있는데 가보아도 되겠습니까?” “물론 되지요. 사람을 붙여드리겠습니다.” “아뇨, 아뇨.!” 악운은 고개를 저었다. “멀리 갑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곳입니다.” “그건...좀 곤란합니다. 그분께서 보내신 사람이 올때까지는.” “그분이라뇨?” “하하, 잘 아시지 않습니까? 짐작가시는 분이 없으시나요?” 잠시 악운은 혹시 할머니가 보냈는가 의심했지만 이곳이 송이 아닌 금이라는 것을 깨닿고는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태수님께서 귓뜸해주시죠.” “저는 2왕자 전하께 친히 보내신 문서를 받았습니다.” “2왕자?!” 태수는 느릿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께서 곡양에 숨어 계신 당신을 찾아 모시고 있으라 하셨습니다. 바로 당신을 황궁으로 모실 사람을 보내신다 하셨습니다.” “예? 황궁?!” “뭐 그리 놀라십니까, 전에도 가보셨을텐데... 아, 그때는 송나라였나?” 악운은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아무래도 이 사람 나를 누구가와 착각하는 듯 하다. 지금까지 봐서는 얼굴도 모르는데 행적은 잘도 아는 것을 보아 혹시...“ “태수님은 어떻게 저에대해 이리 잘 아십니까?” “2왕자전하의 서신을 받고 당신에대해 잠시 읽어보았습니다. 그 뛰어난 계책에 감탄하였지요.” “...그 책을 제가 한번 보아도 되겠습니까?” “그러십시오.” 선뜻 서랍을 열어 두꺼운 책을 건내준다. 악운이 책을 뒤적이면서 난감해하자 태수는 다시 책을 받아 펼쳐주었다. “여기부터입니다.” “감사합니다. 일단 제 방에 들어가서 읽고 돌려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러십시오.” 부리나케 방으로 돌아온 악운은 침대에 누워 책을 읽어내려갔다. 다 읽고서도 눈을 깜박이던 악운은 다시 한번 읽었다. 그리고 천장을 바라보다 다시 한번 읽고는 헛웃음치며 책을 탁자로 향해 던졌다. “이런, 정말로 호인(好人:연인)이 아니라 호인(豪人:영웅)이였군.” 하지만 어려보였는데 말이야. 여기 적힌 거에 따르자면 올해 21이 된건가?. 하긴 그 서슬이 모습에 비해 날카로왔지. 그보다 당장 자신이 처한 상황이 이해가자 골치가 아프다. 그러니까 지금 자신을 그아이로 착각하는, 아니 믿는 모양인데 당장 가서 아니라고 하기엔 3일내내 먹고 자고 한 것이 걸린다. “몰래 도망가버려야겠구만.” 그날 밤 월담을 해서 성을 나가기로 결정한 악운은 일찍 잠들기로 결정했다. 즉시 방을 나가 성안 마굿간을 찾아가 구경하는 척하며 미리 말을 보아둔다. 그리고 저녁을 일찍먹고 누워 잠을 청했다. 자정이 되면 바로 일어나 월담한다. “오늘밤은 때마침 상현달이 되는가.” 씨익 웃고는 눈을 감는다. 레이첸은 턱을 괴고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잠시 모르는 척 그러고 있다가 고개를 돌려 열린 방문을 바라본다. 오늘도 태진 이놈이 한번도 내궁에 들어오지 않았군. 이상한일이다. 전에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찾아와 자신에게 관리들의 속사정이나 궁의 행사에 내가 어떻게 말하고 행동해야 하는지 걷는 연습마저 시키던 놈이다. 행여 자신이 함께 갈수 없는 행사라면 차라리 빠지라고 말하는 놈이였다. 그런데 연이어 두 번째나 소식이 없다. 처음은 내가 곡양으로 곰사냥갔다가 돌아왔을때 어디론가 나가 있었었다. 그야 그의 말대로라면 내가 친첸의 정세를 살피라한 것을 알기 위해 나갔다고 하나 진짜인지는 모른다. 그리고 이번은 아마도 내가 부탁한 그 정안인을 데리고 오는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어차피 왕자의 신분으로 갈수가 없느니 하수인을 부렸을것이다. 그런데 왜 모습을 비추지 않는거지? 톡톡 창틀을 두드리던 레이첸은 고개를 돌려 환관을 불렸다. 그에게 서신을 주며 태진에게 건내라 한다. 서신의 내용은 새 부인이 가지고 싶다는 정말 뚱딴지 같은 말이였다. 이 놈이 궁에 있다면 당장 달려와 잔소리를 해댈것이고 아니라면 답신이 올것이다. “...하루하루가 웃기게 돌아가는군.” 정말로 하루하루가 보이지 않는 전쟁을 치루는 느낌이다. 내가 다루는 환관하나 믿어서는 안된다. 나와 밤을 나누는 여인을 믿어서도 안되고 나를 낳아준 내 아비마져 믿으면 안된다. 고개를 설래 설래 저은 레이첸은 탁자위에 올려진 다기를 열고 차를 탔다. 찻잎을 고르며 피식 웃는다. 차에 누가 독을 넣을지 모르니 스스로 타서 먹으라 말하며 태진은 가차없이 시녀들에게 차시중을 들지 못하게 만들었다. 처음엔 불같이 화를 내던 레이첸이였지만 몇왕자였더라...? 아무튼 몇째인지는 몰라도 자존심싸움으로 독살된 왕자가 나오고 나서는 레이첸은 찍소리하지 않고 스스로 차를 타서 먹었다. 음식을 만들어 먹지 말라는 것만이라도 고마운 일이지. 실소하며 천장을 바라보는데 누군가 쾅소리를 내며 방에 들어온다 빙그래 입가에 웃음이 지어진다. “형님! 무슨 이 판국에 새장가요! 미쳤소? 안그래도 머리 아픈데 형님은 왜 날 찌르시는거요!” “아아, 그냥. 아무리 깐깐한 너라도 안보니 보고 싶어서 그랬다.” “나참, 형님이 시킨일 때문에 이러는 것이 아니요!” 고개를 돌려 태진을 보니 아마도 자신의 생각이 틀렸는 듯 머리도 땋아내리지 않았고 옷차림도 부실하다. 중간중간을 동여맨 머리를 보니 잠자다가 일어난 것이 아닌가 하는생각이 든다. “지금까지 자고 있었나?” “어제 늦게 잤습니다. 감기기운도 있는 것 같고...” 정말인지 쿨럭하고 기침을 한다. 레이첸은 어깨를 으쓱올린다. “난 또 네가 날 속이고 어디론가 나가 다른 사람이랑 손발을 맞추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무슨 소리를 그.. 쿨럭! 그렇게 하십니까.” “너는 과분할정도의 야망을 가지고 있는 놈이니... 눈을 때면 주인을 잡아먹을지 누가 아느냐.” 레이첸의 비수같은말에 태진은 잠시 그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곧 눈을 내리며 웃는다. “그정도면 됐습니다. 많이 성장하셨군요.” “무섭지 않느냐? 내가 성장한다는 것은 곧 네가 필요 없어진다는 말도 된다.” “절대 그런일은 없을겁니다.” “왜?” 태진은 약간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형님은 무서운 사람입니다. 당신 자신은 아무도 모를것이라 생각하시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어리숙한 외양에 숨겨진 당신의 이중성을 궁안에서 누가 모르겠습니까?” “...그래?” “하긴. 정작 알아야할 황제와 2왕자가 모르고 있는 것 같지만 말입니다.” “또 그런 말투. 황제에게 경외심을 표해라.” “쿨럭! 아무튼 다른 왕자들마저 당신안에 있는 그 무식하리만큼 단순한 폭력성을 모른다 생각지 마십시오. 저 말고 당신의 그 이중성을 조설할수 있는 사람이 있을 것 같습니까?” “굉장한 자만이구나?” 몇 번더 기침을 하던 태진은 등을 돌렸다. 방을 나가며 뒤를 돌아보고는 말한다. “그렇다면 새로운 책사라도 구해보시는 것이 어떠십니까? 과연 얼마나 버티고 나갈지 저와 내기나 한판 하실렵니까?” 레이첸이 화를 내기도 전에 태진은 방문을 닫고 나가버린다. 74 조심스런 발걸음과 바람소리와 다르게 흔들리는 나뭇잎소리에 눈을 뜬다. 자정무렵이 되었는지 사방이 어둡다. 악운은 재빨리 일어나 귀를 귀울였다. 누군가 있다. 성안의 사람은 아니다. 이런 발걸음은 조용히 걷기위한 소리가 아니다. 이것은 아무도 모르게 걷기 위한 걸음소리야. 마치 도적들처럼. 귀를 귀울이자 나무를 타고 성벽의 돌담을 타고 몇몇의 사람들이 성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느낀다. 자정이라면 어떤 성도 성문을 열지 앉는 시간이다. 아무래도 초대받지 못한 손님들 같은데. 막 창을 열어보려다가 희미한 상현달의 빛을 받은 한 그림자 손이 창문을 스친다. 놀라기도 전에 몸을 낮추어 탁자밑으로 몸을 숨긴다. 부스럭 대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소리없이 열린다. 그리고 들어오는 인영은 검은 옷으로 감싸 스스로 존재를 부정한다. 도적인가? 라고 생각하기에는 주위를 둘러보지도 않고 곧장 침상으로 다가가 칼을 뽑는다. 암살이다. 하지만 침상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은 자객은 이리저리 방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악운은 가슴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꼈다. 물론 친첸에게 당한 상처다 덜 아문탓도 있고 계획에 갑작스런 차질이 생겨 불안한것일수도 있지만 심하게 공포스러움이 밀려온다. 혹시 송의 관리들이 보낸 자객일까? 그렇다면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을 들통난건가? 하지만 더 이상 생각할 여유가 없다. 들키기 전에 이 방안에서 나가야 한다. 자객이 옆방으로 들어가 확인하는 순간 열린 창으로 나가 성벽위로 올라선다. 빠르게 뛰며 아차한다. 월담을 하기 위해선 밧줄이 필요한데 아무것도 안가지고 나왔다. 아무리 자신이라지만 성벽에서 뛰어내렸다간 무사하지 못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일단 자신의 방에서만 멀어지는데 눈앞이 번쩍한다. 단검이다. 주위를 둘러보니 또다른 자객이 있다. “요즘 일진이 왜이러지?!” 냅다 달려도망가지만 서너명의 자객들이 더 나타나 따라온다. 이런때 무기도 없다. 자신에게 화가 나 씩씩거린다. 성벽위에서 도망치다간 아무도 모르게 비명횡사할 것이 뻔하다.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을 박차고 내려간다. 누군가를 만났으면 좋으련만 아무도 없다. “네놈들 누구냐!” 뒤를 돌아 외치지만 대답은 없다. 길을 잘못들어 막다른 길에 다다른다. 얼른 뒤를 돌아 방향을 바꾸려 하지만 이미 자객들이 자신을 포위하고 좁혀온다. “도대체 누가 날 사주한것이지?” 끝까지 아무말 없는 그들은 칼을 뽑는다. 이크, 저것으로 죽이려나 보다. 저 작은 칼로 죽으려면 얼마나 찔려야 하지. 겁이 더럭 난다. 칼을 쳐들고 자신에게 달려오는 자객을 보고 눈을 감는다. “거기까지해라.” 낭랑한 목소리가 울린다. 생각했던 고통이 없자 슬며시 눈을 떠본 악운은 자객들이 자신의 뒤에 있는 담을 올려다 보고 있는 것을 느꼈다. 자신도 뒤를 돌아 높은 담위를 바라보자 누군가 거기 걸터 앉아 내려보고 있다. “그만들하고 돌아가라.” 마치 타이르듯 한 부드러운 미성이다. 자객들은 움찔거리다 비수를 꺼내기 위해 손을 뒤로 돌리자 담위의 그가 벌떡 일어난다. 낭랑한 미성으로 외친다. “더이상 무례하게 군다면 내 너희 주인을 가만히 두지 않을것이야!” 그 말에 자객들이 움찔한다. “난 네놈들이 누구의 개인지 알고 있다. 그러니 돌아가라!” 서로 눈치를 보던 자객들은 잠시 뒤로 물러나는 척 하더니 바로 공격에 들어간다. 역시 더 이상 말해도 소용이 없다 느꼈는지 그도 담위에서 뛰어내려와 칼을 뽑아 자객들에게 맞선다. 날카로운 금속성소리가 들리며 서너명의 자객들을 상대로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나간다. 악운은 벽에 붙어 그들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자신의 어깨위로 뱀같은 것이 닿아 놀라 털어낸다. “놀라셨어요?” “어?” 묵직한 목소리에 다시 담을 올려다 보니 덩치가 꽤 큰 여인이 밧줄을 넘기며 중얼거린다. “이리 건너오세요. 어서요.” 믿어야 할지 믿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지만 일단 지금 상황보다야 나빠지겠느냐는 생각을 하면서 담을 건넌다. 넘어가 밧줄을 건내준 여인을 보고 억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난다. 세상에 이런 여자도 다 있구나. 키가 적어도 7척(2m)은 되겠다. 게다가 몸집은 마치 곰과 같다. 갈색피부에 근육인지 살인지 덩치마저 커다랗다. 갈색머리가 보아하니 여진족의 여자인 듯 하다. 정말 못생겼다. 하지만 그 여인은 수줍게 고개를 돌리고 그 커다란 손으로 악운의 손을 꽉 잡는다. “어서 여기서 벗어나야해요.” “아, 예.. 저.” “저는 소용(小瑢:조용한옥소리)이라고 합니다. 어서 일단 이쪽으로!” 그 소용이라는 거대한 여인에게 끌려가 외지고 어두운 곳에 숨는다. 잠시 지나온 길을 보던 소용은 부끄럽다는 듯 얼굴을 외면하며 손을 놓는다. “이상한 생각하지 마시어요. 저는 이미 정혼한 몸입니다.” “아, 예 그러십니까.” “그나저나 낭군님은 무사하실지 모르겠네.” 자세히 소용을 바라보자 더욱 무섭다. 우락부락하게 생긴 저 얼굴은 남자라고 해도 믿겠다. 게다가 입고 있는 옷은 꽃분홍색에 장미가 수놓아져 있고 화려한 보석들로 치장되어있다. 분명 아름다운 옷이긴 한데 그것이 저 거대한 몸에 꽉 맞아 근육질의 몸매가 들어나는 것이 탈이라고 할까. 뭔가 봐서는 안될 것을 봤다는 느낌에 오싹해진다. 소용은 다소곳이 조금 떨어져 고개를 숙이고 있다. 빨간 연지를 바른 얼굴이 붉어진 것을 보고 웃지도 못한다. “어마, 낭군님!” 소매자락을 펄럭이며 누군가를 부른다. 가벼운 발걸음소리가 들리며 누군가 그들에게 다가온다. 아까 자신을 구해준 그 사내다. “괜찮으십니까?” 그가 악운에게 다가와 묻는다. 가까이에서 본 사내의 얼굴은 놀랄 정도로 잘생겼다. 하얗고 매끈한 피부, 크고 깊은 검은색 눈동자, 결좋은 검은 머릿결, 적당하게 균형잡힌 몸. 감탄사가 나올정도로 잘생긴 사내다. 하지만 그는 악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의아하다는 듯 말한다. “당신 정안족이 아닌데?” “아?” 사내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이상하다 중얼거린다. “괜한 짓을 한건가... 혹시 목래의 혈족이 아니십니까?” “아아...” 혹시 이사람이 2왕자가 보낸 사람인가. 악운은 고개를 저었다. “오해가 있는 것 같군요. 저는 그 영웅이 아닙니다. 그저 떠돌아다니는 난민인데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이렇게 오게 되었습니다.” “저런. 난처하게 되었군.” 악운은 간단하게 자신이 어떻게 오해를 받았는지 설명했다. 사내는 잠시 곰곰이 생각한다. “그래서 월담해 도망가려는 생각이였군요? 아무튼 지금 당신은 위험합니다. 내일 아침 2왕자가 보낸 호위대가 옵니다. 그때 그들과 황성에 들어간 후 2왕자에게 당신이 그가 아님을 밝힌후 나오시는 것이 좋소.” “황성에 들어가는 것은 좀...” “아까 그 사람들은 당신, 그러니 목래의 그 자를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소. 아마도 당신이 여기서 월담해 도망친들 끝까지 따라갈것이요. 그럴바엔 황성까지 안전하게 들어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나오는 것이 살수 있는 방법이요.” “허...” 악운이 허탈하게 하늘을 올려다보자 사내는 고개를 돌려 소용이라는 여인을 부른다. 부끄럽게 까치 걸음으로 총총 다가온 그 거구의 여인은 고개를 숙인다. “왜 부르십니까 낭군님?” “일단 오늘 아침까지 이사람과 지내다가 날이 밝으면 돌아갑시다.” “소녀는 무엇이든지 낭군님을 따를것입니다.” “노숙이니 불편하지 않을까 걱정되는군요.” 걱정스러운 사내의 말에 소용은 빨게진 얼굴을 숙인다 악운은 그 모습을 보고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한다.이거 한편의 광대극을 보는 듯하다. 절세 미남과 절세 추녀의 부부라. 아침이 될 때까지 그 부부는 악운과 함께 밤을 지세웠다. 해가 떠오르자 사내는 일어나 졸고 있는 악운을 깨운다. “이제 성안을 들어가 태수와 함께 있으시오. 지금 시간엔 자객들도 어쩌지 못할테니. 곧 호위대가 올 것이오.” “아, 가시는 겁니까? 저 대형의 존함이라도...!” “별로. 아마도 인연이 있으면 또 만날지 모르겠지만.” 사내는 소용을 데리고 총총히 어디론가 사라져버린다. 그 모습이 사라지자 악운은 낄낄거리며 참고 있던 웃음을 다 해버린 후 태수의 성안으로 달려갔다. 아침 운동을 했다고 둘러댄후 아무렇지 않는 듯 아침을 먹는다. 정말로 바로 호위대가 도착해 자신을 찾는다. 태수와 작별을 하고 마차에 오르자 2대(50명)정도 되는 병사들이 마차를 호위하고는 황성을 향해 출발했다. 아직 꽃이 피어나지 않아 구할수 있는 것이라고는 갈대와 소나무가지, 간간히 보이는 동백뿐이다. 갈대를 공작의 꼬리처럼 두르고 소나무로 단을 만든다. 동백을 가운데 넣어 소나무로 만들어진 바다를 건너는 배가 되게 한다. “예쁘구나.” “을노.” 을노가 여전히 열린 방문으로 들어와 자례의 앞에 앉았다. 앞에 놓여진 화병을 잠시 바라본다. “잘 만들었구나. 이런 것도 할줄 아느냐?” “방안에서는 할수 있는 것이 몇 개 되지 않으니까요. 마음에 드셨다면 방으로 가져가십시오.” “그래도 되나?‘ “예. 좋아하는 분에게 가야죠.” 싱긋 웃어준다. 을노는 그 표정에 내심 안도한다. “다행이다. 생각보다 잘 지내는 것 같구나.” “...불안하기는 합니다만 그래서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어차피 그럴것이라면 이곳에 적응하는 것이 좋다 여겼습니다.” “그래. 하지만 왜 왕씨가 널 오라 하고는 이렇게 방치하시는지 모르겠구나.” “...” 자례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가위와 남은 꽃가지들을 치웠다. 망설이다 을노를 바라보며 묻는다. “을노, 제가 조금 물어도 되겠습니까?” “어느정도는. 뭐가 알고 싶으냐?” “왜 명림씨를 찾기 시작한것이죠? 세간엔 명림씨를 비롯한 귀족씨들은 고구려가 망할때 그 대부분이 멸족되지 않았습니까? 우보인 명림씨는 그것이 더욱 심해 아무도 생존의 여부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명림씨를 찾게 되신 겁니까?” ”미안하다. 그것은 나도 모른다. 왕씨께서 우리에게 내리신 분부니까. 하지만 목씨를 찾은것은..,“ “명림씨의 가신이 목씨이니 그런것이겠지요.” 말을 끊으며 자례가 대신 대답한다. 곧 다른 질문을 한다. “형이 이곳에 머물렸다면 어째서 형에게 아무런 밀명이 내려지지 않았습니까? 형도 명림씨지 않습니까?” “그건 네 형이 오자마자 목씨 정륜의 상이 있었고 목래에서 다친 상처로 인해 쉬고 있었기 때문일것이다.” “그렇습니까...” 고개를 끄덕인 자례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이번엔 을노가 물었다. “왜 그것을 물었지?” “당연한것입니다. 명림씨를 찾았다는 것은 그에게 줄 밀명이 분명 있었다는 것인데 형에게 밀명이 안내려진 것이 의아해 물어본것이죠. 게다가 지금 여기있는 명림씨인 저에게도 아무런 밀명이 내려지지 않으니...” “않느니?” “어쩌면 왕씨께서 명림씨를 찾은 것은 충동적인 돌발은 아니였는가...생각이 드는군요. 아니라면 지금 상황이 왕씨가 예상한것과는 달리 돌아가고 있다거나...어찌 되었건 당장 제가 해야할일은 없을것이 분명합니다.” “그렇구나.” “걱정되는군요.” “응?” 자례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뭔래 마지막패는 가장 나중에 꺼내는 것입니다. 가장 확실하고 공격적인 패를 마지막에 두는 것이죠. ” “그렇지.” “그 마지막 패가 제가 아닌지 걱정됩니다.” 떡한 표정의 을노는 고개를 저었지만 자례는 화병을 노려보았다. ... 마지막 패라. 75 태진은 고개를 흔들며 뒤로 기댔다. 아찔한 기분에 짜증을 내다 손을 흔들어 사람을 물린다. “실패라...” 황궁에 들어오기 전에 암살해버린다. 2왕자가 보내준 그의 호위대가 가기 전에 도적의 소행처럼 그를 암살한다. 일부러 호위대를 하루 늦추어 보냈고 자객들을 먼저 출발시켰다. 그런데 실패라 이말이지. 계획이란 실패할때도 있는 것이다. 문제는 누군가 그를 살려내었다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알고 있다라... 누가 보냈는지 알고 있다라 했다?” 두 패중 하나이다. 하나는 허세고 하나는 경고다. 허세라면 아마 자객을 상대로 도망쳤지 맞서 싸우지는 않았을것이다. 즉 경고라는 말이다. “허. 대단한 놈이군. 그래.” 4왕자의 등에 업고 있는 나에게 경고라?. 태진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감기 때문에 열이 오른 몸이 뜨거워진다. 주섬주섬 침상에 가서 누운다. 하지만 무시할 일도 아니다. 누구인지 도통 알수가 없으니 조심하는 수 밖에. 하지만 증거도 없으니 무턱대고 겁을 먹을 일도 아니다. 문제는 곧 황성으로 들어올 그 목래의 놈이다. 황성에 들어와 목래가 공성되었다는 둥의 소리를 지껄인들 계명이 다 뒤집어 쓰고 죽은 이상 별 문제는 안된다. 하지만 행여나 자신의 얼굴을 기억해 우연히 마주친 그날 그가 2왕자에게 자신이 공성에 연관되었다고 말한다면 끝장이다. 그 고지식한 선비왕자는 날 가만히 두지 않을테니 말이다. 자신이 어떤 위치인지 뭘 가져야 하는지 잘 알고 있는 2왕자는 4왕자의 세력을 줄일수 있는 기회인 그것을 놓치지 않고 날 궁밖으로 내치거나 4왕자와 날 떨어뜨려 놓을 것이다. “그렇게는 안된다.” 태진은 아프다는 핑계로 레이첸에게 오늘도 자신의 궁안에만 있겠다는 서신을 보냈다. 침대에 누워 황성에서 목래에서 올라온 촌놈을 먼저 내칠 궁리를 생각해야겠다. 체이첸은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머리를 다시 빗었다. 자신이 볼때는 꽤나 잘 된 것 같은데 체이첸은 고개를 저으며 다시 묶게 한다. 레이첸이 그것을 보고 웃었다. “형님 새 장가라도 가시오?” “쯧. 귀한 선비를 맞이할때는 옷차림도 정갈하게 하는 것이다. 아우는 삼고초려도 모르나? 내가 직접가서 모셔오지 못할망정 이리 불러오게 하였는데 이정도의 성의는 보여야지.” “허, 그놈이 와룡봉추라도 되는 놈이랍니까?” 이번엔 마음에 들었는지 체이첸은 빈둥대는 레이첸의 등을 떠밀며 방을 나간다. 체이첸의 단정한 궁의 복도를 걸어간다. “아무튼 수고했다. 정말로 찾아올 줄이야. 기쁘구나. 뭐 원하는 것이 있나?” “그다지. 아, 있다! 나 그냥 들어가면 안되오? 왜 나까지 마중이요?” “그건 안되는 말이다. 안면이 있는 손님이 자신의 집에 오는데 인사를 해야지.” “그게 내 손님이오? 형님 손님이지.” 투덜대며 따라오는 레이첸은 속이 끓었다. 그 흉한 꼴을 보인 놈에게 하하하 웃으며 점잔을 빼면 뭐라 생각할까. 짜증을 부리며 체이첸의 뒤를 따라가 마차앞까지 가서 고개를 돌린다. 조금이라도 알아보지 말라는 뜻이지만 그게 가능한 일인가 좀 더디게 마차에서 그가 내려 체이첸을 본다. 체이첸이 환하게 웃으며 그를 맞이한다. “어서오시오. 고생하셨소.” “잘왔네.” 빈정대며 한마디 건넨 레이첸을 보고 체이첸이 눈을 부라리나 소용없다. 그가 고개를 숙이려고 하자 체이첸이 팔을 잡아 일으킨다. “힘들게 부복하실 필요없소. 황제는 당신네 들에게 그런 권한을 주었으니 말이요.” 그말에 레이첸이 콧웃음친다. 마음속에 온통 얼른 그가 자신을 알아보기 전에 자신의 궁으로 돌아가려는 생각이다. “이만 나는 가보겠소.” “레이첸!” “아, 몰라요!” 체이첸의 외침에 고개를 내젓다 문득 시선에 들어론 손님을 보고 의아해한다. 얼래? 저놈이 아닌 것 같은데. 악운 역시 레이첸이 의아해 하는 것은 눈치챘다. 어영부영 황궁까지 왔는데 정말로 2왕자의 환대를 받고 나니 이거 참 난감한 일이였다. 버릇대로 부복하려다가 체이첸이 얼른 일으키는 바람에 더욱 난감하다. 자신이 그가 아니라는 말을 할 기회를 잃어버린 듯 하다. 게다가 조금 덜어진 곳에서 2왕자와 비슷한 붉은 머리의 사내가 자신을 힐끗 힐끗 보는 것도 수상하다. 혹시 자객을 보낸 사람인가? “왜들 그러시오?” 중간에 낀 체이첸이 둘의 심상치 않은 눈빛에 묻는다. 잽싸게 레이첸이 먼저 말을 한다. “아니오 형님. 내가 실수했소이다. 손님께서는 잘 쉬다 가시길.” “황송합니다.“ 악운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레이첸은 서둘러 자신의 궁으로 돌아온다. 태진을 부르려다가 그에게서 감기 때문에 오늘은 쉬겠다는 서신을 전달받고는 화를 낸다. 태진의 궁으로 직접 걸어가며 의아한 생각을 멈추지 못한다. 저놈은 아니야. 저놈은 아무리 봐도 정안족이 아니다. 게다가 한달도 안되는 사이에 사람이 저렇게 변할리도 없다. 즉 태진 이놈이 별 이상한 놈을 끌고 왔다는 것이다. 태진의 궁으로 들어가 방문을 열고 벌컥 화부터 낸다. “이봐 태진, 너 누구를 데리고 온거냐?” “쿨럭, 형님 서신을 안받으셨소?” “받아서 이리 온 것이 아니냐! 누굴 데리고 온거야? 저 놈이 아니라구!” 태진은 몇 번 더 기침을 하다 일어난다. 잠을 자고 있었는지 부스스한 얼굴로 묻는다. “무슨 소리하는겁니까?” “그러니까 얼토당치 않는 놈이 온 것 같다. 내가 본 사람은 분명 정안인이였는데 온 놈은 한족같아. 전혀 다른 사람이다.” “...정말로?” “그래. 너 도대체 어디가서 누구를...” “정말로 그가 아닌 것이 확실합니까?!” “그래. 왜 그러냐?” 태진은 갑자기 열이 내린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마에 올려진 손수건을 내렸다. “갑자기 감기가 좋아진 듯 하군요. 가서 손님을 만나고 싶습니다만...” 레이첸은 웃기다는 표정을 지었다. “봄이 오고 있다.” 하류사는 창문을 힘껏 열어 새바람이 방안으로 들어오게 만들었다. 쏠리는 바람에 나비와 꽃잎이 가득 방안으로 들어온다. 여관이 차를 내오다가 고개를 돌려 바람을 피한다. “왕씨?” “모도리의 명림씨를 불러와라.” 웃는 왕씨의 어깨에는 귀걸이의 옥을 쪼아보는 제비가 앉아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화원의 문이 열리고 을노와 못보던 아이가 들어선다. “을노. 잠시만.” “응?” “잠시만 기다려요.” 자례는 뒤를 돌아 심호흡을 한다. 긴장하고 있었는가. 생각하지 못했던 모습에 을노가 낄낄댄다. “뭐야 너 긴장했냐?” “그럼 촌구석의 어린사내가 일국의 지배자를 만나는데 어찌 안떨립니까?” “그렇게 생각하지마라. 왕씨께서는 좋은신 분이야.” “예.” 그래도 잠시 화원의 나비를 보던 자례는 드디어 고개를 돌려 을노와 함께 계단을 올라 왕씨의 방앞에 선다. 을노가 문을 두드리며 고한다. “을노입니다.” “들어와라.” 문을 열자 방안 가득 들어온 나비와 꽃잎이 널려있다. 창가에 등을 돌리고 서 있는 자와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있는 여인이 보인다. 을노가 여인에게 고개를 숙이자 여인도 따라 숙여보인다. 그들이 부복하자 하류사는 몸들 돌려 그들을 바라본다. “을노는 나가있으라.” “예.” 을노가 나가자 하류사가 단상에 앉는다. “오느라 수고 많았네. 기다렸을테지 내 부름을. 많이 생각했는데 이제야 일이 풀리는구만.”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아 자례는 그냥 침묵한다. 하류사는 자례를 내려다 보며 말을 이었다. “자네는 영리하니 대략 내 생각을 알고 있을지도 몰라.” “실은 왕씨, 전혀 모르겠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바로 말하지. 난 자네를 황궁으로 들여보낼 생각이야. 이정도는 생각했었겠지.” “그렇습니다.” 역시나 그런가. 자례는 예상했던 대답에 기뻐해야 하는건지 절망해야 하는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혼란스러워하는 것이 하류사에게 비친 듯 그가 잠시 말을 멈추고 차를 마신다. 좀더 시간이 흘려 자례가 안정을 찾는 듯하자 다시 말을 꺼낸다. “사실 난 호랑이 미끼가 필요했다. 사냥꾼이 필요한 것이 아니지.” 그 말에 여관이 잠시 동작을 멈추고 귀를 귀울인다. “그래서 자네 형을 보내지 않았다. 무슨 말인지 알겠는가?” “...예.” 어차피 오래 가지 못할 목숨이니 살아있는 동안 유용하게 쓰겠다는 말로도 들릴수 있다. 하지만 자례는 이해했다. 내가 왕씨라도 그랬을것이다. 결국 죽게될 미끼라면 오래살지 못하는 쪽이 덜 아깝지. “하지만 무리는 않좋다고 참좌가 고하더군.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해서 자네를 부르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생각지도 못하게 일이 풀려 자네를 부른거야.” “예.” “자네는 영리해. 그러니 다음달에 있는 입관시험(立官:과거시험)에 합격해주게. 명실공히 장원으로 말이야.” 잠시 자례는 말을 멈추었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였다. 왕씨는 자신을 금의 관리로 들여보내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합법적이고 정당한, 무엇보다 황제의 관리로 말이다. 자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입관시험을 치룬다 한들 제가 황궁으로 들어가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아골타는 황궁에 정안족을 들이지 못하게 하고 있지 않습니까.” “자네는 한족으로 시험을 보게 될것이다. 오늘부터 새 거처로 옮길것이야.” “분부 시행하겠습니다.” 왕씨는 조금 떨어진 방에 있는 여관을 보고 손으로 입을 가리며 생각에 잠긴다.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는 여관에게 말한다. “여관은 나가있으라.” 망설이던 여관도 방을 나간다. 문이 닫히자 하류사는 창문을 닫았다. 바람소리가 끈겨 방안은 고요해진다. 펄럭거리는 나비의 비상소리만이 요란하다. “고개를 들어라 명림자례.” “예.” 자례가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자신이 생각해왔던 제왕이 그곳에 서서 자신을 내려보고 있었다. 우러러보는 큰키에 크지도 작지도 않은 강한 체격. 날카로우면서도 사려깊은 검은 눈매. 비단같은 검은 머리가 허리를 넘어 출렁이며 매끈한 피부의 미남자다. 하류사가 단상에서 두계단을 내려왔다. 무겁게 움직이는 모습이 그렇게 유려하고 정중할 수가 없어 저절로 고개가 수그러든다. 저분이 우리 모두의 시간을 이어주실 분인가. 가슴이 두근거리며 저절로 왕씨에 대한 불신이 사라지는 것이 느껴진다.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아주 많이 흡족한 지도자이다. 자신이 꿈꿔왔던 그런 지도자이다. 앞으로의 희망이란 감동이 밀려와 눈물이 나올것만 같다. 왕씨는 두계단을 내려와 고개를 든 어린 아이를 바라보았다. 여관이 말한 것이 옳군. 아직 어려. 그의 형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어린 아이이다. 자휼이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대해 불만과 분노를 잠재하고 있었다면 이 아이는 체념과 희망을 잠재하고 있다고 할까. 확실히 훗날을 내다보는 아이군. 이대로 죽이기엔 정말 아깝다. 하류사는 다시 단상으로 올라가 앉았다. 자례를 내려다 보며 진지하게 묻는다. “자네는 지병이 있다고 들었다.” “그렇습니다.” 수긍하는 아이에게서는 묘한 위기감이 느껴져 잠시 말을 멈춘다. “나는 자네를 미끼로 삼아 아골타와 4왕자를 붕괴시키려 한다. 너는 내게 어떤 의견을 내어줄수 있지?” “죄송합니다. 아직 저는 궁안의 사정에 대해 아는 것이 없습니다.” “4왕자가 장가간 소식은 들었겠지? 화선부인이라고 꽤나 미인이지.” “제게 화선부인과 황제와의 불경을 꾀하게 만들라 하실생각이셨군요.” “...그렇다.” 정확한 자례의 대답에 하류사는 만족스런 미소를 짓는다. “더불어 4왕자가 아골타를 미워하게 만들게 하려고 했었지. 그들 스스로 자괴하게 말이다.” “초선의 반간계(叛姦屆:이간질)입니까.” “그렇지만 화선부인은 4왕자를 꽤나 좋아해. 그러니 다른 3자가 반간계를 해주어야하지. 그 반간계를 할 사람이 자네다.” “예.” “그럼 하나 물어볼까. 반간계가 완전히 성공된다는 것은 너에게 무엇을 의미하느냐?” 잠시 침묵이 흐른다. 하류사가 특유의 그 무표정한 얼굴로 자례를 내려보았다. 자례는 잠시 눈을 내리깔다 곧 시선을 마주치며 말한다. “반간계로 교체되어 오른 황제는 즉위의 타당한 이유를 들어야 합니다. 그는 반간계를 원인으로 지목할것이고 그 원인을 저로 들어 왕윤(초선의 양부)처럼 자살하거나 참수되는 것이 완성이라 하겠지요.” “그것이 ‘완벽‘ 이겠지. 가서 그렇게 하라.” “...예.” 마지막패는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자. 하지만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두근거린다. 아까와는 다른 두근거림이다. 알수 없는 공포와 쓰라림으로 심장이 요동친다. 마지막패는 아니야. 그러니까 괜찮아. 하지만 벼랑끝에 서있는 듯한 어지러움이 느껴져 토할것만 같다. 어린 아이의 눈을 살핀다. 가늘게 흔들리는 눈동자가 역시나 아직은 계략적으로 완성된 자객은 아니라는 것이 들어난다. 죽음과 끝에 관한 공포가 가슴 깊은 곳에 잠재 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영웅서엔 올해 21이 된다 적혀있지. 그렇다면 지금 나이는 19이 되는가?” “예. 올해 생일이 아직 지나지 않았습니다.” 하류사는 한숨을 쉬었다. 어리군. 생각했던 것과 같지만 생김새는 어리다. 아니 여리다고 해야하나. “글을 잘읽나?.” “예?” 자례가 무슨 뜻이냐는 듯 되묻자 하류사는 빙긋 웃어보인다. “자네는 정시로 궁안으로 들어가 궁안의 정세를 스스로 살피게. 정시로 들어가면 황제의 직속이 되니 왕자들의 세력싸움에 끼여 위험한일에 휘말리는 일은 없을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반간계는...” “지금부터 자네는 미끼에서 사냥꾼이 되는 것일세.” 하류사는 팔짱을 풀고 옆을 날아다니는 나비에게 손을 뻗었다. “그후 때를 보아서 2왕자의 밑으로 들어가게 될것이다. 2왕자의 신임을 얻는다면 황궁의 생활을 모질지 않겠지. 자리가 잡히게 된다면 4왕자와 14왕자의 사이를 벌려놓는다. 이때 2왕자의 권력과 신임이 도움이 될것이다.” “...?” “그것이 이루어지면 자네는 도사(道士)로써 황궁을 나오게 될것이다.” “....환속을 하는것입니까?” 이해할수 없는 말에 다시 되물었다. 살아 나오는 것인가? 황궁에 들어가 살아나오는 것인가? 훗날을 지탱하기위한 일을 하는 것인가? 단지 4왕자와 14왕자의 사이만 벌려 놓으면 되는 것인가? “그렇다. 자네가 무사히 환속(換俗:관리에서 일반인이 됨)이 가능하려면 주인이 죽어야 한다. 그것에 대해서는 내가 지시한다. 단지 모든 것을 믿고 거기서 기다려라.” “받들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그에게 하류사는 경고했다. “일단 입궁을 하게 되면 이곳에서 자네를 도와줄수가없다. 연락을 취하는 것도 아슬아슬한 일이다. 따라서 생겨나는 일에 자네의 능란한 대처가 필요하다. 자네가 생각했던 길로 인도되지 않을수도 있다. 하지만 이곳의 나는 내가 원한 방향으로 일을 진행시킬것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는가?” “제가 살아남으려면 왕씨께서 말씀하신 것을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생각처럼 쉽지 않을것이다. 14왕자는 꽤나 영리한 놈이다. 자네가 이미 몸소 체험했겠지. 목래에서 말이야. 자네에게도 절호의 복수전이 될지도 모르지.” “황송합니다.” 자례는 멀리서 계명과 함께 자신을 바라보았던 태진을 기억해내려 애를 썼지만 정확히 떠오르는 얼굴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에 대한 억눌러둔 분노가 사그라든 것은 아니다. 하류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가게. 장군 을지마기가 기다릴것이다.” “왕씨!” “왜그런가?” 정말로 그것뿐입니까? 단지 그것 뿐입니까? 그것으로 제가 다하는 것입니까? 하지만 자례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빙긋 웃고 있는 왕씨가 어째서 자신의 아버지와 같은 느낌이 들어버리는 것인지 스스로도 이해할수 없다. 자례의 의문을 이해했는지 왕씨는 단상의 계단을 내려와 그에게 다가갔다. 왕씨가 다가오자 얼른 고개를 숙이는 자례를 바라보다가 그 큰 손을 천천히 뻗어 작은 머리위에 올려놓는다. 따듯하고 큰 손으로 머리를 쓰담는다. 화들짝 놀라 움찔하는 아이는 황송함에 어쩌줄 몰라한다. 조용히 깊고 낮게 울리는 소리로 하류사가 자례에게 속삭였다. “네게 내가 만든 미래를 보여주겠다.” 76 “문전 박대라니 생각하지도 못했던 복병입니다.” 다음날 새벽같이 일어나 체이첸에게 알현을 청했던 태진이 씁쓸하게 웃었다. “당연하지 않느냐? 형님은 그놈이 정안족이라 믿고 있으니 외부인은 어지간해서 그의 궁에 들어가지 못하게 될것이다.” “으흠?” 태진이 의미있는 웃음을 지으며 레이첸의 등뒤로 돌아갔다. “이상한 일입니다. 형님.” “뭐가?” “어째서 2왕자를 그렇게 흠모하는 4왕자께서 그가 가짜라는 것을 밝히지 않으신것일까요?” 뜨끔한 표정으로 레이첸이 고개를 돌린다. “무엇인가 이유가 있어 그를 궁안에 들이고 싶지 않아 하시는 것은 아닌지요?” “몰라.” “이런 이런. 정말이군요. 행여나 했습니다만. 그 촌구석에서 무엇을 하고 계신겁니가?” “절대 비밀이다.” “그렇다면 제가 그를 잡아들여도 되겠습니까?” “뭐?” 의아한 표정으로 레이첸이 되묻자 태진이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당신과 연루된 자가 정안이라는 것이 훗날 안좋게 작용할지도 모릅니다. 후환이 두려운 것은 미리미리 없애는 것이 상책이 아니겠습니까?” “아니. 그럴정도는 아니다. ” 딱잘라 말하며 레이첸이 태진의 앞으로 가서 그를 막아섰다. “체이첸형님도 그에 대해 의심하지 않고 있으니 그가 나와 연루되는 일은 더 이상 없을것이다. 그러니 괜한 일을 저지르지 말아라.” “아무튼 형님은 그놈에 대해 더 이상 관여하지 말아주십시오.” 태진이 딱 잘라 말하고는 시선을 돌렸다. 잠시 생각하더니 씩웃는다. “그보다 화선부인은 어떠하답니까? 근간에는 누구와 지내시는지요” “응? 화선은 여전히 화가 나있고 요즘에는 ...” 손을 올리며 한숨을 쉰다. “소처와 지내고 있다.” “소처? 언제 처를 두셨습니까?” “아니 비빈이였던 궁녀에게 준 이름이야. 아직 정식은 아니지. 그래. 여기서 나가면 그애를 정식으로 불러올생각이다.” “그건 불가능한일입니다. 화선부인이 과연 그것을 허락할까요?” “왜? 아직 화선은 정비가 아니니 첩을 들이는 일에 관여하지 못한다.” “잊고 계시는군요. 화선부인이 누구의 외동딸인지 잊으셨습니까?” “...” “적당한 시기에 장난은 그만 두십시오. 그보다 화선부인을 달래 차후 독립할 때 그녀의 아버지에게 군사를 얻는 것이 좋겠지요.” 태진은 냉정하게 등을 돌렸다. 막 방을 나가려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한다. “그렇다고 소처를 죽이면 안됩니다. 궁녀는 황제의 것입니다. 잊지 않으셨겠지요?” “나가버려!” “혹시 애라도 가지면 제가 처리할테니 괜한 장난하지 마시고요.” 팍하는 소리가 들리며 문에 비게가 부딪친다. 방문 밖에서 태진이 웃는 소리가 들린다. 단지 듣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피곤해질 정도로 긴장해 있었다. 문을 열고 나가자 복도에 여관이 누군가 소곤거리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보자 수려한 용모의 젊은 장수가 여관과 담소를 하고 있다. 장수가 먼저 자례를 보고 다가와 인사했다. “을지 마기입니다.” “목... 아니 명림 자례입니다.” “생각보다 많이 어려보이시는군요.” 자례는 마기장군을 올려다 보았다. 굉장히 잘생긴 얼굴이다. 같은 남자라지만 감탄이 나올정도로 잘생겼다. 분명 정안인의 생김새이긴 하지만 이상하게도 정안인 같지 않다. 머리를 올리고 한족의 복장을 해서 그런가. 묘한 분위기다. “마기장군은 어릴때부터 한족의 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우리도 잘 구분하기 힘들정도지요.” 여관이 대신 말해준다. “자례는 마기 장군의 집에서 생활하게 될것입니다. 선인 을노는 계속 모도리에 남을 예정이지요. 인사하세요.” “좋은 동생이 생겼다 생각하고있습니다.” “마기장군은 궁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알려줄겁니다.” 마기장군이 웃으며 말하며 나가자는 눈짓을 한다. 자례는 마기장군을 따라 나가려다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여관에게 묻는다. “저...” “무슨 일입니까?” “...혹시 제 형님에 관해 아무런...?” “자휼은 난곡에서 사라진 후 아직까지 아무런 연락이 없답니다.” “역시 그렇습니까.” 실망한 표정으로 등을 돌리는 모습에 여관은 안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다시 부른다. “하지만 소식이 오면 바로 연락해주지요. 열심히 하시길.” “감사합니다.” 좀 좋아진 표정으로 계단을 내려가는 자례의 뒷모습을 보고 여관은 미소지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사라지는 모습을 계속 바라본다. 그들이 사라지자 방안에서 왕씨의 목소리가 들린다. “여관, 마류장군을 불러라.” “예.” 여관은 고개를 돌려 다시 참좌로 돌아간다. 그것이 자신의 일이란 것을 느낀다. 마기가 인도 한 곳은 전혀 예상 밖의 장소였다. 황성 근처에 있는 거대한 기와집이였다. 한족의 방식을 따른 집이였는데다가 장군들이 모여사는 지역에 세워져 있어 내심 당혹스럽다. 마기가 자례에게 설명했다. “우리 장인의 집이지. 하지만 저번 송과의 전쟁에 전사하고 내 부인, 그의 외동딸만 살고 있다네. 나는 궁안에 거처가 따로 정해져 있어 궁밖출입이 자유롭지 못해. 그러니 자례는 이곳에서 공부하고 그녀가 돌봐줄것이다.” “부인에게 너무 폐가 되는 것은 아닌지...” “흠. 좋은 여자야. 걱정마라.” 문이 열리며 굵은 목소리가 들린다. “어머나, 낭군님이 돌아오셨군요.” 순간 자례는 멍하니 고개를 들어 그녀를 올려다 보았다. 크다. 그 거대한 키에 자례가 놀란 표정을 짓자 소용은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이 아이군요. 생각보다 매우 귀엽습니다.” “부인께서 잘 돌봐주세요.” “그럼요. 어서 들어오세요. 모두들.” 거대한 문을 두팔로 활짝 열며 두 사람을 맞이한다. 알딸딸한 표정으로 자례가 말했다. “부인이 매우...키가 크시군요.” “음? 그렇지. 키만 큰게 아니라 손도 발도 나보다 큰걸.” 마기는 빙그래 웃었다. “하지만 매우 영리하고 총명한 여인이다. 학식도 매우 풍부해. 좋은 선생님이 될것이다.” “모두들 이쪽에 상을 차려놓았어요.” 분홍색 손수건을 흔들며 소용이 한 방을 가리켰다. 마기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요리솜씨도 최고지.” “좋은 부인이군요.” “그래. 그보다 사실 왕씨에게서 자네에게 해주라는 말이있었네. 방안에 들어가서 하지.” 방에 들어가자 소용이 마기옆에 공손하게 앉아 차를 따른다. “부인. 잠시만 나가서 기다리세요.” “알겠습니다.” 소용이 총총걸음으로 나가는 소리가 쿵쿵 울린다. 그 소리가 멀어지자 마기가 입을 열었다. “난 황성에서 무위장군(武衛將軍)의 역임하고 있네. 그래서 궁안 어디라도 자연스럽게 돌아다닐수 있지. 얼마전 힌두루(왕씨의 은신처 현제 화원)에서 서신을 받았는데 목래에 관한 이야기였다.” “어떤 내용이였습니까?” “그것은 목래가 공성된 것이 황궁에서 어떤 식으로 마무리 되었는지 알아보라는 내용이였지. 공식적으로 죽은 계명장군에게 모든 것이 돌려졌지만 어느날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네. 14왕자가 오랬동안 자신의 성에 부재중이였다는 것이지.” “목래를 공성하는 동안 말이군요.” “그래. 앞으로 알겠지만 왕자들이 궁을 나가는 일은 극히 힘들어. 그래서 며칠전 시간을 내어 근처를 돌아다니다. 우연히 자객들을 만났네. 궁안에서 관리처럼 행새했지만 자객이라는 것은 자연스럽게 드러나기 마련이거든.” “자객이 14왕자의 처소에?” “그리고 14왕자는 곡양근처의 낭성에 있는 ‘손님’을 죽이라는 것이였다. 몇가지 조사해보았는데 그것은 자네를 말하는 것이였지.” “저를요? 하지만 저는 낭성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갈 이유도 없었구요.” 이해할수 없다는 듯 자례가 고개를 갸웃한다. “지금 궁안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말해주겠네. 목래의 공성에 대해 어떻게 알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아는대로 이야기해주지. 그것이 왕씨께서 내게 지시한 일일세.” “예.” “목래의 공성은 14왕자의 단독행동이였네. 이유는 아마도 15왕자에게 간 여인들에게 있을 것 같다. ” 그말에 자례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15왕자가 목래로 말을 차출하려 왔을때 여인을 마음에 담은 모양입니다.” “그래. 그래서 14왕자가 힘을 과시해 15왕자의 소원을 들어준 것이다. 그런데 목래가 공성된후 15왕자는 2왕자의 눈에 들어 힘을 가지게 되었지.” “그랬군요.” “문제는 15왕자가 2왕자에게 너와 자휼을 천거했다.” “예. 들었습니다.” “자네 혹시 15왕자가 준 2왕자의 가신패를 아직 가지고 있는가?” 그말에 자례가 인상을 썼다. “그것이...저도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그것은 4왕자가 가지고와 지금은 2왕자의 손에 있다.” “예?” “자네는 공성된후 계명의 집을 나와 유번님과 함께 곡양으로 가서 은신했지. 그런데 우연히 4왕자가 그쪽으로 가서 만났다는데 정말인가?” “그렇습니다.” “그때 4왕자가 그것을 발견하고 주어간 듯 하다. 4왕자는그 패를 2왕자에게 돌려주었고 2왕자는 그것을 들고 있던 자네를 찾아라 명령을 내렸네.” “어째서? 그 패가 제것임을 어찌 알고...” “가신패에는 일정한 순번이 정해져 있네. 그것으로 알았겠지. 2왕자는 최고 왕자인 만큼 궁을 나가는 것은 행사에 가까워. 그래서 4왕자에게 그것을 부탁했지. 아마 4왕자는 14왕자에게 그것을 다시 부탁했을것이다. 실제로 2왕자가 내게서 2대정도의 병사를 빌려갔다.” “그렇다면 암살건은?” “그런데 이상하게 병사들이 당일 출발하지 않더군. 그래서 14왕자쪽을 살펴보다 자객을 만난거다. 일단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마침 휴가기간이던 나도 자객들과 함께 궁을 나갔다. 잘 모르지만 자네가 왕씨께서 찾고 싶어하시던 명림씨라는 것은 알았고 또 혈족이 암살당하는 것을 지켜본다는 것은 힘들어서 말이야. 그날 밤 자객들과 거의 동시에 낭성으로 도착했지.” “아마 그때 저는 백라님과 을노와 말을 달려 도성으로 오고 있었을겁니다. 그러고 보니 중간에 밤에 달려가는 병사들을 보았습니다만...” “아마 그것은 내 병사들이였을거다. 내가 출발한 다음날 출발한 모양이군. 아무튼 도착하니 누군가 성벽위에서 자객들에게 쫓기기에 일단 구했지만 정안족이 아니였어. 그가 말하더군. 오해가 있어 자신이 너라고 착각한다고 말이야.” “그는 누구였습니까? 혹시 유번님?” “아니 악운이라는 사내였다.” “아아...어떻게...”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가 끌려갔는지는 모르지만 어쨌건 또 꼬여든 사내군. “곡양에서 온 서신엔 그가 절벽에서 떨어져 정신을 잃은 것을 유번님이 돌보고 계셨다는군. 그래서 오해가 있었는 듯 하다.” “그 사람 기어이 난곡 아래로 사냥 온 장수들의 짐을 턴 모양이군요.” “사냥온 장수?” “그가 난곡 아래에 여진 귀족들이 사냥왔다 조심하라 말하더군요. 악운은 호북 군벌의 아들입니다.” “호북 군벌의 아들은 죽었지 않은가? 송이 악비를 죽리려다 그가 대신 독살당했다고 하던데?” “아뇨. 암살은 성공했지만 숨겼다 하더군요. 호북은 마나님이 지키고 악운은 이리로 도망와 화적일을 하는 듯 해보였습니다.” “그렇군. 그를 살린 것이 헛일은 아니였군.” 마기는 차를 마셨다. “나는 그를 구하고는 일단 황성으로 들어오라 했다. 들어와서 부정하고는 나가라 했지. 아니라면 끝까지 그를 노릴테니까. 그는 내말대로 어제 황궁으로 들어왔지. 2왕자가 극진하게 대접하더군.” “4왕자가 제 모습을 보았는데 혹시 의심하지 않았습니까?” “그게 바로 말하려고 하는 중점이네.” 이해할수 없다는 듯 마기가 자례를 바라보았다. “4왕자는 그, 악운이 자네라고 말했어. 그리고 지금 악운과 잘 어울려 지내고 있네.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야. 태진마저 아무말 하지 않으니 말이야.” “...그렇다면...” 손톱을 깨물던 자례가 중얼거렸다. “태진이 그를 이용해 2왕자를 내칠생각일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정안인은 황궁의 출입이 금지되어있지 않습니까? 아골타의 칙명이였으니 그것을 어기는 것은 반역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하지만 악운은 정안인이 아니지 않은가.” “태진쪽은 아직 모르고 있는 것이지요. 아니 어쩌면 알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2왕자는 모릅니다. 그가 모르고 있으니... 그렇다면 악운이 위험합니다.” “왜?” “악운을 죽인 후 4왕자와 14왕자가 입을 다문다면 그는 정안인이던 한족이던 될 수 있으니까요. 만약 황제의 앞에서 악운이 죽는 불상사가 일어난다면 당연히 아골타는 악운에게 관심을 가질테고 그에 대해 묻겠죠. 악운을 정안인으로 알고 있는 2왕자는 아무런 대답을 할수 없을것입니다.” “그렇다면 4왕자나 14왕자가 아골타에게 악운을 정안인이라 말해 2왕자를 황제의 눈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건가.”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아골타는 사나운 인물로 알고 있습니다.” “사나운 사내지. 하지만 영리한 사내기도 해. 만약 2왕자를 태자로 결정했다면 오히려 4왕자나 14왕자가 내쳐지는 신세가 된다. 그는 황제라는 것이 얼마나 많은 적을 두는지 이해하고 있어. 아들조차 위험하다 느끼면 다 죽여버릴만한 무서운 놈이다.” 마기는 말을 끊었다. “게다가 자네의말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만 사실 불가능하기도 해. 일단 왕자라고 해서 황제와 알현할수 있는 기회가 많은 것은 아니거든. 부름을 받지 않으면 왕자라 한들 황제에게 다가갈수 없지.” “그렇습니까?” “이제부터 궁안의 규칙에 관해 내가 조금씩 알려줄것이다.일단은 입관시험으로 정당하게 입궁하는게 먼저다.” “예.” “뭐 걱정하지는 않아. 명림씨는 총명한 인재를 많이 가지고 있지 않는가. 하지만 입관시험은 오늘부터 삼주정도도 안남았다. 가능하겠는가? 뭐, 안되면 내가 답지라도 빼 돌려주지.” 호탕한 마기의 말에 자례는 낮게 웃었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입관시험이란 시를 작문하는 법을 보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 하지만 여긴 황성이니 최고의 인재들만이 모인다. 방심하지 말도록. 왕씨께서 자네가 이왕 들어가는 것, 최고로 들어가셨으면 하시지 않는가.” 아무말 없이 고개를 조금 숙여보인다. 마기가 미소지으며 잠시 말을 멈춘다. 서로에게 다른 생각이 스쳐지나간다. 아무렇지 않게 앉은 자례의 가슴속에도 응어리진게 풀리지 않는다. 형은 어떻게 된거지. 그대로 사라져 버린건가. 아직도 난곡에 있는걸까. 자신은 점점 이곳에 발이 묶이고 더 움직일수 없는 새장안으로 들어가려 준비하는데 형은 자신을 만나지 않는다. 정말로, 정말로 입성하게 된다면 환속할때까지 만난다는 것은 불가능할텐데. 이젠 영영 만날 수 없는 건가. “아참 왕씨께서 또 하나 말씀하셨는데.” “예?” “자휼에 관한 것인데 일단 도성과 낭성에는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다는군. 계속 서신을 보내고 있으니 곧 소식이 있을것이라 하셨다. 아무래도 왕씨께서는 그 악운이 한탕했다는 그 장군들의 틈에 끼어 어디론가 가버린 것이 아닐까 하시더군.” “그렇습니까?!” 자례의 큰 소리에 마기가 놀란다. “추측이지. 진정해.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날 난곡으로 여행을 간 장수들은 도성안의 장수는 아니야. 만약나갔다면 내게서 병사들을 차출해 갔을것이니까.” “그렇다면? 외부의 태수? 관리? 호족?” “그것은 네가 더 알아내기 쉬울것이다. 얼굴한번 본적없는 나나 혈족이 알아낸다는 것은 무리야. 하지만 악운은 그들을 직접 보았지 않나. 네가 입성해서 악운에게 접근해 알아내라.” “마기장군이 입성전에 알아내 주시면 안되는지요? 제가 입성하면 알아낸들...!” 만나기가 힘들지 않습니까. 하지만 마기는 고개를 저었다. “난 황제 직속이다. 악운은 2왕자 직속이니 만난다는 것은 무리야. 2왕자가 악운이 정안족이라 생각하는데 황제 직속의 나에게 그를 보여줄 것 같은가? 게다가 악운은 그 누구와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하더군. 결국 네가 알아서 하는수 밖에 없다. 네가 직접 2왕자의 가신이 되어 악운을 만나는 수밖에 없어.” “그래서 왕씨께서 나에게 2왕자의 밑으로 들어가라...” “그래. 왕씨께서는 자상하시니까.” “그렇군요.” 자례는 한결 마음이 편해졌지만 역시나 실망도 컸다. 결국 근간에 만나기는 좀 힘들겠구나. 결국 내가 살아나와야만 형을 만날 수 있는것이다. 반드시 살아나와야, 반드시 밀명을 이루어 내여야 만날 수 있는것이다. 일종의 포상이 되겠구나. “왕씨는 굉장하시군요.” “그렇지.” 자례는 고개를 흔들었다. 진실로 굉장하시군요. 저 스스로 포기하지 못하게 하고 계십니다 그려. “입관시험까지 20여일, 필요한 책은 안채에 모두 있다. 책상 아랫서랍에 있는 것은 저번 입관시험에 나온 시문이다.” “그럼 지금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아니 오늘은 쉬는것이...” “아뇨. 충분히 쉬었습니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었거든요.” “하지만 식사는 하고하지.” 마기는 오랫동안 기다린 소용을 불렀다. 77 오늘따라 답답한 느낌인지 왕씨는 고개를 많이 움직였다. 여관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물었다. “어디 불편하십니까?” “아니. 음. 그래. 이상하게 오늘따라 답답하군.” 여관이 다가가 옷의 솔기를 다시 접고 매만져준다. 한결 좋아졌다는 표정으로 왕씨가 웃음짓는다. “고맙군.” “예. 그보다 아까부터 마류장군과 을노장군이 대기중입니다만.” “아아. 기다리게 했는가. 들어오시게.” 여관이 방문을 열자 두 장수가 들어와 고개를 숙였다. 하류사는 을노를 가까이 불렀다. “근간 나를 모시느라 고생하셨지. 선인께서.” 을노는 뜨끔했다. 이 다음으로 나올말은 아무래도 날 멀리 보내시겠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역시나 왕씨는 벽에 걸린 지도를눈짓한다. “호북의 군벌세력에 관해 어떠한가?” “그들은 우리에게 아직은 유용한 동맹군벌이라 생각합니다.” “그렇지. 그러니 자네가 가서 그들이 패하지 않도록 힘좀 써주게.” “예. 하오나 그쪽에는 마류장군께서...” 을노가 약간 떨어져 있는 마류장군을 보고 말을 흐렸다. 호북과의 동맹은 오래전부터 지속된 것이였다. 하류사는 근처의 혈족에게 그들을 도우라는 명령을 내렸고 그 우두머리로 마류장군을 임명해 놓고 있었다. “마류는 지금 송나라의 관직에 있지?” “예, 송 국경지대의 군벌로 지내고 있습니다.” “그렇지. ‘서쪽 군벌 장준(마류장군의 한족명)의 기마병’이였던가. 잠시 그 자리를 을노에게 돌리고 자네는 입궁한다.” “어떤 경로로 말입니까?” “도성안으로 이사온 도사로 말이야.” “알겠습니다. 누구의 가신이였다 도사가 되는 것입니까?.” “1왕자의 가신이다.” 손가락으로 탁자를 치며 하류사가 웃었다. “1왕자의 가신으로 자네는 황제의 친우가 되는 것이다. 황제가 경마를 좋아하니 그것으로 접근하는 것도 좋지. 자네는 무조건 2왕자의 트집을 잡는다. 마지막 결정타는 후에 알려줄 것이다.” “저는 2왕자와 황제를 이간질 시키는 것입니까?” “그렇지. 그리고 마류장군은 ‘그’를 만난지 오래 되었지 않나?” “....‘그‘를 말씀이십니까?” “곧 그를 부를것이니 가서 시주나 하며 어떻게 지내는지 잘 알아보시오.” 마류가 고개를 끄덕이고 방을 나가자 을노가 고했다. “그렇다면 제가 마류장군님 대신 그쪽으로 가는 것이군요. 모도리는 누가 관리합니까?” “마류장군의 아우인 마유장군에게 그 후임이 인계될것이다.” “그렇다면 가서 인계할 준비를 하겠습니다.” “출발은 황제의 축일인 모래 저녁이다.” 을노가 고개를 숙이고 나가자 여관이 물었다. “황제와 2왕자를, 4왕자와 14왕자를 이간질 시키시는군요.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무슨 결정타를 가지게 된단 말입니까? 어느 한명을 완벽히 고립시켜야 일이 진행되지 않습니까?” “고립시키고 있지 않는가?‘ 하류사가 웃었다. “4왕자를 말이야.” 활발한 곳이였다. 도성치고는 작은 규모였지만 사람들은 굶주리지 않았고 사치스럽지도 않았다. 인구에 비해 병사들이 많아 조금 살벌하게 느껴졌지만 주민들은 익숙해 졌는 듯 병사들과 농담을 하거나 시장의 잡다한 도박을 하는 것도 눈에 들어왔다. 기산성이라고 했다. 도성이지만 너무 변방에 있어 부속된 지방성이 하나도 없는 일종의 자치구였다. 목주와 거리가 너무 멀어 자치구로 살아왔던 목래와 같은 상황이였다. 도성과의 거리가 너무 멀어 금나라가 아닌 일종의 작은 나라를 생각하게 하는 성이였다. “상처는 어떠십니까?” “별로. 아주 좋아졌네.” “뼈에 무리가 있었다고 하니 얼마동안은 더 누워계시지요.” 편안하게 한족의 옷을 입은 마고가 자신의 방으로 들어와 깨끗한 옷을 탁자위에 올려놓았다. 사냥갔을 때는 거란족에 가깝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한족의 옷을 입으면 한족에 가까워 보인다. 여진의 옷을 입으면 또 여진인과 흡사하다. “흐음.” “왜 그러십니까?” “그냥 다른 생각좀 했지.” 자휼이 성안을 보고 있던 창문에서 떨어졌다. 천천히 발을 절며 탁자에 앉는다. 마고가 차를 가져와 따른다. “친첸전하께서 상처가 호전되면 말을 같이 타자고 하시는군요.” “아아.” “괜찮으십니까?” 마고가 찻잔을 밀며 물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혹시...” “아냐. 됐네. 별 생각없어. 정말 괜찮아.” 생긴 것은 쌀쌀맞았지만 마고는 예상외로 친절했다. 그는 자신을 막사로 데리고가 자휼이 부담스럽지 않도록 친첸에게 설명했다. 친첸은 기뻐하며 사냥을 중단하고 자휼을 데리고 기산성으로 돌아왔다. 기산성에 혈족이 없어 불편할것임을 걱정하는 친첸에게 마고는 선뜻 나서 자신이 돌보게해달라고 말했고 친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부담스러울 정도로 마고는 자신을 잘 돌보고 있었다.불편함이 전혀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크게 거슬리는 일 없이 자휼은 이곳에서 지냈다. 한가지 걸리는 점이있다면 친첸이 5왕자라는 점이였다. 친첸이 왕자라는 사실을 알게되자 그때부터 친첸의 얼굴에 쉬첸의 얼굴이 겹쳐 부담스러웠다. 마고는 자휼의 그 부담이 여진족을 섬기는 것에 대한 거림칙이라 여겼다. “오늘은 성안이 더욱 들뜨는군.” “공물 때문에 성안으로 외부상인을 들여왔습니다.” “공물?” “곧 황제의 탄생일입니다. 기산도 역시 황제의 것이니 응당 보낼것이 있는것이죠.” “하지만 상인...아니다.” 자휼은 입을 다물었다. 이상하다는 눈으로 마고가 바라보았지만 모르는 척 차를 마신다. 내 아이는 공물을 상인에게서 고르지 않고 주문했는데. 어차피 고가의 것을 보낼수 없다면 희귀한것이라도 보내자며 매년 그날이 다가오면 머리를 쥐어짜며 없는 살림에 여분돈 내는 것이 짜증나 항상 신경질난 얼굴로 돌아나니곤 했다. 하지만 이젠 그럴필요도 없겠구나. “수해, 나 지금부터 나가서 물건들을 봐야하는데 함께 가시겠어요?” “...아니.” “...그럼.” 마고가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갔다. 약간 실망한듯한 뒷모습이다. 자휼은 한숨을 쉬고는 따라 걸어가 마고의 등을 툭쳤다. “같이 가지.” “정말로요?” 그 무표정한 얼굴에 잠시 화색이 돈다. 나란히 성벽을 내려간다. 마고를 바라보니 못내 짓지못하지만 기분좋다는 옆얼굴에 자신도 모르게 쓴 웃음짓는다. 마고에게 약하게 굴고 있구나. 시종이 가져오는 흑염에게 올라타며 마고를 바라보다. 그 역시 검은 말에 올라타고 앞을 바라본다.성을 나가기전 몇몇 관리들을 불러 무엇인가 지시하는 모습이 보인다. 잘은 모르지만 마고는 친첸의 참모정도 되는 모양이다. 저놈은 내 아이를 닮았어. 모습이 닮았다는 것이 아니다. 성격이 닮았다는 것이 아니다. 행동이, 생각이 닮은 것이 아니다. 단지 무엇이라 딱 잡아땔수 없는 미묘한 그 분위기가, 눈동자에 담긴, 아무도 모르는 저 멀리 무언가를 바라보는 그것이 같은것이다. 혹시 마고를 통해 내 아이를 이해할수 있게 되지 않을까? “안오십니까?” “간다.” 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던 고개는 끄덕여진다. 성은 상상 이상으로 많은 상인들로 붐비고 있었다. 아무리 성을 개방한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상인들이 있다는 것에 놀란 자휼이 눈을 크게 뜨자 마고가 설명했다. “기산성 뒤쪽으로 좀 떨어진곳에 자산이라고 하는 철광이 있습니다.” “아아 그 강철이 나오는...” “자산은 황제의 것으로 아무도 채굴이 허락되지 않지만 기산성이 그것을 관리하는 이상 조금씩은 빼어 쓸수 있으니까요. 자산의 강철은 금보다 귀합니다. 상인들은 그것을 바라고 있는것이죠.” “아아. 그렇군.” “뭐. 이곳에서 괜찮은 물건을 건진다면야 자산의 철조각 따위 얼마든지 줄수는 있습니다만...” 마고의 말에 자휼은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그런 귀한 물건이라면야 상인들이 직접 친첸에게 가져오지 않을까?” “그런 물건들은 이미 다른 왕자들이 구했을 것입니다. 쓸모없어요. 그런 것 어차피 황궁의 보물관 구석에 산더미처럼 쌓여있습니다. 그러니 좀더 다르면서 황제의 기호에 맞는 것을 보내라는 친첸전하의 말씀입니다.” “그런가.” 마고의 설명으로 자휼은 상상하지 못했던 고가의 물건들과 그 쓰임조차 알수 없는 물건에 금새 정신을 빼앗겼다. 마치 제천날에 광대를 보듯 자휼은 이리저리 사람들속에서 흘러다니며 이것 저것을 구경했다. 한참을 구경하다 잠시 뒤를 돌아보니 마고가 보이지 않아 이리저리 둘러본다. “여기입니다. 수해” “뭐를 보지?‘ “이거 진짜같습니까?” 마고가 건내는 것은 털가죽이였다. 붉은털의 지닌 여우같았다. 자휼은 그것을 들추어보고 놀랬다. “꼬리가 세 개이군?” “그렇죠. 수해가 보기에는 만든 것 같습니까?” 그말에 그것을 자세히 들고 이리저리 바라본다. 꼬리쪽을 섬세하게 들여다보던 자휼은 한참만에 고개를 저었다. “아닌 것 같군. 만든것이라면 정말로 실력이 좋은 장인이거나.” “그렇죠? 이거 어떻습니까?” “뭐? 이걸?” “황제는 젊은 시절에 사냥을 즐기던 호방한 사내였다 하더군요. 이런 것도 좋을지 모르지요.” 마고는 상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친첸왕자가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어쩌려구?” “설득하면 됩니다.”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단순명료하게 말하는 마고를 보며 자휼은 웃음지었다. 혹시 말이다. 내 아이도 주문한 물건을 다른 관리들과 고르면서 이런 말을 하진 않았을까. -태수님이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어쩌시려구요? -설득하면 됩니다. “....아마 좋다고 할거다.” “예?” “네가 골랐으니 좋다고 할거야.” “...?” 자휼은 고개를 갸웃하는 마고를 바라보았다. 그래. 내 아이가 골랐으니 좋았던것이다. 자휼은 갑자기 자신을 스치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징그럽게 느껴졌다. 움직이는 그들이 창살처럼 자신을 조여오고 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본다. 파란 하늘에 구름이 보이다. 봄이 저 구름에 실려 오고 있는것이다. 78 도성이 들뜨고 있었다. 황제의 탄생일이 온것이다. 속속히 제후로 나간 왕자들이 많은 선물을 들고 도성으로 환궁했다. 연이은 왕자들의 행열에 도성은 분주하고 그들의 하수인들 때문에 꽉차기 시작했다. 자연히 시끄러워 진 도성안은 밤이 되어도 그 소란이 가라앉지 않았다. 공부를 시작한지 이틀 째이지만 그 소란스러움에 자례는 결국 책을 덮었다. 소용이 옆에서 바느질을 하고 있다 물었다. “역시 너무 시끄럽죠? 여긴 장군촌인데도 불구하고 여끼가지 사람이 붐비는군요.” “그렇습니다. 너무 시끄럽군요. 매년 이렇습니까?” “매년 그렇죠. 모두들 좋아합니다. 자례공이 보시는 입관시험도 실은 탄생일을 기념해 열리는 시험인걸요.” “그렇군요.” “시끄러워 공부하실수 없다면 나가서 구경이라도 할까요? 호호호.” 소용은 곱게 일어나 벽장에서 무엇인가를 꺼냈다. 그것은 파란색 한족의 옷이였다. 자례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나가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이젠 슬슬 한족의 생활도 익히시지요. 너무 방안에만 있으면 나중에 힘들어지실걸요.” “그것도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나가있을께요.” 잠시 후 아마도 마기의 옷처럼 보이는 파랑색의 한족의 옷을 입은 자례가 방을 나가자 마당에는 나들이 준비를 마친 소용이 기다리고 있었다. “다행히 낭군님의 옷이 잘 맞아요. 이젠 낭군님은 한족옷은 안입으시거든요. 관리가 되고 나시더니 항상 정복차림이에요. 나는 관복은 잘 짓지 못하는데 말이에요.” “소용부인은 마기장군님과 오랫동안 지내셨군요.” “그럼요. 저희는 이미 17년이 넘는 부부랍니다.” 얼굴을 붉히며 소용이 부끄럽다는 듯 말한다. “17년이나요? 마기 장군님은 보기보다 매우 젊어 보이십니다.” “호호호, 낭군님은 벌써 40이 다되어가세요.” “그러십니까? 저는 20초반으로 보였습니다.” 정말로 놀란 표정을 지으며 자례가 미소지었다. 아무리봐도 30이 넘긴 것 같지 않았는데 그런 나이라. 부끄럽다는 듯 소용이 부채로 입을 가리며 웃는다. “워낙 아름다운 분이라...부인인 내가 이런말 하기 창피하지만 정말 아름다운 분이시잖아요.” “예. 많이 놀랬습니다.” “하지만 자례공을 보고도 전 놀랬는걸요. 공도 미인에 속하셔 이 소용을 부끄럽게 만드시는군요.” “아뇨, 전 마기장군님께 비할바가 안되는 평범한 사내입니다. 장군께서는 정말 여인보다 더 아름다우십니다.” “하지만 둘이 앉아있는 것을 보면 마치 친 형제가 앉아있는 느낌이에요. 그렇지 공은 형이 있으시다고 했죠? 꼭 한번 뵙고 싶군요.” “저도 소개시켜드리고 싶군요.” 자례가 웃고는 둘은 집밖을 나갔다. 하인들이 따라 오려했지만 씩씩한 소용은 필요 없다 말하며 성큼 성큼 걸어 북적이는 저녁 거리로 나갔다. 북적이는 사람들틈에서 오래간만에 도성을 거닐던 자례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사실 축일은 어제가 아닙니까?” “맞습니다. 하지만 축일당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요. 낭군님께서는 축일 당일엔 행사를 마무리 하느라 너무 바빠 궁안은 난리라는군요. 다음날인 오늘부터 보름동안 축제가 시작되는 것이랍니다.” “이런. 마기장군님께서 지금 고생하고 계시겠군요.” “걱정하지 마세요.” 소용은 지나가던 사탕장수에게 사탕을 사며 싱긋 웃었다. “어깨가 너무 죄잖아!“ 굽신굽신 거리며 옷시중을 들던 시종들이 놀라 뒤로 물러난다. 레이첸은 화를 내며 동으로 만든 거울앞에서 팔을 들어보였다. 화려한 수가 놓인 옷은 기품있기는 하나 어깨를 너무 작게 만들었는지 팔을 올리기 부담스럽다. 다시 한번 팔을 올리며 몸을 돌려본 레이첸은 짜증스럽게 옷을 벗어 던졌다. “다시 만들어와라!“ “하...하지만 전하. 지금은...” “다시 만들어오라고 하지 않느냐!” “그만두십쇼.” 레이첸이 시종들에게 화를 내자 누군가 방으로 들어오며 혀를 찼다. “원례 예복의 어깨는 조이지 않습니까? 왜 아랫것들에게 그러시는 겁니까? 불쌍한 것에게 화를 내는 것을 즐기시는 것은 어릴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까?” “시끄럽다.” “너희들은 나가라.” 태진은 시종들을 내보내고 레이첸이 던진 옷의 어깨를 살펴보았다. “짓기는 정확하게 잘 지은 옷입니다. 불편하시더라도 참으셔야겠군요.” “이런 옷을 보름이나 입고 있어야 한단 말이다!” “오늘 저녁엔 편안한 옷을 입어도 되니 걱정마십시오. 그때 시종들에게 어깨를 넓게 하라 하면 되겠군요.” 레이첸은 수긍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태진이 옷을 입는 것을 거들었다. 레이첸은 이상하게 생각했다. 아까와 같은 옷인데도 태진의 말을 듣고 입으니 한결 편안한 느낌이다. 스스로 단순하다고 생각하며 옷을 다시 다듬었다. “힘들군. 매년 있는 일이지만 도저히 적응이 안돼.” “진상품은 잘 챙기신 것을 보니 그래도 적응하신 것 같군요.” 태진이 탁자위에 올려있는 보물함을 열어보며 중얼거렸다. 자신이 건내준 소동의 진주다. 탁자에 앉아 차를 타서 마시는 태진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예복이란 화려하고 사내의 당당함을 나타내기 위한 옷이다. 그래서인지 예복을 입은 태진이 참으로 당당해 보인다는 생각을 하고는 웃는다. “왜그러십니까?” “네 놈도 참 잘난 것 같아서 말이다.” “그야 저도 황가의 자손이 아니겠습니까? 차를 드시지요. 그러는 형님은 지금 당장 황제를 하셔도 믿을만한 모습입니다.” “놀리지마라. 그보다 친첸이 들어왔나?” “아뇨.” 태진은 고개를 저었다. “5왕자는 오늘 오후에나 들어올것입니다. 그는 어떤 일이 있던 항상 최후에 입성하는 왕자가 아닙니까. 아직 다른 왕자들이 입성하지 않았습니다. 좀더 기다려야 하는 것이죠.” “그 자식 들어오면 나랑 만나지 않게 신경써라.” 레이첸은 옷자락을 펄럭이며 말했다. “한 대 날려버릴것이 뻔하니까.” 황궁이 보였다. 이미 시작된 축제에 도성안은 저녁인데도 불구하고 환하게 불이 켜있다. 친첸은 하품을 했다. 단기간에 기산에서 여기까지 달려오는라 피곤했다. 뒤를 돌아보니 십여명의 수하들이 자신을 호위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역시 그들도 조금은 지쳤는지 고개를 돌리거나 목을 쓰다듬는다. 바로 옆에 있는 마고에게 친첸이 물었다. “오늘 들어갈까? 아니면 말까? 하루 정도 신경 안쓰고 잠좀 자고 싶은데?” “그렇다면 근처 여관에서 오늘 밤은 쉬고 내일 새벽에 환궁하시도록 하지요.” 마고가 쉽게 말했다. 축제기간이라 활짝 문이 열린 성안으로 내려갔다. 도성안에서는 말을 못탄다는 말에 순순히 모두들 내려 말을 잡고 여관이 있는 거리로 향해 걸어간다. 그 넒은 도성의 길이 빽빽할 정도로 사람들이 붐비고 있다. 간만에 축제에 방안에만 있던 여인들이 나왔는지 화려한 장신구들이 짤랑이는 소리와 노랫소리로 밤하늘이 가득찬다. 홍등가를 지나 조용한 여관에 방을 잡고 들어간다. 이미 다 손님이 있다는 주인의 말에 돈을 더내어주고는 한층을 빌려버린다. 굽신하게 고개를 숙이는 여관주인은 간만의 횡재에 이층을 내려가다 마침 올라오는 사람과 부딪치고 물러난다. “죄송합니다. 손님.” “별로.” 여관주인은 고개를 들어 상대방을 올려보다 흠칫 놀라뒤로 물러난다. 흉측하게 이그러진 반신에 어쩔줄 몰라 하다가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알고 급히 고개를 숙이지만 이미 늦었다. 막상 본인은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 눈치이지만 그 위로 올라오고 있었던 묘한 분위기의 사내의 인상이 찌푸려진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괜찮아. 그보다 방을...” “두번 다시 실수하면 네 목을 가만 두지 않을것이야!” 자휼은 고개를 살짝 돌렸다. 뒤따라 왔던 마고가 냉정하게 주인을 바라보며 화를 내고 있었다. 자휼이 그만하라는 눈짓을 하자 마고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돌려버린다. “화는 내시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게 무심히 지나치지 마시고요.” “별로. 내가 그렇게 생긴 것이 문제지 그들에게 스스로 느끼는감정을 숨기라고 하고 싶지는 않아.” “하지만 수해는 저런 사람들을 만날때마다 상처받은 눈을 하고 있어요.” 흠칫, 걸음을 멈추고 마고를 바라본다. “내가?” “...모르나요? 아주 슬픈 눈을 하고 있다구요.” “...허허허.” 실없이 웃으며 외면하지만 마고의 시선이 따갑다. “수해. 스스로에게 너무 각박하게 굴지 마세요. ”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그래. 아니, 이젠 절대 아무렇지도 않아.” “수해...” “날 상처입힐수 있는 사람들은 없어. 네가 보는 것은 그때 아이에게 받은 상처겠지. 아직도 지워지지 않은것일까.” 알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자휼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버린다. 따라들어가려다가 고개를 숙이고 멈춘다. 얼마 안되서 친첸이 자신을 찾을 것이다. 그때 내가 안보이면 화를 내겠지. 아쉽지만 마고는 친첸의 방쪽으로 걸어갔다. 문을 열자 왜이렇게 늦었냐는 눈의 친첸이 마고를 바라본다. “머리를 풀러라.” 자신도 알 수 없는 깊은 한숨을 속으로만 삭히며 마고는 친첸에게 다가가 단단하게 땋아내린 금발머리를 풀러준다. 하나하나 풀러내려가자 황금물결이 내리린다. 마고는 잘 밋어내린 다음 하나로 묶었다. 가벼워진 머리로 탁자의 차를 마시던 친첸은 머리끈과 입성할 때 입을 옷과 장식품들을 챙기고 있는 마고에게 물었다. “너 수해장군과 함께 있었지?” “예.” “꽤나 마음에 들어버린 것 같구나.” “...” 대답없이 물건을 다 챙긴 마고는 뚜벅걸어서 문가로 다가갔다. 하지만 친첸이 문을 살짝 막아선다. “넌 정안인이 아니야.” “그렇습니다. 전 정안인이 아닙니다.” “넌 여진도 거란도 아니고 한족도 아니다.” “...” “그런데 저 놈을 통해서 네가 누군지 알아내보려고 하는 것이라면 그만두는 것이 좋아.” “저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그거 신기한 일이란 말이다. 마고.” 침상에 누운 친첸이 마고를 손짓해 불렀다. 옷과 장식품을 탁자에 올린 마고가 가까이 다가가자 침상에 걸터앉게 하고는 턱을 잡아 얼굴을 가까이 오게 만든다. 물끄러미 그 얼굴을 보며 씨익 웃는다. “네가 만약 정안족의 아비를 가졌으면 네 어미처럼 곱상하게 생겼을것이 분명한데 말이야. 안타깝게도 어미를 닮은 곳이라곤 한구석도 없단 말이지. 거진에 여란에 한족의 피가 섞인 아비놈의 이상한 점만 끼어넣은 모습이란 말이다.” “그렇습니까?” “뭐 그 분위기는 네 어미와 똑같아. 널 연동으로 산 것이 아니였으니 상관없지만 말이다. 가끔 아쉬울때가 있지. 특히나 네가 이렇게 도도하게 굴때면 말이다.” “제가 언제 도도하셨다 그러십니까?” “지금이 그렇지.” 턱을 놓으며 친첸이 웃었다. “그 얼음같은 네 녀석의 표정이 그 반쪽병신의 이름만 나오면 흔들리는 것이 얼마나 재미있는 줄 아는가. 너도 꼴에 혈통이 무엇인지 알고는 있는 모양이다. 그래 하나도 아니고 셋넷의 피가 섞인 네놈이 선택한 것은 정안족이냐? 하하하!” “옷은 여기다 두고 나가겠습니다.” “안돼.” 웃음을 멈춘 친첸은 마고의 손을 잡아 탁자에 앉게 했다. “장난이다.” “...” “요즘 네가 내게 소홀한 것 같아 해본말이니 잘 생각해봐.” “허. 30이 다되는 커다란 어린아이의 투정을 언제까지 봐야 하는 것인지. 스스로 얼마나 한심한지 자괴하라는 이야기십니까?” “...” 친첸은 잠시 소리없이 웃었다. “넌 처음봤을때와 전혀 변하지 않아. 그것이 마음에 들지만.” “가보겠습니다.” “안돼. 내가 잠들때까지 어깨를 주물러라. 레이첸과 붙기 전까지 최상의 몸을 유지하고 싶으니 말이다.” “알겠습니다.” 어깨에 단단한 손가락이 닿자 친첸은 눈을 감았다. 등을 누르는손이 부드러우면서도 강해 기분이 좋아진다. 그래, 이녀석의 어미는 꽤나 미인이였는데 말이다. 아까운 일이지. 79 아홉번째 옷을 갈아입은 아골타는 등쪽을 살폈다. 거울에 보이는 화려한 수가 마음에 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인다. 그제야 잔뜩 긴장되어서 서있던 시종들과 환관들이 안도의 웃음을 짓는다. “이것으로 하자.” 황제의 허락에 모두들 머리를 조아린다. 한달동안 오늘 입을 옷을 위해 그들은 20벌의 새옷을 만들어야 했고 그중 11벌은 색이 마음에 안든다는 황제의 말에 불태워졌다. 다행히도 마지막 옷에 호감을 가진 황제의 말에 더 이상 고생은 하지 않아도 될터이다. 의복을 책임진 종사가 나가자 이번엔 관(冠)을 책임지는 종사가 들어왔다. 새로운 관을 만들어온 모양이다. 금박의 꽃과 옥으로 주렴이 내려진 아름다운 관이다. 하지만 아골타는 힐끗 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런 잡스러운 것으로 내 위엄을 떨치지 말라.” “황송합니다!” 관의 종사는 얼른 고개를 숙이고 용서를 빌다가 아골타가 등을 돌리자 얼른 나간다. 그는 지금부터 새로운 관을 위해 휘하의 장인들을 닦달할것이다. 땅에 끌린 긴 예복을 화려하고 웅장하게 끌며 황제의 단상으로 올라가 앉는다. 날이 갈수록 의자가 비좁아 지는 느낌에 짜증이 난다. 옷자락의 약간의 구김이라도 있을까 걱정스러운 시종들과 환관들이 옷을 매만지자 고개를 흔든다. 얼른 물러나는 그들을 내려보며 황제의 자리가 그다지 나쁜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단지 좀 불편한 것이다. 물론 저 멀리 장군으로써 황제를 바라보았을때 생각했던 ‘무엇이든지 할수 있는 인간’은 아니였지만 적어도 어느정도까지는 가능한 일이였다. 게다가 모두가 자신을 옹호하며 머리를 조아리며 자신에게 자비를 바라는 그 눈빛이 참으로 마음에 든다. 소맷자락에 수 놓아진 금사와 은사의 적절한 용문양을 무심하게 바라보며 이 자리에 올라와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다. 지배하는 것이 참으로 마음에 든다. 문득 드넓은 홀을 바라본다. 황제가 시선을 돌린 것을 느꼈는지 수많은 시종들이 고개를 숙이며 부복한다. 명령만 내려달라는 그들에게서 안정을 얻는다. -난 당신의 시종이 아니오. 갑자기 귀에 쩡쩡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흠칫 고개를 든다. 저 멀리 홀의 정문 끝에서 그가 서서 자신을 노려본다. 그 아름다운 검은 눈동자에 자신에 대한 경멸함을 가득담고 외친다. -내게서 당신에 대한 존경을 억지로 만들어내려고 하지마시오. 타캉! 갑자기 황제가 내던지 사기잔에 놀란 시종들이 몰려온다. 부들 부들 팔을 떨며 분노하는 황제에게 함부로 다가가지 못하지만 얼른 다가가 잔을 줍고 새잔을 가져온다. 하지만 황제는 그잔을 물리치고는 머리를 괸다. 천천히 자신의 감정이 사라지길 기다리면서 떨리는 손을 가만히 소맷자락사이로 넣어 감춘다. 악운은 그날따라 아침 일찍부터 찾아와 차를 마시는 체이첸을 보았다. 송나라에서는 금나라의 옷이 야만적이라고 했지만 그를 바라보니 그렇지도 않는 것 같다. 화려하고 위엄있으며 정갈하다.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궁안에 갇혀 있는 답답함때문이라 여겼는지 그가 부드럽게 말한다. “궁안이 혼란스럽기는 하나 이곳은 조용할것이다.” “예.” “때가 된다면 자유롭게 나갈수 있을것이니 조금만 참게.” “하오나 전하...!” “또 그소리를 하려는 것이군? 이젠 안듣겠네.” 체이첸이 시종들과 궁을 나가자 악운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젠장 어쩌다가 이렇게 되어버린거지. 스스로 이해가지 않아 한숨만 쉰다. 악운은 자신을 마중한 체이첸에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반가워 하면서 부복하려는 자신을 잡아끌어 일으킨다. 아차 하는 순간에 정안족이 되어버린다. 이게 아닌데 하면서 자꾸 말을 걸어보려고 하지만 그는 궁안으로 서둘러 들어가자는 말을 하고 앞서 걸어가버린다. 마침내 기회가 되자 악운은 그에게 진지하게 말을 꺼냈다. “실은 전하, 전 전하께서 찾으시는 영웅이 아닙니다.” “무슨 소리지?” 체이첸이 고개를 갸웃했다. “저는 사실 우연하게...” “하하 이런 또 이렇게 오래간만이군!” 악운이 고개를 돌리자 붉은머리의 사내가 다가와 웃는다. 어리둥절해서 체이첸을 바라보고 그를 다시 바라본다. 많이 닮은 얼굴이다. 혹시 저 붉은 머리의 사내도 왕자인가. 아주 반갑다는 듯 그가 자신에게 다가와 어깨에 손을 올린다. “곡양에서 신세 많이졌지! 내가 기억나나?” “무슨 소리인지... 저는 공을 잘...” “저런! 어두울때만 봐서 그런지 나도 자네 얼굴이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왜 우린 만났지 않는가? 내가 그집에서 하룻밤 묶었지 않나? 기억해보게나.” “아닙니다. 전 찾고 있는 그 사람이 아닌 전혀 다른 사람입니다!” “저런 형님. 그다지 왕성과 연관되고 싶지 않나 봅니다.” 붉은 머리의 사내가 체이첸에게 속삭였다. 체이첸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 마음을 이해하나, 15왕자가 남긴 성의를 생각해서 내게 머물러 주었으면 하네.” “그러니까, 전 그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전혀 다른 사람입니다! 전 그와는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우연히 그의 집에 있다가 이곳으로 오게된것입니다!” “정말인가 레이첸?‘ “에이.” 레이첸이 피식 웃었다. “저 사람이 맞습니다. 형님. 확실히 날은 어두웠지만 내가 잘못볼 리가 없지 않습니까. 저 사람이 맞아요.” “아닙니다!” “그만 그만.” 체이첸은 두 사람을 떨쳐 놓았다. “누가 맞는 소리인지는 모르겠군. 하지만 일단 이곳에 왔으니 머물러 주길 바라네.” 더 이상 악운의 말을 듣지 않겠다는 체이첸이 표정에 악운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 눈동자는 어찌되었건 손에 들어온 물고기는 놓치지 않는다는 욕심이 보였다. 그리고 하루하루가 지나 지금 여기까지 온것이였다. 혼자 남은 악운은 천장을 보며 황망하게 중얼거린다. “설마 황궁에서 날 암살하려고 하진 않겠지만...” 어째서 4왕자란 그 붉은 머리 사내는 처음본 나를 그 아이라 주장하는 것인지 감이 잡히질않는다. 이곳에서 자신은 정안족이라 알려져 자신의 방을 나갈수도 누군가 이야기 할수도 없다. 그저 방안에서 조용히 있는 것이 다이다. 답답한 마음에 탁상에 놓인 책을 뒤적이나 눈에 들어올 리가 없다. “그 놈의 관 무거워서 더 이상하고 있다간 목뼈가 부셔지겠다.” “허허.” “형님은 참으로 인내심이 많으시오. 어찌된게... 거 그 관 안무겁소?.” 히우루가 역정을 내며 목을 주물렸다. 얼핏 옆에 있는 시종에게 주무르라 시키고 싶지만 자신정도의 신분이 되면 시종들이 몸에 손을 대는 것도 불경이라 의원이 아니고서야 자신 스스로 주물러야 한다니 미칠지경이다. “높은 자리에 오르면 편할줄 알았는데 이거 원...” “그러냐.” 아골타는 여전히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앞을 보며 걸었다. 복도의 많은 시종들이 그들을 보고 부복한다. 그의 옆에 있는 비슷한 연배의 노인이 미소지었다. “이제 완전히 ‘황제’가 되어버리셨소.” “그렇다.” “하지만 가끔 나는 형님이 초원에서 말을 달리던 그때가 그리워진다오.” 히우루의 말에 아골타가 걸음을 멈추었다. 뒤에 따라오던 시종들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놀라 얼른 부복한다. 아골타는 하나남은 친 동생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히우루는 미소지은 얼굴로 황제의 시선을 받아들인다. “그런말은 하지 말아라. ” “하지만 가끔은 그리워지지 않소? 형님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힘없는 시골장군의 때가 어째서 그리워 진다는 것이냐?” “그때는 꿈이 있었지 않습니까?” 히우루가 먼곳을 바라보는 눈으로 말한다. “우리에겐 ‘안정’보다는 꿈과 이동이 더욱 잘 어울리는 것이 같습니다. 있지 않습니다. 저는 가끔 저 멀리 송의 국경에 가있는 동생 우키마이가 참으로 부럽습니다.” “그놈은 우리 형제가 아니다.” "형님, 어미는 다르나 한 아비를 두고 나지 않았습니까. 너무 그러지 마십쇼." "..." 그보다 결정은 된것입니까?” “뭐?” “태자말입니다.” “닥쳐라!” “하지만 이젠 후계를 결정해야하는 것이 아닙니까? 조금더 지체하면 왕자들끼리 피터지게 싸울것입니다. 황가의 존속을 바란다면...!” 아골타는 처음으로 히우루에게 손을 내밀어 접근하지 못하게막았다. 황제를 호위하는 거기장수들이 달려와 그들의 사이에 끼어 벌린다. 히우루는 좀더 말을 해보려 하지만 아골타의 눈에는 더 이상 말을 꺼냈다가는 바로 죽이겠다는 눈을 하고 있었다. 친동생이라고 안심하지 마라. 너는 못죽일 것 같은가. 히우루는 잠시 굳어진 얼굴로 서있다가 곧 공손히 부복한다. “황송합니다. 황제폐하.” “공은 자신의 일에만 몰두하라!” “알겠습니다.” 등을 돌려 지나쳐버리는 황제의, 친형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본다. 이젠 더 이상 형이 아닌 황제인 것이다. 한숨을 내쉬고는 서관으로 향한다. 자신이 할일이라고는 책을 읽고 글자를 만드는 일뿐이다. 대전의 천장을 노려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놈도 저놈도 딱 떨어지는 후계자는 없다. 그렇기에 정해지지가 않는다. “차라리 하나 더 낳아볼까...?” 하지만 실없이 웃고 만다. 그놈이 걷기도 전에 내가 죽을지 누가 아는가. 아무튼 2왕자나 4왕자중에서 한명 선택해야한다. 하지만 2왕자를 선택하기엔 내가 원하던 금의 이상향에서 벗어나 분명 한족의 나라로 돌릴것이뻔하다. 그렇다고 4왕자를 뽑았다간 3대도 가지 못하고 나라가 망할 것도 분명하다. 그놈은 사내로는 괜찮은 놈이지만 황제로써의 책임감은 떨어지는 놈이니까. 그렇다면 지금의 자신처럼 2왕자를 황제로 삼고 4왕자를 그 옆에 보좌하게 만들까. 하지만 고개를 설래 설래 흔든다. 그것도 마당치가 않다. 4왕자 이놈은 단순한 면이있어 충성한다는 의미를 모른다. 누군가 자신을 찔러대면 반역할 위험이 있다. 그렇다고 4왕자를 황제로 하면 역시 2왕자가 가만히 있지 않을것이다. 그렇다면 친첸은 어떤가. 그 녀석을 황제로 정했다가는 다른 아들들은 내가 죽는 그날에 모두 죽을것이 뻔하다. 아니, 2왕자나 3왕자나 4왕자정도까지야 그대로 죽고만 있진 않을것이다. 결국 황제의 자리를 놓고 대란이 일어나는 것이다. 히우루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진시황놈은 나와 같은 걱정이 있어서 영생을 노렸던 것은 아닌가 싶다. ------ 단설의 역주는 인용과 개인적 견해가 들어간 글입니다.(맹신(盟信)사양. 도용씁쓸)-------- 주: 히우루(완안희윤) 아골타(완안아구다)의 동생인지 인척인지 분명치 않다. 하지만 여기서는 동생. 1115년에 여진 대자를 만들어낸다. 기록상으로 남아있는것은 거의 없다. 선비정신이 강한 사내였던듯 하다. 주:우키마이 (오걸매(吳乞買)) 아골타(완안아구다)의 또다른 동생. 오걸매는 아골타의 친 동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서는 이복동생이다. 1135년에 죽었다고 기록된곳도 있으나 그 기록이 없는 곳도 있어 분명하지 못하다. 아골타가 1123년 요나라와의 전쟁을 거의 끝내는 시기에 병에 걸려 죽게 되자 그가 뒤를 이어 전쟁을 계속한다. 히우루와는 반대인 장수 성격이였던 듯. 80 “즐거워 보여 다행입니다.” “오래간만에 나온것도 참으로 좋습니다.” 자례가 고개를 숙이며 웃어보였다. 소용은 그 웃음이 기분 좋다는 듯 미소짓는다. 번잡스러운 도성은 아직도 불이 꺼지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소용이 멀리 보이는 황궁을 가리켰다. “내 낭군님은 저기서 아직도 고생하고 계시겠네.” “그러게 말입니다.” 편안하게 황궁쪽을 바라보고 있던 자례는 흠칫 놀라 뒤를 바라보았다. 부산스럽게 군것질거리와 장난감을 가지고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다. 소용이 그런 자례가 이상한 듯 물어본다. “왜그러십니까?” “...아뇨.” 한 겨울에 찬물에 빠진 듯 오싹한 시선이였다. 쿵쾅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소용을 데리고 그 자리에서 비킨다. 다행히 다시 느껴지지 않아 조용한 곳에서 걸음을 멈추고 뒤를 확인한다. “어머나. 저길 보세요. 광대입니다!” 뭐라 말하기도 전에 소용이 자례의 손을 잡고 사람들의 물결을 손쉽게 헤치며 앞으로 나갔다. 먼저온 사람들이 화를 내려고 했다가도 소용의 덩치를 보고는 얌전히 입을 다무는 것이다. 앞으로 나가자 사람들이 둥그렇게 만든 자리에 오색의 천을 두른 광대들이 극을 하고 있었다. “아아.” 그 낯익은 동작에 자례는 활짝 웃었다. 그들은 정안족이였다. 가면을 써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들이 춤추고 노래하는 그것은 정안의 것이였다. 단 한번도 황제의 탄생일이 축제라고는 생각해 보지 못했다. 없는 살림이 거덜나는 날이라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눈 앞에 펼쳐지는 인형극과 노래에 자신도 모르게 그동안 쌓아왔던 속쓰림과 노여움을 풀게 된다. 소용은 고개를 숙여 자례를 보았다. 정말로 어린아이처럼 활짝 웃고있는 모습에 내심 귀여워 죽겠다고 생각한다. 아이가 있었으면 좋겠어. 그리고 그 커다란 덩치로 사람들에게 치이지 않을까 걱정해 막아주는 것이다. “주무십니까?” 어깨를 주무르던 손을 때고 잠시 기다린다. 아무래도 친첸은 깊게 잠이 든 듯 아무말이 없다. 마고는 조용히 방을 나왔다. 한참을 노동한 팔과 손이 저려와 툭툭 친다. “거기서 나올줄 알았지.” “수해.” “밖으로 나가볼 생각인데 함께 가지 않겠나?” 복도에 비치는 등불의 역광을 타고 자휼이 그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무심코 그 모습을 바라본 마고는 조금 놀란 표정이다. “왜?” “아뇨. 좋은 일이 있으신 것 같아서요.” “그래?” 자휼은 한번 미소지어 보였다. 흉한 얼굴에 끔찍한 표정이였겠만 이젠 신경쓰이지 않았다. “오늘은 이상하게 잠이 오질 않아. 좋은 일이라도 생기려는 것일까...” 마고는 잠시 친첸의 방문을 보고는 망설이다가 자휼의 손을 잡았다. “나가요.” “얼른 들어오면 그도 모를테지.” 두 사람은 작게 웃고는 여관을 나섰다. 조금 걷자 사람들이 몰려 떠들어대는 거리가 나온다. 자휼은 하얀 두건을 옆으로 써 얼굴을 가렸고 마고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사람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별 생각없이 한 이야기지만 참 즐거워 보이는데?” “축제에 나간적은 없으니까요.” “한번도?” “예.” 자휼은 의아하게 그를 바라보다가 그냥 수긍했다. 그의 사소한 일까지 알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 즐겨보는 것도 좋겠지.” “예.” 마고는 그 표정과 나이답지 않게 이것 저것을 구경하고 사보기도 하면서 활짝 웃었다. 자휼은 그 모습을 보고 정말로, 정말로 그가 자신의 아이와 닮았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된다. 그의 생각이 들켰는지 마고가 다가와 묻는다. “그다지 즐겁지 않으신가요?” “아니야.” “수해.” “응?” 잠시 머뭇거리던 마고가 결심했다는 듯 말한다. “정안인들에게도 축제가 있겠죠.” “그래. 우리에겐 많은 축제가 있지.” “우리...아니 그들에게도 이런식의 축제입니까?” 우리...라. 자휼은 말을 바꾼 마고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것만 같아 측은했다. 내가 그를 통해 내 아이를 이해하려는 것과 같이 그는 나를 통해 혈족을 이해하고 싶어하는지도 모른다. 자휼은 마고의 손을 잡았다. 자신의 허리띠를 풀러 그의 머리에 매어준다. 의아해 하는 마고에게 말한다. “그날엔 새 머리띠와 화려한 옷을 입고 구슬과 옥으로 만든 귀걸이와 허리띠, 파란 신을 신지. 왕씨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축제의 효시를 알리시고 단위에서 장수들과 함께 춤을 주신다네. 그것으로 우리들에게 축제가 시작되는 것이지.” 우리라는 말에 힘을 주어 말하자 마고는 놀란 표정을 짓다가 웃는다. 또 그 미소다.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허망한 표정의 슬픈 미소. 자휼은 고개를 저었다. 손을 들어 그의 눈을 가리면서 아주 작게 중얼거린다. 그런 슬픈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지 말아달라고. 떠나버린 내 아이를 떠오르게 하지 말아달라고. 잊으려고 노력하는 내 마음속의 아픔을 깨우지 말아달라고. “수해?” “...광대극을 보러 가지 않을래?” 애써 감정을 삼키며 자휼이 그를 이끈다. 화선은 놀라 고개를 돌렸다. 거울속에 비친 것은 레이첸이였다. 벌떡 일어나 고개를 돌린다. “여기까지 어떻게 오셨습니까?” “사랑하는 여인에게 다가오는 것도 죄가 되나.” “말은 잘하십니다.” 화장을 하던 것을 멈추고 다른 방으로 들어가 시선을 피한다. 뒤따라오는 레이첸을 느끼며 이 사내를 어떻게 내쳐야 하는지 잠시 고민한다. 화선이 무슨 생각을 하는것인지 모르는지 레이첸은 그녀에게 다가가 끌어 안는다. “내가 보고 싶지 않았나?” “치워요.” 부드럽게 하지만 냉정하게 팔을 뿌리치고는 다른 방으로 건너가버린다. 피식 웃고는 레이첸이 다시 그녀를 따라들어간다. “그렇게 화를 내면 내가 미안하지 않은가.” “나는 내 아이가 어미의 신분을 탓하며 자라길 원하지 않아요!” 날카롭게 외친 화선은 다가오는 레이첸을 피해 작은 방으로 들어가며 문을 잠궈버린다. 레이첸은 방문을 두드리다가 껄걸 웃고 만다. 소용은 자례의 어깨를 툭툭쳤다. “일어나요. 사람들이 밀려오고 있어요.” “아?” 벌떡 일어나자 소용이 한쪽으로 비킨다. 왁자지껄하는 거친 사람들의 소리가 들리며 구경하던 사람들이 슬금 슬금 비켜난다. 그 바람에 극을 하던 사람들이 멈춘다. 자례도 한쪽으로 비키며 원형을 뚫고 들어오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보아하니 그쪽도 광대인 듯 화려한 옷과 분장을 하고 있었다. 그들중 우람한 체격의 사내가 극을 하던 정안인쪽으로 다가가 위 아래를 훓터보다가 갑자기 그를 밀어 넘어뜨린다. “여기는 우리 구역이야!” 그말에 자례도, 구경하던 정안인들도, 극을 하던 정안인들도 동시에 한숨을 내쉰다. 또 텃세시작이군. 이미 많이 당해보았는지 극중 우두머리인 듯한 사람이 가면을 벗고 앞으로 나온다. 이미 수염이 백발이된 노인이였다. 노인든 그들을 향해 고개를 숙여인사했다. “이보시오. 축제란 모두들 즐기기 위한 것이요. 당신들도 광대이니 알겠지만 우리들은 이 하루만을 위해 준비하는 사람들이지 않소. 광극을 하는 사람이라면 모두들 이곳으로 모여들기 마련이요. 그런데 이 넓은 도성의 무대에서 왜 당신들처럼 거대한 광극단이 이 조그만 자리를 탐내하는지 이유를 모르겠소.” 칭찬인지 욕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말이였다. 자례는 노인의 달변에 감탄했다. 하지만 그들은 잠시 뻘쭘해 있다가 곧 도구들을 무너뜨리고 부수며 난동을 피우기 시작했다. 두 광극단이 몸싸움을 하기 시작했고 관객들은 때아닌 싸움구경에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군대처럼 힘있고 절도 있는 싸움이 아닌 주먹으로 치고 넘어지고 쓰러지는 시장싸움에 불과했지만 점점 그 정도가 심해지자 소용이 자례를 흔들었다. “이만 돌아가요! 무서워요!” “하지만...” 자례는 차마 발을 돌리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했다. 싸움을 건 광극단은 꽤나 큰지 계속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었지만 정안의 광극들은 고작해야 십여명에 불과했다. 싸움을 잘하고 못하고는 떠나 심한 머릿수의 차이에 턱없이 밀려버리고 있었다. 중재를 했던 노인이 주먹을 맞고 나동그라지자 구경하고 있던 정안인들이 못참겠다는 듯 나서 광극단들에게 덤벼들었다. 놀란 구경꾼들은 한족과 정안족이 싸움을 벌인다며 병사들에게 신고했고 곧 관청에서 그들을 말리기 위해 병사들이 몰려왔다. 결국 양 극단의 단장들이 관청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싸움은 끝났지만 이미 구경하던 사람들은 놀라 모두 도망간터였다. 허탈하게 아직 젊은 광대들이 부셔진 도구들 사이에 주저앉았다. 남아 있던 정안인들이 그들을 위로 했으나 별소용이 없었다. 자례도 근처에 있던 탈을 주어들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광대에게 다가가 건내었다. “힘내요. 아직 축제는 남아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모갑(단장)님이 없으시니...” “곧 돌아오실겁니다.” 자례의 뒤에서 마른 여인이 걸어왔다. 몹시나 피곤하고 초최한 모습이였다. 그녀는 먼지가 묻은 의상을 털어내었다. “이런 일이 한두번이 아니에요. 아마 축제가 끝난 후에야 풀려나실거예요. 게다가 많은 돈을 요구하겠지요.” “염병할! 한족들은 그나마 노래라도 할수 있지만 우리는 이게 뭔가! 왕씨는 어디로 도망간건지! 우리는 여기 있는데 나라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땅에 피가 섞인 침을 뱃으며 한 사내가 화를 내었다. 그의 말에 자례는 눈살을 찌푸렸다. 한마디 하려고 했으니 여인이 자례의 손을 잡았다. “그러지 말아요. 알아요. 그냥 화가 나서 저러는 거랍니다.” “...예.” 자례는 아차하며 자신의 잘못을 느꼈다. 축제는 나라의 부귀와 안정을 상징하기도 한다. 나라가 망하면 그 누구보다도 고생하는 것이 유량하는 광극단이였다. 어느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어느곳에서도 안착할수 없는 신세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다른 문화의 광극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광극이란 같은 문화를 즐기는 사람들이 그들 깊숙한 곳에 있는 희노애락을 이해하자고 만든 하나의 비밀극이다. 다른 민족이 광극을 본다고 해서 웃기거나 감동을 받는 것은 무리인것이다. 때문에 대부분의 광대들은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화전민이 되기가 일수였다. 그것이 조금이라도 먹고 살기가 쉬웠다. “어째서...어째서 광극을 계속하십니까.” 도성에서 멀리 떨어져 산속으로 들어가시지 않고. 자례의 말을 이해했다는 듯 그녀는 미소지었다. “하지만 당신같은 사람들이 아직 있지 않습니까. 남아있는 혈족들에게 축제의 의미마저 없애려는 저같은 놈들에게 우리는 지고 싶지 않습니다.” “...” 그녀는 쓰러진 도구들을 다시 일으켰다. 십여명의 광대들이 도구들을 정리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싸움을 걸었던 광극단이 공연을 하는지 사람들이 몰려 웅성였다. 하지만 묵묵히 도구들을 일으키고 정리하는 혈족의 광대들을 보며 처음으로 자례는 느꼈다. 망해버린 나라의 설움을. ------ 단설의 역주는 인용과 개인적 견해가 들어간 글입니다.(맹신(盟信)사양. 도용씁쓸)-------- 주:광대극 남사당패와 비슷한 유랑을 하며 기예를 보여주던 예술인 집단이라고 할수 있을것이다. 단지 여기나온 광대극에는 남자만이 아닌 혼성으로 만들어져 있다. 남사당패가 만들어진것은 조선시대임으로 그 배경을 보아 충분히 여성의 참여가 불가능했을것으로 여긴다. (물론 남사당패가 남색그룹이라 여인의 참여가 불가능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양쪽 다 가능한 이야기라고 본다.) 조선후기에는 기예를 익힌 사람을 천하게 취급했지만 실제로 고려때로 올라간다면 그렇지 않았을것이라 여겨진다. 화랑이나 선인들이 춤과 노래. 기술을 익힌것을 칭송한것으로 그것을 이해한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선비정신은 얼마 되지 않는 것이니까. 여기서도 광극단은 웃음과 즐거움을 주며 유랑하는 무리로 되어있지만 천하게 여겨진다는 내용은 없다. 유교가 먼저 진행되었던 중국쪽, 소용만이 기예가 천하다고 생각하는 모습을 보인다. 81 자휼은 행여나 어린 동생이 자신을 놓칠까봐 걸음을 늦추었다. 저 작은 손으로 자신의 옷자락을 꽉잡고 따라오는 것이 대견스럽다. 하지만 점점 지쳐간다는 얼굴에 자휼은 앉을 자리를 찾아보았다. 마침 앞에 극이 열리고 있어 그쪽으로 다가간다. 많은 사람들을 비집고 가느라 행여 자신의 아이가 손을 놓칠까봐 스스로 손을 뻗어 아이의 손을 잡는다. 작은 손이 움찔하면서도 빼내지는 않는다. 뜨거운 손이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것 같아 자신도 모르게 미소짓는다. 앞으로 나가지만 어린 아이의 몸이 자꾸만 어른들의 아래로 치이지 자휼은 아이에게 두 팔을 내밀었다. 고개를 갸웃하면서 자신을 바라보는 아이에게 눈짓한다. 이리와서 안기라고. 활짝 웃으며 자신에게 안기는 어린 동생의 몸은 가볍다. 어른들에게 더 이상 치이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아닌 자신에게 안겼다는 자체를 즐기고 있다는 느낌은 착각인지도 모른다. 앞으로 나가 아이를 안고 조금 멀리 보이는 화려한 꽃으로 치장한 두 연인의 극을 바라본다. 두 연인이 서로의 허리를 감싸고 돌자 아이는 자신을 바라보고 의아하게 묻는다. “저들은 사랑하는 사이일까요?” “응? 글쎄. 아닐수도 있지.” “그런데 어떻게 저런 춤을 출수가 있을까요?” “단지 극이니까.” “극?” “정말로 그런것처럼, 보는 사람을 즐겁게 하기 위해 스스로의 감정을 속이는 것이지. 그것이 광대다. 그들은 진짜 사랑을 하고 있지 않아.” 아이는 아직은 이해할수 없다는 눈이지만 고개를 끄덕인다. 극이 끝나가자 아이는 다시한번 자신을 바라보고 묻는다. 역시 주렴을 내린 관은 무거워서 목이 뻐근하다. 아골타는 잠시 목에 손을 올려 두드렸다. 아직 행사가 시작된 것은 아니라 시간이 남아 잠시 방에서 차를 마시고 있던 중이였다. 누군가 급하게 다가오는 소리가 들린다. 환관한명이 급히 나가와 부복하더니 작은 서신을 전했다. 구깃구깃한 종이에 황제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일단 펼쳐 읽고는 자리에서 벌떡일어났다. 잠시 감정을 추스르다가 다시 차분히 자리에 앉아 고민한다. 그리고는 고급 비단을 펼치고 직접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한글자 한글자 써내려가는 아골타의 미간이 찌푸려지면서 분노를 삭히는 모습에 시종들은 그 화가 자신에게 미칠까 두려워 몸을 사렸다. 얼마 안되어 서신을 다 적었는지 황제는 자신의 옥쇄를 찍고는 그것을 봉인시켰다. 그리고 서신을 가져왔던 환관에게 그것을 던졌다. 친서를 받은 환관은 황송함에 어쩔줄 몰라 하나 아골타는 냉냉하게 말한다. “그것을 가져온 자에게 들려보내라.” 그가 나가자 아골타는 창문을 바라보며 인상을 쓴다. 저 멀리 황궁 밖 도성의 강가에서 불꽃놀이를 하고 있는지 소음이 울리며 화려한 불꽃이 피고 진다. “공자 돌아가요. 광극이란 것은 천한 일입니다. 귀한 몸으로 어떻게 그들에게 신경을 쓰시는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소용부인. 저는 이들을 돕고 싶어요.” 소용은 못내 내키지 않아하면서도 자례를 끝까지 막지는 않았다. 그녀는 사내가 하는 일에 대해 여인이 어쩌라는 둥의 말을 중얼거렸다. 거진 다 정리했는지 마른몸의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아직까지 자신들을 기다려주고 있는 혈족들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가면이 다 부셔져서 광극은 못하겠어요. 하지만 극은 할수 있습니다. 기다려주신것에 보답하기 위해 작은 극을 보여드릴까 합니다.” 그말에 남은 몇몇의 혈족을이 기뻐하며 자리에 다시 앉았다. 계속되었던 소용의 투정에 발을 돌리던 자례가 다시 고개를 돌리자 그녀는 어쩔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다시 가서 앉았다. 대강 치워진 자리에서 펄럭이는 옷을 입은 키작은 여인이 나왔다. 긴 머리를 종종 묶어 내리고 새 하얀 옷을 꽃으로 장식한 모습이였다. 소용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자례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환호성을질렸다. “뭐예요?” “저건 낙랑공주입니다.” “낙랑?” 자례는 무엇인가 생각에 잠기는 듯 했고 고개를 갸웃한 소용은 그냥 보기로 결정했는지 입을 다물었다. 옷자락을 손가락으로 든 분장한 여인이 중앙에 서서 빙그르르 돌아 자리에 앉았다. 아까의 마른 여인과 상처를 입은 사내들이 악기를 꺼내 연주하기 시작했고 그 소리에 맞추어 여인은 춤을 춘다. 답답한 궁안. 어린 공주가 원하는 자유로움. 사랑에 대한 갈구와 환상. 공주로의 의무. 직위.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의 무거움. 가느다란 피리소리에 맞추어 움직이는 작은 여인의 춤은 너무도 아름다워 모두들 숨을 죽이고 그것을 지켜본다. 하얀 옷자락이 펄럭일때마다 하늘로 쏘아올린 불꽃이 수놓아진다. 하나 둘 길을 가던 사람들이 발을 멈추고 구석진 자리의 조그만 여인의 춤에 다가왔다. 가지고 싶은것에 대한 욕심. 저 밖으로 향한 욕망. 여인의 춤이 끝났을때 큰 박수소리에 자례는 깜짝 놀랐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까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광대들도 놀란 듯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구경꾼들은 아끼지 않고 자신들의 동전을 던졌다. 마른 여인이 당황스럽다는 듯.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싼 구경꾼들은 더 많은 것을 원했고 이야기의 결말을 원했다. 연주가 중단되고 사람들의 환호소리에서 낙랑이 다시 등장한다. 반대편에서 호동이 등장하고 서로는 서로를 견제하면서 거리를 좁히지 않는다. 상대방에 대한 불신. 처음 만나는 자에 대한 경계심. 먼저 움직이는 쪽은 호동이다. 그는 그녀에게 다가간다. 그녀는 물러선다. 빙글 돌며 서로를 견제하다가 호동쪽에서 그녀를 잡아 자신의 품으로 강하게 끌어들인다. 상대에 대한 호기심. 처음 만나는 자에 대한 궁금증. 서로에 대한 흥미와 동정. 그것에 대한 충족감과 만족감. 거의 얼굴이 붙어 있다 싶을 정도로 밀착되어 움직이는 모습에 소용을 얼굴을 붉게 달아오른다. 부채로 얼굴을 가려보지만 큰 얼굴은 작은 부채에 다 가려지진 못한다.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진다. 열정. 욕망. 관계. 책임. 허리를 잡아 자신에게 밀착시킨다. 여인은 움찔하며 작게 숨을 내쉰다. 단지 극을 하고 있는 것 뿐인데 정말로 사랑을 하는 연인처럼 그가 사랑스럽다. 몸을 돌리고 맞잡는 손이 뜨겁다. 얼굴을 붉히면서도 소용은 그것을 자세히 바라본다. 문득 자신이 너무 몰두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얼른 옆에 있는 자례를 보고는 의아해한다. 아까전에는 즐겁게 보던 극을 외면하고 있다. 그 고개를 올려 한곳을 응시한다. 그리고 너무도 놀라고 황당한 표정으로 뭐라 중얼거린다. “공자?” 벌떡 일어나 갑자기 극의 한가운데를 지나친다. 처음에는 걸어가다 곧 뛰어간다. 때아닌 무대의 난입에 광대들과 사람들이 영문도 모르고 자례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이미 사람들 사이로 사라진 후였다. 마고는 자휼을 따라 계속 걸어갔다. 광극단처럼 보이는 많은 사람들을 지나쳤지만 자휼은 그들을 보고 싶어하지 않았다. 아마도 다른 무엇인가를 찾는 듯했다. 멀리 하얀 깃대를 보던 자휼은 미소지으며 저쪽으로 가자고 말했고 마고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늦게 온것인지 사람들이 이미 꽉 들어차 있었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사람들의 혼란속에서 극을 바라본다. 마고가 춤을 추는 여인을 보고 물었다. “저건 어떤 것입니까?” “어린 공주의 사랑이야기지.” 자휼이 미소지으며 마고를 자신의 앞으로 끌어당겨 좀더 잘보이게 해주었다. “사랑?” “그래.” 마고는 아무말 없이 춤을 추는 여인을 바라보았고 곧 이어진 왕자 분장의 사내와 춤을 춘다. 서로를 향한 갈망이 춤에 녹아 있어 마고는 의아해한다. “저들은 사랑하는 사이일까요?” “응? 글쎄. 아닐수도 있지.” “그런데 어떻게 저런 춤을 출수가 있을까요?” 순간 자휼은 믿을수 없다는 눈으로 마고를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에 놀란 마고가 조금 물러난다. “제가 무슨 잘못을?” “아니...아니야.” 멋쩍게 웃으며 자휼이 부정한다. 마고가 대답을 재촉하는 눈을 하자 한숨을 내쉬고는 허탈하게 웃는다. “오래전에 너와 같이 묻던 아이가 있어서 말이다. 단지 그 아이가 떠올랐을뿐이야.” “..단지...” ‘단지’ 입니까? 하지만 마고는 그말을 하지 않았다. 스스로도 알고 있다. 자신의 앞에 있는 이 사내에겐 두고 온 것이 많다는 것을. 아마도 아까 기분이 좋아보인 것은 그가 두고온것에 대한 기억이 이곳에 남아있는지도 몰랐다. 잠시 말을 가다듬 마고는 다시 물었다. “그래서 어떤 대답을 해주셨나요? 저에게도 같은 대답을 해주실겁니까?” “....아니.” 자휼은 깊게 숨을 들이쉬고 춤을 추는 두 연인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정말 사랑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인다. 문득 주위의 사람들이 소란스러워 앞을 바라본다. 수많은 사람들의 머리와 팔사이로 보이는 것은 별 다를바가 없다. 하지만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말은 누군가 무대에 난입했다는 것같다. 자휼도 이상한 것을 느끼고 그쪽을 바라본다. 그리고 딱딱하게 굳어버린다. 못볼 것을 보았다는 듯한 그 모습에 마고는 그의 팔을 흔든다. “수해?” “아니야. 그럴리가.” “왜그래요? 앞에 무슨 일이 있는겁니까?” 그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는 것을 느낀 마고는 얼른 그를 뒤로 이끌었다. “우리 돌아가요. 너무 오랫동안 있으면 들킬겁니다.” “왜...” “수해?!” “어째서?” 자휼은 마고를 내려다 본다. 그의 눈은 이해할수 없는 일에 관한 것에 대한 부정으로 가득하다. 마고는 등을 돌려 자휼이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본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놀라는 것일까. 그리고 그제서야 시야에 누군가 무대를 가로질러 자신들쪽으로 걸어, 아니 뛰어오고 있는 것을 본다. 한족의 옷을 입은 어린아이. 하지만 정안인이라는 것을 쉽게 알수 있는 모습이다. “어째서...!” 화려한 음악과 환호하는 사람들속에서 외마디의 의문을 남긴 자휼이 마고의 팔을 부여잡았다. 놀라기도 전에 그를 잡고 급히 인파속으로 사라진다. 그뒤를 따라 자례도 달려간다. 82 마류장군은 을노에게 자신의 군대와 성을 양보하는 검과 지도를 주었다. 간략하게 호북의 상황에 대해 말하고 을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과 다를 바가없는 대치 상태군요." "아니. 그렇지 않아. 앞으로 그렇게 되지 않을테니 선인께서 나 대신 가는 것이 오히려 잘된일일지도 모르지." "예?" "이번에 호북으로 입명된 금나라쪽의 장수는 오걸매거든. 나도 어제 전갈을 받았네. 왕씨께서 부르시지만 않았다면 난 이미 어제 전갈을 받는대로 떠났을꺼야." 그말에 을노가 아차하는 표정으로 인상을 구겼다. 장난스러웠던 미소가 사라지고 심각하게 생각하다 고개를 돌린다. "그 사람은 아직도 죽지 않았군요?" "황제의 동생이니 그렇게 쉽게 죽을까." "항상 그랬지만 여전히 저는 왕씨께서 그 사람을 암살하라는 명령을 내려주시길 바라고 있습니다." 을노가 사나운 표정으로 말했다. 마류도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그는 도성안으로 세력을 피지 못하는 사람이니 ...변방에서 지내는 이빨빠진 호랑이에게 사람을 보내기는 아쉬우신것이 아닐까하네." "하지만, 막상 전장에서 이빨빠진 호랑이가 아닌 놈은 오걸매 하나입니다." 차를 내려놓고 입술을 깨물며 을노가 분노한다. "그는 미쳤어요! 아시지 않습니까? 그는 제정신이 아니라구요! 상관없는 금의 어린아이들까지 죽이는 사내입니다. 맙소사.그 눈이라니. 미친 소도 그런 눈을 하고 있지 않을겁니다. 그 핏발선 누런 눈이라니! 바라보기만 해도 끔찍합니다!" "그런가." 마류가 어깨를 으쓱였다. "우리중에서 그와 대등하게 싸울만한 실력자는 선인아니신가. 나는 그를 마주본적이 없어 잘 모르겠네." "오걸매의 눈은 참으로 더럽지만 그 기백은 미친사람보다 더하죠. 저역시 바라보고 있으면 어느순간 제 자신이 질것같다는 생각을 종종하기도 합니다." 한숨을 쉰 을노는 갑자기 자신이 호북으로 가는이유를 알것같기도 했다. 왕씨께서 미리 전서를 받으신것인가. 그래서 내가 가는 것인가. 이럴때는 자신이 유달히 뛰어난것도 짐이 되어버린다. 더이상 자신이 호북으로 가는 것에 대한 의문은 들지 않지만 힘든 일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미리 알아버려 입이 쓰다. 애써 추스리고 마류장군과 작별을 고한다. 축제분위기로 소란스러운 길을 지나 장군촌으로 간다. 호북으로 가면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 행방을 모르는 자휼은 제치고서라도 자례에게라도 갔다오겠다는 말을 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힘내라고도. 하지만 저녁에 짐을 챙겨 소용의 집으로 갔을때는 아무도 없었다. 단지 하인들이 집을 지키고 있을 뿐. 을노는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소용하고 자례가 축제 구경을 나간것인가. “거 참. 작별 인사라도 하려고 했는데.” 을노는 머리를 글적이며 잠시 생각을 하다가 그냥 출발하기로 결정했다. 장군촌을 나가자 북적이는 사람들 틈에 끼어 성문쪽으로 향한다. 꽉 들어선 사람들 때문에 움직이기도 시원치 않다. “이거 조금 험해도 북문으로 갈것을.” 중얼거리며 후회하지만 늦다. 이런 축제의 기간에 낄수 없는 무리들이 있다. 부랑자. 난민. 그런 자들은 이런 축제의 기간에 북문으로 가서 그들만의 무리를 짓고 가끔 그쪽을 지나치는 멋모르는 여행객의 돈을 강탈하기도 한다. 관청에서는 축제의 기간에 북문에 각별히 신경을 썼지만 병사들조차 축제속으로 빠져들어가 관리하기 힘들었다. 다행히 북문이란 사문이라고도 여기는 사람들이 많아 축제의 기간이나 평시에도 그쪽으로 출입하는 사람들이 매우 적었다. 그때문인지 다행스럽게도 그다지 큰일은 일어나고있지 않다. 결국 을노는 고민끝에 북문쪽으로 돌아나가기로 결정하고 등을 돌렸지만 앞으로만 가려는 사람들 틈을 비집고 반대방향으로 간다는 것은 꽤나 힘든 일이였다. 끙끙대며 사람들 틈을 비집고 앞으로 가려는데 문득 손을 뻗으면 닿을듯한 거리에서 낯익은 얼굴이 스쳐지나간다. “어라?” 을노는 이상하다는 듯 눈을 깜박였다. 아까의 불꽃놀이 때문에 화약가루가 날려서 헛것이 보이는 것은 아닐까. 을노는 잠시 그를 노려보다가 소리높여 외쳤다. “자휼!” 하지만 그 소리는 인파의 소란스러움에 사라지고 자휼은 사색이 된 얼굴로 자신을 지나간다. 을노는 재빨리 손을 뻗어 자휼의 옷자락을 잡으려고 했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손끝이 옷을 스치는 정도이다. “자휼!” 몸을 돌려 그가 사라진 쪽을 보던 을노는 크게 소리쳤다. 인파 때문에 그를 따라가기조차 힘겹다 자휼의 뒤를 바라보니 그는 누구를 끌고 도망가는 듯하다. 무슨 일이 또 생긴것인지 걱정도 되지만 일단 그를 찾았다는 느낌이 들어 기쁘다. 하지만 자휼을 따라가야 하는지 아니면 왕씨의 명령대로 지금 나가야 하는것인지 갈등하는 상태에서 을노는 또하나의 낯익은 얼굴을 보았다. “자례?” 새파란 한족의 옷을 입은 아이가 풀어헤친 머리가 엉키는것도 모르고 인파를 밀치며 앞으로 뛰어간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자례를 힘껏 부르지만 역시나 마찬가지이다. “빌어먹을!” 을노가 크게 외치지만 자신이 외친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문득 뒤에 자신을 밀치던 사람들이 느껴지지 않아 고개를 돌리니 때아닌 천을 쒸운 통나무가 보인다. 시선을 올리니 거대한 사람 얼굴이 자신을 밀치고 있다. 쭈욱 밀려 구석으로 들어간 을노는 어이없다는 듯 그녀를 보았다. “소용부인...?” “을노장군!” 소용은 와락 외치며 을노에게 달려들었다. 갑작스러운 덩치의 습격에 을노는 쩔쩔매었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을노에게 안겨. 아니 을노를 안아들고 울먹였다. “공자가 갑자기 저를 두고 인파속으로 가버렸어요. 어떡하지요? 혼자서는 무섭다구요!” “소...소용부인!” “공자도 걱정되지만 저는 어쩌지요?!” 을노의 머릿속에는 자휼일행을 따르는 것도 아닌, 왕씨의 명령을 따르는 것도 아닌, 이 거구의 단정한 소용부인을 집까지 모셔주는 것이 가장 급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화선 문을 열어라.” 조금은 지친 목소리로 레이첸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없다. 잠들어 버린 것은 아닌가 하며 조금더 큰 소리로 불러본다. 그래도 대답은 없다. 레이첸은 그만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곧 왕자들이 모여 저녁을 같이 하는 연회가 있다. 일어나 방을 나가다가 문득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낀다. 어째서 내가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하는가. 어쨌거나 우리는 부부가 아닌가? 레이첸은 발걸음을 돌려 다시 문앞으로 다가갔다. 다시 한번 화선을 부르고 문을 두드리지만 여전히 대답은 없다. “...” 레이첸은 문에서 조금 물러났다. 그리고 문을 노려보고는 발로 힘껏 차버린다. 콰당하며 나무로 만들어진 궁의 문이 부셔지는 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그 소리도 축제의 폭죽소리에 사라지고만다. 엉키는 머리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앞을 가렸다. 자꾸만 앞으로 쏟아지는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뒤로 넘긴다. 단지 눈앞에서 멀어지는 한 사내의 뒷모습을 따라 달려간다. 사람들과 부딪치는 어깨는 예전 상처의 고통을 호소해 온다. 하지만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사람들틈에 사라지는 저 하얀 두건을 따라 달려가는 것뿐이다. 단지 그것뿐이다. 을노와 마기장군은 형이 도성안에는 없다고 했어. 그러니까 내가 잘못봤을 확률이 높다. 단지 난 전혀 모르는 타인을 따라가고 있을지도 몰라. 그리고 형이라면 이렇게 도망가지는 않았을거야. 틀림없이. 머릿속으로는 이해하면서도 걸음은 멈추지 않는다. 단지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따라갈뿐. 그를 잡고 얼굴을 보고 그가 자신과 전혀 상관이 없다는 확인을 받아내고 싶은 것일뿐. 아닐거야. 분명해. 두건으로 얼굴로 가린데다가 사람들의 머리사이로 본 것은 단지 눈뿐이였다. 무심하게 고개를 들었을 때 무대를 가로질러 있는 하얀 두건이 눈에 들어왔고 다시 한번 눈을 깜박였을때 정확히 마주친 눈동자에 놀라고 말았다. 20여년동안 바라보았던 그 다갈색의 눈동자만으로도 그가 누구라는 것을 알아버려 굳어버린다. 일어나 자신도 모르게 정말로 자신이 알고 있는 그사람인지 확인하고 싶어 다가간다. 사람들의 틈을 비집고 그가 보이는 곳으로 나와 가까이 걸어간다. 단지 확인하고 싶어서. 형이라한들 할말또한 생각나지 않는다. 그냥 저 내가 알고 있는 눈을 가진 사람을 단 한번만 더 보고 싶을뿐이다. 그리고 가로질러간 그쪽에서 그가 자신을 바라보았을때 아찔한 기분에 몸이 떨린다. 형인가? 그가 고개를 돌려 한 사내의 손을 잡고 인파속으로 숨어들어갈 때 보였던 얼굴은 분명 자신이 너무 잘 알고 있는 사람의 얼굴이라 따라 뛰게 된다. 갑자기 극한 어깨의 고통에 눈살을 찌푸린다. 참으려해도 주저 앉아지는 통증에 아차하며 어깨를 부여잡는다. 입술을 깨물며 다시 일어났을때는 아주 멀리 떨어진 하얀색의 두건이 보여 다시 따라 간다. “수해!” 하지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그는 자신을 끌며 사람들을 헤치며 달려간다. 한쪽다리를 절면서도 정말 믿기지 않는 속도로 뛰어간다. 보폭을 맞추며 마고는 뒤를 바라보았다. 어린 아이. 파란 색의 옷이 눈에 잘 들어온다. 아직 작은 어린아이일 뿐. 풀어져 엉키는 머리카락이 새까맣다. 이쪽을 바라보는 눈동자또한 새까매 그가 정안인이고 자휼과 연관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는 무척이나 쉬운 일이다. 사람들과 부딪쳤던 아이가 잠시 사라졌다가 조금후에 다시 나타난다. 어깨를 쥐고 있는 것이 탈골이라도 된듯하다. 그럴만도 하지. 문득 점점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다는 느낌에 주위를 둘러보고는 자휼을 말린다. “수해! 이쪽은 북문쪽입니다! 북문쪽으로는 가면 안됩니다!” 무기도 지니고 있지도 않다. 게다가 그들이 입고 있는 옷은 꽤나 호사스러운 것들이기 때문에 북문쪽으로 갔다가는 봉변을 당할것이 뻔하다. 하지만 자휼은 들리지 않는다는 듯 앞으로 달려간다. 멀리 멀리 도망치는 듯한 눈으로. 도저히 용납할수 없다는 눈으로 그렇게 무언가에게 도망가버린다. 사람들이 눈에 보이게 줄자 마고는 자신을 끌고 가는 자휼의 손을 끌어당겼다. 멈추지 않으려는 그를 강제로 잡아채어 멈춘다. 헉헉거리는 자휼의 눈을 보고 작은 골목으로 들어가 조용히 몸을 숨긴다. 잠시 후에 그들을 따라왔던 그 아이의 모습이 보인다. 두리번 거리면서 그들을 찾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안달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화를 내는 것도 아닌 묘한 두려움으로 이리저리를 둘러본다. 마고는 걸음을 멈춘 그아이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알수 없는 묘한 친밀감을 가진다. 저 아이 이상하게 나와 비슷한 느낌이 들어. 모습은 아니다. 머리카락 하나도 닮지 않았지만 묘하게 그아이가 거울을 보는 것같은 느낌을 주는 것을 알고 당황스럽다. “포기해라...” 헉헉거리면서도 골목의 틈으로 아이를 바라보는 자휼이 중얼거린다. 아주 작게 흐느끼는 목소리로 포기하라고. 마고는 자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가 지금 바라보고 있는 아이에게 무엇을 느끼고 있는 것인지 알아내고 싶어한다. 두사람은 어떤 관계인가. 하지만 알수는 없다. 따라오는 아이는 두려움으로 가득찬 눈을 하고 있고 도망갔던 자휼의 눈에는 분노와 알수 없는 슬픔이 느껴진다. 아이는 이리저리 두리번 거리다가 결국 앞쪽으로 다시 달려갔다. 그의 모습이 시선에서 사라지자 자휼이 털썩 주저앉아 고개를 괸다. 마고가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생각났다는 듯 말한다. “저쪽은 북문쪽인데...” “?” “축제엔 북문에 도성의 부랑자들이 모입니다.” 벌떡! 화들짝 놀라도록 빠르게 자휼이 일어난다. 달려가려는 그의 앞을 막는다. 이리저리 계속 그를 막아 가지 못하게 하지 자휼이 분통을 터뜨린다. “비켜!” “아까는 도망왔지 않습니까? 왜 지금은 따라가려는 거죠?” “...도망온게 아니야!” “그럼 그냥 앞서 달려온 겁니까?” 그말에 자휼은 대답을 하지 않는다. 대신 힘으로 자신을 밀어내려는 그를 보고 단단히 중심을 잡는다. 비켜주지 않겠어. 서로 어깨를 잡고 밀고 밀리는 소리없는 힘겨루기가 시작된다. 승자는 마고다. 마고는 자휼을 벽에 밀어버리고는 그 앞을 막아섰다. “진정해요. 지금 당신이 가서는 이것도 저것도 안될것입니다. 저에게도 밀리는 와중에 뭘 하러 가는겁니까?” “네가 뭘 알아!” “...그렇겠죠.” 조금은 상처받은 표정을 짓고싶지만 이상하게도 아무런 표정이 지어지지 않는다. 스스로 이해할 수가 없어 마고가 고개를 갸웃한다. 가슴이 쓰리고 두근거린다. 상처받은 것 같은데 표정은 굳어 나오지 않는다. “게다가 그는 정안족. 수해는 친첸전하를 모시니 더 이상 정안족과 연관되지 않길 바랍니다.” “왜? 친첸왕자에게 날 소개한 것이 누군데?!” “소개한것도 저이고 내칠 수 있는 것도 저입니다.” “그럼 그렇게 해라! 날 버려!” 딱딱하고 냉정한 마고의 말에 자휼은 실소한다. 그리고 다시 한번 마고를 밀어내려 하지만 마음이 급한 탓인지 마고는 쉽사리 밀리지 않는다. 뛰어온 급한 숨과 짜증나는 힘겨루기에 지친 자휼이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작게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낀다. 마고가 그의 앞에 다가갔다. 조용히 자휼을 바라보고는 잠시 길을 막았던 자신의 행동에 대해 조금 후회한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다. 손을 뻗어 자휼의 리를 감싸고 작게,진정하길 바라며 속삭인다. “돌아갑시다. 우리가 있어야 할곳으로." 83 한순간 놓친 하얀두건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갈림길에서 두리번거리다가 그 흔적을 찾지 못해 앞으로 달려간다. 인적이 뜸한 곳까지 와서야 정말로 놓쳤다는 것을 알고 한탄을 하며 무너진다. “...아닐 거야.” 미련스럽게 중얼거리며 자신을 달랜다. 하지만 다리에 힘이 풀릴정도로 한스러워 벽에 몸을 기대고 감정을 추스린다. 정말 형과 똑같은 눈이였는데. 미련을 털기 위해 돌아가려한다. 그래도 못내 뒤를 돌아보고 차마 떨어지지 못하는 걸음을 억지로 디딘다. 깊게 숨을 들이쉬며 머리를 넘긴다. 돌아가자. 문득 소용부인이 걱정도 되고 아까와 전혀 다른 이 한적한 분위기에 위압감을 느껴 얼른 돌아온 길을 되돌아가려한다. “...!” 온몸이 움츠러드는 듯한 전율이 몸을 스친다. 아까전에 느꼈던 시선과 같다. 온몸이 얼음물에 들어간 듯 확 움츠러든다. 얼른 주위를 둘러보며 누구인지 알아내려 하지만 아무도 없는 적막감이 휘돌뿐이다. 기분나쁜 고요함에 얼른 이곳을 나가려 하는데 수근 수근대는 소리와 함께 뒤와 옆에서 서너명의 부랑자들이 모인다. 아차하는 자신의 실수를 느끼면서 잠시 쓰린 웃음을 짓다가 얼른 근처에 있던 나무막대를 주어든다. “이곳이 어딘줄 알고 어슬렁거리는거야?” “아직 어린애 주제에 겁도 없이 북문으로 왔다는 건가?” 낄낄거리며 모여드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더럽고 악취가 난다. 아무말 없이 그들을 지나쳐 앞으로 나가려고 하지만 사람을 놀리는 듯 앞을 막으며 길을 터주지 않는다. “어디를 가려고? 이왕 여기까지 왔으면 구경하고 가야지?” “관람비가 좀 비싸지만 너라면 낼수 있을 것 같은데?” “이야. 좋은 옷을 입고 있네. 근데 머리는 왜 산발이지?” 하아. 자례는 품에서 돈주머니를 꺼내들었다. 잠시 그것을 흔들어보인후 조금 떨어진 사람에게 던진다. 그리고 팔짱을 끼고 그를 노려본다. 더 이상 자신에게 나올 것은 없으니 보내달라는 이야기다. 순순히 내어놓는 자례를 보고 어리둥절 하던 사람들은 곧 돈주머니에 호감을 보인다. 하지만 막상 자례가 지나가려 하면 비켜주지 않아 곤란하다. 자례는 손에 든 나무막대를 한번 빙그그르 돌리고는 뒤로 물러난다. 상대는 자신보다 월등하게 머릿수가 많아 되도록이면 힘으로 이상황을 벗어나고 싶지 않다. “보내줘라.” 나이가 지긋한 노인이 말하자 사람들은 이죽거리다가도 비켜준다. 얼른 그 자리를 빠져나와 걸어가지만 이상하게도 분명 자신이 걸어들어온 길이 맞는데 나가는 길을 모르겠다. 당황스럽지만 내색하지 않고 낯익은 길로 들어간다. 때 아닌 횡재에 사람들이 모여 돈주머니에 좋아하고 있을 무렵 물끄러미 이 심심한 손님이 가는 방향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저 놈 길을 잃었군.” “그러게 말이야.” 수근 수근 거리던 젊은 부랑자 서너명이 슬금 슬금 자리를 비운다. “형? 어디가!” “아차, 시끄러 소야(嘯冶: 휘파람소리).” 사내는 지저분한 어린아이를 얼른 밀어버린다. 하지만 치켜올라간 눈을 가진 아이는 포기하지 않는다. “어디가! 어디가?!” “뒷간간다! 뒷간!” 그들은 얼른 아이를 밀어내고 그들끼리 모여 사라진다. 소야는 삐진입으로 그들을 바라보다가 조금 후에 따라나섰다. 얼마 가지 않아도 이곳이 어딘지를 몰라 난감해 한다. 이럴바에야 북문으로 가 그곳의 초소에 있는 병사들에게 길안내를 받는 편이 좋을 듯 싶어 골목 넘어 꼭대기만 보이는 북문쪽으로 걸어간다. 하지만 몇걸음안가서 누군가 자신을 따라오는 것을 느끼고 경계한다. 역시나 길을 막는 사람들은 예상했던 자들이라 화가 나기 전에 허탈하기도 하다. “내게서 더 이상 가져갈 것은 없는데?” “아무리 구면이라고 하나 그렇게 반말을 하면 쓰나?” “생긴 것은 선비지만 입은 험한걸?” 낄낄거리는 그들이 짜증나지만 상관하고 싶지는 않다. “뭘 바라는 것이지? 나는 바쁘다.” “귀한 몸, 바쁜길을 막아 죄송하지만 좋은 인연이 되고자 하는 셈이지.” 과장스럽게 인사한 그들이 다가오자 손에 들었던 막대를 올려 더 이상 다가오는 것을 막는다. “길을 잃었지?” “...” “만약 우리가 여기서 나가는 길을 인도한다면 우리에게 무엇을 해줄수 있지?” “무엇을 원하는가?” “그냥 약간의 금전적인 도움이라고 할까?” “흥.” 자례는 등을 돌렸다. 그들을 무시하며 앞으로 걸어간다. “길을 잃었다고는 하나 눈앞에 성문이 보이는 정도의 거리, 다가가 초소의 병사에게 길을 물어보는 것이 더 빠를 것 같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는가? 게다가 나는 더 나은 생활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 자들에게 줄 돈은 더 이상 없다.” “어쭈? 우리가 그저 서있는 허수아비로 보이나?” “어디다 손을 대는 것이냐!” 쫘악하는 소리가 들리며 자례의 어깨에 손을 얹었던 자가 고개를 돌린다. 놀라 뒤로 물러난다. 그 힘의 강함보다는 황당함에 놀란 얼굴이다. 안그래도 사나운 인상을 한 조그만 녀석이 눈을 올리고 성을 내는 모습이 매서워 당황스럽다. 하지만 곧 화가 치밀어 오르며 이 조그만 타인을 내치려고 덤벼든다. 조금 물러난 아이는 손에 든 막대를 검처럼 뒤로 돌리더니 정확하게 공격해 들어온다. 도망갈줄 알았던 아이가 공격해 들어오자 당황스럽다. 게다가 막대를 휘두르는 폼이 어설픈 것이 아니라 행여 벌통을 쑤신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된다. 그냥 겁을 주려는 의도였기 때문에, 게다가 왼쪽 어깨가 너무도 아파와 적당히 거리를 둘정도로만 내친다. 뒤로 발랑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우며 자리를 비키려고 했던 그들을 뒤로 하고 앞으로 걸어가는데 큰 소리가 등을 때린다. “이봐! 이봐!” “맙소사! 죽은 것 같아!” 그말에 흠칫하며 뒤를 돌아본다. 설마. 이런 가느다란 막대에 몇 대 맞았다고 죽다니? 그들이 또다시 농간을 부리는 것은 아닌지 생각이 되어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가 다시 길을 간다. 몇걸음 가지 않아서 날카롭게 째지는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울린다. “살인자!” “...!” “당신은 살인자야! 형! 형!” 너무도 놀라 눈동자만 굴리다가 가까이 다가간다. 천천히 걷다가 형을 부르며 우는 아이에게 끌려 황급히 달려간다. 거짓이 아닌지 아까 쓰러진 한 사내가 그대로 누워 일어나지 못한다. 다가가 목덜미에 손을 넣어 맥을 확인한다. 정말로 죽은 것인지 맥이 뛰지 않는다. 가슴이 쿵쾅거린다. 전쟁으로 인해 사람을 죽여 본일은 수도 없지만 이렇게 뜻하지 않게 사람이 죽어버린 것은 처음이다. 그는 날 죽이려고 하지는 않았다. 나도 그를 죽이려고 하지 않았다. 이건 실수야. 기분 나쁜 두근거림에 가슴깊은 곳에서 울컥 올라오는 느낌이 든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시체를 살펴본다. 자신이 쳤던 곳의 옷을 올리고 보니 확실히 붉게 부어있지만 이것가지고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다. “네 형에게 혹시 지병이라도 있지 않았니?” “몰라! 이 살인자! 형의 몸에 손대지 마! 다른 자들은 이미 도망가버렸는데 홀로 형의 시체를 부여잡은 이아이는 당돌하게 자례의 손을 뿌리친다. 어찌해야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 이리저리 둘러보며 도와줄 사람을 찾는다. “그냥 두고 나가시오.” 등뒤에서 아까 보았던 노인이 말한다. 언제 온것인지 노인은 지팡이에 의지에 힘겹게 아이에게 다가왔다. “이놈이 또 말썽을 피운게지. 그렇게 조심하라고 일렀는데.” “노인장...” “놈은 심장이 안좋았소. 아마도 그래서 죽은것일테지. 당신 잘못이 아니오.” “그런...” 다행이라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는다. 어쨌거나 자신이 발작을 일으킨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평소와 같으면 바로 등을 돌렸을일이지만 그렇지 못하다. 형의 시신을 붙잡고 우는 아이에게 차마 냉정하게 등을 돌릴수 없어 그 자리에서 아이를 달래보려 하나 아이는 냉정하다. “내게도, 형에게도 손대지마! 이 살인자 같으니라구! 천벌이 내릴꺼야!” “그만두거라 소야! 저분의 잘못이 아니다! 규칙을 어기고 그를 따라가서 네 형에게 천벌이 내린거야!” 노인은 아이를 나무라지만 자례에겐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윙윙거리는 이명이 머리를 아프게 만들고 가슴깊숙한곳에서 자꾸만 피비린내가 올라온다. 이런일은 싫다. 어째서 내 길은 이렇게 꼬여지는 것일까. 이것이 전에 보았던 나의 업인가. 아찔한 머리를 손으로 괴며 정신가다듬는데 팍하는 느낌과 함께 그 어린 아이가 자신을 치고 저 멀리 달아나 버린다. 노인이 아이를 애타게 부르지만 아이는 어두운 골목으로 사라져 버린다. “...내가...” “공자는 돌아가셔도...” 얼른 아이의 뒤를 따라 달린다. 도무지 속도가 붙지 않아 뒤쳐지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이이상 빠르게 달릴수가 없다. 마치 꿈에서 있는 듯한 비현실적인 느낌. 앞서가는 아이가 마치 거인이 된듯하다. 문이 부셔지는 소리에 막 잠이 오려던 것이 도망갔다. 화선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거친 발걸음소리가 들리며 누군가 침대의 휘장을 걷어버린다. 놀라 눈을 크게 뜨니 레이첸이 인상을 찌푸리며 자신을 내려본다. 분명히 화가 나있다는 그 표정에 어이없어한다. 먼저 약속을 어긴 것은 레이첸이고 자신은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자신에게 화를 내고 있는가. 그 표정이 너무나 냉정해 무섭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는다. 고개를 올리고 그를 마주보며 묻는다. “문을 부수면 어떡하라는 겁니까?” “자고있지 않았는가. 너에겐 내말이 들리지 않는가? 아니면 내 말을 무시할정도로 난 네게 아무런 가치도 없는 사내인가!”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십니까!” “시끄럽다!” 짝하는 소리가 들리며 뺨이 알딸딸하다. 처음에는 자신이 무슨일을 당한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아 떨리는 손으로 화끈거리는 뺨에 손을 올린다. 뜨겁다. 난생 처음이였다. 자신의 아버지에게도 맞아본 적이 없는 몸이였다. 젓가락 이상으로 무거운것조차 들지 않으며 곱게 자란 몸이다. 울컥하고 화가 치밀어 올라 침상에서 벌떡 일어난다. “날 치다니! 감히 날!” “그래 쳤다! 네 아비가 얼마나 대단한 장사꾼인지는 몰라도 너는 나와 혼인을 했으니 이젠 내 것이다!” “내 아비는 장사꾼이 아니오! 그리고 나는 당신의 물건이 아니...!” 말을 끝맺기도 전에 세차게 밀어버리는 힘에 침상위로 쓰러져 버린다. 그의 난폭함에 화가 나면서도 일단은 뱃속의 아기가 먼저 떠오른다. 두 손으로 배를 가리며 뒤로 물러난다. 84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아이의 행방을 찾는다. 멀리 조그만 인영이 보여 그곳으로 달려간다. 힘들고 지쳐 그만 뛰고 싶다. 헉헉거리는 숨소리와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가 자신의 귀에 들려 시끄럽다. 일순 몸이 한쪽으로 와락 쏠리는 느낌에 정신을 차려보려하지만 늦었다. 누군가 자신의 손을 잡고 폐가의 축사로 끌어들인다. 뿌리쳐야 하는데. 정신은 어서 빨리 뿌리치라고 하는데 몸은 그렇지 못하다. 정신과 몸의 괴리가 심해 쓴웃음마저 지어진다. 누구지? 상대의 얼굴을 보기위해 고개를 들다가 난대없는 입맞춤에 당황해 눈을 크게 뜬다. 순식간에 몸과 정신이 현실로 돌아와버린다. 혀를 유린하는 물컹한 살덩이에 불쾌감이 생기기 보다 숨이 턱 막힐듯한 강한 향기에 머리가 아프다. 단 한번도 맡아 본적이 없는 이질적인 향이다. 두통이 일정도로 심한 향기에 헛구역질까지 나오려고 한다. 하지만 입을 막고 서 있는 자는 비킬생각을 안한다. 손으로 그의 머리를 잡아 당겨 거부감을 표시하지만 도무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질끈하고 피비린내가 느껴질정도로 상대의 입술을 깨물어버린다. 움찔하며 떨어지자 겨우 자유롭게 된다. 손으로 입을 막으며 땅위에 주저앉는다. 지독한 향에 아침에 먹은 모든 것이 올라올것만 같다. 인안에 남아있는 타인의 흔적은 지독히 맵고 써 침을 뱉어 게워내지만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열이 오르는 느낌에 가슴을 친다. 귓가에 그 역한 향이 풍기는 자의 숨결이 느껴진다. 허리로 들어오는 손, 목아래로 느껴지는 타인의 촉감에 몸서리친다. 아니, 그보다 근접한 상대에게서 풍기는 이 향에 미칠지경이다. 몸에 배일까봐 두려운 향에 벗어나기 위해 크게 몸을 뿌리치지만 마치 곰에게 안긴 듯 곰짝을 할 수가 없다. 몇 번 더 시도하다 안되는 것을 알아버리자 힘이 빠져버린다. 거칠게 호흡을 하며 몸을 추스르려고 애를 쓴다. 딱딱한 손이 자신의 허리띠를 풀고 수염으로 거친 얼굴이 목덜미를 쓸어내려온다. 뿌리치고 싶고 거부하고 싶지만 너무나 어처구니 없어서인지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믿기지않게 이대로 기절해버리거나 곤하게 잠들어 버리고 싶다는 욕망이 생긴다. 너무나 많은 일이 있었던 탓인지 정신마저 이젠 그만 깨어나 있고 싶어한다. 하지만 잠이 들거나 기절하지 않는다. 목을 감아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팔에서도 그 역겨운 향이 풍긴다. 조금이라도 향을 맡지 않고 싶어 고개를 든다. 축사의 천장에는 거미줄이 있다. 허벅지에 닿는 거친 손길과 어깨너머로 흘러내리는 옷자락이 느껴진다. 무슨일을 당하는 것인지 모를정도로 바보가 아니다. 단지 너무나 급작스럽고 예상하지 못한 관계에게 놀랐을뿐. 들어보기는 했지만 막상 자신에게 닥친다고 생각하니 당황스러울 뿐이다. 달걀인줄 알았던 알에서 까마귀가 태어난 것을 본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저항할 생각은 목을 잡혀버렸을때 끝나버렸다. 목을 파고드는 거친 팔목에 숨이 막혀 움직이지 않는다. 호흡을 조절하려 안간힘을 쓴다. 계속 되는 그 지독한 향에 미쳐버릴것만 같다. 천천히 숨을 가다듬어 조금이라도 향을 들이쉬지 않으려 노력한다. 무심하게 천장을 바라본다. 축사의 천장에는 거미줄이 있다. “그만두시오! 내 몸에는 아이가 자라고 있소!” “누가 모르나?” 앙칼진 화선의 외침에도 소용없이 레이첸이 그녀의 위로 타고오른다. 버둥대는 손을 잡아 올리고 허리띠를 풀기조차 아까워 치맛자락을 올린다. 자신의 허벅지로 낯익은 사내의 손이 올라와 더듬자 이전과는 다른 혐오감에 휩싸인다. “레이첸! 레이첸!” “흐음? 이젠 내가 너의 친구로 보이는가?” 그 이상 신성할수 없는 몸의 안쪽으로 그의 손이 들어오자 화선은 몸을 뒤틀어 피해보려 하지만 안을 휘젓는 손가락에 울음이 나올것만 같다. “여관! 누구 없느냐! 여관!” “시끄럽다!” 난대없이 문이 부셔지는 소리와 궁의 주인의 비명소리가 들리자 놀란 시종들이 우르르 달려온다. 그리고 부셔진 문안으로 벌어지는 광경에 입을 딱 벌리며 얼른 고개를 돌려버린다. 그 소란에 여관이 달려와 침상위의 진풍경을 보고 몸을 떨며 분노한다. “전하!” “닥처라!” “화선부인은 임신중입니다! 지금 무슨짓을 하고 계시는 겁니까!” 침상으로 여관이 달려와 레이첸의 팔을 잡아 끌어내리려 하나 여자의 힘은 사내와 사못달라 맥없이 내쳐진다. 떨어저 나간 여관에게 레이첸이 눈을 부라리며 외친다. “당장 방에서 나가라!” “말도 안되는 말씀입니다! 임신한 부인에게 야합은 금지된일이 아닙니까! 게다가 이 상황은 무엇입니까! 천한 난봉꾼이 하는 배덕한 짓과 뭐가 다르단 말입니까! 그러시고 황가의 존속이라 할수 있다하시는 겁니까!” “지금 네 황제의 힘을 업고 나에게 명령하는 것이냐!” “그런 불경스러운 말을...!” 여관이 입을 가리고 못들을 말을 들었다는 듯 외면하나 그래도 물러서지 않을 기세다. 레이첸은 고개를 갸웃하고는 여전히 한손으로 화선을 누른체 자신의 허리띠를 풀렀다. “그럼 거기서 2왕자가 야합을 나누는 것에 대해 자세히 보시게.” 화들짝 놀란 시종들을 그나마 나이많은 시종장들이 밖으로 내간다. 기가막힌 여관도 정말로 레이첸이 자신의 하체를 들어내자 움찔하며 뒤로 물러난다. 화선의 다리를 벌리고 밀착하려고 하자 다급하게, 너무도 절실하게 화선이 레이첸을 부른다. “전하!” “그래? 이제야 내가 네가 지아비로 보이는 모양이구나.” “전하. 제발...” 크게 뜬 눈에 맑게 눈물이 고이더니 기어이 흐르고 만다. 처연한 미인이 검은 머리를 풀어헤치고 자신에게 배달린다. 부디 알아달라는, 도와달라는 눈으로 자신의 뜻을 호소한다. 흐느끼듯 그 붉은 입술에서 낮게 새어나오는 말이 가슴을 울린다. “이 아이는 전하의 아이입니다. 제발...” 그말에 발광하던 레이첸도 잠시 움추러 든다. 순식간에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던것인지 바로 이해가 가버린다. 바로 들뜨던 자신의 욕망이 착 가라앉는 것을 느끼지만 무엇인가, 알수 없는 감정이 울컥하게 만든다. 그녀가 흘리는 눈물이 가식적으로 보여 화가 치밀어 올라 화선의 몸에 자신을 강하게 밀착시킨다. “악!” 째지는 비명소리도 잠시, 안된다 고개를 젓던 그녀도 그의 움직임에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인형처럼 가만히 누워있는다. 위에 올라탄 사내는 열락에 들뜨는데 그를 태운 여인의 가슴은 배신으로 쓰리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하나의 짐승이 자신의 위에서 몸부림치고 있는 것일뿐. 레이첸의 붉은 머리카락이 눈앞에 흔들린다. 내 아이도 저렇게 붉은 머리를 가지고 있을까. 가만히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배신에 쓰린 상처와 눌리는 몸뚱아리의 불쾌감을 모두 잊을수 있는 무엇인가를 발견해 낸다. 척추를 울리는 통증에 잠시 숨을 깊게 들이쉬다가 헛구역질을 한다. 정말 지독한 향이구나. 분명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향이란 것인데 불구하고 눈앞에 새까만 연기로 향이 보이는 것 같아 몸서리 쳐진다. 하늘로 검은 향이 올라가 천장의 거미줄에 걸리면 어느 구석에 숨어 있는 거미가 나와 그것을 자신의 집으로 끌고 들어갔다가 그 향에 놀라 도망가버리는 것은 아닐까. “헉!” 멋대로 침입당한 곳의 통증보다 거친 손이 꽉 부여잡고 끌어당기는 어깨의 통증이 더 아프다. 그가 꺽은 팔도 아프고 앉지도 서지도 못하는 다리도 아프고 감긴 팔이 조여와 목도 아프다. 전신이 쓰려 자신이 왜 이런 일을 당하는 지 의문도 없다. 단 한 가지의 생각만 되풀이된다. 빨리 끝내버려. 흔들리는 몸에 따라 눈앞에 자신의 머리카락이 미친사람의 그것처럼 흔들린다. 그 사이로 보이는 천장의 거미줄을 눈으로 따라간다. 얇고 투명한 저 줄에 가느다란 다리를 걸치고 사뿐하게 움직이는 거미를 보니 마치 정숙한 여인과 같아 웃음마저 나오려 한다. 움직임이 격해졌던 뒤의 상대는 어느순간 자신의 욕망을 풀어놓고 일어난다. 자신 역시 일어나려고 몸에 힘을 주지만 마치 어린아기가 되어버린 듯 다리가 펴지지 않는다. 뒤에서 옷자락을 챙기는 상대의 소리가 들린다. 문득 자신도 한기를 느껴 그나마 움직이는 손으로 흘러내린 옷자락을 어깨로 올린다. 바로 오싹한 시선을 느끼고 움찔한다. 찬물에 몸이 빠진듯한 한기. 예의그 시선을 느끼고 축제가 시작되고부터의 하나의 궁금증은 풀렸다는 바보같은 생각을 한다. 탕하는 소리가 나며 상대가 축사를 나가버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에 조금은 힘을 얻어 다시한번 일어나려고 몸에 힘을 준다. 여전히 아기가 되어버린 듯 누군가의 도움을 바라는지 몸은 움직이지 않는다. 왜 일어나지 못하는 건지 알수 없다는 눈으로 앞에 보이는 손을 바라본다. 꽉 쥐고 있었던 듯한 손은 새하얗게 질려있고 전혀 느끼지도 못했던 마른 볏잎들이 손아귀에 쥐어있다. 힘들게 일어나 축사의 기둥에 몸을 기대자 허벅지로 타고 내리는 불쾌한 이물감에 손으로 그것을 훔친다. 불투명한 타인의 흔적에 실소가 터져나온다. 옷을 추스르고 축사의 밖으로 나와 하늘을 올려다 본다. 어둠이 깔린 북문의 허름한 난민촌에는 단 하나의 등불마저 보이지 않아 자신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 알수 없가 없다. 극한 이질감이 느껴져 몸이 떨려온다. 모든 것이 꿈인 것 같아 잠시 하늘을 올려다 본다. 펑펑하는 소리가 들리며 아직도 하늘은 불꽃으로 수가 놓여지고 있다. “광극이 끝나는 군요.” 서먹서먹한 분위기를 벗어나고자 마고가 지나치는 아까의 광극을 바라보았다. 자휼은 대답하지 않고 앞을 향해서 가다 문득 고개를 멈추고 극을 바라본다. 마지막 막인듯한 장면에 이해못하는 마고는 턱을 괴고 바라본다. “두 연인이 헤어지는군요?” “그래.” “타인에 의해서 입니까?” “...아니.” 사랑한다. 지독히 사랑하고 있다. 하지만 절대로 이어질수 없는 비극적인 그들의 관계. 두 연인은 서로가 지닌 운명을 재앙으로 생각하며 상대를 위해 떨어지려고 한다. 이것이 상대에게 보여줄수 있는 자신의 애정표현이라고 스스로를 이해시키며 서로의 마음에 불신을 심는다. 스스로 자신만이 상처입는 다고 생각하며 더더욱 상대에 대한 증오를 키운다. “단순한 불장난에 의한 하룻밤의 꿈인것이군요.” “...사람은 왜 사랑을 하는가...” “...?” 자휼의 목소리가 떨린다. 막은 끝에 다달아 호동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증명하려던 낙랑의 반역과 죽음으로 끝난다. 쓰러져 버리는 공주의 옷자락에서 꽃잎이 흩어져 휘날린다. “그리고 사랑은 어째서 욕망을 낳는것일까?” “...” “어째서 사랑하면 안되는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것일까?” 그말에 마고는 죽은 연인을 끌어안고 울고 있는 왕자를 바라본다. 적국의 연인. 사랑하면 안되는 사이. 정치적 이용과 갈등. 서로를 상처 입히고 증오하게 되어 모든 기억을 저주로 생각하게 되는 최악의 관계. 이렇게 후세로 이어서도 그 사랑이 진정으로 옳은것인지 생각하게 만드는 두 연인. “저건 사랑이 아닙니다.” 마고의 말에 자휼은 희미하게 미소짓는다. “저건 단지 사랑이란 허울을 쓴 어린아이의 소유욕에 불과한 것입니다. 어미가 아이의 젓을 때기 위해 아이의 요구를 거절하는 것과 같이, 어린 아이가 어미의 젓을 소유하기 위해 때를 부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쾅하는 소리가 울리며 등뒤로 오색의 폭죽이 쏘아올려진다. 하지만 들리지 않는 다는 듯 무심한 표정의 자휼은 그렇게 마고를 바라본다. 아니 마고의 모습 안으로 보이는 누군가를 바라본다. 열정은 욕망을 부르고 욕망은 채워진 후 급속히 사라진다. 관계에 남는 책임은 누구에게 돌아가는것일까?” 의심. 불신. 질투. 분노. 배신. 남은 것은 서로에 대한 오해와 증오뿐. 그것은 사랑이 아닌 어린 아이의 치기인가. 왜 사람은 사랑하면 안될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것일까. 아이에게 익힌 햇밤을 건낸다. 고마워하는 얼굴로 그것을 받아들지만 먹지는 않는다. 굉장히 좋아하면서도 먹지 않고 손에 들고 있는 아이를 보며 잠시 생각하다가 아이 스스로 햇밤을 깨물어 먹기는무리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다시 건내받아 깨물어 반을 쪼개어 준다. 환한 얼굴로 반을 받아 조금씩 속만 베어먹는다. 극이 끝나 일어나자 아이의 얼굴과 옷자락에는 소복하게 익은 밤의 부스러기가 붙어버린다. 눈살을 찌푸리며 그것을 수건으로 털어낸다. 문득 아이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자 고개를 든다. “왜그러니?” “왜 사람은 사랑해서는 안될 사람은 사랑하게 되는것인가요?” “...뭐?” 난대없는 질문에 잠시 고개를 갸웃하고는 그것이 극에 나온 연인들에게서 느낀것이라 여긴다. 피식 웃으며 아이의 입가에 붙은 부스러기를 때어낸다. “절대로 그런일은 없을테니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너는 고작 한 손을 겨우 넘긴 나이가 아니냐? 그런 것은 아직 알필요가 없는거야.” 그 대답은 자신이 원하는 대답이 아닌지 실망한 표정을 짓는 아이의 손을 부드럽게 잡고 저 멀리 사자춤이 행해지는 곳으로 걸어간다. 걸어가면서도 아이가 계속 아까의 생각을 하는 것을 보고는 한숨을 쉰다. "그것은 사랑이라고 말할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 "그것은 어린 아이가 엄마의 젓을 때지 못하는 것처럼 잘못된 소유욕이며 투정인 것이다. 단지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욕망으로 한 사람을 잡고 흔드는 것이지. 마치 좋아해서 버리고 싶지 않은 장난감과 같다." "그럼 사랑은 뭐가 다른가요? 사랑은 좋아하는 것과 다른것이라 들었는데요?" "진정한 사랑이란 사랑하면 안되는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어느날 자신이 사랑해도 되는 사람을 만나 사랑하게 되는 것이지. 운명처럼 다가온 자신에게 딱 맞는 상대에게 호감을 느끼고 정을 나누게 되는 것이다. 검과 검집처럼 완벽히 들어맞으며 조금의 어긋남이 없이 상대에게 충실한것이 진정한 사랑이겠지." "...사랑은 이미 정해진 인연과 하는 것입니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연인이란 하늘이 주는 자신의 반쪽이다. 그러니 이미 정해진것이 아니겠느냐?" 그말에 아이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앞을 바라본다. 잘 이해못하겠다는 표정이다. 하긴 고작 대여섯먹은 아이에게 이런 말은 너무 어렵지. “걱정하지 말아라.” “예?” “너도 나도 사랑해서는 안될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일은 없을것이니까.” "정말로요?" "그래. 우리는 하늘이 내려준 인연의 반쪽을 만나 소담한 정을 나누며 짧은 이승의 삶이 끝날때까지 사랑하게 될것이다. 이 몸이 죽어 사라질때까지 말이다." 그말에 기쁜듯 미소짓는 아이의 표정은 너무도 환하다. 화려한 털을 휘날리며 광장을 뛰어다니는 무사자들이 형제를 감싸돌고 뒤로 지나간다. 절대로 그런일은 없을것이라는 형의 믿음이 담긴 눈동자에 아이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곧 고민을 잊어버리고 형의 손을 잡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 두근거리게 좋아하며 사자들을 보러 앞으로 걸어간다. 85 늘그막한 의원은 거칠게 열리는 문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했다. 창백한 얼굴에 풀어헤친 머리가 마치 귀신을 연상시켜 뒤로 물러났지만 힘들게 한발 한발 다가온 아이는 정중하다. “의원이십니까?” “그렇지만...” “이 향이 도대체 무슨 향입니까?” 아이는 불쑥 얼굴을 의원가까이 댄다. 숨소리가 느껴져 얼른 뒤로 물러나지만 그가 묻고 있는 것이 자신의 몸에서 나는 향이라는 것을 알고 다시 다가가 냄새를 맡는다. “이런 이런, 이건 담배가 아닌가.” “담배?” “박하에, 담배. 후추와 향신료를 넣어 만든 유목민족들의 담배지. 지독하지.” 그렇게 말하면서 의원은 이 젊은 공자의 목에 나있는 붉은 표시에 혀를 찬다. 축제의 열기에 기녀에게 혼을 뺏긴 젊은 서생인가하는 생각이다. 노인은 고개를 설래설래 저으며 약간 뒤로 물러난다. 아이는 탁자 옆으로 다가가 묻는다. “앉아도 되겠습니까?” “그래.” “팔을 좀 봐주셨으면 합니다.” 그말에 마주 앉아 파란 옷위로 팔을 더듬어 간다. 옷은 털어냈지만 흙먼지가 묻어있어 문란한 상상을 하게 한다. “탈골이야. 별것 아니지. 옷을 벗어보게. 조금 잡아당기면 괜찮아.” “옷을?” “그래. 옷을 입고 있으면 제아무리 화타가 왔다한들 어찌 뼈를 맞추냐?‘ 노인의 제치있는 말에 자례는 천천히 윗옷을 벗었다. 노인은 힐끔 그를 바라본다. 등뒤에 나있는 붉은 점을 보며 눈살을 찌푸린다. 어서 뼈나 맞추어 주고 내보내야 한다 생각한다. 앞으로 다가가자 어깨에 나있는 긴 흉터에 깜짝놀란다. “이건 무슨 상처야?” “아, 반년전에 전쟁에서 당한 상처입니다.” “전쟁?” 그제야 다시 눈을 뜨고 이 어린 서생을 바라본다. 다시한번 양해를 구하고 팔을 손으로 눌러가며 올라간다. 몸이 외소하고 많이 말라있지만 확실히 단단하게 잡히는 근육이 일반 글쟁이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꽤나 아플텐데도 탈골한 뼈를 집어넣을때 입술을 깨물뿐 아프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어꺠를 흔들어 더 이상 아프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는 옷을 다시 입는다. “한번 빠진 뼈는 계속 빠지게 되지. 연골을 튼튼하게 하는 약을 지어줄테니 잘 다려먹어.” “감사합니다.” 노인은 종이를 꺼내들고 묻는다. “못먹는 음식이라도 있나?” “육식을 먹지 않습니다만...” “저런. 그럼 안돼. 뼈를 우린 국을 많이 먹어야 하네. 그리고 근간에 상처가 나거나 피를 흘린적은?” 그말에 멈칫한 아이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흔든다. 그말에 노인이 자례를 노려본다. “의원에게 거짓말을 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는가?” “...예.” 그래도 잠시 생각에 잠겼던 아이는 노인에게 묻는다. “제가 말씀드린 것을 비밀로 해주시겠습니까?” “원한다면.”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빠르게 말한다. “저는 폐병을 오래전부터 앓고 있습니다. 처음 피를 토한 것은 5살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반년전 마지막으로 의원에게 진료를 받았을 때 그는 제가 20살을 넘기지 못할것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자네 지금 몇 살인데?” “20..아니 한족의 나이로는 지금이 18입니다.” “....한족의 나이? 자네는 정안인인가?” 자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어나지 못할정도로 독한 약을 먹으면서 지금까지 버텨왔습니다. 하지만 그 약을 끊고 나서 처음으로 핏덩이를 토했던 기억이있습니다. 다행히 그 이후에는 민간의 약으로 요양을 했는데 몸은 많이 좋아진 느낌입니다.” “자네 등을 돌려보게.” 등을 따라 손을 누르던 의원이 쓴 표정을 지으며 손을 땐다. 아무렇지도 않게 자례가 의원에게 묻는다. “지금 제 상태가 어떻습니까?” “뭐...그렇지.” 어물어물 답변을 피하는 의원의 손을 잡아 자리에 앉게 한다. “의원은 환자에게 거짓을 고할수 없다고 하던데요?” “아 거참. 하지만 꼭 말할필요도 없네! 연골약이나 먹게! 근간에 토혈한적이 있는건가 그럼?” 자례는 고개를 저었다. “봉변을 당한 것은 있지만 괜찮습니다.” “봉변?” “요즘 도성을 휘돌고있는 남색가에게 걸려든 것 같습니다만. 이런 통증은 빨리 사그라드니까요.” 그말에 의원은 입을 딱 벌린다 “자네 봉변을 당했어?!” “북문쪽으로 다가간 제 잘못입니다.” 그제야 뒤쪽으로 나있는 붉은 자국과 스스로 알지 못하는 향을 물으러 온 아이를 이해한다. “그럼...” “...?” “그쪽 상처도 봐줘야 하는 것이 아냐?” 노인은 찬장에서 약을 꺼내들며 심각하게 인상을 지었다. “사실 나도 젊은 시절에 여진놈에게 당한 기억이 있단 말이지. 그때 그냥 넘겼다가 이 나이가 되도록 화장실에서 죽도록 고생하고 있네. 항상 후회하는 것중 하나지. 그 유목족들의 행위는 이해가 가지 않는단 말이야.” 사기그릇에 담긴 약을 든 의원은 자례에게 눈짓한다. 잠시 고민하다가 일어나 다시 옷을 벗는다. “그럼 봐주십시오.” “목욕물도 받아줄까?” 그말에 탈진된 얼굴이지만 싱긋 웃어보인다. 무엇보다 그것이 필요했다. 아름다운 무희들의 춤을 구경한다. 절도 있고 품위있는 음악과 춤속에서 레이첸은 맞은편에 앉있는 친첸을 바라보았다. 무엇인가 기분 나쁜 일이 있었던것같다. 지금까지 보아왔던 성격이라면 자신을 보고 실실웃을 놈인데 지금은 단지 인상을 쓰고 술을 마실뿐이다. 징이 울리고 무희들과 음악이 물러난다. 모두들 일어나 부복하자 단상의 위에서 주렴소리가 카랑거리며 들려온다. “모두들 앉거라.” 그말에 왕자들이 먼저 자리에 앉고 뒤로 대신들이 앉는다. 어차피 받아도 쓰지 않는 값진 금은 보화와 재보들이 아골타에게 진상된다. 호명된 자는 단상밑으로 가 그것을 환관에게 건내고 환관이 그것을 황제에게 보여준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면 그것은 황제의 보물관으로 이동된다. 계속되는 진상에 그 위엄을 놓치지 않고 아래를 내려다 보던 아골타에게 붉은 머리와 금발머리가 눈에 들어온다. 붉은 머리는 레이첸이고 금발은 친첸이다. 나란히 서서 등을 돌리고있는 폼이 아무래도 사이가 좋지 않아보인다. 마치 예전의 자신처럼말이다. 갑자기 기분이 좋아지며 좋은 흥밋거리를 찾은듯해 가슴이 뿌듯하다. 진상이 끝나길 기다린다. 지루한 그것이 끝나자 무희들의 춤이 이어지고 술이 돌아간다. 그 이상의 연회에는 참석하지 않겠다는 황제의 말에 모두들 부복하며 황제가 홀을 떠나는 것을 배웅한다. 황제가 나가자 알수 없이 숨통이 트인듯한 홀에 누군가 레이첸에게 다가온다. 역시나 오늘은 말이 없다고 여겼던 친첸이다. 예의 그 비웃는듯한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그가 인사한다. “여어. 레이첸 형님 그동안 잘 지내셨소?” “시끄럽다.” “뭐. 열심히 연습하셨으리라 생각하오. 이 아우 기대되어서 잠을 못잘 지경이요.” “그런 놈 치고는 얼굴색이 아주 좋구나.” “하하 나야 언제나 그렇지. 형님은 안그런가 보오? 좋은 소식 같은거 없소? 슬슬 아이가 생길때가 아닌가?” “네 걱정이나 해라!” 문득 아까 전 화선과의 강제적 관계가 떠올라 화를 버럭내며 그를 밀친다. 강하게 힘이 들어간 팔에 어이없다는 듯 친첸이 뒤로 물러나다 시종들과 부딪쳐 넘어진다. 무희들이 물러나고 음악이 멈춘다. 순식간에 홀이 조용해 지면서 두 왕자를 주목한다. 서로를 노려보는 두 왕자는 죽일 듯이 으르렁거린다. 무슨일이라도 당장 터질 것 같은 긴장감속에서 누군가 손을 들어 음악을 계속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체이첸이다. 그는 눈짓으로 레이첸과 친첸에게 떨어지라는 명령을 내린다. 기분이 상한 레이첸은 그대로 자신의 궁으로 돌아가버리나 친첸은 일어나 새로운 술잔을 잡을 뿐이다. 그 날 종일 계속되는 연회에 레이첸은 불참했고 친첸은 계속 나와 즐겼다. 여러번 권유해도 안가겠다는 레이첸은 이제 짜증을 넘어 화를내고 있었다. 분명 자신이 모르는 무슨 일이 있는 듯 한데 레이첸은 아무말도 해주지 않는다. 시종에게 다그치면 금방알아낼 것이니 그다지 걱정하지 않는다. 일단은 지금을 즐기자는 태도로 태진은 연회장에서 나와 길을 걸었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문득 저 앞에 누군가 서서 자신과 마찬가지로 바람을 쏘이고 있는 것이 보여 다가간다. 자신이 오고 있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돌리는 자는 묘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모습을 보아하니 누구가의 가신 같은데 얼굴이 낮선 것을 보아 제후로 나간 왕자의 사람이 아닌가 싶다. 자신이 다가오자 그는 자리를 비켜주고는 다른곳으로 간다. 그 뒷모습이 묘하게 누군가와 닮았다고 생각해 불러세운다. “너는 누구의 사람이지?” “친첸전하의 가신입니다.” “그런가...너 한족이냐?” “...예.” “그래? 묘한 분위기구나. 가도 좋다.” 그는 바로 돌아 연회장의 등불을 피해 사라진다. 태진은 고개를 갸웃하며 생각한다. 분명 본적없는 얼굴이지만 이상하게 낯익은 분위기군. 그다지 기분 좋은 느낌은 아니라서 혀를 차고 등을 돌린다. 문득 눈에 빙고가 들어온다. 그리고 저 안에 있을 누군가도 떠올라 버려 한숨을 쉰다. “바보같은 녀석...” 조용히 중얼거리다 문득 지금이라면 빙고에 들어가는 것도 쉽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주위를 둘러보고 시종에게 여기서 기다리라고 말한 후 빠른 걸음으로 빙고로 다가간다. 여전히 보초병들이 있지만 예전과는 달리 서너명 뿐이다. 태진은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와 시종에게 그들에게 술과 안주를 가져다 주라 말한다. 물론 익명으로. 시종들이 안주와 술을 내가기를 기다리며 수 많은 왕자들을 본다. 결국은 이 많은 사내중에 단 한명만이 패자가 되는 것이다. 고개를 괴고 그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자조적인 웃음이 나온다. 얼른 웃음을 거두고 밖으로 나가 술에 취해 있는 빙공의 보초병들을 닦달한다. 근무중에 술을 마신 그들이 난처해하자 아량을 베푸는 마음으로 다른 병사들을 불러오라 명령한다. 그들이 뛰어사라지자 얼른 빙고 속으로 들어간다. 돌문을 힘껏 밀자 우그륵하는 돌의 마찰음과 함께 빙고가 열린다. 화악하는 차가운 냉기가 올라온다. 봄이 온지 얼마 안되었지만 빙고의 추위에 비하자면 밖은 더울정도다. 얼른 들어가지만 너무도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다시 나와 보초병 옆에 있던 등불을 들고 들어간다. 가슴이 떨리고 불안으로 긴장된다. 빙고속은 깔끔하게 정리된 작고 큰 짐과 상자로 가득차있다. 그중 꽤나 거대한 상자들도 많아 다가가 두드리며 사람이 들어있을 만한 것을 찾아본다. 그리고 그중 하나를 골라내어 열어보려 하나 단단히 밀봉되어 있어 힘들다. 두리번거리지만 막대기 하나 발견하기 어렵다. 곤란해 이리저리 두리번 거리다가 들고 있는 등불의 손잡이를 생각해내고 등과 손잡이를 분리한다. 얼음이 끼어있는 틈사이에 그것을 끼워 힘을 준다. 하지만 단단히 얼어있는 그것을 열기에는 손잡이가 너무 약하다. 멀리서 달려오는 병사들 소리에 태진은 망설이다가 얼른 나와 빙고의 문을 닫는다. 여름이 온것처럼 후덥지근한 공기를 참아내며 병사들에게 훈계를 해보이고는 얼른 그 자리를 벗어난다. 조금 떨어진 곳까지와서 숨을 토해낸다. 긴장된 몸이 뻣뻣해서 몸을 움직인다.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으면 좋으련만. 쓸쓸한 눈으로 빙고를 바라보다가 시종들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냉냉하게 돌아서버린다. 86 잠시 눈만 감았다 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눈을 떴을때는 검소한 침상에서 이불까지 덥고 자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눈을 깜박이다가 일어나려고 몸을 움직이니 조금 떨어진 곳에서 누군가 와락 달려든다. “공자! 괜찮아요?!” “소용부인?” 무슨 일인지 감이 잡히지 않아 어리둥절한다. 소용부인이 기댄 가슴이 무거워서 숨소리마저 헉헉거린다. “부인 진정하시구랴. 그러다 애 잡겠소. 보소. 얼굴이 파랗게 질렸지 않나?” “어머나!” 그말에 샐쭉하게 삐진 얼굴로 소용이 물러났다. 의원이 다가와 힐끔 자신을 바라본다. “괜찮은가?” 아아. 그랬지. 목욕을 하고 나오자 도저히 못견딜 정도로 졸음이 왔다. 갈아입을 옷을 가져다 주는 노인에게 감사하자 노인은 피식 웃을뿐이였다. 그는 봉변당한 동질감이라 생각하라며 웃었다. 그리고 침대를 치워주었고 눕기전에 자신이 노인에게 소용부인의 거처를 대며 소식을 전해달라 말했었다. “너무나 놀랬어요! 갑자기 소용을 두고 그렇게 떠나시면 어쩌나요? 얼마나 겁이 났던지요!” “죄송합니다. 그래도 무사하셔서 다행이군요.” “을노 장군님을 만났어요. 정말 다행이였죠.” “을노장군을?” 몸을 일으키자 따끔따끔한 통증에 눈살을 찌푸린다. 하지만 못견딜만큼은 분명히 아니여서 그냥 참아버리고 만다. 애써 태평한 표정으로 묻는다. “을노장군님이 마침 그쪽에 계셨군요.” “오늘 성을 나가신다고 하더군요. 전언을 남기셨어요. 들으실래요?” “예.” “힘내라. 다시 만나자...였어요.” “그렇습니까.” 그말에 을노가 상당히 멀리 가버린 것을 짐작한다. 조금 쓸쓸해진다. 이곳에 와서 기댈만한 사람이라곤 을노뿐이였는데. 노인이 헛기침을 하며 생각에서 벗어나게 했다. 자례는 일어나 노인에게 다시한번 감사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돌아가 약소하지만 사례를 보내겠습니다.” “됐어. 벌써 부인에게 받았네.” 노인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놀랍다는 듯 말한다. “사실 난 자네를 처음 보았을때 어디 부유한 장사꾼의 아드인줄 알았지. 그런데 대단하구만. 자네 우가문의 사람이였던가. 이거 실례를 많이 범했네.” “존칭써요!” 소용이 꽥 소리를 지른다. 그말에 노인은 눈을 굴리며 딴소리를 한다. “알수 없는 것은 그 수려한 우광덕(마기장군의 한족명)의 취향은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과제란 말이야.” “뭐라구요!” “아직도 아이가 없으신가?” 버럭 화를 내던 소용이 그말에 축 늘어져버린다 작게 미소짓는 축제의 아침에서 작은 일상을 느낀다. 소용이 가져온 옷으로 갈아입고 돌아가려는데 의원이 다가와 꽤나 큰 꾸러미를 넘긴다. “이제 무엇입니까?” “가슴약. 연골약. 그리고 약간의 연고지.” “감사합니다.” 그것을 받아들자 노인은 묻는다. “그냥 먹을 생각인가?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내가 조제한 약을 먹어볼생각인가?” “그렇습니다.” “어째서?” “이유를 말하자면 한도끝도 없겠지만 그냥 노인을 믿고 싶습니다.” 그말에 노인은 자례의 눈을 빤히 바라본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며 웃는다. “거참 아름다운 눈을 가진 공자구만. 눈싸움에 지긴 처음이네.” “죄송합니다.” “아냐아냐. 내가 눈을 바라보려고 한것이니 자네의 잘못이 아니지.” 잠시 노인은 망설이다가 조용히 말한다. “나는 도성 동북청(관청)의 약사네.” “...” “청사의 약사는 의원과는 다르지. 무슨 말인지 알겠는가?” “사약을 만드시는 분이시군요.” “그래. 나는 독을 만들어 사람을 죽이는 살인자이지. 그래도 그약을 가져가겠는가?” “예.” 짐을 들고는 자례가 노인을 지나친다. 노인은 다시한번 생각하라는 눈짓을 하지만 그냥 웃는다. “저는 죄를 지은 것이 없으니 노인의 약을 먹어도 죽지 않을겁니다.” “기다리게.” “...?” 노인은 자례의 짐을 푸른다. 그리고 한짐을 덜어낸다. “이건 두고 가게.” “알겠습니다.” “...왜 내가 이것을 덜어냈는지 묻지 않지?” “덜어낼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허.” 알수 없다며 한탄을 하던 노인은 바로 껄껄웃는다. 즐거운 듯 크게 웃고는 다시 그짐을 자례에게 떠민다. “난생 처음이로군! 그래. 나는 살인자가 아닌 약사라네. 그러니까 내 약을 먹어도 죽지 않지.” “당연한 것이 아닙니까.” “하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네.” 쓸쓸하게 내뱉은 말에 스스로 놀라 입을 막고는 노인은 밝게 이야기한다. “실은 그 약이 가슴약이야. 그런데 거기에 노박이라는 약초가 원래 들어가야 하는 양보다 두배정도 더 들어가있네.” “노박?” “독을 해소하는 것이지. 왜 약을 먹으면 졸립고 나른하지 않는가? 그게 노박이야.” “아아.” “잘못쓰면 독이 되는 것이지만 자네의, 그 불한당이 담배를 피고 있었지 않은가? 아마도 곧 천식같은 조짐이 보일꺼야. 그때 치료하려고 하면 가슴병이 심해질것이 뻔하지 않은가. 그래서 미리 넣어두었네. “그렇다면 졸립거나 피곤하게 됩니까?” “처음 일주일간은 그럴꺼야. 일주일 분량만 두배를 넣었거든. 그냥 누워서 한동안 지내라고.” 그말에 자례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에 오르자 노인은 손을 흔들며 배웅한다. “나는 차씨네. 동북청의 차의원이라고 하면 모두들 알지!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달려오게!” “감사했습니다!” 노인에게서 멀어지자 소용이 자례에게 물었다. “의원이 공자가 불한당에게 걸려서 한동안 몸조심해야 한다고 하던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것지요?” “아아...그다지 신경쓰실일은 아닙니다. 그보다 소용부인. 제가 한 아이를 데리고와 키워도 되겠습니까?” “예?” 난데없는 자례의 말에 소용은 당황한 듯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한다. “어디의 아이인가요? 근본은 있겠죠?” “아뇨. 북문의 떠도는 난민같았습니다.” “절대로 안됩니다!” 고개를 힘껏저으며 소용이 거부했다. “근본도 없고 배우지도 못한 아이를 기르시다뇨! 그런 것은 절대로 안됩니다!” “하지만...제가 그 아이에게 큰 빛을 지고 말았습니다.” 자세한 내막은 이야기 하지 않았다. 이야기의 전말을 다 해주기에는 소용은 여린 마음을 지닌 여인이였다. 소용은 빚을 졌다는 말에 한숨을 쉬고는 입을 가리며 생각을 하다가 역시 고개를 저었다. “생각을 더 해보겠지만 역시 공자 저는 반대입니다. 빚을 지었다고 하시니 소용이 적당한 댓가를 치루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양육한다는 인연을 맺기에는 부적절합니다.” “....” “양육은 신성한 것입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인간과 인간사이의 특별한 인연인것입니다. 비록 그것이 자신의 품에서 나오지 않았더라도 양육을 한다는 그 사실은 인연과 인연. 혼인보다 더한 책임과 서로의 미래가 묶이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단순한 동정심은 절대로 안되는 말씀이지요.” “...그렇군요.” “제가 너무 냉정하다고 여기시지 마십시오. 한겨울, 농부가 뱀을 동정해 가슴에 넣어살려냈더니 뱀이 농부를 물어죽인다는 이야기를 아시지 않습니까?” 그말에 자례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용부인께서 절 깨우쳐주십니다. 그 박학다식함에 또 한번 놀라고 말았습니다.” “어머나, 부끄러워요.” 소용을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외면한다. 자례는 그런소용부인을 바라보며 정말로 마기장군이 운이 좋은 사내라는 것을 느낀다. 하늘에서 내리는 인간 사이의 특별한 인연. 서로의 미래가 묶이고 책임을 지는 것. 단순한 동정심으로는 절대로 안되는 것? 자례는 눈을 내리깐다. 마른 손등위로 손가락으로 이어지는 뼈를 만지작거리면서 어제의 하얀 두건과 그 낯익은 눈동자를 떠올린다. 물론 아닐지도 몰랐다. 아니 아니라고 믿었다. 홀로 착각해 스스로 이리때속으로 굴러가 호되게 물리고 나온것이라 생각했다. 형님, 하늘에서 내리는 특별한 인연이라고 합니다. 서로의 미래를 묶고 책임까지 나누는 사이라고 합니다. 당신에게 저는 그런 존재라 믿고 기다려도 될까요? 당신에게 단순한 동정심과 책임감으로 맡겨진 아이가 아닌 하늘에서 내린 특별한 인연이라 생각한다면 분명히 다시 만났을때 또 한번 웃으며 그 옷자락에 매달릴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절 버리지 마세요. “하악...” 가슴이 꽉 막혀온다. 토혈로 인한 통증이 아닌 다른 고통이 한숨을 토해내게한다. -인간의 운명이란 어찌 이리 장난과 같아, 왜 하필 너와 이런 인연으로 만나게 되었는지 분통 터지는 일이 아닐수 없더구나.- 절 지켜주세요. -곱씹고 곱씹어 보아도 이리 악연일수는 없더라. 왜 하필 네가 내 아우이며 내가 네 형인지 너는 생각해 본적이 있느냐?-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마주잡고 이를 악문다. 눈가가 젖어오고 알수 없는 억울함에 목이 답답할정도로 매어온다. 깊게 숨을 들이쉰다. 소용의 매화향이 느껴진다. 아니요. 단한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습니다. 당연히 제 앞에 있는 사람은 당신이고 당신뒤에 따를 사람이 저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신이 내 형으로 태어나고 내가 당신의 동생으로 태어난 것이 우리가 원하지 않아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원하지 않더라도, 또는 당신이 원하지 않더라도, 절대로 깨어질 수 없고 순응해서 따라가야 하는 것이 지당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저는 당신을 단한번도 원망한적이 없었습니다.당신이 아무리 모질게 절 내치고 그 냉냉한 눈으로 절 탓하신다 한들, 원하던 원치 않던 쓰린 상처에 저 혼자 빈방에서 그것을 삭이며 울어도 그것을 빌미삼아 당신과 저의 인연을 단한번도 원망한적이 없었습니다. 그것이 저의 잘못입니까. 하지만 형님, 하늘에서 내리는 특별한 인연이라고 합니다. 서로의 미래를 묶고 책임까지 나누는 사이라고 합니다. 비록 당신이 그렇게 생각지 않더라도 제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분명, 언젠가, 가까운 시일에 만나는 그날, 예전처럼 저에게 손을 내밀어주기를 바라는 것이 저만의 욕심입니까. 그저, 손을 내밀어 그것을 잡고 당신이 내 앞에 서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조차 당신에게는 악연의 악몽이라고 하시는 겁니까? 그래도, 하늘에서 내리는 특별한 인연인데. 역시 내가 잘못알고 있는 것이겠지요. 당신은 지금 먼 곳에 계실겁니다. 분명 어제 절 보고 도망가버린 자는 당신이 아닌것입니다. 그러니까 저의 지금까지 모든 생각은 바보같은 짓입니다. 더할나위없이 어리석고 우둔한 아우의 투정에 불과한 것이지요. 분명 어제 절 보고 도망가버린 자는 당신이 아닙니다. 고개를 소용에게서 돌려 창밖을 바라본다. 고개를 숙이면 눈물이 흐를 것 같아 오만하게 턱을 들고 지나가는 주민들을 바라본다. 천천히 지나가는 사람들은 마차에 탄 부유층의 사람들에게 고개를 숙인다.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는다. "자례공? 무슨 일이 있으셨군요? 무슨 일이 있었던겁니까?" 아른하게 소용이 계속 물어온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문득 자신도 모르게 조용이 내뱉는 말에 스스로 가슴을 저리게 된다. "형을..." "예?' "형을 만났습니다." 땅을 치고 통곡하고 싶은 자신의 어리석음이지만 그래도 자신을 내친 형의 모짐 보다는 결국 단 한번도 못보았다는 것이 더욱 가슴을 저려서, 이것이 어쩌면 마지막 만남인 것 같아, 차마 부정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도, 형의 외면보다는 그 모습을 보았다는 것이 좋아서, 그렇게 대답하고 만다.마차의 흔들림에 검은 머리가 무심하게 흔들린다. 동백향이 머리끝에서 저 멀리 하늘까지 날아가버린다. 87 친첸은 처음보는 왕자들의 토론을 듣다가 문득 옆에 서있는 마고를 바라보았다. 피곤한 얼굴로 자신의 옆에 서 다른 왕자들을 바라보고 있다. “마고, 성을 나가서 토론이 끝날때까지 쉬고 와라.” “예?” “예전처럼 함부로 굴리다가는 너도 망가지겠군. 얼굴이 말이 아니야.” 피식 웃은 친첸은 더 이상의 말은 듣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 말에 마고는 고개를 숙이고 홀을 나섰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마고가 홀을 나가는 것을 보며 태진은 또한번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봐도 은근히 어디선가 본듯한 느낌이다. 자례는 소용이 자신을 흔드는 느낌에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가 자신을 보고 입을 달싹거리지만 도무지 소리가 들리지 않아 다시 눈을 감아버린다. 또 한번 몸을 흔드는 느낌이 나지만 눈이 떠지지 않는다. 일주일이니까. 일주일만 잠꾸러기로 지내면 되니까. 애써 먹고 싶지 않은 그 쓴약을 다시 머금으며 자신을 달랜 것이 삼일째다. 이제 사일만 더 참으면 된다. 소용은 걱정스럽게 두어번 더 꺠워보다가 포기했다. 약을 먹고 자고 약을 먹고 자고를 반복하는 아이의 몸이 처음으로 걱정이 되었고 또한 이런 식으로 잠만 자서 과연 내 놓으라하는 입관시험에 통과할수 있을지 너무도 걱정이 되어 잠을 이룰수가 없다. 입관시험은 이제 겨우 열흘정도 남았을뿐이였다. 물끄러미 길을 가던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한가한 길이라서 그런지 어린 아이들이 까르르 거리면서 이곳 저곳으로 뛰어가는 것을 잘 볼수 있었다. “어머나, 애야, 조심하거라.” “당신이야 말로 조심하는 것이 좋아. 저 아이들보다 당신 뱃속이 있는 아이가 장난꾸러기인걸.” 만삭의 한족 여인이 무거운 몸으로 앞으로 달려가는 자신의 다른 아이들을 불렀다. 남편으로 보이는 중년사내가 그 여인을 부축하며 웃었다. 축제를 보기 위해 도성 밖에 살고 있는 평범한 가족으로 보였다. “어머니, 제가 할께요.” 앞서간 어린아이들 보다는 조금 큰 아이가 다가와 여인을 대신해 어린 동생들을 불러모았다. 그 모습이 알수 없게 찡해진다. 고개를 돌리다가 복도의 끝에서 보이는 인영에 놀라 중얼거린다. “마고?” “잠시 돌아왔습니다.” 자휼은 일어나 생각지도 않았던 마고의 등장에 기뻐했다. 자신은 정안인이라 궁안으로 들어갈수 없었고 여관에 남아 남은 병사들의 인솔과 짐을 맡고 있었다. 마고는 친첸과 입성 다음날 입궁했다. 마고는 자신이 아마도 축제가 끝나는 날이나 그 다음날에야 돌아올수 있을거라 이야기 해주었다. 조금은 심심하게, 그리고 행여나 자신의 아이와 만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긴장감에 여관에서만 지낸지도 삼일, 생각지도 않았던 마고가 돌아온 것이였다. 마고는 몹시 피곤한 표정이였다. “잠시 전하께서 돌아가서 쉬고 오라 하셨습니다.” “그래? 안그래도 얼굴색이 안좋아.” “오래간만에 밤을 새어가며 전하를 지키니 이거 피곤하군요.” “...지금까지? 입궁부터 지금까지?!” “예.” 자휼은 혀를 찼다. 얼른 마고의 이마에 손을 얹어보니 역시나 뜨겁다. 그다지 건실한 놈도 아닌게 오일이 넘게 밤을 새어가며 신셩을 쓰니 당연하지. “어서 자는게 좋겠다.” “네시간 후에 전하의 대련시합이 있습니다. 그때까지는 돌아가야 합니다.” “잠시만이라도 그런 생각하지 말고 자는게 좋아!” 엄하게 말하는 자휼에게 약간은 놀란 눈을 보내던 마고는 빙긋 미소지었다. “다행입니다.그동안 많이 좋아지셨군요.” “응?” “...아닙니다.” 마고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자 자휼은 그 뒷모습을 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어찌보면 정말로 저렇게 무리하는 것이나 알 듯 모를 듯 하는 말을 흘리는 저 모습이 정말로 너무나 똑같다. 저 아이는 내아이와 정말 비슷해. 문득 확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몸을 돌려 마고의 방으로 뛰어들어간다. 역시나, 마고는 침대위에서 자고 있는 것이 아닌 탁자위에 서신들을 펼쳐 놓고 주인이 없는 기산성이 어떠한지에 대해 확인하고 있었다. 갑자기 무리하는 마고에게 화가 나 뚜벅 뚜벅 다가가 손을 잡아 의자에서 잡아 뺀다. 어리둥절 하는 마고를 침대위로 밀어넣고는 이불을 목까지 덥고서는 그 옆의 의자에 앉아 단호하게 말한다. “자라!” “수해...” “어찌 그렇게 똑 같은지 모르겠구나! 어서 자라! 무리하면 더 심해진다!” “...예?” “응?” “뭐가 심해집니까?” 그말에 자휼의 표정이 이그러진다. 잠시 입을 막고는 시선을 돌리던 자휼은 웃어넘겨버린다. 하지만 마고는 그 표정 너머의 대리만족을 본다. 조금은 씁쓸하지만, 그리고 분명히 가슴이 아릿하게 불편하지만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다. “하지만 자휼, 일단 기산성도 관리해야...” “네가 기른 성이니 믿고 지금은 너 자신을 돌보도록해.” “....예.” 마고는 그제야 편안히 침상에 몸을 푼다. 목을 피고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고는 자휼이 그곳에서 떠나려 하지 않는 것을 알고 묻는다. “안나가실겁니까?” “나가면...또 서신을 보겠지.” “후후...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그거야... 하지만 자휼은 쓰게 웃고 만다. “너라면 그럴 것 같다.” “그렇군요. 저도 그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자휼이 제가 잠들때까지 그곳에 앉아 있다면 그러지 못하겠군요.” “...지금 내가 여기 있어주길 바라는 것이냐?” “그럼 꼭 잠들때까지 있어달라 해야하는 겁니까?” “...그건 아니지.” “그럼 옆에 있어주겠지요?” 하지만 그 아이는 달랐지. 일어나는 날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내게 잠들때까지 옆에 있어달라는 말은 차마 꺼내지 못하던 아이였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라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였다. 하지만 그 것을 모르는 척,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은 바로 자신. 그리고 지금 그것을 후회하고 있는 자신도 보고 있다. “...옆에 있어주마.” 그말에 마고가 미소짓고는 자휼의 손을 잡는다. 곧 편하게 눈을 감아버리는 마고를 보며 잡힌 손이 무척이나 뜨겁다는 생각을한다. 열이 오르는 것이 아닌지. 걱정스럽게 이마를 짚어보고는 기다린다. 마고가 깊게 잠든 것 같자 버릇대로 일어나려다가 마고가 잡고 있는 손이 걸려 일어나다 멈춘다. 그리고 다시 앉아 마고를 바라보았다. 그래 곁에 있어주마. 원한다면 곁에 남아 주마. 흥얼 흥얼 정말로 오래간만에 노래가 나온다. 어린 아이를 품에 안고 토닥이며 열을 내릴때 마다 부르던 자장가다. 노래소리에 마고가 실눈을 뜨고 자휼을 본다. 그 노래가 좋은지 애써 눈을 깜밖이며 듣기위해 안간힘을 쓰다가 그대로 눈을 감고 잠이 든다. 잘자라 우리 아가. 검은 눈안으로 하늘속의 달이 들어가기 전에. 살며시 네 눈을 감아라. 잘자라 우리 아가. 하얀 소매로 풀숲의 귀뚜라미가 들어가기 전에. 포근히 네 날개를 접거라. 잘자라 우리 아가. 그립던 엄마를 만나거든 손을 흔들어주렴. 잘자라 우리 아가. 아침이 오면 창가의 햇님이 널 보기 위해 새 단장하고 기다릴터이니. 부디, 부디 꿈에서 꺠어다오. “...형도 너를 기다릴터이니...” 잦아들어가는 노래소리가 멈추어진다. 자휼은 고개를 숙여 손으로 얼굴을 감싸버린다. 어디선가 내 아이도 이런 보호를 받고 있겠지? 난곡에서 도성쪽으로 온것일까? 혹시 나를 따라 온것일까? 왜 한족의 옷을 입고 있었을까? 어째서 도성의 정안족과 함께 있지 않았던 거지? 혼자서 축제를 보러 나왔다는 것인가? 혼자 있는건가? 만약 내 아이가 어딘가 모르는 곳에서 홀로 어려움과 배고픔에 떨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지금 당장 미쳐버리고 말것이다. 괜찮아. 나에게 달려오던 아이는 그래도 괜찮아보였다. 한족의 옷을 입고 있던 것은 계명이 아닌 다른 사람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것이겠지. 누굴까. 한족일까? 한족 누구?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이 되풀이 될뿐 딱히 해결되는 궁금증은 없다. 안타까움에 입술을 꺠물며 혼란스런 머리를 식히려 노력한다. 문득 깊게 잠든 마고의 얼굴이 무척이나 편해보인다. 누군가 네 손을 잡고서는 이렇게 네가 잠들때까지 자장가를 물러주며 그 모습을 지켜주고 있는걸까. 참을수가 없다. 바보같고 이기적인줄 알지만 내 아이에게 누군가 이런 시선을 보내고 있다는 것이 너무도 참을수가 없다. 어째서 내가 그 자리에 있지 못하는 것일까. 어째서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일까. “어째서...” 자신에게 내려지는 이 운명이 이렇게 가혹한지 갑자기 못견딜 정도로 서럽다. 왜 사랑하면 안되는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을까. 행여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사랑이란 어린날의 내가 말한 어린 아이의 장난감타령일까. 그것과는 달라. 가슴이 지끈해져 오는 감각에 몸을 떨며 중얼거린다. 형제가 형제를 사랑하는 것과도 다르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과도 다르다. 친구가 친구를 사랑하는 것과도 다르다. -어째서 사람은 사랑해서는 안될 사람을 사랑하게 되나요? “...이젠 내가 묻고 싶구나.” 그렇다면 네가 대답을 해줄수 있을까? 너는 그래줄수 있을까? 사랑한다. 사랑하고 있단다. 어린 아기때부터 키어온 내 아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내 품에서만 잠들던 그 어린 아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저기 멀리 서 있는 남모르는 혈족을 사랑하는 것이다. 스치는 그 인연으로 만난 낯선 너를 사랑하는 것이다. 하지만 너에게는 나는 형제라는 인연으로 생긴 하나의 운명이겠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그저 그렇게 순응하는 운명이겠지. 연인으로써 안되는 인연이라면 형제로써 만이라도 이 인연을 지키고 싶다. 연인으로 너의 손을 잡지 못한다면 형으로써 그 손을 끌어주고 싶다. 언젠가 분명 내가 잡은 손을 누군가에게 넘기더라 하더라도, 지금 순간만은. 지금 바로 이순간만은. 그렇게 지금까지 버터왔다. 너에게 나의 욕망을 들키지 않고자 괴롭게 자신을 감싸안으면서 널 끌어왔다. 하지만 애야. 사랑한단다. 마고는 얼른 눈을떴다. 얼마나 잔것인지 방이 어두웠다. 벌떡 일어나다 누군가 고개를 침상에 두고 엎드려 자고 있는 것을 알고 깜짝놀라 움찔하다가 그것이 자휼인것을 알고 안도한다. 그가 깊이 잠든것을 알자 문득 그의 얼굴을 만저보고 싶다는 감정이 든다. 천천히 손을 가져가 머리를 살짝 쓸어올리며 깊게 잠든 그의 얼굴을 바라본다. 예전부터 알수 없었지만 마고는 자휼의 얼굴이 흉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것이 원래부터 그렇게 된것인듯 자연스럽게 보이는 것은 이상한걸까. 자휼이 자고 있는 모습이 참으로 평화스러워 보여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렇게 시간이 계속 흘러가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얼굴을 돌리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황성에는 이미 시합이 시작되었는지, 끝났는지, 아직 시작되지 않았는지 모른다. 하지만 분명 돌아가야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자신이 늦는다면 친첸이 불같이 화를 내며 자신을 칠것이다. 그런데 차마 발걸음이 때어지지 않는다. 이해할 수 없는 시간이 지나가고 있다. 88 씨익 웃는 아골타는 무슨 일인지 화려한 예복을 거절했다. 생각보다 간편한 복장의 옷을 고른다. 대신들보기가 꺼려져 화려한 포를 걸치긴 하였으나 약식의 옷에 비한다면야 매우 단순한 옷차림이였다. “검을.” “예?” 의관을 챙기는 관리가 매우 놀라 되물었지만 얼른 뒤로 물러났다. 장식검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해서 그것을 들고 바치치만 아골타는 흥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직접 황제를 호위하는 장군에게 다가가 그가 찬 검을 바라본다. 장군은 놀라면서도 망설인다. 그리고 바로 자신의 검을 풀어 황제에게 바친다. 황제는 그것을 뽑아 힘껏 휘두른다. 이미 노쇠한 그의 검에는 젊은 날의 강함과 유려함은 보이지 않지만 절대 권력자의 배경이 그 검에 무시무시함을 더한다. 황제는 그 검을 허리에 묶게 하고는 기대하고 있던 아들들의 시합을 보려 홀로 걸어나간다. “늦군.” 처음으로 초초하게 친첸이 홀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마고가 오지 않는다. 이런일은 처음이다. 단 한번도 마고는 늦는일이 없었다. 입술을 악물고는 홀을 노려본다. 그 놈때문이냐? 그런거냐? 청동잔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간다. 하얗게 질리는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표정이 점점 굳어져간다. 그것을 저 멀리의 레이첸과 태진이 보고 있었다. “친첸왕자가 아닌 듯 모르게 긴장하고 있나보군요.” “아니야.” 레이첸이 팔과 다리에 매어진 띠를 단단히 조이며 웃었다. “화를 내고 있는 거다. 저놈.” “...어떻게 장담하시는지요?” “그거야 내가 저러니까.” 굳어지는 태진의 표정에 레이첸이 피식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르렸다. “짐승은 짐승을 알아본다. 저놈 정말로 분노하고 있는것이다.” “형님!” 다급하게 태진이 레이첸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마주하는 눈빛에는 레이첸으로는 알아낼수 없는 두려움과 조초함이 보인다. 레이첸이 자신의 주먹을 태진에게 들어 보였다. 역시 마찬가지로 하얗게 질리고 부들부들 떨리는 손이 눈앞에 보인다. “나는 저놈이 내 앞에 있다는 사실이 싫어!” “...” 레이첸의 표정에 사슴을 죽이고 그 피를 즐기는 잔인함이 보여 잠시 물러난다. 치켜올라간 레이첸의 눈을 바라보며 태진은 몸을 움추린다. 가끔은 내가 이용하는 것이 아닌 이용당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때가 있지. 징이 울리고 마지막 날의 연회가 베풀어진다. 황제가 입장하고 모두들 머리를 조아린다. 황제는 기쁜 듯이 앉으라 손짓한다. “오늘 짐은 기대하고 있도다.” 그말에 바로 앉은 레이첸과 친첸이 서로를 바라본다. 그리고 미소짓는다. 지루한 연회의 첫막이 지나자 드디어 기다리던 둘의 ‘검무’를 가장한 시합이 시작된다. 호명당한 두 왕자는 앞으로 나간다. 레이첸은 여전히 딱딱하게 상대에 대한 반감을 깊이 나타내지만 친첸은 빙그래 웃음지으며 그를 마주본다. 징소리와 함께 황제에게 인사하고는 서로 칼을 뽑아든다. 진검은 아니다. 검의 날을 죽인 가검이다. 술과 화려한 장식이 달린 춤에 사용하는 의검이다. 하지만 서로를 노려보는 눈이 진지하여 가검이라는 사실을 잊게 만든다. 단상위에서 그들을 내려보는 아골타마저 매우 흥미있는 표정으로 턱을 괴고 응시한다. 그렇게 대치상태로 서로를 노려보며 긴장감을 더해간다. 계속되는 긴장과 서로에 대한 탐색이 계속되자 난데없이 친첸이 편안하게 자세를 세우며 몇가닥 내려진 앞머리를 뒤로 넘긴다. “언제까지 노려보고만 있을거요 형님?” “너야 말로 얌전한 척 하지 마라.” “연장자에 대한 나의 성의를 무시하시는구만.” 순식간에 몸을 낮춘 친첸은 빠르게 자신의 복부를 향해 검을 휘두른다. 지지 않고 막아 금속성의 소리가 홀에 짜랑짜랑하고 울려퍼진다. 어떠냐라고 물으려다가 자신을 밀어붙이는 힘에 놀라 발을 뒤로 뻗어 밀려가지 않기위해 버틴다. 하지만 이미 주륵 밀려간 몸은 대전의 기둥에 힘껏 부딪친다. 충격에 잠시 눈을 감았다 뜨니 친첸이 얼굴이 가까이 보인다. 그 날카로운 눈에 레이첸이 인상을 굳히지만 바로 히쭉 웃는 표정으로 변한 친첸이 묻는다. “괜찮으시오?” “이 자식, 장난하나?” 그제야 발동이 걸린 레이첸은 무섭게 친첸을 공격해 들어간다. 몇수정도는 칼을 맞서던 친첸은 얼마 가지 않아 슬슬 피해버린다. “왜 도망가냐?!” “형님 뭔가 착각하시는 것 같은데... 우린 지금 춤추는거요. 싸우는게 아니라니까. 이검으로 사람 안죽어요.” “어디 정말 안죽나 보자!” 버럭 화를 내며 덤비는 레이첸의 검은 강하고 힘차며 그것을 받아 돌리는 친첸의 검은 부드럽고 또 날카롭다. 아골타는 혀를 찼다. 아주 꼭 생긴대로 노는구만.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점점 둘의 검에 변화가 일어난다. 레이첸의 검이 날카로와 지고 친첸의 검이 강해진다. 아마도 레이첸이 친첸을 힘으로는 누룰수 없다는 것을 알아버린 것이겠지. 친첸은 레이첸의 검이 날카로와지자 강하게 대항하는 것이고. 늦어. 능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판단력이 늦어. 아골타는 친첸을 응시했다. 저 놈은 확실히 끝을 낼 능력은 레이첸보다 떨어지지만 판단력이 좋아. 약싹 빨라서 지지는 않을것이다. 결국 이싸움은 무승부다. 재미없다. 아골타는 손을 들어 둘을 때어놓았다. 씩씩거리며 떨어지는 레이첸과는 달리 친첸은 예의바르게 웃으며 떨어진다. 아골타는 들어가려는 둘을 세우고 말한다. “한판 더해볼까.” 그말에 레이첸의 표정은 좋다며 웃지만 친첸의 표정은 한순간에 굳어진다. 황제가 손을 들어 자신의 가도위(황제 직속 호위 장군)에게 그들에게 진검을 가져다 주라 명령한다. 그 말에 황제의 옆에서 조용히 앉아있기만 하던 친동생인 히우루가 놀라 작게 말한다. “무슨 짓입니까!” “괜찮다. 저 놈들 사이가 안좋은 것은 분명해서 날 죽이려고 함께 단상으로 뛰어 오르진 않을테니까. 한놈이 뛰어오면 다른 놈이 한놈을 막을것이다. 왜? 누가 단상으로 날아와 날 칠지 내기라도 하자는 것이냐?” “그게 아니라...!” “시끄럽다!” 황제의 날카로운 눈에 히우루는 입을 다문다. 태진은 깜짝 놀라 일어났다. 갑자기 황제가 그들에게 진검을 내린것이다. “저 말도 안되는...!” 주위를 두리번 거리자 자신만 놀란 것이 아닌지 모두가 술렁거린다. 하지만 감히 안된다고 말하는 이는 없다. 두 사람에게 건내어진 진검은 동시에 두 무사의 손에서 그 모습을 들어낸다. 카랑하고 맑은 음이 울리면서 등불의 빛을 새빨갛게 비친다. 친첸은 진검의 묵직함을 손으로 재어본 후 레이첸에게 묻는다. “형님, 정말로 날 도울 생각이 없소?” “내 대답은 변하지 않는다.” 비웃음이 어렸던 얼굴이 사늘해져버린다. 가검과는 다른 긴장감이 돌자 스스로 이해할수 없는 즐거움이 서로의 몸을 전율하게 만든다. “춤추기엔 무겁군요 형님.” “사내가 무슨 춤이냐?” 아까와는 다른 두 왕자의 무시무시한 긴장감에 보고 있던 구경꾼들은 걱정하면서도 색다른 호기심에 몸을 앞으로 내민다. 아골타는 손을 올라가는 순간 창캉하는 날카로운 검의 비명소리가 들리며 두 왕자가 서로의 치명타를 노리고 달려든다. 아까와는 전혀 다른 진지함과 빠른 판단력으로 친첸을 몰아세우는 레이첸에게 맞서 역시 아까와 전혀 다른 강한 힘을 과시한다. 둘은 막상 막하로 검을 튕긴다. 일합, 이합을 따질순간도 없이 쉬지도 않고 한번 맞 대면한 그들은 서로 떨어지지 않고 검을 휘두른다. 너무나 빠르고 신속한 움직임에 관리들은 입을 막고 뒤로 물러나고 장수들은 선망의 눈으로 다가선다. 큰 외침소리가 울리며 칼날을 울린 두 왕자가 서둘러 뒤로 물러난다. 고개를 든 레이첸의 왼쪽 목덜미에 가느다란 검의 흔적이 피를 흐르게 한다. 그것을 손가락으로 만지며 씨익 웃는 레이첸의 눈은 친첸을 떠오르게 하는 잔인함이 엿보여 태진은 눈을 찌프린다. 아직은 저 모습이 황제에게 들키면 안되는데. 친첸 역시 고개를 들고는 왼손으로 오른쪽 어깨를 잡는다. 터진 옷자락이 붉게 물들어간다. 항상 빙그래 웃음짓던 그 모습에 어느덧 레이첸 못지 않는 단순한 짐승과 같은 분노의 표정이 물들어간다. 친첸이 검을 왼손으로 고쳐들고 레이첸이 왼쪽 목덜미의 피를 손바닥으로 튕겨내며 다시 서로를 향해 돌진한다. 귀가 듣기 힘든 금속의 비명소리가 울리며 허공으로 두 검이 날아오른다. 두 무사는 일순간 날아오른 자신의 검을 바라보고는 상대를 노려본다. 그리고 동시에 검을 향해 뛰어오른다. 모두들 몸을 앞으로 내민다. 누가 검을 먼저 잡아 공격할 것인가? 레이첸은 아슬하게 떠있는 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팔을 뻗으면 닿을만한 곳에서 함께 뛰어오른 친첸이 보인다. 그리고 친첸이 검을 잡으려다가 손가락을 휘어서 자신의 검을 스스로 튕겨버리는 것까지 볼수 있다. 튕겨버린 검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고 그것을 느낀 순간 몸의 본능이 친첸과 같은 행동을 하게 만든다. 주인없이 허공에서 무딪친 두 검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날아간다. 황제의 정면으로. 챙캉! 가도위들이 그 소리를 듣고 놀라 검을 뽑는 그순간 황제의 화려한 옷자락이 사뿐하게 땅위로 내려앉는다. 어느새 허리에 찬 검을 뽑아든 황제가 단상에서 몸을 돌리며 두 검을 다시 내쳐버린다. 다시 자신들에게로 날아온 검은 두 사람이 원하던 원치않던 자신들이 황제를 시해할뻔했다는 사실마저 잊게 해버린다. 몸을 돌려 날라온 자신의 검을 돌려받은 왕자들은 다시한번 서로의 검을 향해 괴성을 지르며 달려간다. “아바마마!” 쩌렁쩌렁하게 홀을 울리는 사내의 목소리에 긴장해 있던 사람들은 화들짝 놀라 가슴을 쓸어내린다. 그 소리에 놀라 레이첸과 친첸 역시 검을 거두며 물러난다. 황제 역시 검을 다시 허리에 찔러놓고서는 몸을 돌려 소리를 친 아들을 바라본다. 빠른 걸음으로 체이첸이 레이첸과 친첸에게 다가가 그들의 피묻은 검을 빼앗는다. 둘다 검을 좀처럼 내놓으려 하지 않자 화난 체이첸은 좀더 가까이에 있는 레이첸의 뺨을 힘껏 때린다. 짝 하는 소리가 울리자 홀에 모인 모든 사람이 몸을 움찔한다. 레이첸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체이첸을 바라본다. 하지만 여지 없이 체이첸은 레이첸의 검을 억지로 빼앗고는 친첸에게 손을 내민다. 레이첸이 맞는 것을 봐서 그런지 친첸은 칼날까지 돌려 순순히 검을 내준다. 그 모습에 황제는 눈살을 찌푸리며 자신들의 가도위들에게 눈짓한다. 가도위들이 단상으로 내려가 얼른 손을 내민다. 다가온 아골타의 가도위에게 검을 넘기며 체이첸이 단상 아래로 가까이 다가가 앉는다. 인상을 구긴 황제는 등을 돌리며 뒷짐을 진다. 하지만 체이첸은 상관하지 않는다. “무슨 짓이십니까, 보십시오. 정말로 서로를 죽이려 하고있지 않습니까!” “그냥 여흥이다.” “아무리 여흥이라지만 해서는 안될 일이 있는 것이 아닌지요? 형제가 서로를 죽이게 하시려는 겁니까? 당신 자식들이 당신 앞에서 저런 짓을 하게 하시다니요!” “황자는 물러가라!.” 아골타의 호통에 아무리 체이첸이라지만 고개를 숙인다. 황제가 뒤를 돌아 휘장 안으로 사라진다. 그가 완전히 사라지자 체이첸은 한숨을 쉬었다. 이해 못할 일이 근간에 많이 일어나고 있는 듯해 걱정스럽다. 황제가 나간 홀에서 퇴정을 말할수 있는 자는 자신이라는 것을 기억하고는 일어난다. 목과 팔에 피를 흘리며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 두 형제를 보고 한숨을 쉰 체이첸은 레이첸과 친첸에게 각기 서로 떨어지라 손짓한다. 떨어지지 않으려는 레이첸에게 눈을 부릅떠보인다. 마지못해 레이첸이 씩씩거리며 홀을 나가자 체이첸은 퇴정을 선언했다. 밤의 연회가 끝난것이다. 89 레이첸이 눈을 올리며 등을 돌렸다. 태진이 한숨을 내쉬고는 그를 다독였다. “형님. 그 좋아하는 2왕자에게 한대 맞은 걸로 그렇게 화를 내시는 것은 또 무엇입니까?” “시끄럽다!” 그말에 태진이 탁자에 앉아 조용히 목을 쓰다듬었다. 나로써는 아무래도 좋다. 그가 2왕자에게 반감을 가진다면 일이 쉬워질지도 모르지. “아, 일진 한번 꼬이는구만. 쌓이는게 너무 많아.” “뭐가?” “몰라도 된다. 그 보다 그 뭐냐, 나갈것이면 어서 가버리자.” “예. 준비하고 있습니다.” 레이첸이 귀찮다는 듯 차도 안탄 뜨거운 물을 들이켰다. “그런데 말이야.” “예.” “왜 체이첸 형님이 날 따라오지 않고 친첸의 뒤를 따라간걸까?” 태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레이첸은 가만히 정면에 있는 기둥을 노려보며 생각에 잠겼다. “상처를 치료하고 나가시게.” “은혜가 하해와 같지만 아우는 그만 나가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상처를 벌릴까 조심조심 붕대를 감는 의원의 손이 짜증나는지 친첸이 의원을 확 밀쳐버린다. 스스로 입과 한손을 이용해 엉성하지만 빠르게 묶고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난다. 앞에 앉은 체이첸이 일어나자 고개를 저어 거절한다. “아기도 아니니 성문을 나가는 것 쯤은 혼자합니다.” “여기 좀더 있게. 팔의 상처도 그렇고 무엇보다 황궁에 입궁한 자가 퇴궁의 절차를 받지 않고 간다는 것은..” “참으로 군주이시군요. 2왕자께서는.” 내민손을 촥소리나도록 내치며 친첸이 비아냥거렸다. “그 군자의 덕이란 어찌 어린 아우가 홀홀 단신 성문으로 내칠때는 그 손한번 내밀어주지 못한단 말입니까?” “친첸...!” “섭문(攝們무리를 지키는자:친첸의 호명)공이라 부르시오! 경락공!(京洛:황성의 강: 체이첸의 호명)” “같은 어머니를 지닌 형제가 어째서 호명을 부른단 말이던가!” “같은 어미가 날 지킨 것이 아니요!” 화려한 금발이 신경질적으로 휘어진다. “내가 아직 살아있는 것은 나의 지나친 욕심과 하늘이 울고갈 운이요!” “...친첸!” “섭문공이라 부르시오. 경락공.” 쌀쌀맞은 눈으로 방문으로 걸어가며 친첸이 내뱉는다. 그 무례함에 체이첸의 가신들이 화를내며 그를 따라 간다. 하지만 체이첸이 얼른 손을 들어 걸음을 멈추게 한다. 문을 열기 전 친첸이 갑자기 낮게 웃으며 중얼거린다. “또 하나 있지.” “...” “닷푼에 산 똥개가 날 어지간이 살렸지.” “...좀더 머물다 가거라 친첸.” “웃기지 마시오. 경락공.” “화가 미칠것이다.” “알고 있소.” 시종들이 문을 열자 뒤도 안돌아보고 나가버린다. 옅은 갈색의 머리카락은 뻣뻣하다. 정말로 비슷한 색이네. 마고는 문득 자신의 머리카락이 자휼의 그것과 너무도 비슷한 색이라는 것에 놀란다. 정말로 똑같을 정도다. 머리카락 때문에 반괴라 생각했다. 그래서 다가갈 용기가 났던 것이다. 처음 보았을 때, 그가 정안인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해할수 없지만 그가 정안인이라는 것을 바로 알수 있었다. 머리로가 아닌 그를 본 순간 그가 정안인이라는 것이 강하게 다가와 잠시 멈칫했다. 나는 반괴다. 혈족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다정 다감한 정안족이였지만 타민족의 혼혈에게는 가차없었다. 이름모를 거지를 키울망정 자신이 낳은 반괴는 죽여버린다는 민족. 분명 상처도 많이 받았다. 쓰렸고 아팠다. 그 어딘가에도 속하지 못하는 더러운 피를 가진 자신으로써 그들을 원망하고 미워했다. 그리고 사랑했으며 동경했다. 하지만 어느 민족도 그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당신만은...” 어째서 날 반괴로 보지 않는것인지요? 어쨰서 날 보고 웃을수 있고 내 손을 아무렇지 않게 잡을수 있는 것인지. 난생 처음으로 잡다한 피가 흐르는 자신이 깨끗해보였고 오랜 여행에서 집으로 돌아온 피곤함을 느낄수 있었다. 쿵쿵. 등이 뻣뻣해지며 긴장한 것은 순간이였다. 바로 낮익은 사람이 올라오는 소리가 들린다. 자휼을 꺠우기도 전에 방문이 부셔지라 열린다. 그 소리에 자휼도 눈을 뜨고 일어난다. 역광에 얼굴이 보이지않지만 그 그림자만으로도 누군지 알아 마고가 일어나 말한다. “전하.” “...” 자휼이 일어나 옷을 털다 의아한 분위기를 느끼고 고개를 든다. 천천히 친첸이 불도 켜지지 않는 방으로 들어와 탁자에 앉는다. 의자가 당겨지는 소리와 허탈하게 앉는 소리가 들린다. 어둠사이로 피비린내를 느낀 마고는 황급하게 친첸에게 다가간다. “전하 다치셨...!” 쫘악하는 듣기 싫은 소리가 울린다. 잠시 귀를 울리는 그 소리에 자휼은 눈동자를 굴리다가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버리자 마고에게 달려가 끌어낸다. “무슨 짓이오! 자넨 괜찮나?” 마고역시 좀 당황스럽다는 표정이다. 손으로 입가에 흐르는 피를 만져보고는 이해할수 없다는 듯 자휼을 보고 어둠속의 친첸을 바라본다. 자휼이 터진 마고의 입술을 보고는 친첸에게 화를 낸다. “마고가 공을 지키느라 피곤한 것을 알고있지 않소! 그러기에 공이 마고를 이곳으로 보내 쉬게한것이고. 어째서 주인을 지키느라 애를 쓴 가신에게 이리 모질게 군단 말이오!” “비켜주세요. 수해.” 마고가 수해를 밀며 친첸에게 다가간다. 똑바로 자신의 주인을 바라본다. 또 한번 귀를 울리는 소리가 울린다. 자휼이 놀라 다시 다가가자 마고가 고개를 흔든다.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기가막히군.” 처음으로 친첸이 마고의 말에 대답한다. 화가난 목소리가 아니다. 평상시 약간은 장난끼 어린 사내의 목소리. 그것이 사람을 더욱 불안하게 만든다. 입에 흐르는 피를 훔치며 마고가 말한다. “늦을 생각은 아니였습니다. 단지 피로가 쌓여 일어나지 못했던 것 뿐입니다.” “거짓말은 여전히 서투르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래...?” 또 한번 친첸이 팔을 쳐든다. 하지만 자휼이 좀더 빨랐다. 마고를 뒤로 잡아 당기며 내리치는 팔을 잡는다. “이 무슨 투정이요 왕자!” “이 팔놓아라!” “그럼 왕자도 물러나시오!” 자휼이 힘껏 친첸을 밀어버린다. 분노하고 있어서인지 자휼의 힘이 예상보다 센것이였는지 뒤로 물러나며 벽에 등을 부딪친다. 쿵소리에 마고가 놀란 얼굴로 자휼을 밀치며 친첸에게 다가가 일으킨다. “괜찮으십니까?” “...안괜찮다.” 친첸이 피식웃으며 허리에 찬 칼을 뽑는다. 카랑거리는 소리에 자휼이 놀라 마고의 어꺠를 잡아 일으켜 자신의 뒤로 숨긴다. 그 모습에 친첸이 크게 웃었다. “아니, 꼴같지 않는 그것은 무엇인가?!” “칼을 내려놓으시오. 왕자.” “이런 이런. 잘 생각하시게 수해.” 친첸이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놈은 정안족이 아니네. 여진도 아니고 거란도 아니야. 그렇다고 한족도 아니지. 그런데도 내 앞을 막을 생각인가?” “그런 말은 그만 두시오!” “비키지 않는다면 벤다.” 딱 잘라지는 말로 친첸이 말하며 칼을 자휼에게 겨누었다. “정안인들은 마고를 반괴라고 부르지. 반괴, 배신으로 떨친 쓰레기란 말이 아니던가? 그것은 자네들이 그를 혈족이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닌가!” “시끄럽소!‘ “아니라면 네 대리만족을 위해 마고를 이용하는 셈인가?!” “...!” 친첸은 내가 마고를 통해 누구를 보는지 알고 있어. 마고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느낀다. 날카롭지만 눈동자만은 내 아이처럼 까만 밤하늘이라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그 눈이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을 느낀다.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그 시선이 부담스럽다. “난 비킬수 없소!” “괴씸한!” “수해, 비켜요!” “미친...! 둘다 죽여보시오!” “저놈은 너의 혈족이 아니다! 네놈들이 그리 혐오하는 배신의 조각이 아닌가!” “시끄럿!” 비명처럼 자휼이 소리쳐 친첸을 물러서게 만들었다. 등골이 오싹한 마고의 시선이 더 이상 두렵지 않다. 친첸이 자신을 노려보는 눈길이 뜨겁지도 않다. 또박또박 말을 잇는다. “그는 우리네 혈족이야! 혈족의 아이는 모두 내 아이다! 내 아이에게 손대지 마랏!” ...어째서? 자휼의 말에 마고도 친첸도 이해할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잠시동안이지만 지독한 적막감이 셋을 싸고돈다. 한참이 지나서야 친첸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크게 웃는다. “네 아이? 하하...하하하! 네 아이라고? 하하하!” “그를 괴롭히지 마시오. 왕자. 반괴라고 부르지 마시오!” “반괴는 반괴다! 네 아이라? 네 혈족이라 이거지?” 겨우 웃음을 멈추며 친첸이 자휼을 비아냥 거렸다. 마고의 앞을 막아서서 움직이지 않겠다는 단호한 어깨 넘어로 어이없는 마고의 얼굴을 본다. 아니, 어이없는 것이 아니다. 놀란것이다. 그 날카롭던 매눈안의 눈동자가, 그 어여뻤던 어미를 닮은 검은 눈동자가 흔들린다. 놀라움, 황당함을 넘어선다. 기쁨인가. 가슴속으로 울컥 쏟는 불쾌감에 표정이 굳어진다. 지금 내가 앞에 있는데 네놈이 저 반병신을 보고 있는것이냐? 등을 돌려 올라오는 분노를 참던 친첸은 검을 자휼의 앞에 던진다. 자휼이 검을 밟아 움직이지 못하게 하지만 친첸은 그 모습을 보고 웃는다. “마고. 저 검을 주워라.” “...예.” 자휼이 제지하려고 하지만 마고가 고개를 젓는다. 줍지마라. 하지만 이 이상 전하를 화나게 한다면 둘다 위험합니다. 마고가 천천히 하지만 분명하게 검을 줍는다. 역시나, 여전히, 아무런 표정을 짓지 않는다. 그 표정이 마음에 드는지 친첸이 조금은 풀어진 얼굴로 명령한다. “죽여.”“...누구를?” “저놈이나 나다. 네가 죽이고 싶은 사람. 우리 둘중 한명을 죽인다면 넌 자유다. 널 풀어주겠다. 영원히. 두 번 다시 없는 기회다. 잘 생각해라.” “왕자!” 카랑! 칼소리에 놀란 자휼이 마고를 돌아보았다. 어둠의 방안에서 홀로 빛나는 칼을 쥐고 마고는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고 서있었다. 놀란 자휼이 마고에게 손을 내밀어 칼을 달라는 눈을 한다. 하지만 마고는 그런 자휼을 한번 보고는 다시 칼을 노려본다. “있지 않은가? 네 놈이 분명 죽이고 싶은 놈이 있을 것이란 말이다. 오늘 내가 기분이 좋기 때문에 허락해 주는 것이다. 그래. 누가 죽이고 싶은가?” “...왕자!” “시끄럽다! 정안인!” 소맷자락을 펄럭이며 신경질을 낸 친첸이 다시 마고를 본다. “어떠냐. 널 이렇게 만든 날 죽이고 싶지 않으냐?” “마고, 칼을 이리다오!” “아니라면 널 반괴라 부르며 네 어미를 죽음까지 몰아간 저 정안족이냐?” “...!” 자휼은 뒤로 물러났다. 단순한 말이였지만 친첸의 그 말에 마고가 어떤 과거를 가지고 있는지 알 것 같아 전신에 소름이 끼쳤다. 반괴다. 반괴. 타민족보다 혐오하는 반괴야. 배신으로 가득한 쓰레기. “...마고?” “...나는.” 칼을 든 마고가 검을 세우며 친첸에게 몸을 돌렸다. 칼을 세워 그를 노려본다. “호오. 나냐?” “...” 칼을 들고 있는 손이 부들 부들 떨린다. 그 날카로운 검은 눈동자가 초조하게 떨린다. 친첸이 편하게 의자에 앉아 두팔을 벌린다. “죽여봐라. 그래 날 죽여봐!” 죽여봐라. 머릿속이 빙빙 울린다. 죽일수 있어. 나는 이 사람을 죽일수 있다. 이 사람은 내게서 많은 것을 앗아갔다. 좋아하지 않아. 이사람을 죽일수 있다. 죽이는 거야. 이사람을 죽이고 새로 시작하는 거다. 죽인다. 죽일수 있어. 이 사람을 떠나버리는 거다. 죽여버리자. 그래. 죽여. “왜 못죽이겠는가? 죽여봐라 마고! 죽여!” “...난!” 저자를 죽일수가 없어. 난 저자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하지만 그래도 죽일수 없어. 가슴이 쓰릴정도로 두근 거린다. 친첸이 어서 죽이라고 외치지만 이미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검을 든 손이 무거워지고 눈앞이 흐려진다. 순간 따뜻한 손이 올라와 자신의 검을 내린다. “그만해라.” 떨는 손을 잡으며 자휼이 마고를 마주보았다. “마고. 괴로워하지 마라. 그를 죽이지 않아도 된다.” “다시 생각해라. 수해.” “다시 생각할 것은 전하요.” 자휼이 피가 흐르는 마고의 입술을 훔쳐주며 말한다. “마고는 당신을 죽일수 없소. 마고에게 당신의 존재는...” “...?” “...!” 순간 머릿속이 비어오는 듯한 충격에 휩싸인다. 당신의 존재는 아이의 존재와 동일하오. 반괴로써 아무것도 없이 시작한 마고에게 당신이란 존재는 마고 자신의 삶을 인정하는 것이요. 당신은 그 아이의 전부요. 당신을 죽이는 것은 마고 스스로가 자신을 부정하는 셈이 된단 말이오. “다시 생각할 것은 수해 너다. 난 분명히 둘중 하나를 죽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너는 마고의 손에 죽을 아량이 있어 날 죽이려는 마고를 말리는 것이냐?” “...당신은...마고의...” “그만두십쇼. 전하. 저는 전하를 죽이지 못합니다. 하지만 수해도 죽이지 못합니다. 명령을 거두어주십쇼!” 마고가 충격을 받은 자휼의 앞을 막아서며 친첸에게 부탁한다. 하지만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당신은 마고의 전부야. 그러니 마고는 당신을 죽이지 못해. 아니 살리기 위해 애를 쓸 수밖에 없어. 당신은 마고 그 자신이야. -...왜 여기 있어요? 등을 돌린 마고의 어깨에서 피가 흐르는 것 같은 착시를 일으킨다. 친첸이 계명으로 겹쳐보인다. 그 빌어먹을 한족장군이 내 아이의 어깨를 베었다. 피를 흘리며 쓰러지려는 아이를 내가 받쳐 안았다. 놀라고 안타까운 얼굴로 내 아이가 내게 물었다. -...왜 여기 있어요? 그때는 이해 못했지. 그 아이가 날 속여 나만은 살리려고 한 그것이 괘씸해 저 멀리서 활을 겨누었다. 저 못난 한족장군에게 빼앗기려거든 차라리 내손으로 죽여버리리라! -싫습니다. 무슨 소리 하시는 겁니까! 제말을 이해 못하시는 군요! 우린 어차피 죽습니다! -우리가 아니지 않느냐! 그때 아이가 짓는 너무나 황당한 표정은 단순히 말이 막혀서라 생각했다. 울려고 하는 그 눈동자는 내게 어리광을 부리는 치기라 생각했다. 나는 내 아이의 전부야. 나는 내 아이가 짧은 삶을 걸고 만드는 또 하나의 분신이였던 것이다. 목래가 아니였어. 내 아이가 바라보고 있던 꿈은 내 미래였다. 나는 내 아이의 꿈이야. “...바보같이...어떻게 이렇게 바보같이...” 나는 항상 내 아이를 울리고만 마는구나. 정말 모질게도, 어떻게 이렇게 모질게 굴수만 있단 말이냐. 검을 들고 떠는 마고가 눈동자가 울것만 같다. 그 떨고 있는 눈동자가 어쩌면 그렇게 내 아이와 같단 말인가. “죽여라 마고. 저놈이 아니면 나다. 죽여!” “왕자.” 자휼이 친첸을 바라보았다. “부탁하오. 마고를 더 이상 괴롭히지 마시오. ” “잘난 군자놀이는 달갑지 않다!” “부탁이오!” “흥. 좋아. 그렇게 군자놀음이 하고 싶다면 말리지 않는다. 수해, 네가 대신해라.” “?” “네가 날 죽이던지 저놈을 죽이란 말이다!” “무슨...!” “왜? 내 아이의 곤경을 풀기 위해서라면 이정도의 댓가는 생각했었던 것이 아니더냐? 허울좋은 말에 그냥 넘어갈 것 같았더냐! 마고를 위하고 싶다면 네 놈이 죽여라! 날 죽이던지 마고를 죽이란 말이다!” “못하오!” “그렇다면 말뿐인 내 아이타령을 그만 두라! 어차피 사람이란 자신에게 피해가 안갈때만 정의로운 법이지. 막상 자신의 손에 피가 뭍는다면 모두 도망가는 것이다! 너도 다를바가 없다! 허울좋은 말 따위가 사람을 구하는 것은 아니다!” 입술을 깨물지만 어찌할수 없다. 마고는 혈족이다. 마고를 죽일수 없다. 그렇다고 친첸을 죽일수도 없다. 친첸은 마고의 전부다. 친첸을 죽이는 것은 마고를 죽이는 것보다 잔인하다. 스스로 자신을 부정하는 것과 타인에 의해 자신이 죽어가는 것중 뭐가 좋단 말인가? “...내가 죽지요.” 조용한 마고의 말에 오싹함을 느끼고 자휼이 고개를 돌린다. 검을 돌린 마고가 스스로 자조한다. 검을 돌려 목에 갖다대자 친첸과 자휼이 동시에 외친다. “안돼!” “안돼!” 검을 잡은 것은 친첸이였다. 맨손으로 검날을 잡은 친첸의 손에서 길게 붉은 길이 생겨 바닥으로 떨어진다. “웃기지 마라. 내가 허락하지 않는 이상 네놈은 죽을수도 없다!” “전 그 누구도 죽일수 없습니다.” “죽여라!” “그만 두시오 왕자!” 친첸을 밀친 자휼이 마고의 손을 잡았다. 검을 쥔 그 손을 꽉 잡아 자신에게 잡아 당긴다. 검끝으로 느껴지는 살이 베이지는 감각에 마고가 놀라 소리친다. “수해!” “이해한다. 지금은 내가 계명놈인거야.” “수해! 손을 놔요! 맙소사! 손을 놓으란 말이야!” 허리띠가 붉게 물들어 가는 자휼의 옷을 보며 마고가 미친 듯 소리친다. 고통 따위 느껴지지 않는다는 듯 자휼이 믿기지 않는 힘으로 검을 당겨 스스로의 몸에 찔려 넣는다. “결국 누군가 죽어야 저 왕자가 널 해하지 않는다면 내가 죽어주마!‘ “수해!” 짱! 하는 소리가 들리며 검날이 튕겨버린다. 둘다 뒤로 넘어진다. 꼴사납다는 듯 친첸이 검집을 들고 둘사이를 갈라놓는다. “웃기는군. 정말 웃기는 군. 그래. 죽을수도 있다 이거냐?” “...왕자.” 마고가 자휼에게 다가와 피가 흐르는 곳을 누른다. 그 모습에 친첸이 화를 낸다. “나가라 마고!” “하지만 전하, 피가...!” “나가라!” “나가있어. 마고.” 강경한 주인의 말에 갈팡질팡하는 마고를 밀어버린다. 울 것 같은 얼굴로 마고가 일어나 열린 방문으로 나가버린다. 자휼의 피가 흐르는 검을 들고 이리저리 비추어보던 친첸이 피식 웃는다. “그만두시오.” “뭘?” “마고는 이미 충분히 알아들었소. 이런 일을 벌이지 않아도 알아듣는 어른이란 알이오!” “뭘?” “왕자의 그 치졸한 소유욕은 꼴 사납소!” “치졸? 치졸이라. 네 놈에게는 그 치졸이 없나?” “...!” “기산성으로 돌아가면 수해장군을 북문을 지키는 수문장군으로 임명한다.” “그곳은 이미 마고가 지휘하고 있지 않소? 이렇게까지 해놓고 둘이 붙여 놓는 심뽀는 무엇이요!” “벌이란 호된것.” “뭐?” “기르는 개가 잘못하면 벌을 주는 것이 당연하지 않는가? 하지만 교미까지 막을 정도로 난 호된 주인은 아니지.” 친첸이 검집에 검을 넣고 방문으로 걸어간다. 잠시 친첸의 말을 생각하던 자휼이 사색이 된얼굴로 외친다. “그는 당신의 개 따위가 아니야!” “안타깝군. 새끼를 볼수 있다면 그야말로 잡종이 되는것인데 말이야.” 미친 듯 웃는 소리가 멀리 사라진다. 피가 나는 허리를 움켜 쥐고 자휼이 벽을 주먹으로 친다. -치졸? 치졸이라. 네 놈에게는 그 치졸이 없나? “빌어먹을...!” 없는 정도가 아니다. 마고는 내 아이를 닮았다. 그리고 자신은 친첸을 닮았다는 것을 느낀다. 두렵다. 90 몸을 추스르며 일어난 자례는 약간 멍한 상태로 눈을 가늘게 떴다. 소용이 옆에서 찬물을 적신 수건을 건내주자 그것으로 얼굴을 식힌다. “오늘은 몇일입니까?” “오늘이 바로 시험일입니다.” “...이런.” 한숨을 쉬고는 눈을 깜박인다. 일어나자 소용이 걱정스럽게 바라본다. 이미 그 옆에는 시험증과 입고 갈 옷이 준비된 상태였다. “제가 오래잤군요.” “어찌할까요?” “예?” “꼭 합격하셔야 한다면 낭군님께서 뒤를...” 소용이 말을 흐렸다. 뒤를 바주시겠다는 말인가. “괜찮습니다. 어차피 시작(詩作)시험이 아닙니까.” “...그래도.”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소용의 도움으로 머리를 올린다. 머리를 올리는 도중에 작년에 나왔다던 시문을 읽는다. 문득 자꾸만 머리 위가 무거워 지는 느낌에 묻는다. “...머리를 꼭 올려야 합니까? 한족이라해서 머리를 꼭 올리는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지만 공은 머리라도 안올리면 너무 티가 나는걸요. 게다가 이런 중요한 일에 머리를 푼다는 것은 한족에겐 어림없는 일이지요.” “불편합니다” “곧 익숙해 지실겁니다.” 올려진 머리가 무겁게 생각되어 시문이 생각날 것 같지가 않다. 하지만 사실은 그것이 이유가 아닌 것을 잘 알고있다. 몸이 불편한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생각만했었던 입궁이라는 것이 현실로 다가와 무섭다.정말로 한족의 옷을 입고 궁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실감나게 다가와 두려운 것이다. 소용의 배웅을 받으며 마차를 타고 시험장으로 간다. 축제가 끝난지 사흘정도 거리는 이제 축제의 인파보다는 도성에서 입관시험을 보기 위한 선비들로 들어찬다. 시문을 배정받으면 시험관(館)으로 들어간다. 마치 바둑판처럼 생긴 한평 남짓한 조그만 토방들이 나열된 시험장. 삼면이 꽉 막히고 들어오는 유일한 입구는 발이 쳐진다. 대낮에도 암흑이 내려 불을 켜야 하는 장소. 평소에는 쓰지 않는 장소라 쾌쾌한 냄새마저 지독하다. “...답답해.” 받은 시문의 주제를 읽어보며 중얼거린다. 답답해. 어서 쓰고 나가야지. 레이첸은 붕대를 갈았다. 태진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의원이 붕대를 갈고 나가자 그가 탁자를 손바닥으로 쳤다. “이런 제기랄!” “진정하십시오.” “진정하게 되었는가!” “너무 과민한 반응이십니다.” “뭐? 내가?” 레이첸은 천장을 보고 웃었다. 그리고 매서운 눈으로 태진를 노려보았다. “하마터면 황제를 죽일뻔했다. 친첸놈은 그것을 예상하고 있었어! 그놈, 날 이용해 황제를 죽이려고 한거야!” “하지만 황제께서는 아직 자신이 건제함을 보여주신 것 같더군요. 그러면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히려 친첸에게 협박을 한 셈이 되었으니까요.” 태진이 침착하게 말했다. 그말에 맥이 풀려버린 레이첸은 힘빠진다는 표정으로 의자에 앉았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진정된 레이첸이 묻는다. “이사준비는 어떻게 되었나?” “...생각중입니다. 마땅한데가 없군요.” 그말에 둘다 다시 입을 다물어 버린다. 문득 레이첸은 화선부인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그렇게 강제로 범한 이후로 다시 만나지 못했다. 축제의 기간이라 바빠서 그랬던 것도 있지만 사실 다시 만나기가 좀 껄끄러웠다. “새 장가야. 새 장가. 그 방법밖에 없어.” “?” 레이첸의 중얼거림에 태진이 눈살을 찌푸렸지만 곧 그도 다른 생각에 빠져 고개를 숙였다. 악운은 조심스럽게 체이첸의 눈치를 살폈다. 오늘따라 이상하다. 책을 읽으면서도 눈동자가 자꾸만 돌아가는 것이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듯 하다. 문제는 그것을 나보라는 듯 한숨을 쉬고 있는 것이다. 결국 못이기는 척 말을 건다. “어디, 불편하신데라도 있으십니까?” “악운.” 체이첸은 잘되었다는 듯 악운을 향해 몸을 돌렸다. “어느정도 자네도 황궁의 정세를 읽었다고 생각하고 있다네.” “...” “자네가 볼때는 과연 누가 황자의 자리에 앉을것으로 보이는가?” “...” 딱히 이렇다 저렇다고 단정짓기 어려운 물음이다. 체이첸이 황자의 자리에 오른다고 하기에는 조금 성급하다 싶었다. 그렇다고 다른 왕자들이 황자의 자리에 오를것이라 말하는 것 또한 바늘방석에 스스로 앉는 꼴이 아닌가. “아직은 말할 시기가 아니라고 봅니다.” “...흠. 그런가.” 스스로 생각해도 잘말했다는 생각이 들어 속으로 환호한다. 체이첸은 악운의 뒤를 돌며 조용히 말한다. “내가 볼때는 나는 아닌가 싶네. 아마도 자네역시 그러하겠지.” “...” “내가 볼때는 넷째놈이 아무래도 걸려. 대전이 홀에서 검무가 있었다네. 검무를 가장한 실력싸움이지. 예상했던대로 셋째와 다섯째의 싸움이 관건이였네. 자네는 누가 이겼을 것 같은가?” “...글쎄요. 제 생각에는 딱히 누가 이겼다고 말할수 없을것같군요.” “맞아. 무승부였어. 아니 좀더 자세히 말하면 승패가 나뉘기 전에 내가 갈라놓았네. 내 의중을 자네라면 짐작하겠는가?” “승자가 나는 것이 꺼려지셨습니까?” “그럴지도.” 체이첸은 가만히 한곳을 응시하다 일어났다. 조금은 밝아진 얼굴로 말한다. “오늘은 입관시험이 있는 날이지. 나는 이 날이면 신입관리들의 시험지를 살펴보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네.” “그러십니까.” “가끔 꽤나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황제의 눈을 피해 내 밑으로 데리고 오기도 하지. 자네처럼 말이야.” 악운이 빙긋 웃었지만 속은 쓰렸다. 나는 끌려왔다니까. 그리고 돌아가지도 못하고 있단 말이다. 체이첸이 나가자 악운은 주먹으로 창틀을 쳤다. 여기서 누가 날 좀 꺼내다오. 방을 나가자 조금 떨어진 복도에서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고는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걸어잠그기도 전에 탕소리가 나며 문이 밀쳐진다. “수해.” “황궁에서 일이 아직도 풀리지 않은 모양이구나. 네가 고생하는 것 같다.” “원래 저러시다가 곧 풀리는 분입니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마고의 말에 자휼은 피식 웃었다. “나가서 말이라도 탈까?” “....아뇨. 저는 할일이...” “끝날때까지 기다리마.” “너무 늦을 것 같으니...” “어차피 네가 일을 다해서 나는 일도 없다. 기다리지.” “....수해. 전...” “어차피 북문쪽이니 친첸은 우리를 못본다.” 그말에 망설이던 마고가 힘들게 고개를 끄덕인다. 어깨를 툭쳐주고 먼저 나와 할일없이 빈둥거리는 흑염을 끌고 나온다. 오래간만의 달리기에 흑염은 몸을 부르르 털며 준비한다. 마고가 새하얀 백마를 끌고 나와 자휼의 옆에 선다. “금방 돌아와야 합니다.” “걱정마라. 친첸의 눈에 들어가기 전에 멀리 나가버릴것이니. 너만 잘 따라오면 된다.” 바람처럼 북문을 나간 두 장수들이 전속력으로 말을 내달린다. 산이 많은 곳이라 말등위는 부드럽지 못하고 난폭하다. 얼마 뛰지 않아서 산속으로 통하는 길에 들어서고 이리저리 산을 오르자 기산성이 내려다 보인다. 부산스러운 성내의 모습을 감상하던 마고는 하늘을 보고 있는 자휼을 보았다. “무엇을보고 계시죠?” “하늘. 구름이 봄을 싣고서 이리로 오는 것을 보고있었지.” 그 말에 마고 역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양떼와 같은 구름이 부산스럽게 밀려오고 있다. “이제 곧 3월이니 봄이지요.” “날씨가 많이 따뜻해지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다행이야.” “...뭐가 다행이라는 것이죠?” “아무것도 아니다.” 봄을 따라 오고 있는 양떼 구름을 올려다 본다. 봄이 오고 나비가 날아다닌다. 꽃이 필것이고 사람들은 묵은 겨울의 내음을 집밖으로 털어낼 것이다 그리고 어디선가 있을 내 아이가 밖으로 한발 내딛겠지. 이젠 더 이상 추운 겨울바람에 떨고 있을것이란 생각을 지울수 있겠지. 이젠 더 이상 내 아이의 생각을 지우고 내가 할수 있는 일에 전념할수 있겠지. “수해?” “너 혹시 날 따라 이곳을 떠날 생각은 없느냐?” “예?” 자휼의 말에 마고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진다. “...저는...” “너에게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이곳에서의 너는, 차라리 날 따라 유량하는 피곤함이 더 행복해 보여서이다. 원한다면 멀리 있는 혈족들의 터전으로 섞여들어갈수 있도록 내 먼 인척으로써 보호해 줄것이다.” “...” “싫으냐?” “....죄송합니다.” 거절의 말에 자휼이 가볍게 웃는다. “그럴줄 알았다.” “정말 죄송합니다.” “됐다.” “수해는...이곳을 떠날 생각이시군요?” 마고가 안타깝게 묻자 자휼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래. 하지만 방금 생각했는데 나 친첸왕자의 장수가 되기로 결정헀다.” “정말로!?” “너만 저 왕자에게 두고가기가 걱정스럽다.” “수해...” “반괴던 정통이건 역시 너는 나에게 혈족의 일부이다. 그러니 내가 남는다는 것은 언젠가 널 이곳에서 데리고 나가기 위함임을 잊지 말아라.” 자휼의 날카로운 눈빛에 마고가 쓴웃음을 짓는다. 그 웃음을 따라 내 아이를 잊고 새로운 길로 들어가려 한다. 눈 앞의 이 아이는 지킬수 있을까. 아니 지키고 말겠다. 친첸은 그를 수하나 친구도 아닌 애완동물로 생각하는 모습이였다. 자휼은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그 이유는 마고의 처지가 아닌, 자신도 내 아이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사실때문이였다. 내가 내 아이에게 한 행동은 친첸의 그것과 다를바가 없어. 잘못을 하면 화를 내며 크게 혼낸다. 버릇없는 개를 혼내듯 그렇게. 자신에게 매달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느낀다. 기른 개가 자신에게 충성하는 듯이. 다른 누구에게도 줄수 없는 것이다. 개가 주인을 보호하고 타인에게 적개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느끼는 것 처럼. 하지만 내 아이도, 마고도 애완동물이 아니다. 그러나 바보같은 자신도 친첸과 다를바가 없는 일을 했던 것이다. 내 아이가, 검을 들고 떨던 마고처럼 상처받고 눈물 흘렸을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려온다. “수해, 사실은 이곳말고 갈곳이 있는 것이지요?” “뭐?” “날 보는 수해의 눈은 집에 가고 싶다라고 말하고 있으니까요.” “돌아갈 곳은 예전에 없어지고 말았지.” 웃으며 고개를 돌린다. 하지만 수해. 당신의 눈은 그렇지가 않은걸요. 돌아가고 싶다. 단 한번만 돌아가고 싶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내 눈에 무엇이 비치는 것이길래 당신은 날 보며 그런 눈을 하는 것일까요. “이젠 돌아갑시다.” 자휼이 고개를 끄덕이자 마고가 먼저 기산성쪽으로 말을 달린다. 뒤를 따라 기산성으로 말을 달리면서 자휼은 계속 뒤를 돌아보았다. 귓가에 맴도는 자신을 부르는 아이의 목소리가 끝내 지워지지 않고 자신을 부른다. 계속 계속 뒤를 돌아본다. 마고는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고 말을 멈추었다. “수해?” 하지만 등을 돌린 자휼은 뒤돌아 보지 않는다. 마고는 이상한 느낌에 자휼의 등에 손을 얹었다. 저 멀리 벌판을 바라보는 자휼의 눈은 텅비어 있어 걱정스럽다. “바람소리가 들려.” “예. 풀이 자랐으니까요.” “바람소리가...그리고 향기가...” “...?” 곧 이 붉은 평원에는 푸른 잔디가 자라나겠지. 초지가 되고 더운 바람결에 그 자유의 냄새가 이곳을 채울것이다. 그 푸른 내음과 쓴 내음이 잊을수 없는 것을 잊으려 애를 쓰는 나를 비웃겠지. 그래. 그 쓴 내음이 말이다. 하늘이 푸르게 빛나고 대지가 녹색으로 물든다. 그럴수록 마음 한구석의 텅 빈곳을 울리는 그것. 결국 잊을수 없는 것인가. 91 완연하게 봄이 와 화원에 종일 피우던 화로를 줄였다. 여관은 새로 태어난 나비를 부채로 살짝 부쳐주었다. 곧 날개가 마르면 날수 있 을것이다. “재미있는 소식이군.” “무슨 일입니까?” “아골타가 2왕자와 5왕자에게 진검승부를 하라 시켰다는군. 안타깝게도 둘다 살아있는 것이 문제지만.” “친 자식들에게 진검승부라니...” “아마도 확인하려고 했을 것이다. 누가 더 괜찮은 놈인지 말이야.” 하류사가 제비에게 줄 것을 찾다가 여관옆에 있는 나비망에서 나비를 하나 꺼내 제비에게 주었다. 생각지도 않은 고기 먹이에 제비가 덥썩 나비를 물지만 여관의 부채에 머리를 맞고는 입을 벌려 나비를 놓아준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나비는 얼른 천장으로 날아가버 린다. “그렇다면 아골타는 이미 3왕자나 5왕자중 하나를 선택한것일까요?” “아니. 2왕자를 선택하고 둘다 서로 죽이게 하려는 것일지도 모르지. 원래 단순한 것들이라 붙여놓기만 하면 서로 죽이려고 달려들테 니까.” “그렇습니다.” 제비에게 물린 나비가 아직 살아있는지 확인한 여관은 소맷자락에서 호두를 꺼내 제비에게 물린다. “입관시험이 결과가 오늘 나왔지? 뭔가?” “장원입니다. 명림씨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그렇다면 얼도당치 않는 문으로 가기전에 미리 손을 써라." "예" “호북으로 간 을노에게선 연락이 왔나?” “예, 잘 지내고 있는 듯 합니다. 노마님을 만나보기도 하였다지만 아직 악운의 이야기는 하지 못했다 하더군요.” “천천히 해도 된다고 전하라. 아직 신경쓸일은 전혀 아니니까. 아, 그리고 자휼에 관한 소식은 들어왔나?” “예. 지금 자휼은...” “거기까지.” 하류사는 빙긋 웃으며 여관을 말을 막았다. “그것은 비밀로 하지.” 황궁에서 합격증이 나왔다는 사실을 알게된 것은 어제 저녁이였다. 그들은 자례를 힐끔 보고는 잠시 망설이다 자례의 신분증을 확인한 후 해당 관청으로 가 합격증을 받으라 했다. 기뻐하는 소용과는 달리, 합격을 알리러온 그들을 보았을때 자례는 심장이 쿵하고 멈추는 듯한 충격을 받아야했다. 이젠 정말로 들어가야해. 못내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관청앞에서 서성거린다. 소용이 얼른들어가라고 홍조띤 얼굴로 재촉한지 오래야, 더듬더듬 들어가 자신을 빤히 보는 관리앞에서 한숨을 쉰다. 합격증을 받으러 왔다고 전하자 나이를 물어보고 이름을 물어보고 본적까지 뒤적여본 다음에야 놀 라며 말한다. “아니, 왜 이리 어려보이시는가?” “...” 기분상해하지 말라고 달래며 관리가 합격증을 준다. 문득 합격증을 받고 나자 왕씨가 말한 장원이 떠올라 합격증을 읽어보지만 거기에 는 단지 합격이라는 두 단어와 자신의 신상기록부, 그리고 알수 없는 무수히 많은 인장이 찍혀있을뿐. 장원의 여부는 확인할수 없었다 . “합격증을 받아가시기 전에 여기다 서명을 해주세요." 절차에 따라 서명을 하고 붓을 내려놓았다. 관청을 나오며 숨을 깊게 쉬고 하늘을 올려다 본다. 합격증을 받아들고 관청을 나오자 소 용이 손을 흔들며 자신을 불렀다. “여기에요! 자례공!” “소용부인.” “합격증은 보셨나요?” “예.” 자례는 올려 책(손수건모양의 머리두건)으로 고정한 머리가 신경쓰이는지 손으로 잠시 만져보고는 신경질적으로 그것을 잡아당겼다. 풀러지기 전에 소용부인이 먼저 손을 잡아 멈추게 한다. “머리는 잘 고정되어있습니다. 그러지 마세요.” “예, 그냥 불안해서요. 무겁기도하고...” “익숙해지실만도 하셨는데요. 하긴 처음엔 웃긴 일도 많았지만.” 소용이 호호호 거리며 웃고는 자례와 집으로 걸어갔다. “오늘저녁엔 낭군님이 오신답니다.” “그럴 것 같았습니다. 오늘은 분홍색 옷을 입으셨으니까요. 게다가 화장도 예쁘게 하시고.” “호호호.” 참지 못하겠는지 조용히 웃는 소용이 목소리에 놀란 사람들이 그들을 피해지나간다. 그날 저녁 환하게 웃으며 들어온 마기 장군은 자 례를 불러 손을 잡았다. “장원이야!” “그렇군요. 합격장에는 적혀 있지 않아서 몰랐습니다.” “좀더 기뻐해도 되지 않나? 하하하! 정말로 장원이 될줄은 몰랐네. 운이 좋았어.” “운?” 마기는 윗옷을 벗으며 자리에 앉았다. 소용이 대신 말해준다. “원래 입관시험은 부정이 많아요. 고관대작들의 자제가 시험을 보게 된다면 그들이 장원이 되지요. 그런데 이번 입관시험에는 고관들 의 자제가 없었다고 들었습니다.” “하긴 올해부터 입관시험을 황제직속이 아닌 히우루가 맡아서 부정은 힘들거야.” “히우루?‘ “황제 아골타의 친 동생이다. 지금 녹상서사(錄尙書事)에 있는 자지. 뇌물이 먹히는 자가 아니라서 부정이 없어질 것 같다.” “아골타에게 친 형제가 남아있었군요.” “그래. 두명 남아있지. 친 동생인 히우루와 이복동생인 오걸매라는 자다.” “오걸매?” “그 놈은 위험해. 미쳤거든. 완전히 돌았지.” 마기가 딱 잘라 말하며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긴다. 하지만 곧 웃으며 자례의 어깨를 두드린다. “괜찮아. 자네는 만날 일도 없을것이다. 오걸매는 이번에 호북쪽으로 좌천당했다고 하더군. 궁에서 일할 자네와는 만날 이유가 없지. ” “예.” “그보다 왕씨의 전갈이네. ‘축하한다’라고 전해주라 하셨네.” 자례는 고개를 깊게 숙여 자신의 지도자에게 감사의 뜻을 보였다. 마기가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피며 소용을 바라보고 눈을 찡끗한 다. “옷을 갈아입고 오겠네. 오늘부터 일주일간 휴가를 받았거든.” “어머나 정말이세요 낭군님!” 좋아하는 소용이 마기를 따라 나간다. 고작해야 소용의 어깨에 키가 닿는 마기가 소용의 머리에 장식된 비녀를 가리키며 뭐라웃는다. 얼굴이 붉어진 소용은 황급히 먼저 나가버리자 마기역시 어깨를 으쓱이고는 따라 나간다. 잠시후 한족의 옷을 입은 마기가 들어오고 소용은 식사를 준비를 위해 나가자 자례가 웃는다. “소용부인이 마기장군을 많이 좋아하시나 봅니다.” “워낙 내 일정이 빡빡해서 말이야. 그렇다고 그녀를 궁안으로 데리고 갈수도 없고... 소용은 거란인이야. 황궁에 들어가긴 힘들지.” “역시...” “왜?” “아니, 거란인과 성혼하시다니 좀 놀랐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거란인과 결혼한 마기를 나무라는 느낌이 들어 얼른 수정한다. “어떻게 인연이 닿으셨는지요?” “흠. 아주 어릴때 만난 친구 사이지. 솔찍하게 말함세. 내가 곰사냥을 나갔다가 그녀의 어깨에다 활을 쐈거든. ” “예?” “아니 풀숲에서 저 큰 몸이 숨어서 움직이자 그게 곰인줄 알았지 뭔가? 그때 나는 고작해야 12살이였고 겁이나서 활을 당겼는데 그게 소용이였던 거지. 소용은 그때도 지금처럼 컸어. 지금은 몸집이 생겼지만 그때는 살이 좀 있었지.” “하?” 웃지 못할 만남에 자례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내몸의 두배가 넘는 그녀를 마을까지 업고 오느라 내 키가 이모양 이꼴이라니까. 에휴, 뭐 작은 키가 아니라서 그냥 만족하지만. 우 리 을지가문의 사람들은 모두 7척은 되는데 나만 6척이라니까.” “하지만 작은 키가 아닙니다.” “거야 한족들이 워낙에 짧은 다리를 가지고 있으니 커보이는 것이지.” 어꺠를 으쓱하며 말한 마기는 자례보다도 큰 편이였다. 그리고 그 말대로 한족의 어느 장수와도 견줄만한 키였다. “장성해서 그녀가 나에게 시집오고 싶어한다는말을 들었을때 내가 얼마나 놀랬는지 모를걸. 게다가 장인어른도 그렇고, 우리 아버님 도 그렇고, 활을 쏘았으니 책임을 지라는 것이야.” “어째서?” “그야 상처를 좀 보려고 옷을 열어봤거든. 맨살을 보았으니 책임지라는 것이지. 지금은 당연한거지만 30년정도만 해도 혼외정사 따위 상관없지 않았나? 우리도 아직도 혼욕제로 첫 연인을 만나는것처럼 그런거 신경안쓰잖아? 그런데 그때 이곳에는 막 유교라는 것이 돌 아 여인들이 사내에게 맨살을 들어내는 것이 민감해졌던 시기였던거야. 게다가 장인어른, 소용의 아버님은 그 유학의 선두파였고.” “저런.” 하지만 마기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 웃었다. “물론 나도 그녀를 싫어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혼했다네. 점점 정이 들어버렸지. 소용은 좋은 여자야.” “예. 아주 좋은 안주인이십니다.” “가끔은 정말로 안타까워. 정말로 부부라면 좋을텐데 말이다. 아이도 생기고.” “에...예?” 무슨 소리냐는 듯 자례가 고개를 들었다. 정말로 부부라니? 가짜 부부라 이건가? 그런 것 같지는 않았는데. 마기가 돌아오면 그녀와 합방하는 것을 종종 본터라 자례는 의아하게 되물었다. “어? 모르고 있었나?” 마기는 자례보다 더욱 황당한 표정을 짓고는 크게 웃는다. 어리둥절한 자례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웃음을 겨우 멈춘 마기가 미소지으 며 말한다. “나는 여인이네.” “아?” “정말로 모르고 있었나 보군. 왕씨께서는 항상 이러신다니까.” “저 마기장군... 하지만...” “물론 한족이나 여진족이나 여인이 장수가 되는 것을 금하고 있지. 하지만 우리는 아니지 않은가?” “....정말로?” “키워질때무터 좀 험하게 자라서 말이야. 을지씨는 장군씨인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겠지?” 낮게 웃는 마기를 보면서도 자례는 미심적은 표정을 지었다. 소용이 들어와 그들 사이에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를 알고는 자례에게 말했다. “정말로 모르셨어요? 낭군님은 여인이세요. 보세요. 수염이 안났잖아요.” “아...예.” “충격이 컸나보군. 끝까지 안알려줄 것 그랬나.” “어머나 낭군께서도 짓궂으세요. 호호호” 자례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미소지었다. 그런가 보지. 뭐. 하지만 앞에서 웃는 마기는 여인보다 아름답기는 하나 여인처럼 생기지는 않았다. 굉장한 미남자일뿐. “아차. 그러고 보니 자례는 정말로 사내인가?” “예?” “왕씨께서 나에 대해 안말씀하셨다면 자네역시 여인일지도?” “아닙니다. 전 사내가 맞습니다.” 웃으면서 고개를 젓자 이번엔 소용이 이상하다는 듯 자례를 가만히 들여다보고는 묻는다. “어떻게 20살 넘은 사내가 수염이 안나죠?” “자례의 나이는 18이야. 우리는 만으로 나이를 세니 좀 다르지. 아직 어린거야.” “그렇구나. 실은 저도 자례공이 여자라 생각했거든요.” 왠지 소용이 실망스럽게 눈을 감자 마기와 자례는 크게 웃고 말았다. 진정이 되자 마기가 차를 한잔 따랐다. “입관했으니 자네는 제일 먼저 황궁의 도서관을 맡는 비서랑이 되네. 관리의 첫 걸음이 여기서부터 시작되지. 어느 정도 그곳에서 시 간을 보내면 자네를 2왕자에게 추천하는 일이 생길거야. 그때부터는 자네가 알아서 하는것이다.” “예. 입궁은 언제 하게 됩니까?” “3월 3일이다. 내 휴가가 끝나면 함께 입궁하는거지.” 마기는 차를 따라 자례에게 내밀었다. 92 “뭐하니? 받지 않고.” “조금 현실감이 떨어져서요.” “허.” 손을 내밀어 입명장과 관, 옷을 받는다. 낯선 모양의 그것들이 몹시도 생소하지만 가슴 두근거리게 기쁘다. “녀석. 많이 좋은가 보구나.” “정말로 태워버린줄 알았다구요. 할아버지.” 그말에 목씨 정륜이 크게 웃으며 무릎을 쳤다. 자휼이 옆에서 자신의 임명서를 보고는 안도의 표정을 짓는다. “할아버님도. 진작 주시지 그러시구요. 정말로 태워버리신줄 알고 조마조마했다구요.” “녀석들. 니들이 어떻게 이루어 온것인데 내가 아무리 화가 났다 한들 화로에 던져버렸겠느냐? 그냥 골려준것이다. 다음부터 행여 이 런 일이 있다면 그땐 제 정신 단단히 차리고 행동하거라.” 그말에 자휼도 자례도 환하게 미소지었다. 낮게 후후거리던 자휼이 입을 열었다. “그런 일은 없을겁니다. 두 번다시 입명서를 받는 일은 없을거예요.” “할아버지께서도 이리오셔서 저희와 함께 사실거죠?” 자례가 의자에 앉은 정륜의 무릎에 얼굴을 기댄다. “할아버지랑 살수 있게 되었어요.” “그렇습니다.” “너희들...” 정륜이 설마하는 표정을 지었다. “예. 이곳에서 정착할겁니다. 저도 쉬고 싶고 자례도 쉬어야 할때니까요.” “입명장은 이것으로 족해요.” 빙긋 웃는 얼굴에 만족감이 어린다. “...두번다시 입명장을 받는 날은 없을거예요.” 갑자기 등골이 오싹한 한기를 느끼고 붕대를 돌리던 손을 멈춘다.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분 자신이 벽을 등지고 앉아있는 것을 알고 있어 더욱 의아하다. 그러나 이상한 기운이 사라지지 않아 뒤를 확신하면서도 고개를 돌린다. 역시 벽뿐이다. 게다가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다. 붕대감는 법을 지도해주던 마기가 그 모습을 보고 묻는다. “왜 그러는가?” “...아닙니다.” “아팠나?” “아뇨. 아닙니다.” 마기가 고개를 갸웃하고는 다시 붕대끝을 풀어준다. 튼튼하게 묶였던 붕대가 풀려간다. 오래전 계명에게 다친 어깨는 쉽사리 아물지가 않았다. 왼쪽 어깨에서 가슴아래까지 길게 이어진 검의 흔적은 보는 이로 하여금 오싹한 느낌이 들게 만들었다. 시골이라 뛰어난 의원또한 없어 투박한 바느질솜씨로 상처를 꼬맨 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 아직도 심하게 움직이면 쓰리고 상처가 벌 어지는 느낌도 남아있다. 마기는 휴가동안 자례가 유달리 왼쪽어깨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이상하게 여겨 결국 상처가 있다는 것을 알아낸 것이다. 도 성안의 명의를 불러 상처를 다시 보게 했지만 의원은 이미 상처를 치료할 시기는 지났다면서 좀더 실력있는 명의가 있었다면 이런식의 흉터나 후유증은 없었을 거라 아쉬워했다. 자례는 그다지 상관없다고 웃었지만 마기는 고개를 저었다. “궁은 사냥터. 그안에는 사냥꾼이 가득하네. 자네나 나나 그들에겐 사냥감이야. 몸이 강하지 않으면 정신은 무너지기 마련이네.” “하지만 이미 치료하기가 너무 늦은 상처입니다.” “붕대를 감는법을 알려주겠네.” “예?” “상처란 여인의 마음과 같아서 내버려두면 깊어가지만 정성을 다하면 언젠간 동고동락하기 마련이지.” “...” “그 상처에게 정성을 다해보게.” 미소짓는 마기의 표정이 너무나 부드러워 시선을 외면하게 된다. 그런 자례를 마기는 무리해서 자신을 바라보게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궁안에서는 강해지셔야 하오.” “...예.” 창을 열고 마기가 숨을 들이쉰다. 궁안은 전쟁터다. 자신도 궁안에 들어갔던 때가 분명 자례와 같은 나이였다. 더러운 음모. 믿기 힘든 권력 싸움. 죄없이 죽어가는 천재들과 권력을 희롱하는 둔재들. 하늘을 올려다 보지 못하도록 자신이 더럽다 고 느끼는 하루하루. “낭군?” “...소용.” 걱정스럽게 소용이 다가와 자신을 바라본다. 지금까지 내가 나로써 존재할수있었던 것은 소용이 있었기 떄문이다. 지켜야 할것. 원하는 것. 주어진 것. 그 세가지가 인간을 얼마나 강하게 만드는가. “자례는 지켜야 할것이 있나?” “예?” “...만드는 것이 좋아.” 마기는 소용에게 미소지어보인다. “누구냐?” 나무바닥을 스치는 옷자락 소리에 귀가 민감해진다. 감고 있던 눈을 뜬다. 큰 문을 지나 이층을 올라온다. 처음들어보는 발자국소리다. 자객과 같은 의도적인 고요함은 아니다. 타고난 듯한 가벼운 발소리. 옷자락이 마루를 쓸려오는 소리가 음악소리처럼 규칙적이고 정갈 해 타민족이라 생각하기 어렵다. 뜨거운 물에서 몸을 일으킨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싸뿐한 걸음걸이가 등뒤로 다가온다. 한발 한발 다가오는 소리에 등을 곤두세우며 긴장하지만 막상 다가오 는 상대에게는 아무런 살기가 느껴지지 않아 그것도 되지 않는다. “누구냐?” 하지만 대답하지 않는다. 등으로 차가운 손이 닿는다. 놀라운 것은 사실이지만 뿌리치지는 않는다. 찬손이 등을 쓸고 내려와 척추선을 타고 목위로 올라온다. 다시 밑으로 내려가고 올라온다. 어깨를 잡아 부드럽게 쓸어준다. “누구냐?” 다시한번 묻는다. 여전히 등에 손을 올린 자는 대답이 없다. 손이 무척이나 부드럽군. 젓가락조차 잡아본 것 같지 않는 매끄러운 손바닥이다. 가락지나 손톱의 느낌이 없으니 여인이라 생각하기엔 이르다. 물이 식어가고 있는 것을 느낀다. 갈아입을 옷을 가지러 간 여관이 곧 올라올것이다. 걱정하지 않는다. 여관은 왕비족의 여인이다. 온 화한 성격이 그것을 들어내지 않지만 나보다 우둔하지 않다. 뛰어나면 뛰어날터. 단지 내 등에 손을 올린 이 자의 정체가 궁금하다. 다시 등선을 타고 올라오는 손을 조용하게 손으로 누른다. 잡힌 손을 내빼지 않는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등뒤의 자를 확인하려고 한 다. 그리고 놀란다. “여관?” “...” 여관은 가만히 자신을 들여다 본다. 그것은 신하가 왕을 바라보는 눈이 아니다. 여인이 사내를 바라보는 것도 아니다. 어머니가 아이를 바라보듯 그렇게 지긋이 내려본다. 너무나 보고싶었다는 듯 천천히 손을 들어 하류사의 얼굴을 쓰다듬는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안아 품안으로 끌어들인다. 손은 차갑 지만 몸은 따뜻하다. 성숙한 여인의 가슴사이로는 단내가 풍킨다. 어린 소년을 보호하는 향. 젊은 사내를 유혹하는 향. 늙은 노인을 다스리는 향. 두손에 힘이 들어간다. 여인을 물속으로 끌어당긴다 품에 안고 그 눈을 바라보며 자신을 허락해주길 바란다. 짝! “...엇!” “...왕씨?” 하류사는 눈앞에 내밀어진 모아있는 여관의 두손을 보고 어리둥절한다. “무슨...?”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으셨습니다. 무엇을 그리 생각하고 계셨습니까?” “...생각?” “물이 차가워 졌습니다. 어서 나오십시오.” 여관의 말에 어리둥절 하지만 곧 어떤 일이 있었는가 짐작을 받는다. 꿈을 꾸었던 것인가. 잠시지만 너무나 생생한 꿈을 꾼것인가. 옷을 걸쳐주는 여관이 문득 이상하다는 얼굴로 잠시 행동을 멈춘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왕씨의 등에 올린다. 따뜻하다. 아까와는 다른 따듯함. “왜그러는가?” “등에 이상한 것이 붙어 있습니다.” 여관이 등에서 무엇인가를 떼어낸다. 두 손으로 길게 그것을 늘여 왕씨에게 보여준다. 새하얀 머리카락. 그것이 어두운 방안의 달빛을 품고 파랗게 되비친다. 93 이상하다는 눈으로 밭을 일구던 농부들고 아낙들이 길을 바라보았다. 벌써 7명째다. 그냥 그럭저럭한 한족의 옷을 입은 사내들이 얼굴을 가릴수 있는 깊숙한 두건과 모자를 쓰고는 자신의 말을 끌고 산위로 올라가고 있 었다. 다들 건장한 체격에 꽤나 힘있어 보이는 젊은 축의 사내들이였다. 그들이 끌고가는 말은 마치 짐말처럼 무엇인가를 지고있었지 만 특별한 마구가 없는 맨모습에도 명마라는 것을 알수 있을 만큼 단단하다. 그런 그들이 오늘 새벽부터 한명 두명씩 산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마을의 험한 뒷산 건너에 있는 장촉곡으로 가고 있었다. 또 한명의 사내가 그렇게 지나갔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 뒤에서 흙피리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그 엄청 난 체격에 놀라 말을 잊는다. 정말로 한족의 옷이 안어울리는 30대중반의 사내였다. 게다가 그가 데리고 오는 것은 말이 아닌 소였다. 소 역시 주인처럼 우람하다. 소년이 소에 올라 흙피리를 부는 것은 이상적이겠지만 이 곰같은 사내가 역시 괴물같은 소에 올라 흙피리를 부는 것은 너무나도 이상 하다. 곰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몸집에 우락부락하게 생긴 얼굴. 밤송이 같은 수염을 단 사내는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다가 농부들에게 다가왔 다. “저기, 장촌곡이 어딥니까?” “아, 저...저기...” 놀란 농부들이 손가락으로 저 멀리 하늘에 닿아있는 산을 가리키자 그는 한숨을 쉬고는 소의 등짝을 후려친다. “가자가자, 이 느림보야.” 하지만 소는 소일뿐 말이 아니라서 터벅터벅 걸어갈뿐이다. 천천히 그가 걸어가고 있는데 뒤에서 빠르게 말을 타고 달려온 마른 중년 인이 그를 보고 호통을 쳤다. 그가 하고 있는 말이 여진어도, 거란도 한족도 아니라 그들이 정안인이라는 것을 알아챈다. “예사장군! 그 소! 또 소입니까! 그놈이 소! 소!” “아아, 좌보님 안녕하십니까.” “인사 따위 집어치우시오!” 백라가 씩씩거리며 예사에게 화를 내었다. “그 수염은 또 뭡니까! 아무튼 왕씨의 곁을 떠나 멀리 내보내면 어째서 젊은날의 망나니로 돌아가는 겁니까!” “겉은 변해도 속은 변하지 않습니다.” 냉큼 말한 예사는 껄껄웃으며 백라를 진정시켰다. 하지만 백라의 화는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웃지마시오! 지금 모두들 기다기고 있는데 막상 지휘관이 오지 않으니 아무것도 못하고 있지 않소!” “이런! 지금 당장 튀어가겠습니다! 안그래도 내 아위(牙衛: 상장군 예사의 직속군중 하나.) 놈들이 이곳까지 잘 도착했는지 걱정을 하고 있던 참이였습니다!” “당장 뛰어가시오!” 그말에 예사는 얼른 소에서 내리고 산을 향해 뛰어갔다. 혀를 차며 그 모습을 보던 백라는 힐끔 소를 바라보고는 자신도 산으로 말을 달렸다. “나도 늙었나봐!” “공은, 무슨 말씀을 그렇게...!” “빨리! 빨리!” 그야말로 난폭한 운전에 자례가 마기장군의 허리를 꽉 부여잡았다. 도성에서는 말을 타고 달리면 안된다. 하지만 마기장군이 입고 있 는 관복과 차고 있는 검에 새겨진 관등에 감히 말을 제지하는 자는 없었다. 무엇보다 늦은 입궁에 궁으로 들어가는 길에 아무도 없기 떄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마기는 자신의 검은말을 독촉하면서 달려 동 문쪽으로 왔지만 입궁의 시간을 제한하는 종이 울리고 있었다. “공은, 아직 입명을 받지 않았으니, 북문으로 들어가는 것, 이요. 나는 남문을 지키니 반대편이고. 맞나? 합격증에 그렇게 적혀있었 지?” 헐떡거리며 말한 마기는 말에서 내려 자례에게 작은 주머니를 하나 준다. “일단 가지고 있어. 화급한 일이 생겨 도움이 필요하다면 남문의 수문관으로 와서 남문의 무의 장군 우광덕을 찾아. 우광덕이 내 한 족명이다. 자네 이름을 말해보게” “우광효.” “잊지 말게. 자네는 지금 한족이고 내 먼 친척이야. 정안인이 아니니 평소의 버릇대로 생활하다간 들키기 십상이네. ” “궁금했던 것인데 제가 쓰는 이름은 누구의 것입니까? 우광효라뇨?” “광효는 저번 전쟁에서 죽은 내 먼 친척이 사용하던 한족명 이름이지. 황궁에서 얼마동안은 날 보는 것은 힘들것이야.” “알겠습니다.” “자네는 한족이니 황제에게 부복해야하네. 힘들지 않겠지? 어차피 서관에 그런 자들은 들어오지 않아. 하지만 만약 마주치기라도 하 면 그냥 땅에 무엇인가 떨어졌다 생각하고는 숙여.” “예.” “잊지 말게. 초반의 실수가 결국 죽음으로 이르게 할지 모른다네.” “시험지에 쓴 이름을 잊겠습니까.” “자네의 오늘은 그야말로 빡빡할것이야. 아무튼 내가 먼저 찾아가지. 동기를 좋은 사람으로 만나게나.” “감사합니다.” 같은 황성으로 입궁하는 것이지만 서로 반대편문으로 뛰어간다. 입궁을 제한하는 시종이 마지막을 알리며 끝났지만 자례는 북문으로 도착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리 길을 가도 북문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런.” 입궁하지도 못하는 일이 생길지 모르겠는걸. 갑자기 뒤에서 말이 달리는 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돌린다. 마기장군인줄 알았지만 전혀 모르는 검은 말을 탄 사내가 자신을 향해 뛰어 와 선다. 멍하니 그를 올려다 본다. 새치가 많이 섞여 회색으로 보이는 머리를 가진 젊은 선비였다. 덩치가 꽤 좋아 보이는 그는 자례 의 앞을 말로 막고 어깨를 으쓱였다. “이봐, 타!” “예?” “타라고!” “...?” “안타?!” 아직도 멍한 자례가 잠시 주춤하자 그는 말위에서 내리지 않고 허리를 숙인다 자례의 허리에 손을 감아 말위로 올리는 것은 순간이다. “무슨 짓입니까!” “북문에서 서문으로 바뀌었어. 걸어가서는 제 시간에 도착한다는 것은 택도 없단 말이다.” “예?” “꽉잡아. 어린애야.” 그는 말의 허리를 찬다. 다짜고짜 말이 출발하자 자례는 얼른 말의 갈기를 부여잡았다. 아침과 똑같이 거친 말을 타고 끝이 안보이는 황성의 담을 돌기 시작한다. “너도 이번 합격생이지?!” “예?!” “나도 합격생이거든!” “안들려요!” “아 근데, 오늘 아침에 갑자기 사람이 찾아와서 서문으로 돌아오라고 하는거야 글쎄. 무슨 이따위 처신이 있냔말야!” “뭐라고요?!” “젠장, 아침밥도 못먹고 이게 무슨 짓이야!” “아무것도 안들린다니까!” “그래도 나만 늦은게 아니라서 다행이다!” “다시 말해봐요!” “내이름은 양만익이다! 참고로 말하지만 양만이 성이고 이름이 익이야!” “이 사람 정말! 아무것도 안들린다니까!” 황성을 두른 도로는 화강암으로 되어있어 말이 달릴때마다 경쾌한 망치질 소리가 난다. 그 소음에 아무것도 안들려 짜증이 잔뜩 난 자 례와 할말은 다 했다는 익 모두 우여곡절끝에 서문으로 도착했다. 이미 다른 사람들은 도착해 있었고 아마도 둘이 마지막인 듯 모두들 이 시끄러운 마지막 동기를 노려보았다. 자례가 말에서 내려 옷자락을 탈탈털어내었다. 익은 자신에게 다가온 시종에게 말을 넘겨주며 뭐라 부탁했다. 날카로운 눈의 관리가 다가와 그들에게 묻는다. “자네들의 이름은?” “우광효.” “양만익. 양만이 성이고 이름이 익이오.” “우씨와 양만씨. 됐군. 두명은 안오는가. 아무튼 이제 그만기다리지.” 그말에 자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관복을 입은 자들과 시종 병사들을 빼면 단 4명뿐. 자신을 포함해도 5명이다. 그 수만은 젊은이들 중에서 5명만 뽑은것인가. 잠시 이번 시험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관리는 그들이 다 모인 것을 확인하고 서문앞에 걸린 병사에게 문을열라며 품에서 자신의 출입패를 꺼내보인다. 병사는 옆에 걸린 징 을 크게 친다. 그러자 거대한 서문이 끼끽하는 마찰음을 울리며 열린다. “나를 따라 오게. 오늘은 바쁠테니 한눈팔생각은 하지말게.” “이봐요, 관리님. 역시 서문이라니 우리는 모두 비서랑이 되는것이군요? 정말로 우리 다섯이 다요? 내가 듣기론 합격자들 중 선두에 낀 몇 명은 왕자들이 먼저 가로챈다는데 진짜인가요?” “....자네 성이 뭐였지?” “양만. 익은 이름이오.” “양만공은 입조심하게.” “알아모시지요.” 관리는 그런 익을 노려보고는 서문으로 들어간다. 그 뒤를 따라 합격자들이 들어가자 서문은 곧 거친 소리를 내며 그 입을 다문다. 쿵하는 소리가 등뒤로 퍼지자 자례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먹혀버렸다. 이 거대한 궁안에 먹혀버린거야. 이상하다는 듯 2왕자의 심복은 고개를 갸웃했다. 예정대로라면 네명이 와야 하는데 온 것은 단 두명이였다. 하지만 징이 울리고 모든 성문의 폐문을 알리자 그는 두명을 데리고 북문을 열고 들어갔다. 단 둘이라는 것에 놀란 표정이 역력했지만 그들이 황제의 앞으로 가 지 않고 2왕자의 궁으로 들어갔을때는 더욱 놀라는 표정이였다. 하지만 어차피 얼마 가지 못할 황제보다는 곧 보위에 오를 태자를 선택하는 것이 합당하는 것에는 동의하는지 별말 없이 체이첸의 요 구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어찌 되었건 그들에게는 체이첸의 요구를 거절한다하더라도 다시 황궁으로 입궁할 처지가 못된다. 그들에게 숙소를 배정하기 위해 다른 가신들이 방을 나가자 이상하다는 듯 체이첸이 합격자를 마중한 가신에게 묻는다. “이상하군. 양만씨와 우씨가 서문으로 돌아서 갔다고?” “예. 그들은 일단 관궁의 비서랑으로 들어간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그거 정말 이상한 일이군.” 체이첸이 따뜻한 차를 마시며 아쉽게 웃었다. “그들에게 합격증이 그대로 전달되었나?” “아닙니다. 양만씨와 우씨, 강씨,초씨 이 네명의 합격증에는 서문대신 북문으로 오라 했습니다만...” “누가 알려준건가?” “글쎄요.” “아쉽게 되었군.” 고개를 괴면서 생각에 잠긴다. “우씨 글이 참으로 유려해.” “예?” “양만씨는 글에 충성이 보이고.” 옆에 선 가신은 이해하지 못하는 말을 중얼거린 체이첸이 웃는다. “다시 만날날이 있었으면 좋겠군.” 94 하얀 대리석으로 만든 바둑판에서 옥알을 튕기고 있던 악운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경질적으로 휘장을 걷고 나오자 그를 보호라 는 이름으로 감시하던 시종들이 고개를 숙인다. 답답해서 돌아버릴 것 같다. 황궁도 좀 큰 성이라 생각하면 된다 했던 것이 착각이였다. 월담을 해보려던 얼마 전의 밤, 여타 다른 도성과는 비교할수도 없는 넓이 와 빡빡한 경비에 악운은 두손을 들고 말았다. 게다가 거의 매일 밤마다 자신을 부르는 체이첸에게는 오로지 책과 도에 관한 이야기뿐 이였다. 옳고 그름. 선과 악. 명군과 폭군. 도와 이치. 차라리 병법에 관련된것이라면 어떻게 해보겠는데. 다행이 아주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니라 대강 넘기고 있었지만 게속되는 토론에 악운 은 지쳐가고 있었다. 도적질할때가 가장 편했지. 그러면서도 시종들이 가져오는 책은 꼬박꼬박 읽고 있었다. 언제 자신의 신분이 탄로나서 죽을지 누가 안단 말인가. 내 스스로 살아남 을 수밖에 없다. 손가락으로 창틀을 치던 악운이 복도를 나가자 시종들이 따라나왔다. 얼마 나가지도 않아 덩그러니 나무 한그루가 보 이는 돌벽에 서서 바람을 쐰다. 황궁이라서 엄청 화려하고 멋질줄 알았는데 여길 봐도 돌이고 저길 봐도 돌이란 말이야. 물론 꺠끗하고 웅장하기는 하지만 이거 원 사 람사는 곳같지가 않으니. 사방을 둘러보아도 산하나 보이지 않으니 이거 별세계에 온듯하단 말이다. 하늘위에 붕뜬 궁전이라고 해야할 까. 나뭇가지 사이로 하늘을 바라보던 악운은 문득 먼 하늘을 날아가는 검은 점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제비?” 하긴 제비가 날아올떄가 되었긴 하지만...아니 좀 이른 것 같은데...? 악운은 제비가 날아가는 방향을 따라시선을 옮겼지만 궁과 궁의 담을 넘어 멀리 멀리 날아가는 제비는 곧 시야에서 사라져버린다. 악 운은 소리없이 화를 내고는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시종들에게 뭘보냐는 뜻의 눈치를 주고는 다시 방안으로 들어가버렸다. 마기는 날라오는 제비를 품안으로 불러들여 숨겼다. 바로 고관 대신들이 앞으로 지나간다. 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이고는 그 자리를 피 한다. 자신의 처서로 정해진 작은 궁으로 들어와 품을 열자 제비가 소리없이 날아올라 자개장의 위로 올라간다. 전서를 꺼내들고 그것 을 읽은 마기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잠시 생각하고는 전서를 불태워버린다. 혈족의 젊은 장수들이 작은 전쟁을 치루려한다. “예, 그러니까, 오느라 수고했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상장군님!” 산이 쩌렁쩌렁 울리는 대답소리에 상장군 예사가 몸서리를 친다. “조용, 조용. 화적들 깨겠다.” “예!” 백여명의 젊은 사내들이 아무리 소곤거리며 대답해도 산이 울린다. 별수가 없다는 것을 안 예사는 높은 바위위에서 아래를 내려다 본 다. 젋은 장수들이다. 이들중에 분명 호랑이가 껴있을것이다. 차마 현세에 풀어두기 힘든 용이 끼어있어 이번 전투에서 하늘이 거두어갈지 도 모른다. 장수가 아닌 속인으로써 삶을 살아야 하는 사내에겐 전투의 상처를 그 몸에 남길것이다. “너희들은 젊은 사내다!” 예사는 밤송이가 되어버린 턱을 쓰다듬었다. 올려묶은 검은 머리가 바람에 휘날린다. “그 말은, 네 놈들 마음속에 한명쯤은 지켜야 할 여인이 생겼다는 것이다. 마음속에 홀로 품고 있는 보름달의 연인이 이 천하 어딘가 에 너희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이야기다! 어떠냐! 이놈들 가슴이 쿵닥쿵닥하면서 달아래서 나눈 연정이 떠오르지 않느냐!” 어라? 어쩐지 말이 세어간다는 느낌에 예사의 옆에 앉아있던 백라가 고개를 들었다. “네, 그래 네놈! 얼굴이 왜 그리 빨게! 너 혹시 아직도 동정이란 말이냐? 뭐? 아냐? 알겠어. 알겠어. 다음달 보름에 꼭 짝을 찾아라. 하하하! 짚신도 짝이 있으니 너라고 짝이...” “예사장군!” 백라의 외침에 찔끔한 예사가 헛기침을 한다. “그러니까, 그 뭐냐, 내말은 너희들은 젊은 인재란 말이다. 좌보님이나 나나 이미 늙었다. 어이쿠, 좌보님 그렇게 날 노려보지 마시 오. 사실은 사실 아니오? ” 낄낄거린 예사는 자신의 젊은 사내들의 얼굴을 본다. “거 참, 다들 얼굴도 풍채도 시원하니 앞날이 밝구나. 부러운 놈들.” “예사 장군! 자꾸만 딴말하지 마시오!” “예.예. 그러니까 내말은! 결코 죽지 말라는 이야기다.” 모두들 미소지으며 상장군과 좌보를 바라본다. 감히 마주하리라 생각지 못하던 좌보가 투닥거리는 것이 몹시 재미있다. “너희들은 우리의 미래다. 이 싸움이 끝이 아니다! 이것은 단지 앞으로 갈 많은 문 중 첫 번째 문인것이다. 이런 첫 번째 문에 끼여 회까닥 죽지 말란 말이다! 너희들은 젊다! 치기와 용기가 넘치는 나이다! 하지만 그것이 너희들을 살리는 것이 아니다! 나라에 관한 충정이 너희를 강하게 만드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예사는 자신의 가슴을 두드린다. “네 마음속에 있는 여인을 생각하라! 그 사랑스런 여인의 손목을 잡던 그날을 생각하란 말이다! 수 많은 어중이 떠중이 중에서 가장 바보스런 자신의 손을 잡던 여인을 떠올려라! 나라가 없어 수많은 민족에게 치욕적인 말을 들어가면서 지금도 어느 촌구석에서 얼굴을 가리고 있을 네 여인을 떠올려라! 오늘 너희들이 이곳으로 나올때 눈물을 참으며 머리를 잘라주던 여인이 눈앞에 아른거리지 않는단 말이냐!” 그말에 병사들이 자신의 투구와 가슴속에 있는 정인의 물건에 손을 얹는다. “환한 대낮에 검은 동정을 단 화려한 옷을 입은 그녀와 손을 잡고 달을 보려 가고 싶지 않은가? 화촉을 밝히고 네 가슴속의 여인과 혼인을 하고 싶지 않는가말이다! 그녀가 낳아줄 아이를 안아보고 싶지 않은가? 아이가 장성해 보름달 아래 연인을 구하러 나갈 때 매 어줄 허리띠가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느껴보고 싶지 않는가! 아비로써 내 아이의 손을 타인에게 넘겨줄 그날의 두려움을 기대하고 있 지 않은가!” 환성을 지르는 병사들 사이로 예사가 뛰어내린다. 칼을 뽑아 들고 웃는다. “살아남아라! 나라를 위해 살아남는 것은 왕씨이시다! 너희들은 네 여인을 위해 살아 남아라! 그것이 진정한 정안의 사내인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싸우는 바로 그 이유인것이다!” “살아남아라! 살아 남아라!” 일사분란하에 외치는 소리에 백라는 팔짱을 끼었다. 환하게 웃는 예사장군을 바라본다. 입안이 쓰다. 예사의 부관인듯한 사내가 다가 와 말을 건다. “너무 화내지 마십쇼. 좌보님. 예사장군님께선 전투에 임하실때면 항상 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사장군의 연설에 화를 내고 있는 것이 아니야.” “예?” “...자네 부관을 맡은지 얼마 되지 않았군?” “예?” “저 말은 예사장군 자신을 원망하는 말이야.” 백라는 안타까운 눈으로 예사를 바라보았다. 혼자서 중얼거린다. “저 바보같은 사람. 아직도 부인을 잊지 못했구만.” “어째서 파낭의 장촌산으로 젊은 장수들을 보내신겁니까? 그곳에는 화적들이 모여있을 뿐입니다. 화적은 우리에게 직접적인 위협을 주지는 않지 않습니까?” “미리 자리를 치워주는거다. 왕자들이 오기 전에 말이야.” 장군 마유가 고개를 갸웃했다. “파낭에 뭐가 볼것이 있다 그리로 가는 것일까요? 성이 큽니까? 그렇다고 토산품이 있습니까? 좀 이상한 처사같습니다.” “파낭은 황궁과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먼 성입니다. 왕자는 분명 그쪽으로 옵니다.” 대답하지 않는 왕씨대신 여관이 대신 말한다. “도성의 주성에는 이미 개국공신들이 자리매김하고 있으니 아무리 권세있는 왕자라도 내놓으라 할수 없습니다. 파낭은 주성에서 가장 가까운 도성이면서 실세가 가장 떨어지는 계주성과 닿은 성입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계주성을 가지는 것이 이득이 아닙니까. 거기는 일단 도성에 해당하니.” 하류사가 웃었다. “도성은 황제의 칙령이 발동한다 하지만 도성에 속한 주성은 도성의 제후의 포고령에 따른다. 결국 파낭은 일종의 면죄부를 받은 성 이다. 파낭에서 일어난 일은 황제의 책임이 아닌 계주태수의 책임이 된다. 하지만 과연 별 능력도 없는 계주태수가 감히 4왕자에게 뭐 라 할수 있을까?” “결국 태진은 군대를 조직할 생각인것같군요.” “그렇지. 게다가 조금 떨어진 곳에는 강철의 생산지로 유명한 자산이 있다. 철은 무기와 돈을 만든다. 그 앞이 난곡이니 형세적으로 밀리면 좋은 방패가 되어줄테고. 태진이 그곳의 성으로 가겠지. 그 지역에서 파낭성에 가장 가까운 성이 어디인가?” “낭성입니다. 곡양촌이 낭성의 영지입니다.” 여관과 왕씨가 서로 혼잣말을 하는 것 같으면서도 대화가 묘하게 딱 떨어진다. 하류사가 고개를 저으며 웃는다. “낭성태수는 한족이다. 게다가 낭성쪽으로는 혈족들도 거진 살지 않지.” “하지만 낭성은 요동성과 가깝습니다. 우리가 다시 요동에서 일어날 때 레이첸과 태진은 큰 장애물이 될것입니다.” “그 전에 치우면 되지 않나.” 여관이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하류사는 스스로 이해하면 된다는 듯 조용히 중얼거리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계주와 파낭,낭성에 남아있는 혈족들을 대피시키고 화적 놀음이라도 해보자.” 하류사는 미소지었다. “태진을 도와주는 것이 이것이 마지막이였으면 좋겠군.” 95 빤히 자신을 노려보는 익의 시선에 뒷통수가 뜨거웠다. 결국 자례는 손을 들었다. 관리가 자례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문서에 기록한다. “그럼 양만씨와 우씨가 한방을 쓰도록.” 안내된 작은 방은 서관과 연결된 작은 숙소로 성각헌(城覺軒)이라고 하는 공무용과 주거용이 함께 병행된 헌(軒:궁궐내 건물의 호칭) 이였다. 큰방에는 책상이 두개, 작은 서고가 있는 공무용 방이있었고 깊이 들어가면 개인의 침실용으로 작은 방이 두개, 안쪽으로 더 들어가면 사적인 공간으로 활용할수 있는 작은 방이 하나 더 있었다. 자례는 관리에게 받은 일정표와 관복을 큰방에 있는 책상중 하나에 소리나게 내려놓았다. 몸을 돌려 익을 노려본다. “아니 어떻게 세 번뽑은 제비에 같은 사람이 계속 연달아 나올수 있습니까?” “그것이 인연이라고 하는 것이다. 어린애야.” “그런 호칭으로 쓰지 마시오. 양만공!” “어쭈.” 익이 피식 웃으며 빈 책상에 자신의 짐을 내려놓고는 자례에게 다가와 노려본다. 지지 않고 노려보는 자례와 눈싸움을 하다가 갑자기 손가락을 들어 그 이마를 딱소리나게 튕긴다. “앗!” “쪼그만게, 어디서 어른을 노려봐!” “이...” 이 기본 예절도 없는 거란 원숭이가. 애써 말을 삼키며 물어본다. “그렇다면 공의 연배를 여쭈어도 됩니까?” “34. 비가 주적주적 내리는 7월의 첫날 태어났지.” “7월 1일?” 그말에 의아하게 익을 바라본다. “왜?” “...아닙니다. 제가 아는 사람과 같은 날이군요. 신기하게 나이까지...” “누군데?” “개인적인 것이라.” 익이 피식 웃으며 오랫동안 비어있던 것이 분명한 방의 창문을 활짝 활짝 연다. “너는 이름이 뭐냐? 아 아까 우광효라고 했지? 광효라... 너랑 안어울리는 이름이군.” “...” “뭐. 우씨라는 것 자체가 안어울려. 너에겐 왠지 다른 성이 어물리는 것 같다. 예를 들자면...” 창문을 다 연 익이 자례에게 다가와 턱을 괴고 고민한다. “특별히 떠오르는 성은 없지만 우씨는 강하고 폭력적인 성씨가 아니냐. 아무튼 아닌 것 같다.” “익은 사주도 하시나 봅니다?” “가끔은. 말이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이것저것 많이 알수록 오래사는 경우가 많거든.” “...” “어찌되었건 이 방은 그다지 좋지 않군. 보아하니 저 왼쪽 침실이 북쪽이고 오른쪽이 남쪽이다.” 자례의 책상위의 짐을 아이에게 던지며 익이 오른쪽을 가리킨다. “네가 남쪽을 써라. 내가 북쪽을 쓰지.” “보통은 북쪽이 더 안좋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 하지만 뭐랄까. 너보다는 내가 쓰는게 좋을 것 같군. 하지만 책상은 내가 이쪽을 쓴다. 난 창가가 좋거든.” “좋으실대로.” 짐을 들고 오른쪽방으로 들어가 침상을 막고 있던 휘장을 걷고 털썩 누워버린다. 서럭서럭한 먼지가 손에 잡히자 얼른 일어나 인상을 구긴다. 옆방에서 익이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정오가 되면 시종이 배당된다고 했지? 청소시킨 후에 누워야겠다. 여기 장난아니게 먼지가 많아.” “...여기도요.” 옷을 탈탈 털면서 자례가 신경질적으로 대답한다. 익이 방을 나왔는지 말소리가 좀더 크게 들린다. “옷갈아입고 어서 나와라. 서관으로 정오가 되기까지 가봐야 한다고 했잖아.” “예.” 옷을 갈아입고 방을 나와 앞에 보이는 서관을 향해 걸어간다. 아무말없이 묵묵히 걸어들어가자 익이 답답했는지 화를 낸다. “왜 아무말이 없어?” “예?‘ “나는 이런 분위기 굉장히 어려워한단 말이다.” “하지만 할말이 없습니다.” “지어내.” 기가막히다는 얼굴로 자례가 시선을 외면해버리자 익이 더욱 화를 낸다. “무시하냐? 너 지금?” “그렇지 않아요. 하지만 없는 말을 지어내서 대화하라는 익공의 말이 절 무시하는 행위가 아닙니까?” “흠. 그렇다면 내가 지어내지. 네가 이번 장원이냐?” “합격장에 그런 말은 없었습니다.그것을 내가 어찌 압니까.” “바보같군. 아까 제비가 3번이나 같게 나왔다고 한 것은 너다. 즉 우리둘을 의도적으로 묶어놓은거야. 그렇다면 이유는 단순하지 않 는가. 첫째, 둘다 바보다. 둘째 둘다 인재다.” “그렇다면 둘다 바보는 어떻습니까?” “그럴 리가 없다.” 익이 자신만만하게 말한다. “난 천재다. 그러니 너도 천재겠지.” “...그런 자만심은 어디서 왔는지 갑자기 부러워지는군요.” “내기해볼까? 서관에서 출석을 부르는 순서가 등수다. 아마도 내가 먼저 아니면 네놈일거다.” 아무말 없이 자례는 허탈하게 웃었으나 정작 정말로 낭관(비서랑직속관리자)이 호명할 때 익이 말한 그대로 전개되자 더 이상 웃을수 없었다. “네놈이 장원인가. 그렇다면 너가 창가에서 가장 먼 저 구석자리겠군. 내가 그 옆이다.” “아니, 어떻게 그런걸...” “우씨가 저쪽의 자리로 간다.” 낭관이 정말로 익이 가리킨 자리를 가리키자 뭔가 사람들이 짜고 자신에게 장난을 치는 거 같아 내심 불쾌하다. 자리까지 배정 받아 앉자 낭관이 긴 비단을 펼치고는 앞으로의 일과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다. “아침7시에 모든 비서랑들의 일과가 시작된다. 10시까지 스스로를 가다듬어서 서관으로 나올것. 첫달은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서관 을 정리하며 분리하는 일을 맞는다. 12시부터 2시까지 점심을 오후는 궁중에 필요한 기본 예절...” “어떻게 내가 이곳에 앉을 것을 알았습니까?” “뭐?” 작게 자례가 중얼거린다. “어떻게 내가 이 자리에 앉을 것을 아셨냐구요?” “그야 네가 장원이니까. 가장 안좋은 자리에 앉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 “어린애야, 여기는 전쟁터다. 비서랑이라는 것은 출세를 지향하는 모든 관리들이 거쳐야 하는 일종의 신고식이 아니더냐. 즉 저기 우 리를 빤히 내려보는 낭관도, 저 상급비서랑들도 예전에는 이곳에 있던 놈이라 이거지. 비서랑은 궁안의 가장 말단이니 다들 빨리 벗어 나고 싶어하는게 당연하다. 그렇다면 예전에 합격했지만 아직도 비서랑 자리에 앉은 놈들이 새로온 어린애한테 기회를 줄까? 이곳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아.” “하지만 궁안 관리들은 일정한 시험을 통해 진급되는 것이지 않습니까?” “바보. 정말로 모든 비서랑들이 진급시험을 볼수 있다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추천을 받아야 원하는 관청쪽으로 가서 진급시험을 보고 이 지긋지긋한 곳을 빠져나갈수 있는것이다. 어찌 되었건 고관의 눈에 들어가야 된다는 것이지. 그러니까 까마귀속에 백로인 너 나 나나 이 구석탱이에서 하루종일 썩어야 한다는 거다.” “...그렇게 잘 아시면서 익공은 어째서 시험을 잘 보신거죠?” “거야, 누군가 놀아줄 사람을 기다린거다.” 익이 씨익 웃었다. “이번 합격증이 4번째거든.” “예?” “심심하지 않냐. 나 혼자 까마귀틈에서 노는 것이. 그래서 동지를 기다린거지. 그러니 잘부탁한다.” “...” 아무리 이 세상에 별난놈이 많다지만 이런 인간은 처음이군. 자례는 익의 얼굴을 보고 허탈하게 웃었다. 합격증을 받는다 한들 입관되기는 힘든일이라는 것은 안다. 물론 자신은 형의 가신이였다가 형이 지방성의 태수가 되면서 자연스래 입 관이 되어버린 편안한 쪽이였다. 하지만 입관시험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받고 나서 태연히 입궁을 거절할만한 일은 아닌 것을 알고 있었다. 형과 같은 나이, 생일도 같다. 생긴 것은 형보다 좀 잘생기긴 했다. 윤곽이 매우 선명한 강한 인상의 얼굴이다. 피부가 구리색이라 여 진인이 아니면 거란인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 머리카락이 검은 색도 아닌, 그렇다고 유색도 아닌, 새치가 절반 이상 들어간 회색을 띠어 통 어느 민족이라 단정짓지 못하겠다. 눈은 검정색이다. 자신과 같은 검은 색. 검은색 눈이라니 정안인은 아니겠고 그렇다면 혹 시 한족인가? 익이 자례의 시선을 느끼고 대꾸한다. “난 거란족처럼 보이지 않냐?” “...한족이라 생각했습니다.” “뭐, 여진인이 아니라면 거란인이나 한족이나 정안인이나 대우는 마찬가지다. 너는 우씨니 한족이겠구나?” “예.” “흠. 그래.” “...?” “널 궁밖에서 보았다면 정안인이라 생각했을거다.” “...그런말을 자주 듣는 편입니다.” “하긴 검은 머리에 검은 눈에 하얀 피부라. 머리풀고 정안족 옷 입으면 아마도 정안족도 모를정도겠다. 그보다 넌 참 예쁜 눈을 가졌 구나. 새까만게 참으로 순해보인다.” “...그말은 처음이군요.” “알어. 네 성격이 더러운 것은 안다. 거참 생긴거 치고 성격좋은 놈 못봤다.” 낄낄거리며 익이 웃다가 낭관에게 지적을 받고 얼른 웃음을 멈춘다. 낭관은 익과 자례를 노려보다가 긴 두르말이를 둘둘 말아 품에 끼 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황제 폐하를 알현하러 갈것이니 모두들 의관을 정제하고 날 따르라.” 그말에 모두들 긴장하는 얼굴이다. 익이 굳어 있는 자례를 툭 치며 말한다. “황제도 인간이니 뭐가 다를것이 있는가. 긴장풀어라 어린애야.” “...” 자례는 다른 의미로 속이 쓰렸다. 부복해야 하는것인가. 하지만 황제는 나의 지도자가 아니다. 왜 내가 나의 지도자가 아닌 여진족의 사내에게 존경을 표해야 하는것이지? 그는 수많은 우리들을 죽이고 땅을 강탈해갔으며 여인들을 앗아가고 어린아이들을 노예로 삼았다. 그런데 어째서 그에게 고개를 숙여야 하는거지? 그건 싫어. “아...” “왜 그래?” 바늘이 뱃속으로 들어간 통증에 배를 감싸고 인상을 찡그리는 자례를 익이 부축한다. “어디 아프냐?” “그냥 속이 좀...” “괜찮겠냐? 체한거냐? 뭘 잘못먹었냐?” “아뇨... 잠깐...괜찮습니다.” 따끔따끔한 위장에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일단 낭관을 따라 서관을 나선다. 96 펄럭거리는 하얀색 긴 소맷자락을 팔뚝위로 걷어 붙였다. 어지간히 참아보았지만 이 이상은 무리다. 이렇게 긴 소매를 입고 어떻게 움 직인단 말인가. 술병을 기울여 잔을 채워 들이킨다. 정말 못살겠군. 탁자위로는 하나 가득 책이 올려 있다. 누가 읽으라 강요한 것은 분명 아니지만 읽지 않으면 2왕자의 말을 도통 이해할수 없으니 스스 로 읽게 되는 것이다. 그것도 하루 이틀 가능한 것이고 한달 남짓하다보니 머릿속의 밑천이 바닥나고 있음을 느낀다. 그래도 오늘밤에도 2왕자는 자신을 불러 대화를 나누고자 할것이니 텅 빈 머릿속에 무엇인가를 채워넣어야 한다. 하지만 타의에 의해 배우게 되는 지식은 고달프다. 책을 들어 머리에 뒤집어 쓴다. “이럴게 아니라 정말로 궁에서 나가야해.” 입술을 잘근 잘근 씹는다. 정말 여기서 나가야 한다. 이거 뭐, 호랑이 굴속에서 사는 것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띵띵거리는 머리를 쥐 어짜 생각을 한다. 한참 후에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책을 얼른 숨기고 시종을 불러 술을 더 가져오게 한다. 저녁일상을 마친 체이첸은 기지개를 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녁을 먹고 잠시 하루의 피곤함을 쉬던 그는 언제와 마찬가지로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를 만나러 가는 것이다. 환관이 옷시중을 들어준다. “흠.” “왜그러십니까?” “아니다.” 별말을 하지는 않지만 많은 생각이 오고 간다. 생각보다 그다지 대단한 인물은 아닌 것 같다. 물론 평범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 재치와 입담은 참으로 마음에 들지만 뭐랄까 내가 바 라고 기대했던 그 이상의 현명함은 없는 듯하다. 물론 그를 자신의 사람으로 둔것에 대한 것에 대해 후회 따위는 없다. 단지 생각과는 좀 다르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리고 약간의 실망도 말이다. 뭐랄까 영웅서의 업적을 볼때는 나에게 많은 조언과 충언을 해줄만한 사람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는 좋은 말벗은 되어주지만 그 이상으로 자신에게 주제넘는 말은 하지 않는다. 몸을 사리는 것일까. 하긴 이곳은 정안인의 출입이 금지된 곳이니 홀로 위협을 느끼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앞장 서라.” 환관을 앞세워 자신의 궁 깊숙한 곳에 숨겨둔 그를 찾아간다. 문앞에서 시종들이 자신이 왔음을 고하지만 그는 나오지 않는다. 의아함 을 느낀 체이첸은 시종들에게 문을 열라고 고개짓한다. 열린 방안은 어두웠다. 등을 켜지 않은 듯 한다. 술냄새도 풍겨온다. 등을 당 겨 불을 키니 탁자에 엎드린 그가 보인다. “공은 왜 이렇게...?” “아, 이런! 전하께서 오셨습니까?” 얼른 일어나지만 술기운인지 그는 휘청인다. 목을 굽혀 인사하는 그가 낯설지만 그것이 그가 정안인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 마음에 든 다. “무슨 영문으로 이렇게 혼자 술을 마시고 있소?”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람이 어째서 이 시간에 이렇게 취해있나?” 내가 오는 시간인줄 뻔히 알면서 말이야. 악운은 정말로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젓다가 슬프다는 표정으로 등을 바라보았다. 체이첸이 계속 그 이유를 묻자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쉰 다. “실은 고향생각이 나서...” “고향? 곡양말이요?” “황궁에서 전하에게 입은 은혜는 하늘과 같지만...두고온 지인들이 떠올라 심려치 않을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밤에 술을 마시며 홀 로 다독여 본것입니다.” “저런, 저런!” 체이첸은 딱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악운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래, 어서 나보고 한번 가보고 오라고 해라! 어서! 당장 여기서 나가줄테다! “내가 미쳐 그 생각을 못했군. 자네에게도 분명 지인들이 성밖에서 살고 있겠지. 미안하네. 내가 좀더 깊이 생각했다면 좋았을것을. ” “아닙니다. 제가 아직 미숙해서 정에 약한것입니다.” “아닐세. 이것은 내가 잘못한거지. 지금 당장이라도...” 그래! 지금 당장 보내줘! “곡양에 사람을 보내서 황성으로 입궐시키지. 그래, 지인으로 누가 있소?” “...아닙니다.” 악운은 한숨을 쉬었다. 정말, 정말로 이곳을 나가기 쉽지가 않다. 그는 그들을 데리고 황궁안의 깨끗한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대리석으로 만든 깨끗한 도로에는 잡풀하나 자라지 않도록 잘 가꾸어져 있었다. 가는 길 부분 부분에 잡초를 뽑거나 정원을 다듬는 궁녀들과 환관들이 보였다. “이번 입관은 황제님의 축일을 기념해 열리는 것인지는 알고 있을것이네. 특별히 알연할 기회가 있는 것이지. 다른 시험때는 장원을 한 사람만 황제폐하를 만나게 되지만 말이야.” 관리를 자례를 돌아보며 의미있는 눈빛을 보내지만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자례는 그냥 흘려보낸다. 아까부터 익이 자신에게 이것 저것 말을 거는 바람에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는 터였다. 관리가 무시당했다 생각했는지 헛기침을 해보이자 익이 입을 다문다. “아무튼 한달정도는 고서들을 필본하며 황궁에서 익혀할 예절을 배울것이네. 그 전에는 만널 사람도 없거니와 나갈일도 없을것이네. ” “아, 관리님. 그럼 황궁에서 나가려면 누구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까?” “자네는 아는 것이 없는 것 같군. 황궁에서 출입하며 업무를 볼수 있는 것은 제후들이나 고관들뿐이다. 자네들은 입궁한 지금부터 나 가긴 힘들것이야. 물론 경사에는 휴가가 나온다.” “저런.” 익이 어깨를 으쓱했다. 몇 개의 궁전과 성을 나누고 있는 문을 건너 드디어 대전에 도착할수 있었다. 관리를 그들에게 옷을 정리하라 말한 후 황제에게 어떻게 인사해야 하는지 알려주었다. 손의 위치와 고개를 숙이며 외치는 만세만세의 이야기는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 땅에 물건이 떨어져 줍는다. 줍는다. 줍는다... “...줍는다, 줍는다...” “뭐라고 중얼거리냐?” “응? 아니...” 당황해서 얼른 손을 내젓는다. 그런 것을 보면 마기장군은 정말 대단하구나. 황제의 직속이라면 하루에 한번은 부복해야하는 것일텐데 . 뭐, 어린아이도 아닌데 이런 일에 마음상할필요 있겠나. 하지만 역시 손은 부들부들 떨린다. 아 하기 싫어. 왜 내가 얼토당치 않는 우두머리에게 존경을 표해야 하는거지? 난 존경하지도 경외하지도 않는단말이다. “광효, 자네 얼굴색이 상당히 안좋아. 긴장했나?” “시끄러워!” 험악한 대꾸에 익이 얼른 뒤로 물러난다. 대전의 화려함이나 근엄함 따위 눈에 들어올 리가 없다. 또 머리가 아프고 속이 쓰리는 느낌 에 배에 손을 올리고 인상을 쓴다. 익이 그모습을 보고 괜찮냐고 말을 걸으려는 듯해 그를 노려본다. 말조차 꺼내지 못하고 불만스럽 게 익은 등을 돌린다. 오랜 기다림 끝에 북이 울리자 일단 다들 무릎을 숙인다. 그정도는 스스로도 익숙한 것이라 다른사람들과 함께 숙이지만 선 듯 허리만 은 숙일수가 없다. 마음다르고 행동다르고 말다른 것이 이런건가. 문득 자신 홀로 등을 세우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아찔해진다. 숙여야 한다는 마음은 있지만 고개가 아플정도로 허리에 힘이 들어가 숙 이려고 하지 않는다. 나도 아직 어린애다. 쓴웃음짓는다. 숙이려고 하지만 마음속의 자존심이 그렇게 두지 않는다. 황제가 홀로 나오는지 징과 북소리가 들려온다. 막 휘장사이 로 화려한 금색 옷자락이 보이는 것을 노려보는데 누구가 자신의 머리를 손으로 누르며 엎드린다. 극한 반감이 일어나 그 손을 쳐내버리고 벌떡 일어난다. 아차하는 것도 한순간이다. 타인들의 시선을 느끼고 눈을 돌렸을땐 이미 늦는다. 칼소리가 들리며 황제의 호위장수 두명이 내려와 자신과 익의 팔을 휘어잡아 누 른다. “무례한 것들, 어느 안전이라고 망발이더냐!” 황제의 옆에 있는 환관하나가 앙칼지게 외친다. 여자도 남자도 아닌 목소리에 등에 소름이 돋아 파랗게 질린다. 팔을 잡은 장수들이 자신들을 거칠게 뒤로 끌어당기다가 문득 손을 푼다. 고개를 돌리니 높은 단상에 앉은 거대한 몸집의 늙은이가 보인다. 징그러워. 아까와는 다른 소름에 고개를 돌려버린다. 그의 옆에 있는 늙은 관리가 일어나 말한다. “모두 고개를 들라. 황제의 축일에 들어온 관리들이다. 너무 험하게 굴지 말라. 황제도 그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장수들이 고개를 숙이며 뒤로 물러나자 황제가 부복한 젊은 비서랑들과 멀리 장수들에게 끌려 뒤로 물러난 비서랑들을 바라본다. 상관 없다는 듯 황제의 치하의 말이 이어지나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쓰린 팔을 주무르며 얼핏 옆을 보니 익이 이상하다는 눈치로 자신을 바라본다. 그 시선을 받아낼수가 없어 고개를 돌리지만 등에 흐르 는 땀은 어쩔수가 없다. “왜그래?” “아무것도.” “그럼 빨리가!” 소근 소근 말한 익은 안절부절 못하며 팔로 자신을 건들인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다. 임명장을 내리는 대표로 황제가 자신을 호명한 것이였다. 이곳까지 안내한 관리가 앞으로 나오라는 고개짓을 한다. 앞으로 나가자 면류를 들인 관을 쓴 황제가 자신을 내려다 보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고개를 약간 숙여 시선을 느끼지 않으려 애를 쓴다. 황제가 말하는 것이 들리면서도 아늑해진다. 현실하고 동떨어지는 느낌에 눈을 깜빡이며 정신을 가다듬는다. 황제의 손에서 환관, 관 리의 손을 거처 자신에게 입명장이 들어온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다를바가 없이 타인과 타인의 손을 거처 삶의 중요한 분기점을 결정 한다. -...두번 다시 입명장을 받는 날은 없을거예요. 손에 든 임명장이 공허가 느껴져 손으로 꽉 움켜쥔다. 움켜쥐지만 움켜쥐고싶지 않는 묘한 감정싸움이 자신을 흔들리게 한다. “..하니 스스로 더욱 정진하라.” “황공하옵니다.” 상투적인 인사말이 끝나자 황제는 휭하니 일어나 나가버린다. 딱딱하게 굳어있는 자례에게 익이 물었다. “이봐, 왜그래?” “....목” “뭐? 목?” “목이 저려서 그렇소.” 그제야 천천히 일어나 자신의 뒷목을 두드린다. 얼마나 긴장하고 있었던 것인지 목이 뻐근하다. 관리의 뒤를 따라 서관으로 향한다. 움켜쥐지만 움켜쥐고싶지 않는 그것을 든 손이 떨린다. 모두가 퇴정한 대전에서 낭관이 자례와 익에게 마구 화를 내지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임명장을 든손이 떨린다. 너무나 깊은 동굴속으로 들어가는 느낌. 바람이 불면 곧 꺼질 등잔을 하나 들고 끝을 알수 없는 동굴속으로 들어간다. 97 재빠르게 담을 넘었다. 우물에서 물을 뜨고 있던 한 여인이 놀란 눈으로 이 두 침입자를 바라본다. 한명은 마른 몸의 18정도 되는 소년이고 또 한명은 몸집이 크고 튼실해보이는 15 가량의 소년이다. 둘다 검은 동정에 붉은 머리띠와 허리띠, 머리 한쪽에 장식된 뀡의 깃털을 보아 낭도(화랑을 섬기는 젊은 무사)다. “죄송합니다!” “실례합니다!” “...이 야밤에 무엇을 하지, 두 낭도?” 여인이 묻지만 이미 두 낭도들은 마당을 가로 질러가 담을 또 넘어 어디론가 사라진다. 어꺠를 으쓱한 여인은 다시 우물로 몸을 돌린다. 한참을 달려가던 두 낭도들중 한명이 길을 가리키며 외친다. “왼쪽길이다!” “비켜!” 예사가 얼른 걸음을 멈추고 길바닥에서 돌을 하나 든다. 빠르게 날아간 돌은 멀리 어둠속을 달려가던 한 소년의 머리를 명중시킨다. 서둘러 달려가 소년을 짓누른다. 헉헉거리며 백라와 예사는 마주보고 웃는다. “잡았다.” “응. 잡았다.” “거란족이다. 게다가 생각보다 어린데? 예사 네 나이다.” “그보다 품을 뒤져봐.” 거란의 소년은 뭐라뭐라 소리치지만 둘다 알아듣지 못한다. 거란소년의 품안에서 작은 종이가 나온다. “찾았다. 마을 지도다. 어라? 옆마을지도들도 함께다?” “이놈, 남의 마을 지도를 마구 훔쳐간다 이거지? 너 밀정이냐?!” “그만해, 아직 어리다. 지도를 빼앗았으니 됐어. 보내주자.” “안돼. 밀정은 죽여야 하는거야!” 예사가 허리춤에서 단검을 빼든다. 하지만 백라가 고개를 저으면서 그 검을 밀어버린다. “예사, 저 소년을 봐봐. 너와 같은 나이야. 그에게도 우리처럼 가족이 있겠지. 어쩌면 우리처럼 흉년이 들어 곡간을 털기 위해이랬을지 누가 아니. 용서해주자.” “하지만...!” 예사는 안된다는 얼굴을 한다. 거란 소년은 둘이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아는지 모르는지 고개를 들어 그들을 바라본다. 검은 피부에 갈색눈동자. 뺨에 흉한 상처의 흔적과 눈밑에 있는 검은 점이 묘하게 잘 어울리는 소년이다. “안돼요. 형. 밀정은 죽이도록 배웠지 않아요!” “예사. 너랑 저 소년의 입장을 바꾸어보렴. 저 아이도 너처럼 널 기다리는 부인이 있을거야.” 부인이란 말에 예사의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그..그것이랑 이거는 다르죠! 밀정은 죽여야 합니다!” “내가 이렇게 부탁하는데 말이냐?” 그말에 예사가 발을 구르며 화를 참다가 등을 돌려버린다. “형 좋을대로 해요. 하지만 이일에 책임지는거에요? “좋아. 내가 책임지지.” 백라가 거란 소년의 몸을 누른 다리를 치우자 소년은 벌떡 일어나 마을밖 자신의 영지로 뛰어간다. 예사는 등을 돌리고 그 소년을 잊으려 하고 백라는 그 소년이 무사히 가는지 확인한다. 거란의 소년이 사라지자 백라는 예사의 등을 치고 다시 마을로 돌아간다. 예사가 고개를 부드럽게 돌려보았다. 뚜두둑하는 소리가 울린다. 손으로 턱턱쳐서 바로잡은 후 피에 젓은 머리를 통째로 나무통안으로 넣었다가 뺀다. 짐승처럼 물기를 털고는 어지러워 몸을 가누지 못하다 정신을 차리니 앞에서 난대없이 물벼락을 맞은 백라가 화난 얼굴로 서있다 . “죄송합니다.” “확! 그냥.” 백라가 하얀 옷에 뿌려진 물방울을 털어내며 우물의 옆에 걸터앉는다. 그와는 상관없이 예사는 윗옷을 벗어 대강 물에 빨아 꽉 짜 다시 입는다. “그런다고 피가 지워지지는 않지 않나?” “그냥 느낌입니다. 뭘 그리 따지십니까?” “...수고하셨소.” 조용히 내뱉는다. 아직 소수의 병사들이 뛰어다니고 있지만 얼마 안가서 북의 화적은 모두 잡히거나 죽을것이다. “그러고 보니 좌보님은 흥료성 이후에 이렇게 가까이 전투를 보시기는 처음이시죠?” “그렇지. 그 후에는 왕씨를 모실 곳을 찾아 다니느라 통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네. 게다가 나는 글쟁이 아닌가. 예사장군과는 다르지.” “그렇죠.” 옷자락을 탈탈털어 지휘자의 위엄에 손상이 없도록 가다듬는다. 물기어린 머리를 짜서 다시 머리띠를 한다. “그렇다면 여기 계십시오. 지금부터 저는 왕씨의 명령을 따라 이곳을 없애버릴것입니다.” “같이 가겠네.” 따라일어나려는 백라에게 예사가 손을 내밀어 거부한다. “여기 계십시오.” “하지만...” 하지만 전투로 지친 눈동자는 절대 안된다는 말을 전한다. 일어나려다 결국 다시 앉는다. 어차피 전투에서는 총 사령관의 명령이 절대적인 것. 왕씨도 자신이 사령관이 아닌 이상 사령관의 명령을 존중한다. 옆으로 젊은 장수들이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며 우물로 다가와 물을 퍼간다. 예사의 연설이 소용이 있었던 것일까.저 멀리 사상자를 눕혀놓은 나무 밑을 바라본다. 스무명 정도의 시체가 나무 밑에서 고된 몸을 쉰다. 이 거대 화적소굴을 점령한것에 비한다면 스무명의 손실은 그야말로 기적에 가까운 것이다. 하지만 예사는 그렇지 못했다. 이놈은 아직 장가를 못갔는데, 이 놈은 검을 잘쓰는 놈인데, 이 놈처럼 빨리 달리는 놈도 없는데, 이놈처럼 , 이놈처럼, 이놈처럼. 끝내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며 시체앞을 서성거리는 것을 백라가 밀어내었다. "그만해라. 이미 죽은 사내들이다." "하지만 좌보님. 이 사내들에게도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텐데 말입니다. 그것을 전달해야 하니 까마득하군요." "어쩔수 없는 희생이 아니였지 않은가? 그정도는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장군의 책임이라고 할수 없는것이오. 죄책감은 바보같은 짓이야." "...그런가요. 좌보님은 항상 냉정하신 듯 하군요." "...?" 약간은 비꼬는 듯한 말에 좌보가 예사를 노려본다. 헛헛 웃은 예사는 물로 깨끗하게 만든 검을 들고 저 멀리 골목으로 돌아간다. 좌보는 하늘을 보며 상장군 예사의 정을 한탄한다. “저렇게 정이 많으면서 어떻게 아위와 다위를 이렇게 강하게 만들었는지...” “좌보님 여기 계셨군요.” “..?” 예사의 부관이 자신에게 다가온다. 그의 어깨에는 제비가 앉아있었다. 자신에게 온 전갈이라는 것을 눈치채고 일어난다. 부관이 작은 종이를 손에 건낸다. 펼쳐보고는 의아하게 느낀다. “이거 을노놈이 힘든가보네.” “예? 을노님이라면, 눌현성의 선인이신 그분?” “아아. 그래.” “송선인이라면 한번쯤 뵙고 싶었습니다. 저희들의 우상이 아니셨습니까. 지금 어디계시는 지요?” “그 유명한 송선인께서는 저 북송경계선에서 한족 흉내를 내면서 미친 여진인과 눈싸움을 하고 있다네.” “예?” 서신을 흔들흔들 거리며 백라가 피식 미소지었다. “난 일단 도성으로 돌아가 왕씨의 곁을 지켜야겠네. 상장군께 말씀드리고 떠나도록하지. 상장군은 어디 계시나?” “그게... 상장군께서는 좌보님이 일이 끝날때까지 여기서 기다려 주십사 했습니다.” “뭐?” “지금 이곳을 완전히 지우시려고 하시지 않습니까.” “그게 뭐?” “...” 화들짝 놀라 백라가 장수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달려가려 하지만 부관이 냉큼 팔을 뻗어 제지한다. “비켜라!” “저는 상장군님의 명령으로 좌보님은 여기에 체류시키겠습니다!” “좌보의 권한이 상장군의 아래에 있단 말이더냐!” “지금은 전시이고 이곳은 상장군님의 관할아래에 놓여져 있습니다!” “이런!” 화를 내는 좌보에게 부관이 침착하게 말한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장군꼐서는 단지 좌보님이 오랜시간동안 전투에 임하지 않으시어 지금의 상황을 이해 못하실까 그러시는 겁니다.” “네 이놈!” 분노에 찬 얼굴로 백라가 욕설을 입에 담으려 하자 얼른 부관이 길을 비켜준다. “상장군께서는 좌보님께서 험한 말을 하시기 바라지 않으신다 하셨습니다.” “...누굴 놀리냐!” 씩씩거리며 걸어나가자 부관이 따라온다. 제지하려고는 하지 않아 상장군이 사라진 쪽으로 몸을 돌린다. 길을 도는 그 순간 깜짝 놀라며 몸을 멈추고 만다. 깊게 파여진 구덩이 속에는 나무와 마른 풀이 가득 들어있고 그속으로 사람의 머리와 목없는 몸뚱아리들이 가득 들어있었다. 화적때인듯한 그 시체에 놀란 것이 아니다. 그 옆으로 장수들이 내려치고 있는 포로의 목이 잘려 구덩이 안으로 시원하게 굴러들어간다. 어린아이다. 다섯 여섯먹은 어린아이들과 힘없는 노인들과 여인들의 머리가 젊은 장수들의 검에 잘려 몸과 목이 분리된체 구덩이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두려움에 벌벌떠는 어린아이들이 어미의 가슴속으로 파고 들어간다. 죽음의 문턱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치는 그들을 앞으로 밀고 목을 쳐버린다. 방금전까지 살아있던 몸이 뜨거운 피를 흘리면서 구덩이 속으로 떨어져 내린다. 울고 있는 어린 아이의 목을 치는 젊은 장수들의 눈동자는 무표정하다. 돼지를 도살하는 듯한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광경에 놀란 어깨를 부관이 잡고 끌어당긴다. “상장군께서는 좌보님이 이 것을 보시고 자신에게 훈계하지 않으시길 바라신다 하셨습니다.” “...미..미쳤나!” “내 자리를 지켜라 부관.” 뒤에서 예사가 다가와 부관에게 지시했다. 부관이 사라지자 예사는 턱을 쓰다듬었다. 말끔하게 수염을 깍아버린 모습이였다. 백라가 화난 목소리로 외쳤다. “화적의 소굴을 없애라는 명령이였소! 죄없는 여인과 아이들을 참수하라는 것은 아니오!” “맞습니다. 북쪽의 화적, 두령을 잡고 이곳을 없애라는 명령을 받았소이다.” “아이들과 여인들은 왜 죽이는 것이요?!” “그들의 아비는 화적이요, 낭군도 화적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도 억지로 끌려왔을 뿐 원해서 가족이 된 것은 아니지 않는가! 저들을 다 죽일생각인가?! 아무런 힘도 없는 저 들을 모두 참수해버릴 생각인가?!” “그랬기 때문에 우리들이 죽어가는 것이오!” “뭐?” 예사가 무섭게 백라에게 다가와 눈을 마주보게 했다. “그랬소. 무력한 이들을 죽이지 않는다는 것이 장수의 도리라고 배웠던 적이 있었소. 호랑이가 자신이 먹을 만큼 사냥하는 것이 죽이는 사냥감에 대한 도리라 이해했던 적이 있었소. 하지만 현실은 그것이 아니오!” “예사, 억지 부리지 말게!” “우리가 그렇게 그들을 살려본들 저들에게 우리의 가르침이 통하는 것이 아니오. 저들은 오히려 복수하기 위해 저 여인들과 아이들을 통해 우리의 뒤를 추격해온단 말이오.” “추격당할만한 당신들이 아니지 않는가!” “우리는 추격당하지 않소! 하지만 단지 정안인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죽음을 당하는 혈족들이 너무도 많소!” “이유가 부당하다!” 백라가 예사를 밀치고는 어린 아이들과 여인들의 시체가 뒹구는 곳으로 뛰어들어갔다. 이미 화적들은 모두 죽음을 당했는지 그 목과 목이 없는 시체들이 뒹굴거리고 있었다. 죽음의 공포에 떠는 아이들과 여인들이 백라를 바라본다. 98 “지금 당장 여인들과 아이들을 죽이는 것을 멈추어라!” 하지만 칼을 들고 있는 젊은 장수들은 잠시 검을 멈추었을 뿐. 물러나지는 않는다. “물러서란 말이 안들리나!” “하지만 좌보님, 이들을 죽이지 않는다면 억울하게 죽어간 혈족들을 어찌 한단 말입니까?!” 그중 한 장수가 앞으로 나와 결연하게 외친다. “제 어미와 누이는 이놈들에게 끌려가 죽었습니다. 비참하게 죽어간 그들에게 이정도의 복수도 못한다면 어찌 제가 자식이고 오라비란 말씀입니까!” “하지만 이들과 연관이 없다! 물러서라! “그렇다면 제 어미와 누이는 화적들과 무슨 연관이 있기에 그렇게 비참하게 죽어야 했단 말입니까!” “무...무슨!” “제 어미는 베를 짜며 일가를 이끌어오셨습니다. 단 한번도 타민족에게 위해 한번 하지 못하신 분입니다. 누이는 몸이 약해서 방안에서 누워만 있던 아이였습니다. 도대체 그들이 무슨 죄를 지었길래 방안에서 끌어내어져 수많은 화적때에게 욕을 당하고 사지가 짤려 죽음을 당해야 했단 말입니까!” “...!” “비통합니다! 비통합니다!” 끝내 눈물을 흘리며 젊은 장수가 원통하게 외쳤다. 주춤 물러난 백라는 그래도 안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안되네. 그렇게 비통하다면 이들도 헤아려 주기바라네. 이들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어째서 우린 그들을 헤아려야만 하고 그들은 우리를 헤아릴수 없다는 것을 용서해야하는 것입니까! 어째서 그들이 우리를 헤아리는 것을 탓하지 않는것입니까! 어째서 그들이 우리를 헤아릴수 없다는 것에 대해 분노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난!” “우리가 그 놈들보다 선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까! 그따위 선함, 내 어미와 내 누이를 위해서라면 악인이 되고 말겠습니다! 선함이라는 명예로 가슴이 답답해지는 이 원통함을 갚지 못한다면 차라리 지옥으로 떨어질망정 그리하고 말겠습니다! ” 철썩! 예사는 젊은 장수의 뺨을 후려쳤다. “좌보님께 무슨 무례란 말인가! 물러나라!” 입술을 깨물면서도 고개를 숙이고 물러나는 장수의 눈동자에는 한이 담겨있다. 그 옆의 피가 흐르는 갑옷과 검을 들고 있는 장수들의 눈에도 한이 담겨있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 눈동자에 담긴 감정에 등골이 오싹해진다. 내가 잘못아는 것인가? 순간 백라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수많은 시체. 불쌍하고 측은한 모습들. 발아래 구르는 이제 서너살 먹은 어린 아이의 시체들. “...그래도 이건...” 이해할수 없다는 눈으로 예사를 바라본다. 마주친 검은 눈동자의 장수의 눈은 오싹할만큼 감정이 없다. 깊은 곳에 들어찬 한의 차가움에 감정마저 얼어버린것일까. “살려주세요!” 말은 알아들을수 없지만 백라가 자신들이 죽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을 안 듯 여인들과 어린 아이들이 백라에게 매달린다.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그들을 바라보며 백라는 어지러움을 느꼈다. 비틀거리는데 예사가 그 등을 떠밀며 옆의 장수에게 검을 받아 백라에게 건낸다. “받아.” “...!” “죽여. 자네에게 조금이라도 장수의 피가 흐르고 있다면 할수 있겠지.” “난...난 못해!”“...못해?” 난폭하게 백라의 손에 검을 쥐어준다. “못해?! 못한다구!? 을노는 어떤가! 그 가여운 어린아이가 떠오르지 않는가?! 을야는! 너의 여동생은 무슨 죄를 지어서 죽었단 말인가!” “그만해라!” “불쌍하지도 않단말인가! 네 여동생, 네 조카딸, 자네의 약혼녀는!?” “그만해!” “죽여!” 부르르 몸을 떨며 예사가 다른 검을 빼들었다. “네놈이 그들을 죽이지 못한다면 지금 당장 여기서 널 죽여버리겠다!” “예사!” “죽이란 말이다!” “못한다!” “제발!” “못해!” “바보같은 사람!” 움찔하며 백라가 뒤로 몸을 뺐다. 예사가 울고 있었다. 뚝뚝 눈물을 떨어뜨리며 한이 녹아든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우리...아이...” “예사.” “우리...아이는... 여자애였어.” “예사?” “쌍동이였어...우리 딸아이...! 세상의 빛 한번 못보고...!” “그만해라.” 백라가 예사에게 다가가 그 우직한 머리를 안았다. 가슴팍이 장수의 눈물로 젖어들어간다. “그만해라. 잊어라. 고통스러워 한들 아무도 돌아오지 못해.” “제발...제발 죽여버려...형! 제발 죽여버려!” “그럴수는 없다! 정신차려!” “내가 이렇게 부탁하는데도!” “...!” 충혈된 눈으로 백라를 바라보는 예사는 진심이였다. 몸이 뻣뻣하게 굳어가는 느낌에 아찔하다. 하지만 간신히 고개를 저어 부정의 뜻을 나타낸다. 순간 무섭게 눈을 치켜뜬 예사가 검을 들어 백라를 겨눈다. “상장군!” 부관이 달려들어 예사의 앞을 막아선다. “장군님! 이러시면 안됩니다!” “비켜라.” “상장군!” “비켜라!” “절 치고 지나가십시오!” 부관의 담담한 대꾸에 예사의 눈이 붉어진다. 칼을 들어 내리치기 위해 망설이다가 결국 검을 던져버린다. 등을 돌려 장수들사이로 사라진다. 백라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안도의 한숨을 짓고 있는데 부관이 예사가 버린 검을 들고는 자신에게 다가온다. 움찔 뒤로 물러나지만 검을 치겨든 부관은 자신에게 매달렸던 여인과 아이들의 목을 덩겅덩겅 베어버린다. 그들의 피가 바로 튀겨나와 백라의 하얀 옷자락을 붉게 물들인다. “무...무슨!” “갈아입을 옷정도는 준비해놓았습니다.” “네 지금 날 우롱하는가!” 언뜻 목이 없는 몸이 자신의 다리를 부여잡고 있다는 것에 흠칫에 얼른 뒤로 물러난다. 하지만 이미 의지가 없는 죽은 몸인데도 불구하고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울쌍인 백라를 보고 부관이 다가가 두 손으로 시체를 떼어낸다. 털썩 털썩하고 시체들이 땅으로 쓰러진다. 목이 없는데로 바르르 떠는 시체에 놀라 백라가 가슴을 부여잡는다. 부관이 묵묵히 그 시체들을 구덩이 속으로 밀어넣으며 말한다. “좌보님은 야속한 사람입니다.” “네가 무엇을 알기에 그런 말을 하는가!”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하지만 상장군님의 부인과 아이들에 대해선 들었지요.” “흥!” 백라가 등을 돌렸다. “예사 장군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부인이 임신중에 거란족에게 죽음을 당했었지. 충격으로 어떻게 된 것은 아닌가!” “그렇게 자신만 홀로 고고한척 하시면 스스로 만족하십니까?” “뭐?” “모든 사람들이 자기보다 미천한 존재라 여기십니까? 감정에 울고 웃는 이들이 바보라 여기십니까? 자기만 이 난세에 인재라 여기며 홀로 깨끗하다 여기십니까!” “네 이놈!” 찰싹 소리가 나며 부관이 고개를 돌린다. 하지만 그는 노여워 하지 않는다. “좌보님이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 알고 계십니까!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려 들어간 사람이 스스로도 나오지 못해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보고 비웃는 사람이 좌보님이십니다! 자신은 차마 구하려 가지 못할망정 구하려 간 사람의 비난하는 사람이 좌보님이시란 말입니다!” “네 놈이 좌보를 우롱하려 드는가!” “어찌 그리 옹졸하십니까!” 부관이 안타깝게 외쳤다. “왕씨께서 좌보님을 이번 전투에 보내신 연유를 못느끼신단 말입니까?! 좌보님께서 가지고 계신 허황된 동정이 얼마만큼의 큰 피해를 입히시는지 모르신단 말입니까!” “닥쳐라!” “좌보님께서 지니신 동정은 자기 만족이십니다!” “닥쳐라!” 부들부들 분노로 떨며 백라가 부관에게 손가락질 한다. “어느 놈이고 다들 미쳤구나! 다들 미쳤어!” “저에게 상장군님을 모신지 얼마 안되셨다고 하셨습니까?! 좌보님은 얼마나 오랜 시간동안 상장군님을 괴롭히셨는지 아십니까!” “네 놈이 우리에 대해 뭘 어찌 안단 말이냐!” “적어도 상장군님께서 쌍둥이 따님을 두셨다는 것은 압니다!” “어리석은 놈! 예사의 부인은 출산을 한달 앞두고 거란에게, 금의 병사에게 죽었다! 딸은 태어나지 못했어!” “태어나지 못했으나 알수는 있었습니다!”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온다. 자신이 무엇인가 커다랗게 잘못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자신을 감싼다. “뭐...?” “그 거란인이 산채로 부인의 배를 가르고 아이를 꺼내어 그 머리를 부셔버렸습니다. 예사장군님이 그곳에 도착했을때는 이미 부인은 죽고 두 번쨰 아이의 머리를 칼로 자르고 있었단 말이오!” “....거...거짓말하지 말라!” “그렇습니다. 거짓말인줄 알았죠.” 부관이 백라를 노려보았다. “마님을 죽인 거란인이 좌보님께서 놓아주신 그놈이라는 걸 들었을 땐 분명 거짓이라 생각했습니다!” 순간. 백라는 가슴이 터져버린 통증에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뭐냐?” “형. 아무래도 어제 놓아준 그 놈이 마음에 걸려요.” “저런 저런. 아직도 넌 어린아이구나.” 백라가 씩 웃으며 정원 넘어로 산책을 하는 예사의 부인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몇 개월이지?” “예? 아아... 이제 3개월인걸요.” “이거야. 기대되서 원. 네 놈같은 괴물이 저런 선녀를 얻어 아이까지 가지다니. 항간엔 아이가 널 닮을지 세가를 닮을지 내기중인데 넌 어떠냐?” “형님!” 잘 익은 감처럼 얼굴을 붉히며 예사가 방방 뛴다. “놀리는 것은 그만두시라구요. 형님이야 말로 얼른 화랑되셔서 약혼녀와 성혼하셔야죠.” “그러게 말이다. 나는 무예에는 영 ...” “허허. 그녀는 기다리실텐데...” 이번엔 백라가 붉어진 얼굴로 뛴다. 문득 예사가 진지하게 말한다. “내일 젊은 낭도들이 모여 어제 그 거란소년을 잡을 생각입니다.” “왜?” “마음에 걸려요.” 나이답지 않는 침착함으로 예사가 정자의 끝으로 걸어갔다. 저 멀리서 자신의 부인이 천천히 산책을 하고 있다. 이른 태교다. 바라만 보아도 미소가 지어지는 풍경에 입을 가린다. 백라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반대다. 사람을 그렇게 쉽게 죽이는 것은 나쁜일이다. 그들에게도 나처럼 똑같은 가족이 있는 것이 아니겠니? 아무리 적군이라 할지라도 힘없는 사람들을 죽인다는 것은 죄악이다. 사람이 정도를 잃고 마구 살인을 자행한다면 그것이 어찌 사람이라 하곘느냐? 그것은 짐승인 것이다.” “저는 그렇게 어렵게 생각하지 않아요. 전 단지 내 아이들은 좀더 행복하게 살았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그들도 그렇지 않겠니? 적이라고 모조리 나쁘게 볼일은 아니다. 그들도 너처럼 생각하기에 그리 행동하는 것정도는 이해해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마저 그들처럼 마구 살인을 한다면 어떻게 되겠니? 우리는 타고난 고고한 민족이다. 그들처럼 지내서는 안돼지.” “모르겠어요. 저는 그냥 내 아이들도 나처럼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다른 혈족들도 형님도 모두요.” “바로 그거다. 그 소년도 너처럼 생각하고 있을거야. 그러니까 찾아 죽인다는 것은 포기해라. 불쌍하지 않니? 아직 어린 아이였잖아. 너와 비슷했다고. 그런데도 찾아서 죽이고 싶단 말이니?” “알았어요. 형님 뜻대로 하죠.” 멀리서 부인인 세가가 손을 흔든다. 환하게 웃는 예사도 손을 흔드며 중얼거린다. “난 그저 저들을 지켜줄만한 강한 아빠가 되고 싶어요. 그 이상은 바라지 않아요.” 99 신중할 것도 없이 쑥쑥 날아간 화살은 그대로 과녁에 박힌다. 하지만 정확히 중앙에 박히는 것은 없다. 구경하는 사람들은 그 대범함과 운좋음에 박수를 친다. 어깨를 으쓱인 태진이 나와 활을 겨눈다. 대조될정도로 신중한 태도로 오랫동안 과녁을 노려보다가 시위를 놓는다. 정확히 중앙으로 박힌 화살에 사람들은 환호한다. “거 참. 사람 죽이는데 저렇게 정확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형님, 왕자나 황제가 사람죽이는 죽이기 위해 활을 당기는 일은 드물어도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쏘는 일은 다반사지요.” “쳇.” 레이첸이 투덜거리며 다시 화살을 재우고 이번엔 오랫동안 과녁을 노려본다. 신중하게 노렸건만 아슬아슬하게 중앙을 빗겨간다. 박수소리 속에 의아한 표정을 짓던 레이첸은 다시 한번 정중앙에 도전하지만 역시 실패한다.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렇네. 보기엔 쉬워보이는데 말이다.” “평시에 날리는 화살은 주인의 마음대로 날아간다고 하지요. 형님의 마음이란 그런것인가보지요.” 태진의 화살은 다시한번 정중앙으로 돌진한다. 레이첸은 싫증난다는 듯 화살을 던졌다. 환관에게 수건을 받아 얼굴을 훔치고는 자신의 궁전 마당을 나온다. 태진역시 따라나오며 웃는다. “그것도 형님의 성격이요. 안되면 금방 싫증내고 토라져 버리는 것 말이요.” “뭐라고?” “하지만 오늘 저녁에 열심히 활연습을 하시겠구려. 도무지 쉽게 포기하지는 못하는 분이니까.” 정곡을 찔린듯한 말에 레이첸은 소리친다. “그깟 화살쯤, 못한들 어떻고 잘한들 어떻냐!” “하지만 속으로 제가 심히 괘씸하실텐데요.” “아는놈이 그러냐!” 화를 내며 수건을 던저버리자 태진이 그것을 줍는다. “파낭성입니다.” “응? 아아. 또 하나는?” “그것은 아직 안정했습니다.” “너 혹시 지방성의 태수가 될 생각이냐?” “뭐 그것도 괜찮다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별일이구나.” 레이첸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웃는다. “네 놈이 그런 작은 것에 고개를 끄덕이다니 말이다.” “뭐, 앞으로 가질 큰 것을 위해 지금 이 순간의 희생은 별것 아니지요.” “그럼 그렇지.” 크게 웃던 레이첸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화선이 엄청 화가나 나와 합방하지 않으려고 그런다.” “뭐, 비빈하고 매일밤을 보내시고 있다 알고 있는데요.” “그야 궁하지는 않지만 어디 그게 화선하고 같나. 그 예쁜 얼굴한번 보러 가는 것도 힘든 상황이다.” “왜요? 궁에 못들어가게 합니까?” “그렇지는 않지만 아프다고 안나오니... 단단히 토라진 것 같은데 네가 책임져라.” “상관없는 내게 책임을 물으십니까? 듣자하니 축일날 화선부인과 밤을 보내셨다는데? 그것도 아주 뜨겁게?” “시끄러워! 애초에 화선하고 틀어진 것은 네 놈이 임신사실을 숨기자고 해서가 아닌가!” 태진은 낮게 웃고는 문든 저 멀리 보이는 서관을 가리켰다. “시(詩)라도 적어보내 달래보시지요.” “시? 내가 그런 것 싫어하는 거 알잖아.” “하지만 화선부인은 고관의 외동딸이니 어지간한 보물엔 눈하나 깜짝하지 않을 여인이지 않습니까? 그럴바에야 젊은 선비들이 하는 연애놀음을 하는 것이 좋을지 모르지요.” “그럴까? 저 너덜너덜한 종이쪼가리를 보내는 것으로 날 용서할까?” “화선부인은 똑똑한 여인입니다. 어설픈 시는 웃음거리만 되니 차라리 옛시를 베끼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태진이 갈라지는 길에서 등을 돌렸다. “저는 이제부터 바쁠겁니다. 아시다시피 우리나라는 이사를 잘 안가려고 하는 곳이 아닙니까?” “잘 달래서 내보내라. 막무가네로 내보내다간 이쪽에서 혼난다.” “걱정마십시오. 형님이야 말로 사랑노래나 지으시며 얌전히 계십시오.” 멀리 사라지는 태진을 응시하던 레이첸은 고개를 돌려 황궁 외각에 위치한 서관을 보았다. 입을 다시며 생각하다 외면한다. 좀더 버텨보지 뭐. 봄 기운이 가득한 성안에서 자휼은 이상하다는 듯 다시 한번 호적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들어 호적을 가져다준 마고를 바라본다. “정안인이군.” “신기한 일입니다. 그 전에는 정안인들이 기산성까지 오는 일은 없었습니다. 자휼이 와서 그런가요? 벌써 4가족이나 기산성으로 호적을 옮겼어요.” “...친첸왕자는 뭐라 하던가?” “오는 사람을 막으라 하시는 분은 아닙니다. 하지만 호적을 옮겼다 하더라도 몇 달동안은 기산성안에서 거주할수도 없고 상업활동도 할수 없습니다. 다른 성과 마찬가지로 있던 주민을 먼저 보호해야 하니까요.” “그래서 나에게 그들을 돌보라는 것인가.” 자휼은 고개를 갸웃하며 성안을 내려보았다. 정안족은 거주지를 옮기는 것을 싫어해. 게다가 이번달은 손없는 달인데 옮겨왔단 말이지. 벌써 4가족이나 별볼일 없는 이 먼 기산성으로 말이야. 자신에게 보내준 호적을 보니 계주에서 1가족이 낭성에서 3가족이 이주해왔다. 서랍에서 지도를 꺼내들고 낭성과 계주를 찾아보니 계주성에 속한 성이 낭성이다. 좀더 자세히 보니 자신이 수련했던 난곡이 계주성의 영지인 것도 알수 있다. “마고, 근간 계주에서 무슨 일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나?” “별일은 아닙니다만... 북쪽과 남쪽의 화적들이 전쟁을 벌여북쪽의 화적소굴이 완전히 와해되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비어버린 북쪽으로 남쪽의 화적들이 이동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어떨까 내 생각에는...” “안됩니다. 자휼.” 마고는 옅은 웃음지으며 맞은편 탁자에 앉았다. “가끔 자휼은 너무 많은 것을 저에게 알려주려 하신단 말입니다.” 잠시 말을 끊던 마고는 시선을 외면하며 낮게, 하지만 강하게 말했다. “저는 친첸전하의 가신입니다.” “...그랬지. 하지만 나는 자네가 정안인이라 생각한다네.” “저도 자휼과 있으면 제가 정안인이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마고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빙긋 자휼이 웃어보인다. 상관치 않겠다는 웃음이다. 그 웃음에 마고가 져버린다. 슬쩍 미소지으며 시선과 말을 돌린다. “하지만 자휼, 여기와서 서신을 주고 받으시는 것을 못보았는걸요.” 그말에 자휼이 표정을 굳히고는 마고를 향해 몸을 돌렸다. “자네...?” “제비를 이용하지요. 제 어머니가 했던 아른한 기억이 남아있습니다.” “...만약 이 성으로 제비가 온다면 어떻게 할텐가?”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자휼, 난 친첸전하의 가신입니다. 그분이 망하는 것을 보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 “게다가 전 반괴니 정안족으로 들어갈수 없다는 것을 자휼도 잘 아시지요. 그런 제게 정안의 편을 들라는 것은 무리입니다. 저에게 남은 것은...” “됐네. 더 이상 스스로 자신을 상처입히지 말아.” 자휼은 고개를 저으며 등을 돌려버렸다. “자네가 난처하지 않도록 내 스스로 주의하지.” 마고는 방문을 열고 나갔다. 자휼은 자신의 손에 쥐어진 호적을 꽉 움켜쥐었다. 마고는 진심이다. 아닌 듯 별신경쓰지 않는 듯 하지만 그가 하는 행동과 대답 하나하나에 친첸을 배려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수가 있다. 작고 사소한 것 하나까지 그는 친첸의 안위를 생각해서 대답하고 있다. 그럴수 밖에. 마고에겐 친첸이 그의 전부인걸. 그를 혈족이라 생각하고 움직였다간 정말 큰일이 나고 말것이다. 두려운 것을 피해 도망왔다 생각했는데 오히려 호랑이굴에 갇혀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군. 하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마고의 표정이나 눈은 무척이나 부드럽고 진심이어려 자신도 모르게 경계심이 풀어진다. 무엇보다, 그 무엇보다 자신의 아이를 닮은 그 분위기에 자신이 먼저 말하고 배려하게 된다. 그는 날 죽일수는 없을것이다. 그것 하나만은 확신할수 있었다. 무거운 걸음걸이로 자휼의 방을 나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려는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불러세운다. 잠시 망설이다가 뒤를 돌아보니 예상했던 인물이 벽에 기대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아무 말없이 그를 바라보자 그는 자신에게 다가온다. “네 주인이 누구냐?” “...” “네 주인이 누구냔 말이다!” “...전하!” 멱살을 쥐어 벽에 내친다. 등에 닿는 충격에 마고는 인상을 찌푸렸다가 얼른 일어나 반대편으로 돌아간다. 이를 들어낸 친첸이 허리를 낮게 숙이고 자신을 노려본다. 언제라도 뒤로 도망갈수 있도록 거리를 둔 마고는 다가오는 그를 피해 뒷걸음 쳤다. “네 주인이 누군지 모르나?” “취하셨습니까?” “건방진 놈!” 또다시 자신이 멱살을 잡으려는 친첸의 손을 피해 얼른 뒤로 물러나버린다. “전하, 취하셨습니다. 왜 술을 드셨는지 모르지만 방으로 들어가 주무십시오.” “그 잘난 네 놈의 이성이란 대단하구나!” “그렇다면 왜 술을 드셨는지 여쭈어보라는 것입니까?” “당연히 그래야지!” 씩씩거리던 친첸은 휘청이며 벽에 몸을 기댔다. 아무런 표정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는 마고에게 친첸은 웃음지었다. “네 놈이란 참으로 알수가 없다.” “...” “술이 마시고 싶은데 왜 내 곁에 없는거냐!” “저는 전하의 술상대가 아닙니다.” “그래! 술상대가 아니지! 그럼 넌 대체 뭐냐! 왜 여기서 저놈하고 있는거냐!” “...전하께서 수해를 북문으로 보내신 것을 잊으셨습니까?” “몰라!” 졸음이 오는지 눈을 깜박이는 친첸을 보고 마고는 한숨을 쉬었다. 다가가 친첸을 부축하자 어린아이처럼 매달려온다. “날 혼자두지마라.” “예.” “넌 날 떠나면 안돼.” “떠나지 않습니다.” “빌어먹을...너는 안돼...” 곧 쓰러져버리는 친첸을 부축해 복도를 걷는다. 이상한 느낌에 뒤를 돌아보니 좀 떨어진 자휼의 방문 앞에서 그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 검은 눈동자에 마고는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한다. 힘을 주어 친첸을 그의 방으로 끌고가는 길이 너무 멀다. 등은 누군가의 시선으로 저려오고 친첸은 무겁기만 하다. 어머니, 사람은 왜 감정을 느껴야 합니까? 감정을 느끼지 않더라도 어째서 따르게 되는겁니까? 아니 따라야만 합니까? 미래를 꿈꾸는 것은 누구에게 허락된것입니까? 어째서 저는 타인의 강요에 정해진 운명을 가야 하는 것인가요? 하지만 오래전에 죽은 그녀는 대답해 주지 않는다. 지금 자신에게 남은 것은 강요된 운명과 꿈꾸고 싶은 미래의 조각뿐. 100 “두명이 한방이라. 좋지 않아. 좋지 않아.” 자례는 중얼거리며 앞에 앉은 익을 노려보았다. 익은 씩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그렇게 잡아먹을듯한 표정은 그만두라고. 어차피 두달의 예절교육이 끝나면 각방쓸테니까.” “알겠으니 어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주시면 안되겠습니까?” “뭐, 벽 하나두고 말이 많다.” 자례의 침상에서 일어나 차를 따른 익은 자례에게 건냈다. 자례가 고개를 저어 거절하자 포기하고 잔을 내려놓는다. “사실 말이야. 오래전에 죽은 동생과 네가 닮아서...” “...예?” “널 보면 동생이 떠올라 난 좋은데 너에겐 귀찮은 일이겠지.” “...익공.” “됐다.” 위로라도 해야하는 분위기에 자례가 일어나서 익의 등에 손을 대자 익은 벌컥 뒤를 돌아 손을 꽉 잡았다. 깜짝 놀라 손을 뿌리치려는 자례에게 익이 웃어보인다. “...라고 할줄 알았지! 감히 연장자의 차를 거절해! 받아라!” “무슨... 악!” 익은 따라놓았던 찻잔을 자례에게 들이부었다. 난데없이 미지근한 물벼락에 자례는 어이없이 젓은 옷을 바라보았다. 익의 낄낄거리며 웃는 소리에 정신이 들었는지 눈을 번뜩이더니 찻주전자를 잡아든다. “하하...어? 어? 잠깐! 그건 뜨겁...!” “차 잘마셨습니다!” “으왓! 뜨거! 뜨거!” 뜨거운 차에 팔딱팔딱뛰며 옷을 털어내던 익이 옆에서 깔깔거리는 자례를 보고는 침상의 비게를 들고 나왔다. 씩씩거리며 달려드는 익을 보고 얼른 웃음을 멈춘다. 내리치는 비게를 아슬아슬하게 피한 자례는 연이어지는 비게의 칼에 기둥위로 돌아 몸을 숨겼다. “맙소사! 당신이 그러고도 연장자요!” “연장자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준 놈에게 무슨 예의냐!” “이러지 마시오!” 하지만 계속 덤비는 익에게 쫓기던 자례는 얼른 창문가에 있던 사기 화병을 들었다. 앞으로 달려오는 익을 보고 잠시 망설이다가 화병을 던진다. 투박한 사기그릇이 깨지는 소리후에 버게가 떨어지는 가벼운 소리가 들리고 잠시후에 쿵 하는 소리가 들린다. “무슨 소리가 이런가?” “마기...!” “아니. 우장군이지. 황궁에선 우광덕이네. 자넨 우광효. 잊지말게 광효.” 마기가 고개를 설래 설래 젓고는 방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어지럽혀진 방안을 보고 바닥에 쓰러진 익을 가리킨다. “이 사람이 자네를 죽이려고 했나?” “그런 아니지만...” “그럼 자네보고 간이라도 내놓으라 하던가?” “그게...” 우물 우물하는 자례를 보고 마기가 인상을 썼다. 일단 익을 어깨에 메고 침대에 던져 놓는다. 함께 탁자에 앉아 차를 마시며 충고한다. “과잉반응을 하지 말게. 그것은 눈에 띄이는 짓이고 신분을 속이는 자네에겐 하등 좋은 일이 아냐. 그 누구에게도 가까이 다가가지 말고 멀리 돌지도 말게. 있어도 없는 듯 없어도 있는 듯 하는 처사가 자네를 안전하게 할것이다.” “알겠습니다.” “게다가 이제 말단인 자네의 모든 행동은 그야말로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하고 있는 셈이야. 자네들은 비서랑이니....그렇지, 낭관(郎官)이라는 관급 담당하는데 우습게 보여도 이 낭관에게 얼마나 잘보이는가에 따라 출세의 길이 결정되네. 지금 같은 경우는 동관급끼리 싸운 것이 됨으로 충분히 쫓겨날 수 있네. “예.” “뭐 대부분이 그렇듯 책을 보는 늙은이들은 까다로와 이런 작은 싸움에도 엄청난 잘못을 한 듯 고하는 것이지. 조심하게.” “감사합니다. 장군께 항상 폐만 끼치는군요.” “이젠 그러기도 힘들어.” 마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무관급이나 자네는 문관급으로 들어가는것이지. 알지? 문과 무가 어떤 관계라는것을. 친척관계라지만 내가 자네에게 신경을 쓰는 것조차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것이지. 그분의 명령이 없다면 나는 더 이상 자네에게 아무런 조언을 하지 않을것일세.” “예. 저 스스로 살아남으라 하셨으니까요.” “사실 좀더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그럼 가보겠네.” “...?” 마기가 침상의 익의 얼굴을 찰싹 때려보고는 웃었다. “잘 지내봐. 좋은 인상이군.” “글세요.” “휴가가 나오면, 물론 먼 이야기지만 당연히 우리집으로 오게.” “예.” “정오부터 3시간 간격으로 시종들이 왔다갔다 할거야. 그들에게 물어보면 걱정할일은 없을것이다.” 마기가 얼른 방을 나가자 자례는 바닥에 떨어진 찻잔을 주었다가 다시 땅에 내려놓았다. 탁자에 앉아 조금 기다리자 정오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얼마후 정말로 시종들이 들어오자 자례는 떨어진 찻잔을 가리키고는 말했다. “청소. 그리고 의원을 불러주게.” 부산스럽게 청소하기 시작하는 시종들 사이에서 편한하게 의자에 기대며 가슴에 손을 올렸다. 두근 두근 하는 자신의 심장소리를 들어본지 오래라 생소하다. 이젠 스스로 챙겨야한다. 스스로 보호해야해. “...살아나간다.” 살아나간다. 살아나가야 하니까.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으니까. 잠시후 의원이 들어오자 자례는 자신의 맥을 집게하고 병에 대해 조언을 들었다. 상세하게 독한 약의 부작용을 이야기하자 의원은 고개를 끄덕인다. “우연이겠지만 운이 좋소. 황궁의 의원들은 가슴병에 대해 타 병보다 더 많이 알고 있거든.” “예?” “전에 귀인께서 이 병을 앓으신적이 있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소. 독한 약이안된다면 민간요법도 있으니까.” “아니요. 조금 독해도 좋으니 병색을 늦출수 있는 것이였다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졸리고 피곤하다며?” “아무튼.” 자례가 손을 들어 의원의 질문을 거절하고는 일어나는 그에게 말했다. “참. 저 침상에 누워있는 사람 머리도 좀 봐주세요.” “응? 왜? 자는 것이 아니던가?” “글세요.” 씩 웃은 자례는 헛기침을 하고 방을 나왔다.사방을 보아도 풀한포기 찾아볼수 없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돌길과 거대궁전들만이 눈앞에 들어온다. 하늘위에 지어진 듯 어딜 보아도 푸른 녹잎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답답함에 하늘을 바라본다. 하늘만은 그 어디든지 푸르고 높다. 마기장군이 하고 싶다는 말은 무엇이였을까? 문득 아쉽게 방을 나가던 마기장군이 떠올라 잠시 생각에 잠기나 아무런 짐작이 가지 않는다. 그것도 답답하다. 같은 혈족인데도 말을 걸수가 없다. 오로지 홀로 여기서 목숨을 부지해서 살아남을 생각을 해야한다. 4왕자와 14왕자의 사이만 벌려 놓으면 되는 것이다. “4왕자라...” 생각나는 것은 붉은 머리. 무식하리만큼한 과격한 행동과 알수 없는 괴짜짓뿐이다. “...게다가 지금 상태로써는 왕자들의 얼굴 한번 보는 것도 굉장한 일같은데...” 결국 출세해야 한다는것인가. 가장 가깝게 보이는 서관을 바라본다. 그리고 한숨을 포옥 내쉰다. 갈길이 멀기만 하다. “다들 신원확인은 분명한 것이 정확하겠지.” “그렇습니다.” “장원을 한 놈이 생각보다 어려보이던데 몇 살인가?” “여기 21세로 되어있는데요.” “그래?” 아골타는 뒷목을 주물렸다. 히우루가 그 옆에서 관리들의 호적을 읽어준다. 이번 입관된 관리들에겐 조금의 의심스러운 점이 없다. 아골타가 고개를 끄덕인다. 5명 다 황궁에서 일하는 것으로 결정된다. “그 두 한족들을 잘살펴라. 지방입관에서 합격한 놈들이니 사주를 받고 황궁에 들어왔는지도 모르니까. 특히 친첸, 기산성쪽에서 온 놈들은 모두 돌려보내.” “잘 알고있지요. 그보다 조금 시간이 비는데 차라도 마실까요?” “됐다. 그보다 낭성쪽의 일이 들어와있던데...?” “아, 화적들이 세력싸움을 벌여 계주성이 시끄럽다고 합니다. ” “당연하지. 북쪽화적이 무너졌다니 빈 집으로 쥐새끼들이 몰려들어 가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계주성은 혼란스러울 것이다. 계주성의 태수가 누구지?” “계주성...은 산관(散官)출신의 한족입니다. 헌성곡라는 산관입니다.” “뭐? 헌성곡? 누구인가 그게?” “있지 않습니까. 축일에 천년거북을 내놓은 자말입니다.” “...?” “수염을 길게 기르고 파란 옷을 입었던 자입니다.” 그래도 기억이 안난다는 듯 아골타가 고개를 저었다. “관리수가 어마어마하니 내가 다 외우기 곤란하다.” “하지만 계주는 도성중 하나니 얼굴을 외우시는 것이 좋지요.” “그놈은 입궁시켜라.”“예?” “한번 봐야겠다. 이제 계주는 화적들의 땅따먹기가 시작될터인데 그것을 이겨낼수 있는 놈인지 말이다. 아니라면 다른 관리를 보내야겠지.” “알겠습니다.” “난 이제 시헌을 하러 가야한다. 서류를 정리해 놓아라. 저녁 다과시간에 알현을 청해라. 그때 서류를 다시 보겠다.” 히우루가 고개를 깊게 숙이자 아골타는 허리를 피고는 쿵쿵거리며 환관과 시종들의 호위속에 방을 나간다. 히우루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합격자들의 호적을 다시한번 들여다보았다. 문득 히우루는 입명장을 건내던 날의 소동을 떠올렸다. “부복하지 않았다.” 웃긴 것은 황제도 그들이 부복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있었어. 그런데 그냥 일을 속행했다. 귀찮아서인가. 하긴 요근래 일이 많이 터지고 있으니 그럴만 하지. 서류를 정리하다가 낯선 지명에 그것을 집어든다. 그것은 호북에서 온것이다. 얼마전 형님께 좌천을 당한 이복동생의 편지이다. 잠시 망설이다가 그것을 들고 만지작 거린다. 결심이 서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는다. 서신을 말고 있는 비단을 풀고 그것을 연다. 조심스럽게 연것과는 달리 그안에는 글자 하나 적혀 있지 않다. “...?” 히우루는 그것을 이리 뒤집고 저리 뒤집으며 행여 비밀문서는 아닐까 싶어 불에 비추기도 하면서 글자를 찾아내려고 하나 아무곳에도 글자는 없다. 그냥 빈문서이다. 히우루는 허탈하게 웃으며 그냥 다시 문서를 말아 버렸다. ------ 단설의 역주는 인용과 개인적 견해가 들어간 글입니다.(맹신(盟信)사양. 도용씁쓸)-------- 주: 도독(都督) 위문제(魏文帝) 때 각 주(州)의 군사와 자사(刺史)의 관원을 통할하던 관직이다. 그러나 후대에 이르러서 산관(散官)의 명칭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101 “일어나요! 일어나요!” “...?” 자휼은 흐릿한 눈을 떠 자기를 깨우고 있는 마고를 바라보았다. 그는 무장하고 있었다. 허리에 매단 검이 내는 소리에 자휼은 잠이 확 도망가는 것을 느끼고 벌떡 일어났다. “무슨 일이지?” “화적입니다!” ”화적?!“ 마고가 내어주는 검과 갑옷을 입으며 귀를 기울이니 밖이 소란스럽다. 재빨리 허리띠로 검을 올려 묶으며 묻는다. “갑자기 무슨 화적이?!” “그거야 잡아봐야 알겠죠.” “아니... 이렇게 먼 성인데 화적때가 나타나나?” “이곳은 특별한 곳이 아닙니까. 제후가 왕자의 신분이니 별 놈들 다 방문하지요.” 피식 웃은 마고는 재빨리 등을 돌렸다. 그 어깨를 자휼이 잡았다. “어디로 가지?” “저는 친첸전하 곁에...” “어리석다!” 자휼이 그의 손을 잡고 방을 나서며 화를 내었다. “기산은 성문이 8개이다. 그리고 태수의 수하엔 성문을 맡을 만한 장수는 여섯명도 되지 않아. 화적은 난입(亂入)하기 마련이니 성문엔 모두 우두머리가 있어야해. 그런데 네가 태수 옆에 있겠단 말이냐?!” “...성의 존속 여부는 제책임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분의 안위는 제 책임입니다.” “어째서 그렇게 단순한거지? 남이 볼때는 한심할정도로 태수에게 매달리고 있단말이다!” “수해는 태수가 아니라서 잘 모르는 것이겠지요.” “뭐?” 하지만 마고는 손을 빼내고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나가버렸다.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던 자휼은 성을 내며 따라 나섰다. 그리고 아차하며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뜨거운 열기가 확 덤벼온다. 성벽위는 불화살이 날고 있었다. 재빠르게 검을 빼들자 두명의 장수들이 자신에게 다가와 외쳤다. “우리는 북서문으로!” “북서문?” 저 멀리 성벽을 뛰어가는 마고의 뒷 모습이 보였다. 자휼은 고개를 한번 내젓고는 다른 장수들과 함께 북서문으로 뛰어갔다. 북서문까지 침입할정도로 화적의 인원이 많지 않았던 것일까, 수십의 군사를 이끌고 갔지만 그곳은 조용했다. 다행이라는 듯 장수들이 안도하는 순간 병사 한명이 소리지르며 한곳을 가리켰다. 스무명 남짓 되어보이는 화적들이 성벽위로 막 올라오고 있었다. 모두들 몰려 나가려 하자 자휼이 손을 들어 그들을 막았다. “활을 쏴라! 성벽으로 다가가지마!” 하지만 활을 쏠수 있는 병사들이 거의 없었다. 어이없는 자휼이 직접 활을 들어 그들을 맞추자 같이온 장수들이 도왔다. 몇 개 날리지 않았지만 그들은 올라오는 것을 포기하고 다시 내려갔다. “생각보다 빠르게 포기하는군?” 누군가 중얼거리자 자휼은 활을 맞아 죽은 화적에게 달려가 몸을 숙였다.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혹시 정안인일지도 몰랐다. 일을 꾸미는 것에 내가 방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어 얼굴을 가린 복건을 풀어낸다. 다행히 그는 한족으로 보인다. 안도의 숨을 쉬다가 문득 죽은 화적이 무기가 없다는 것을 알고 의아해한다. 몸을 뒤적여 무기를 찾다가 벌떡 일어나 달려나간다. “왜 그래요?!” “젠장! 저건 미끼야! 무기가 없어!” 따라 달려오는 장수들에게 자휼이 외쳤다. “다른 문쪽에서 같은 일이 있거든 병사들을 모아서 정문으로 모이게해!” “웃기는군. 내가 당했다. 갈라지는줄 알았건만.” 친첸이 앞으로 쏟아진 머리를 위로 올리며 웃었다. 머리위를 아슬아슬하게 화살이 지나간다. 마고가 달려와 친첸의 허리를 잡아 안쪽으로 끌여당겼다. 화살을 피할만한 곳으로 가자 숨찬 목소리로 친첸에게 말한다. “다른 문으로 가있는 장수들을 다시 부르겠습니다.” “그래야겠지.” 마치 다른 사람일처럼 친첸이 고개를 끄덕이자 마고는 친첸의 얼굴을 잡아 눈을 들여다 본다. “괜찮으신가요?” “물론. 다 괜찮아. 하지만 넌 일어나지마라.” 명령을 내리기 위해 일어나려는 마고를 친첸이 잡아 앉게한다. 씨익 웃으며 마고를 바라본다. “바보놈들이 아닌 이상 이쪽으로 오겠지. 네가 가는 것은 무의미해.” “하지만...” “숨이 막히잖아. 여기 있어라!” 마고는 일어나려는 생각을 접고 친첸의 앞에 앉았다. 성문이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그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짝하는 소리가 나며 얼굴이 화끈거리는 통증에 눈을 크게 뜬다. 화난 표정의 친첸이 손을 들어 마고의 뺨을 내친다. “성의 존속은 내가 결정한다! 네가 걱정해야 하는 것은 바로 눈 앞에 있는 나야!” “알고 있습니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친첸은 머리가 아픈지, 아니라면 스스로 감정을 추스르려 애를 쓰는지 인상을 쓰며 신음을 한다. 고개를 떨구자 마고가 가까이 다가가 어깨로 머리를 기대준다. 땀과 피에 젖은 손이 자신의 옷자락을 꽉 부여잡는다. “황제가 보낸거다! 황제가 그런거야...” “그저 화적때입니다. 걱정하실 필요없습니다.” “아니야!” 큰 외침에 놀라기도 전에 화살이 자신의 옆으로 날아온다. 불붙은 화살이 바로 옆에 박혀 화르륵 타오른다. 그 자리에서 피하고 싶지만 자신에게 매달린 친첸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친첸을 잡고 일어나려 하다가 그냥 큰 숨을 내쉰후 그대로 자세를 유지한다. “멍청한 놈!”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며 몸이 벌떡 일으켜진다. 고개를 드니 자휼이 자신을 바라보며 혀를 차고 있다. “알고 오셨군요.” “난 바보가 아니야! 그리고 다큰 아이를 품에 안고다니지마. 네가 보모냐?!” 냉큼 친첸과 마고를 떼어낸다. 활을 들어 다가오는 화적에게 날린다. “활을 못쏘는 병사라니! 난리났군!” “이런 산속 성의 병사는 창을 주로 사용하지요.” 창을 주어든 마고가 멋지게 화적을 베어보인다. 뒷따라 달려온 장수들에게 전하를 인계한다. “친첸전하를 안쪽으로!” “태수가 왜 그러는거지?!” 그 말에 갑자기 조용히 앉아있던 친첸이 벌떡 일어났다. 머리가 아프다는 듯 눈을 감았다 뜬다. 허리에서 칼을 꺼내며 자휼의 앞으로 나가며 중얼거린다. “몸이 힘들어서 휴식한거지.” “예?” 어이없다는 자휼을 등지고 친첸은 앞으로 달려나간다. 가볍게 휘두르는 검에 화적들이 성 아래로 떨어져 버린다. 완벽하다라고 할수 있는, 자신과 싸운다면 이길것이라는 보장을 하지 못하는 멋진 솜씨에 자휼은 감탄한다. 마고가 친첸의 뒤를 따라가려 하자 그를 잡고 말한다. “중앙문이 열렸다! 그걸 닫아야해!” “수해가 가서...!” “난 저거 작동방법 몰라! 네가 가라!” 등을 떠밀어 마고를 밀친다. 머뭇하던 그가 결정했는지 아래로 뛰어내려가는 것을 보고 잠시 숨을 돌릴때 등뒤에서 울리는 방울소리에 흠칫몸을 떤다. 빠르게 몸을 돌리자 꽤 떨어진 곳에서 이런 아수라장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깨끗한 회색 승복을 입은 중년인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스님?” 이런곳에 스님이 있다니. 자휼은 그에게 다가갔다. 위험하니 성 아래로 숨어있으라 말하려고 했다. 통통하게 살이 붙은 부드럽게 생긴 얼굴에 몸도 통통했다. 아니 매우 거대했다. 아마도 자신보다 3배정도는 무거워 보였다. 그는 자휼이 다가가자 빙긋 웃으보이며 합장했다. 그의 손에 들린 염주가 딸랑이며 울렸다. 나무구슬이나 옥으로 만드는 염주와는 달리 구슬이 들어있는 염주였다. 자휼도 고개를 약간 숙여보였다. “스님 여긴 위험...?” 하지만 고개를 들었을때는 아무도 없었다. 헛것을 본것처럼 자신의 앞에는 불붙은 화살만이 간간히 날아올 뿐이였다. 잠시 눈을 의심한 자휼은 재빨리 성문쪽으로 내려갔다. 성위에서 버티고 아래를 내려보는 친첸은 예전의 그 당당하고 강한 모습이였다. 더 이상 성벽위로 화살이 날아오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달려간 성문은 아수라장이였다. 참호속에 시체가 쌓여 그것들을 건지지 않고서는 성문을 닫을수 없었다. 장수들과 몇몇의 병사들이 시체를 건저내고 있었다. 성위와는 달리 아직 끝나지 않은 싸움에 자휼은 두리번 거리며 마고를 찾았다. 마고는 성문 바같쪽에서 성안으로 들어온 화적이 도망치지 못하게 성안으로 몰고 있었다. 자휼은 달려가 마고의 옆에 섰다. “그냥 내보내라!” “안되요! 누가 시킨것인지 알아내야 합니다!” “화적은 누구의 지시도 받지 않아! 이들은 스스로 온것이다!” 자신에게 덤비는 한 사나이를 칼로 베어버린다. 뜨거운 피가 튀긴다. 하지만 의견을 굽히지 않는 마고에게 지고 말아 자신도 옆에서서 밖으로 나가는 화적들을 죽인다. 아슬하게 피한 화적의 검이 자신의 뒤에 버티고 있었던 마고에게 향한다. 자휼은 급한김에 마고를 밀어 넘어뜨렸고 넘어진 마고는 영문을 몰라 화를 내다가 뒤로 스치는 칼에 벌떡 일어난다. 그리고 동이 트자 하나둘 나온 기산성의 주민들은 자신의 집앞에 있는 시체를 보고 멍석을 가져다 덥는다. 새벽의 혼란함과는 전혀 다른 그 고요함에 자휼은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여유있는 싸움이였다. 목래와의 전투와는 전혀 다른 그저 일상에 흔히 보는 도적을 모는 일이였다. 그런데 왜 이렇게 피곤한것일까. 허리를 뒤로 피는 자휼에게 마고가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내민 손을 바라보다 잡고 일어선다. “수고하셨습니다.” “....너도.” 흙과 피가 튄 옷을 털어주는 마고가 문득 지난날의 자신의 아이를 떠오르게 해 가느다랗게 미소짓는다. 어차피 소용없는 일인데도 찻물을 털어내던 아이가 떠올라, 고개를 드는 마고의 미소진 얼굴에 그 서글픈 미소가 겹쳐진다. 날 바라보며 미소짓지말아. 등을 돌려 살아남은 화적들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본다. 하지만 눈이 보고 있는 저 산속이 아닌 그 어딘가를 떠올린다. 작은 대장간. 작은 정원. 큰 길. 그리고 거기 하염없이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던 아이. 그리고 그 뒷모습을 바보처럼 바라보았던 자신까지도 보인다. 102 우아한 곡선을 그리던 제비는 어디론가 모르게 날아가버렸다. 창가에 서서 제비가 사라지는 방향을 가늠하던 자례에게 익이 말을 걸었다. 그는 품안 가득 종이와 책을 들고 있었다. “여유만만하시네. 창가에서 바람도 쐬고.” “종이가 없으니 할일도 없죠.” 익이 가져온 종이를 탁자에 풀자 자례와 익은 다시 각각의 책상에 앉아 책을 필본하기 시작했다. 이미 있는 책을 필본하는 일이라 지겹고 따분한 작업이였지만 둘다 별다른 불평없이 베끼는 중이였다. 사실 불평하고 말 것도 없이 비서랑의 할일이란 이것뿐이였으니까. 자례가 먼저 끝내고 책상을 정리하자 익이 이상하다는 듯 말리고 있는 종이를 들여다 보았다. 팔랑이며 종이를 들여다본 익은 웃는다. “그다지 성의있게 쓴것같지는 않은데.” “하지만 익공이 쓴것보다는 많이 괜찮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넌 더 잘쓸수 있으니까.” “어차피 필본이란 이름이 남지 않는 작업이니 명필이던 악필이던 마찬가지아닙니까.” “하지만 낭관은 누가 어떤 필본을 했는지 알고 있지 않나? 자네는 출세하고 싶지 않는 듯 하군.” 그말에 자례가 뒤를 돌아보고는 말리고 있는 익의 필본을 바라본다. 정말로 잘쓴 것은 아니다. “익이야 말로 잘 써야 할 것 같습니다.” “내 글자는 원래 그래. 다들 내 글자가 이런줄 알아. 하지만 넌 시험보았을때 이런 글씨가 아니였지 않니?” “그걸 어떻게 알죠?” “종이를 가지러 갔다가 낭관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거든.” “그들이 뭐라 하던가요?” 탁자에 올려진 약대접을 들고 자례가 창가로 다가갔다. 돌바닥 사이사이에서 풀한포기 나지 않는다. 봄이 오고 있지만 어디에서도 그 모습을 볼수는 없다. “네가 명필이라 시험지를 낭관중 하나가 가져간 모양이던데.” “허! 할일 없는 낭관이군.” 실소한 자례는 인상을 찌푸리며 약을 마셨다. “그래서 네가 쓰는 그 필본말이야, 특별히 2왕자가 부탁한것이라 하던데.” “그래요?” “그런데 뭘 그렇게 먹는거냐? 맛있는 거면 나도 줘라.” “머리붕대나 다시 감고 와야 하는 시간 아닙니까?” 숨도 삼키지 않고 약을 다 마신 자례가 차를 마셔 입을 헹구며 말했다. 익은 자신의 이마에 둘러진 붕대를 만져보았다. “그리 심하진 않는 상처인데. 붕대를 감아 놓아서 크게 보이는 거지.” “아무튼. 덧나면 더 이상 책임지지 않습니다.” “네가 잘못한 것은 아나보지?” 장난스럽게 말한 익은 붕대를 갈기 위해 방을 나갔다. 혼자 남은 자례는 입속에 남은 쓴 기운에 헛기침을 하다가 말리고 있는 자신의 필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주저없이 수많은 필본들을 구겨 바닥에 버린후 다시 책상에 앉았다. 명필을 원한다면 그렇게 해주지. 레이첸은 다급하게 궁안을 가로질렸다. 따라오는 환관이 송구하다는 듯 얼굴을 가리고 따라 뛴다. “어떻게 된일이지?!” “그게...상한 떡을 드시고...” “맙소사!” 레이첸은 작게 욕설을 내뱉고는 화선의 궁으로 들어갔다. 문앞에 그가 올줄 알았다는 듯 여관과 나이많은 환관들이 서서 그를 막는다. “이것은 법도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정비가 아닌 여인의 문병을 오시다니요!” “비켜라!” “그럴수는 없습니다!” 여관과 환관들이 문앞을 가로막고 섰다. 절대로 피할수 없다는 얼굴이였다. 레이첸은 몇 번더 소리질렸지만 그들은 꼼짝을 하지 않았다. “너희들...!” 등을 돌린 레이첸은 뚜벅뚜벅 걸어 궁을 호위하는 병사에게 다가가 창을 빼앗아 들었다. 여관과 환관들이 움찔했지만 비키지 않는다. 창을 세우고 걸어온 레이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차가운 표정으로 레이첸이 다시한번 강하게 말했다. “비켜라!” “...안됩니다!” 인상을 쓴 여관이 강하게 말한다. 레이첸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괴씸한 것. “화선?” 부드럽게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자 가느다랗게 눈을 뜬다. 너무도 오래간만인지, 창백한 그녀가 새삼스럽게 너무도 아름다워 입을 맞춘다. 하지만 레이첸의 정열에 반해 화선은 그냥 눈을 감아버리고 만다. 전의 일에 아직도 삐진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레이첸은 옆에 서 있는 의관에게 몸에 대해 묻는다. “식중독입니다. 단순한 것이니 너무 걱정하시지 않으셔도...” 쫙!하는 소리가 들리며 지긋한 노인이 저 멀리 밀려가며 휘청인다. 어리둥절하며 왕자를 보지만 그의 표정이 너무나 평온해 의관은 자신이 무엇인가 잘못했다는 것을 알고 얼른 부복하며 용서를 구한다. “아이는?” “예? 아 ... 저 그게.” “내 아이는!” “무...무사하십니다! 아기씨께서는 아무렇지도 않으십니다!” “그래? 너는 두고두고 내 첫아기에게 감사해야 할것이다. 그 가느다란 목숨의 은인이니까.” 의관이 방에서 쫓겨나자 레이첸은 화선의 손을 잡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처음으로 저 어린 여인이 자신의 여인이고 자신이 그녀의 사내라는 것이 느껴져 가슴이 뜨거워진다. 그리고 아직 가느다란 허리지만 곧 자신을 아버지라 부를 아기를 상상하고 손을 올려본다. 화선의 차가운 손 때문인지 문득 그녀를 보호해야한다는 들어 뭉클해지는 감정을 추스려본다. 부관은 혀를 차며 수건을 갈았다. 퉁퉁 부은 눈이 쉽사리 가라앉지 않는다. 쓰리다고 아프다고 칭얼대는 선인의 배를 꾹 누른다. “아파! 왜 누르는거냐?!” “꼴사나와서 그럽니다! 아니 그러게 왜 눈을 치켜뜨고 그럽니까 그래!” “눈싸움에서 지면 싸움에서 이길 마음이 안생긴단 말이다!” 을노가 퉁퉁부은 눈에 다시 물수건을 대고 누웠다. 부관이 뭐라 한마디 더 하려고 했지만 등을 돌린 장군은 색색거리며 다시 잠들어버린다. 부관은 그 어꺠를 흔들며 잔소리를 한다. “그러기에 혼자 감당하시려니까 이렇죠. 선인은 무술이나 지략과 더불어 외관도 중요한 것. 이렇게 퉁퉁 부은 조기 눈으로 선인이라고 말할수 있겠습니까. 원군을 청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니까요. 어째서 부관을 말을 잔소리로 들으시는 겁니까. 이러면 어떻게...” “부관!” “예?” “잠 좀 자자, 잠 좀!” 꽥 소리지른 을노는 다시 흥 하고 등을 돌려버린다. “지금 병사들은 부족하지 않다. 게다가 근래에 작은 싸움으로 아위와 다위들이 빠졌다는 것은 저들도 몰라. 그러니 병력에 문제가 있어 힘든 것이 아냐.” “그렇다면 왜 매일 징징거리십니까 그려?” “거야 상대가 미친놈이니까 그렇지!” 버럭 화를 내며 벌떡 일어난다. “미친놈을 상대로하는 놈은 미쳐야 하는거야! 고로 내가 미친 놈이 되어가고 있단 말이다! 정말 미치겠네! 누군 저들을 상대하고 싶은건줄 알아! 하지만 저 미친놈을 감당하는 장수가 나뿐이란 말이다! 저 미친놈 미쳐서 그렇지 싸움을 얼마나 잘하는줄 네가 알아!” “알죠. 하지만 장군님만 할수 있다면 다른 한분도 할수 있지 않습니까?” “누구?” “을지 마기 장군이요. 그분도 선인이시죠.” “선인 마기께서는 20년 전에 외도 불문이 되어버렸잖아! 황궁에서 나올수가 없단 말이다. 너 나 약올리냐?!” 씩씩거리면서 일어난 을노는 물수건을 치웠다. 장막을 나서자 부관이 따라나오며 중얼거린다. “그 눈 정말 흉합니다.” “너 맞는다!” “장군님, 호북군벌 악가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악가에서 사신이?” 부관에게 한대 먹이려고 한 손을 치우며 을노는 일단 사신을 만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장막안으로 들어가자 그곳에는 얼굴을 다 가린 작은 사람이 앉아있었다. 을노가 들어가자 그 옆에 앉은 장수가 정중하게 부탁한다. “사람을 물려주십시오.” “그러지.” 안된다는 부관의 표정을 무시하고 다들 나가게 한다. 모두 나가자 키 작은 사신이 얼굴을 가린 복면을 풀고는 웃는다. “호호호, 과연 선인으로 이름 높은 장군이군. 이 여인이 반했소이다.” “...설마 악가의...?” “그렇소. 내가 악가의 마나님인 선부인이요. 장군을 뵙소.” “선인 을지입니다.” 둘다 인사하고 나란히 앉자 여인은 자신의 호위하던 장수마저 내 보낸다. 둘만이 있는 작은 장막에서 묵묵히 침묵이 흐르다가 선부인이 먼저 말을 걸었다. “내게 뭐 묻고 싶은 것 없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요? 나는 알고 싶은 것이 있는데.” “무엇입니까?” “내 손주놈의 소식이요.” “손주라면...그...하지만 그는 장군 악비와 함께 독살당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천연덕스럽게 을노가 딱 잡아때었다. 그 모습을 노마님이 노려보다가 고개를 돌린다. “그런가. 아직 장군은 모르지. 그렇다면 내 오늘 온 것이 정말로 다행이구료.” “제게 무슨 하실 말씀이...” “중요한 말이요. 아마도 자네에게 전해지지 않았던 모양이구료.” “예?” “너무 긴장하지 말고 들으시오.” 을노의 손을 토닥토닥거리며 노마님이 진지하게 말했다. “실은 우리 악가와 자네의 송가는 정혼한 사이라네.” “저런...예?!” 화들짝 놀라며 을노가 뒤로 물러났다. 얼마나 물러났는지 장막의 천이 등에 붙는다. “무...무...무...순.. 무산...” “무슨 장난이 이리 심하냐고? 이사람 장난이 아니야.” “마..말...” “말도 안된다고? 나도 자네 아버지가 그런 말을 할때는 몹시나 놀랬지.” “거...거” “거짓말 말라고? 이사람. 내가 이 나이가 되어서 거짓말 하겠는가!” “타민족과 혼인이라니 안돼!” 장막밖에서 기다리던 부관과 노마님의 호위장수가 을노의 비명소리에 깜짝 놀라 몸을 움추렸다. 둘다 들어가려고 하다가 서로 눈치만 보고 다시 장막밖에서 하늘만 처다본다. “우리 아버님이 그랬을 리가 절대 없습니다. 타민족과 혼인이라니요! 절대로 절대로 말도 안되는 말입니다.” “그래? 하지만 정말이야.” “지금 마님께서는 우리 아버님이 저에게 악가의 여인과 혼인을 하겠다는 말을 하셨다는 것인데 설마 그것을 지금 이루시려는 것은 아니겠지요. 저는 모르는 일이거니와 적어도 악가의 여인의 행복을 바란다면 저와 성혼을 안하는 것이 지당합니다. 보시면알겠지만 지금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 있지 않습니까! 차라리 근처의 적당한 장수에게 보내여 노년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여인에게도 행복한...!” “그만 그만.” 을노의 끝없는 부정에 노마님이 입을 막고는 혀를 찼다. “누가 자네랑이래? 난 딸 없어.” “예?” “내 손자와 자네 누이와 말이야.” “내 누이? 을야?” 순간 탁자를 쾅 울리며 을노가 매섭게 눈을 치켜떴다. “우리 누이가 설령 약혼을 하고 죽었다한들 그 아이는 우리 가문 아이요! 자고로 정안은 혼인하고 아이가 셋이 생기더라도 사내가, 여인이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 혼약은 무효요! 내 누이의 명예를 더럽히시려거든 여기서 동맹을 깨시오!” “진정하게. 선인. 나도 당신들의 혼약에 대해서는 조금쯤은 알고 있어. 게다가 자네들은 부모가 정해준 혼약도 스스로 파기할수 있지 않는가? 결국은 자네 누이가 내 손자를 거부할것이라는 것을 나도 짐작했다네. 그래서 약혼을 하고서도 그 아이에게 그것을 말한적이 없네.” “그런데?” “내 며느리가 그것을 아이에게 말해버렸어. 그렇지만 자네 누이는 죽었지 않는가? 결국 그놈에게 자네 누이는 꿈속에서나 나올 천녀가 되어버렸단 말이네.” “예?” “그 놈이 자네 누이가 아님 성혼하지 않겠다고 말하며 집을 나가버렸단 말이네!” “하?” “우연히 그날 내 아들은 독살을 당했어. 그 놈이 집을 나간 것은 지 목숨을 살린것이지. 이거 원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무튼 그놈에게 자네 누이가 단명했다는 말을 전하지 못한 내 잘못이기도 해. 그 놈이 누이를 찾아 나선다고 그쪽으로 건너갔었는데 혹시 못만났는지...선인?” - 그렇다면 을노 장군의 성씨는 무엇이지 알아도 괜찮겠습니까? -눌현성의 송씨네. 소나무씨라고도 하지. -...송이라...혹시... “으아악!” “애그머니나!” “안돼! 안돼! 그놈은 절대 안돼!” 장막안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에 장막 밖의 사내들은 그저 어깨만 움찔움찔하며 자신의 주인이 자신을 물러주길 기다릴 뿐이다. 103 익은 이해할수 없다는 얼굴로 자례를 보았다. 한숨을 쉬고 천장을 보고 땅을 내려보고 하더니 결국 소리를 지른다. “아니 그것을 갖다주었단 말이지! 너 바보냐!” “말이 험합니다. 익공.” “익공이고 뭐고, 너 정말 바보냐! 잘 써서 그것을 냉큼 같다 주었다는 것이 말이 되냐! 어제 만 하더라도 필본할것이 많이 남아있던데 언제 그걸 다 써서 줘버린거냐!” “어차피 필본은 낭관을 걸처 필요한 사람에게 가는 것이 아닙니까. 무슨 걱정을 하는 겁니까.” “바보놈! 낭관이 잘도 2왕자에게 건내어 주겠다!” “...?” 자례가 등을 돌려 혼자서 열을 내고 있는 익을 바라보았다. 익은 허리에 손을 얹고 씩씩거렸다. “어린 아이야, 이곳은 전쟁터라고 했지 않는가! 너나 나나 잘나서 구석에 박혀 있는 것을 잊었는가?! 낭관에게 주면 그것을 2왕자에게 잘 전해줄것같은가? 천만해, 내기할까? 네 놈은 얼마 안가 하지도 않는 실수를 들어 지방관으로 좌천되거나 목을 매달릴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잠잠해지면 네 필본을 쥐고 있는 낭관은 2왕자에게 네 필본을 건내며 자신을 천거하겠지! 알겠냐 이 바보야!” “...일리있군요.” “뭐? 일리가 있어? 이건 사실이야 임마! 곧 있을 네 사고 소식을 즐겨주마!” 자례는 고개를 괴고 생각에 잠겼다. 사실 겉으로는 태연한척 하지만 속으로는 아차하고 있었다. 잊고 있었다. 이곳이 전쟁터인 줄. 손톱을 잘근 잘근 씹으며 앞일을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생각하지만 아무해답도 나오지 않는다. 그럴 수밖에, 황궁의 사정에 대해 지방성에서 한가하게 보내던 내가 어찌 안단 말인가. 게다가 이 황궁은 왕씨의 것도 아닌 전혀 모르는 타민족의 관할이다. 아무리 자신이 뛰어나다고는 하지만 고작 몇주일 사이에 황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 대처하는 것은 무리다. 아무것도 모르겠다. 심지어 익의 말이 사실인지 거짓인지도 모르곘어. “손톱 물어뜯지마. 신경쓰이잖아!” “...익공.” “왜? 놀릴만한 인간이 생겼다고 다고 생각했는데 고작 한달도 못버티고 가버리는구만.” “익공은 참으로 궁안내의 사정에 대해 잘 알고 계시는군요.” 비아냥 거리는 목소리에 익이 화를 내었다. “네가 멍청해서 벌어진 일이다. 내게 화는 내는 것이냐?” “내가 아무리 멍청한 들 지금 이 난관을 헤쳐 나갈수 있는 방법을 하나 알아내었습니다.” “호오.” 익이 자례의 침상에 털썩 누웠다. 베개를 비고는 약간 미소짓는다. 풀향이 묻어난다. 황궁에서 맡을수 없는 자유의 내음이다. “말해봐라. 뭐냐?” “익공에게 부탁하는 것으로 하지요.” “뭐? 하하하. 너라면 그걸 알려 주겠냐? 나로써는 조금 섭섭하긴 하지만 막강한 라이벌이 사라지는 일이니 반가운 일인데?” “그렇습니까? 익공?” 자례는 침상으로 다가가 앉았다. “...?” “왜?” “아뇨.” 누워 눈을 감은 익은 왠지 정감이 느껴지는 얼굴이다. 자례는 손을 뻗어 익공이 빈 베개를 빼어 내며 탈탈 털었다. “저 스스로 이 난관을 헤쳐 나가기는 힘들지만 익공까지 저와 함께 궁에서 내쳐지는 방법은 알고 있습니다.” “허? 너 나 지금 협박하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한번 해봐라. 내가 잘도 나가는지 보자.” 낄낄거리며 비웃는 익은 깜짝 놀라 웃음을 멈추었다. “야, 야, 임마, 너...!” “익공.” 어디서 난 것인지 자례가 작은 비수를 들고 익을 내려보고 있었다. 얼른 일어나려고 하는 익의 목에 칼을 들이밀어 다시 눕게 한다. “너...칼은 어디서 생긴거냐!” “입궁할때부터 가지고 있던 것입니다. 항상 베개 속에 넣어두었는데 익은 모르셨습니까? 제 베개를 많이 비셨잖아요?” “베개가 무겁다고는 생각했지.” “그래요?” 자례가 싱긋 미소짓는다. 저 얼굴에 미소라니 참으로 아름다울것이 분명한데 목에 칼을 들이밀고 저렇게 웃으니 등골이 오싹하다. “너 나 죽일거냐?” “생각중입니다.” “...사람죽이면 사형이다.” “익공의 말에 따르면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저에겐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렇지.” “그렇다면...” 슥하고 목밑에서 단도가 움직인다. 자례는 능청스럽게 칼을 까닥이며 생각에 잠기는 척을 한다. “이래도 죽고...저래도 죽으니...이왕 죽는 것...” “이봐...” “길동무나 한명 데리고 갈까?!” “야!야! 칼 조심해 칼!” 목에 스치는 금속의 느낌에 익이 놀라 외친다. 낮게 웃은 자례가 단도를 목에서 치웠다. 치우자 마자 익이 벌떡 일어나 자례를 밀쳐버린다. 그 박력에 침상아래로 떨어진 자례가 옷을 털고 일어나자 익이 화가 나는지 베개를 던졌다. “건방진 녀석! 검을 치웠으니 두 번 다시 기회가 있으리라 생각하지 말아라. 네놈이 덤벼보았자 체구로 볼때 네가 날 이길수 있을 것 같아?!” “애초에 당신을 헤칠생각은 없었습니다.” “목에 칼을 들이밀었던 적은 뭐고!” “단칼보다는야, 사형수로 벌벌떨며 목이 잘릴때까지 무죄를 외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말을 마친 자례는 단도의 날을 돌려 자신의 목으로 향한다. 이번에도 익이 기겁을 한다. “뭐야! 뭐냐고!” “익공. 날 도와주셔야겠습니다.” “웃기지 마라!” 익 또한 지지 않고 외쳤다. 자리에 털썩 앉아 고개까지 괴고 목을 겨눈 미인의 초상을 감상한다. “그런 자해 협박으로 날 잡을수 있을거라 생각하는 것인가! 네가 죽어자빠지는 내 알바가 아니야! 지금 당장여기서 목을 그어봐라! 잘 구경해주마! 패월 초선, 항우를 위해 그 목을 치는구나!” “누가 자해합니까? 나는 익공에게 살해 당하는 겁니다.” “무슨 말이냐! 검은 네가 쥐고 네 목을 겨누고 있지 않는가!” “그말을 과연 낭관이 믿을까요?‘ “...!” 벌떡 일어나 비웃음을 가신다. 익은 무서운 눈으로 자례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자례의 눈은 그런 익을 비웃고 있다. “자신에게 필본을 가져다 주는 멍청한 비서랑을 믿겠습니까? 입궁 첫날부터 낭관에게 궁안의 비리를 말한 비서랑을 믿겠습니까?” “네 이놈!” “낭관으로써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군요. 나야 단순히 여기서 목을 긋는다면 끝나는 것이지만 익은 고생좀 하셔야 겠습니다. 아니면 내 뒤를 이어 따라오시겠습니까? 길동무가 느는 것 또한 즐거운 일.” “검을 내려놓아라!” “왜요?” 피식 웃는 자례를 보고 악이 생긴 익이 달려든다. 하지만 사뿐하게 옆으로 피한 자례는 검을 더욱 자신의 목으로 당긴다. “다가오지 마시오.” “검을 내려놓아!” “큰 소리 치면 시종들이 달려오는것도 모르시오? 빼도 밖지도 못하오.” “네 이놈!” 익은 우락부락하게 화를 내기 시작했다. 방안의 모든 물건을 마구 집어던지며 표효한다. 한동안 씩씩거리던 익은 갑자기 크게 웃었다. “하하하! 졌다.졌다. 젠장할, 졌다고!” “...” “좋아. 널 돕겠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것은 서로가 이익이 되는 것으로 한다1 네가 출세한다면 날 도와야 한다. 이 조건을 못맞춘다면 난 널 돕지 않아!” “승락합니다.” 자레가 힘없이 목에서 칼을 내렸다. 익이 놀란 눈으로 일어나 자례에게 다가가 목을 잡았다. “목에 상처가 났다!” “괜찮습니다.” “의원을 부르겠다. 여기 앉아!” “...” 헝클어진 방안의 의자를 세우고는 익은 자례를 앉게했다. 시종을 부르는 종을 울리는 익을 보고 자례는 또 한번 작게 웃었다. “왜 웃어?” “아니 아까와는 너무 달라서.”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고! 그보다 너 움직이지마! 상처가 벌어지잖아!” “...예” 시종들이 와 어지러진 방안을 보고 놀라하기도 전에 의원을 부르러 가야했다. 그들이 의원을 부르러 가는 동안 익은 손수건을 꺼내들고는 자례의 목을 눌렀다. “아파요.” “그러길래 누가 이렇게 상처입혀 놓으래?” “익이 처음부터 순순히 날 도와주었으면 이런 일은 애초에 없지요.” “바보. 사람이 사람을 믿는다는 것이 그리 단순한 것인줄 아느냐?” 그말에 자례는 또한번 실소했다. “익의 말이 맞군요. 사람이 사람을 믿기는 힘들지요.” “또 하나 조건이 있다.” “예?” “네 몸을 담보로 거래를 하지 말아라.” “...하지만.” “하지만 뭐?” “하지만 지금 제가 가진 것은 제 몸밖에 없지 않습니까?” 빤히 자신을 바라보는 자례의 대답이 틀린 것은 아니기에 익은 잠기 생각하고는 화를 내었다. “누가 그걸 모른데? 앞으로는 그러지 말란 말이야! ” “앞으로도 제가 가질것이 더 생길 것 같지 않은데요.” “아 이자식! 앞으로는 내가 네 옆에 있으니 나부터 걸어! 너부터 걸지 말고! 알겠냐!” “내 내기는 위험한데...” “이놈!” 딱 소리가 나며 이마가 가볍게 울린다. 익이 또 손가락으로 이마를 친것이다. “앞으로는 나먼저 걸어라. 알겠냐?” 자신의 바라보는 익의 눈길이 너무나 걱정스러워 보인다. 그것이 진심이라는 것또한 느낄수 있다. 자례는 문득 자신의 목을 잡고 있는 익이 믿어도 될만한 사람이라고 느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7월의 첫날에 태어났지. 우연하게도 같은 날인걸까. 모르긴 하지만 형이 이런 성격이였다면 좀더 깊게 서로를 보일수 있었을지도 몰라. “어린애야, 대답은?” “...” “야!” 재촉에 못이겨 자례가 싱긋 웃었다. “앞으로는 위험한 내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104 “음식맛이 좀 다르지 않습니까?” “뭐가?” “형님의 궁의 음식맛이 다르다고 했습니다.” “잠자코 먹어! 헛소리 늘어놓지 말고. 내 궁에 와서 먹으면서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그래요.” 태진은 수저를 놓고는 옆의 수건을 들어 입을 닦았다. 물끄러미 식사를 계속하는 레이첸을 보고는 피식 웃는다. “그거 들었습니까 형님?” “뭘?” “황제가 호랑이를 기르지 않습니까?‘ “그건 왜? 이미 오래전에 결정된 일이잖아.” “그런데 며칠전에 그 호랑이에게 살아있는 사람을 먹이로 주었다는군요. 그것도 3사람이나 산채로.” “...” 태진은 과장스럽게 창문을 열고 바람을 들어오게 했다. 봄으로 따뜻해진 바람이 들어온다. “그 사육사가 보았다지 뭡니까. 허공에 매달려 다리부터 먹혀들어가는 사람들이 고통에 꿈틀거리는 것을.” “...시끄러워.” “하긴. 이미 죽어있다고 해도 되는 사람이였지만 말입니다.” 태진은 탁상으로 다가가 레이첸의 앞에 손을 강하게 내려높고는 그를 마주보았다. “그들은 눈이 도려내어지고! 귀와 코가 잘려있고!” “...” “손가락이 모두 젖혀져 있는데다가! 손톱이 빠져있고!” “...” “팔다리가 모두 잘 익혀져 있고! 머리가죽이 벗겨져 있고!” “...” “그래도 죽지 않고 산채로 호랑이가 자신을 먹는 것을 보아야했죠.” 레이첸이 수저를 놓았다. 입을 닦고는 거칠게 음식위로 그것을 던졌다. “돌아가라 네궁으로!” “내장이 튀어나올때까지도 살아있었다고 하던데 말입니다?” “돌아가라!” “형님 궁의 음식맛이 왜 변한것이냐 말입니다!” 화난 목소리의 레이첸에 못지 않게 태진이 큰 소리쳤다. 서로를 노려보던 그들은 레이첸이 먼저 눈을 돌리는 것으로 끝났다. “내 궁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네가 신경쓸필요가 있는가?” “미쳤군요! 그냥 죽이면 내가 뭐라 합니까? 그게 무슨 짓입니까! 고작해야 상한 떡하나로 모든 것을 말아먹으려는 겁니까!” “화선은 내 아이를 가지고 있다!” “아이는 또다시 생기는 것이지만 기회는 두번오기 어렵습니다!” “지겹다! 지겹다” 레이첸이 손을 내쳐으며 태진에게서 물어났다. “네 야망을 들어주기 위해 허수아비 노릇을 하는것도 지겹다! 난 황제가 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네 놈은 그럴지언정 난 아니란 말이다!” “입조심하십시오!” 태진이 옆에 있는 시종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였다. 식사시중을 들던 시종 두명은 직감적으로 그들의 위기를 알아챘다. 하지만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레이첸이 그들에게 다가오자 도망갈수 없다는 것도 깨닳았다. “죽어라.” “...전...전하!” “죽어!” 레이첸은 그중 한명의 머리채를 휘어잡고는 방을 지탱하는 기둥에 머리를 부딪쳤다. 한번 두 번, 되풀이 되는 무식한 행동에 붙잡힌 시종의 얼굴의 코가 무너지고 피투성이가 되며 이가 뿌러져 마루로 후둑거리며 떨어진다. 쾁하는 둔탁한 소리가 들리며 결국 그 단단한 사람머리가 흐느적 거리며쪼개져 버린다. 옆에 서있던 다른 시종이 놀라 바들바들 떨지만 피와 두부같은 뇌조각을 손에 묻힌 레이첸은 무표정하게 남은 시종에게도 손을 내민다. “그만하시오!” 태진의 날카로운 소리가 쩌렁하게 울리며 그가 칼을 뽑아들고 레이첸의 등뒤를 겨눈다. “흥. 죽일것이냐?” “왜 못할 것 같소?” “해봐라.” 레이첸이 실소한다. 그리고 서슴없이 남은 시종의 머리채를 휘어잡는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끌려오는 시종의 목이 어느순간 저항이 없어진다. 그리고 뜨겁고 비린내 나는 것이 옷자락에 확튀어버린다. 손에는 시종의 목이. 조금 떨어진 곳에는 목이 없는 시종의 몸이 누워있다. 태진이 피묻은 검을 털어냈다. 입을 닦았던 수건을 들어 검에 묻는 피를 훔쳐낸다. 멍하니 손에 든 시종의 머리를 보는 레이첸에게 외친다. “정신차려요! 이곳은 당신의 성이 아니란 말입니다!” “...” “이곳은 황제의 성이요! 그의 법을 따라야 하고 그의 생각을 존경해야하오! 그런데 당신은 황제소속의 여관과 환관을 고문까지해서 죽였소! 게다가 지금은 당신을 모시는 시종까지 죽였으니 누가 당신을 믿고 따른단 말이오!” “시끄러워!” “왜 나까지 한번 해보려는거요?!” 그러자 레이첸은 정말로 태진을 어떻게 할 듯이 그에게 성큼 걸어왔다. 하지만 곧 그 더러운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뒤로 물러난다. 숨을 깊게 쉬고 감정을 진정시킨 후 다시 고개를 든다. 태진의 그 냉정한 눈을 보자 그제야 제정신이 든듯하다. “내가 심했군.” “형님은 남자인데도 불구하고 임신으로 인한 감정동요를 하고 있는 것 같군요.” 태진은 누그러진 얼굴로 검을 치웠다. 잠시 발을 툭툭이며 아직도 피를 흘리고 있는 목이 없는 몸뚱이를 본다. “이것들을 믿을만한 놈을 불러 자루에 넣어 도성 외각의 강에 돌을 넣은 자루에 담아 던져야 겠습니다.” “그래.” “그리고 두어명 더 죽여야 할 것 같은데 말입니다.” “누구?” “호랑이 사육사말입니다.” “...알았다.” “아. 내가 죽일것이니 형님은 쉬고 계십시오. 일 크게 만들지 말고. ” 레이첸이 아무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태진의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괜찮습니다. 근간에 당신은 쌓인 것이 많았으니까요. 이렇게 터진 것이 더 잘된 것 같군요.” 태진이 아기를 달래듯 작게 속삭였다. “이제 궁을 나갑시다.” “모본이다. 모본.” “모본?” “그래. 어차피 넘어간 필본을 되찾기는 힘들다. 차라리 수를 써서 2왕자쪽에서 널 찾게 만들어야 하는거야.” “...?” “너 필본한 원본서책을 가지고 있니?” “아니요. 필본을 낼때 원서로 같이 내기로 되어있지 않습니까?” “지금 당장 가서 빌려와!” 익이 씩씩거리며 외쳤다. “아주 그냥 모범을 보여라, 보여! 당장! 누가 가져가기 전에 어서 빌려와!” “예,예.” 또 베게라도 던지며 난동을 피울까봐 얼른 일어난다. 서관으로 걸어가다가 뒤에서 날라온 붓이 어꺠를 스치고 지나가자 얼른 달려간다. 뒤에서 익의 큰소리가 마구 들려온다. “성격한번 굉장하네...” 가볍게 웃고는 서관을 들어간다. 마주치는 비서랑들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며 들어간 서관에서 당직 비서랑에게 자신이 빌렸던 책을 다시 빌릴수 있는지에 대해서 묻는다. 마침 필본과 원본의 대조가 끝나서 원본은 빌릴수 있다고 한다. 원본을 가지러 서관의 깊숙한곳까지 걸어들어간다. 문득 시녀한명이 자례의 길을 막고 말한다. “죄송하지만 지금은 이곳으로 들어갈수 없습니다.” “...비서랑이 서관에 출입을 통제 받는다는 것은 들어본적이 없습니다.” “지금 이곳에는...” “됐어. 들어오시게 해라.” 고운 여인의 목소리에 자례는 고개를 갸웃한다. 안쪽으로 들어가니 한무리의 여인들이 구석으로 피한다. 시선을 안보내려고 해도 원하는 책이 그쪽에 있어 물끄러미 그쪽을 보았다. “찾으시는 책이 이쪽에 있습니까?” “부인께서 들고 계시는 책이 제가 찾던 책이군요.” “어마?” 낮게 웃던 여인이 시종을을 제치고 앞으로 나왔다. 무척이나 아름다운 여인이였다. 나이는 자신과 비슷해보인다. 여인은 조심스럽게 앞으로 걸어나와 책을 건낸다. “여기.” “감사합니다.” “비서랑은 어리군요.” “?” “궁안에서 제 또래의 사내를 보는 것은 처음입니다.” “그러십니까.” 빙긋 웃으며 서로를 바라본다. 지긋한 나이의 여인이 다가와 얼른 둘사이에 끼어든다. “화선부인, 아무리 비서랑이라 하나 이런식으로 말을 거시는 것은...” “내 앞에서 비켜라.” 단호하게 말하는 화선의 말에 유모가 얼른 뒤로 물러난다. 화선은 앞에 있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관복이 이상하게 안어울리는 사내다. 그래서 그런지 뭔가 신기하다. 그가 옆으로 비켜 고개를 갸웃한다. 비켜주었으니 나가도 된다는 이야기다. 왠지 그대로 나가기엔 섭섭하다고 느낀 화선은 말을 다시 걸었다. “좋은 책을 한권 골라주십시오.” “서관의 책은 황제의 소유로 직속인이 아닌 이상 그것을 서관 밖으로 가지고 나갈수 없습니다.” “어째서 제가 직속인이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직속인이셨다면 제가 감히 부인의 얼굴을 보았을 리가 없지요.” “어머나? 잘 아시는군요. 호호호.” 화선은 기분좋게 웃었다. 조심스럽게 배에 손을 얹고 말한다. “아이를 가지고 있답니다. 이 배 안에 아이가 들어있지요.” “경축드릴 일입니다.” 진심으로 활짝 웃으며 자례가 축하해주었다. 화선도 생긋 웃었다. “아이에게 읽히고 싶은 책을 고르기 위해 여기까지 왔답니다. 하지만 공의 말을 들으니 여기서 제가 책을 가져가기는 힘들 듯 하군요.” “저런.” 화선은 시종들을 끌고 서관을 나섰다. 자례는 손에 든 책을 가만히 보다가 화선을 따라 나왔다. 화선은 의아하게 뒤를 바라보자 자례가 웃었다. “부인, 한달후에 다시 이곳에 오십시오. 부끄러운 글이지만 제가 필본을 하나 써 드리겠습니다.” “어머나, 정말로요?” 화선은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며 꼭 오겠다고 약속하고는 걸음을 나선다. 화선이 멀리 사라지자 자례는 책을 빌리는 확인을 받기 위해 당직 비서랑의 앞으로가서 서명을 한다. “자네 저 여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가?” “아니오.” “그녀는 간의대부의 외동따님이네. 또한 서공님의 세부이기도 하지.” “...서공님?” “4왕자의 ‘자‘이다. 황족을 제외하고는 황족들의 '명'을 부르는 것은 죄다. 우리는 '자'로 칭한다.” "...4왕자가 서공?" 당직은 서류를 챙기고 책을 건낸다. “조심하라고. 간의대부라면 극상의 지위는 아니나 황제의 고문관이다. 꽤나 실세가 있는 집안의 여인이지. 다른 황자들의 부인같으면 서관에 출입할수 있을줄 아는가? 그녀이기 때문에 아까 아무도 제지하지 않았던 거야. 그녀의 아버지가 황제에게 귀뜸만해도 매장당하기 십상이거든.” “...” “그러고보니 그녀도 자네에게 꽤나 호감을 가진 듯 하군. 나이가 비슷해서 인가?” “시끄럽소.” 자례는 책을 챙겨들고 등을 돌려버렸다. 지긋지긋한 곳이구나. 그저 작은 인연을 바라고 베푸는 것도 타인의 눈에는 아첨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인가. 진심으로 응대해도 속마음이 만들어지는 곳이 여긴가. 더럽고 치사하며 옹졸하다. 온몸에 벌레가 기어가는 듯한 느낌에 진저리를 친다. 바로 여기서 나가고 싶다는 마음이 왈칵 들어 몸을 돌려 보이지는 않지만 궁문의 방향을 노려본다. 나가버릴까? “어딜 보는거야?” “익공?!” “너무 늦어서 나왔다. 거참. 느리기도 하다!” 익은 자례의 손에서 책을 낚아챘다. 그리고 남은 손으로 자례의 손을 잡고 숙소인 성각헌으로 마구 끌고 들어간다. 처음엔 손을 뿌리칠까 하다가 그랬다간 정말로 궁문으로 달려갈 것 같아 아무말 없이 끌려들어간다. 분명, 내 발로 이곳을 나갈때가 올것이다. 105 “생각해봐라. 필본이란 원본과 똑같은 내용이여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원본의 내용중 한 장만 빠져있다 하여도 그 필본은 완벽한 것이 아니야.” “그렇습니다.” “네가 줘버린 필본을 가져오기는 무리가 있지만 원본의 내용을 늘리는 것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다!” “원본을 늘린다면 어떠한 득이 있습니까? 필본이 완벽하지 못하다는 것뿐이 아닙니까? ” “2왕자는 선비주의자다! 완벽하지 않는 필본을 소장하려고 들지 않을것이 분명하다.” 익이 원본의 책장을 촤라라락 펼치면서 조용하게 말한다. “일단 원서의 내용을 두어장 껴둔 후 2왕자가 필본을 받을때까지 다시 서관에 가져다 둔다. 그가 필본을 받을때 소문을 내는 거다, 필본은 완벽하지 못하다. 한 장이 빠져 있다라고. 그렇다면 왕자는 그것을 낭관에게 다시 주어 고쳐오라 할것이다. ” “그동안은 무사하겠군요. 그럼 그것을 고친후에는?” “고치는 것이 아니지. 낭관이 너에게 와서 그것을 고쳐달라 말한다면 필본은 이제 네것이야. 네손으로 들어온 네것이니 왜 주겠나?” “...?” “시간을 최대로 끌어낸다. 2왕자가 재촉해도 낭관이 할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결국 2왕자는 점점 화를 낼태고 낭관은 자필이 아니니 널 재촉만 할뿐이지. 그후에는 내가 나선다.” “익공이?” “그래.” 익이 씩 웃으며 창문을 닫아걸었다. “난 소문을 낼거다. 필본이 어째서 완성되지 못하는 것인가 하는 걸 말이다.” “과연.” “자. 말단인 우리에겐 시간이 없다. 지금부터 모본을 해야해. 너 할줄 알지?” “하기는 하겠지만...모본은 필본과는 달리 더 시간이 걸릴텐데...” 소매를 걷어 올리고 연적의 물을 따른다. 익이 새 종이를 꺼내기 위해 나무상자를 열때 땅캉하는 소리와 함께 연적이 나동그라지는 소리가 들린다. “뭐야?” “쿨럭! 쿨럭!” “왜 그래?” 고개를 저으며 등을 돌린 아이는 몇 번더 기침을 하고는 고개를 든다. 심호흡을 하더니 말짱한 얼굴로 손을 내민다. “종이.” 새옷은 어른이나 어린 아이나 할 것 없이 입는 순간부터 기분이 좋아지게 만든다. 새 옷을 입은 하류사는 나무의자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목욕할 때 있었던 일로 여관과 함께 도성에서 떨어진 마을에서 조용하게 쉬고 있었다. 따뜻한 봄햇살을 등에 받으며 여관이 마당 한구석에 앉아 화분의 흙을 채우고 있다. “얼마 안가 화원으로 돌아갈터인데 그래도 키우실겁니까?” “또 이곳으로 나올 일이 있을테니까요. 왕씨께서 머무시는 곳이 이렇게 삭막한 곳이라니... 여관으로써 죄송스럽군요.” “그래,무엇을 심고 계십니까?” “제비꽃입니다. 담장위에 많이 있답니다. 화분으로 옮기면 내년에도 볼수 있겠죠.” “흐음. 보라색이라. 여관에게 잘 어울리는 색입니다.” “그런가요.” 삑삑거리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어디서 들어왔는지 암탉과 병아리 여섯 마리가 줄을 지어 마당으로 들어온다. 화분에 담을 흙을 위해 파놓은 곳으로 다가가 발톱으로 흙을 헤치며 지렁이를 찾아먹는다. 그들이 화분을 해하지 못하도록 담장에 그것을 올려놓는다. 문득 하류사는 떠오르는 생각을 말한다. “가끔은 여관께서 보라색 꽃물을 들인 옷을 입은 것이 보고 싶군요.” “명령이시라면.” “부탁은 안되겠습니까?” “왕씨가 여관에게 부탁을 하시다니 말도 안됩니다.” 미소짓는 여관의 옷은 언제나 회색이다. 계주성의 성주 헌성곡은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알수 없게 문제거리였던 북쪽의 화적소굴이 하루아침에 소탕되어 좋아했던 것이 어제다. 하지만 이제 비어버린 소굴을 차지하려는 화적들이 사방에서 몰려오고 있었다. 병력으로 딸리는 것이 아니였다. 계주성은 작고 도성중 가장 외진 성이지만 그래도 도성이였다. 충분히 화적들을 밀어버릴만한 병력은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계속되는 화적들의 침입과 그에 따른 민가의 손실에 짜증이 나고 있었다 마치 쌀가마니에 안보이는 구멍으로 쌀이 솔솔 빠져나가는 것처럼 손해는 점점 커지고 있었다. 특히 낭성쪽의 피해가 극심하다고 매일 보고가 들어왔다. 이해할수 없는 일이였다. 낭성은 무엇하나 특별한 것이 없는 곳이였다. 있다면 온천뿐인데 화적들이 감히 낭성전체를 소굴로 삼을 것도 아니니 온천 따위가 그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그러던 와중 황제의 귀에 계주성의 사태가 들어갔는지 오늘, 입궁첩이 온것이다. 헌성곡은 당황하지 않았다. 언제나 그렇듯. 항상 있는 일이였다. 가서 적당한 선물과 함께 자신이 아직 건재하다는 것을 보이면 끝나는 일이였다. 그는 자신의 건재함을 알리기 위해 그의 장성한 세 아들과 함께 황궁으로 향했다. 계주성의 기를 높이 들고 마차를 호화스럽게 장식했다. 천을 드리워 봄햇살을 가린 마차의 안에서 태수는 자신의 긴 수염을 내리만지며 짜증을 냈다. “화적들은 짜증나는 놈들이구나. 누가 어서 그들 좀 소탕해라.” 두 아들들이 모두 웃었지만 둘째 아들만든 웃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 화적이란 전쟁으로 일어난 난민을 일컫는 말이기도 합니다. 전쟁이 끝나지 않는한 화적들은 없애기란 무리일겁니다.” “누가 그것을 모르느냐? 아버님이 하시는 말씀은 계주의 영지 내에서 화적들을 몰아내는 것이지.” 맏아들이 둘째에게 핀잔을 준다. 하지만 둘째는 고개를 흔든다. “아닙니다. 보십쇼. 골칫거리였던 북쪽의 화적소굴이 와해되고 나자 더 큰 문제가 생기고 있지 않습니까? 만약 타 영지내로 화적을 밀어넣는다면 후에 계주는 타 영지에 군사를 지원해야 하고 막대한 자금이 들것입니다. 게다가 지금은 금이 세워진지 얼마 안되는 혼란기. 차라리 화적이 있어서 반란이 일어날 기회가 줄어든 것이 아닙니까. ” “둘째 형님은 너무 생각이 많아. 화적들이란 전쟁난민들이니 전쟁이 나면 포로고 뭐고 다 죽여버리는 것이 깨끗하다니까.” 막내의 말에 둘째는 한숨을 첫째는 웃는다. 갑자기 마차가 멈춘다. 이른 멈춤에 마차안의 성주가족은 잠시 고개를 갸웃한다. 아직 도착할때가 아니다. “무슨 일이냐?” 마차밖이 소란스럽다. 칼이 부딪치는 소리에 모두 검을 빼어든다. 마차문을 열고 나가는 첫째를 둘째가 말리기도 전에 마차의 문이 벌컥 열린다. 그리고 억척스러운 손이 들어와 첫째를 끌어내는 동시에 단검을 그 가슴에 밖아버린다. 피를 뿜으며 첫째가 쓰러진다. “형님?!” 큰 소리를 지르며 검을 들고 나간 막내의 뒷머리에 강한 타격이 가해진다. 휘청거리는 몸을 가눌사이도 없이 두 손이 그 머리를 잡고 어깨넘어까지 강제로 돌려버린다. 자신의 등뒤의 똑바로 풍경을 바라볼수 있는 것은 세상에 태어나서 단한번이다. 혀를 물고 쓰러지는 셋째를 보고 그들의 아비가 놀라 억소리를 친다. 셋째가 아버지를 지키기 위해 검을 들지만 검을 빼기도 전에 그 이마에 주먹만한 돌을 맞고 그대로 주저 앉는다. 돌은 이마속으로 아주 밖혀버려 뇌수와 피가 섞여 얼굴로 흘러내린다. “으아악!” 느린 비명에 자신의 아들을 모두 죽인 살인자는 천천히 등을 돌린다. 맨질한 머리가 대낮의 환한 불빛을 받아 빛난다. 한손으로는 방울이 달린 법구를 들고 한손으로 합장하며 고개를 숙인다. “아미아비타불.” “너, 너! 넌 뭐냐!” 포동포동하게 살찐 중이다. 가늘게 보이는 눈이 여성스럽다. 그는 인자하게 웃고는 회색장삼을 펄럭이고는 등을 돌린다. 헌성곡이 다시 눈을 떴을때는 눈앞에는 그저 나무들만 있을뿐 중의 모습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아미아비타불.” “...” “힘내십시오. 시주.” “후소, 넌 알고 있었지?” “뭘 말입니까?” 퀭한 눈으로 백라가 고개를 들어 중을 본다. “예사의 일 말이야.” “소승은 이미 속세의 일을 잊은지가 오래입니다.” “거짓말하지마! 그날 예사와 조를 짠 것은 후소 자네지 않은가! 자네는 세가가 죽은게 내탓인 것을 알고있었지!” “...” “그래서 네가 대장에게 날 새은신처를 찾는 조에 껴넣어달라고 한 것이 아니야! 내가 예사와 마주쳤다가는 그가 날 죽여버렸을테니까! 아주 날 난도질 하고 싶어했을텐데 잘도 말렸군!” “말이 험하시군요. 시주.” “빌어먹을! 내 앞에서까지 그 중놀이 할래!” “그럼 뭘 어쩌자구 이 새끼야!” 둥글게 휘어진 눈동자가 부릅떠진다. 온화해보였던 인상이 순식간에 험악해지면서 거친 손이 백라의 목을 잡아 나무에 던저버린다. 나뭇가지가 흔들리며 잠시 땅위에 누워있던 좌보에게 다가가 풀어내린 머리체를 잡고 끌어당긴다. “이 미친자식! 내가 말했었지! 전쟁통의 네 그 잘난 온정이 큰일을 치를거라고! 그래, 네가 살린 그놈이 세가를 죽이고 배를 갈라 그 아이들의 머리를 씹어버렸다! 왜! 이제 속이 후련하냐! 개자식! 그때 예사의 말을 따라 거란놈을 죽이기만 했어도 이런 일까지 벌어지지 않았어! 쿵. 또 다시 나무에 던저버리고는 달려가서 발로 꽉꽉 밟아버린다. “네 놈이 뭘 알아! 평생을 약속한 여인이 배를 갈려서 눈을 뜨고 죽어있는 것을 봤어! 태어나지도 못한 자기 자식들의 머리가 발아래서 산산조각나는 것을 보았어?! 그 어린 것들이 태어나지도 못했는데 죽음의 고통에 손발을 바들 거리는 것을 보긴했어! 이 천벌을 받아 죽을 놈!”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다시 백라를 일으킨다. “예사뿐만이 아냐, 이 죽여버릴 자식아, 마을의 절반이, 그 일로 흥료성 전체가 무너졌어. 그런데도 어째서 네가 좌보인지 난 모르겠다! 내가 죽여버리고 싶다! 내가 죽이려고 했지! 하지만 넌 죽일가치고 없는 놈이야! 알아! 알아들었냐고 이새끼야!” 피로 엉망이된 백라를 후소가 던져버린다. 더럽다는 듯 손을 털고 침을 뱉는다. “빌어먹을. 이젠 네가 얼마나 큰 죄를 지고 살아가는지 알아야 해. 이 지독한 전쟁을 끝내고 싶어도 너같은 병신이 있어서 끝나지 않아!” “...나 죽어버릴까?” 히죽 백라가 웃는다. 그말에 후소가 주먹을 들어 인정사정보지 않고 그 머리를 후려친다. 아찔한 소리가 숲을 울린다. 찣긴 이마에서 피가 흘러나온다. “웃기지마. 네 놈은 죽을때까지 책임을 져야해. 너 같은 놈은 억겁의 화염도 받아주지 않아!” “...그렇겠지.” “일어나라!” “...왜?” “너는 왕씨에게로 돌아가야지.” “이제와서?... 나보고 어쩌라고?...예사앞으로 가서 혀를 물고 죽어버릴까!”” “이새끼 아직도 정신못차렸냐! 예사가 널 살려둔 이유를 생각해라!” “나도 그것이 궁금해. 후소. 네가 좀 알려줘라.” 바보같이 멍하게 있는 백라에게 후소의 발길질이 이어진다. “죽일사람은 널렸는데 너같은 놈 때문에 시간을 허비하라고? 비켜!” “후소. 나도 죽여라. 네가 할일이 그것아니냐.” “네 피가 묻을까봐 더러워 임마!” 씩씩거리며 숲속으로 들어간 후소는 한시간도 지나지 않아 다시 돌아온다. 그리고 나무에 기대 늘어져 있는 백라를 본다. “이봐.” “...” “예사가 전하라는 말이 있어서 말이야.” 번쩍 고개를 든다. 부운 눈을 비비고는 후소를 바라본다. “뭔데?” “쯧. 40이 넘어서 애같기는.” “뭔데? 뭔데?!” “세가는 죽었지만 낙노는 죽지 않았데.” “...정말?” “그래.” “하...하지만 흥료성의 생존자는...!” “예사 그자식, 세가의 시체를 버렸어.” “뭐?” 후소가 누그러진 눈으로 백라를 본다. “세가의 시체를 업고 나오지 않았어. 대신 낙노를 업고 나왔다.” “저...정말?” “그래.” 잊어버렸던 짐을 챙기며 후소가 낮게 웃는다. “네 약혼녀는 살아있어 임마. 운도 지지리 좋은 놈 같으니라구.” “그럼? 그럼? 낙노는?” “젠장할. 떨어져 임마! 중문의 산속에 은거시켰다는데 화적이 가서 불을 질렀데. 그뒤로는 소식이 없지만 시체는 안나왔다고 하더라.” “어째서?! 어째서 그걸 지금?!” “바보 놈.” 후소가 미친 듯이 웃었다. “너 때문에 세가를 잃었는데 널 보고 그말을 할수 있었을까? 보자마자 죽이려고 했겠지.” “...그래” “그래서 내게 말하더라. 너에게 전해달라고. 뭐, 하지만 피눈물 흘리면서 말하는 예사를 보니 너에게 말하고 싶지 않더라. 결국 오늘까지 나 혼자 알고 있었다. 보아하니 예사는 너가 그 소식을 들은줄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너...너!” 발끈 화를 내는 백라를 보고 후소가 벌컥 화를 냈다. “이 자식이! 그럼 이제와서 너 혼자 행복해보겠다는거냐! 그래, 낙노를 찾아서 예사앞에서 실실 웃어봐라 미친놈아! 그앤 죽었어! 알았냐!” 후소가 침을 뱉고는 이번엔 정말로 숲사이로 사라졌다. 한참후에 일어난 백라가 급하게 그 뒤를 따라 뛰었지만 그는 보이지 않았다. 울화통이 터지는 답답함을 느끼고 백라가 그가 사라진 쪽을 향해 외쳤다. “낙노는 네 누이잖아, 이 거짓부렁자식아!” 눈물이 흐른다. “하나 남은 네 누이가 보고 싶지 않을 리가 없잖아. 살아있는지 죽었는지 알고 싶을꺼 아니야... 이 땡중같으니라고... 너의 행복마저 내가 망친거냐?” 부인의 시체를 업지 않았다. 그 부인을 죽인 자의 약혼녀를 업고 무너지는 성안을 탈출했다. 내가 얼마나 야속할까. 행복하고 싶었는데. 그냥 행복하고 싶었던 것인데. 내가 누리는 행복을 타인들도 느끼게 하고 싶었을 뿐인데. 화려한 왕조를 되살리고 싶었던 것이 아닌데. 그냥 행복을 누릴수 있는 나라를 되찾고 싶었던 것인데. 단지 그것이였는데 어디서 어긋났는가. 오열하고 있는 등위로 봄의 따스한 햇살이 내리쬔다. 106 몇차례 눈을 비비던 자례가 일어나 허리를 피고는 침상으로 다가갔다. 옆 책상에서 다른 필본을 뜨고 있던 익이 물었다. “그만 자려고?” “예. 졸립니다.” “어디보자.” 모필하고 있던 것을 들어본다. 비밀리에 하는 것이라 낮에 할 수가 없어 저녁을 먹고 남은 시간에 방문을 걸어잠그고 쓰고 있었다. 두시간채 쓰지도 않았는데 벌써 자례는 자려고 하고 있었다. 역시 모본은 몇줄도 되지 않았다. “너무 늦다.” “할수 없어요. 명필가에게 모필은 쥐약입니다. 남의 글씨 따라하는 것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특히 저 같이 자신의 글씨체가 완성되어 있는 사람에게는요.” “하지만 정말 똑같이 썼는데?” “시간이 걸리는 것이 문제입니다. 신경도 배로 쓰이고요.” 눈을 비비던 자례는 옆방으로 건너가 침대에 걸터 앉았다. 익이 따라와 말했다. “조금만 더 써라. 너무 늦어.” “...안됩니다. 오늘은 이만입니다.” “하지만...!” “익형. 난 병이 있어요.” 그 말에 익이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자례 본인은 별로 신경쓰이지 않는다는 얼굴이였다. “조금만 움직여도 많이 피곤합니다. 그래서 무리하고 싶지 않군요. ” “하지만 일이 커지는 날에는 병 때문에 죽기전에 이것으로 먼저 죽을테다.” “내 앞에서 함부로 죽는다는말 하지 말아요!” 신경질적으로 약를 따르며 자례가 외쳤다. “듣고 싶지 않아요. 그런말들. 아무튼 전 무리하지 않아요. 이일도 중요합니다만 제 몸도 중요해요. 무리하고 정작 중요한 시점에 누워지내고 싶지 않단 말입니다. 이해하시겠어요?” “...병자가 쫑알쫑알 말도 많지. 약 다 먹었으면 얼른 자버려.” 익이 옆방으로 가 필본을 계속하자 자례는 침상에 몸을 뉘었다. 온몸이 으쓸한 것이 감기라도 올 것 같았다. 이제 날이 따뜻해지고 있는데 무슨 감기람. 더 이상 생각하기 싫을정도로 잠이 온다. 힘들게 일어나서 겉옷만 벗는다. 침상에 눕기전에 허리에 찔러넣고 다니는 작은 단검을 꺼내 비게뒤로 숨긴다.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눈을 감는다. 오늘이 끝났다. 익은 이상한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창가에 아직은 이른 철새인 제비가 날개를 쉬고 있었다. 문을 열지만 제비는 도망가지 않는다. 익은 손을 내밀어 제비를 잡아 방안으로 끌여들였다. 발에 무엇인가 묶여 있는 것을 본다. 풀러 읽은 그것을 등불에 태워버리고 잠든 동기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무일도 없다는 듯 다시 자신의 일에 매달렸다. 태진은 다시한번 고개를 갸웃하고 팔짱을 꼈다. “일이 너무 손쉽게 풀리는군?” 하지만 텅 빈 방안에는 태진의 말에 대꾸를 해주는 사람은 없다. 정말로 일이 너무 손쉽게 풀려 이상할 정도다. 계주성의 태수가 원래 별볼일 없는 사람이긴 했지만 그래도 성을 그렇게 쉽사리 포기할 것 같지 않았는데 말이다. 별다른 힘은 없지만 그래도 도성이다. 도성의 태수라는 것은 작은 나라의 왕에 속하는 지위다. 황제의 명을 받고 황궁한다는 소식을 접했을때 태진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입궁때 사람을 붙여 계주성내에서 태수를 암살할계획이였다. 물론 위험이 큰 일이였지만 화적들이 몰려가고 있는 지금은 아주 무리한 일도 아니였다. 그런데 그 태수가 오늘 입궁해서는 바로 성을 반납한것이였다. 황제는 그의 아들중에서 성을 이어받을 자가 없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없다고 했다지. 하지만 내가 알기로는 그에게 아들이 셋이 있다. 둘째 아들이 매우 총명해서 계주의 다음 태수가 기대된다는말을 언뜻 들은 기억이 난다. 그런데 없다니. 하지만 태진이 사람을 계주성에 보낸 결과는 전혀 뜻밖이였다. 세 아들이 모두 죽었다는 것이다. 태수는 다른 말을 하지 않았지만 입궁하기 위해 이곳으로 오다 변을 당한 듯 하다. “마치 누군가 내 앞길을 닦아주는 듯하지 않은가?” 원하던 지역에 화적들의 싸움. 게다가 후계자들의 적절한 죽음. 태수의 은퇴. 게다가 생각지도 않았던 낭성지역의 민고(民呱). “완벽하군. 하늘이 돕는 것일까?” 물끄러미 화병을 노려보던 태진은 기분 좋은 웃음을 짓고는 몸을 일으켰다. 일단은 레이첸이 먼저 가는거다. 그리고 낭성쪽으로 내가 가는 것이지. 도성의 인계는 적어도 두달가량 걸리는 중요한 문제다. 지금부터는 다른 것에 신경쓰지 않고 레이첸이 계주성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인재라는 것만 알리면 되는것이다. 뭔가 시원한 느낌에 태진은 허리를 피고 웃는다. 여전히 아름다운 여인이였다. 화선은 자례에게서 필본을 넘겨받고 미소지었다. “고마워서 어쩐다지요?” “아니요. 간단한 것이였으니 그다지 힘들지 않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가볍게 고개를 숙이는 모습도 아름답다. 화선의 권유로 자례는 서관 뒤에 있는 조그만 정자에서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공은 궁안 생활이 답답하지 않으신지요?” “사내가 궁안의 명예을 바라고 들어왔다면 답답함을 느끼기 쉽지 않지요.” “그렇군요. 저는 매우 답답한데 말입니다.” “어째서말입니까?” “너무 많지요. 일단 저들을 보십쇼.” 그녀가 손가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늘어선 시종들을 가리켰다. “항상 저렇게 제 뒤를 감시하니 어디 편하게 다녀보겠습니까?” “부인을 보호하는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감시하는거죠. 제 신분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는지, 행여 궁안 권력에 무슨 힘을 쓰는 것은 아닌지 하고요.”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아이에게도 부인에게도 힘든일입니다. 태교를 하고 계시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그래요. 태교하고 있어요.” 화선이 약간 침울한 얼굴로 말한다. “태교라도 해야 아이한테 미안하지 않아요.” “예?” “왜 사내들은 여인을 대하는 마음이 시간이 갈수록 변해가는 것일까요?” 대답을 구하는 질문에 자례가 난처한 얼굴로 웃었다. “아직 여인을 사랑해보지 못해 대답을 해드릴수가 없군요.” “예? 정말입니까?” 굉장히 놀란 얼굴로 화선이 웃었다. “놀랍군요. 요즘은 조혼제가 유행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아직... 하지만 분명 한 여인을 사랑하게 된다면 그 마음이 쉽사리 변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사내란 단순해서 여인의 머리카락과 같다 하지 않습니까.” “여인의 머리카락?” “길게 늘이면 늘일수록 자르기 힘든, 정을 주면 줄수록 때기 어렵고 , 풀어 내리면 거추장스럽고 묶어 올리면 무거운, 성혼 전의 사내와 성혼 후의 사내의 차이가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분명 자신의 것이 분명해서 신경을 안쓰면 안되고 신경쓰면 한도 끝도 없는 것이 바로 사람의 마음이아닌가 합니다.” “...우공은 좋은 낭군이 될것같군요.” “과찬이십니다. 쿨럭!” “어디 감기라도? 손을 뻗지만 자례는 얼른 뒤로 물러나 화선에게서 떨어진다. 약간은 섭섭한 얼굴로 그녀가 등을 돌렸다. “이젠 가봐야 합니다. 슬슬 내 낭군이 궁으로 찾아올 시간이거든요. 정말로 신경안쓸래야 안쓸수 없고 신경쓰면 한도 끝도 없는 것이지요.” 아무말없이 자례는 고개를 숙였다 화선은 손을 흔들고는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아직 배도 나오지 않았는데 조심하는 것을 보아 아이를 무척이나 생각하고 있는 듯 하다. 갑자기 정자가 흔들린다. 그대로 기둥을 등에 대고 주저 앉는다. 착각이다. 정자가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시야가 흔들리는 것이다. 손을 머리에 대니 뜨겁다. 그다지 무리한 일도 없는데 열이 오른다. 정자의 아래에 흐르는 연못물에 손수건을 적신다. 물이 매우 차가워 기분이 좋아진다 궁안에 있는 연못물이 흐르다니 신기한 일이군. 황궁은 산을 깍아서 물이 내려올 지형이 아닌데 말이야. 수건을 이마에 대고 멀리 바라본다. 같은 듯 하면서도 다른 미묘한 색의 차이가 보이는 황궁안의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바라보며 머릿속으로 지도를 그려본다. 머릿속에 그려진 지도의 끝이 텅빈다. 이상하다 생각하고 다시 되집어간다. 분명 가장 외각에 성문보다 거대한 누각이 있는데 그래도 그 앞인 안쪽은 지도가 텅 비어버린다. “그곳은 건곤궁이다.” “건공궁?” “황제의 사궁이지. 일설에는 그냥 거대한 루(壘: 연회용 다층궁)라고 하던데. 소문에는 황궁에 흐르는 물이 건곤궁안에서 나오는 물이라고 하는데 맞는 말인 것 같아. 연못물들이 깨끗하잖아? 그 빈곳이 루의 호수가 있는 모양이지” “그래서 중간이 비는건가.” “뭣하러 궁안의 지도를 생각하는거냐?” “예?” “그곳은 황제의 사궁. 그 누구도 부름을 받지 않고는 근처에 가지도 못해. 그보다 모본이나 완성해라.” “예.” “그보다 너 얼굴이 빨갛다. 열이 있는 것이 아니냐?” 익은 대답을 할사이도 없이 다가와 손으로 자신의 이마와 자례의 이마를 번갈아 집어보고는 단호하게 말한다. “빨랑 자!” 아골타는 생각에 잠겼다. 어쩌면 은근히 바라던, 아니라면 전혀 예상치 못하던 결과라고 해도 좋았다. 계주성은 두달 안으로 주인이 없어진다. 계주성의 태수인 헌성곡은 한족, 즉 이곳의 호족세력이였다. 그곳에 자신의 아이를 집어넣는다면 도성의 모든 태수들을 여진인으로 바꾼다는 자신의 절대 권력에 대한 탄탄대로가 완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선 태자를 어서 정해야 한다. 계주성은 태자처럼 영리하지만 뛰어나지 않을 인물을 넣어 기를만한 곳이다. 멀어 권력에 힘쓰기가 어렵지만 황제의 힘이 되기에는 가장 좋은 위치에 있다. 즉 태자와 인연이 좋은 놈으로 넣어야 한다. 하지만 아직 태자는 정해지지 못했다. “체이첸을....” 그렇다면 레이첸을 황자로 하자는 이야기인에 이 바보놈이 황자의 자리에 올랐다간 3왕자 태천과 체이첸의 가신들이 들고 일어날것이다. 레이첸 이놈은 용기는 있어도 생각은 없는 놈이라 분명히 얼마안가 체이첸에게 자리를 넘기거나 친첸놈처럼 다 죽일지도 모른다. 그건 안된다. “레이첸을...?” 그렇다면 체이첸을 황자로 둔다는 것인데 이놈을 태자로 앉게 했다간 여진족의 금이 아닌 한족의 금이 되버릴것이 뻔하다. 결국은 어영부영 한족들이 황비를 꿰차고 시간이 흐르면 그 징그러운 한족들이 다시 황권을 가질것이다. 그건 안된다. “친첸...은?” 절대 안되지. 그놈을 황자로 두었다간 내가 죽이도 전에 아들놈들끼리 피터지는 전쟁을 하는 꼴을 보아야 할것이다. 내가 그것을 조용히 시킨다 하더라도 친첸놈이 다른 자식들을 전부 죽일것또한 분명하다. 그것도 안된다. 속을 부글부글 끓던 아골타는 허리를 피고 일어나 건곤궁의 끝자락으로 다가섰다. 황제의 사궁. 조용하기 이를데 없다. 원칙대로라면 호위장수들정도는 있어야 하는 곳이지만 이곳은 그가 죽은후에 완전 폐쇠한 곳이라 그들조차 없었다. 이제 침소로 돌아가야 한다. 자리를 비우는 것도 한계다. 저 멀리서 등불이 왔다갔다 하는 것을 보고 인상을 찌푸리다가 곧 편다. 그것은 히우루이다. 이 폐쇠된 궁전을 책임지게 한 것은 자신의 하나남은 친동생인 히우루였다. 그 등불은 건곤궁의 두 번째 궁전의 일층에서 이층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아마도 침입자가 있는지 아니면 철새들이 임시둥지를 지었는지 살피는 것이리라. 등불이 삼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잠시 멈칫한다. 그리고 주저주저하다가 그냥 내려가버린다. 등이 오싹해진다. 기억하고 싶지 않던 기억이 떠오른다. 아골타는 잠시 두 번째 궁의 삼층을 허물어버릴까 생각한다. 하지만 궁안에서 가장 높고 아름다운 루라 반대가 만만치 않을것이다. 사실은 그것보다 그 루마져 없어진다면 기억속의 그가 영원히 자신을 떠나버릴 것 같아 그러지 못한다. 이젠 밤이 와도 춥지 않다. 아골타는 등불이 이쪽으로 오는 것을 느끼고는 몸을 돌려 건곤궁의 출구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 . 107 서역의 유리구슬을 감상하는 듯한 매끈한 글이였다. 점하나 획하나 더할나위 없이 완벽하고 아름답다. 레이첸은 다시 한번 책장을 하나하나 넘기며 글의 내용보다는 그 글씨의 유려함에 반한다. “이렇게 유려한 글을 쓰는 낭관이 계셨다니 몰랐군.” “황공하옵니다.” “그래. 굉장히 완벽한 글씨야.” 체이첸이 조심스럽게 책을 닫고는 미소짓는다. 앉아있는 낭관의 얼굴을 살핀다. 서관에 갔을때 한두번은 마주쳤을만한 인물이지만 기억에는 남지 않은 인물이다. 그런데 이렇게 완벽한 글씨를 쓰고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심지어 시험날 잠깐 들려서 보았던 우씨 성의 선비보다 더 휼륭한듯하다. “내가 아는 누구보다 가장 유려한 글씨요.” “미약한 잔재주를 부렸을뿐입니다.” “일단 필본은 잘 받았네. 고맙군. 하지만 이 필본에 관해 소문이 많이 돌고 있어 내 자네를 부른것이야.” “예?” “이 필본, 원서보다 두장이 모자르다고 되어있더군.” 그말에 낭관이 고개를 갸웃한다. 그럴 리가 없다는 표정이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경락공(체이첸의 자). 신이 몇 번을 확인해 보았지만 그것은 원본과 동일합니다.” “원본을 지금 내가 가져왔네. 내 앞에서 직접 확인해보지.” 낭관은 원본을 받아 필본과 비교하며 페이지를 넘긴다. 알수 없게도 원서의 페이지가 두페이지가 많다. 다시한번 비교해보지만 역시 그렇다. 난감해하는 낭관에게 체이첸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실수는 할수 있지. 가서 고쳐오게. 두장이 완벽히 갈리는 내용이니 그것만 써 끼워넣으면 되지 않는가.” “알겠습니다.” 낭관은 다시 필본을 가지고 궁을 나간다. 체이첸은 그가 나가는 것을 보고 휘장뒤로 돌아가 차를 마시고 있는 악운에게 묻는다. “저 관리를 어떻게 생각하나?” “원하는 곳까지 도달하기엔 힘이 부족한 사내로군요. 눈에는 야망이 보이지만 그 자신에겐 세상을 움직일만한 총기가 보이진 않습니다.” “나도 그런 생각이다. 하지만 글씨 하나는 정말 볼만하군. 군자는 저런 선비를 키우는 것을 좋아한다지. 저 낭관을 내 가신으로 만들고 싶은데 어떤가?” “원하시는대로 하십쇼.” 악운은 냉큼 말해버리고 입을 다물어버린다. 체이첸은 그 냉한 모습에 약간 아쉬워하지만 탓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금방 돌아올줄 알았던 낭관은 2주가 지나도록 찾아오지 않았다. “헉?!” 반사적으로 눈앞의 그것을 내친다. 쨍그랑 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리며 사기가 쪼개지는 소리가 들린다. “이런, 이런.” “괜찮습니까?” “괜찮소.” 낯선,그리고 낯익은 두 목소리에 목소리에 몸을 일으켜 초점을 맞추기 위해 애를 쓴다. 전혀 생소한 공간에 잠시 흠칫하지만 곧 스스로 이해한다. 내 방이였지. 익이 자례에게 다가와 눈앞에 손을 흔들어보인다. “깼냐? 이제 괜찮은거니? 내가 보이긴 하냐?” “...예? 무슨?” “저런.” 어느새 자신을 돌봐주는 의원이 다가와 머리맡에서 혀를 찬다. 하지만 얼굴은 웃고 있다. 약상자를 챙겨 일어나는 의원에게 익이 고개를 숙인다. 흩트러진 머리를 뒤로 넘기며 침상에서 나오려 하지만 이상하게 다리가 후들거린다. “일어나지 않아도 좋아. 서관에는 내가 말해두었으니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아골타가 죽었어.” “....” 잠시 자례는 고개를 갸웃해 보인다. 그 모습에 익이 낄낄거렸다. “하하하! 정말로 기억이 안나냐? 정말 그 말을 믿는거냐? 이거 나 원참.” “무슨 일이있었는데요?” “기절했다.” 간단명료하게 말한 익은 차를 따라 자례에게 쥐어주었다. “어디까지 기억하냐?” “저녁에 약을 먹고 잠을 잤던 것까지...” “그래. 두시간 후에 나도 잠을 잤지. 그런데 한시간 정도 후에 등이 켜 있길래 일어나 보니 네가 모본을 쓰고있더구나.” "제가요?” “그래. 그래서 나는 들어가서 쉬라고 했지. 그런데 네놈이 하는 말이, ‘몰라요’ 였다. 세상에. 그 늘어지는 말투라니. 몰라요. 몰라. 하하하!” 익이 자례의 말투를 흉내내었다. 화가 났는지 눈을 치켜뜨는 자례를 보고 얼른 웃음을 멈춘다. “아무튼 난 그 후에 다시 잤거든. 일어나보니 모본은 끝나 있더구나. 넌 네 침상에서 자고 있고 말이야. 그러니까 그 후에... ” 익은 옷을 대강 입고는 잘 말려진 모본을 원본책에 잘 끼워넣었다. 누가봐도 감쪽같아 보이게 묶은 실을 다시 풀고 새 실로 동여 매였다. 지겨운 작업이지만 두어시간을 걸려 자신이 생각했던 대로 책이 만들어지자 흡족하게 바라보았다. 종이 울렸다. 조회시간이 다가옴을 느낀 익은 아직도 자고 있는 자례의 방으로 들어가 그를 깨웠다. 추욱 늘어진게 아무리봐도 일어나지 않을 생각인 것 같지만 조회를 결석하는 것도 큰 일이였다. 몇 번을 흔들어 깨우자 못내 일어난 자례는 비틀거리며 탁자로 가 시종이 떠온 물에 손을 넣었다. 익이 옷을 입기 위해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촤악하는 때아닌 폭포소리가 들렸다. 익이 소리가 난 자례의 방을 바라보자 세숫대야를 머리위로 치켜들고 있는 자례가 보였다. 머리부터 뒤집어 쓴 물이 뚝뚝흘러내리고 있었다. “무슨 짓이야!” “....더워요.” “그래도 방안에서 뭐하는 거야! 아직 봄이란 말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덥죠.” 손을 익의 어깨에 걸고 몸을 기댄 자례는 그대로 추욱 늘어져 버렸다. 익이 자례를 안아 올린다. 그제야 몸이 굉장히 뜨거운 것을 알고 놀라 어쩔줄 몰라 방을 넘보는 시종에게 묻는다. “몸이 뜨거워! 어떻게 하면 좋지?!” 익과는 달리 시종들은 각각 의원을 부르기 위해, 찬물을 가져오기 위해, 서관으로 소식을 알리려 각각 뛰어간다. “그리고 네가 쓰러진지 벌써 이틀째지.” “정말입니까?” 식은 죽을 떠먹던 자휼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익을 바라본다. 실은 오늘 아침에 일어났던 일이 아닐까. 아니라면 다 거짓말인지도. 불행이도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익은 죽이나 마저 먹으라는 듯 고개짓을 한다. 그리고 옆방에 가서 책과 고급스러운 종이를 가지고 나온다. “뭡니까?” “그 이틀동안에 너가 깨어나길 기다렸던 일이지.” “...좋은 소식은 없나요?” “봐라.” 익이 자례에게 보여준 것은 자신의 필본이다. 다시 돌아와있는것이다. 싱긋 웃어보인 둘은 조용히 필본을 상자에 넣어버린다.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시종에게 죽을 가져오게 하고 각자의 일을 본다. 자례는 죽을 떠먹다가 갑자기 진저리치며 내려놓는다. “왜?” “맛없어요.” “허.잘먹다가 그러는구나.” “입이 써요. 그 일 급한걸까요? 좀더 자도 됩니까?” “글쎄다.” “무슨 일인데요.” 주섬주섬 침상으로 다가가 이블을 걷고 올라간다. “자그만치 사랑놀음을 자랑하는 글을 쓰는거지!” “익이 써요.” 완전히 등을 돌리고 돌아누운 자례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 썼다. 웅얼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피곤해요.” “그만큼 자고서도 피곤하냐. 자기전에 약이나 먹고 자라.” “예.” “그럼 이것은 내가 써줄테니까 잠이나 자라. 아. 내일은 조회에 나가야 해.” “몰라요, 몰라요.” 또 듣는 투정에 익이 피식 웃는다. 하지만 자례는 인상쓰는 것도 귀찮다는 듯 아까 그자세로 침상위로 쓰러져 버린다. 그모습을 보고 소리없이 웃은 익은 반대편방으로 나와 책을 뒤졌다. 4왕자가 부탁한 사랑에 관한 시를 쓴 서신을 위해서. 108 레이첸은 몹시 화를 내고 있었다. 태진은 그를 진정시키고 계주성을 받기 위해서 해야하는 일을 말해준다. 하지만 레이첸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내가 우습게 보이나! 이따위 시를 적어 보내다니! 화선이 아주 날 죽이려고 하더군!” “진정하십쇼.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라 계주성...” “시끄럽다!” 레이첸은 옷자락을 펄럭이고는 방문을 걷어찼다. 태진이 그 모습에 한숨을 내쉰다. “서관에 가서 따져봐야겠다!” “그러지 마시고 그 시를 쓴 비서랑을 이곳으로 부르시면 더 간단한 일이 아닙니까?” 그말에 레이첸은 눈을 깜박인다. “네 말이 맞군.” 털석 다시 탁자에 앉고 시종들에게 명령한다. 태진은 다시 탁자에 앉은 레이첸의 옆에서 생활태도나 언행부터 시작해 다가오는 궁안 행사에 어떻게 해야하는지 구구절절 설명하기 시작했다. 얼마가지 않아 짜증이 버럭 난 레이첸은 탁자를 뒤업고는 태진을 향해 불같이 화를냈다. 오늘은 이정도면 됐다고 여긴 태진은 별로 상관없다는 얼굴로 레이첸의 궁전을 나왔다. 바보라도 이정도 말해놓았으면 한두개정도는 실천하겠지. 사실, 그렇지 않더라도 태진은 다른 방법으로 이미 생각한것도 있어 그다지 마음쓰지 않았다. 서관이 소란스러웠다. 낭관들은 소란스러운 곳으로 나가 손님을 보았다. 4왕자의 시종들은 주인의 서신을 대필한 비서랑을 찾고 있었다. “그는 얼마전부터 병환이라 휴가계를 쓰고 남쪽 성각헌에서 지내고있소.” 그말에 시종들은 다시 성각헌으로 몰려간다. 한편 자례는 할일없이 침상에 누워 때 아닌 병자흉내를 내고 있었다. 물론 싫은 것은 아니였지만 생활했던 방식이 있었기 때문에 3주이상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빈둥 빈둥거리는 것도 힘들었다. 간호란 명목으로 동기인 익도 휴가계를 쓰고 있었지만 그는 간호였기 때문에 방밖을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자유스러웠다. 그는 지금도 외출중이였다. 예정대로 필본이 늦어지는 사유를 소문내고 있을것이다. 낭관이 오면 자례는 곧 죽을 것 같이 잠만잤고 그때처럼 지병이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 여긴적도 없었다. 남는 시간, 할수 있는 것은 화선을 위한 필본과 생각뿐이였다. 4왕자와 14왕자를 어떻게 떼어놓는단 말인가? 여기서 무사히 나가려면 얼마나 시간이 지나야하지? 형은 다시 만날수는 있을까? 형은 도대체 어디 있는거지? 악운은 형이 있는 곳을 정말로 알고 있을까? 악운을 만나려면 2왕자에게 접근해야한다. 2왕자의 가신이 된다면 4왕자와 14왕자의 일에 무슨 이득이 있는가? 머리터지게 생각해도 스스로 움직이지 않는 이상은 결론내릴수 없는 일들만 잔뜩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남는 가장 밑바닥의 질문. 나는 얼마나 살수 있는거지? 벌떡 일어난다. 가슴이 답답하다. 급속도로 나빠지면 끝장이라고 했다. 아닌 듯 하면서도 마지막의 순간에 유언조차 남기지 못하고 급살할수도 있다 했다. 그럼 유언이라도 해놓을까? 그런데 누구에게? 할 사람은 형뿐인데. 형은 어디에 있더라? 또다시 질문이 원점이 되어간다. 짜증이 차올라 창문을 연다. 그리고 한무리의 시종들과 눈이 마주친다. “...?” “여기에 우씨성을 가진 비서랑이 있다고 들었다.” 다다닥. 손톱을 세워 창문살을 친다. 난 잘못한게 없는데? “서공께서 널 부르신다.” “어째서?” “너에게 맡긴 서신의...” 익이 무슨짓을 저질렀군. 뱃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익의 얼굴이 보이기만 하면 이번엔 화분도 던저버릴수 있을 것 같다. 재촉하는 그들의 얼굴이 싫어서 창문을 소리나게 닫고는 잠시 침상에서 몸을 뒹군다. 아프다고 가지 말까보다.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하다가 번득 떠오르는 생각에 벌떡 일어난다. “서공?” -4왕자의 ‘자’이다. 황족을 제외하고는 황족들의 ‘명’을 부르는 것은 죄다. 우리는 ‘자’로 칭한다. 서공은 4왕자 레이첸이다.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느낌에 오싹함을 느낀다. 그는 내가 정안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 곡양의 사건을 트집잡지 않는다해도 그는 내가 한족이 아닌 것을 알고 있어. 나만 잡히는 것이 아니다. 인척관계라고 하는 마기장군까지 함께 잡혀버린다. 그럴수는 없어.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깜짝놀라 몸을 움크린다. 밖에서 어서 나오라고 한다. 신경질적으로 나간다고 소리지른 후 손톱을 깨물며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병환중이라는 것은 한계가 있다. 그가 직접 이곳으로 오면 더 낭패가 될지도 모른다. 이곳은 모든 관리들에게 열린 곳이다. 소문이 어디보다 빠르게 퍼지는 곳이다. 사실 익이 쓴것이라고 하고는 익을 보낼까? 하지만 이런 순간에 익이 없다. 확 기절해버릴까? 왜 하필 창문을 열어서 그들과 마주볼것이 뭐람? 어쩌지? 재촉하는 소리에 일단 옷을 입고 밖으로 나온다. 시종들뿐이 아니라 그 뒤로 4왕자의 가신같은 우락부락한 사내들이 두어명 서있다. 비서랑은 황제의 가신에 속해 그들이 자신에게 위해를 가할 수는 없을것이 분명한데도 저들을 보낸 것은 협박인가. 혹시 내가 누군지 여기 있는지 알고 있는건가? 등이 축축해지는 것이 느껴진다. 긴장하고 있는 것이다. 돌길을 걸어 4왕자의 궁쪽으로 걸어간다. 이때만큼 궁과 궁사이의 거리가 상당하다는 것이 고맙게 느껴진적이 없다. 태진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잘못봤나?” “왜 그러십니까?” “아니. 잘못봤다. 올 봄은 유난히 따뜻하구나. 아지랑이가 사람의 시야를 어지럽히는군.” 목래의 그놈인줄 알았다. 하지만 그놈이 미쳤다고 이곳에 올 리가 없다. 무엇보다 그놈은 죽었지 않는가. 다시 긴장을 풀고 자신의 궁으로 향한다. 태진이 등을 돌린 순간 자례역시 이상한 것을 느끼고 등을 돌려 태진을 본다. 하지만 자례 역시 잘못본 것이 아닌가 하며 등을 돌린다. 찰라의 순간이 그렇게 지나가버린다. 어서 들어가라고 재촉한다고 들어갈수 있을 리가 없다. 아직도 아무런 방법을 생각해내지 못한 체로 4왕자의 궁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치명적이다. 쭈빗쭈빗머뭇거린다. 문득 다른 한 무리의 사람들이 4왕자의 궁으로 들어온다. 누구인지는 몰라도 4왕자의 가신들이 전부 비키는 것을 보고 일단 따라서 비켜 고개를 숙인다. “응? 너 고개를 들어봐라.” 4왕자인가? 가슴이 두근 두근거린다. 터질듯한 긴장속에 고개를 들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냥 숙이고 있자 그가 다시 말을 건다. “자네 이번에 입관시험에서 장원한 우씨지? 심려말고 고개를 들라.” “....?” 날 모르나? 아니라면 4왕자가 아닌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을 때 뒤로 물러날뻔한다. 4왕자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전혀 몰라보는 듯해 더욱 이상하다. 그가 미소지으며 자신을 바라본다. 문득 그의 머리카락이 붉은 색이 아니라 검정이란 것에 의아해한다. 얼굴은 분명 4왕자인데 뭔가 이질감이 느껴진다. “이분은 2왕자 경락공이시다.” 옆에서 가신이 말한다. 그말에 가슴이 두근거렸던 긴장감이 사라진다. “비서랑 우씨입니다.” “그대의 글을 읽은적이 있다. 매우 아름다운 글씨더군.” ”과찬이십니다.“ 2왕자는 잠시 생각에 잠긴다. 뭔가 결정을 내렸는지 웃는다. “자네, 지금 내 다과에 초대받아야겠네.” “예?” “4왕자에게 가려고 했건만...일단 자네와 만났으니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다.” “...?” 뭔가 익이 또 큰일을 저지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차라리 4왕자보다는 괜찮다는 생각에 선선히 고개를 숙인다. 어차피 일단 2왕자의 가신으로 들어가라 명을 받았으니 이런 만남이 해될 것은 없다 여긴다. 게다가 2왕자는 자신이 정안족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왔던 길을 다시 올라간다. 4왕자의 가신들이 멍한 표정으로 멀어져가는 자례를 보나 감히 2왕자의 가신들에게 말을 거는 자는 없다. 그들이 안보이는 곳까지 가자 체이첸이 중얼거린다. “흠. 자네도 혹시 4왕자와도 약속이 있었는가. 저들이 날 보는 것같지 않는데? 그렇다면 레이첸도 내 궁으로 부르지. 어차피 나도 만날일이 있었으니까.” 안불러도 되는데. 그래도 차마 표정으로 내색하지 못한다. 악운은 깜짝놀라 벌떡 일어나 난간으로 달려간다. 시종들이 무슨일인가하고 다가오지만 그는 아래층을 노려보다가 얼른 계단으로 뛰어간다. 시종들이 그의 행동에 품위가 없다생각하는 모습이 보이지만 그것을 신경쓸만한 겨를이 아니다. 그때 그 어린놈이다. 일층으로 내려가자 막 복도로 올라오는 체이첸 일행이 보인다. 악운은 씩씩거리며 그 앞으로 걸어갔다. 나쁜 놈. 너 때문에 내가 팔자에도 없는 궁안 생활에 말라가고 있는데 태평하게 이곳에서 생활하고 있었단 말이냐. 하지만 막상 다가가 한대 쳐볼 요량이였던 아이가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소리없이 기침한다. 정말로 괴로운지 미간을 있는대로 찌프려가면서도 체이첸에게 들킬까봐 어깨만 들썩인다. 이러면 때릴수가 없잖아! 그제야 체이첸이 조금 떨어진 앞에 악운이 있다는 것을 알고 조금 당황한다. 체이첸은 자례를 본다. 시선을 느낀 자례는 앞을 보았고 거기서 찾고 있던 악운을 보고 눈이 커진다. 순간 머릿속에 정안족을 숨겨야 한다던가, 4왕자와 14왕자를 이간질시킨다던가, 자신이 지금 정체를 들킬만한 위험에 쳐해있다는 것조차 잊어버린다. 입에서 저절로 외마디소리가 터저나온다. “우리 형은 어디에...!” “너가 왜 여...! 하지만 둘다 난폭하게 체이첸의 궁으로 뛰어들어온 불청객에 놀라 입을 다문다. 화가 나있다는 것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레이첸이 씩씩거리며 복도를 달려오고 있다. 109 레이첸은 화가 나있었다. 아무리 존경하는 형님이라도 내가 찾는 사람을 이렇게 채가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느꼈다. 즉시 일어나 시종들이 따라올수 없는 속력으로 달려 체이첸의 궁전에 도착했다. 주인의 허락이 있어야만 들어갈수 있는 내궁까지 들어와 체이첸을 찾는다. 안된다며 체이첸의 시종들이 그를 말리지만 차마 가로막지는 못한다. 안쪽에 있는 내실쪽의 복도에서 체이첸을 보고 달려간다. “형님, 이러실수는 없소!” 꽥 소리지르고 남빛옷의 비서랑의 팔을 잡아 확 끌어당긴다. “아무리 허물없는 아우라지만 선약된 자를 빼가다니요!” “알아, 알아. 그래서 너보고 이리 와달라 부탁한 것이 아니냐.” “아무튼 아우는 이 비서랑과 긴히 할말이...” 순간 억소리를 내며 레이첸의 입이 벌어진다. 말도 안된다는 표정으로 변한 그는 비서랑의 팔을 얼른 놓는다. 너무 놀라 말이 안나오는지 비서랑과 체이첸의 얼굴만 번갈아서 바라본다. 겨우 진정한것인지 레이첸이 비서랑을 보고 더듬더듬 말한다. “너...너...왜?” “...무슨? 이 비서랑과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냐?” “그게...그러니까...” 정안인은 황궁의 출입을 엄금한다. 순간 악운도 자례도 등골이 오싹함을 느끼고 신경이 날카로와진다. 레이첸 역시 너무 놀라 어떻게 설명을 해야할지 몰라 허둥댄다. 이 성격 더러운 꼬마놈이 자신을 노려본다. 순간 곡양에서 생긴 일이 떠올라 화가 치밀어 오른다. 호통을 치고 싶어 팔을 들어올리려는데 그가 눈동자를 돌려 앞을 바라본다. 저절로 그가 무엇을 보는지 시선을 함께 옮기고는 뜨끔한다. 악운이 떡하니 거기 서있다. 지금 자례에게 아는 척을 한다는 것은 자신이 체이첸에게 악운이 자례라고 속인 것을 알려주는 셈이되는 것이다. 입이 탁 막히면서 팔을 내린다. 자례는 레이첸이 자신의 정체에 대해 말할것이라 생각하고 아찔해한다. 바로 저기 악운이 있는데. 그에게 단 한마디만 물어보면 형이 누구와 함께 어디로 갔는지 정도는 알수 있는데. 안타까움에 악운을 바라본다. 이상하게도 레이첸은 처음의 화난 표정은 어디가고 눈동자만 굴리며 조금 뒤로 물러난다. 악운은 도저히 이해갈 수 없는 이상황을 이해해보려고 노력한다. 2왕자가 진짜로 영웅을 찾아 온것일까. 자신은 이제 풀려나는 것인가. 그런데 왜 저기 4왕자가 나타나서 화를 내는 것인지. 가장 이 상황이 이해 안되는 것은 자신이다. 하지만 그래도 정안인이 황궁에 출입하는 것은 칙령을 어기는 대죄라는 것을 알고 있다. 저 꼬마를 죽이고 싶지는 않은데. 일단은 상황을 더 보는 것이다. 악운은 가만이 입을 다물로 자례와 체이첸을 바라본다. 체이첸은 난처했다. 4왕자야 자신이 정안인을 가신으로 두고 황궁에서 거주하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 비서랑은 모르지 않은가. 그가 입을 잘못열면 황제에게 이 소식이 들어가 자신의 입장이 난처해질지 모른다. 처음엔 자신의 사람으로 두기 위해 회유하려고 불렸지만 이렇게 약점을 들킨이상은 주인과 신하의 관계가 만들어지기는 무리다. 이렇게 된다면 죽이는 수 밖에 없는가. 체이첸의 생각을 먼저 읽은 것은 그동안 그와 많은 시간을 보낸 악운이였다. 그는 체이첸이 그 꼬마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체이첸을 바라보고는 그 눈동자가 밑으로 깔리는 것을 보고 확신한다. 그리고 자례에게 달려들었다. “살아있었구나!” “예?!” 자신에게 달려와 덥썩 안고 기뻐하는 악운에 놀라뿌리치려고 하지만 그는 놓아주지 않는다. 그러긴 커녕 더욱 꽉 잡고는 울먹울먹거린다. “헤어진 이후로 네가 죽었을줄 알았단다!” “?” “이 비서랑을 알고 있는가?‘ 체이첸이 악운에게 묻자 기다렸다는 듯 악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이 아이가 제가 찾던 지인입니다. 우린 형제지요.” “형제?” “동문형제입니다!” 악운이 무슨 의도로 저런 행동을 하는지 알아차리는 것도 순간이다. 자례는 재빨리 악운의 거짓말에 장단을 맞추어준다. 그래도 형제라는 것은 거짓말 같아 말을 돌리면서. 체이첸이 놀라 어깨를 으쓱인다. “동문형제?” “에헤?... 그럼 네가 기다리던 사람이 이놈이였구나?” 레이첸은 뭔가 이해버린다. 이 꼬마가 그 추위속에서 기다리던 놈이 바로 요놈이라 이건가. 레이첸의 이해에 체이첸은 더더욱 알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을 하고 손뼉을 쳐서 주위의 시선을 다듬는다. “방안으로 들어가서 말하지.” 악운은 정안인이였고 우광효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살던 한족이였다. 둘은 한 선생의 밑에서 글공부를 하는 동문형제였다. 악운은 정안족이고 광효는 정안의 혼혈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의견은 항상 동일했고 사이도 무척이나 각별했다. 어느날 화적의 침입으로 평화가 깨지고 악운은 형을 따라 화적을 소탕하는 군대의 책사로 들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몸이 병약해 벼슬과 인연을 떨치고 살아가던 광효는 화적이 처들어온날부터 그 행방이 묘연했다. 악운은 광효를 찾으면서 계속 전투를 해나갔고 결국 목래를 얻어 정착할수 있었다. 한편 광효는 화적때에게 쫓겨 멀리 곡양촌에 있는 인척에게 몸을 의탁한다. 광효는 어느날 목래가 화적에게 망했다는 소문을 들었고 목래의 군승이 자신의 의형제라는 것을 알았다. 광효는 그의 복수를 하기 위해 도성으로 와 관리로써의 시험을 보게 된다 “...꽤나 그럴듯한 이야기네.” 마기가 어깨를 으쓱했다. “자네가 만든 부분은 어디인가?” “곡양촌의 인척에게 몸을 의탁한다 부분입니다. 레이첸과 그곳에서 만났기 때문에 끼워넣었죠.” “나머진 악운이 한건가. 타고난 거짓말쟁이군. 그렇다면 내가 알고 있을 것은 자네의 모친이 정안인이라는 것인가?” “예. 가능할까요?” “그렇다면 서자라는 이야기인데. 일단 호적에는 자넨 정실인 성부인의 아들이네. 뭐. 합격한 이상 별 효과가 없는 이야기지. 알겠어. 일단 입양으로 치면 되겠지.”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큰일을 겪었군.” 그말에 자례가 쓴웃음을 짓는다. “예. 정말로 하늘이 무너지는 줄알았습니다. 하지만 완전히 의미없는 일은 아니였습니다. 레이첸이 절 협박할 이유를 하나 줄인 셈이니까요.” “레이첸은 자네가 한족혼혈이라 믿던가?” “고개를 끄덕이긴 하더군요. 하지만 곡양촌에서 제가 보인 행동이나 모습은 너무도 정안인의 그대로의 그것이라...” 말꼬리를 흐리는 자례의 표정도 흐려진다. 마기가 자례의 어깨를 두드렸다. “걱정하지마. 잘 될것이다. 그 외에 내게 상담하고 싶었던 것은 뭐였지?” “2왕자가 자신의 가신이 되라고 요청할 것 같습니다. 제가 응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말에 마기의 얼굴이 굳어진다. 잠시 생각하던 마기는 딱 잘라 말한다. “그건 안좋은 것이군.” “얼마나 안좋은 것입니까?” “자네나 나나 일단은 황제의 가신. 말단이던 대장군이던 일단은 황제의 신하의 명단에 이름이 올라갔다는 이야기네. 자네 통칭적인 ‘입궁’과 ‘환속’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 “입궁은 관적에 이름을 올린다는 뜻이고 환속은 주인을 읽은 신하들이 관적에서 이름을 파버리는 것이라 알고 있습니다.” “그래. 하지만 환속에서 관적에서 이름을 파낸다는 것은 말이 그렇다는 이야기다. 관적에 오른 이름은 영원히 남는다. 예를 들자면 지금 황제가 죽으면 자네나 나나 ‘환속’의 기회가 주어지지. 대부분 환속을 하며 궁밖의 자유를 꿈꾸지만 환속을 하던 전속을 하던 별다를 차이가 없다. 단지 새 황제의 관적에 다시 이름을 올리지 않는다는 것뿐, 전 황제의 관적에는 그대로 이름이 남기 마련이지.” “그렇군요. 전속은 무엇입니까?” “전속은 환속을 거부하고 새 주인을 받드는 것을 말한다. 이럴 경우가 관적에서 지워지는 유일한 길이야. 죽은 주인의 관적에서 완전히 지워지길 바란다면 전속을 택하는 방법뿐이다. 아니면 대 반란을 일으켜 나라에서 호적을 말소시키던지.” 자례는 한숨을 쉬었다. 궁안이 정말로 만만하지 않다. 특히나 이런 수 많은 관급과 예절, 관습에는 그야말로 무지인데다 따로 알려주는 이가 없어 더욱 난감하다. “그렇다면 전 2왕자의 가신이 될 수 없다는 이야기군요. 그런데 어떻게 2왕자가 제게 그런말을 내비친것일까요?” “남주기엔 위험한 인재고 자신이 가지기엔 이미 황제란 주인이 있기 때문에 선택권을 준것이다.” “만약 제가 승낙을 한다면 어떻게 상황이 돌아갑니까?” “2왕자의 첩자가 된다고 생각하면 된다. 황제에게 심어둔 2왕자의 첩자이지.” 그말에 더욱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어째서요?” “몸은 황제에게있고 마음은 2왕자에게 있지 않은가. 그것을 일러 첩자라 하지않나?” “그렇군요.” “너무 위험하다. 굉장히 위험해. 나는 여관에게 자네의 신변을 양도받았네. 궁안에서는 스스로 살아남으라는 지령으로 생활하지만 자네가 섶을 지고 불속으로 뛰어든다면 당연히 목덜미를 잡아서라도 막아야겠지.” “하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고 있다. 일단 자네가 악운을 본 이상 거절하면 자네의 목숨이 위험하다. 이미 하루가 지났으니 자네와 연관된 모두가, 동기와 나도 위험할지도 모르지.” “제가 정식으로 2왕자의 가신으로 들어가는 방법은 없는 것입니까?” “정식이라면 없지만 공언하에 들어가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일단 하나, 2왕자가 황제에게 너를 달라고 해서 황제가 널 주는 경우다. 아주 드문 경우지만 이것이 주인이 살아있는 상태에서의 ‘전속’이라고 할수 있지. 하지만 이 경우는 기대하기 힘들다. 주인이 살아있는 상태에서의 전속이란 동등한 위치의 두명의 주인사이에서만 이루어지는 일이다. 살아있는 아버지의 여인을 아들이 뺏어간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것과 같다.” “다른 방법은?” “두번째는 2왕자가 자네가 소속된 서관의 총 책임자가 되는 경우다. 이런 경우는 가신이라고 할수 없지만 적어도 황제가 2왕자를 해임시키기 전까지 자네는 2왕자의 가신처럼 생활해도 상관이 없다.하지만 2왕자가 황제의 가신으로 들어가야한다는 전제하다. 세 번째도 있지. 2왕자가 모종의 일을 행하기 위해 수행원으로 자네를 원했을 경우, 황제가 허락한다는 하에 임시적으로 2왕자에게 전속이 된다. 하지만 이경우의 전속은 관적에 파지는 것이 아닌 두 관적에 임시로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황제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다시 2왕자의 관적에서 파지는 것이다.” “힘들군요. 솔찍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관적, 궁안의 모든 생습관들이요. 오히려 전쟁이 더 편한느낌입니다.” 머리를 쓸어올리며 눈을 감는 자례를 보고 마기가 일어났다. “나는 이제 저녁 일지를 적어야 한다네. 조만간 내가 널 찾아가겠다. 그리고 조금은 자두는게 좋아. 오늘 많은 일이 있어서 지금은 아니더라도 곧 탈진하고 싶어질것이다.” “알겠습니다.” “동기에게 오늘 일을 들키지 않게 조심해라.” 마기장군의 방을 나오면서 답답한 가슴을 친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다. 항상 모든 상황의 앞뒤를 남보다 정확하게 빠르게 알고 행동했었다. 하지만 이젠 전혀 다르다.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그때 그때 임기 응변으로 하루하루를 살아남아야 한다. 그것이 이렇게 힘든 일인줄, 답답한 일인줄 미쳐 몰랐었다. “어디갔다 이제 오는거야?” “...전쟁터에서 돌아왔죠.” 무슨말이냐는 듯 황당해 하는 익을 제치고 방으로 곧장 들어가 누워버린다. 익이 방문앞에서서 말을 건다. “낭관이 계속 재촉을 하고 있다. 너 혹시 오늘 2왕자를 만나러 가지 않았니?” “...” “만약 2왕자가 가신을 하라고 한다면 절대로 승낙하면 안된다.” 그말에 벌덕 일어난다. 두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정신을 가다듬고는 익을 손짓해서 부른다. “왜요?” “뭐가?” “왜 2왕자의 청을 거절해야 하는거죠?” “그야 넌 황제의 가신이니까. 정식으로 2왕자의 가신이 될 수 없는 몸이니까. 어찌 되었건 두 마리의 호랑이 사이에서 껴죽는 여우신세가 될것이 뻔하니까. 알겠냐 어린애야?” “...그렇군요.” 익이 입을 삐죽거리고는 자신의 방으로 건너간다. 자례는 피식 미소짓는다. 어쩌면 궁안에서 힘들어하는 것은 자신뿐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110 조회가 끝나자마자 서관으로 들어온 것은 생각지도 않던 4왕자였다. 비서랑들은 어리둥절 하게 레이첸을 바라보았고 서관에서 오랫동안 일한 낭관들은 해가 서쪽에서 떴다고 말했다. “좋은 아침이로고.” “...” 자례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일단 고개를 들어 정면을 바라보았다. 예상대로 무슨 일인가 하는 호기심어린 눈동자들이 자신을 노려본다. 옆자리에 앉은 익이 키득거리는 모습이 보인다. 화를 낼만큼 힘도 없고 짜증도 나기도 해 자리에서 일어나 서관 뒤쪽의 작은 정자로 걸음을 옮긴다. 레이첸이 따라오는 것을 느끼고 잠시 기다렸다가 그가 다가오자 뒤를 돌아 인사한다. “안녕하십니까. 서공” “이제야 인사가 나오냐?” “보는 눈이 많아 어린 제가 함부로 입을 열수가 없군요.” “어여, 이제보니 다른 사람 눈도 신경쓰는 놈이구나? 곡양에서는 그렇지 않았잖아?” “곡양에 대해 논하자면 저보다는 서공께서 더 말씀을 회피하고자 하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왜?” 레이첸이 정자의 난간에 걸터앉아 웃는다. “너가 내게 한짓은 분명 황족에 대한 우롱이다. 그런데 왜 내가 그 이야기를 회피하고자 한다는 것이냐?” “그러시다면 광속에 갇혀 미친사람의 취급을 받았던 일이 있어 절 벌주고 싶다고 황제에게 고하지 그러십니까?” “...고약한 놈. 그 독설은 시골에서나 궁안에서나 변하지 않는구나.” “하실말씀이 그것이였다면 이만 가봐야 합니다. 비서랑은 할일이 많은 자들입니다.” “기다려.” 잠시 주위를 둘러보던 레이첸이 자레에게 다가온다. 아주 가까이 다가와서는 그 눈을, 머리를, 뚫어저라 바라본다. “한족혼혈이라. 믿기지 않는군. 넌 내가 아는 정안인의 완벽한 형태다.” “더 하실말은?” “손 내놔.” “예?” 때아닌 이상한 말에 자례가 황당한 표정을 짓는다. 이 왕자 지금 분명 내게 손 내놓으라고 그랬나? 레이첸은 한손을 내밀고는 다시한번 말한다. “손말이다. 손.” “손?” “그래. 손 좀 보자.” 강한 요구에 영문을 몰라하면서도 한쪽 손을 내민다. 내민손을 레이첸은 덥썩 쥔다. 그리고 손바닥과 손등을 돌려가면서 꼼꼼하게 살핀다. 레이첸의 행동에 자례는 더욱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이게 뭘까. 혹시 궁안관습의 하나인가? 이런별 이상한 행동이 있나? 의문에 의문을 더하고 있는데 레이첸이 물어본다. “손을 다쳤었구나?” “예?” “둘째 마디 부분만 미묘하게 느낌이 다르군. 예전에 크게 다쳤지 않은가? 약간 휜듯한 느낌이 든다.” “서공의 취미가 의술이셨습니까?” “그럴 리가 있나?” 자례는 손을 빼려고 힘을 준다. 하지만 레이첸은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넌 검을 잡은 적도 있다. 검지가 유난히 평평한 것으로 보아 검이 아닌 도를 잡았겠군. 한족이 도를 쓴다는 것은 드문데 악운의 영향이냐?” “그렇습니다.” “그런데도 검지의 둘째마디가 유달리 발달한 것으로 보아 글을 많이 쓴 서생이구나?” “비서랑이지 않습니까?” “검도 잡고, 글까지 쓰는 고된 손인데 매우 곱군?” “잘 모르겠습니다.” 이젠 힘을 주고 명백히 손을 놓으라는 의사를 밝힌다. 하지만 레이첸은 더욱 손을 끌어당긴다. “평생 젓가락만을 잡았던 여인들의 손도 이것보다는 혈색이 좋지, 네 손은 마치 태어났을때부터 옷자락에 감추어 햇살을 받지 못한 그것과 같구나? 어떻게 생각하지?” “무슨 의도로 말씀하시는 건지 몰라 난처하군요.” “손이 하얀게 아니라 햇살을 받지 못해 창백한것이다. 밀가루 인형이나 사기 인형처럼 말이 지! 한족이라며? 한족이 언제 손을 가리고 생활하던가?! 안그런가?!” “손을 놓지 못하겠소!” “넌 한족이 아니야!” “정안족도 아니오!” 타악하는 소리와 함께 손을 빼어낸다. 잡혔던 손목에 선명하게 레이첸의 손가락의 흔적이 붉게 남는다. 쓰린 손목을 쓰다듬으며 자례는 레이첸을 노려본다. “내 혈통이 그리 궁금하면 황제께 고하여 호적을 살펴보시오!” “오호, 내가 못볼것 같으냐? 내가 마음만 먹으면 너 따위정도는 얼마든지... "그렇다면 해보시오!" "네 이놈! 황제의 가신이니 왕자인 내가 널 어떻게 못할것이라 말하는것이냐? 황제를 등에 업을 생각이렸다!” “어찌 생각하시건 내 알바아니오!” 등을 돌려 서관으로 사라져버린다. 자례가 완전히 보이지 않자 레이첸은 팔짱을 끼고 정자의 천장을 노려보다가 이윽고 사라진다. 서관의 기둥뒤에서 레이첸이 화를 버럭버럭 내고 있는 것을 본다. 그가 당장이라도 자신의 호적을 보여달라고 서관으로 들어올것만 같았지만 그냥 사라진다. 자례는 문득 알수있었다. 황제의 가신이라는 점이 이 궁안에서 자신을 보호할수 있는 유일한 방패인 것을. -황제를 등에 업을 생각이렸다. 관적을 옮길수는 없다. 2왕자도 그 누구도 내 관적을 옮길수는 없는거다. 황제가 죽기 전까지는 그것은 불가능한일이다. -정시로 들어가면 황제의 직속이 되어 왕자들의 세력싸움에 끼여 위험한일에 휘말리는 일은 없을것이다. “...그렇구나.” 나는 황제의 가신이니 황제를 등에 업고 있는 것이다. 다른 왕자들이 날 처벌할 권리가 없는것이다. 내가 고민해야 할일은 2왕자의 가신이 되고 말고가 아니였다. 내게 황제의 가신이라는 것은 왕씨가 내게 만들어준 최상의, 하나뿐인 저지선인것이다. 분명 왕씨가 2왕자의 밑으로 들어간다는 말씀을 하셨지만 그뿐이다. 가신이 되라는 말은 없었어. -2왕자의 권력과 신임이 도움이 될것이다. “...” 자례는 기둥에 기대서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일단 체이첸의 시선은 어느정도 무마시켰지만 아직도 이해가지 않는 부분은 산더미 같았다. 아이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체이첸은 그 부분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했다. 결국 한없이 기다리는 일만이 남았을뿐이다. 씩씩거리며 울분을 달래던 중 시종한명이 들어와 체이첸이 부른다는 소식을 전한다. “무슨 일이십니까?” “광효와 자네가 그렇게 절친했다면 그를 설득하는 것도 쉽겠지?” “예?” “나는 자네도, 광효도 잃고 싶은 마음 따위 손톱만큼도 없다.” “예?‘ “그를 불렀다. 하지만 내가 권한들 내 가신으로 들어오려는 생각은 없을것이다. 네가 설득해 서 내 가신으로 들어오게 만들어라.” “가신으로?” “들어오지 않는다면 죽이는 수 밖에 없다.” 악운이 고개를 들어 체이첸을 본다. 체이첸의 입에서 죽인다.라는 말이 나오것은 처음이였다. 거짓말이나 허풍인가 싶어 그 눈동자를 보지만 절대로 농담이 아니다. 선비인만큼 뒤바꿀수 없다는 고집이 단호하게 풍긴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는게 좋을것이야.” 체이첸이 일어나 나간다. 텅 빈 방안에 혼자 앉아 멀뚱히 천장을 바라본다. 그놈을 설득하라고? 내가 왜? 그야 내가 그놈이 형제라고 말했으니까. 이거 큰일을 만들어버 린듯하네. 하지만 어차피 그놈이 진짜 영웅이라 밝혀졌더라도 나역시 죽게 되었을걸. 방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온다. 고개를 돌리는 자례를 보고 악운이 쌓인 감정으로 소리치려고 하자 그가 얼른 다가와 꽉 안아버린다. 전과는 다른 입장에 악운이 바둥거린다. “뵙고 싶었습니다.” “야, 놔,숨막혀!” “옆방에 사람이 있어요.” 그말에 악운이 입을 다문다. 자례가 방안을 둘러보고는 악운의 옷을 당긴다. “벗어요.” “뭐?! 왜?” “시끄러워요. 벗으란 말입니다.” 악운은 정안족의 옷을 입고 있었다. 긴 장옷을 벗게 해 그것을 뒤집어 쓴다. 옷안에서 뚱하게 악운이 묻는다. “이게 뭐하는 짓이냐?“ “말이 덜 새어나가죠. 그보다 난곡에서 사냥왔던 자들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나? 기를 보았다던가, 이름을 들었다던가, 아니라면 아무것이라도 말해보시오!” “뭐야, 지금 그게 문제냐!” “나에겐 그것보다 중요한 것이 없다구요!” 덥썩 목덜미를 부여잡고는 달달 흔들어 답을 내놓으라 보챈다. “아무거나 말해봐요! 그들과 함께 형이 사라졌다구요! 난 형을 만나야해요! 제발!” “이 바보야 그만해라!” 정신없이 흔들리는 와중에 짜증난다는 듯 악운이 자례를 떠민다. 답답한지 옷을 걷고는 심호흡을 하고 크게 소리친다. “그러지말고 2왕자의 가신이 되어라!” “뭐라고?” 다시 옷을 뒤집어 쓰고 자례를 당긴다. “이 빌어먹을 꼬마, 내가 누구 때문에 이 황궁에서 팔자에도 없는 정안족흉내를 내고 있는데 네놈이 하는 것이라고는 고작그거냐! 잘들어. 난 여기서 나가고 싶다! 이 긴옷하며, 때 아닌 고상, 우아, 품위고 뭐고, 지긋지긋한 책도 그렇고 난 여기서 나가고 싶단말이다!” “..2왕자가 죽으면 환속되지 않습니까?” “이 멍청아! 환속될때가 언제라고 기다리란 말이냐! 난 당장 여기서 나가고 싶다!” “그런 불가능한 일을 이야기하지 말고 아는 것이나 내게 털어놓아!” “넌 영웅이라며!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것이 영웅이 아니더냐!” “그깟 종이쪼가리의 적힌 이름 따위가 기적을 만들지는 못하오!” “기적을 만들었기에 종이쪼가리에 이름이 올라간거다!” 이번엔 자례가 답답한지 옷을 걷고 씩씩거린다. 한동안 서로 노려보기만 하다가 결국 둘다 손을 든다. “먼저 말해보시지요.” “아니, 아우가 먼저 말씀하시게.” 다시 옷을 뒤집어 쓰자 악운이 숨쉴틈도 없이 말한다. “일단 알아둘 것은 아까 2왕자가 널 설득해 자신의 가신으로 만들라고 했다. 네가 승낙하지 않으면 널 죽인다고 하는데 어쩔거냐?” “그것에 대해선 생각한 것이 있으니 다른말을 하시죠.” “좋아. 일단 내가 여기서 벗어나는 방법을 알고 싶다.” “내가 무슨 만능인줄 아십니까? 몰라요. 몰라.” “이걸 그냥!” 손을 들어 한대 치려하니 얼굴을 내밀고 쳐봐라는 표정의 자례를 보곤 혀를 차며 손을 내린다. “일단 좀 생각해봐.” “알겠습니다. 그러면 이번엔 내 질문은?” “기다려봐.” 손가락을 미간에 대고 생각에 잠기던 그는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든다. “마고라고 했다.” “마고?” “그래. 이름을 들은 것은 그것 하나다. 그것이 아마도 그 금발머리의 맞은편에 앉았던 어두운 놈의 이름이겠지.” “?” 악운의 머리에는 그날의 일이 떠오른다. 위협감이 느껴와 일을 취소하려고 했다. 엎드리고 조심조심 막사에서 물러나는데 금발의 사내가 잔을 내려놓으며 소리쳤지. ‘마고‘라고. “그것뿐?” “우두머리는 금발의 30초의 사내였고 굉장히 강한 놈이였다. 마고라고 불리는 놈은 황갈색머 리의 20중반의 사내였어. 금발은 여진인같았고...마고라는 놈은 묘한 분위기더군. 딱잘라 혈통을 말할수 없다고 할까?” “...그렇군요.” “제길. 그 금발을 보거든 한대 먹여버려. 그놈 때문에 가슴에 구멍이 뚫렸단 말이다.” “고마워요.” 공손하게 고개를 숙인다. “저도 악운이 여기서 나가는 방법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황궁의 관습에 아직 무지합니다. 오랜 시간이 걸릴겁니다.” “그보다 2왕자건은 어떡할거지?” 자례는 옷을 걷어내 악운에게 건냈다. “거절입니다.” 111 자휼은 책상에 걸터앉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젠 날이 많이 따뜻해져 갑옷을 입고 있으면 덥다. 가볍게 장옷만 걸치고 창밖에 보이는 흑염을 바라본다. 뭔가 욕구불만인듯한 이놈은 푸르릉거리며 자꾸만 마굿간의 말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축사를 관리하는 관리들은 흑염을 마굿간에서 끌고 나와 공터의 나무에 매어놓았다. 처음엔 그곳을 지나는 사람들을 향해 개처럼 으르렁대기도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따분해 졌는지 얌전히 고개를 숙이고 풀을 뜯었다. 문제는 풀어 기르고 있는 친첸과 마고의 말이였다. 마고의 말은 주인을 닮았는지 굉장히 얌전했다. 성담의 구석진 그늘에 들어가 풀을 뜯거나 낮잠을 자는 것이 다였다. 하지만 친첸의 말은 매우 사나웠다. 그 사납기가 흑염과 맞먹어 이 두말은 툭하면 머리를 맞대고 다리를 허공에 흔들어 싸우곤 했었다. 오늘도 친첸의 말이 흑염에게 다가가 시비를 걸고 있었다. 흑염은 예전에 그와 싸웠다가 혼난 기억이 있기에 친첸의 말인 백산(白散)을 무시한다. “무엇을 하고 있나요?” “아, 마고. 이리와봐.” 손짓해 마고를 불러 창밖의 말싸움을 바라본다. 계속 머리로 등을 쳐대는 백산에게 화가 단단히 났는지 흑염이 앞발을 들고 백산의 허리를 향해 내리친다. 잘도 피한 백산이 이번엔 머리로 흑염의 목을 친다. 휘청이고는 물러선 흑염은 백산에게 달려가려다가 목이 나무에 매어져 닿지 못하고 다시 돌아오고 만다. “말싸움을 좋아하셨다니 정말 의외군요?” “귀엽잖아.” 놀리듯 백산이 근처에서 얼쩡얼쩡거리자 흑염은 화나 발을 구른다. 하지만 닿지 못하는 것을 알고는 화를 참고 풀을 뜯는다. 흑염이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자 뚱한 표정으로 백산이 다른곳으로 간다. “흑염이 졌군요.” “그렇군.” 기지개를 피고는 하품을 한후 마고를 바라본다. 마고는 편한 옷차림이다. 그는 휴가중이다. 휴가중이라고는 하지만 따로 이곳을 떠나 거주지가 없는 그에게는 매일 하는 일은 같다. 단지 관복을 입지 않는것만 다르달까. “친첸왕자가 자네를 놓아주었나?” “낮잠을 주무시고 계십니다. 잠시 나왔어요.” “그럼...사냥을 갈까?” “안됩니다. 전하게 깨어나면...” 갑자기 말울음소리가 크게 울린다. 둘다 놀라 창문에 몸을 내민다. 흑염이 힝힝거리며 기분좋게 총총걸음으로 주위를 뛴다. 계속 기회를 노리고 있던 흑염이 생각없이 자신의 옆을 지나가던 백산의 허리를 발로 차버린것이다. 말이지만, 그 말이 친첸의 말이고 자휼의 말이라는 것에 이 단순한 텃세권싸움에 묘한 감정이 든다. 아무말없이 서로 흑염과 백산만을 쳐다보다가 서로 씨익웃는다. “흠. 그래. 사냥을 안간다고?” “가보죠.” 둘은 마주보고 웃고는 서둘러 성을 내려간다. 그늘에서 자고 있는 축(祝)과 웃고있는 흑염을 당겨 타고 성을 나와 가까운 숲까지 들어간다. 처음에는 발자국을 찾거나 사냥에 열중하던 둘은 곧 근처의 평평한 곧에 들어서자 주저앉는다. 어차피 기산성의 근처에는 쇠를 캐는 돌산이라 사냥할만한 곳이 아니다. “옮겨온 정안인들은 어떠합니까?” “잘 있지. 곧 매달의 아이가 태어날꺼야. 여자아이였으면 좋겠군.” “...매달?” “아, 마지막 날에 옮겨온 젊은 부인이지. 굉장한 여인이야. 강하고 상냥하지. 아들이 셋이나 있는데 막내를 임신중이야. 막내는 여자아이였으면 좋겠다고 하더군.” “그래요.” “그러고보니 마고는 전혀 그들에게 모습을 비추지 않고 있군.” “...” “혈통이 마음에 걸린다면 숨기고서라도 한번 둘러봐. 그것이 그리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되는데.” 마고는 대답없이 근처의 풀을 뜯는다. 생각하거나 할말이 없을때 하는 버릇이다. 무엇인가 만지작거리거나 근처의 뭔가를 잡아 뜯는 버릇. 자례가 손톱을 물거나 머리를 끝을 만지작거리던 것처럼 말이다. “수해는 가족이 있나요?” “응? 가족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쓰린 표정을 숨긴다. “어린 남동생이 하나 있지. 부모님은 별세하셨지만.” “그래요? 자휼에게 남동생이 있다는 것은 처음듣는군요.” “하지만 예상은 하고 있었지?” “그래요. 날 대하는 태도가 익숙하니까 짐작할 수는 있었죠. 하지만 확답은 처음이지않습니까.” “그래.” 깊이 한숨을 쉰다. 잊으려고 발버둥치면 더욱 떠오르는 것이 그것이라 그냥 흘려보내려고 한다. “동생은 어떤 분입니까?” “응? 그냥 평범한 아이야.” “정말요?” “그래. 그냥 지나가다가 만날만한 아이야.” 멋쩍게 웃는 자휼의 모습이 조금은 생소하다. 잠시 주저하다가 말한다. “사실은 널 닮았어.” “저를요?” “모습이 아니라... 아마도 생각하고있는 것이 비슷한 것같은 느낌이랄까. 그래서인지 널 두고 가지 못하는 느낌이다.” “그렇군요.” “싫지?” “별로.” 고민할것이 없다는 듯 손에 쥔 풀들을 흘려보낸다. “저는 형제가 없어서 자휼이 절 대하는 것이 부담스러워요.” “결국 싫은가?” “...싫지는 않아요.” “마고의 부모님은 어떤 분이시지?” “저요?” 마고는 다시 풀을 잡아뜯었다. 한참을 침묵으로 일관하더니 피식 웃고는 일어난다. “돌아갑시다. 전하께서 깨어날 것 같군요.” “그게 겨울이였지. 정말 추운 날이였다. 한여인이 아이를 물속에 던저버렸지. 우연히 지나가다가 아이가 살아서 허우적대고 있길래 근처의 한족에게 닷푼을 주고 아이를 건저오게 했지.” “...” “궁금해하는 것 같아서.” 자휼은 아무말도 하지 않고 앞을 노려보았다. 잡에서 깨자마자 자신을 찾은 친첸은 아무말 없이 광산에 한번 가보자며 자신을 호위호 세웠다. 마고가 조금 걱정스러운 얼굴로 둘이 나가는 것을 배웅했지만 친첸은 마고를 돌아보지 않았고 자휼만 웃어보였다. 설마 어찌 되기야 하겠어. 그런 심정으로 출발한 길이였지만 왠일인지 오늘따라 친첸은 듣고 싶지 않는 이야기까지 말하고 있었다. “야속하지 않나? 자기가 낳은 아이를 한겨울에 강에 던저버리는 애미라니. 다행인지 불행인지 저 놈은 그걸 기억못하는 눈치야.” “...여인은.” “그 여인? 몰라. 아이를 건지고 보니 사라졌더군.” “...” “여인은 정안인이였지. 그래서 아이도 정안인인줄 알았거든. 그런데 막상 성장하는 것을 보니 혼혈이란말이지. 버릴까 하다가 그때 내 상황이 그렇지 않아서 키운 것이 지금 여기까지 온것이지.” “...” “어떻게 생각하나?” “수하로 들어간 이상 왕자에게 무례한 말을 할 수는 없는 것일거요. 하지만 지금 당신이 한 말은 거짓말이군.” 그말에 친첸이 말을 멈추었다. 등을 돌려 표정이 보이지 않지만 그가 웃고 있는 것같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일단 시간이 맞지 않소. 왕자의 나이와 마고의 나이차는 불과 한손에 불과해. 그런데 물에 빠진 아이를 건질수 있었다는 것은 성밖으로 나와있다는 것이오. 내가 알기로는 어린왕자가 궁밖의 출입이 가능하지 못하는 걸로 알고 있소. 물에 빠진 것이 거짓이던지, 당신이 건졌다는 것이 거짓이던지.” “흠. 역시 영웅서에 적힌 장군인가.” 바로 자휼은 흑계의 마구를 당겨 뒤로 물러난다. “알고 있었나? 언제부터?!” “긴장할 것 없다. 수하가 새로 들어오면 그에 대해 약간의 조사정도는 당연한 것이 아닌가?” “...” “근간에 성을 도적맞았더군. 그 잘난 14왕자에게 말이야. 안타깝군. 계명장군은 실력가였는데. 처음부터 고개숙이고 날 따랐다면 그리 맥없이 죽진 않았을것을. 너무 큰 야망이 화를 부른거지.” 계명을 죽인 사람이 나라는 것은 모르는 모양이군. 그렇다면 혈족과 관련된 일은 모르는 건가. 불행 중 다행이라는 심정으로 가슴을 쓸어내린다. “그런데 자네 동생은 왜 입궁한거지?” “뭐?” “2왕자에 심어둔 자에게서 자네의 동생인 목래의 영웅이 2왕자의 가신으로 황궁에서 살고 있다 하던데? 그 얼굴은 전혀 모르고 있었던가?” 자휼은 귀를 의심하는 수밖에 없었다. 방금 친첸이 뭐라 말한거지? 내 아이가 황궁에 있다고? 2왕자의 가신? 무슨 소리인가, 아이는 혈족들과 함께 지내고 있을 것이다. 곡양의, 유견스승님의 아우라는 노인과 조용히 지내고 있을것이란 말이다. “입궁이라니 가당치도 않소. 그 아이는 지금 다른 곳에서 요양을 하고 있을것이란 말이오.” “그래? 그렇다면 정안족의 입궁이 금지된 황궁에 버젓히 정안의 옷을 입고 바둑이나 두는 자를 거둔 형님이 괴짜란 말이군. 조만간 2왕자가 망하려나?” “...” “한번 보고 싶지?” “놀리지 마시오.” “안그래도 보내지 않는다. 너는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우수한 인재야. 뭐랄까. 나는 너를 부리고 싶다. 내 마음대로. 내 수족처럼 말이지.” “정안인을 부린다는 것이 얼마나 큰 만용인지 모른단 말이시군.” “그래서 많이 생각했지. 죽여버릴까. 아니면 설득좀 해볼까 하고 말이야.” 저 멀리 광산이 보이자 말을 멈추고 일하고 있는 죄수들을 바라본다. “자산. 강철이 나오는 명지다. 지금은 어떠한 왕자라도 탐내는 보석같은 영지지. 하지만 내가 기산으로 유배왔을때만하더라도 이곳은 화적때들이 잔치를 벌이는 쓰레기장에 불과했다. 그것을 내가, 마고를 부려서 내것으로 만들고 광산을 일구어냈던것이다.” “...” “정안족은 고집이 세. 마고도 고집이 세단 말이야. 너는 순혈이나 더 할테지? 설득은 통하지 않아.” “난 왕자의 수하가 되기로 결정했소. 내가 떠나기 전까진 당신을 모실것이오. 정안인의 맹세는 깨지지 않소.” “바보군. 나는 네가 내 곁을 영원히 떠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건 무리요.” 딱 잘라 말한다. 일순 사나운 표정을 지었던 친첸이 피식 웃는다. 잠시 광산이 돌아가는 것을 바라본다. “황제의 칙명을 어긴 자에겐 어떤 형벌이 내리는지 알고 있나?” “...?” “칙명이란 다른 관할에 따른 황제의 조언이 아닌 황제 스스로 원하는 소원을 뜻한다. 즉 칙명을 거스르는 것은 역적죄와 같은 것이지. 역적은 삼족을 멸하고 사지를 자르고 시체로 젓을 담가먹을수 있게 난도질한다. 그 목을 성벽에 걸고 그 몸둥아리가 바람에 사라질때까지 시장바닥에 버리는거지.” “...?” “광산은 잘 돌아가는군. 심심한데 서신이나 한번 올릴까?” “...?” “정안족의 사내가 2왕자의 휘하에 있는 것 같다고 말이야.” “이 놈!” 허리에서 칼을 뽑아들고 친첸의 목에 겨눈다. 하지만 친첸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죽이려고? 하긴 죽이면 자네 동생머리를 성벽위에서 보진 않겠지. 하지만 나는 황족이야. 이런 작은 성에서 썩고 있다 한들 황족이란 말이다. 날 죽이면 동생 대신 다른 놈의 목이 걸릴테지.” “빌어먹을!” 검을 치운다. 씩씩거리며 울분을 가라앉히지 못한다. 친첸을 살리면 궁안에 있다는 내 아이가 위험하고 이놈을 죽이면 황족이기 때문에 군승이 그 죄를 물어 마고가 처형된다. “꼬리가 물렸지?” “거짓말이야!” 자휼이 부정한다. “내 아이가 황궁에 있을 리가 없다! 날 협박하지 마시오!” “확인해봐. 아니 확인할수 있게 내가 서신을 보내주지.” “이...!” “다시한번 선택해봐라. 마고냐? 그 아이냐?” “그런 선택할수 없소!” “하하하! 하지만 막상 네 아이와 마고중 선택해야 한다면 넌 네 아이를 잡을 것이다. 당연한 것이 아닌가!” “내게 도대체 무엇을 바라는 것이오!” “내게 충성을 맹세해라!” 자휼이 친첸을 노려본다. 친첸은 그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본다. “난 인정할수 없소.” “휴가다. 확인하고 와라.” 친첸이 품안에서 작은 주머니를 하나 꺼내 자휼에게 던졌다. “봄이 왔으니 도성에선 경마가 시작된다. 황제의 유흥이지. 내려오는 길에 말을 하나 사와라.” “안돌아올지도 모르는데?” “하하하! 네 놈이 참으로 그러겠다. 네놈은 확인하고서도 마고 때문에 돌아올 수밖에 없을거다.” “...” 친첸이 등을 돌린다. “흑염에게 지지 않는 말로 사와라. 아니라면 흑염이 백산을 치지 못하게 만들던가.” 112 지난 겨울을 지낸 종이를 빨래처럼 줄에 달아 말리고 있다. 따뜻한 바람이 종이와 종이사이를 요리조리 헤엄치며 경쾌한 소리를 만들어 낸다. 사박하는 발걸음 소리에 구석진 자리에서 책을 읽던 자례가 고개를 든다. “익공?” 뒤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다. 잘못들었나. 하지만 또 한번 사박하는 소리가 들린다. 소리없이 일어나 조용히 책을 덥는다. “익공?” 익은 아닌가. 귀를 기울인다. 완전히 노출되었다는 느낌에 종이가 널린 커다란 마당으로 걸어들어가 모습을 감춘다. 파락 파라락 파락. 멀리서 들었을때는 경쾌한 소리지만 종이사이로 들어오자 시끄러운 돌풍소리가 요란하다. 종이 날에 다치치 않도록 조심하며 계속 종이의 휘장속으로 들어간다. 사박. 사박. 누군가 계속 따라들어온다. 방향을 바꾸고 기다려보지만 그 역시 방향을 바꿀뿐. 확실히 자신을 따라들어오는 것을 알고 긴장한다. 2왕자가 보낸 자객인가? 아님 4왕자? 누군지 알수 없는 타인이 점점 더 다가오는 것을 느끼자 등골이 오싹하다. 뛰다시피 종이를 헤치며 앞으로 걸어간다. 계속, 따라붙는 발자국소리가 등을 긴장시킨다. “이봐! 꼬마야!” “익공!” 어딘가에서 익의 목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사방이 종이로 가득찬 이곳에서는 방향잡기조차 쉽지 않아 고개만 두리번 거린다. “꼬마야! 어디간거야! 낭관이 부른다!” “종이 속에 있어요! 방향을 가늠할 수가...!” “거긴 왜 들어갔어!” 익은 이해할수 없다는 듯 눈앞에 하얗게 펼쳐진 종이의 바다를 바라보았다. 사람키보다 놓게 매어논 줄에 수천, 수만장의 종이를 줄에 걸어 말리고 있는 곳이다. 그야말로 들어가면 사방이 종이 투성이라 미로나 다름없는 곳에 무슨 생각으로 들어간건가. 옆을 보니 책이 한권있다. 오늘은 자례가 종이를 말리는 당번이라 이곳에 앉아 책을 보았던 것 같은데 왜 들어간걸까. “기다려봐! 일단 생각좀 하고.” “그림자가 어느쪽이죠?!” “뭐?” “익의 그림자가 어느쪽으로 되어있냐고요!” “내 그림자?” 그말에 자신의 그림자를 보니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오른쪽이야!” “자세히 말해봐요!” “오른쪽으로 두마디정도 기울어졌어!” 자례는 자신의 그림자를 보고 왼쪽으로 기울어지게 위치를 바꾼다. 익은 종이쪽을 보고 나는 익쪽으로 가야하니 방향은 반대가 된다. 두마디 정도 더 기울어지게 맞추자 그대로 앞으로 종이를 헤치며 뛰어나간다. 어느틈에 발자국 소리가 안들려와 안심한다. 익이 와서 사라진 모양이다. 사박. 순간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본다. 종이와 종이가 서로 겹쳐 흔들리는 간간한 사이로 누군가의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본다. 눈이 마주치는 것도 순간이고 그대로 순간은 지나가버린다. 멈칫서서 잘못본것인지 생각하지만 익의 재촉에 다시 종이를 헤치고 무사히 나간다. “아니 무슨 생각으로 저길 들어간거냐? 미로라고, 위험하니 나보고 장난치지 말라던게 너잖아?” “예. 그냥...” 익의 잔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대로 자신이 나온 종이의 파도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할뿐이다. 뭐라고 해야 할까. 그 눈은 마치 .... 혈족같았어. “야!” “예?” “들었어? 2왕자가 널 보자고 한다구! 지금 서관 뒤에 있는 정자에 와있어.” “그럼 2왕자는 아니네.” “?” “고마워요. 이왕 이렇게 된거 나 대신 여기 지켜줄거죠? 금방 올께요.” 익은 당했다는 느낌을 받지만 어쩔수 없이 팔짱을 끼고 펄럭이는 종이들의 음악을 감상할뿐이다. 정자에 다가갈수록 이상한점을 느낀다. 오늘은 이상하게 가신들을 데리고 오지 않았네. 정자에 오르자 단신으로 정자 밑의 연못을 감상하는 체이첸이 등을 보인체로 말한다. “경락공.” “이리 다가오게. 여기 아직 금잉어가 있군.” 조용히 옆으로 다가가 연못아래를 본다. 하지만 전부터 익이랑 이야기를 할때는 이곳으로 왔기 때문에 연못안에 사는 잉어들을 구별할수 있을정도다. 내색하지 않고 잉어를 같이 본다. 누런 금색의 잉어들이 화려하게 꼬리를 살랑이며 연못의 바닥을 쓸고 다닌다. “예전엔 이곳뿐이 아니라 다른 정원에서도 잉어를 이렇게 보긴 힘들었지.” “예?” “황제께서 황궁 안 물의 근원지인 건곤궁에 연꽃을 심었기 때문이야. 그 진흙이 궁의 연못으로 흘러들어와 잉어들이 모두 폐사했지. 거북이만을 기를 수밖에 없던 때였다.” “그렇습니까.” “궁불견어(宮不見漁) 비루만련(丕壘滿蓮), 소총비가면(沼寵悲佳面), 연우해어화(嚥于解語花).” “...안타까운 일이군요.” “하지만 우린 그를 수화라고 불렸지. 그것만으로 그를 잘 표현할수 있었다.” 푱하는 소리와 함께 잉어들이 반대편으로 몰려간다. “그는 정안인이였다. 황제는 그 이후 정안인을 궁안으로 불러들이지않았다.” “...” “나는 불러들이고 있다. 그 능력이 합당하다면 내 사람으로 만드는 것에 꺼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내 안부를 방치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한번 묻지. 정말로 거절할것이냐?” “이미 황제의 관적에 오른 이상 다른 관적에 오르는 방법은 단 한가지라 알고 있습니다.” “거절인가.” “제 모친은 정안인입니다. 저 역시 어느정도는 이궁에 머물지 못하는 사람이지요.” “...” “저는 소심하고 용기가 없어 두 관적에 오를만한 인재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환속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전속할생각은 있습니다. 아니라면 경락공께서 황제께 저의 전속을 부탁하실 생각이십니까? 그것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확실치 않으면 움직이지 않겠다는 것이구나. 전속이라. 하지만 너 정도면 황제께서도 요긴하게 쓰고 싶어하는 인재다. 난 황제의 측근을 전속으로 받아들일 생각은 없다.” “전속 전까지는 승관시험에 입시하지 않겠습니다. 그정도면 되겠습니까?” 황제의 측근에서 일할수 있는 것은 고관들 뿐이다. 승관시험을 안본다는 것은 전속때까지 비서랑으로써만 남아있겠다는 말이다. 그렇게 된다면 황제를 만날 수 없다. “작은 진주를 품고 있는 조개를 강제로 여는 것보다는 그것을 키울때까지 진흙속에 묻어 놓는 것도 한가지 방법이 아니겠습니까? 싸라기 같은 진주는 쓸대가 없이 거추장 스러운 법입니다.” “...그렇군.” 체이첸은 다시 돌아오는 잉어를 바라보았다. “발랄한 것들이군. 그래. 낭관이 준 전의 필본은 잘되어가나?” “...필본이라니요.” “익이라고 하나. 자네 동기인가. 필본을 맡기기 위해 찾았더니 널 추천하더군. 네가 그 필본을 쓴 사람이라면서 말이야. 우연인가 필연인가?” “...” “소문에 낭관이 쓴 것이 아니라는 것이 나돌아서 이미 짐작은 하고 있었다. 확인차, 관심차 만나려고 생각했었다. 전에 서공을 찾아 갔다가 널 정말 우연처럼 만났던 거지. 선율과 지인이라는 것 또한 신기한 일. 이정도면 자네를 기다릴만한 천운은 따를것이라 생각되는군.” 자례는 체이첸의 입에서 자신의 칭명이 나오자 묘한 느낌에 미소짓고 만다. 선율(仙聿)이라. 정말 오래간만에 듣는 칭명이군. “자네를 기다리겠다.” “감사합니다.” 푱하는 소리가 들리며 다시 금잉어들이 건너편으로 돌아간다. 마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 선택했군. 2왕자의 성격을 잘 파악했어.” “4왕자가 가신권유를 했다면 꼼짝없이 죽었을겁니다. 그가 선비였기에 기다리라는 말이 통한것이지요.” “걱정했던 것보다 자네는 잘 대처하는군. 어차피 황제의 고관까지갈만한 밀명을 받을것이 아닐테니까.” “예. 지금 이상태로도 2왕자의 신임을 이용한다면 제 밀명을 성공시킬수 있으니까요. 어찌 본다면 왕씨께서는 궁안으로 절 보내시기 전에 많은 생각을 해주신 것 같습니다. 저 스스로 지킬수 있는 조언을 해주셨으니까요.” “다정한 분이시니까.” 밖을 확인하고 어둠이 내린 것을 확인한다. “돌아가기 전에 묻고 싶은게 있습니다.” “뭐지?” “혹시 궁안에...우리 말고 혈족들이 있습니까?” “그러겠지. 하지만 나도 그들을 모른다. 그들도 널 모르고 나도 몰라. 우리는 개인적으로 왕씨에게 밀명을 받고 그 것을 성공시키기 위해 이곳으로 모인거다. 서로가 서로를 돕자고 모이는 것은 아니다. 너와 나 같은 경우는 궁안에 들어올수 있는 정확한 호적을 이용하기 위해 인척관계로 묶인 특이한 경우인 것이다.” “그렇군요.” “어째서 묻지?” “아뇨. 그냥... 혈족인 것 같은 사람을 보아서...” “아는 척하지마라. 섣불리 판단하다가는 큰 화를 당한다.” “명심하겠습니다.” “스스로 생존하는 수 밖에 없다. 명심하도록.” 고개를 숙여보이곤 궁을 나온다. 달이 환하게 떴다. 어서 빨리 가지 않으면 성각헌의 문이 닫혀버린다. 총총히 발걸음을 옮겨 작은 물다리를 지난다. 돌다리 아래로 금잉어가 헤험치는 것이 달빛으로 환하게 보인다. 궁불견어(宮不見漁) 비루만련(丕壘滿蓮), 소총비가면(沼寵悲佳面), 연우해어화(嚥于解語花). 궁안에서 물고기를 볼수 없음은 황제의 누각이 연꽃으로 가득참이다. 연 늪은 슬픈 얼굴을 사랑하여 가인을 삼켜버린다. 고개를 돌려 저 멀리 금빛지붕이 빛나는 건곤궁을 바라본다. 마침 달이 건곤궁의 지붕에 걸려 더 이상 내려가지 못하고 있다. 저 안에 연꽃이 가득차 있을까? 만월의 달이 손짓한다. 가슴이 두근두근 거린다. 이런 날에는 연꽃을 따 연인과 손을 잡고 물가로 나가야 하는데. 지나간 행복을 기억해내고 앞으로의 행복을 빌며 서로의 불운을 연등과 연꽃에 싣고 물에 흘려보내야 하는데. -그 누구도 부름을 받지 않고서는 근처에도 가지 못해. 쓴 웃음을 짓고는 만월의 유혹에서 벗어난다. 등을 돌려 성각헌으로 빠른 걸음으로 돌아가 익의 잔소리가 가득찬 방으로 얼른 숨어버린다. 가인을 놓친 달은 오래도록 그 자리에 서서 그가 나오기를 기다린다. 다시 나온다면 이번엔 그를 홀려 데리고 갈것이라 다짐한다. 하지만 시간은 흘러 동이 터오고 무심한 가인은 나오지 않는다. 113 이상한 일이였다. 매일 매일이 조금 고되다고 생각했었지만 오늘만큼 힘든 날은 처음이였다. 점점 말고삐를 잡은 손에 힘이 풀린다. 친구들이 뒤쳐지는 자신을 느꼈는지 망아지를 멈추고 말을 건다. “자례야? 왜 늦어?” “나 언덕위로 안올라가.” “안올라갈꺼야? 집으로 갈꺼야?” “응.” “그럼 잘가.” 손을 흔들고 내일 약속을 한 후 집으로 향한다. 망아지의 목에 걸린 방울소리가 짤랑짤랑 시끄럽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들어가지 않으려고 하는 망아지의 엉덩이를 밀러 마굿간에 넣고 우물가에 가서 손을 닦는다. 집안일을 도와주는 옆집의 부인이 우물가로 다가와서 흘러내리는 머리를 올려묶어준다. “자례도 들어왔구나. 어머? 너 몸이 뜨겁다.” “뛰어서 그래요.” 첨벙첨벙 서툴게 세수하는 모습을 보다가 웃고만 부인은 손을 걷어 씻겨준다. 마른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주고 작은 몸을 안아든다. 내려달라고 하는 아이의 가볍게 코를 잡아쥔다. “괜찮아. 아직 넌 어리니까. 아줌마 품에 기대보렴. 방안까지 안아줄께.” 그말에 아이는 조금 망설이다가 곧 부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댄다. 둥그렇게 부푼 가슴사이는 참 따뜻하고 좋은 향기가 난다. 저절로 눈이 감겨버린다. 긴 돌마당을 가로질러 누군가 뛰어온다. 열대여섯 먹은 소년이다. “어머니!” “돌아왔니?” “예. 어라 자례네. 제 또 왜 저래요? 자는거에요?” “열이 있단다. 재워야겠다. 넌 저녁에 사냥을 가기로 했지? 도시락을 싸주어야 하나?” “괜찮아요. 사냥해서 먹고 오죠. ” “자휼도 함께 가지? 그렇다면 오늘 자례를 안아서 재워볼까보다.” 부인은 아이를 추켜올려 안는다. “만요야, 자휼하고 싸우지 말고.” “걱정마세요. 자례야 형도 갔다올께. 자휼을 데리고 가니 걱정하지 말고 자라. 하하하” 소년이 장난스럽게 손을 뻗어 아이의 이마를 짚어보고 나간다. 조용한 방으로 들어가 향을 피우며 부인은 계속 안아든 아이의 등을 토닥인다. 바로 잠들어버린 아이를 깨끗한 요에 눕히고 이불을 덥어준다. 한동안 토닥여주다가 깊이 잠든 것을 확인하고 조용히 방을 나간다. 하지만 눈을 떴을때는 현실로 돌아온다. 간만에 좋은 꿈이라 생각하며 일어난다. 언제나처럼 옷을 입기전에 붕대를 다시 묶는다. 오늘은 혼자다. 어제가 익이 종이를 말리는 당번이라 지금쯤 그 종이바다를 바라보며 졸고 있거나 그냥 누워자고 있을것이다. 단단하게 붕대를 돌리고 있다가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에 깜짝놀라 움찔한다. “이봐. 안에 있나?” 4왕자군. 대답을 할까 말까. 재빨리 머리를 굴린다. 성각헌이 아무리 정무와 숙식을 함께 하는 곳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불쑥 들어올지는 몰랐다. 그래도 설마 방안까지 들어오겠는가 하는 생각에 입을 다물고 조용히 있는다. 알아서 나가겠지. 정말로 레이첸은 몇 번 두리번 거리다가 문을 닫고 나가버린다. 한참을 기다렸다가 이정도면 멀리 갔을거라 여기고 옷을 입고 책들을 챙겨 방을 나온다. 막 방문을 닫는 순간 누군가 말을 건다. “여어.” “...” 문옆의 기둥에 비슷틈히 몸을 기대고 있던 레이첸이 손을 든다. 기다리고 있었던 건가. “오래걸리잖아?” “...안녕하십니까? 서공.” “그런 표정으로 인삿말이 나오는 것이 신기하다.” “일어나자 왜 서공께 문안을 드려야 하는지 저도 이해할수 없군요. 실례.” 타박타박 복도를 걸어간다. 그 뒤를 레이첸이 따라붙는다. 잠시 서서 무슨 말을 할까 기다리지만 말이 없자 다시 걸어간다. 그리고 다시 따라붙는다. “무슨 하실말씀이?” “그냥.” “...그냥?” 허탈하게 레이첸의 말을 따라하고 걸음을 재촉한다. 처음엔 그냥 빠르게 걷던 것이 점점 더 빨라져 나중에는 달린다. 뒤따라 레이첸도 달리며 중얼거린다. “너 궁안에서 뛰는 것이 얼마나 방정맞은 짓인지 알고 있냐?” “시골선비가 궁안의 예절에 익숙하지 못한 것은 당연, 왕자전하나 뛰지 마시지요.” “너도 뛰지마라!” “싫소!” 생각보다 빠르게 뛰어간다. 몸이 작아서 가벼운것인지 서관으로 올라가는 수백의 계단을 아무렇지 않게 달려 올라가고는 아직 계단 아래에 있는 레이첸은 뒤돌아본다. 그리고 서관으로 들어가버린다. 레이첸이 서관으로 달려들어가 자례를 찾았을땐 이미 다른문으로 나간 상태였다. 가슴을 쓸어내리고는 다른 문으로 얼른 나온다. 종이말리는 뒷마당까지 천천히 걸어간다. 이곳은 외진곳이라 레이첸같은 왕자는 이곳이 있는지도 모를것이다. 역시나 익이 얼굴에 책을 덥어 눈을 가리고 코까지 골며 태평스래 잠을 자고 있다. “익공. 교대입니다.” 하지만 깊이 잠들었는지 익은 깨어나지 않는다. 조금 흔들어 깨우다가 포기한다. 오늘은 바람이 적어 종이들은 귀신처럼 늘어져 있을뿐 움직이지 않는다. 깨끗한 하늘. 돌마당에 세워진 대나무 지지대. 수만장의 종이가 걸린 줄이 거미줄처럼 뻗어있다. 알수 없게 마음이 가라앉는다. 멍하니 종이들이 만든 바다를 바라보다가 익의 배를 베게삼아 옆으로 눕는다. 간간히 불어오는 살랑거리는 바람이 느껴진다. 자고 일어난지 방금인데 그대로 다시 잠들어버린다. 평온한 오전의 풍경에 잠시나마 모든 것을 잊어본다. 유견은 헛기침을 한다. 잠깐 눈을 들어 유견을 바라본 유번은 신경쓸 것 없다는 듯 냉큼 마지막 남은 멸치 조림을 입에 넣는다. “찬물도 위아래!” “듣기 싫어.” 악을 쓰는 유견을 뒤로 하고 마당으로 나와 연분홍의 물결을 이루는 산들을 바라본다. 이 촌구석에도 봄이 온것이다. 포옥 한숨이 나오며 집안에 재웠던 손님들의 생각이 난다. 악운은 잘 지내는지, 그리고 자례는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응?” 때아닌 진동소리에 마당에 있는 탁자에 귀를 들이댄다. 하지만 그보다 빨리 눈치를 챈 것은 유견이였다.벌컥하며 방문을 열더니 혼탕한 얼굴로 외친다. “말이지!” “...형님 눈치 한번 굉장하오.” “말이다 말!” 구르다시피 방을 나간 유견은 집을 나가고는 외마디 소리를 지른다. “놈이다!” “뭐? 놈!?” 그말에 유견은 검을 들고 달려나온다. 큰길을 통해 누군가 검은색 말을 타고 미친 듯이 달려온다. 바람에 옷과 머리로 가린 반신이 흉측스럽다. 검은 말은 속도를 줄이지 못하고 유견과 유번의 앞을 길게 지나쳤다가 다시 돌아온다. 말에서 그가 내리기도 전에 유견이 유번이 들고있는 칼을 빼앗아 덤벼든다. “놈!” “앗! 저! 잠깐!” “어딜갔다 이제오는게야!” 검을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유견과 아슬하지만 잘도 피해다니는 낯선이를 뚱하게 바라본다. 아마도 유견과 아는 사이 같은데 유번은 전혀 모르는 사람이였다. 한참을 씩씩거리며 뛰어다니던 둘은 지쳤는지 헉헉거리기만 한다. 그사이에 유번이 말을 걸었다. “누구요?” 자휼은 말을 건 노인을 바라보았다. 조금 놀란다. 유견과 같은 얼굴이다. 날 보고 달려든 자가 유견이 분명하니 저쪽이 아우라던 유번이겠지. 다가가려고 하나 유견이 검을 들어 유번의 앞을 막아선다. “왜? 내 아우에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냐!” “스승님!” “스승님? 그럼 네가 자례의 형이로구나?” 유번이 유견을 밀치고는 자휼의 앞에 선다. 투덜거리는 유견을 무시하고 말을 건다. “어디에 숨어있다가 지금 나오는 것이냐?” “용서하십쇼. 그보다 내 아이가 이곳에 아직...!” “이미 도성으로 올라간지 한참되었다. 이곳에는 없어.” 쿵하는 소리가 마음을 울린다. 정말이였던가. “어째서 도성에?” “우린 잘 모른다. 좌보님과 함께 도성쪽으로 올라갔을뿐. 그 이상은 우리도 아는 것이 없다.” “...!” 입술을 꽉 물고는 흑염을 부른다. “못난 제자 맞아죽더라도 할말이 없지만 지금 당장 도성으로 가봐야겠습니다!” 유견이 화를 내기도 전에 유번이 말한다. “자례를 찾아라.” “예...?” “그 아이가 널 얼마나 기다렸는지...꼭 찾아 후회하는 일 없게 해라.” “예?” “아, 넌 입이 왜 그렇게 싸! 거참.” 유견이 유번의 말에 투덜투덜거린다. 의아해하는 자휼에게 유견이 망설이다가 유번의 째림을 받고 툭 내뱉는다. “네 동생 얼마 못살아! 네 손으로 묻어주려면 빨리 가서 찾아보란 말이다!” 대문이 열리는 소리에 눈을 비비고 일어난다. 형이 돌아왔나봐. 폴짝 이불을 걷고 방문을 열고 나가 마당으로 말을 끌고 들어오는 형을 바라본다. 안아주지는 않겠지만 말을 걸어주지는 않지만 그래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다. 마굿간으로 말을 넣은 형이 자기방으로 건너가기 전에 말을 건다. “갔다 왔어요?” “....” 답인사를 안해주는 것은 익숙하지만 오늘은 방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왜 자신을 무섭게 내려보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지금이 몇시인지 몰라도 형의 뒤로 보이는 하늘은 까맣고 달이 한가운데 떠있다. 잘 모르겠지만 무엇인가 잘못한 것이 있나 싶어 몸을 조금 움추린다. “왜 오늘 검당(劍堂)을 가지 않았니?” 아차하는 생각이 든다. 더듬더듬 생각해보니 오전에 친구들과 망아지로 승마연습을 하고는 집에 와서 부인의 품에 잠들어버린 것까지 기억이 난다. 그러면 오전부터 지금까지 내내 잠들어있었다는 이야기다. 바보같이. 바보같이. 어쩔줄몰라하지만 잘못한것이란 건 잘 알고 있다. 머리를 숙이고 잘못했다말한다. 옷자락을 걷어 손바닥으로 팔을 짝소리나도록 한때 때린다. 자신의 작은 팔에 빨갛게 자휼의 손가락 모양이 세겨진다. 자휼은 도저히 이해할수 없다는 듯 말한다. “요즘 이상하구나. 이번이 두 번째인걸 알고 있니?”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잘못했다고 말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잖니!” “잘못했어요” 또 한번 팔을 내리친다. 짝 소리에 통증보다는 마음이 놀래 눈물이 나올것만 같다. 하지만 울면 더 혼날 것을 알아서 애써 참아보려 하지만 뜻하는대로 되지 않는다. 글썽글썽한 눈을 보고 자휼이 다시 손을 올린다. “그만해라, 이 멍청아!” 낮의 소년이 가와 자휼을 밀어내버린다. “열이 있었어! 그래서 어머니께서 재웠다. 그게 그렇게 화를 낼일이냐? 너는 살짝 친다고 하지만 맞는 놈은 이제 겨우 한손이라고! 애가 놀란단 말이다!” “우리 일에 신경쓰지마!” 두 사람이 말소리를 높인다. 소리치는 말에 깜짝깜짝 놀라 뒤로 물러난다. 쿵쾅거리는 가슴을 쥐고 맞은곳이 따가운 팔로 눈물을 가려버린다. “꼬마야?” 답답하다고 생각했었다. 눈을 뜨고 책을 내리자 배를 베고 옆으로 누워자고있는 동기를 발견한다. 생각보다 머리가 무겁게 느껴져 깨우려다가 그냥 두고만다. 일어나려 해도 일어날수가 없어 망설인다. 누워서 눈을 깜박이니 파란 하늘이 늘어온다. “날씨 좋네.” 팔을 베고 누워 한손으로 잠든 자례의 어깨를 토닥인다. 궁안에서 느끼기 힘든 평온한 하루가 지금 지나가버린다. 114 처음엔 내색하지도 못하던 불평불만이 슬슬 궁안생활에 익숙해지자 나오기 시작한다. 신기하게도 이 불만에 대해서는 둘다 동감한다. "괜찮아. 괜찮아. 어차피 입만 지나면 속에선 다 섞여버리기 마련이지." "...그게 싫어서 못먹겠다니까요." 둘다 오늘 나온 반찬이 먹기 싫어 젓가락으로 휘휘 젓기만 하고 입에 넣지는 않는다. 눈을 질끈감고 먹는 익과 결국 찻물에 말아서 마셔버리는 자례다. 남보다 두배빠른 식사시간을 마치고 서둘러 식당을 나와 종이를 말리는 학고청(壑固廳)으로 도망친다. 펄럭이는 종이를 바라보며 마루에 누운 익이 늘어지는 목소리로 식당에서 끝내지 못한 대화를 중얼거린다. 그 익의 머리맡에 자례가 앉아 귀를 기울인다. “그러니까 황제의 취미는 호랑이 기르는 것 하고 승마거든. 한식이 오면 경마를 하는데 그것 때문에 황궁내로 말이 들어오는것이지.” “호랑이?” “그래. 건곤궁쪽에 있을걸. 한두마리가 아니래. 수십마리를 기르고 있지. 호랑이 사육관리가 따로 있을정도야.” “특이한 취미군요.” “취미가 아닐걸.” 익이 일어나 물을 마신다. “예전에 건곤궁안에 풀어놓았더라지. 아마.” “호랑이를 궁안에 풀어놓아요?” “응. 왜 그거 알고 있냐? 황제에게 정안족 총인이 있었다고 하잖아. 그에게 건곤궁을 내렸던 적이 있데. 황제의 비궁은 황제의 것이잖아. 비궁이 얼마나 까다로운 영역인지는 알지? 타인에게 양도될수 없는건데 ...게다가 왕에게만 내리는 구석(九錫)을 그에게 주었다고 하더군. 암튼 대단한 자였나보지. 이후 총인이 죽은후에 그를 보고 기다렸던 다른 총인들이 그 궁과 구석을 얻으려고 싸웠다나봐. 귀찮았던 황제가 건곤궁을 호랑이 우리로 썼다는 이야기가 있어.” “...연우해어화.” 피식 웃으며 식사를 한다. 익이 고개를 갸웃하고는 묻는다. “연우해어화? 무슨말이니?” “건곤궁에서 죽은 총인의 이야기에요. 2왕자가 말해주더군요. 궁불견어 비루만련 소총비가면 연우해어화.” “흐음. 그래? 연우해어화라. 불쌍하군. 하긴 사내놈이 너무 고와도 분명 장수라면 장수니까. 과감하게 물속으로 뛰어들어갔을지도.” “예?” “뭐가?” “방금...” “수화를 말하는 것 아니야? 정안족 총인말이야.” “그가...사내였어요?” “그래.” 잠시 침묵이 흐른다. 아무렇지 않게 차를 따라 마시는 익과는 달리 좋지 않다라는 표정을 지으며 자례가 수저를 놓아버린다. “왜?” “불쌍해서요. 정말 안되었군요.” “그렇지. 다들 그런거지 뭐. 좋아서 총인이 되었겠나?” 입에 넣은 것을 씹지도 못하고 삼켜버린다. 물을 마시면서 심각하게 생각해본다. “그거 정말 아프던데. 그걸 매일?....” “뭐?” “아무것도.” 중얼중얼거린 자례는 차를 들고 방을 나와 바람을 쐰다. 문득 궁안으로 들어오기전의 기억이 난다. 그 고약한 냄새가 떠올라 가슴을 두드린다. 기억나는 것은 천장에 있던 거미줄이 다섯가닥으로 엮어져 있었다는 것뿐이다. 좋은 기억이 아니라 묻어두고 있어 잊었는데 갑자기 떠올라 버렸다. 형의 모습도 떠오른다. 뒷모습뿐이지만 그래도 그건 분명 형이라 생각한다. 보고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뭘 그리 생각하나.” “...안녕하십니까 서공.” “여전히 안녕하시지.” 빙글 웃은 레이첸이 자례에게 다가온다. 조금 물러나는 아이에게 더 가까이 다가간다. “왜? 나한데 이상한 냄새가 나냐? 왜 피하냐?” “사람에게 그렇게 근접하는 것이 좋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 이 향기야. 맞아.” “?” “동백이지? 그때 그 붉은 잎이 기억에 남아서 찾아봤지.” “익공, 저 종이를 가지러 서관으로 갑니다.” “그래그래. 이따가보자.” 먼저 걸음을 때어가자 어느때와 같이 레이첸이 따라온다. 잠시 생각하다 걸음을 멈추고 레이첸을 바라본다. “왜 자꾸만 저에게 모습을 보이시는 겁니까?” “당연히 할일이 없거든. 할일이 있다면 내가 이러고 있겠냐?” “할일없는 가운데 그나마 제가 서공의 놀이상대라고 될것이라 생각하십니까?” “거야, 너는 내가 뛴다고 뭐라 하지는 않잖아.” “비서랑은 바쁩니다.” “그런 것 같다. 뭐. 하지만 오늘 일단은 고맙다는 말을 하려고 왔다.” “서공에게 고맙다는 말을 들을이유가 없습니다.” “내 세부에게 필본을 주었다며. 화선이 무척이나 좋아하더군. 사이도 좋아졌고 말이야. 앙칼진 면이 꽤나 있었는데 부드러워졌다고 할까.” “...” “고맙다. 답례도 돌려주지 않으려고 했던 것을 주지.” “무엇입니까?” “말.” “말?” “널 업고 내려오던 자의 말. 그때 급해서 내가 타고 이곳까지 왔거든. 꽤 좋은 말이라 내가 가지려고 했다가 화선의 일도 있고 해서 돌려준다.” “...흑염을?” “흑염? 말이 검은색이기는 하다.” “보여주십쇼!” 냉냉하게 서있던 아이가 한순간에 돌변해버린다. 매달려 오는 아이에게 당황한다. “너 서관으로 먼저 가봐야 하잖아?” “익공, 가서 이야기좀 잘해주시지 않겠어요?” “알았어. 어차피 오늘은 네가 종이를 말려야 하니까 바로 와.” 때아닌 다른 이의 목소리에 얼른 뒤를 돌아보니 뚱한 표정으로 두 사람이 비키기만을 기다리는 자가 있다. 레이첸은 그자에게서도 묘한 느낌을 받는다. “이봐.” “예, 부르셨습니까 서공?” “너, 손.” “예?” “손!” “손이요?” 익은 자례를 본다. 자례는 어깨를 으쓱일뿐이다. 익이 손을 내밀자 레이첸은 그 손을 자세히 보고는 그냥 놓는다. “아닌가?” “제 손에 뭐라도 묻었습니까?” “됐다. 가자.” 레이첸이 자례를 데리고 등을 돌린다. 익은 재빨리 자례를 잡고 소곤거린다. “레이첸을 얕보지 마라.” 안타까움에 한숨을 내쉰다. 분명 검은 말이기는 하지만 생각하던 그 말이 아니다. 실망은 점점 커져서 맥없이 늘어지게 만든다. “왜그래?” “아뇨. 제가 생각했던 말이 아니라서.” 흑염이 아니네. 이건 을노의 말이다. 그렇다면 언덕에서 기절했던 날 데리고 내려온 것은 을노였나. 혹시 형이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말은 자례의 생각을 아는지 자례에게 반가운 기운을 보인다. 살랑이며 몸을 비벼오는 말의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궁안 낯선 사람들과 부대끼다가 그나마 낯익은 사람을 보아서인지 말은 촐싹맞을 정도로 반가움을 표한다. “뭐야. 사람을 잘 따르는 말이잖아. 하도 말을 안듣길래 원래 사나운 말인줄 알았는데 말이다.” “...” 대답할 힘도 없이 스스로의 생각에 빠져있는데 또하나 낯익은 사람의 목소리가 들린다. “우관.” “체이첸 형님이 아니요? ” “경락공.” 체이첸이 가신들을 거느리고 천천히 그쪽으로 온다. “여기서 만나다니 우연이군?” “형님이야 말로 마굿간엔 무슨 일인지? 성을 나가려는 것도 아닐테고 말입니다?” “이번 경마게임에는 나도 한번 이겨보려고 그런다.” 두 왕자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로 자례가 고개를 내밀어 뒤에 사람들 사이에 껴있는 악운을 보고 손을 흔든다. 악운도 반가운 내색을 한다. 두 왕자가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은지 말들사이를 피해 조용한 곳으로 걸음을 옮긴다. 그 사이를 틈타 악운이 자례에게 다가온다. “여어. 좋아보인다.” “무슨 일로 이렇게 2왕자의 궁을 나와서 거닐고 있는거죠?” “말때문이야. 말. 2왕자가 나보고 말을 고르라더군. 무슨 말인지 알지?” 악운이 눈을 찡끗해보인다. 하긴 영웅서에 자례는 말을 치는 곳에 부임이 되었다고 적혀 있으니 그에게 말을 고르라는 것은 당연할지도. “그보다 말이야. 경마축제에 대해 뭐좀 들었니?” “아뇨.” “다섯마리의 말로 세판을 이기는 자가 승자가 된다. 상금도 어마어마한 모양이더군. 그래서 그런지 선비인 2왕자까지 말을 고르기 위해 나왔단 말이야?” “쓸대없는 일로 시간낭비군요.”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자례가 말한다. 저 멀리 두 왕자가 이야기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대화를 나눈다. “들어봐라. 그때 축제에 참가하는 제후들의 말을 관리하고 기록을 적는데 비서랑들이 동원된다고 하더군. 그때 너도 껴라.” “끼면 뭐가 달라집니까?” “바보. 경마축제는 이곳에서 떨어진 서주성에서 열린다. 즉 외부로 나갈수 있는 기회라구. 난 그때 멋지게 날아버리겠다.” 주먹과 주먹을 맞부딪치며 악운이 웃는다. “황궁만 아니라면 감옥에서도 탈출할 자신있다.” “흐음. 그렇다면 제가 도와드릴일은 무엇입니까?” “아니야. 난 나갈자신 있어" "그렇다면 제가 낄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이곳은 너에게 쉬운 곳이 아니잖아. 너도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은거냐? 좋은 기회야. 밖으로 나가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라." "...분명 그렇지만 전 아직은 나갈수없습니다. 하지만 만약 제가 기주성으로 나갈수 있다면 나가지요" "하긴 그래. 그럼 네가 나에게 원하는 것을 말해봐라.” “예?” “너는 이곳에 더 있을것이니까.뭔가 전하고 싶은게 있다면...” “...혹시 제 혈족을 찾아 가시는 겁니까?” “아, 말안했나?” 악운이 머리를 긁적거린다. “실은 내가 이곳으로 온 가장큰 이유는 누구를 찾아온거였거든.” “누구를?” “송씨. 너 아는 사람있냐?” “눌현성의 송씨요? 눌현성씨는 정안족으로는 유명한 장군족입니다. 전에 보셨던 을노장군이 송씨입니다.” “그 쌍검을 쓰던 장수를 말하는 거지? 흠. 혹시 그 외에 송씨는 없는거냐?” “송씨는 눌현성뿐입니다. 제가 아는 송씨는 일단 을노장군뿐이고요. 그 이상 눌현성씨가 있다는 말은 못들었습니다만...” “혹시 을노장군의 나이가 얼마나 되는지 아냐? 을노장군이 호북쪽으로 왔다 갔다 한것이라던가?” “악가와의 동맹은 오랜시간부터 존재했습니다. 우리쪽에서 그쪽으로 많은 장수들을 보냈고 그 안에는 선인들도 포함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그럼... 맞는 것 같은데...을노장군에게 여동생이 있냐?” “예?” 잠시 멈칫한다. 분명 을노장군에게 여동생이 있다는 이야기는 못들었지만 목래에서 그가 동생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적은 있다. “여동생인것까지는 모르지만 동생이 있다 들었습니다.” “그렇구나!” 활짝 웃으며 좋아하는 악운을 이상하다는 듯 바라본다. “을노장군은 요즘 어디에 있니?” “저도 모릅니다. 궁안으로 들어와서는 연락이 되지 않으니까요.” “후후후. 시간 문제야. 시간. 여기서 나간다면 이젠 방황끝이다!” “...?” “예쁠꺼야. 그렇지 않니? 을노형님도 꽤나 멋진사람이잖아.” “그야 을노장군은 선인출신이시니 모든 것이 뒤쳐짐없는 분이시지만...” “기대된다, 후후후!” 어쩔줄 모르게 좋아하는 악운에게서 조금 떨어진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거냐?” “뭐가요?” “나와 대화는 하면서도 시선은 우관을 보고 있구나?” “우관이요? 우씨인가? 그랬나...한족인가 정말로?” “무슨 말이지?” 조금 편하게 자세를 고쳐 앉으면서 체이첸이 묻는다. 잠시 침묵하던 레이첸이 자례가 들어가도록 두손으로 사각틀을 만든다. “봐요.” “뭐가?” “누구를 닮은 것 같지 않아요? 아니, 그렇게 자세히 보지 말고 그냥 얼핏봐요.” “...잘 모르겠는데?” “형님도 참. 그사람하고 닮았잖아요. 사기 인형이요.” 그말에 체이첸이 다시 한번 레이첸의 손안을 들여다 본다. 하지만 고개를 젓는다. “잘 모르겠다. 전혀 달라보이는데.” “하긴 나도 지금은 좀 달라보여요. 처음 봤을때는 깜짝 놀라 뒤로 넘어졌었는데...” “처음? 뒤로 넘어져?” 체이첸의 날카로운 지적에 레이첸이 웃음으로 무마시킨다. 물끄러미 비서랑을 바라보는 아우에게 충고를 한다. “하긴 그가 정안족같은 분위기가 나는 것은 진실이다. 하지만 그와는 달라. 외모도 성격도 달라. 쓸대없는 짓하지 마라.” “무슨 내가 어린애요? 쓸대없는 짓이라니? 나원.” “넌 그를 싫어했잖아.” “...” “맞아. 너 아직도 정안인들 손보러 다니냐?” 뜨끔하지만 내색하지 않는다. “형님도 참. 이제 애아빠가 되는 아우에게 말이 안좋소.” “애 아빠?” 체이첸이 눈을 크게 뜨고 레이첸을 바라본다. 아차하며 입실수를 탓하지만 이미 흘러간것이다. “이런, 언제부터 알았니? 축하한다.” “뭐, 그게...” “하하, 너도 아버지가 되는구나. 굉장한 일이야.” “그거 욕아니요?” “뭐. 칭찬으로 봐도 좋다. 하하하. ” 함께 즐거워해주는 체이첸의 등뒤로 악운과 이야기하는 자례의 모습이 보인다. 자신을 대하는 태도와는 다른 표정에 시선이 끌린다. 진지한 표정. 상대방을 인정하는 눈으로 깊이 생각하고 말을 걸어준다. 시선을 아래로 내려 턱에 손가락을 얹고 생각하다가 대답할때는 고개를 올려 상대를 바라본다. 이야기가 끝났는지 조금 떨어진다. 예의 그 검은 말이 아이에게 다가가 다시 아는 척을 한다. 기분이 조금 풀렸는지 말이 머리를 쓰다듬다가 얼굴을 부벼준다. “정말 닮았어.” “응?” 뭐가 닮은걸까. 뭔가 닮았어. 생긴 것이 닮은 것은 아니야. 생긴거야 둘다 예쁘지만 완전히 다른 느낌이야. 그런데 분명 두사람이 닮았어. 뭐가 닮은건지 모르겠다. ------ 단설의 역주는 인용과 개인적 견해가 들어간 글입니다.(맹신(盟信)사양. 도용씁쓸)-------- 주"구석(九錫)- 천자가 내리는 제후, 공후(소왕국의 왕)에 근접한 개국공신들에게 내리는 아홉가지 큰 예식이다. 구석의 내용을 보아서 당시 천자와 왕의 생활이나 관례의 기준선을 짐작하게하는데 도움이 된다. (쉽게 접할수 있는 구석의 전례는 삼국지에서 볼수 있다.) 1. 수레와 말, 행차시에는 항시 두대의 수레가 움직이는데, 그 중 큰 수레는 제후가 타는 것이고, 작은 수레는 무장을 한 호위병사들을 태운다. 그 수레들을 이끄는 말들도 평범하지 못하다. 검은 소 두필, 누런 말 여덟필이어야 가능했다. 천자의 행차에 준하는 격식이다. 2. 의복. 곤룡포에 면류관을 착용했다. 신발도 붉은색을 사용했다. 왕의 예복에 준하는 복식이다. 3. 악현(藥縣). 조정이나 집에서 음곡(音曲)이나 가무(歌舞)를 감상하는 것을 허용한다. 물론 황제나 왕 앞에서에 준하는 격식이다. 천자 앞에선 팔일무(八佾舞)를. 왕 앞에서는 육일무(六佾舞)를 추도록 한다. 4. 주거. 거처하는 집 대문과 나무기둥에 붉은색을 칠하도록 한다. 이것이 바로 주호(朱戶)이다. 일반 신하들이 사용할 수 없는, 천자의 격식이다. 5. 납폐(納陛). 검리상전과 유사한 것으로 궁중에서 신발을 신고 전상에 오르내릴 수 있게 하는 특전이다. 6. 호분(虎賁). 군대의 명칭으로 늘 곁을 따라다니며 호위하는 병사들이다. 3백명 가량으로 구성된다. 7. 부월(斧鉞)이다. 왕의 의장행사에 쓰이는 도끼이다. 사람을 마음대로 죽일 수 있는 특전을 의미하기도 한다. 8. 궁시(弓矢). 붉은 활 한벌과, 붉은 화살 백개, 그리고 검은 활 열벌과 화살 3천개로 구성된다. 언제든지 역적을 마음대로 처단 할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다는 상징이다. 9. 거창규찬(거창圭瓚). 거창은 제사 때 쓰이는 검은 수수로 빚은 술이다. 규찬은 옥으로 만든 제기이다. 둘 다 종묘 제사때 사용한다. 역시 천자의 격식에 준한다. 115 병아리들이 앞을 지나가는 모습을 바라본다. 한가한 오후에 차를 가운데 놓고 여관과 둘이 아무말이 없는 침묵의 시간을 보낸다. 땅벌래를 가지고 두 병아리가 투닥거린다. 서로 부리를 쪼아가며 상대를 밀어버리는 와중에 다른 병아리가 냉큼 달려들어 삼켜버린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왕씨가 웃고 만다. “영리한 놈이네.” “후후.” “좌보가 늦는군. 마유는 어디까지 왔다합니까?” “어제도착을 하셨어야 하는데 늦군요. 마유장군은 이틀전에 내려와서 마류장군님을 도와드리러 가셨답니다.” “그렇다면 이틀넘게 장촌에 있었다는 이야기군. 그렇다면 후소를 만났겠군요?” “그렇군요. 계주태수의 아들을 암살이 성공적으로 되었으니 얼마간은 못보겠군요.” “산에 산을 돌아 조용한 절에 들어가 자비를 구할지 모르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둘다 잠시 생각에 잠긴다. 조금 후에 왕씨가 웃기다는 듯 말한다. “자비란 인간에게 있는 가장 어려운 문제같지 않습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꼭 가져야 할사람이 가질수 없는 것이 자비. 가지면 안될 사람이 가지게 되는 것이 자비. 가졌다고 해서 선한것도 아니고 못가졌다고 해서 악한것도 아니지 않는 것.” “흠.” 여관은 그냥 웃는다. “그보다 자휼장군이 삼일안으로 도성으로 들어옵니다.” “결국 그렇게 되는가? 아직은 와도 좋고 멀리 있어도 좋을때니 걱정할 것 없지요. 을노는 어떠한가요?” “후후. 힘든가 봅니다.” “하긴. 대원(요동에 세워진 정안의 가국)에서 선인을 두어명 더 데리고 올 것 그랬나...혼자서 미친 장수를 상대하긴 힘들테지.” “을노장군은 잘 해낼사람입니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뛰어난 선인중 하나이지요. 좀더 욕심도 있었으면 하지만 능력에 비해 욕심은 없다는 것이 아깝다고 해야할까. 아무튼 을노가 호북에 있는 이상 오걸매가 아무리 미쳤다 한들 송나라를 치지는 못할것입니다. 일단 그쪽은 을노에게 맡기지요.” “예.” “문제는 좌보님이지. 좀 배워가지고 돌아왔으면 하는데 말입니다.” “좌보님은...” “성격이 좋다는 말로 그를 감싸려 하지 마십쇼. 그를 동정할것이 아니라 그의 실수로 죽음을 당한 혈족을 동정하는 것이 옳은 일. 이젠 나에게 어린아이는 필요없습니다. 우리 좌보도 어린아이에서 성장하셔야 될것이 아닌가요.” “...하지만 여관에겐 왕씨는 아직 어린아이인걸요.” “불경이외다.” 딱잘라 말한 하류사는 말과는 달리 피식웃는다. “자휼은 성급한 면이 없지 않아 있지. 곧 경마축제가 있으니 몇몇의 비서랑들이 궁밖출입을 하겠군. 여관은 자례가 그곳에 낄수 있다고 보시는가?” “안되겠지요.” “그래. 아직 신관이니 황제의 서기로 들어가기는 무리다. 비서랑을 빌릴수 있는 것은 황자의 위치인 체이첸뿐이야. 하지만 체이첸은 자례를 데리고가서 황제앞으로 떠미는 일은 없을것이지요.” “궁안이 비게되는군요. 자례에게는 휴식이 될지도...” “자휼에게는 그렇지 못할것입니다. 어찌되었건 발을 동동구른다 한들 아우님을 보진 못하니... 기산성의 분위기는 어떠합니까?” “여전하지요. 옮겨간 혈족은 잘 지내고 있습니다.” “정착하지는 못하게 사람들을 보내 보호하라 하십쇼. 곧 다른 쪽으로 이동을 시킬것이니.” “일부로 기산을 선택하셨죠?”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친첸은 능력있기는 하나 다스리는 법에 대해선 난폭한 사내입니다. 혈족을 그리로 보내신 것은 자휼을 기산에 머무르게 할 이유를 주신 것이 아닙니까.” “처음엔 그랬지. 하지만 여관은 모르시는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알아냈답니다.” “으음?” “일단은 나만 알고 있지요. 그보다 백라가 오면 여행준비를 시켜야 하니 준비해주시겠습니까?” 여관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어디로?” “기산성.” 익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낭관이 그 모습을 보고 화를 내었다. “자네는 내가 장난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가!” “설마, 어찌 말단인 제가 그런 엄한 짓을 하겠습니까? 단지 코끝이 근질근질 한 것이 참을수가 없어 그리한 것 뿐입니다.” 말은 공손하지만 그 표정과 말투는 너무도 익살맞아 옆에서 함께 훈계를 듣던 자례역시 헛기침을 하며 외면한다. 한참을 훈계를 듣고 나서 벌값으로 두손가득 종이와 필본을 안고 종이 말리는 곳으로 간다. 익은 이 종이 말리는데 사용하는 학고청(壑固廳)을 마당을 ‘빨래터’라고 부르고 있었다. “아니, 빨래터에서 두명의 사내가 모이면 할일이 뭐있나. 잠을 자거나 수다떠는 것뿐이지. 도박을 안하는 것을 칭찬해주지 못할망정 벌을 줘? 안그래도 별 재미도 없는 최하의 종이밭의 허수아비로 써먹으면서 말이야. 지는 능력없는 말단 낭관주제에 감히 우릴보고.” “익이 코를 심하게 골아서 서관까지 울린다 하지 않습니까.” “그런 거짓부렁을 믿는거냐? 뻔하지. 너와 내가 무슨 짓을 하고있는지 와서 힐끔 힐끔 보았겠지. 정말 할일없는 낭관이다.” “아무튼 오늘은 잠을 자거나 수다떠는 것은 못하겠군요. 이것들을 필본을 완성하려면 오늘은 힘들곘습니다.” “에이, 참.” 투덜투덜거린 익을 달래 학고청까지 들어온다. 종이는 고운 햇살에 잘 마르고 있었다. 창고로 사용하는 작은 가옥의 마루에 둘이 마주 앉아 먹을 갈고 종이를 꺼낸다. 얼마동안은 아무말도 하지 않고 열심히 필본을 해 나간다. 한 장. 두장. 곧 좁은 마루에 종이가 가득차자 자례가 먼저 붓을 놓고 하늘을 바라보며 쉰다. 곧 이어 익도 벼루를 밀어놓고는 마루에 누워버린다. “날씨 좋다.” “예.” “그거 들었냐? 휴가 나오는 것 말이다.” “정말로요?” 솔깃한 말에 귀를 귀울인다. “그래. 승마축제가 끝나면 비서랑들중 절반이 휴가를 갔다온다더라. 새로온 사람들 중에서 말이야. 즉 우린 4명이였으니까, 두명이 나간다는 말이지.” “운에 따르는 휴가가 무슨 휴가입니까.” “흠. 그래?” 익은 피식웃고는 등을 돌려 눈을 감았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눈을 살짝 뜨니 둥그런 무엇이 창고의 문틈사이로 자신을 노려본다. 처음엔 쥐라고 생각에 다시 눈을 감았다가 벌떡 일어나버린다. “야! 야! 저것봐!” “...꿈꿨어요?” “아니라니까! 저거 호랑이잖아!” 잠꼬대가 심하다는 표정의 자례를 밀어 문틈 사이를 보게 한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일어난다. “아무것도 없어요.” “그럴리가!” 몸을 숙이고 문틈 사이를 본 익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일어난다. “분명히 봤는데. 어둠속에서 퍼렇게 빛나는...쥐나 고양이 눈이 아니였는데...” “꿈인가봅니다.” “아닌데...” 혼자서 생각에 잠겼던 익은 머리를 감싸쥐고 일어난다. “어디가시나요?” “식당에. 가서 차좀 가지고 올께. 잠 좀 깨야겠다. 과자나 있으면 좀 가져올까?” “괜찮습니다.” “종이속으로 들어가지 말고. 여기서 얌전히 필본이나 떠라” 익이 사라지자 자례는 빙글 마루에 누워버린다. 눈을 감고 봄날의 따뜻한 날씨를 감상한다. 문득 두껍고 무거운 것이 다리를 타고 지나간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가 익이 말한 호랑이라는 생각이 들어 황급히 일어나 몸을 사린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것도 없다. 잘못느낀것인가 싶어 다시 누우려다가 다리 근처의 관복에 종종이 찍혀 있는 발짜국에 멍하니 서있는다. 정말로 호랑이 발자국이네. 순간 황제가 호랑이를 키운다는 말이 떠올라 혼자 있다는 것이 너무너무 무서워진다. 두리번 거리다가 애써 마음을 진정시킨다. 발짜국을 보아하니 아직 어린 새끼다. 이정도면 강아지의 크기일테니 별 위험할 것도 아니다. 그래도 이런 새끼옆에는 어미가 붙어있기마련인데. 가슴이 두근두근 거리면서 쪼그리고 앉아 익을 기다린다. 잠시후 익이 털래털래 차를 들고 나타나자 반가운 마음에 소리친다. “여기 호랑이가 있어요!” “뭐!” 둥그렇게 뜬 눈으로 익은 그 자리에서 다리를 떼지 못한다. 둘은 부리나케 그곳을 떠나 성각헌으로 도망치듯 들어가 문을 걸어잠근 후 씩씩거리며 가쁜숨을 내쉬었다. 익이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며 종이를 펼쳤다. “상소다! 이거 말단 관리들 위험해서 일해보겠냐! 호랑이 우리를 다시 짓던 호랑이를 다 죽여버리던 둘중 하나 하라고 해야해!” “그런데 아직 작은 호랑이였어요.” “작은 거든 큰거든, 에구, 난 호랑이가 너무 싫단 말이야!” “그건 나도 그래요. 어릴때 물렸을뻔했던 적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때 기억이 몸에는 남아있나봐요.” “난 물렸단 말이야!. 어꺠가 날아갈뻔했지. 아무튼 상소다. 상소!” 하지만 애써 만든 상소는 낭관의 손에 빼앗겨 올라가지 않았다. 화를 내는 둘에게 낭관은 고개를 저었다. “이런 일이 한두번있던 일인줄 아는가? 괜히 육관(毓官)에게 눈총만 받아. 일단 육관에게 내가 전하겠네.” “전한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육관이 학고청을 뒤져 호랑이를 찾아 갈거야. 그러면 됐지. 뭘 그리 화를내나? 그나저나 왜 학고청으로 호랑이가 자주 나타나는거지? 잡아도 잡아도 계속 나타나네...” 생각없이 중얼거린 말이지만 그날 밤을 새워 학고청의 허수아비로 지내야 하는 익의 표정은 울것만 같았다. 빙그르 웃으며 달려온 레이첸은 자례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그것을 무시하고 슬쩍 고개를 돌려 못보았다는 척을 한다. 그래도 레이첸은 그다지 기분 나쁜 표정이 아니다. 달려가 자례의 옆에 앉는다. 때마침 언제 호랑이가 나올지 몰라 두근거리는 학고청이라 레이첸이 반갑게 느껴지기도 한다. “안녕하십니다. 서공.” “오냐. 날씨가 매우 좋으니 이거 기분도 상쾌하구나.” “...” 피식 피식 웃는 레이첸이 오늘따라 기분이 많이 좋아보인다. 말을 걸어달라는 레이첸의 표정에 지고 만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내 생일이다.” “그렇습니까? 축하드립니다.” “오늘이 아냐. 삼일 뒤다.” 손을 휘휘 저으며 말한 레이첸은 그래도 기분 나쁘다는 표정이 아니다. “봄이 오면 왕궁이 번잡스럽다니까. 황제의 축일을 다음으로 내 생일, 다음은 체이첸형님의 생일, 그 다음은 죽어버린 1왕자의 기일이 있지.” “그렇군요.” “절기로 따지자면 황제의 축일은 신년이고 내 생일은 입춘이고 체이첸형님의 생일은 한식이고 1왕자 기일은 단오다.” “그렇군요.” “그런데 올해까지는 내 생일을 황궁에서 보낼 예정이라 다행이 널 초대하고 싶다 이거지.” “그렇군요.” “그럼 오는거냐?” “그렇군요.” “...” 갑자기 말이 없어진 레이첸을 느끼고 고개를 드니 인상을 쓰고 자신을 보려보는 얼굴과 마주친다. “왜 그러십니까?” “내가 방금 무슨말했는지 다시 말해봐.” “신년은 황제의 축일, 입춘은 4왕자의 생일. 한식은 2왕자의 생일,단오는 1왕자의 기일, 그래서 봄이 오면 황궁이 번잡스럽다. 생일날 저를 부르시겠다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듣고는 있었네. 그런데 대답이 다 똑같냐?! 화나잖아.” “입춘은 세간에서도 황궁내에서도 일년을 맞이하는 중요한 절기. 가장 끝에 닿은 비서랑으로써는 이 창고에 곰팡내를 풍기는 종이를 말리는 것만으로도 한식절기까지 너무 바빠 움직일수가 없습니다.” “거절이냐?” “승락이나 시간이 허락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그거아냐?” 신경질을 내며 레이첸이 일어난다. “날 화나게 하지 마라. 두고두고보다가 화를 내는 수 있다.” “저런. 저는 서공을 존경합니다.” “거짓말하지마라!” “서공, 제가 비록 서공의 궁에 방문하지 못하겠지만 다음날 서공께서 이리로 오시면 차를 타드리겠습니다.” “됐다.” 뚱한 표정으로 일어났던 레이첸이 다시 주저앉는다. “나는 뜨거운 차는 안마셔.” “미지근한 차로 드시지요.” “그러지말고 내가 술을 가져올테니 한잔할까?” “...” “거절이냐?” “좋습니다. 그렇다면 단둘이 이곳에서 만나서 기울이도록 해주십시오.” “단둘이?” “비서랑과 왕자가 맞상으로 술을 마신다는 것은 저에게 걸리는 일입니다.” “굉장히 따지는군. 좋아. 그렇다면 너도 그 동기녀석 붙이지 말고 그냥 나와라.” “예?” “그 백발성성한 놈 말이다. 저기 저 창가에 서있는 놈. 아까부터 저곳에서 우릴 보고 있었는데 몰랐냐?” 정말로 그곳에 익이 서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레이첸이 기분 좋게 일어나 사라진다. 다시 홀로 되어 종이를 바라보고 있는데 한구석의 종이들이 바람과는 반대 방향으로 흔들리는 것을 보고 이상하다 여긴다. 자세히 바라보다가 종이아래로 빠져나오는 것을 보고 놀라 일어난다. 작은 호랑이 새끼다. 비쩍말라있는 것이 낭관의 말대로 우리에서 몰라 나온지 꽤나 오래된 것 같다. 물끄러미 호랑이를 바라보던 자례와 호랑이의 눈이 마주친다. 갸웃하게 고개를 돌린 호랑이 새끼는 조금조금 자례에게 다가온다. 116 호랑이라는 것은 가볍게 보면 안되는 동물로 매우 포악하고 사나운 성질의 맹수지만 이렇게 작고 말라 있는 어린 것을 보자니 겁이 안난다. 천천하게 손을 내밀어 좀더 다가올수 있도록 유혹해본다. 흔들리는 손가락이 날벌래라고 생각했는지 앞발을 들어 이리저리 따라 움직이다가 자례의 다리사이로 폭 들어와 앉는다. 보기보다 무거워 움직일수가 없다. 강아지처럼 턱을 길게 내밀어 다리에 올려놓고 가르릉거린다. 손으로 쓰다듬는 털이 미끈하면서도 까슬하다. 천천히 쓰다듬자 마치 개처럼 졸린지 눈을 감아버린다. 이미 저녁먹을 시간이 지나 어둠이 오고 있는 때, 슬슬 익이 교대를 하기 위해 올시간이다. 이 호랑이를 어찌해야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귀를 쫑끗한 호랑이는 종이바다 속의 무엇인가를 바라본다. 사박. 전에도 들어본적이 있는 발자국소리가 울린다. 호랑이가 앞으로 튀어나가 크르릉하고 위협하는 소리를 낸다. 일어나 서관쪽으로 가려다가 깡마른 몸으로 으르렁 거리는 호랑이새끼가 못내 안심이 안되어 얼른 다가가 허리를 잡아 안아 올린다. 생각보다 무거워 팔이 쳐지면서도 안아들고 서관으로 들어갈 생각을 한다. 아마도 서관안의 사람들이 모두 뒤집어 질것이다. 카랑하는 금속성의 소리가 울린다. 종이가 흔들리면서 내는 소리에 어떻게 저런 칼소리가 나는것일까. 젓혀진 종이 뒤로 누군가 앞으로 나와 자례를 노려본다. 늙은 노인이다. 그는 잠시 빤히 자례를 보다가 피식 웃고는 두어걸음 다가가 한손을 뻗어 호랑이를 가리킨다. “네가 찾았느냐?” “예?” “신년에 태어난 새끼지. 무던히도 성격이 개구져 우리를 벗어나는 것은 쉽상. 역시 이곳에서 놀고 있었군.” 그는 아무말 없이 호랑이 새끼의 목털미를 한손으로 쥐어 자례의 품과 떨어뜨려 놓는다. 한손에 데롱데롱 매달린체 가르릉 거리는 호랑이에 눈길이 돌아간다. “육관이십니까?” “네놈은 누구냐?” 딱딱하고 강한 어조에 상대하기 힘든 성격의 노인이라는 것을 알고 공손하게 말한다. “올해 입관한 비서랑입니다.” “비서랑? 그럼 여긴 성각헌인가?” “아닙니다. 성각현은 저쪽에 보이는 푸른색 건물이고 이곳은 종이를 보관하는 학고청입니다.” “거참. 이놈의 호랑이새끼는 어찌해서 이곳까지 도망왔는지 신기하구나. 작은 우리를 하나더 만들어달라 해야겠다.” 그는 자신의 손에 대롱대롱 달려있는 호랑이를 보고 실소한다. 그리고 뒤돌아 종이바다로 들어가버린다. 자례가 그쪽으로 가면 길을 잃는다는 말을 하기위에 앞으로 한발자국나가 그를 따라가가 그가 눈동자만 돌려 뒤를 바라본다. 어라? 잠시 멈칫하는 사이 노인은 거짓말처럼 사라진다. 씩씩거리며 달려온 익이 놀라 묻는다. 그는 육관이 호랑이를 데리고 가는 것을보지 못했는 듯 두손에 화분을 들고있었다. “너 아까 데리고 있었던 것 호랑이지?! 너 미쳤냐!” “이젠 없어요. 육관이 데리고 갔어요. 그 화분은 뭐에요?” “칼이 없으니 이거라도 던지려고했지. 그래? 이제 잡아갔으니 편해지겠군.” 안심하고 화분을 내려놓는 익에게 자례가 말한다. “그 육관 전에 보았던 그 사람이에요.” “응?” “전에 종이속에 들어갔을때 보았던...호랑이가 없어져서 찾고있었던 것이였구나...흐음.” 혼자서 말하고 이해하는 자례를 이상하게 익이 바라본다. “육관을 알아?” “아뇨. 오늘 처음 만났습니다. 맹수를 기르는 육관치고는 나이가 많지만 굉장히 정정하신 분이네요.” “노인이였어?” “예. 꽤나 뚱뚱한 노인이시던걸요.” “여진인?” “그건 잘 모르겠어요. 정안족이나 한족이 아닌 것은 분명해요. 거란이나 여진이겠지요.” “그렇다면 그 육관은 황제의 친동생이다.” 얼마간의 침묵이 흐르다가 자례가 못들었다는 듯 어깨를 으쓱한다. 익이 다가와 다시 말해준다. “호랑이를 기르는 곳은 건곤궁. 건곤궁은 비궁에다가 현재 폐궁이고 그곳에 들어갈수 있는 사람은 황제와 구절을 허락받은 그의 친동생만이 들어갈수있다고 들었다. 즉 육관은 황제의 친동생이야. 물론 그가 다스리는 육관이 따로 있을테지만 그들은 맹수와 힘을 기를만한 젊은 장수들이라구.” “...친동생이라.” “왜 입명장 받을때 기억안나냐? 황제의 옆에 서있던 그 덩치 큰 늙은 노인네말이야.” “그때는 다른 생각을하고 있어서 단상을 올려보지 못했습니다. 익은 어떻게 단상위를 보았죠?” “곁눈질이지.” 익은 씨익웃는다. “황제의 친 동생이라... 그렇다면 그는...” “응?” “아뇨.” 혈족이 아닌데 그 눈동자는 참 정감이 가네. 아니 정말로 그 눈동자는 우리랑 똑같았는데. 검은 예복을 입은 마유는 행동이 조심스러워졌다. 그도 그럴것이 자신은 아직 모도리를 지킬만한 연륜이나 실력은 없다고 여겼다. “선도님(先刀:경당의 임시선생이나 초빙강사. 교육을 해주는 선배.) 인상쓰지 마세요.” “인상쓸때마다 늙어요.” 낄낄거리며 동기장수들이 웃는다. 화를 내고싶지만 일단은 자신이 모도리 책임자로써 점잔빼고 앉아있는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던 자휼이 문을 열고 들어왔을때 벌떡 일어나 그를 마주보는 수 밖에 없었다. 자휼은 덤덤하게 마유의 앞으로 다가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오래간만입니다. 마유장군.” “자휼, 도대체 어디서 뭘 한것이지? 어째서 지금에야 나타난것인가?” “일단 그 일은 나중에. 혹시 제 동생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계십니까?” “자례? 글쎄. 백라와 을노가 유번님의 모도리에서 이곳까지 함께 왔었다네. 예전에 자네가 사용하던 방을 쓰다가 왕씨의 부름을 받고 다른 거처로 옮긴이후로 통 그 소식을 듣지 못했어.” “그렇습니까?” 자휼은 두손을 불끈 쥐었다. 확인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바보라도 알수 있을정도로 친첸의 말이 사실처럼 들리고 있었다. 내 아이는 정말로 황궁에 들어간것일까. 아냐 그럴 리가 없다. “좌보님은 어디계십니까?” “좌보님은 얼마전 밀명을 받고 계주쪽으로 떠나가셨다네.” “을노장군은?” “을노장군은 호북쪽으로 건너갔다네.” “왕씨께서는?” “도성을 나가신지 오래되었네.” 절망스런 표정을 지으며 자휼이 머리를 감싸안았다. 마유는 자휼을 데리고 예전에 그가 사용하던 방으로 건너갔다. 차를 건내며 그동안 무슨일이 있었는지 물었지만 자휼은 대답하려고 하지 않았다. 한동안 얼굴을 가리고 생각에 잠겼던 자휼이 고개를 들었다. “혹시 황궁안으로... 아냐, 설마...” “...?” 마유는 눈치가 없는 사내가 아니였다. 그가 아우의 행방을 알기 위한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마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분명 자신은 자례가 어디에서 뭘 하는지는 몰랐지만 왕씨가 도성밖의 작은 촌가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기 때문에 실제로 왕씨의 행방은 이야기해줄수 있었다. 하지만 왕씨의 거처는 알고 있는 자들에게는 비밀이 아니였지만 그 거처를 모르고 있는 자들에게는 비밀이였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자휼에게 왕씨의 거처를 일러줄수는 없는 일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렇게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기에도 안쓰러웠다. 결국 마유는 이것을 자신의 형에게 맡기기로 결정했다. “오늘은 여기서 쉬고 내일 상장군 마류님께 가보게.” “마류장군님께?” “형님은 뭔가 알고 계실지 모르지. 아참. 그보다 말이야. 혹시 유견님이 언제 돌아오는지 아는 것이 없나? 자네 어찌되었건 수업이 끝났다면 유견님은 이제 모도리로 돌아와주셨으면 하는데...” 한숨을 포옥 내쉬는 마유는 나름대로 고생하고 있다는 눈치를 보인다. 그래서 다음날 유번의 모도리로 젊은 무랑들이 모도리의 선생을 모시기 위한 말을 데리고 달려갔고 자휼은 마류가 있다는 도성밖의 박벽산쪽으로 떠났다. 하지만 마유는 여전히 검은 옷을 단정하게 입고 앉아서 검의 도에 관해 외우고 있을뿐이였다. 그 앞을 지나가는 동기장수들의 핀잔을 받으며. 전날 종이 허수아비로써 책임을 다한 익은 매우 피곤했다. 잠이 들어서 깨어보니 어느세 저녁인 듯 싶어 식당에 갔다가 성각헌으로 다시 돌아왔을 땐 자례가 돌아와있는지 불이 켜있었다. “여어. 돌아왔냐?” “아, 익.” 무심코 몸을 돌려 익을 바라보는 자례의 두손에 덜렁거리는 그것을 보고 빼액하며 뒤로 물러난다. “호, 호, 호랑이!” “아직 어린데 그렇게 난감해할 것은 없잖아요.” 자례는 힘들게 호랑이를 들어 자신의 침상위에 올려놓았다. “또 도망쳐 나왔는지 학고청에서 발견했어요.” “그럼 육관이 가져가게 들고 오지 왜 여기까지 데리고 왔어!” “따라온거라구요.” 자례가 말을 증명하듯 익의 곁으로 걸어가자 호랑이가 침상에서 내려가 자례를 따라 움직인다. “봐요. 어쩔수가 없었어요. 익이 오기전에 숨겨보려고 했는데...” “숨기고 뭐고, 나는 호랑이 싫어! 어서 이놈을, 왓! 나에게 다가오잖아!” “저런.” 자례가 호랑이의 허리를 잡았지만 안본사이에 배가 불러 통통해진 호랑이 새끼에게 끌려갈뿐이였다. 질질 끌려가면서 중얼거린다. “생각보다 힘이 쎄어졌네...” “뭐? 생각보다? 너 호랑이가 얼마나 무서운 동물인지 모르지? 지금은 저렇게 귀엽게 굴지만 나중엔 어림도 없어.” 익이 힘껏 호랑이의 앞발을 잡아 뒤로 벌렁 눕혀 버리고는 자신의 방으로 도망쳐버린다. 뒤로 누운 호랑이는 재롱을 피우듯 이리저리 구르는 묘기를 보여줄 뿐이다. 자례는 그 귀여운 모습에 풋하고 웃다가 얼른 호랑이를 다시 끌어 침상위에 밀어넣고 창을 닫았다. 차마 방에는 들어오지 않고 익이 고개만 내민체 자례에게 묻는다. “너 육관이 저 호랑이를 너가 훔쳤다고 하면 어쩔생각이야?” “내일 아침에 학고청에 나가서 돌려줄 생각이에요.” “그럼 여기서 재운단 이야기냐! 내가 엄하게 말하는데 지금 당장 갔다놓지 못해!” “난 피곤해요. 내일은 밤을 새야하는데 밖에서 자고 싶지 않다구요.” 냉큼 말한 자례는 익을 얼굴을 밀고 휘장을 쳐버린다. 웅얼웅얼 화를 내는 익의 목소리에 픽웃고 만다. 침상에 누웠을때 등에 따뜻한 체온이 느껴진다. 호랑이도 등의 따뜻함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대로 기대고는 잠이 들어버린다. 히우루는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어제 세었을때는 숫자가 정확히 떨어졌는데 또 빈다. 이번엔 두 마리나 빈다. “또 그놈의 새끼인가. 정말 신경쓰이게 하는군.” 화를 내며 다시 한번 세어보다가 누군가 걸어오는 것을 느끼고 잠시 행동을 멈춘다. 등을 돌리지 않아도 누가 다가오는지는 알수 있다. “또 수가 부족하냐?” “그렇습니다. 형님. 건곤궁엔 어쩐일이십니까?” “그냥.” 아골타는 천천히 걸으며 우리속의 호랑이를 세었다. 그리고 피식웃었다. “또 수가 부족하구만. 그 새끼호랑가 문제인가. 그리고 한 마리 더 비는 것 같은데 다른 새끼가 있나?” “아뇨. 막 1년된 놈이 없어진 것 같습니다. 형님. 건곤궁 어딘가에 작은 구멍이 생긴 것은 아닌가 합니다. 이런 놈들이 학고청까지 들어갈정도라면 분명 건곤궁 어딘가에 뒷길이 있는것입니다.” “건곤궁은 내 비궁. 뒷길이 있던 없던 그것은 내가 알아서 한다. 너가 할일은 이놈들이나 잘 돌보는 것이야.”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사라진 1년된 호랑이는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궁안에 어슬렁 어슬렁 다니다가는 애꿋은 관리를 물어죽이면 어쩌려구요?” “벌써 시간이 되었군. 저녁 문호를 받을 시간이다.” “호랑이는 어찌하구요?” “병사를 몇몇풀어서 찾게해. 죽은 자가있다면 댓가를 주면 될것이 아닌가? 알아서 해라.” 아골타는 태연하게 건곤궁의 문쪽으로 사라졌다. 히우루는 죄없는 호랑이들에게 인상을 써보이며 화를 낸다. “아 그러니까 이따위 말못하는 짐승을 키우는게 전혀 도움이 안된다 했거늘. 거참. 고기나 축내는 이 비싼 짐승들 같으니라구!” 화를 내는 것도 잠시 히우루는 다시 등을 들고 건곤궁을 돌아보기 위해 우리를 나선다. 117 누군가 자꾸만 흔드는 느낌에 신경질적으로 몸을 돌린다. 눈을 뜨지 않아도 아직 일어날때가 아닌 것을 알기 때문이다. 점점 더 심해지는 느낌에 눈을 가늘게 떴다가 휭그렇게 커다란 눈을 보고 놀라 뒤로 물러난다. 삐끗하고 침상에서 굴러떨어저 퉁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을 구르게된다. “봐라 봐라. 자기가 데리고 온 호랑이에 놀라는 꼴이라니. 흉하다.” 낄낄거리며 차마 방까지 들어오지는 못하고 문틈 사이에 얼굴을 내민 익이 웃는다. 몸에 칭칭감긴 이불을 걷고 멍하니 침상을 바라보니 어제 자신이 데리고 온 것이 분명한 호랑이가 고개를 갸웃하며 자신을 내려본다. “왜... 호랑이... 여기에...?” “잠 덜깼냐? 일어나라. 아침이야. 어제 네가 모셔온 범신이시다. 어서 육관에게 넘겨버려.” 익이 칫솔질을 하며 수건을 던진다. 턱하니 머리위로 떨어져 내리는 수건에 시야가 가려진다. 멍하니 그자세로 유지하다가 침상에 몸을 기대고 몇분이라도 더 자려고 한다. 하지만 머리위에 자신의 머리를 올려놓는 호랑이의 무게를 못이겨 일어나고 만다. 아침단장을 끝낸 둘은 서관으로 들어가 출관을 기록한 후 각각의 공무에 돌아간다. 실제로 오늘 학고청을 지키는 자는 익이였지만 호랑이를 돌려줘야 하는 관계로 자례가 대신하기로 했다. 익이 자례가 해야하는 필본을 뒤적거리는 동안 자례는 성각헌으로 돌아가 호랑이를 데리고 학고청으로 들어간다. 여전히 종이들은 하늘하늘 거리고 있었다. 배가 고픈지 칭얼대는 호랑이를 달래보지만 허기가 지는지 심심한것인지 손가락을 살짝 물고 잘끈 잘끈 씹는다. 가끔은 등골이 오싹할정도로 따끔해 얼른 손가락을 빼어내지만 그럴수록 장난스럽게 달려든다. “너는 장난치는 거지만 나는 아프단 말이다.” 그래도 좋다고 힝힝거리며 달려드는 호랑이를 보고 있으려니 한심하다. “그래도 네가 맹수의 왕이라니 체통이 없구나. 하긴 그게 없으니 동물이겠지만.” 얼추 손장난에 맛이 들여진다. 계속해서 낄낄거리며 호랑이와 놀게된다. 익이 중간에 찾아와 점심을 가져다 주며 한심하다는 듯 잔소리를 해대었지만 그다지 신경쓰이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문득 어두워지는 느낌에 고개를 들었을 땐 해가 지고 있었다. “네 보호자는 네가 나온줄 모르나보다.” 크릉하고 호랑이가 자례의 말에 동감한다. 잠시 고민하다 역시 다시 방안에서 재우기로 마음먹는다. 물론 익이 펄펄뛰었지만 어쩔수 없는일이다. 유견은 아주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유번의 허리띠를 잡았다. 덜컥하고 타의에 걸음을 멈춘 유번은 매우 짜증나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려 유견을 노려본다. “왜?” “나랑 같이 도성으로 가자.” “싫어.” “그러지 말고 아우님. 형님이 잘 해줄테니까 저승길이나 함께 다듬어보자고.” “싫어.” “생각 좀 해봐라. 이제 우리 나이도 60고개. 이제 슬슬 망자의 산이 부를 나이가 아닌가?” “혼자 갈꺼야. 다정한 내 마누라도 아닌 냄새나는 노인네랑 왜 같이 거길가?” “너 정말 그럴래!” 계속되는 유번의 대꾸에 유견이 꽤액 소리지르고 만다. “그래, 뭐가 그리 못마땅한거냐! 5살 때 오줌산 이불을 뒤바꾼거냐? 아니면 10살 때 부러진 화살을 네 전통에 넣어둔것? 아니면 14살 때 네 말 안장밑에 도토리 끼워둔거? 17살떄 옆집 소담녀에게 내가 먼저 고백한거? 18살 때 금간 검을 속인거냐? 아니면 21살 때 첫아이보고 돼지라고 한거? 25살 당양전투에서 네 투구를 벗겨 도망간거? 28살 네 관복을 걸래로 쓴거? 32살 무너진 다리밑에서...” “시끄러워!” 유번이 귀를 막고 소리친다. “시끄럽단 말이야! 시끄럽다고!” “함께 가자!” “웃기네, 형에게 당한게 얼마인데 이제 살길얼마 남지 않는 노후를 얼마나 당하라고 따라가냐! 난 여기서 조용히 살련다!” “그러지 말고!” “큰소리치치마! 뭐가 잘났다고 큰소리냐!” 또다시 둘이 멱살을 잡고 정원을 뒹군다. 마루위에서 파를 다듬으며 그싸움을 흥미있게 지켜보는 보던 동자는 킥킥거리며 웃는다. 이미 몇십번이나 되풀이된 일이라 말리는 것이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전에 싸우고 오후까지 토라져 있다가 저녁에 화해하고 잠자기 전에 또 싸우고 일어날때까지 삐져있고. 재미있게 사는 노인들이라 생각했다. 문득 나무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뒹구는 두 사람을 지나 문을 여니 세명의 건장한 청년들이 말을 가지고 서 있었다. 무슨일인지 묻지만 마당에서 벌어지는 난투극에 할말을 잊고 만다. 서로의 수염을 쥐고 죽어라 당기고 있다가 타인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자 얼굴이 화끈하다. 아직 어린 젊은 장수들이 얼이 빠져 둘의 싸움을 구경하고있다. 헛기침을 하며 재빨리 떨어져 옷을 다듬는다. “무슨일이지?” 유견보다 유번이 항상 재빠르다. 청년들은 잠시 유번을 바라보다가 유견을 바라보고는 고개를 갸웃한다. “도성모도리의 선생님을 모시러 왔습니다.” “잘왔다. 어서 들고 냉큼 사라지렸다!” 유번이 유견을 손가락질한다. 유견은 허리가 아픈지 낑낑거리다가 손가락질하는 유번을 노려본다.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싸움에 젊은 장수들은 유견과 유번을 달래 서로 때어놓는다. 둘을 달래 떼어 놓고 유견을 말에 태운다. “잘먹고 잘살아라 이 가드락(버릇없는. 경망스럽다.)!” “다시는 오지마 이 덩둘아(둔하고 어리석다)!” 씩씩거리며 주먹을 앞세운 두 노인은 그렇게 헤어진다. 말을 타고 점점 멀어지는 곡양의 작은 모도리를 뒤돌아보는 유견은 못내 아쉬운 표정이다. “바보같은 놈!” 끝내 한마디 내뱉고는 말허리를 찬다. 하지만 빙그레 웃고 만다. 저 멀리 보이는 모도리에서 누군가 나와 손을 흔들어주었기 떄문이다. 화선은 때 아닌 선물에 기뻐해야 할지 불안해야할지 분간을 할수 없었다. 2왕자가 보낸 것은 오색이 고운 다과였다. 얼마전 상한 떡으로 호되게 혼났으면서도 맛나보이는 색과 향에 손이가 하나 집어 입에 넣으면서도 왜 자신이 2왕자에게 선물을 받는지 이유를 몰라한다. “서신이나 전언은 없었나?” “세부께서 더 잘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2왕자의 시종은 간드러지게 웃는다. “곧 정식으로 부인이 되시겠군요.” 그말에 입맛이 싹 달아나버린다. “감사히 받았다고 전해드리게.” 시종이 물러나자 물끄러미 다과선물을 본다. 2왕자가 자신이 임신한 사실을 알고있었다는 것이 불쾌했던 것이 아니다. 심지어 레이첸이 자신의 임신사실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화내고 있는것도 아니다. 부부가 비게 머리맡에서 한 이야기가 저런 시종들에게까지 오고가는 것이 싫은것이다. 비게를 함께 비는 여인에게하는 말조차 비밀로 지켜지지 않는다면 그 어떤말이 비밀로 지켜진다는 말인가. 화선은 앙칼지게 눈을 떴다. 태교에 화는 안좋다고 고분고분 사뿐 사뿐지내고 있었지만 이일은 큰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자존심과 자신의 사내의 명예가 달린 일이라 생각하니 태교도 뭐고 화가 벌컥 난다 . “아랫것들을 모두 불러오라!” 때 마침 와있던 그녀의 어머니가 화선을 말린다. “애야, 화내지 말고 말로 해야한다.” “어머니께서는 출가한 딸 집안의 내계가 무너지는 것을 보고도 참으시라 하십니까?!” 부인은 사내란 바람과 같아 그 총애가 한순간의 실수로 바람처럼 날아간다는 것을 설명해주려고 하나 입을 다물고 만다. 나이 40이 넘어 18살 부인을 얻어 낳은 외동딸이다. 얼마나 오냐 오냐 귀하게 키워왔는지는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딸아이가 아랫사람들에게 훈계를 하는 것을 보며 한숨만 쉰다. 다과소는 번잡한곳이였다. 황제를 만나러 오는 자는 하루에도 수십명. 그에 따른 차를 내가야 한다는 것은 하루종이 과일을 깍고 오색물을 들여 과자를 내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절기에 따른 연회에서도 황제가 내리는 간단한 하사품에서도 다과는 존재했다. 둥근 얼굴의 궁녀가 배를 깍고 있었다. 익숙한 손에 비해 커다란 배가 깍기 힘든 듯 인상을 쓰던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배를 내려놓고 잠시 쉬었다. 차곡차곡 담겨 상에 오르는 떡을 바라보다가 이상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린다. 상한떡을 먹어도 애가 떨어지는 것은 아닌가 보네. 얼마전이였다. 어느때와 다름없이 다과를 깍고 꿀을 재우는 일을 하고 있을때였다. 처음 궁안으로 들어와 이일을 맡았을때는 힘들다는 생각은 눈꼽만도 하지 않았다. 그때 나이는 고작 8살이였으니 20년이 지금보다야 힘들었을것이 뻔하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강양 윤씨 궁녀 윤소에게는 12살에 찾아온 행운이 하나있었다. 그것은 왕자의 비빈의 역이 주어진 것이였다. 궁안에 들어와 익숙해질만할 때, 황제의 수많은 첩중 하나인 여인에게 다과를 올리기 위해 그녀의 처소로 들어갔었다. 우연히 황제는 그날 4왕자의 비빈으로 잊고 있던 첩을 찾아갔던 것이고 우연히 윤소 역시 비빈으로 결정된것이였다. 궁녀에게 꿈같은 이 선택은 단순히 황제가 그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이 아이도.’라는 한순간에 결정되었다. 왕자에게 야합의 기술을 가르쳐주는 것은 황제에게 기술을 받은 첩이였지만 막상 왕자가 처음으로 여인의 허리띠를 풀어주는 상대는 윤소였다. 다들 다과소에 일하는 미천한 궁녀의 대단한 행운에 질투했고 윤소 역시 조금쯤은 기대했었다. 잠시나마 다과의 일에 벗어나 여관이라고 하는 중년여인들의 시중을 받아가며 고운 옷과 좋은 음식을 먹던 것이 가난한 집에서 자란 그녀에게는 꿈처럼 생각되었다. 하지만 막상 4왕자와 합방을 했던 날, 수염도 나지 않은 앳된 왕자가 들어와 그녀를 나체로 세워 다리를 벌리고 몸을 합쳤던 왕자가 그 일이 끝나자 뒤도 안돌아보고 방을 나가버렸을때 그녀는 펑펑 울고 말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끔찍했고 너무 아팠고 또 모멸감이 가득했다. 몸안에 가득한 왕자의 체액이 마치 독처럼 느껴졌다. 그의 몸이 들어갔던 곳이 썩어버릴 것 같아 불안에 떨며 새벽처럼 일어나 매일 소금물에 닦아내었다. 다행히 그날 이후 왕자를 보는 일은 없었다. 나중에야 비빈이라는 것이 단지 하룻밤의 상대라는 것을 알고 어린 그녀는 안심하고 잠들 수 있었다. 하지만 좀더 나이를 먹어 왕자와의 야합이 궁녀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에 대해 알고 성숙하게 변한 육체를 지니게 되자 그날이 그리워지는 것 또한 어쩔수 없는 일이였다. 그리고 그날 믿을수 없게 어떤 이의 인도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을때 자신을 돌아보던 왕자의 붉은 머리카락에 가슴이 두근거림을 알수 있었다. 그것이 기회인지 어린날에 겪은 공포인지는 잘 몰랐다. 하지만 그날밤은 처음 그날처럼 괴롭지만은 않았다. 그리고 다음날. 간간히 그녀를 찾는 왕자에게 부담을 느끼면서도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비빈의 통례를 깨고 왕자의 첩으로 들어갈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에, 이 지긋지긋한 과일과 기름냄새를 떠날 수 있다는 꿈에 젖어 있었다. 하루, 한달, 거의 매일 그녀를 찾는 왕자를 보고 착하고 소심하던 궁녀 윤소의 안에서 무엇인가 변해버리고 만 것이다. 그녀는 다른 궁인들 몰래 몸을 사렸으며 찬음식을 먹지 않았고 함부로 앉지 않았다. 내 몸에 왕자의 아이를 가질수 있다. 비빈이 왕자의 아이를 갖는다는 것은 황족의 혈통을 우롱하는 죄다. 윤소는 도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부 화선보다 먼저 아이를 가져 정실로 들어가는 것을. 하지만 문득 화선의 궁으로 들어가는 다과의 양이 많아지고 담당하는 궁인이 귓말을 하는 것을 듣고는 절망하는수 밖에 없었다. 화선은 임신한 상태였던 것이다. 윤소로써는 왕자와의 관계가 들키는 순간 궁밖으로 내쳐지는 운명이였다. 그녀는 여기서 자신을 끝낼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위험하게도 상한떡을 숨겨 화선의 궁으로 들어가는 다과에 올려놓았던 것이다. 물론 화선을 죽일생각은 전혀 없었다. 단지 아이를 없애고 싶었다. 하지만 윤소의 일이 나쁘다는 하늘의 뜻인지 화선도 아이도 무사한듯했다. 그리고 당장 4왕자의 명으로 화선의 다과를 책임진 궁인들이 불려간후 다시 돌아오지 못한 것을 보고 그녀는 몸을 떨어야했다. 4왕자는 화선이 싫증나 자신을 부른 것이 아니였다. 단지 화선이 임신중이였기 때문에 대신 안을 인형이 필요했던 것이다. 만약 자신이 상한떡을 올려놓은 범인이라는 것을 알며 죽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달라졌다. “무슨 생각을 하는거냐? 어서 손을 움직여!” 잠시 손을 멈추었다고 냉큼 쏘아대는 상인(上人)을 노려본다. 그녀의 눈길에 화가 난 상인은 손을 들었다가 그녀가 최근 4왕자와 인연이 있다는 소문을 기억하고 손을 내린다. 더럽다고 중얼거리며 상인이 다른곳으로 간다. 상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윤소는 몇가닥내려진 앞머리를 한손으로 위로 올린다. 다른 한손으로는 앞치마가 둘러진 배위에 올려 쓰담는다. 지금은 모든 것이 달라졌다. 118 입춘을 압두고 궁밖에서 붉게 물들인 향나무 패가 들어왔다. 하나하나 먼지를 털고 햇빛에 말린 나무패들은 차곡 차곡싸여 서관으로 옮겨졌다. 점심이 지나자 명필로 발탁된 몇몇의 비서랑들과 낭관들이 서관의 다방에 모였다. “올해 춘축(春祝) 문귀는 ‘여세추이(與世推移) 여무가론(餘無可論) 여민해락(與民偕樂) 여발통치(勵發統治)’요.” 늦게 나타난 낭관이 긴 비단을 펼치고 문구를 읽는다. 모여든 명필가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간다. “으아악!” 성각헌에 때 아닌 비명소리가 들린다. 놀란 자례는 성각헌으로 달려가 문을 열어보니 탁자에 올라간 익과 그 밑에서 어슬렁 거리며 놀아달라고 보채는 호랑이가 보인다. 자례를 보자 익은 구세주를 만난 듯 외친다. “너! 너 방문도 안닫고 나가다니! 그렇게 문단속이 허술해서 쓰겠어?!” “...” 끝없는 잔소리에 아무말 하지 않고 방문을 닫아버린다. 방안에서 꽤액하고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린다. “잘못했다. 잘못했다! 이 놈좀 어떻게 해줘!” “...그럼 해드리죠.” 다시 방문을 열고 들어와 호랑이 꼬리를 잡아 당겨 자신의 방안으로 들여보낸다. 씩씩거린 익은 엄살이 아닌 듯 창백하다. 탁자에서 내려와 덜덜떨며 의자에 앉는다. “방문 좀 닫고 살아라. 넌 도둑걱정도 안하냐? 허구헌날 문을 열어놓고 사니 나원...” “어떻게 나왔는지...방문은 조금만 열어 놓고 갔었는데?” “문틈에 얼굴끼여 열었나 보더라. 영리한놈이란 말이야. 일어났는데 그놈이 내 옆에서 뒹굴고 있는거야. 세상에 그 노란 눈이라니, 미쳐버리는 줄 알았다고. 제발 문좀 닫고 살아라. 왜 항상 문을 열고 있는거야?” “답답해서 그래요.” “별 이상한 것 다 보겠다. 너 무섭지 않아? 누군가 네 방안에 들어와 널 해하려 한다고 생각하지않아?” “제 방안에 들어올만한 사람은 익뿐이잖아요. 익이 절 해칠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저 생각보다 잠귀가 얇아요. 금방 일어난답니다.” “거짓말. 너 자면 못일어나던데?” 비꼬는 익에게 책상위의 종이뭉치를 던저버린다. 잽싸게 한손으로 그것을 받은 익이 묻는다. “그래. 춘축구는 뭐더냐?” “여세추이(與世推移) 여무가론(餘無可論) 여민해락(與民偕樂) 여발통치(勵發統治).” “으음. 신생국에 걸맞는 춘축구로다.” “그래요? 전 굉장히 웃긴 춘축구라고 생각했습니다. 여무가론이라니, 말조심하라는 춘축문구아닙니까? 신년 복을 기원하는 춘축구에 협박을 하다니.” “신생국이니까. 요나라를 잊지 못하는 한족들에게는 여세추이(與世推移) 여무가론(餘無可論), 이미 대세가 정해졌으니 헛소리말고 흐름을 따라오라는 것이고 금나라에 봉사하는 여진인들에게는 여민해락(與民偕樂) 여발통치(勵發統治)겠지. 잘살아보자는 것아닌가.” “아무튼 오늘부터 내일까지 300장을 써야 합니다. 별로 좋은 문구도 아닌데 300번이나 쓰려니 죽겠군요.” “황궁의 모든 문은 9999개. 하늘의 문이 일만개니 그의 아들인 황제가 사는 이곳은 9999개라지. 나눠서 쓴다해도 300장이라. 고생꽤나 하겠구나.” “지금 놀리는거죠?” “전혀.” 익은 붓을 챙겨주며 정색을 한다. "하지만 오늘밤은 절대로 호랑이랑 자지않을 생각이니 알아서 보내주고 와야한다." 자휼이 갑작스런 휴가를 떠난지 꽤 오래된 느낌이였다. 마고는 무엇인가 텅빈 느낌을 받았다. “무슨생각을 하는거냐?” “아무것도 아닙니다.” 친첸의 지적에 고개를 숙인다. 언제나처럼 친첸고 함께 기산성의 일을 처리한다. 자질구래한 것은 결국 마고의 일로 돌아갔지만 성과 성사이를 오고가는 태수의 전지만은 쉬첸이 처리했다. 조용하게 문서를 읽고 붓을 들어 서명을 한다. 간혹 마고의 의견을 물어보는 모습은 어느때와 다름없었다. "이주한 정안족 때문에 낭성에서 호적을 보내왔더군." 마고에게 호적을 넘기며 고개를 돌리는 친첸은 깍은 듯 반듯한 얼굴선이 날카로우면서 냉정해보인다. “그러고 보니 북쪽성벽에 정착한 정안인들이 시끄럽더군. 입춘절기 축제가 한창이던데. 가보았는가?” “아니요. 그곳은 수해장군이 책임지는 곳이 아닙니까.” “헛소리. 가고 싶으면 가서 한번 봐라. 참. 올해 기산성의 춘축구는 수원수구다(誰怨誰咎). 문패를 만들어 걸도록 해.” 나가보라는 손짓에 방을 나온다. 성위로 올라가니 풍경이 삭막한 이곳의 산에도 봄꽃이 피려고 한다. 노랑과 분홍빛이 감도는 산을 바라보며 탄광의 흙내가 아닌 꽃내음을 맡아보려고 노력하나 아무것도 맡아지지 않는다. 성아래는 항상 북적북적하다. 여느때와 같은 풍경이지만 어느날 부터 정안인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보인다. 이주해온 주민들이다. 몇 안되는 가족이지만 그 특이한 생활풍습과 옷차림때문에 눈에 안들어올수가 없다. 그들은 아직은 기산에 정착하려는 생각은 없는건지, 아니면 호적정리가 되는 것을 기다리는지 북쪽성벽에 작은 초가를 짓고 생활하고 있었다. 외진 북쪽성벽은 어느때부터 정안족의 구역이 되어버렸다. 간혹 호기심많은 관리들과 젊은이들이 그곳으로 들어가 그들의 생활을 둘러보기도 했으나 큰 충돌은 없어 안심하고 있던 차였다. 친첸의 말대로 북쪽 성벽이 시끌시끌한것이 무슨 절기 축제라도 벌이는 것 같다. -혈통이 마음에 걸린다면 숨기고서라도 한번 둘러봐. 그것이 그리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되는데. 자휼의 말이 떠오른다. 문득 북쪽성벽에서 생활하는 그들이 어떤 춘축구를 문에 걸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그래도 잠시 망설이다가 고민하다가 결국 북쪽성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방안에서 귀를 귀울이던 친첸은 마고가 걸어가는 소리를 듣고 웃고만다. 북쪽성에 전에는 보지 못했던 작은 초가들이 세워진 것을 발견한다. 봄볕이 마냥 좋아 까르르거리며 뛰어다니는 아이들이 손이 가려지는 소매자락을 흔들며 서로를 알아본다. 초가에서 임시로 생활하는 여인들은 단소하게나마 생활품들을 사들여오고 사내들은 초가 옆의 작은 밭을 일구거나 사냥을 나간다. 활을 등에 매고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의 모습에는 불안감따위는 없었다. 젊고 늙은이 할것 없이 함께 사냥을 나가는 모습이 동년배들의 모임과 같아보인다. 한둘은 남장을 한 여인들도 있어 특이하게 생각된다. 집을 지키는 노인은 자신의 아이, 남의 아이 할것 없이 돌본다. 튼튼한 체격의 여인이 갖난 아이를 안고 마고의 곁을 지나간다. 여자아기인지 강보다 살구색이다. 자휼이 말해준 매달이라는 여인이 떠오른다. 자신도 모르게 그 여인을 따라 시선을 돌린다. 무척이나 예민한 여인인지 아니면 아기를 안고 있기에 민감한 것인지 그녀는 바로 마고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본다. “무슨 일입니까?” “아니...난.”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더듬는다. 그녀는 그런 그를 보고 싱긋 웃어주더니 다른 곳으로 향한다. 이렇게 당황스러운 일이 없었기에 마고는 어서 이 자리를 떠나야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바로 자신을 향해 뛰어온 어린아이가 그에게 명주실을 내민다. “목우를 묶어 주세요.” “응?” “입춘에 보낼 나무송아지요!” 어영부영 아이들에게 끌려 볏집과 솔가지로 만들어진 조악한 솜씨의 목우의 못에 줄을 걸어준다. 신이 나는 듯 아이들은 목에 건 줄을 당기며 나무 송아지를 끌고 앞으로 달려간다. 아마도 한족의 토우와 비슷한 절기 놀이인 듯 싶었다. 풍년을 기원하며 흙으로 만든 소를 입춘에 만들어 마을을 돌게 하는 놀이. 단지 나무로 만든다는 것이 조금 달랐을 뿐이다. “왜 묶어 주셨소? 아이들이 혼자 하게 두시지 않고.” “예?” 지나가던 중년 부인이 미소지으며 그에게 말을 건다. 그녀는 작은 비단상자를 들고 있었다. 열린 상자에는 까만재가 소복히 들어있었다. “이게 무엇입니까?” “풍재(豊梓)요. 모르시는가? 정월 열나흗날 저녁에 수수깡을 잘라 보리로 깍은 것을 땅에 재웠다가 대보름아침에 꺼내어 태운 것이라오. 말그대로 풍년을 바라는 씨앗이지.” “그렇습니까?” “우리네 풍습이 그렇다는 것이지. 입춘절기를 보러 오신 손님이신가? 그럼 가기전에 저쪽 집에 들어가 보리점이나 보고 가시오. 내가 본 것은 풍년이였는데 당신도 좋게 나왔으면 좋겠군.” 부인이 풍재를 가지고 지나가자 젊은 여인서넛이 바구니 가득 나물들을 끼고 지나간다. 입춘식을 위한 나물인가 싶은데 꽃송이도 가득들어 있다. 저멀리 사내들이 묶은 솔가지와 볏집을 모아 태워 그 재를 하늘로 올린다. 오색의 밤콩을 손에 쥔 늙은이들이 젊은 연인들앞에서 그것을 굴리며 조언을 해준다. 후두둑 소리가 들리면서 바구니에 넣은 말린 콩을 집앞에 뿌리는 사람들도 보인다. 무엇인가 낯익은듯하면서도 낯선 일상들속에서 안락하면서도 혼란스러워 얼른 도망치듯 그곳을 나온다. 두근 두근 하는 가슴을 쓸어내린다. 그날 저녁 친첸은 오래간만에 마고를 저녁식사에 동석하게 했다. 아무말없이 식사를 하던중 친첸이 불쑥 묻는다. “그래. 재미있었나?” “...” 하지만 마고는 아무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을 바라던 것도 아니였기에 기분상해하지 않는다. 친첸은 식사를 하는 마고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묘한 분위기다. 아름답다거나 호화스럽다거나 하는 이상적 분위기가 아닌 뭔가 앞뒤가 딱 잘라 아귀가 들어맞은 듯한 딱딱한 분위기라 할까. 친첸은 그런 마고의 얼굴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이번 경마에는 나도 참석하려고 한다.” “기주에서 열리는 황제의 경마축제에 말입니까?” “그래. 나도 한번 해보고 싶어서 말이야.” “그렇다면 말을 준비해야겠군요.” “수해장군이 사올거야.” “....” 또다시 입을 다물어 버린다. 역시 그 딱딱한 표정에 친첸은 고개를 끄덕인다. 질리지 않는 얼굴이다. 향물에 붉은 돌가루와 금가루를 섞고 적당히 풀을 넣어 만든 것이 축구에 사용하는 먹이다. 옆에서 졸던 호랑이의 얼굴이 붉게 변해 흉측하다. 박하향이 나는 먹에 관심을 가지던 중 자례가 한눈을 파는 사이에 낼름거려 먹범벅이 된것이다. 이미 저녁이 되어 어두워져있었지만 오늘은 호랑이와 함께 자지 않겠다고 화를 내는 익 때문에 등을 세 개나 키고 육관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로써 250장이군.” 붓을 내려놓고 두손을 포갠 후 힘을 준다. 도독하는 뼈마디의 소리가 들리며 손이 알싸해진다. 얼마 남지 않았다. 붉은 향나무패에 금사로 적은 춘축문은 입춘을 기준으로 황궁 모든 문에 걸어져 한해의 길조를 비는 부적이 된다. 정안족이 하는 춘첩자와 같은 것이였다. 단지 주련으로 사용하는 정안과는 달리 문패로 사용하는 것이 다를뿐이였다. 다시 새 나무패를 올려놓고 춘축구를 적어 나가는데 옆에서 자던 호랑이가 벌떡 일어난다. 그 모습을 보고 붓을 놓고 종이바다를 바라본다. 역시나 사박거리는 소리가 들리며 예의 그 육관이 모습을 드러낸다. 자례가 일어나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육관은 그런 자례를 힐끗 보다가 마루에서 으르렁대는 호랑이를 보고 혀를 찬다. “또 너냐? 지겹다.” “새 우리에서도 나온것입니까?” 대꾸없는 육관은 으르렁대는 호랑이에게 다가가 목털미를 덥썩 쥐어 올린다. 대롱대롱 메달려 으르렁 대는 것이 웃기기만 하다. 그대로 종이사이로 사라지려 하다가 발에 채이는 문패에 뒤로 물러난다. 등불에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한 그는 자례에게 묻는다. “춘축구군. 네가 쓴거냐?” “예.” “...좋은 글씨군.” “...하나 가져가시겠습니까?” “모든 문에 다는 것은 내게 필요없다.” 무슨 소리인가 해서 잠시 머뭇하다가 새로 써달라는 것인 것을 알아차린다. 새 문패를 꺼내고 묻는다. “공이 원하시는 춘축구는 무엇입니까?” “일춘화기만문미(一春和棄滿門楣)" 그말에 또다시 멈칫하고 만다. 그것은 정안족이 잘 사용하는 춘축구가 아닌가. 일단 문패에 그대로 적어주면서도 의심을 떨치지 못한다. 익은 그가 황제의 친동생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는 여진인이 분명하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우연이 계속되는 것일까. 힐끗 쓰고 있는 문패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를 바라본다. 역시 까만 눈. 아무리 봐도 여진인의 눈이라 보기엔무리가 있다. 문패를 건내주자 꽤나 흡족한 듯 등불에 이리저리 비추어보던 그가 불쑥 말한다. “좋군.” “감사합니다.” “호랑이를 잡아주고 문패를 받았으니 보답을 하고 싶군. 비서랑이라 했던가? 시간을 보아하니 오늘 공무는 끝날을터.” “그러하옵니다만 보답을 바라고 한일이 아니니 심려치 마십시오.” “하긴. 오늘은 좀 바쁘다.” 그는 자례를 돌아보았다. 얼른 고개를 숙여 그의 시선을 피해버린다. 황제와 근접한 사람과 관계되고 싶지 않는게 솔찍한 속마음이다. 갑자기 그가 손가락으로 자례를 가리키며 명령한다. “고개를 옆으로 돌려라.” “...?” 영문을 몰라하면서도 고개를 옆으로 돌린다. 턱을 잡아 옆모습을 유심히 보던 그는 이내 떨어진다. 영문을 몰라하는 자례에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닌가.” “...” “돌아가라.” 대꾸할틈을 주지 않고 그는 종이속으로 카릉거리는 호랑이를 데리고 사라졌다. ------ 단설의 역주는 인용과 개인적 견해가 들어간 글입니다.(맹신(盟信)사양. 도용씁쓸)-------- 사자성어에 대한 역주는 달지 않겠습니다. 주. 입춘(立春):양력 2월 4일경, 태양이 시황경 315°에 왔을 때를 입춘 입기일로 하여 이후 약 15일간이 입춘기간에 해당한다. 음력으로는 정월의 절기로 동양에서는 이 날부터 봄이라고는 하지만, 추위는 아직도 강하다. 주. 절분(節分): 입춘·입하·입추·입동의 전날을 절분이라고 하는데, 동양에서는 입춘부터 입하 전일까지를 봄, 입하부터 입추 전일까지를 여름, 입추부터 입동 전일까지를 가을, 입동부터 입춘 전일까지를 겨울이라고 부르므로, 절분은 4계절의 경계를 뜻한다.특히 입춘의 절분을 해넘이라 하여 콩을 방이나 문에 뿌리면서 마귀를 쫓고 새해를 맞이하는 풍습이 있다. 주. 입춘첩(立春帖) :입춘방(立春榜)이라고도 하고 궁궐에서 사용하던 것은 춘첩자 (春帖子)라고 하기도 한다. 정월 초하룻날 문신들이 임금에게 지어 바친 연상시(延祥詩)를 길쭉하게 자른 장광저지(長廣楮紙)에 쓰고 위에는 연잎, 아래에는 연꽃을 그렸다. 민간에서도 춘축(春祝)이라 해서 대문·기둥·대들보 등에 축원의 글을 써 붙였는데, 상을 당해 탈상 전에 있는 사람은 이것을 하지 않는다. 춘축에 흔히 쓰는 글귀는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 '국태민안(國泰民安) 가급인족(家給人足) 등이지만 선비들은 직접 짓거나, 고인(古人)의 글귀를 따서 쓰기도 한다. 여기서 잠시, 처음 육관이 원한 글귀를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으로 가장 흔히 사용하는 문구를 선택했었으나 역주를 달기 위해 공부하던중 건양다경의 건양이 고종황제의 연호라는 것을 알고 당황했다. 결국 다른 축춘구를 넣기 위해 축춘구를 찾은 결과 아래와 같았다. 춘도문전증부귀(春到門前增富貴) 춘광선도길인가(春光先到吉人家) 일춘화기만문미(一春和棄滿門楣) 수여산(壽如山) 부여해(富如海) 거천재(去千災) 래백복(來百福) 국태민안(國泰民安) 가급인족(家給人足) 우순풍조(雨順風調) 시화세풍(時和歲豊)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 소지황금출(掃地黃金出) 개문백복래(開門百福來) 부모천년수(父母千年壽) 자손만대영(子孫萬代榮) 문영춘하추동복(門迎春夏秋冬福) 호납동서남북재(戶納東西南北財) 여기서 가장 뜻이 마음에 드는 일춘화기만문미(一春和棄滿門楣)로 바꾸었다. 역시 생각없이 쓴글은 이런 오류가 나오기 마련이다.(당당하게. 잘못없다는 듯. 헛헛헛;;) 주. 입춘 축제- 입춘을 맞아 행하는 여러가지 의식. 춘첩자, 입춘굿, 보리뿌리 점, 목우놀이. 풍재와 솔보내기 등의 지방에따라 많은 의식과 놀이가 있었다. 아쉽게도 지금의 입춘은 그저 하나의 절기로 굳어져 버렸지만 원래 입춘이란 농사를 중요시 했던 옛사람들의 진정한 한해의 시작으로 여러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절식 음식을 따로 만들고 봄맞이 청소를 하는 간소한 의식은 어느정도 전해지고있다. 참고로 옛 중국에서는 입춘 15일간을 5일씩 3후(候)로 갈라서, ① 동풍이 불어서 언땅을 녹이고, ② 동면하던 벌레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③ 물고기가 얼음 밑을 돌아다닌다고 하였다. 잡절(雜節)은 입춘날을 기준으로 하여 결정된다. 밭에 씨앗뿌리기가 시작되는 88야(夜), 태풍시기인 210일, 220일 등은 각각 입춘날로부터 88일, 210일, 220일째 날이다. 119 방으로 돌아왔을땐 방안은 조용했다. 살짝 익의 방문을 밀고 들여다 보니 익은 몹시 피곤한 일이 있었던 듯 옷도 갈아입지 않고 침상에 쓰러지듯 누워 잠들어있었다. 조용하게 다가가 아래도 떨어진 이불을 올려 덥어준다. 잔소리에 핀잔도 많고 짜증도 많이 부리는 나이많은 동기지만 자는 모습은 누구나 다 이렇듯 어린 아이같이 순수해보이는 걸까. 고개를 옆으로 돌린 익의 얼굴을 물끄러니 바라보다 처음으로 자신의 동기가 매우 잘생긴 쾌남이라는 것을 알고 놀란다. 정말 잘생긴 얼굴이네. 반듯한 이마와 짙은 눈썹 감은 눈의 속눈썹도 가지런하고 조금 날카롭게 솟은 코이지만 강한 턱선에 잘 어울린다. 새치라고 하기엔 결좋은 힌머리카락이 절반이상 섞인 머리카락이 신비한 인상을 주는 보기드문 잘생긴 얼굴이다. 마기장군의 얼굴은 온화하면서 귀족스러운 아름다움을 가졌다 한다면 익은 강하면서도 담담한 아름다움이라고 할까. 보면 볼수록 매우 잘생겼다는 것을 알수 있는 얼굴이다. 갑자기 질투라는 것이 생긴다. 익은 자례가 원하는 형태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도 이렇게 생겼으면 얼마나 좋았을까하고 잠시 생각해보고는 질투심에 익이 자주 그러듯 손가락으로 그의 이마를 튕기고는 문을 닫고 나온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관복을 벗고 관을 내리고 머리를 푼다. 물이 쏟아지듯이 머리카락이 등을 덥으며 내려온다. 하얀 속포를 입고 잠을 청하려고 하나 잠이 오지 않는다. 몸은 피곤하지만 정신은 말짱하다. 뒤척뒤척하다가 결국 일어난다. 산책이라도 할까 싶어 그대로 방을 나온다. 멀리 가지 않고 방문앞 복도에 나와 쪼그리 않아 하늘을 올려다 본다. 달도 흐리고 별도 흐린밤이다. 마고라고 했었지. 악운에게 들은 마고라는 이름이 잊혀지지 않는다. 형을 데리고간 사람들중 한명의 이름일것이라 짐작되는 이름. 마고라. 혈족을 모른다 했다. 정말로 이름으로는 그의 혈통을 구분하긴 힘들다. 형은 잘 있을까. 곧 입춘인데 감기는 안걸렸겠지? 내일이 입춘이니 오늘은 해넘이(절분)다. 이날엔 콩을 문과 방에 놓아 귀신을 쫓는 날이다. 하지만 황궁에서는 할수 없는 것들이다. 풀어헤친 머리끝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긴다. 어쩌다가 황궁까지 온것일까. 과거의 일이 모두 꿈과 같은 듯 목래가 불탄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전설속의 이야기인 듯 아른하고 몽롱하기만 하다. 서글프고 속상해서 기분이 축 늘어진다. 처진 기분을 잊어보고자 잘 부르지 못하는 노래를 흥얼거린다. 누가 들을까 조심조심 작게 소심하게 중얼거린다. 노래는 형이 굉장히 잘하는데. 나는 노래 못해. 노래를 멈추고 멍하니 하늘을 보며 형이 노래하던 기억을 떠올린다. 부탁을 하면 어지간해서는 불러주던 자휼이였기 때문에 쉽게 여러 가지가 떠오른다. 형을 부러워하는 자신에게 그는 항상 미소지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 아우는 소리없는 노래를 부르지 않니. 형은 내 춤을 좋아했었다. 아니 좋아했던 걸까. 아니면 좋아하는척 했을지도. 고개를 갸웃하면서 흐린 달을 바라본다. 명확히 떨어지지 못하는 생각은 달과 같다. 답답함에 고개를 푹 숙이고 자괴하다가 벌떡 일어나 달을 향해 춤을 춘다. 흐린달은 춤추는 이의 그림자마저 빼앗아 가고 안개가 발자국소리를 먹어버린다. 소리없이 어둠속에서 하얗게 흔들리는 옷자락과 작게 흥얼거리는 노래소리만 들린다. 오싹할정도로 몽환적인 안개속에서 차가운 봄비에 이기지 못하고 떨어지는 작은 찔례꽃처럼, 빙글 돌아 천천히 빗물이 고인 땅위에 떨어저 작은 물웅덩이에 떠다닌다. 옆으로 내리치는 빗방울에 이리저리 휘말려 다니면서도 끝내 그 보잘 것없는 작고 조그마한 하얀 꽃잎에는 상처하나 없이 깨끗하다. 우연히 떨어진 하늘의 심술에 웅덩이속으로 가라앉아버린다. 금세 떠오르지 못하고 진흙 속 돌조각과 썩은 낙엽속에서 꽃잎을 상처입힌다. 벗어나려고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상처는 깊어져 보기흉한 흔적을 남긴다. 지나가던 바람이 불쌍히 여기고 물웅덩이가로 꽃잎을 밀어낸다. 이미 수많은 생채기로 고왔던 하얀꽃잎은 보잘것없이 추해져 그 흔적을 알아보기 어렵다. 그래도 심술이 남은 하늘은 수많은 물방울을 던저온다. 하지만 이제 피할힘도 없어 묵묵히 그 심술을 다 받아낸다. 결국 섞어 문드러지는 꽃잎은 시간이 흘러 모래와 바람의 날카로움으로 한줌의 재로 변해 날아가는 그순간을 기다린다. 문득 마지막으로 올려본 그곳에 있는 것은 하늘이 아니다. 모든 것을 보낸 찔래나무가 자신의 분신이 죽어가는 것을 보듬어주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눈에 가득담아 울고 있는 모습임을 알기도 전에 꽃잎은 사라져버린다. 발걸음이 멈춘다. 알수 없는 설움이 복받쳐 오른다. 힘들어 죽겠다. 아무나 붙잡고 이 설움을 토로하며 울어버리고 싶다. 깜박깜박거린 눈동자에서 눈물이 나오기전에 얼른 소매로 닦아 버린다. “못된 형같으니라구. 힘들어 죽겠는데 도와주러 오지도 않고...” 말같지도 않는 투정을 부려보지만 그럴수록 안타까움만이 가득해서 더욱 자신의 처지가 서러워진다. 어찌 보면 너무도 웃긴 일이다. 타인이 본다면 이미 분가해 살아가야 하는 두 형제가 얼추 얼마간 얼굴을 못보아서 울고짜고 하는 것이 얼마나 흉할까. 자신도 그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도무지 형에 대한 그리움을 접을수가 없다. 자례는 두 눈을 꼭 눌러 눈물이 나오지 않게 막으면서 중얼거린다. 모두 형이 빨리 장가를 가지 않아서 벌어지는 일이라고 말도 안되는 핑계를 대며 자신을 위로한다. 티딕. 등뒤에서 들리는 복도소리에 몸을 떤다. 얼른 얼굴표정을 굳히며 일어나 소리가 난 복도를 보고 경악에 차 한숨을 쉰다. “너 또 나왔니?” 반가워 자례에게 달려오는 것은 몇시간전에 육관에게 대롱대롱 끌려간 그 호랑이이다. 박벽산은 넓지는 않지만 높은 산이라 도성에서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왕래가 거의 없는 곳이였다. 박벽산쪽으로 가기전 산아래 작은 마을의 주점에서 간단한 요깃거리를 하고 밀빵을 몇 개 주문하자 주점의 주인이 눈치를 보며 다가온다. “손님 혹시 박벽산을 넘어가실 생각이신겁니까? 혼자서요?” “그렇소.” “아이고. 그건 안좋은 생각입니다. 사람이 많이 모이길 기다렸다가 가십시오.” “왜요?” “박벽산쪽으로 괴물이 나타났다는 소문 못들으셨습니까?” “괴물?” “박벽산넘어 있는 고을은 풍요하기는 하나 거래할수 없는 지역이지 않습니까. 물건이 싸 상인들이 자주 왔다갔다 하며 거래를 하는 지역인데 아, 어느날부터 산을 넘는 상인들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요물이 나타나 박벽산을 넘어가지 못하게 한다는 겁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요물?” 자휼은 피식 웃고는 식사값을 식탁에 내려놓았다. 말리는 주인을 뒤로 하고 주점을 나와 휘파람을 부니 홀로 마굿간에서 마른풀을 먹던 윽염이 얼른 달려나온다. 마지막까지 주점의 주인이 말려보지만 이 반신불수의 협객은 들은체 만체 하고는 검은 준마를 달리게 해 박벽산쪽으로 뛰어간다. 박벽산은 소문처럼 매우 놓은 산이였다. 흑염이 올라가기 힘들어 할정도라면 가히 위태로울 정도로 높은 것이였다. 결국 흑염과 나란히 걸으면서 자휼은 주위를 살펴보았다. 하지만 어디에도 괴물이나 요물이라고 하는 흔적은 발견할수 없었다. 가벼운 사람들의 입장난이라고 생각하고는 발을 재촉한다. 혹시 마류장군은 동생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도 몰라. 흑염을 재촉하며 올라가는 산행에서 문득 이상한 것을 느끼고 발을 멈춘다. 누군가의 시선이 계속 느껴지는 것이다. 잠시 고개를 들어 사방을 살펴본다. 하지만 시선이 계속 느껴지는 반면에 주위에는 아무도 없는 것이다. 잠시 이 산을 넘어가는 것이 위험할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산을 넘으면 아우의 행방을 알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불안해하는 흑염을 이끌고 산을 올라간다. 올라가는 중에도 계속 그 시선이 자신을 따라와 멤도는 것을 느끼고 신경이 날카롭게 세워진다. 공격해 올것인가? 지금? 아니면 조금 후에? 잔뜩 몸을 긴장시키고 정상을 향해 올라간다. 시선은 공격해올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몸을 쉬거나 긴장을 풀려고 등을 세우면 바로 강한 위화감이 느껴지는 것이다. 결국 몸을 뻣뻣하게 긴장시킨체로 정상까지 오르는 수 밖에 없었다. 비오는 듯 땀이 흐르지만 그것을 닦아낼만한 여유도 주지 않는다. 앞만 보고 계속 앞으로 내달려가 정상까지 도착하자 이미 해가 진 상태였다. 이 가파른 산을 밤길에 내려가기엔 무리다. 하지만 등뒤에서 자신을 따라오는 시선을 두고 여기서 쉬어 갈수도 없을 것 같다. 내려가기로 마음먹고 흑염을 당기지만 말은 밤길의 위험함을 아는 것인지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내려가지 않으려 버틴다. 몇 번더 당겨보다가 포기하고 나무 밑으로 다가가 주저앉는다. 공격하려거든 해봐라. 요물이던 괴물이던 죽기밖에 더할라구. 팔짱을 끼고 앞을 노려본다. 등엔 나무를 대고 있으니 조금은 안심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따가운 시선은 계속되는데 그 누구도 나오지 않는다. 결국 날이 환하게 밝을때까지 눈을 부릅뜨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피곤을 느끼면서도 어지간히 앞을 분간할수 있을때가 되자 흑염을 끌고 산을 내려간다. 역시 그 시선은 계속 따라온다. 잠을 못자서인지 길이 험해서인지 발을 절기 때문인지 계속 미끄러진다. 새벽 이슬에 촉촉한 땅에 벌렁 미끄러지기 여러번 화도 나고 짜증도 생겨 버럭 소리지른다. “누구냐! 요물이면 물러가고 사람이면 나와라!“ “그렇게 화를 낼필요도 없지 않은가?” 사람 목소리에 얼른 일어나려고 하지만 상대가 더 빠르다. 그는 자휼이 미끄러진 나무위있었던 듯 자휼을 향해 뛰어내린다. 일어나려는 자휼의 목에 지팡이를 겨누고 다시 눕힌다. “아직 이슬이 채 마르지 않는 새벽. 무슨 일로 험한 산을 내리시는 겁니까?” “...스님이 이렇게 험한 행동을 해도 되는 것인가요?” 자신의 배를 타고 앉은 40중반의 스님을 보고 자휼이 중얼거린다. 꽤나 살찐 사내라 숨이 막힌다. 그는 자휼의 반신을 가린 버리카락을 손으로 들추어본다. “시주께서는 특이한 외모를 가지고 있군요?” “외모에 대해 물으시는 것을 보니 파계승이시요?” “그런 심한말을 하시는가요? 허허허.” 장난삼아 그런 듯 힘을 주어 자휼의 배위에서 움직인다. 억소리가 저절로 나며 인상이 찌푸려진다. “스...스님. 내려오지 않으시면 내장을 토해낼 것 같습니다.” “엄살쟁이 같으니라구. 유견의 제자치고는 몸단련도 안된 놈이구나?” “예?” 그가 자휼의 배위에서 일어나 옷을 턴다. 회색 장삼자락이 펄럭이고 포동포동한 얼굴에 눈썹이 둥글게 휘어 여성스런 느낌이 난다. 자휼도 따라 일어나 묻는다. “절 아십니까?” “응. 명림씨겠지. 왕씨께 이야기를 들었다. 이곳으로 온다길래 기다리고 있었지. 정말로 반신이 볼만하구나. 불에 잘 익었다. 한점 뜯어 먹으면 좋았을것을.” 스님의 신분으로 입에 담기 어려운 말을 서슴없이 꺼낸다. 여성스럽고 부드러워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험한 입을 가진 스님이였다. 일단 혈족이라는 것을 알자 인사를 건낸다. “명림자휼이라고 합니다.” “후소라 불러라. 보다시피 출가인이지.” “후소스님께서는 여기서 절 기다리고 계셨습니까?” “후소스님이 뭐냐? 후소는 내 이름이야. 법명은 법주다. 그냥 후소라 불러라. 그리고 널 기다린 것은 맞아. 일단 마을로 내려가자. 그동안 너 오기 전에 다른 놈들 올라오지 못하게 하느라 산위에서 생활했더니 엉덩이가 시려.” 후소는 등을 돌려 조근조근하게 걸어간다. 큰 몸둥이에 비해 발이 매우 작아 걸음걸이가 뒤뚱뒤뚱 조근조근 하다. 천천히 걷는 것 같으면서도 순식간에 멀어져 버리는 후소를 따라 자휼이 뛰어간다. 분명 후소는 걷고 있는데 자신은 뛰어도 그 거리가 좁혀지지 않아 의아해 한다. 헉헉 거리면서도지지 않겠다는 듯 열심히 따라오는 자휼을 보며 후소는 마음에 들었다는 듯 속도를 더 올리고 산을 거의 내려왔을때에는 흑염은 모둠뛰기를 하고 있었고 자휼은 전속력으로 뛰고 있었다. 팔랑팔랑 장난하듯 산을 내려온 후소는 자휼이 숨을 몰아쉬며 다가오자 언덕 아래로 보이는 마을중 가장 커다란 기와집 한 채를 가리졌다. “마유는 저기 살고 있다. 지금 들어가볼테냐? 어차피 네가 원하는 답은 안나온다.” “후소님은 제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계십니까?” “거야 네 아우가 어디 있는지 궁금해서 온 것이 아니냐?” “어찌 알고계시는겁니까?” “네 얼굴에 적혀있어.” 당황스러워하는 자휼을 보고 후소가 낄낄거린다. “여러 사람에게서 네 이야기를 들었다. 두명 남은 형제니까 당연 궁금해할것이라 맞춰본것이다. 자, 마유에게 가자. 왕씨께서 자네에게 전갈을 보내신것도 있고 나도 마유를 만나 이야기 할것이 있거든.” 먼저 휘적휘적걸어 앞으로가는 후소를 보고 자휼은 한숨을 쉬고는 다시 따라 뛰어간다. ------ 단설의 역주는 인용과 개인적 견해가 들어간 글입니다.(맹신(盟信)사양. 도용씁쓸)-------- 주- 절분 : 원래 계절의 최종일을 뜻하였는데, 근래에는 단순히 겨울의 마지막날 저녁, 즉 입춘의 전날 밤을 가리킨다. 민간에서는 이날 밤을 해넘이라 하여 콩을 방이나 문에 뿌리면서 마귀를 쫓고 새해를 맞이하는 풍습이 있다. 120 흠칫하고 눈을 든 하류사는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꿈인가 현실인가? 조용히 정면을 바라보며 지금 자신이 꿈을 꾸는지 현실을 보고 있는 것인지 분간해보려한다. 따뜻한 침상위에서 앉아있는 자신을 느낀다. 고개를 돌리고 싶지 않지만 누군가 옆에 누워있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에 천천히 시선을 돌려 옆자리에 누운 사람을 바라본다. 긴 머리채를 풀어내리고 하얀 속포를 걸친체 옆에 누워있는 사람은 너무나도 낯익은 여인이다. 보기힘든 고귀한 여인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머리를 풀고 눈을 감은 모습이 저렇게 아름다울 것이라는 것은 예상하고 있던 차였다. 하지만 이것은 현실이 아냐. 그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한다. 갑자기 잠들었던 여관이 힌 옷자락속에 숨겨진 손을 내밀어 하류사의 팔목을 잡는다. 잡힌 손목이 오싹할정도로 시려 몸을 움찔한다. 여관은 눈을 뜬다. 눈동자가 새파랗다. 파란 하늘을 보는 듯한 눈동자. “넌 대체 누구냐?” 낮게 속삭인다. 큰 소리를 치고 싶지만 손을 잡힌 손목이 점점 무거워지며 몸이 저려온다. 마치 가위에 눌리는 듯 점점 몸의 감각이 무뎌진다. “누구...냐?” 힘들게 소리내어 말한다. 여관은 출렁이는 긴 머리를 뒤로 넘기며 일어난다. 한손은 여전히 하류사의 팔목을 잡은상태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머리를 귀로 넘긴다. 너무도 평범한 일상적인 행동이지만 이상할정도로 느리게 보인다. 시간이 더디게 가는듯하다. 꿈이다. 현실이 아니라는 것에 내심 안도하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 여관은 하얀 목을 길게 보이며 자신의 얼굴을 하류사의 얼굴로 다가간다. 숨을 쉬지 않는군. 거의 닿을 듯 다가온 얼굴에서 숨결이 느껴지지 않는다. 마주댄것도 아닌데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그녀가 얼마나 차가운지 시린 기운이 느껴진다. 숨이 턱 막히고 답답해온다. 깨어나야 한다.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고 하류사를 바라본다. 한손으로 그의 목을 쓰다듬는다. 하류사는 그녀의 소맷자락속의 손이 자신의 목을 자를수 있다는 것을 느낀다. 깨어나야 한다. 꿈이라고 하지만 그녀의 차가움은 너무도 잘 느껴진다. 눈을 감고 싶지만 감기지도않는다. 안간힘을 써보지만 이미 가위에 눌린 듯 꼼짝도 못하겠다. 그녀가 하류사의 배에 올라타 그를 지긋이 눌러 다시 눕게 만든다. 깨어나야 한다. 여관의 입술이 자신의 이마를 지긋이 누르고 점점 아래로 내려온다. “왕씨!” 순간 온몸에 감전이 오든 이불을 걷으며 벌떡 일어난다. 가쁘게 숨을 쉬며 허공을 노려보다가 정신을 가다듬으며 숨을 정리한다. 침상의 옆에서 여관이 걱정되는 모습으로 하류사를 바라본다. “여관?” “또 악몽을 꾸신겁니까?” 머리를 옆으로 땋아 내린 속포차림의 여관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하류사에게 차를 건낸다. 건낸 차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한다. 한참후에야 손을 내밀어 차를 받는다. 한모금 마시다가 내려놓고는 길게 숨을 내쉬며 정좌의 자세를 취한다. “나가계십쇼.” “알겠습니다.” 여관이 방을 나가 방문복도에 앉는 소리가 들린다. 하류사는 천천히 눈을 감고 명상에 잠긴다. 이상하다. 목욕탕에서 여관의 환영을 보았던 이후로 계속해서 악몽에 시달리고 있었다. 다른 장수들에겐 악몽을 꾸는 내색을 보이지 않았지만 잠자리를 봐주는 여관까지 속이기는 무리였다. 아니 여관이 있었기에 꿈의 마지막까지 보지 않아 다행이였다. 왜 하필 여관의 모습이지? 하지만 눈을 감은체로 실소하고 만다. 어째서 여관의 모습인지는 자신이 더 잘알것만 같았다. 숨을 깊게 들이쉬고 내쉰다. 온갖 잠념을 떨치고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무념 무상. 스스로가 인간이 아닌 듯 어둠속에 동화되어 버린다. 얼마나 지났는지 다시 눈을 떠 일어났을때는 발밑에 사락사락거리는 콩들 밟게 된다. 문을 여니 콩을 뿌리는 여관의 모습이 보여 묻는다. “귀를 쫓으십니까? 민간의식을 여관께서 하실줄은 몰랐는데요” “왕씨의 악몽을 쫓는것이죠.” 별다른 말 없이 여관은 다시 한번 북쪽을 향해 콩을 던진다. 잠시 그 모습을 보던 왕씨는 여관에게 다가와 자신도 콩을 들고 북쪽을향해 던진다. 익은 눈을 떴다.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일어나 등과 허리를 피며 몸을 푼다. 어제는 조금 피곤했나. 손가락을 딱딱 소리나도록 당기며 방을 나온다. 식어버린 차를 마시고 자례의 방문을 소리없이 연다. “어라?” 침상은 텅 비어있었다. 얼굴 표정이 확 굳어지며 방안으로 뛰어들어가 침상위에 손을 댄다. 이불안은 이미 식어있었다. 자신이 늦게 일어난 것이 아닌가 하고 조금 열린 창을 들어 밖을 확인한다. 하지만 밖은 아직 새벽달조차 들어가지 않는 시간이다. 평소에 자례가 일어나려면 두시간은 더 남은 새벽인것이다.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않고 방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익은 외포를 하나 걸친체 성각헌의 빈방문을 모두 열어보았다. 하지만 청소도 되어 있지 않는 빈방에는 사람의 흔적이 없다. 옆방의 같이 입관한 한족 동기를 깨워 자례에 대해 물어보려다가 멈칫하고 서관으로 뛰어간다. 하지만 서관의 문은 열리지도 않은 상태였다. 서관뒤의 정자를 돌아보고 아무런 흔적을 찾지 못한다. 초조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황궁의 수많은 돌길을 두리번 거리다가 생각났다는 듯 학고청으로 뛰어들어간다. 그리고 창고의 마루에서 호랑이와 함께 잠들어있는 동기를 발견하고 안심반 조바심반의 감정으로 다가간다. “이 바보가. 입춘이라지만 아직 춥단말이다.” 깊이 잠든 듯 어깨를 흔들어보지만 깨어나지 않는다. 반면 품에 안겼던 호랑이는 벌써 깨어나 자례를 흔드는 익을 보고 고개를 갸웃한다. 익은 손을 내밀어 자례의 목과 손을 잡아보고 혀를 찬다. 차갑다. 분명 추워하고 있는것이다. “일어나라. 일어나. 들어가서 자라. 감기걸려.” 여전히 대답없는 어린 동기를 몇 번 더 흔들다가 목과 허리에 손을 넣어 안아든다. 생각보다 더 가볍게 들리는 것을 느끼고 인상을 쓴다. 성각헌을 돌아가려하자 혼자 남은 호랑이가 으르렁 거리며 익의 앞을 막는다. 무시하고 앞으로 나가려니 달려와 옷자락을 물고 흔든다. 헛헛 웃던 익은 호랑이를 무서워하던 평소와는 달리 발을 힘껏 구르며 위협한다. “비켜라!” 광하는 발구르는 소리에 놀란 호랑이가 얼른 옷을 놓고 물러난다. 맹수라지만 강자에게는 꼬리를 내리는 것이 짐승의 본모습이라 축 늘어진체 낑낑거린다. 그것을 무시하고 몇걸음 가다가 멈추고 호랑이를 부른다. “따라와라. 이놈이 널 걱정할라.” 고개를 갸웃한 호랑이는 앞서가는 사람이 고갯짓을 하자 얼른 따라간다. 성각헌으로 돌아와 침상위에 자례를 눕히고 이불을 덥어준다. 냉큼 침상으로 올라가려는 호랑이의 얼굴을 호되게 쳐서 올라가지 못하도록 한다. “짐승주제에 사람하고 함께 자려하다니 괴씸하다.” 코가 아파 낑낑대는 호랑이를 무시하고 방안에 열린 창을 닫는다. 따뜻한 차를 방안으로 들어와 온기가 퍼지게 만들고 나가기 전 마지막으로 동기의 비게를 올려준다. 조용히 방을 나오며 문을 닫는다. “것봐라. 뭐가 잠귀가 밝냐.” 피식웃으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던 익은 잠시후 다시 나와 완전히 닫았던 자례의 방문을 조금 열어놓는다. 입춘을 계기로 모든 궁에 축춘패와 그동안계획했던 신년 일정을 처음으로 시작하는 날이기 떄문에 고관들은 일찍일어난다. 마기도 평소보다 세시간 정도 일찍일어난 상태였다. 옷과 머리를 정리하고 시종들을 불러 관복을 입기 전에 침상에 앉은체로 몇몇 공문서류를 확인한다. 침상이 있는 방에서 나와 옆방으로 나가니 탁자에 살구색 보자기에 싸인 상자가 보인다. 살구색 보자기라면 분명 궁밖의 소용이 보낸 것이라 반갑게 다가가 살펴본다. 무게가 묵직하니 먹을 것 같다. 붉고 푸른 술로 단단하게 묶여진 매듭을 푸는 것은 쉽지는 않다. “내 참, 살살 좀 묶으라니까...” 힘들게 풀러 열어보니 찬합이다. 기대하며 열어보니 역시 입춘절식이다. 황궁에서는 보기 힘들지만 들에나가면 흔히 볼수 있는 햇나물을 삶아 겨자와 함께 무친 오선반이다. 보기만해도 먹음직스러운 음식에 빙긋 웃음이 나온다. 작은 비단주머니가 있어 풀러보니 말린 콩이 들어있다. 황궁에서는 정안의 풍습을 따를수 없지만 소용은 성혼한 이후 수 많은 절기 풍습을 지킬수 있도록 준비해주고 있었다. 참으로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어 마른콩을 하나 들어 방에 톡 던진다. “액막이요.” 때구르르 굴러간 콩은 서탁의 아래로 굴러가 사라진다. 다시 찬합을 정성스럽게 싼 마기는 오후에 자례를 불러 같이 점심을 할까하는 생각을 가진다. 딸랑이는 소리가 들려 등을 돌린다. 시종들이 배식(背式:주인이 지정한 자리에 서서 명을 기다리는 것)하는 것이다. 숨을 들이 쉰 마기는 가장 가까이 배식된 시종에게 말한다. “관복을 가져오라.” 입춘이다. 121 시종들이 배식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평소같으면 대사(大仕:왕자의 선생)들이 깨우러 올때까지 누워있지만 오늘만은 벌떡 일어난다. “입춘이로고!” 레이첸이 일어난 것을 확인한 시종이 얼른 차를 가져다 준다. 차를 마시고 준비된 세숫물에 단장하고 머리를 빗는다. 붉은 반곱슬의 머리가 꼼꼼하게 땋아내려진다. 오늘 입을 옷을 든 시종이 다가오자 레이첸은 고개를 젓는다. “그거 말고 붉은색의...” “절기에 붉은색을 입는 왕자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태진.” “생일축하드립니다. 형님.” 성큼 들어온 태진은 작은 상자를 탁자에 올려놓고 앉는다. 단장이 안된 상태에서 손님을 맞는 것은 안되는 일이지만 태진은 항상 예외였다. “일찍 일어났구나?” “오늘은 형님의 생일이니 일찍 일어났지요.” “거짓말.” “하하하, 입춘입니다. 이 날에 늦잠을 자는 왕자는 없을겁니다.” “입춘패를 달고 온거냐?” “그럼요. 형님은 아직 달지 않았더군요. 어서 다십시오. 그리고 생일 준비를 하셔야죠.” “생일준비라니, 평소대로 술마시고 놀면 되는거지.” “잊으셨습니까? 이번 생일은 궁안에서 하는 마지막 연회가 될지 모릅니다. 그런데 평소대로 할일없이 술만 마시겠다고요?” 날카롭게 태진이 레이첸을 쏘아본다. 쩝하고 레이첸이 그 시선을 피해버린다. 2왕자에게 말실수로 화선의 임신을 알린 것을 태진에게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결국 얼마 가지 않아 제후로 승격되어 황궁에서 내쳐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쩔생각이냐?” “빈집은 있지만 손님이 들어갈만한 곳은 아닙니다.” 옷을 다 입은 레이첸이 손을 흔들어 시종들을 물러가게 한다. 태진과 맞은편 의자에 앉아 묻는다. “알아듣게 말해라.” “계주성의 태수가 입궁하다 그 아들들이 모두 암살된 것을 알고 계시지요?” “그래. 셋째가 영특하다고 소문났더니만...마차에서 죽었다며?” “그일로 계주태수가 성을 반납했습니다. 계주성은 2달내로 비워질겁니다. 일단은 두달안으로 다른 형제들이 성혼하지 않는이상 형님만이 그 성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겁니다.” “그럼 된 것이 아닌가?” “계주는 살기 힘든 성입니다. 형님. 계주는 도성입니다. 황제의 칙령이 발동하는 성입니다. 그곳에 간다는 것은 황제의 가신으로 들어간다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게다가 계주성 태수인 한성곡은 오랫동안 계주의 주인으로 지낸 호족세력가. 황제는 그곳을 장악할수 있는 인재를 보내고 싶어할것입니다.” “내가 그 인재가 안된다 말하는 것이냐? 아니면 내가 그곳에 가서 황제의 가신이 된다는 말이냐?” “둘다 제가 원하는 결말이 아닙니다. 어찌 되었건 황제는 형님은 지략가로 치지 않으시니 섣불리 형님을 보내진 않을거라 생각합니다만.” “넌 어떤 성을 보고 있지?” “계주성에 속한 주성인 파낭성과 그 옆의 낭성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레이첸은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한참을 생각하던 그는 태진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네 생각대로 가긴 힘들거다. 내가 보기엔 황제는 날 계주로 보낼경우가 많다.” “무슨?” “네 말이 맞다. 계주는 태수로는 살기 힘든 곳이다. 도성에 속한 태수로써 황제의 비위를 맞추어야 하고 힘을 키우려고 하면 도성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곳이야. 하지만 이렇게 생각할수도 있다. 만약 황제에게 있어 고관을 피해 강한 아군을 만들려 하면 최적의 장소 역시 계주이다.” “그렇군요.” 태진이 흥미있게 레이첸을 바라보았다. 가끔 레이첸은 평소 생활하던것과는 달리 무척이나 예리한 면모를 보여주곤 했다. 그때마다 태진은 자신이 레이첸을 이용하는 것이 아닌 자신이 레이첸에게 이용당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었다. “즉 나라가 세워진지 얼마 안된 관점에서 한족이 관리하던 계주는 위협이 되는것이다. 그런데 우연하게 계주태수가 성을 내놓았어. 그렇다면 황제는 그곳에 황권을 강화할수 있는 중요 인재를 앉게 하려 할것이다. 바로 여기서 고민하는거지.” “어떤것을요?” “당연한 것이 아닌가? 태자다. 태자와 친분이 있는 놈을 그곳에 앉혀야 다음 황권에 계주가 황제의 힘이 될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황제가 아직 고민하고 있다는 것은...” “그래. 아직 태자를 결정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레이첸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그 모습이 먹이를 잡은 맹수와 같아 태진은 움찔한다. “결국 태자는 결정되어 있지 않다. 그러니 내가 그곳으로 간다.” “태자가 결정되지 않았는데 어째서 형님이 다음 황권을 보호할 계주태수로 부임되는겁니까?” “그것은 내가 2왕자를 태자로 만들것이기때문이다.” “안됩니다!” 탁자를 치고 일어나는 태진을 보며 레이첸은 실소한다. “2형님은 너무 한족에 가깝고 3왕자는 한족혼혈이며 나는 너무 무식하다. 5아우는 영리하고 똑똑하긴 하나 성질이 포악해서 황제의 미움을 받고 있는 형편. 그렇다면 결론은 두가지다. 2황자를 황권에 두고 날 보호자로 만드는 경우. 날 황권에 두고 2황자를 보호자로 만드는 경우이다.” “그래서요? 두 번째 경우일수도 있다는 것 아닙니까?” “바보같이 굴지마라. 생각해봐라. 황제는 무력으로 금나라를 세운 사람이다. 거란을 밀어내고 한족을 구겨버리고 정안을 죽여버렸어. 그 과정에 얼마나 짐승같은 짓을 했겠냐? 그러면서 만든 금나라다. 그런데 100년도 가지 못하고 나라가 망하게 할 것 같은가? 어떤식으로든 강한 황권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할것이다.” “결국 형님을 황권에 들어서게 되면 2왕자를 옹호하는 자들이 반기를 들어 나라가 혼란스러워 질터이니 황제의 선택은 2왕자라는 것이군요?” “그렇지.” 레이첸은 무릅을 탁 두드렸다. “큰일이 일어나지 않는한은 그게 정석이야. 파낭과 낭성은 포기하는 것이 좋다. 황제가 날 계주로 임명하면 그것은 내가 황권에서 떨어진다는 것을 의미하니까.”“알겠습니다.” 태진이 가볍게 웃으며 일어난다. 그 웃음이 마음에 안들었던 레이첸이 묻는다. “내가 황권에서 벗어난다면 너는 어쩔생각이냐?” “형님이 황권에서 벗어나요?” 어깨를 으쓱이며 태진이 소리내어 웃는다. “어째서요? 내가 있는한 당신은 황제가 될것입니다.” “불가능하다.” “당신은 욕심만 내면 가능한 위치입니다. 당신이 욕심을 안내기 때문에 불가능해보이는 것이죠.” “...어쩔생각이냐?” “무슨 짓을 해서라도 당신을 계주로 보내지 않으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 “그보다 오늘 연관이 되면 도움이 될만한 관리들에게 초청장을 보냈습니다. 오후연회에서 실수하시면 안됩니다. 아시겠지요?” 레이첸은 말없이 등을 돌려버렸다. “일어나라!” “...예?” “조회시간까지 앞으로 반시간!” “예?!” 그말에 벌떡 일어난다. 정신은 깨어났지만 몸은 꺠어나지 못해서 휘청인다. 넘어지기 전에 익이 가랑이 사이에 팔을 넣어 질질 끌고 방을 나간다. “자 옷갈아입읍시다. 오늘은 입춘이니 조회가 길다네.” “예.예.” 아직도 잠이 덜깨 허우적대는 자례를 보고 익이 옷을 입혀준다. 속포가 뜨지 않도록 허리띠를 묶어준다. “아앗!” “왜 그래?” “숨 못쉬겠어요!” 얼른 허리띠를 푸는 자례를 보고 익이 어리둥절한다. 허리띠를 풀고 가쁘게 숨을 내쉰 자레가 익에게 퉁명스럽게 대꾸한다. “전 속포엔 허리띠 안해요.” “뭐야? 그럼 관복이 뜨잖아?” “뜨던 말든. 답답해서 안해요.” 허리띠가 따로 없는 관복은 속포를 조이지 않으면 임산부처럼 배가 나오게 된다. 관복을 입고 머리를 빗어내리는 자례의 배를 뚱하니 본다. 분명 속포가 떠서 배가 나와보이지만 흉하지는 않다. “편리한데?” “거기 끈을 좀...” 엉성하게 묶어 올린 머리를 보고 끈을 집어주며 익이 딱하다는 듯 말한다. “해줄까?” “아뇨.” “사양말고. 그렇게 올렸다간 관이 내려올거야.” “됐어요. 어차피 오늘도 학고청에 나가니까 풀어지면 다시 묶죠.” “해줄께.” “싫어요!” 내민 익의 손을 피하며 자례가 과하게 소리친다. 익이 어깨를 으쓱하며 물러난다. 당혹스러운 표정이다. “싫으면 하지 않아. 그렇게 화를낼 것은 또 뭐냐?” “아...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바로 얼굴이 변한 자례가 정말로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익에게 사과한다. “머리카락을 만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요.” “그래? 왜?” “뭐랄까...범해지는 기분이라고 해야할까요.” “에?!” 어설프지만 머리를 올려 관모를 쓴 자례가 얼토당치 않다는 익에게 설명한다. “맨살에 닿는 느낌이라고 해야할까요. 마치 가축처럼 호기심이나 부러움에 머리카락을 만지는 이들에게 팔리는 느낌입니다. 물론 혈육은 다르지만...” 말끝을 흐린 자례는 얼른 익의 손을 잡아 끈다. 미안함때문인지 밝게 웃어준다. “조회를 하러 가야지요. 익공.” “미안하면 익형이라 불러.” 아슬아슬하게 조회에 도착한 그들은 최고 낭관이 춘축패를 문에 다는 것을 지켜보는 것을 시작해 입춘의 간단한 의식을 치룬다. 삼삼오오 모여 고관들이 부탁한 필본을 나누어 받는다. 익과 함께 받은 필본을 날짜에 따라 책상에 나누고 있는 중 함께 입관한 한족 동기중 하나가 다가온다. “그거 들었나?” “무슨?” “간랑(姦郞)이 들어온다.” “간랑?” 자례가 고개를 갸웃하는데 익이 앞으로 나와 그와 이야기한다. “언제? 누구의 아들인데?” “몰라. 듣자하니 대홍로(大鴻擄)의 아들이라고 하던데?” “왜그걸 우리에게 말해주는 거지?” “긴장하는게 좋을 것 같다고 알려주는 거지. 난 우관이 쓴 축춘구가 황성 정문에 붙을 거라 생각했거든.” 어깨를 으쓱이는 그의 말에 자례가 고개를 갸웃한다. 익은 이상하다는 듯 묻는다. “정문에 붙은 축춘패가 우관이 쓴게 아닌가?” “그래. 간랑이 쓴거란다. 둘다 조심하라고. 실력만 믿고 설치다가 낭관까지 오르지도 못하게 생겼으니까.” 피식 웃으며 그가 사라지자 익은 골몰하게 생각에 잠긴다. 점심시간이 되자 역시나 물에 밥을 말아먹던 자례가 익에게 묻는다. “간랑이 무엇입니까?” “학고청에가서 알려주지. 그보다 반찬하고 같이 먹어라. 매일 물만 먹는데 어째서 안쓰러지는 건지 몰라.” “과자를 먹으니까 그렇죠.” 익이 괴씸하다는 듯 자례를 바라보나 아이는 시선을 회피한다. ------ 단설의 역주는 인용과 개인적 견해가 들어간 글입니다.(맹신(盟信)사양. 도용씁쓸)-------- 대홍로(大鴻擄) 외국의 빈객(賓客)과 귀순한 외이(外夷)를 맡던 관직으로, 원래 전객(典客) 이라 하던 것을 한무제 때 대홍로 고쳤다. 장관을 대홍로경이라 한다. 122 말린 육포는 못먹는지 호랑이는 몇 번 찝적대기만 할뿐 먹지는 않는다. 저런 것을 보면 확실히 개와는 다른 것 같다. “큰일이네. 너 자꾸만 나와서 네 주인이 화를 내겠다.” 그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례가 걱정스럽게 말한다. 그 모습을 보고 익이 꽥 소리지른다. “자신이나 걱정해라! 간랑이 온다는 것은 앞뒤길이 꽉 막힌다는 거야.” “신경안써요.” “뭐?” “어차피 현 황제의 밑에서는 힘듭니다.” “쳇.” 고관의 자제들이 정식 입관의 절차를 걸치지 않고 관리의 길에 오르는 자들을 불러 간랑(姦郞)이라 속칭했다. 대부분의 간랑들은 부모의 배경이나 고관의 총애로 정식으로 들어온 관리들을 누르고 출세의 길을 가는 존재들이였다. 어찌 보면 부러운 존재일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관랑이 그 맡은 직위보다 능력이 떨어지기 대부분이기 때문에 나라를 걱정하는 선비들은 간랑의 존재에 대해 부정적이였다. 자례도, 익도 간랑의 존재에 대해 그리 탐탁하게 여기고 있지 않았다. 익은 드러내고 불만을 표현했지만 자례는 그렇게 깊이 생각하는 눈치는 아니였다. “그보다 정문에 제글이 아닌 간랑이 글이 걸렸다고 하니 한번 보고 싶군요.” “간랑이란 자리에 맞지 않는 실력을 가진자를 일컫는 말이다. 보나마나뻔하지.” “아무리 간랑을 허용하는 황궁이라지만 정문에 걸어놓는 그것을 함부로 결정하지 않았을것이 분명합니다. 이번의 간랑은 어쩌면 봉(鳳)일지도 모르지요.” “봉 좋아한다.“ 투절투절 거린 익은 간랑의 이야기를 더 알아본다며 서관으로 올라가 버린다. 육포를 가지고 노는 호랑이와 단둘이 남은 자례는 필본을 뒤적거렸다. 간랑이 오던 말던 이곳에서 광명을 바라는 것이 아닌 이상 그다지 신경쓰이지 않는 것이 사실이였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크릉하고 말을 거는 자례에게 호랑이는 수긍해보인다. 터벅터벅하는 발걸음소리에 고개를 돌린다. “지겹다.” 이미 몇 번 들어본 목소리다. 예상했던 인물에 일어나 고개를 숙인다. “입춘 여민해락를 기원합니다.” “흥. 여민해락? 이상하군.” 역시 으르릉 거리는 호랑이에게 다가가 덥썩 그 목을 잡아 올리며 그가 자례를 노려본다. “너가 내게 써준 춘구는 일춘화기만문미(一春和棄滿門楣)가 아니였던가?” “...그렇군요. 입춘 일춘화기만문미(一春和棄滿門楣)기원합니다.” “좋군.” 역시 종이속으로 사라질줄 알았던 그가 오늘은 창고의 마루에 걸터 앉는다. 피곤해보이는 얼굴이였다. “피곤해보이십니다.” “입춘연회를 막 끝내고 오는 길이다.” “저런.” “그래도 이놈이 어디갔는지 알고 있으니 그거 하나는 편하더군. 하하하.” 처음으로 그가 웃는 모습을 본다. 나이에 걸맞치 않게 굉장히 천진한 웃음소리다. 그가 갑자기 웃음을 멈추고 말한다. “오늘 저녁 유시(오후 5시30분∼오후 7시30분)에 여기서 기다려라.” “예? 하지만 유시라면...” 하지만 그는 대답을 듣지 않고 종이속으로 들어간다. 문득 종이속에서 육관의 목소리만 울린다. “혹시 이놈이 또 탈출하거든 잡아놔라. 우리가 아직 완성이 안되었다.” 안경을 끼고 눈살을 찌푸린체 문서를 뒤적거리는 노장군의 모습은 인상적이였다. 자휼은 조심스럽게 그 앞에 앉았지만 함께 온 후소는 피식피식 웃으며 마류장군에게 인사했다. “나 왔습니다. 마류장군님.” “응. 안그래도 기다리고 있었지. 그 옆에 있는 자가 자휼인가?” “명림 자휼입니다.” 절을하며 인사를 하자 하얀 수염의 노장군은 고개를 끄덕인다. 모도리에 있는 마유장군의 형이라고 들었다. 나이차가 많이 나는 듯 마유장군이 40중반으로 보였지만 마류는 50후반정도로 보였다. 나이차가 있지만 두 사람은 비슷해보였다. 마류는 보던 문서를 닫고 그들에게 당겨앉았다. 그는 물끄러미 자휼을 본다. “마유는 만나보았겠지. 나는 그놈의 형일세.” “예.” “자네 동생은 만나보았지. 영특해보이더구만.” “예.” “자네 나이가 몇이지?” “예?” “이제 슬슬 둘이 떨어져 분가해야하는 생각은 안드나?” 마류의 말에 당황한 듯 자휼이 말을 못하자 후소가 웃는다. “마류형님도 참, 제 동생 예뻐서 눈에 안들어온다는데 어쩌누? 후후후” 하지만 마류는 웃지 않았다. 자휼은 처음 목래에 백라와 함꼐 왔던 마유를 떠올렸다. 그가 털털해 보이는 편한 사내라면 형인 마류는 생각보다 매우 깐깐한 성격같았다. “후소, 경거망동을 그만두어라. 네 나이가 몇인데 흉한 꼴이냐!” “예.” 따끔한 말에 후소는 얌전하게 앉아 진지한표정으로 자휼을 본다. 잘은 모르지만 왕씨의 수하임이 분명한 나이지긋한 장군이 자신을 바라보자 자휼은 몸이 움츠러들었다. 마류가 그것을 느꼈는지 안경을 벗고는 좀더 부드러운 표정을 보였다. “동생이 어디있는지 내게서 알고 싶은가?” “...예!” 잠시 망설였지만 단호하게 외친다. 고개를 들어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거짓이 아님을 알고 마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알려주지는 않겠네.” “어...어째서?!” “그 아이는 자네 소유물이 아니야.” “예?” “네 동생은 하늘의 운명에 따라 네 아우가 되었을뿐 그 아이의 삶은 네가 장기알을 움직이듯 이리저리 이끌수는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 정도는 저도 알고 있습니다! 전 제 아이가 제 소유물이라는 생각을 한적이 없습니다!” “거짓말!” 쾅하는 소리가 나며 마류가 책상을 쳤다. 화가난 목소리로 자휼을 훈계한다. “어째서 ‘내 아이’란 말인가! 자네의 동생은 자네 부모의 아이가 아니겠는가! 자네와 아우는 동격이네. 자네 스스로 아우를 자신의 것이라 생각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모르겠는가!” “단지 어릴때부터 품에 넣어 기른 아이기 때문에 ‘내 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제가 아우를 물건으로 취급한다는 말씀은 너무하십니다!” “품에 넣어 기른 자는 필경 유모일것이다! 네가 한 짓은 형이란 네 위치가 떠오를때마다 가서 하는 자기만족에 지나지 않는것이다! 지금도 역시 그렇지 않느냐! 너는 지금 동생의 안위가 걱정되어 나에게 물으려 온 것이 아니다. 단지 네 동생이 네가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대로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찾아가 네가 원하는 것대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냐!” “절대 아닙니다!” 이번엔 자휼이 주먹으로 바닥을 내리쳤다. 몹시나 분노한 듯 연장자인 마류를 바라보는데도 고개를 들고 그 눈동자를 마주 보고 있다. “아닙니다! 전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전 단지 동생이 걱정되기 때문에 그런것입니다!” “그렇다면 네 동생이 지금 안전하게 지내고 있다면 그대로 돌아가겠는가?!” “...!” 마류의 날카로운말에 자휼은 잠시 주저했다. 분명 자신은 동생이 안전한지 확인하기 위해 이곳까지 찾아왔다. 친첸이 아이가 황성에 있고 자신이 아이를 헤칠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이렇게 찾아온것이다. 처음 곡양에서 아이를 만나기를 포기한 것은 자신이였다. 그것이 비록 흉한 외모에 아이가 자신을 거절한 충격에서라고는 하나 자신이 마음만 먹었다면 만날 수 있었다. 도성 황제의 축일날 벌어진 축제에서도 아이는 자신을 따라왔지만 만나지 않고 도망쳤던 것은 자신이였다. 그것은 어찌보면 곡양에서 거부당한 충격에 대한 보복일지도 몰랐다. 무엇보다 지금도 그 아이를 마주볼 엄두는 나지 않았다. 알수 없는 자신감의 상실. 마치 꽃같은 외모를 사랑하는 어리석은 연인들처럼 자신의 외모에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것은 어찌보면 아이보다는 자신이 아닐까. 내 자신을 혐오하기 때문에 아이를 만나려 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것은 내가 내 아이를 육친이 아닌 연정의 상대로 바라보기에 가능한일이다. 상대에게 맞추기 위해서 서로 단장하는 연인들처럼, 그렇게 못하는 자의 시기와 불안처럼 자신이 그러하다. “...알려주십시오. 내 아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내 말에 대답하지 않았지 않느냐.” “안전하다면...” 마른침이 넘어간다. 정말로 그러하다. 난 단지 그 아이의 안전을 확인하려 왔다. 그러니까 안전하다는 말을 듣는다면 돌아가도 충분한 것이다. 단지 그뿐이다. 하지만 도저히 그럴수가 없다. 힘들게 입을 연다. “그럴수는 없습니다. 단지 안전하다는 말한마디로 등을 돌릴수는 없습니다. 살펴주십시오.” “허허허, 녀석. 마음 여린 것 하고는.” 후소가 쓰게 웃으며 중얼거린다. “마류형님, 그만 하십시오. 애타 죽습니다.” “그런가.” 다시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마류가 자휼에게 대답해주었다. “자례는, ‘내 아이‘는 지금 안전하네. 목숨에 지장따위 전혀 없는 상태야.” “하지만!” “내말을 먼저 듣게. 여기에는 변수가 있네. 그 변수는 바로 자네야.” “예?” “자례는 지금 무척이나 안전하네. 그것은 자네가 기산성의 5왕자의 수하로 생활한다는 전제아래 성립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역시 황궁에?” 후소가 대신 고개를 끄덕여 대답해 주었다. 불안해하는 자휼에게 마류가 다시 말해준다. “아마도 5왕자가 자네에게 자례의 생사를 걸고 넘어갔겠지. 자네가 자신을 따르지 않겠다면 그를 신고한다는 식으로 말이야.” “...그러합니다.” “하지만 5왕자가 알고 있는 자네의 아이는 다른 인물이다.” “예?!” “자네의 아우는 지난 황제의 축일날 시행된 입관시험에 합격하여 정식으로 관리가 되어 입궁한 상태다. 이 말이 무엇인지 알겠지? 하지만 자네가 5왕자의 비위를 거스려 황궁안에 정안인을 거르는 문제는 나게 만든다면 동생은 무사하지 못할것이다.” “...아이가 원했단 말입니까? 입궁을요?” “그랬을 것 같지는 않아.” 마류가 물러나고 후소가 끼어든다. 부드러워보이는 얼굴에서 나오는 날카로운 목소리가 안어울린다. “아마도 밀명이 있었겠지.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자네는 뭔가 짐작이 가는 것이 없나? 혈족이라면 황궁에 들어가는 것을 꺼리는 것이 지당하다. 밀명이라고는 하나 그는 차기 우보님이 아니신가. 손이 귀한 이때 왕씨께서 그런 그에게 밀명을 강요하지는 않으셨을거야. 그런데도 입궁했어. 즉 그는 무엇인가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발견하고 들어간 것이 분명해.” “소심한 아이라 밀명을 받들고 주저없이 들어갔을겁니다.” “소심하다고?” 날카롭게 말을 지적하며 후소는 고개를 저었다. “소심한 것은 그가 아닌 자네야.” “예?” “자네는 사람 하나 탈출시키는데 자네가 다스리는 성과 주민과 자신의 목숨까지 걸어가며 내기할수 있는가?” “무슨 말씀이신지.” “목래의 이야기는 대강 들었다. 듣자하니 네 동생은 널 목래에서 탈출시키기 위해 자신과 성전체를 미끼로 삼았더군. 게다가 계명장군에게 독을 먹였고 태연하게 15왕자의 마차를 타고 그곳을 나왔지. 소심하다고? 소심한 놈이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독살하고 어린아이와 여인들이 가득한 성을 내걸고 내기를 할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자휼이 말을 하지 못하자 마류가 대신 말해준다. “자례가 소심하다고 생각하는 네 생각자체가 네가 그아이에게 원하는 것임을 모르겠는가?” “자네의 아우는 소심하지 않아. 오히려 위험할정도로 날카로워. 그래서 왕씨께서 자네가 아닌 자례를 황성으로 보내신것이겠지. 황성에서는 무딘 검이 들어가봤자 얼마못가 동강나 버리니까 말이야.” 약간 실소를 띠며 후소가 이어준다. 자신을 비유하는 말에 울컥한 자휼이 애써 화를 참고 묻는다. “무딘 검이라니요.” “자네는 지금 누가 제일 밉나?” “....” “지금 눈앞에서 웃고 있는 나인가? 아니면 자네말대로 움직이지 않는 아우? 아니면 자네를 협박하는 5왕자? 자네는 지금 가장 분노해야 할 대상을 잊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자넨 무뎌.” “그런...” “자네 동생은 목래를, 자신이 일궈온 터전을 재로 만든 장본인에게 칼을 들이대기 위해서 황궁으로 들어갔음이 분명하다. 밀명은 그 후의 일이겠지. 그 장본인이 누구인지 알겠나?” “알고 있습니다.” 사람을 깔보는 듯한 그 한족왕자의 얼굴이 떠올라 속이 미식거린다. 그러고 보니 정말로 자신은 한동안 그를 잊고 있었다. 화를 내면서도 목래의 일을 분통해하면서도 서서히 분노가 가라앉고 있었던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는 것은 그런것이다. 분노에 몸을 떨다가도 차츰 사라지고 다른 고민이 자리잡기 때문이야. 그것은 몸에 닿는 절실함이 점점 사라져가기 때문이지. 하지만 자네 동생은 달라. 가슴을 앓고 있는 자네 동생에겐 남은 시간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 그 시간안에 할수 있는 것이라고는 자신이 이루어온 것을 불태운 그자에 대한 복수겠지.” “아아...” “하지만 자네 역시 잊지 않는 절실함이 있어. 그것이 앞서 말한 자네 아우에 대한 자네의 소유욕이다. 하지만 지금 그것은 자네나 자례에게 있어 위험만 늘일뿐이야. 자네가 무디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나?” “예. 하지만, 이이상 무뎌지는 일은 없을 겁니다.” “당연하지.” 후소가 어깨를 으쓱했다. “왕씨의 명을 받아 유견님의 뒤를 이어 내가 자네를 교육시킬것이다. 미리 말하지만 난 만만치 않다.” 123 1왕자가 죽고나서 비어버린 남파궁(태자의 궁)이 2왕자에게 돌아갔다하지만 실제로 4왕자가 있는 서교궁이 왕자들이 사는 궁중에서 가장 화려한 궁전이였다. 오히려 다른 궁보다는 매우 작은 크기였지만 황궁에서 보기 힘든 정원도 있는 잘 꾸며진 곳이였다. 정원이라고 해보았자 서너평도 안되는 작은 화단이였지만 그것조차 가지고 있는 궁은 드물었다. 태진의 궁 역시 정원과 연못은 꿈도 못꾸는 곳이였기에 태진은 레이첸을 만나기 위해 서교궁으로 들어오면 한번씩 들러보고는 헀다. 서교궁의 화단을 가꾸는 사람은 레이첸이 아닌 태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였다. 입춘이라 혹시 새로운 싹을 볼수 있을까 싶어 태진은 이것 저것 일을 마치고 서교궁으로 들어와 화단을 꼼꼼히 살펴보고 있었다. “땅에 뭐 흘렸냐? 뭘 그리 꼼꼼히 보는 거냐?” “싹이 났을까 했지요. 형님.” “나원, 그렇게 마음에 들면 그 화단 퍼가라니까?” “14왕자의 신분으로 감히 4왕자의 화단을 퍼가란 말씀입니까?” 태진은 빙그래 웃으며 레이첸의 곁으로 다가와 함께 걸었다. “아직도 화선부인과 사이가 좋지 않습니까?” “당연하지. 생일인데 문안도 오지 않았다니까.” “화선부인이 문안을 오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정비가 아닌 세부이니까요.” “아, 그랬지.” “어차피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 이제 그만 화선부인을 정비로 맞아들이시지요.” “글쎄.” 생각외로 뚱한 레이첸의 태도에 이번엔 태진이 놀랬다. “어째서요?” “소처도 임신을 했다.” “소처라면...그 비빈? 아직도 만나고 계셨습니까?” “당연하지. 화선이 만나주지 않는데 누구랑 밤을 보내냐? 아무튼 그녀도 임신을 했다는군. 그렇다면 기다려볼만하지 않나?” “무슨?” “아들을 낳는 여인을 부인으로 맞이할거다. 당연하지 않는가? 후계자의 어머니가 정비여야만 불화가 생기지 않는다.” “뭔가 반대로군요. 부인에게서 후계자를 얻는 것이 도리입니다. 형님의 말씀은 정부인이 여럿 있을때 가능한 것이 아닙니까? 한명은 비빈의 미천한 여인이고 한명은 황제가 추천한 고관의 외동딸입니다. 누가 정비가 되는지는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네 말이 맞아. 하지만 태진, 만약 화선이 딸을 낳고 세부가 아들을 낳는다면 어찌될까?” “예?” “아마도 화선은 참지 못할것이다. 세부를 가만두지 않을거야. 그리고 나서 세부의 아들까지 죽이겠지. 하지만 나는 화선이 낳은 아이나 세부가 낳은 아이에게도 아버지다. 그러니 둘다 살아남게 할 생각을 할수 밖에.” 그말에 태진이 풋하고 미소짓는다. “형님은 여인들을 너무 쉽게 보시는군요. 그 버릇 나쁩니다. 여인이란 황제의 배위에도 탈수 있는 유일한 자라 했습니다. 제 생각에는 화선부인이 아들을 낳는다면 형님은 즉시 세부를 버리시는 것이 좋을겁니다. 화선이 딸을 낳는다 한들 그녀를 부인으로 올리지 않는다면 형님은 그녀의 아버지에게서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할테니까요.” “화선이 딸을 낳고 세부가 아들을 낳는다면 어차피 내가 죽고나서 형세는 뒤박인다. 그럴바에는...” “그럴바에는 세부를 없애버리고 평생 화선부인외에게서 후사를 얻지 않으면 해결되는 일이 아닙니까. 뭐, 형님의 성격상 그게 힘든 일이겠지만.” “너 날 놀리는거냐!” 하지만 그다지 기분 나쁜 표정이 아닌 것 같아 태진이 또 묻는다. “오늘 무슨 좋은 일이라도?” “생일이잖아. 오후에 연회도 있고. 술잔치가 있다는데 안좋은가?” “흐음. 그것이 아닌 것 같은데요. 혹시 화선부인이 서신이라도 올린 것이 아닙니까?” “그녀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여인인 것 같은가?” “그런가요.” “그래. 아참. 방금 생각났는데 연회를 파하는 시간을 좀 앞당겼으면 한다.” “어차피 입춘이라 자시(오후 11시30분∼오전 1시30분)가 되기 전에 파할것인데요.” “아니 내 생각에는 한... 술시(오후 7시30분∼오후 9시30분)정도에 끝냈으면 좋겠다.” “아니 형님, 연회란 유시(오후 5시30분∼오후 7시30분)에 시작하여 자시(오후 11시30분∼오전 1시30분)가 되면 끝나는 것이 통념입니다. 그런데 유시에 시작하는 연회를 술시에 끝내다니요!” “아 내 생일연회니까 끝내라면 끝내!” “안되는 말씀.” 태진의 단호한 대답에 졌다는 듯 레이첸이 말을 돌렸다. “그럼 술시까지 하되, 난 한시간 정도 자리를 비울 예정이니 네가 잘 처리해야 한다.” “누굴 만나시려고요?” “...내가 누굴만나려고 하는지 네가 어떻게 아느냐?‘ “그럼 형님이 이 밤중에 공부라도 하러 들어간다는 말씀입니까? 뻔히 누구를 만나러 가는 것이 아닙니까.” 너무나 당연한말에 레이첸도 잠시 수긍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단호하게 말하고는 얼른 도망친다. “어쨌던 난 잠시 비울것이다.” “아아, 멀리 가지 말아요. 이제 세시간 후면 연회가 시작된단 말씀입니다!” 익은 하품을 하면서 방안을 정리했다. 보기보다 깔끔한 성격인지 빠른 손놀림에 정신없던 방이 순식간에 정리된다. 차곡차곡 폐지를 접어 상자에 넣고 책들을 작은 책장에 껴 넣는다. 화분에 물을 주고 시종에게 찻물을 떠오게 한후 환기를 시키고 문을 닫는다. 뜨거운 찻물이 들어오자 차를 타고는 탁자에 앉아 피곤한 몸을 쉰다. 타탁거리는 소리가 들리며 낯익은 발소리가 들려온다. “익공 먼저 들어오셨군요.” “응.” 빙긋 웃으며 동기를 맞이한다. 가지고 온 책을 내려놓는 자례를 모습을 이곳저곳 보고는 일어나 기지게를 핀다. “어흠. 난 먼저 잔다.” “벌써요?” “응. 조금 피곤해.” “아참, 그런데 말이죠.” “뭘?” “어제 제가 여기서 자고 있었나요? 제 기억에는...” 머뭇거리는 모습에 익은 장난기가 돈다. “무슨 소리야. 네가 새벽에 들어와 놓고는.” “제가 들어왔나요?” “그래. 새벽에 춥다고 투덜거리면서 호랑이를 데리고 들어와서 잔게 누군데 그래. 덕에 나는 선잠을 잤다고.” 투덜투덜 대는 익에게 자례가 굉장히 미안한 표정을 짓는다. “미안해요. 호랑이 때문에 밖에서 있었던건데... 내가 들어왔었군요.” “...호랑이 때문에?” “익공이 호랑이를 너무 무서워하니까요. 하지만 이상하네. 전혀 기억이 없다니...” 고개를 갸웃하는 자례를 뒤로 하고 익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피식 웃으며 잠을 청한다. 좀더 생각해보던 자례에게 마기의 시종이 찾아와 저녁을 초대했기에 그일은 잊혀지고 말았다. “이런, 역시 소용부인이군요.” “부럽지? 부러우면 어서 좋은 여인과 인연을 맺으라고.” 조금은 이른 저녁이였지만 두 사람은 탁자에 찬합을 마주한체 앉아 젓가락을 들었다. 아저씨와 조카와의 식사인지라 시종들은 밖으로 나가 있었다. 아무말 없이 조금씩 식사를 하던 둘은 엿듣고 있는 자가 없다는 것을 확신한후에야 입을 열었다. “그뒤로 2왕자와는 어찌 되었나?” “만날일이 없었습니다.” “다행이군. 다른 일은 없었고?” “4왕자와 차를 마실예정입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4왕자 생일이군. 언제지? 그와는 언제 친분이 생긴건가?” “친분정도는 아닙니다. 내일만나기로 했습니다.” 자례는 마기에게 4왕자와의 일을 이야기 하지않기로 했다.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 보통 궁안의 연회란 자정을 넘겨서 끝나게 된다네. 연회가 있는 날의 약속은 정확해야하네. 우리는 자시가 지나면 날이 지나갔다하지만 황궁이나 특히 한족들은 연회 다음날의 약속이란 연회가 끝나는 시간의 약속을 말하기도 하거든.” “그렇습니까?” “오늘밤은 그를 기다려보는게 좋아. 그리고 다른 것은?” “없습니다. 단지 밀명을 실행하기에 긴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 걱정이 되는군요.” “왜?” “...시간은 무한하지 않으니까요.” “...” 시선을 피하는 자례의 모습에 마기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여관에게서 이미 그에대해 들은 상태라 병이 중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저렇게 자신이 죽을 시간을 재듯한 태도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괜찮습니다.” “뭐?” “제 병에 대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죽을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시간이 제한되어 있다면 그 안에 꼭 이룰려 애쓰는 것뿐입니다.” “...그래.” “맛있군요. 황궁의 음식에 도저히 적응을 하지 못해서 고생하고 있었거든요.” “잘됐군.” 활짝 웃어보이는 자례의 표정에 진심이 담겨 있어 마기는 같이 미소지었다. 정말로 맛있었던지 한공기를 깨끗하게 비운 자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차도 마시고 가지.” “아닙니다. 사람들의 눈도 있고 하니... 이만 일어나지요. 소용부인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해주십시오.” “그래. 참. 경마제가 끝나면 비서랑들이 휴가를 간다지. 그때 자네가 나가게 되면 소용에게 가야하네.” “알고 있습니다.” 마기는 일어난 자례에게 작은 주머니에서 마른 콩을 조금 꺼내 쥐어주었다. “하지만 이 풍습은...” “길에 가다 뿌리면 누가 알겠나? 어차피 황궁의 돌길에 오늘 내일사이 부셔질텐데.” “그럼 그럴까요.” 순순히 콩을 쥐고 나가는 자례는 보며 마기는 웃음지었다. 124 마기의 궁에서 나온 자례는 곧바로 학고청으로 향했다. 비록 승락을 하지 않았다고 하나 육관이 와서 기다릴 것 같아 무심히 지나칠 수 없었다. 날이 어둑어둑 해지는 학고청은 으쓸한 기운을 느끼게 한다. 달이 뜨긴 이르고 해는 완전히 진 시간이라 어둑어둑해 조심조심 걷는다. “늦었군.” 학고청의 창고마루에 조각처럼 육관이 미동도 하지 않고 앉아있었다. 그는 팔짱을 끼고 작은 등불을 옆에 놓은체 종이가 펄럭이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자례는 그 등불에 의지해 육관가까이 다가갔다.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글쎄. 나오기는 좀 되었지만 호랑이를 잡으러 나온것이라 오래 기다렸다고 하긴 그렇군.” “또 도망갔나요?” “아마도 이 근처를 어슬렁 대고 있을것이다. 그런데 내가 이곳에 앉아있다는 것을 아는건지 나오지 않는군.” 뚱하게 말한 육관은 종이바다만을 노려본다. 어디선가 호랑이가 튀어나오면 바로 달려들 기세다. 자례는 그 모습을 보고 작게 웃었다. 기분나쁘다는 듯 그가 묻는다. “왜 웃지?” “죄송합니다. 그런데 어째서 길을 막지는 않으시는 겁니까?” “뭐?” “호랑이가 계속 이곳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면 우리의 어느곳이 뚫려 있다는 것이 아닌지요. 그러니 그것을 확인해 본다면 호랑이가 다시 도망오지 않지 않겠습니까?” “누군 그러고 싶지 않아서 그러는줄 아는가? 하지만 그 궁에 손을 댈수가 없으니까 이러는 것이지.” 육관은 퉁명스럽게 말하며 일어난다. 문득 바스락 거리는 소리에 둘다 뒤를 돌아보고는 외친다. “호랑이!” “잡아라!” 뚱둥한 몸에 비하지 않게 빠른 걸음으로 육관이 호랑이에게 달려든다. 하지만 잽싼 호랑이는 손쉽게 빠져나와 다른곳으로 도망간다. 어찌할지 모르고 서 있는 자례에게 육관이 화를 내었다. “잡으란 말이다!” “아, 예!” 호랑이에게 뛰어가나 호랑이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자신과 놀아주려는 것으로 생각했는지 좋다는 표정을 지으며 종이 바다속으로 뛰어들어간다. 종이바다를 앞에 두고 자례는 잠시 멈칫한다. 달도 안뜬 상태, 이 속에서 길을 잃는다면 내일 아침까지 나오지 못할지 몰랐다. “으아악!” “예?” 육관이 화난 듯 소리지르며 종이바다속으로 뛰어들어갔다. 너무나 순식간의 일이라 말리지도 못했다. 잠시 안절부절하며 고민하다가 종이속에서 육관의 화난 목소리에 결국 종이바다속으로 들어간다. 카랑카랑하는 종잇날이 비켜가는 소리가 요란했다. 역시나 기분 좋은 곳은 아니다. 상처가 생기지 않도록 조심하며 육관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다가간다. 바람이 늘씬하게 늘어진 순백의 칼날을 치고지나간다. “앗!” 순식간에 치고 나간 순백의 날에 뺨에 실같이 가늘고 긴 상처가 생겨난다. 조금씩 피가 흐르는 것을 느끼고 짧은 소매자락을 올려 뺨을 누른다. 얼마 가지 않아 피가 멈춘다. 다행이라 생각하고 다시 육관을 따라가기 위해 귀를 기울였을 때는 이미 주위는 고요했다. 이런. 사방이 또다시 종이로 막혀 있다. 바람소리와 종이가 날리는 소리가 요란할뿐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 갇혔나. 하늘을 올려다 보지만 아직 달이 뜨지 않았다. 초조한 기분에 몇걸음 더 걸어가다가 멈추고 만다. 더 헤멜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였다. 손을 뻗어 눈앞에 가려진 종이를 밀친다. 줄에 널린 부분이 구겨지며 접혀진다. 낭관에게 들키면 혼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지나간 길을 표시하기 위해 한쪽으로만 걸으며 계속 종이를 밀쳐 길을 만든다. 하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다. 이 종이 바다는 얼마나 큰 것일까. 어둠속에서 이리저리 귀를 기울이다. 특이한 발자국소리를 듣고 난해해 한다. 발은 가벼우면서도 몸은 무거운 발자국소리다. 동물의 소리야. 그렇다면 호랑이인가. 오히려 육관보다는 반갑다는 생각이 나 소리가 나는 쪽으로 걸어간다. 다가갈수록 발자국 소리가 커진다. 갑자기 등을 치는 생각에 걸음을 멈춘다. 어린 호랑이가 이렇게 큰 발자국 소리가 날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스치자 마자 등골이 오싹하다. 천천히 뒤로 걸어 발자국에서 멀어지려고 한다. 하지만 앞에 있는 그것은 자신의 발소리를 들었는지 더 앞으로 다가온다. 잘못들은건가. 내가 과민반응을 하는 것은 아닐까. 새끼 호랑이일지도 몰라. 얼굴을 땅에 대고 간신히 보이는 종이틈으로 둘러본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걸어오는 커다란 호랑이 발을 본다. 얼른 몸을 일으켜 조용히 뒤로 물러난다. 소리없이 물러나도 종이가 펄럭이는 소리가 요란하기 때문에 자신의 소리가 지워질거라는 생각이 들어 속도를 올려 앞으로 뛰어간다. 크릉. 앳된 호랑이가 아닌 맹수로 성장을 끝낸 그 소리에 역시나 고개가 뒤로 돌려진다. 아직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 자신의 뒤를 쫓고 있는 듯 종이가 갈라지는 소리가 요란하다. 맙소사. 정말 위험하잖아 이거. 입궁해서 처음으로 진심어린 달리기를 한다. 레이첸이 따라붙을때 간혹 뛰긴했지만 진심으로 달리는 것은 이것이 처음이였다. 타닥타닥거리며 돌바닥에 맹수의 발톱이 울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온다. 정말 위험해. 방향을 바꾼다. 한참을 달려보지만 끝은 보이지 않는다. 등뒤로 타닥타닥하는 발걸음 소리는 점점 다가오는데 머릿속에 딱히 이 상황을 넘길수 있는 방법은 떠오르지 않는다. 상대가 인간의 말을 알아들어야 협상이나 타협이라도 할것이 아닌가. 날리는 종이들 사이로 누런색의 거대한 몸집이 다가오는 게 보인다. 앞으로 달려가도 딱히 도망칠구석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자 더 이상 도망치지 않는다. 달려서 지쳐 잡혀먹을 것이라면 차라리 힘이 남아있을때 저항이라도 해보겠다. 맹수를 상대로 터문이 없는 생각이지만 어차피 달려보았자 잡힐것이 뻔하다. 자객도, 독도 아닌 맹수에게 물려죽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웃음이 나온다. 무슨 말인가. 이렇게 턱없이 죽을수도 있구나. 황궁과는 전혀 상관없는 맹수의 밥으로 인생을 마친다라. 얼굴을 웃지만 몸은 긴장되어서 뻣뻣하게 굳는다. 긴장하고 앞으로 다가오는 그것을 노려본다.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저 멀리 종이가 갈라지는 소리에 몸을 떤다. 눈 앞에 잔 흉터가 가득한 손이 불쑥 내밀어진다. 너무도 놀라 악 소리를 지르며 뒤로 넘어진다. 바로 옆의 종이를 가르고 육관이 나온다. 한손에는 새끼 호랑이를 역시 대롱대롱 흔들리게 잡은 상태다. 육관은 넘어진 자례를 내려다보며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을 짓는다. “귀신이라도 보았는가?” “호랑이가 한 마리 더 있습니다.” “응? 역시 그놈도 이쪽으로 왔는가.” “예?” “여기서 나가야 한다. 놈은 사나워. 조련도 안된 놈이라 힘들다.” 육관이 등을 돌려 따라오라는 듯 천천히 걸어간다. 일어나려고 하지만 몹시 긴장했던 것이 순간적으로 풀려서인지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육관은 한심하다는 듯 그 모습을 보다가 다시 손을 내밀어 옷자락을 내린다. “잡아라.” “감사합니다.” 길게 내려진 옷자락을 잡자 육관이 손을 들어 아이를 일으킨다. 일어선후에도 후들거리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고는 앞서 성큼 성큼 걷는다. 얼마 가지도 않아 떨리는 손에서 옷자락이 미끄러져 버린다. 아차하는 느낌이들지만 눈을 크게 뜨고 육관을 놓치지 않도록 따라간다. 문득 자신의 아래에 그림자가 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달이 떴다. 충만한 노란빛이 아닌 앙상한 해골을 연상시키는 허연 달이 종이위로 높이 올라 자신을 비웃는다. 오싹한 느낌에 걸음을 멈추고 두 팔로 자신을 부여잡는다. 불길한 달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을때, 꼭 저런 달을 보았다고 자휼이 말했었다. 그래서 그런지 자휼은 하얀 달을 보는 것을 꺼리는 눈치였다. 말하지는 않았지만 다시한번 저 창백한 달이 뜬다면 이번엔 자신을 잃을것이라는 예감이였을 것이다. 난 정말 여기서 죽는가? “바보같은놈.” 자신의 차가운 손을 따뜻하고 투박한 손이 잡는다. 그리고 세게 잡아당겨 더 이상 더 창백한 달을 보지 못하도록 걸음을 옮긴다. “힌 달을 보고 얼어붙어버리다니 어린 놈이구나. 미신 따위에 좌지 우지 되다니 웃긴 농이로다. 정신차려라. 호랑이가 따라온다. 어서 나가야 한단 말이다.” “...예.” “그러고 보니...어느 혈족은 저 힌달을 보면 재앙이 생긴다 여기며 불길해 했다하지? 붉은 달이 보이면 천재지변이 일어나고 말이다.” “....그렇습니까.” “정안족이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 미신에 불과하다. 믿지 않아도 된다.” “예.” 한손엔 대롱대롱 호랑이가 매달려가고 한손에는 하얀 달의 공포에 질린 아이를 끌고 육관은 종이의 바다를 헤쳐간다. 125 육관도 길을 찾기는 어려웠다. 둘은 다가오는 호랑이 발자국 소리에 잠시 서로를 마주보았다. 자례가 대롱대롱 매달린 호랑이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 호랑이는 매번 이곳으로 들어오니 아마도 이곳을 나갈 길을 알지 않을까요?” “이 놈이 왔다 갔다하는 곳은 개구멍이 분명해.” “그렇다면 육관께서는 어디로 오셨습니까? 서관을 통한 길을 지나 학고청으로 오신 것은 아닌 것 같은데요.” “나야, 이곳으로 통하는 담을 통해서...” “호랑이를 놓아주십쇼. 담으로 인도해줄지 모릅니다.” 다급한 마음에 그렇게 말은 했지만 사실 마음속으로는 호랑이 혼자 도망가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육관은 잠시 망설였지만 호랑이를 놓아주었고 호랑이는 바로 앞으로 달려 뛰어도망가기 시작했다. 둘은 그 호랑이의 뒤를 따라 뛰어간다. 처음 자례가 흰 달에 놀랐을때는 육관이 그를 끌고 갔지만 다급해지자 반대가 되어버린다. 정신이 날카로와진 자례가 오랜 달리기에 힘들어하는 육관을 끌고 뛴다. 비대한 몸에 힘든 듯 헉헉거리는 육관의 손은 거칠고 커서 손을 잡고 뛴다는 것이 여간 힘들지 않다. 얼마 뛰지도 않아 다행히 호랑이가 사라지는 쪽에 담이 보여 모두 안도한다. 자례가 담에 다가갔지만 이 담은 얼핏보아도 높이가 사람의 세배는 넘는 것이 몸이 가벼운 자신이라 해도 뛰어넘을 높이가 아니다. “이 담을 어떻게 넘어오셨습니까?” “누가 넘어왔다고 했느냐. 비켜라.” 이리저리 담을 만지던 육관은 한쪽 벽을 힘껏 밀친다. 놀랍게도 벽은 빙글 돌아가며 사람이 지나갈만한 충분한 공간을 만든다. “비밀문?” “황궁이니까. 어느 담에나 이정도의 출구는 있기 마련이다. 나와라.” 육관이 문을 나가자 따라 나간다. 그리고 또 놀란다. 담보다는 낯은 높이의 담들이 빽빽하게 질러있었다. 육관이 다시 옷자락을 내밀고 그것을 잡자 앞으로 걸어간다. 보이는 것처럼 미로였다. 옆으로 앞으로 수많은 길을 지나 좁은 길을 지나간다. 담은 수리되어 있지 않아 지저분했다. 추측하건데 아마도 이길은 황제나 고관들의 중요한 인물들이 난을 만나 황성을 탈출할 때 사용하는 비밀문이 분명했다. 서관은 황궁의 외벽에 가장 가까운 궁이였다. 확실히 난을 만나 탈출할 때 가장 빠른 곳으로 이렇게 비밀길을 깔아 놓았던 것이다. 지방의 강한 호족이나 오래된 성에서는 흔히 볼수 있는 미로였지만 최고의 보호를 받고 있는 황성에도 이런 길이 있다는 것이 뭔가 이질적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육관이 잠시 멈칫하며 말한다. “저 호랑이놈, 저 앞에 있군. 정말로 학고청에서 이쪽으로 구멍이라도 났나.” “잡으셔야죠.” “그래.” 두사람은 앞에서 어슬렁 거리는 호랑이를 잡기 위해 다시 빠르게 걸어간다. 뛰고 싶지만 자례마저 답답하다고 느끼는 좁은 길이라 육관의 비대한 몸이 벽에 걸려 빠져나가기 쉽지 않다. 한참을 고생해서 호랑이를 막다른 길에 몰아넣은 둘은 호랑이를 전리품처럼 잡아 들었다. 잡힌 것이 분한듯, 아니라면 이 모두가 재미있다는 듯 호랑이는 가릉거린다. 터덜터덜 걸어 미로의 끝까지 나오자 역시 벽으로 막혀있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벽을 밀어 문을 만든후 나간다. 그곳을 나오니 작은 도랑이 흐르는 좁은 통로가 보인다. 흘러가는 물색이 무척이나 더럽다. 이곳은 황성의 물을 내보내는 하수구정도 되는 것 같았다. 도랑을 훌쩍 건너뛰어 맞은편의 담을 돌아간다. 그 담은 처음 보는 형식의 회벽색벽돌로 쌓인 담이였다. 꽤나 높다. 사람의 열배는 충분히 넘을 정도다. 황성안의 담이라고 하기보다는 내성이라고 해도 될정도의 높이다. 끝이 안보이는 담을 돌아가다 자례는 걸음을 멈추었다. 육관이 묻는다. “왜?” “이만 가보겠습니다.” “왜?” “그야, 이곳은...제 신분으로 들어와서는 안될곳 같기 때문에...” “호랑이를 잡아준 상을 내린다고 했다. 따라와라.” "하지만..." "뺨에 상처가 났다." "아...별것 아닙니다." 역시 대답을 듣지 않고 앞서가는 육관의 모습에 잠시 망설인다. 떠오른 것은 레이첸과의 약속이였다. 생일날에 초대하겠다고 말한 레이첸이 떠오른 것이였다. 물론 자신은 다음날이라고는 했지만 마기가 말해준 한족은 연회 다음날 약속을 연회 끝난후의 약속으로 치기도 한다는 말에 고민하고 만것이다. 자례는 이곳이 어디인지 알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방향조차 가늠할 수가 없었다. 아마도 미로속에서 헤멘탓이였을것이다. 혼자서 성각헌으로 돌아가는 것은 무리라는 것을 알자 육관을 따라간다. 그 이후 육관은 한참을 더 걸어가고는 역시 담을 통한 비밀문을 열었다. 그리고 자례가 들어가길 기다린다. 못내 망설이다가 눈을 부릅뜨고 소리없이 화를 내는 육관의 눈쌀에 밀려 먼저 들어간다. 그리고 그 기분좋은 비릿한 풀내에 놀란다. “나무가...” “따라와라.” 돌담안으로 들어간 곳은 정원이였다. 정식 정원은 아니였고 그냥 작은 사철나무가 빽빽하게 가로수처럼 들어선 돌길이였지만 간만에 보는 푸른 나무라 자례에게는 무척이라 아름답게 보였다. 둘은 돌길이 끝나는 곳까지 걸어갔다. 발밑에 밟히는 땅이 단단한 돌이 아닌 풀과 모래로 푹신한 느낌이 들자 아래를 내려본다. 돌길이 끝났다. 그리고 곧 숲이라 해도 믿을만한 장소가 나타났다. 돌과 기와로 만들어진 황성에 이런 곳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할정도로 자연스러운 숲이였다. 놀라움에 이리저리 둘러보지만 나뭇잎사이를 날아다니는 나방이나 이슬이 맺힌 거미마저 그 형태가 자연스럽다. “이런 곳이 있었다니...” 자례는 이곳으로 들어오기 위해 통과했던 높은 담을 생각했다. 아마도 이 높은 담이 이 안의 숲을 가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육관은 손에 들고 있었던 호랑이를 내려놓았다. 호랑이는 냉큼 뛰어 숲안으로 들어가 사라져버린다. 육관은 멍하니 숲안을 둘러보던 자례에게 다가가 말했다. “상으로 하나 가져가게 해주지.” “예?” 육관은 아무말 없이 숲을 바라본다. 숲안에 있는 무엇인가를 준다는 이야기같았다. “원하는 꽃이 있다면 가져가라.” “아아...그래도 괜찮겠습니까?” “두 말 하지 않는다.” 퉁명스러운 말에도 더 이상 그가 두렵거나 무섭지 않는다.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노인의 표정은 때아닌 호의에 쑥쓰러워 할것이라 짐작된다. 자례는 육관과 함께 숲으로 들어가며 이리저리 두리번 거렸다. 더 깊이 들어갈 것도 없이 자례는 근처의 한 나무밑에 있는 작은 풀을 가리키며 육관에게 물었다. “저것을 가져가도 됩니까?” 육관은 자례가 가리킨 것을 보고는 실소했다. 그것은 손바닥만한 풀이였다. 자세히 가서 들여다 보니 상추같은 연녹색의 풀이 보이고 연자주색의 꽃송이가 보인다. “저 안쪽에는 서역에서 들여온 희귀한 란이 잔뜩하다.” “아뇨. 이것이면 됐습니다.” “가저라.” 자례는 품안에서 손수건을 꺼내들었다. 조심조심 맨손에 닿지 않도록 뿌리체 그것을 뽑는다. “감사합니다.” “이해할수 없군.” “늦었군요. 죄송하지만 제가 어느길로 가야하는지 알려주시겠습니까?” “나온 길로 돌아나가면 된다.” 정말로 무책임한 말이지만 자례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등을 천천히 돌려 물러서는데 육관이 천천히 따라나와 하늘을 올려다 본다. 창백한 달이 떠있다. “서라.” “예?” “아직도 창백한 달이 두려운가?” “...아니요.” 자례는 흘러내린 머리를 귀뒤로 넘겼다. “그것은 정안족이 믿는 미신에 불과합니다. 한족인 저로서는 이해하기 힘듭니다.” “...돌아가라.” 고개를 숙이고는 그곳을 빠져나온다. 돌길을 걸어가 예의 그 벽이 나오자 힘껏 밀친다. 생각보다 뻑뻑해 애를 먹었지만 다행히 열고는 담을 넘는다. 담 다음에는 수로다. 수로를 건너 뛴다. 그 후에는 벽을 통과해 학고청의 종이바다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자례는 여기서 잠시 망설였다. 아직도 학고청에는 호랑이가 어슬렁 거리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이담을 건너서는 안된다. “큰일이군. 4왕자가 학고청에서 날 기다릴지도 모르는데.” 일단 학고청의 담을 돌아달린다. 한참을 뛰어가자 학고청의 끝이 보인다. “서라!” “...?” “누구냐?” 서넛의 병사들이 다가온다. 자례는 걸음을 멈추고 그들을 기다렸다. 성안을 순시하는 병사들인 듯 했다. 성 외각의 병사와는 다른 늠름함과 강함이 전신에서 풍겨온다. “이런 늦은 시간에 돌아다니다니 임명증을 보여주시오.” “예.” 손목안쪽의 주머니에서 임명증을 꺼낸다. 병사들은 그것을 꼼꼼히 확인하고는 자례에게 말했다. “입관한지 얼마 안된 비서랑이군. 이런 늦은 시간엔 황궁을 돌아다니는 것은 야패(夜佩)을 받은 환관과 시종들 뿐이요. 야패를 가지고 계시오?” “아닙니다.” “이 일은 낭관에게 전해질것이오. 임명증은 낭관에게서 받아가시오. 우리가 당신이 성각헌에 들어가는 것을 보겠소.” 낭관에게 입명장에 간다는 말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일단 그들이 성각헌까지 함께 간다는 말에 안심한다. 적어도 그들이라면 성각헌까지 안내해줄수 있을것이다. 병사들은 늦은 밤을 생각해서인지 담을 돌아 성각헌으로 들어가지 않고 학고청을 가로질러 성각헌으로 갈생각인 것 같았다. 잘됐군. 4왕자가 와있는지 확인할수 있겠어. 호랑이는 걱정되지만 일단 무기를 지닌 서넛의 병사들과 함께라 생각하니 안심이 된다. 학고청의 창고 마루에는 아무도 없었다. 내심 안심하고 지나친다. 하지만 학고청의 문앞에 기대 서있는 그림자를 본순간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쉰다. “늦잖아.” 레이첸은 툭하고 잔을 내려놓는다. 혼자서 마시고 있었던 듯했다. 병사들이 레이첸에게 다가가 말한다. “입명장을 보여주시오.” “안그래도 그럴려고 했다.” 레이첸은 팔목에서 작은 옥패를 하나 꺼내 던진다. 그것을 받아 읽어본 병사들은 얼른 고개를 숙인다. “서공님께서 이런 늦은 밤중에 이런곳까지 나와계신겁니까?” “약속이 있었다.” “서공님, 왕손이라 한들 야패증이 없는 한 황궁안을 이 늦은 시각에 돌아다니는 것은 안되는 일입니다. 레이첸은 힐끔 자례를 보고는 턱을 괴고 곤란하다는 듯 말한다.. “아아, 그렇다면 자네들이 날 내 대사(왕자의 선생)에게 데리고 갈것인가? 그건 곤란한데.” “하지만 이곳에 계시는것도 안됩니다. 약속이 있으시다면 날이 밝은날 만나시지요.” “좋다. 그렇게 하지. 다음부터다.” 레이첸은 병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놓아라.” “예?” “내 명패. 그리고 이 비서랑의 임명장도 내놓아.” “그러실수는 없습니다. 야간에 나온 관리들에게 야패가 없을경우...” “시끄럽다. 잔소리 말라.” 신경질적으로 레이첸이 말한다. “내가 야패없이 밤중에 돌아다니는 것이 이번이 처음인가? 거의 매일 왔다 갔다 하니 네들 상관도 이젠 날 만나기 지긋지긋해할것이다. 대사역시 늙었으니 이런 잔일로 괴롭히기 싫다. 내가 위험인물도 아니니 여기서 그만 끝내라.” “하지만...” “내놓아라.” 단호한 레이첸의 말에 병사들은 레이첸의 명패를 건내주었으나 자례의 임명장은 주지 않았다. “왜 그것은 건내지 않는가?” “서공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알지만 비서랑은 황제의 관리이니 서공님의 요구는 타당치 못합니다.” 그말에 레이첸이 인상을 쓰며 큰소리치려고 하나 그보다 빨리 자례가 손가락을 들어 입에 가져가 댄다. 말하지 말라는 표시다. 레이첸은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다면 비서랑의 입명패는 가져가도록 하라. 하지만 난 비서랑과 중요한 약속이 있었으니 그는 내가 성각헌으로 돌려보내겠다.” “하지만...” “내 명패를 담보해주겠다. 하지만 그 이상을 바란다면 나를 우롱하는 처사로 생각하지.” 말은 곱지만 그 눈빛은 매서워 병사들은 이쯤에서 물러나기로 했다. 4왕자는 어릴적부터 말썽장이에 난폭한 성질이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였다. 결국 자례는 레이첸에게 인도되었다. 병사들이 학고청을 나가자 레이첸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무슨 짓이냐. 이렇게 늦어서야 쓰겠냐?” “많이 기다리셨습니까?” “그래. 얼마나 기다렸냐면 태진놈이 내 상대를 기다리다 내가 퇴짜 맞았다 생각하고 돌아갔을 정도다.” “...태진?” “아아...내 아우다. 아까 내가 누굴 만나는지 궁금해서 저쪽에서 몰래 숨어있더라. 뭐, 그런 쪽으론 둔한 놈이라 쉽게 알아챘지만.” “아우?” “음. 내가 개인적으로 아끼는 아우지. 14왕자. 호는 태진. 자는 마반(摩泮). 자 그대로 머리를 쓰는 놈이지.” 레이첸은 자례가 늦은 것에 대해 투정을 부렸지만 자례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방심했다. 4왕자의 곁에는 항상 14왕자가 맴돌고 있었다는 것을 잊고 있었어. 창백한 달이 자신을 비웃는 듯 흔들린다. 흔들리는 달빛에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그림자가 그 생존의 갈피를잡지 못하고 주인의 몸에서 몸부림 친다. 126 레이첸은 힐끔 맞은편에 단정하게 앉아있는 자례의 얼굴을 눈여겨 보았다. 가느다랗게 뺨에 난 상처에서 더 이상 피는 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가 물어보았지만 종이에 베인것이라 말한후 더 이상 말이 없다. 잘못본것이였나. 정말 굉장히 창백했는데. 하지만 단정한 자세로 앉아있는 지금은 너무도 태연하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방울 안나올것 같은 표정이다. 푱하는 소리가 들리며 금잉어들이 헤험치는 소리가 들린다. 학고청에 호랑이가 있다는 말에 서관뒤편에 있는 작은 정자로 자리를 옮긴 상태였다. 적막을 지운 그소리에 힘입어 레이첸이 입을 연다. “너 정말 괜찮냐?‘ “무슨말씀이신지?” “많이 마신 듯 하다.” “...서공께서요?” “...건방지다.” 레이첸은 술잔을 내려놓았다. 자례가 술병을 들어 잔을 채워준다. 자례역시 잔을 내려놓고 스스로 잔을 채운다. 아무렇지 않게 잔을 비우는 자례를 보고 레이첸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이미 상당히 마신상태였다. 황궁안의 술꾼인 자신이 취기가 오르고 있는데 앞에 앉은 이 작은 꼬마는 도저히 취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술배에 자존심을 운운한다면 어리석은 일이겠지만 이 작은 꼬마보다 술에 약하다는 것을 인정하기가 싫다. 레이첸은 오기로 잔을 비우고 술병을 들었다. “내가 따라주지.” “아닙니다.” “됐다.” 레이첸은 자례의 잔을 가득채우고 자신의 잔에는 반잔만 채웠다. 어찌되었건 저쪽먼저 물러나게 만들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십여잔을 넘게 비웠지만 자례는 취하지 않는다. 안주도 없이 이 독한 매화주에도 꿈쩍을 하지 않는 꼬마가 슬슬 괴물로 보이기 시작한다. “취하시는 겁니까?” “그럴 리가 없다!” 명백히 혀가 꼬이는 목소리를 느끼면서도 부정한다. 자례는 살짝 미소짓고는 술병을 들어 자신의 잔만 채워 들이킨다. 이미 레이첸의 눈은 풀려있는 상태였다. 더 이상 먹였다가는 자신이 레이첸을 들어다가 그의 궁에 넣어줘야 하는 상황이 생길지도 모른다. 더이상 자신의 잔을 비우지 않는 레이첸을 두고 스스로 잔을 채운 후 작게 한숨을 쉰다. 답답하구나. 다시 한번 잔을 채워 들이킨다. 잘 익은 화주에 알싸하게 목은 쓰리지만 취하지 않는다. 원래 술에 강했던지라 이정도 먹더라도 취하지 않을 것을 알기에 별 부담없이 다시 잔을 채운다. “닮았어...” “예?” “넌 사기 인형을 닮았어.” “사기 인형이라니요.” “넌...예전의 그를 너무나 닮았어.” “예전의 그?” 레이첸은 몸을 길게 늘이며 성각헌의 기둥에 몸을 기댔다. 졸린듯해 보여 자례는 슬슬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한다. “젠장맞을 놈이였지. 생긴 것은 월궁항아보다 예쁜 것이 요사스럽게 사내로 태어났다는 것이 잘못이였다.” “...황제의 총인?” “그래! 그 놈! 나는 그놈이 아주 싫었다.” “왜?” “그 놈이 날 무시했거든!” 다시 잔을 채운다. 레이첸은 이미 많이 취한 상태였다. 가만히 그의 투정을 듣고 있다 문득 황제의 총인에 대해 궁금증이 생긴다. 혈족이란 동일감에서인가. 어차피 이정도 취했다면 이일을 기억할리도 만무해 말또한 편하게 놓는다. “그는 어떻게 죽었지? 정말로 물에 빠져죽었나?” “그래. 황제가 올라탔지. 그것을 못견뎌서 그냥 자살해 버렸다.” “황제가 그를 좋아했나?” “좋아해? 무슨...하하하” 레이첸은 실소한다. “너 개들이 교미하는 것을 보았는가?” “...?” “보면 지독해. 암컷은 수컷을 싫어하지. 암컷은 수컷과는 달리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나?그런데 수컷은 암컷을 품고 싶어한단 말이다. 암컷은 수컷을 피해 계속 도망쳐버려. 그럼 수컷놈이 어떻게 하는지 알고 있나? 암컷을 물어. 목을 물어서 굴복시키지. 그래도 반항하면 암컷은 죽어. 결국 상처입은 암컷을 수컷이 품어버린다. 도망치지 못하게 앞발로 허리를 꽉 잡고 말이야.” “...” “그런데 웃긴 건 목이 잘릴 정도로 반항하던 암컷도 허리를 꽉 잡히면 더 이상 반항하지 않아. 체념이라고 해야할까.” “...” “지금 생각해보면 사기 인형과 황제는 그것과 다를바가 없었다.” “그런가...” 자례는 레이첸의 말을 듣고 자신이 경험한 것을 떠올렸다. 레이첸의 말은 분명 틀린 것이 아니였다. 자신도 분명 그랬으니까. “뭐가 다른걸까?” “응?” “그렇게만 본다면 사람도 짐승과 똑같지 않은가? 다를바가 없어. 체념하고 받아들이면 서로가 편하단 말이다. 그런데 왜 사람은 그렇지 못하지?” 자례는 아무말 없이 자신의 잔을 채웠다. 레이첸이 손을 내밀어 자례의 잔을 빼앗았다. “왜 사기 인형은 체념하지 못했을까?” “잔을 내놓아.” “왜 체념하지 못한거지? 사기 인형은 결국 목을 물려 죽은거야.” “잔을 내놓아.” “네가 생각하기엔 어떤가? 넌 알고 있을 것 아니냐. 왜 그가 자살을 선택해야 했는지 넌 알고 있을거다. 분명 그렇지? 말해다오. 말해줘.” 자례는 자신에게 손을 뻗는 레이첸의 손을 냉정하게 뿌리쳤다. 레이첸이 잔을 돌려주지 않을 것이 분명하자 대신 술병을 든다. 잠시 망설이지만 곧 입을 대고 마셔버린다. “서공.” “싫어. 대답을 해주어야 말해주지.” “당신은 황제가 되고 싶은가?” “황제?” 레이첸은 미친사람처럼 피식피식 웃는다. “난 그딴거 필요없다.” “그래? 그럼 14왕자는 어떤가?” “태진? 그놈이야 황제가 되고 싶겠지. 하지만 그놈은 무리야. 배분이 않좋아.” “다음 황제는 누가 될까?” “당연히 2왕자지. 왜냐면 내가 그렇게 만들거거든.” “그렇군. 서공 당신은 생각외로 욕심이 없군.” “욕심?” 레이첸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자례를 본다. 흔들흔들하는 고개가 똑바로 되더니 자례에게 다가온다. “난 욕심이 많아. 내가 원하는 것은 꼭 가져야만 직성이 풀리지.” “황제는 서공이 원하는 바가 아닌가?” “그 자리는 귀찮기만 하다.” “그럼 욕심을 내고 있는 것은 뭐지?” “그거? 이젠 못가져. 하하하.” 다시 박장대소한다. 갑자기 뚝하니 웃음을 멈춘 레이첸은 멍하니 자례의 손을 바라본다. 달에 홀린듯한 모습에서 날카로움이 비쳐나온다. 슬쩍 입꼬리를 올리며 웃은 레이첸이 자례를 돌아본다. “나는 황제의 사기 인형을 원한다.” “당신은 그를 싫어했다고 하지 않았나?” "그럼! 난 정말 그가 싫어! 그런데 왜 죽었을까? 넌 알지? 응?” “귀찮군.” 자례는 술병에 남은 마지막 술을 마셨다. 이제 그만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응? 왜 죽었을까?” “그는 개가 아니니까.” “응?” “백로에게 들개와 교미할것을 강요한다면 그 상성이 맞지 않아 죽어버리는게 당연한것이 아닌가?” “...무슨 소리 하는거야? 도통 알아듣기 힘들잖아.” “술 잘마셨다. 오래간만에 마시는 술이라 반가웠지.” 자례는 옷자락을 털며 일어났다. 두손을 공손이 모으고 인사한다. “먼저 물러가겠습니다. 서공.” “벌써?” “좋은 밤 보내십시오.” 먼저 등을 돌린다. 몇걸음 걷지 않았는데 누군가 어깨를 잡고 몸을 돌린다. 확하는 술냄새가 기분 나쁘다. 레이첸은 불안한 눈으로 자례를 보았다. “넌?” “예?” “넌...개냐?” “...개?” “넌 그와는 다르지? 넌 개가 될 수 있다. 그렇지?” “헛소리 하지 마시오 왕자.” 레이첸의 손을 뿌리친다. 잡혔던 옷깃을 세운다. “난 백로요. 그것은 내가 죽는 순간까지 변하지 않소.” “....그래?” “하지만 당신은 들개지.” 냉정하게 말한 자례는 등을 돌려 정자를 나온다. 푱하는 소리가 울리며 정자밑 연못에 사는 잉어가 반대편으로 돌아간다. 뜨거운 물로 차를 우려낸 후에 절반을 버리고 그곳에 이미 끓여두었던 찬물을 절반 붓는다. 미지근하게 만든 차를 막사밖에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장군에게 가져다 준다. “하얀 달이다.” 을노는 차를 가져온 부관에게 하늘의 달을 가리켰다. 부관은 그다지 탐탁지 않다는 얼굴로 그 창백한 달을 바라보았다. “불길한 징조입니다. 오늘 밤, 그것을 꼭 하시겠습니까?” “물론.” 미지근하게 식힌 차를 마시면서 을노는 반대편의 진영을 노려본다. “힌 달이 불길한 징조라는 것은 정안인들만 알고 있는 풍습이다. 하나의 미신일지도 모르지. 그러니 그다지 신경쓸일은 아니다.” “...” 부관은 한숨을 쉬지만 말리지는 않는다. 을노는 그런 사내였다. 전장에 잘 어울리는 검은색 조복이 화려하게 펄럭인다. 표면상 송나라의 군벌로 되어있는 상태라 군인들은 모두 송나라 복장이였고 을노 자신도 송나라 무장을 하고 전투를 치루었지만 전투가 끝나면 항상 옷을 갈아입었다. 귀찮은 일이였지만 을노는 별말없이 옷을 갈아입었다. 하루에도 열두번이 넘도록 옷을 갈아입는 때도 있었지만 불만하지 않는 을노에게 부관은 감탄했다. 을노는 자신이 선인이라는 것을 알고 또 책임지고 있었다. 무랑들의 선망의 선인의 신분인지라 아무리 전장이라한들 옷하나, 장신구 하나 소홀하게 할수 없는 법이다.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왕씨이지만 수 많은 무랑들을 통솔하고 키우는 것은 선인들의 역할이였다. 을노는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였다. 하지만 계속되는 전쟁과 자신을 다스리는 일에 지쳐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였다. “휴식이 필요하다. 오걸매가 저쪽으로 좌천된 이후 우리군대는 쉬지도 못하고 항상 경계태세야. 원체 미친놈들이라서 속임수를 쓰는 것은 간단한 일이지만 적어도 오걸매와 이렇게 가까이 앉아 쉬고 싶지 않단말이다.” “잘 될까요? 선비 몇명을 죽인다 한들 저들이 그리 쉽게 물러날 것 같지 않습니다.” “오걸매는 글을 쓸줄 몰라. 그래서 항상 대필할 부관을 두지. 하지만 그 놈의 부관은 전에 자네가 활을 쏴서 죽였잖아. 난 사실 그때 오걸매가 새 부관을 받으러 올라갈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였단 말이야.” “오걸매가 직접 올라간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황궁으로 서신이 갔지않습니까.” “아마도 백지 서신일거라 생각이 든다. 그런데 황제는 새 부관을 보내지 않았어. 그말은 무슨 뜻일까. 황제가 서신을 못받았거나 저 안에 부관을 대신할 또다른 인물이 있다는거지.” “그리고 장군님께서는 오늘밤 또 다른 인물을 찾아 죽이기 위해 가실거구요.” “그래. 지금 오걸매곁에서 대필을 할만한 인재는 부관의 막사에 그를 도와주던 관리들뿐이다. 분명해.” 부관이 조복 허리띠에 매달린 엉킨 옥장식들을 풀어준다. 촤라랑하는 옥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며 시선을 잡아끈다. “하지만 진영에 글을 쓸수 있는 자들이 한둘은 있을겁니다. 7만이라면 장수만해도 스물이 넘으니까요. 또 백지서신이나 대필자가 생겨나면 어쩌시려구요?” “오걸매는 황제의 친동생이다. 그에겐 황제의 친서가 온다. 그 친서의 내용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어떻게 아는가? 명을 늘리고 싶은 놈이라면 함부로 저 무시무시한 형제들의 싸움에 말려들지 않으려 할걸. 게다가 오걸매는 생각보다 자존심이 강한 놈이야. 자신이 감시 당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리려고 할까.” “말려도 하실 생각이군요.” “당연하지.” 을노는 앞을 스쳐 지나가는 장수들의 인사를 받으면서 선인답게 온화한 미소를 지어보인다. 사내란 사랑하는 여인하나쯤은 가뿐히 가슴에 지고 싸울줄 알아야 하는법. 하지만 잦은 전쟁과 타국살이에 그네들의 여인들은 점점 메말라가고 사나워진다. 지켜주지 못한다는 것이, 스스로 지킬수 있다는 것보다 가슴에 맺혀 쓰라리다. 때아닌 칼부림에 편안한 잠을 자던 태수와 군승, 장군들이 모두 일어난다. 하지만 준비하고 들어온 자들과 예견치 못한 공격에 당황하는 자들중 유리한 쪽은 결정되어 있어 성은 금세 정문을 빼앗겨 버린다. 태수가 갑옷을 챙겨 입고 있을때 장수들은 정문을 뚫은 무서운 사내의 얼굴을 보기 위해 성벽 아래를 바라본다. 하지만 도통 누가 지휘자인지 알수가 없어 당황하고 만다. 보통 기습에는 뛰어난 지휘자의 아래 움직이기 보통인데 정문을 통과한 오백여무리의 군사는 상하의 지위가 구분되지 않는다. 특정한 인물을 지키려고 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도망가려 하지도 않는다. 그 말은 분명 지휘관이 있다는 이야기지만 아무리 봐도 대책없이 그냥 싸우고 있는 모습이다. 성벽에 횟불이 밝혀져 환해지자 더욱 아연실색한다. 군사들의 복장이 더무나 나태한것이다. 분명 황군의 군복이기는 하나 그 위에 텃을 덧대거나 찣어지거나, 더럽혀져 마치 패전한 군사와 같다. 하지만 군사들은 하나같이 일반 병사들보다는 큰 몸집에 사나운 인상이다. 여진의 군사를 초원의 들개라고 하는데 실로 그러한 모습이다. “마치 산적들을 보는 듯하지 않는가?!” “저 사람이 장군이 아닌가?” 누군가 한명을 가리킨다. 그자는 호랑이 가죽을 어깨에 걸친 사내였다. 얼핏보니 나이는 50중반의 커다란 몸을 가진 사내였다. 아른 거리는 횟불에 보이는 그의 머리는 어깨근처에서 성의 없이 잘라 묶여있지도 않은데다 피처럼 붉다. 그 누구도 그를 보호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그에게 다가가려 하지 않았다. 때문에 혼자서 덩그러니 서서 싸우는게 눈에 들어온다. “활을 가져오시오!” 누군가 그렇게 외치고 병사가 가져온 활을 그에게 겨눈다. 이리뛰고 저리 뛰는 놈이라 잘 겨냥이 안되 공을 들인다. 등을 보인 그를 막 겨누고 막 활을 놓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그가 움직임을 멈춘다. 잠시 멈칫한 순간 허공으로 도끼가 날아와 활을 겨누었던 장수의 머리에 밖혀버린다. 너무 한순간의 일이라 옆사람의 머리가 박살나 죽어버리는데 아무도 움직이지 못한다. 피가 튀기고 옷이 젖어 들어가자 그제야 뒤로 몰러난다. 손을 뻗은 그는 장군들을 노려본다. 씨익 웃는 얼굴은 자신이 죽인 병사들의 피로 뒤범벅이다. 그의 한손에 다른 도끼가 들려있는 것을 눈치 챈 장수들은 얼른 뒤로 물러난다. 을노의 예상대로 오걸매는 정문을 뚫고 내성문까지 들어가는데 성공했다. 그 후 그는 태수의 성까지 들어갔으나 눈치 빠른 태수는 휘하 장수들과 성을 빠져나간 상태였다. 오걸매는 태수를 쫓지 않았지만 성안에 남아있던 사서들중 셋을 데리고 나오며 도성 창고안의 식량을 약탈하고 성안에 불을 질렀다. 공성을 하려는 것은 아니였다. 그저 이번 싸움에 잃은 군사들에 대한 보복인 것 같았다. 오걸매가 약탈한 식량을 가지고 진영으로 돌아오는 것을 바라보는 을노의 심정을 착찹했다. 뒤에선 부관에게 묻는다. “우리쪽의 피해는?” “병사는 여섯명, 민간인은 두명이 죽었습니다.” “...” “지켜낸 수가 백이 넘는 것을 감안한다면 적은 수 입니다.” “병사들의 시체는?” “회수했습니다.” “잘 묻어주어라.” 을노는 자신의 긴 머리를 한줌 쥐고는 단검으로 잘라 그것을 허공에 뿌려버린다. 지극한 슬픔의 날실들이 어둠속으로 흩날린다. “...어째서 시대는 희생없이 넘을수 없는가.” “...희생을 강요당하는 자에게 시대는 무엇을 해줄수 있는걸까요.” 적의 진영에 불이 밝혀지고 진영의 재배열이 이루어진다. 을노는 팔짱을 끼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속상함이 이루 말할수 없지만 그것을 내색하지 않는다. 그러기엔 을노가 가직 책임은 너무도 컸다. 그것이 희생을 강요하는 한명으로써 하늘이 내리는 천벌일지도 몰랐다. 전같으면 뛰어내린다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높이였다. 하지만 그것을 생각하기도 전에 이미 몸이 반응해서 훌쩍 뛰어내린다. 보기 좋게 한손만으로도 균형을 잡아 이층의 난간에서 아래로 무사히 뛰어내린다. 다리가 저릴정도는 한데 그대로 앞으로 달려간다. 착치에서 뛰어가는때까지 거침이 없다. 후소는 자휼이 근접하는 것을 보고는 그대로 난간을 뛰어넘어 성벽위의 계단으로 올라간다. 잠시 자휼이 멈칫한다. 계단을 올라가는 것은 요행을 바랄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먼서 출발한 후소보다는 늦는 것이 당연하다. 재빨리 주위를 살피던 자휼은 근처나무에 말을 묶으라고 놓아둔 밧줄을 풀어 끝에 매듭을 지어 성위로 던진다.한손이지만 매듭을 풀고 묶는 것이 자연스럽다. 성벽의 규칙적으로 쏟아있는 벽돌에 줄이 단단히 묶이자 그것을 손으로 당겨 성벽을 타고 올라간다. “...원숭이다. 원숭이.” “...” 차를 마시며 아침부터 시작한 자휼의 이상한 운동을 보던 친첸이 중얼거린다. 마고역시 이해할수 없다는 눈으로 성벽을 타는 자휼을 본다. 한손으로 줄을 감아가며 올라가는 모습이 아슬아슬해 보이지만 순식간에 성벽을 타고 오른 자휼은 또 성벽위를 달린다. 창가에서 자휼의 모습이 사라지자 친첸은 다시 서신에 매달리고 마고는 그 옆을 보좌한다. “잘 알수는 없지만 누가 일부러 그를 닦달하는 것 같군.” “예?” “자휼은 그 힘이 강하고 도검을 사용하는 강한 무사다. 하지만 그에겐 결정적으로 부족한게 있었거든. 그것이 지금 채워지는 느낌이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궁(窮)과 극(極)이다.” “예?” “자휼은 필사적으로 어딘가에 몰려본 일이 없는 눈을 가지고 있다. 또한 목숨을 걸만한 극한 상황도 겪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무사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지. 무사는 궁과 극을 번갈아 경험하며 성장하는 것이다.” “...” “궁과 극을 겸험하지 않는 무사는 유능한 통솔자가 되기 어렵다. 아무리 강한 자휼이라고는 하나 나를 따를수 없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지. 장수들이나 선비들이 왕을 따르는 이유는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궁과 극을 존경하기 때문이다.” “궁과 극은 그다지 좋은 경험은 아니지 않습니까.” “물론 그렇다. 자존심과 목숨을 내걸고 얻는 것이 궁과 극이니까. 레이첸과 나는 그 실력이 엇비슷해 보이나 사실은 체력적으로 보나 경험으로 보나 내가 더 못하다. 하지만 그와 대등하게 싸울수 있는 이유는 이거지.” 친첸이 보고 있던 공문에 도장을 찍고 다시 잘 말아 놓는다. 손짓으로 마고를 부르자 마고가 다가간다. 손을 내밀어 마고의 내려진 앞머리를 올리고는 그 눈을 감상한다. 다갈색의 눈이 자휼과 매우 비슷하면서도 그 느낌이 전혀 달라 새롭다. “나는 궁극에 도달했던 자이고 레이첸은 궁극을 전혀 모른다. 그러니 그는 내게 휘둘릴 수밖에 없는것이지.” “...” “자휼이 궁극에 도달하면 널 이해할수 있을까?” “그에게 이해받을 것도 없고 이해 받고 싶은 것도 없습니다.” “당연하지. 널 이해하는 것은 나다.” 친첸의 자신만만한 눈에 마고는 시선을 돌리고 싶은 충동을 받는다. 후소는 웃었다. 기분 나쁜 웃음이 아니였다. 요몇일 자휼을 약올린 보람이 있는 것인지 드디어 자휼이 자신을 앞질러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본것이다. 성벽을 타고 올라오는 것을 보았을때 다시 계단의 난간을 타고 내려가 줄을 내치면 간단히 자휼을 떨칠수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다. 이후의 행동이 궁금해졌다고 해야할까. 자휼은 계단을 올라오는 후소에게 달려갔다. 후소가 얼른 성벽위를 달린다. 타닥타닥하던 자휼의 발소리가 잠시 사라졌다고 느끼는 그때, 성벽의 난간위를 전력으로 뛰어와 자신의 옆을 스치는 그를 보고 잠시동안이지만 몹시 놀란다. 이 녀석 정말로 눈에 보이는게 없는가 보다. 폭이 한자도 되지 않는 성벽 난간위를 전력으로 달리던 자휼과 눈이 마주친다. 후소는 순간 씩 웃으며 손을 내밀어 자휼의 발을 걸려고 한다. 하지만 어느정도 예상했던 듯 훌쩍 그 팔을 피하며 공중제비를 돌아 후소의 머리위로 내려앉으려 한다. 후소 역시 그런 행동을 예측못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얼른 뒤로 물러나 자휼을 피하지만 떨어져 내린 자휼이 그 반동을 이용해 팔꿈치고 자신의 얼굴을 강타한다. 정확하게 맞았다면 분명 기절할것이라 믿었던 자휼은 아쉬운 표정을 짓는다. 후소가 손을 내밀어 팔꿈치를 잡아버린것이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는다. 그대로 주먹을 뻗어 비어있는 복부를 가격하나 역시 후소의 다리에 막힌다. 정면 공격을 몇 번 더하나 그것이 힘들다는 것을 알자 한발 물러나 다리를 이용해 옆구리를 노린다. 후소가 자휼의 생각을 알아차린 것인지 한발 뒤로 물러나는 자휼의 품으로 들어와 손바닥으로 가슴을 힘껏 쳐 밀어버린다. 이젠 통증에 저절로 나오는 외마디의 신음조차도 내지 않는다. 주춤 물러났던 자휼은 밀리면서도 균형을 잡아 쓰러지지 않게 버틴다. 쓰러졌다 일어나면 후소를 다시 따라잡기 힘들다는 것을 눈치챈 이후부터는 착지에도 신경써 넘어지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자신의 가슴위에 올려진 손을 꽉 잡고 그대로 후소를 끌어 당긴다. 밀어버릴줄 알았던 손을 잡아당기는 바람에 처음으로 기우뚱하고 후소가 균형을 잃는다. 잡아당긴 손을 어깨로 걸치고 엎어치기를 한다. 후소의 무거운 몸이 자휼의 등에 올라 둥글게 원을 그리며 성벽위로 퉁하고 떨어진다. “하악, 하악, 하악,” “...녀석. 쓸만하구나.” 하지만 자휼은 대답하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너무도 숨이 차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체로 곧 기절할 것 같이 다리를 후들후들 떨면서도 다리로 후소의 멱살을 누르고 한손으로 얼굴을 겨냥한체 그를 경계한다. 이마에서 길게 피가 흘러내려와 입에 맺혀 목으로 떨어진다. “하악, 하악...새...” “제비를 달라구? 알았다. 잡혔으니 주마.” 생각보다 손쉽게 후소가 제비를 잡고 있던 왼손을 펼친다. 똘망한 눈을 굴리며 제비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고 고개를 갸웃하며 머리위의 자휼을 바라본다. 까지고 긁힌 상처가 가득한 손을 내밀어 제비를 이쪽으로 오라 손짓한다. 잠시 자신을 향한 주먹이 사라진 때를 놓치지 않고 후소가 자휼을 밀어내며 발로 찬다. 하지만 자휼은 밀려나가지 않는다. 이정도는 예상했다는 듯 후소의 발을 주먹으로 잡아 땅에 내친후 정말로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주먹으로 후소의 얼굴을 향해 무겁게 친다. 척하는 둔탁한 소리가 나며 이번엔 정말로 정통으로 후소의 얼굴에 자휼의 주먹자국이 생겨버린다. 기절한것인지 움직이지 않는 후소의 목에 떨리는 손가락을 올려 맥이 뛰고 있는지 확인한다. 한주먹에 후소가 죽을거라 생각지는 않지만 힘조절이 전혀 안되는 지금으로는 자신도 장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후소가 단지 기절한거라는 걸 확인하자 후소와 술래잡기를 한 이후 처음으로 한숨을 쉬며 허리를 핀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후소의 손에 앉아있는 제비를 향해 손짓한다. 길들여진 제비라 푸드득 날아 자휼의 어깨에 앉는다.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피가 거추장 스러워 손으로 비벼보지만 계속 흘러내린다. 의원에게 치료를 받아야 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이정도의 상처엔 죽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제비를 손에 옮기고 그 다리를 살핀다. 없다. 자휼은 급히 뒤를 돌았다. 어느샌가 후소역시 사라져 있다. 제비의 다리엔 아무것도 없었다. 이미 후소가 빼어낸 것이다. 순간 자휼은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며 참을수 없는 분노에 온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후소!” 광폭하게 외치며 화를 내는 자휼에게 감히 다가가지는 못하는 병사들은 그저 성벽위에 떨어진 자휼의 피를 물로 닦아 내리는 것이다. 곧 쓰러질 것 같은 얼굴로 성벽위에서 아래를 두리번 거리던 장군은 계단을 향해 뛰어간다. 저 몸으로 또 달릴 생각인가 하고 움찔하던 병사들은 퍽하고 바로 꼬꾸라지는 장군을 보고 얼른 다가가 부축하고는 의원을 부른다. 134 자례는 누군가의 시선에 눈을 떴다. 그리고 놀라 벌떡 일어난다. “놀라게 해드렸습니까?“ “막관!”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얼른 침상의 끝으로 물러난다. 너무나 황당한 방문에 뭐라 말이 나오지 않는다. 막관은 그다지 놀랄일이 아니다라는 투로 말한다. “낭관의 명령으로 부르러 왔는데 문이 열려 있어 들어왔던 것 뿐입니다. 너무 곤히 자고 있어 깨우기가 미안하더군요.” “타인의 잠든 얼굴을 보는 취미는 고약한것임을 모르오?” “하지만 잠든 얼굴만큼 그 사람의 내면을 표현해주는 것은 없다하지 않습니까?” “방을 나가시오.” 애써 차분한 목소리로 말한다. 막관은 고개를 끄덕인다. “어차피 말을 전해드리려 왔으니까요. 내일은 서관으로 나오지 말고 학고청으로 바로 나가 종이를 거두어 들이라 하셨습니다.” “알겠소.” “그리고 방문을 닫고 주무시지요. 누가 들어와도 모를정도의 잠귀라면 위험하지 않습니까?‘ 슬쩍 미소지어 보인 막관은 방을 나간다. 막관이 복도를 지나쳐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 것을 확인한 자례는 가슴을 쓸어 내린다. 벌떡 일어나 외포를 어깨에만 걸치고 방안의 물건들을 확인해본다. 어차피 혈족에게 오는 모든 서신은 즉시 태워버리기 때문에 그쪽으로는 걱정이 없었지만 그 반대일 경우를 생각해 겁이 난다. 방을 자세히 뒤져본 자례는 물건이 없어지지도 많아지지도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고 한숨을 쉰다. 침상에 앉아 숨을 돌린 자례는 망설이다 조금 열려진 방문앞으로 가 문을 꽉 닫아 본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 침상에 앉는다. 하지만 십여분도 못견디고 얼른 문을 열고 헉헉 거린다. 답답해서 그렇게 할수는 없어. 결국 문을 열고만다. 하지만 잠이 오지 않는다. 잠이 올 턱이 없다. 안절부절 하던 자례는 옆방의 익을 생각해내지만 그가 오늘 학고청 당번이라는 것을 생각해내고 한숨을 쉰다. 할일없이 촛불을 켜놓고 책을 보던 것도 한두시간 곧 짜증이 난다. 아참. 육관에게 가볼까. 고개를 갸웃하고 생각에 잠긴다. 가보았자 별 좋은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또 야패없이 병사들에게 걸리면 이번에야 말로 관복을 벗어야 할지 모른다.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이 위험을 감수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잠은 오지 않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앉아 밤을 새면 내일 학고청에서 졸지도 모른다. 여러번 머리를 굴리다가 좋은 생각을 떠올리고 얼른 일어난다. 익의 방에서 자면 되지. 풀어진 머리를 대강 묶고 외포를 걸치고는 몰래 몰래 성각헌을 나간다. 서관까지 가는 길에는 단 하나의 부조물도 없어 몸을 숨길곳도 없다. 운이 좋았는지 서관까지 무사히 들어가 학고청으로 향한다. 내일이면 다시 창고에 차곡차곡 들어갈 종이들이 마지막 야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익?” 하지만 익은 대답하지 않는다. 이미 책을 뒤집어 쓰고 곤하게 잠들어있는 상태였다. 다가가 어깨를 흔들며 깨운다. “익? 익? 나 방좀 빌려 쓸께요. 익?” “네 방도 있잖냐...” 익이 귀찮다는 듯 몸을 돌려 눕는다. 잠결에 대답한 것인지 바로 코를 골아 버린다. 아쉬운 자가 참는다고 다시 어깨를 흔들며 부탁한다. “문을 열고 있기가 그래서 그래요. 오늘 방좀 빌릴께요.” “몰라 이놈아.방이 무서우면 여기서 자라.”” “난 오늘 당번이 아니란 말이에요.” 대답없는 익을 바라보다가 그 귀를 잡아 당긴다. 악하는 소리와 함꼐 귀에 끌려 일어난 익은 화를 낸다. “왜 그래!” “방좀 빌려쓰자구요.” “네 방은 어따쓰고?!” “방문을 열고 자기가 불안해서 그래요.” “그럼 닫고자. 아니 숨막혀 죽을 정도로 작은 방도 아닌데 왜 그러는거야?” “빌려줄꺼에요, 안빌려줄꺼에요? 한밤에 화나게 하지 말라구요.” “누가 할말을 하는거냐. 너야말로 한밤에 잠을 깨운거잖아.” “학고청야근에 잠을 자는 익이 이상한거죠.” “시끄러, 시끄러.” 익은 품을 뒤적이다가 열쇠를 하나 주고 다시 들어누워 버린다. 열쇠를 받은 자례는 서두러 학고청을 나오다 옷끝이 당겨지는 느낌에 얼른 뒤를 돌아본다. 문틈사이에 낀것인지도 몰랐다. “...너.” 크릉하고 반갑게 꼬리를 흔들거리는 호랑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손으로 옷자락을 툭 잡아당긴다. 입에서 빠져나가는 옷자락이 장난이라 생각했는지 열광적으로 따라붙는 호랑이에게 놀라 물러났던 자례는 곧 그 머리를 쓰담아주며 중얼거린다. “오래간만에 보니 반갑다만은, 육관은 어디에두고 도망쳐 온거냐?” 말을 알아들을 리가 만무하다. 자례는 잠시 발발거리며 반가움을 표현하는 호랑이를 바라보다 몸을 일으켜 학고청으로 다시 들어갔다. 산책을 가듯 호랑이가 따라온다. 운이 좋다면 오늘정도는 병사에게 들키지 않을지 모르지. 유모는 슬쩍 미소지었다. 아직 아이와 다름없다고 생각되는 저 작은 몸으로 태교를 한다고 밤낮을 설쳐대는 또하나의 아기가 귀여워 미칠지경이다. “그만 주무시지요?” “안그래도 그럴생각이에요. 그런데 잠이 오질 않아.” “긴장하셔서 그렇지요.” “긴장하지 않아요. 아직 아이가 태어나려면 한참 멀었는걸. 이제 겨우 배가 나올 것 같은 예감이라구요.” 화선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말린 육포를 입에 넣는다. 빙글 빙글 만사의 걱정을 제치고 편안하게 책을 본다. 푹신하게 받쳐진 침상위의 비단베게속에서 깔끔하게 묶인 책을 읽던 화선은 미소짓는다. “그러고 보니 우관은 어찌 지내고 있나 몰라?” “아휴, 그 일은 안좋은 일이였어요. 아무리 말단 관리라고는 하나 사내를 만나시다니요.” “내가 만난것인가? 우연히 만나게 된것이잖아요? 이 필본도 다 보아가니까 또 한권 달라고 부탁하면 안될까?” “아무튼 아가씨도 참.” 아삭소리가 나는 과일을 먹으면서 화선은 책을 덥는다. “이젠 자야겠어. 너무 늦게 자면 아이에게 안좋겠지.” “그러세요.” 유모가 이불을 가지고 온다. 게으르다고 생각할 정도로 동글게 몸을 말고 이불속에서 꼼지락거리던 화선은 어느순간 잠들었는지 조용해졌다. 좋은 꿈을 꾸는지 곤한 표정에 유모는 시종들을 파하고 자신은 그 옆방에서 누워 잠자리에 든다. 소처는 이상하게 생각했다. 원래 자신을 부를때마다 술을 마시고 있거나, 이미 마셨다거나, 마실려고 하는 것이 보통이였다. 하지만 이상하게 오늘은 술병을 눈앞에 누고 차만 마시고 있었다. “무슨 걱정이 있으신가요?” “아니다. 곧 올라갈테니 그대로 있어라.” 하지만 얼마전에도 같은말을 했던 레이첸이였다. 소처는 망설이다가 이불로 맨 몸을 두르고 탁자에 앉은 레이첸에게 다가간다. “술을 따라드릴까요?” “아니.” 골몰하게 술병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던 레이첸은 얼마 지나지 않아 팔을 쭉 뻗고는 신경질적으로 외친다. “아아, 모르겠다! 아무것도 기억이 안나! 작작 좀 마실걸.” “무슨?” “신경쓸일이 아니다.” 레이첸은 탁자에서 일어나 소처를 안아들고 침상위로 올라간다. 어깨에 걸쳐진 여인은 따뜻하고 부드럽다. 가벼워 깃털을 희롱하듯 그 몸은 눕히고 올라가 입을 맞춘다. 간지러운지 키득거리며 웃는 소처에게는 화선에게는 볼수 없는 아양과 귀여움이 가득하다. 얼굴로 보아서는 화선이 더욱 아름답고 앳된 얼굴이지만 성격이 이렇게 달라 여인을 사랑하는 마음을 다르게 만든다. 부드러운 목선에 그 따뜻한 가슴에 입을 맟추던 레이첸은 갑작스럽게 행동을 멈추고 일어나 침상에 걸터 앉는다. “왜 그러세요?” “아니. 방금 뭐가 기억날 듯했는데....” 안타까움에 눈살을 있는데로 찌푸리며 레이첸이 애써 기억을 살려보여 애를 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수 있는가. 아무것도 기억이 남지 않았다. 술을 마시고 이렇게 전날의 기억이 하나도 남지 않는 일은 처음이라 너무 당혹스럽다. 젠장. 왜 자꾸만 떠오르는 거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으면서도 끊임없이 떠오르는 기억의 조각은 자신을 괴롭힌다. 그것은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며 짧게 이야기하는 자례였다. 단지 연상되는 것이라면 별 신경쓰지 않겠지만 그렇지 못했다. 더러운 것을 바라보는 듯한 경멸감으로 가득찬 눈동자. 아랫사람을 취급하는 것처럼 자신을 내리보는 그 도도한 시선. 그 작은 몸이 당당하게 자신을 노려보고 외마디 말을 던진후 등을 돌린다. “미치겠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안나니 뭐라 할수도 없고...” 소처는 잠시 레이첸이 혼자 생각하게 놔둔다. 아마도 화선 때문에 저러는 것 같지는 않으니 자신이 끼어들어보았자 바보취급을 받을 것이 뻔했다. 그 뒤로로 한참을 고민하던 레이첸은 술을 줄여야겠다고 중얼거리며 다시 소처를 눕힌다. 뜨거워지는 자신의 몸과는 달리 정신만은 냉정해 진다. 뭐라고 말하는 거냐? 도대체 뭐라고 말하는 거지? 너무나 생생한 모습에 짜증이 난다. 더욱 참을수 없는 것은 그 눈동자. 새까만 밤하늘과도 같은 그것이 자신을 비웃는다. 사기 인형은 싫다. 메아리가 돌아오지 않는 산은 즐겁지않아. 하지만 이런 식으로 들려오는 메아리도 원하지 않는다. 멍하니 하늘만을 올려보던 사기인형의 검은 눈동자와 자신을 내려까는 검은 눈동자 중 어느쪽에 손을 들어야 하는지 고민이 된다. 둘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가슴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아파하는 소처의 얼굴이 보이나 손을 풀지 않는다. 나는 황제의 사기 인형을 가지고 싶다. 하지만 그 초첨조차 흐린 황제의 인형은 싫다. 그것은 이미 내것이 아니다. 내 다리밑에서 하루의 욕망을 채우는 인형을 원한다. 내 명령에 웃고 울수 있는 그것을 원해. 하지만 그 멍한 눈은 싫다. 순간적으로 눈앞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은 역시 자신을 내려보는 듯한 도도한 검은 눈동자. “흥, 그것 또한 용납못한다.” “전...전하?“ 황제의 사기 인형이 날 사랑하길 바란다. 내말에 고개를 돌리고 내 명령에 춤을 추는 그것을 가지고 싶다. 결코 내가 가져서는 안되는 천륜으로 금지된 그것을 품에 안고 즐기고 싶다. 나는 사기 인형을 싫어한다. 하지만 사기 인형은 자신을 사랑하길 바란다. 웃음이 나온다. 이런 억지가 어디 있는가. 귀여운 얼굴의 소처역시 자신만의 인형이다. 화선역시 앙칼지긴 하나 자신의 인형이다. 그런데 자신은 이미 죽어버린 황제의 사기 인형을 원한다. 사람은 만족을 못하는 짐승인가. 사람은 얼마나 이기적인 요물인가. 소처를 끌어안고 밤이 깊어간다. 곤히 잠든 자들에게는 조용한 밤이, 연인과 사랑을 나누는 자에겐 열락의 밤이, 그리워 하는 이에게는 기나긴 밤이 각각 흘러간다. 그 모든 밤을 지켜주는 달은 아무런 말이 없다. 135 잠들어있는 익을 지나쳐 종이바다로 들어간다. 두어번 들어가서 그런지 다행스럽게 처음 들어갔을때보다 두렵지 않다 뒤를 따라 호랑이도 따라오는 것을 느끼고 피식웃는다. 한참을 들어가 몇 번 헤메었지만 곧 돌담을 발견하고는 자세히 살펴본다. 곧 육관이 밀쳤던 흔적을 발견하고 그것을 밀어 연다. 끼긱거리는 돌의 마찰음이 귀에 거슬린다. 열린 문틈 사이로 호랑이가 날세게 들어간다. 미로속을 호랑이와 함께 빠져나와 수로를 건넌다. 높은 담을 지나 또다른 비밀문에 도착한다. 누가 볼세라 얼른 어깨로 밀쳐보지만 어떻게 된 영문인지 꼼짝하지 않는다. 원래 빡빡한 문이긴 했지만 열리기는 했던 문이라 당황하며 더욱 힘을 준다. 한참을 실랑이한다. 호랑이는 끙끙대는 자례옆에 엎드려 문이 열리기를 팔자 좋게 기다리고 있다. 문이 끼긱거리며 돌아간다. 하지만 자신이 미는 방향이 아닌 자신을 향해 밀린다. 어라? “뭐야!” 걸걸한 목소리에 확하고 문이 확 돌아간다. 그바람에 문에 밀쳐져 뒤로 넘어져버린다. 눈을 깜박이며 열린 문을 바라보고는 어이 없어 한다. 육관이다. 지금까지 육관은 안에서 자신은 밖에서 서로를 향해 문을 밀었던 것이다. “너 방금 문을 이쪽으로 민것이냐?” “...그런 것 같습니다.” “어쩐지 문이 안열린다고 했지. 바보냐! 내가 열고 있으면 너가 피해야 할 것 아니냐!” 이 높은 담넘어 누가 문을 열고 있는지 닫고 있는지 어찌 압니까. 벌떡 일어나 옷을 턴다. 그리고 호랑이를 가리킨다. “또 빠져나왔더군요.” “내가 내보냈다.” “예?” 그말에 약간 당황한다. 혹시 육관이 몇일전부터 자신을 기다린 것은 아닌가 싶어 조심스럽게 묻는다. “절 기다리셨습니까?” “내가 왜 널 기다리느냐?” “...?” 더욱 아리송해지는 자례에게 육관은 등을 돌려 담안으로 들어간다. 자례는 호랑이에게 담안으로 들어가라 손짓한다. 하지만 크게 울리는 육관의 목소리에 놀라 움찔한다. “왜 안들어와!” “예? 아, 들어갑니다.” 얼른 담안으로 들어간다. 호랑이가 자례를 따라 사철나무가 세워진 돌담을 건너간다. 곧 푹신한 땅이 발끝에 닿자 호랑이는 숲안으로 사라져버린다. 육관이 등을 돌려 자례를 노려본다. 이번엔 무슨 요구를 해올까 싶어 그 눈빛에 마음이 편치 않다. “뭐냐?” “예?” “왜 이곳으로 온거냐?” “예? 아, 호랑이를 돌려보내기 위해...” “그 다음은?” 자례는 황망하게 육관을 바라본다. 오라고 할때는 언제고 이번엔 왔다고 해서 뭐라 하는건가. 정말로 제멋대로인 노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왜?” “늦은 시간이니까요. 내일일을 위해 잠을 자두려고 합니다.” “난 어쩌라고?” “예?” 육관은 뚱하니 서서 자례를 본다. 마치 전혀 모르는 곳으로 나온 어린아이가 어른에게 어디로 가야 집으로 통하는지 물어보는 듯한 모습이다. “육관도 내일을 위해 쉬셔야...” “싫다!” “...그럼.” 저보고 어쩌라구요. 하지만 상대가 상대인만큼 얼른 다른 말을 짜낸다. “산책이라도 하고 들어가시겠습니까?” “어디서?” “이 숲이라도...” “이궁은 내것이 아냐.” “하지만 밖으로 나가보았자 아무것도 볼것이 없지 않습니까.” “...” “몰래 오라하셨으니 이번엔 몰래 산책하면 안될까요?” 그말에 육관은 아무런 대답없이 등을 돌려 숲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자례가 따라오지 않자 화를 버럭 낸다. “따라오라!” “예.” 어깨를 으쓱한 자례는 육관에게 안보이도록 한숨을 쉬고 5보정도 뒤로 떨어져 육관을 따라 숲을 산책한다. 정말로 숲이였다. 조경을 위해 아름답게 꾸며놓은 것과는 전혀 달랐다. 마치 산을 통째로 퍼와 옮겨 온것처럼 한 아름이 훨씬 넘은 고목에서는 버섯이 피고 있었고 그 안에는 거미가 먹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나무의 시들은 작년 가지들은 그 밑으로 깔려 황금색의 이불이 되어주고 음지에서만 볼수 있는 고사리들이 피어난다. 이름도 모르는 잡풀이 발아래서 춤추고 농가에서 흔히 볼수 있는 강아지풀과 어딘가에서 딸려온 콩줄기까지 자연스래 자라나고있었다. 완연한 봄의 숲에 자례는 깊게 숨을 들이쉰다. 밤공기가 깊게 폐속으로 들어와 간지럽힌다. 비릿한 풀내음이 너무도 기분 좋게 느껴진다. 갑자기 육관이 걸음을 멈춘다. 그리고 한동안 움직이지 않는다. 자례가 한발 다가가 말을 건다. “왜 그러십니까?” “어느쪽으로 가야하지?” “예?” “난 이곳까진 들어오지 않는다. 이 이상은 길이 없다.” 그말에 육관의 옆으로 서서 앞을 바라본다. 정말로 길이 보이지 않는다. “제가 앞으로 나가 살펴보아도 됩니까?” “허락하마.” 육관을 뒤로한 자례는 좌우를 자세히 살펴본다. 정말 감탄을 금치 못할정도로 자연스럽다. 이 숲이 어찌 황궁안 깊숙이 숨겨져 있는 건물일부라 상상하겠는가. 어디선가 다람쥐가 뛰어나오고 뱀이 기어나올 것 같다. 조금 더 주위를 살피던 자례는 일어난다. “저 역시 잘 모르겠습니다. 산책은 여기까지 할까요?” “음.” 등을 돌리는 육관의 따라가며 자례는 입을 다문다. 역시 아무말없이 오던 길을 되집어 올라가던 육관은 갑자기 등을돌려 자례를 바라본다. 또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는가 궁금해하는 표정으로 육관을 바라본다. 그는 자례의 위아래를 살펴보고는 뜬금없이 묻는다. “복장이 외람된다.” “아, 죄송합니다. 잠을 자다 나온것이기 때문에...” “자다 일어난건가?” “예.” “왜?” 그말에 얼른 머리를 굴린다. 팍 떠오르는 것은 물이다. “목이 말라 일어났습니다.” “목? 차를 타는 시종이 없나?” “저희들에겐 해가 지면 배식된 시종을 파하니까요.” “그래서 물을 마시러 학고청까지 나왔나?” “예? 식당이 문을 닫아서 말입니다. 옆방의 동기가 학고청에 야근이라 열쇠를 얻으려 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 “물은?” 이 노인은 보기보다 꽤나 집요한 곳이 있군. “이젠 괜찮습니다.” “해가 뜨려면 6시간이나 남았다.” 육관은 하늘을 가리켜 보인다. 달이 머리위로 뜬 것이 해가 뜰려면 오래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실은 목이 마른 것은 아니였지만 실제로 물때문이라 거짓말을 해서인지, 거짓말이 들키지 않게 긴장해서인지 목이 탄다. “반대편으로 가면 물이 있다.” 역시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육관은 등을 돌려 걸어간다. 그 뒤를 따라가면서 자례는 두 번다시 목이 말라 일어났다는 핑계를 사용하지 않기로 다짐한다. 아까의 사철나무로 싸여진 돌길을 지나 얼마가지 못해 작은 수로가 나타난다. 이곳을 오기 위해 넘어왔던 수로의 물이 매우 탁하고 더러운 반면에 이 수로의 물은 하늘이 비춰보일 정도로 깨끗하다. 계속 흘러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아하니 안쪽으로 거대한 수원지가 있는 모양이다. 건곤궁이군. 처음으로 자례는 이곳이 건곤궁 안이라는 것을 확신한다. 육관은 수로의 내려보며 아무말 없이 서있는다. 한참을 기다리다가 또 자례가 물어본다. “왜 그러십니까?” “잔이 없어.” “예?” 잔이 없어 물을 먹지 못하겠다는 말이다. 손으로 떠먹으면 되지라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고 만다. 하긴 황제의 친동생정도의 지휘라면 손에 물을 적신다는 것조차 엄청난 일로 생각할지 모르는 것이 아닌가. “목이 마르십니까?” “아니. 하지만 넌 마셔라.” 저도 안마셔도 됩니다라고 말할 시간을 놓쳐버린다. 빤히 자신을 바라보는 육관에게 밀려 수로에 다가가 무릎을 꿇고 앉는다. 마실테냐도 아니고 마시지 않을래도 아니고 마셔라니. 속으로 중얼중얼 꿍한 생각을 하며 몸을 숙인다. 헐겁게 묶은 머리가 흩어져 내려오자 어깨넘어로 걸친다. 손을 수로에 넣어 물에 닿자 깜짝 놀란다. 차갑다. 마치 얼음을 만지는 듯한 시린 차가움이다. 물에 넣은 손끝이 금세 빨게지며 시리다. 손을 물에 헹구고 두 손으로 물을 떠 입을 데고 마신다. 원래 목이 마른 것이 아니였기에 마시는 척하고는 그냥 물을 흘려보낸다. 다시 일어나 육관의 뒤로 돌아간다. “이젠 그만 돌아가봐야합니다.” “...” “다음에 또 호랑이가 나오면 데리고 오겠습니다.” 하지만 육관은 가보라는 신호를 보내지 않는다. 그냥 가도 되는걸까, 그러다가 노발대발 화를 내면 어쩌지 하는 예감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꿔다 논 보릿자루처럼 서 있는다. “목이 마르다.” “예?” “목이 마르다고 했다.” “...예?” 육관의 미간이 꿈틀한다. 화를 내려는 징조라 얼른 머리를 굴린다. 목이 마르다니. 눈앞에 수로가 있지 않는가. 떠 마시면 되지 뭘 그런것까지 나에게 말하는가. 이런. 막 소리치려는 육관을 지나쳐 수로에 다가앉아 두손으로 물을 떠올린다. 무릎을 꿇은 상태로 육관을 올려다보니 안그대로 비대한 육관이 더욱 크게 보여 놀란다. 육관은 천천히 다가와 자례의 손끝을 잡고 허리를 숙인다. 그렇게 크게 보였던 육관이지만 자신의 손에 고개를 숙이자 그 날카로운 시선이, 거역하기 힘든 관록이 사라져버린다. 손안의 물을 마시는 것은 목이 마른 노인이다. 숙여 보이는 뒷머리는 백발이다. 문득 친할아버지로 알고 컸던 목씨 정륜이 떠올라 착찹해진다. 육관이 고개를 들고 입을 닦는다. 옷을 털며 일어나는 자례에게 육관이 의아하게 말한다. “네 몸에서 풀냄새가 난다.” “...그렇습니까?” “쓴 내가 지독하다.” “저런.“ 육관이 고개를 흔들며 자례에게서 떨어진다. “왜 물을 떠 주었지.” “...글쎄요.” 물을 떠달라고 보첸 것은 육관아닙니까. 하지만 자례는 그냥 미소지었다. “나중에 생각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생각해라.” “...목이 마르시다고 하셨기 때문에 물을 떠드린 것이 아닙니까?” “그것 뿐?” “...예.” “넌 정안족이냐?” 그말에 자례가 픽 웃는다. “황제의 칙명에 따라 정안족은 입궁할수 없습니다. 제가 정안족이라면 어찌 이곳에 있겠습니까?” “가라.” “예?” 육관이 등을 돌린다. 고개를 숙여 그 등에 인사하고 막 문을 열고 나오는데 육관의 목소리가 들린다. “네 향은 지독하지 않다.” 하지만 못들은 척 그곳을 나와 성각헌으로 돌아가 익의 방을 열고 들어가 잠을 청한다. 136 이른 새벽 성각헌의 방으로 돌아온 익은 당황했다. 열쇠가 없어진것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자례가 열쇠를 빌려 갔던 것이 떠올라 방문을 두드린다. “어이, 이봐? 자냐? 문좀 열어라.” 하지만 깊이 잠들었는지 대답이 없다. 익은 끙하고 한숨을 쉰다. 저놈 잠귀가 어둡던데 꼼짝없이 일어날때까지 여기서 이렇게 서 있어야겠군. 학고청에서 잠을 잤지만 역시 아직 새벽이라 졸리다. 문에 기대 꾸벅꾸벅졸던 익은 문득 생각난 열쇠에 벌떡 일어난다. 안쓰는 주머니를 뒤져보니 역시 있다. 자례의 방 열쇠다. 익은 옆방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근다. 역시 방을 바꾼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타인의 방이라는 느낌에 위화감이 생긴다. 졸린 기운에 모든 것을 잊고 침상에 푹하고 누워버린다. 편하게 몸을 누이고 정신없이 잠에 빠져들어간다.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생각한 자례는 일어나 정신을 가다듬으며 귀를 귀울인다. 하지만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아 잘못들은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피곤함에 다시 익의 침상에 누워 잠에 빠져든다. 무거운 옷을 입기 전 허리를 길게 늘인다. 두두둑하며 밤사이 굳어버린 뼈들이 제멋대로 움직인다. 이리저리 몸을 움직인 아골타는 환관들의 손길을 받아 수 많은 옷을 하나하나 입어간다. “특별한 일은 없는가?” “예.” 히우루가 단상아래에서 고개를 끄덕인다. 그는 수많은 서신들을 서둘러 풀러보고는 중요한 것은 펼쳐 놓고 그다지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것은 다시 말아 처분한다. 황금색의 절대권력의 힘을 과시하는 옷을 펄럭이며 아골타가 단상아래로 내려와 히우루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왜 그러십니까?” “얼굴색이 안좋다.” “제 걱정을 해주시는 겁니까? 황송합니다.” “네가 아프면 누가 저 많은 서신들을 줄이겠는가?” 피식 웃은 아골타는 단상위의 화려한 의자에 앉아 턱을 괸다. 히우루가 그 모습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한다. “형님도 얼굴색이 매우 안좋습니다.” “아아...근심이 있어서 그렇다.” “무슨?” “...왜 서신이 안오지?” “예?” 아골타는 벌떡 일어나 대전의 수 많은 기둥을 내려다본다. 어느정도 화가 난 목소리로 크게 외친다. “어째서 호북소식이 하나도 전해지지 않는거냐!” 쩌렁 쩌렁한 목소리에 뜨끔한 환관들과 궁녀들이 얼른 고개를 숙인다. 불똥이 나에게 튈까 걱정하는 눈치다. 히우루는 졸린 아골타를 달랜다. “그곳은 전장이니 할일이 많을테지요. 가는데 한달 걸리는 거리이니 두달동안 서신이 안온 것이 무책임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흥.” 아골타는 묵묵히 그대로 서서 한참을 허공을 노려보다가 등을 놀려 히우루에게 묻는다. “건곤궁이 폐궁된지 얼마냐?” “예? 그거야...한 20년정도 아닙니까?” “27년째다.” “...오래되었군요.” “관리는 잘하고 있겠지? 듣자하니 새 첩을 들였다 하던데 그것으로 인해 건곤궁을 소홀히 하지 마라.” “지당한 말씀입니다.” 씩 웃어보인는 히우루는 걱정스럽게 말을 돌린다. “형님 정말로 얼굴색이 좋지 않소. 잠은 주무시고 계시오?” “듣기 싫다.” 딱잘라버리고는 높은 단상위로 오른다. 기다란 단상에 편히 앉으면 아래로 대려다 보이는 높은 계단이 아찔하다. 계단이 끝나면 환관들과 궁녀들이 서있는 긴 복도가 이어지고 커다란 두 기둥이 대전을 지탱하는 것이 보인다. 항상 이 대전에 서면 떠오르는 것은 수년전에 물귀신이 되어버린 사내의 환영. -내게서 당신에 대한 존경을 억지로 만들어내려 하지마시오. 그 검은 눈동자에 자신에 대한 경멸감만이 가득하다. “존경이라...” 턱을 괴고 눈을 감는다. 존경이란 어찌해서 나오는 것인가. 지금 저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향해 절을 하는 것은 존경이 아닌것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황제는 무언가를 다스리기 때문에 그들에게서 존경을 받는것이다. 적어도 황제인 자신이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분명 그를 다스렸다. 그런데 어째서 그는 날 존경하지 않았을까. 그것은 반역에 해당하는 것이다. “히우루.” “예?” “존경이 무엇이냐?” 히우루는 때아닌 아골타의 질문에 생각에 잠긴다. 딱 잘라 나올수 없는 질문이기 때문에 최대한 황제의 비위에 맞게 수정한다. “뛰어난 업적에 대해 경외감을 느껴 저절로 숙이는 것을 존경이라 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나는 존경할 대상인가?” “황제께서는 이 나라를 세우셨습니다. 그 이상의 거대한 업적은 나올수 없을것이 분명합니다.” “...” “황제의 이름은 태조가 되어 금을 잇는 모든 황제들에게 가장 위대한 인물이 될것입니다.” “정안족은?” 툭 던지는 그 한마디에 히우루는 아골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린다. 또 죽은 총인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구나. 고민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여진인에게는 나라를세운 영웅이지만 정안족이나 한족, 거란에게는 자신들의 평화를 깨고 땅을 앗아간 도둑놈이 아닌가. 존경이라니 당치도 않다. 경멸을 받는 것이 지당한 이야기인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아골타가 어째서 존경에 대해 묻는지를 이해하는 지금 그런 말을 했다가는 당장 좌천을 당하거나 목이 날아갈것이다. “남방의 근본없는 오랑케에게 받는 존경이 어찌 쓸만하겠습니까? 황제는 그들을 다스리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큰 은혜를 입는 것입니다. 당연히 황제를 존경해야하는 법입니다.” “...” “그들이 당신을 존경하지 않는 무지함을 관대함으로 받아들일수 있는 것 또한 존경을 받을 일.” “됐다.” 아골타는 식상하다는 듯 고개를 돌려버린다. “결국 그들에게 존경을 받기는 힘들다는 말이군.” “...” “아직도 생각하곤 한다.” 멍하니 대전의 허공을 바라보던 아골타가 피식 웃는다. “그가 날 존경해주었다면 결코 난 그를 가두어 두지 않았을 것이라고...” “...” “어떠냐?” “예?”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거야...” 말을 멈춘다. 히우루는 적어도 다른 이들보다는 아골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 총인이 황제를 따랐다면 그가 정말로 총인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해주었을까? 히우루의 대답은 아니다였다. 만약 그 총인이 황제를 따랐다면 그는 금방 그에게 실증을 내고 돌아섰을것이며 총인에게 자유를 준다는 것은 이미 그에게서 마음이 떠났다는 것을 말했다. 어쩌면 그가 황제에게 반항했기 때문에 황제는 그를 잡아둔것일지 몰랐다. 우리에 밀어넣고 동물을 사육하는 듯 한 그의 자기만족의 애정방식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이 모든 생각이 자신만의 오해일지도 몰랐지만 히우루는 그렇게 믿었다. 자신을 노려보는 황제의 검은 눈에 흠칫 뒤로 물러난다. “당연히 원하시는 바가 이루어질것입니다.” “당연하다.” 아골타는 등을 돌려 대전을 떠난다. 히우루는 뻐근한 목을 주물른다. 황제와의 눈싸움은 언제나 힘겹다. 후소는 진심으로 자휼의 손을 피했다. 오늘이 몇일째지? 앞에서 으르렁대고 있는 자휼은 이미 사람의 몰골이라고 하긴 위험한 상태였다. 전신에 동여진 붕대가 거진 풀어지고 채 아물지 못한 상처에서 피가 베어져 나왔다.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 거리는 모습이 미친 개를 연상시킨다. 후소는 바라보는 눈은 이미 혈족이고, 연장자이고, 선배임을 떠나 사냥감을 보는 듯한 맹수의 눈으로 변해있었다. 몹시 분노하고 있는 듯 그 안색이 창백하고 다가가기 힘든기운이 풍겨나온다. 그럴만도 할것이 죽을 고생을 하며 후소를 잡은게 벌써 두 번째이지만 처음은 제비 다리에 서신이 없었고 두 번째는 빈 종이였기 때문이다. 이번만은 결판을 짓겠다는 각오인지 자휼은 조금의 빈틈도 보여주고 있지 않았다. 성위의 병사들이 붕대를 날리며 달려가는 장군을 뒤돌아보기도 전에 둘은 성벽아래로 뛰어내려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자취를 감춘다. 아무렇지도 않는 듯 넘어지고 맞으면서도 끈질기게 따라붙는 자휼을 보고 후소는 웃고 만다. “이놈아, 그렇게 성을 지켰다면 네가 이지경까지 됐겠느냐!” 대답하지 않는 자휼은 앞을 지나가는 수례를 건너뛰어 후소를 향해 몸을 날린다. 닿지 않을거라 생각한다. 무모한 뛰기다. 하지만 뒷덜미에 충격을 받고 앞으로 밀린다. 손으로 잡지 않고 발로 차버린것이다. 위도 아래도 보이지 않냐. 후소는 화가 나지만 그것이 자신이 바랬던 것으로 생각하고 얼른 일어난다. 하지만 쫓는자가 더 빠르다. 자휼은 두 발을 사용하여 후소의 두 손을 밟고 힘들 준다. 장난이 아닌 공격에 후소가 놀라 얼른 손을 빼려하지만 자휼은 놓아주지 않는다. “새.” “흥.” 손이 밟힌 상태로 굴려 자휼을 깔고 일어난다. 주먹으로 그 얼굴을 호되게 친다. 턱이 빠질정도로 세찬 주먹에 잠시 아찔했는지 가만히 있던 자휼을 고개질을 하며 한손으로 후소의 주먹을 치고 그 목을 노린다 턱하고 목이 잡히자 손에 힘들 주어 목을 조인다. 아무리 장사라도 목을 노리면 힘을 쓰지 못한법이다. 후소는 손을 때어내야 한다고 생각하다가 문득 자신에게 깔린 자휼의 눈동자를 본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는 복잡한 눈동자가 마음에 든다. 물론 아직 자신이 원하는 자객의 눈은 아니지만 그에게는 이정도가 딱 좋다는 생각이다. 후소는 손을 내밀어 자휼의 목을 잡는다. 서로의 목을 잡고 힘을 준다. 장난이 아닌 듯 둘의 팔에 힘줄이 불거져 나오고 얼굴이 파랗게 질려온다. 이렇게 장시간 버티면 아무리 체력이 좋은 후소라한들, 만신창이가 된 자휼이든 죽는다. 하지만 서로를 노려볼뿐 손을 빼지 않는다. 숨이 막혀 눈동자가 떨리는데도 손에 힘이 빠지지 않는 자휼을 보고 적히 만족한 후소는 끝의 끝까지 갔다고 느낄정도로 힘을 주던 자휼의 손을 재빨리 내쳐버린다. 벌떡 일어나 숨을 몰아쉬며 진정한다. 자휼도 일어나려 애쓰며 컥컥거린다. 아직 숨쉬기 힘들어 컥컥거리면서 후소를 노려보며 일어나려는 자휼에게 후소는 웃어보인다. “졌다.” “...?” 후소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자휼에게서 두발 멀어진다. “서신은 네 베게속에 있다. ” “...뭐?” “처음 네가 날 잡기 위해 이층으로 올라왔을때부터 그곳에 있었다.” 하지만 믿는 눈치가 아니다. 자휼은 후소곁으로 한발 다가서나 후소는 한발 멀어져 거리를 유지한다. “잘했다. 네 놈이 여기까지 몰린 것이 고작해야 동생놈의 서신때문이라니 맥이 풀리지만 사실 그것이 좋은 건지 모르지.” “...” “난 도성으로 돌아가게 된다. 널 여기까지 몰리게 한 것이 나의 일이였으니까.” 후소가 눈앞에서 사라진다. 높쳤다는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 거리는 자휼의 뒤에 후소가 조용히 나타나 그목을 쥐고 한대 쳐 기절시켜버린다. 기절한 자휼을 땅에 천천히 눕히고는 웃는다. “유견님이 널 꽤나 좋아했을 것 같구나. 넌 좋은 놈이다. 뛰어난 놈이기도 하고. 이제는 더 이상 소중한 것을 상실하지 않도록 노력해라.” 후소는 함께 한지 일주일도 안되는 자신의 제자를 인정있는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켜 천천히 사라진다. 137 어째서 우관의 방에서 양만관이 나옵니까?” 자례와 익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익은 말하기 귀찮은 눈치였고 자례는 막관의 방문에 놀라 다른 방을 사용했다하기엔 자존심상했던 것이다. 막관은 두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그대로 고개를 돌려 서관으로 향한다. 막관이 사라지자 익은 자례에게 묻는다. “소문날것같지?” “글쎄요.” “내기하자.” “그럼 난 소문난다로.” “난 안난다로. 내기 품목은 휴가때 사오는거다. 난 주사위 놀이기구” “그럼 난 10년된 홍화주.” “그건 비싸잖아!” “주사위 놀이기구 사려면 기루에 들어가야하잖아요!” 둘은 작게 언성을 높이면서 서관으로 들어간다. 낭관이 소란스러운 둘을 보고 헛기침을 한다. 둘은 얼른 서로의 책상에 앉아 필본책을 뒤적거린다. “우관, 막관. 잠시 내방으로 오게.” 영문을 모르는 자례는 일단 막관과 함께라는 소리에 흠칫경계한다. 그모습에 익이 어깨를 툭치며 중얼거린다. “야, 사람 무안하게 그런 표정하지마.” “왜요? 제 표정이 어떤데요?” “못볼 것을 봤다는 얼굴이잖아.” 그말에 자례는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가 잠시후 손을 내린다. 거짓말처럼 표정이 변한다. 익이 웃기다는 표정을 짓자 낼름 혀를 내밀어 보이고는 낭관의 방으로 들어간다. 낭관의 방으로 둘이 들어가자 남은 비서랑들은 수군수군 자신들만의 추측을 이야기한다. 낭관은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는 자례를 보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둘이 책상앞에 서자 낭관은 비단으로 싸여진 두개의 상자를 가리킨다. 굉장히 중요한 것인 듯 그것은 단단히 동여매여 있었다. “이것은 이름을 밝힐수 없는 분께서 요구하신 것이다. 듣자하니 오래된 고서같더군. 이것을 복원하여 필본하는 것이다.” 낭관은 두 비서랑에게 상자를 각각 한개씩 밀어준다. “원본을 잃어버리면 안되는 중요한 것이다. 신신당부하셨으니 두 사람은 정신차리고 원서가 손상되지 않도록 신경쓰게. 그 내용을 남에게 알리지 않고 비밀히 마쳐주게.” “알겠습니다.” 둘다 상자를 안고 방을 나온다. 낭관이 나가려는 두 사람에게 덧붙인다. “시간 제한은 없지만 누가 더 빨리 해가지고 오는지 기다리겠어.” 밖으로 나온 막관이 자례를 보고 웃는다. 역시 나이가 비슷해서 그런가 웃는 표정이 그렇게 밉지는 않다. 자례는 상자를 한손으로 옮기고 편안하게 말한다. “나는 이것외에도 필본할것이 밀려있으니 막관이 먼저 하지요?” “우관은 나이가?” “음? 아, 21이네.” “그래요? 전 19입니다.” “정말로?” 막관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자례를 어림잡아보고 웃는다. “형님이셨습니까? 보기보다 동안이시군요.” “그러게. 난 막관이 나보다 좀더 살았을줄 알았지. 그보다 19에 입관이라니 굉장히 빠른 나이군. 막관은 천재인가 보오.” “흠. 그말을 정식 시험을 보고 들었다면 몹시 기뻤겠지요. 암튼 기분나쁘지는 않습니다.” 자례가 덧말을 붙이려고 막 입을 열려 하는데 어디선가 날아온 종이뭉치가 머리를 톡치고 발아래로 떨어진다. “야, 학고청 당번! 종이가 떨어졌어!” 익이 종이를 든 손을 흔들며 투덜댄다. 익에게 인상을 써보인 자례는 막관에게 묻는다. “일단 이것을 성각헌에 가져다 놓아야 할 것 같은데 같이 갈텐가?” “그러지요.” 투덜거리는 익을 무시하고 성각헌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따뜻한 봄날씨가 마음에 드는지라 아무말없이 바람을 즐긴다. 막관도 같은 생각이였는지 눈을 반쯤 내리깔고 아무말하지 않는다. “날이 따뜻해져서 기분이 좋아집니다. 저는 추운날을 싫어하거든요.” “나도 그래. 하지만 나는 눈이 내리는 겨울도 싫어하지 않네.” 단지 내몸이 그 추위를 견디지 못하니까 피하는 것뿐이지. “가끔은 추위에 입김이 하얗게 불어나오는 날의 정갈함과 고요함에 감탄하고는 하지.” “흠. 그렇습니까. 저는 여름에 태어나서 그런지 겨울이 좋아지지 않더라구요.” “막관은 여름에 태어났나? 여름에 태어나면 키가 크다는게 정말인가보지.” 막관은 낮게 웃는다. 역시 웃으면 아직 앳된 인상이 보여 그에대한 감정이 조금은 누그러진다. 어느덧 성각헌에 다 오자 둘다 서로의 방에 상자를 넣어두고는 문을 걸어잠근다. 자례가 문을 확인하는 것을 본 막관은 궁금하다는 듯 묻는다. “오른편의 문은 안사용하시는군요?” “음. 한쪽문만 사용하기로 했지.” 자례는 문이 단단히 잠겼는지 확인하고 학고청으로 발을 옮긴다. 막관이 따라나와 함께 걷는다. “학고청 당번이시군요. 특별히 할일이 없으니 도와드릴까요?” “맡고 있는 필본이 없나?” “안타깝게도. 낭관은 나에게 일반 필본은 주지 않는군요.” “...” “가끔은 제가 어리석게 생각이 들기도 해요. 그냥 집에서 책이나 보고 있을걸 그랬다는 생각을 가끔해요. 여기서도 집처럼 책만 읽으니까요.” “그러게 생각하면 관리의 생활을 재미없지.” 자례는 잠시 생각해보고는 진심으로 말해준다. “관리라는 것은 어찌보면 정말 할일없는 사람들이네. 나 하나 움직이지 않는들 일이 안돌아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흔히들 스스로 움직이지 않기가 쉬워. 하지만 스스로 움직이는 자들에게 관리란 신분은 처리하기 곤란할 정도로 일이 쌓이는 것이네.” “스스로 고생을 자처할 필요가 있을까요?” “화원을 감상하는 사람은 그 꽃이름도 외울수 없는 법이지만 화원을 가꾸는 자들은 꽃에서 씨를 얻어내는 법이지. 결국 스스로 움직이는 자만이 수확하는 법이야.” “...왠지 절 책망하시는 것 같은데요?” “그렇게 들렸다면 할수 없는 일이지. 하지만 막관, 그 누구도 영생을 살수 없다네. 그 어느때인가 바람이 불어 우연하게 하늘로 날아오르길 바란다면 어리석은 일이야. 시간은 누구도 멈출수가 없지 않나.” “흐음.” 학고청의 잘 마른 종이를 걷어내 둘둘 말고 있는 자례를 바라보던 막관은 시큰둥한 표정이다. 서너개정도 더 말아 챙긴 자례가 그에게 묻는다. “왜 표정이 그렇지?” “우관은 제 생각과는 좀 다른 사람이군요.” “뭐? 그럼 날 어떻게 생각하고있었는데?” “그야...약관의 나이에 장원이니 어느정도는 자존심이 세고...처음 보았을때 창백한 안색에 눈이 올라가 있어 보통 깐깐한게 아니라 여겼고...방안에 들어갔을때 화를 내는 것을 보아 신경질도 잘 부리고...독초를 키우는 뭔가 괴별난 사람이라 생각했죠.” “뭐라고? 하하하.” 자례가 고개를 돌리고 마구 웃는다. 정말 환하게 웃는 웃음이라 듣는 막관이 민망해진다. “언제는 감정에 미숙하다 해놓고는...” “미안. 하지만 막관은 정말로 보기보다 어린걸까? 생각하는게 몹시 귀엽군.” “그 정도 입니까?” “틀린 것은 아니야. 하지만 모두들 어느정도는 생각하고 있는 것에 따라 성격을 만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을 뿐이네.” “흠. 위장이라는 것이죠. 하긴 저도 때가 아니라 느껴 이렇게 허송세월을 보내고는 있지만...” 그 말에 자례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며 생각에 잠긴다. “나에게 묻고 싶었던게 그건가?” “흠. 역시. 눈치빠르신 분. 절 실망시키지 않는군요.” 막관이 자례대신 종이들을 품에 안는다. “이 중국의 드넓은 땅은 천자께서 우리 한족에게 내린것. 비록 대세가 혼탁하여 저 먼 초원의 오랑캐들이 드나들고 있지만 모든 것은 사필귀정, 하늘은 한족을 버리지 않을것입니다.” 막관이 당당하게 한손으로 하늘을 가리킨다. “하늘의 대신하여 이 대륙을 다스리는 황제는 하늘의 아들, 그는 선택받은 한족이여야만 합니다. 지금 현 황제의 자리를 차지한 들개가 곧 청벌을 받을때가 다가왔으니 지금시대에 태어난 재인(才人) 과 천재(天才)들이 당연 올바른 황제를 옹립해야 될 때가 아닙니까?” “...” 자례는 미소지었다. 다가가 막관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조용히 말한다. “막관, 연인이 계신가?” “예?” “막관은 참으로 미남이니 뭇 여인들이 자네를 싫어하지는 않겠지.” “갑자기 무슨...?” “이렇게 좋은 봄날이니 여인들이 치장을 하고 물가로 나올것이네. 좋은 여인을 만나 머리를 식히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슬쩍 웃은 자례가 막관을 두고 서관으로 발길을 돌린다. 뒤에서 불만을 토하며 따라오는 막관은 포기하지 않을 것 같은 오기가 보인다. 곧 황제가 죽는다? 자례는 발걸음을 빨리하며 서관의 200계단을 오르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차기 황제는 누가 될것인가? 목래가 불타고 억류되었던 계명의 집에서도 생각한 일이다. 하지만 그땐 궁안의 사정을 잘 몰랐던 때고 지금, 왕자들을 만나니 좀더 생각이 복잡해진다. 2왕자는 자신만의 사람들을 모으고 있다. 4왕자는 황제가 되고 싶어하지 않아. 14왕자는 황제의 꿈을 4왕자에게 의탁하려 한다. 그리고 한족을 섬기겠다는 자신보다 어린 천재. 그게 다인가? 이것으로 보자면 대세의 흐름을 타 2왕자가 황제가 될 가망성이 높다. 하지만 결국 태자를 정하는 것은 황제인 아골타이다. 자례는 황제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결국 원점인가. 갑자기 고개를 설래 설래 젓는다. 누가 황제가 되던 자신과는 상관없는일이다. 손을 깍지껴 가슴앞으로 힘껏 밀어본다. 두둑하고 울리는 날개뼈가 시원해진다. 모든 것은 잘될것이다. 결국 그렇게 될것이다. 여관은 빈방을 닫았다. 왕씨는 없었다. 어디론가 나가버린 것 같았다. 허리띠를 동여매며 여행차비를 준비하는 백라가 저 멀리 우물가에 보인다. 조용히 그에게 다가가 바라보자 백라가 그 마른 얼굴로 웃어보인다.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저보다 여관께서 더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물론입니다.” 여관은 고개를 끄덕여보인다. 백라는 앞으로 가야할길을 가늠하는 듯 잠시 생각에 잠긴다. “어디가셔서 그것을 찾아오실생각입니까?” “애초에 있지도 않는 것을 찾아오기는 무리입니다.” “그러시다면?” “여관께서 짐작하시는 대로 시간을 낚아오면 되는것이죠. 이거, 저만 계속 편안 일을 하는 것 같아 부담스럽습니다. 하하하.” 만족스런 말이였는지 여관은 고개를 숙여 백라에게 여행의 인사를 건낸다. “좋은 여행이 되시길.” “감사합니다.” 넙죽 여관에게 인사한 백라는 가벼운 걸음걸이고 다시 도성을 나선다. 왕씨의 의심은 쓸데없는 것이다. 왕씨가 태어날 때 여관과 자신은 그 옆방에서 탄생의 순간을 기다렸다. 걸음마를 할때부터 첫 글을 읽을때까지 여관과 좌보는 항상 그 곁을 지켰다. 왕씨의 부모님, 전대의 왕씨는 비록 그 태생을 밝히지 못하고 시장에서 채소장수를 했지만 그 전대의 왕씨는 자신의 할아버지의 보호를 받고 자랐으며 그 전대는 여관의 증조할아버지의 보호를 받았다. 자신에게 전해지지 않는 그 전대로 거슬러 올라가더라도 왕손들은 어느 순간에도 좌보나, 우보, 왕비족의 보호를 받고 있었음이 분명해 엉뚱한 타인을 왕손으로 착각할리는 만무한것이다. 하지만 그토록 악몽을 꾸는 일은 처음이였기 때문에 좌보는 아무말없이 이 여행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일단은 유번님부터 만나볼까.” 백라는 자신의 검은 말을 끌고 나와 곡양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138 조금 쓰린 듯 어깨에 한손을 올렸던 자휼은 곧 빙그레 웃는다. 상처투성이가 된모습으로 웃음을 참으려는 모습이 괴기스러워 마고가 헛기침을 한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아무것도.” 등을 돌리며 자휼이 서신들을 정리한다. 마고는 자휼의 등에 얼핏 핏자국이 점점 커져가는 것을 느끼고 놀라 말한다. “수해, 등에 치료하지 않는 상처가 있는 것은 아닙니까?” “응? 아아, 아니다. 신경쓰지마.” “이리와봐요.” 마고가 싫다는 자휼을 잡아 옷을 벗긴다. 사실 그정도의 핏자국에는 별 신경쓰지 않지만 자휼인지라, 더군다나 멀쩡한 팔이 달린 어깨에서 나오는 피라 민감해진다. 나머지 팔하나를 잃는다면 그가 어떻게 장수의 길을 걷는단 말인가. “이건 뭡니까?” “응? 아아 연비다. 아직 피가 나오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래.” “흐음.” 손수건으로 피를 닦아내고 글을 읽는다. “흉중생진 천애여비린(胸中生塵 天涯如比隣)이라...” “이상한 생각하지마라. 정인이 보낸 것은 아니니까 말이야.” “그래요? 아무튼 굉장히 유려한 글씨군요.” “그렇지? 그놈이 글을 잘쓰긴해.” “그 놈?” “아아, 내 동생이다.” 그말에 마고가 고개를 끄덕인다. 전에 헤어졌다는 동생을 말하는 것인가보다. 피가 멎도록 손에 힘을 주어서 어깨를 눌러준다. 새삼스럽게 전보다 몸이 단단히 단련된 것을 느끼고 놀란다. “몸이 전보다 많이 좋아지셨군요.” “으음. 아침마다 달리고 있거든. 요즘은 예전보다 더 빨라졌어. 너랑 뛰어도 지지 않을걸?‘ “어떤 이유가 자휼을 부지런하게 만든걸까요?” “안 죽으려고.” 자휼이 담담하게, 하지만 강하게 말한다. “안 죽고 오래오래 살아서 하고 싶은거 하려고. 어때? 마음에 드냐?” “흐음.” 손수건을 치우며 마고가 생각에 잠긴다. 그러나 문득 자휼에게 고개를 푹숙이고 중얼거린다. “나도 있어요.” “뭐라고?” “나도 연비가 있어요. 목깃사이로 등을 봐봐요.” 그말에 자휼이 마고의 목깃사이를 들여다 본다. 정말로 등가운데에 검은 연비가 보인다. 둥근 모양인것처럼 보이지만 정확히 뭔지는 알수 없다. “그게 뭐지?” “나도 몰라요. 등에 이것이 있다는 것을 철이 들때야 알았죠. 이상하죠? 기억도 없는데 등엔 이런게 남아있다니.” “옷을 벗어서 내가 그것을 보면 안되나?” “...안될 것은 없지만 보여주고 싶지는 않아요.” “왜?” 마고는 고개를 들어 옷깃을 여민다. 약간은 서글픈, 부끄러운 눈이 시선을 피한다. “거란인들은 노예를 잡으면 머리를 깍아요. 노예가 탈출하면 한쪽 귀를 자르고 등에 화점을 찍어요.” “그건 화점이 아니야. 화점은 그런식으로 검게 생기지 않는다.” “그렇게 말해주면 고마워요. 하지만 싫어요.” 그말에 자휼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난다. 하지만 탐탁한 표정은 아니다. 옷깃을 잡고 있던 마고가 빙그래 웃는다. “굉장히 강해진 느낌이군요. 예전과는 사뭇다른걸요.” “글쎄. 잘은 모르지만 목적이 생긴듯한 느낌이라...” 피식 웃은 자휼은 연비가 그려진 어깨를 으쓱한다. “동생분도 연비를?” “그건 몰라. 사실 안했으면 좋겠어. 안그래도 피토하는 놈인데 이런 것으로 쓸대없이 피흘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몸이 많이 병약한가요?” “...네 마음 만큼은 아냐.” 마고의 어깨를 툭치며 자휼은 방을 나간다. 생각보다 너무 오래된 문서라 종이가 삭아있었다. 세월의 흐름보다는 누가 태우다 물에 넣어 살려낸 듯 다닥다닥 붙어있고 살짝 때어내도 종이가루가 바스라져 떨어진다. 간혹 페이지를 기어나오는 종이벌레에 결국 그것을 들고 성각헌의 마당으로 나가 햇빛에 말린다. 앞에 편히 앉아 벌레가 떨어지길 기다린다. 지루한 시간이 가는 때 반가운 손님이 찾아온다. “화선부인.” “오래간만입니다. 우관.” 화사한 장미꽃을 수놓은 옷을 곱게 입은 화선이 그 꽃처럼 웃으며 다가온다. 살짝 살짝 걸어온 그녀는 자례의 옆에 있는 쓰레기에 뚱하니 말한다. “왠 쓰레기입니까?” “아아, 이것은 고서입니다. 벌래가 나와서 햇빛에 말리고 있던 참이에요.” “어머나 벌래? 아버님이 보시던 책들에도 벌래가 나왔었는데.” 낮게 웃던 화선은 즐겁게 이야기 한다. “아버지는 나랑 놀아주지 않았어요. 그야 내가 너무 어려서 그랬겠지만 다른 집은 딸이 서원에 다닐수 없으니 부모가 글을 가르쳐 주잖아요? 전 아버님이 불러오신 선비님께 배웠지요. 간혹 아버지를 훔쳐보기 위해 방으로 들어가면 책장에서 이런 벌레가 기어다니는 것을 보고 기겁을 했다니까요.” “고서를 많이 가지고 계신가 보군요. 하지만 보통 그런 귀한 고서라면 잘 관리할텐데.” “흐음. 아버지께서는 그런 고서를 몹시 귀하게 여기셔서 밖으로 내보내지 않았어요. 내가 들어가서 읽다 들키면 몹시 혼났는걸요.” “그래요.” 화선은 팔다리를 바둥거리며 기지개를 핀다 . “따뜻한 햇살이죠. 곧 여름이 와서 뜨거워 질텐데... 궁안에 와서는 물놀이 한번 못가고...어서 황궁을 나가야 한다니까요.” “황궁을 나가다니요?” “아이참. 우관은 잊었어요? 난 어머니가 되요. 그럼 내 서공께서도 아버지가 되겠죠. 왕자는 아이가 생겨 가족을 부양하는 시기가 오면 태수로 승격이 되어 황성을 나간답니다.” “아아...” “좋은 곳으로 갔으면 좋겠어요. 물놀이를 할수 있는 곳으로. 나 사실 더위를 굉장히 잘타거든요. 우관은 어때요?” “저도 더위를 잘탄답니다.” “어머, 그래요?” 화선은 빙긋 웃으며 주위를 두리번 거린다. 함께 왔던 시녀들이 의자를 가져온다. 그곳에 앉아 화선이 묻는다. “나 앉아서 할께요.” “그러십쇼. 몸이 무거워질테니까요.” “흠. 아직 그러진 않지만 곧 그렇게 되겠죠. 예전엔 황궁에서도 물놀이를 했다는데 이젠 그런 구경도 못하니 좀 섭섭하네요.” “예?” “아버지의 책에서 읽었는데 어떤 왕이 자신을 총애하는 후궁을 위해 거대한 호수를 황궁에다 만들었다면서요. 하얀 돌만 깔아넣어 인어를 키웠다고 나오잖아요. 정말로 인어는 진주만 먹고 사는 걸까요?” “하하, 그건 아마 이야기책같군요. 인어라니요. 그런게 있을리가요.” “아아 역시 그렇구나. 아쉽네요. 하지만 건곤궁의 물뱀은 진짜잖아요?” “물뱀?” 화선은 힐끗 유모와 시녀들을 바라보고는 자례에게 다가오라는 손짓을 한다. 그리고 아주 작게 소근 거린다. “황제의 비궁이라는 건곤궁엔 건호라는 호수가 있는데요. 지금 황제가 총인을 위해서 호수 전체에 백련을 심어줬었데요.연꽃을 황제가 비싸게 사니 사람들이 연꽃을 구하려고 자신의 자식을 사고 팔고 했다나요?” “으흠.” “팔려가기 싫었던 아이들이 연못에 빠져 자살했는데 그 원혼이 연꽃에 서려있다가 건호에서 뭉쳐 거대한 물뱀이 되었죠. 그리고 자신을 그렇게 죽게 만든 총인을 삼켜버린거래요. 어느 환관이 봤데요. 물뱀의 몸통이 커다란 아름드리 나무보다 두꺼웠다고 하던걸요.” 자례는 미소지었다. 거짓말이 분명했다. 그래도 그것을 진심으로 믿고 있다는 화선에게 미안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정말이에요. 건곤궁에 귀신이 나온다는 사실은 우관도 한번 정도는 들어보지 않았나요? 그 물뱀이라구요. 자꾸만 사람이 물에 빠져 죽어서 황제가 그 궁을 폐궁했답니다.” “그렇군요.” “사실은 그래서 다른 총인들이 건곤궁을 포기한거라구요.” 소근 소근 말을 마친 화선은 유모의 눈치를 본다. “우리 유모는 내가 우관과 이야기하는 것이 못마땅한가봐요.” “유감이네요.” “아쉽지만 이만 일어나야겠어요. ” “재미있는 이야기책을 하나 써드릴까요?” “정말로요!” 너무좋다는 표정을 지으며 화선이 자례의 손을 잡는다. “고마워요. 사실 그 이야기를 하려고 왔는데 그냥 잊고 갈뻔했네요.” “그럼 나중에 뵙지요.” 화선이 손을 흔들며 사라진이후에야 자례는 히식 웃고 만다. 물뱀귀신이라니 터무니 없는 이야기가 아닌가. 그들이 사라지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막관이 터벅거리며 걸어온다. “아름다운 여인이군요. 높은 신분 같은데 누구입니까? 공주인가요?” “아냐. 신경쓰지 말게. 막관도 책을 말리려 왔나?” “예. 이거, 너무 오래되어서 벌레 때문에 못하겠네요.” 막관이 햇빛에 자신이 받은 책을 벌려 놓는다. “우관, 혹시 받은책에 표지가 있었나요?” “아니. 나도 없었네. 자네도 없었군?” “예. 표지가 없으니 사라진 페이지에 대한 것을 어디서 잘라와야 하는건지.” “이건 요나라때의 관명부와 그에따른 계보야.” “예?” 자례는 별것 아니라는 듯 말한다. “자네 책도 아마 내것과 비슷할꺼야. 연호와 배경 그리고 공훈과 약간의 호적 적혀 있지?” “관명부라고 하기엔 내용이 너무 조잡합니다. 일단 관명부라면 이름과 생년월일이 기록되어야 하는데 여기엔 없어요. 황제의 연호도 순서대로가 아닌 뒤죽박죽이고 마치 영웅서 같이 공훈과 기록들만 잘라 오려논것같은걸요. 이것 혹시 영웅서의 원본이 아닐까요?” “아니 이건 관명부의 사본일꺼야.” “사본?” “왜 그런 것 있잖아. 이중 장부. 연호는 다르지만 자세히 읽어보면 동일인물에 대한 기록인 것을 알수 있어. 얼핏봐서는 영웅서 같지만 그러기엔 영웅의 이름이 나오지 않았는데다가 기록날짜가 정해져있지 않아.” “하긴, 영웅서라면 공훈날짜가 적혀야 하는데 이곳은 연호만 적혀있어요. 정말로 관명부의 기록인 듯?” 막관이 이해한다는 얼굴로 말리고있는 고서를 보고 진지한 표정으로 변한다. “그렇다면 이건 요나라때 만들어진 관명부의 원본이군요? 이건 대단한 겁니다! 이것을 완전히 풀어내면 현 관직자들의 약점을 한손에 쥘수 있는거에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당연하지요! 원래 관직이란 것은 재산과 같아 애초에 가지고 있던 사람만이 가질수 있는 것입니다. 즉 나라가 교체될 시기 수 많은 관리들이 그대로 퇴거될 수는 없어요. 새 권력자가 새로운 천재를 찾기 보다는 이미 천재라고 공인된 자를 끌어들이는데 손쉬운 일이니까요. 하지만 요에서 금으로의 전환은 혈통의 변환, 거란에서 여진으로 변한겁니다. 그러니 관리도 모두 퇴거될 수밖에 없었죠. 하지만 누군가 이렇게 관명부를 조작해 황궁에 사람들을 남긴겁니다.” “응.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기존에 있던 관명부에서 황궁에 남게한 사람들의 것만 추려서 버린것이지. 그럼 그는 관적이 없는 새사람으로 되어버리니까.” “그럼 이것을 누가 맡긴걸까요? 이런 중요한 것을 황제의 사람인 비서랑들에게...” “위험하지.” 자례가 책에서 나온 벌레를 한발피하며 중얼거린다. “누가 이걸 비서랑에게 맡겼을까?” “왕자들 중 하나겠군요.” “왜?” “그야 새 황제에 등극하기전 부왕을 모시던 관직자들의 과거를 속속히 알아야만 훗날 후회가 없을테니까요. 어떤 황제도 계속 다른 황제를 모시는 신하들을 좋아할리 없지 않습니까. 신하도 여인과 같아 첫혼인이 끝나면 그 값어치가 떨어지는 것이니까요.” “그럼 막관은 누구같아?” “역시 지금 이런 중요한 문서를 가질만한 권력과 힘을 가진 자는 2왕자가 뿐이겠지요. 4왕자는 이런식의 머리를 쓰는 자가 못되고 유배된 5왕자가 여기까지와서 책의 판독을 물어볼 리가 없어요. 6왕자는 지방태수로 만족한지 오래라 이런 일을 저질렸을 리가 없고 그 이후로 볼만한 놈은 14왕자인데 그놈은 현재 4왕자가 이주할 성을 알아보느라 이런 일 할 정신이 아니에요.” 자례는 그말을 듣고 물끄러미 막관을 바라본다. 홀로 진지하게 생각에 잠긴 막관이 고개를 들어 그 시선을 묻는다. “왜요?” “아니. 왜 3왕자는 빼는건가하고.” “3왕자는 아니에요.” 막관은 딱잘라버린다. “어째서?” “3왕자에게는 이런 판본을 해독할만한 인재들이 있어요. 태수가 되어 조용히 있는데 이런 문제를 황궁까지 끌고올 인물이 아닙니다.” “...그래?” 막관은 3왕자를 모시는가. 뭐라 설명하는 막관의 말이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잠시 생각을 가다듬던 자례는 막관의 입을 막고는 조용하게 말한다. “이 책은 황궁안에서 건내진것이야. 내용을 보아 분명 황제의 권력을 원하는 자가 책을 구했을것일테지. 하지만 내생각엔 왕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분명 2왕자가 가장 근접하지만 더욱 근접한 사람이 있지 않은가?” “예? 누가요?” “황제.” 그말에 막관이 벌떡 일어나서 좌우를 살피고는 다시 내려앉는다. 말도 안된다는 표정이다. “관명부의 조작은 황제가 지시했을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네 어째서 지금에와 다시 원상복귀한다는 것이죠?” “그래. 그것으로 보아서는 황제가 아닐가능성이 커. 그렇다면 그 밑사람으로 할수도 있지.” “...황제의 친동생 헌안공?(憲按:법을 만지는 자)” “으음. 헌안공이라 불리는가.” 자례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 이름을 외운다. 육관은 헌안공이라 불리는군. 막관은 자례옆에 앉아 좀더 생각을 해보고는 묻는다. “그렇다면 헌안공이 황제의 꿈을...?” “...그럴 사람 같지는 않은데...” “예? 헌안공을 만나뵈었나요?” “아니, 아니야. 말이 헛나왔네. 다른 사람을 생각했어. 헌안공이 이 문서를 번역하는 것은 어쩌면 단순한 호기심일지도 몰라. 아니라면...” “아니라면 혹시 태자옹립의 문제가 아닐까요? 왕자들에게 접근해 불화를 일으킬만한 관리들을 미리 내치려는 속셈일수도, 아니라면 이미 태자가 정해진 상태에서 그 왕자에게 해가 될만한 관리들을 미리 정리하려는 속셈일수도 있구요. 황제가 그에게 위임할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거 그럴듯하네.” 자례와 막관은 물끄러미 발아래에 있는 꼬질꼬질한 고서를 바라본다. 세상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이런 벌래꼬이고 쾌쾌한 냄새나는 종이쪼가리에 이 광활한 대지를 다스릴 자의 꿈이 담겨있는것이다. 139 호북태수 곽학정은 처음으로 분노하게 되었다. 그의 자존심이 이렇게 부셔지기는 처음이였다. 차라리 정식으로 싸워 지기라도 했다면 패장이라는 이름을 쓰고 자결이라도 할텐데 그렇지도 못했다. 일방적인 기습, 일방적인 공격, 일방적인 탈취. 그리고 유유히 사라져버렸다. 처음엔 화적때인줄 알고 근처의 주성에 서신을 보내 화적들을 추격해 달라는 공문을 보냈으나 모두들 뚱한 답장이였다. 화적비슷한 사람들도 지나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장수들을 시켜 발자국을 따라 추격한 결과 너무도 어이없는 결론이 나왔다. 그들은 무려 자국의 병사들이였던 것이다. 호북관문을 받고 있는 대장군 오걸매라고 했다. 장수들은 그가 황제의 의붓동생임을 알려주고 일을 덥어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괜히 황제를 성나게 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분노는 이미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기엔 너무 늦어있었다. “자국의 성을 공격한 것은 황제에 대한 반란! 역적죄요, 게다가 나의 사람을 유괴한 죄 감당치 못한다!” 그는 즉시 상소를 작성하라 명령했다. 몇일 후 상소가 완성되자 빠른 말과 사자를 통해 도성으로 올려보냈다. 악가의 마나님은 되돌아온 병사들을 확인하고는 한숨을 쉬었다. “생각보다 희생은 없었지만 뭔가 남는 싸움이 아니여서 좀 그렇군.” “전쟁이라는게 항상 부획물이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오히려 병사들이 무사하다는 것을 좋다 여겨야지요.” 부관의 말에 마나님은 미소짓는다. “늙은 여인의 습성이 어디로 가겠는가? 어떤 일을 하면 반드시 뭔가 남겨야 한다는 것이 어머니의 생각일쎄.” “알고 있습니다.” “우리 손주는 어디서 놀고 있나 몰라. 이젠 슬슬 돌아와도 별상관 없을텐데 말이야.” “을노 장군님에게 여쭈어 보시지 않고요.” “그는 전혀 모르는 눈치던걸. 아니 알아도 이야기하면 안된다 여기면 무슨 수를 써도 말하지 않는 사람이야.” “그렇지만 도련님이...” “어디서 쉽게 죽을 아이는 아니잖아. 걱정말고 기다리지.” 마나님은 단 과자를 입에 넣고 오물거린다. 정말로 하나 남은 손주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을노는 정말 모르는 눈치던데. 한숨을 쉰 마나님은 뒤로 등을 기대며 나몰라라 해버린다. 워낙에 악운에 강한 아이다. 그러니 별 걱정안해도 된다. 악운은 오래간만에 보는 자례의 모습에 손을 흔들었다. 아직 자례는 자신이 보이지 않는지 묵묵히 걸어오고 있다. 주위를 둘러보다가 사방에 널려 있는 종이를 한 장 잡아 구겨 공을 만든 후 저 아래 걸어오는 자례에게 던진다. 툭하고 자신의 앞에 하얀 무엇이 떨어지자 황급히 뒤로 물러났던 자례는 그것이 종이라는 것을 알고 고개를 들어 악운을 본다. 반갑게 손을 흔드는 악운이지만 자례는 그냥 멀뚱히 바라보다가 2왕자의 남파궁으로 들어온다. 어라하는 생각으로 아래층으로 내려가 자례앞에 서니 자례가 반갑게 인사한다. “안녕하셨어요?” “뭐야, 너. 아까는 본체 만체하고.” “예? 아아, 아까 종이를 던진 사람이?” “그럼 누구라고 생각했는데?” “안보였어요. 이렇게 어두운데 3층에 있는 사람이 보일 리가 만무하지 않습니까.” “쳇. 나는 그럼 귀신 눈이라도 달고 있다는 거냐?” 별일 아니지만 투닥투닥 그일을 가지고 말싸움이 시작된다. 조금 후 2왕자가 나와 둘을 보고 웃는다. “안으로 들어오게.” 2왕자를 따라 안쪽방으로 들어가면서 악운이 소곤거린다. “곧 있으면 2왕자의 생일이라는군. 선물로 귀한 술이 들어왔는데 함께 마시자고 부른거다.” “그래요? 별것 아닌 일인데...저까지 부르다니.” “실은 널 불러달라고 내가 말했지.” “왜요?” “마고라는 사람에 대해 들은게 있어서 이야기해주려고.” 그말에 자례가 고개를 돌려 옆에 걸어가고 있는 악운을 바라본다. 악운은 눈을 찡끗하고는 주위를 살핀 후 말해준다. “마고라는 사람은 5왕자의 가신이래.” “5왕자의 가신?” “그래. 그정도 뿐이야.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군.” “고마워요.” 편한 미소를 지어보이자 악운도 답례로 웃어보인다. “너는 새야.” “예?” “넌 황궁이란 새장에 갇혀살수 없는 새야. 무슨 일로 들어왔는지 이해하지도, 네가 말해줄리도 없지만 명심해라. 새는 날지 못하면 어느순간 죽어버린다. 깨끗한 물이 흐름을 멈추고 어느순간에 썩어버리는 것처럼 순식간의 일이야.” “예.” “실은 황궁에 들어온 이유인 네가 참 괴씸하게 여겨졌지만 여기도 어느정도 익숙해지자 생활할만 하더라. 하지만 그것은 밤 쥐인 나에게만 가능한거겠지. 네 날개가 더 이상 날지 못하기전에 이곳을 나가야 할꺼야.” “...여기서 나가면 을노장군을 찾아가실건가요?” “으응? 거기까지 내가 말했나?” 악운이 머리를 긁적거린다. 쑥쓰러운 모습이다. “뭐, 일단은 만나뵈어야지. 그분의 동생과 약혼이 되어있는데 만나뵈어야 하는게 아니겠어?” “...아마도 동생분은 살아있지 않을겁니다.” “알아. 뭐 어쩔수 없지. 여자로치자면 망문과부(望門寡婦약식후, 상대가 죽어 성혼안되고 과부가 된 여인)가 된건가.” 조금은 씁쓸하게 말하는 악운은 예상하고 있었던 것인지 그 이상의 동요는 나오지 않는다. “뭐, 그래도 형님은 형님. 만나는 본다. 뭐 전해줄말이라도 있냐?” “몸 조심하라 전해주세요.” “그래.” 작고 깨끗한 방으로 들어간 둘은 레이첸과 술상을 마주대로 앉는다. 시종들도 물린 체 향긋한 술을 기울인다. 나이에따라 한잔씩 돌아간 후 작고 큰 이야기를 나누다 간랑의 이야기까지 간다. 체이첸이 묻는다. “어떤가? 그 막관이란 사람은?” “영리한 천재입니다.” “하긴, 사마가의 사내니 똑똑은 하겠지.” “...그가 사마씨입니까?” “그래. 본명은 사마주(司馬 主). 지금은 보잘 것 없어진 패국의 황족이지.” “사마씨... 삼국을 통일한 그 사마소의? 진나라 황실의 후예라는 건가?” “그렇게 되겠죠.” 악운이 약간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 체이첸은 자례를 보며 당부한다. “그 사람, 주인이 있는 몸이다. 내가 알기로는 3왕자 태천의 휘하에 지내고 있다가 이번에 아버지의 힘을 빌려 간랑으로 올라온것이지.” “잘 알고 계시는군요?” 어느정도 막관의 정체에 생각하고 있던 참이라 그다지 놀라지는 않는다. 오히려 막관에 대해 더 잘알고 있는 체이첸이 놀랍다. “그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인 대홍로를 조금 알아. 황제가 나라를 건국하고 관리를 입관시키는데 그를 일부러 남겼거든. 나중에 그것에 흥미를 가지고 그를 살펴보다가 알아낸거지.” 체이첸은 자례에게 경고한다. “그에게 다가서지 말게. 자네와 비등한 천재이니 잘못 했다간 자네쪽에서 당하는 수가 있을 것이야.” “그에게 별다른 흥미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 간랑이라 신경쓸줄 알았지.” “그보다 3왕자를 모신다하는 것은?” “아아, 3왕자 파공(坡) 지금 양인성의 태수로 있는 의붓동생이지. 그는 한족의 피를 가지고 있다. 후궁중 하나인 복산씨(宣憲皇后 僕散氏)의 첫 아들이지.” “그렇다면 황자가 되기엔 조건이 부족한 사람이군요. 그런데 어째서 막관이 그를 섬기는 것일까요?” “모르지. 그래서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으면 하네” “...다가가 알아보라는 것이 아니라요?” 자례의 말에 체이첸은 악운을 잠시 바라본다. 악운이 어깨를 으쓱하자 2왕자는 미소짓고 만다. “그래, 난 자네가 막관을 감시해주길 바라고 있네.” 굉장히 독한 술이였다. 몇잔 마시지 않았는데 얼굴이 확 달아오른다. 야패가 없음으로 야패를 가진 체이첸의 시종의 안내를 받아 성각헌으로 돌아간다. 얼굴을 쓰다음으며 정신을 차리려 애를 쓴다. 성각헌으로 돌아와 자신의 방의 문을 열기 위해 열쇠를 찾는데 도무지 열쇠를 돌리지 못하겠다. 믿을 수 없지만 취한 느낌이다. 몇 번 여는 것을 실패하니 신경질이 난다. 포기하고 옆방의 문을 두드린다. “누구냐?” “저요.” “뭐냐? 이 밤에 자지 않고.” 문이 열리며 익이 고개를 내밀로 자례를 본다. 바로 얼굴을 찌푸리며 인상을 쓴다. “아이고 술냄새. 너 술마셨냐?” “재워줘요.” “미쳤냐? 술귀신은 안받아. 네 방에서 홀로 자라고.” “술에 취했어요.” “보기만해도 알아. 그래서 어쩌라구?” “잠들면 못일어날 것 같은데 문을 열어놓고 자기가 불안해요.” “...말은 잘한다.” 익은 잠시 생각하다가 어쩔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는 몸을 비켜 자례가 들어오게 한다. 막 자려던 참이였는지 침대에는 이불이 널려있었다. “침대도 작은데, 너 잠버릇은 괜찮겠지? 코골거나 이갈면 당장 내보낼꺼야.” “그럴 힘도 없어요.” 푹하고 침상에 쓰러진 자례는 그대로 잘 생각인 것 같아 익이 기겁을 한다. “야, 옷벗고 자. 세수는 하고 자란 말이야. 이 놈이 정말!” “몰라요. 몰라.” “모르긴 뭘 몰라!” 술기운때문인지 축 늘어진 자례를 끙끙대며 일으켜 세운후 옷을 벗겨준다. 술냄새가 지독해서 혀를 내두른다. 무슨 술냄새가 이리 독한지. 머리를 풀어주고 신을 벗긴후에 침상 안쪽으로 밀어넣는다. 그래도 꼼짝을 하지 않는 것을 보아 이미 잠들어버린 모양이다. 이런 이런, 내일 아침에 막관을 만난다면 이번에야 말로 소문이 나겠군. 꼼짝없이 홍화주를 사줘야 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곘어. “잘 자라.” 등불을 끈 익은 그 옆에 누워 눈을 감는다. 140 숲속에 쪼그려 앉아있던 자례가 뭔가를 찾아냈는지 손을 들어 이리저리 움직인다. 뭔가 잡았는지 손을 동그랗게 만다. “뭘 잡았는데?” “예?” “방금 뭘 잡았지 않느냐?” “이거 말씀이십니까?” 별것 아니라는 듯 손을 핀다. 그 안에는 빨간 색의 콩같은 것이 들어있다. 육관이 그것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낼름 입에 넣어버린다. 순식간의 일이라 그저 눈을 크게 뜨고 육관을 어이없이 바라본다. 그는 그것을 우물우물 씹다가 침을 뱉고는 투덜거린다. “맛없다.” “...예.” 자례는 그것이 무당벌레였다는 것을 절대로 말하지않기로 했다. 육관은 입맛을 다시고 난후 뜬금없이 묻는다. “존경이 뭐냐?” “예?” “넌 나를 존경하느냐?” 크게 한숨을 내쉰다. 이 사람과 있으면 항상 긴장이 된다. 뜬금없는 질문, 어이없는 행동에 아이같은 투정까지 정말 가지가지로 한다라는 생각이 들정도이다. “말그대로 자신보다 더 나은 상대를 우러러보는 것이아닙니까.” “정말로? 그럼 넌 날 존경하는구나.” “...예.” “시원치 않다!” 벌컥 화를 내는 육관에게서 좀 멀어져 피한다. “날 존경하느냐, 안하느냐!” “...공경합니다.” “내가 물어본 바가 아니다!” “존경은...잘 모르...” 육관이 벌떡 일어나 자례를 노려본다. 굉장히 화가 나 있는 듯 얼굴이 하얗다. “왜? 날 존경하지 않느냐?!” “아닙니다. 존경합니다.” 얼른 말을 바꾼다. 괜히 화나게 만들어서 좋을 것이 없다는 판단이다. 역시 육관은 그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얼른 얼굴표정이 풀어지고 다시 자리에 앉는다. 아까보다 얼굴이 많이 부드러워진 얼굴이다. “그건 당연한것이다. 알겠느냐?” “예.” “흠. 오늘은 날씨도 좋군.” 달도 흐리고 별도 안보이는 밤하늘을 보며 씨익 웃는 육관이 몹시 즐거워보인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자례도 어설프게나마 웃어보인다. 사실 오늘은 별이 안보인다는 말로 입을 열생각이였는데 육관이 이런식으로 나오니 말할수도없다. 멍하니 침묵만이 흐르자 육관이 또 성을 낸다. “심심하다!” “그만 들어가서 주무시지요?” “싫다!” 육관에게 안보이게 중얼거리며 투덜거린다. 갑자기 바람이 불어온다. 따뜻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한겨울의 찬바람이 불어와 놀라 고개를 든다. “뭐냐?” “찬바람이 물어와 좀 놀랬습니다. 육관은 안그러십니까?” “앞엔 건호가 있다. 이쪽으로 부는 바람이 찬 것은 당연하다.” “건호? 그럼 이곳은 정말로 건곤궁안입니까?” 태평스럽게 묻는다. 물론 이곳이 어딘지 모르는 것이 아니다. 그냥 할말이 없기에 이어간것이다. 하지만 그 노력의 본전도 안나오도록 육관이 퉁명스럽게 말한다. “전에 말한적이 있지 않는가? 넌 바보냐?” “...죄송합니다.” 그래도 둘은 항상 사철나무가 깔린 길과 숲의 외각에서만 지냈기 때문에 이곳이 건공궁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 것도 사실이였다. 좁은 사철나무의 돌길위에서 수로의 물을 바라보며 항상 말없이 있다보면 육관이 심심하다 소리지르고 자신은 쩔쩔매며 쓸대없는 말만 늘어놓는다. 이러면 안되는데. 머리위에 손을 올리고 생각하던 자례가 무엇인가 결심한 듯 육관에게 말한다. “육관, 내일부터 중요한 일을 하게됨으로 더 이상 이곳으로 출입을 할수 없습니다.” “안돼.” “예?” “그래도 와라.” “...예.” 말한 내가 바보지. 아픈 머리를 쥐고 푸욱 한숨을 쉰다. 문득 육관이 중요한일이 궁금했는지 묻는다. “무엇을 하는데 그러지?” “고서를 필본하는 일입니다. 바쁜 일이라하셔서 근간에 밤을 도와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래?” 처음으로 육관이 고개를 돌리고 진지하게 무엇인가 생각하는 눈치다. 그 모습에 자례가 그를 곁눈질하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내려 한다. 자례의 시선이 느껴졌는지 육관은 화를 벌컥내며 손을 휘젓는다. “가라!” “예?” “가란말이다!” “그럼 이만. 좋은 밤 되십시오.” 서둘러 말하고 담을 민다. 육관은 등을 올린체로 아직도 생각에 잠겨있다. 담을 밀어 닫으후 잠시 담에 귀를 붙이고 기다리나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는다. 성각헌으로 돌아오며 육관이 보인 반응을 이해하려 노력한다. 하지만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서둘러 병사들의 눈을 피해 성각헌으로 돌아온다. 여전히 등짝을 노려보는 시선에 익이 또 못참고 등을 돌린다. “이번엔 왜?” “우관이 걱정안되십니까? 근간 통 나와 바람을 쐬는 모습을 보지 못했는데요.” “그놈은 애가 아냐.” 익은 보고 있던 책장을 넘기며 신경질적으로 말한다. “네가 어린것이겠지. 뭐가 걱정이냐?” “요즘은 식당에도 안나오고 성각헌에서 놀고 있는 것도 못봤고 도통 방안에서 나오지 않으니까 그나마 가장 가까운 익관에게 묻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나도 요즘 그 놈을 못만났어. 너나 나나 옆방인 것은 마찬가지않나? 늦은 저녁까지 방안에 불이 켜져있는 것을 보아하니 필본을 하고 있는 모양이지.” 무심하게 익이 다시 등을 보인다. 뭔가 이상타 생각하는 막관과는 달리 태연한 표정이다. “뭐지요?” 아닌척 얼른 몸을 뒤로 빼지만 터벅터벅 걸어온 자례가 문을 왈칵연다. 문틈에 기대있던 익이 문틈에 옷이 끼어 낑낑거린다. “여기서 뭐해요?” “어? 그냥 바람쐬고 있었어.” “...그런데 문틈으로 방안은 왜봐요?” “으흠, 들어가자.” 아직 막관의 방에 불이 켜있다는 것을 본 익은 그가 듣기 전에 자례를 밀어 방안으로 들어간다. 방안은 엉망이였다. 여기저기 종이가 널려있고 여기저기 마르지도 않는 붓이 돌아다닌다. “으, 넌 보기와는 달라.” “아아, 지금 치울생각이였어요.” 말과는 다르게 책상위에 앉은 자례는 도저히 정리할 분위기가 아니다. 이것 저것 뒤적 거리기만 할뿐이다. 책상위에 있는 새 종이 묶음을 익이 힐끗본다. “이거냐? 막관하고 들어가서 받은게?” “아뇨. 그건 아직 시작도 안했고 저건 지인에게 줄 이야기책이에요.” “...그래서 방에 늘어붙은거냐.” “예?” “아냐.” 익은 주섬주섬 종이를 줍는다. 자례가 이야기책의 표지를 단단히 묶어 정리했을때에는 익은 붓을 정리하고 있었다. “와, 방안이 깨끗해졌는걸요.” “넌 시종이 필요해. 분명히. 그 아이는 청소 잘하고 깔끔해야겠어.” “으음, 생각해 볼께요.” “심각하게 생각해.” 마지막 붓을 붓걸이에 올려놓은 익이 자신이 정리한 방을 보고 만족해한다. 그모습을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던 자례가 묻는다. “익공?” “익형이라고 해.” “익형. 난 당신을 좋아해요.” “뭐? 뜬금없이 무슨 헛소리야?” 자례는 팔을 괴고 천장을 바라본다. 한숨을 포옥 쉬고 인상을 쓰는 것이 진심인 것 같아 불안하다. “미,미안하지만 난 장차 부인을 얻어 자식을...” “예? 아아, 나도 자식은 가지고 싶어요. 딸은 화선부인을 닮고 아들은 익형을 닮아도 좋을 것 같아요. 물론, 소용부인처럼 현명한 딸이나 악운처럼 개구진 아들도 좋아요.” “...너 애도 낳냐?” “음? 난 남자인데.” 서로 멀뚱히 바라본다. 쩔쩔거리는 익을 보고 자례가 깔깔웃는다. “나원, 뭐라고 생각한거에요?! 하하하!” “시끄럿! 갑자기 그렇게 진지하게 말하니까 헷갈리잖아!” “하하하!” “조용히해! 옆방에서 듣잖아!” “예.예.” 씩씩거린 익이 방문을 열고 나가려하자 자례가 그를 부른다. 고개를 돌리는 익의 얼굴은 놀림에 붉게변해있었다. “정말로 익을 좋아해요.” “시끄러.” 퉁명스럽게 말한 익이 방을 나가자 빙글 몸을 돌려 천장을 바라본다. 이야기를 적은 필본을 밀어놓고는 그 밑에 감쳐두었던 문제의 고서를 꺼내든다. 파라락하고 훝어본 뒤 소리없이 한숨을 쉬고 천장을 바라본다. 내리깐 눈동자가 흔들리더니 뭔가 결정했다는 듯 눈을 크게 떠 열린 문틈을 본다. “그것 어떤거냐?” “예?” “네가 하고 있다는 그 고서말이다.” “그건 말씀드리기가 곤란합니다. 낭관에게 그것을 비밀로...” “안말한다는 것이냐!” “...영웅첩같은겁니다.” 육관은 그말에 고개를 갸웃하고는 생각에 잠긴다. 역시 또 가보라고 할 것 같아 천천히 일어나려는데 그가 벌컥 화를 낸다. “왜 일어나!?” “예, 그냥 자세를 고치려고...” 어영부영 다시 자리에 앉는다. 육관은 혼자서 열심히 생각하고 질문한다. “영웅첩이 맞는가?” “파본이 심해서 그럴것이라고 짐작하는 것입니다.” “파본이 심한 고서를 영웅첩이라 생각하는 것이라는건 그 형식에 규칙이 있다는 것이군. 아마 표지는 없고?” “...예.” “어디까지 했느냐?” “알아볼수 없는 글자가 많아 이제 몇장했을뿐입니다.” “그래.” 이번엔 육관이 일어난다. 얼추 표정을 보니 그만 들어가 자려는 것 같아 자례도 따라 일어난다. “그만 돌아가서 쉬십시오.” “그건 내가 결정한다.” “하지만 얼굴색이 좋지 않습니다.” “흠.” 그말에 육관이 미소짓는다. 그 표정이 진실되어 보여 되려 자신이 쑥쓰러워진다. “듣기 좋군.” “예?” 하지만 육관은 성큼 성큼 걸어 숲사이로 걸어가버린다. 141 때아닌 밤중의 부름이였기 때문에 히우루는 옷을 여미면서 하품을 했다. 졸린 눈을 비비며 황제의 침실로 들어간다. 잠시 기다리자 황제가 나온다. 아마도 방금 전까지 후궁의 방에 있었던듯한 차림이였다. 아골타는 동생 히우루를 자세히 들여다 보고는 손가락으로 작은 밀방으로 데리고 간다. 영문도 모르는체 따라들어간 히우루는 아골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궁금해 그의 얼굴을 본다. “문서가 하나 실종되었다.” “예?” “모르는 척 하지마라!” 탕하고 마시던 찻잔이 옆으로 날아온다. 얼핏 옆으로 고개를 돌려 피한다. 벽에 부딪친 찾잔은 벽에 물을 뿌리고 땅으로 구른다. “내 문서를 관리하는 놈은 너뿐이지 않은가!” “그러니까 정확히 어떤 문서가 사라졌다는 말씀입니까?” “...흥!” 고개를 돌린 아골타가 다른 찻잔을 찾아 차를 따른다. 잠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히우루가 갑자기 역정을 낸다. “형님이야 말로 지금 큰 실수를 하려하고 있소!” “뭐야!” “나도 알고 있소! 비서랑들을 시켜 ‘그것’을 다시 완성시키려하지 않소!” “헛소리!” “나라를 세운 것은 당신이요! 이제와서 나라를 버리지마시오!” “네놈이 가져간 것을 누구에게 떠미는 것이냐!” 벌떡 일어난 히우루와 등을 돌린 아골타가 서로를 노려본다. 으르렁거리는 두 형제는 서로를 죽일 듯 화를 낸다. 하지만 결국 고개를 숙이는 것은 히우루이다. 언제나 그랬듯 히우루가 먼저 고개를 숙이고 다시 자리에 앉는다. 히우루의 말없는 복종표시에 아골타도 화를 가시며 다시 자리에 앉는다. “그것을 다시 회수해라!” “정말로 난 아니오 형님!” “어쨌던!” “알겠습니다.” 히우루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문득 아골타가 이상하다는 듯 그에게 묻는다. “너가 아니라면 그것을 가지고 있는 놈이 누군지 어찌 아는가?” “누가 안다고 했습니까?” 히우루가 퉁명스럽게 말한다. “앞으로 찾아서 회수하겠다는 것이지요.” 서관의 야근이 돌아왔다. 전날 당번이 익이였기 때문에 자례는 깔끔하게 정리된 서관을 인계받았다. 피곤한 눈으로 익은 자례를 노려보고는 협박하는 것이다. “나 정리 힘들게 했다. 알겠냐?” “예. 안어질러 놓을께요.” “그말을 믿느니 내일 다시 정리하고 말지.” 익이 포기했다는 듯의 어깨를 으쓱인다. 자례는 손까지 흔들며 어서 가라고 재촉한다. 익이 사라지자 야근중이라는 푸른 등을 걸고 서관의 책상에 앉아 자신의 책상아래에 넣어둔 하얀 종이를 꺼내 새 종이 뭉치를 만든다. 어림잡아 빈책이 만들어지자 남는 종이로 반듯이 잘라 접기 놀이를 한다. 점점 손이 빨라지면서 순식간에 손에서 한 마리씩 학이 만들어진 후 산만하게 바닥아래로 굴러 떨어진다. 발밑에 어느정도 소복히 학이 쌓이자 벌떡 일어나 서관의 책고의 문을 열고 들어간다. 손가락으로 산처럼 쌓여있는 책들을 좌라락 훑어간다. “아냐, 아냐.” 다음 책고를 열고 들어간다. 역시 빠른 속도로 책의 뒤적인다. 그리고 다음 책고. 그리고 다음 책고. 그리고 다음 책고. “젠장!” 한참을 뒤적였지만 원하던 책이 없자 신경질을 부리며 책을 던진다. 잠시 손톱을 깨물며 이리저리 서성이던 자례는 아직 필본되지 않은 대나무로 만든 죽간을 모아둔 방으로 들어간다. 종이로 만든 책과는 달리 죽간은 칸칸마다 빼어내어 봉인한 끈을 풀고 그 안을 확인해보아야 그 내용을 알수 있다. 빼고 푸르고 읽고 다시 돌려 봉인하고 넣는다. 시간이 많이 걸리는 작업이라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화가 치밀어 오른다. 시간은 자꾸 흐르는데 혼자서 열어 확인하려는 죽간은 너무도 방대한 분량이다. 수백개를 열었더니 끈을 풀고 묶었던 손가락이 얼얼할 정도다. 자례는 동이 터올때까지 죽간을 확인해보고나서 열었던 책고를 흔적이 없도록 모두 정리했다. 그리고 안열어본 책고를 계속 열어보며 훝어본다. 수십개의 책고를 열어보고 안의 내용을 확인하고 나오고를 반복한다. 그러다 열리지 않는 책고를 발견한다. 문틈을 자세히 보니 커다란 빗장이 걸려있다. 그 옆의 책고도, 그 옆의 책고도 빗장이 걸려있다. 자세히 빗장을 바라보고는 그만 책고에서 나와 서관의 책상에 다시 앉아 종이를 가른다. 다시 손에서 차곡차곡 학을 접어 내리며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 평온한 표정을 짓는다. 곧 날이 밝아 익과 막관을 포함한 비서랑들이 왔을때 자례는 소복히 쌓여진 종이학 뭉치를 베고 탁자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막관이 깨우려고 다가가자 익이 말리고는 성큼 다가가 허리를 잡아 일으킨다. “해 떴다. 해 떴어.” “...응?” “일어나라고. 가서 자라.” 졸린 눈으로 부스스하게 눈 뜬 자례는 눈앞에 흔들리는 막관과 비서랑들을 보았는지 어느때와 달리 빠르게 잠이 꺤다. 식어버린 차를 마시며 정신을 차리려고 하자 막관이 다가와 접어놓은 종이학을 들고는 웃는다. “이것은 신라의 계림지.이 귀한 종이로 학을 접으시다니 배짱이 크십니다.” “아아 어쩐지 종이가 좋더라니...막관은 종이에 대해서도 잘 알군?” “아, 저 요즘 이 종이를 쓰고 있거든요. 저기 내 책상위에 있는 종이 뭉치가 이거잖아요. 뭐, 요즘에는 귀화한 신라후예들에게서 이 기술을 전수 받았다하니 예전보다 그리 귀하진 않지만... 아깝군요. 밤새 이것만 접으신 겁니까?” “워낙에 졸려서 말이야. 아까우니 다시 펴서 막관이 쓰게.” 정신이 들었는지 자례가 일어나 팔을 쭉 뻗는다. 익이 불침등을 가지고 들어와 끈다. “들어가서 자라.” “예.” 막 인수를 끝내고 서관의 창문을 열고 환기를 시키는데 누군가 헐래벌떡 서관의 계단을 오르면서 소리지른다. 마침 계단을 내려가고 있는 자례를 보더니 그 멱살을 잡고 외친다. “큰일이다!” “예?” “네 방이 난리야!” 그 소란에 모두들 나와 무슨 일인가 갸웃거린다. 얼굴이 하얗게 변한 자례가 놀라 옷자락을 걷어들고 계단을 뛰어내려 성각헌으로 달려간다. 그 뒤를 익이 따라달려가고 잠시 멈칫한 막관이 따라 달리려다가 소식을 알려준 비서랑에게 다가가 묻는다. “무슨 일인데 그러지요?” “우관의 방에 누군가 들어간 모양이야. 방안이 헤집어져 있더군.” “...헤집어져 있다니요? 우관은 서관으로 나올 떈 특히나 문단속을 잘하는 분입니다. 그런데 헤집어져 있었다는 것은 선관께서 우관의 방안을 들여다 보셨다는 이야기군요?” “문이 열려있었어!” 막관에게 의심어린 시선을 받자 비서랑은 매우 억울한 듯 외친다. “우관의 방문이 조금 열려있었단 말이야. 우관은 항상 문을 열어 놓아서 난 그냥 성각헌으로 돌아온 줄 알았단 말이야. 물어볼게 있어서 방을 열어보았더니 그상태였다!” “흐음?” “의심나면 매관에게 물어봐! 우린 둘이서 함께 봤으니까!” 막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천히 걸어 성각헌을 향해갔다. 이미 이 사실이 알려진 듯 시종들과 낭관과 궁안 치안을 담당하는 병사 몇몇이 성각헌주위에 대기중이였다. 막관이 성각헌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제지를 당했다. 별수 없이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다. 자례는 엉망이 된 방안을 둘러보고 한숨을 쉬었다. 시종 한명이 차를 떠다주고 두어병의 병사들이 다가와 물는다. “없어진 물건이 있는지 확인해주십쇼.” “지금 당장? 난 일어나지도 못하겠습니다.” 떨리는 손으로 차를 마시며 자례가 신경질적으로 외친다. 익이 화내지 말라는 듯 자례의 어꺠를 두드린다. 병사들은 어깨를 으쓱하고 시종들을 향해 손짓한다. 이제 그만 방안을 정리하라는 뜻이다. 손톱을 물며 생각하던 자례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침상으로 다가가 베게를 손으로 눌러본다. 익도 아차하는 생각에 그 모습을 본다. 그곳엔 단검이 있었다. 얼추 몸으로 가려줄 생각에 다가가가지만 자례가 비게를 던져버린다. “없냐?” “젠장!” 벌컥 화를 낸 자례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는 병사들과 시종들을 헤치고 방을 나간다. 의아해하는 병사들에게 익이 대신 말한다. “잃어버린 물건이 있나봅니다.” “그럼 일단 성각헌을 봉쇄하는 수 밖에 없소.” 조장격의 병사가 신호를 해 성각헌을 비우라는 신호를 한다. 달려간 자례는 성각헌의 안쪽문에는 들어오지 못하는 막관을 본다. 막관을 부르려고 입을 여는 순간 늙은 낭관이 먼저 자례를 잡는다. “무슨 일인가? 우관?” “별일 아닙니다.” “허, 황궁에서 이런 소란이라니!” 곧 이어 이야기를 듣고 달려온 낭관들이 모여 이 사태에대해 서로 말을 나눈다. 잠시 시선이 거두어진 틈에 자례는 막관을 잡아 성각헌으로 데리고 왔다. “무슨 일입니까?” “쉿.” 자례는 낭관들에게서 떨어져 막관에게만 들릴정도로 조용히 말한다. “자네, 지금 방안에 들어가서 고서가 남아있는지 확인해보게.” “예? 설마?” 아무말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도난 당했다.” “그런일이!” 막관이 서둘러 자신의 방안으로 들어가려 하지만 병사들이 제지한다. 없어진 물건이 있기 때문에 성각헌을 임시 봉쇄한다는 이야기였다. “저희와 우관이 성각헌을 돌아가며 방을 살펴볼겁니다. 그후에야 봉쇄가 풀리게 됩니다.” “성각헌의 방은 70개가 넘소! 그 동안 비서랑들은 어디서 지내라는 것이오!” “오늘 안으로 해결될겁니다. 아직 아침이니까요.”“잃어버린 물건과 동일한 것을 나도 가지고 있소. 내것도 없어졌는지 확인해 보아야합니다.” “규정대로 할 수밖에 없습니다.” 딱딱한 병사의 말에 자례도 막관도 한숨을 쉰다. 막관은 좀더 병사들을 좀더 설득하려 했지만 어쩔수 없다는 것을 느꼈는지 자례에게 다가와 열쇠를 내민다. “뭐지?” “내 방 열쇠요. 책상위에 놓여진 여섯 번째 새 종이 묶음사이에 책상에 고서를 낱장으로 풀어 끼어 놓았습니다. 있는지 확인해주세요.” “알았어.” 각 방의 비서랑들과 함께 방안으로 들어가 방안을 살핀후 자례가 고개를 저어 아니라는 표시를 하면 병사들이 열쇠를 비서랑들에게 돌려준다. 그 방은 봉쇄에서 풀리고 방주인도 혐의를 벗어난다. 처음 들어간 익의 방에서 고서를 발견할수 없었던 자례가 고개를 흔들자 병사는 익에게 열쇄를 돌려주고 다음 막관의 방으로 들어간다. 막관이 자신의 방문앞에서 자례를 기다린다. 방에서 나온 자례는 한숨을 쉬고 고개를 흔든다. 병사가 막관에게 열쇠를 돌려준다. 막관이 열쇠를 받으며 자례의 눈을 보며 자문을 구하지만 자례는 역시 고개를 흔든다. 철렁하는 느낌에 방안으로 뛰어들어가 책상위에 놓인 종이 묶음들을 손으로 훝어가며 확인한다. 막관의 고서도 사라져 있었다. ------ 단설의 역주는 인용과 개인적 견해가 들어간 글입니다.(맹신(盟信)사양. 도용씁쓸)-------- 주 계림지.원래 종이는 후한의 환관 채윤에 의해 발명된것으로 중국의 4대 발명품중 하나라고 한다. (그러나 고고학쪽으로는 그보다 250여년전부터 종이가 사용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애초 종이의 쓰임은 기록이 아닌 음식 포장이였다. 당시 중국의 민간 음식은 맨손으로 먹는 만두나 부침같은 것이 주류였고 돼지고기를 살때 역시 이 종이를 이용해 포장했다고 한다.이때의 종이가 바로 첫 종이로 표시되는 채후지. 채후지는 우리가 알고 있는 미끈한 종이가 아닌 두껍고 거칠며 마른후에는 잘 쪼개졌다. 더군다나 재료으 특성상 벌래를 잘먹어 보존성이 매우 안좋았다. 110년에 이르러 종이는 기록용으로 쓰이는데 이때 종이는 많은 개량이 되어있는 상태였다. 이때 우리나라의 종이 기술은 중국으로 받은 제지술에 의한 기록은 600년정도이지만 그보다 1000년 전인 낙랑의 고분에 닥종이로 추정되는 것이 남아 있고, 근간 평양 고구려 유적에서 삼베를 원료로 한 마지가 발견됐다는 소식도 있지만 확인하지는 못했다. 이것으로 한국 특유의 제지술이 있었던 것이 아닌지 추정이 된다. 삼국시대에 들어와 종이는 크게 융성했는데 당시 고분설계의 오류상 섬유질이 보존될수 없었다고 한다. 현제 한국의 가장 오래된 종이로는 불교에서 신라시대에 제조된 범한다라니경(梵漢陀羅尼經) 한 장이 남아있을 뿐이다. 특히 통일신라시대에 와서 계림지, 백추지라 불리는 종이가 만들어 지는데 이것은 중국에서도 천하제일이라 극찬했던 한지의 근원인 명품이였다. 소장의 "대방광불화엄경"(755년)에는 "닥나무에 향수를 뿌려가며길러 껍질을 벗겨내고 그것을 맷돌로 갈아 종이를 만든다"는 제조법이 남아있는데 이렇게 만든 종이가 누에고치처럼 희고 부드러우며 섬유질이 고르고 질기다. 계림지의 보존성은 2000년지난 책을 읽을수 있을 정도라하며 중국에서 대량 수입했던 종이이다. 참고로 색종이의 시작은 7세기인 당나라부터이다. 금때에는 색지라는 것은 찾기 힘들었던 것으로 색지라고 해보았자 다갈색을 띤 마분지같은 것이다. 142 유번은 들려오는 말소리에 귀를 귀울이다 활짝 웃으며 문을 열었다. 역시 예상했던 인물이 말을 타고 달려오고 있었다. “유번님!” “어서오시오!” 반가운 얼굴로 백라가 말에서 내려 유번에게 허리숙여 인사한다. “또 만날 수 있다니 정말 좋군.” “본의 아닌 여행을 오게 되었습니다.” 방안에서 따뜻한 차를 마시며 백라가 웃는다. 마른 웃음에 예전과는 달리 보이는 여유가 있어 유번이 웃는다. “어찌된 영문인지 좌보님께서 여유가 보여 좋군요.” “미숙했던 저에게 약간의 성장이 찾아온 것인지도요.” “이번 여행은 어떤 일로? 이 늙은이를 왜 찾아오신겁니까?” “아 그것이 실은 ...” 불필요한 말을 빼고 백라는 왕씨가 내린 말만 내비쳤다. 그말에 유번은 처음엔 몹시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다가 나중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단호하게 말한다. “이해할수 없군. 왕씨의 정당성에 대해서는 나보다 자네가 더욱 잘알고 있지 않나? 아니, 더욱 이해할수 없는 것은 그것을 그리 잘아는 자네가 어째서 이 여행을 떠나온것인가? 오히려 왕씨를 더욱 심란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왕씨의 정당성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이 여행을 떠나올수 있었던 겁니다. 그 자리에서 제가 여행을 부인했다면 왕씨께서는 도리어 태생에 의심을 가지셨을 겁니다.” “허허. 알수 없는 일이군. 대대로 왕씨들이 악몽을 꾸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그것은 어느정도의 계시적 의미이네. 하지만 위해가 되는 꿈을 반복해서 꾼다는 것은 정말로 이해할수 없는 일이야.” “그렇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손댈수 없는 제사의 영역이니 두고 볼수 밖에는...” 문득 유번은 뭔가 떠오른 듯 앗하는 표정을 짓는다. “제사의 의미라...” “무엇인가 떠오르는 것이 있으십니까?” “...아냐.” 말과는 달리 유번의 머릿속에는 자례와 산행때 보았던 하얀 매구가 떠올라 버린다. 매구, 매구라. 매구는 왕조의 영물이다. 왕씨를 지키고 그 정당성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자닝...자닝하여... “무엇인가 말하고 싶으신게 있군요?” “뭐?!” “놀라시기는...그냥 해본 말입니다.” “늙은이를 놀래키지 말게.” “그냥 해본 말에 놀라신 이유는?” 빙그래 웃는 백라에게 보이는 치밀함에 유번이 혀를 찬다. “자네 많이 변했어.” “전쟁에 쓸대없는 동정심은 가지지 않기로 했을뿐입니다.” “...실은 전부터 말해야 한다는 것이 하나 있었지만...내 생각에는 지금 말해서는 더욱 사태가 안좋을 듯하군.” “유번님.” 잔을 내려놓은 백라는 그 마른 인상에 더욱 날카롭게 보이는 삼백안을 치켜뜬다. “좌보는 나입니다. 대세를 결정하는 것은 왕씨지만 대세를 읽는 일은 저에게 있는 것입니다.” “...정말 많이 변했네.” 유번은 잠시 고민하다 백라에게 그날 산위에서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낭관은 화가난 표정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둘 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수 있는가!” 화난 낭관의 잔소리를 묵묵히 받고 있던 두 사람은 슬슬 속이 아프기 시작했다. 자신이 실수해서 그런 것이 아니지 않는가. 누군가 닫힌 문을 따고 들어가 가져간것이다. 어쩔수 없는 것이 아닌가. 실컷 잔소리를 듣고 나오자 막관은 화가난 표정으로 근처의 종이뭉치를 발로 차버렸고 자례는 몹시 피손하다는 듯 주저앉아 머리를 감싼다. “젠장! 누가 가져간거지!” “...큰소리치지 마라... 머리 울린다.” “이건 뭔가 이상해요!” 막관은 자례를 서관의 조용한 정자로 거진 끌고 간다. 퐁퐁하는 물소리와 잉어가 오고가는 소리만 들린다. 막관은 이를 갈며 화를 토해낸다. “이건 분명히 우릴 잘 알고 있는 사람의 짓이에요.” “...왜?” “내 고서를 가져갔잖아요! 일단 우관의 고서는 언제 털렸는지 모르지만 난 확실히 서관에 나오기 직전에 고서를 확인하고 나온것이였어요. 그러니 내 고서가 증발할수 있는 시간은 고작해야 내가 서관으로 출근한 그 잠깐 사이라구요!” “하지만 그 잠깐 사이에 책사이에 낱장으로 끼워 둔 걸 어찌 알고 얌전히 집어 갔나몰라.” “그러니까 우릴 잘 알고 있는 사람의 짓이라니까요! 이상하잖아요! 우관의 방은 난장판인데 내방은 너무도 깔끔했어요. 둘다 고서는 사라졌구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거지?” “그러니까 내 말은 이거에요. 누군가 그 고서가 판독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어요.일단 이 것은 그가 이 고서의 내용을 알고 있다는 것으로 시작되죠.” “그렇지.” “그는 어떤 방법으로 우리가 그 고서를 나누어 판독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는 그것을 훔칠 계획을 세웠어요. 운이 좋게 우관은 당직이였으니 방이 비어버린게 되는거죠. 그는 먼저 우관의 방으로 가서 밤내내 방을 뒤져 고서를 빼내었어요.” “그리고는?” “그리고...우관의 방에서 내 방을 염탐하며 내가 나가길 기다리고 있었던 거에요. 내가 나가자 그는 내방으로 들어와 고서를 빼내어 도망간거라구요.” “과연. 그렇게 된다면 내 방은 난장이고 네방은 멀쩡한 것이 설명은 되지. 하지만 이상하군.” “왜요?” 손톱을 물며 생각에 잠기던 자례가 작게 말한다. “고서를 판본하지 않게하려고 했다는 것은 남이 알면 안되는 비밀이 있다는 이야기잖아.그렇지?” “그렇죠.” “만약 나라면 우리 둘을 다 죽여서 그동안 판독된 내용에 대해 입다물게 하고 고서를 가져가는 것이 더 간단한 일인 것 같거든. 말대로 이 일은 비밀로 받은것이라 우리가 죽으면 고서가 어디에 있는지 일을 준 낭관도 모르지 않나. 훔쳐갔는지 못찾는건지 알수없고 말이야.” “과연. 비밀로 하고 싶은 와중에 고서를 훔치는 것은 그것에 대한 소문을 더할뿐이죠. 우릴 죽인다면 살인사건으로 사라질 일이지만. 궁안내 선비들의 염투극으로 인한 살인사건은 흔한 편이니까요.” “근데 왜 그렇게 하지 못했을까...” “우관이 하고 싶은 말은 범인은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람중 하나란 이야기군요? 그가 우리를 죽일수 없는 입장이라는 거지요.” “...넌 얼마나 판독했지?” “겨우 한두장이에요. 워낙에 힘들어야죠.” “그래. 아무튼 근간에 몸조심해라.” 자례는 조용히 일어나자 막관이 그 옷자락을 잡아 다시 앉게한다. “왜?” “범인은 양만관이 아닐까요?” “익공이? 어째서?” “사실 처음에 이 사건을 알려준 선관의 말을 들었을때부터 의심을 하고 있었어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자례가 다시 자리에 앉자 막관이 진지하게 말한다. “처음 알려준 선관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그가 이렇게 말하더군요.우관의 방이 헤집어져 있다고요. 그말은 방안을 들여다 보았다는 것이 아닙니까. 이상하더군요. 우관은 내방쪽 문을 닫아놓고 사용하고 있었고 양만관 방쪽의 문을 열어놓고 사용하고 있잖아요. 즉 열린 문은 양만관 쪽의 문이라는 건데 양만관이 서관으로 출근하려면 우관의 방을 지나 내방앞의 계단으로 내려가야 하니 그는 반드시 우관의 방을 지나가야 한다는 거죠.” “그래서?” “얼마 알지 못하는 나도 우관이 문을 열고 지낸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친해보이는 양만관이 분명 야근중인 우관의 방문이 열려있다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만약 방문이 애초부터 열려있다면 우관방을 가장 먼저 본 사람은 양만관이여야합니다.” “...” “그런데 그는 그런 내색이 없었어요. 모른척 한것이라면 의심스럽고 정말로 닫혀 있었다면 무고한 것이지요.” “내 방 자물쇠는 부셔져 있었다.” “예?” “익공은 쓰지 않는 방쪽의 열쇠를 가지고 있어. 만약 그가 고서를 노렸다면 열쇠를 열고 들어왔을거다. ” “...열쇠가 있어서 일부로 열쇠를 부시고 들어간 것이 아니라요?” “게다가 익공은 내가 중요한 것을 어디다 두는지 알고 있어. 방을 뒤질 필요가 없다. 그는 아니야.” “...흐음. 난 이상하게 더욱 의심이 되는군요.” “관두게.” 이번에야 말로 일어난 자례는 생각에 잠긴 막관을 두고 학고청으로 나간다. 홀로 학고청의 종이를 걷으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그는 깊게 한숨을 내쉬고는 학고청 마루에 앉아 쓴 표정을 짓는 것이다. 유번의 이야기가 끝나자 백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스럽게 유번이 백라를 보자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한다.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단지 계시의 한 부분인가 보지요.” “하지만 항상 그 말뜻이 마음에 걸려 말하지 못했었네.” “결단을 내리시는 것은 왕씨의 일입니다.” 차분하게 말한 백라가 일어나가 유번이 묻는다. “왜? 벌써 가보려고?” “예. 실은 안되는 말이지만 누군가를 찾아보려 합니다. 개인적인 여행이 될것입니다. 하지만 오래 걸리지는 않을겁니다. 왕씨께서 안정이 되었다 느끼면 여행을 바로 중단하고 돌아올것이니까요.” “그래? 좌보께서 개인적인 여행이라니 그거 신기한 일이군.” “뭐, 너무 개인적인 일이라...” 말을 흐린 백라는 일어나 유번과 안녕을 고한다. “유견님이 쓸쓸해 하시니 이제 그만 도성으로 올라오시지요?” “됐어. 형은 형대로 나는 나대로 살아가는 것이 서로에게 더욱 도움이 된다네.” “그러시다면 더 권유하지는 않겠습니다.” “저기 혹시...” 말을 흐리는 유번은 고개를 흔든다. “아니야. 아무것도 아닐세.” “... 자례에 관한 말씀을 하려고 하신겁니까?” “사실은 그랬지. 그래, 그 아이 어떻게 지내는가?” “커다란 새장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얼마간은 나오지 못할겁니다.” 백라가 황성쪽으로 향해 손가락질하며 말한다. 유번은 그말을 알아듣고는 한숨을 쉰다. “꼭 다시 나왔으면 좋겠네.” “그것 역시 왕씨의 결단. 어떤일이 생기더라도 유번님께서 고민하실 일은 아닙니다.” “아참, 그렇다면 자례는 형도 못만났겠군?” “자휼이 이쪽으로 왔습니까?” “형님이 도성으로 올라가기 전 급하게 달려와 아이가 있는 곳을 묻고는 도성으로 달려가더군. 그 놈도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아나?” “여행중의 일이라 잘은 모르겠습니다.” “그 형이라는 놈은 어디에 있는건가?” “그러고 보니 왕씨께서 저에게 기산쪽으로 보내 자휼을 돕게 하겠다는 말을 언뜻 비추셨습니다만... 여기서 기산은 가까우니 한번 가봐야겠군요.” “음. 그렇다면 안부를 전해주게.” 백라가 다시 말을 타고는 곡양을 한번 둘러본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 유번에게 물어본다. “여기서 가장 가까운 절이나 암자가 어디입니까?” “근처에는 없네. 여긴 절이나 암자가 생기기에는 너무 험하고 사람이 없는 곳이지 않는가.” “그렇군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백라는 기산쪽으로 말을 달렸고 그 모습이 사라지자 유번은 다시 방안으로 돌아와 앉는다. 너무도 조용한 집안에 문득 아이가 썼던 방안에서 동백향이 풍겨와 웃음짓는다. 143 육관은 서성거리며 안절부절하지 못했다. 이상하게 불안한 하루였다. 앞에 보이는 튼튼한 우리에서 호랑이들이 크릉거렸지만 조금도 위협이 되지 못한다. 이미 너무 오랜시간동안 길러와 식상해 버린것이다. 문득 낑낑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 새로 지은 작은 우리를 바라본다. 예의 그 문제의 호링이 새끼가 우리틈사이에 얼굴을 들이밀면서 화를 내고 있었다. 답답한지 자꾸만 얼굴을 들이 내밀지만 작은 우리로 지어 빠져나갈 리가 없다. 몇 번을 기를 쓰고 애쓰던 호랑이의 바램대로 얼굴이 쑥 우리밖으로 빠져나오지만 몸은 그렇지 않다. 빼도 박지도 못하고 그대로 우리 창살사이에 끼어서 낑낑거린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육관은 박장대소하고 만다. 웃는 육관과는 달리 호랑이는 계속 낑낑거린다. 육관은 우리사이의 창살을 두들겨보고는 호랑이가 끼어 있는 우리창살 두개를 손으로 잡아 벌린다. 예전의 그가 아니라 왈칵 벌려지지는 않지만 그래도 조금씩 벌려진다. 용을 쓰고 벌리자 약간 벌어진 틈에 간신히 호랑이가 고개를 빼어낸다. “답답하냐?” 말이 통할리 없는 짐승이지만 그래도 밖으로 나가려는 모습이 측은하다. “...너도 여기서 못나가면 자살이라도 하는거냐?” 끼었던 목이 저린지 뒷발로 목을 긁는 호랑이를 보던 육관은 다시 창살을 잡아 벌린다. 아주 약간의 미묘한 차이지만 호랑이는 그 사이로 쑥빠져나와 깡총거리며 숲사이로 사라진다. 쫓아가 잡아올까 하다가 왠지 그러는 자신이 바보같아 보인다. 원한다면 돌아오겠지. 하지만 등을 돌리지도 못한다. 돌아올생각이 있다면 나가려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결국 육관은 호랑이를 따라 걸어간다. 벌써 어디로 갔는지 안보이지만 어차피 어디로 갈지 알아서 별로 신경쓰이지 않다. 학고청으로 들어가자 여전히 변함없는 모습에 안도감이 든다. 혹시 오늘 당번이 자신이 알고 있는 비서랑일까 하는 생각에 종이 사이를 헤치며 앞으로 걸어간다. 한참을 걸어 창고가 보이는 끝에 다달았을때에는 실망한다. 아무도 없었다. 곧 이상한 점을 느낀다. 학고청에 종이를 말리는 늦봄과 가을에는 항상 지키는 비서랑이 있기 마련이였다. 행여 비가오거나 바람이 종이를 버릴지도 모르는 생각에 세워두는 것이다. 아무도 없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아무도 없는 창고마루는 뭔가 이질적으로 보여 멍하니 그곳을 바라본다. 어디선가 나타난 호랑이는 킁킁거리며 창고마루를 왔다갔다 부산스럽게 하더니 얼추 창고 아래의 작은 틈사이로 얼굴을 들이민다. 아마도 예전엔 그런식으로 그곳을 드나들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동안 자신이 덩치가 커졌다는 생각은 못하는 모양이다. 또 낑낑거리는 소리에 육관이 한숨을 쉬고 호랑이를 빼내주기 위해 창고로 다가가 허리를 숙이고 그 꼬리를 잡는다. 창고의 안쪽 틈 사이로 하얀 손이 불쑥 나온다. “으악!” “에?” 너무도 놀라 뒤로 자빠진다. 하지만 창고 안쪽에서도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들리고는 한참후에 먼지를 뒤집어 쓴 누군가가 콜록거리며 나온다. 그 낯익은 모습에 안심한다. 하지만 하얗게 질린 얼굴과 그 놀란 표정이 정말 귀신같다. “놀랬지 않은가!” “육관?” 정말로 놀랬다는 듯 일어나 가슴에 손을 얹고 헉헉거리는 육관을 보는 자례역시 흙과 먼지 투성이이다. 호랑이가 틈사이에 끼어 얼굴만 보이자 안쪽에서 밀어 내보내주려던 때 갑작스런 사람소리에 놀란 자례도 창고 안에서 넘어져 버린것이다. “귀신이라도 나온줄 알았네.” “귀신을 믿으십니까?” “말이 그렇다는 것이다!” 성을 내는 육관에게 갑자기 자례가 고개를 돌려버린다. 아무리 화를내도 이런 일이 없었기 때문에 육관은 의아하게 여긴다. “왜 그러느냐?” “아무...것도 아닙니다!” “뭐?” 곧 어깨를 들썩이며 마른 기침을 한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한게 무색하게 심한 기침이다. 숨넘어가겠다라고 생각한 육관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잠시 후 진정되었는지 고개를 돌린 아이의 표정은 아까보다 창백하다. “죄송합니다. 먼지가 걸려서.” “허, 먼지 때문에 황천가게 생겼구나?” “흠. 저도 좀 놀래서.” 달이 밝게 뜨자 육관이 자례의 앞에서서 찬찬히 내려다 본다. “너 많이 놀랬구나.” “예?” “식은땀이 흐르지 않느냐. 손발이 차보인다.” “아, 괜찮습니다.” 불쑥 육관의 손이 자례의 손을 잡는다. 갑작스러운 일인데다가 육관이 그럴것이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해 어이없이 손을 잡힌다. 놀라 잡아 빼려하지만 늦었다. “역시 차구나.” “그...그렇습니까?” 얼른 손을 빼내온 자례는 곁눈질로 자신의 손을 잡았던 육관의 손을 바라본다. 갑자기 호랑이가 허리로 매달려온다. 앞으로 쏠리지만 버틸만하다고 느꼈던 것도 잠시 바로 앞으로 주저 앉게 된다. “하하하. 엄청 무거워졌지? 호랑이라는 것은 인간과 달리 빨리 크지.” “정말 많이 컸군요.” “그래도 널 잊지 않고 매달리는 것을 보니 네가 마음에 든 모양이다.” “나중에 다 커서 배고플 때 절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군요.” “...호연(虎戀)이라는 것을 아느냐?” “호연? 좋은 인연이라는 뜻입니까?” 잠시 아골타는 뭔가를 생각하는 듯 웃는다. 그가 웃으면 말투와 모습과는 달리 인자한 구석이 보여 자례는 그의 웃는 표정을 좋아했다. “호연. 맹수의 사랑이란 맹목적이고 이기적이나 평생을 변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네가 그 호랑이의 사랑을 받는다면 어찌 널 잊겠느냐. 평생동안 널 기억해줄것이다.” “...하지만 그런 호연은 사람을 힘들게도 하는데 말입니다.” “뭐?” “아, 별것 아닙니다. 하지만 이렇게 이 놈이 내가 좋다고 계속 허리에 매달려 있는다면 전 얼마안가 걷지 못할 것 같습니다. 사실 지금도 무척이나 무거워서 말입니다.” 그말에 아비가 허리에 매달린 호랑이의 목을 잡고 들어보지만 이젠 덜렁이며 들리지 않는다. 끈질기게 매달린 호랑이를 육관은 신경질을 내며 발로 차버린다. 화를 내면서도 일단 떨어진 호랑이는 근처를 서성인다. 옷을 털고 일어나는 모습을 육관이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 애써 외면하려고 하나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왜 그러십니까?” “좋은 인연이라고도 생각할수 있겠구나.” “예? 아 호연말씀이십니까.” “...인연은... 빌릴수 있는 걸까?” 역시 뜬금없는 물음에 깊히 생각하게 된다. 육관의 눈치를 보고 중얼거린다. “인연은... 빌릴수 없는 것이...” “왜!” 큰소리에 깜짝 놀란 자례는 육관에게서 한발 멀어진다. 어느정도 안전거리에 왔다 생각되자 자신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인연이란 하늘이 맺어주는 것이 아닙니까. 자신에게 내려진 천명을 누구에게 빌려준다는 것은...” “인연이란 인간사이에서 생기는 정이 아니냐! 천명 탓을 거들먹거리는 것은 옳지 않다!” “하지만...” 입을 다물고 만다. 그것이 더욱 마음에 안들었던지 육관이 재촉한다. 마지 못해 입은 연 자례는 고민하며 말한다. “누군가...인연이라는 것은 하늘이 내리는 인간과 인간사이의 특별한 것이라 했습니다. 단순한 동정심이나 투기로 인해 변한다면 그것은 인연이라고 생각하기엔 무리가있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황제에게는 하늘이 특별히 인연을 수백씩 내려 그 많은 연인들을 거느리게 하는 것이란 말이냐? 그것이 천명이냐? 단순히 가문과 자신의 부귀를 위해 궁안의 그림으로 남길 선택한 그 여인들에게 내린 인연이 단지 그것이란 말인가!” “...” 아무말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어 버린다. 그 모습이 약해보여 육관은 자신이 너무 신경질을 내고 만것같아 잠시 멈칫한다. 한참을 침묵으로 있던 아이가 뜬금없이 질문한다. “왜 사람은 사랑해서는 안될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것일까요?” 순간 얼굴이 뜨겁다. 눈을 뜨니 육관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자신을 바라본다. 입가가 쓰려와 손을 데어보니 피가 흐른다. 씩씩거린 육관은 그대로 몸을 돌려 종이사이로 사라져버린다. “...화가 나버렸네.” 중얼거리며 한손으로 피를 훔쳐낸다. 성각헌의 방앞에는 익이 서 있었다. 익은 자례를 보자 기다렸다는 듯 다가왔다. 뭔가 중히 할말이 있는 듯 막 입을 열려고 하다가 한쪽 얼굴이 부어버린 자례를 보고 소리없이 오만 인상을 쓴다. “이번엔 뭐냐?” “맞았어요.” “그래, 그래.” “익, 나 재워줘요.” “뭐?!” 말도 안되는 소리하지 말라는 표정의 익에 자례는 웃고 만다. “하지만 누군가 들어왔던 방에 다시 들어간다는 것이 좀 그래요. 익은 이제 서관으로 출근하니 방은 비잖아요.” “그럼 매일 내방에서 지낼꺼냐? 그건 아니잖아.” “오늘 만이라도...아, 또 터젔다.” 주륵하고 터진 입술에서 피가 흐르자 익은 죽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방문을 연다. “난 사생활도 없냐.” “고마워요.” “젠장, 할말이 있었는데 꼴이 그게 뭐냐?” 투덜거린 익은 손수건을 꺼내 던진다. 입을 막은 자례가 의자에 앉아 손수건으로 입을 막자 익이 커다란 세안 물병을 가지고 와 대야에 붓는다. “왜 맞고 다니냐. 제대로 처신해라. 칠칠맞게.” “예.” “그보다 고서는 못찾은거지. 누구 짐작가는 사람이라도 있니?” “...아뇨.” 세수를 한 자례는 머리를 풀고 손으로 대강 내려빗는다. 옷을 벗자 익이 잘 털어낸다. “먼지투성이네. 창고에들어갔었니?” “...예.” “너 정말 왜그래? 멍하잖아.” 툭하고 이마를 치며 익이 묻는다. 멍하니 익을 바라보던 자례가 묻는다. “인연은 빌릴수 있는 거에요?” “...너 혹시 차였냐?” 익은 낄낄웃다가 진지한 표정의 자례를 보고 헛기침을 한다. “인연을 어떻게 빌리냐? 말도 안되는 것이지. 인연이란 하늘이 맺어주는 사람과 사람사이의 운명이다. 연리지처럼 두나무가 어느날 한그루가 되어 가지가 엮이는 것처럼 그 운명이 하나가 되는것인데 어떻게 인연을 빌린단 말이냐?” “그런가요.” “인연을 빌린다는 이야기는 연리지의 두 나무를 도끼로 찍어내어 다른 나무사이에 다시 심는다는 것과 뭐가 다르냐. 하지만 아무리 나무와 나무를 같이 붙여놓는다 한들 가지는 하나가 되지 못한다. 연리지가 될 수 있는 것은 운명을 받은 두 나무인듯, 억지로 행한 것에 되지 않고 원하지 않아도 저절로 이어지는 것이 바로 인연이 아니겠니? 빌린다 한들 빌리지 못하는 것, 빌리고 싶지 않아도 저절로 자신에게 오는 것이 바로 인연이라 생각한다.” 진지하게 말한 익은 자례의 얼굴을 살핀다. “뺨의 상처에 입술까지 그렇게 되었으니 네 얼굴도 볼만해지구나. 누가보면 한바탕 싸운줄 알겠다.” “그럼...왜 사람은 사랑해서는 안될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것일까요?” “뭐?” 이해가 안된다는 듯 익은 잠시 생각하고는 피식 웃어버린다. 자례에게 다가가 허리를 안아 침상에 올려놓는다. “그만 자라. 어린애야. 밤을 새었으니 피곤할터인데.” 익이 어깨를 잡아 눕혀주려고 하자 자례가 그 손을 잡아 누른다. “대답은?” “...역시 어린애인가.” 손을 빼고 눕혀 이불을 올려 덮어준다. 눈을 뜨고 익을 바라보는 모습에 할수 없다는 듯 익이 말한다. “인연은 이해가느냐?” “예.” “그렇다면 자고 일어났을때 네가 한 질문에 대한 답이 떠오를 것이다.” 무엇인가 말하려는 어린애의 눈을 손을 들어가린다. 얼마 가지 않아 손을 치웠을때에는 눈을 감고 잠든 모습에 익은 미소짓는다. 144 여전히 등짝을 노려보는 시선에 익숙해지련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익은 다시 등을 돌린다. “왜?” “그냥요.” “저쪽보고 눈싸움해.” “우관의 방문이 열려 있는 것을 못본건가요 안본건가요?” “뭐?” “아니면 닫아논 방을 열고 나온건가요?” “뭐?” 이해할수 없는 말에 익이 낮게 되묻는다. 막관은 그런 익이 의심스럽다는 듯 바라본다. “간랑인 나와 장원인 우관이 나가게 된다면 승승장구 할 것은 이곳에 양만관뿐이군요. 죽이기엔 우관이 걸리던가요?” “무슨 소리하는거냐!” 벌떡 일어난 익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막관을 마주본다. “어디서 그런 헛소리를 늘어놓는건가!” “막관은 우관방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면서요!” “별걸 다 아는군. 그래,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지? 그렇다면 네방은 어떻게 들어간거라 할건가?” “성각헌의 열쇠정도는 얼마든지 대용품으로 열수 있지 않습니까?” “웃기는군. 이봐, 막관. 난 네가 좋지않아. 만약 내가 그래야 할 상황이였다면 자네 방을 아주 부셔놓고 나왔을거다.” “저런.” 안그래도 민감해진 서관이 둘의 말다툼에 조용해진다. 낭관이 소리를 질러 둘의 말싸움을 그만두게 한다. 하지만 위압감이 생긴 서관의 분위기는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점심때에 들어 서관으로 들어온 자례의 얼굴은 더더욱 상상력을 부축이게 만들었다. 이튼날도 그 다음날도 계속되는 익과 막관의 신경전에 우관의 중재까지 나서게 되어 서관은 매우 혼란스러워졌고 낭관들은 짜증을 내기시작했다. 세 사람이 모두 근신을 임명받았지만 나란히 붙은 성각헌의 방에서는 항상 싸우는 소리가 울렸으며 결국 못참은 성각헌의 비서랑들이 낭관들에 탄원을 올리게 되었다. 낭관들은 그들을 임시 좌천한다는 문서를 올렸다. “임시좌천?” “사이가 좋지 않는 비서랑들인가봅니다.” “사이가 좋은 관리들이 어디있는가? 모반할때나 붙은 것이 그들이다. 그것가지고 좌천하겠다는거냐? 황제의 사람이 도성관리 아래에서 일하는 것은 날 우습게 보는 일이다.” “실은 사이가 안좋은 이유가 걸려서 그럽니다.” “왜?” 아골타는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는 몸을 돌려 히우루를 바라본다. 히우루는 고개를 갸웃하고 잠시 망설이다가 말한다. “우리가 찾던 그것말입니다. 누군가 가져갔다고 하더군요.” “허! 회수하라 하지 않았나!” “회수하라 말씀하신 저녁에 없어졌다합니다. 문제는 이것이 아니라 그들이 싸우는 이유가 이 고서때문이라더군요.” “무슨 말인가?” “싸우고 있는 두 낭관이 이 고서를 맡았던 관리들입니다.” “그럼 남은 하나는 뭔가?” “범인으로 지목되는 경우인 것 같은데 아직 확실치는 않습니다.” “알아서 해라. 어찌 되었건 그것을 찾아내서 없애버려.” “예.” 귀찮다는 듯 아골타가 긴 의자에 몸을 기대 앉는다. 히우루가 붓과 도장을 들어 낭관들의 상소에 도장을 찍어 대신 윤허한다. 좌천하라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 두 관리중 막주라는 관리는 아시다시피...” “아아, 대홍로 막씨의 아들인가?” “그렇습니다. 어찌할까요? 이자도 좌천시킬까요?” “...알아서 해.” “그럼 일단 집에서 근신처분을 내리겠습니다. 그럼 우씨는 내일부터 도성 밖에 있는 동북청사에 임시로 좌천시켜 놓겠습니다. 약만씨는 혐의는 있지만 증거가 없으니 좌천의 대상에서 제외하지요.” “마음대로 해라.” 아직 하고 싶은 말이 더 남았는데 아골타는 몸을 일으킨다. “벌써 들어가십니까?” “오늘은 좀 피곤하다.” “그러시다면...내일하지요.” 하지만 그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아골타는 휘장사이로 사라져버린다.얼마지나지 않아 막관은 자택근신을 자례는 임시 좌천으로 동북청사에 배속되었으며 익은 그들이 복귀할때까지 학고청당번을 맡게 되었다. 씩씩거리는 익은 그야말로 조금만 건드려도 폭팔할 것 같은 모습이였다. 낭관에게서 셋의 처분 명령을 받고 나서 가장 먼저 막관이 아버지인 대홍로의 처소로 일단 건너가버렸기 때문에 어느날과 같은 큰 소란을 일지 않았지만 익의 화는 가라앉지 않았다. “젠장할! 머리에 피도 안마른 꼬마놈이 우습게 보고 있어! 아무튼 간랑이라는 거 정말 마음에 안든다니까!” “하.” 자례가 깊게 한숨을 쉰다. 익이 자례를 돌아보고 화를 낸다. “너도 마찬가지야. 뭣하러 그런 말을 한거야! 안그래도 꼬장꼬장한 놈이 더 의심하잖아!” “그만해요! 나 짐정리 해야하잖아요!” “좌천이라니! 아주 잘됐구나!” “익공!” “언제 풀릴지 알아! 내 생각은 안궁금하냐? 이 모든 것이 꼬마 놈이 널 좌천시키려고 한짓같단 말이다! 봐라, 그놈은 아버지덕에 근신이지만 넌 궁을 나가잖아!” “임시 좌천이에요.” “언제 그것이 풀려 복직할지 누가 알아!” 익이 손을 올리며 웃는다. “말이 좋아서 임시 좌천이지, 풀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끝장이란 말이다. 황제에게 오고가는 문서가 얼마나 많은지 알고 있냐? 다시 널 불러들이는 행운이 있을 것 같아!” “미안해요.” “뭐가 미안한지 알고는 있는거냐?” “난 돌아오게 될겁니다. 익. 그리고 그때는 필본사건으로 했던 약속을 지켜드리죠. 신세를 진 것은 분명히 갚겠어요.” “바보같은 어린애같으니라구. 그따위 신세는 필요없어. 누가 그런거 정말 받고 싶은줄 알아?” 더욱 화를 내던 익이 갑자기 자례를 끌어안는다. “몸조심해라. 요즘 도성 밖은 청소기간이란 말이다.” “걱정말아요. 돌아올테니.” “너 돌아올동안 난 뭘 가지고 노냐?” 진지했던 분위기가 틀어져버린다. 눈썹을 치켜올린 자례가 중얼거린다. “...내가 무슨 장난감입니까?” “그리고 너 일단 황성나가는 것이니까 휴가라고 치자고. 그 꼬마놈 괴씸하지만 일단 우리가 한방에서 잔다는 소문은 안났으니 내가 이긴거지? 주사위 놀이기구 사와야 한다. 잊지말고.” “정말!” 비게를 던져버린 자례는 화를 내며 익을 방에서 내쫓는다. 후다닥 방을 나갔던 익이 잠시 후에 빼꼼 고개를 다시 들이민다. "그러고보니 어제한 질문의 해답은 나왔니?" "잠을 자고 일어났더니 머리만 아프더군요!" 자례가 갑자기 무엇인가를 던져 손을 내밀어 그것으 받는다. 필본이였다. "이거 왜?" "혹시 서공이 온다면 이것을 화선부인에게 전해달라 해주세요. 그녀가 부탁한것이니." "흐음. 내 주사위 놀이도..." 퍽! 하는 소리가 나며 정통으로 베게에 얼굴을 맞은 익은 아무소리도 안하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다. 기산성은 작고 외진곳의 성이였지만 굉장히 번화한 성이였다. 철광을 끼고 있는 성이라 근처의 산 풍경은 험악했지만 부산스러운 성안 움직임이 마음에 든 백라는 말을 재촉해 성을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등뒤에서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보고는 말에서 내린다. 눈앞에는 여진의 복장을 한 사내가 자신을 물끄러니 바라보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 기산성으로 가시는 길인가요?” “예. 그냥 지나가는 손님입니다. 기산성에 사시는 분인가봅니다?” “그렇습니다.” “흠. 그럼 성안까지 안내라도?” “그럴까요.” 마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부터 보이지 않는 수해를 찾아 성밖으로 나와 찾고 있었다. 너무 오래 북쪽성문을 비워두면 곤란하기 때문에 돌아가야겠다고 길로 들어선 순간 낯선이의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둘은 말을 끌고 천천히 산길을 내려가며 대화를 나눈다. “기산엔 무슨 연유로 오셨는지요?” “말그대로 잠시 지나가는 길입니다. 운이 좋다면 알고 있는 누군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눌수도 있겠지요.” “으흠.” “날씨가 무척이나 좋습니다. 곧 여름이 올것처럼 이 따뜻함이 과하군요. 하하” 쉽게 웃는 백라의 모습에 마고는 조금 생소해 한다. 보기에는 바싹 마르고 신경질적으로 생겼지만 성격은 그렇지 않는 모양이다. “아 혹시 공은...” “예?“ 백라가 마고를 힐끔 보고는 웃어버린다. “정안족?” “예?!” “아니라면 그리 놀라실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공을 보니 누군가 떠올라서 한번 생각해본겁니다.” “아, 전...” 아닙니다. 하지만 그말도 쉽게 나오지 못한다. 마고는 잠시 멈칫했다가 말을 바꾼다. “그럼 그쪽은 정안족이십니까?” “아아, 그렇진 않습니다. 전 보다시피 한족입니다. 정안족들과 함께 지냈기 때문에 남들보다는 그들에대해 잘 알고 있지만 말입니다.” “그렇군요.” 연녹색의 한족옷이 그럭저럭 어울리는 것을 보아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 아닐거라 생각한다. 백라는 조금 대하기 힘들다는 내색이 보이는 이 젊은 사내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분명 아닌 것 같은 묘한 느낌이 있지만 그에게는 정안인 특유의 분위기가 있었다. 자신이 틀리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이 되어 백라는 그가 반괴정도 되는 혼혈이 아닌가 하는생각을 했지만 표현하지는 않았다. 성에 가까워지자 병사들이 마고를 알아보고 마중을 나왔다. 백라는 마고가 북쪽성을 관할하는 장수임을 알았고 고개를 가볍게 숙여 인사를 표했다. 마고는 그의 신분을 확인하는 도성의 증명서를 읽고는 그의 입성을 허락했다. “감사합니다.” 백라가 총총히 사라졌지만 마고는 한참을 더 그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았다. 친첸이 다가와 마고의 어깨를 쳐 고개를 돌리게 만든다. “언제 오셨습니까?” “네가 성문에 도착했을때. 아는 사내인가? 난 처음보는데?” “아니요, 산길에서 만난 여행객입니다.” “그런데 뭘 그렇게 서로가 아는 사이처럼 마주본건가?” “예?” 친첸이 신기하다는 듯 표정을 짓는다. “너 눈을 마주보고 이야기 하던걸.” “그럴리가요.” “흐음.” “그만 두십쇼.” 아닌듯한 한숨을 쉬고 마고가 등을 돌려버린다. 문득 등뒤를 돌아보니 저 멀리 수해가 흑염과 앞서듯 뒷서듯 성으로 달려오는 것이 보인다. 친첸이 그를 향해 아는 척을 해보인다. 자신도 그를 기다린다. 사실은 친첸의 말이 맞았다. 낯을 심하게 가리는 편이 분명한데도, 그 여행자가 굉장히 날카로운 삼백안의 소유자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은 그를 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친첸에게도, 자휼에게도 시선을 회피하게 되는 자신인데도 말이다. 그의 성격이 마음에 들었나. 하지만 스쳐 지나가는 인연을 지우고 앞으로 달려오는 지인에게 손을 흔든다. 145 씩씩거리던 주는 결국 제 분을 못이기고 정원 가득피어있는 춘란을 잡아 뜯는다. “제기랄! 제기랄!” 손에서 아직 피지도 못한 꽃봉오리가 하늘로 날려 사라져 버린다. “그만 두어라!” “...왜요!” 반백의 머리의 중년인이 주에게 다가와 그 손의 란을 털어내게 한다. “이 무슨 추태냐! 말못하는 꽃에게 그 화를 풀다니! 애초에 네가 잘못한 것이 아니더냐! 보관이 충실했으면 이런 일은발생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님! 제 보관방법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누군가 마음을 먹고 털어간 것을 어찌한단 말입니까? 그것이 내 잘못입니까!” “이미 틀어진 문제다. 이야기를 복잡하게 만들지 말아라!” 단호하게 말한 그는 등을 돌린다. “나는 입궁해야 한다. 근신기간동안 얌전히 지내거라.” “알겠습니다.” “...시간이 난다면 양인성에 가서 지내도 좋다.” “...파공(3왕자 태천)께서 부르시던가요?” “그럼 널 부르지 않게 생겼느냐! 이런 사건을 만들어버렸는데!” 그가 버럭 화를 내며 젊은 아들을 바라본다. 아까와는 달리 주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흔든다. “안됩니다. 아버님. 그 고서는 중요한 것이 분명했습니다. 분실된것만을 보아도 알수 있지 않습니까. 그것을 가져간 그 누군가는 분명 그것을 판독하고 있던 나와 우관을 살피고 있을것이 분명합니다. 지금 파공에게 간다는 것은 파공을 위험에 빠뜨리게 하는 것입니다.” “...좋다. 그럼 얌전히 지내라.” “알겠습니다.” 그가 사라지자 주는 다시 춘란을 잡아 뜯으며 화를 푼다. 동북청의 관사는 멀뚱하게 때아닌 인력에 잠시 고민했다. 고개를 갸웃하며 멀뚱히 생각에 잠긴다. 앞에 서서 관사의 말을 기다리는 젊은 관리를 본다. 50대의 관록이 생긴 동북청사의 관사가 문득 뭔가 떠올랐다는 듯 말한다. “아, 우린 구면아닌가?” “예?” “어디보자... 그렇지. 이번 입관시험에 합격했던 우씨아니던가! 여기서 내가 자네의 합격장을 인계했지.”“아아...기억하고 계십니까.” “입관시험에 합격한다는 것은 그렇게 흔한 일이 아니니까. 게다가 자네 표정이 기억에 남아있네.” “예?” “보통 입관의 합격생들은 기쁜 표정으로 그것을 받기 마련인데 자네는 마치 사형이라도 언도 받은 사람처럼 받아갔지 않은가?” 관사는 피식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례 앞으로 나서 따라오라 신호했다. “입궁한지 얼마 안되었는데 벌써 좌천이라니. 임시 좌천이긴 하지만...무슨 문제가 생긴것인가? 얼굴을 보아하니 싸웠나?” “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뭐, 황궁이란 체질적으로 맞는 사람이 있고 없고 하는 것이지. 너무 부담가질 필요가 있을까.” 관사를 따라 별청으로 들어간다. 황궁과는 다르게 화분에 꽃도 있고 낡은 병풍과 주렴들이 마음을 편하게 한다. “그런데 지금 시기에 오다니... 좀 그런데.” “왜 그러십니까?” “실은 봄이지 않는가. 봄이면 당연 청소를 하기 마련이지. 힘들단 말이야. 인재가 생기는 것은 좋은데 도성의 관리인 내가 황제의 관리를 이런 일에 부려먹는다는 것도 역시 내키지가 않군.” “하하, 좌천의 의미는 이런 것이 아닐까요.” “내말을 이해 못하는구만. 마당을 쓴다는 것이 아니네. 가주 정리를 한다는 이야기야.” “가주 정리라 함은 난민 신고를 받는다는 이야기입니까?”“빈민촌들을 정리한다는 이야기네. 추방하는 것이 정식이지만 보통은 죽이지.” 드륵하고 막 들어가려던 문이 열린다. 나오는 것은 젊은 병사들이다. 그들에게서 확하고 피비린내가 풍기는 느낌에 자례는 한발 물러나 그들이 지나가길 기다린 후 방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가주가 없다고 한들 함부로 죽일수는없지 않습니까?” “가주가 없다고 하는 것은 난민이나 부랑아라는 것이네. 알다시피 가주가 없으면 일을 할수 없고 일을 할 수가 없으면 도적질이나 구걸을 하게 되네. 이곳은 황궁이 있는 곳이라 그런 짓은 범법에 해당하지.” “그렇다면 어떤식으로?” “아까 본 병사들이 일일이 대조하여 가주제외자들을 끌고 오지. 친인척이 있으면 그곳으로 보내지만 범법의 행위가 있으면 여기저 처분하는 것이지. 이런 처사가없으면 이 거대한 황제의 도성이 무리없이 돌아갈 것 같은가. 이주해오는 것도 나가는 것도 까다로운 것이 황제의 것이라네. 자네도 황제의 관리이니 잘 알지 않는가.” “판단은 관사님이 하십니까?” “그렇지. 우리 쪽은 좀 많아. 왜 근처에 북문이 있지 않은가? 그쪽엔 난민이 자주 모이거든. 보통 다른 청사들은 하루에 대략 서너명정도 처리하면 되지. 하지만 동북청사인 이곳은 하루에 열명정도는 처리해야한다네.” 아마도 동북청사의 담으로 보이는 문을 지난다.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응. 처형장에 한번 가보는거야.” “...” 힐끗 관사가 자례의 침묵에 눈길을 던진다. “사람 죽는 것을 못보았나?” “아니오.” “하루에 열명을 참수한다는 것은 보통일이 아니라네. 그래서 동북청사는 약으로 그걸 해결하지.” “약으로?” “그래. 하루에 10명씩 참수하면 동북청사전체가 피비린내로 진동을 한다네. 하지만 독약을 먹이면 간단히 끝나거든.” “시체 수습은? 매일 열구씩 나오면 처리가 불편할텐데요.” “어차피 가주가 없는 시신이니 매일매일 도성밖으로 빠져나가 산속에 버려지는 것이지.” “그럼 제가 무엇을 해야합니까?” “가주확인을 해주게. 처형 직전에 정말로 가주가 없는 놈인지 마지막 확인을 하는거지. 간단한 일이야.” 한참을 걸어 번화가에서 떨어진 공터로 나온다. 원래 처형장은 도성 북문 근처에 있는 공터로 사람들이 잘 볼수 있게 만들어 놓은 축대위에 있었지만 그들이 가는 곳은 북문과는 반대편의 으슥한 곳이였다. 긴 담을 두른 허름하지만 튼튼해 보이는 동북청사의 외관으로 들어간다. 문패도 없는 이곳은 좁은 마당과 긴 복도, 서너개의 방과 감옥으로 가는 듯한 쇠문이 바로 보이는 곳이였다. “오늘은 이미 끝난상태거든. 매일 아침 저기 보이는 옥에서 한명씩 이리로 끌어내어져 자네에게 가주 확인을 받네. 별다른 일이 없다면 병사들이 약을 가져와 먹이지. 그리고 다음 사람, 그렇게 열명이지. 두시간도 안가서 끝나는 일이네. 괜찮겠나?” “...다른 것을 원한다면 그것을 할수 있습니까?” “그렇게 해주지.” 자례는 텅비어있는 이 살벌한 곳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문득 한기를 느끼는 듯 한발 물러난다. 여긴 왠지 있고 싶지 않다. “다른 일을 할까?” “그랬으면...” 갑자기 등뒤에서 삐꺽하는 소리가 들려 흠칫 놀라 뒤를 바라본다. 누군가 들어온것이다. “아아 차의원.” “여기 계셨군요. 관사님. 여쭐게 있어서...어라?” “...의원님?” 차의원은 예상치 못했던 인물에 놀라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자례 어느정도 잊고 있었던 사람이라 놀란다. “우씨 가문의 도련님이 아니신가? 이런 험한 곳에는 어쩐 일로...” “이런, 둘이 알고 있는 사이인가? 이런 인연이 있나.” “예. 차의원님께 큰 도움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차의원은 그제야 자례가 입고있는 관복에 흥미를 보인다. “이런 관직에 오르셨나?” “예, 하지만 좌천중이랍니다.” “차의원이 이곳의 약을 짓지. 여러모로 의원에게 신세를 많이 지고 있다네.” “이런, 관사님, 우관이 좌천중이라한들 이런 곳에서 일을 할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얼굴을 찌푸린 차의원이 말한다. “황제의 사람인데다 어디까지 오를지 모르는 선비 아닙니까. 이런 험한 일을 시키시면 안되지요. 게다가 우관은 가슴병이 있어서 이런 음침...” “아뇨. 이 일을 하겠습니다.” 자례가 얼른 수긍한다. “차의원님이 계시다면 여기서 일하는 것이 제게 남는 시간도 많아 좋을 것 같군요.” “얼마 안되는 시간이라지만 사람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 본다는 일은 쉽지 않네.” “괜찮습니다.”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차의원을 두고 자례와 관사는 고개를 끄덕인다. 관사가 차의원을 보고 묻는다. “그럼 내일부터 우관이 이곳을 지킬걸세. 그런데 차의원께서는 왜 날 찾았지?” “아아, 그게 약재가 부족한 바람에 내일 일을 늦추자고 말할생각이였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지. 우관, 이곳에서 지내는 와중에는 내 옆방을 사용하도록 하시게. 방을 안내하지.” “감사합니다. 차의원님도 함께 가시지요?” “난 왜?” “차라도 대접하고 싶어서 말입니다.” 싱긋 미소지으며 차의원을 다가오게 한다. 성각헌의 방보다 작고 지저분한 방이지만 지낼만 하다고 여긴 자례는 물을 따라 차를 만든다. 어느정도 이야기를 한 관사는 이만 공문을 작성해야 한다며 방을나간다. 둘만 남자 차의원이 이상한 듯 묻는다. “입관시험에 합격한 것인가?” “예. 그때 도와주셔서 시험날 잘 치루게 되었습니다.” “아냐, 난 그것을 물어보려는게 아닐세. 난 늙었다지만 아직 기억력하나는 쓸만하이. 내가 자네에게 지병을 물었을때 자네는 분명 정안족...” “흠!” 탁자를 치며 일어난 자례는 차의원의 입을 시선으로 막는다. 서로 아무말 없이 견제하다가 천천히 탁자에 다시 앉은 자례가 입을 연다. “일이 이렇게 되었습니다.” “...뭐가? 원래는 한족이란 이야긴가? 그러고 보니 자네는 우가문의 사람이기도 하지 않나. 혹시 양자인가? 아니라면 정안족과 혼혈인겐가?” 자례는 가늘게 실눈을 뜨고 재빠르게 생각한후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도 차의원은 마기장군이 정안족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 듯 해보였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제 신분이 노출되면 우장군님에게도 폐를 끼치니 알려지지 않았으면 합니다.” “좋아. 그렇게 하지. 해될 것은 없으니까.” 여전히 호쾌한 성격의 노인이라 자례는 경계심이 풀어져 버린다. “이런식으로 다시 재회할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나 역시 자네가 궁금하기는 했지만 역시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라 기별을 놓지는 못했네. 보아하니 입관한 것 같은데 보기와 같이 영리하구만.” “과찬이십니다.” “그래, 몸은 괜찮고?” “예. 입관해서도 황궁안의 의원에게 계속 약을 지어 먹었으니까요.” “다행이군. 좋아. 여기 있을때는 내가 다시 약을 지어주지.” “그러시겠습니까?” 차의원은 웃으며 차를 한잔 더 따른다. “내 약을 의심없이 먹어주는 것은 우관이 처음이였으니 말이야. 어느때라도 지어줌세.”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약재가 모자르다고 말씀하셨는데...” “으음. 사약이라는 것은 워낙에 잘 쓰지 않는 약재로만 만드는 법이라 내 수중에 있는 것이 딱 떨어지면 참으로 난감하다네. 다른 의원들은 극소량을 쓰는 약재를 난 펑펑담아 쓰게 만들지 않는가. 다른 약방을 다 뒤져도 한사람분 약을 만드는 것도 힘들거든.” “그럼 내일은 어찌 합니까?” “일단은 산행을 할생각이네. 독초라는 것은 여기저기 많으니까 말이야. 이맘때면 앉은 부채가 활짝 피는 때이니 곧 구할수 있을거야.” “아아 그거...” 자례가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하자 차의원이 묻는다. “앉은 부채를 알고있나? 하긴 자네라면 알고있을만 하지. 오랫동안 이약저약을 많이 먹었을테니까.” “예전에 진통제로 먹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독이 있다는 말은 들었는데 정말로 사약에 쓸만한 독초입니까?” “그래. 위험한 것이네. 그 뿌리를 소량쓰면 강한 진통제의 역할을 해주지만 그 화려한 꽃과 잎을 다려 먹게 되면 뱃속의 오장육부가 머리위로 뒤집어 지는 고통으로 고생하게 된다네. 사실 이것만으로는 죽진 않아. 실제로 사약은 앉은부채에 미치광이풀을 다리거나 천남성에 수은을 타서 먹인다네. 하지만 수은이 좀비싼가. 하루 열명분의 수은을 구하려면 동북청사는 한달안으로 빈털터리가 될걸. 하하하” “그래서 직접 제조하시는 건가요.” “...수은은 독성이 강해 죽기전에 어마어마한 고통을 느낀다네. 이왕 죽어야 하는 몸이라면 달게 죽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하하하, 하긴 어설프게 죽는 것보다는 못하겠지.” 허탈하게 웃는 차의원의 목소리가 매우 자조적이라 서글픈 느낌이 난다. “어설프게 죽는다니요?” “예를 들자면 그 앉은 부채가 그러하네. 앉은 부채의 잎을 소량만 다려먹은 경우 두통이나 복통, 현기증과 기절등의 단순한 중독 현상만 일어나지 죽지는 않아. 하지만 그것이 계속되풀이 되면 어찌되는지 아냐?” “...어찌 되는데요?” “장님이 되어버리네. 앉은부채가 그 뛰어난 진통효과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사용되지 않는 이유는 맹안초(盲眼草)이기 때문이야.” “...눈이 멀어버립니까? 평생?” “특이한 독초 중 하나지. 평생을 눈병신으로 고생하게 되는거야. 어설프게 죽는거지.” 설마라는 얼굴로 차의원이 묻는다. “자네 설마 이런 약재들을 함부로 먹는 것은 아니곘지?” “실은 지금 저에게 앉은 부채뿌리가 있습니다만...” “당장 내놔!” “하지만 뿌리이고 이건 포상받은 것이라...!” “누가 이런 것을 상으로로 주나! 소란스런 옆방에 관사는 잠시 귀를 기울인다. 하지만 곧 자신의 일에 매달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용해 지겠지라는 생각이다. 동북청에서의 좌천 생활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 단설의 역주는 인용과 개인적 견해가 들어간 글입니다.(맹신(盟信)사양. 도용씁쓸)-------- 미치광이풀 미치광이풀은 4-5월 고산지대의 습지에 잘 자라며 5월초 황색 또는 자색의 작은 종모양의 꽃을 피우며 뿌리는 어른 손가락 굵기로 옆으로 뻗는다. 줄기의 뿌리부분이 자색을 띠며 키는 20-60cm정도이다. 뿌리 줄기는 진통 진경재로 약용한다. 이를 먹게 되면 독성이 너무 강해 소화기계통의 마비, 땀이 나오지 않으며, 눈앞이 캄캄해지며, 호홉이 느려지고, 발열, 흥분, 불안, 환각 증상이 나타난다. 마치 미친 사람처럼 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맹독성 식물이다. 뿌리줄기는 10g이상 먹었을 때 생명이 위험하다. 앉은부채 천남성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 풀로서 산의 습지에 잘 자라며 키는 30cm 이내이며 3-4월경에 먼저 꽃이 피고 잎이 달린 후 6-7월경에 열매를 맺으며 꽃이 크며 불꽃모양의 광배 속에 꽃이 피며 꽃에서 썩은 냄새를 풍겨 수분을 한다. 독성이 강하며 잎을 먹은 경우 구토, 복통, 설사, 어지럼증, 시각장애 등의 증상이 나타난다. 뿌리는 진통, 이뇨, 기관지염 천식등의 치료에 사용한다. 146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웃기는 일이였다. 기산성에 공연하게 정안족이 들어와 부락을 형성하고 생계를 위한 농사와 장사를 시작한 것은 이미 예전의 일이였다. 사내들은 수렵을 하고 여인들이 모여 음식을 만들어 내논다. 자휼 역시 혈족의 부락이 생기면서부터는 별 무리가 없다 여기면 그쪽의 식당을 찾아가 끼니를 사먹고는 했다. 오늘도 아침운동 후 조금은 이른 점심을 먹기 위에 부락을 찾아갔다. 마고는 항상 친첸과 식사를 같이 했기 때문에 식사만은 자휼 마음대로 할수 있었다. 항상 앉았던 자리에 앉아 매번 먹는 음식을 기다리며 문득 고개를 들었는데 정말 우연이라기에는 웃기는 사람이 앉아있다. “백라님?” “이런, 저녁때야 볼수 있을줄 알았는데. 아침인가 점심인가?” 백라가 자리에서 일어나 자휼의 탁자로 옮겨갔다. 자휼은 너무도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본다. “어떻게 제가 이곳에 있는 줄...” “세상에 비밀이 어디있는가? 그렇게 허겁지겁 도성안을 뛰어다녔다는 사람거처를 못알아낸다는 것이 웃기는 일이 아닌가?” “아아, 죄송합니다. 난곡으로 절 만나러 오셨다는 것은 알았는데...” “됐어. 그일은 접어두지.” 백라는 차를 마시고는 빤히 자휼을 바라본다. 그 날카로운 눈빛에 자휼이 조금 부담스러워 고개를 돌린다. “무얼 그리 보십니까?” “후소를 만났는가?” “예? 그것을 어찌...” “전보다 오기가 생긴듯해 보여 짐작해본것이네. 보기 좋군. 예전엔 비오는날 주인을 잃은 강아지 같았는데 지금은 사냥을 나가고 싶어하는 매의 눈이네.” “저...후소란 분은 어떤 분이십니까?” “그가 아무말도 안하던가? 하긴 그럴 친구지.” 밥이 나오자 천천히 식사를 한다. “그는 예사장군과 나와 친구사이일세. 자세히 말해줄수는 없지만 스님은 아니고 개힘의 수련선생이지. 보통은 그냥 무난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놈인데 근간에 일이 있는지 돌아다니는 모양이지.” “굉장히 강하신 분이였습니다. 몇일되지 않는 기간이지만 정말 감탄했습니다.” “하긴. 몸에 비해 굉장히 날렵하지? 돼지가 하늘을 난다는 것이 거짓말은 아닐 것 같다니까.” 넉살좋게 말한 백라는 낮게 웃는다. 그 웃음이 왠지 써보여 자휼은 고심끝에 묻는다. “무슨 일로 여기까지?” “지나가다 들린 걸세. 듣자하니 이 성의 장수라던데 자세히 좀 들어볼까?” “아아, 별것 아닙니다.” “좋아. 자네 아우가 을노와 먼저 출발했지. 나와 유번님은 그 다음날 따라 출발했고. 그곳에 가니 자네는 없었네. 듣자하니 유견님께서 자네가 수련으로 나가있는 상태라 말씀해 주셨지. 하지만 그 후부터 자네를 못보았네. 을노가 말해주기를 자네와 그 밤에 만나긴 했지만 자네가 우리와 만나는 것을 거부했다고 하더군. 자, 여기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할까?” “...실은 그 이후에 산을 내려가다 이 성의 태수인 5왕자를 만났습니다. 우연히 그를 도와주게 된 인연으로 이성에 들어와 지금까지 지내고 있는 것입니다.” “왜 우리와 만나는 것을 거부했는지는 안말하는건가?” “...죄송합니다.” 조용한 말이지만 자휼의 눈에 절대로 말하지 않겠다는 단호함이 나와 백라는 끄덕인다. “알겠네.” “저, 가능하시다면 그 이후에 제 아이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알려주시지 않겠습니까?” “...왜 만나는 것을 거부했지?” “...역시 안되겠습니까?” 자휼은 잠시 몸을 뒤로 물리고는 고민하다가 결심했는지 다시 몸을 당기고 말한다. “실은 제...앗?” “아직 멀었어.” 백라가 다가온 자휼의 이마에 손가락을 힘껏 튕겨 놀라게 한다. 쓰린 이마를 손으로 누르며 뒤로 물러는 자휼에게 백라가 인상을 찌푸리며 경고한다. “아직 멀었군. 말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어떤 이유에서라도 바꾸면 안되는 법이네. 사내놈이 이렇게 지조가 없으면 어떤 여인이 자네를 믿고 다가오며 어떤 친구가 자네를 신용 하겠는가?” “쳇, 당해버렸군요.” “어설픈 동정이나 나약한 결단은 쓰린 상처를 만들어 준다네. 자네는 그런 일이 없도록 지금부터 다신을 다스리는게 좋지 않을까...” “... 무슨 일이 있으신겁니까.” “별로.” 백라의 웃음은 거짓같아 자휼은 동조하지 못한다. “그래. 자네가 수련을 가던 사이에 우리는 도성으로 돌아오라는 명을 받았다네. 좀더 자네를 기다렸으면 하는 자례의 뜻을 받아들일수 없었네. 날이 밝는대로 우리는 도성으로 향했고 자례는 왕씨의 명을 받들어 가호적을 받아 황제의 축일날 시행된 입관시험에 합격하여 지금 황궁의 관리로 들어가 있네.”“예...그렇군요.” “별로 놀란 표정이 아니군?” “어느정도는 예상하던 일이였습니다.” “그럼 됐지.” 머뭇머뭇하던 자휼이 솔찍히 말한다. “실은...제가 죽였지 않습니다. 그를.” “누구? 응? 아아... 그래. 왜?” “그자를 내가 죽였는데... 아이가 황성에 들어갔다는 것이 몹시 마음에 걸립니다. 이 사실을 아이는 알고 있습니까?” “그일을 아는 사람은 황궁에서도 극소수일것이네. 자례도 몰라.” “...그렇습니까.” “뭐가 걸리나? 상관없는 왕자가 아니던가. 그저 공물을 받으러간 사람일뿐인데.” “그렇습니다만 그에게 도움을 받은적도 있고 아이와 사이도 그리 나쁘지 않았기에 만일 알고 있다면 부담이 될것입니다.” “그렇다면 애초에 죽이지 말것을.” 식사를 끝내고 밖으로 나가 조용한 나무밑으로 간다. 기산의 분주한 사람들이 저마다의 일을 가지고 그들의 앞을 바삐 지나친다 . “기산은 작지만 매우 번화한 곳이군. 태수가 강직하고 군승이 유연하면 이런 결과가 오지.” “말씀 그대로 입니다. 4왕자는 강직하고 그의 태수는 유연하지요.” “난 농담삼아 한말인데 정말 그런가?” “...4왕자는 고집이 대단하면서 어린애 같은 곳이 있고 마고는 그의 말에 복종하면서도 왕자를 피해가며 일을 보완합니다.” “마고?” “기산성의 군승입니다. 잘은 모르지만 반괴인 것 같더군요. 실은 얼핏보아 저와 많이 비슷한 외모입니다.” “아하, 성문앞에서 만났던 사내인가!” 백라가 신기하다는 눈을 하며 자휼의 머리를 가리킨다. “실은 이 성안으로 건너오다가 자네와 정말 같은 머리색의 사내를 보지 않았나. 그 인상이 비슷해서 그런지 낯설지 않더군. 그래서 말을 주고 받으며 이리로 왔지. 북문에서 그를 장수라 부르기에 그런줄 알았는데 그가 군승인가?” “정말로 보셨군요. 어떠셨나요?” “뭐가?” “그러니까...저기, 반괴지 않습니까.” “아아...그러고보니 그것도 눈치챘는데.” “괜찮으셨습니까? “...이상하네. 별 느낌이 없었네.” 반괴에 대한 혈족의 반감은 극심한 일이 대부분이였기에 자휼은 백라의 태도에 조금은 놀랬다. 오랫동안 한족과 살아와 그 생활 방법에 익숙해진 자휼이 특이하게 반감이 적은 상태였다. 하지만 막상 자례만 하더라도 반괴에 대해서는 상당한 불쾌감을 표시하는 것이였다. “다행이라는 표정이군? 그와 친하나?” “...예.” “반괴랑 친하다니 세상 참...” “하지만 그는...!” “왜?” “물론 반괴지만...그래도 그래도 좋은 사람입니다.” “반괴는 그 정통성을 찾기 어려운 것일세. 좋고 나쁘고를 떠나 어딘가에 분명 소속되어 그 책임을 지고있지 않는 자에게 신용과 비밀을 나누기 힘들기 때문에 반괴를 멀리 하는 것이야.” “...그건 그렇습니다.” “저기 저 사람맞지?” 눈짓으로 뒤를 가리키는 백라의 모습에 자휼이 뒤를 돌아본다. 그곳에는 마고가 약간 부자연스런 모습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작은 15왕자의 궁에 선물이 도착했다. 태진은 못보던 난의 화분에 그 향을 맡고는 마음에 들었는지 시종을 시켜 묻는다. “누가 보낸거냐?” “파공께서 보내신겁니다.” “테천형님이?” 태진은 인상을 찌푸리고 생각에 잠긴다. 곧 손가락으로 그 화분을 가리키며 명령한다. “돌려보내거라.” “예?” “왔던 그대로 돌려보내라.” 그대로 등을 돌리니 자신의 부인 명씨가 그곳에 서서 자신을 바라본다. 태진은 이상하다는 듯 묻는다. “왜 여기에 있지?” “방안이 답답한 지라 잠시 나왔습니다.” “그래.” 그대로 옆을 돌아 지나치려는 태진의 옷자락을 그녀가 잡는다. “저기...” “왜 그러느냐?” “...아기를.” “뭐? 똑똑히 말해라. 안들린다.” “아기를 가졌습니다.” 태진은 그말에 자신의 부인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손을 내밀어 허리를 잡고 배를 가늠한다. 단단히 동여맨듯한 천이 느껴지나 이미 배는 꽤 불러있는 상태였다. 태진은 화를 내며 부인을 밀어내었다. “언제지? 왜 바로 말하지 않았느냐?!” “하지만 전하께서 임신을 원치 않으셔서...” “언제냐?!” “4개월 후 출산을 합니다.” “뭐?!” 믿기지 않는다는 듯 떨고 있는 부인을 노려보던 태진은 웃고만다. 손가락으로 수를 세어보곤 더욱 웃고 만다. “성혼한 그 달이군.” “예.” “하긴, 둘째달 이후로 동침하지 않았으니 배가 부른다 한들 알 리가 있는가.” “낳고 싶습니다.” “뭐?” “첫 아이니까 낳아 기르고 싶습니다.” “어째서 내가 지금까지 너와 동침하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모른단 말인가!” “하지만,하지만!” “치워라!” 화를 내지만 어쩔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다. 약을 사용해서 아이를 지울수 있는 기간이 정해져 있다는 것은 이미 화선부인이 임신했을때 의원에게 자신이 알아본후였다. 비록 상한 떡을 먹고 탈이난 화선을 보고 난리친 레이첸 때문에 그 약을 지어 올리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별수 없군. 낳아야한단 말인가.” “...” “아들이 아니라면 넌 그 자리에서 물러나야 할것이다.” 흠칫뒤로 물러나는 부인을 등지며 태진은 빠르게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버린다. 고민하기엔 늦었다. 이제 4개월후면 자신은 태수로 승격해서 성을 받아 나가야 하는 것이다. “낭성으로 가야한다!” 그래야 훗날 레이첸이 파낭으로 옮겨왔을때 힘을 기를수가 있다. 낭성은 얼마전 성을 내어놓은 계주성의 딸린 성이였다. 전혀 좋지 않는 외지고 작은 성이였다. 고작해야 온천이 있다는 정도일뿐 자신이 원하는 것은 아니였다. 하지만 바로 근처에 있는 파낭성은 그 성이 작지만 그 영지가 넒으면서 산에 가려 군사를 키울만 하다. 특히 계주성의 성주가 어리버리해 군사를 길러도 어느정도 숨길수 있다는 생각에 파낭에는 레이첸이 가고 낭성에는 자신이 간다는생각을 하고있었다. 계주성의 태수가 아들들을 잃었다는 소식에 기뻐한 것은 파낭과 계주성에 보낼만한 후계자들이 없어졌다는 것에 대한 안도였다. 하지만 그 멍청한 태수가 계주성까지 내놓을줄 누가 알았겠는가. 이대로라면 레이첸은 계주성으로 들어갈 공산이 컸다. 계주성은 작지만 황제의 명령이 발동하는 도성중 하나라 꼼짝없이 황제의 감시하에서 살아야 한다. 그렇다면 군사고 뭐고 얌전히 늙어 죽어야 한단 이야기였다. 현제 낭성에는 계주성 태수의 작은 동생이 부임하고 있다고 들었다. 아직 건장해 3개월 안으로 죽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다닥하고 손가락이 탁자에 튕기는 소리가 조용한 방을 울린다. 한참을 노래가락처럼 울리던 소리가 멈추자 태진은 단호하게 일어난다. 암살을 다시 한번 해야겠다. 147 생각했던 것보다 심하진 않았다. 끌어내어진 자들은 험악한 범죄자 같았고 살아남겠다고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욕을 해대는 통에 측은심이나 동정심 따위는 생기지 않았다. 그렇게 첫날의 10명이 죽어가고 벌써 일주일이 지나가고 있었다. 오늘도 변함없이 열명의 시체가 끌려나가자 자례는 책상위에 널려있는 가주들을 모아 정리하기 시작했다. 반면 차의원은 뚱한 표정으로 서류를 정리하는 자례를 바라보았다. 이 공자야말로 오래 병마에 찌들어 죽음에 대한 공포나 두려움이 극심할터인데 독약을 먹고 고통스러워 거품을 물고 죽는 자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저 검은 눈동자는 오싹하리라만큼 무심하다. 그들이 먹고 죽을 약을 만들고 마시고 죽는 모습을 수없이 바라본 자신마저도 그 마지막 순간에는 고개를 돌리거나 시선을 피하게 된다.그것은 두려움보다는 죽음이란 존재에 대한 의원으로써의 경외감과 살아있는 사람으로써의 동정이기도 했다. 하지만 옆에 앉아 있는, 20살에 죽음을 선고받은 젊은 관리의 눈에는 그런 경외감도, 동정도 보이지 않는다. 마치 독을 먹고 죽는 것이 당연한 것인 듯, 하나의 풍경을 보고 있는 것 마냥 아무런 생각없이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이다. “생각보다 공자는 참 무정해.” “그런 섭섭한 말씀을.” “하긴... 전쟁에 나가보았다고 했지? 그렇다면 그럴만 하지만...” 차의원이 말꼬리를 흐리며 책상을 정리하는 것을 도와준다. 가호적을 다시 창고로 옮기며 자례가 묻는다. “마음에 안드십니까?” “처음 인상하고 좀 달라 그러는 걸세.” “처음 인상이 어찌했습니까?” “그야, 축제 대낮에 봉변을 당하고 비틀거리며 들어오는데 누구라도 측은심이 안들면 그것이 인간이겠는가? 불쌍하고 가련했지.” “지금은 어떤데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요?” “...조금은 무섭네.” 전혀 예상외라는 듯 자례가 작게 웃으며 고개를 저으며 부정한다. “그럴리가요. 전 그렇지 않습니다. 작고 마른데다 좌천중의 말단 관리가 뭐가 두렵단 말씀이십니까?” “자신의 죽음 앞두고서 태연히 다른 이의 죽음을 지켜보는 사람이 정상이라 할수 있을까?” “...태연히라니요. 많이 떨려하고 있습니다.” “늙은이에게 그런 거짓말은 통하지 않아.” “...” 마지막 가주문서를 서랍장에 천천히 닫아 넣는다. 차의원이 팔짱을 끼고 자례의 등을 바라본다. “자네는 죽음이 두렵지 않는가.” “...예.” “어째서?” “너무 오래된 이야기라 어째서 두려워 해야하는지 잊어버렸습니다.” 갑자기 등을 돌린 아이가 낮게 웃는다. 흐느끼는 듯 느껴 차의원은 뒤로 한발 물러난다. “어차피 사람은 죽습니다. 빨리 죽고 더디게 죽는 것이 다를 뿐아닙니까.”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그것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닌게야.” “그럼 무엇입니까?” “...귀신이지.” 깔깔웃는 소리가 들린다. 밝은 웃음 소리라 그다지 무섭지는 않지만 분위기가 갑자기 변해 되려 무섭다. 활짝 웃는 자례는 차의원에게 다가와 가볍게 농담을 건다. “그말은 너무 하십니다. 제가 귀신이란 말씀이십니까?” “이 사람, 정말 사람 놀라게 하는군! 아무래도 좋으니 이제 죽어가는 사람을 볼때 그 무심한 표정 좀 어찌 하란 말이야!” “예. 내일부터는 울지요.” “그런거 말고!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것 말이다!” “그럼...고개라도 돌릴까요?” 차의원은 기가막히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름대로 진지하게 표정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자례는 본다.결국 웃고만다. 화를 내기에는 나쁜 자가 아니라는게 느껴져 지고 만것이다. 무심한 것이 아닐지 몰랐다. 어쩌면 이 아이는 죽는다는 것을 너무 일찍 받아들여 그것에 익숙해져 버린것일지도 모른다. 마치 어린아이가 생각없이 벌래의 다리를 하나씩 때어내면서도 그것에 대해 죄책감이 없듯 죽음에 대한 자신의 무감각함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게 분명했다. 스스로 벌래가 불쌍하다고 생각해야 벌래 죽이는 버릇이 고쳐지는 법이지. “자네 스스로가 불쌍하다고 여겨야 죽음에 대한 내 감정을 이해할수 있을걸세.” “...예?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 “됐어. 시간이 해결하겠지. 아참, 술이라도 먹으러...하하,병자에게 무슨 권유람.” “술이라면 즐겨 마시지만 아쉽게도 저는 좌천중 삼금인지라 (금주 금회 금족 술, 연회, 외출)마시지는 못하겠군요.” “그래?” “몰래 마시면 몰라도 말입니다.” 자례는 힐끔 막 문으로 사라지는 병사들을 확인하고는 차의원에게 싱긋 웃는다. 붉게 물들인 손으로 거문고를 튕기던 기녀는 고개를 들어 창가에 서 있는 손님을 바라본다. 등을 보이고 창밖의 도성을 감상하는 그가 자신의 거문고소리가 끊겨도 아무런 불평없이 가만히 그렇게 서있는다. 다른 생각을 하고 있나. 섭섭하지만 다시 거문고줄을 가다듬자 그가 낮게 말한다. “나갈까?” “예?” “날씨가 좋으니 강가에 나가 배라도 탈까했다.” 자홍은 기뻐 일어나 그에게 조금 다가가지만 곧 실망스런 표정을 짓는다. “소녀는 이곳에 팔려온것이라 밖으로 나가는 것은 힘듭니다.” “그럼 하루동안 널 사볼까?” 미소지으며 고개를 돌린 하류사는 자홍에게 손짓해 창가로 나오게 한다. 밝은 봄 햇살이 눈부시게 빛난다. 그 화려함에 눈을 감빡이며 부셔하던 자홍은 옆에 서있는 자신의 손님을 바라본다. 여전히 깍은듯한 얼굴, 부담스러울 정도의 고귀함이 봄 햇살이 환하게 부셔진다.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왜? 이렇게 날이 좋으니 밖에 나가보고 싶지 않은가?” “함께 있어서 즐겁다는 것을 공은 아실까요.” 자홍이 슬쩍 하류사에게 그 얼굴을 기댄다. 하류사는 그녀의 머리에 손을 올려 자신에게 끌어 당겨준다. “졸리면 자라.” “아이참.“ 붉게 상기된 얼굴로 자홍이 투닥거리자 하류사가 웃는다. 낮고 강한 웃음소리가 듣기가 좋다. “자홍은 몇 살이지?” “어머나, 기루의 여인의 나이를 물으시다니 진심이세요?” “왜?” “거짓말을 할것이 뻔하지 않습니까. 호호.” “그래도 몇 살이지?” “...22살입니다.” “그럼 곧 성혼해서 어머니가 될 나이군.” 그말에 자홍이 몸을 일으킨다. “글쎄요. 기루에 몸담았던 여인이 어머니가 될 수 있을지요?” “여인이라면 응당 어머니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어머니라는 존재는 몸의 흔적이 아닌 아이를 대하는 상냥함과 진실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몸이 아닌 마음으로 되기에 세상엔 양어머니와 입양하는 아이들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자홍은 좋은 어머니가 될꺼야.” 자홍이 고개를 숙여 감사의 뜻을 나타낸다. 하류사는 그 인사를 받는다. “자홍을 어머니로 두는 아이들을 보고 싶군.” “...저기.” “응?” 뭔가 말하고 싶은 듯 입을 꼼지락 거리지만 자홍은 그냥 웃고만다. “술 마시시지 않으시겠어요?” “차로 만족하지.” 어쩔수 없는 분이란 표정을하며 차를 따라 가져다준다. 잎가루가 가라앉길 기다리는 하류사에게 자홍이 소리없이 물어본다. 공의 아이들의 어머니가 되고싶습니다. “왜? 뭐라도 묻었나?” “아뇨. 저...” “응?” “좋아하는 분이 계시지요?” 그말에 하류사는 자홍을 가만히 바라본다. 그리고 피식 웃고는 고개를 돌린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절 만나고 싶어하시지만 만지고 싶어하시지는 않으니까요.” “...없어.” “정말로?” “존경하는 여인은 있지.” 자홍이 가웃한다. 보통 존경한다는 것은 어머니에게나 사용하는 것이 아닌가. 하류사는 차를 탁자에 올려놓고는 편하게 앉는다. “무척이나 현명한 여인이시지. 하지만 그 이상을 바랄수는 없는 여인이라네. 내가 자홍을 찾아오는 이유는 그녀에게서 받지 못할 것을 자홍이 가지고있기 때문이야.” “그게 무엇일까요?” “자홍은 날 필요로 하니까.” 화악하고 얼굴이 붉어진 자홍은 기둥뒤로 돌아가서 달아오른 열을 식힌다. 애써 침착한 얼굴로 말한다. “공자께서는 항상 그리 대범하신겁니까? 자홍은 기루의 꽃이니 공자가 아니더라도 찾아오는 님을 필요로 하는 것이랍니다.” “좋아하는 사내가 생긴다면 언제든지 내게 말하게.” “예?” “기루에서 나갈수 있도록 도와주지.” 기둥에서 나온 자홍은 이해할수 없다는 듯 하류사의 옷자락을 잡고 묻는다. “공자는...절 싫어하시는 건가요? 아님 좋아하시는 건가요?” “싫어하는 사람을 찾아 머무르는 사람은 없을것아닐까. 난 자홍을 좋아해. 내게 자홍같은 여동생이 있었다면 난 다른사람이 되어있겠지.” “여동생...이요?” “혈육이 있다는 것은 어떤의미일까?” 그 짙은 검은 눈매에 아찔하도록 날카로운 빛이 스치고 지나간다. 하지만 몹시 실망한 모습의 자홍은 아무런 말도 생각도 나지 않는다. 혈육이란 어떤의미로 다가오는가. 자신을 모시는 백라와 을노도, 상장군 마류와 마유도, 저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유견과 유번도, 자휼과 자례도 서로에겐 어떠한 의미로 다가오는 것일까. 적어도 나와같은 의미는 아니겠지. 정통성을 의심받고 있다. 아니 의심하고 있다. 내게 내가 모르는 혈육이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까지 날 괴롭혀 왔던 것은 매구이다. 그정도는 알수 있다. 나는 왕씨이면서도 제천장이기도 하니까. 만약 혈육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내 형인가. 그래서 이몸이 역리를 행하는 것을 막아볼셈이란 말인가. 감히 천년이 넘게 이어온 왕씨의 존망을 이젠 사라져간 이능의 미물이 결정한단말인가. “가당치 않은 고대의 미물같으니라구.” “예?” 그 단정한 잎에서 툭 나오는 불쾌함의 목소리에 자홍이 고개를 돌린다. 하지만 하류사는 싱긋 웃어줄 뿐이다. 148 역시 불편함을 못참고 안절부절하는 마고 때문에 그들은 성안으로 자리를 옮겼다. 마고는 백라에게 차를 따라주었다. “수해장군과 아시는 분이였군요. 그래서 저와 비슷한 사람을 아신다고...” “그러게 말입니다. 묘한 인연이군요.” “이분은 내가 큰 도움을 받은 분이야. 지금은 여행을 오고가시는 중이시라더군.” “백선생이라 불러주십쇼.” 백라가 냉큼 자신의 이름을 감춘다. 그 모습에 자휼은 마고가 아직 백라가 혈족이라는 것을 모른다는 걸 알아차린다. 자신도 따라서 장단을 맞추어준다. “난 어릴적엔 한족들과 살아왔다는 것은 전에 이야기해주었지? 그때 나에게 참 잘해주신분이지.” “수해도 참. 그냥 옆집에 살았던 사람인걸. 그보다 간만에 본 네가 이런 모습이라니 가슴이 철렁하구나.” “아저씨와는 너무 오래간만에 만나니 그럴만하시네요. 실은 제가...” 척척 손발맞는 자연스런 연극에 마고는 넘어가버린다. “그럼 수해장군을 찾아 도성에서부터 이곳으로 오신겁니까?” “아니오. 실은 누구를 찾으러 왔는데 놈이 이곳에 있다는 풍문을 듣고 이리로 달려온것입니다. 이제 곧 또 떠나가야지요.” “오래간만에 뵈었는데 머물러 주시지 않고요.” “아냐. 꼭 찾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이젠 떠나야겠네.” 사람을 찾아야 한다는 말은 자휼도써도 처음 듣는 일이라 조금 의아해한다. 백라의 표정을 보아하니 거짓말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또다른 귀족씨를 찾고 있는것일까. “누구를 찾으시는데요?” “개인적인 일이야. 어린아이는 몰라도 된다.” “그래도요. 혹시 애인이라도?” 자휼이 장난스럽게 백라에게 씨익 웃어보인다. 절대 그럴 리가 없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웃을수 있는 것인데 백라는 잠시 멈칫하더니 웃고만다. “아아, 너에겐 속일수가 없구나. 전쟁에서 헤어진 부인을 찾는 중이다.” “예?!” “전쟁에 가족을 읽으셨습니까? 안되셨군요.” 그 말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몰라 놀래야 하는 것인지 웃어야 하는 것인지 망설이는 자휼옆으로 마고가 안됬다는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그런식으로 헤어진 사람들은 부지기수. 어떤 식으로 찾을 생각이십니까?” “일단 마지막 머물렀던 장소는 알고 있으니 거기서부터 시작해야겠지요.” “...오래되신겁니까?” “응? 아아, 헤어진 것은 오래되었지만 근간에 그녀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들었답니다. 이거야 말로 천운이 아니겠습니까. 어서가서 다시 만나라는 하늘의 뜻이겠지요. 부부의 인연이란 하늘이 맺어준다고 하니 말입니다.” 진지하게 말하며 환하게 웃는 백라의 표정을 보아하니 이말도 진짜라 자휼은 더더욱 고민하기 시작한다. 정말인가? 하지만 백라에게서 가족이 있다는 이야기는 못들어 보았는데. 그 말과 웃음을 본 마고는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피식 웃어버린다. “죄송합니다. 꼭 찾으시길요.” “왜 웃으셨습니까?” “아닙니다. 단지 다른 생각을 해서...” “무슨 생각을?” “...실례되는 말씀입니다만. 여인이 홀로 낯선곳으로 떨어진다는 것은 그녀가 다시 돌아올수 없다는 말이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보통은 찾지도 않고요. 그런데 백선생의 표정이나 말에서 제가 생각했던 그런 일들이 깨어져 스스로 비웃던 것입니다.” “아아,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하지만 여인이 스스로를 지킬힘이 미약하기에 사내들이 여인을 지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혼인이란 한 사내가 자신의 힘으로 한 여인의 일생을 지키겠다는 서약입니다. 제 스스로 지키지 못해 약속한 여인을 힘들게 했다면 그것이 어디 여인의 잘못이겠습니까, 전쟁의 잘못이겠습니까?” “...” “자신의 여인조차 지키지 못한 못난이들이 그녀가 새 사내를 만나 새로운 약속을 행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어디 여인을 탓할 일입니까. 지켜주겠다 자신의 맹세를 믿고 인생을 넘겨준 한 여인조차 지키지 못한 못난 자신을 탓해야지요. 안 그런가 수해?” “아, 예. 아저씨.” 자휼은 쩔쩔 매며 대답한다. 아무말없이 듣고만 있던 마고가 날카롭게 묻는다. “그렇다면 그녀가 새 혼인을 맺어 살고 있다면 어찌 하실 생각입니까?” “사람이 기러기나 원앙에 미치지 못할이유는 없는 법. 선택은 그녀의 몫이지만 버림받았다한들 혼인의 약조를 깰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외기러기 신세가 되어야죠.” “...선택받지 못했다는 것은 그녀에게 더 이상 옛 사내가 필요없다는 것이 아닙니까.” “그럼 죽어 줄까요?” 부드럽게 올린 고개지만 날카로운 삼백안이 마고를 본다. 흠칫한 마고는 자신이 개인적인 문제에 너무나 많은 간섭을 한 것을 깨닫고 미안해 한다. 고개를 숙여 미안하다는 말로는 안될 무언가의 선을 넘어간 것 같아 창백해진 얼굴로 얼른 그 방을 나와버린다. 방안에서 수해가 부르는 소리가 들리지만 고개돌리지 않고 성벽으로 나가 북문에서 멀어진다. “정말이십니까? 정말 찾고 계신건가요?” “그래. 저쪽이 많이 놀란 모양인데 가서 안달래주나?” “모르겠어요. 실은 마고가 저렇게 사람을 몰아가는 질문을 한 것은 처음이라...저도 당황스럽군요. 그대로 두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요.” “자네는 어떤가?” 자휼이 백라를 바라본다. 무표정한 백라는 조용히 다시 묻는다. “약속하고도 지키지 못해 약속한 여인을 힘들게 했다면 누구를 탓하겠느냐? 여인인가? 원인인가? 자신인가?” “...백번을 물어보셔도 마찬가지아닙니까.” 우울한 표정의 백라에게 자휼은 차를 건낸다. “제 잘못입니다. 그것은 변하지 못합니다. 전쟁이 잘못이라고 할수 있는 것은 여인만이 그 못난 사내에게 해줄수 있는 최고의 위로겠지요.” “그렇지?” 갑자기 환하게 변한 백라가 벌떡 일어나 주먹을 쥐고 기합을 넣는다. “좋았어! 이번엔 틀리지 않겠지?! 이젠 찾기만 하면 된다! 출발이다. 잘있게 자휼.” “벌써요? 정말 가시는 겁니까?” “그래. 그녀가 기다릴테니까.” 쑥스럽게 웃는 백라는 나이보다 훨씬 젊어보여 자휼은 고개를 흔들고 만다. 맥라가 검은 말을 재촉하며 남쪽으로 달려가는 모습을 성벽위에서 지켜보던 자휼은 그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크게 웃는다. 그런것일까. 사내가 여인을 좋아한다는 것은 이렇게 다큰 어른을 어린아이보다 못난 놈으로 만드는가. 어깨가, 남은 한쪽 어깨가 아려온다. 손을 올려 어깨를 감싼다. 알수 없는 따뜻함이, 참을수 없는 뭉클함이 손을 타고 가슴을 울리고 전신을 떨게 한다. “....내 아이야.” 따뜻한 햇살이 가득한 성벽위에서 그렇게 그림처럼 서있는다. 언젠가, 언젠가 만날 수 있을것이다. 천애여비린. 하늘끝까지 떨어져 있다한들 항상 내 곁에 존재하는 것이다. 어느순간에도 어느곳이라도 항상 자신의 곁에. “왜 그러지?” “...아뇨.” 눈동자를 크게 뜨고 뭔가를 느끼려던 아이는 바로 고개를 흔든다. “잘못들었습니다. 술에 취했나 봅니다. 이제 그만돌아갈까요?” “아이쿠, 이거야 벌써 환청이 들리면 쓰겠는가? 심신을 단련해주는 보약이라도 지어줄까?” “하하하, 약은 이제 사양합니다.” “하지만 말이야, 어느정도는 비상약같은거 가지고 다니는 것이 당연한거 아닌가? 시장 잡배들도 박하쯤은 가지고 다닌다고.” “흠. 그러시다면 저에게도 하나 만들어 주시죠.” “그럴까. 역시 진통제가 좋으려나?” 자례는 손톱을 물며 생각에 잠긴다. 그 모습에 술에 취한 것 같지 않아 차의원은 몸을 바로한다. “극약하고 해약을 해주실수 있습니까?” “뭐? 왜?” 못들을 것을 들었다는 듯 주위를 경계하며 차의원이 낮게 묻는다. “그런건 어따쓰게?” “극약은 되도록이면 표시가 안나는 것으로. 해주실수 있으세요?” “싫어.” 역정을 낸 차의원은 술을 한잔 더 따른다. “그런거 있으면 좋지 않아. 내 차라리 진통제를 잔뜩 만들어 주면 주었지 그것은 안되네.” “함부로 사용하지는 않을것입니다. 정말이에요.” “약이라는 것은 있음으로 해서 살인이 나고 없음으로 해서 살아남는 것이라네. 그건 안돼.”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자례는 이제 그만 마시자는 눈치를 한다. 차의원은 집으로 가자 자례는 술병과 잔을 서랍에 넣고 꽉 닫고는 그대로 침대위에 누워버린다. 몰래 마시는 술은 맛도 모르고 취한다더니 그말이 맞다. 한시간정도 그렇게 불편하게 누워있다가 벌떡 일어나더니 책상에 가서 앉는다. “...마고, 마고라.” 낡은 종이들을 뒤적이며 마고라는 이름을 찾는다. 보고 있는 것은 동북쪽에 자리잡은 창사치들의 장부였다. 세금을 탈세하는 것을 막기 위해 달마다 업종을 달리하며 장부를 확인하는 작업을 하는 것을 우연히 본 자례는 곧 그것을 돕고 싶다고 말했다. 그것을 이용해 사람을 찾는 방법을 생각해낸것이다. 5왕자의 가신이라고 했다. 근간에 황제의 축일이 있었기 때문에 분명히 5왕자도 이 황성으로 들어왔을것이 뻔하다. 보통 먼거리에 있는 왕자들은 날짜를 정확히 맞추기 위해 미리 황성에 와서 축일까지 기다리다가 당일날 황성에 임성한다. 축일당일날 입성할수 있도록 머리를 쓰는 왕자들도 있다. 아니면 다음날 태연히 나타나는 왕자도 있다. 당일이나 다음날이라면 도성에 머물필요가 없지만 미리 온 경우라면 여관을 사용했어야 할것이다. 운이 좋다면 마고라는 이름이 장부에 기록되었을수도 있는 것이다. 사실 도성안의 여관은 수도 없이 많고 그들이 동북쪽의 여관이 아닌 다른쪽의 여관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더 컸지만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는 것은 싫었다. 무엇이라도 해야 안정이 된다는 느낌에 잘 지내고 있다고, 서신까지 받은 형의 흔적을 찾는 것이다. 실은 마고라는 인물이 5왕자의 가신이라는 것을 들었을때 이미 자휼이 기산성에 있다는 것과 서신을 받았을 때 자휼이 잘 지내고 있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다. 하지만 만나러 가지는 못한다. 아마도 아주 오랫동안. 황제의 관적에 올라있는 이상, 황제가 죽기 이전까지는 여행조차 수훨하지 못한것이다. 지금도 좌천이란 명목으로 황궁을 나와있는 상태이지만 실은 유배에 가까웠다. 당일날은 몰랐지만 다음날 소용에게 한번 들리려고 관청을 나서는데 모르는 병사들에게 제지를 당한것이다. 삼금(三禁)의 이유를 들어 외출을 못한다는 것이였다. 그제야 자례는 자신이 감시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몸을 사리게 되었다. 다행히 그들이 방안에까지 들어와 난동을 피우는 일은 전혀 없었다. 아마도 관청내에서는 마음대로 움직여도 상관이 없는 듯 해보였다. 하지만 열린 문틈으로 자유롭게 나다니는 사람들을 볼때마다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자제하기 힘들정도였다. 이렇게 가까운데 나가지 못하다니. 어느날인가 마당에서 손체조를 하고 있다가 마치 발정난 망아지처럼 이 문을 열고 뛰쳐 나가고 싶다는 충동을 못이겨 빠른 걸음으로 관청 정문까지 왔다가 그 앞을 지키고 있는 병사의 시선에 못이겨 다시 돌아서고 다시 오는 바보같은 짓을 하룻동안 내내 되풀이 한적이 있을 정도였다. 한권의 장부를 뒤져보았지만 이곳에는 마고란 이름은 없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기로 하고 자례는 옷을 벗고 머리를 푸른 다음 침상에 눕지만 잠이 올턱이 없다. 다시 일어나 불을 키고 한숨을 쉰다. “하아.” “너도 고민은 하나보구나?” “예?” 고개를 들어 방안을 살피나 아무도 없다. 하지만 들려오는 목소리는 분명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철없는 왕자의 목소리다. 잠시 고민하다가 신경질적으로 벗어놓은 옷을 가볍게 걸치고 외친다. “병사! 병사!” “야, 임마!” 불쑥 방안에 있는 작은 창문사이로 짜증나는 붉은 머리가 올라온다. 자례는 고개를 돌리고 못봤다는 듯 벽까지 손으로 치며 병사를 부른다. 쿵쿵거리는 소리에 대기, 감시중이던 병사들이 얼른 방안으로 들어온다. 그들이 오는 소리가 들리자 자례는 화분을 들고는 레이첸의 얼굴이 반쯤 보이는 창문을 향해 조준한다. 놀란 레이첸이 외친다. “너 지금 뭐하는 것...!” “으아악!” 태평한 얼굴에서 째지는 비명소리가 울린다. 그리고 정말로 화분을 던진다. 탕하고 사기 화분이 흙과 함께 부셔지는 소리가 들린다. 병사들이 뛰어 들어오자 자례는 호들갑스럽게 먼저 다가온 병사의 팔을 잡고 몸을 숨긴다. “저 창문아래에 도적이 있소!” “예?!” 파편이 튀기기 전 얼른 창문에서 떨어진 레이첸은 자례가 말하는 도적이란 소리에 입에 욕설을 담아 중얼거린다. 저놈 분명 날 보고 일부러 그런 것이 분명해. 울컥 화가나 고개를 들었다가 자신을 발견한 병사들에게 깔려 찍 소리도 못해보고 붙잡힌다. 레이첸이 꽁꽁묶이는 장면을 보며 자례는 하늘을 보고 엇흠하고 괜한 기침을 해보이는 것이다. 마음속 깊숙이 잠재된 자신의 감정을 감추려고 무척애를 쓰는 표정은 아마도 놀라 인상을 쓰는 것과 같을 것이다. 셈통이다. 결국은 몸을 뒤로 돌려 소리없이 웃고만다. 149 학고청의 피곤한 일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낯익은 사람을 본다. 아는척을 해야하는 건지 말아야 하는건지 고민하는 터에 그가 먼저 말을 건다. “자네는 우관의 동기였지?” “서공이시군요. 어인 일이십니까?” “요즘 통 우관을 못봐서. 무슨 일이 있나? 이쪽방이라고 들었는데 문이 잠겨있군?” “아아 모르신겁니까?” 익은 굉장히 피곤하다는 얼굴로 그를 지나쳐 자신의 방문을 연다. “들어오실겁니까?” “아니. 우관이 어떻게 되었는데?” “도둑 맞았습니다. 중요한 고서를 도둑맞았는데 그 일로 인해 좌천을 당했지요.” “좌천?” “뭐 임시 좌천이기는 합니다. 잠시만.” 방안으로 사라진 익은 잠시후에 잘 포장되어진 작은 책자를 하나 가지고 나온다. “우관이 저에게 맡기고 간 물건입니다. 전해드리라고 하더군요.” “이게 뭔데? 난 우관에게 필본을 부탁한적이 없는데?” “화선부인께서 부탁한 이야기책이라 했습니다. 직접 만나기 어려우니 서공을 만나게 되면 전해달라 하더군요. 그럼 이만.” “잠깐.” 레이첸은 익을 붙잡았다. 이해할수 없다는 듯 묻는다. “황성안에 도둑이 들었다고? 범인은 누구였나?” “그게 어째 저 같습니다만.” “뭐?” “죄송하지만 함구령이 내려 더 이상 말씀드릴수가 없습니다.” “좋아. 우관은 어디로 갔지?” “그걸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하지만 이런 임시 좌천의 장소는 보통 애초에 자신이 속해 있던 구역으로 가기 마련입니다.” “그래? 그런데 우관의 구역이 어디더라?” “...동북청사요.” “고맙군.” 책을 들고 빠른 걸음으로 성각헌을 나가는 레이첸을 보고 익은 잠시 생각에 잠긴다. 푸드득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올려 하늘을 보니 어디선가 제비가 날아온다. 그대로 제비를 보고 있자니 예전에 자례와 둘이 쓰던 방으로 가는 느낌이라 잠시 망설이다가 제비를 따라 성각헌을 돌기 시작한다. “그럴 리가 없소.” 밤하늘을 가르며 자례가 병사들을 헤치고 자례가 앞으로 나왔다. 레이첸이 으르렁 거리며 자신을 노려본다. 지지 않고 함께 노려본 자레는 피식 웃으며 등을 돌린다. “4왕자께서는 지금 황궁안에 계실것이 분명하오. 아니라면 왕자의 신분으로 도성 청사의 담을 넘어 창문을 엿보는 밤손님흉내를 내고 있는 이자가 4왕자라는 말이오? 나는 인정하지 못하오.” “너야말로 왜이러는 것이냐! 넌 내 얼굴을 알고 있잖아!” “분명 모습은 비슷해 보이나 난 4왕자께서 이런 곳에 이렇게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겠소.” 팔짱을 끼고 몸을 돌리는 자례의 모습은 진심이다. 레이첸은 이젠 정말로 화가 나기 시작했다. 관사를 부르러 갔던 병사가 뛰어와 자례에게 말한다. “관사님은 한시간 후 정도에 도착하신답니다.” “잠을 깨워드린 것 같아 죄송하군요. 저도 잠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오겠습니다.” 꽁꽁묶인 레이첸을 뒤로 하고 들어가려는데 뒤에서 레이첸의 악쓰는 소리가 들린다.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려고 하는데 등부터 강한 타격이 와서 그대로 앞으로 넘어진다. 바닥에 굴러 정신없는데 이 소동으로 나온 관청사람들이 떠들어대는 소리와 비명소리 발자국 소리에 머리가 딩딩거릴정도로 어지럽고 무겁다. “이거, 미안해서 어쩌나?” 자례가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병사들이 다가와 자례위로 쓰러진 레이첸을 일으켜세운다. 아직 어떤 일이 일어난건지 영문을 몰라하는 좌천중의 관리는 이리저리 두리번 거리다가 옷을 털어주는 사람들에게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짐작하고 인상을 쓰는 것이다. 레이첸은 자신을 일으키는 병사들에게 단호하게 말한다. “내 몸에서 손을 때어라.” “말도 안되는..!” “내 몸에서 손을 때어라!” 안그래도 거대한 몸에 부드러운 면이라고는 찾기 힘든 얼굴에 인상까지 쓰며 외치자 병사들은 하나 둘 물러난다. 레이첸은 그런 그들을 으르렁거리면서 노려보고는 조금 떨어져 어깨를 잡고 있는 자례에게 다가간다. 서너걸음 떨어진 곳까지 걸어온 레이첸은 자례를 노려본다. 두사람사이에 기묘한 분위기가 풍겨와 구경꾼들은 힐끔힐끔 그들을 바라본다. 한쪽은 관리이고 한쪽은 밤도둑인데, 한쪽은 작고 마른 약한 선비이고 한쪽은 우락부락한 산적인데, 지지 않고 팽팽하게 둘이서 눈으로 싸운다. 침묵을 깨고 먼저 말을 한 것은 레이첸이였다. “줄을 풀어라.” “...” “우관. 줄을 풀라고 명령했다.” “흥.” 어깨를 감싸고 있던 손을 풀고 실소한다. 천천히 걸어 레이첸을 우회한 자례는 레이첸의 팔목에 걸린 줄을 그 특유의 내리깐 눈동자로 비웃는다. “왜? 내가 왜 이 줄을 풀어야하지?” “우관, 장난이 지나치면 용서는 없다.” “헛소리.” 작지만 차분하고 딱 떨어지는 목소리다. 천천히 우회했던 걸음을 다시 걸어 정면으로 레이첸을 올려다본다. 레이첸은 정말로 화를 내고 있었다. 짗굿은 웃음을 지었던 표정이 딱딱히 굳어지고 그 갈색 눈동자가 냉냉하게 변한다. 몸전체에서 자신을 누르는 듯한 압력이 나온다. 흐음, 4왕자도 그냥 망나니는 아닌 것 같은데. 자례는 천천히 몸을 돌려 레이첸에게 등을 보인다. 노여워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는 맹수에게 등을 보이고 천천히 청사의 건물안으로 들어간다. 한걸음 한걸음 자례가 멀어질수록 레이첸이 엄청나게 분노하고 있다는 것이 생판 둘을 모르는 타인에게도 전해져 온다. “너! 이 줄 풀어!” “예? 그럴순 없소!”“네 이놈! 내가 진짜 4왕자라면 네놈은 서공을 우롱한 죄를 들어 네놈의 재산을 몰수하고 그 가솔을 노예로 만들어 북쪽의 탄광에서 밀죽을 먹으며 오늘 일을 죽을때까지 후회하게 만들어주겠다!” “무슨..!” 박력에 못이긴 병사하나가 그 줄을 풀자 이미 청사내로 사라진 자례의 뒤를 따라 성큼 레이첸이 뛰어들어간다. 너무 늦은 밤이라, 힘을 쓸만한 병사들은 모조리 집으로 돌아간 상태이고 남아있는 것은 야근을 위한 몇몇 병사들뿐이라는게 문제였다. 모두들 사라지는 레이첸을 억울한 눈으로 바라본다. 밖의 창문으로 자례의 방이 어느쪽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작은 공간을 미로처럼 나누어 놓은 청사를 빠르게 돌아 그가 사라진 쪽을 찾는다. 방밖으로 불빛이 새어나오자 벌컥 문을 열고 안을 노려본다. 차를 마시려고 했는지 주전자를 든 자례가 막 탁자에 다가가고 있었다. 열린 문으로 불청객을 바라보는 그 눈동자는 잊으려 해도 잊혀지지 않던 그, 취기속의 검은 눈동자다. 자신을 깔보는 듯한 저 검은 눈동자. “네 이놈!” 레이첸은 성큼 성큼 다가가 그 목을 잡아 끌어당겨 뺨을 날려버린다. 어째 뺨을 친것인데 복부를 구타하는 소리처럼 퍽소리가 나는 것은 어찌된 영문일까. 혹시 하고 때린 손을 보고 아차한다. 주먹을 쥐고 있는 것이다. 평소의 버릇이 그대로 나와버렸다. “어이, 괜찮냐? 괜찮아?” “...때린 사람이 한말치고는 참으로 뻔뻔스럽군.” 육관에게 맞았던 상처가 또 터져 주륵하고 피가 흐른다. 짜증이 밀려온다. 왜 하필 때린대를 또 때린단 말인가. 레이첸을 밀치고 고개를 들고 머리를 뒤로 넘긴다. 입가에서 주르륵 피가 흐르고 하얀 옷에 긴 검은머리가 산발이 되자 영락없이 야차의 모습이라 레이첸은 움찔한다. “어째서 이곳에 계신겁니까? 서공.” “역시 너 내가 왕자라는 것을 알고있었지! 왜 날 모른척한다고 이런 수모를 주는 것이냐!” “그럼 좌천당한 황제의 관리에게 이 한밤을 도와 4왕자가 찾아와 창가에 얼굴을 들이밀고 방안을 염탐하는 것을 저들에게 알려주란 말입니까?” “어차피 조용히 해결될 수도 있었지 않은가!” “애초에 도적으로 소리친 것은 서공 스스로 이곳을 빠져나가시라는 눈치 아닙니까. 어째서 그런 실력을 가지시면서 이런 말단 병사들에게 잡힌단 말입니까?” “네가 소리치지 않았으면 잡히지 않았다! 너야말로 어째서 항상 날 이렇게 몰아붙이는 것이냐!”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군요. 항상이라니요. 제가 서공을 미워하기라도 한단 말입니까?” “곡양에서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지 않은가! 처음 거리에서 만났을떄는 이런 놈이 아닌 것 같았는데?!” 그말에 자례가 눈을 치켜뜬다. “나는 서공과 황궁에서 처음만났소. 도무지 알수 없는 이야기를 하시고 있소. 하나 아는 것은 서공이 사사건건 날 방해한다는 것이오!” “헛소리마라! 처음만난 것은 작년 겨울, 황성의 번화가였다. 보름달이 뜬 밤이 아니였느냐! 두 번쨰 만난 것은 곡양에서였지. 넌 날 창고에 가두어 놓았다. 아니라고 발뺌할테냐?!” 손으로 긴 머리체를 휘어감아 앞으로 내민다. “그 붉은 꽃향기가 아직도 네 머리에서 풍기는데 어디서 거짓말을 할셈인가! 날 우습게 보지마라! 네놈이 황권의 보호를 받는다고 안심하나 황제가 과연 어디까지 살수 있을지 네놈이 모르는 것은 아닐터! ” “황권에 대한 모욕이요!” 레이첸의 손에 감긴 머리체를 잡아당겨 풀러버린 자례는 실소한다. “곡양의 이야기는 들었소. 하지만 곡양의 그는 경락공의 가신으로 있다고 들었소. 분명 나역시 비슷한 경험을 한적이 있지만 서공께서 경락공에게 선율이라는 분을 곡양에서 만났다며 소개시켜주었다고 소개시켜 주셨소. 분명 선율과 내가 아는 사이라는 또다른 우연은겹치지만 우린 명백히 곡양에서 만난적이 없소!” “그 곡양의 놈이 네놈이 아니더냐! 네놈이 곡양에서 창고에 가둔 것은 미친놈이 아니라 나다!” “그렇다면 서공께서는 경락공에게 이름모를 자를 불러 나라고 소개시키셨단 말이오?!” “...너구리 같은 놈!” 바득하고 이를 간 레이첸은 재빨리 머리를 굴린다. 지금 이놈은 내가 2왕자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인정하게 만들려는 것 같다. 그렇게 된다면 난 이놈에게 약점을 쥐이게 된다. 한족인지 정안족인지 확실치 않는데다가 2왕자와 교류가 있는 놈에게 이런 약점을 잡히게 된다면 뒷탈이 날것은 뻔한 이야기. “그렇다면 말은 무엇이냐?!” “말?” “내가 네놈에게 곡양에서 황성까지 타고온 말을 돌려주겠다 했을때 네놈의 반응은 무엇이였단 말이냐!” “그야, 곡양의 그 미친자가 내 친우의 말을 타고 올라갔기 때문이오. 서공과 미친자의 외모가 비슷하니 혹시나했던 것이오. 하지만 분명히 내가 그말을 본순간 내가 찾던 말이 아니라며 그대로 두라는 말을 했던 기억인데 말입니다. 아닌가요?” “...이 놈!” “즉, 곡양에서 만난 미친자가 당신이라면 당신은 서공이 아니오. 당신말대로 당신이 서공이라면 우린 황성에서 처음만난것이오.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당신은 경락공을 속인것이겠지.” 붉그락 변하다 못해 새하얗게 질린 레이첸은 그대로 자례를 때려죽일 기세였다.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린다. 성벽을 돌던 병사들을 불러모은 모양이다. 레이첸은 그소리를 듣고는 자례에게 다가와 그 어깨를 손으로 밀어 벽에 대고 누른다. 아프다는 듯 눈살을 지푸린 자례가 레이첸을 바라보며 말한다. “미안하지만 그쪽 어깨는 한번 빠진적이 있어 굉장히 불편하오만.” “그래? 이쪽은 아까 내가 밀친 쪽의 어깨가 아닌가. 정말 아프겠군.” 레이첸은 그 얼굴을 자례에게 가까이 댄다. 숨소리가 맞다을만큼 다가온 레이첸은 씨익 웃어보인다. “너 황성에 다시 들어오면 두고보자.” “그렇다면 서공이 분명하다는 말씀이시군. 여기까지 오신 이유는 뭐요?” “화선이 이야기책 고맙다고 하더라.” 어깨를 잡은 손아귀에 힘을 꽈악주며 화풀이를 한 레이첸은 서둘러 그 방을 빠져나간다. 그가 방을 나가버리자 그대로 주저앉은 자례는 어깨의 통증에도 불구하고 낼름 혀를 내밀어보이는 것이다. 150 잠시 뜸했던 사이에 서교궁의 작은 화단에 꽃이 피어있었다. 태진은 허리를 숙이고 그 꽃을 물끄러미 감상하는 것이다. 꽃을 보고 있을때는 잠시나마 모든 시름을 잊을수 있어서 좋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보낸후에야 레이첸은 쿵쿵거리며 모습을 드러낸다. “어제 어딜 나갔다 오신겁니까? 왔더니 안계시던데요.” “잠잤다.” “이런이런. 그래서 방안에 들어갔더니 형님은 안계시던걸요.” “잠잤다니까! 게다가 악몽이였어!” “예.예. 어련하시겠습니까.” 아마도 성을 나가 모르는 여인을 잡고 지냈던 것이겠지. 편안하게 생각하기로 했던 태진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데 무슨 일이냐?” “저 낭성으로 먼저 나가야겠습니다.” “갑자기 왜? 나 나두고는 불안해서 안된다 하던 놈이 왜 먼저 가냐?” “실은 형님보다 먼저 아버지가 되게 생겼습니다.” “...뭐?” 잠시 눈을 깜박이던 레이첸은 그말의 뜻을 알아채고 웃고만다. “얌전한 고양이 먼저 부뚜막에 올라간다더니만...” “그런식으로 말하지 마십쇼. 일단 제가 먼저 내려가서 기다릴테니 서신으로 계속 연락을 취하는 것으로 하지요.” “내 기억으로는 낭성엔 태수가 건재하잖아. 비어있지 않은데 어떻게 들어가려고?” “흠. 일단 강경책부터 써보고.” “힘들걸.” 레이첸은 피곤한지 근처의 돌석상에 기대 앉는다. “낭성에는 계주성 태수의 조카인가 동생인가가 태수로 있다면서. 계주성을 내놓은 태수는 어디로 가겠나? 어차피 근처의 친인척들에게 몸을 의탁할것이 뻔한데 내가 볼때는 파낭보다는야 낭성이 더 유력해 보이거든.” “어째서요?” “거야 파낭은 낭성보다는 크지만 노친네들이 쉴만한 곳은 아니지 않은가. 그에 반해 낭성은 온천이 있으니 몸을 담그며 널널하게 보내기 딱 알맞아. 나도 노후엔 그리 지냈으면 좋겠구만.” “결국 낭성에 계주성의 태수까지 옮겨올것이란 이야기군요. 하지만 그렇게 되지 못하게 만들어야지요.” “강경책은 때에 따라 사용해야한다.” “호오, 근간에 강하게 밀어붙인 여인에게 차이신 적이라도 있다는 말씀이군요.” “미쳤냐!” 하지만 말과는 달리 얼굴색이 변한 레이첸은 씩씩거린다. 복장터진다는 듯 가슴을 쾅쾅 두들기고는 한숨을 쉰다. “미치겠다.” “무슨 일이 있으신겁니까? 상담이라도 해드릴까요?” “됐어.” “그렇게 하지 마시고 좀 말씀해보시죠. 어느집 여인입니까? 혹시 궁녀는 아니겠죠? 설마 후궁은 더더욱 아니실테고.” “이놈, 내가 무슨 색마인줄 아냐!” “근간에 들어 그런 취미밖에 하지 않으셨지 않습니까. 사냥을 나가신적이 있습니까? 그렇다고 글을 읽지도 않으시면서.” “아, 정말 선비놈들은 다 똑같아!” 팔을 벌리고 짜증난 목소리로 외친 레이첸은 허리에 팔을 올린다. “난 체이첸형님을 존경한다. 알고 있지?” “그럼요. 알고 있지요.” “너 내가 곡양에 온 그 선비일로 거짓말을 한 것을 알고 있지?” “예? 아아...다른 사람이 들어온거요? 하지만 형님이 먼저 그가 진짜 영웅이라고 말했지 않습니까?” “내가 만약 체이첸 형님에게 거짓말을 했었다고 말하면 형님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을 하셨습니까?” “약점을 잡힌 것 같아 신경쓰여서 그런다.” “약점?” 태진은 이해할수 없다는 얼굴로 레이첸의 앞에 앉는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어차피 2왕자가 그에게 만족하고 있으니 별 상관은 없을것이 아닙니까? 그냥 내버려두십시오.” “하지만 막상 패의 임자가 눈앞에서 걸어다니는데 신경안쓰이게 생겼냐?” “...예?” 무슨 말이냐는 듯 정색을 한 태진의 얼굴에 이번엔 레이첸이 당황한다. “너 모르고 있었던 것이냐? 입관시험에 합격해 궁안에 들어왔지 않느냐?” “누가요! 그럴리가! 죽은 것이 아닙니까? 어찌된 영문입니까?!” 벌떡 일어난 태진의 표정이 너무도 정색이라 레이첸은 아무말도 하지 않고 이복동생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본다. 몹집도 튼튼하고 뿔도 각진 멋진 소였다. 검은 털이 옆에 선 말에 뒤지지 않게 윤이난다. 예사는 소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그 앞에 앉아 투박한 얼굴을 감상한다. “속도만 말과 비슷하다면야 전장에서 타고 다녀도 뭐라 할사람은 없겠지만 말이다.” “마류장군님.” “이제 그만 말을 고르지 그러느냐?” 화려한 한족복장을 깔끔하게 입은 마류가 마굿간안에 들어찬 명마를 가리킨다. “여기서 마음에 드는 말이 하나 둘은 있음직한데.” “아직은요. 아직은 이놈으로 만족합니다.” “소에 마각(馬角 말뿔)이라는 이름을 붙인 놈은 너뿐일거다.” “뭐, 아, 보아하니 이제 출발하는 것입니까?” “그래. 이정도에서 출발해야 적당한 시기에 양인성을 거쳐갈수 있으니까.” 옷을 털고 일어난 예사는 등을 돌린다.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아직 저에게 말씀하실수는 없는 것인가요? 양인성은 3왕자의 성이 아닙니까. 보아하니 왕씨의 밀명이신데...” “왕씨의 밀명이라면 혼자 간직하는 것임을 알터인데?” “...저에게 남은 것은 이제 형님들 뿐이아닙니까. 더 이상 잃고 싶지 않습니다.” “예사.” “뭐, 마류형님이 제 도움이 필요할정도로 허술한 사람이 아닌 것은 제가 더 잘 알고 있습니다만 할일없다보니 별생각이 다들어서 말입니다. 잔뜩 긴장하신 어깨를 보니 더욱 그러하고.” 장난기어린 말로 말한 예사는 마류와 마굿간을 나가 방안으로 들어간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예사는 그 투박하고 거친 모습과는 달리 너무도 부드러운 눈동자를 가진 사내라 정감이 간다. “뭘 걱정하고 있는건가?” “예?‘ “나에게 거짓말은 통하지 않아. 내 동생인 마유도 백라도 후소도 자네도 모두 내아래서 자라난 장수가 아닌가. 보아하니 뭔가 고민거리가 있는 듯 한데.” “지금 시점에 고민이 없는 장수가 어디있습니까.” “그런 고민말고. 걱정되서 고민하는 거. 백라와 관계된건가? 아니면 마유놈이 뭐라고 했는가? 아니면 후소가 또 장난이라도 걸었나?” “...아뇨.” “그럼 뭘까. 소를 보고 청승떠는 것을 보니 옛일을 떠올리는 것이 분명한데 나에게 오기전에 분명 장촌곡으로 나갔었지? 그러고보니 그곳에 백라가 보조를 해주러 갔다고...” “에이, 형님도 그만하시오.” 덩치큰 장수의 애교있는 밀침에 늙은 장수는 벌렁 넘어져 버린다. 호들갑스럽게 다시 일으켜주는 예사의 이마에 일침을 가한 마류는 한숨을 쉰다. “너무 가까웠어.” “예?” “차라리 다들 멀리 떨어진 인연을 잡았어야 했던거야. 이리꼬이고 저리꼬여서...결국은 모두 불행해진거라 생각하고 있다네.” “...인연이란...하늘에서 내리는 것이니까요.” “...그래도 시도는 해봤어야 했네. 내 잘못이 크지.” “천명을 거스를 생각이신겁니까? 하하하!” “자네들을 전부 따로 널렸다면 적어도 서로 미워하는 일은 없었을거다.” “우린 서로 미워하지 않습니다.” “그래?” “그냥...아쉬워하는 것 뿐이에요.” 내가 좀더 강했다면 내게 주어진 인연을 지킬수 있었을 것이라고. 그렇게 아쉬워 하는 것입니다. “아이고, 이런. 내일 떠나야 하는데 이런 칙칙한 이야긴 그만두자구요. 일찍 자야지요. 마류님도 어서 주무십시오.” “세가는 참 고왔는데...무슨 영문인지 너같은 산적놈에게 마음이 끌려서는...” “하하하, 산적만의 매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까. 세가가 그런 것은 딱부러졌지요.” “그래. 자네는 운좋은 사내야. 그러니 앞으로도 잘 해보게.” “...예.” 별이 총총하게 어두운 밤을 밝히는데도 둘은 그렇게 방안에 앉아 조용히 예전 좋은 시절의 생각을 떨치지 못하는 것이다. 돌아온 화분에 태천은 피식 웃고 만다. 포장안을 보니 이제는 시들한 난꽃이 추하다. 아마도 황궁안에 도착했을 땐 활짝 피어있었을 것이다. 봄꽃을 좋아하는 놈이 이것을 되돌려 보낸 것을 보면 이미 단단히 틀어진 셈이다. 하긴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화분을 버려라.” 공손히 화분을 내가는 시종이 사라지자 태천은 창을 열고 황궁쪽을 바라본다. 3왕자와 4왕자는 동갑이였다. 달을 앞두고 태어난 태천이 3왕자의 자리를 차지했지만 그의 어머니가 한족이라는 이유로 배분과는 상관없이 태자의 자리에서 물러나야했다. “흐음. 이제 곧 경마축제인가...” 검은 머리에 갈색 눈을 가진 얼핏보기엔 친형제간이 태진과 비슷한 외모였다. 마치 2왕자인 체이첸과 4왕자인 레이첸이 굉장히 닮은 외모인 듯 3왕자 태천과 14왕자 태진역시 그러했다. 선비형의 체이첸과 장수형의 체이첸과는 달리 둘은 성격마져 매우 비슷했다. 나이가 좀더 있는 태천쪽이 태진보다 자존심이 강하다는 정도외에는 두 형제는 매우 닮아 있었다. 태천이 가지고 있는 양인성은 황제가 경마축제를 여는 기주성의 모성이였다. 때문에 황제는 일년에 한번씩은 항상 태천의 양인성에 들려 축제기간동안 머물곤했다. 양인성은 규모가 크고 부유한 영지를 가지고 있는 터라 황제을 모시는 축제정도는 별 무리가 없었다. 어느날 태천은 가신들에게 축제의 이득을 물어본적이 있었다. 사람들은 황제에게 잘보일 기회라고 말하며 비위를 맞추는 것이 상책이라고 했지만 대태천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밤에 황제를 따라 양인성으로 건너온 자신의 친동생에게 그말을 물어 대답을 들었을 때 태천은 웃었다. -지긋지긋한 늙은이, 매년 형님을 감시하러 이곳으로 오는 것을 알면서 내게 묻는거요?“ 태진의 말이 맞았다. 결국 황자의 자리에서 비켜갔다고는 하나 높은 배분인지라 2왕자가 태자가 아닌 4왕자가 태자가 될경우, 아니 2왕자가 태자가 될경우라고 한들 자신이 가만히 있지 않을것이라는 건 확실한 것이였다. 그래서 일부러 황성에서 축제를 열지 않고 자신이 있는 양인성으로 옮겨와 축제를 하는 것이다. 확실히 그 방법은 효과가 있어 태천은 섣불리 군사를 만든다거나 사람을 모은다는 것을 내색할수도 실제로 행할수도 없었다. 자신이 거느리고 있는 가신들은 유능하기는 하나 품고 있는 야망을 이루어주기엔 너무도 겁쟁이들이였다. 적어도 아직 새파랗게 어린 주라는 천재를 만나기 전까지 가슴에 품은 것을 내비칠수 없었다. -귀공의 가슴안에 있는 새를 놓아 드릴려고하오. 미친놈 취급을 하는 어른들틈에 낀 그 어린 천재는 손가락으로 그들을 가리키며 웃었다. 안일함이란 유혹에 빠져 우리에서 나오지 못하고 제사에 오르는 돼지들이라고. 신중한 태천은 그런 말을 함부로 내뱉는 주를 신용하지 않았으나 얼마후 황제가 축제를 위해 양인성으로 오자 그는 웃으며 말했다. -매년 전하를 감시하러 오느라 늙은이가 힘꽤나 들겠군요. 태천은 그제야 주를 신용했다. 애초부더 함께 일을 도모해보려던 태진은 형인 자신이 한족 혼혈이기 때문에 태자가 되기는 힘들다는 이유를 들어 자신의 권유를 뿌리치고 있던차에 태진에 비할만한 천재가 손안으로 들어온것이다. 훗날 그가 이미 망해버린 진나라의 황실의 후예로 사마씨라는 것을 알았을때는 적지 않게 당황했지만 주에게는 그런 위압감은 없어 자연스럽게 주종관계가 성립되었다. 자신의 가신으로 들어온지 일년 남짓, 하늘을 보고 있던 주는 때가 오는 것 같으니 슬슬 황궁으로 들어가봐야겠다는 뜬금없는 소리를 하며 아버지인 대홍로의 힘을 빌려 간랑으로써 황궁으로 들어가버렸다. 황제의 관적에 들어간다는 말에 적히 마음쓰고 있는 자신에게 주는 웃어보였다. 어차피 자신은 당신의 가신이니 그런 것에 신경쓰려거든 자신을 아는척하지 말아달라고. -무엇 때문에 황궁으로 들어가는것이냐? -때가 되었습니다. -때? -주인께서는 기다리시면 됩니다. 제가 알아서 할테니. -하지만 네가 황제의 관적에 들어가는 것은 마땅치 않다. -우리에겐 사람이 부족하지 않습니까. 있는 것은 곧 제사상에 올라갈만한 돼지들뿐인데 슬슬 어디가서 호랑이라도 잡아두어야 훗날 써먹지요. -황궁에서 사냥이라도 해볼생각인가? -난들 안됩니까? 2왕자는 수시로 하는 인간사냥을 말입니다. 홀홀단신으로 황궁에 들어간 이후 소식이 끊겨있다가 몇일 전에야 근신중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양인성으로 불러 그동안의 일을 물을까 하고 아버지인 대홍로에게 그말을 건냈지만 주는 아직 오지 않았다. “때가 되었다라...” 피식 웃는 웃음이 너무나 태진과 닮아버린다. 한동안 황궁쪽을 바라본던 태천은 창문을 닫고 부인의 처소로 걸음을 옮긴다. 151 손가락을 차분하게 꼽으며 이리저리 생각에 잠기던 자례는 손바닥을 주먹으로 탁치며 웃는다. “좋고.” “뭐가? 사람 죽는데 그런 표정하지 말랬지 않나?” “아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인 자례는 엄숙한 표정을 지어보이지만 그래도 입가는 미소짓고 있어 보는 사람을 오싹하게 만든다. 열구의 시체가 떠나자 차의원은 자례에게 다가간다. “무슨 일이길래 그 와중에 웃었는가?” “아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일이 지루해...그게 아니라 잠시 딴생각을 해서.” “사람 죽는 꼴도 이젠 시원찮아 다른 생각이라도 했단 말인가?” “그렇게 말씀하지 마시고...어느정도는 노력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스스로 불쌍하다 생각해야 죽음이 무서워질걸. 아무튼 무슨 생각을 했기에 이리 기분이 좋은가?” 그말에 자례는 머쓱하게 웃는다. “기분이 좋다니요. 그냥...” “굉장히 좋아보이네.” “그럴리가요. 단순히 점을 친 것 뿐인데요.” “점?” “지루하기...가 아니라 단순히 아는 사람의 운세를 봐본 것 뿐입니다. 좋게 나와서 웃었던 것이 그렇게 되었군요.” “누군데?” 솔낏한 얼굴로 차의원이 자례에게 달라붙는다. 이 노인은 어찌보면 참 장난기 어린 구석이 있다. “누군데? 혹시 정인인가?” “아니라니까요.” “그럼 누구를 점치나? 역술을 안다는 것은 몰랐는데. 한번 말해보게. 누구야? 혹시 기루에서 눈맞은 여인이라도 있는 것 아냐? 성혼날짜라도 본건가?” “아니라니까요!” 씩씩거리며 떨어진 자례는 빠른 걸음으로 자신의 방으로 걸어간다. 차의원이 그 뒤를 따라가며 중얼거린다. “아니면 아니지 그렇게 화를 낼 필요는 없지 않나.” “...제 형입니다.” “뭐? 자네에게 형이 있었나?” “예. 친형이 한분 계세요.” “어디에 있는데? 자넨 양자로 들어왔다고 했으니 형과는 떨어져 있겠군?” “예. 정말...오랫동안 떨어져 있군요.” “한번 가서 보면 될 것을 뭘 점을 치고 실실거리나? 좌천중이라 가지 못하면 서신이라도 보내면 되는 것 아닌가?” “...예.” 말하는 모습이 쓸쓸해보여 혹시 말실수한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된다. 분위기를 바꿀겸 차의원은 자신의 것을 한번 봐달라고 조른다. “저 이런 것 잘 못해요. 그냥 약간만 아는 정도에요.” “그래도 해봐. 궁금하잖아.” “틀리다고 뭐라하시면 안됩니다.” 차의원이 생일을 말하자 손가락을 꼽아보던 자례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해본다. 그리고 또 다시 해보고는 곁눈질로 차의원을 흘끔 보고 웃음으로 넘겨버린다. “역시 이런 것 못한다니까요.” “왜? 뭐가 나왔는데 그러는거야?” “아니에요.” “어어, 어서 말하지 못해? 본인 앞에서 하고 말해주지 않는 것은 무슨 심뽀냐?” 차의원의 독촉에 못이긴 자례가 어깨를 으쓱한다. “여행을 떠날 것 같은데요.” “여행?” “아주 긴 여행. 출가불귀(出家不歸)라고 나오는데...” 차의원의 눈치를 보고 슬슬 뒤로 물러나는 자례의 옷자락을 꽉 잡은 차의원은 크게 웃는다. “역시 공자는 점쟁이는 아닌가봐! 아니, 이런 시기에 내가 없어지면 어쩌라고 그런 점괘를 뽑았는가? 하하하!” “그래서 말하고 싶지 않았어요. 잘못된 것 같아서.” “공자것은 어떤가?” “예?” “중이 제머리 못깍는다는 말은 있지만 이런 단순한 것이라면 공자스스로도 할수 있지 않은가?” “그건 안되요.” 자례가 미소지으며 부정한다. “어째서?” “전 제 생일을 모른답니다.” “뭐?” “그게...형이 알려주지 않아서...특별히 생일을 챙기고 싶은 마음도 없고... 나이는 알고 있으니 불편함도 없어서...그냥.” “하긴 근간 전쟁이 번번해서 생일을 정확히 기억하는 자들은 드물지. 내가 미안한 것을 물었나?” “아닙니다. 별생각 없으니까요.” “하지만 형이 알려주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왜 알려주지 않은건지.” “글쎄요.” 어설픈 부정에 또한번 실수했다고 느낀다. 아마도 이 아이의 형이 알려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 아이가 알고 싶지 않아해서 말하지 않았을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 안가 죽는다고 했지. 그러면 지금 생일을 알고 점을 쳐보았자 나오는 것은 한가지 일것이다. “참. 얼굴은 괜찮은가?” “예. 보다시피 모습은 흉하지만 아프진 않아요.” “안아프기는. 많이 쓰릴텐데. 그런데 고약한 도둑이네. 사람 얼굴을 이렇게 치고 도망가다니 말이야.” “살려줘서 고마울 뿐인걸요.” 진심인 듯 아닌 듯 풋하고 웃는 자례가 이해 안간다는 듯 갸웃한다. 방안까지 가서 언제나 그렇듯 차의원이 다려주는 약을 마시는데 옆방에서 관사가 들어와 조용히 말한다. “손님이 와 계시네.” “예? 하지만 전...” “옆방에 모셔두었으니 조용히 만나게. 비밀로 해주지.” 뜬금없는 손님에 조용히 관사의 방으로 들어가자 생각하지도 못했던 인물이 반긴다. “소용부인!” “어머나 도련님 오래간만이에요! 꺄악! 얼굴은 왜 그모양이래요!” “하하, 일이 좀 있어서.” 오래간만에 본 소용은 역시 커서 뒤로 한발 물러나게 된다.부산스럽게 자례의 상처를 걱정하던 소용은 부끄럽게 도시락을 내민다. “맛은 없지만 싸왔어요.” “이러실 필요는 없는데... 옥에 있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낭군께서 공이 좌천되어 내려와있다는 말을 들었을때 얼마나 놀랬는지... 혹시 옥속에서 찬바람에 떨지는 않을까, 밥은 제대로 먹고 있는지, 이 소용은 걱정이 되어 몇일밤을 지세웠답니다.” 정말로 퀭한 소용은 눈은 보기 무서울 정도다. “앞으로 자주오지는 못하겟지만 그래도 소식은 관사님께 물어 들을테니 열심히 하세요.” “죄송합니다. 걱정을 끼쳐드려서.” “집안에 있는 저야 별 다를것이 없지만 낭군께서는 많이 걱정하시더군요.” “마기장군님께서...” “낭군님은 도련님이 아직 어리다며 다독거려주길 바라셨거든요. 혹시 소용이 도와드릴일은 없나요?” 순간 자례의 머릿속에는 익의 주사위 놀이기구가 떠올랐지만 고개를 저어 부정한다. “아닙니다. 없습니다.” “그럼 소용은 이만 가봐야해요. 실은 여기까지 오는데도 병사들이 뭐라 하지 않겠어요. 나원.” 투덜투덜 거리는 소용은 자례를 꼬옥 한번 안아보고는 손을 흔들며 먼저 방은 나간다. 이제 장가를 고를 나이가 된 자례지만 소용에게는 아직 아기로 보이는 듯했다. 소용이 나가자 들어온 관사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옆방으로 가 차의원과 좀더 이야기를 나눈다. 차의원이 집으로 돌아가자 여전히 마고라는 이름을 찾아보기 위해 장부를 뒤적뒤적거리다가 하품을 하고 잠잘 준비를 한다. 목뒤로 손을 넣어 풀어헤친 머리를 정리하고 옷을 벗고 누웠다가 아프다는 얼굴로 벌떡 일어난다. 허리춤에서 단검을 꺼내 베게속에 집어넣고는 툭툭친다. “이야, 오늘은 운이 좋은걸.” “그러게 말입니다. 정말 운이 좋은데요.” 너무커서 들고 올수 없는 곰을 두 마리의 말허리에 매어 땅에 질질 끌고 들어온다. 마고가 한숨을 내쉬며 웃는다. “아까 놈이 수해에게 달려들었을 때는 정말 아찔했습니다.” “나도 죽는 줄 알았지. 하지만 내 명줄은 생각보다 긴것같군.” “막 겨울잠을 깬 놈이라 날렵할텐데... 아무튼 운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말이야.” “예.” “아니다.” 말을 끊어버린 자휼은 괜한 딴짓을 한다. 무엇인가 할말이 있는데 참고 있다는 표정에 마고가 지고 만다. “괜찮아요. 뭘 말하시려구요?” “그렇다면 말하는데, 전에 백선생님에게 왜 그런 질문을 한거지? 아저씨가 무척이나 난처해 하시던데.” “아아...그건 정말 죄송했습니다.” “너 답지 않았다. 그런식으로 사람을 몰아가는 질문은...” “...나도 모르게.” 마고는 저 멀리 보이는 기산성을 내려다보고는 숨을 들이킨다. “수해.” “왜?” “가끔은 너무 답답해서 이곳을 뛰쳐 나가고 싶어요.”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에 자휼은 고개를 들어 마고를 바라본다. 쓰린 표정을 지은체 언덕 아래로 보이는 기산성을 바라본다. 원래부터 감정표현이 거의 없던 터라 그 쓴 표정이 가슴에 닿는다. “넌 이곳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였나?” “...난 저기 바람이 부는 쪽으로 여행을 가고 싶어요.” 마고가 손을 들어 바람이 부는 방향을 가리키며 웃는다. “언젠가는 모든 것을 버리고 저곳으로 달려갈수 있을까요?” “...그쪽으로 달려가보았자 네가 찾던 것이 있으라는 보장은 없지 않나. 게다가 넌...” 친첸을 모셔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였나. “백산(친첸의 말)과 황주(마고의 말)를 풀어 기르는 것을 보셨지요.” “그래.” “그래도 이놈들은 도망가지 않아요.” “...” “저도 이놈들처럼 왕자에게 길들여져 버린걸까요. 저 멀리 전하는 우리가 사냥을 나가는 것을 보고 있었을 겁니다. 그래도 잡지 않아요. 그건 내가 반드시 그의 곁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지요.” “도망가고 싶은거냐?” “모르겠어요.” 멍하니 성안을 보는 마고는 고개를 흔든다. “그것조차 너무 오래되어서 내가 왜 왕자를 떠나고 싶어했었는지 잊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왕자가 함께 있었지?” “그것도 잊었어요. 너무 오래되었어요.” “...” “수해.” “그래.” “당신은 그에게 길들여 들지 말아요.” 자휼은 대답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바람이 크게 불어 나무를 치고 가는 소리로 마기가 중얼거린다. 들리지 않는 낮은 절규가 눈앞에서 깨어지고 만다. 바람이 잠잠해지자 흩어져 버린 다갈색의 머리카락이 처량하다. 자휼은 손을 내밀어 또하나의 아이의 등을 쓰다듬는다. “돌아가자.” “...예.” 말을 재촉해 성안으로 들어간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친첸의 부름에 마고는 표정없이 자휼을 곁을 떠난다. “길들여졌다라...” 이해할수 없는 이야기, 공감할수 없는 감정.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런 이야기를 할때마다 짓는 마고의 표정이 내 아이와 겹치는 것. 그 쓴듯, 단듯한 표정과 눈안의 감정이 어쩌면 그렇게 똑같을까. 저 멀리 어딘가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느끼는 서글픔이 너무나 같아 가슴이 아린다. “사냥은 즐거웠나?” “예.” “...무슨 일이 있었지?” “아니오.” “그런데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지?” “아무런 표정을 짓고 있지 않을텐데요.” 정말로 아무런 표정이 없는 마고는 친첸을 마주본다. 하지만 친첸은 입가를 올리며 웃고 만다. “그만 해라. 표정을 짓지 않는다고 한들 내가 널 모를 리가 없지 않나. 사냥가서 무슨 일이 있었던거냐?” “아무일도.” “말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좋다.” 등을 돌린 친첸은 마고가 타온 차를 마시며 웃는다. 무심하게 그 옆에 앉아 널린 종이 정리한다. 열린 창문을 통해 들어온 바람이 흩어진 머리를 또다시 날린다. 바람이 크게 불어 나무를 치고 가는 소리로 마기가 중얼거린다. 들리지 않는 낮은 절규가 눈앞에서 깨어지고 만다. 바람이 잠잠해지자 흩어져 버린 다갈색의 머리카락이 처량하다. 수해가 자신의 앞에서 걱정스러운 듯 바라본다. 가슴속에서 터져나오는 쓰디 쓴 말을 삼키지 못하고 내뱉고 만다. 길들여 지는 것은 너무나 고통스러워요. 하지만 바람소리에 아무것도 못들은 것 같은 자휼은 자신의 어깨를 감싸고 성안으로 들어가자 한다. 한발 한발 내딪는 말의 목을 쥐어 잡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 아찔해 한다. 봄은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계절이다. 152 부관이 달려오기 전에 몸으로 느끼는 전쟁의 위압감 덕에 벌떡 일어난다. 최전 진영에서 울리는 북소리가 가느다랗게 밤공기를 타고 울려온다. 침대위를 구르듯 내려와 옷을 벗고 갑옷을 걸친다. 때에 맞춰 부관도 막사로 들어와 갑옷을 입는 것을 도와준다. “무슨 일이지?” “기습입니다.” “오걸매가? 이 밤에? 기습을?” 믿지 못하겠다는 눈을 하지만 초를 다투는 것이 전장이라 일단 갑옷을 입고 막사를 뛰어나온다. 이미 최천방의 진영은 불을 밝히고 있었다. “적이 진영안으로 들어왔나?” “그런 것 같습니다. 자세한 것은 아직 모릅니다. 4진영으로 보낸 자들이 돌아오지 않아서...!” “오걸매놈이 완전히 돌았나 보군. 이젠 기습도 하고 말이야.” 쌍검을 허리에 찬 을노는 검은 말을 타고 병사들을 모은다. 몸이 빠른 장수들이 갑옷을 챙겨 입고 병사들로 대열을 만들어 을노의 곁으로 모인다. “일단 선인께서는 여기에 계시오! 4진영으로는 우리가 가보겠소!” “아니, 4진영은 그대로 두시오. ” “그럼 최전방은 포기하신단 말입니까? 4진영을 포기하면 3진영으로는 오걸매를 상대론 얼마 못가 우리쪽에서 뒤로 물러나야 합니다.” “난 오걸매가 기습을 한다는 것을 믿지 않소.” 을노는 피식 웃고는 불화살이 날리기 시작한 저 먼 4진영을 바라본다. “일단 감흥장군께서만 4진영으로 들어가 병사들을 진정시키시오. 어차피 들어온 것은 몇 명 안되는 병사들일거요. 색출해서 목을 매달면 4진영을 포기할일은 전혀 없소.” “그렇다면 남은 진영은?‘ “1진영은 물자를 지키고 2,3진영은 그대로 대기하시오. 자리를 비우면 안되오. 그리고 몸이 빠른 병사 몇몇과 활을 잘쏘는 부관과 히비장군을 데리고 잠시 내가 진영을 비우겠소.” “어디로 가시려구요?” 부관이 을노의 말에 재빠르게 화살을 챙기며 묻는다. 을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생각에 잠긴다. “이곳에서 도성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 어디지?” 히우루는 들어서자마자 우루루 도망가듯 나가는 환관들과 궁녀들을 보고 어떤 사태인지 직감했다. 문을 열기 전에 한숨을 쉰다. 자신도 이럴때는 들어가기 싫은 것은 마찬가지인 것이다. 잠시 헛기침을 하고 대전을 들어간다. “무슨 일이십니까?” 하지만 예상했던것과는 달리 아무것도 날아오지 않는다. 고개를 슬쩍 들어 단상위를 보니 비단서신을 읽고 있는 아골타가 보인다. 최근 무슨 일인지 일찍 일어난다 했더니 자신보다 먼저 대전에 와서 새로온 서신을 읽고 있었던 모양이였다. 화가 난 표정은 아니였다. 별일 아닌 표정. 뚱한 평소의 표정이 그대로 나온체 흥미 있게 서신을 읽은 아골타는 그것을 돌돌말아 자신의 옆에 있는 돌탁상위에 내려놓는다. “근간에 백지 서신이 왔던 적이 있었다.” “예?” “네가 그것을 빼버린 것이다. 그렇지?” 재빠르게 머리를 굴린 히우루는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수긍한다. “전에 분명 그런 서신이 왔으나 잘못온줄 알고 빼어버린적이 있습니다.” “그건 호북에서 오걸매가 보낸거다.” “예?” “놈, 내가 붙여준 부관을 전부 잃은 모양이다. 서신이 안온다 했더니만 그랬었군.” “뭐라 적혀 있습니까? 오걸매는 글을 모르지 않습니까.” “이건 놈이 보낸 것이 아니다. 호북성주가 보낸 상소야.” “예?” 또다시 놀라는 히우루에게 아골타는 피식 웃어보인다. “이쪽에서 답장이 없자 궁했던 모양이지. 호북을 털었다는 군.” “오걸매가 호북성을 공격했답니까?!” “하하하, 놈다운 발상아닌가!” “하지만 자국의 성을 공격한다는 것은 황제에 대한 반란입니다!” “그런 시시콜콜한 것을 따질때냐? 놈이 어째서 그랬는지 알고있는데다 사실 원인은 네놈이 아니냐. 아무튼 데려간 관리들은 돌려주어야 할 것 같으니 새로 관리 몇 명만 뽑아라. 이번엔 좀 오래살수 있는 튼튼한 놈으로.” “...알겠습니다.” “아, 중요한 인물을 빼지말고 그냥 그럭저럭한 놈으로 뽑아라. 그리고 사절로 이쪽에선 레이첸을 보내겠다.” “넷째 조카를 보내시겠다고요? 왜 하필?” 오걸매는 당연하다는 듯 히우루를 본다. “그럼 누굴보내냐? 호북까지 먼 길을 뛰어갈 무식한 놈으로는 레이첸밖에 더 있으냐? 글쟁이가 좋다고 매일 앉아 허벅지에 물오른 체이첸놈을 보내겠느냐, 아니면 자기 성을 가지고 있는 태천이나 친첸을 보낼수는 없는 것 아니냐.” “다른 장군들도 많이 있는데 어째서 그런 위험한 곳에 조카를 보내시려고 합니까.” “서신을 받을 놈은 내 이복동생이다. 황제의 아우란 말이다. 게다가 광인(狂人)이다. 그런놈이 내것이라고 가져간 물건을 돌려달라는데 어중이 떠중이 보냈다가는 되려 장수만 잃는다. 아무리 미친 놈이지만 자기 조카의 멱을 따지는 못할테니.” “하지만...” “걱정마라, 걱정마라. 자기 목 위험하면 레이첸놈도 호락호락 당하고 있지는 않을것이다.” “그런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결국 히우루가 역정을 낸다. 단상위의 아골타는 태연하지만 아래의 히우루는 좌우를 왔다 갔다 하며 짜증스럽게 말한다. “왜 다들 죽이지 못해서 안달이십니까?! 하나는 동생이고 하나는 자식아닙니까. 전에는 레이첸과 친첸을 붙여놓으시더니 이번엔 레이첸과 오걸매입니까 레이첸놈이 분명 단순한 놈이라지만 형님 호구는 아니지 않습니까?!” “헛소리마라!” 벌떡 일어난 아골타는 단상을 내려와 히우루의 어깨를 잡아 등을 보이게 한다. 그리고 두어발물러나 손가락을 뻗어 등 가운데에 올려놓는다. 그뿐이다. 아무런 말도 그이상의 행동도 보이지 않는다. 눈앞에는 텅빈 대전이 보일뿐이다. 등에 올려진 손가락의 미묘한 느낌만 느껴질뿐. 별 느낌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잠시 등뒤가 오싹해지면서 온몸의 신경이 그 가볍게 눌러진 등가운데로 쏠린다. 마치 미간에 손가락을 올려놓은 모양으로 미묘한 고통스러움이 느껴져 눈앞에 있는 대전이 머릿속으로 들어오지 못한다. 얼마나 그렇게 서 있었던지 전신에 힘이 쫙 빠지는 느낌이다. 그때 대전으로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가 발자국소리가 들린다. 그쪽으로 눈동자를 돌린다. 차를 가지고 들어오던 궁녀는 황제와 황성의 태수가 단상아래에 서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작은 신음소리와 함께 뒤로 물러난다. 동시에 궁녀보다 놀란 히우루가 결국 바닥에 주저앉는다. 고개를 돌려 등뒤에 있는 아골타를 바라본다. 아골타는 아무런 미동없이 손가락을 짚은 그대로의 자세였다. 히우루가 땀을 흘리며 헉헉거리는 모습을 보고는 그제야 팔을 내린다. 단상위로 옷자락을 걷고 올라간 아골타는 편히 앉아 예의 그 손가락을 들어보인다. “이건 친첸이다.” “...” “궁녀는 레이첸이야.”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습니다.” “뭐. 스스로 알지 못하면 알지 않아도 상관없다.” 궁녀가 차를 들고 단상위로 올라오자 황제는 뚱한 표정으로 차를 마신다. “그런데 네 생각도 맞다. 내가 너무 레이첸만 가지고 노는 느낌이군.” “...형님.” “그럼 이번엔 친첸도 함께 보낼까?” “아까와 달라진바가 전혀 없지 않소!” “좋아. 이번엔 졌다.” 킥킥 웃은 아골타는 근엄하게 말한다. “칙명으로 오걸매를 황궁으로 입궁시켜라.” 레이첸은 태진을 내려보았다. 하지만 태진은 그 이상의 말은 하지 않으려는 듯해보인다. “더이상 할말없는 것이 확실하냐?” “없습니다.” “단지 그뿐이라? 그럼 문제될 것은 없지 않은가? 사냥 갔다가 지방관리와 왕자와 마찰이 생기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다. 신경쓸 것은 없다. 성을 공격한 것은 문제가 될만하나 어차피 그 문제는 이미 끝난 것이 아니냐? 황제에게 말단의 비서랑이 그일을 다시 들추어낼 리가 만무하다.” 말을 멈춘 레이첸은 고개를 갸웃한다. “그런데 확실하냐? 우관이 영웅인것이?” 태진이 뭐라 하기전에 레이첸이 피식 웃어버린다. “생각해보아라. 너는 목래의 영웅을 만났지만 우관은 못만났다. 나역시 사냥가서 생긴 문제로 만난 어린 사내를 체이첸 형님께서 영웅이라며 불러오라 했다. 그렇다고 체이첸형님이 그 영웅을 만났던 것또한 아니다. 체이첸 형님은 15아우에게 소개를 받았을뿐이며 15왕자는 그를 만나기 위해 나갔다가 죽어버렸다. 게다가 영웅에게 주려던 패는 실종되었어.” “하지만 그패가 이곳에서 사흘을 말을 달리는 먼거리의 촌부의 옷속에서 가져온 것 또한 우연이라 치기엔 너무한 것이 아닙니까.” “...실은 말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태진의 날카로운 눈을 돌리가 손짓하며 레이첸이 편안한 자세로 고쳐 앉는다. “곡양에서 원치 않게 그와 오랜 시간동안 지내게 되었다. 그런데 그는 항상 누구를 기다리는 눈치더군. 굉장히 중요한 인물같아보였다. 그런데 얼마전 화선에게 보낸 연애서...이건 됐고, 아무튼 체이첸 형님의 영웅과 그 아이가 만나는 것을 본적이있다. 둘은 이미 알던 사이더군.”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겁니까?” “그 패는 정말로 체이첸형님이 데리고 있는 자의 것일지도 모른다는 거다. 단순히 긴 여행에 중요한 물건이라 우관에게 맞기고 나갔을지 누가 아느냐.” “왜 그런 생각을 하시게 되었습니까?” “뭐?” “형님은 생각보다 단순하신 분입니다. 일을 이렇게 꼬아 생각하시는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 아닌가요? 예상외의 질문에 잠시 고민한다. 정말로 자신은 이런식으로 복잡하게 생각하는 타입은 아니라 지금 상황이 웃기기도 한다. 하지만 곧 자신이 이렇게 생각한 이유가 나온다. “우관이 한족이기 때문이다. 너와 싸운 지방태수는 정안족이고 체이첸형님의 영웅도 정안족이다. 게다가 정안족이라면 무슨 생각으로 황제의 관적에 이름을 올린단 말이더냐.” “한족인 것을 어찌 장담하십니까? 속이려고 마음먹는다면 속이지 못할 것은 또 무엇입니까?” “...너와 싸운 놈이 어떻게 생겼는데?‘ “정안족들의 생김은 다 똑 같지 않습니까. 생김새는 변화하기 마련입니다.” “특이한 것이 있었을 것아니냐.” “...머리가 짧다 정도요? 아니 아니 잠깐...” 신중하게 고민하던 태진은 레이첸을 본다. “우관이 몇 살정도입니까?” “응? 몰라. 한 20살정도 되었겠지.” “그럼 동생쪽인가...짧은 검은 머리에 창백하고 몸이 외소하며 글을 쓰는 모습을 보아하니 신경질적이면서 고개숙인 폼이 꽤나 순응적이더군요. 왼손을 위로 해서 잡는 버릇을 보아 양손을 사용하거나 무예를 배운 자입니다.” “...한번 본 사이에 별걸 다 아는구나.” “눈을 내리까는 버릇이 있던 것으로 보아 소심하거나 지나치게 진중하거나 머리회전이 빠른 놈일수도...우관은 어떤 자입니까?” “...비슷하긴 하다. 머리는 올린 것으로 보아 긴 것 같지만. 순응적이란 말도 전혀 아닌 것 같아.” “제 눈으로 확인하는 것보다 더 빠르고 정확한 길은 없는 것 같습니다.” 태진이 결정했는지 일어난다. “비서랑이니 성각헌에 가면 볼수 있는 것이겠지요.” “그놈 지금 좌천중이다.” “예?” “일이 있었던지 좌천중이야. 잠깐, 그를 보기전에 내 말을 먼저 들어라.” 다시 태진이 자리에 앉는다. “일단은 그가 황제의 관리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말단의 관리라고는 하나 분명 그는 황제의 것이다. 지방태수와는 전혀다른 신분인것이다. 그것을 잊고 전과 같은 행동을 한다면 이것은 나로써도 막아줄수 없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놈이 절...” “괜한 걱정이다. 스스로 싸움을 걸어와 지고 만 것이 아닌가. 그정도는 왕자라면 한번쯤은 부릴만한 치기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그 정도의 일은 내가 감추어줄만 하다. 정 그놈이 걸린다면 지금 좌천중이니...” 그말에 태진이 고개를 든다. 등을 돌린 레이첸에게는 안보이겠지만 태진의 눈이 날카로와진다. “좌천중이니 제가 손을 써도 된단 말씀이십니까?” 정곡을 찔린듯한 얼굴로 레이첸이 잠시 주저한다. 사실 자신의 뒷말이 그말이였다. 좌천중이니 적당히 손을 써 사고사한다면 별 무리없이 통과된다. 하지만 막상 그렇다라고 말을 하기엔 좀 걸린다. 화선이 그놈을 굉장히 좋아하는 눈치인데. 전날 필본을 받고 무척이나 좋아하던 아름다운 부인은 자신에게 방안으로 들어오라며 간만의 옛정을 느끼게 해주었던 것이다. 다시 고개를 갸웃한 레이첸은 고민에 빠져들었다. 153 누군가 등을 부드럽게 쓰는 느낌에 실눈을 뜬다. 회색 장삼의 스님이 눈앞에서 자신이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꿈인가? “눈 떴으면 얼른 일어나야지 뭘 그리 꾸물대는 것이냐?” 벌떡 일어나 베게에 손을 가져다 대지만 좀더 빨리 움직인 스님의 부드러운 손이 베게를 밀쳐낸다. “이거? 아까 빼내었다.” 빙긋 웃는 후소의 손에는 단검과 피묻은 손수건이 있다. 자례는 잠시 그를 노려보다가 그에게서 위험을 느끼지 못해 조금은 안심하고 묻는다. “누구십니까?” “네 형을 봐주던 사람이다.” “그럴리가. 형은 유견님과...” “그분은 예전에, 난 가장 최근의 선생님이시지.” 잠시 의심해보지만 그가 자신을 해하러 왔다면 일어날 기회조차 주지 않았을 것이 분명해 얼른 고개를 숙인다. “명림 자례입니다.”“오냐. 그냥 후소라고 불러라. 멍청한 형과는 달리 머리회전이 빠른 놈이구나.” 후소가 침상위에 편안하게 앉자 자례가 일어나 자리를 비켜준다. 차를 타서 가져오자 반갑게 들어준다. 얌전히 그 앞에 마주앉아 차 시중을 들어주는 자례를 힐끔 바라보던 후소가 묻는다. “나이가 몇이지?” “올해 생일이 지나면 19이 됩니다.” “생일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 거 이상한 일이군. 나는 알고 있는데.” “예?” 뜻밖의 이야기에 자례가 고개를 들자 후소가 미소짓는다. “네 아버지는 취향이 고약한 분이였거든. 도둑장가든 사람이야. 그래서 네 어머니가 너희를 가졌을적에 모두들 그녀가 도망갈지 몰라서 교대하면서 지켰거든. 우연히 너가 태어난 날 내가 문앞을 지키던 터라 네 생일에 대해선 잘 알지.” “그랬습니까.” 처음 듣는 소리에 진심인지 농담인지 몰라 잠시 멈칫한다. 그런 자례를 보고 후소가 가까이 오라 손짓한다. 자례가 몸을 기울이자 조용히 말한다. “사실은 말이다.” “예.” “농담이야.” “예.” 그렇게 침묵이 지나간다. 멀뚱한 표정의 자례를 보고 후소가 먼저 몸을 일으킨다. “에이, 재미없다. 형쪽은 놀릴만 하지만 네놈은 별로구나.” “죄송합니다.” “다시 돌아올때는 널 놀릴만한 일을 만들어서 오지.” “기대하겠습니다.” 후소는 침대위에서 일어나 천장을 바라보다가 자례에게 손짓한다. 차분히 곁으로 아이가 다가오는 소리에 맞추어 단검을 뽑아 뒤를 향해 찔려본다. 그리고 뒤를 돌아본다. 아이는 단검보다 두발 떨어진 곳에서 멈추어있었다. 그 모습에 후소는 웃는다. “왜 더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지?” “후소님 뒷모습이 무서워서... 전 겁장이거든요.” “그래? 그 정도는 알만한가? 역시 넌...” “예?” “내 앞으로 서라. 두팔을 벌리고. 정면의 벽을 바라보아라.” 잠시 머뭇하지만 그다지 해는 없을것이라는 생각에 팔을 벌리고 선다. 뒤로 후소가 다가오더니 곧 목으로 차가운 손이 닿는다. 어깨와 허리를 기준으로 잠시 몸을 만져보던 후소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손에 들고 있던 단검으로 허리띠를 툭친다. 찌릭하는 소리에 자례가 허리를 바라보는 순간 옷이 위로 들려지는 느낌에 놀라 그대로 옷깃을 잡고 몸을 돌려 후소를 마주본다. 갑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자례에게 되려 후소가 놀란다. “응? 왜?” “...아뇨. 아끼던 허리띠라서.” “그래? 그냥 홀겹 허리띠잖아. 내꺼 주리?” “됐습니다.” “그럼 벗어.” “...예.” 벗는 자례로는 껄끄러운데 보는 후소는 천연덕스럽다. 확실히 망설여지기는 하지만 어차피 벗어야 한다면 이래저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어 빠르게 벗는다. 사실 안에다가 포를 하나 더 입고 있지만 속이 비춰보이는 옷감이라 신경쓰였던 것이다. “어이구. 잔말없이 벗는다 생각했더만 형과는 달리 홑저고리까지 입고 있었구나. 이제 날도 더워지는구만.” “이젠 입어도 됩니까?” “기다려라.” 아까와 마찬가지로 몸을 살펴본 후소는 이제 입으라고 등을 툭친다. “네 형은 글씨는 영 아니구나. 종이에서 보나 네 몸에서 보나 말이야.” “알고 계시군요.” “가슴쪽의 흉터는 오래 되지 않은 것이군. 어디서 다친거냐?” “목래 공성전에서 다친것입니다.” “아아...그 계명이라고 했나? 그 한족장수에게 당한건가. 그 이야기는 들었다.” 후소가 탁자에 편히 앉아 조금은 식어버린 차를 다시 들자 자례는 재빨리 옷을 걸치고 후소의 앞에 마주 앉는다. “춤을 좋아하지?” “어찌 아셨습니까?” “네 몸의 균형이 좋아서. 보통 검을 쓰는 놈들보다 춤을 추는 여인들이 몸의 균형이 완벽하거든. 힘쓰는 놈들은 항상 그쪽만 사용하기 때문에 몸의 반이 조금씩 크지.” “왜 절 살펴보신겁니까?” “14왕자가 널 찾아올것이다.” 자례는 인상을 쓰며 고개를 숙인다. 손톱을 깨물며 생각에 잠긴다. “어떻게? 그와 마주친적이 없는데 벌써 내 존재를 안단 말입니까?” “4왕자가 말을 퍼트린 모양이야.” “허.” 한숨을 폭쉰다. 덜떨어진 왕자 같으니라구. 그런 이야기를 또 가서 말하다니. “어떡할건가?” “예?” “가만히 있지않을 것이 분명하잖아.” “거기까지 제가 걱정해야 할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째서?” “제 밀명은 그것을 포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후소가 낮게 웃는다. “그럼 14왕자가 자객을 보낸다면 그냥 죽을것이냐?” “절 지켜주는 누군가있겠지요.” “...넌 왕씨를 믿고 있구나.” “제게 미래를 보여주신다 하셨습니다.” “믿느냐?” “후소님은 아니 그러십니까?” 잠시 두사람의 눈싸움이 시작된다. 여전히 고개를 돌리는 것은 후소이다. “졌다. 어린놈이 뭐그리 기가 세냐.” “죄송합니다.” “그래. 네 말대로 왕씨께선 그일로 날 보내신거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널 지키는 것은 아니야. 난 14왕자를 황궁에서 내보내는 역할이다. 네가 다시 황궁안에 들어갔을때 위험이 없도록 말이야.” “그러시다면 오늘 이곳에 오신 연유는?” “대강이라도 네가 네몸을 지킬수 있도록 해주라는 명을 받았다.” “강하진 않지만 약하지도 않습니다.” 그말에 후소가 빤히 자례를 바라보고는 피식 웃는다. 갑자기 정색을 하고 일어나 권을 뻗는다. “받아보겠느냐!” 어느정도는 예상했는지 후소가 일어나자마자 거진 동시에 일어난 자례가 뒤로 물러나며 그 주먹을 감싸 옆으로 밀어내어버린다. 이 놈 봐라? 자휼이 무식하게 정면으로 돌진하는 것과는 달리 자례는 상대의 힘으로 밀어버리는 유형이였다. 강하게 타격하면 무리없이 피해버리고 피할수 없으면 밀어서 빗겨가게 한다. 그런데도 후소가 틈을 보이면 확실히 가격해버린다. 얼핏 십여분 권을 나누다 정말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 자례가 얄미워져 진심으로 힘을 담아 가슴을 향해 내치다가 아이가 가슴병이 있다는게 떠올라 얼른 손을 흐린다. 때를 놓치지 않고 손을 당겨 어깨에 인 자례는 그대로 후소를 내쳐버린다. 퉁하는 소리가 들리며 돌바닥에 넘어져버린 후소는 잠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가 옆에서 주저 않아 숨을 몰아쉬는 자례를 보고 웃으며 일어난다. “정말로 강하진 않지만 약하지도 않구나? 권은 누구에게 배운것이냐? 네 형이랑은 전혀 다르구나?” “제 할아버지...아니 목씨 정륜님에게 배웠습니다.” “아아! 목정륜님말인가! 그럴만도 하네. 목씨는 장군중에서도 권에 뛰어나니까.” 벌떡 일어난 후소는 앉아있는 자례를 일으켜 세운다. “너 검도 할줄 알지? 이 참에 너도 수련 좀 받아보지 않겠느냐?” “어떤 수련을요? 후소님처럼 자객을?” “내가 자객이라는 것은 어찌 알았지?” “자객처럼 들어오셨지 않습니까.” “그런가? 허허허.” “가르쳐 주신다면야 기쁘게 배우겠습니다.” 탁자에 놓인 단검을 다시 겁집에 넣는다. “사실 단검을 가지고 다니기도 좀 불안한 참이라. 무기를 지니지 않고 몸을 보호할수 있다면야 좋지 않겠습니까.” “아쉽지만 검을 들고 덤비는 놈을 맨손으로 상대하는 것은 쉽지 않다.” “예.” “하지만 우리네 특성상 사람을 죽이기는 간단한 일이다.” “예?” “잘봐라.” 후소는 장삼을 벗는다. 회색의 스님옷 아래에는 정안족의 포를 입고 있었다. 후소는 허리띠를 풀지 않고 두팔만 벗은후 승복을 다시 입는다. 겉보기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자. 무기 없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무기를 만들어 볼까?” “?” 뒤로 물러난 후소가 소맷자락을 턴다. 안쪽으로 벗어놓은 긴 옷자락이 밖으로 밀려나오자 손을 돌려 순식간에 밧줄처럼 만든다. 다시 손을 털자 옷자락이 풀리고 어깨를 으쓱여 소맷자락을 안으로 감춘다. 너무도 순식간의 일이라 보던 자례도 깜짝 놀란다. “정말 그렇군요!” “금의 관복은 허리띠가 없다. 사람을 괴사시키기엔 허리띠가 최적인데 그럴수 없으니 이런식으로 하는것이지. 신기하지?” “예. 처음 알았습니다. 순식간이라 증거도 남지 않겠군요.” “또한 네가 입고있는 홑옷은 명주로 된 것이 아니더냐. 그거 굉장히 부드럽고 얇게 보이지만 식초에 담구었다 빨아 말리면 세상 어느 밧줄보다 튼튼해 진다. 아까처럼 말면 어지간한 검은 튕겨낼 정도지. 어떠냐, 곧 떠나야 하지만 네가 이미 권의 기본은 알고 있기에 금방 배울수 있다.” “하겠습니다. 강해지고 싶으니까요.” “그건 네 형이랑 같구나.” 그말에 머쓱한 표정을 지은 자례는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짓다가 중얼거린다. “저, 별것 아닌 질문이지만...” “뭔데?” “형, 잘 있나요? 전에 내가 보낸 서신은 받았을까요?” 그말에 후소는 배를 잡고 구른다. 참으려해도 웃음이 터져나온다. 혈육은 속일수가 없단 말이야. 이놈을 놀리는 법을 터득해버렸다. 154 레이첸은 잠시 태진을 등지고 방을 나와 걸음을 걷는다. 손을 쓴다는 것은 죽인다는 것이겠지. 그렇지. 자. 어떻게 할까. 죽일까? 어차피 별 귀엽지도 않고 재미있는 호구거리에 불과한 사내니까. “죽일까 말까 레이첸?” 스스로에게 물어보고 웃고만다. 게다가 잘 생각해보니 자신을 협박하는것도 그렇고 곡양에서 광에 가둬 놓은 것도 , 청사에서도 도둑으로 몬 것이 참으로 괴씸하다. 하지만 황제의 관리라는 것이 마음에 걸려 손쉽게 결정을 내릴수가 없다. 그러나 태진의 말이 맞다면 그는 정안족이 아닌가. 그렇게 된다면 별문제가 되지 않는 터이다. 하지만 정말 한족이라면? 그거야 말로 황제의 노여움을 스스로 사는 꼴이 되고 만다. 들킨다면 그건 끝장이다. 또 스쳐지나가는 것은 그 얄굿은 검은 눈동자의 조소. 순식간에 마음이 결정되어 버린 레이첸은 발걸음을 돌려 태진이 기다리는 방으로 들어간다. “해라. 단 그가 맞는지 확인을 해야한다.” “감사합니다.” 태진이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간다. “이해할수 없군요. 이왕 기습까지 할정도로 바르게 미쳤는데 이렇게 쉽게 빠른 길로 돌아갈 것 같습니까. 느린 길이지만 우회해서 갈것이 분명합니다!” “그놈은 그렇게 약지 않았다. 아마도 내가 전에 기습한 것이 떠올라 흉내낸 것이 다일게 분명해. 그리고 도성에 올라갈 정도라면 황제의 명령이 있었다는 것인데 지금 시기에 그놈이 느릿느릿올라가게 생겼는가?” “지금 시기라 함은?” “백지 상소가 중간에 가다 사라졌으니 이번에 느리게 올라오면 황제가 군을 이끌고 와서 저놈 등뒤를 치는 생각을 하고 있을거다.” 을노의 말에 부관이 곰곰이 생각하고는 이상하다는 듯 묻는다. “황제와 오걸매의 사이가 그렇게 않좋습니까?” “굉장히 않좋지.” 턱을 괸 을노가 중얼거린다. “형제들끼리 피를 보고 싸웠는데 안그러게 생겼나.”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나중에 시간 날 때 이야기해주지.” 툭하고 부관의 어깨를 친 을노는 몸을 조금 일으켜 나무사이로 보이는 지름길을 노려본다. 이제 슬슬 나타날 때다. 하얀 호랑이 가죽을 뒤집어쓴 전쟁에 미친 사내가 말이다. 앞의 나무에서 신호가 오자 부관이 활을 재는 소리가 들린다. 을노 역시 몸을 낮게 숙이고 앞을 응시한다. “오걸매만 쏴선 일이 끝나지 않는다. 오걸매를 쏘고 따라오는 다른 장수들도 남김없이 죽여라.” “알고있습니다.” 눈을 들어 좌우를 확인한다. 이미 매복해 있던 궁수들과 장수들이 하나같이 팽팽하게 활을 당겨 그들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린다. 말소리가 울리며 그들이 모습을 들어낸다. 수는 약 이십여명, 하나같이 산적들이다. 거란이나 여진이나 뭘 먹고 저리 어깨가 넓어진다냐. 다리가 짧아서 어깨가 넓어지는 건가. 을노가 내린 손에 나무위에서 화살이 날려지고 정확히 그 화살에 맞은 오걸매측의 병사들이 땅을 구른다. 선두에 달리던 오걸매가 잠시 멈칫하고 말을 멈춘사이에 말에서 뛰어내린 오걸매측의 장수들과 앞쪽에 매복해 있던 을노측의 장수들이 벌써 맞붙는다. 천천히 말에서 내린 오걸매가 좌우를 두리번 거리다가 큰 언월도를 뽑아들고는 부관을 향해 겨눈다. 다른 자를 경계하고 있다가 등골이 오싹한 느낌에 부관이 뒤를 돌아보았을때는 그 커다란 언월도가 자신을 향해 내리꼿고 있었다. 그래도 산전수전 다 겪은 터라 몸을 굴리려 하는데 을노가 먼저 달려와 부관을 발로 차버린다. “비켜! 이놈하고 눈 마주치지 말랬지!” “선인!” 정통으로 허리를 맞았는지 부관은 인상을 쓰며 을노를 노려보다가 얼른 다른장수를 맡아 뛰어간다. 오걸매는 언월도를 옆으로 비켜 들고는 자신의 먹이를 낚아챈 또하나의 야수를 바라본다. 이를 들어내고 자신의 영역에 들어온 맹수에게 화를 낸다. 그 또하나의 맹수 역시 몸을 낮추고 오걸매의 노란 눈을 바라보며 시선을 묶어버린다. 을노와 오걸매는 동시에 웃고만다. 어차피 너와 내 상대는 서로밖에 없다. 그 작은 산의 외길에 두 마리의 호랑이가 서로의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 거린다. 스스로 영역안으로 뛰어온 호랑이는 발톱을 내밀고 영역의 호랑이는 이빨을 들이민다. 깊은 어둠이 깔린 조용한 황성의 길을 걷던 후소는 천천히 모도리로 걸음을 옮긴다. 문을 두들기자 이미 준비하고 있었던 듯 바로 마유장군이 나와 웃는다. “갔다 왔습니까?‘ “음. 뭐 영리한 놈이라 별 할말도 없었고.” “우리도 떠나야지요. 곧 날이 밝을 겁니다. 월담하려면 지금 나가야지요.” “그래야지. 준비는 다 되었는가?” “어느정도는. 아직 못한 것은 있긴 하지만 가면서 해야지요. 여기서 파낭까지는 꽤 걸리니까요. 출발하기전에 유견님께 인사라도 하셔야지요?” “그래야지.” 후소가 모도리로 들어오자 유견역시 기다리고 있었던 듯 연습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거대한 방에서 조용히 정좌의 자세로 앉아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후소가 그에게 다가가 웃는다. “잘지내셨습니까? 근간에 유번님과 함께 계셨다고요. 참 즐겨우셨겠습...” “조용해라!” 손을 들어 후소의 입을 막은 유견은 후소를 한번 보고 마유를 한번 보고 그것을 되풀이하다가 한숨을 폭 쉬고는 신경질 난다는 듯 말한다. “다들 마음에 안든다.” “아니그럼 40된 사내들에게 뭘 바라신거요? 미끈한 허리라도 바라신거랍니까?” “시끄러 이놈아! 내 하나뿐인 동생을 너희들에게 맡긴다는게 못미더워 하는 말이다! 어쩜 이렇게 넉살좋은 놈들하고 가는지!” “그렇게 말씀하시면 너무 서운합니다.” 마유가 웃으면서 유견을 달랜다. “유번님은 별 상관치 않으시지 않습니까.” “그래도 그렇지, 거절했다면 내쪽으로 돌아왔을 것을. 조용히 시골구석에서 칼이나 갈것이지 뭣하러 갑자기 끼어든다는 것인지!” “아이고, 그 나이되어 동생감싸는겁니까? 이제 60넘은 노인들끼리 참으로 보기 좋소. 하하하!” 딱소리가 나도록 유견은 후소의 머리를 쥐어박는다. 말리는 마유에게 밀려 다시 자리에 앉고는 침중하게 경고한다. “내 동생 위험하게 하지말아라. 나와는 달리 무예쪽으로는 별반 신경쓰지 않았던 놈이니까.” “알아모시지요.” “별로 위험하지 않을것입니다. 그래서 저와 후소님이 따라가는 것이니까요.” “...너희들이 못미덥다. 유번놈은 지 스스로 알아서 하는 놈이야.” “걱정마십쇼.” 후소가 맘편하게 웃는다. “유번님이 위험에 뛰어들지 못하도록 우리가 가는 것이 아닙니까.” “잘 해다오.” 유견이 고개를 숙여 혈육을 맡기는 예를 보이자 후소와 마유역시 고개를 숙여 답례한다. 해가 뜨기 전에 움직여야 한다는 말에 마유와 후소가 일어나 모도리를 나온다. 푸른 안개사이로 두사람의 그림자가 사라지자 유견은 혀를 차며 문을 닫는다. 나이가 먹어도, 태어난 시간차이가 고작 몇분 안되더라도 형은 형이고 아우는 아우라 걱정이 안될 리가 없다. 그런데도 이 방만한 아우는 조용히 살던 것을 버리고 위험속으로 뛰어들어간다. 말리고 싶어도 그럴수가 없다. 이미 오래전에 아우가 자신을 말렸을 때 그의 말을 헛으로 들으며 이 위험속에 뛰어들었던 것 또한 자신이니까. 새벽동이 트자 마류는 자신의 말을 끌고 마당으로 나와 앞으로 올라가야 하는 산을 바라본다. 예사도 허리를 풀면서 마류에게 아침인사를 한다. “좋은 아침입니다. 아직 새벽이지만. 지금 떠나야죠?” “그래. 저 산을 또 넘어갈 생각을 하니 아찔하군. 나도 나이가 먹어서 이젠 지독한 산행에는 힘들단 말이야.” “하하하, 장군님은 아직도 농담을 잘하십니다. 이곳으로 오셨을때 훨훨 날아오셨다면서요? 마을 안팍에 신선이란 소문이 났던데 말입니다.” “거야 시간이 급해서 달려온것이였지만 아이구야, 여기서 요 몇주 편하게 지냈더니 허벅지에 살이 쪄서말일세.” “에이, 넘어가시면서 빼실 생각이시군요?” 마류는 지긋이 웃고는 반듯하게 올린 백발머리를 풀어헤친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눈처럼 하얀 백발이 아침 바람에 날린다. 검은 명주실로 엮은 끈으로 그 머리를 곱게 아래로 묶어 내린다. “그럼 출발할까? 말까지 데리고 가는 여행이니 아주 느릴꺼야. 다른이들과는 달리 북치고 장구칠 길이니 소란스럽기도 할테고.” “그거 반가운 소리인걸요.” “설마 자네 마각을 데리고 가려는 것은 아니겠지?” “저의 애마를 어찌 놓고 간단 말입니까. 더군다나 이런 한가한 여행에 말입니다.” 눈을 찡긋한 예사는 아직 잠이 덜깬듯해 보이는 마각을 데리고 나온다. 마류는 잠시 인상을 찡그리지만 곧 웃고만다. 곧 예사의 병사들이 하인의 병복을 입고 수례에다가 단단히 봉해둔 상자를 수십여개의 마차에 싣는다. 알려지지 않는 남쪽에서 경마축제가 벌어지는 기주성까지 화려한 여행이 시작되었다. 백발의 대 부호는 남강이라고 불렸는데 무예를 숭상하여 돈을 아끼지 않고 명검과 무기를 모은다고 하였다. 그 값을 매우 후하게 쳐주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집안에 있는 내력있는 검이라면 한번쯤은 그에게 가져가보길 원했다. 남강은 별 무리가 없다면 모든 검을 사모았는데 그의 일행이 양인성까지 도착했을때는 그에게 손견의 고정도와 왕윤의 칠보검까지 비롯 간장과 막야까지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게 되었다. 155 어느정도나 되었을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목뒤로 넣어 앞으로 쏠린 머리를 뒤로 정리한다. 이젠 어느정도 익숙해진 화려한 기루의 천장이 눈에 들어오자 자리에서 일어난다. 화려한 비단이불을 걷고 침대에서 일어나 앉는다. “...거기 있는가?” 방은 비어있었다. 하지만 누군가 자신의 잠자는 모습을 바라보는 시선에 못이겨 일어난것이다. 분명 이 방안에 누군가 있다. 그것이 사람이 아닐지라도. 이젠 익숙해져버린 인정할 수밖에 없는 고대의 유산이. “아무리 그래보았자 날 막을수는 없다.” 조용히 속삭인 하류사는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들이쉰다. 고요하게 재워진 어둠속의 공기가 가슴을 울리게 한다. “나오거라. 오늘 밤은 무슨 놀이를 해줄까.” 검은 머리를 뒤로 넘기며 하류사는 방안 구석을 향해 손짓한다. 어두운 구석에서 한참이 지나서야 누군가 터벅터벅 걸어나온다. 검은 머리, 검은 눈매에 강한 이목구비. 이제 한손이 될까 말까한 어린 얼굴에 작은 몸인데도 그 눈동자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가늠하지 못하겠다. 검은 포를 입고 하얀 허리띠를 맵시 있게 묶은 단정한 모습이다. 웃으면 무척이나 귀여울터인데 아이의 표정은 마치 곧 죽을 노인보다 무거웠다. 하류사가 자리에 앉아 손을 내밀어 아이에게 다가오길 청한다. 아이는 고개를 비스틈하게 세워 그 검은 눈매로 그를 바라보다가 콧웃음을 한번 친다. 하지만 마음엔 들었는지 천천히 하류사에게 다가온다. 다가온 아이는 날카롭게 하류사를 바라본다. 옷자락에 감추어진 작은 손을 들어 하류사의 이마에 손을 얹고는 그 얼굴을 외어보려는 듯 쓰다듬는다. 천천히 미끄러지는 손길에 하류사는 눈을 감는다. 눈을 떴을땐 아이는 자신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는 듯 그의 어깨에 기대 앉는다. “오늘 밤은 무슨 놀이를 해줄까?” 찰랑하는 소리가 들린다. 아이가 금꽃이 달린 옷자락을 흔들며 손을 보이자 그 안에서는 나무를 깍아 만들어 붉게 칠한 공이 나온다. 무척이나 오래되어 보여 하류사는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아이에게 손을 뻗어 공을 받으려고 한다. 하지만 줄수는 없다는 듯 인상을 쓰며 내민손을 내쳐버린다. 그리고 하류사에게 떨어져 벽을 향해 공을 굴린다. 하류사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혼자서 즐거운 듯 보이는 아이에게 빠져 그 옆으로 다가가 앉아 턱을 괸다. 탁, 스르르르륵 퉁. 탁, 스르르르륵 퉁. 한참을 그렇게 나무공의 무거운 소리가 울린다. 스르륵하고 공이 벽에 부딪치기 전 하류사가 손을 내밀어 공을 잡는다. 아이가 고개를 들어 자신을 방해한 하류사를 노려보지만 그는 미소지으며 공을 손안에서 튕긴다. 무거운 나무공이 손안에서 유연하게 하늘로 올라간다. 떨어지기 전에 무릅으로 공을 다시 튕긴다. 왼쪽 어깨로 오른쪽 다리로 튕겨진 공은 왼손으로 올라가 팔을 타고 올라 어깨를 지나 등쪽으로 굴러간다. 손을 등뒤로 뻗은 손안에 공이 탁소리를 내며 잡혀 들어온다. 손을 돌려 아이에게 내민다. 손안의 공은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다. 하류사는 낮게 아이에게 속삭인다. “난 마류장군을 믿어. 예사가 있으니 그들은 잘 해낼것이다. 넌 어떻게 생각하지?” 아이는 손안에서 멈추지 않는 공을 신기하게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어 하류사를 본다. “후소에게 과한 임무를 준것인지 몰라. 그사람은 좋은 사람이야. 사람을 죽이는 일을 시키는 것은 네가 잘못한거야.” “하지만 그만큼 강한 감정의 사람은 내게 후소밖에 없는걸.” “거짓말.” 아이는 인상을 쓴것같은 미소를 짓는다. “자례에게도 칼을 쥐어주었잖아.” “그 아이는 얼마 안가 죽는다. 사람은 죽기 전에 가장 강한법이야. 안그러면 내가 을노나 마기를 사용했어야 한다는 거니?” “을노보다 마기가 더 쎄. 그런데 왜 오걸매에게 을노를 보낸거지?” “마기는 황궁에 잠복해있어서야.” “마기는 원래 아골타를 상대하는 장군이였잖아? 언제 황궁으로 들어간거지?” “응? 이런.” 하류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의심스럽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아이에게 되묻는다. “지금이 몇 년이지?” “철종이 죽었잖아.” “으흠. 그래? 그 뒤로 시간이 흘렸어.” “어느정도?” “네가 잘 생각해봐.” 그말에 아이는 눈을 내리깔고 생각에 잠긴다. 한참을 정적속에서 그렇게 보내던 아이는 손을 내밀어 아직도 하류사의 손에서 돌고 있는 공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누른다. 툭하고 공은 거짓말처럼 서버린다. 아이는 의심서린 목소리로 하류사에게 말한다. “하지만 이 계획이 틀어진다면 더 이상 돌이킬 시간은 없어.” “그래. 나도 알고 있어. 틀어지지 않을거야. 그렇게 하고 있으니까.” “오걸매는 순진한 어린아이야. 상처입힌다면 입힌 그대로 돌아와.” “상처로 인해 자멸하게 만들것인데?” “다리가 아파.” 난대없이 아이는 팔을 벌린 하류사에게 안긴다. 아이를 안은 하류사는 창을 열고 조용한 밤길을 바라본다. “상대가 너무 많아. 다 죽이기엔 힘들어.” “그래. 아골타가 자식 좀 줄여주었으면 하는데 말이야. 무슨 좋은 생각있니?” “자례는 해루가 아니잖아?” “그래.” “미인계가 또 통할까? 그렇지 않을걸. 그건 내가 장난친거잖아. 두 번 통하는 것은 힘들어.” “그럼 뭐로 할까?” 그말에 아이는 활짝 웃는다. 재미있다는 듯 두팔을 벌려 커다란 원을 만든다. “아주 커다란 싸움을 일으키는거야. 스스로 서로 죽일수 있게.” “전과 같이?” “아이참, 자례는 해루가 아니래두.” “그랬지. 그럼 어떤 싸움을 일으키는데?” “하지만 그건 아주 나중의 일이야.” 하류사는 아이의 말을 곱씹는다. 딱딱해진 하류사의 표정에 아이가 손을 들어 장난스럽게 그의 코를 잡아 비튼다. “아골타와 오걸매가 싸워주었으면 좋겠지?” “응. 그리고 2왕자와 3왕자가 4왕자와 5왕자가 싸워주었으면 해.” “그건 힘들어. 여전히 욕심쟁이구나.” “그럼 어떻게 해야지?” “따로 나누어 치워야지. 하지만 3왕자를 죽이는 것은 생각보다 쉽다. 그지?” “응.” “하지만 명령하진 않을거지?” “그래.” “바보같아. 약해졌잖아.” 쫑알쫑알 거리던 아이는 하류사에게서 내려와 땅에 떨어진 공을 다시 던진다. 탁, 스르르르륵 퉁. 탁, 스르르르륵 퉁. “난 안그러는데 넌 왜 겁쟁이가 된걸까?” “역시 네가 봐도 그러니?‘ “바보. 누나랑 연을 맺을수는 없다. 관리잖아.” “그래.” “죽는 사람을 구할 힘은 없는거야. 장난에 쓸 인형이 생겼다면 다른건 건들지 말아.” “노력해보지.” “4왕자와 14왕자가 벌어진다해도 4왕자는 지지않을걸. 그 놈을 지게하려면 죽여야해.” “누구를?” “사기 인형.” 그말에 하류사는 고개를 흔든다. “그건 안돼. 약속했어. 미래를 보여주기로.” “바보. 손안의 벌래에게 좋아한다고 말해도 살려주는 것은 아냐.” “내겐 나비 날개가 필요없어.” “거짓말이야.” 아이는 장난스럽게 말하고는 다시 공을 굴린다. 피식 웃은 하류사는 고개를 끄덕인다. “나비 날개가 필요해.” “그럼 날개만 때어가져.” “그럼 나비가 죽잖아.” “세상에 안죽는게 어딨어?” 혀를 낼름 내민 아이는 공을 잡아 하류사에게 내민다. 하류사가 공을 잡아 허공으로 튕긴다. 현란한 공놀이에 아이는 하류사를 바라보며 손벽을 친다. “2왕자를 죽기기가 가장 만만치 않아.” “2왕자는 죽이지마.” “왜?” “그건...어, 여우다! 돌아왔나봐!” 아이는 갑자기 등을 돌려 어둠속으로 달려간다. 그림처럼 사라져 버리는 아이의 환영에 남은 것은 손안에 남은 오래된 나무 공뿐.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공을 손으로 다듬는다. 더 이상 공놀이를 하지 않아도 되는 나이가 되었으니까. 동그르르 땅에 공을 굴린다. 그리고 뒤로 물러난다. 하지만 공은 멈추지 않는다. 악운은 주위를 돌아보고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는 편하게 앉는다. 매일 허리를 피고 책을 읽었더니 허리가 쓰리다. 툭툭허리를 치고 있을때 2왕자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려 얼른 정좌의 자세로 돌아간다. 오늘은 이상하게 빠른 걸음으로 들어온 2왕자는 고개를 흔든다. “들었나?” “무슨?” “하긴 들을 리가 없지. 우관이 임시 좌천을 당했다네.” “예? 그 아이가 무슨 일로?!” 몹시 놀랐다는 듯 악운이 되묻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미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 고집쟁이 녀석, 덤비면 안되는 놈에게 시비붙어서지지 않으려 용쓰다가 내쳐진 것이 분명할것이다. 하지만 체이첸은 전혀 다른 말을 한다. “도난 사건이 있었나보이.” “예? 그 아이가요?” “아니. 도둑을 당한 모양인데... 일이 꼬여 좌천까지 간 것 같다.” 체이첸은 한숨을 쉬고 어리둥절한 모습의 악운에게 말한다. “실은 곧 성에서 문관을 뽑아 호북으로 보내야한다. ” “호북이라 함은 송과 대치중인 위험한 곳이 아닙니까. 어째서 그런곳에 문관을?” “그쪽을 지키고 있는 장수가 글을 몰라 문관을 붙여주는 것이다.” 그말에 악운이 더 말이 안된다는 듯 말한다. “아니, 황성의 장수가 글을 모른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는 특별한 경우니까. 내 작은 아버지가 된다.” “그렇다면 황제의 아우?” “그래. 문관을 뽑아주는 것은 해마다 계속되었던 일이야. 그런데 우관이 좌천을 당했으니 이거 참으로...” “좌천과 그것과 무슨 상관입니까?” “외지로 자신의 관리를 보내는데 좋은 것을 보낼 리가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 아이가 뽑힐수 있다는 것입니까?” “일단 내가 어느정도까지 돌릴수 있는가 해보겠지만...아직 좌천에서 풀리지 않았으니 잘된다면 좌천상태로 이 위기를 넘어갈수 있겠지.” 한숨을 쉬는 레이첸을 보고 악운은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든다. “저로써는 무척이나 황공한 일입니다만 경락공께서는 참으로 그 아이를 아끼시는 듯 합니다. 비록 저의 지인이고 글을 잘쓰기는 하지만 경락공께서 이렇게 까지 해야할 아이일까요?” “글을 잘쓰기라니. 자네는 우관의 글이 얼마나 미려한지 잘 모르는 것 같군. 아니라면 영웅의 주위에는 수많은 천재들이 다녀가 그의 특별함을 모르는건가.” 체이첸은 그 특유의 선비정신이 발동된 듯 부드러운 표정으로 변해 창가로 다가간다. 춘란을 심어 놓은 붉은 사기 화분을 바라보며 웃는다. “그는 그 글로써 자신을 특별하게 한다네. 자네가 그 현명함으로 자신을 특별하게 하는 것 처럼. 나는 어떤 천재라도 놓치고 싶지 않아.” “예.” “특히나 그것이 내 사람이라면!” 휙 등을 돌린 체이첸의 표정은 황궁으로 입성할 때 보았던 그 우락부락한 4왕자를 너무도 닮아 흠칫 뒤로 물러나게 만든다. 체이첸은 악운에게 다가와 그 어깨를 잡아 자신에게 끌어당긴다. 그 차가운 검은 눈에 단정한 검은 머리에 저 망나니 붉은 머리의 왕자보다 더한 욕심이 보여 악운을 당황시킨다. “내게 일인자의 자리가 만들어진다면 나는 그것을 남에게 줄정도로 인정있지는 않네. 선비인 듯 고고한 학처럼 굴고 있지만 나 역시 들개의 피를 이어받고 있으니까.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인재다. 자네도 그렇고 우관도 그렇고 황제에게서 가로첸 수많은 천재들도 날 위해 시를 짓게 될것이야!” “경락공!” “자네들 정안인은 설객(雪客:백로)이라 하더군.” 어깨를 쥔 손을 놓고 천천히 뒤로 물러난 체이첸은 팔을 벌려 미안하다는 뜻을 보인다. “설객은 송백지조, 야견은 음식지인이라. 빙호에 엄동래설하여 역취비천하나 상풍고절에 통운망극하여 비통읍혈이라. (雪客 松柏志操 野犬 飮食之人 氷湖 嚴冬來雪 逆取飛天 霜風高節 痛隕罔極 悲痛泣血)” “...” “황제는 시작에도 일가견이 있지. 어떤가?” “그래서 황궁엔 정안족이 입궁하지 못하는 것이군요.” “그래. 그 어떤것에도 굽히지 않는 설객이 내 손에 한 마리 날아들었다.” 손을 올려 빈주먹을 쥔 체이첸은 미소짓는다. “내가 역취비천한것인가?” “...” “분명 그렇다 하더라도, 곧 내가 황제가 되면 회귀비천(回歸飛天)해주마. 그때가 올때까지 날 따라라.” 그 오싹한 미소에 악운은 눈으로 견제하며 뒤로 물러난다. 대답을 바라는 왕자에게 고개를 숙여 대답을 대신한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른다. 들개는 들개일뿐인가. 아무리 모습이 다르다 한들 그 것은 죽을때까지 변하지 못한다. 학의 탈을 쓰던 곰의 탈을 쓰던 그 안은 변하지 않는다. 이봐 꼬마야, 이 사람 사실 그 망나니 왕자보다 더 위험할지도 몰라. 정말로 하늘을 빼앗기기 전에 어서 날아올라 도망가라. 156 아무리 기다려도 아이는 나오지 않는다. 답답함에 조금만 더 조금만 더를 반복했던 차의원은 기어이 일어나 화난 걸음으로 청사를 향해 달려갔다. 낯익은 문을 왈칵 열고는 크게 외친다. “안나오나!” “에?” 방안은 난리였다. 폭풍우라도 쓸고 간 듯 그 좁은 방안의 물건들이 바닥으로 다 떨어져 있었다. 풀어헤친 머리를 하얀 명주실로 대강 동여맨체 속포만 입은 자례는 무엇을 하고 있던 것인지 멀뚱히 차의원을 바라본다. 붉그락 붉그락 거리며 화를 내는 차의원이 얼굴을 보고 아차하며 일어난다. “늦었군요!” “당연하지! 방안 꼴이 이게 뭔가?!” “준비하고 나가겠습니다!” 자례는 차의원을 밀어 방밖으로 내보내고 방문을 잡근후 얼른 옷을 찾는다. 물건이 쓸리는 소리와 깨지는 소리가 요란스럽다가 잠시 잠잠해지더니 얼른 문을 열고 자례가 튀어나온다. 얼핏 옷과 머리는 챙긴모습이다. “갑시다!” “잠은 잔거야? 눈이 부었다. 도대체 뭘 한거야 방안에서?” “그냥 놀았어요. 얼른 가야지요.” 뛰다시피 청사를 나와 오래전에 준비가 끝난 탁자에 앉아 가주를 잡는다. 기다리다 지쳐 나무 그늘에 앉아있던 병사들이 다시 일어나 난민을 하나 끌고 온다. 이름과 가주를 확인하는 작업이 끝나자 차의원이 가리키는 약을 병사들이 먹인다. “두번 다시 늦지 말게. 저들이 자네를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자네는 그들에게 사신인데 이렇게 늦는다면 목숨을 가지고 노는 셈밖에 더될까.” “죄송합니다. 시간이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고...” “뭐하고 있었는데?” “그냥...어젯밤에 잠이 안와서 술마시고 춤췄어요. “....말세군. 화를 그렇게 푸나?” 혀를 찬 차의원은 정말 이해할수 없다는 듯 다른 방향을 본다. 세구의 시체가 끌려나가고 새로운 난민이 끌려온다. 자레는 먼저번의 충고에 따라 냉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지 않고 묻는다. “이름과 가주의 주인, 또는 도성안에서 받은 호패를 보여라.” “그런게 있을 리가 없잖아!” “이름도 없는가?” “소야다!” 어라? 잠시 손을 멈춘 자례는 너무나 놀란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든다. 그리고 한숨을 쉰다. 가주끝을 만지작 거리면서 빠르게 머리를 굴린다. 차의원이 이상한 눈치를 보이자 자례는 불안한 눈으로 의원을 바라본 후 마음의 결정을 내린 듯 귓속말을 한다. “나 저 아이를 알고 있어요.” “그래서?” “살릴수 있나요?” “뭐?” 말도 안된다는 표정으로 차의원은 역시 귓말을 한다. “척봐도 공자와는 인연이 없는 아이잖아. 저런 난민을 어떻게 알고 있는거야?” “그게...제가 저 아이의 형을 죽였어요.” “억?!” 놀란 얼굴로 벌떡 일어난 차의원은 자례에게 손가락질 한다. “도대체 소시적에 뭘 하고 논거야! 축제기간에 봉변을 당하지 않나, 입관한지 일년도 못채우과 좌천한 주제에 술마시고 춤추지 않나, 몸에는 칼부림에, 상판대기는 부어올랐고 , 이젠 사람까지 죽였어!” 그 소리가 얼마나 큰지 지하의 감옥까지 조용해 진다. 병사들이 정말이냐는 뜻으로 서로의 정보를 나누고 부랑인들은 눈치를 살핀다. 그 침묵에 자례가 헛기침을 하며 무마시켜보려고 하나 침묵은 사라지지 않는다. 바람부는 소리에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가 카랑카랑하게 울린다. 묘한 침묵을 깬 사람은 죽기 위해 끌려나온 어린아이였다. “뭐야? 왜들 그러는데?” 두리번 두리번 고개를 돌리던 아이는 자신을 바라보기 위해 몸을 돌린 자례를 보고 인상을 찌푸린다. 그리고는 버럭 화를 내는 것이다. “난 저사람을 알아! 우리 형을 죽였어! 이 살인자!” “부정하지 않는다.” 책상을 돌아 아이에게 다가간다. 욱하는 성격으로 자례를 치려고 몸을 일으키려는 아이를 억누르는 병사들은 어찌할바를 모르는 눈치다. 두발 위로 선 자례는 눈을 가늘게 뜨고 땅에 엎드려 있는 소야를 바라본다. 아직 어린아이. 더러운 옷과 얼굴에 자신을 바라보는 눈이 악의에 가득차있다. “몇살이지?” “너에겐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아!” 자례가 어깨를 으쓱이며 차의원을 바라보자 그는 아까의 무안함을 미안하게 생각했는지 책상옆의 인적사항이 적인 종이를 꺼내 읽어준다. “막소야. 14살이고 생년월일은 없고. 가주도 없고. 보호자도 없고.” “14살? 아직 너무 어린데 이 아이도 부랑인에 들어가는 것입니까?” “보호자가 없으니 할수 없다. 전쟁고아를 돌보는 것도 한계가 있는 것이니까.” “그럼 사형이군.” 촤락하며 등을 돌린 자례는 다시 탁자에 앉아 붓을 든다. 막 승인을 하려고 붓에 먹을 담그는 손길이 느릿느릿하다. 결국 다시 붓을 놓고는 병사들에게 뒤로 물러나라는 손짓을 한다. 머뭇머뭇하던 병사들이 소야를 놓고 뒤로 물러나자 벌떡 일어난 소야는 자례에게 달려온다. 가느다란 눈을 치켜뜨고 달려오는 어린아이에 놀란 차의원이 재빠르게 탁상에서 일어나 옆으로 피한다. 자례역시 자리에서 일어난다. 자례의 몸이 큰 것은 아니나 확실히 나이 어린 소야보다는 크기 때문에 손을 내밀어 달려오는 소야의 머리를 잡아 근접을 막자 바둥거리는 두 팔과 다리가 몸을 치지는 못한다. 한참을 그렇게 힘겨루기를 하던 둘중 먼저 지친 자례가 소야를 뒤로 내친 것으로 끝났다. 뒤로 넘어진 소야에게 병사들이 우루루 달려가 몸을 두른다. 손목이 뻐근한지 손을 털며 인상을 쓴 자례는 소야에게 말을 건다. “그때, 그 노인이 말했었다. 네 형은 심장이 나빠 운나쁘게 객사한것이라고. 그러니 소야, 내가 네 형을 죽였다는 것은 부당하다.” “멀쩡하던 형이 네가 휘두른 몽둥이에 맞아서 죽었잖아! 그 날 아침만하더라도 웃고 있었단 말이야!” “그만해. 아무리 그렇게 기억을 더듬는다한들 죽은 사람은 다시 돌아오지 못해.” “네가 우리 형을 죽였어! 우리 형을 살려내!” 강한척하지만 역시 아직은 어린아이라 글썽 글썽한 눈을 채 감추지 못하고 통곡하고 만다. 어린아이의 쟁쟁거리는 울음에 자례가 귀를 막고 눈을 감는다. 한참을 그렇게 울던 소야가 스스로 지쳐 울음을 그칠떄에야 손을 땐다. “소야. 그 노인은 어찌 되셨지? 보아하니 너의 보호자가 될 것 같던데?” “할아버지는 한달전에 이곳으로 끌려와 죽었어!” “그래? 하긴 부랑인이 부랑인의 보호를 해주었자 그것이 그것이지.” “할아버지를 욕하지마! 너희들이 산 난민촌의 여자들이 낳은 아이들을 돌봐주신 분이야! 씨만 뿌리고 거두지 않는 너희들이 우리를 욕할자격은 없어!돈있다고 누나들을 괴롭히는 너희들이 뭘 알아! 우리를 더러운 것으로 알고 침을 뱉는 너희들이 뭘 알아! 개 돼지만도 못하게 봄이 오면 이곳으로 끌여와 목을 잘려야 하는 부랑인들을 이해할수 있어?! 알량한 자존심과 동정심으로 우리를 도우려고 하지마!” “...” “부모잘만나서 윗자리에 앉아 우리를 깔보는 너희들이 땅에 떨어진 것을 주어먹으면서 살아야 하는 심정을 어떻게 이해하다는 거지! 잘난 듯 거들먹거려도 어차피 전쟁이나면 죽는 것은 너희나 우리나 마찬가지야! 너희는 끝까지 안죽을 것 같아! 할아버지가 다음에 태어나면 너희들은 개보다 못한 것으로 태어난다고 하셨어!” “...” 달칵하는 작은 사기 소리가 나며 자례에 앞에 놓인 차뚜껑을 열고 입김을 불며 한모금 들이킨다. 앞의 소야가 쩌렁쩌렁하는 목소리로 자신을 비난하는 소리를 듣는다. 얼마나 한이 쌓였으면 차 한잔을 다 마시는데도 그 목소리가 지치지 않는다. 듣는 것이 지루할정도로 기다렸을때야 소야의 말이 잦아든다. 다 마신 찻잔의 바닥을 물끄러미 보던 자례는 드디어 잔을 내려놓고 붓을 든다. “또?” “뭐?” “또 할말은?” 흠칫하고 놀라는 소야를 차의원이 나무랬던 그 특유의 냉냉한 검은 눈동자로 바라본다. 아무런 감정이 들어있지 않는 검은 눈동자에 아이는 두려워한다. “살인자! 나도 형처럼 죽일꺼지!” “그게 지금 내가 받은 일이니까.” “나중에 돼지로 태어나라! 내가 잡아먹고 말테다!” 고개를 숙인 자례는 손에 든 붓으로 소야의 신상명세가 적혀있는 종이에 뭐라 써 내려간다. 차의원이 혀를 차며 죽기에 아직 어린 아이를 불쌍하게 바라본다. 그 아이 말대로 좋은 가문에서 태어났다면 지금 한창 글을 읽으며 미래를 꿈꿀텐데. 어린아이치고는 험한 말을 입에 담던 아이도 그것이 자신의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고는 두려움에 떨며 훌쩍인다. 죽음이 두렵지 않는 것은 인간이 아니다. 아무리 어리더라도 죽음에 대해서 공포감이 없다는 것은 거짓말이지. 옆에서 무심하게 글을 적고 있는 이 공자만 빼고 말이지. 글을 다 적은 자례는 고개를 들어 소야에게 묻는다. “죽고 싶니?” 말이 끝나기 무섭게 차의원이 날카롭게 옆구리를 찌른다. 뜨끔한 옆구리를 손으로 누른 자례는 책망어린 차의원의 눈길에 헛기침을 한후 말을 돌린다. “살고 싶지?” “내가 만약 살아남는다면 너가 죽을때까지 괴롭혀줄꺼야!” “저런.” 안타까운 얼굴을 한 자례는 옆에 앉아 안절부절하는 차의원에게 손짓한다. “차의원.” “가져가라.” 못볼 것을 본다는 듯 차의원이 고개를 돌리며 약대접을 가리킨다. 병사 한명이 약대접을 들고 일어나자 정말로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아버린 아이는 울지 않고 자례를 노려보기만 한다. 아이의 말대로 원귀가 되어 저주할것처럼. “아니. 그게 아니라 공증좀 서주실수 있으신지...” “공증?” “예.” 자례는 다쓴 종이를 들어 스스로 다시 한번 읽어본후에 차의원에게 넘긴다. 그는 그것을 읽고는 놀라 외친다. “정말?!” “예.” “그래도 괜찮을까?! 우가문은 그리 만만하지가 않는데?!” “어차피 저는 황궁안에서 생활하니까요.” 차의원이 어찌할줄 모르겠다는 고민에 빠지자 자례는 아직까지 자신을 노려보는 소야에게 말한다. “내가 널 거두겠다.” “뭐?” “내 종이 되는 것이다. 우씨의 가주는 내가 아니라 널 양자로 받아들일수는 없다. 하지만 내 시종으로 들어온다면 네 가주는 내가 되니 여기서 저 약을 먹을 필요는 없게된다.” “...흥! 그까짓 일로 내가 널 용서할줄 알아!” “용서하지 않아도 좋아.” 여전히 무심한 자례는 고개를 끄덕인다. “나 역시 내 형을 해한 자가 있다면 그를 ....” 말을 흐리지만 그 뒷말이 짐작간 차의원은 아까보다 더 경악스러운 모습이 되어 자례의 손을 끌고 말이 안들릴 정도로 소야에게서 떨어진다. “제 정신인가! 저 아이의 형을 죽였다며! 실수라도 저놈은 자네가 죽였다 생각하니 자네를 원수로 생각할걸세. 그런데도 저 아이의 가주가 될텐가!” “두 형제를 다 죽일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내 말은, 거 참! 하지만 실수 인한 사고에 뱀을 품에 안고 다닐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소용부인과 같은 말을 하시는군요.” 빙긋 웃은 자례는 걱정말하는 듯 차의원을 안심시킨다. “저런 어린아이에게 당할정도로 저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습니다. 걱정마시고 공증을 해주시겠습니까?” “그럴순 없네! 멀쩡한 생사람이 독사를 품안에 넣는 꼴을 두 눈을 뜨고 어찌보나!” “...하나 정도는 살릴수 있길 바라는 것입니다.” “뭐?” 일순 그 무감각하던 눈동자에 조금쯤은 죄스러운 표정이 지어진다. “어릴적부터 전쟁터를 연연하며 수 많은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관리로 입적한 지금도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저 아이의 말대로 운명이란 것이 있고 윤회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위해서라도 지금 내 손으로 살릴수 있는 저아이를 구해보고 싶습니다.” “...정말?” “뭐, 제 운명이 워낙 죄스럽다고 나와 하나쯤은 좋은 일을 해서 훗날 염라대왕에게 양해를 구해볼생각인겁니다.” 장난인 듯 진담인 듯 웃는 자례를 도통 이해할수 없어 차의원은 고개를 갸웃하고 만다. 혼자 걸음을 돌린 차의원은 소야에게 다가간다. “너, 진실로 답해라. 저 사람이 널 거두어준다는 것은 너의 목숨의 은인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저 사람을 해할것이냐?!” “저 사람은 내게 하나뿐인 육친을 죽였단 말이에요! 용서할수 없어요! 너! 얄팍한 네 동정심으로 날 지금 죽이지 않는다면 두고두고 피눈물을 흘리게 해줄꺼다!” “...그래.” 소야에게 다가온 자례는 눈높이를 맞추려 그 앞에 쪼그려 앉는다. 너무 근접한 거리에 소야쪽이 놀라 흠칫 뒤로 물러난다. 자례는 소야의 헝클어진 머리를 손가락으로 대강 빗어내리나 아이는 고개를 흔들며 손을 거부한다. 그 모습에 자례는 작게 미소짓는다. “하지만 날 죽이는 것은 너 스스로 성장한 후에나 가능할것이다. 지금의 넌 힘으로나 머리로나 날 이길수 없으니까.” “흥! 스스로 뱀을 기르겠다는 거냐!” “...이미 기르고 있단다.” 낮게 말한 자례는 너무도 밝게 웃는다. 무표정보다 그 웃음이 더 공포스러워 다들 쭈빗쭈빗거린다. “그러니 날 잘 지켜야 할걸? 너 말고 다른 뱀에 물려 죽을지 몰라. 내 주위에는 독사들이 드글거리거든.” 157 검은 조복에 옥과 금꽃으로 장식된 허리띠를 짤랑거리며 저 먼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 을노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황성쪽은 완연한 봄이겠지만 이곳은 아직 간간히 눈이 내릴고 얼음이 얼정도의 추위가 남아있었다.가벼운 조복만으로는 추울만 한데 을노는 장막안으로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들어가십시오.” “...왜 나왔지?” 머리와 가슴에 붕대를 칭칭감은 부관이 인상을 찌푸리면서 천천히 걸어온다. 몹시 고통스러운 듯한 표정에 을노는 남쪽을 노려보던 것을 포기하고 부관에게 다가가 그를 부축한다. 부관은 부축에 몸을 맡기면서도 무척이나 죄스러워한다. “죄송합니다. 좋은 기회가 저 때문에...” “됐다. 더 이상 그것을 거론하지 말자. 이미 지나간 일을 되풀이 할 수는 없는것이니까.” “죄송합니다.” “그만 하라하지 않느냐.”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적인 을노는 차라리 잘됐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놈을 죽이는 것은 언제든지 할수 있는 일이지만 7년째 살아 날 모시는 너같은 부관은 두 번다시 구할수 없을테니까.” “죄송합니다.” “됐다니까!” 버럭 악을 쓴 을노는 부관을 휙 밀친다. 기우뚱하고 땅에 주저앉은 부관은 상처가 말할수 없이 쓰리다는 표정을 짓는다. 을노는 다시 부관은 부축하고는 그를 위로한다. “그만해라. 실수 한번 안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자네도 올해 액땜을 크게 했다고 생각한다면 잊을수 있을것이다.” “하지만...” “또 밀어버린다?” 을노의 날카로운 말에 부관은 입을 꽉 다물어버린다. 그것은 예상외의 것이였다. 마주치기만 하면 싸우느라 으르렁거렸던 두 맹수가 그렇게 꼬리내리고 그렇게 포기할줄은 아무도 몰랐다. 얼핏보아도 호각지세, 언제나 그렇듯 결판이 안나는 싸움이였다. 뒷일이 밀려있는 오걸매는 슬슬 짜증을 부리기 시작했고 을노는 잠복해 있던 궁수들이 활을 언제 쏘나 하고 기대감에 밀려 서로 충실한 내기는 되지 않고 있었다.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을 느낀것인지 전과 같은 맹열함이나 투기가 없어 뒤로 물러났다가 서로 견제하며 다시 붙는 시간때우기식 싸움을 눈치챈 부관이 자신이 맡고 있는 장수를 다른 이에게 넘기며 그들에게 달려와 활을 재었을때였다. 그 누구도 오걸매의 행동을 예측할수 없었다. 을노와 싸우는 도중에 오걸매는 들고 있던 유일한 무기인 창을 들어 부관을 향해 던저버린 것이였다. 을노와 단둘이 나와 싸울때는 절대로 창을 던지는 무모한 행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놀란 을노는 얼른 몸을 숙이며 뒤를 돌아보았고 부관이 뒤쪽에서 활을 재는 모습에 놀라 외쳤다. “엎드려라!” 하지만 활을 재는 동작에 몸을 쉽사리 뜰수가 없는 부관이 머뭇거리자 을노는 연결된 쌍검중 하나를 돌려 던져 부관의 가슴을 쳤고 가슴을 맞은 부관이 본능적으로 몸을 숙이는 덕에 창은 그 뒤로 날아가버렸다. 부관이 가슴을 잡고 그대로 쓰러지는 바람에 을노는 검을 회수하고도 오걸매를 노리기전에 부관에게 달려가야했다. 그 틈을 노려 오걸매는 재빠르게 멀리 떨어져 있던 말을 타고는 재빠르게 남쪽으로 도망갔던것이다. 창을 스치지도 않은 부관이 쓰러졌다는 것보다도 오걸매가 승부를 포기하고 도망갔다는 사실에 놀란 을노는 한동안 입을 벌리고 오걸매가 도망간 방향을 바라보기만 했다. 신음을 흘리는 부관이 따라잡지 않을꺼냐고 물을때에도 을노는 기가막히다는 표정만 짓고는 고개를 저었다. “미친 호랑이 도망가면 아무도 잡지 못한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기절해 버리는 부관을 안아들고 진영으로 오는 을노는 내내 자조하는 표정이였다. 의원이 달려와 부관을 보며 을노에게 상황을 듣고는 웃고말았다. 요행이 창에는 살아남았지만 기절한 이유는 을노가 던진 검이였는데 손잡이쪽으로 돌려 던졌다고는 하나 다급해 힘조절을 못했던 것인지 가슴뼈에 금이 가버렸다는 것이다. “보호가 과하셨습니다.” “이놈, 칼등에 맞고 뼈나가는 허약한 놈은 필요 없어.” “선인의 줄로 튕긴 칼등을 맞고도 매번 무사한 오걸매 놈이 이상한거지요. 하하” 투덜투덜대면서도 을노를 보고 장수들은 웃고 말았지만 부관의 상심은 컸다. 자기 때문에 이번 일을 망쳤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꽁한 표정으로 등을 돌리고 누워있는 폼이 애같았다. 을노 역시 이번일이 굉장히 좋은 기회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속으로 몹시 안타까워 하고 있었다. 장수는 눈을 감을때까지 놓친 사냥감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고 했다. 을노도 마찬가지였다. 부관은 다시 막사의 침대에 눕히고 그 옆에 앉아 등불을 당겨 지도를 살펴본다. 누운 부관이 힐끔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느끼지만 모르는 척 한다. “저기...” “콱!” 입도 열지 말라는 뜻으로 눈을 부라린 을노를 보고 부관은 뜨끔한 표정으로 이불속으로 들어간다. 혼자서 화원으로 돌아온 여관은 여전히 온화한 표정이였다. 완연히 따뜻해진 날씨에 눈을 흐리게 뜨고 햇살을 즐기다가 이제 곧 나비가 날아갈 때라 겨울내내 비워둔 빈 화단에 꽃씨를 뿌린다. 올해 이 꽃이 피는 것을 볼수 있을까. 싱긋 미소짓고는 마져 꽃씨를 다 뿌린 후에 점원들이 다가와 물을 뿌리는 것을 지켜본다. “주인님, 오늘 아침에 이걸 샀습니다.” 서넛의 젊은 여인들이 다가와 여관에게 한아름되는 배꽃을 보여준다. 그 단향에 여관은 아찔함을 느끼며 웃는다. “배꽃은 구하기 힘든데 이렇게 많이 구했나? 올해 나비들은 일찍 날수 있겠구나.” “연못가에 심어 놓을 생각이에요.” “내가 연못가에 가볼생각이니 이리 다오.” 한아름이 넘는 배꽃가지를 안고 화려한 정원을 가로지른다. 여인은 발걸음이 가벼워 꽃과 풀을 밟고 지나가도 그 꽃이 상하는 법이 드물다. 옷자락으로 환하게 핀 제비꽃을 지나쳐 긴 사각형의 연못으로 온 여관은 근처의 물기어린 흙틈에 가지를 꽃는다. 뿌리를 내리려는 것이 아닌 정원을 날아다니는 나비들이 앉아 쉬고 꿀을 먹을수 있게 하는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연못가가 하얀 배꽃으로 풍성하게 채워진다. 손에 묻어난 나무의 수액과 흙을 씻어내기 위해 꽃틈을 비집고 연못가에 앉아 손을 물속에 담근다. 가만히 손을 닦고 있다가 물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잠시 손을 멈춘다. 수면이 잠잠해지며 그 안에 자신을 물끄러미 보고 있는 한 여인의 모습을 감상한다. 흘러내린 몇가닥의 잔머리를 귀옆으로 넘기며 모습을 정리한다. 물안의 여인은 자신을 보며 싱긋 웃는다. 많은 시간이 지났네. 이젠 예전처럼 내 모습을 바라보며 수줍어 하던 모습이 생겨나지는 않아. 장식없이 하얀 수건으로 머리를 올리고 회색의 비단옷을 입고 앉은 여인의 모습은 이 화려한 봄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진주분을 바르고 잇꽃을 물어 입술을 붉게 물들인다. 옥주령, 금꽃과 순백의 비단끈으로 머리를 올리고 붉은 옥을 엮은 목걸이를 길게 늘인다. 오색으로 짠 주름치마를 입고 명주로 만든 피사를 어꺠에 걸고 강가로 나가 봄을 맞이한다. 하지만 눈앞의 여인은 무심하게 항상 같은 차가운 회색의 옷을 입은 여인일뿐이다. 어느틈엔가 눈가엔 주름이 생기고 표정은 중후해져 화려함은 자취를 감춘다. 손을 올려 귀밑의 머리를 조금빼어낸다. 귀 옆으로 슬쩍 내려 애교머리를 만들어 본다. 손가락으로 꼬아내린 머리는 포도덩굴처럼 우아하게 곡선을 이룬다. 고개를 갸웃하며 이리저리 모습을 비추어보던 여관은 살풋 웃고 만다. 이 나이에 무슨 짓을 하는거지. 부질없는 일이다. 머리가 무거워진다. 커다랗게 만개한 붉은 모란이 머리위에 올려진다. 고개를 올려 상대를 바라보기도 전에 어깨에 손을 올린 하류사는 연못속을 가리킨다. “연못속의 모란을 감상해보시지요.” “저런.” 서로 아무말 없이 만개한 모란을 바라본다. 살랑거리는 커다란 꽃잎이 하얀 수건이 늘어지고 검은 머리가 날린다. 연못속의 하류사는 한족의 복장으로 그 검은 눈매를 지긋하게 내리깔고 물속의 모란을 감상한다. 환하게 미소지은 그는 손가락을 수면위로 올려 모란을 친다. 물결이 일어나며 두 사람의 모습은 자취를 감춘다. “아름답군요. 실로 봄에 어울리는 꽃입니다.” “그렇군요.” 하류사를 따라 여관이 몸을 일으킨다. “돌아오셔서 기쁩니다.” “할일이 떠올랐거든요.” “들어가시지요.” 여관이 손으로 건물안으로 인도한다. 하류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먼저 걸음을 옮긴다. 여관이 손을 올려 머리위에 놓인 모란을 거두어들이려고 하자 그는 고개를 돌려 여관을 바라본다. “선물입니다.” “예? 하지만...” “가끔은 좋지 않습니까.” 하류사의 말에 여관이 올린 손으로 그 큰 꽃잎을 만지작거린다. 내릴까 말까 고민하는 표정이 보인다. 기대하는 눈빛을 감추며 몸을 돌린다. 여관은 머리 위의 꽃을 내려 두 손으로 안는다. 내리깐 눈은 웃고 만다. 158 죽인다. 죽이고 만다. 태진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린다. “죽여라.” 고개를 괴고 잠시 생각을 가다듬는다. “애초부터 병약한 놈이라 했으니 상처를 내지 말고 독살하는 편이 더 깨끗할것이다. 좌천중이라고는 하나 황제의 관적에 들어간 놈이니 시체를 손상시키면 일이 커지게 된다. 질식시켜서 죽여도 상관없겠지.” 앞에 앉은 시종이 말없이 고개를 숙인다. “같은 인물을 두 번이나 죽이러 가는것이다.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만만히 보지마라. 운이 따르는 놈인 것 같으니. 확실히 죽은 것을 확인해야 한다.” 시종이 물러나자 태진은 어깨가 뻐근함을 느낀다. 정말로 운이 좋은 놈이다. 운을 만드는 놈일지도 모르지만 어찌되었건 수월하게 죽어줄 놈은 아니야. 모조리 불태운 성에서 살아남았는데다가 이미 한번 자객을 보냈는데 불구하고 살아있는 놈이다. 아니, 자객을 보내기도 전에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것이 분명하겠지. 하지만 이번엔 좌천중이니 청사밖으로 나갈수는 없을것이다. “누구있는가?” 곧 다른 시종이 달려와 고개를 숙이자 태진은 외출준비를 하라 시킨다. “장인어른을 만나겠다.” 태진은 그 날카로운 눈을 휘며 웃는다. 자객을 보내는 것이 다가 아니다. 기억하고 있다. 전에 보낸 자객을 누군가 막아내었다는 것을. 그것은 분명 자신을 감시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다. 이번에도 허무하게 그리 당할 수는 없는 일이였다. 영웅서엔 그들이 정안족이라 했었다. 그렇다면 그가 정안족이라 친다면 그를 도와준 인물도 정안족이라는 생각이였다. 자객은 그가 자신들을 보낸 사람을 알고 있다고 했다. 허세일지도 몰랐지만 맞서 싸웠다는 점에서 마음에 걸린다. 피하려고 허세를 한것이라면 싸울 필요는 없었을것이다. 결국 그 누군가는 궁안의 사람이란 말이 된다. “궁안. 그것도 정안인. 게다가 왕자들의 궁을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이란 말인가...” 가장 쉽고 유력한 인물은 궁안을 자유롭게 오고가는 시종들이다. 궁녀일수도 환관일수도, 아니라면 자신이 기르는 시종일지는 모르는 일이였다. 하지만 그가 자객을 상대로 태연하게 싸워내고 사라졌다는 점에서 그가 장군이거나, 적어도 차를 나르는 시종은 아닐것이라 여기는 것이다. 아무리 속이려고 해도 그정도의 검을 사용하는 자라면 몸의 단련이 차를 나르는 시종들과는 다를 수밖에 없으니. 너무 어두워서 얼굴을 확인할수 없었다는 말이 복장터지지만 이정도까지 구별해낼수 있으니 나머지는 기다리면 된다. 궁안을 마음대로 돌아다닐수 있는 병사들은 수 없이 많다. 하지만 자신의 자객을 막기 위해서 성안을 나가는 자는 단한명에 불과할것이다. 출궁 기록을 확인하고 싶지만 왕자인 신분으로는 꿈도 못꾸는 일이다. 하지만 장인인 공부시랑 양씨정도라면 가능한 일이다. 그에게 도움을 받는다면 출궁기록을 보는 일은 단순한 일이다. 이번 일이 성공할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실제로 꼭 죽여야 한다는 마음은 있었지만 이번엔 차라리 실패해도 괜찮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저 하늘 높이서 자신을 노리는 매도 두려운 법이지만 자신의 바로 앞에서 으르렁거리는 호랑이가 더 무서운 법이다. 일단 궁안의 첩자를 잡아야한다. 아니라면 그 놈을 죽여도 일이 완전히 은폐되지는 못해. 잡으려면 두 마리다 잡아서 한꺼번에 없애버려야한다. 관을 쓴 태진은 옷자락을 털고 방을 나선다. 복도를 나오자 봄바람을 쐬고 있었던 것인지 부인인 양씨와 마주친다. 고개를 숙이는 양씨의 배는 이제 숨기지 않는지 전보다 확연하게 불러있다. 죄를 진 것 같은 표정의 부인을 보는 태진은 짜증스러운 표정이다. “방안에 들어가라.” “예.” “지금 양공을 만나러 가는 길인데 하고 싶은말이 있느냐?” “예? 아뇨, 없습니다.” “그럼 들어가서 앉아있거라. 나와걷다 넘어지지 말고.” 차가운 목소리에도 자신을 걱정하는 말에 양씨는 고마워하는 눈치다. 태진은 시종들을 거느리고 궁을 나선다. 물론 작은 마찰은 있었지만 무난하게 시종으로 소야를 데리고 들어온 방은 나갔을때 마찬가지로 너무나 엉망이였다. 들고온 공문들을 어리저워진 책상위의 물건을 밀어내고 올려놓는 자례를 보고는 더 황망한 표정을 짓는다. “정말로 당신방이야?” “그래.” “당신 생긴것과는 달리 굉장히 더럽게 노는구나.” “그래.” “설마 이거 나보고 치우라는 소리 하지 않겠지?” “그럼 누가 치우지?”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자례는 한말과는 달리 재빠르게 방안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시장의 쓰레기 더미와 같던 작은 방안이 주인의 모습대로 정리가 된다. 이십여분 정도 되자 멀뚱히 서있기 미안할정돌 방안은 깨끗해 진다. 손을 탁탁 털어낸 자례는 앞으로 쏠린 잔머리를 뒤로 휙 넘기며 팔짱을 낀다. “앞으로는 네가 해야한다.” “...싫어.” “그럼 하지마라.” 너무도 쉽게 응해버리는 자례에게 소야는 적응하기 힘들다는 표정을 짓는다. “화 안내?” “왜 화를 내야하지? 하기 싫다고 말한 것은 너잖니. 그러니 안하면 돼. 어차피 방을 어질러 놓지 않아. 어제밤에 할일이 있어서 헤집어 놓긴 했지만.” “그럼 청소 안해도 되는건가?” “그래.” 자례는 깨끗하게 정리된 책상에 앉아 공문을 펼친다. 꼼꼼히 읽어보고 작은 붓으로 틀린 글자를 지우거나 새로 종이를 덧댄다. 그 작업이 침묵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라 방안은 사각거리는 종이소리만 울린다. 멀뚱히 서 있는 것도 한시간 정도고 곧 짜증을 부린다. 작은 소리로 투덜투덜대는 소야를 돌아본 자례는 단호하게 말한다. “조용히해라.” “하지만 할일이 없잖아” “지금 배우고 있잖아.” “뭘? 할일없이 빈둥거리는거?” “서서 기다리는 거.” “뭐야? 나 그런거 싫어!” “이건 안돼. 하루 종일 서서 기다릴줄 알아야해. 특히나 내 시종이라면 더하다.” “싫어!” 징징거리는 소야를 보며 한숨을 쉰 자례는 몸을 돌려 소야를 본다. 지저분한 모습을 보고 밖으로 잠시 나갔다가 들어와 한 병사를 가리킨다. “이 사람을 따라 나갔다가 저녁에 돌아오렴.” “내가 왜?” “그건...” 자례가 차근하게 설명해주려고 하는데 뚱한 표정의 병사는 덥썩 소야를 허리에 끼더니 달랑 달랑 거리며 나간다. 도망쳐 버릴거라고 꽥괙 소리지르는 소야에게 손을 흔들어준 자례는 피식 웃고는 방안으로 들어온다. 그렇게 형을 죽인 원수에 이제부터 자신의 주인이라 말한 작자의 방에서 나와 간곳은 전에도 본적이 있는 그 늙은이였다. 차의원은 마당에서 풀을 뽑다가 그들을 보고 고개를 들고는 일어나 손을 턴다. 허리에 낀 소야를 내려논 병사는 역시 뚱한 표정으로 소야를 감시한다. 몇 번이나 도망치려고 도주하지만 그때마다 얼마 도망치지도 못하고 빠르게 달려온 병사에게 다시 끌려가기를 반복한다. 결국 목욕을 하고 차의원이 새로 내어주는 옷을 입었을땐 이미 달이 떠있었다. 툭하면 달려 도망가는 소야를 겨우 의자에 앉게 한 차의원은 힘들다는 표정으로 말한다. “들어라. 우공자가 무슨 이유로 널 거두었는지 나로써는 짐작도 안가지만 어쨌던 우 공자는 너의 은인이 된것이다.” “형의 원수야!” “그래. 물론 형의원수... 가 아니라 그건 심장병이였다며! 정말로 심장이 안좋은 사람은 어느날 갑자기 죽는다. 그건 공자의 잘못이 아냐. 운나쁜 것은 공자다. 괜히 어거지로 너에게 원수 취급이나 받고.” “나에게 설교할 생각하지 마시지 늙은이!” “알았어. 알았어.” 못당하겠다라는 표정을 한 차의원은 두 손을 들고 약간 물러난다. “공자에게는 병이 있다. 심한 병이야. 그래서 매일 약을 먹어야 하는데 그 시중을 네가 들어야하지 않겠니? 그래서 내게 온것이다.” “독을 타서 죽여버릴테다” “못된 놈!” 철썩 하는 소리가 나며 차의원이 힘껏 그 뺨을 때린다. 갑작스럽게 당한 매질에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바로 대꾸한다. “정말이야! 약을 먹는다면 내가 독약을 넣을테다! 당신이 우리 할아버지를 죽인 것 처럼!” “이...상종을 못할 더러운 천민같으니라구!” 크게 분노한 차의원은 근처를 돌아보다 손에 잡히는 지팡이를 들어 소야를 마구 때렸다. 많이 아플텐데 꼼짝도 하지 않고 매를 다 맞으면서도 욕설을 내뱉는 소야에게 먼저 지친 것은 차의원이였다. “쓰래기속에서 살아온 것들이라 생각마저 더럽구나!” “당신은 얼마나 깨끗하게 살아왔기에 사람을 죽이는 약을 만드는건데!” “이놈이 그래도!” 안에서 매질하는 소리와 비명소리에 소야를 데리고 온 병사는 문에 기대 하늘을 올려본다. 원래 집으로 돌아가고도 남을 시간이였지만 부탁받은 꼬마를 차의원은 도통 내어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어차피 오늘은 바쁜일이 없으니 더 기다려보기로 하고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는다. 성벽위에서 달리기를 하던 자휼의 모습이 사라졌다고 생각한 것이 얼마 안되어서 맑은 악기 소리에 고개를 들어 창가로 나간다. 문을 열고 이리저리 살펴보니 먼 망루에 붉은 옷의 외팔이 장수가 보인다. 인상을 찌푸리고 집중해서 망루를 살펴보니 마고와 함께 망루에서 무엇을 보고 있는 모양이다. 그 조그만 뒷모습이 잘 어울려 자신도 모르게 짜증이 난다. 귓가에 맴도는 소리는 자세히 들어보니 새 소리같기도 하고 악기 소리 같기도 해 신경을 곧두세운다. 한참동안 그 소리에 집중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그 소리에 빠져 즐기는 것을 보고 놀란다. 고개를 흔들며 소리에서 벗어난 친첸은 황당한 표정을 짓는다. 마치 최면에 빠지는 듯한 소리였다. 듣지 않으려 등을 돌리는데 그것마져 쉽지 않다. 의자에 앉았다가 다시 창가로 가서 눈을 감고 소리를 듣는다. 얼마가지 않아 울음소리가 끝난다. 꿈을 꾸고 있는 듯한 몽환적인 기분에 눈을 깜박이다가 그 소리의 정체를 알고는 깜짝놀란다. 수해인가. 그날 저녁 여전히 마고와 식사를 하는 친첸은 망설이다 마고에게 묻는다. “오늘 낮에 망루에서 노래를 부른게 수해냐?” “전하도 들으셨습니까?” 예외라는 듯이 마고가 얼른 고개를 들고 되묻는다. 그 기분좋은 악기의 소리가 사람의 목소리라는 것을 알고는 실망 반, 호기심 반에 친첸이 다시 관심을 가진다. “소리가 커서 여기까지 들리더군.” “아름다운 목소리가 아닙니까.” “...” “사내의 목소리가 저렇게 청아한지 몰랐습니다. 듣고 있으면 마치 악기나 새소리를 듣는 것 같아 술에 취한것보다 더 심하게 취기를 느끼지요.” “꽤나 마음에 들어버렸군?‘ 친첸의 말에 아차하는 심정으로 마고가 입을 다물어버린다. 실제로 말을 하거나 소리를 치는 수해의 목소리가 크고 폭이 넓다는 것은 알았지만 노래를 부른다는 것을 안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잠이 안와 성벽에서서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을때 저녁 산책을 나왔다는 수해와 마주쳤고 장난스럽게 자장가를 불러주겠다는 말에 처음 들은 노래에 들은 것이 처음이였다. 사람 목소리가 이렇게 아름다울수가 있구나. 가슴을 저리게 하는 그 어디에서도 구할수 없는 악기에 홀려버린것인지 그 이후부터 마고는 수해의 노래를 자주 청하게 되었고 가능하다면 수해는 노래를 불러주었다. 마고는 잘 몰랐지만 병사들과 정안족들 사이에선 수해의 노래가 꽤나 유명한 모양이였다. 그날도 망루에서서 바람을 쐬던 도중 마고의 부탁에 수해가 노래를 불러주었다. 노래소리를 듣고 모인 병사들의 소란 때문에 친첸에게까지 들린 모양이다. 슬쩍 친첸의 눈치를 살핀다. 또 한마디 말이 나올듯하지만 친첸은 눈을 내리깔고 생각에 잠길뿐이다. “내일 연회를.” “예?” “몇일후에 경마축제를 위해 기주로 가야하지 않는가. 떠나기 전에 연회를 열자.” “예.” “수해장군의 노래를 준비해라.” “예?” “한번 들어보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식사를 계속하는 그의 모습에 마고는 걱정해야하는 것인지 좋아해야 하는 것인지 몰라 복잡한 표정을 숨기려 고개를 숙인다. 그 모습에 친첸이 웃는다. “너 변했어.” “무슨?” “예전의 너라면 나에게 되묻는 일은 없었다. 알겠습니다라는 그 정떨어지는 대답이 다였지.” “...” “넌 그를 몹시 아끼는구나. 짜증날정도로 말이야. 그러지 말아라.” “알겠습니다.” “정말이야.” 탁소리 나게 저분을 놓은 친첸은 마고의 턱을 들어 눈동자를 노려본다. “나에겐 너가 필요하지 수해란 외팔이가 필요한게 아니니까.” 159 2왕자가 부르는 말에 레이첸은 떨어지지 않는 다리를 재촉한다. 봄이와서 그런지 나른함이 극에 달아 움직이기조차 귀찮았다. 천천히 걸어 2왕자의 궁안으로 들어가자 입구에서 활쏘는 내기를 하고 있는 2왕자를 발견할수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응, 왔니?” 과녁을 겨루며 건성으로 말한 체이첸은 잠시후에 화살을 놓는다. 시위를 떠난 활은 얄밉게 정 중앙에 박힌다. 체이첸이 레이첸에게 활을 건낸다. “너도 낄래?” “내기가 뭔데요?” “...아직 안정했다.” “그럼 끼죠.” 레이첸은 활을 받아 팽팽하게 시위를 늘린다. 신중하게 과녁을 겨우고 시위를 놓는다. 하지만 역시 정중앙에서 벗어난다. 전에 태진과 했을때처럼 신중히 해도 과녁의 중간을 통과하지 못한다. “이상하네.” “뭐. 그럴때도 있는거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체이첸이 활을 받아 다시 정중앙을 맞추어 보인다. 시종에게 활을 넘기면서 체이첸은 웃는다. “내가 이겼지?‘ “저와 하는 내기였습니까?” “뭐. 선율과 하고 있었는데 잠시 올라갔다 온다더니만 안내려오는군.” “아아.” “정안족은 활을 잘쏜다고 들었는데 선율은 별로인가봐. 하긴 선비이니 활쏘기를 취미로 하지 않았을테지.” 그말에 뜨끔한 레이첸은 말을 돌린다. “아 그러고 보니 얼마 후면 형님의 생일이 아니오? 뭐 가지고 싶은 것이 있으며 말해보시오.” “정말?” 환하게 웃는 체이첸은 레이첸의 어깨에 손을 올린다. “실은 말야 받고 싶은게 있었다.” 항상 바르고 곧아 존경하는 형님은 오늘도 눈부시게 정갈하다. 깔끔한 하얀 깃의 체이첸은 붉은 머리의 친동생을 보며 고민한다. “너 우관이 쓴 필본을 가지고 있다며?” “예?” “나 그 필본 가지고 싶은데.” “예?” 뜬금없는 말에 레이첸은 당혹해한다. 마침 악운이 나와 레이첸을 보고 인사를 한다. 인사를 받은 레이첸은 몹시 거북한 표정이다. 안지을려고 하나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난감해할 때 체이첸이 묻는다. “왜 안되니?” “예? 아아, 그거 실은 화선에게 주었는데.” “화선? 네 부인말이냐?” “애초에 우관이 화선에게 만들어 주었기 때문에.” “그래? 뭐, 그럼 어쩔수 없지. 사내대장부가 여인에게 준 선물을 돌려달라 할 수는 없는일이니까.” 빙긋 웃은 체이첸은 레이첸과 악운을 데리고 방안으로 들어간다. 시종들이 차를 내온다. 레이첸이 차를 받고는 또다른 말을 기다리나 체이첸은 아무말 없이 차만 마신다. 종내 기다리지 못한 레이첸이 짜증을 낸다. “정말로 날 부른 이유는 무엇이오?” “응? 아아, 실은 경마축제에 대한 것을 물으려고 했었다.” “아아, 곧 있을 황제의 말놀이 말입니까?” “그래. 너 출전하느냐?” “출전이라니 거창합니다만. 일단 나가기는 합니다. 왜요? 설마 형님도?” “그래. 나도 그 말놀이 한번 구경하려고 한다.” 그말에 레이첸은 찻잔을 내려놓을 정도로 놀란다. 철들기 전에는 황제를 따라 경마축제애 따라가던 2왕자였지만 철이 든 이후로는 단한번도 따라가지 않았었다. 짐승의 싸움으로 서로의 힘을 겨루는 것은 유치한 일이다라고 말한 체이첸에게 황제가 분노한 일이 있을정도였다. 그런데 이번에 경마축제를 구경한다니. “이거 오래 살았더니 별일이 다있군요 형님.”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느냐. 전에 내가 말을 고르는 것도 보았지 않니. 새삼스럽긴.” “하긴...분명 그랬지.” 그날이 분명 우관을 만난날이였다. 우관을 떠올리자 또다시 짜증이 밀려온다. 신경질적으로 차를 다시 마시는 레이첸을 보고 체이첸이 고개를 갸웃한다. “고민이 있느냐?” “아닙니다.” “걱정말로 내게 말해보렴.” “정말로 아무것도 아닙니다.” 힐끗 악운의 눈치를 살피며 얼른 부정하나 예리한 체이첸의 눈을 벗어나긴 힘들다. 체이첸은 당황하는 동생을 자세히 들여다 본다. “나쁜짓을 하려는 아이가 하기전에 들킨 꼴이구나?” “형님도. 내가 무슨 애요. 이젠 그만 하시오. 이젠 나도...” 아차. 또. “이젠 나도 아버지가 된다였지?” 싱긋 웃은 체이첸이 레이첸이 못다한 말을 이어준다. “그러고보니 황제에게 슬슬 고할때가 아니더냐. 듣기로는 계주성이 반납되었다고 하던데 그쪽으로 갈생각인거냐?” “아니...그게...아직은 잘 모르겠소.” 푸욱 한숨을 쉰 레이첸은 이렇다 저렇다 말도 하지 못하는 자신의 입장을 탓한다. 하지만 온화한 미소를 지은 자신의 형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천천히 생각하렴. 산달이 멀었으니 천천히 생각해도 될것이다.” “...내가 계주로 들어가면 어떻겠소?” 뜬금없이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었던 레이첸이 레이첸에게 묻는다. 잠깐 눈을 크게 뜬 체이첸은 바로 평소대로 돌아간다. 그는 악운을 잠시 바라보고는 생각에 잠긴다. “선율은 서공의 말을 어떻게 생각하지?” “제가 감히 이런 자리에서 어떤 말을 꺼낼수 있겠습니까.” 일단 악운은 말하라고 했으니 딴소리 하지 말라는 듯 으름을 떨었다. “서공께서 계주로 가신다는 것은 경락공과 돈독한 우애를 다지시는데 도움이 될 듯 하군요.” “역시 그런가. 나도 아우가 가까운 계주로 부임되어 종종 내 말벗이 되어주면 그 이상 좋을 것이 없겠지만.” 부드러운 말이지만 체이첸의 말에는 이미 자신이 황자의 자리에 올라갈것이 분명하다는 으름장이 들어있었다. 말에 다른 뜻이 들어있다는 것을 모를정도의 바보가 아닌 체이첸은 그말에 곰곰이 생각한다. “이 아우가 형님과 원수지지 않으려면 역시 계주가 가장 좋겠군요.” “만약 아우가 그쪽으로 간다면 내가 황제에게 말씀을 올리지.” “괜찮습니다. 때가 된다면 자연히 그렇게 되는것이겠지요. 그리고 아직 아버지가 된다는 것이 좀...실감은 안나서 말입니다. 하하” 별것 아니라는 듯 레이첸은 자연스래 말을 돌려내지만 그말속에 숨겨진 열손가락에 꼽히는 이중적 의미를 발견해 내는 체이첸이다. 체이첸도 황제의 자리를 생각하고 있군. 빙그레 웃은 체이첸은 시종에게서 술을 내오라 시킨다. 술이란 소리에 반색하는 레이첸을 보고 따끔한 일침을 놓는다. “선물로 주는거야. 여기서 안먹을것이네.” “저런. 하긴 형님의 궁은 워낙 삭막해서 술마실 분위기는 아니오.” 독한 화주를 들고 싱글거리며 자신의 궁으로 건너간 레이첸의 모습이 사라지자 체이첸은 실소하며 악운을 돌아본다.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을 말해주지 않겠나?” “서공에게 예리한 누군가 붙어 있는 모양이군요.”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첫째, 말을 하는 중간 중간 끊어 생각하는 것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 아닌 타인에게서 들은 기억을 되살리는 자의 버릇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계주성의 이야기를 비칠때 그것은 물어본 것이 아닌 확답을 받기 위한 질문이였기 때문이지요.” “그래. 맞다. 그러면 저놈에게 누가 붙어 있는 것일까?” “그런 질문은 사양합니다.” “어째서?” “군자는 남을 농락하지 않는 법입니다. 이미 경락공은 어떤 자가 붙어있는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 “그러나 서공 스스로는 황자에 대한 의욕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말에 체이첸이 의외라는 뜻의 표정을 짓는다. “어째서?” “그것은...말로는 못해드리겠습니다만...어쨌던 계주성 추천에 경락공을 말린 이유는 공이 생각하시는 그런 것이 아닌, 황제에게 괜히 자신의 위치를 부각시키지 말라는 권유였던 것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래?” 악운의 말에 체이첸은 심각하게 다시 한번 생각한다. 실제로 천거를 거절했을때 레이첸이 의미것이 아직 태자로 내정된 것이 아니니 모든 것은 풀러보아야 안다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던 체이첸에게는 악운의 말이 굉장히 생소하게 들렸다. 몇 번 곱씹어 보던 체이첸은 악운의 말이 완전히 거짓인 것은 아닌거라 느껴 허탈하게 웃는다. “정말로 저 놈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걸까?” “...” 악운은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두 왕자를 비웃을 수밖에 없었다. 겉이 다르건 속이 다르건 들개는 들개일뿐인데 좋은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으르렁거리는 꼴이 볼만하다. 고개를 숙이고 허탈해 하는 악운을 보고 체이첸이 걱정한다. “어디 몸이 안좋은 것은 아닌가? 표정이 안좋군.” “아닙니다.” “역시 걱정되나? 좌천당했다고는 하나 내가 손을 써서 얼마후에는 올라올것이 분명하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예.” 전혀 예상못한 체이첸의 지적에 수긍해버린다. 그 모습이 안쓰러운것이였는지 체이첸은 곰곰이 생각끝에 놀라운 제안을 한다. “성을 나가 그를 만나고 오겠나?‘ “예?!” “그렇게 놀랄 필요는 없지 않은가. 좌천이라 생각하면 안좋은거로 생각하지만 우관같은 말단의 임시 좌천은 오히려 시간이 남는 휴가라 생각해도 좋을 것이네. 가서 내가 맡기는 필본하나 건내주며 상황을 보고오면 자네도 좀 좋아지지 않을까?” “가겠습니다!” 성을 나갈수 있다는 생각에 눈이 빨게진 악운이 바로 대답한다. 힘이 넘치는 그의 표정에 체이첸은 두 사람의 우애가 정말 깊다는 생각을 하며 영웅과 천재의 좋은 인연에 호감을 보낸다. 하지만 뜻밖의 성을 나갈 기회를 받은 악운은 흥분되는 두 주먹을 꽉 쥐고는 두근거려할뿐이다. “오늘 나가도 되겠습니까?!” “저런, 진작에 한번 보내줄것을. 하지만 성을 나가려면 하루정도 준비해야하네. 준비 되는대로 나가서 당일날 돌아오게. 좌천중이라 자네를 만나기는 까다로울것이야. 소개장을 써주지.” 뭐든 좋다는 표정으로 악운이 체이첸의 뒤를 따라 출궁준비를 하기 위해 방으로 건너간다. . . (여기서 레이첸과 체이첸이 마구 바뀌었지요;;;) 160 “그 아이는 이미 내 재산에 속합니다. 제것을 저렇게 흠집을 내놓으시다니요.” “내게 감사할날이 올걸세. 저런 버릇없는 시종을 들이다니, 상전을 모실생각인가.” “상전을 들이던 시종을 들이던, 그것은 그 아이의 가주가 된 나의 몫입니다.” “공증을 선 것은 나이니, 차후 일어날 일에 대한 결과를 받게되는 것은 당연한일이네.” “제가 그리 순순히 저 아이를 풀어 놓을 것 같습니까.” “그렇게 잘한다면 시종에게서 저런 말이 나오게 한단말인가!” 결국 차의원이 역정을 내며 벌떡 일어난다. 냉냉히 앞을 바라보고 있는 자례는 뒤를 돌아 사라지려는 차의원의 옷자락을 잡아 멈춘다. “왜?” “사람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경외감을 가져야 한다는 분이 지금 등을 돌리시면 어쩝니까?” 자례의 말대로 앞에는 여전히 독을 먹어 입에 거품을 물고 바들바들떠는 반시체가 놓여있다. 결국 다음날 아침에야 차의원과 함께 돌아온 소야는 엉망이였다. 깜짝 놀라 소야를 본 자례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차의원을 바라보았다. 버릇이 없어 교육시켰다라는 말에 소야의 성격이나 말투로보아 충분히 그럴만 하다고 여겼지만 등쪽에 나있는 화상자국에 이것은 아니다라고 생각한 자례와 아침부터 팽팽한 신경전을 하고 있던 중이였다.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는 사람이라 꿍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다시 자리에 앉는다. 얼음장 같은 자례는 다음 사람의 가주를 확인하고 독살을 명한다. 살고 싶어 바둥대는 사람에게 약을 억지로 먹이는 모습을 지켜본다. “책임을 져주셔야지요.” “돈으로 사는 시종에게 매질을 한 책임을 감히 나에게 묻는것인가!” “적어도 치료를 해주셨다면 이렇진 않았을텐데요.” “나도 의원일세. 아이의 상처는 한달후면 모두 사라지고 생활에 불편이 전혀 없네.” “흉도 말입니까?” “흉을 없애는 방법도 있지. 살을 깊게 도려내면 되는 것이 아닌가. 왜? 내가 지금 아이에게 가서 해주길 바라나? 응?” “...어째서 제게 베푸셨던 아량을 그 아이에게 해주시지 못한겁니까.” 자례의 말에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차의원은 인상을 찌푸린다. “자네는 사람이지 않는가. 하지만 그 아이는 달라. 돈으로 가축을 사고 팔 듯이 그 아이도 마찬가지란 말일세. 사람이 말을 듣지 않는다면 타일러 보겠지만 기르는 개에게 말로 하는 것을 보았는가?” “두팔다리모두 있고 이목구비가 달린 아이에게 가축이라니요.” “공자야 말로 이상하이. 잔정을 두지 말게. 나는 공자처럼 하늘의 이치를 살피지는 못하나 관상을 보지. 공자는 눈이 밝고 그 목소리가 청아하여 심성이 정대한 것이 분명하지만 걸음끝이 너무 흐리고 미간에 주름이 잡히니 시름이 수중에서 떠나지 못하는 불우영웅의 상이네. 소야놈 전형적인 반골이야. 턱이 뾰족하고 이마가 나왔지 않나!” “...”“게다가 자네는...!” 갑자기 아차하며 차의원이 황급히 입을 다물어버린다. 갑자기 멈춘 대화에 자례가 차의원을 바라본다. “저는?”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튼 그만두지. 내가 심했다 하면 다시 그 아이를 나에게 보내지 말게.” “...알겠습니다. 그만하지요.” 오늘도 열구의 시체가 실려 나간다. 자례가 가주를 정리하고 차의원은 기분이 몹시 상한 듯 먼저 모습을 감춘다. 자레는 한숨을 쉬고는 자리에 앉아 잠시 생각을 정리한다. 얼마나 앉아 있었는지 병사 하나가 다가와 청사 안으로 들어가라는 권유를 한다. 몸을 일으켜 청사안의 방으로 들어간다. 방안 한구석에는 엉망이된 소야가 쭈구리고 앉아있었다. 들고온 공문을 책상에 올려놓고 등을 돌린다. 여전히 조용한 방에는 사락거리는 종이소리만 울린다. 그야말로 바람처럼 달려 먼저 도착한 낭성이였다. 황성에 비하면 말할 것도 없는 촌이였다. 마을사람들은 스님모습의 후소를 보고 깊게 고개숙여 불심을 나타낸다. 정말 별볼일 없는 작은 성이였지만 성에 가까운 태수의 집안에 온천이 있다는 사실로 근방의 부유객들이 자주 찾아오는 듯 주민들의 생활은 안정되어보였다. 마유는 유번님을 호위하러 갔으니 적어도 삼사일의 여유는 있었다. 어제 날라온 제비에게서 마류장군과 예사가 기주성에 잘 도착했다는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파낭에서 기주까지 아무리 빨리 달려도 일주일은 잡아야 한다. “시간은 없는데 할일은 많군.” 걸음을 서둔 후소는 바로 태수의 성문을 두드린다. 중후한 스님의 방문에 낭성의 태수는 그를 맞이한다. 태수는 불심을 믿는 자였기 때문이였다. 애초에 예사가 이쪽으로 올 예정이였지만 그가 불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말에 자신이 이쪽으로 돌려진것이다. 태수의 융성한 대접에 후소는 이틀간 그와 열반의 이야기를 나누며 친해질수 있었다. 어느정도 친해지자 후소는 넌지시 그에게 미끼를 던진다. “그런데 듣자하니 계주성의 태수에게 큰일이 일어났었다고 들었는데 말입니다.” “아아. 들으셨습니까.” 파낭의 태수는 한숨을 푸욱쉬고는 넉두리를 한다. 이미 죽을 나이가 다된 그에게는 이런 말을 나눌수 있는 후소가 있어 다행이라는 표정이다. “어떤 미친놈이 태수의 아들을 모두 죽이고 사라졌다합니다. 그 충격으로 태수는 계주성을 황궁에 반납한 상태입니다. 게다가 식음을 전폐하고 있구요.” “잘 알고 계시는군요.” “실은 계주성의 태수와 저는 큰 아버지와 조카의 사이입니다. 놈이 계주성을 내놓는다 할때 가업을 이어 계주를 다스리던 우리 가문의 누가 될 것은 분명했지만 자식들을 모조리 잃은 그놈에게 차마 그럴수가 없었습니다. 성의 반납이 끝나면 조카놈은 이곳으로와서 조용히 살겠다고 하더군요.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태수님께서는 이미 후계자가 계시지 않습니까. 장성한 아드님이 살아계시는데 계주의 태수가 오면 둘 사이에 마찰이 있지 않을까요.” 정곡을 찔렸다는 듯 파낭태수는 고개를 끄덕인다. “실은 안그래도 그것 때문에 성안이 뒤숭숭합니다. 조카놈이 온다면 아늘놈의 위치도 그렇고 그렇다고 해서 조카놈을 못본척한다는 것은 인륜에 어긋나는 일이고.” “흐음. 그렇다면 차라리 계주성을 계속 지키시고 있는 것이 두 성을 위해 좋은 일이련만.” “저도 그렇게 말했습니다만...너무 큰 충격을 받았는지 지금 계주는 실주(失主:주인이 없음)상태입니다. 그렇게 성이 무너지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다른 이에게 넘겨 존속을 위하는 것이 좋다고 하더군요.” “혼자 힘들다면 든든한 조언자를 구하면 될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도성이란 함부로 조언자를 구할만한 위치가 아닙니다. 도성이 흔들리게 되면 주성과 소성들이 모두 무너지게 되니...” “하지만 인척이라면 괜찮을 듯 합니다. 혹시 압니까. 계주는 오랫동안 태수가문의 사람들이 살아왔던 곳입니다. 어디선가 큰 인물이 잠자고 있을지.” “...그럴까요.” 화색이 돈 파낭태수는 기쁜 얼굴로 의자를 당겨 앉는다. “실은 선친에게 이어온 성을 남에게 주지 않는 방법이 있다면 그 이상 좋은 것이 어디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좋은 조언자를 찾아보시지요. 사람을 풀면 될것이 아닐까요. 혹시 증표라도 있습니까? 그렇다면 제게 한번 보여주시지요. 오랜 시간동안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본 만물속에 태수께서 찾고 계시는 인물이 있을지 누가 압니까.” “정말 그렇게 해주시겠습니까?” 그말에 태수는 후소를 내실로 인도한다. 좁고 밀폐된 방안으로 들어간 태수는 여려개의 빗장을 풀고 밀봉한 상자를 소중하게 내려놓는다. 후소가 그것에 대해 궁금해 하자 태수는 엄숙한 표정으로 상자의 끊을 푼다. 그 안에는 상아로 만든 완환(腕環:팔찌)이 들어있었다. “이것은 저의 가문을 상징하는 물건입니다. 저의 선대가 이것을 호문, 산규, 거선의 세 형제에게 각각 한개씩 나누어 주셨고 그것들은 우리 가문의 삼대파로 나뉘어 계승되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고 남은 하나는 지금 계주태수가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 남은 하나가?” “그렇습니다. 바로 남은 하나가 산규님으로 시작된 저희 가문의 또다른 줄기이지요. 하지만 그들은 이미 진나라의 분서갱유때 모두 잡혀 들어갔다 전해집니다.” “문서갱유라함은 남은 후손들이 선비들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예. 오랜 시간동안 남은 하나의 완환을 찾고 있었지만... 아직까지 아무런 소식도 없었습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제가 그것을 들어 보아도 되겠습니까?‘ “예.” 후소는 그것을 들어 자세히 살펴본다. 오랜 시간에 마모되긴 했지만 조잡하다 할수 있을정도로 짜여진 문양과 팔찌 안쪽의 호문이라는 글이 세겨져 있다. 이런 것은 가짜를 만들려면 시간이 꽤나 걸리겠는데. 후소는 태수에게 그것을 넘기고는 고개를 갸웃한다. 생각하는 표정에 태수의 표정이 다급해진다. “혹시 알고 계십니까? 본 기억이 있으신지요?‘ “실은...그게 완환이라고는단정짓지 못하겠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실은 저 멀리 기주에 속한 곡양이란 촌을 지나오면서 이와 비슷한 것을 보긴 하였습니다.” “정말입니까?!” “잠시만. 하지만 이런 완환이 아닌 반고리 모양의 목걸이였습니다. 하지만 모습은 매우 똑같군요.” “반고리의 목걸이? 정말로 이와 똑같단 말입니까? 호...혹시 완환이 손상되어 그렇게 한 것은 아닐까요?” 후소는 고개를 흔든다. “거야 저는 모르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이런 크기의 상아팔찌라면 지금도 구하기 힘든 물건이니 혹시 모르지요.” “그 자를 지금 만나보고 싶습니다!” “진정하십시오. 여기서 곡양까지는 멉니다. 태수님은 노쇠하셨으니 먼 여행을 무리입니다. 하지만 그분도 노쇠한 나이라 이곳까지 모시기 힘들군요.” “아아, 그분도 저와 비슷한 연배이십니까?” “60중반의 분이십니다. 키가 훤칠하고 모습이 매우 단정하여 비범한 인물임을 한눈에 알아보았습니다. 지금은 곡양의 촌에서 동자한명을 데리고 살고 계시답니다.” “그분이 분명합니다!” 태수는 흥분된 목소리로 외치고 후소의 손을 덥썩 잡아 일으킨다. “부디 그분을 모셔오는데 도움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꼭 그리 해주신다면 보답을 하겠습니다.” “진성하십시오. 태수님. 적어도 완환정도는 확인해 보셔야 할것이 아닙니까?” 하지만 후소의 확인하라는 말은 늙은 태수를 흥분하게 만들뿐이다. 태수는 곧장 계수태수에게 서신을 띄운다며 부산을 떤다. 후소는 태수가 쓰는 편지의 내용을 읽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곡양의 그분께 제가 서신을 띄워이리로 오실수 있는지 여쭙지요.” “그렇게 해주신다면 더할나위 없겠지요!” 후소도 곡양의 유견을 향해 정중한 장문의 서신을 적었다. 내용의 핵심은 이리로 와달라는 단순한 것이였지만 이리저리 생각하며 늙은이의 취향에 맞게 부분부분을 고친후 사람에게 시켜 띄워보낸다. 그리고 그날 저녁 후소는 정말로 중요한 내용을 적은 작은 종이를 두장 만들어 각각의 제비에게 맡겨 곡양과 기주로 동시에 날아가게 했다. 푸드득거리는 날갯짓 소리에 삐쩍 마른 여행객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본다. 허공을 날아다니며 볏짚과 흙을 물어와 집을 짓고 있는 제비부부를 본다. 그러고 보니 봄이 왔으니 이젠 이곳에도 제비들이 날아다닐때구나. 부산스런 그들의 움직임에 미소를 짓는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아닙니다.” 문을 열고 늙은 스님이 나와 백라에게 고개를 숙여보인다. “제가 무엇을 도와드릴일이라도?” “들으신대로 이곳에 화제가 나기전 몸을 의탁한 정안의 여인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그 말에 스님은 눈을 감고 곰곰이 생각에 잠긴다. 화재로 인해 이곳의 절역시 불탔고 그때 많은 스님들이 이 절을 떠나갔다. 재건되고 돌아온 자는 이 늙은 중뿐이였다. 곰곰이 생각하던 그는 기억이 났다는 듯 눈을 뜬다. “분명 그런 여인은 있었습니다. 이름이...이름이...무슨 새이름 같았는데...” “낙노, 낙노가 아니였습니까?!” “그렇군요. 낙노(樂鷺:노래하는 백로)였습니다. 늙은 중이 이런 말을 하긴 웃기지만 정말로아름다운 여인이였습니다. 그 검은 머리에 분홍뺨이 절색이라 소문나 젊은이들이 절간을 드나들기를 제집처럼 했었다지요 허허허.” “저, 그럼 어디로 나갔는지 혹시...” 그말에 스님은 웃는다. “알고 있습니다. 기억이 안날 리가 없지요. 황제에게 시집간 여인을 어찌 잊겠습니까.” “...예?” 귀가를 울리고 가는 바람소리에 화들짝 놀란다. 화려한 봄의 시간이 멈추어 버린다. -그럼 이제와서 너 혼자 행복해보겠다는 거냐? 그래, 낙노를 찾아서 예사앞에서 실실 웃어봐라 미친놈아. 그 앤 죽었어! 161 마기는 갑옷을 벗고 실소한다. 금속성의 검을 탁자에 올려놓고 차를 마신후 시종들을 불러 옷을 갈아입는다.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은 마기는 긴 좌탁에 몸을 기댔대며 시종들을 모두 내친다. 품안의 서신을 꺼내들고 가늘게 뜬 눈으로 읽는다. 단 한글자이다. 조(俎) 바로 등을 당겨 종이를 태워버린다. 조라는 것은 부엌에서 쓰는 도마의 의미로 있지만 제단에 희생물을 올려 놓는 것을 의미한다. 즉 지금 자신의 상황이 위태롭다는 말이다. 이미 공부시랑 양씨가 궁안의 출입계를 보고 싶다고 자신을 찾아왔었기 때문에 그 한글자에서 모든 것을 파악한다. 14왕자가 눈앞의 호랑이를 잡아내려고 하는군. 아삭하고 탁자위에 놓인 과자를 씹는다. 순순히 잡혀줄수는 없지. 오해로 악운을 구하러 가게되었을때는 이미 휴근의 상태였다. 즉 궁의 출입계를 아무리 뒤적여도 자신의 이름은 적혀 있지 않다. 게다가 정규적인 절기 휴가였기 때문에 휴근계를 뒤적여도 수 많은 관리들이 하루를 등지고 오고 가고 한 기록만이 남아있을뿐이다. 바보같은 왕자. 차를 마셔 입을 헹군다. 태진이 갑작스럽게 눈앞의 호랑이를 잡으려는 까닭은 무엇일까. 가장 쉬운 것이 두 번째 암살을 계획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전에 암살을 막으며 누가 보냈는지 알고 있다는 암시를 했으니 이번에도 내가 막으러 갈것임을 지래 짐작하는것이다. 아니라면 뭔가 다급한 일이 생겨 궁안의 일을정리하게 되었다거나. 14왕자의 다급한 일이 뭐지? 14왕자의 장인인 공부시랑이 움직였다는 사실만으로도 답이 나온다. 부인 양씨가 임신을 했군. 즉 얼마 안가 궁을 나가야 한다는 말이다. 나가면서 궁안을 정리한다는 것은 위해가 될 과거를 지운다는 뜻도 되지만 문제를 사전에 방지한다는 뜻도 된다. 그러고 보니 4왕자도 아이를 가졌다는데... 순서가 뒤바뀐건가. 피식 웃음이 나온다. 결국 4왕자를 혼자두고 가기 걱정되어서 급한 불부터 끄고 성을 나간다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암살의 대상은 누구지? 신중하게 생각을 고른다. 하지만 정확히 떨어지는 대상은 없다. 물론 이유를 들자면 태진이 죽이고 싶지 않는 인물이 어디 있겠느냐만은 성을 나가는 와중에 암살이란 큰 짐을 늘릴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만큼 중요한 인물이 누구란 말인가. 이것만은 선인이라 불리우며 추앙받았던 자신으로써도 도저히 모르겠다. 고개를 갸웃하며 누군가를 집어내려고 하지만 딱 떨어지는 인물은 없다. 설마 자례는 아니겠지. 태진은 자례가 입관한사실을 모르고 있으니까. 게다가 이미 실패한 인물에게 또 다시...설마 바보같은 4왕자가...? 벌떡 몸을 일으킨다. 나는 태진에게 안보이는 호랑이이다. 하지만 자례또한 눈앞의 호랑이다. 게다가 좌천중이니 황제의 관리를 암살하려면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을것이다. 게다가 내가 태진이라면 자례를 암살하면서 또다시 그를 구하기 위해 몸을 들어내는 날 잡으려고 할것이다. “...영리한 놈.”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르게 중얼거린 마기는 작은 종이를 꺼내어 벽(霹:벼락)이라는 글을 쓴후 자신의 궁 처마에 잠든 제비를 불러 그것을 날려보낸다. 늦으면 안돼. 멀어저 가는 제비를 바라보는 마기의 가슴이 불안으로 두근거린다. 머리를 울리는 낮은 신음소리에 자례는 다시 돌아눕는다. 잠이 오질 않는다. 결국 일어나 포를 걸치고 문을 연다. 문앞에 자신을 감시하던 병사한명이 졸다 놀라 일어난다. “잠시 아랫방에 가보고 싶소.” “아아, 시동 때문에 그러시는군요.” 병사는 혼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등을 들어 길을 안내한다. 청사의 외채인 이곳은 아랫방이라고 했는데 말그대로 청사의 아래쪽에 있는대다가 시동들이나 관기들이 머물고 있는 곳이였다. 소야의 방을 찾는 것은 쉬웠다. 어떻게 소란을 피웠던지 아랫방쪽을 보고 있던 병사가 인상을 찌푸리며 구석의 작은 방을 가리켜 보였던 것이다. 문을 살짝 열고 들어간다. 침대도 없고 덩그러니 나무바닥에 요를 깔고 자는 곳이다. 원래를 서넛이 함께 자는 곳이 분명한데 소야의 성격때문인지 다쳐서 그런지 혼자 구석에 붙어 자고 있는 모습이 무척이나 서글프게 보인다. 다가가 모습을 확인해보려고 하지만 몸을 있는대로 웅크린 아이는 얼굴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 모습이 자신이 토라졌을때와 비슷해 웃고만다. 신음소리가 자꾸만 귀에 들려 잠을 잘수가 없다. 씁쓸한 표정을 지은 자례는 땀에 젓은 아이의 이마를 옷자락으로 훔쳐낸다. 매질에 열이 올라버린 몸이 몹시 깡말라 있어 안쓰럽다. 축축한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끙끙대는 아이는 아파하면서 꿈을 헤메는지 자꾸만 몸을 떤다. 걱정되고 속상하고 자신이 무능해보여 답답하다. 분명 내 형도 이랬을까. 떨어지지 못하는 열로 끙끙대는 자신을 바라보는 그 딱딱한 표정이, 열과 고통에 지쳐 초점이 흐리게 된 눈으로 보았던 형의 그 굳은 표정은 날 탓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무능을 탓하는 표정이였을까. 손을 들어 스스로 자신의 얼굴을 만진다. 딱딱하게 굳어 있는 얼굴이 느껴진다. 내가 지금 이 아이가 걱정되어 속상한 것처럼 형도 그랬을까. 그렇다면 그 수많은 밤을 내 신음소리에 잠못이루면서 이렇게 자신의 무능을 탓해야 했던 것일까. 인척의 관계도 아닌 이런 아이에게 느끼는 이 걱정이 하나 남은 혈육을 보는 형의 마음에 비할수 있는건지. 결국 나는 형을 괴롭히기만 했던 건가. 왜 형은 이 못난 아우를 내치지 않고 안아들고 재워준걸까. 그 깊은 목소리로 밤새 노래를 불러가며 자신을 재웠던 것일까. 언제까지나 도움이 안되는 어리광쟁이에 철부지 아우일뿐인데. 아우이기 때문인가요. 이제 하나남은 혈육의 아쉬움인걸까요. 아이의 목뒤로 손을 넣어 안아올린다. 14살의 나이치고는 몸이 작다. 못먹고 거리에서 구르며 커왔기에 그랬을 것이다. 앉은 체로 품에 안고 다독인다. 이것역시 하나의 인연. 어찌보면 네 형이 내 앞에서 죽은 것은 너와 날 잇는 필연이였을지 모른다. 그것이 악연이라도 쉽게 보낼수 없는 것이 더 이상의 인연을 바라기 힘든 나의 바보같은 짓일지도 모른다. 분명 그것이 선연이 아닌 악연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인간의 운명이란 어찌 이리 장난과 같아 왜 하필 너와 이런 인연으로 만나게 되었는지 분통 터지는 일이 아닐수 없더구나. 곱씹소 곱씹어 보아도 이리 악연일수는 없더라. 왜 하필 네가 내 아우이며 내가 네 형인지 너는 생각해 본적이 있느냐. “...” -그러나 하늘이 그렇게 정해주었다면 한낱 인간인 나로서는 어찌할 수 있겠느냐. 내 스스로가 그 운명을 감당하는 수밖에. “...그래. 하늘이 그렇게 정해주었다면 인간인 나로서는 따를 수밖에 없는 거야.” 형이 날 감당한것처럼 나도 널 감당하는 것이다. 너가 느끼는 상실의 크기를 이해하기 때문에 받아드린 것이다. 언젠가 나역시 받을 상실의 아픔을 잊기 위해 널 거두어 들인 것이다. 눈물이 나올것만 같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잊을수가 없다. 다시 만난다면 제가 그 뒷말을 해주실겁니까? 그래서 만나야 하는 겁니까? 하지만 그러지 마십시오. 소심한 마음에 저 멀리서 그 뒷모습을 보고 도망치는 일이 없게, 제게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주세요. 스스로 감당하신다는 운명의 불만을 제게 토로하지 말아주세요. 제게 내린 천형도 이 짧은 시간의 삶도 기쁘게 받아들일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 운명의 쓴 웃음을 제게 지어주지 마세요. 당신께서 자신에게 지워진 운명을 부정하신다면 어찌 나의 쓴 운명을 받아들일수 있겠습니까. 다시 만나면 웃어주세요. 그냥 미소지어주세요. 아무말도 하지 않고 그대로 저를 바라보고 웃어주세요. 제가 다가가 그 손을 잡고 너무 힘들었다고 한마디 투정부리면 나약한 제 자신을 꾸짓어 주세요. 결국 수많은 시간이 흘러도 당신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세요. 언젠가 제가 죽어도 당신안의 내가 악연이 아닌 인연으로 존재할수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세요. 제발 날 잊지 말아요. 악연으로 지우지 말아요. 결국 내 모든 것이 지워지고 당신만 홀로 남아 밤을 지세우게 되신다면 흐릿한 인연으로 기억해주세요. 잊지 말아요 갑작스럽게 노래를 멈춘 자휼은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뒤에 앉아있던 마고가 무슨 이유인가하고 눈을 떠 자휼을 본다. 친첸도 눈을 뜨고 음을 멈춘 악기를 바라본다. 자휼은 이해할수 없다는 얼굴로 마고를 바라보고는 천천히 눈동자를 내리깔며 고개를 돌린다. “왜그러지?” “...아닙니다.” 하지만 자휼은 단상에서 일어나 아래로 내려간다. 더 이상 노래하고 싶지 않다는 듯 굳어진 얼굴표정이 매우 단호하고 침중해서 아무도 말리지 않는다. 가수의 갑작스런 중단에 연회의 자리가 굳어진다. 친첸은 자휼에게 다시 노래를 시킬까생각했지만 곧 포기한다. 하얗게 질린 자휼의 표정은 죽다 살아난 사람과 같았다. “난 몰랐군. 수해장군이 이렇게 미성이라는 것을 말이야.” 좌중을 부드럽게 누른 친첸은 분위기를 풀어낸다. “수해장군에게 창출(唱?: 노래의 물길)이란 호를 내리겠다.” “...감사합니다.” 뻣뻣한 얼굴로 일단 고개를 숙이지만 그 머릿속엔 다른 생각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이 보여 그다지 만족스럽진 않다. 연회가 파하고 천천히 관리와 장수들이 각자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자 홀은 텅 빈다. 화난 표정으로 자신의 방으로 달려가듯 재촉걸음을 하던 자휼의 등을 마고가 낚아채듯 돌린다. “왜 그러십니까?” “아무것도 아니야!” “얼굴색이 창백합니다.” 다시 등을 돌리려는 수해의 등을 마고는 다시 돌려잡는다. “왜 그러는건데요? 말을 해야알지요. 그런 표정을 하고서는 그리 달려가면 저는 어쩌라는 말입니까?” “이 손 놓아!” 인상을 쓰며 자신을 바라보는 마고가 보인다. 그 미간의 주름에, 속내 보이지 않는 눈동자에 아찔하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이 모조리 환청으로 울린다. “싫습니다! 그렇다면 표정을 바꾸던지요!” -싫습니다! 무슨 소리 하시는 겁니까! “수해는 내게 소중한 친구입니다. 당신이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방관할 수는 없어요! -하나남은 혈육이 죽음으로 향해 가는 것을 어찌 보고만 있으라 하십니까? “나는 당신의 친구가 아닌가요?!” -그러기전에 당신의 아우입니다! 그 험한 얼굴에 오만가지 인상을 쓴 자휼은 한손으로 마고의 목털미를 잡고 벽으로 밀친다. 그 검은 눈에 얼마나 큰 분노를 담고 있는지 그야말로 짐승을 보는 듯하다. 낮게 으르렁거리던 자휼은 마고를 노려본다. 목을 조이는 손에 힘이 들어가 고통스러워 팔을 때려 힘을주나 어느새 힘줄이 불거져 나올정도로 단련된 자휼의 손을 내치기엔 턱없이 무리다. “지긋지긋하다! 그놈의 혈육!” “예?” “차라리 끝장을 내어버리고 말것을! 잘려진 팔처럼 때어버릴 것을!” “무슨 소리 하는겁니까!” 턱을 쥔 손이 앞으로 당겨진다. 숨결이 느낄정도 다가선 그의 눈은 굉장히 투명하다. 그 노여움과 분노에도 맑은 심성을 보이려는 듯 너무도 깨끗해 마고는 부담을 느낀다. 마고의 당황한 표정에 뭔가 느꼈는지 손에 힘을 푼 그의 고개를 숙이고 중얼거린다. 이렇게 가까이 있는 자신도 들을수 없는 이야기를. “수해?” “...하지만 안되겠지. 절대로 안되겠지.” 입이 막히는 느낌에 어리둥절한다. 그것도 잠시이고 이것이 입맞춤이라는 것이 퍼득 머리를 스치자 놀라 수해의 머리를 때어내려한다.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자 무릎으로 배를 올려 차버린다. 잠시 움찔했던 수해는 얼른 고개를 때어내고 황급히 뒤로 물러난다. “이...미안하다!” “... 아주 오래도록 미안하셔야 할겁니다.” 입가를 훔치며 마고가 인상을 지푸린다. 굉장히 기분나쁘다는 표정이다. 자휼역시 자신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이해할수 없다는 표정에 마고는 그일을 접어두려고 한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다. 마고가 눈을 크게 뜨고 자휼이 고개를 돌린다. 복도 끝에 등을 든 친첸이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162 늙었지만 아직도 여전히 아름다움을 간직한 여인이 이해할수 없다는 듯 아들의 어깨를 잡고 달랜다. “이 밤중에 어딜 나간다고 그러는거니. 더군다나 지금 넌 근신중인데... 여기서 머물면 안되겠니?” “잠시만요. 너무 걱정하실 것 없어요 어머니. 잠깐 청사에 나갔다 오는거니까 얼마 걸리지도 않아요. 게다가 근신중에는 감시하는 병사도 없는데 뭘 걱정하시는건지.” “하지만 상대방은 좌천이니 감시하고 있지 않니. 너 역시 가서 괜히...” “호랑이를 얻으려면 그 굴안으로 뛰어들 무모함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주는 고개를 들고 어머니를 품에 안는다. 자신을 낳아준 여인의 불안함을 감싸려는 듯 꼬옥 힘을 주고는 떨어진다. “다녀올께요. 내일 점심쯤엔 돌아올수 있을겁니다.” “조심해라.” 자신의 아들이 집을 나서는 모습을 보는 어머니의 마음은 편치 않다. 차라리 못난 아이였다면 품안에 넣어 기르면 편했을것을. 어린 나이에 문자를 알고 대세를 읽으며 지내더니 아직 혼인도 안한 나이로 궁안에 들어가 위험한 일을 하고 있다. 세상 어떤 어미도 저런 자식이 있다면 편히 쉬지 못할것이다. 두손으로 작은 종이를 꾸낏꾸낏하게 만든다. 등잔에 던진후 창문을 단단히 잠궈버린다. 등을 돌려 시무룩한 얼굴로 벽에 기대 서 있는 소야에게 말한다. “소야, 식당에 가서 좁쌀을 얻어와.” “뭐? 그 노란거?” “그래. 조금만.” 투덜투덜거리면서도 소야는 식당으로 나간다. 방금전 부랴부랴 달려온 소용에게 받은 차잎선물에는 작은 종이가 들어있었다. 종이는 아주 작은 단 한글자만 적혀 있었다. 벽(霹) 암살이다. 보자마자 그 단어가 무슨 뜻인지 알아버리는 자신이 한스럽다. 두 손으로 꾸낏꾸낏거리며 그것을 없애버린다. 소야를 방에서 내보내고는 침대보를 들어내고 숨겨둔 검을 꺼낸다. 후소가 주고 간 검이였다. 실컷 자신을 놀리던 후소는 이제 일어나야 한다며 허리에 찬 검을 하나 빼주었다. 재미있게 해준 보답이라는 것이다. 괜찮다고 사양하는 자례에게 그것이 청사안에서 굴러다니는 검이라는 말로 끝까지 놀린 후소는 올때처럼 그렇게 소리없이 사라졌다. 허리 뒤편에 검을 찔려넣고 외포를 걸쳐 감춘다. 침상에 앉아 등뒤에 벽을 대고 책을 든다. 잠시후 소야가 퉁퉁거리며 볼이 부은 얼굴로 와 자례에게 좁쌀을 내민다. “여기. 뭐에 쓸꺼냐고 아저씨가 날 보고 뭐라하던데.” “그래.” 한줌의 좁쌀을 받아 문을 열고 복도에 뿌려버린다. 팅팅하는 미약한 소리와 함께 그것이 사라진다. 소야가 화난 목소리로 외친다. “무슨 짓이야! 내가 빌려왔으니 내가 그랬다고 생각할것아냐!” “나중에 치우면 되지.” “뭐야?!” “소야, 오늘은 여기까지. 피곤할텐데 가서 쉬렴.” “부르지 마!” “오늘 수고했다.” “몰라!” 문고리가 흔들리도록 거세게 문을 닫은 소야가 쿵쿵거리며 방을 나가버린다. 아직 해가지지 않았다. 서신이 언제 적혀진것인지는 모르지만 어쩌면 벌써 와서 날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디선가 방안의 불이 꺼지길 기다리는지도 모른다. 이번에도 태진이 보낸 자객일것이다. 그렇다면 이 서신은 마기장군이 보낸것이리라. 전에 악운을 자신으로 알고 실수 한적이 있던 태진이 다시 시도한다는 것은 분명 나의 존재에 대해 알아버렸기 때문일것이다. 반드시, 반드시 죽이려고 하겠군. 그러면 안되는데. 애초에 4왕자와 14왕자의 사이를 벌려 놓기만 하는 밀명이라 수월하게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였다. 14왕자에겐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키면 안되는 입장이였기에 4왕자에게 접근하기조차 어려운 상황이였다. 게다가 예상하지 못했던 2왕자의 집착에 더욱 모습을 들어낼수 없으니 아무런 손을 쓸수 없는 답답함, 속을 알수 없는 동기의 장난, 말단 관리의 잔업처리,밤이면 때쟁이 늙은이의 놀이 상대까지. 먼저 손을 내밀수 없다면 그쪽에서 손을 내밀어 주길 기다리는 수 밖에. 하지만 레이첸이 내민 손은 전혀 도움이 안되는 장난과 호기심, 자존심 장난 뿐, 결국 차선택은 부인인 화선을 통한 이간책이였다. 화선은 심성이 곧고 강직했지만 아직 어리고 여인의 순수함과 혈통의 자존심이 강해 손을 쓰기는 쉬운 편이였다. 적절히 친해지면 화선을 통해 14왕자를 모함해보려던 생각이 틀어진 것은 이 바보같은 2왕자가 이곳까지 찾아온것. 좌천중인 관리에게 왕자가 찾아왔다는 것은 수 많은 상상력을 만들어 낸다. 모략, 중상, 반역, 모의, 결국 소문은 커지고 커져 황성안으로 들어갈것이고 그러게 된다면 그야말로 자신은 끝장이였다. 모습을 들어내지 않겠다는 2왕자와의 약속이 가장 먼저 깨지고, 그는 4왕자를 불러 자신과 그가 무슨 사이인지 물어볼것이며, 그렇게 되면 곡양에서의 자신이 들어나 태생의 의심을 받을것이다. 결국 인척관계로 되어있는 마기 장군까지 의심을 받게되고 그 소문을 들은 태진은 자신을 알아차리고 정안인이라 소문을 내 자멸하게 만들것이고 소문의 진상을 확인하려는 황제에 의해 자신의 신분이 노출된다면 황궁안의 모든 관리들의 호적을 다시 확인할것이다. -혹시 궁안에 우리 말고 혈족들이 있습니까? -그러겠지. 결국 자신뿐만 아니라 황궁안에 있는 모든 혈족의 일을 망치게된다. 창문사이로 보이는 붉은 머리에 덜컥 겁이나고 앞으로의 일이 막막하여 그를 도적으로 몰아 청사안에서 내보내고 그 치기를 도발시켜 한대 맞고는 무뢰한 도적으로 소문을 무마시켰지만 황궁안으로 들어가면 기다리던 레이첸의 보복도 결심해야하는 터이다. 그런데 그의 보복이 14왕자에게 자신의 위치를 노출시키는 것이라니.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따라서 생겨나는 일에 자네의 능란한 대처가 필요하다. 자네가 생각했던 길로 인도 되지 않을수도 있다. “...왕씨” 손톱을 깨물며 생각에 잠기던 자례는 머리를 비우려 애쓴다. 왕씨의 말이 맞다. 일은 내가 생각했던 것만을 잘도 피해 진행되고 있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밖의 상황이 안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어떤식인지는 모르지만 이 모든 것이 왕씨에게 알려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후소를 시켜 자신을 경각시킨것이라. 그렇다면 다른 방법을 생각해 낼수밖에. 지긋하게 눈을 감는다. 지금 내가 이루어 논 것이 무엇이 있는가? 단 하나뿐이다. 2왕자의 신임뿐. 그렇다면 2왕자에게 기대 14왕자를 내쳐볼까. 14왕자에게 계속 암살의 위협을 받고 있다한다면 자신에게 집착을 가진 2왕자는 그를 죽이진 못해도 적어도 황궁에서 나가게 조치할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4왕자와 14왕자는 자연스래... -2왕자의 신임을 얻는다면 황궁의 생활이 모질지 않겠지. 자리가 잡히게 된다면 4왕자와 14왕자의 사이를 벌려놓는다. 이때 2왕자의 권력과 신임이 도움이 될것이다. 살얼음이 띄워진 물을 끼얹은 듯 등골이 오싹하고 식은땀이 난다. 떨리지 않게 붙잡은 손이 방정맞을 정도로 떨린다. 도대체 왕씨는 어디까지 내다보고 계시단말인가?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단 말인가? 내가 화선을 선택할 것을? 내가 좌천될 것을? 내가 암살당할 것을? 그렇다면 내가 성공할것인지 실패할것인지도 알고 있단말인가? 새삼스래 단 한번 만나뵈었던 지배자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 짙은 검은 눈매에서보았던 지배자만의 오만과 긍지를, 그 날카로움과 두려움없는 잔인함을, 진중함과 물러나는 법이 없는 냉정함을. -네게 내가 만든 미래를 보여주겠다. 결국은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그 큰 손이 매우 따뜻하다는 것이 떠올라 그 검은 눈매가 흐릿하게 지워진다. 어둠속에 떨어지는 한방울의 물방울처럼 그 울림이 퍼지나 곧 잠잠해져 지워지는 것이다. 청사로 온것까지는 좋았지만 예상외로 병사들은 강권했다. 관사를 만나길 청했지만 상소가 받아들여지지 않는이상 민간인의 신분으로는 관사도 만나기 힘들었다. 여러모로 애를 써보았지만 그들은 단호했다. “이런 이런. 보통은 이런거였군. 하지만 이렇게 관사를 만나기 힘들면 어떻게 주민들을 돌본다는 이야기지?” 병사의 째려봄을 멀리한체 일단 뒤로 물러난다. 근처의 식당으로 들어가 차를 마시면서 어떻게 청사로 들어가야 할지 고민한다. 이것 저것 이야기를 들어보니 우관은 정오가 되기 전에 청사의 밖에 있는 외관으로 가는 것 같다. 오늘은 여기서 기다리고 내일 정오에 잠시 만나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한무리의 일행이 청사로 다가와 잠시 대화를 나누더니 그대로 청사로 들어간다. 평복을 했지만 걷는 모습이나 중앙에선 사내를 호위하는 모습에서 황궁사람이라는게 들어난다. 관심을 가지고 자세히 들여다보지만 그들은 빠르게 사라진다. 역시 2왕자의 입김때문인지 별말없이 병사들을 통과해 청사로 들어갔다. 만나고 싶다고 하자 청사의 가장 윗머리로 보이는 노인이 고개를 숙이고 물러가려고 한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얼른 그를 만류한다. “잠깐. 내가 그의 방으로 들어가보고 싶은데.”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병사들이 이상하게 생각할텐데요.” “...할수 없지. 불러와라.” 곧 그가 사라지고 얼마 안되어 사박거리는 가벼운 발걸음이 들린다. 고개를 돌리고 문을 열자 예전보다 좀 어두워진듯한 익숙한 얼굴이 들어온다. 그 신경질적인 얼굴은 악운을 보고 무척이나 놀란표정으로 말한다. “어떻게 나왔습니까?” “다 방법이 있지.” 악운은 싱긋 웃으며 재빠르게 자례의 손을 잡아 탁자에 앉게한다.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선수친다. “내가 먼저 말하지. 2왕자는 네 생각보다 위험한 인물이다. 내가 볼때는 4왕자보다 더 심한 느낌이야. 어때 지금 나랑 이곳을 나갈래?” “나간다 함은...” “당연하잖아. 도망가는 거다!” 두 팔을 벌린 악운은 이해를 구하듯 어깨를 으쓱한다. “황궁에서, 주어진 속박에서 자유를 찾아 떠나는 거다.” “저는 떠날수가 없습...” “거짓말. 너는 다른 것을 찾기위해 난곡을 올라갔었다. 황성의 머릿수를 채우기 위해 존재할만한 인물이 아니야. 뭘 찾고 있었던것인지 모르지만 다시 찾고 싶지 않니? 나는 잃어버린 자유를 위해, 너는 너대로 꿈을 위해서 이곳을 나가는거다!” “...그렇군요.” 악운의 혈기 있는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맞는 말이다. 자신도 그러고 싶다. 하지만 때가 아니다. “하지만 저는 안됩니다.” “왜...!” “안된다면 안되요!” 탕하는 소리가 나며 자례가 주먹을 쥐어 탁자를 내리친다. 부들 부들 떠는 손이 마음을 표현한 듯 싶어 악운은 그 손을 노려본다. 묘하게 저 냉정한 아이가 흥분해 있다는 것을 알수 있을 정도로 몸을 떤다. 자신 스스로도 통제를 못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 아이는 손을 뻗어 악운에게 자신을 바라보지 말라는 듯 외면하고는 벽을 바라본다. “나는 안되요.” “...알았다.” “지금 도망치실 건가요?” “그래. 당연하지.” “...지금 도망친다면...” 손톱을 잘근잘근 물던 아이는 피식 웃고는 고개를 돌린다. 그 검은 눈동자에 익히 보던 그 도도함이 보여 안심한다. “도망가십쇼.” “그렇게 안말해도 가려고 한다.” “그전에 한가지만 해주시겠어요?” “뭘?” 하얀 손가락을 입가운데로 올린 자례는 싱긋 웃는다. “재미있는 놀이.” 163 화려한 비단의 옷을 입은 마류는 서신을 받고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예사를 부른다. 역시 한족복장의 예사가 들어온다. “낭성에서 소식이 전해왔습니까?” “그래. 상아로 만든 완환이라는군. 기주 태수와 약속이 언제 잡혀 있지?” “내일입니다.” “그럼 물건을 선보이는 것은 안되겠군. 일단 반만 떠보자. 자네는 지금 즉시 낭성으로 가서 물건을 받아와. 낭성쪽에 마유가 대기하고 있을거네.” “알겠습니다.” 예사가 막 나가려고 하자 마류가 충고한다. “시간이 없으니 마각을 타지 말고 멀쩡한 말을 타고 가야하네.” “알고 있습니다.” 싱긋 웃은 예사는 큰 몸을 빠르게 움직인다. 이상하네. 후소는 고개를 갸웃하며 차를 마시는 척을 하며 등뒤로 시선을 옮긴다. 누군가 있다. 방안에 있는 것은 분명 아니지만 누군가 험악한 일을 꾸미기 위해 이 성 전체를 두르고 있다. 마치 자신과 같은 날을 세운 비수와 같은것이다. 누군가 자객을 보냈다? 후소는 피식 웃고는 잔을 내려놓고 성벽위로 올라가 하늘을 바라보며 혹시나 모르는 서신을 기다린다. 반나절 정도 기다리자 역시 예상했던 제비가 허공을 돌며 내려앉을 곳을 찾는다. 파낭쪽으로는 처음이라 그런지 헤메는 제비에게 소매자락을 휘둘러 만리꽃의 향을 맡게 한다. 제비는 곧 후소에게 다가온다. 임(淋) “흐음. 역시.” 후소는 그것을 입에 넣고 씹다가 삼켜버린다. 다른 자가 보낸 자객이 성안에 있다. 두개의 나무(木)과 하나의 물(水), 나무 앞의 물은 형태 그대로 피를 가리켜 나무를 자객으로 만드는 것이다. 누가 보냈지? 역시 답은 바로 나온다. 14왕자다. 그 왕자가 이쪽으로도 자객을 보낸것이다. 정말 대단한 배짱의 사내다. 주인이 있어 못들어오는 집이니 그 주인을 없애겠다는 것인가. 후소는 웃음을 멈추지 못한다. 바보 왕자. 네가 안그래도 내가 죽일려고 한단 말이다. 괜한 고생하고 있어. “아니지... 그쪽에서 내 일을 대신 해준다고 생각할까.” 고개를 돌린 후소는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파낭태수를 보고 반색을 한다. “무슨 일이?” “계주태수에게서 답신이 왔습니다.” “그래요?‘ 몸을 일으킨 후소가 그 부드러운 얼굴로 웃는다. 태수는 후소를 가까이 앉히고는 서신을 읽어준다. 오랜기간 자신들의 땅이였던 이곳을 타인에게 주기보다는 또 다른 파의 인척이 있다면 차라리 그에게 계주를 넘기는 것을 찬성한다는것이였다. “태수도 그것을 꼭 확인해보고 싶다는군요.” “저도 서신을 보냈습니다. 이쪽으로 오고 있답니다.” “잘됐군요!” 굉장히 좋아하는 태수의 얼굴은 밝다. 후소는 그 밝은 표정에 죽음의 그림자를 본다. 그를 노리는 수 많은 눈동자가 등을 찔려온다. 늙은 태수는 전혀 모르는 지 후소에게 술을 마시자 권한다. “이렇게 좋은 일이 생겼으니 한잔 안할수 있겠습니까. 좋은 술을 마셔봅시다.” “그럴까요? 원래 중은 안되는거지만 약간이라면.” “후소님은 그런점이 너무 좋소! 하하하!” 두 사람은 외각의 정자에서 꽃향기를 맡으며 독한 곡주를 들이킨다. 밤을 새우며 술을 마시던 두사람은 얼핏 술에 많이 취한채로 서로의 방으로 들어간다. 후소도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침대위에 앉아 신경을 곤두세운다. 누군가 지붕을 타고 태수의 방쪽으로 가고 있다. 난간을 타고 창문을 열었다. 문을 지키던 동자가 방을 나간다. 방안으로 들어가 태수를 지켜보고 있다. 칼이 아니다. 질식시키려는 건가. 미묘한 흐름을 느끼고 있던 후소는 태수의 숨소리가 잦아 드는 것을 느낀다. 숨이 막혀 고통에 몸부림치던 늙은이의 숨이 멎는 것은 순식간이다. 지붕을 타고 그들이 흩어지는 것을 느낀다. 어느정도 그들이 지나치자 후소는 벌떡 일어나 태수의 방으로 뛰어들어간다. 방안의 모든 물건을 흩뜨러 트리면서 예의 그 밀방에 들어가 완환을 꺼내들고는 품안에 넣는다. 도적이라도 든 듯 요란히 방안을 어지럽힌 후소는 침대로 다가가 이제 굳어버리고 있는 태수의 몸을 바라본다. 사람은 다들 이렇게 죽는거지. 잠자다 죽은거는 행운이라오. 마지막 길에 고개를 숙인 후소는 방문을 열고 크게 외친다. “도둑이야!” 조용한 파낭이 발칵 뒤집힌다. 병사들이 태수의 방으로 뛰어오자 후소는 창문을 가리키며 외친다. “누군가 태수를 죽이고 문밖으로 빠져나갔다!” 장수들과 함께 후소는 성벽위로 뛰어나간다. 어둠속이지만 후소의 눈은 속일수 없어 바로 그들을 잡아낸다. 성벽위를 빠르게 뛰어가고 있는 자객들을 보고 후소가 소리를 질려 시선을 끈다. 한 장수가 성문을 닫으라 외치지만 자객들은 성문으로 오지 않았던 듯 성벽에 들어진 줄을 타고 성밖으로 빠져나간다. “쫓아갑시다! 태수의 원통함을 위해!” 누군가의 외침에 장군몇몇과 병사들이 말을 달려 사라지는 그들을 따라뛴다. 그속에 후소도 끼어 그들을 따라 말을 달리다가 슬밋 사라져 말의 방향을 낭성으로 돌린다. 바람처럼 말을 재촉하여 달리기를 한시간정도 이미 기다리고 있던 마유장군이 후소를 보고 뛰어온다. “물건은?” “여기.” 후소는 품안에서 상아팔찌를 꺼내든다. 말에서 내려 근처의 바위위에 그것을 놓고는 검으로 후려쳐 절반으로 쪼갠다. 마유가 그것을 품에 넣는다. “후소님은 파낭에 계속 계시면서 계주태수와 지내시랍니다.” “알겠네. 다른이가 대신해주어서 그래도 괜찮을 것 같아.” “역시 14왕자의 자객이 들어왔었군요.” “그래. 왕씨께서 알려주시던가?” “예. 왕씨께서는 14왕자의 자객에게 ‘두 번은 용서 없다’라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두번은 용서없다?” “황궁쪽으로 가려면 자객들은 이쪽 길을 사용할것이니 이곳에서 기다리시면 된다 하셨습니다! 전 이만.” 마유가 계주성쪽으로 뛰어사라지자 후소는 말을 데리고 근처의 나무위에 몸을 숨긴다. 한참을 기다리자 말을 달리는 자객들이 나타난다. 바람처럼 숲을 빠져나가려는 그들은 갑자기 등위로 날아오는 돌맹이에 말을 멈춘다. 주위를 휙휙 둘려 보지만 아무도 없다. 딱 소리가 나며 또다시 누군가 머리에 피를 흘리며 신음을 한다. “두번은 용서 없다.” 모두들 고개를 들어 소리가 나는 허공을 바라본다. 멈칫하는 사이 화살이 날아온다. 낭성에서 쫓아온 병사들이 따라온것이다. 숲속에서 난전을 벌이는 그들을 내려다보며 후소는 나무사이에 깊숙히 자신을 기댄다. 조용히 하늘을 바라보며 아래서 나는 피비린내를 잊어버리는 것이다. “뭐? 나보고 죽으라고?” 악운이 이해가지 않는다는 듯 되묻자 자례가 고개를 끄덕인다. “당신에게 걸린 모든 속박을 풀어주겠어요. 여기서 죽어요. 그리고 당신은 송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죽으면 송으로 어떻게 돌아가냐?” “여긴 시체가 넘처나는 곳이에요.” 그말에 악운과 자례는 서로를 빤히 바라본다. 그리고 서로의 의중을 파악한 듯 웃는다. 악운이 겉옷을 벗는다. “그럼 어떤부위로 할까?” “여기서 시체 보관하는데까지는 이십여분거리입니다. 안들키고 올수 있는 만큼 가져오세요.” “후후, 너 도적을 우습게 보지 마라. 잊은 것은 아니겠지? 내가 밤손님이라는거.” 어깨를 푼 악운은 피식웃는다. 방안을 둘러보고는 창문으로 다가선다. “이쪽으로 드나들어야겠군. 시체 창고가 어디지?” “왼편으로 나가 좁은 길로 돌다보면 나오는 문을 나가 세 번재 길을 돌아보면 회벽으로 만든 창고가 있을겁니다.” “그럼 다녀오겠다.” 미꾸라지처럼 미끈하게 창문을 빠져나간 악운은 지붕을 타는 건지 위로 올라간다. 악운이 나가자 자례는 악운이 벗어 놓은 옷을 탁자위에 올리고는 방을 대강 흩트린다. 조용한 밖의 정황을 살펴보고는 탁자에 앉아 악운을 기다린다. 다행히 2왕자의 서신이 효과가가 큰지 아무도 방안으로 접근하지 않는 듯하다. 얼마나 지났는지 누군가 지붕을 타는 소리에 일어나 창가로 다가간다. 악운인가 싶어 창문에 건 빗장을 푼다. 열린 창문으로 고개를 조금내민다. 쑥하고 부드러운 비단이 목을 스친다. “...엇!?” 아차하는 사이도 없이 팽팽하게 잡아당겨지는 비단이 목을 조른다. 숨이 막히면서 머리를 크게 맞은 것처럼 눈앞에 번쩍이는 잔영이 생긴다. 한손으로 목의 비단을 잡아당기고 다른 손으로 주위를 더듬는다. 아무거나. 아무거나 날카로운거. 흐릿해지는 눈으로 비단을 잡아당기는 위를 바라보니 역광으로 모습이 보이지 않는 시커먼 그림자가 자신을 내려다보며 팔에 힘을준다. 태진의 자객이구나. 하지만 아직 해도지지 않았는데. 순간 자객을 대비해 허리춤에 찔려둔 검이 떠오른다. 떨리는 손으로 검을 뽑아 목을 조르던 비단을 잘라버린다. 팽팽히 잡아당겨지고 있던것이라 칼의 미묘한 스침에 저절로 찢겨지고 만다. 잘려진 비단은 허공으로 올라가버리고 졸리던 목은 방안으로 내동댕이친다. 컥컥거리며 숨을 가다듬는다. 어두운 시야를 확보하려고 노력하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누군가 방안으로 들어온다. 휘청이면서도 일어나 자객을 피해 뒤로 물러나지만 호흡을 잃어버렸던 몸은 제멋대로 움직인다. 사람을 불러야해. 크게 외치려 숨을 들이쉬지만 민첩한쪽은 자객이라 목을 잡혀 탁자위로 밀려 쓰러진다. 목을 조르는 자객이 뭐라 중얼거리지만 들리지 않는다. 버티려고 애써보지만 몸이 뒤로 눕혀진 상태에서는 목이 졸리지 않아도 호흡이 턱에 닿기 마련이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자신의 귀를 울린다. 그 소리마져 점점 아늑해져 이것이 정말로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든다. 안되는데. 아직 죽으면 안되는데. 갑자기 목이 풀린다. 그대로 옆으로 돌려누워 숨을 몰아쉰다. 새까맣던 방안이 조금씩 그 색을 제대로 찾자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일으킨다. 악운이 자객의 목을 조이고 있다. 조금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목을 조이던 비단끈이 이번엔 자신의 목을 조이던 자의 목을 조인다. 악운의 눈썹이 위로 치켜올라가며 단호해지자 몇 번 경련을 일으키던 자객이 축 늘어진다. 늘어진 후에도 악운은 몇 번더 끈을 조이며 그가 죽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힘없이 손을 푼다. 퉁하고 마루바닥으로 얼굴을 가린 시체가 힘없이 떨어진다. 땀으로 얼룩진 악운은 숨을 몰아쉬며 자례는 본다. “너 내가 두 번 살려줬다. 그치?” “시체는?” “저기 있잖아. 이놈이 네 목을 조르기에 급해서 던저두었어. 하지만 이젠 시체가 너무 많은 것이 아닌가하군.” 정말로 구석에 시체 한구가 고스라니 구겨져 있다. 악운은 어깨를 으쓱이며 근처에 떨어진 검을 든다. 자례는 마른기침으로 호흡을 가다듬으며 악운에게 다가온다. “자르기 전에 옷을 먼저 갈아입혀야 합니다.” “좋아. 누가 대역을 하는거지? 이 자객? 아니면 저 난민?” “처형된 난민의 얼굴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어요. 죽은자가 살인을 했다면 믿지 않을테니 저쪽이 대역입니다.” “다행이군. 얼추 비슷한 놈으로 끌고 왔거든.” 악운은 나머지 옷을 벗고 난민의 옷을 벗겨 입는다. 난민의 시체에 악운의 옷을 입힌다. 악운이 검을 들어 난민의 목을 잘라낸다. 이미 죽었던 시체라 피가 거의 나오지 않아 그다지 번거롭지 않다. “서둘러요. 밖에 소리가 들렸을거에요.” “여기 검.” 악운이 검을 넘기고 자른 목을 종이에 싼다. 검을 받은 자례는 죽은 자객의 목과 팔에 상처를 내 피를 만들어 사방에 뿌린다. 악운이 머리를 풀어 얼굴을 가린다. 피투성이가 된 자례가 이마를 훔치자 길게 핏자국이 난다. 스스로도 피를 보려는 듯 검을 자신을 향하는 자례를 보고 악운이 그 손을 잡아 막는다. “됐어. 그만해도 충분해.” “우관은 검을 쓸줄 모르는 자입니다. 그런데 멀쩡하게 있으라구요?” “목을 졸렸잖아. 그걸로도 됐어. 의심하는 자는 없을꺼야.” “그건 내가 판단해요.” 밖에서 사람들의 소리가 들린다. 아까 자례와 자객이 몸싸움을 벌일때 난 소리가 사람들을 부른것같았다. 냉냉한 눈으로 두구의 시체를 바라보던 자례가 악운에게 작별을 고한다. “어서 가요. 이젠 악운이 자객이에요. 지금가지 않으면 잡혀요.” “...너...” 악운이 와락 자례를 끌어당겨 안는다. “무사해라 꼬맹이.” “악운도 무사히 돌아가십쇼.” 악운이 창문을 통해 재빨리 모습을 감추자 자례는 검을 돌려잡고 심호흡을 한다. 말이 쉬워자해지 실제로 그것을 하기엔 얼마나 많은 치기가 필요한가. 아이고 맙소사. 곧 썩을 몸에 별짓 다하네. 실소한 자례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계명에게서 입은 상처를 비켜가게 검을 긋는다. 챙캉하며 검이 떨어지고 몸이 부르르 떨린다. 옷이 축축해지는 것을 느끼며 힘들게 검을 발로 차 자객쪽으로 민다. 탁자위에 손을 기대 몸을 지탱하며 숨을 몰아쉰다. 너무 깊게 했나? 꽤나 아찔한데. 퉁하며 이번엔 자신의 몸이 쓰러지는 것을 느낀다. 흐릿해진 눈에 어질러진 방바닥을 구르는 구겨지고 피가 튀긴 장부가 보인다. 거기에 마고라는 이름이 적혀 있는것도. 젠장. 하필 이럴때... 흐릿해진 정신이 더 이상 아무런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어둠을 내리깐다. 164 여인의 섬세한 손이 단도와 정을 가지고 섬세하게 그것을 깍아낸다. 잘려진 양끝에 은으로 된 장식을 끼워넣고 반고리의 중심에 구멍을 뚫어 푸른 줄을 끼워넣어 노리개를 만든다. 그녀는 그것을 들어보고는 따뜻한 모래가 담긴 항아리에 그것을 넣어 두손으로 비비고 다시 턴다. “다 됐습니다.” 마유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두개의 노리개가 된 상아 팔찌를 받아 다시 말을 탄다. 여인은 아무일 없었다는 듯 기구들을 치우고 다시 솥에 밥을 올린다. 마유가 예사를 만날쯔음엔 여인은 다된 밥을 식탁에 올리는 것이다. 말을 달려온 예사는 황급히 마유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쪽까지 오는데 꽤 걸리는군. 계주에서 낭성은 꽤 멀어. 오래기다렸나?” “조금요. 파낭에서 낭성까지는 가까운데 말입니다.” “인사는 나중에 만나서 하지.” “아참, 제 형님은 잘계시지요?” 몸을 돌리려는 예사에게 마유가 묻자 그는 웃는다. “우리는 부유한 장사꾼역이라 말이야. 편하게 지내네. 걱정말아.” “그럼 나중에 뵙지요.” 예사는 다시 계주성으로 향해 마류에게 돌아가고 마유는 낭성으로 향해 유번에게 돌아간다. 자휼은 고개를 흔들며 자괴감에 빠져있다가 이건 아니란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문을 민다. 하지만 문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은 친첸과 마주치고 다시 뒤로 물러나 방안으로 들어간다. 친첸이 그런 자휼을 보고 웃으며 방안으로 들어온다. “여행준비는 잘되고 있나?” “...예.” “흐음. 수해, 아니 이제 창출이라 불러야하겠지. 기주는 좋은 곳이라네. 황제의 축제가 벌어질만한 안전한 곳이지. 너무 염려하지 않아도 괜찮아.” “알겠습니다.” “준비 다하면 내려오게.” 그 마음을 내가 모를줄 아느냐는 식의 웃음을 지은 친첸은 방문을 닫고 나온다. 부르르 떨리는 손을 부여잡으며 자휼은 분노를 다스린다. 어떻게 됐지? 마고는? 얼핏 들은바로는 그에게 맞았다는데 괜찮을까. 불안한 걸음으로 이리저리 배회한다. 저 왕자에 대해서 도무지 알수가 없다. 가끔은 정말로 예리한 눈동자를 보여 사람을 긴장시키다가도 어떤땐 어린아이보다 못한 고집과 치기를 부려 당황시키기도 한다. 감정의 상태를 종잡을수가 없어 대하기가 힘들다. 그런일이 있은후 엄청 화를 낼줄 알았던 친첸은 그저 어깨를 으쓱이고는 고개짓으로 마고를 불러 방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할줄 알고 긴장시키고있던 자휼을 한참 바라보던 친첸은 히쭉 웃었다. “기주에 먼저 가있어라.” “예?” “기주로 가 바로 경기에 임하면 말도 피곤할테니 기주에 먼저 가서 말을 길들이고 있으란 말이다.” “지금...말입니까?” “지금 당장해서 나와!”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지른 후 마고의 방으로 들어간다. 방문이 큰 소리를 내며 닫히는 것을 보고 자휼은 불길함을 느껴 그 문을 노려본다. 시종들에게 끌려 자신의 방으로 들어와 짐을 챙기는 손이 떨린다. 내가 미쳤지. 단단히 돌아버렸지. 아직도 자신이 마고에게 무슨짓을 한것인지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입을 맞추었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 쓸쓸함과 슬픔이 담긴 눈동자를 보자 스스로 끌려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 입을 맞추었다. 마고와. “젠장!” 입을 맞추었다. 내 아이와. 화풀이로 탁자를 치고 벽을 친다. 그것은 내 아이였다. 그 눈동자 안에 들어있는 내 아이의 환영에게 내 욕심을 낸것이다. 알고 있었다. 그것이 내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그것이 마고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랬던 거다. 내 아이라면 절대로 못하니까, 마고라서 안심하고 입을 맞춘거다. 이렇게 한심할 수가 있는가. 내가 사랑하는 아이에게도 못할짓이고, 날 믿고 있는 마고에게도 못할짓이고, 스스로에게도 못난 짓이다. 두 번 세 번 화풀이로 탁자를 친다. 마고에 대한 미안함이 하늘을 찌른다. 못난 놈. 못난 놈. 이상하게 불길했다. 가슴이 뛰고 몸에 열이 오르는 것이 불안했다. 그리고 분명히 들렸다. 내 아이의 목소리가, 간절하게. 그 낮고 들리지 않을 정도로 흐느끼는 소리로 등을 돌린 자신을 향해 말하는 내 아이의 목소리를. 괴로워요 형. 순간 내리깐 시선 뒤로 피흘리며 쓰러진 아이의 모습이 분명히 보였다. 그 초점을 잃은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소리없이 흐르는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누군가 자신의 목소리만을 훔쳐간 듯, 애초부터 벙어리인 듯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시간이 멈추고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고개를 돌려 뒤를 살폈다. 하지만 그곳에는 마고가 이상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볼뿐이였다. 환영인가? 착각인가? 아무리 헛것이라고는 하나 더 이상 노래를 부를 흥이 나지 않는다. 연회가 파하고 스스로 그곳을 걸어나온다. 하지만 뇌리를 떠나지 않는 그모습. 괴로워요 형. 지워져라. 지워져라. 그 아이는 괜찮아. 나는 알고 있다. 이것은 다 자신의 나약함이 만들어내는 환상이라 여기고 싶었다. 하지만 너무도 생생했던 그 목소리. 그 초점없는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 현실보다 뼈져리게 느껴져 부르르 몸을 떤다. 정말로 그런 일이 있다면 내 등을 보고 그런 말을 하게 만들지 않으리. 험한 몰꼴로 바닥에 눕게하지 않으리. 괴롭다 말하기전에 내 스스로 그 아이의 짐을 떠맡으리. 눈물을 흘리기전에 아이의 손을 잡아 자신의 품에 기대주리. 속타는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세상은 무심하게 흘러간다. 주는 벌떡 일어났다. 청사에서 병사들이 우루루 몰려 나온것이다. 무슨 일이지. 급하게 청사로 다가가 모여든 사람들의 말을 주어담는다. 어느정도 믿을수 있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자객이 들어 청사안의 사람이 죽은 모양이다. 누가 죽었는지는 사람마다 말이 달라 믿을수가 없다. 갑자기 청사의 문이 열리고 전에 보았던 궁안의 사람이 얼굴이 파랗게 질린체로 황궁쪽을 향해 뛰어간다. 설마? 불길함에 그를 따라가야 하는 것은 아닌지 고민하는데 누군가 병사의 말을 타고 청사로 달려온다. 모습을 보니 늙은 의원같다. 그는 허겁지겁 청사안으로 들어간다. 일반인들을 통제하는 병사들에게 밀려 뒤로 물러난 주는 눈을 가늘게 뜨고 청사를 노려본다. 무슨 일이 생긴거냐. 침착하게 머리를 정리하며 청사에서 떨어진 나무아래로 가 주저앉는다. 설마 우관이... 하지만 황성의 팔대 청사를 상대로 암살할만한 놈이라면... 두근 거리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그 차가운 머리를 굴린다. 혹시 예의 고서를 도난당해서 생긴 일인가. 우관이 스스로 말했었다. 몸조심하라고. 우릴 죽여 그것에 대한 흔적을 없앨수 있다 말이다. 만약 그렇다면 집안에서 근신중인 자신보다 좌천중인 우관을 먼저 죽이는 것이 쉬운 일이다. 그렇다면 정말로 우관이 죽어버린건가. “젠장!” 활를 벌컥 낸 주는 인상을 쓴다. 청사를 보며 좀더 신경쓰고 싶지만 우관에게 자객이 들었다 한다면 자신역시 위험했다. 일단은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애써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린 주는 문득 황궁안으로 달려간 병사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는 것을 다시 기억해 낸다. 그러고보니 청사에 이런 소동이 생겼으니 황궁사람이라면 바로 청사를 나가 황궁안으로 들어가 보호되는 것이 당연한것인데 병사 하나만 황궁으로 들어갔단 말이야. 우관이 암살당한 것이 아닌 아까 그 황궁에서 나온 사람이 암살당한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아까 황궁에서 나온 사람은 어째서 청사로 내려왔던 걸까. “흥. 일이 재미있게 되는데.” 어찌 되었건 주는 황급하게 집으로 돌아간다. 악운은 뒤로 안돌아보고 골목과 담을 넘어가며 달렸다. 건초를 싣고 나가는 마차에 숨어 황성을 나온 악운은 주위를 살폈다. 어느쪽에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난감했다. 그동안 황성이란 좁은 곳에 갇혀 지냈던 탓일지도 몰랐다. 길을 잃어버린 아이처럼 배회하는데 한 노인이 그를 보고 다가온다. 뭔가 낯이 익다는 느낌에 모습을 감추려 하는데 그 노인이 먼저 손을 들어 그를 부른다. “이리오게 악운.” “...저를 아십...아! 곡양에서 절 구해주신!” “그래. 기억하는군.” 유견은 성밖에서 매회하는 악운을 발견하고는 다가갔다. 뭔가 찔린다는 듯 도망치려는 그를 불러세운다. “어떻게 여길...” “난 원래 이곳에 사네. 아무튼 자네 무사해서 다행이군.” “예. 운이 좋았습니다.” “뭐 사정이 많았겠지만 아무튼 이 걸 받게.” 유견은 품안에서 꽤나 묶직한 돈주머니와 함께 있던 말을 내어준다. “송으로 돌아갈테지?” “...제가 송나라 사람이라는 것을 어찌 아시고?” “을노에게 들었네. 자네 악가의 사람이라며. 그렇다면 정안인으로 자네를 도와야 하는것이겠지. 아직 자네와 우리와의 동맹은 깨지지 않았으니까.” “감사합니다. 하지만 아직 송으로...” “가려면 지금이 최적이네. 당장 떠나라 하셨네.” “예?”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악운에게 유견은 차근히 설명한다. “금에서 송으로 국경을 넘어가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네. 게다가 자네의 아버지는 송나라의 표적이니 어차피 자네는 자신의 영지로 넘어가야 목숨을 부지하기 쉬울것이 아닌가. 지금 자네의 영지와 대치중인 금군의 대장은 황제의 친동생인데 지금 그는 황성쪽으로 올라오고 있네.” “금군을 뚫고 갈 절호의 기회이군요.” “금군과 대치중인 송군의 을노장군의 12영이네. 지금이 기회라는 것을 알겠나.” “알겠습니다.” “당장 떠나게. 당분간 금으로 들어오지 말라는 명령이시네.” 말을 탄 악운은 고개를 갸웃한다. “누구의 명령입니까?” “알 것 없지 않은가.” 유견의 단호한 대답에 악운은 고개를 끄덕이고 호북을 향해 말을 달린다. 성을 지나 드디어 광할한 푸른 초지가 보이자 드디어 되찾은 자유에 기쁨의 함성을 지른다. 마음한쪽에 남겨두고온 어린 아이가 걸리지만 앞으로 펼쳐진 푸르고 광대한 땅을 보며 말을 재촉한다. 165 이런일이 있나. 부들부들 손을 떨며 목없는 시체를 확인해본 체이첸은 그대로 몸을 돌려 방안으로 들어갔다. 가신들이 시체를 치우라 말하고 왕자를 따라 방으로 들어간다. 꽤나 큰 충격이였는지 한참동안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겨있던 체이첸이 한숨을 쉬고 묻는다. “우관은 어찌 되었나?” “상처를 크게 입었지만 다행히 생명과는 연관이 없어 청사내에서 계속 요양중입니다.” “그래? 그나마 다행이군. 의원은 괜찮겠지?” “예.” 가신들을 물리치고 난 체이첸은 뭔가 꼴몰히 생각하며 시간을 보낸다. 해가 질때쯤이 되서야 비로서 고개를 든다. “아무리 생각해도 누가 죽였는지 알수가 없구만 그래.” 실수다. 그를 내보내는 것이 아니였는데. 누구냐. 누가 그를 죽인거냐. 그가 정안이였기에 나는 그를 내 궁밖으로 내보내는 일도 없었거니와 함부로 다른사람에게 만나게 한적도 없었다. 나갈때는 외부의 손님이라 위장해 내 보냈건만 누가 그와 나의 관계를 알고 죽였단 말인가. 가신들이 서로의 질투에 눈이 멀어 그를 죽였다는 것도 생각해 보았으나 가신들중에서도 그를 알린 사람은 극소수였다. 하나하나 그 극소수의 가신들을 떠올려 보지만 역시 그럴만한 놈들이 아니다. “...설마 레이첸 놈이.” 가신들이 아니라면 그와 자신의 존재를 알고 있는 것은 레이첸뿐이다. 눈을 게슴츠레 뜨고 레이첸을 떠올린다. 그가 그럴만한 사람인가. “...사람의 속을 누가 알겠는가.” 피식 웃은 체이첸은 영웅을 읽은 쓴마음을 추스린다. 날아가버렸구나. 손안에 앉아 오래도록 풍경을 감상하던 설객이 자신의 것이라 믿었건만 누군가 던진 돌에 맞아 죽다니. 주먹을 불끈 쥐고 화를 참는다. 결국 설객이란 존재는 그 누구도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한단 말인가. 애써 미간을 피며 평이한 표정을 지으려 노력한다. 일단 그가 죽은 것이 확실하다. 죽은자를 살리는 힘은 황제에게도 없는 것이니 어쩔수 없는 일. 일단은 살아남은 우관이라도 되찾아 와야해. 그가 혹시 자객을 보았을지도 모르지. 머리는 이성적으로 돌아가도 화로 가득찬 마음은 그렇지 못하다. 그리고 같은 시간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또하나의 왕자가 분통을 터트린다. “그럴줄 알았지! 내 이럴줄 알았지!” 태진은 하늘을 우러보며 외친후 씩씩거린다. 화가 풀리지 않아 예쁘게 놓인 화병을 확 던저 버린다. 물건깨지는 소리에 모두들 찔금하며 방에서 멀어진다. 한참을 그렇게 화풀이하다 지친 태진은 자리에 앉는다. 웃기도록 운좋은 놈이아닌가. 아니라면 지지리 영리한 놈이던가. 실패했지만 죽은 자객에게서 날 연상시킬만한 것은 아무것도 못찾았을 것이다. 문제는 그놈이다. 이유는 알수 없지만 왠지 그놈이 자객을 보낸 자가 나라는 것을 알 것 같다. 그래, 분명 레이첸을 통해 나의 존재를 알고 있을터다. 그런데다가 자객을 보았으니 분명 자신을 의심할것이다. “곤란한데. 어쨌거나 죽어줘야 하는 놈인데...” 중얼 거린 태진의 마음은 편하지 않다. 놈이 날 의심한다한들 날 어찌 할수 없겠지만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는 것은 당연하다. 혹시 훗날에 그놈이 궁안의 고관의 마음에 들어 적당한 권력을 가지게 된다면 더 이상 곤란하거나 귀찮은 것이 아닌 명실공히 적이 될테니까. 그런데 가서 목잘려 죽었다는 놈은 또 누구야. 그놈은 지지리 운없는 놈이구만. 피식웃은 태진에게 누군가 서둘러 달려온다. 조용히 다가온 그는 태진에게 다가과 귓말을 하고 얼른 방을 나간다. 잠시 생각하던 태진은 더욱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두번은 용서없다라고? 허?” 낭성쪽의 암살은 성공한 모양이였다. 문제는 완벽히 처리하지 못하고 꼬리를 잡혔다는 것인데 상처를 입었지만 다들 돌아온 모양이라 신경쓰진 않아도 될것이다. 문제는 그들을 막은 누군가 전한 말, 두 번은 용서 없다라는 말이다. 즉 전에 보았던 놈이라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날 가로막고 있는 호랑이는 황성사람이 ㅇ니란 말인가. 장인의 도움을 받아 살펴본 기록에는 특별히 의심가는 자는 없었다. 정말로 외부사람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도대체 내가 암살하려는 것을 어찌 안것이지? 누가 암살당할지 모르는데, 내가 암살할사람에게만 접근해서 살려낸단 말인가. “이건 억지다!” 분명 황궁안에 첩자가 있다. 그것도 외부의 도움을 받을수 있는 단독이 아닌 거대한 무리의 무엇이다. 더도 덜도 생각할 것 없이 그것들은 설객의 무리일것이다. 정안족들이 성안에 들어왔는가. 아니, 들어와있었던가. 그 꼬리만 잡기만 하면... 하지만 그것은 2왕자가 정안인으로 위장한 가짜를 데리고 있는한 무리다. 만약 자신이 정안족을 찾아 찍어낸다면 2왕자의 가짜도 찍혀 나갈테고 그렇게 된다면 2왕자는 자신을 가만히 두지 않을것이다. 그 가짜가 정안인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면 2왕자와 4왕자의 사이는 급격이 벌어질테고 바보같은 4왕자는 자신을 미워하며 사이가 벌어질것이 뻔하다. “일단은 후퇴다.“ 낭성에서 때를 기다리자. 내가 여기 없더라도 얼마든지 그 애송이 녀석쯤은 죽일수 있다. 애써 주인을 내보낸 그 자리에 어중이가 가서 차지하기 전에 일단 자리부터 잡자. 단호하게 말한 태진은 자리에서 일어난다. 황제에게 고하여 자신을 낭성으로 보내달라는 상소를 만들러 서제로 떠난다. 가만히 눈을 내리깔고 잔안의 매화를 바라보던 하류사의 분위기가 얼마나 진지한지 항상 그런 모습을 보아왔던 여관조차 힘들어진다. 일어나 차를 한잔 더 따르며 묻는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십니까? 겨울이 다시 오려합니다.” “으음. 그런가.” 말은 부드럽게 하지만 그 표정은 전혀 변함이 없다.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여관이 창문을 열고 따뜻한 공기를 안으로 들인다. “밖으로 나가서 햇살을 쬘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역시 반(礬이야.” “...” 여관이 다시 창문을 닫는다. 조용히 다시 자리에 와서 앉는다. 하류사는 여전히 날카로운 눈으로 잔안의 매화를 노려본다. “조(俎).벽(霹),임(淋),체(替), 다음은 역시 반(礬)인가... 그렇다면 다음은 미(米)정도 될것인가. 아니 소(巢)까지 미룰수 있다면야...” “...” 문득 여관이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든다. “무리하시면 안됩니다.” “무리 따위 하지 않습니다.” “...” “어찌되었건 체(替)까지 가능하다면야...절대로 무리하는 일은 없을것이니.” “체? 파를 나눌생각이신겁니까?” “그렇게 된다면 내 손으로 그들을 자멸하게 만들 수 있지요.” 단호하게 말한 하류사는 허리를 피고 뒤로 몸을 기댄다. 옥팔찌를 낀 손으로 잔을 치지 칭하는 엷은 울림이 방안을 울린다. “조란 두 사내중 한명이 다른 한명을 밟고 벽을 넘어가는 것. 결국 둘중 하나만 살아남는 원수의 관계.” “14왕자와 자례입니까.” “그 아이에게 약속한 것이 있으니 14왕자가 우보를 밟고 올라서겐 할수 없는일. 아직 우보가 태진을 올라서긴 무리이니 그렇다면 한명이 넘어가고 다른 한명이 그 손을 잡아 둘다 살아남게 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어떻게...?” “우리 어린 우보가 14왕자의 손을 잡아 살리겠지요. 아니 살렸을겁니다. 스스로 아직 자신이 태진을 스스로 치기엔 무리가 있다는 것을 알테니. 하지만 벽을 넘어가면 다시 원수가 되는 법. 벽(霹), 소리없이 일어나는 재해. 말그대로 등골이 시리는 것.” “하지만 말그대로 벽을 넘어서는 우보에게 불리합니다.” “그래서 임(淋). 둘중 하나가 피를 흘려야지요. 피흘린놈이 그 자리에 남고 멀쩡한놈이 도망치는 수 밖에. 황성을 나가지 않고 이곳에 남으려면 그만한 댓가는 있어야 하는 법.” “...그렇다면 우보가 피를 흘리는 겁니까?” 여관이 인상을 쓴다. 하류사는 다시 한번 팔찌를 튕겨 널리 튕기는 음파를 즐긴다. “반(礬).” “...” “아니라면 파(派).” “...” “그 다음은 체(替)가 분명한데.” 하류사는 여관을 바라보고는 웃는다. “과연 반이 될지 파가 될지.” “반은 동맹이나 큰 약조가 아닙니까. 파는...한명을 희생하는 것이고.” “반은 큰 힘을 감추고 두무리가 서로를 엮는 것. 동맹을 이야기 하기도 하지요. 큰 힘을 얻는다는 것도 됩니다. 파는 희생을 의미하는 것뿐만이 아닌 큰 위험을 피하기 위해 자신위로 아군과 적군의 시체를 쌓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 “그런데 여기서 막히는군요. 내가 원하던 것은 분명 파(派)이고 유견이 동맹군의 악운을 만난 것을 보면 우보역시 그것을 선택했을 것이 분명. 태진을 막기 위해 쌓아올린 아군이 악운이라면 적군으로는 누굴 막았던 것일까? 그것이 애매하군요.” “...마기장군?” “마기장군은 조(俎), 암살 위험으로 자중하니, 벽(霹) 그 위력이 절반에 미치지 못하고, 임(淋), 남을 구하려다 스스로 다칠상이니, 체(替),서로 대치하며 다른 날을 도모하는 법. 이정도는 우보도 알터이니 그를 방패로 삼았을리는 무방.” “그럼 2왕자를?” “조(俎). 왕자들을 누르고 올라가려는 터에, 벽(霹) 예상못한 난리에 주저하고 ,임(淋) 그 위급에 자신을 보호하려 남을 방패삼을 테니 ,체(替) 전혀 도움이 안되는 타인과 다를바가 없습니다.” “...그럼 혹시.”“그는 조(俎) 스스로 우보를 보호하기 위해 아래로 설것이 분명하니 자신보다 아래 있고 .벽(霹) 그 의중이 뚜렷하지 못해 신임할수 없으며 임(淋) 차칫하다가는 되려 자신이 당할테고 ,체(替) 훗날 일을 도모하기 위해 함께 있어야 함으로 사용했을 리가 없지요.” “그것이 누구인지가 그렇게 중요한것입니까?” “그럼요.” 차가 식어 매화가 다시 봉오리로 맺힌다. 하류사는 잔을 여관에게 밀어 새 차를 따르게 한다. 따뜻한 차에 다시 매화가 피는 모습을 감상한다. “파(派), 그 모습은결국 쌓아올린 그것들이 자신보다 넘쳐 결국은 스스로를 덥치는 상.” “왕씨...” “약조을 했으니 죽게 하지 않는 것.” 냉정하게 말한 하류사는 다시 잔을 들여다보며 생각에 잠긴다. 여관이 걱정스럽게 그 모습을 보다 묻는다. “정말로 모르시겠습니까?‘ “아니오.” 허리를 피며 하류사는 웃는다. “짐작가는 자가 한명 더 있지만 감히 우보가 그자를 선택했다는 것이 절 놀라게 하는군요.” “...” “내가 우보를는 얕보는 것인지 우보가 너무 믿는것인지.” “...” “하긴 믿지 않으면 가지 못했겠지만.” 혼자서 중얼거린 하류사는 여관에게 손을 내민다. 여관이 다가오자 일어난다. “강가로 나가 머리를 식힐까요.” 166 분명 피식 웃은 황제는 한참동안 허공을 바라보다가 히우루를 불러 묻는다. "이 서신 보았겠지? 어찌생각하는가?" "계주에서온 것이군요. 분명 읽어보았습니다. 잘된 일이아닙니까. 어차피 계주로 보낼만한 왕자도 없었습니다." "그렇긴하지. 그러나 내논 성을 다시 달라고 하니 웃기지 않는가." 다시 한번 웃은 아골타는 단상에서 두어개단 내려와 아래에서 공무하고 있는 히우루를 내려다본다. 그 모습이 참으로 단정해보여 감탄하고는 허리를 피며 주위를 둘러본다. 그 모습에 히우루가 웃는다. "참으로 심심하신 모양입니다." "그래. 근간엔 아무런 놀이를 못했지 않은가." "하지만 곧 경마축제가 있지 않습니까." "유일한 즐거움이지." 다시 단상에 올라 턱을 괴는 아골타에게 히우루가 조심스럽게 묻는다. "잠은 주무시고 계십니까? 얼굴이 여전합니다." "내 나이가 나이이다보니 얼굴이 좋을리는 없다." 아골타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하고는 잠시 침묵을 하다 생각났다는듯 얼굴을 든다. "그러고보니 이놈은 왜 이렇게 안와?" "예? 아아..." "내 서신을 보았다면 내가 그 뒤를 칠까 두려워 일각에 달려왔을 놈이다. 그런데 어째서 아직도 소식이 없는 것이지?" "한달걸리는 거리입니다. 벌써 도착한다는 것이 이상한 것이죠." "그런가. 아무튼 비서랑들을 몇명 빼어놓아라. 오면 같이 보내게." "실은 그것때문에 말입니다.좌천당한 비서랑과 근신중인 자, 한족이나 거란의 혼혈이 된 자들을 골라 보낼 예정인데 어떠십니까?" "그렇게 해라. 어차피 비서랑이란 한둘 없어도 괜찮은 것이니까." 아골타는 심심하다는 얼굴로 다시 서신을 읽는다. "잃어버렸던 혈육에게 성을 물려주고 싶다니...자식을 잃었지만 형제는 얻었다는 것인가. 어떤것이 더 좋은 것인지 모르겠군." "아, 그리고 여기 한장이 더 있습니다." 히우루가 서신을 한장 뽑아서 올린다. 그것을 읽은 아골타는 미간을 찌푸리고는 이상한 표정을 짓는다. "낭성태수가 죽었다." "예? 낭성태수는 계주태수와 인척간이..." "거참, 계주에는 뭐이리 일이 많아? 동시에 한주에 두개의 성이 실주상태라니..." 짜증난다는 듯 서신을 던지자 히우루가 다시 주어와 읽는다. 신기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생각에 잠긴다. "근간에 정말 계주에 일이 많군요. 어찌하실겁니까? 잊으신것은 아니시겠지만 14왕자가 분주(分柱)을 신청한 것을 잊지 않으셨겠지요?" "그래." "계주를 맡기기엔 힘이 없던 놈이니 딱 낭성이 제격같군요. 이쪽으로 보내시는 것은 어떠하십니까?" "낭성에는 뭐가 있지?" "아무것도. 아, 온천이 있습니다." "온천? 별볼이 없는 곳이군. 왕자가 살기에 궁색하지 않다면 그냥 보내버려야지. 슬슬 내 후계자를 위해 궁을 비워야하니 어중한 놈들이라면 다들 내보내." "그럼 낭성쪽으로 보내겠습니다." 아골타가 고개를 끄덕이자 히우루가 새 종이를 꺼내 정성스럽게 공문을 작성한다. "그런데 낭성태수가 암살당했다고?" "예. 그들은 계주태생인데도 불구하고 적이많군요." "...그런가." 아골타는 등을 돌리고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가 히우루를 막는다. "낭성쪽으로 왕자를 보내기는 하나 계주쪽은 일단 비워놓겠다." "어째서말입니까?" "뭔가 아귀가 너무 들어맞는 기분이야. 어차피 기주쪽으로 축제때문에 갈일이 있으니 직접 보고 성을 돌려주던 말던 하지." "알겠습니다." 히우루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골타는 어깨를 치며 이 지루함을 달랜다. 낭성태수의 분향을 마친 계주태수는 몸을 돌렸다. 굉장히 초최한 모습이였다. 한달도 못가 세 아들과 가까운 인척마져 암살로 잃었으니 고민될만 했다. 그는 한숨을 크게 쉬고는 분향을 도와주는 스님에게 하소연을 한다. “원체 낭성태수도 자식들이 모두 전장에 나가 사망하여 후계가 막막했습니다. 제 아들중 하나를 이쪽으로 보낼 생각이였는데...어찌된 영문인지 왜 모두들 나보다 먼저 가는 것인지...” 슬픔이 지나쳐 짜증으로 변해버린것인지 그는 인상을 쓴다. 후소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어느정도 진정이된 태수는 일어나 후소와 다른 방으로 건너간다. 기다리고 있었던 유번과 마유가 일어났다. 마유는 고개를 숙였지만 유번은 계주태수보다 연상이였음으로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신했다. 태수는 후소에게 자신의 팔목을 보였다. “이것이 저의 완환입니다.귀공께서도 가지고 계시겠지요?” “안타깝게도 나의 완환의 절반은 다른 이에게 주었다네.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은 이것뿐이군.” 유번이 반쪽만 남아 노리개로 만든 상아팔찌를 보여주자 태수는 그것을 받아 자세히 살펴본다. 분명 같은 물건이다. 의심할여지가 없다. “공의 성명을 여쭈어도?” “감곡(邯哭)이라고 하네.” “어째서 팔찌가 이렇게? 나머지 절반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누군가 너무도 간곡히 원하던터라 빌려주었네.” “의심하는 절 용서하십시오.” 태수는 피곤한 눈을 비비며 말한다. “하지만 근간 저에겐 너무도 혼란스러운일만 겹쳐 그 누구를 믿지 못하는 상황이니 너그럽게 봐주십시오. 지금 저로써는 이 절반의 팔찌의 나머지를 가진 그 누군가도 의심스럽군요. 공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공께서 이 절반을 누군가에게서 얻어내 후소님과 만난 우연한 인연에 절 만나러 오신것일지 누가 압니까. 그 절반, 제가 볼수 있을까요?” “그렇다면...그는 남강이라 하였으니 한번 돌려달라 해보겠네.” “남강이요?” “남강을 알고 있나?” “근래에 엄청난 부호라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남강이라는 부호에게 팔찌를 넘기셨다는 말입니까?” “그가 워낙에 내 검을 원하는 바람에 팔찌까지 딸려간것이네.” “검이라면...혹시 반구?” “그것 알고 있나?” “당연하지요! 그것은 우리파의 명검이 아니겠습니까! 부호가 탐낼만한 물건이 아닙니다. 응당 돌려받아야지요! 제가 당장 서신을 띄워 그것들을 돌려달라 하겠습니다!” “돈을 받고 판 것은 아니나 내가 여의치 않았을때 맡긴 물건이니 찾는 것또한 그다지 탐탁하지 않네. 완환만 일단 돌려받기로 하지.” 유견의 말에 태수는 안타까워하면서도 일단 완환만 돌려달라는 서신을 쓴다. 화려하게 꾸민 여인들의 춤과 노래가 끝나자 향기로운 술과 맛난 음식으로 배를 채운다. 그 잔과 그릇하나하나가 진귀하고 부유해 태수라는 신분에도 감탄한다. "정말로 남강공께서는 그 부유함이 대단하십니다." "원래 여행을 자주 다니는 터라 그 부유함이 하루 아침에 사라지기도 한답니다." 금실과 보석으로 장식된 옷을 걸친 마류는 웃는다. "게다가 늙은이의 취미도 괴팍해 좋아하는 것을 위함이라면 무엇이든 사 모아 이런 사치도 얼마 부리지 못하지요." "남강공께서 검을 매우 좋아하신다는 것은 익히 들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저에게 수집품을 한번 보여주시지 않겠습니까?" "이런, 기주태수께서 검에 흥미가 있다는 것은 처음안 사실이군요." "저 역시 젊은때는 장수로 어찌 검에 흥미가 없겠습니까?" 비슷한 연배의 두 사람은 서로 술을 권하며 웃는다. 한참 흥이 익자 마류는 슬쩍 마음을 떠본다. "실은 근간에 참으로 신기한 검고 장식을 얻었지 뭡니까." "신기한 장식이라하심은?" "이곳에서는 보기 드문 상아장식이지요. 오래된 연륜이 느껴지는 물건으로 반구검에 잘 어울리더군요." "반구검은 혹시 진나라의 강양의 장수인 패후가 사용했다던 그 명검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반구검까지 알고 계십니까? 그것은 그리 이름있는 것이아니라서 알고 있는 사람이 드문데...태수님께서는 정말로 검을 좋아하시는군요." "한번 꼭 보고 싶습니다." 하지만 마류는 고개를 흔든다. "반구검은 아직 수리가 끝나지 못했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촌부의 손에 있어와 그 날의 예리함은 그대로지만 검장식이 많이 마모되었답니다. 수리가 끝나는 그때 보여드리기로 하지요." "촌부의 손에 있었다는 것은..." "실은 이쪽으로 오는 길에 있는 제가 아끼는 검집에 흠집이 나 곡양에 있는 작은 대장간에 들어갔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대장간 한구석에 먼지를 잔뜩 먹고 있는 그것이 바로 명검 반구가 아니겠습니까!" "저런!" "얼마나 놀랬는지요. 그 촌부에게 부탁해 반구검을 흥정했지만 촌부는 절대로 그검을 안팔려고 하더군요." "그가 반구검을 알던가요?"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아무튼 저는 그 사람에게 간곡하게 검을 부탁했고 그는 결국 그 검을 내게 맡겼답니다." "맡겼다 하심은..." "하하하, 그는 그 검을 팔지 않았습니다. 제가 너무 완강하게 무탁했더니 촌부는 한숨을 쉬고는 '그럼 맡기게 해주십시오'라며 제게 검을 보낸것입니다." "역시! 검은 주인을 잘만나야 그 이름값을 하는 법입니다." 그때 예사가 들어온다. 예사는 무척이나 난처한 얼굴로 뭐라 속삭인다. 마류는 인상을 찌푸리고는 밖으로 나갔다가 한참후에야 돌아온다. 태수가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자 마류는 웃는다. “반구검의 주인에게서 기별이 왔군요.” “저런. 혹시 검을...” “검을 돌려달라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상아장식만 다시 돌려받고 싶다는군요.” “상아 장식을?” 더욱 궁금해 하는 태수에게 드디어 문제의 반구검을 내온다. 태수는 검을 들고 감탄을 금치 못한다. 명검이라함은 그 장식의 유려함보다는 그 날의 내구성과 주인의 공훈으로 판단되기 때문에 실제로 반구검은 그다지 화려한 검은 아니였다. 태수는 그 검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신기해하다가 그 상아 장식을 보고 묻는다. “이것입니까.” “예. 꽤나 특이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잘 어울리지요.” “검을 달라하는 것은 뭐고 장식만 달라는 것은 또...” “글쎄요. 근데 문제는 저에게 돌려달라 청한사람이 계주의 태수님이시군요.” “계주의? 계주라면 근간에 성을 환납한...” “그 문제의 자객사건이 일어났던 낭성이 있는 주가 아닙니까?” “아아, 저도 들어보았습니다. 한 주에 실주인성이 두개나 생기다니... 게다가 주성이 실주상태니 조만간 황성쪽에서 괜찮은 황족이 하나 들어가겠지요.” “으음?” 마류는 고개를 갸웃한다. “제가 듣기로는 계주태수가 다시 성을 내려달라 했다는데요.” “그래요?” “아직 확정은 안되었지만 낭성만 실주상태라더군요. 낭성에는 왕자가 분주로 인해 들어간다고...”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이런, 계주는 저희와 붙은 주성인데도 불구하고 남강공께서 저보다 더 잘알고 계십니다 그려.” “여행이란 많은 것을 듣게 하더군요. 아무튼 일단은 돌려보내야겠습니다.” 무척이나 아깝다는 표정을 짓는 태수에게 마류는 웃어보인다. “그러고보니 슬슬 경마축제도 오고하니 기주도 바빠지겠군요. 황제가 이곳으로 납시니까요.” “사실 그거 때문에 고민이 많답니다. 제궁 안쪽으로 거대한 별궁을 하나 보셨지요?” “아아 그 붉은 지붕의 궁말입니까.” “주석궁(主席宮)이라고 부르는 황제만이 사용하시는 별궁입니다. 저역시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지요. 문제는 해마다 저 드넓은 곳을 청소하고 치장하는 것도 정말 굉장한 일이랍니다.” “여기서보기엔 그다지 치장을 한것같지 않습니다만.” “황제의 외궁이 속해 있는 지역은 그 궁을 지탱하기 위해서 국세의 삼할이 감안됩니다. 하지만 그것이야 황제가 한두번가보는 작은 궁이고 매년 오시는 주석궁을 지탱하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허리띠를 졸라매어야 한다지요.” “하지만 황제가 이쪽을 온다는 사실만으로도 태수님께서는 궁핍하시지 않으실텐데요?” 눈을 내리깔고 의미있게 말하는 마류의 속삭임에 태수는 멈칫하다가 곧 웃고만다. 167 강가에 배꽃이 떨어지는 풍경은 시와 같이 황홀하다. 작은 배로 뱃놀이를 즐긴다. 여관이 손을 내밀어 물에 흘러가는 꽃잎을 건져낸다. “늦는군요.” “예?” “여행간 좌보가 늦습니다.” 왕씨의 말에 여관이 몸을 돌려 그를 마주본다. “그런 부탁을 하셨으니 마음편히 돌아오기는 무립니다.” “그냥 확인해보려는 것뿐.” “이미 알고 계시면서...” “...” 하류사는 눈을 들어 하늘을 보고는 밝은 밝은 햇살에 손을 들어 눈을 가린다. 문득 여관도 빛에 인상을 쓰고 있는 것이 보인다. 일어나 높이 앉는다. “왕씨의 판단엔 혹시라는 것은 있을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의심스럽다면 확인해봐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왕씨는 왕씨일뿐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지요. 그것을 잘 알고 계시면서 어째서 확인하시려했단 말입니까.” “...” “아직도 악몽에 시달리시는지요?” “악몽이란 되풀이꾸면 그 의미가 퇴색되기 마련이지요.” “정말로 꿈이라면 그러하겠지요.” 조금 몸을 움직여 왼쪽으로 틀어 앉는다. 여관이 근심스런 표정으로 하류사를 올려본다. “모시는 자는 안달하며 걱정으로 잠을 못이루는데 당하는 자는 별 근심없이 계시니 이를 어찌하면 좋단말입니까.” “걱정되십니까?” “당연한 말씀.” 그말에 하류사가 옷자락으로 입을 가리며 미소짓는다. “봄에 듣기에 최상인 다감한 말씀.” “...우리 모두의 분이시니까요.” “저런. 좋다 말았군요. 어찌 되었건 우리 좌보께서는 우보께서 걸을수 있기 전에 이곳으로 도착해야한 할텐데.” “...?” “우보 성격상 누워있지는 않을텐데 말입니다.” “무슨 말씀인지?” “움직이지 마세요.” 하류사가 일어나려는 여관에게 말한다. “애써 일어나 앉은 이유가 없어지지 않습니까.” “예?” 장난인 듯 아닌 듯 하는 말투는 사람을 놀리듯 홀리듯 그렇게 흘러가버린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는 알고 있나?” “2왕자의 생일입니다.” “기억하고는 있군.” “궁안이 떠들썩하니 모른다면 바보지요.” 레이첸은 팔을 벌려 옷을 갈아입는다. 시종들이 물러가자 레이첸은 이해할수 없는 모습으로 태진에게 다가간다. “낭성으로는 언제 가게 되나?” “낭성으로 가는 것은 확정된 것이지만 아직 제게 공지가 오지는 않았습니다. 제 생각에는 경마축제가 시작되기전에 갈 것 같습니다.” “어째서?”“대장군 하나가 올라온다는 소식 들으셨습니까?‘ “들었다. 오걸매가 올라오고 있지. 이유는 알수 없지만.” “그가 얼마전에 호북성에 난입해서 관리를 빼어내갔답니다. 호북성주가 화가나 상소를 올렸구요. 황제는 그를 상경시키는 것입니다.” “흐음.” “황제의 성격으로는 귀찮은 일은 해결하고 축제에 들어갈 것이 분명합니다. 원체 오걸매와 황제의 사이는 좋지 않으니 축제 전에 해결할것이고 왕자의 분주는 크게 벌이면 벌일수록 거창해지고 말이 많아짐으로 이것역시 축제 전에 해결하려고 할테니까요.” “하긴 아버님의 성격은 어설프지 않으니까.” “그런데 왜 제 분주 날을 물으신겁니까?” 레이첸은 고개를 괴며 생각에 잠긴다. “너...확실히 죽였냐?“ “예?” “그 비서랑 말이다.” “아아.” 두 팔을 벌려 난색을 표현한 태진은 낮게 웃는다. “실패했습니다.” “그게 웃을일이더냐!” 버럭 화를 낸 레이첸이 탁상을 주먹으로 치며 화를 낸다. “언젠가 놈이 황궁으로 돌아올지 모른다. 그런데 그렇게 웃으면서 실패했다는 말이 나오냐?!” “제가 나가지 않습니까.” 멈칫한 레이첸이 태진과 마주 않는다. “무슨 말이지?” “세가지로 경우를 나누었던 것 뿐입니다.” “세가지?” “내가 머문기간에 그놈을 처리하던가. 그놈이 돌아오기전에 내가 나가던가, 내가 나간후에 그놈이 돌아오던가.” “그게 그거아니냐?” 레이첸이 머리 아프다는 듯 짜증을 내지만 태진은 진지하다. “잘 들어두십쇼.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방법이니까요.” “쉽게 말해봐라.” “놈이 양보하는가, 내가 양보하던가, 아니면 싸우는가. 뭐 이경우에 양보하는 자는 자멸의 길을 가게 되겠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일단 그 놈과 내가 좋은 사이는 아닐것이니 그놈이 양보해주길 바라는 것은 말도 안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제가 양보해야 한다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자멸하게 되니 그것도 안되는일. 결국 싸워야 하기마련입니다. 하지만 형님도 알다시피 양보는 그 결과가 빤히 보이지만 싸우는 것은 그 결과를 예측하기엔 불가능한일.” “...” “형님같으시면 어찌 하시겠습니까? 이런 경우에 말입니다.” “뒷길을 마련하고 싸우겠지. 살아남아야 하니까 말이다.” “맞습니다. 그래서 뒷길로 제가 먼저 성을 나가는 것을 선택했고 공격하는 것으로는 암살을 선택한것입니다.” “결국 암살한다는 것은 일종의 시험이였다는 거냐?” “전 진심이였습니다.” 태진은 정색으로 하고 말한다. “하지만 기가막히게 그놈 운이 좋기에 이번에도 그 운이 따르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뿐입니다. 역시 그놈은 운이 좋았고 살아남았습니다. 그러니 이젠 전 뒷길로 도망치면 되는 것이지요.” “나는?” “예?” “넌 도망가더라도 난 그놈을 마주봐야 한단 말이다. 네 말을 빌리자면 그놈 엄청 영리한 모양인던데 암살에 나역시 개입되었다는 것을 알 것 아니냐!” “하긴 그렇겠군요.” “그렇게 태평하지 마라.” “뭐가 걱정이십니까? 증거는 없습니다. 그저 추측이지요. 그는 형님께 아무런 위해도 끼칠수 없습니다. “그놈은 그리 만만한 놈이 아냐!” 벌떡 일어난 레이첸은 눈을 치켜뜨며 등을 돌린다. “곡양에서도 그렇고 이번 청사에서도 그렇고 머리회전이 무섭게 빠른 놈이야. 잊고 있었던 거냐 태진? 체이첸 형님이 그를 원하고 있었다는 것을? 이번에 가짜가 죽었으니 이젠 그놈이 어떻게 나올지 넌 걱정되지도 않단 말이냐?” “예?” 이번엔 태진이 사색이 되어 일어난다. “가짜가 죽었다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설마...” “아직 모르고 있었던 거냐? 그 놈을 찾아보기 위해서 가짜 영웅께서 궁을 나갔다가 목이 잘려 죽었단다.” “죽은자는 2왕자와 아무런 연관이 없던자였는데?!” “정안인을 내보내는데 그 소속을 밝힐 리가 없지 않은가! 오늘 아침에 2왕자 궁에 들어갔다 나왔다. 체이첸 형님이 화가 나 있더군. 이유불문하고 너 꼬리를 잡힌다면 무사하기는 힘들것이다!” “후, 뭐가 걱정입니까? 레이첸 형님이 계시는데 말입니다.” “헛소리.” 냉냉한 얼굴로 레이첸이 돌아선다. “말해두었지만 난 체이첸 형님이 황제가 되었으면 좋겠다 생각하고 있다. 그를 거스르고 싶은 마음 따위는 없어.” “그럼 형님꼐서는 이 아우가 죽는 꼴을 보겠다는 말씀입니까?” “그것도 마음에 안드니까 지금 너보고 생각해보라는 것이 아니냐!” “...형님 마음대로 하시지요.” “뭐?” 짜증나는 표정으로 돌아선 레이첸은 태진의 멱살을 잡고 올린다. “너 지금 날 놀리는 거냐?” “이 아우의 목숨을 형님에게 맡기겠다는 것입니다.” “...” “하고 싶은데로 하십시오.전 예정대로 나가야 할것입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 보여주십시오.” “...후회없단 말이지?” “원하신다면 제 목숨까지라도.” 태진은 길게 팔을 빼고 절한다. 그대로 나가려는 태진에게 레이첸이 마지막으로 묻는다. “너 확인은 해보았겠지? 분명 네놈과 싸운 지방관리더냐?” “왜 그걸 물으십니까?” “확인했으면 됐다. 나가봐. 준비할것이 많겠구나.” 레이첸은 손가락을 탁자에 부딫친다. 타다다닥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린다. 168 한심하다는 듯 자신을 비웃던 여행객은 성문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자에 의해 깔금한 여관으로 안내되었다. 이 여관의 왼쪽에 있는 별체로 들어가자 시종들이 그가 데리고 온 말들을 마굿간이라기엔 큰 그곳에 들여보낸다. 시종들이 나가고 혼자 남게 되자 준비된 차를 따르며 얼굴을 가리고 있던 차양이 들이워진 모자를 벗는다. 한숨을 포옥쉬며 고개를 흔든다. “미련퉁이, 미련퉁이 같으니라구.” 자휼은 몇 번을 그렇게 자책하고 나서도 힘이 나지 않는 듯 그대로 침상에 누워버린다. 멍하니 천장의 그림을 바라본다. 사실 무슨 그림이 그려져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다. 결국 쫒겨난건가. 무리를 인솔해 이쪽으로 왔다고 하지만 일단은 기산성에서 나온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일종의 퇴출일지도 모른다. 어차피 미련을 두고 있는 곳은 아니였지만 그래도, 그 아이가 마음에 걸린다. 이미 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린 눈을 한 사내지만 그대로 그 행동과 말에서 느낄수 있는 상처받기 쉬운 이면을 지켜주지 못해, 아니 자기 스스로 파괴했다는 느낌에 어쩔줄을 모르겠다. 갈팡질팡 하는 마음을 다잡으려 명상이라도 할까 하고 정좌를 하지만 곧 밖에서 울리는 시끄러운 소리에 고개를 돌린다. 창을 열어보니 사람들이 우루루 몰려 성문쪽으로 간다. 무슨 구경거리라도 있는 모양이다. 이렇게 방안에서 골치아프게 생각하고 있으니 차라리 잊어보자는 생각에 밖으로 나가 사람들 눈을 피해 성벽위로 걸어 문쪽으로 간다. 아래로 내려다본 성문쪽은 붉은 문양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누군가의 일행이 들어오고 있었다. 보아하니 가운데 마차에 휘장이 둘린 것으로 보아 황족이거나 대 호족일가능성이 높다. 이런 구경을 하려 나온 것은 아니였기 때문에 자휼은 곧 실망한다. “그럴필요까지는 없지. 3왕자 파공, 즉 태천왕자의 무리들이네.” “예사님?!” “여어. 오랜만이야.” 씨익 웃으며 옆에 앉는 거구의 사나이는 여전히 한족옷이 어울리지 않는 예사였다. 어지간히 놀라하는 자휼과는 달리 예사는 고개를 숙여 관심있게 태천무리를 살펴보고는 웃는다. “이야, 3왕자도 좋은 말을 가지고 있군. 이번 시합은 무척이나 즐겁겠어.” “아니, 그보다 어째서 이쪽에?” “응? 아아, 나뿐만이 아냐. 마류님께서도 계시다네. 하긴 자네는 혈족과의 연락이 두절된 상태였으니 뭐가 뭔지 알 리가 있나. 하지만 걱정말게.” 툭툭 팔없는 어꺠를 친 예사는 밤송이 같은 수염을 긁으며 낄낄거린다. “몰라도 되는 일이니까.” “그런말하지 마시고, 어떻게 돌아가는 일입니까?” ‘어, 그렇군. 하긴 신기한 일이기는 하네. 저들이 왜 이곳에 왔을까? 뭔가 자네는 알고 있나? 5왕자의 근황은 어떤가?“ “뭐...그야.” “흠. 그보다 태천이 이쪽으로 오는 것을 보아 이번 경마는 심상치가 않아. 자네도 말을 데리고 왔지 않은가.” “절 보셨습니까?” “나야 자네가 온다는 서신을 받았거든. 자네가 성문을 통과할때도 여기에 있었네.” 아무렇지 않게 말한 예사는 자휼의 어깨를 흔들어 일어나게 한다. 둘은 강가를 거닐면서 그동안 밀렸던 이야기를 나눈다. 자휼은 여전히 아우의 일을 물어보지만 예사는 황성을 떠나있던지가 오래라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 자휼역시 기산성에 거주하고 있으나 5왕자의 심중을 헤아리지는 못했기에 그들은 금방 다른 화제로 돌아갔다. “태천이라함은 3왕자입니까? 저로써는 그다지 알지 못하는 것이라.” “그래? 아주 인연이 없다고는 못하네. 14왕자의 친혈육이지. 둘은 황제의 수 많은 부인중 선헌왕비인 복산(宣憲)씨의 아이들이네. 14왕자 태진은 잘 알고 있겠지?” “...어찌 잊겠습니까.” “그놈 친 형이 바로 3왕자 태천이다.” 자휼이 예리한 눈으로 태천무리의 얼굴을 바라본다. 곧 잊으려해도 잊지 못하는 망나니 왕자와 그도록 닮은 얼굴을 발견하고는 욕설을 내뱉는다. “저자가 태천인가?” “그럴겁니다. 그 아우과 생김이 저렇게 비슷하니 그 성격은 얼마나 개망나니일지 기대되는군요.” “태천과 태진은 그 외모뿐아니라 성격까지 닮았다고 하더군. 모습을 보아하니 꽤나 깐깐하고 자존심강하게 생긴 놈이구만. 그런데 왜 저놈이 이곳까지 왔을까?” “왜요? 기주에서 경마축제가 있으니 미리 말을 쉬기 위해 온 것이 아닐까요?” 그말에 예사가 깔깔웃는다. “아이구, 이래서 자네나 나나...결국 장수란 정치엔 쓸모없는 돌덩이들이라 불리는거야.” “제가 실수라도?” “태천은 양인성을 가지고 있다네. 그리고 이 기주는 양인성에 딸린 주성이네. 물론 그 권력은 분리되겠지만 기주성은 어찌보면 양인성의 소유란 말이네. 주인이 시종을 부르지 않고 스스로 시종의 처소에 들린다는 것은 평범한일이 아니지 않는가.” “그렇군요. 몰랐습니다.” “그럼 혹시 이건 아는가? 황제가 경마축제를 빌미로 양인성에 필요도 없는 자신의 군사를 주둔시키는 이유를 말이야.” “...글쎄요. 혹시 태천을 감시하는 것입니까?” “그래. 어찌되었건 높은 놈이 낮은 놈의 집에 기웃거릴때는 목적이 있서서란 말이지. 실제로 경마축제는 이 기주에서 열려. 게다가 기주성엔 황제의 외궁까지 있지 않는가? 경마축제동안 그 외궁에서 지내면 될 것인데도 황제는 일부러 양인성에서 짐을 풀고는 경마 당일날에만 이곳으로 온단말이네.” “태천에게 경고하는 것이군요. 그렇다면 태천도 황권에 대한 욕심을...?” “뭐, 눈앞에 금덩이가 있는데 손안뻗을 놈이 어디있겠냐 하것만은.”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턴 예사는 하늘을 올려다 본다. 문득 떠오르는 일이 있어 자휼이 묻는다. “그러고보니 기산성에서 좌보님을 만나뵈었습니다.” “...그래? 으음. 잘 지내고 계시겠지.” “여전히 마르셨지만 전보다 느낌은 굉장히 좋던걸요. 하하, 믿어지세요? 그분께서 여인을 찾기위해 떠나셨답니다. 냉철한 선비들에게도 불타는 연정은 찾아오나 봅니다.” “...” 혼자 웃고 있다고 느낀 자휼이 예사를 바라본다. 쓴 표정을 애써감추는 예사는 하늘을 멍하니 본다. “예사님?” “어? 음. 그래. 자네는?” “예?” “자네에게도 그 누군가가 없지는 않을 것 아닌가.” “어, 그게...아직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역시 아직은... 그게 그러니까.” “뭔가, 그 엄마라도 사랑하는 표정은.” 뜨끔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는 자휼을 이상하게 바라본다. 자휼은 달아오른 얼굴을 식힌다. 예사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웃음을 지으며 자휼의 어깨에 팔을 올린다. “자네 설마 아직?” “예?” “숫총각이라던가?”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더욱 당황한 표정으로 자휼은 부정한다. “부모님은 안계셨지만 할아버님이, 그러니까 목씨정륜님께서 챙겨주셨으니까요. 만월밤의 연인이야 저에게도 있는 것이 당연합니다!” “흐음, 그렇지. 그나이가 되었으니 만월인연(滿月因緣)이 열은 넘을터이지. 그런데 아직까지 총각인 것을 보면 그다지 마음에 맞는 인연이 없었던 모양이야?” “그게...” “왜?‘ “아우가 너무어려 할 수가 없었으니까요.” 약간은 쑥스러움, 아쉬움과는 다른 허탈함이 묻어난다. 자휼은 멋쩍게 웃는다. “제 아이가 너무 어려서 십년이 넘도록 지내야하는 문갓살이(서옥제)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병도 있고해서...어떻게 하다보니 지금까지 이르렀습니다만 그다지 서운하지는 않습니다.” “으흠? 그러고보니 자네 아우도 총각아닌가? 아우는 어떤 이유인가? 고이 품에 넣어 기르다보니 넘겨주기 아쉽던가? 담사이에서 고생하는 것 못보겠지?” “설마요.” 크게 웃은 자휼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한다. “사내라면 사랑하는 여인의 담곁에 서서 떠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아우녀석은 만월인연을 바랄 나이에 전쟁터에서 지내야했고 그 이후에 한족의 성인 목래에 정착해서 그다지 기회가 많지는 않았지만 기회가 된다면 만월인연을 찾아 이슬을 맞던 놈입니다.” “그런데 없었어?” “목래에는 혈족이라곤 손꼽을 정도였거든요. 항상 시무룩한 얼굴로 돌아와서 깊게 물어보지는 못했지만 마음에 드는 아이가 없었던지 아니라면 멋지게 월불출(月不?차였음)되었는지도요.” “으흠. 하긴 첫 만월인연이 이어지기는 힘든 일이지.” 그렇게 말하는 예사의 표정은 몹시 따듯해보여 자휼은 더 묻는다. “예사님의 만월인연은?” “난 멋지게 나의 첫 만월인연의 담에서 신나게 떨었다네! 하하하! 내가 타고 다니는 마각을 보았는가? 인연이 준 내 첫 재산이지.” “마각은 잘 모르지만 첫 인연이 닿았다니 그거 좋은 더 없이 행복한 인연이군요. 지금 인연은 잘 계십니까?” “...어...음” 예사는 잠시 눈을 깜박거린다. 잠시 생각하는 듯 하다가 그 거친 얼굴에 환한 웃음을 짓는다. “응.” “행복하시군요.” 자휼의 부러운 눈빛에 예사는 미소지으며 고개를 숙인다. “행복하고 말고.” 말을 재촉하는 마른 사내의 표정은 혼란스러웠다. 한숨을 쉬고 땅을 바라보다 미친 듯 웃기도 한다. 눈물이 나오는 것 같아 소매로 눈을 찍어내면서도 웃기도 한다. 미치겠네. 백라는 길가에 보이는 작은 민간집에 들어가 물을 청한다. 지쳐보이는 여인이 나와 백라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우물을 가리킨다. 말을 끌고 우물로 가 물을 길으려고 고개를 숙인다. 등뒤로 돌이 날라와 따끔한 느낌에 돌아선다. 얼굴에는 잔뜩 겁먹은 어린 아이들이 작은 눈에는 분노를 담고 부들 부들 떤다. 백라가 이해할수 없다는 표정으로 두 팔을 벌리고 아이들에게 다가가자 작은 어린아이가 자신보다 한머리는 큰 아이를 꼭 껴안으며 외친다. “내 동생을 건드리지마!” “...동생?” “우리 집에서 나가!” 백라는 조금 물러나 아이들을 바라본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두 아이는 닮은 듯 하면서 그 태생이 의심스러울정도로 타른 특징을 가졌다. 말을 들어보면 둘은 남매인 듯 했다. 이런. 백라는 뒤로 물러났다. 아까 본 여인의 자식들일것이다. 아비가 다른 아이들. 집안을 둘러보자 어디에도 사내의 손이 닿은 듯한 흔적은없다. 필히 저 여인은 이런 외진곳에 혼자서 살아가기 위해 인연이 없는 사내의 아이들을 낳아 기르고 있는 것이리라. 사내 아이는 한족인 것 같았지만 동생이라고 한 덩치큰 아이는 거란혼혈 같았다. 이상하게도 여자아이의 눈이 멍해 보인다. 자세히 보려고 몸을 숙이자 등뒤에서 지친 여인의 목소리가 들린다. “바보에요.” “예?‘ “바보라구요.물을 마셨으면 돌아가세요.” “아...” “보아하니 행색은 초라하나 배우신분 같은데 나처럼 더러운 창녀의 뱃속에 자신의 아이를 남기고 가진 않으시겠지요?” 여인의 말에 백라는 인상을 쓴다. “난 그런 사내가 아니오!” “난 사내라는 것을 믿지 않아요.” 겁에 질린 아이들에게 다가간 여인은 아들의 손을 잡고 딸을 안아든다. “돌아올것이라 약속했던 나비는 더 향기로운 꽃을 찾아 떠나고 초원에 사는 짐승같은 것은 자신의 딸을 범해 바보로 만들어요. ” “...” “여인이 난세를 살아가려면 어찌 이리 고달픈지요. 살아남기 위해 남의 아이를 가지면 손가락질 하고 빌어먹기위해 동양을 나가면 더럽다하지요. 시들어버린 꽃을 본 옛 정인은 더 이상 그 꽃을 거두려 하지 않아요. 치사한 이 인생을 그만두려 해도 내 뱃속에서 나온 자식에게 몹쓸짓이라 이렇게 하루 하루를 연명하죠.” “왜 나에게 그런것을말하시는것이요?” 여인은 쓰게 웃는다. “당신의 표정이 날 보고 도망친 내 낭군과 같기 때문이에요.” “...!” 백라는 황급히 등을 돌린다. 말을 재촉해 그 집을 빠져나온다. 말을 재촉해 그들과 멀어져 점이 되어버려 시선에서 완전히 사라진후에도 머리가 아프다. 그 여인의 비참함이, 받아내야 하는 그 큰 고통이 느끼고 동정하면서도 내 인연이 그렇다는 것은 이해 못하는 자신이 그 무엇보다 어리석고 치졸해 얼굴이 달아오른다. 언제가 되어야 이런 이런 일에 초월할수 있을것인가. 169 딱딱하게 굳어있는 표정에 말장난은 통하지 않는다는 고압적 무언이 좌중을 긴장시킨다. 술 따위가 넘어갈 리가 없건만 그래도 명색의 축하연회라 왕자가 잔을들면 좌중도 같이 잔을 든다. 서리가 내릴 것 같은 표정의 체이첸은 그대로 연회를 계속해 저녁무렵 일찍 파한다. 나름대로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고 모여들었던 고관들이 되려 눈에 가시가될까 두려워 모두 빠르게 궁을 나간다. 모두들 사라지는 모습을 이층의 창에서 내려보며 레이첸은 웃는다. “거참, 형님은 표정하나로 저 많은 놈들을 물리치는군요.” “흥.” 체이첸은 아무말 없이 차를 따라 마신다. 레이첸이 그 앞에 마주 앉아 눈동자만 올려 그를 바라본다. 자신과 흡사한 외모에 성격은 정 반대의 친동생. -서공 스스로는 황자에 대한 의욕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정말일까. 창밖에 사라지는 연회의 손님들을 재미있다는 듯 보는 동생은 아직 철부지다. “레이첸.” “예.” “누가 선율을 죽인걸까?” “...” 안보이게 가슴을 쓸어내린 레이첸은 창밖을 바라보며 시선을 돌린다. 체이첸이 허탈하게 웃는다. “정말로 설객이란 존재는 그 누구도 다스릴수 없는 것인가?” “...그럴지도요.” “그 잘난 설객의 황제 한번 만나보고 싶군. 어떤 놈이기에 이런식의 충성이 가능한걸까.” “그건 충성이라기 보다는 그저...” “그저?” “...아무것도 아닙니다. 말실수에요.” 타고난 성품이 그러한 것이 아니오? 자신들의 무리를 지키려는 타고난 본능이 들개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먼저 잡아먹힐지언정 그 집안을 내어주지는 않는단 말이요. 그들의 황제는 우리가 생각하는 일인자가 아닌 일종의 중계자같은 것일지도 모르오. 체이첸은 차를 한잔더 마신다. 뒷늦께 술이 오르는지 얼굴이 빨갛다. “레이첸, 궁밖으로 나가 우관을 좀 만나고 오지 않겠나?” “...어떤 이유로?” “선율이 죽었으니 우관의 충격이 컸을 것이다. 하나를 잃었다고 해서 두개를 잃을수는 없는 일이지 않느냐. 좌천중이니 불안하기도 할터이다. 몸이 허약해보이니 심정도 연약할것. 네가 가서 날 대신해 안심시키지 않겠나?” 심정이 약해요? 어림없소 형님. 호랑이 아가리에다 손을 넣고는 그 혀를 잡아뺄놈이요. 하긴 나도 그놈을 처음 보았을땐 형님과 같은 생각을 했었지만. 하루 보고 이틀보니 그게 아니더이다. 그 작은 몸에서 어디 그런 배짱이 있는 것인지. “하긴 또다시 자객이 들어갈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일단 제가 한번 가볼까요.” “고맙구나.” 레이첸은 피식웃는다. “그럴필요는 없소. 형님과 나 사이에.” 퍼뜩 눈을 뜬 자례는 자중을 돌아본다. 옆에 붙어 있던 차의원이 눈치채고 말을 건다. “괜찮은가?!” “장부!” “엥?” 가슴을 부여잡고 일어난 자례는 뜬금없이 장부타령을 한다. “내가 쓰러졌을때 내 오른쪽에 놓여있던 장부말입니다. 그거 어디있지요?” “진정하게. 진정하고 다시 누워.” “장부를 달란 말입니다!” 와락외치고는 가슴의 고통에 부르르 떤다. 차의원이 웃기다는 듯 실소하며 자례를 부축해 다시 눕힌다. “그렇게 일을 열심히 하는 줄은 몰랐군. 장부야 어딘가에 보관되고 있겠지. 나중에 관사에게 물어보면 될것이 아닌가.” “...무슨 일이 있었지요?” “그걸 지금 내가 자네에게 물으려고 하는데 말이야.” “누군가 와서 손님을 살해했어요. 저도 죽이려고 해서 대들다가 기절한것뿐인데요.” “그래? 일은 좀더 복잡한데 말이야. 자네는 편하게 외우고 있군.” 차의원은 잠시 고민하다가 소야를 힐끗본다. 전에 맞았던 기억이 남아있는지 소야는 귀를 세우고 있다가 얼른 몸을 뒤로 뺀다. 차의원은 소곤소곤 거린다. “자네를 찾아왔던 손님이 황궁안에 있는 사람이라며. 시체를 황궁안으로 회수시키라는 명령을 받았다네.그리고 자네 복귀할 것 같아.” “복귀를?” “응. 아직 잘은 모르지만 아까 관사가 황궁에서온 편지에 자네이야기가 적혀 있다면서 준비시키더라구.” “...아직은 아닐겁니다. 아니 벌써인가.” 이해할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 자례는 다시 일어나려고 한다. 차의원이 고개를 저으며 묻는다. “왜?” “차를 마시려고요.” “시키면 되잖아.” 차의원이 소야를 향해 고개를 으쓱이자 소야는 입을 내밀고는 얼른 옆방으로 도망가버린다. 그 버릇없는 행동에 차의원이 호통을 친다. “저 놈을 그냥!” “됐습니다. 차 정도는 스스로 타먹겠습니다.” “그럼 저런놈을 어따 쓰게?” 못마땅하는 얼굴을 차워원은 짜증을 내며 스스로 차를 타서 자례앞에 소리나게 내려놓는다. “마셔.” “감사합니다.” “나원. 자네랑 나는 어째 이런 인연인가?” “...오늘이 몇일입니까?” “전날이 2왕자의 생일이였다네.” “어? 그럴리가?” “당연한 말이지만 자네는 그동안 잤어.”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차의원과는 달리 자례는 이를 바득이며 속상해한다. “이놈의 잠은 계속 늘기만하고, 잠귀는 어두워지기만 하니! 다시 애가 되는 것도 아닐텐데!” “몸이 안따르니 어쩔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아. 아무튼 자네 일어났으니 이젠 난 가봐야겠어. 내일은 전과 같이 일할수 있겠지?” “예.” “놈담이야. 푹자라고.” 차의원은 웃으며 나간다. 어느정도 정신이 들자 자례는 옆방으로 나가 관사에게 장부에 대한 말을 한다. 하지만 피묻은 그것들은 다 태워버렸다는 이야기에 한숨을 쉰다. 방으로 다시 건너온후 탁자에 조심스럽게 앉아 상처를 눌러 고통을 던다. 미간을 찌푸리며 마지막으로 보았던 마고라는 이름이 어떤 한자로 적혀 있었는지 기억해내려고 한다. “저기 관사님이 찾으십니다.” 행여나 장부에 대한 이야기일까봐 얼른 일어나 옆방으로 건너가지만 방안에서 자신을 보고 일어나는 이는 소용부인이다. 그녀는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자례에게 다가온다. “이야기 대강 들었습니다. 몸은 어떠세요?” “참을만 합니다. 그런데 어디서 제 소식을?” “물론 제 낭군님께 들었지요.” “마기 장군께서 지금 궁밖으로 나와계십니까?” “예. 어제밤에 임시휴근을 내고 나오셨답니다. 이곳으로 직접 오실수는 없으니 저보고 가보라 하더군요.” 소용은 한숨을 포옥내쉬고는 자례의 얼굴에 손을 댄다. “얼굴이 반쪽이 되었군요. 어쩜 이리 사람마음을 긴장시키신단 말입니까.” “죄송합니다.” “낭군께서 공에게 전해주시라 한 것이 있었습니다.” 소매를 뒤적거리던 소용은 편지를 한 장 꺼낸다. 뭔가 비장함이 어린 표정으로 내미는 그것은 마치 결투장과 같아 떨떠름해진다. 편지를 받아들자 지금 읽어보라는 권유에 따라 그것을 읽는다. 곰곰이 생각에 잠겨든 자례에게 소용이 말을 건다. “심각한일이지요?” “예? 아뇨. 신경쓰실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낭군님의 얼굴이...” “예?” 소용은 눈을 깜박이며 뭐라 말하려다가 고개를 흔든다. “아닙니다.” “마기 장군께서 어디 편찮으신겁니까?” “아뇨. 아닙니다. 절대로요.” 비녀가 뽑힐 듯 머리를 흔들며 부정하던 소용은 자례의 말없는 진지함에 울먹울먹거린다. 그 거다란 덩치로 슬픔에 울쩍해하는 모습이 그다지 아름답지는 않지만 그만큼 진지하다. “나는 알고 있어요.”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낭군이 다시 떠나려고 하는거요.” “...마기 장군님이 어디로 가신단 말씀입니까?” 훌쩍훌쩍거리는 소용을 달랜다. “장군께서 부인을 아끼니 두 인연이 벌어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버님께서 그는 날 버리고 갈사람이라고 했는걸요!” “예?” “무리해서 따라붙지만 소용의 마음은 불안해져요. 결국 어느날에 낭군은 소용을 버리고 가버리겠죠. 그때처럼 말이에요.” 자신으로는 이해할수 없는 말에 잠자코 듣고만 있는다. 달래주지 않아서인가 점점 더 심해지는 소용의 울음소리에 고개를 돌리지만 딱히 해줄말이 없다. 하지만 아무말도 하지 않는 자신도 참 딱해보인다. 뭔가 해봤어야 방법을 알지. “음, 마기 장군님이 떠나신적이 있으십니까?” “그 사람 얼마나 못됐는데요. 지금은 부처님처럼 변했지만 예전엔 늑대보다 더 했는걸요. 저 따위는 신경쓰지 않고 멀리 멀리 떠나갔답니다.” “하지만 돌아오셨잖아요?” “당연하죠.” “그럼 이번에도 다시 돌아오지 않으실까요?” 그말에 동그랗게 눈을 뜬 소용이 자례를 바라본다. 멋쩍은 얼굴로 자례가 다시 말한다. “이번에도 돌아오실겁니다. 아무리 먼곳으로 가는 철새라도 봄이 오면 다시 둥지를 찾아 돌아오는 것처럼말입니다.” “어머나!” 소용은 언제 울었냐는 듯 함박웃음을 짓는다. “그말은 제 낭군이 이야기해준것과 같아요!” “그럼 걱정하실필요 없군요. 이번에도 돌아오실테니까요.” “그렇군요!” 좋아하는 소용에게서 행복감이 전해져온다. 마냥 좋아했던 소용은 자례의 손에 들린 서신에 다시 진지한 표정을 한다. “아무튼 큰일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낭군의 얼굴에서 예전의 날카로움이 다시 보이니까요. 뭔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세요. 모두들 조심해주세요.” “걱정마십시오. 제 몸 하나 간수 못할 정도로 못난 칠칠이는 아니니까요.” 그말에 소용은 웃어버린다. “공이 가장 걱정되는걸요.” 170 치룬 듯 만 듯 구렁이 담넘어 가듯 끝난 2왕자의 생일이 지나자 바로 1왕자의 기일이 돌아왔다. 다른 자식들의 생일이나 기일을 모르는 척 하는 황제도 이번만은 기일행사에 참여한다. 이미 1왕자를 낳은 성목황후는 죽은 후였기 때문에 상복을 입은 자는 찾아볼수 없다. 죽은 사람이 젯밥을 잘 받으려면 그 인척이 필요하다고, 성목황후가 죽은후에는 2왕자의 기일에 상복을 입고 등궐하는 자는 찾기 어려웠다. 왕자의 기일이라고는 하나 크게 하는 것도 아니고 조그만 별궁에 위패를 가져다놓고 향을 피우는 정도라 있는 듯 없는 듯 하게 끝난다. 단지 1왕자는 전쟁에서 죽은 영웅임으로 해가 지나도 기일을 기억하는 장수가 많다는 것 뿐이였다. 태진과 레이첸도 향을 올린후 제단을 나온다. 태진이 분향을 위해 기다리는 장수들의 행열을 보며 웃는다. “저들이 1왕자의 진실을 알면 어찌 될까요?” “쓸대없는 말 하지 마라. 잊혀질 일은 잊는 것이 좋아.” “뭐. 저렇게 매년 잊지 않고 분향된다면 개죽음은 분명 아닙니다만. 친 아비에게 목을 졸려 죽는 것은 너무 처참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모든것의 원흉은 여자야. 여자는 요물같단 말이다.” 놀란 듯 태진이 과장스럽게 팔을 벌린다. “이거야 형님에게 그런말을 듣다니! 이 아우는 너무 놀라서 쓰러질 것 같소!” “장난치지마라. 사실이 그렇지 않느냐.” 둘은 계단을 내려와 길게 늘어진 돌길을 걷는다. “애초에 그 여자가 아름답지 않았으면 2왕자의 연분도 생기지 않았을터이고, 또한 황제에게 시집가는 일도 없었을것이다. 다 여자탓이야.” “그렇다면 형님의 화선도 예쁘기에 요물이라는 것이요?” 레이첸이 짜증을 낸다. “내 여자는 다르지. 여자는 이쁠수록 좋은거 아니냐.” “뭔가 말이 다르지 않소. 너무 예뻐서 요물이라더니.” “내 여자말고 다른 여자들말이다.” “거 형님은 욕심이 많소이다. 자시 여자보다 예쁜여자는 안된다는 말아니오. 내 보기엔 1왕자와 여인이 밀회를 나누었기 때문에 일이 커진것같소. 둘이 그런 사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아비가 여인을 황제에게 주었겠소.” “뭣하러 그런가 모르겠다. 얼굴은 다르지만 몸이란 다 똑같은데 말이다. 다른 여자 데려다가 안는것이랑 그 여자랑 몰래 하는 것이랑 뭐가 다를까.”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시는거요?” 태진이 되묻자 레이첸이 그를 돌아본다. 약간 장난기 어린 태진의 얼굴에 자신이 뭔가 잘못말한 것을 알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한다. “황제께서 화선을 원한다면 혼쾌히 내주실수 있다는 말이지요?” “뭐? 농담하냐?” “농담이 아닙니다. 말대로라면 소처안고 화선이다 외우면 된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너 말야.” 손가락을 들어 태진의 미간을 겨눈 레이첸이 화를 낸다. “이 이상으로 날 농락하면 너부터 죽는다.” “잘 생각해십쇼. 지금 제가 한 말이 어떤 것인지요.” “그정도를 모르는 바보는 아니다. 하지만 난 내것을 희생하면서 올라가진 않아.” “그것 아시오 형님?” 양갈래로 갈라진 길에서 태진이 먼저 왼쪽길로 들어서며 뒤를 바라본다. “2왕자나 형님이나 자기것에 대한 욕심이 과하오.” 그리고 그것은 황제에게서 물려받은것일거요. 황제는 뭔가 걸린다는 듯 미간을 찌푸린다. 히우루가 그 모습을 보고 이상하게 여긴다. “곧 그리 좋아하시는 축제에 가시는데 얼굴이 왜 그러십니까?” “묻지 말라.” 어꺠를 으쓱인 히우루는 다시 자기 일에 몰두한다. “삼일후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뭐가?” “양인성으로 가시는 일정입니다.” 단상으로 몸을 돌린 히우루가 자신이 적은 글을 읽는다. “삼일후 양인성으로 출발하시게 됩니다. 거기장군의 삼분의 일은 이틀전에 출발해 지나치는 성마다 미리 알릴것입니다. 황제는 삼일후에 황궁을 나가시게 되며 거치는 성은 전년과 마찬가지로 없고 곧 바로 양인성으로 가십니다.” “예정일은 같은가?” “예. 여행은 이주일 정도. 양인성에서 머무시는 기간은 일주일이고 기주로 옮겨 가시는 일정이 삼일, 축제에 머무시는 오일. 다시 양인성으로 돌아오시면 별다른 일정없이 다시 황궁으로 돌아오십니다.” “좋다.” 황제의 승낙에 막 승인인장을 찍으려 한다. 그때 황제가 잠시 기다리라 히우루를 멈춘다. “그렇다면 내가 출궁했을때 그놈이 오는 것이 아니냐?” “예? 아아 그렇게 됩니다. 잠깐 기다리게 하지요.” “황성에 그놈을 둔다는 것은 마음에 내키지 않는다.” 일어난 황제는 하얀 수염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긴다. 히우루가 그를 설득한다. “하지만 그가 들어온 후에 나가신다면 축제에 참여하시기는 힘들것입니다. 정히 그러신다면 축제를 미룰까요?” “그건 안된다. 축제는 파종기 이전에 행해야 한다. 파종 이후에 축제는 백성의 노동력을 갈취하는 셈이 되니까.” “어째서 말씀이십니까?” “바보같은 것. 파종이 시작되면 바쁠터이다. 내가 황궁을 나가면 각 성주가 백성들을 괴롭혀 세금을 걷을것이니 애초에 빈털터리인 파종전에 나가는 것이 현명하다. 게다가 파종후라면 막 초지가 일어날때이니 말먹일 풀을 얻기위해 성주간에 싸움이 날것이 틀림없어.” 냉냉하고 아니꼽다는 목소리지만 말하는 바는 굉장히 공명해 히우루는 미소짓고 만다. “황제께서는 지당히 현군.” “아첨을 한다면 그 입을 가만두지 않겠다.” 하지만 그다지 기분은 나쁘지 않다는 표정이다. “황궁을 나가기 전에 행사가 있으냐?” “특히 정해진 것은 없습니다. 대외적인 일로는 14왕자의 분주. 오걸매의 입궁과 그에 따른 잔업. 아, 그리고 15왕자의 기일이 있습니다.” “흠. 분주부터 하라. 말커지면 거창해지니까. 제사는 내가 궁을 나간뒤에 한다. 그건 너에게 맡기지.” “알겠습니다. 오걸매쪽은 어찌하면 좋을까요?” “스스로 골라가게 해.” “예?” “날 보지 않아도 좋으니 오걸매가 오면 네가 처리하는 것이다.” “하지만.” “비서랑들을 모아두고 마음에 드는 놈을 데러가라 하라. 중요한 놈이 있으면 미리 빼어놓으면 되지 않나.” 히우루는 거절하려고 하지만 황제의 눈빛에 수긍한다. “알겠습니다.“ “너무 겁먹을 것은 없다. 놈이 미친 것은 분명하지만 살인자는 아니다.” 고개를 숙여 수긍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미친것이나 살인자거나 마찬가지라 여긴다. 손끝을 올려 자신에게 다가오는 나비를 히롱하던 왕씨는 누군가 들어오는 모습에 손을 내린다. “무양하셨습니까.” “건강해보이는군.” 마기가 고개를 숙여 깊게 절한다. 정말로 오래간만에 풀어내린 머리가 고개를 숙임에 따라 아래로 흘러내려 어깨를 감싼다. 단상에 올라 앉은 하류사는 마기장군을 지긋이 바라본다. “어쩔수 없이 선인도 늙어가는 모양이오.” “부담스럽습니다. 어린 날의 치기일뿐입니다. 이제는 선인이 아닙니다. 일개 장수일뿐.” 하류사는 마기를 바라보며 미소짓는다. 일족에서 가장 강한 검과 정신을 가진 장수가 하는 겸손은 오만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고개를 숙인 그 모습에 진심이 담겨 고개를 끄덕인다. “무슨 일인가?” “14왕자는 낭성으로 들어갔습니다.” 마기가 근심스럽게 말을 멈춘다. “결국 그를 끝까지 도와주게 된 것 같아 몹시 걱정됩니다. 물론 그 결정이 계주를 포획하는데 도움이 될 것은 분명하지만.” “꿈자리는 안좋아.” “예?” 마기가 되묻지만 하류사는 그냥 고개를 흔든다. “우보는 잘지내는가?” “가슴에 상처가 생겨 요양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역시. 머리를 잘쓰는군.” “무슨 말씀이신지.” “선인께서도 짐작은 하셨을거요. 오걸매가 화성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반년전과 마찬가지로 황성에서 새 비서랑들이 뽑혀 호북으로 나가게 될것입니다. 마기장군께서 우보와 특별한 인척관계를 나타내지 않으셨으니 그 역시 축출될것이 분명, 몸에 상처를 입었다면 호북까지 가는 길을 생각해서 보내지 않을터.” “악운을 떠나보냈을때 오걸매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습니다만 그가 자해를 하여 머물생각인 것은 예상치 못했습니다. 알았다면 미리 막았을것을.” “그것은 나도 예상치 못한 것이니 선인께서 염려하실바가 아니오.” 고개를 끄덕인 마기의 검은 눈에 새파랗게 차가운 바람이 스쳐지나간다. 그 수려한 용모에 얼음같은 눈동자가 보는 이로 하여금 참으로 미묘한 느낌을 끌어낸다. 손을 대고 싶으나 손을 대면 위헙하다는 것이 분명한, 위험하기에 아름다운 무엇. “선인께서는 젊은 날로 돌아가시고 계신 것은 아닌가.” “설마요. 이젠 반백을 향해 달려가는 나이아닙니까.” “그렇지 않다면 뭔가 느끼고 있는건가.” “우둔한 장수가 어찌 지배자의 머리를 짐작한단 말입니까.” “장군이 오늘 내게 온 것은 선인의 밀명을 행할때가 아닌가 싶어서가 아닌가.” 하류사가 고개를 갸웃하며 선인의 모습을 내려본다. 미동없이 그림처럼 앉아 있던 마기는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습니다.” “좀더 기다려라.” “알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마기장군에게 하류사가 생각났다는 듯 묻는다. “인연은 잘계시는가?” “예.”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약간 돌린 마기는 웃는다. “제 인연은 항상 씩씩한 여인이니까요.” “소중한 것이지.” 마기가 방을 나가자 하류사는 닫혀지는 방문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닫혀진 문에서 조그만 아이가 자신을 돌아보며 웃고는 달려온다. 손을 뻗어 아이를 안아 무릎에 올리고는 머리를 쓰다듬는다. 아이는 그것이 싫은 듯 고개를 휙휙 돌리며 거부한다 퉁. 하고 공이 바닥을 구른다. 171 얼마 지나지 않아 태진은 낭성으로 분주하게 되었다. 모두들 레이첸이 아쉬워할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는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낭성까지 오는 동안 태진일행은 마음편히 여행길을 감상했다. 궁안에서만 생활하던 왕자라면 피곤했을지도 모르지만 레이첸과 사냥을 많이 나갔던 태진에게는 편한 여행이였다. 낭성에 도착하자 마중나온 자는 예상못한 계주 태수였다. 주위를 둘러보자 낭성관리들의 모습도 보인다. 주인이 죽어 산에 들어가버린 자도 있지만 이렇게 계속 남아 새 주인을 모시는 자들도 있기 마련이다. 보통 장수들은 유랑을 하며 새 주인을 찾지만 엉덩이 무거운 선비들은 찾아오는 주인을 모신다. 태진은 일단 낭성의 모든 관리들을 자신의 사람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일단 인수인계를 위해 전태수의 관리들을 내치지는 않았지만 작은관직의 하나하나에도 자신의 사람을 끼워넣어 언제라도 교체할수 있게했다. 다음날 저녁무렵에서야 마중나왔던 계주태수와 만나 이야기를 나눌수 있었다. 계주태수에게는 스님한명이 딸려 들어왔는데 이름은 후소였고 불가에 귀의한 사람이라고 했다. 전 태수와 절친한 사이였으며 무엇보다 잃어버린 친척을 찾는데 도움을 준 사람이라 소개했다. 태진이 후소에게 묻는다. “호오. 스님께서 태수의 잃어버린 인척을 알고 있었다는 겁니까?” “우연한 인연에 바람처럼 닿은 것이지요.” “하지만 내가 분주전 황궁에서 인척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적이 없소. 여기 계신 계주태수님께서 성을 내놓았다는 이야기까지 들었지만.” 태수가 고개를 저었다. “성을 내놓았다는 것또한 진실이고, 제가 다시 상소를 올려 성을 제 인척에게 주십사 한것도 진실입니다.” “그렇다면 그 인척은 확인된것이요?” 흥미있다는 태진의 말에 후소는 어깨를 으쓱일뿐이다. 대신 태수가 말한다. “혈육의 증표는 보았습니다. 또한 문파의 검까지도 우리의 사이를 증명했지요. 그는 틀림없는 저의 인척이며 형님이십니다.” “그렇습니까. 한번 만나 뵙고 싶군요.” “형님께서는 지금 계주에 계십니다. 실은 이쪽으로 찾아와 왕자께 인사를 드리고 싶다는 것을 제가 만류하였습니다. 이 늙은이가 실주를 한상태로 성을 비워놓아 한시라도 급하게 그분께서 성을 인수해주십사 하는 욕심이였으니 절 나무라십시오.” “아닙니다.” 태수의 말에 태진은 손을 들어 만류한다. “어찌보면 계주는 제가 다스릴 낭성의 모성이니 제가 찾아뵈어야 하겠지요.” “아아, 근간 파낭성에 대한 일로 형님께서는 참으로 바쁘시답니다.” 진절머리를 치며 태수는 태진에게 설명한다. “파낭의 장촌산에서 오랫동안 지냈던 화적의 무리들이 어느순간에 사라지는 바람에 파낭은 지금 화적과 국군과의 전쟁중이랍니다. 이거 화적이 없어지면 편해질줄 알았더니만 모든 난적들이 파낭을 통해 계주까지 몰려드는 형국이라 파낭의 태수도 무척이나 난감해 하고 있습니다.” “흐음. 그러고 보니 들은적이 있습니다. 때아닌 북쪽의 화적때가 무너져 파낭과 계주가 난적의 땅따먹기가 되어버리고 있다고.” “모두 제가 미천한 탓입니다.” 고개를 숙이는 태수와는 달리 태진은 즐겁다. 그렇지. 일이 그렇게 잘 터져 주었지. 그래서 이 계주 태수가 황명을 받아 입궁하려고 할때 자식들이 모두 암살당했지. 못난 이놈이 제풀에 놀라 계주를 내놓을때는 아차했지만, 계주를 다시 이어받을 사람이 생겼다니 이건 나에게 길조다. 어차피 레이첸이 힘을 키우려면 계주보다는 황제의 눈에서 멀어진 파낭이 제격이니까. “그렇다면 그분께서 계주를 돌보고 계시어 일이 진정이 된 모양입니다. 이리로 오는 과정에 그 어떤 난적도 볼수 없었습니다.” “실로 군주의 모습이 아닐수 없습니다.” 계주 태수는 홍조를 띄우며 인척을 칭찬한다. 어찌보면 팔불출이라 할수 있는 모습이지만 그렇기에 일이 이리 수월하게 돌아가는 것이라 생각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수긍해 준다. 아까부터 말없이 앉아 두사람의 대화를 듣기만 하던 후소를 힐끗 곁눈질한다. 눈을 감고 있는 것이 명상을 하는건지 도를 닦는건지 아니면 그냥 자고 있는 것인지 모르지만 그는 조용하다. “스님께서는 말수가 없으시군요.” “저는 말이 없지만 왕자께서는 무척이나 이곳을 마음에 들어하신 듯 합니다.” 후소는 눈을 뜨고 태진을 본후에 살짝 웃고는 다시 눈을 감아버린다. 태수가 태진에게 후소는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말하며 중재한다. “이곳이 정리 되시면 곧 제 형님과 함께 찾아뵙겠습니다.” “그러지요. 모성의 태수를 뵙는것도 영광.” 하지만 후소는 고개를 흔든다. “아직 감곡공이 태수로 내정된 것은 아니니 그런 결정은 너무 이릅니다.” “감곡공이라 하시는가요. 내정이 안되었다는 것은?” 태진의 물음에 후소가 말한다. “황제께서 계주를 통치할 인물은 뛰어나야 한다시며 회수를 거절하셨습니다. 결국 감곡공에겐 실질적인 관력은 없습니다. 실주 상태의 성이니 뛰어난 선비로써 기질을 발휘하고 계시는 것 뿐.” “그렇습니까?” 태수가 걱정말라는 듯 덧붙인다. “하지만 따로 계주성으로 나올만한 분은 없다 하시니 결국엔 형님께서 성을 받으실겁니다.” “하지만 세상은 한치앞도 모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몇일전만해도 이 의자에서 편이 차를 마시시던 낭성 태수께서 한밤에 비명으로 돌아가실줄 누가 알았단 말입니까.” “흠.” 태진은 입을 가리며 안됐다는 표정을 짓는다. 후소와 태수가 계주로 돌아가고 나자 태수의 방으로 들어온다. 달빛이 가득 들어오는 조용한 방안에는 전 태수가 죽었다는 사실 따위 느끼지 못하도록 고요하고 정갈하다. “사람이란 죽으면 끝인거지.” 침상에 앉아 호기있게 웃는다. 하지만 바람이 불고 창이 덜컹거리자 웃음을 멈춘다. 내가 죽인 사람의 침대에서 누워 자는 것이 쉬운것은아니다. 태진은 결국 사람을 불러 태수의 방을 북쪽의 큰방으로 옮긴다. 전날 파란만장하게 모든 준비를 마친 황제의 일행이 큰 북을 울리며 황성을 나가게 되었다.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익이 어깨를 으쓱이며 웃는다. “이거 한번 나가는데 저렇게 힘빼서야 어디 두 번다시 나가겠나.” “이걸로 우관은 요번달 내로 황궁에 돌아오지 못하는군요.” “에? 너 언제 돌아왔냐?” 익숙한 목소리에 등을 돌리니 그 삐닥한 표정의 막관이 서 있다. “너 근신은 풀린거냐?” “그러는 양만관역시 근신이 풀린 모양입니다?” “어제 저녁에 풀렸다. 너 역시 그러냐?” “예. 하지만 우관은 안풀렸어요.” “요양중이라 그래. 상처가 좀더 아물면 환궁시킨다 한다. 일단은 풀렸지.” 빠른 소리로 말하고 등을 돌리는데 역시 막관이 자신을 따라온다. 신경질적으로 뒤를 돌아 톡쏜다. “왜?” “어디 다쳤나요?” “안다쳤어. 보면 모르냐?” “우관이요.” “잘몰라. 나보다는 네가 더 알기 쉬울텐데 날 귀찮게 하지마라.” “왜 그렇게 날 미워해요?” 익은 웃기다는 듯 팔짱을 끼고 막관을 본다. “네 하는 짓이 어디귀여워야 귀여워해주지.” “그럼 우관은 특별히 귀여운가요? 좀 작긴 하지만 귀여운 얼굴은 아닐텐데요.” “물론 그렇지. 하지만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질문이나 행동은 안해.” “내가 양만관을 불편하게 하나요?” “심하게. 그럼.” “기다려요!” 계단을 뛰어 도망치다시피 내려가는 익의 어깨를 와락 잡는다. 싫은 얼굴로 손을 뿌리친다는 것이 그대로 균형을 잃고는 뒤로 넘어진다. 막관이 놀라 다시 잡아주려고 손을 뻗나 그대로 넘어져 계단을 굴려 내려간 익은 꼼짝을 안한다. “사실은 별것 아니지 않습니까.” “작은 상처도 자네에겐 버겹지 않은가!” 차의원은 신경질을 낸다. 붕대감기가 끝나자 옷을 다시 입은 자례는 탁자위에 놓인 서신을 다시 읽는다. “저 좌천에서 풀렸습니다. 일주일 후 정도에 다시 황궁으로 돌아오라는군요.” “잘돼었군. 황궁안에는 이곳보다 좋은 약재들이 있을테니 가서 몸조리 잘하게.” “예. 걱정마세요.” “걱정않아게 하나!” 탕하고 문을 닫은 차의원이 사라지자 자례는 약간 웃는다. 고개를 돌려 벽에 기대 딴짓을 하고 있는 소야를 부른다. “소야 물을 가져와라.” “...” 소야는 뚱한 표정으로 입을 내밀면서도 주전자를 들고는 휙 몸을 돌려 나간다. 어느정도 익숙해지고 있는 모양이였다. 하지만 역시 자유롭게 지내던 때의 버릇이 안없어져 공손히 대답하거나 청소를 해주는 일은 없었다. 저 아이를 황성까지 데리고 가야할까. 맡아줄 사람이라고는 소용뿐인데 부탁한다면 들어줄것같지만 전에 반대를 했던 그녀였기에 무리하게 그러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고 황성까지 데리고 가기에는 저 아이의 방만함으로 인해 고통스러울까 싶어 데리고 가기도 그렇다. 하지만 데리고 가야 하겠지. 결국 소야를 데리고 가기로 결정한다. 한가지가 정해지자 소용에게서 받은 서신을 떠올린다. 태진이 낭성으로 떠났다는 내용. 마음은 모르겠지만 일단 몸이 멀어졌으니 4왕자와 14왕자를 멀게 한다는 자신의 밀명은 어느 정도 해결된 셈이다. 이젠 적어도 황궁안으로 들어가 태진과 마주칠 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좀더 확실히 하기 위해 4왕자에게 접근하여 둘의 사이를 벌리게 만드는 것도 좋을 것이다. 마음에 걸리는 내용은 그 다음이였다. 호북으로 임용될 경우가 있으니 그대로 좌천할것. 아마도 이미 들어 알고 있던 황족 대장군의 입성에서 비롯된 것이이라. 황제의 칭 아우라는 대장군이 때때로 황성에 들어와 비서랑들을 빼내 호북으로 데리고 간다는 이야기는 들었던 것이다. 호북은 송과의 대치중인 전선이라 가면 다시 돌아오기 어렵고 죽는 것이 더 쉽다는 소문은 공공연히 돌고 있었다. 황궁안에서 먼곳으로 임용될 경우에 뒷순번부터나 흠집이 있는 관리가 가는 것은 어느정도 당연한 일이였다. 자신도 그 대상에서 낄 것을 예감하고 악운을 보내면서 의심도 지울겸, 임용대상에서 빠질겸 겸사 겸사 상처를 만든것이다. 사실 악운이 오지 않았다면 황궁으로 돌아가 성각헌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굴러버릴까 하는 생각도 하고 있던 중이였다. 지금 걱정하고 있는 것은 익이였다. 익은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영리한 사내라 어느정도 임용에서 빠질 꾀를 부리고 있을지 모르나 정작 그는 오걸매에 관한 소식을 모르니 그대로 호북으로 떠날지도 모르는 일이다. 익은 내 곁에 있는 것이 좋은데. 뭔가 크게 도움이 된다더나 그에게 의지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있으면 힘이 되는 사내였다. 영리한 사내이니 적어도 그리 쉽게 떠나지는 않을것이라고 좋게 생각하기로 한다. 그러고 보니 오걸매라는 자는 어떤 사람이지? 잠시 고개를 갸웃한다. 황가는 왜이리 복잡한지 도무지 정리가 잘안된다. 지금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황제, 그리고 황제의 아우로 육관과 지금 온다는 대장군인 오걸매. 아들로 우리와의 전쟁때 죽었다는 1왕자. 그리고 2왕자 경락공, 막관이 모시는 3왕자 파공, 그리고 4왕자 서공 레이첸. 그리고 14왕자 태천. 그러고보니 태천의 호는 모르는군. “아아 쉬첸왕자.” 고개를 끄덕인다. 15왕자 쉬첸. 그러고보니 쉬첸은 잘 지내고 있을까 몰라. 목래에서도 황궁이 안어울리는 왕자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황궁안에서 생활하자 더더욱 그곳이 안어울리는 왕자임이 분명한 사람이였다. 쉬첸이 떠오르자 자연히 목래도 떠올라버린다. 갑자기 축 늘어지는 몸을 탁자에 엎드려 기댄다. 포기가 빠르다는 것은 그만큼 현실적이다는 것이다. 그런 자신이 바보같아 원망스럽기도 하다. 어쩌면 그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해봤어야 하는지도 몰라. 그랬다면 이런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지나간 일은 변하지 않는다. 우울하고 씁쓸해 숙인 고개를 흔들어보며 손가락으로 장난도 처본다. 하지만 텅 빈 마음을 채워지지 못한다. 외롭고 서글퍼 눈이 감기는데 누군가 밖에서 자신을 부른다.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172 얼른 일어나 머리를 추스르려 손을 올릴때 허락하지도 않았던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온다. “안녕.” “안녕하십니까.” 올렸던 손을 내린다. 그대로 머리가 쏟아져 내린다. 레이첸이 등뒤의 문을 손을 뻗어 닫자 자례는 침상쪽으로 가 벗어논 포를 입는다. “자고 있었나?” “죄송합니다. 손님이 올것이라는 생각을 못해서.” “내가 찾아온게 불만이라는 거냐?” 바로 시비다. 자례는 잠시 손을 멈추고 그 다음말을 기다리다가 말이 없자 옷을 마져 입는다. 몸을 돌려 탁자로 그를 안내한다. “차를 타올리겠습니다.” “다쳤다며?” “별 것 아닙니다.” “왜 다쳤지?” “글쎄요. 누군가 덤벼드는 바람에... 잘 생각이 안나는군요.” 그말에 레이첸이 비웃는다. “거짓말 마라. 네 정신으로 놀라 기억이 안난다고 말하려는 거냐? 알고 있을텐데.” “모릅니다. 그리고 정말로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거짓말.” “...” 자례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려 찻잎을 골라낸다. 그런 모습에 레이첸은 조초해졌다. 오늘따라 이상하네. 전에같으면 톡 쏘아 올렸을텐데 오늘은 아파서 그런지 놀라서 그런건지 별 반응이 없다. “경락공께서...” “응?” “경락공께서 서공을 보내신겁니까?” “그래. 여전히 영리하구나.” “그럼 서공은 왜 오신건가요?” “뭐? 형님이 시켜 왔다고 너도 알지 않으냐.” “절 어찌 해보시려고 온 것은 아니구요?” 그말에 레이첸이 잠시 침묵하다가 일어나 자례에게 다가간다. 속눈썹이 길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수없는 눈을 내려보며 묻는다. “왜 그런 생각을 했지?” “그 자객은 서공께서 보내신 것이 아닌가 했으니까요.” “왜?” “제게 원한을 가질만한 자가 서공뿐이 더 있습니까.” 피식웃음이 나온다.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참으려고 고개를 잠깐 돌린 레이체은 다시 고개를 돌려 자례에게 속삭인다. “너 정안족 맞지?” “아니오.” “다 알고 왔는데 시침때는 것이냐?” “무엇을 어찌 알아보셨는지 모르지만 전 아닙니다.” “난 너가 정안인인 것을 알고 있다. 넌 그 영웅이지? 영웅서에 적힌 그 목래의 석빙계말이다! 네가 그 영웅이 아니더냐!” “그것은 얼마전 죽은 선율의 이야기가 아닙니까. 전 아닙니다.” “거짓말하지마라! 난 알고 있어. 넌 그 영웅이다!” “어디서 그것을 확신하십니까?” “그거야!” 태진이 만난 지방관리가 너가 맞다고 했으니까 그렇지. 하지만 그말을 해줄만큼 멍청하지는 않다. 그말을 그대로 누가 자객을 보냈는지에 대해 알려주는 것과 다를바가 없으니까. 하지만 욱한 심정에 자꾸만 말이 튀어나올것만 같다. 레이첸은 자례를 손가락질하며 말을 계속 삼킨다. “좋아. 그럼 다른거 물어보지. 곡양에서 날 보았던 것이 너가 맞지?” “그렇습니다.” 잠시 얼빠진 표정이 된다. 이렇게 쉽게 대답해주리라 생각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대로 뒤로 물러난다. “난 널 죽일꺼다.” “왜입니까?” “말해줄수 없다.” “언제요” “지금.” 레이첸이 침상으로 다가가 한쪽 휘장을 손을 당겨 찢어낸다. 그것을 자례에게 건낸다. “목을 매어라.” “제가 순순히 그렇게 하시길 바라십니까?” “그래. 난 너가 그 가짜 영웅의 죽음에 대한 충격으로 자결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과연. 그러나 그것을 누가 믿을까요.” “적어도 내 형님은 믿게 할수 있지.” “흐음. 너도 그렇게 생각하니 소야?” 탕캉하는 소리가 들리며 방문앞에서 누군가 빠르게 달려가는 소리가 들린다. 레이첸이 벌컥 문을 열었을땐 얼빠진 표정으로 서있는 병사둘이 보이고 저 멀리 사라지는 꼬마아이가 한명 보인다. 발빝에 깨진 주전자와 쏟아진 물이 보인다. 어처구니 없는 등뒤로 자례가 말한다. “죄송합니다. 아직 좌천이 끝난 것이 관사에게 전달이 안되어 계속 감시받고 있었습니다.” “너...이 여우놈!” 쾅소리가 나도록 문을 닫은 레이첸은 씩씩거리며 자례를 바라보다가 손에 든 휘장을 느낀다. 그냥 죽여버릴까. 휘장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살풋 차갑고 하얀 손이 휘장을 움켜진 손위로 올라와 지긋이 누른다. 놀라 고개를 드니 미간을 찌프린 자례의 모습이 보인다. 그 검은 눈동자에서 이상하게 왕자의 신분으로 자객노릇을 하고 있는 자신이 비춰보여 몹시 창피하다. “그만 두십시오. 이런짓.” “...쳇.” 등뒤로 그것을 던진다. 미끄러지듯 휘장이 땅아래로 떨어져 버린다. 레이첸은 못믿겠다는 듯 자례를 보고는 실소한다. “너 사람을 몹시 부끄럽게 만드는 재주가 있구나.” “차를 못타드리게 되어 안타깝군요.” 마른 찻잎을 들여다보며 자례가 미소짓는다. 그 옆모습에서 쓰게 웃는 미소에서 여전히 사기인형이 잔향을 발견한다. 아니라고 머릿속에서 되내이지만 이미 떠올려 버린 환상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가가 그의 손에서 마른 찻잎을 빼앗듯 낚아체 입속에 털어넣고 씹는다. 약간 놀란 표정의 자례의 모습은 눈을 크게 떠 마음에 든다. 찻잎은 역시나 써 인상을 쓰며 레이첸은 자례에게 말을 건다. “이봐.” “예.” “고개를 옆으로 해봐.” 전에 손을 달라고 했을때와 똑같은 표정으로 레이첸을 바라본 자레는 작은 한숨을 쉬더니 고개를 옆으로 돌린다. “좀더.” “...?” “역시.” “...” “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왜 고개를 돌려야 하는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거 말고 평소에 말이야.” 자례가 뒤로 물러나 레이첸을 바라본다. 찻잎을 우물거리는 레이첸은 편하게 탁자에 앉는다. “뭔가 생각하고 있지 않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무척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레이첸이 묻는다. 자례는 좀 난감하다는 표정을 한다. “그냥...이것 저것을. 특히 생각하고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냐...” “게다가 제 생각을 알아본들 그와 같을수는 없지 않습니까.” 진지한 자례의 표정에 레이첸은 잠시 멈칫한다. “너 알고 있었냐?” “그는 유명하더군요. 하지만 저는 그가 아니니 저를 보시고 그를 떠올려도 헛짓입니다. 그를 이해하고 싶으시면 그가 했던 말과 행동을 떠올리고 생각하시는게 정확합니다.” “하지만 너는 그와 똑같아.” “어떤 점이?” “뭐랄까...모르겠다. 하지만 널 보면 그가 떠올라. 이것은 나뿐만이 아닐꺼다. 갑자기 널 황제에게 소개시켜보고 싶군.” “...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으신겁니까?” 몸을 돌린 자례는 창문을 열고 바람이 들어오게 한다. “작고 지저분한 시골초가에서 햇살에 조는 것을 생각합니다.” “뭐?” “텃밭에 채소를 키우고 마당에는 석류나무 하나 있어 가을을 기대하는 것도 좋겠지요.” 그리고 형과 함께 추수를 하는 것도 좋겠습니다. 땅이 좋지 않아 거두어 들이는 것이 얼마 안되더라도 그 이상을 바래 걱정하지 않고 지금 손안에 있는 것으로 만족하는 하루를 보내고 싶지요. “정말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사냐?” “...예.” “너 참 욕심이 없구나.” 자레가 살짝 웃는다. “욕심이 없는 것은 당신일겁니다.” “?” “전 누구보다 최고의 욕심을 부리고 있답니다.” 손을 어깨에 올려 지긋하게 누른다. 언젠간 만난다. 그래서 내 엄청난 욕심을 꼭 부리고 말것이다. 자례의 아른해지는 표정에 레이첸은 고개를 갸웃할뿐이다. 후소는 방문을 두드렸다. 들어오라는 소리는 없지만 문을 열고 소리없이 들어간다. 방안에는 유번과 마유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족의 복장을 한 유번이 일어나 후소에게 묻는다. “어떻게 되었지?” “뭐. 그래도 아직 놈도 인간이라고 방을 바꾸더이다. 하긴 제가 죽인 태수의 침상위에서 잘정도로 뻔뻔한놈은 아닌가봅니다.”“그거 말고.” 고개를 흔드는 마유에게 후소는 진지하게 말한다. “14왕자로써는 유번님이 이 계주의 주인이 되길 바라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 눈치구요. 하지만 일단 황제가 만나 결정하겠다 했으니 모든 것은 유번님께 달렸습니다.” “너무 무리하지 마시라 말하고 싶지만...그렇지 못하군요.” 마유가 걱정스럽게 유번을 바라본다. 약간 긴장한 표정인 유번은 씩 웃는다. “이 나이정도 되었으니 거짓말 하나는 능통하게 해야하는 것이 아닐까. 모두 걱정말게.” “상대는 황제이니 어설픈 거짓말은 통하지 않을겁니다. 실제로 황제가 직접 만나보겠다는 말이 나올줄은 몰랐습니다. 도성의 유견님께서 무척이나 걱정하고 계실겁니다.” “그래서 기주에 마류님이 가있는것일쎄.” 후소가 걱정할 것 없다는 듯 마유장군의 어깨를 친다. 유견도 미소지으며 마유를 달랜다. “모든 것은 잘될꺼야. 다들 걱정할 것은 없을것이네.” “그나저나 오걸매가 황성쪽으로 들어온다는데 황제가 축제를 위해 온 것을 보면 엄청난 결정을 내렸군요.” 알수 없다는 듯 후소가 고개를 갸웃하며 마유에게 묻는다. “오걸매가 황성쪽으로 떠났다면 호북쪽이 비었단 이야긴데 지금 호북엔 선인이 가있던가요? 역시 아직도 을노?” ”마기는 황성쪽으로 들어간지 오래니까. 여전히 을노가 호북을 맡고 있네.“ “호북의 마나님이 굉장한 분이라 하던데...을노가 당해낼지 모르겠군요. 게다가 오걸매의 상대라니. 실제로 오걸매를 상대할만한 장수는 마기가 아니던가 하는데.” 마유가 고개를 갸웃한다. “마기가 그렇게 강하던가요? 함께 싸웠던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강하다는 것이 뭘 뜻하던가.” 후소가 진지하게 묻는다. “검을 잘쓰는 것역시 강하다는 것이지만 그 이상으로 사람을 강하게 만드는 것이 있네. 그중 하나가 기백이겠지. 난 마유 자네가 오걸매보다 검을 못쓴다고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 자네가 오걸매와 싸운다면 말릴걸세.” “그건 마유 자네가 아직 기백이 없어서야.” 유번이 거든다. “어떤 방해가 있더라도 내가 저 사람을 죽이겠다 마음먹으면 앞에 자신의 부모가 있던 자식이 있건 검을 내리치는 그런 결단 말일세. 자네는 마류가 앞에 있는데 그 뒷사람을 죽이기 위해 검을 내리칠수 있겠는가?” “...어떻게 그런짓을!” “하지만 오걸매는 그렇게 할수 있지.” “역시 마기도 능히 그럴수 있는 자이고.” 후소는 쓴웃음 짓는다. “그래서 오걸매를 미쳤다고 하는거다.” 173 익은 사과를 물었다. 얼마나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인지 심심해 죽을 지경이였다. 의원이 다리의 붕대를 다시 감아주고 나가자 한발로 쿵쿵뛰어 책상으로 가 이것 저것 뒤적이며 심심함을 달랜다. 하지만 곧 막관이 방문을 두드리자 확 속이 상해버린다. “양만관?” “분명 방안에 있지만 들어오지 말아줬음 좋겠어.” “그런 무성의한 대답이 어디있습니까.” 문을열고 고개를 들이민 막관이 말한다. “게다가 넘어진 것은 양만관의 다리가 꼬여서지 내가 밀어버린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네가 어깨를 잡지 않았으면 그렇게 뛰어가지도 않았을걸.” “아무튼. 제가 물어볼 것은 그게 아닙니다.” “그럼 뭐야?” “예전에 성각헌의 북쪽방을 사용하셨지요? 그 서문쪽에 있는 큰방말입니다.” “그런데?” “혹시 호랑이 키우세요?” “뭐?” 짐작되는 것이 있어 익은 의자에 지탱에 일어난다. 막관이 어깨를 으쓱한다. “들어가도 됩니까?” “들어와. 무슨 일인데?” 방안으로 들어온 막관, 주는 편하게 의자에 앉아 말한다. “오늘 그곳을 지나쳐 오는데 그방문앞에서 호랑이를 보았지요.” “신고했어? 황제가 호랑이를 길러 가끔 그렇게 하나 둘 튀어 나오더군. 육관들에게 말하면 된다던데.” “그게 문제가 아니라 그 호랑이가 아까전부터 우관방문앞에서 졸고 있거든요.” “뭐?” “덕에 전 방안에 들어가지도 못하겠습니다. 어디다 말하면 되는거라고 했죠?” “그냥 쫓아버려. 아직 새끼잖아.” “저런 호랑이를 새끼라고 부르는 것은 키우는 자의 만용입니까?” 그말에 어리둥절한 익은 막관에게 지탱해 방을 나가 복도의 꺽인 부분에 얼굴만 내밀고 자례의 방문을 본다. 햇살이 내리쬐는 것이 좋은 듯 하품을 쩌억 하는 호랑이는 이미 다커 사람만 했다. 뭔가 냄새를 맡은 듯 킁킁 거린 호랑이가 익쪽을 바라본다. “힉!” 놀란 표정의 익은 막관과 얼른 방안에 들어와 문을 걸어 잠근다. “언제부터 저렇게 있었는데?!” “오늘 아침에 북쪽방앞에서 있던 것을 보았고 지금 와보니 저곳에서 길목을 지키고 있군요.” “낭관에서 말하면 낭관이 육관에게 말해줄꺼야.” “낭관들은 지금 호북으로 임용할 비서랑들을 추리느라 면회금지에요.” “나보고 어쩌라구!” “호랑이 갈때까지 여기서 지내도 되요?” 막관의 태연한 말에 익이 화를 낸다. “안돼!” 책을 들어 제자리에 얹어 놓던 자례는 관사의 부름에 방을 건너갔다. 관사는 진지한 표정으로 책을 하나 밀어준다. “이게 무엇입니까?” “전에 자네가 말했던 것이 떠올라서 말이야. 이건 제작년의 장부지만 혹시 도움이 될까 해서 말이네.” 그말에 책을 들어 살펴보니 오랜시간이 지난 장부였다. 전에 장부를 내놓으라 화를 내었던 자례가 떠올라 관사가 찾아본 모양이였다. 괜시리 미안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해 자례는 고개를 숙인다. “감사합니다.” “별 것 아니네. 어쨌건 자네가 이곳에서 나가니 섭섭해지겠군. 여기서 지낸 시간이 그렇게 고되지 않았길 바란다네.” “그러하였습니다.” 거듭 고맙다고 말하고 자신의 방안으로 넘어와 책정리하던것도 잊은체 장부를 뒤적거린다. 하지만 마고란 이름을 보이지 않는다. 아쉬움에 아무말없이 턱을 괴고 있다가 일단 장부를 가지고 가기로 결정한다. “소야, 물건은 다 챙겼니?” “몰라. 챙길 것도 없잖아.” “그 옷은 누가 골라준거니? 잘 어울리는구나.” 소야는 혀를 내밀고 옆방으로 들어가버린다. 자례는 고개를 갸웃하지만 그냥 두기로 결정한다. 가슴의 상처는 아직 쓰리고 아물지는 않았지만 일단 태진이 나가고 상처 때문에 입용될 처지는 아니니 황궁안에 들어가 익에게 귓뜸을 해줄 생각이였다. 가져왔던 짐도 별로 없어 정리는 쉽게 끝나버린다. 차의원이 찾아와 자례를 찾는다. “내일 모래 성안으로 들어간다지? 좌천은 끝났겠다. 상처도 참을만 하니 이틀의 속세생활을 즐겨보는 것은 어떠한가?!” “하하하, 이런 기회가 없었다면 몹시 서운하셨겠군요.” “어서 나가세!” 어차피 장군촌에 들려 마기장군을 만나보려고 했던터라 자례는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소야는 아직도 옆방에서 나오지 않고 있어 함께 가려다가 그만 둔다. 실제로 몇 달 안되던 황궁생활이였지만 청사로 나와 길을 지나다니는 사람을 속에 들어선 순간 이 모든 것이 너무도 낯설게 보여 어리둥절한다. “왜 그래? 촌사람처럼 유치하게 굴지말고 이리오게.” “아...예.” 거리를 지나가는여인들은 팔목을 드러내는 옷을 입고 보석목걸이를 드리워 아름다움을 과시한다. 길가에 꽃을 팔기도 하고 먹거리도 나오고 겨울에 황성에 들어올때는 보지 못했던 유복민족의 복장을 한 사람들도 무리지어 지나가는 모습이 보인다. “아직 유목생활을 유지하는 색목인(色目人몽고인)들이네. 보통은 겨울이 될 때와 봄이 올때 성안에 들어온다네. 겨울엔 물건을 팔려오고 봄이 올땐 씨앗을 사려오는 것 같더군.” “색목인이라.” “가까이 가지 말게. 냄새나. 유목인이란 양을 치는 더러운 야만족이 아닌가.” 다분히 싫다는 얼굴로 차의원은 자례를 끌어당겨 다른 길로 인도한다. “하지만 지금의 황제도 유목인 출신이 아닙니까.” “큰일날 소리. 황제께서는 저런 저속한 무리들과는 다르네.” 차의원의 말에 자례는 그냥 웃고만다. 지배자가 되면 그의 모든 것은 절대적이 되는 것인가하는 생각에 씁쓸하다. 문득 바람이 무척이나 따뜻해졌다는 것을 알고 바람이 불어오는 쪽을 향해 손을 올린다. “날씨가 많이 더워졌지? 여름은 금방 올꺼야. 하긴 천하란 너무 넓어 아직도 눈이 내리는 곳이 있지만 말이야.” “정말로 곧 여름이 올 것 같은 날씨군요.” “참 나온 김에 입궁할 준비를 하는 것도 좋겠군. 옷가게를 가겠나? 여름옷은 있는가? 총각이니 관복을 지어줄 부인도 없을것이 아닌가.” 생각난김에 가자는 듯 차의원은 자례의 손을 잡아 포목점쪽으로 이끈다. 막 커다란 포목점에 이르자 낯익은 두사람의 모습에 걸음을 멈춘다. 거구의 소용은 등을 돌려도 그 모습을 한눈에 알수 있다. 아마도 마기 장군의 여름 옷을 지을생각인지 소용은 진푸른 색의 비단을 고르고 있었다. 꽤나 시간이 지났는지 하품을 하는 마기 장군은 지쳤다는 모습이였지만 소용은 다 똑같아 보이는 푸른비단을 일일이 꺼내서 마기에게 대어본다. “부인, 아무것으로나 해도 될 것 같은데...” “안되요. 여름이니 좋은 비단을 써야 지치지 않는다구요. 낭군께서는 갑옷을 입고 다니셔야 하니 더더욱 그래요. 그렇다고 황궁에서 모시옷같은 것을 허용하는 것도 아니니...어허! 똑바로 서시라구요!” 소용의 호통에 깜짝 놀란 마기가 얼른 똑바로 선다. 사실 마기만 놀란 것이 아니라 근처의 모든 사람들이 소용의 호통소리에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는 두 부부의 조화에 차마 그곳에 끼어들어 두사람이 만들어 내는 일상을 깰 용기가 나지 않는다. “왜? 안들어가나?” “흠. 이따가 들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래? 그럼 구경이나 할까?” 차의원과 이리저리 거리를 돌아다닌다. 추운 회색의 성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덧 화려함과 부유함으로 가득한 성으로 변해 사람을 홀린다. 근처의 주점으로 들어가 간단한 요깃거리를 주문한 자례는 놀랐다는 듯 웃는다. “이상하군요.” “뭐가?” “이렇게 부유한 황성, 화려한 봄날인데 불구하고 사람들의 옷에는 하얀색이 많으니 좀 맞지 않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거야 황제께서 백색을 숭상하시니까 그런거 아닌가. 여긴 황성이네. 황제의 생각이 가장 빠르게, 많이 번지는 곳이지.” “황제가 백색을 숭상?” “몰랐는가? 황제의 군마는 모두 백마요, 황궁에 늘어진 휘장역시 모두 백풍이네. 또한 궁안의 백담과 백돌길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그 말을 듣고 보니 그렇군요...” “거참 신기한일이 아닌가? 예로부터 우리 한족은 태양의 붉은색을 길조로 여기고 대대로 내려오는 황제들은 모두 황포에 붉은 용을 수놓아 그 위염을 자랑했네. 그런데 이번엔 힌색이란말이야. 그 뭐라나...정안족은 태양에 산다는...뭐 새가 있던데.” “삼족오. 태양에 산다는 검은 성조이지요. 그래서 고구려의 국색은 검정색. 하지만 고구려의 황제들은 힌색옷을 입고 검은 허리띠를 차는 것이 정복. 반면 힌색을 국색으로 삼은 부여는 검은 옷에 하얀 허리띠를 차는 것이 정복이였지요.” “맞아. 그말을 하려고 했지. 자네는 그들에 대해서 잘 알군. 난 정안인들이 이상해. 미개인이 아닌가. 항상 머리를 풀어헤치고 다니는 모습이 참 지저분하네.” “피발(披髮, 자연 그대로 풀어내린 머리)은 상고부터 내려오는 그들의 풍습이니까요. 머리를 올리는 풍습은 한족에게서 흘러들어온것이니...” 자례는 그냥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더 이상 말했다가는 의심을 받을 것 같아 그래도 이해 안간다며 정안의 풍습에 불만을 늘어놓는 차의원에게 고개를 끄덕이기만 한다. 슬슬 차의원의 말에 지처갈때쯤 식사가 나와 다행히 잔소리가 그친다. 식사를 하고 소화겸 나와 걷다가 눈에 띄이는 물건이 있어 다가간다. “부채군. 이런거 좋아하나?” “곧 여름이니 하나 사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눈이 동글게 휘어진 장사꾼은 자례에게 부채를 보인다. 이것 저것 부채를 보던 자례는 그다지 마음에 드는 물건이 없는지 물러나려고 한다. 한명이라도 손님을 놓칠세라 그는 자례를 붙잡는다. “별로 마음에 차지 않으신가 보군요. 원하신다면 다른 물건도 보여드릴수 있습니다.” “그냥 가지.” “그렇다면 보여주시오.” 투덜거리는 차의원은 뒤로 하고 자례는 그가 꺼내는 상자의 부채를 하나씩 들여다본다. 천천히 꼼꼼하게 하나하나를 보던 자례는 이백여개의 부채중에서 두개를 골라낸다. 그다지 화려하지도 않고 특별하지도 않아보인다. 게다가 오래된 것 같아 보이는 것이라 차의원은 이상하게 생각한다. “이왕 살것이면 좋은 것을 사지.” “아뇨. 이것이 마음에 드는군요. 얼마지?” 차의원이 비싸다고 말하는 가격을 치루고 두개의 부채를 집어드는데 장사꾼이 웃으며 다시 자례를 잡는다. “오랫동안 찾으신다 했더니... 혹시 손님 이것을 사시겠습니까?” “응?” 그는 또 오랫동안 뒤적거리더니 상자를 꺼내 자례에게 보여준다. 그것 역시 평범한 부채였다. 부채는 두자루였는데 한쌍인 듯 하나는 붉은색이였고 하나는 푸른색이였다. 자례가 붉은 부채 하나를 들어 펼쳐보니 금가루인듯한 반짝이는 물감으로 글이 새겨져 있었다. 그것을 꺼내 자세히 보고는 굉장히 마음에 들었던 듯 가격을 물었다. “삼관은 주셔야 합니다. 은으로 주셔도 좋구요. 교초(송대 발행된 지폐)는 받지 않습니다.” “부채 하나에 삼관? 이 장사꾼이 미쳤나! 그돈이면 문(전)이 6000개요, 쌀이 열가마가 넘어! 한철을 쓰고 버리는 부채에 그만한 돈을 사용한다는 것이 될터인가! 아무리 지금에 이르러 냥과 전이 풍족해 졌다고는 하나 말도 안되는 가격이네!” 자례대신 차의원이 펄펄 뛴다. 하지만 자례는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 “그만한 가격은 되는 부채입니다. 하지만 정말 비싸긴 하군요.” 자례는 부채중 파란색을 들고는 장사꾼에게 은으로 만든 세냥을 내민다. “이것을 자네가 말한 터무니없는 가격에 사지. 하지만 조건이 있네.” “뭘 들어드릴까요?” 굽신굽신하는 장사꾼의 얼굴은 예상치 못한 큰건이 성사되어 기쁘다는 표정이다. 자례는 돈을 넘겨주며 말한다. “나머지 부채를 황성내에서 팔지말고 이곳에서 떨어진 기산으로 들어가 팔게. 분명 같은 가격으로도 나머지 부채를 사는 자가 나타날것이네.” “저야 그러면 좋지요. 알겠습니다.” 돈을 건내고 돌아서는 자례를 차의원은 미쳤다는 듯 바라본다. “미쳤지. 그돈이면 비단옷이 두벌이고 소를 다섯 마리를 살걸세. 은 한냥을 더 보탠다면 일가족이 한달을 먹고 사는 돈이야!” “어차피 전 혼자니까 괜찮을겁니다. 차의원이 말씀하시는대로 이런 사치는 속세생활에서만 누릴수 있는 특권이 아니겠습니까?” 웃어 넘기는 자레를 기가막히다는 표정으로 보던 차의원은 자례가 관사로 가는 것 같아 그를 잡는다. “옷은?” “부채사는데 다 써버렸는걸요.” “내 정말!”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화를내는 차의원에게 자례가 아까 따로 산 부채를 하나 건낸다. “이르지만 여름 잘 지내십시오.” “난 서민이라 그런 돈바른 부채 안받아!” 꽤액 소리지른 차의원은 등을 돌린다. 차의원을 바라보며 미소지은 자례는 아까 산 파란 부채를 활짝 핀다. 천애여비린. 햇살에 반짝이는 부채의 글씨가 마음에드는지 천천히 길을 올라간다. 174 싫어하는 소야의머리를 잘 빗겨준 자례는 걱정스럽게 그를 바라본다. 소야는 그런 자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흥소리를 내며 외면한다. “소야, 황성에서는 나도 말단 관리라 널 감쌀수 없다. 네 스스로 알아서 얌전하게 지내야한다.” “몰라!” “그럼 일단 이 병사를 따라가 내방에서 머물고 있으렴. 나는 내일정오에 들어가게 된단다.” “몰라!” 짐을 가지러온 병사는 저런 시종을 처음본다는 듯 자례를 보나 자례는 모르는 척 시선을 돌린다. 시종을 일종의 짐과 같아 하루 먼저 입궁하는 소야를 걱정스럽게 바라본 자례는 그대로 몸을 돌려 마기장군의 집으로 간다. 문앞에서는 소용이 마을 아이들에게 과자를 나누어주고 있었다. “어머나, 소식 들었어요. 어서오세요!” 소용이 반갑게 자례를 맞이하며 안을향해 소리쳐 시종들을 부른다. 자례와 집안으로 들어온 소용은 이것저것 그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하며 즐거워하다가 막 방안에서 나오려는 마기를 보고 그를 부른다. 자례가 고개를 숙여 인사하려고 하자 마기가 손을 들어 말린다. “그동안 소식은 대강 알고 있네. 허리를 숙이면 상처가 안좋을테니 인사는 말로 하지.” “예. 걱정해주신 덕에 별탈없이 지냈습니다.”“들어오게. 부인, 차를 내주겠습니까?” “안되요. 식사를 해야죠. 호호호. 사실 낭군께서도 점심 전이랍니다. 아이들이 어찌나 과자를 달라고 보채던지...곧 식사를 차릴테니 안에서 기다리세요.” 소용이 쿵쾅거리며 사라지자 둘은 방안으로 들어와 마주보고 앉는다. 문득 소용이 전에 말했던 것이 떠올라 마기장군의 눈을 바라본다. 전혀 변함이 없어 보이는 그 수려한 용모에서 자신은 아무런 느낌도 받을수 없다. “왜 그렇게 날 보는가?” “아닙니다.” “소용이 말하던가. 내가 떠날것이라고.” 태연하게 말하는 마기에게 차마 거짓을 말하지 못한다. “예.“ “고운 인연, 남겨두고 가는 것이 가슴 아리지만 어쩔수 없는 일이야.” 그말에 자례는 고개를 급히 들어 놀란 얼굴로 마기를 본다. “가십니까?!” “조용히 하게. 지금 당장 가는 것도 아니고...자네나 나나 한치 앞을 헤아릴수 없는 밀명을 받은 것이지 않는가. 난 미래의 일을 말한 것 뿐이야.” “...하지만.” “...” “부부의 일에 끼여드는 것이 무례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소용부인은...!” “인연이란 끝까지 행복해서가 아니네.” 날카로운 소리로 마기가 말한다. “헤어짐이 슬픈것도, 그 인연이 악독하여 비통한것도, 끝까지 행복하여 꿈처럼 사는 것도 모두 인연이네. 그 끝이 어찌 될지 모르는 것이 인연이란 말이네.” “...죄송합니다.” “그런말은 그만하지. 그보다 난 삼일후에나 들어가게 된다네. 자네는 내일 입궁하지?” “예” 다시 부드러워진 마기는 피식 웃는다. “자네 동기 말이야.” “양만관말씀이십니까?” “그자, 성각현의 백계단에서 굴러서 요양중이더군.” “예” “들리는 말로는 막관이라는 사내가 밀어서 굴렀다는데...지금 상황이 이렇고 보니 충분히 영리한 사내란 생각이 들지 않는가?” “다행이군요.”“다행?” 아차하는 생각이 든다. “자네 그와 친하나?” “의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곁에 있으면 어러모로 수월하기에...” “그럴필요는 없네.” “예?” “그렇게 부정할 필요 없네. 궁안에서 하나 정도는 말 터놀 사람이 있는 것은 힘이 되지. 나도 그런 장수들이 있네.” “그렇습니까.” “단 어디까지나 그것은 우관으로써일쎄. 자례로써 그들을 진심으로 대한다면 큰일이 일어날것이야.” “명심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마기는 잠시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문을 바라본다. “그나저나 점심은 언제 되는걸까.” 화려한 시종들을 이끈 행렬이 계주로 도착했다. 마차에서 나온 한족의 사내는 마중나온 사람들사이에서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다 한사람을 보고 반색한다. “그동안 무양하셨습니까 감곡공?” “남강공! 오랜만이입니다.” 두 사내는 손을 잡고 기뻐한다. 유번은 마류에게 계주 태수를 소개한다. “이분이 계주의 주인이십니다.” “아닙니다. 이젠 계주의 주인은 형님이신 감곡공의 것이 될것입니다.” “두 형제분의 이야기는 서신에서 대략 들었습니다. 일단 감축드립니다.” 길게 허리를 숙인 마류는 손을 튕겨 예사를 부른다. “작지만 저의 성의입니다.” 예사가 가지고 나온 상자를 열자 가득 들어있는 금가루가 눈을 부시게한다. 예사는 그것을 계주태수에게 넘기나 태수는 아니라면 한사코 거절한다. 마류가 난감해한다. “허허. 가지고 온 선물은 그것뿐만이 아닌데 그 작은 것을 못받아 주시면 어찌하십니까?” 그말에 태수는 상자를 받는다. “그렇다면 고맙게 받겠으나 처분은 형님께 맞기겠습니다.” “내가? 저런. 어찌한다.” 유번은 고개를 갸웃하다. 웃고는 그것을 후소에게 내민다. “이 모든 인연을 이어준 스님께서야 받으시면 좋겠소.” “출가한 사람이 금품이 무슨 말입니까. 거절하겠습니다.” 후소가 손을 흔들며 받지 않자 계주태수가 거든다. “실로 형님의 말씀이 공명하시오. 후소님이야말로 이 경사의 주역이 아니겠습니까. 공양받는셈으로 받아주십시오.” 몇 번 더 사양하던 후소는 마지못해 그것을 받는다. 그들은 계주태수의 성으로 들어가 이야기를 나눈다. 오랜시간 이야기를 나눈후에 계주 태수가 말을 꺼낸다. “실은 남강공이 가지신 명검 반구말입니다.” “서신으로 읽었습니다. 반구를 다시 돌려드렸으면 한다구요.” 마류는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또다시 손을 튕겨 뒤에 서 있던 예사에게 검을 가져오란 지시를 한다. 잠시후 예사가 검을 가져오자 계주 태수는 떨리는 손으로 상자의 봉인을 풀려한다. 하지만 마류가 손을 내밀어 태수의 손을 잡는다. “감곡공은 이검을 제게 맡기셨으나, 지금 다시 이 장사치는 명검 반구를 사고 싶습니다!” “그런 안되는 말씀입니다.” 태수는 인상까지 써가며 반구가 자신의 문파에 얼마나 큰 증거인지 설명한다. 하지만 마류역시 쉽사리 물러나지 않으며 검의 가격을 점점 올린다. 마침내 검의 가격이 180냥까지 이르자 태수 역시 움찔한다. 그 싸움을 끝낸 것은 유번이였다. “팔겠습니다.” “하지만 형님!” “그만해라. 계주는 오랫동안 난적과 싸우느라 궁한 상태니 문파의 작은 증거를 팔아 문파가 이루어온 성을 지킬수 있다면 더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또한 검역시 해로운 주인에게 가는 것은 아니니...” “과연 큰 인물이시요. 그 결단에 감복해 내 이 검을 500냥을 드리겠소!” 백냥이란 소리에 게주태수도 할말을 잃고 뒤로 물러난다. 500냥이라면 주성인 계주성을 다시 지을만한 돈이였다. 결국 마류는 다시 반구를 들고 다시 기산으로 돌아갔고 얼마치나지 않아 남강의 천냥검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이제는 정말 늙은 것인지 푹신한 마차에 앉아 편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엉덩이가 저린다. 아골타는 손을 들어 마차를 세우게 한다음 마차를 세우고 밖으로 나온다. 따라오는 수행원들이 모두 부복해여 고개를 숙이자 홀로 눈을 들어 새파란 초지를 감상한다. 젊었을때가 그립구만. 자신도 모르게 미소짓는다. 확실히 초지는 보는 이로 하여금 좋은 느낌을 가지게 한다. 조금 걸어가자 호위장수들이 옆으로 따라온다. 말을 타고 바람보다 빠르게 이 초지를 달릴때가 있었다. 호랑이보다 용맹하게 싸워 이땅을 자신의 깃대를 세우고 정복한자에게서 기쁨을 얻는 그런때가 분명 있었다. 하지만 이젠 늙었는지도 모르지. 바람이 풀어 꽤나 길게 자란 풀을 쓸고 지나간다. 물이 찰랑이는 것 같은, 흐느낌 같은 소리가 초지를 메아리치게한다. 한번 정도는 데리고 나왔어도 좋았을텐데. 씁쓸한 미소를 짓는다. 눈앞을 가리는 주렴이 신경쓰여 관을 벗는다. 눈앞에 푸른 초지가 자유를 외치고 있는 것이 똑똑히 보인다. 그래. 정말 한번 정도는 함께 나왔다면 달라졌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때만 하더라도 누가 볼까 두려웠고 나 아닌 다른자에게 고개를 돌린다는 것을 참지 못했다. 온전히 내것이라는 것은 그 모든 것이 내안에 들어가야 한다고 믿었고 나 홀로 가져야 한다는 것으로 알았다. 단지 그의 마음에 내가 들어선다는 것만으로도 그를 소유할수 있다는 것을 몰랐다. 너무 어렸고, 유치했고, 바보같고, 욕심만 많았다. 그 때문에 그의 마음엔 내가 들어갈수가 없었다. 결국 난 그를 소유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날 따르지 않아 화를 내었던 바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정말.” 사랑했는데. 그 아름다움을 느끼기위해 여인을 사랑하 듯, 몸을 합칠때의 쾌락을 얻기위해 여인을 사랑하 듯, 자식을 얻기 위해 여인을 사랑하 듯한 것이 아니였는데. 그가 화를 내는 것도, 그가 우는 것도, 그가 날 미워하는 것조차 좋았는데. 그래. 정말 사랑했는데. 사람이란 존재가 사람이란 존재에게서 인정받고 위로 받고 싶다는 것은 처음이였는데. -나에겐 당신 따위 존재하지 않아. “다시 한번...” 아골타의 벌어진 입에서 안타까움이 새어나온다. “다시 한번만...” 환관들이 황제의 무슨 명령을 내리는 것이 아닐까 싶어 얼른 다가온다. 멍하니 초지를 바라보는 황제는 더 이상 말이 없다. 다시 한번만 기회를 주면 안되는거냐 해루. 하지만 고개돌리는 아름다운 가인의 검은 눈에는 슬픔만이 가득차 있다. 내리까는 눈썹에 맺히는 것은 자신이 준 고통이고 외면하는 고개가 향할수 있는 것은 내가 가둔 새장의 쇠막대기일뿐. 175 손이 부족하다는 말에 머리를 긁적인 을노는 잠에서 억지로 깨어난다. “왜 손이 부족해?” “전사했습니다.” 간단한 말이지만 당연한 말이라 이해도 빠르다. 일어나 하얀 수건으로 머리를 감싸고 장막을 나가 다친 병사들을 살핀다. 성인의 치료에 황송해하는 병사들에게 괜찮다며 상처를 돌보던 을노는 달이져 새벽녘이 되서야 허리를 핀다. 부관의 막사안으로 들어가자 갈비뼈가 부러진 부관이 끙끙거리고 있는 모습이 보여 웃는다. “일어나서 걸었지? 어제는 괜찮더니만 오늘은 왜 그러나.” “좀처럼 좋아지지 않습니다.” “거야 당연하지. 뼈야 시간이 지나면 좋아지는것이니 호기부리지 말고 누워있기나해.” 피곤한 눈을 비비며 을노가 탁자에 앉아 등을 핀다. “오걸매가 슬슬 황성에 도착할 때이군.” “서신이 왔습니까?” “그래. 하지만 오걸매의 이야기는 아니야. 15왕자가 급살을 맞았다는 서신이였다.” “15왕자라면...그 예의?” “그래. 전에 혈족이 죽인 왕자다. 1왕자 기일이 끝나서 지금에야 장례가 들어가는 모양이군. 그런데 이유가 급살이 뭐냐. 히우루는 아골타처럼 그방면으론 머리가 안돌아가는 모양이야. 게다가 오걸매까지 황성으로 들어가는 와중에 아골타가 계주로 떠났으니 무서워서 떨고 있겠군.” 실소한 을노는 차를 따라 마시며 다시 오는 잠을 물리친다. 부관이 막사의 천장만 바라보다 묻는다. “전에 아골타와 오걸매의 사이가 왜 나쁜지 이야기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해달라고? 나 피곤한데.” “잠깨는 것으로 좋지 않겠습니까.” 그말에 을노가 잔을 내려놓고는 잠시 생각을 정리한다. “아골타는 핵리발의 둘째 아들이다. 위로 오야속이란 형이 있고 히우루라는 동생과 오걸매가 있는거지.” “예.” “아골타가 형인 오야속을 치고 완안부를 차지한 것은 알지?” “예.송부에서 임명한 관리는 아골타지만 실권은 오야속이 가지고 있어 괴리에 화가나 형을 친 것이 아닙니까?” “좀 달라. 오야속은 태평을 원했지만 아골타는 세력을 넓히고자 욕심을 부렸어. 실제로 오야속이 먹은 땅의 대부분이 아골타가 전두 지휘한 곳이다. 그러던 그가 송의 땅까지 넘보기 시작한거야. 오야속은 반대했지. 그 차이로 아골타는 오야속을 죽이고 완안부의 왕이 된거야.” “오걸매는요?” “오걸매는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도 굉장한 장수였어. 오야속을 치기 전에 아골타가 오걸매를 회유하면서 약속을 한 것이 있었다는군. 하지만 막상 아골타가 황제가 되자 그 약속을 깨어버렸지. 그래서 둘 사이가 으르렁 거리는거야.” “그 약속이 뭔데요?” “호북성이란 이야기가 있지.“ “호북성?” “그래.” 부관은 어리둥절한다. “하지만 호북성의 태수보다는 지금의 대장군이 훨씬 높은 관직 아닙니까. 게다가 구절이 내린 상태니 일개 태수에 비할바가 못됩니다.” “미친 사내의 속마음을 누가 짐작할까. 아무튼 둘 사이는 그 이후로 원수사이라더군.” 궁금증이 풀리긴 하나 더 생겨버린 부관은 머리 아프다는 표정으로 눈을 감아버린다. 을노는 하품을 하다가 결국 의자에 앉은체로 잠시만 눈을감기로 결정한다. 자례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분명 뒤에 있는 것은 백라였다. 허름한 옷에 땀과 먼지에 찌든 백라는 그 마른모습에서 위험한 느끼을 주기 충분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왜 이런...” “모습이 험하지? 그보다 내가 시간을잘 맞춰온 것 같군.” 모습은 초최하지만 눈빛만은 시퍼렇게 빛나 자례는 흠칫 뒤로 물러선다. 하지만 백라는 자레에게 다가와 낮게 말한다. “사람을 찾는데 도와주겠나?” “제가 할수 있다면...” “황제의 여인중에 정안인이 있나 알아줘.” “예? 황제에게 정안의 여인이 있나요?” “...모르지. 일단 알아주겠나?” “...알겠습니다.” 백라는 벌떡 일어난다. 자례가 그를 붙잡는다. “차라도 한잔 하고 가시지요.” “아니. 너무 늦었어. 여행이 길었지. 왕씨께 가서 내 긴 여행을 보고할 준비가 끝났네. 우보.” 좌보인 백라의 입에서 자신을 우보라고 칭하는 말이 나오자 알 수 없는 감정이 가슴을 탁친다. 무거운 것도 가벼운것도 아닌 즐거운것도 괴로운것도 아닌 올것이 왔다는 느낌과 뭔가 책임이 막중해지고 어느정도 뭔가를 이루었다는 느낌이다. “알겠습니다. 좌보님.” “몸조심하시게.” 백라는 그대로 청사를 나가 사람들 사이로 사라진다. 그가 사라지자 자례는 알수 없는 불길함에 하늘을 올려보았다. 말들이 걷는 모습을 지루하게 보던 자휼은 뒤로 등을 기댔다. 기산으로와서 딱히 하고 있는 일은 없었다. 오로지 말들을 산책시키거나 달리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였는데 그것도 하루 이틀하고나서는 휘하의 수하에게 시키고 흑염만 데리고 산을 들락날락거리며 마음을 달래는 것이 다였다. 예사는 계주쪽으로 일이 있다며 마류장군을 수행해 기주를 나가있었기 때문에 딱히 말상대를 해줄 사람도 없었다. 어느때와 마찬가지로 말들을 걷게 하고 자신은 흑염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 달리고 있을때였다. 잊지 못하는 예의 그 얼굴이 자신에게 말을 걸어온것이다. “좋은 말을 가졌군.” “...그렇군” 그는 태천이였다. 주위를 돌아보고 있었던 건지 무기를 가지지는 않았고 수하에 딸린 장수들만이 자휼을 의심스럽게 바라볼뿐이였다. 아닌 듯 그런 듯 태진과 꼭 닮아있는 이 3왕자는 관심있게 흑염을 바라보고는 묻는다. “그 말, 자네껀가?” “그렇소.” “내게 팔지 그러나?” 반말로 함부로 대꾸하는 자휼을 보며 호위장수들이 욱하는 표정을 지으나 태천이 고개를 흔들어 말린다 아마도 태전은 자휼이 자신의 신분을 모른다 생각하고 있을것이 분명했다. 자휼은 시큰둥하게 대답한다. “싫소.” “그러지 말고 팔지. 좋은 값에 쳐주겠네.” “싫다면 싫은거요.” “100냥을 주지. 그정도면 되겠는가?” “싫다하지 않소. 이랴!”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휼이 흑염을 재촉해 다른 방향으로 뛰어간다. 말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태천 일행이 따라오고 있었다. 하는수 없이 말을 멈추고 그들을 기다려 묻는다. “왜 따라오는거요?” “원하는 가격을 제시하게. 달라는데로 주지.” 돈이면 다 된다는 생각이 밖혀버린 저 부유한 왕자의 얼굴을 보자 자휼은 술내기 놀음 따위에 자신의 성을 말아먹은 그 누군가가 생각나 소리를 질러버린다. “싫다지 않소!” “좋아, 200냥정도면 되겠는가?” “맙소사.” 어쩌면 형제가 이렇게 똑같단 말인가. 특히 그 개망나니 같은 저 사상들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자휼은 그대로 말을 돌려 기주성으로 달려간다. 이번에는 따라오지 않는 것 같아 안심하고 말을 천천히 걷게 한다. 경마전에 말다리에 이상이 생기면 15왕자가 자신을 달달 볶을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반사적으로 깊게 몸을 숙인다. 슝하고 화살이 아슬아슬하게 머리위를 스킨다. 뒤를 돌아보니 태연하게 화살을 겨눈 태천의 모습이 보인다. 태천이 옆 장수에게 손을 건내자 장수가 화살을 하나 건낸다. “하! 흑염! 성으로 돌아가라!” 바로 말에서 내려 흑염의 엉덩이를 친다. 흑염은 안절부절하며 망설인다. “가라 이 성격더러운 말아! 넌 덩치가 커서 표적이 된단 말이다!” 세차게 말옆구리를 치자 놀란 흑염은 빠르게 달려 성안으로 들어가버린다. 날아오는 화살을 피해 숲안으로 들어가 숨는다. 천천히 태천의 일행들이 자신이 숨은 나무아래로 지나가며 외친다. “그럼 300냥은 어떤가! 지금 팔면 목숨도 살려주지. 빨리 결정하는게 좋을거야!” 외치고난 태천은 새 활을 장수에게 받아 화살에 재운다. “안그럼 죽는다.” 즐거운 놀이처럼 대답하는 웃는 얼굴이 태진과 너무도 같아 자휼은 불쾌감과 분노에 손이 떨리는 것을 느낀다. 176 히우루는 비어있는 대전의 단상을 올려다본다. 실제로 수백명이 거주하고 있는 황궁안에서 빠져나간 사람은 고작해야 일백에 지나지 않을텐데 왜 이리 황궁이 비어보이는지 모르겠다. 일국에는 하루라도 지배자가 없으면 안된다라는 말이 항상 아골타가 성을 비울때마다 떠오르는 것이다. 하지만 머리위에서 뭔가 날아오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어 안심은 된다. 적어도 이번만은 오걸매가 황궁으로 부름을 받아 올라오고 있다는 점이 마음에 걸리지만 말이다. 이미 데리고 갈만한 사람은 추려놓았고 그를 설득해 호북에서 데리고온 자들을 다시 돌려보내도록 하는 것 또한 생각해놓았다. 하지만 그 광기어린 눈을 생각하면 그 무엇도 할수 없는것이다. 초조하게 손가락을 튕기던 히우루는 드디어 대장군이 도착했다는 말에 자리에서 일어나 비장한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나갈 필요도 없이 대전의 문이 활짝 열리더니 누군가 신을 신은체로 들어온다. 뚜벅뚜벅거리는 발걸음소리가 오싹할정도로 대전전체를 울린다. 히우루가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보았을때는 이미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는지 모두 잊은체였다. 대전의 끝에서 점점 자신에게 다가오는 자는 분명 덩치만 큰 어린애였다. 등을 두른 하얀 호랑이가죽이 흔들린다. 땀과 멈지로 범벅이 되어버린 그는 피곤한표정에서도 미친 자만이 가질수 있는 광기가 보인다. 헝클어진 적갈색의 머리와 핏발선 누런눈이 등골을 긴장시킨다. 탕하는 소리와 함께 오걸매의 손에 들린 창이 돌로 만든 바닥에 떨어졌다. 깜짝놀라 뒤로 물러섰던 히우루는 그것이 무기를 버리는 것임을 알고 놀란 자신을 부끄러워한다. 오걸매는 무기를 버리고 단상위로 올라와 히우루에게 다가온다. 뒤로 물러나려 하지만 물러날곳도 없어 난감해하는 히우루를 힐끔 본 오걸매는 고개를 들어 휘장이 쳐진 황제의 자리를 보고 고개를 갸웃한다. “나,나 왔다. 형은?” “황...황제는 지금 경마 축제에 관한일로 궁을 비우셨다.” “날 불렀...느은데?” “내게 네 일을 부탁하셨다.” 어눌하게 돌아가지 않는 혀를 놀리는 오걸매를 손으로 밀어 조금 떨쳐 놓는다. 멍하니 단상을 바라보던 오걸매는 등을 돌려 단상아래로 내려와 버려둔 창을 들고 대전을 성큼성큼 나가버린다. 그의 몸에서 나는 지독한 냄새에 떨어져 있던 히우루도 따라나간다. “비서랑들을 모아두었다. 그들을 데리고 가고 호북에서 데려간 관리들을 돌려주라는 명령이셨다. “...” “들었니? 호북에서 데리고간 관리를 풀어주란 말이다!” “시...시끄러!” 신경질적으로 창을 휘둘러 히우루를 물러나게한 오걸매는 더듬거린다. “언제...나 거짓말. 난 이곳에 왔...다. 형은...없다.” “경마축제라 그런 것이 아니냐! 애초에 네가 호북을 침범하지 않았으면 너같은 놈이 황궁에 다시 들어오는 일은 없었어!” “없어! 거지...쟁이!” 마음과 달리 나오지 않는 말이 답답한지 그 이후로는 입을 꼭 다문 오걸매는 앞을 막아서는 환관들과 병사들을 향해 자신의 창을 휘둘러 위협한다. “대장군을 잡으라!” 대전을 지키던 장수들과 병사들이 오걸매에게 다가가나 섣불리 덤벼드는 자는 없다. 그도 그럴것이 반년전 황궁에 들어온 오걸매가 퇴궁의 절차를 걸치지 않고 나가려는 것을 잡으려고 했던 장수들을 모두 죽이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였다. 그 이후 황제는 오걸매에게만은 입퇴궁의 복잡한 절차를 걸치지 않게하는 특권과 함께 구절을 내렸다. 하지만 황제가 없는 지금 히우루가 궁내사의 실권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해 병사들은 덤벼들수도 그렇다고 보내줄수도 없는 난처한 상황에 어쩔줄 모른다. 아무말없이 히우루는 피의 흔적이 역력한 창을 무시무시하게 휘두르며 길을 만든다. “나는 분명히 경고했다. 말을 파는 것이 싫다면 죽어줘야겠다.” “망조가 든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고 싶군!” 머리위로 날아오는 화살을 피한 자휼은 손을 뻗어 좀더 높은 가지로 올라간다. 그동안 착실하게 단련된 오른팔과 다리를 이용해 나무에서 다른 나무로 뛰어간다. 태천은 머리위에서 움직이는 그림자에 등을 경계하나 워낙 빨리 움직여 표적을 삼을수가 없었다. 그를 호위하던 장수들이 곁으로 모여 그를 보호한다. “주공, 놈은 장수같습니다.” “몸놀림이 산적과는 다르니 돌아가심이 어떤지요?” “흥.” 태천은 콧웃음친다. “뭐가 장수더냐. 내가 보기엔 외팔의 병신 원숭이 같군. 화살을 재워서 원숭이를 잡아라. 오늘밤은 연회를 열까보다.” 딱하는 소리가 울리며 태천은 뒷머리에 강한 통증을 느끼고 고개를 숙인다. 손을 뻗어 쓰린 부분을 만저보니 뭔가 미끈하다. 손을 돌려보니 피다. 놀라는 장수들이 주위를 돌아본다. 또다시 딱하는 소리가 들리며 이번엔 옆에 있던 장군의 이마에 상처를 내놓는다. “솔방울인가.” 이마를 튕기고 땅아래로 떨어지는 그것을 바라보며 태천이 중얼거린다. 나무위를 바라보며 솔방울을 던진 자를 찾아내려는 장수들의 노력이 헛짓이라고 판단한 태천은 빠르게 말한다. “모두 산을 내려간다!” 장수들을 이끌고 산을 내려온 태천은 말을 멈추고 자신이 내려온 산을 바라보다 옆에선 장수에게 묻는다. “저 산이 어디에 이어졌는지 알고 있나?” “저산은 홍소산인데 뒤로 작은 마을이 있기 때문에 산허리가 잘려 이어져 있지는 않다 들었습니다.” “그래? 그럼 불태워.” 장수들이 놀라 뭐라 말하기도 전에 태천은 냉냉하게 돌아선다. “원숭이까지 죽도록 저 산을 불태우란 말이다.” “하지만 주공, 저 산뒤로는 마을이...!” “산속의 작은 마을따위, 내가 흘린 피보다 더 값질소냐.” 히식 웃으며 먼저 말을 출발하는 태천은 손가락에 묻어있는 자신의 피를 낼름 혀로 핥아낸다. 그들이 돌아가는 것을 보고 나무에서 내려와 잠시 기다리던 자휼은 멍하니 숲가지사이로 보이는 하늘을 바라보다 눈을 감는다. 죽일수는 없었다. 자신이 한심스럽다. 하지만 어쩔수가 없었다. 마음같아서야 죽여버리고 싶었지만 그럴수가 없었다. 이미 한 왕자를 울컥한 자신의 감정으로 죽인 것이 있었기 때문에 어느정도 갈등을 느낀것도 사실이였다. 분명 지금 여기서 저 빌어먹을 왕자를 죽이고 나도 죽을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된다면 내 아이를 더 이상 만나지 못한다는게 쓰려 그럴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보냈다. 하지만 내가 아니더라도 너희 일족전체가 우리일족에게 고개를 숙이고 사죄하는 날이 올것이다. 분명 어느날인가. 반드시. 인상을 쓴 자휼은 한숨을 쉰다. 파다다닥하는 소리에 급하게 몸을 일으키고 경계하자 산속의 새들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나무에서 급하게 내려오는 작은 짐승들이 산위로 뛰어 올라간다. 무슨 일인가. 하지만 전에도 익히 맡아본 냄새에 등골이 오싹함을 느끼고 뒤를 바라본다. 바람을 타고 산은 빠르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넘실넘실 자신을 삼키려 달려오는 화마에 자휼은 꼼짝을 못하고 그대로 불을 바라본다. 또 다시 불인가. 흠칫하고 몸이 떨린다. 그래도 그동안 후소에게 맞아가며 배운 탓인지 몸은 불에게서 시선을 돌려 앞으로 뛰어 도망가게 해준다. 불은 싫어. 갑자기 속이 울컥하고 올라오는 느낌에 구토감을 느낀다. 바람은 화마를 재촉해 모든 것을 삼켜버리라 명령한다. 나무에 몸을 기대 구역질을 하던 자휼은 피부가 녹아버릴 것 같은 뜨거움에 눈을 뜨지도 못하고 벌벌떤다. 도망쳐야하는데. 머리는 멀쩡하나 몸이 자꾸만 말을 듣지 않는다. 정신과 육체와의 괴리가 더욱 사람을 힘들게 만든다. 누군가 도와줘.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애써 일으켜 도망가려한다. 떼어지지 않는 발걸음은 천근같이 무겁다. 타탁! 눈앞에 불붙은 나뭇가지가 떨어져내린다. 심장의 고동소리가 자신의 귀를 멀게할것만 같다. 가슴을 부여쥔 손이 어깨로 올라가 자신의 부적을 움켜쥔다. 난 여기서 죽을수는 없어. 만나고 만다. 무슨일을 해서라도 다시 만나고 만다. “흐...흑염!” 고통스럽게 터져나온 목소리가 불타는 산을 울린다. “흑염! 흑염! 네 주인을 죽게 할 생각인거냐!” 거짓말처럼 어디선가 말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자욱한 연기속에서 콜록이며 고개를 드니 연기를 헤치고 거짓말처럼 흑염이 모습을 드러낸다. 기뻐할틈도 없이 흑염은 부리나케 자휼의 하나남은 팔을 머리로 밀며 그를 재촉한다. 흑염의 머리를 붙잡고 간신히 일어나 말에 오르자 흑염은 재빠르게 허공에서 떨어지는 불똥들을 피해가며 산위로 도망간다. “안돼, 산위로 가면 결국 죽는다. 콜록, 콜록, 아래로, 내려가야해.” 하지만 흑염에게는 그런 판단을 할만한 머리는 없다. 단지 불이 나지 않는 곳으로 달려 주인을 보호할뿐. 매운 연기속에서 눈물을 흘리며 주위를 바라보던 자휼은 산꼭대기까지 올라서야 그 밑에 마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사색이 된다. “마을로 가자!” 푸릉거리며 매운연기에 고개를 돌리면서도 흑염은 착실하게 자휼의 말에 따라 산을 뛰어내려간다. 177 또다시 산을 넘으려 준비하던 중년의 사내는 이상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 본다. 수행원인 듯 한 여인이 그에게 다가온다. “무슨 일이십니까 도련님.” “아무것도 아니야 교소. 하지만 이상하군. 산너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데.” “예?” 교소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리고 산새들이 자꾸만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을 보고 놀란다. “혹시 산불이 난 것은 아닙니까?!” “뭐? 산불이라고?!” “어서 이쪽으로 오십쇼 도련님! 수행원들을 깨워야겠습니다.!” “저기, 말이 온다!” 산 위에서 검은 말이 급하게 뛰어내려온다. 말은 그대로 마을로 뛰어들었고 이 시끄러운 손님에 놀란 마을사람들이 불에 그슬린 검은 말을 바라보자 말위에서 몸을 일으킨 한 사내가 목쉰 소리로 외친다. “산불이요! 어서 피해요!” 순식간에 조용했던 마을은 혼란스러워진다. 사내는 말을 탄 자휼에게 빠르게 다가가 묻는다. “이 마을은 산을 파내고 지은 것이요! 산불이 났다면 어디로 나가란 말이요?! 어느쪽에서 불이 난거요?!” “콜록, 앞쪽산은 전부 타버렸소. 일단 산뒤로 나가야... 콜록!” “앞쪽산이 타버렸다면 그것은 안될말이오!” 사내는 비명을 지르며 피난을 준비하는 마을사람들에게 외친다. “모두 진정들하시오! 도망가지 못하오! 우린 산불은 꺼야만하오!” 사내는 우왕자왕하는 사람들속에서 벗어나 우물 가장자리에 선다. “내 말을 들으시요! 바람이 마을쪽으로 불고 있는데다 이분의 말을 들어보니 불은 이제 붙은 모양이요. 그렇다면 불은 빠르게 번질것이고 산을 오르는 속도는 느릴 수밖에 없으니 모두 죽게됩니다! 우린 불을 꺼야해요!”] 하지만 눈앞에 연기가 마을에 들어차자 마을사람들은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순식간에 평화로왔던 마을의 전경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혼란이 가득찬다. 교소는 사내를 부축해 내려오게 한다. “우리도 피해야합니다!” “하지만!”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설득해보려는데 검은 옷을 입은 사내가 천천히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것이 보인다. 그 짙은 검은 눈매가 이질적이였는가. 모두가 혼란스럽게 뛰어다닐때 홀로 주위를 감상하는 차분한 걸음이 눈에 띄인것인지 사내는 그에게서 눈을 못땐다. 주변을 돌아보던 그 검은 머리의 사내와 눈동자가 마주친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듯한 고압적인 느낌에 그는 뒤로 물러난다. “도련님?” “괜찮아.” “이봐. 자네.” 그가 팔을 뻗어 자신을 가리킨다. “도끼를 들어 불이 번지는 쪽의 산의 나무를 쳐내라.” “뭐라고?” 듣는척 마는 척 한 그는 등을 돌려 달아나는 마을 사람들을 향해 소리친다. “모두 멈추어라!” 그렇게 크거나 울리는 목소리가 아닌데도 낯게 울리는 특유의 강권함이 사람들을 돌아보게한다. 그는 팔을 벌리고는 사람들을 내려본다. “사내는 도끼를 들어 나무를 쳐내고 아이들은 도랑을 판다. 여인들은 물을 긷어와 도랑을 채운다!” 멍하니 그를 보던 마을사람들이 어찌해야할지 몰라 눈치를 보자 그는 화를 내며 대갈한다. “우매한 것들! 터전을 버리고 어디서 살아남길 바라느냐!” 멈칫멈칫하던 그들중 하나가 짐속에서 도끼를 들고 와락 앞숲으로 뛰어들어가자 너도나도 할것없이 도끼를 들고 호미를 든다. 여인들은 우물가로 모여든다. 도망갈때는 공포감으로 서로를 경쟁으로 삼지만 맞서 싸울때는 서로에게 의지하는 법이다. 금새 도랑이 파지고 물이 흐른다. 검은 부채로 연기를 멀리하는 그는 계속 자신을 바라본다. 아니, 자신의 뒤에 있는 누군가를 바라본다. 말을 타고 왔던 사내가 말에서 내려 그에게 다가가 부복한다. “그동안 무양하셨습니까.” “장군도 무사한 것 같군.” 하류사는 자휼을 일어나게한다. 말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확실한 주종의 관계가 보여 검은 옷의 사내는 태수정도이고 말을 타고 왔던 사내는 가신정도가 아닌가 생각한다. 연기에 눈이 매워 비빈다. 다시 눈을 뜨니 흐릿한 회색의 잔상이 앞으로 걸어온다. 놀라 눈을 크게 뜬다. 그림으로만 보았던 월궁항아의 모습이 자신을 바라보고는 고개를 작게 숙인다. 다시 눈을 깜빡였을때는 모든 것이 환상인 듯 자신의 앞에 있는 것은 추한 외모의 아까 말을 타고 왔던 사내일뿐이다. 하지만 역시 조금 몸을 틀자 검은옷을 입은 사내 옆에 있는 회색 비단옷의 미녀에 눈을 돌리 못한다. 그들은 그렇게 서서 이야기를 나누는 듯 하다가 어느새 사라진다. 교소가 그에게 다가와 흔든다. “도련님.” “그래. 우리도 나가자.” 아직도 그 여인의 잔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왕형은 중얼거렸다. 뒷목에 손을 넣어 머리를 턴다. 소리없이 흩어지는 머리채를 휘어잡아 끌어 올려 묶는다. 건책(머리를 올리는데 사용하는 수건)을 사용해 머리를 올린다. 좌천은 끝났지만 황궁안에서 입는 관복은 아직 궁안에 있기 때문에 정장을 하진 못한다. 소야는 얌전하게 있나 모르겠네. 베게밑의 피묻은 손수건과 부채를 들고 따로 짐이라고 할것없이 책 몇권을 들고 방을 나간다. 문앞에는 차의원이 기다리고 있던듯 바로 인사한다. “조심하게.” “감사했습니다.” “뭐. 다시 만날 날이 있을 것 같으니 다른 말은 안하겠네.” 씩 웃은 차의원은 모습은 전과는 달리 산뜻한 모습이라 가기전에 묻지 않을수가 없다. “좋은 일이 있으십니까?” “아아 이거? 실은 이제 봄청소는 끝났으니 슬슬 나도 의원노릇이나 해보려고.” “좋은 의원이시니 바빠지겠군요. “뭐. 어떻게든 되겠지. 어떻게 들어가려나?” “뭐. 말을 타고 내려온것도 아니니 천천히 걸어 들어가려구요.” “잘가게. 헛튼데 들리지말고. 바로 들어가라고.” 어깨를 치며 격려한 차의원은 관사의 부름에 방안으로 들어간다. 이미 관사와의 인사는 끝낸터라 그대로 문을 나서 거리로 나온 자례는 여전히 익숙하지 못한 번화가를 지나 반듯한 돌이 깔린 황성쪽의 길목으로 걸어들어간다. 먼저번에는 급하게 말을 타고 지나갔던 길이라 이렇게 걷는 것이 좀 생소하다. 동문에 이르자 병사들이 제지한다. 초적과 출입증을 꺼내 확인하는 때 쾅하는 소리가 들리며 그 큰 문이 흔들린다. 깜짝 놀란 것은 자례뿐만이 아닌 듯 병사들도 놀란 얼굴로 뒤로 물러난다. “무슨 일이지?”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건가?” 자례는 혼란스러워하는 병사들의 모습을 보면서 뒤로 물러난다. 생각건데 아마도 궁안에서 호랑이가 빠져나온 것은 아닌가 싶다. 저 문이 열리면 호랑이가 튀어나와 사납게 굴 것 같아 몸을 사린다. 몇 번더 쿵쿵하는 소리가 들린후에야 문이 열린다. 빳빳하게 몸을 긴장시켜 언제라도 도망갈 준비를한다. 문 사이로 하얀 호랑이의 앞발이 불숙 나온다. 그리고 머리도. 다리도. 그것을 걸친 사내도. 사람이였네. 긴장을 풀고 그 사내를 본다. 안쪽이 시끄러운 것을 보아하니 뭔가 일이 있던 모양이다. 보아하니 한 50정도 되어보이는 여진인이다. 궁안을 출입하기에는 더럽고 예의가 없어보인다. 그는 말을 타고 궁의 문을 나온다. 우루루 궁을 지키는 병사들이 몰려 나오는 것이 보인다. 추방당하는건가. 창을 사용하는지 그는 그 긴창을 휘둘러 따라오는 병사들을 떨친다. 그 창에 살기가 어린 것이 보여 자례는 놀란다. 황궁안의 사람을 상대로 창을 저렇게 휘두른다는 것은 반역에 해당할텐데. 그가 말을 돌린다. 몸의 여기저기에 상처의 흉터가 남은 커다란 말이 사납게 운다. 그대로 앞으로 내달리려는 그와 눈이 마주친다. 순간 그의 핏발선 누런눈에서 정상이 아니라는 것이 느껴져 추춤 뒤로 물러난다. 그가 앞으로 달려 사라지자 열린문으로 나온 병사들과 관리들이 멍하니 그곳을 응시한다. 뭔가 큰일을 치룬듯한 모습들이다. 자례가 멍하니 그가 사라진곳을 바라보는 병사의 어깨를 흔든다. “입궁해도 좋습니까.” “아, 예.” 떨떠름한 표정으로 병사는 얼른 손에든 자례의 신분을 증명하는 문서를 읽어본다. “누구였습니까? 다들 큰일을 치룬듯한 모습이군요.” “저사람을 모릅니까? 저분이 바로 대장군인...” “잠깐.” 갑자기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자레가 그의 말을 막는다. 한겨울에 찬물을 뒤집어 쓴듯한 오한에 눈이 커진다. 불안함과 초조함에 눈을 심란하게 깜박린다. 전에도 느껴본 것이 아니던가. “괜찮소? 이런.” “괜...찮습니다.” 병사가 근심스럽게 묻다가 놀라 뒤로 물러난다. 이유를 알수 없어 병사를 바라보다 땅을 울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다. 다시 말을 돌려 달려온 그자는 자신을 노려본다. 때아닌 적의감에 놀란 자례는 급하게 뒤로 몸을 피한다. 그대로 문에 부딪칠 것 같은 오걸매의 모습에 다들 사색이 되어 성안으로 들어간다. 자례도 성문을 지키던 병사들도 등뒤에서 울리는 비명소리가 말에 깔린 사람이 내는 소리인지 아니면 오걸매 본인이 지르는 괴성인지 분간할수 없을 정도로 혼란스럽다. 오싹한 시선에 등골이 뻣뻣해진다. 사나운 말의 울부짖음이 귀를 울리고 가슴의 상처가 저려오더니 몸이 위로 쏠린다. 그리고 숨이 막혀오는 강한 내음. “이...런, 맙소사!” 경악에 찬 비명소리는 사람들의 비명소리에 묻혀버린다. 사나운 말은 상처입은 몸을 겨누지 못할정도로 크게 뛰어댄다. 다시 돌아온 오걸매는 사람들을 한번 휩쓸고는 다시 돌아가버린다. 머리에 흐른 땀을 훔친 병사는 손에 든 증명서가 다 구겨졌다는 것을 알고 난감해 한다. “확인이 되었으니 들어가시지요.” 하지만 주위를 둘러봐도 젊은 관리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기주로 돌아온 자휼은 바로 옷을 벗고 목욕을 한다. 새까만 몸에 붙은 끈적이는 땀과 재가 물에 씻겨 나가는 것을 보자 시원해진다. -그냥 들리는 길이였지. 산길을 이용하다보니 우연치 않게 자네게 보여 내려온것일세. 하류사는 미소짓고는 자휼의 턱을 올려 눈을 바라본다. “강해졌군. 좋은 눈을 가지게 되었네.” “송구스럽습니다.” “불이 무서운가?” 핵심을 찌르는 말에 자휼은 멈칫한다. 하류사는 그냥 미소지을뿐이다. “기회가 된다면...” “예. 마마.” “호북의 을노에게 가보게. 그 일에 대해서 도움이 되어줄터이니.” 정말로 지나가는 길이였는지 그말이 끝나자 대기하던 검은말을 각각 타고 여관과 하류사는 기주와는 반대편길로 사라졌다. 사실 왕씨와 만나면 그동안 소리소문없이 자취를 감춘일이나 그동안 소식이 없었던 점을 미루어 충고를 받으리라 여겼는데 왕씨는 별반의 말이 없었다. 그게 더욱 마음에 걸린 자휼은 세차게 머리를 헹구어내린다. “자휼?” “예. 안에 있습니다.” “들어가겠네.” 얼른 포를 걸치고 문을 열자 예사가 방안으로 들어온다. 예사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휼을 본다. “공격을 당했다면서? 산에 불지른 것과 관계가 있나?” “아아,” 자휼은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3왕자가 말을 팔지 않으려면 죽으라고 하더군요. 안팔고 고집을 피웠더니 절 죽이려고 산에 불을 놓았나 봅니다.” “그랬군. 어째서 그가 자네의 말을 사고 싶어했을까? 자네는 5왕자의 가신이지 않은가. 3왕자도 함부로 하지않을만한 신분인데.” “그는 제가 5왕자의 가신이라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였습니다.” “그래? 흠. 말을 팔라했단 말이지.” “무슨 일입니까?” 물이 떨어지는 머리를 수건으로감싸며 묻는다. 예사는 심각하게 생각하더니 피식 웃는다. “자네, 황제의 경마축제에 참가하는 태수들이 얼마나 되는지 알고 있나?” “아니오. 저희는 그저 말을 대기만 했었으니까요.” “작년에 서른둘의 태수들이 참여했네. 하지만 올해는 몇 명인지 짐작이 가나? 고작해야 열셋정도야. 항간에는 참여의사가 있던 태수들이 기권을 하고 있다더군. 이유는 말이 없다는 거야.”“그럼 혹시 태천이 일부러?” “그런 것 같군. 아무튼 자네가 5왕자의 가신이라는 것을 몰랐다면...이거 큰일인데.” “왜 그렇습니까.” 진지한표정의 예사는 오랫동안 생각을 하나가 결국 짜증을 낸다. “아, 위험한 것은 알겠는데 자네에게 말로 설명하지 못하겠어. 마류님께 가서 듣지 않겠는가?” “마류님이 오셨습니까? 계주일은 잘되었나요?” “그래. 계주 일은 잘 되었지. 지금 윗층에서 잠시 머물고 계시네.” “여기까지 천냥검에 대한 소문이 퍼졌더군요. 정말로 천냥을 주셨습니까?” “아니. 한족들이란 소문을 부풀리는데는 천재성이 보이니까. 저녁에는 계주태수와 연회를 가질 예정이라니 지금가서 여쭈어보게.” 예사가 일어나자 자휼은 서둘러 머리를 정리한다. 178 “경마축제의 진정한 의미는 태천의 감시라고 하는 것이 분명할것이네.” 마류가 차를 따르며 설명해준다. “실제로 축제가 기주에서 열림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양인성에서 짐을 풀고 당일에만 기주로 가지. 들어본적 있는가?” “전에 예사님이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래. 그러니 축제는 사실 3왕자의 돌발을 감시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이지.” 고개를 끄덕인 마류는 창문을 닫고 조용히 말한다. “황자의 자리는 아직도 정해지지 않았네. 1왕자가 죽은 지금은 2왕자도 3왕자도 그 외의 왕자들도 어차피 같은 위치라는 것이네. 누가 황자가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지만 형식상 2왕자가 가장 상의권안에 있으니 실권역시 그가 가장 강하다고 생각해도 무방하네. 하지만 그렇다고 2왕자가 황제가 자신을 황자로 임명해주기만을 기다리는 바보같은짓을 할까?” “2왕자가 다른 왕자들을 누를것이란 이야기군요.” “그래. 2왕자도 마찬가지지만 다른 왕자들은 황제의 눈치도 봐야하고 2왕자의 눈치도 봐야하니 더더욱 행동이 조심스러워지는 것이 당연하네. 속이야 황자에 욕심이 있건 말건 겉으로는 2왕자의 충실한 심복이되어야 황자가 정해지기 전에 2왕자의 손에 죽을위험이 줄어든다는 말이네. 지금 황궁에 가장 유력한 왕자들이 누구인가.” “2왕자와 4왕자가 아닙니까. 5왕자까지? 하지만 3왕자는 한족혼혈이니 황자에 오를리가.” “그래. 하지만 눈앞에 있는 임자 없는 황금덩어리를 줍지 않는 인간은 없네. 3왕자도 은근히 욕심을 부려왔을것이고 때가 되었음을 느껴 이번 경마축제에 모종의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이지. 그런데 그 모종의 일을 도모할적에 적인 5왕자의 가신에게 그 모습을 딱 틀키고 말았다는 말이네. 예사가 위험하다고 말한 이유를 알겠는가?” “제가 어찌하면 좋을까요.” “5왕자를 방패삼아야지. 이 기주에서는 조용히 지내는 것이 최고일 것 같네. 알겠나.” “알겠습니다.” 자휼이 고개를 숙여 마류의 조언에 감사를 표한다. 마류는 차를 불어 마신다. “황제가 도성에서 떠난지 한 사일정도 되었나. 여기까지 오려면 더 기다려야 하겠지.” “유번님이 긴장하고 계시겠군요.” “걱정하지 않아. 그는 잘 해낼만한 인물이네. 그래서 왕씨께서 부르신것이고.” “예.” “황궁안에는 오걸매가 도착했을 때군. 성안이 소란스럽겠어.” “오걸매라 함은...?” “황제의 동생이지 대장군에 위임하고 있네. 호북에 가있는 을노와 대치중인 장군이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자휼이 묻는다. “어째서 성안이 소란스럽다는 것입니까.” “그가 미쳤기 때문이야.” 마류는 어깨를 으쓱여보인다. 절대로 익숙해 질수 없는 시선에 익은 책을 내리고 외친다. “왜 또?! 왜 또?! 왜 그렇게 보냐고!” “화낼 것까지는 없잖아요. 그냥 본거에요.” “내가 무슨 그림이냐? 그렇게 보게? 호랑이가 사라졌는지 가서 다시봐봐.” “방금전에 확인한후부터 오분도 안지났어요.” “그럼 저쪽 벽봐. 나보지 말고.” “원래 그렇게 머리가 하얀색인가요?” “눈이 안보이냐? 내머리가 어째서 하얀색이냐.” 주는 피식 웃는다. “잘 어울리는군요. 양만관과 정말 잘 어울려요.” “쓸대없는 소리 말고 어서 벽이나 봐.” “양만관은 혼혈이죠? 거란과 한족? 여진과 한족? 혹시 만주족과 한족?” “시끄러!” 등을 돌린 익은 짜증나는 표정을 지으며 주를 외면한다. 하지만 주는 지칠줄 모른다. “사실 양만관은 무관쪽이 아닌가요?” “...” “실제로 양만관은 덩치도 좋고 움직임이 정확하니 아마도 예전에 호신술 정도는 배워두었을것이 분명해요.” “머리를 보면 어느쪽인지 모르겠지만 눈이 검은색이니 분명 한족일테죠.” “하긴 양만관이 무관의 능력도 있다면 질투했을거에요. 문관으로써 능력도 충분하니까요. 난 운동은 영 아니거든요.” “시끄러!” 익은 벌떡 일어나 화를 낸다. “너 정말 시끄러워! 밖에도 아까부터 소란스럽던데 왜 이렇게 시끄러운거야! 호랑이가 있던 없던 나가버려! 난 병자야 병자! 이거, 이거, 다리 아픈거 안보여! 편히좀 쉬게 나가주면 안되겠냐!” “벌떡 일어나는 것을 보니 설수는 있나보네요. 뭐. 이왕 이렇게 된거 좀 친해지는 것은 어때요.” “너 다섯셀때까지 안나가면 나 벼루를 던져버린다.” “사실 우관과 특별한 사이죠?” “저걸 콱 그냥!” “잠깐만요. 조용히 해봐요!” 주가 갑작스럽게 웃던 얼굴을 정색하며 귀를귀울인다. “들어봐요. 병사들의 소리죠? 집단으로 나가는 소리에요. 황제도 없는데 누가 군사를 출궁시키는 걸까요?” “위임받은 육관밖에 더 있나.” “이상하군요. 저 나가볼께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금방 올께요.” “영영 오지마라.” 정색을 하는 익에게 주는 혀를 낼름 내밀고는 밖으로 뛰어나간다. 주가 나가자 익은 탁자에서 벌떡 일어나 다리를 감싼 붕대를 재빠르게 풀어 부목과 함깨 품에 넣어 숨기고는 자신도 방을 뛰어 나간다. 주는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멀리 보이는 십여명의 군사들이 군마중에서도 빠른 말들을 골라타고 있었다. 그 옆에 히우루의 모습도 보인다. 그는 심각하게 군사들에게 뭐라 명령한다음 상자에 봉인한 서신을 하나 넘긴다. 군사들이 바람같이 달려 궁을 나가자 히우루는 서두러 대전쪽으로 사라진다. 근처에 다른 자들에게 무슨일이 있었는지 물어보지만 그들역시 고개를 흔들며 잘 모르겠다는 말뿐이다. 결국 주는 머리를 긁적거리다가 아버지인 대홍로에게로 걸음을 옮긴다. 대홍로는 공무중 아들의 방문을 받고는 좁은 밀방으로 그를 데리고가 묻는다. “왜 찾아왔지?” “헌완공이 서신을 띄우더군요. 궁안에 무슨 일이 있었던거죠?” “녹상서사(錄尙書事:내각총리 히우루의 관급)가 서신을 보내? 별로 문제될것이 없지 않느냐. 황제가 궁을 나갔으니 의논할것이 있어 서신을 보낸것이겠지.” “그외에 궁안에 있었던 일은 없었나요? 제가 모르는 거요.” “글쎄다.” 대홍로는 곰곰이 생각에 잠긴다. “언제나와 같다. 별다른 일은 일어나고 있지않아. 네가 모르는 것을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는 힘들다. 난 네게 다 말해주니 말이다.” “뭔가 있으면 바로 알려주시기에요.” “그래.” “아참.“ 주는 방을 나가려다가 짜증을 낸다. “제 방앞에 호랑이가 있는데 그거 누구한테 말해야 하는거에요? 방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어요.” “내가 치워주지. 기다려라.” “황제라는 권위로 날짐승이나 키우고...나원.” 짜증을 내며돌아선 주에게 대홍로가 묻는다. “너 그럼 지금 어디 있는거냐?” 그말에 주는 어깨를 으쓱인다. “속을 알수 없는 혼혈놈 방안에서 신세지고 있어요.” 옷을 잡아당겨 품에 안으려는 그를 뿌리치고 떨어지려고하나 한번 잡힌 손은 뼈가 으스러져도 빠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머리위로 거미가 내려온다. 두 번다시 이곳에 오지 않을생각이였는데. 정신없이 달려온 곧은 기억하기 싫은 북문의 폐가였다. 그래로 밀어넣는 그자가 전의 그자라는 것이 너무도 확실하여 당황함과 혼란에 휩싸인다. 팔을 꺽어 힘으로 굴복시키자 한숨과 함께 상대의 숨결이 느껴진다. 담배라고 했던가. 여전히 지독해 헛구역질이 나오려고 한다. 가슴을 헤치는 손에 짜증을 내며 몸부림친다. “상처가 있으니 헤집지 마시오! 내말 듣고 있는 거요? 상처를 건들...악!” 상처가 벌어지는 느낌에 눈앞이 캄캄해진다. 거친손이 붕대를 쥐어뜯어낸다. 벌어진 상처에서 피가 흐르는지 간지럽다. 자신의 몸을 탐하는 자에 대한 불쾌감과 모욕감보다 벌어진 상처에서 흐르는 피와 고통이 더 충격적이다. 작별인사한지 몇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다시 차의원을 찾아가야 할지도 모르겠군. 역시 전과 같이 포기해버린다. 한번 물렸던 것 또한번 물리면 어떠냐는 식이다. 눈동자마 올려 천장을 바라본다. 다행히 전보다 거미줄이 잔뜩이라 시간때우기 지루하지는 않겠다고 여긴다. 간간히 거미가 줄을 타고 내려오니 겨울에 당했던 것보다는야 즐거운 일이 아닌가. 해볼때로 해봐라는 듯 몸을 내맡겨버린다. 상처쪽에 손이 닿으면 그 거친 움직임에 고통을 참아야하지만 그 외에는 전과 별다를것이 없어 다행이라 여긴다. 물론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찌하랴. 몸을 부셔져라 누르던 상대도 자례가 별다른 반항을 안하자 목을 조르던 손을 늦추어 숨쉬기까지 쉬워졌으니 더 이상 뭐가 걱정이겠는가. 거친손이 옷자락속을 파고 들어오며 상처와 맨살을 휩쓸때 반감에 몸이 움찔거리는 것은 어쩔수 없지만 그 외에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힘을 뺀 모습에 오걸매는 잠시 손을 멈추고 자례의 반응을 살핀다. 목을 눌렀던 손을 때어낸다. 자례가 그 느낌에 눈을 뜨고 오걸매를 바라본다. 그 핏발선 누런 눈을 보는 순간, 뭔가 이상한 그의 분위기에 알수 없는 공포감이 든다. 자례는 애써 태연하게 옷을 추스르며 그의 눈치를 본다. 복장은 어디 시골의 장수같은데 땀과 먼지로 멈벅이 되어있다. 등위에 올려진 온전한 머리를 달고 있는 하얀 호랑이 가죽에는 피가 튀겨 있어 그의 성품을 짐작하게 한다. 몸집은 레이첸정도. 하지만 호랑이 가죽을 뒤집어 써서 그런지 그 어깨와 덩치는 더욱 커보인다. 적갈색의 머리는 지저분하게 산발이 되어 그 사이로 보이는 눈만이 늑대같은 야광을 뿜어낸다. 뭔가 위험한 자같군. 자신에게 하려던 일과는 달리 앞에 서서 자신을 노려보는 이 사내자체가 위험하다는 것을 느낀다. 등줄기에 길게 땀이 흘러내려간다. 한참을 그렇게 서로를 노려본다. 먼저 진 것은 자례였다. 그 오싹한 눈동자를 더 이상 보았다가는 뭔가에 홀려버릴듯한 느낌이라 힘들게 눈동자를 돌려 오걸매의 등뒤에 있는 축사의 문을 바라본다. 이대로 나가면 안될까. 그냥 보내줄 것도 같은데. 풀어져 버린 머리를 귀뒤로 넘기며 입을 연다. 하지만 생각이 소리로 변하기 전에 그가 먼저 다가와 그 두꺼운 두 팔로 허리를 안아들고는 벽쪽으로 밀친다. 반항을 하려고 몸에 힘을 주지만 곧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기억해 내고 벽쪽으로 밀쳐지면서도 그의 눈을 바라본다. “미안하지만 나는 당신과 몸을 나누고 싶지 않소. 사내를 원한다면 기루로 가 연동을 찾으면 될것이 아니오.” 하지만 들리지 않는다는 듯 앞자락을 풀어헤친 그는 목덜미를 덥썩 물어버린다. 괘락을 위해 무는 것이 아닌 정말로 짐승같이 물어버려 자례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고개를 옆으로 돌린다. 목이 간지럽다. 눈물이 날 정도로 아프지만 차마 그앞에서 울수가 없어 눈을 부릅뜨고 오걸매를 노려본다. 오걸매의 입에서 길게 내려오는 붉은 것은 자신의 피다. 입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느꼈는지 그는 신기하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리는 자례의 턱을 당겨 눈을 마주본다. 역겨운 냄새에 돌아버릴 지경이지만 그는 숨소리가 들릴정도로 얼굴을 맞댄다. 그 눈동자에서 빛나는 위험한 느낌에 정말로 그가 자신을 먹어 버리지는 않는가 일순 걱정이 된다. “너..넌...살아있다.” “뭐?” “피가...여기, 다...따뜻하다.” 그의 어눌한 말에 그에게서 느껴졌던 이질적인 분위기에 대해 해석을 할수 있게 된다. 그는 몹시 화난 표정으로 아직도 피가 흐르는 목에 입을 맞춘다. 목으로 피가 쏠리는 느낌이 공포스럽다. “죽을거다...너...그리고 나.” “무슨 말을 하는건지는 모르지만 정말 날 먹어버릴생각이오?” “나...난 안죽는다!” 크게 외친 오걸매는 늘어진 검은 머리채를 손으로 휘어잡는다. 179 레이첸은 이상하다는 얼굴로 좌중을 돌아본다. 떨떠름한 표정의 병사들은 그를 보고 고개를 숙여 인사하지만 뭔가 제정신이 아닌듯한 모습이다. 그대로 지나치려다가 멈칫한 레이첸은 팔짱을 끼고 묻는다. “무슨 일이냐?” “아무것도...” “시끄럽다. 아무것도 아닌데 이렇게 많은 수의병사가 궁의 정문앞에 몰려 있느냐.” 결국 한 병사가 오걸매가 궁문을 억지로 열고 출궁했다가 입궁하는 관리를 하나 납치해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해준다. 레이첸은 소리내어 웃는다. “대장군은 여전하시군. 녹상서사께서는 무슨말을 하시더냐?” “그게...” “황제게 서신을 보내 대장군을 어찌해야 하냐고 했는가? 소용없다. 전과같이 그냥 놔두라고 할것이다. 끌려간 놈만 재수가 없는 것이지. 호북의 전쟁에서 살아남으려면 꽤 고생할테니 말이야.” 낄낄거린 레이첸은 그대로 말을 끌고 성문을 나간다. 오래간만에 사냥을 갈생각이였다. 그동안 특히 곡양에서 돌아온 이후로 위축되어 놀이삼아 성을 나가지 못했던 것을 태진이 나가 잔소리꾼이 없어진 기념으로 거하게 사냥 한판할 예정이였다. 성문이 멀어지자 말을 신나게 달린다. 여전히 성안에서 말을 타는 자신을 제지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성밖까지 내리 말을 타고 달려나온 레이첸은 숨을 들이쉬며 하늘을 바라본다. 황제는 봉인된 상자를 열고 비단으로 덧댄 서신을 읽는다. 다 읽은 아골타는 별일 아니다라는 듯 그것을 상자에 다시 넣고 환관에게 일러 불태우라 명령한다. 마차 밖에서 부복해 명령을 기다리는 사자에게 툭 내뱉는다. “그냥 놔두라.” 아골타의 말이 끝나자 마차는 다시 출발하기 시작했고 사자는 벌떡 일어나 황제의 말을 전하기 위해 다시 황궁으로 뛰어 들어간다. 황제는 다시 출발하는 마차의 진동을 느끼며 눈을 감는다. 긴 여행이 지루하다. 그러고 보니 직접 말을 타고 어딘가를 나섰던 마지막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게 아니지. 규칙적으로 흔들리는 진동에 몸을 뒤척인다. 과연 2왕자가 내 뒤를 이어 이 나라를 이어갈수 있을까. 너무 성급했어. 1왕자를 죽이는 게 아니였는데. 지금에와서 생각하면 이것 저것 모자르다고 생각한 1왕자지만 어떻게 보면 이것 저것 대강 구색은 갖춘 놈이라 할수 있었다. 모난 구석이 없다고 할까. 우둔하지도, 영리하지도 못한 놈이였다. 죽은 자를 생각하는 것은 쓸대 없는일이지. 고개를 반대쪽으로 괸다. 2왕자는 누굴 닮아 저러는지 몰라도 성품이 너무 선비적이다. 황제라는 자리는 선비정신만으로는 지탱할수 없다. 그가 왕자가 되면 장자직속의 원리에 따라 군신들의 지지는 받겠지만 그 야박한 선비정신 때문에 곧 마찰이 생길것이고 혼란스러워질것이다. 그들을 내보낸다고해서 문제는 끝나지 않는다. 직위를 읽고 화려한 생활을 잃은 그들은 다른 왕자에게 달려가 새 집을 얻는대신 2왕자를 몰아내려고 할것이다. 그렇다고해서 2왕자가 과감히 그들을 모두 죽이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체이첸이 가지고 있는 욕심은 현군으로의 욕망이야. 세간에 이름을 날리고 싶다는 욕망. 남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인정받고 싶어하는, 태어났을때부터 1왕자에 가려 빛을 보지 못했던, 좋은 것은 1왕자가 항상 그 나머지만을 받았던 그림자의 역할에서 벗어나려는 어린아이의 충동적 욕구와 같은것이다. 그놈은 자신의 명예에 위배되는 짓은 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놈도 내 피를 이어받았으니 그 속의 피는 분노를 잠재우고 있을것이 분명하다. 아닌척하면서도 뒤로는 사람을 모으고 내 앞에서는 그저 성실한 맏왕자의 역할을 다 해내는 것을 보면 어느정도 모략적으로 성장했다고 할수 있다. 곁에 대범한 놈하나 끼여있으면 황제가 되고나서도 어느정도는 나라가 유지가 될것이다. 그 대범한 군신이 체이첸이 하지 않으려하는 궂은 일을 할테니까.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못한다. 왕이 선행만을 하면 군신은 악행만을 해야하고 결국은 왕이 군신을 처형하는 관계가 되어버려 황궁이 무너져내린다. 그것을 2왕자도 알고 있을것이다. 그래서 무리해서 사람들을 모으고 있는것이지. 내 눈을 속여 입적시험에 합격한 자들을 뒤로 돌려내어가면서 말이다. 그렇게 모아둔다면 나중에 궃은일을 하는 군신을 죽이더라도 다른 군신이 그 일을 맡아주거나, 군신들을 죽이는 것을 바대하는 주장을 해줄수 있으니까. “귀엽지 않는가.” 피식웃은 아골타는 팔짱을 낀다. 전부터 생각했던 것이지만 위태위태 하지만 일단은 2왕자가 황자로써는 그나마 적합하다. 사실 1왕자를 죽인 그순간부터 마음에 들어찬 것은 2왕자였다. 하지만 그렇게 마음을 결정하기엔 많은 시간이 걸렸다. 2왕자의 선비 짓이 마음에 들지 않아 결정할수 없었고 또한 2왕자와 흡사한 외모의 4왕자 레이첸에게 은근한 기대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 아이라면 혹시 2왕자의 현명함과 나의 패기를 닮아 현군이 되지 않을까 하고. 하지만 그저 사냥을 좋아하는 초지의 젊은 사내일뿐. 부인을 맞이하게 해보았지만 애는 애다. 마냥 철부지처럼 사냥을 하러 나가고 궁밖으로 나돌아다니는 망나니일뿐. 가끔 자신의 눈치를 보거나 속으로만 생각했던 비밀이야기를 불쑥 꺼내는 둥의 예리함을 보여 당황하지만 그놈은 천성적으로 욕심이라는게 부족한 놈이다. 욕심이 없는 황제는 그 권위를 오래 유지하지 못한다. 그래서 4왕자는 안될것이다. 2왕자가 가장 합당한가. 하지만 5왕자놈도 뒤로 미뤄놓을수만은 없는 놈이다. 규칙적으로 흔들리는 마차안에서 아골타는 홀로 깊은 생각속으로 빠져든다. 마고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딱히 물건을 사러 나온 것은 아니지만 그것에 새겨진 글씨에 끌렸다는 것이 정확할것이다. 걸음을 멈추고 붉은부채를 자세히 들여다본다. 금사로 붉은 비단에 새겨진 천애여비린이란 글자가 생소하지 않아 계속 들여다본다. 부채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확실히 정성들여 만든 물건이라는게 보인다. 사실 외관의 모양보다는 부채에 세겨진 글자가 마음에 걸린것이다. “이 물건을 사실생각이 있으십니까? 물건을 보는 물건이 있으시군요.” “얼마지?” “산관을 주셔야 합니다.” “삼관? 황성의 부유한 상인도 아니면서 이런 시골까지와 부채 하나에 삼관을 달라는 건가?” 씨익웃는 장사꾼은 살테면 사고 말라면 말라는 눈치이다. 부채를 들어 펼쳐본 마고는 잠시 망설이다가 장사꾼에게 삼관을 넘긴다. “좋아. 사지.” “이거야, 정말이군요! 그 젊은도련님의 말이 딱 맞았습니다 그려!” “...무슨?” “다른쪽 부채를 사간 한 도련님이 기산에 오면 나머지 부채가 팔릴것이라 말해주셨답니다. 정말이군요!” “이 부채, 짝이 있는가?” “예. 파란색 짝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황성쪽에서 나가버렸지요.” “...그래?” 장사치 앞에서 깊은 생각에 잠겼던 마고는 그에게 묻는다. “어떤 사내였지?” “예? 뭐, 그냥 20세정도의 젊은 도련님이였습니다. 좀더 어릴지도 모르겠군요.” “그가 여기에 와서 이부채를 팔라고 했나?” “예. 분명 사줄 사람이 있다면서...” “그래? 생김새같은것은?” “그냥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가지고 파란색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만...” 갑자기 알수 없는 짜증이 밀려온다. 등을 돌려 성으로 돌아온다. 북쪽문의 더 이상 수해는 없다. 자신에게 사심을 가진 죄로 기주로 먼저 달려갔으니까. 방문을 닫고 책상에 앉아 부채를 내려보며 인상을 쓴다. 수해가 자신을 그의 아우와 동일시해서 본다는 것을 모른다는 건 아니다. 그것은 스스로도 알고 있으며 친첸역시 종종 말하는 것이다. 그래 절대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문제되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자신도 어느정도는 수해에게서 다른 누구의 친절함을 받으려고 했던것이라 생각했으니까. 결국 서로 가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뭔가 이건 아닌 것 같은데. 저 멀리 얼굴한번 내 비치지지 않던, 황제의 축일에 얼핏 본 나와 전혀 닮지 않는 아이는 무엇하나 움직이지 않고 수해를 좌지 우지 하는가. 적어도 수해가 자신에게 입을 맞추지만 않았더라도 이 사실이 그리 억울하지는 않았을것이다. 무엇인가 손해보았다는 느낌이다. 정작 수해를 감싸고 보살피는 것은 나인데 결국 수해는 황궁에 있는 녀석의 형인 것은 변함없다. 저 먼곳에서 유유자적하게 앉아있는 놈은 그 웃는 얼굴로 모든 것은 무마시키려고하는가. “무엇을 그렇게 생각하는거냐?” 눈을 들어 앞을 본다. 언제부텨였는지 모르지만 쉬첸이 탁자에 앉아 서신을 보고 있다. 이상하다는 듯 쉬첸은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마고에게 다가간다. 표정없는 얼굴의 턱을 잡아 올려 눈을 마주본다. 그 다갈색의 눈에 자신만이 알아볼수 있는 미묘한 변화가 있어 웃는다. “뭔가 화가 난 표정이구나.” “아닙니다.” “왠 부채냐? 이것사려고 방을 비운거냐.” 친첸이 마고의 손에서 부채를 빼내 펄럭인다. 부채를 살펴본 친첸은 묘한 표정을 짓는다. “천애여비린이라. 너 여인이 생긴거냐?” “아닙니다.” “네가 스스로 이런 문구의 부채를 산거라니 믿어지지 않는군.” “제가 쓸것이 아니라...” 하지만 말을 끊는다. 궁금해 눈썹을 올리며 뒷말을 묻는 친첸을 보고 망설인다. “...그냥 예뻐서 하나 사봤던겁니다.” “충동적이란 거냐. 이상한 일이군. 너하곤 어울리지 않다.” 부채를 책상에 던진 친첸은 마고의 손을 잡아 일으킨다. “나가자. 내가 좋은 것을 골라주지.” “됐습니다. 부채 따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러지 말고. 아니라면 수해를 내보내서 아직도 내게 화가 나있는거냐?” “그런게 아닙니다!” 버럭 소리지르고는 스스로 놀란다. 지른자도 놀라눈이 커지고 때아닌 호통에 들은자도 놀란다. 잠시 서로를 바라보던 둘중 친첸이 먼저 입을 연다. “넌 저런거 어울리지 않아.” “죄송합니다.” “나가자. 여름이 오니 절기 선물하나 주는 것도 좋지 않으냐.” 결국 손에 이끌려 다시 밖으로 나간다. 180 긴 여행에서 돌아와 익숙한 방안의 안락함에 편하게 몸을 푸는 하류사와 여관은 아무말도 없이 창가에 앉아 화원을 감상한다. 날씨가 이젠 더워서 따로 나비를 키우지 않아도 어딘가에서 날아온 나비들이 화원을 날아다닌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보다 그자는 누구였을까요.” “누구말입니까?” 여관은 다 알면서 왜 모르는 척하는하시는가 하는 의아한 눈을 한다. 하류사는 빙긋 웃을뿐이다. “그자, 한족은 아니였습니다. 그렇다고 유목민족은 더더욱 아니였습니다. 그는 필시...” “고려인이였습니다.” 하류사는 여관의 말을 끊으며 대답한다. 목이 마른지 잔기침을 하는 하류사를 보고 여관은 물주전자를 당겨 차를 탄다. “역시. 고려인이였군요. 지금 고려의 왕은 왕흠이라는 자라는데...” “왕흠. 자는 원량. 현종의 장남이였지요.” “고려인이 무엇 때문에 금나라안쪽까지 왔을까요? 그들은 거란과 사이가 나빠 금에와서도 그다지 좋은 관계가 아니지 않습니까. 고려의 그것이 훈요십조로 인한 것이라고 떠들어대지만 실은 사신송환으로 인해 벌어진 것이니까요.” “흠. 여관께서도 알고 계십니까. 사신송환의 문제는 둘째치고 압록강의 성교를 허물어 달라는 요구를 거란에서 거절했기 때문에 하정사 파견이 중단되었던 것이겠지요. 그 때문에 크고 작은 싸움이 계속 일어나고 있고...” “지금 성을 쌓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 성을 쌓고 있는 것이 왕흠의 아우인 왕형. 하지만 그는 형과는 예종의 총기를 타고 나지 못한 것 같군요.” 그말에 여관이 설마하는 표정을 짓는다. 그때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린다. 백라가 하류사의 일행이 여행에서 돌아왔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뛰어온것이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좌보님.” 빙긋 웃은 하류사는 백라의 긴 여행의 이야기를 들은 준비를 한다. 눈을 뜨자 히미한 시야가 다시 눈을 감게 만든다. 하지만 몸에 닿는 차가운 바닥에서 다시 정신을 차리려고 애쓴다. 잠들었나. 흩어진 머리를 뒤로 넘기고 풀어진 옷을 당겨 몸을 가린다. 잠시 허리의 통증에 가만히 있다가 일어나 옷을 챙겨 입는다. 얼마나 지난것인지 사방이 어두컴컴하다. 막 해가 진 듯 공기중에는 아직 온기가 남아있다. 몸을 돌려 문쪽으로 걸어가려하지만 다리가 후들거린다. 결국 한참을 서서 힘이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어느정도 익숙해져 다리를 움직일수 있게 되자 천천히 걸어 문쪽으로 다가간다. 하지만 문을 가로막고 있는 하얀 호랑이에 걸음을 멈춘다. 아까 자신의 위에서 몸장난을 하던 자네는 스스로의 행위에 지쳤는지 곤하게 잠들어 있었다. 잠들은 것은 상관이 없는데 하필 문을 등지고 잠들어서 나가지 못하는 상황이다. 어둠이 깔리고 어느정도 눈이 그것에 익숙해지자 잘만하면 나갈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걸매의 몸을 치지 않게 조심하면서 돌아간 문에 힘을 주어 당긴다. 헤쳐진 가슴의 상처가 쓰려 눈물이 나올것만 같다. 잠든 오걸매의 몸이 얼마나 무거운지 꼼짝도 하지 않는다. 무리하게 힘을 줘 확가 잡아당기자 오걸매의 몸이 앞으로 쓰러져 버린다. 그가 뒤척이자 깨어나는가 하는 생각에 움찔하지만 그틈으로 열린 문사이로 축사를 나와버린다. 하늘에 상현달이 떠있다. 그러고 보니 그날도 그랬던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본다. 상현달의 마력에 빠져들까 싶어 급하게 고개를 흔든 자례는 천천한 하지만 분명한 걸음걸이로 축사에서 멀어진다. 차의원을 찾아가야 할까. 잔소리가 엄청나겠지. 하지만 이런 몰꼴로는 황궁에 들어갈수도 없는걸. 결국 차의원을 찾아가기로 하고 그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얼마나 걸어갔는지, 전에도 한번 왔던 길이지만 완전히 어둠이 깔린 이곳은 여전히 새롭다.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저 멀리 보이는 북쪽문의 초소불빛을 기준삼아 걸어간다. 어디선가 말소리가 들린다. 흠칫 귀를 귀울여 그 소리를 확인하고는 불안감에 휩싸인다. 몸을 숨기는게 좋겠다 생각해 근처의 골목으로 들어가 담의 그림자속으로 들어가 죽은 듯 숨는다. 역시 상처입은 백마를 끌고 달려온 자는 오걸매였다.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그 역시 나가는 길을 잊은걸까. 오걸매는 좀더 두리번 거리다가 다른쪽으로 말을 달려사라진다. 그가 사라지고 말소리가 들리지 않자 크게 숨을 쉰다. 다시 일어나서 가고 싶지만 오걸매가 사라진 방향이 가려고 했던 방향이라 어찌할줄 모르겠다. 좀더 기다렸다가 그가 북쪽문으로 빠져나갔을정도에 걸어가는게 좋겠다고 결정한다. 비스틈이 담에 기대 앉아 무릅에 고개를 올려놓고 피곤한 몸을 쉬게한다. 밤이 되어도 그다지 춥지 않는 날씨라 잠까지 온다. 아니 잠이 든다. 익은 짜증을 낸다. 주는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길뿐이다. “아니, 어떻게 그럴수가 있지? 황제의 관리를 그렇게 데려가도 되는것인가?! 그런 유괴다!” “조용히해요. 대장군이라 아무도 막지 못했던거겠죠.” “녹상서사는 괜히 있는줄 아냐! 도대체 뭐하고 있는거야!” “황제가 승낙했다고 하잖아요.” 주 역시 짜증스럽다는 듯 말한다. “에이, 일이 왜 이렇게 꼬이는지 모르겠군. 내 생각대로 진행되지 않아. 대장군에게 끌려갔다면 살아돌아오긴 틀렸군.” 챙깡하는 소리와 함께 찾잔이 주의 얼굴 옆으로 찻잔이 날라온다. 얼굴로 튀긴 물을 소매로 닦아내며 주는 익을 노려본다. “무슨 짓이에요.” “말은 씨가 된다고했다. 그딴 말 두 번 다시 하지마라.” “사실을 말한 것 뿐이에요. 대장군은 호북의 송과의 대치선을 막고 있는 전방장군. 전쟁터에 끌려간 비서랑이 얼마나 견딜거라고생각해요? 게다가 대장군은 정상도 아닌데.” “정상이 아냐?” “대장군이 미쳤다는 거 몰라요? 알만한 사람은 다 알텐데.” “대장군이 때마다 비서랑들을 뽑아 간다는 것은 알지. 하지만 미쳤다니?” 익은 붕대를 감은 다리를 들고 남은 한다리로 뛰어 침상위로 올라 앉는다. “아는 것이 있으면 말해봐.?” “대장군인 오걸매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 뿐이에요. 저 역시 만나서 이야기 해본 것이 아니라 몰라요.” “미친자가 어떻게 대장군이 되지?” “모르죠. 하지만 문관은 글에 미쳐야 등용이 되고 무관은 피에 미쳐야 등용이 가능한 것이 아닐까요. 뭐 결국 문무 다 사람죽이는 기술이지만.” 오싹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한 주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호랑이가 없어졌으니 전 가볼께요.” “...넌 우관에게 무엇을 바란거냐?” “예?” “너가 우관에게 접근하고 있었다는 것을 모를 것 같아?” “별일 아니에요.” 어깨를 으쓱인 주는 웃는다. “그저 그정도의 머리가 있으면 미래를 보아야 한다는 거죠. 그뿐이에요.” 익의 의심스런 눈을 피한 주는 피식웃으며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문을 걸어잠근다. 눈을 뜬 것은 발걸음소리보다 그 고약한 냄새때문이였다. 뭔가 고개를 들사이도 없이 누군가 팔을 잡아당겨 몸을 일으킨다. 순식간에 잠이 깨어 팔을 잡은 자를 이해할수 없는 눈으로 바라본다. “왜?” 하지만 화난 표정의 오걸매는 그대로 벽에 밀친다. 등을 부딪친 충격으로 몸을 수그리자 등위로 발을 올린 오걸매는 더듬더듬 말한다. “도...도망...쳤...안돼!” “당신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발 내려!” “나쁜....나쁜 거다!” 발에 힘을 주어 몸을 누른다. 뭔가 굴복시키려는 것 같은데 이건 뭔가 아니다라는 생각에 자례역시 몸에 힘을 주어 버팅긴다. 아무리 무쇠다리라고 하지만 한다리보다는 전신이 버팅기는 힘이 강해 오걸매는 발로 누르는 것을 포기하고 그래도 차버린다. “악!” 설마 차겠느냐라는 생각을 하고있던터라 그대로 옆구리를 맞고 쓴비명을 지른다. 일어나기도 전에 화가 나 씩씩거리는 이 피묻은 하얀 호랑이에게 난대없는 구타를 맞는다. 처음 며번의 주먹이 쓰릴뿐이고 나중에는 그냥 아릴뿐이다. 피하거나 도망치면 될터인데 이 알수 없는 사내는 말도 통하지 않고 그렇다고 힘으로 하긴 딸린다. 천적이 이런것일까. 그 와중에 별생각다하고 있는 자신이 참 웃기다. 정말 이렇게 십여분만 더 맞으면 맞아 죽을지도 모르는데 이런 태평한 선비 놀음이라니. 터진 입술의 피를 손으로 훔친 자례는 다시 때리려는 주먹을 피해 고개를 돌린다. 맞을줄 알았는지 몸의 균형을 잃고 휘청이는 오걸매의 빈틈을 타서 그대로 골목을 빠져나와 내달린다. 그가 따라오는 것이 느껴진다. 실제로 달리기에는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이 지친것인지 아니면 아까 맞을때 다리를 다친건지 그것도 아니라면 따라오는 저 미친 호랑이가 빠른건지 거리가 좁혀진다. 이럴때 뒤를 바라보면 분명 잡힐거라고 느끼지만 그래도 등골이 오싹한 그 시선에 뒤를 바라보고는 기겁한다. 그 누런 눈에는 정말로 호랑이같은 푸른 안광이 번쩍인다. 정말 죽이려고 하는가. 그럼 혹시 저자는 태진의 자객인가. 혹시 레이첸? 막 골목을 돌아 나오자 마침 북쪽성문을 순찰하고 있는 서너명의 병사들이 보인다. 구세주를 만난 것 같은 기분으로 자례는 그들에게 달려와 숨을 헐떡인다. 병사들은 때아닌 이 피투성이 젊은 사내에게 놀라지만 얼른 경계태세를 취한다. “무슨 일입니까.” “모르겠습니다. 저자가 갑자기 절 죽이려고 덤벼들기에...” 병사들은 일순 북쪽성문의 망나니들이 술에 취해 서로 죽이려는가 하고 의심을 품지만 파르르떠는 이 작은 사내의 피투성의 옷자락이 고급스럽고 그 검은 눈매에서 높은 자존심이 보여 얼른 창을 빼들고 앞을 막아선다. “어서 초소로 돌아가시오!” 병사 하나가 자례를 부축하여 초소쪽으로 피해간다. 남은 병사들은 조심스럽게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적을 경계하며 앞으로 나간다. 바로 골목을 돌아 나오는 오걸매를 본 병사들은 놀라 뒤로 물러나지만 그래도 황성을 지키는 병사답게 창을 겨누며 외친다. “거기 서라!” 등뒤에서 싸우는 소리에 자례가 흠칫 놀라자 부축하던 병사가 걱정말라는 듯 말한다. “걱정마시오. 그는 병사들이 막을것이요. 황성의 병사들은...” 하지만 말은 끝나지 못한다. 자례와 병사의 사이로 거다란 창이 불쑥 들어오더니 병사의 목을 쳐낸다. 뜨거운 피가 얼굴로, 입으로 마치 비처럼 터져 흐른다. 자신의 허리를 잡아 부축하던 몸은 그대로인데 말하던 목만 아래로 떨어진다. 아직도 뻐금뻐금거리면서. 붕어 같네. 너무 놀랜것이지 시체를 많이 봐야 별 감흥이 없는것이지 멍하니 피가 쏟아져 나오는 그 머리를 바라본다. 몸은 고통을 느끼는지 아닌지 자신을 한번 꽉부여잡고는 그대로 쓰러져 머리와 운명을 같이 한다. 고개를 돌려 창을 든 미친 호랑이를 바라본다. 새로운 피가 묻은 호랑이 가죽에 손을 닦은 오걸매는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아이에게 다가간다. “나..쁜거다.” “뭐가? 뭐가 나쁜건데?” 놀란것보다는 짜증스럽다는 표정의 아이가 뒤로 물러난다. “죽일건가? 누가 보냈지? ” “넌...너도...도...망친다.” “난 당신이 하는 말의 뜻을 몰라!” 와락 소리질러버린다. 때를 맞추어 오걸매가 창을 거꾸로 들고 그대로 다리를 향해 휘두른다. 뭔가 익숙하면서도 등에 소름이 돋는 소리가 들리자 휘청이며 그 자리에 쓰러진다. 곧 밀려온 지독한 통증에 몸을 떨며 오걸매를 노려본다. “뭐하는 짓이야!” “이젠...못...한다.” 오걸매가 자례의 부러진 다리를 툭 차며 창을 세운다. 고통에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들석이는 자례를 보고는 마음에 들었는지 한손으로 허리를 잡아 어깨에 올린다. 어깨에 올린 자례는 기절한건지 울고 있는건지 아무런 반응이 없다. 오걸매는 말을 끌고는 어둠속으로 사라진다. 181 긴 황제의 일행의 중간정도에는 체이첸 역시 끼여있었다. 성장해서는 처음으로 가는 경마축제라 따로갈지 수행원으로 갈지 고민하던 체이첸에게 황제는 따라오라 했다. 어차피 황제는 양인성으로 들어가고 자신은 기주로 들어갈것이니 그 동안이라도 따라오라는 것이였다. 자신에게 미소짓는 황제의 얼굴에서 그 마음을 짐작할 수가 없어 체이첸은 승낙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황제가 여행도중에 자신을 불러 이야기를 하는 일은 없었다. 자연히 마음이 놓여 장시간 마차를 타는 것이 고되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럭저럭 편안한 여행길을 가고 있었다. 그날도 창문을 열어 놓고 오랜만에 보이는 초지를 감상하고 있을때 비호같이 녹상서사의 사자의 기를 든 자들이 눈앞을 스쳐지나갔다. 황제가 궁을 비운터라 녹상서사의 사자가 왔다 갔다하는 일은 흔한것이라 별신경안쓰고 있었다. 하지만 궁안에서 두고온 심복이 보낸 서신에는 깜짝 놀라는수밖에 없었다. 대장군이 황궁에 들어와 난리를 부린후에 입궁하는 비서랑을 유괴해서 사라졌다는 것이였다. 문제는 이 유괴당한 비서랑이 우관이라는데 있었다. 체이첸은 그야말로 이루 말할수 없다는 침통한 표정을 하며 입술을 깨문다. 앞에선 가신은 뜨끔한 표정을 지으며 뒤로 조금 물러난다. “정말로 확인해 보았는가?” “예. 그의 신분증명서가 병사에게 남아있었습니다.” “녹상서사는 이일을 황제께 고했겠지?” “황제께선 그냥 묵인하셨다고 합니다.” “그럴순 없는일이다!” 벌떡 일어난 체이첸은 신경질적으로 왔다갔다하다가 결심한 듯 말한다. “양인성까지 얼마나 남았지?” “오일남았습니다.” “기주까지는?” “빠르게 간다면 하루면 됩니다.” “황성에서 호북까지는?” “한달...정도 걸리는 거리가 아닙니까.” “그래?” 다시 눈동자를 내리까며 생각에 잠긴다. “2왕자는 언제 출발한다고 그러던가?” “서공께서는 사냥을 나가셨는지 궁을 출궁하여 지금까지 소식이 없습니다.” “저런 태평한 놈!” 분통터진다는 모습을 하지만 그놈의 성격으로 본다면 사냥나온 길에 홀로 기주로 올 것도 같아 잠시 멈칫한다. “14왕자가 낭성으로 갔었지?” “예.” “그렇다면 바로 올 생각이로군. 낭성은 기주랑 가까우니 14왕자가 말을 따로 준비할테니까. 속편한놈이로다.” 등을 돌린 레이첸은 손을 저어 가신을 뒤로 가게 한다. 마차의 창을 닫고는 신경질을 부리지만 혼자있어 괜찮다. 포기할까 보냐. 하지만 지금 가서 황제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바보같은 짓이다. 일년 내내 기다리고 있는 중요한 축제니만큼 귀찮게 군다면 그다지 좋지 않을것이야. 양인성에 가서 하는 것이 좋을지도 몰라. 가늘게 뜬눈으로 손가락을 꼽아보며 날짜를 맞추던 체이첸은 피식 웃는다. “어라?” 자휼은 땅에 떨어진 화분을 다시 집어든다. 바람에 날린것인지 창가에 올려있던 작은 화분이 바닥에 떨어져있었다. 조심스럽게 들어낸다. 이미 화분은 완전히 조각나있었고 언제 떨어진것인지는 모르지만 화분안에 심어져 있는 작은 싹도 시들어있었다. “저런, 저런. 하지만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괜찮았지 않니.” 사람을 대하듯 미소지으며 중얼거린 자휼은 이리저리 두리번 거리다 들고 있던 찻잔에 일단 임시로 싹만 넣어둔다. 서둘러 방안을 뒤적거리며 화분을 대신할 것을 찾지만 그런 것이 나올 리가 없다. “뭐하나?” “어라? 언제 오셨습니까 후소님?” 빙글 천장에서 뛰어내려온 후소는 화들짝 놀라 뒤로 넘어지는 자휼을 뚫어지라 바라본다. “뭐냐? 뭔가 숨기는 그 눈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정말이에요.” “헤에. 뭐냐 이 잡초는. 먹는거냐?” “아이고! 아니에요!‘ 낼름 입안에 잔을 떨어넣는 후소를 보고 자휼이 경악을 한다. 우물우물거리며 후소는 가볍게 자휼의 손을 피한다. “맛도 없네. 왜 그러느냐? 울 것 같은 얼굴이다.” “아아 힘들게 싹틔운 것인데..” 한숨을 푹 내쉬며 추욱 늘어지는 자휼을 보고 후소는 깔깔 웃는다. “왜 웃으시는겁니까!” “오호라, 잘은 모르지만 그 얼굴과 한숨! 네 그 귀여운 아이와 관련된 일이렸다!” 순간 얼굴을 붉인 자휼은 심하게 도리질 한다. “절대로 절대로 아닙니다! 무슨, 제가 무슨 어린애인줄 아세요!” “이놈아. 얼굴이 홍시가 되어버렸다. 가을되려면 멀었는데 왠 홍시냐.” “그러니까! 아니래두요!” “호오라 그래?” 후소는 자휼에게 가까이 다가가 얼굴을 맞댄다. 그리고 낼름 혀를 내민다. 혀위에는 그 작은 싹이 그대로 올려져있다. 경악하는 자휼에게 재빠르게 멀어지며 그 가느다란 눈을 휘어 웃는다. “뺏아봐.” “정말...당신이란 분은!” 하지만 이미 몸은 후소를 향해 움직인다. 재빠르게 움직이는 자휼을 보고 후소는 미소짓는다. “아참. 그런데 배치면 삼킬지도 몰라.” “이익!” 그말에 배를 겨누던 주먹을 얼른 치운다. 헤실하게 웃으며 이방저방 미꾸라지처럼 튕겨다니는 후소를 잡으라 때아닌 땀을 뺀다. 레이첸은 기분좋게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크고 화려한 주점과 작고 번잡스런 주점을 연이어 바라보다가 결국 화려한 주점쪽을 들어간다. “어서오십쇼!” 점원들이 그의 말과 짐을 받으며 굽신거린다. 레이첸은 자랑스럽게 말을 가리키며 웃는다. “주방장에게 내가 잡은 사슴을 요리해서 오늘 저녁을 올리라고해.” “알겠습니다. 이거 참 먹음직한 사슴이군요!” 두명의 점원이 사슴다리를 잡고 얼른 한쪽으로 사라진다. 이층으로 올라가 깨끗하고 큰 방의 침대에 다리를 뻗고 누위 기지개를 핀다. 오래간만이여서 그랬을까 사냥을 최고였다. 목욕준비가 끝나자 즐겁게 흥얼거리며 옷을 벗고 목욕을 한다. 깨긋한 옷으로 갈아입자 점원이 차와 다과를 준비해준다. 과자를 물고 창문을 열자 옆에있는 자그만한 주점이 보인다. “옆가게가 다 보이는군.” “워낙 우리가게가 높다보니 멀리있는 저 작은 가게안에 훤하게 보인답니다.” 점원은 레이첸이 입었던 옷을 챙기며 웃는다. “뭐, 간혹가다 재미있는 장면들을 보여서 주인님께서 저 가게를 무리하게 쫓아내지는 않으시더군요.” “재미있는 장면?” “뭐, 남녀의 치정문제나 도둑이 드는 장면이라던가, 주정꾼들의 싸우는 장면같은게 구경거리가 되거든요. 하긴 엊그제 같은 장면은 좀 그렇지만.” “엇그제는 무슨일이 있었는데?” 의자를 창가로 옮겨 앉으며 레이첸이 묻는다. 점원은 고개를 갸웃하며 생각한다. “제 생각에는 남편과 부인같은데...여기선 말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잘은 모르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계집이 딴 사내와 도망이라도 간 것을 잡아온것인지 심하게 굴더랍니다. 아. 다리를 다쳤던가? 아니면 걷지 못하는 여자일수도 있겠군요. 아무튼 그 머리채를 잡고 방안으로 끌고 가는데 계단이 피칠되고... 거참 아무리 사내가 계집을 다스린다고 하나 그런 식의 대우를 한다면 어떤 계집이 사내와 결혼하고 싶어하겠습니까. 보아하니 계집쪽은 어려 보이고 사내쪽은 나이가 있어보이더구만. 요즘 망조가 들어 부모가 딸을 돈받고 파는 식이니 계집도 불쌍하죠.” “사내라면 예쁜 여인을 부리고 싶은게 당연한거 아닌가? 정을 줬던 여인이 도망갔으니 화가 나는게 당연하지.” 레이첸이 당연하다는 듯 말하자 점원은 할말이 없어진 듯 고개를 꾸벅이고는 방을 나간다. “기다려.” “예? 또 시킬일이라도?” “그래서 그들은 나갔나?” “글쎄요. 아직 있을걸요.” “그래? 그럼 나도 좋은 구경꺼리 한번 보겠네. 창문쪽으로 눈을 돌리는 레이첸은 낄낄거린다. 조심스래 갈아입을 옷을 두고 나가려는 점원의 가슴을 터질것만 같았다. 행여 그 무시무시한 손님에게 잡혀 곤욕을 치룰까봐 얼른 등을 돌린다. “이봐.” “힉!” 잠자고 있는 줄 알았던 칭상위의 피투성이 여인이 말을 건것이다. 덜덜떨며 점원이 돌아본다. 미동조차 하지 않고 침대위에 누워있는 뒷보습에서 자신이 잘못들었나 싶다. 다시 다가려는데 또다시 말소리가 들린다. “목욕을 하고 싶은데.” “아, 예! 예! 지금 여점원을 불러오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부인.” “그럴필요 없어.” “예?” 낮은 신음소리가 들리며 여인이 상체를 천천히 일으킨다. “그자는 어디있지?” “예? 예, 아까 주점을 나가시던데요.” “여긴 어디야? 황성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거지?” “여긴 망성촌입니다.” “망성촌이 어디야?” “황성에서 오셨습니까? 여긴 황성에서 반나절 걸리는 시골입니다.” “어느 쪽으로? 북쪽?” “예. 북문으로 반나절...” 한숨을 깊게 쉰 여인은 피곤과 고통에 갈라진 목소리로 뭐라고 중얼거린다. “이봐.” “예!” “지금 당장 의원과 말을 하나 구해줄수 있겠나?” “예? 예! 알겠습니다!” “목욕은 여점원을 부를필요는 없어.” “그럼 혼자하시겠습니까.” “다리가 부러져서 혼자할 수는 없어. 자네가 해주면 되겠지.” “예?” 얼굴을 붉히며 안절부절못하는 점원에게 여인은 피식웃는다. “내가 여자로 보이나.” 182 자휼은 울쌍으로 후소의 다리를 잡고 매달렸다. “이젠 그만하세요! 입속에서 익어버리겠어요!” “뭐야. 이렇게 잡는 것은 반칙이다?” “후소님! 정말 어렵게 키운거란 말입니다!” “헹! 실은 이미 삼켰다.” 입을 벌려 텅 빈 것을 확인시킨다. 멍한 표정으로 자휼이 허탈해하며 우울에 빠진다. “정말 어럽게 키운건데...” “쯧쯧. 울꺼냐?” 탁자에 앉아 소심하게 웅얼거리는 자휼을 보고 후소는 한참을 웃는다. “됐다. 정말. 널 놀리는 것은 보람이 있다니까. 자. 그 어렵게 키운 놈 여기 있지 않냐.” 아까부터 탁자위에 올려져있던 잔을 밀어 자휼에게 보낸다. 자휼이 잔을 잡고 안을 들여다보고는 화를 낸다. “또 저를 속이셨군요!” “입에 뱉어서 돌려놓은지 오래다. 못본 네놈이 바보지.” 어찌되었건 돌아왔으니까 됐다 싶은 표정으로 정성스럽게 찬물로 싹을 헹구는 자휼을 보는 후소의 표정은 밝다. “그런 표정하지 마십쇼. 또 무슨 장난을 치고 싶으신겁니까.” “뭐. 잘 큰 제자를 보고 웃는 것도 안된다는 것이냐. 이 박정한 것.” “후소님이 그런말을 하는 것은 안어울려요.” 입을 내민 자휼은 역시 아까와 마찬가지로 화분을 할만한 것을 찾아 두리번거린다 창아래에 떨어진 흙을 손에 담아와 잔에 넣는다. “화분찾을게 어디있냐. 그냥 여기다 키우면 되지.” “후소님! 그건 찻잔이라구요!” “화분 찾을 동안 싹이 죽어버리겠다. 이 없으면 잇몸으로 하는거 아냐?” “하지만 물이 고여 썩을 텐데...” “걱정마라. 이런 싹일때는 괜찮아. 나중에 뿌리가 깊게 들어가면 갈아줘야 하겠지만 계속 이 찻잔에 키울 것은 아니잖아? 넌 밖으로 나가지 못하니 얼마간은 이것으로 만족하라구.“ “그렇군요.” 자휼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동안 후소는 잔을 들고 꼼지락거린다. “뭐하는겁니까!” “음? 잃어버리지 말라고 이름 써주는거야. 다 썼다.” 후소가 싱긋웃으며 자휼에게 화분이 된 잔을 넘긴다. 잔을 본 자휼은 경악을 하며 외친다. “왜 여기다 자례라고 써요! 맙소사 먹물이라서 지워지지도 않네!” 옷자락으로 빡빡 문지르지만 광이 나지 않는 토기라 먹물을 머금어 지워지지도 않는다. 화를 내는 자휼에게 후소는 언제나 즐거운 표정이다. “뭐? 난 또 분명히 네놈이 그놈을 생각하고 적었을거라 여겼지. 사실이 그렇잖아. 싫다면 다른 찻잔으로 옮길까?” “이름쓴 것은 어쩌구요?!” “깨버려.” 태연한 말에 자휼은 더 화를 낸다. “그렇게 태평하게 깰수 있을것같아요! 후소님은 자기 형제이름이 적힌 잔을 깰수 있으신가요?!” “그럼. 당연히 할수 있지. 너 못하면 내가 대신 해주마.” 얼른 화분을 뺏은 후소는 그것을 높이 쳐든다. 자휼이 사색이 되어 뒤로 물러나 잔을 받으려고 하자 또다시 깔깔댄다. “어린놈. 정말 어린놈. 네가 어린거지. 네 동생보다 네가 더 어리다.” “정말! 언제까지 절 놀리셔야 시원하시겠어요.” 자휼은 짜증스럽게 화분을 다시 받아 따듯한 창가에 다시 올려놓는다. 그 모습이 참 진지해보여서 후소도 웃음을 멈춘다. “정말 키울생각이구나. 그거 뭔데?” “동백이에요.” “왠 동백?” “그냥...요.” “흐음.” 후소는 자휼의 어깨에 턱을 걸치고 화분속의 싹을 바라본다. “거참. 이렇게 곱게 정을 주면 나중에 자례와 떨어질때 감당을 어떻게 하려구 그러누.” “예?” 얼굴을 확붉히는 자휼은 설마 후소가 자신을 마음을 아는가 싶어 질겁한다. “왜, 이런 어린 싹은 잘 죽잖아.” “...언제부터 이 싹이 자례에요!” “여기 잘 적혀 있구만. 자례라구.” “정말 후소님!” “쯧쯧. 그렇게 감사하지 않아도 된다. 원랜 그렇게 하고 싶었잖아. 눈이 무서워서 못하는거지. 내 사랑스런 제자에게 그정도 못해줄까.” 크아악하고 화를 내는 자휼을 피해 후소는 키득거리며 어디론가 사라져버린다. 후소가 사라지고 나서 한참을 씩씩거리던 자휼은 화분이 되어버린 잔을 높이 들어 깨뜨릴까 하지만 결국 다시 내려놓는다. “정말...후소님 당신은...” 짜증을 부리며 침상에 누웠다가 얼마지나지 못해 벌떡 일어나 의자를 끌고 창가로 다가가 싹옆에 앉아 책을 펼친다. 힐끔 눈을 돌리자 화분에 적힌 후소의 엉망인 글자가 보인다. 고개를 획돌려 외면했다가 다시 돌려 싹을 바라본다. “자례라...” 뭉클해지는 느낌에 얼른 생각을 지우지만 화분옆에서 떠나지 못한다. 가슴을 돌려 단단히 붕대를 감은 의원은 목을 봐준다. 믿을수 없다는 듯 의원은 자례를 보며 묻는다. “도대체 어떤 자가 이렇게 물어놓은거요? 조금만 깊게 물렸더라면 그대로 죽었을거요.” “안죽었으니 괜찮겠죠.” “당분간 아무말하지 않는게 좋소. 목이 많이 상했으니까. 다리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오른쪽 다리는 멀쩡하오. 왼쪽은 부러졌지만 아직 공자는 어리니 곧 붙을거요. 많이 먹고 푹 쉬면 곧 좋아질테니 염려마오.” 붕대를 돌려 목을 감싼 의원은 다리에 부목을 대준다. 멍하니 그 옆에서 의원을 도와주던 점원은 울쌍이다. 그야말로 못볼 것을 봤다는 눈치다. 상처가 대강 감싸지자 자례는 점원을 불러 묻는다. “말은?” “말은 준비되었습니다만...” “그럼 날 부축해주겠지?” “하지만 정말 말을 타실건가요? 마차가 좋지 않을까요? 그몸으로 괜찮을까요?” “마차는 느려서 붙잡일테니...신경쓰지말고 말에게 데려다 줄래?” 점원은 이해할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는 자례를 부축한다. 전신의 상처를 본후라 어디를 잡고 부축해야 할지 몰라 허둥지둥하다가 결국 안아든다. “죄송하지만 이게 편할 것 같군요.” “고맙군.” 간신히 말을 탄 자례는 점원에게 고개를 끄덕인다. “말값은 그자가 돌아오면 꼭 받아내게.” “예, 하지만 부인...이 아니라 공자는.” “난 남쪽으로 떠날꺼야. 그렇게 말하게.” “예.” 잠시 마른기침을 하던 자례는 점원이 열어준 문으로 천천히 말을 몰아 북쪽으로 향한다. 황성까지 반나절이라. 말을 달려서라고 했으니 그가 언제 올지는 모르나 황성안에 먼저 도착한다면 충분히 숨어지낼만하다. 말등이 움직일때마다 전신이 쓰라려 정말 울고 싶은 심정이지만 여기서 울었다가는 정말로 잡혀 죽을 것 같다는 생각에 자신을 독촉하며 말을 몬다. 아니 근대 왜 내가 이꼴이 되어야 하는건데? 억울함에 입술을 깨물다가 터진 입술을 물어 질겁을 한다. 다시 피가 흐르는 입술을 옷자락으로 누른다. 도대체 저 황제의 미친 동생은 날 왜 가지고 노는건데? 수많은 생각속에서 이런 경우를 찾아낸 경우는 단한번도 없었다. 아무리 생각대로 돌아가지 않는다고는 하나 이건 정말 아니다라는 생각이 든다. 짜증나고 신경쓰이고 억울해 울분이 터지나 온몸이 쓰리고 고통스러워 일단 잠부터 자고나서 화를내던 울어버리던 하고 싶은 심정이다. 어느정도 달려왔다고 생각하자 말을 멈추고 등을 굽혀 그동안 참아왔던 고통을 달랜다. 어깨를 떨며 한동안 아프다는 얼굴을 하고 꼼짝을 하지 않다가 좀 괜찮아지자 뒤를 바라보고는 다시 말을 달린다. 이번엔 잡히면 정말 죽을지도 몰라. 하지만 아직 죽기는 싫은걸. 레이첸은 기지개를 힘껏 피고는 창문을 열고 차를 마시며 예의 그 주점을 바라본다. 별다를것이 없는 모습이다. 하품을 하며 계속 그곳을 바라보다가 문득 눈에 들어오는 몸좋은 사내의 모습에 혹시나 하고 눈을 가늘게 뜨며 집중한다. 여진인같은데. 아니...잘 모르겠는데? 사내는 화가났는지 상처난 백마를 끌고나온다. 점원들도 우루루 나와 어쩔줄 몰라하는 표정이다. 길가로 나온 사내는 이리저리 둘러보다 말을 타고 남쪽으로 내달린다. “...끝이야?” 뭔가 굉장히 허무한 느낌에 레이첸은 머리를 긁적인다. 아침을 먹고 다시 말을 탈준비를 한다. 기주를 향해 남쪽으로 말을 돌린다. 얼마 달리지 못해서 바로 앞에 달리는 예의 그 상처난 백마의 모습에 말을 속도를 멈춘다. 흉진 말치고는 참 잘뛰는데. 사실 근육은 좋구만. 곡양에서 자신의 말을 잃어버렸기 때문인지 레이첸은 말의 주인보다 그 말에 신경을 쓴다. 이번 기주의 경마 축제에 참가하는 이유도 절반은 좋은 새말을 찾기 위함이였다. 그 뒤를 따라 유심히 말을 살피며 따라간다. 갑자기 무엇인가 굉장히 화나는 일이 있는 듯 말의 주인은 험하게 말의 방향을 돌린다. 그바람에 바싹 따라붙었었던 레이첸의 말은 놀라 뒤로 물러나며 허공으로 발을 든다. “으왓!” 아차하는 사이에 말뒤로 굴러버린다. 놀라 홰를 치는 말다리에 깔릴까 얼른 몸을 굴려 일어난다. 자욱한 먼지사이로 말굽소리가 들린다. 콜록이며 눈을 뜨니 그 백마의 주인은 뒤로 돌아보지 않고 북쪽으로 달려간다. 그 건방짐에 레이첸은 자신의 말을 끌어타고 죽어라 따라간다. “이놈! 사람을 죽일뻔하고 그대로 도망가다니 뻔뻔스럽다!” 하지만 임시로 궁전안에서 빼온 말도 저 흉진 백마를 따라가긴 힘들다. 레이첸은 그대로 말을 멈추고 등뒤에서 활을 세운다. 신중할 것도 없이 그 거대한 표적을 향해 날린다. 피육하고 날라간 화살은 얼도당치 않게 말탄 자의 등에 박힌다. “에이, 머리를 노렸는데! 왜 명중이 안되지?” 고개를 갸웃하며 말을 달려 그자에게 달려간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도 따라잡히지 않는다. 혹시 저 가죽넘어에 갑옷이라도 입고 있나 싶어 다시 말을 멈추고 연거푸 활을 쏴본다. 분명 화살은 등짝이던 어깨던 명중하는데 좀처럼 그는 맞은척도 안한다. 화가 난 레이첸이 마구잡이로 날린 화살이 말궁둥이에 명중한다. 말은 때아닌 따끔한 일격에 놀라 멈칫 속도를 멈추고 뒷발을 차며 화를 부린다. 그제야 말의 주인이 몸을 돌려 레이첸을 바라본다. 이미 등에 대여섯개의 화살을 달고도 그다지 동요하는 표정이 아니다. 그가 창을 세우고 레이첸에게 다가온다. 그가 가까이 올수록 레이첸은 뭔가 아니다 싶은 마음이 들어 흠칫한다. 어디선가 본것도 같은 사람인데. 적갈색머리에 검은 피부. 들어난 굵은 팔뚝에 있는 수많은 흉터자국과 얼굴을 가로지르는 불화살이 빗나간 흉이 그가 보통사내가 아닌 전장의 군사라는 것을 말해준다. 핏발선 누런눈에 인상을 찌푸린다. 뭔가 이상이 있는 사내같다. 오걸매는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시비를 걸고 있는 사내에게 다가선다. 시간은 촉박한데 뭐가 이리 거추장스러운지 화가 치밀어 오른다. 183 성큼 성큼 앞서오는 오걸매와는 달리 레이첸은 의아한 표정으로 뒤로 물러난다. 분명 어디선가 본적이 있는데. 어깨에서 흔들거리는 사지와 얼굴이 멀쩡한 하얀 호랑이 가죽이 눈에 자꾸 들어온다. 백호는 흔한 것이 아니다. 구하기가 까다로와 황제조차 백호는 기르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의 흔하고 드물고를 떠나 저것이 낯익다는 생각에 뭔가 두려워진다. “기다려봐. 노인장은 혹시 날 전에 본적이 있...” “죽어.” “에?” 슈륵하고 눈앞이 번쩍한다. 놀라 마구를 뒤로 당기지만 이미 말은 퉁하고 주저앉는다. 말의 목이 때굴때굴 굴러 저 멀리몸없이 도망간다. 뭔가 순식간의 일이라 잠시 어이없이 목없는 말에 앉아있던 레이첸은 다시한번 무표정한 오걸매가 창을 돌려잡자 벌떡 일어나 뒤로 튕기듯 피해버린다. 그와 동시에 말허리가 잘려버린다.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나와 시선을 가린다. 장막처럼 튀어오르는 피의 폭포안에서 누군가의 손이 불쑥 튀어나온다. 그리고 그 몸도. 전신에 말의 피를 칠한 오걸매는 그야말로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레이첸을 바라본다. 머리에서 흐르는 말티에 눈뜨기가 힘들어졌는지 손으로 얼굴을 훔친다. 그리고 그 손을 입으로 가져가 핥는다. “뭐, 뭐, 뭐야! 미쳤군!” 레이첸이 벌떡 일어나 떨어진 검을 주어들고 뒤로 물러난다. 오걸매는 멍하니 죽은 말을 바라본다. 피가 점점 멎어 수그러 들자 다시 고개를 들고 레이첸을 보고는 히쭉 웃는다. 그 표정에 레이첸은 등골이 오싹함을 느끼나 받들어 살아온자답게 오만을 부린다. “죽여버리겠다!” “하하하!” 레이첸이 칼을 뽑아듬과 동시에 오걸매도 창을 바로든다. 텅빈 벌판에서 때아닌 칼부림이 일어난다. 피가 흩뿌려지는 팔을 휘두르며 오걸매가 레이첸을 몰아가다. 레이첸은 극히 당황하는 기색을 보인다. 이 늙은이 보통이 아니네. 창과 칼의 싸움에서는 칼이 불리하다고는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창이 칼에 부딪칠때 마다 손이 찌릿찌릿한게 그 힘이 엄청나다는 것을 알게했다. 힘으로는 왕자들중 제일이라 생각했던 자신이라 더더욱 당황스럽다. 나이가 50이 넘어보이는 이 늙은이에게 이런 힘이 있다는게 놀라워 어쩔줄 모른다. 그러고보니 창엔 날도 안서있네. 힘으로 부셔 죽인다는 건가. 하지만 맘편하게 생각할수도 없다. 속도도 너무 빨라 분명 자신이 아니라면 막지도 못하고 황천행이였으리라. 갑자기 창을 세운 오걸매는 짜증을 낸다. 멈칫 한 순간 언제인지 가슴에 극심한 통증을 입고 뒤로 넘어진다. 무슨 일이 있는건지 몰라 눈앞에 보이는 하늘에 심호흡한다. 일어나려하지만 몸이 꼼짝을 안한다. “아악!” 복부를 누르는 천근같은 힘이 느껴진다. 무엇인가가 배에서 흘러 땅을 적시는 것이 느껴져 처음으로 공포를 느낀다. 아늑한 정신중에 오걸매가 창을 내리며 레이첸의 머리맡에 앉는다. 그리고 손가락을 뻗어 레이첸의 왼쪽눈에 가져간다. 그리고 눈을 파낸다. 엄청난 비명소리가 들리자 오걸매는 시끄럽다는 듯 일어나 레이첸의 머리를 발로 차 소리를 멈추게 한다. 손안에 눈알을 입속으로 털어넣는다. 우물거리다가 인상을 쓰고 뱉어낸다. 형제를 알수 없는 물컹한 것이 땅에 떨어진다. 자신의 말로 걸어가며 오걸매는 어눌한 말을 중얼거린다. “마...맛없다.” 태천은 고개를 숙였다. 황제의 일행이 양인성의 앞에 도착한것이다. 백리전부터 마중을 나왔던 태천의 일행은 황제의 마차를 호위하고는 조심스럽게 양인성으로 들어간다. 양인성은 도성의 하나로 기주성의 모성이였다. 황성근처의 도성보다는 크지 않았지만 황성의 도성과 지방성의 상업을 이어주는 중계무역으로 꽤나 부유한 성이였다. 황제가 온다는 소문에 양인성의 사람들을 모두 나와 지배자를 마중한다. 화려한 기를 세운 황제의 일행이 태수의 성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자 드디어 태천이 말에서 내려 황제의 마차앞에 업드린다. 가도위중 하나가 마차의 문을 열며 말한다. “양인성입니다.” “어서오시옵소서.” 황제는 마차에 내려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본다. 자신의 앞에 부복한 셋째 아들을 내려다보고 피식웃는다. “흥. 여전하군.” “황제께서 명치를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일어나라.” 황제가 손을 저어 태천을 일으킨다. 태천은 황제의 앞에서 그가 머물 궁으로 안내한다. 궁안에 도착해 옆으로 길을 비키던 태천은 생소한 사람의 얼굴에 약간 놀란다. “경락공께서도 오셨습니까.” “인사가 먼저가 아니겠는가?” 체이첸은 옆으로 비켜 수행원들의 길을 터준후에 태천에게 웃는다. “잘지내는 것 같군. 파공은.” “그야, 작년에도, 올해에도, 내년에도, 여전히 변함이 없는 곳이니까요.” “그렇군. 변함이 없다는 것은 좋은거네.” “경락공께서는 기주성으로 들어가실줄 알았는데요.” “응. 그럴생각이였지만 이왕 아버님을 수행한 이상 끝까지 함께 해보기로 했지.” “호오.” 태천은 눈을 가늘게 뜨며 웃는다. 둘은 궁을 나와 조그만 정원으로 들어간다. “여전히 자네의 궁은 화초가 많군.” “군자란 화초보기를 미인처럼 여기는 법입니다. 초지에서 풀이나 다루는 자들과 어찌 비교한단 말입니까.” 혈통상 밀려난 황자의 자리를 운좋게 얻는다면 여진피의 왕자들을 가만두지 않겠다는 으름이다. 태천의 말에 깔려있는 악의에 체이첸은 그냥 웃을뿐이다. “나도 화초를 키워보고 싶지만 황궁안에서 그런 것을 키우게 허락되는 것이 어렵지 않은가. 이나이에 편안히 분주하여 내 정원을 가지고 싶지만 그것도 쉽지 않군. 하지만 아우가 이렇게 키우니 내 종종 놀러옴세.” 네가 어떻게 발버둥치던 황자의 자리에는 자신이 내정되었다는 대답이다. 덧붙여 내가 황제가 되면 지금 아버님을 모시는 것처럼 자신을 모셔야 한다는 뜻에 태천은 미간에 돋은 힘줄을 풀기 위해 애를 쓴다. “그러고보니 경락공께서는 좋은 인재를 많이 모으신다면서요. 참 부럽습니다. 저는 황궁에 있지 못해 그런 인재를 돌려쓰기 어렵지요.” “아참. 14왕자가 낭성으로 밀려갔다는데 자네 상심이 크겠네. 이왕이면 양인성 관할내의 성으로 들어와야 자네 두 형재가 좋았을텐데.” “그러는 경락공이야 말로 4왕자인 서공이 곧 분주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서운하시겠습니다.” “하하, 난 붙잡고 싶지만 단 한명만 황궁에 남는 것이 원칙이니 어쩔수 없지 않는가.” 체이첸은 눈을 돌려 태천을 내려본다. 가시 돋은 대화에 왕자들의 뒤를 따르던 가신들은 어떠 일이 벌어질지 몰라 위태위태하게 둘을 바라본다. “내 말이 틀렸나?” “...저녁 연회에서 뵙지요.” 태천은 얼른 등을 돌려 가신들과 함께 사라진다. 익은 고개를 올려 하늘을 본다. 구름이 끼고 있어 비가 올 것 같다. 주섬주섬 방안으로 다시 돌아와 침상에 누워버린다. 곧 있어 비가 내린다. 간만에 내리는 비가 소리한번 시원하다. 몸을 돌려 열린 방문으로 빗방울이 신나게 떨어지는 것을 구경한다. “어린애 같군요.” “방문 가리지마라.” 신경 안쓴다는 듯 주가 방안으로 들어와 침상에 걸터 앉고 자신도 비를 바라본다. 통통 띵팅. 빗방울이 기와를 미끄러져 마룻바닥을 때리며 경쾌한 음을 낸다. “듣기 좋군요.” “...” 익은 대답하지 않는다. 몇 번 말을 걸던 주는 대답없는 익을 쳐다본다. 익은 꿈을꾸는 표정으로 빗방울을 바라만 본다. “칼소리...” “예?” “꼭 칼소리 같지?” 뜬금없는 소리에 주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흔든다. 익은 뭔가 재미있다는 듯 웃는다. “봐라. 하늘에서 땅을 이겨보려 군대를 보냈다. 땅은 그들의 기습에 당황하고 있어.” “잘 모르겠군요.” “대지를 헤집어 놓는 천군의 만행은 차마 볼수 없이 처참한데 부딪치는 서로의 칼부림은 이렇게 아름답도다.” “...” “피를 보고 광분하는 하늘은 제분수도 모르고 날뛰지만 그것도 한순간의 오만일뿐. 천군이 후퇴하면 아무렇지 않는 듯 상처입은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하늘이 바람을 보내 대지를 삭풍으로 괴롭혀도 대지는 그렇게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어린애 같군요. 천지의 오행을 그런 이야기로 넘어가려하다니.” “어린애의 이야기야.” “예?” “아주 옛날 이야기지.” 익은 태천을 보고 빙긋 웃는다. 처음보는 익의 웃음에 주는 약간 당황스러워 한다. “절대로 무너지지 않아.” “... 그것보다.” 뭔가 멋쩍은 듯한 분위기에 주가 헛기침을 하며 화제를 바꾼다. “우관은 잘 있을지 모르겠군요.” “...아직 도착하지도 않았을걸.” 짜증난다는 듯 금세 분위기를 바꾼 익은 등을 돌려 눕는다. 주는 그런 익을 보며 묻는다. “실은 생각해봤는데 우관이 돌아올것같지 않습니까?” “어떻게?” 익이 눈을 돌리며 되묻는다. 하지만 주는 어깨를 으쓱일뿐이다. “아니. 그냥 그런 것 같다구요. 그게 우관이라면 그냥 터덜거리며 황궁으로 돌아올 것 같다는 거죠.” “아. 그거.” 익은 별볼이 없다는 듯 다시 등을 돌린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하지만 오걸매가 보통 미친게 아니니...” “...흠. 대장군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나봅니다?” “바보.네 놈이 미쳤다고 했잖아.” 퉁명스럽게 대답하지만 주는 의심스런 시선을 익의 등뒤에 보낸다. 184 툭툭하고 차가운 하늘의 눈물이 떨어진다. 곧 장대비가 쏟아져내린다. 어찌나 세찬 비인지 말과 자신의 어깨에 물방울이 튕겨 생기는 물안개 때문에 시야가 가려질 지경이다. 이럴줄 알았으면 목욕 따위 안해도 됐었을걸. 몸에 걸맞지 태평한 생각을 하고는 시야를 가린 비 때문에 안절부절하는 말을 다독여 천천히 걸어간다. 어지간한 사람이 아니고서얀 이 비속에서 말을 타고 뛰어오지는 못할것이다. 자신의 말도 달리기를 거부하고 주섬주섬 앞으로 걸어가는 것이 다니까. 평소같으면 열이 오른다, 감기든다하며 찬바람도 못쐬게 하는 형이 자신을 붙잡고 집안으로 끌여들었을테지만 이젠 그렇지 않다. 형은 어딘가에서 이 비를 바라보고 있을지 모르지만 자신의 곁에는 더 이상 없는것이다. 뭔가 굉장히 외롭다. 상황이 이래서 그런지 쓸쓸하다. 빗방울이 몸에 스치는게 너무 고통스럽다. 비를 피할만한 곳을 찾아 고개를 두리번 거리지만 앞은 물안개가 자욱할뿐이다. 게다가 아직 황성에 가까울려면 한참이 남아 있다. 아냐. 혹시 몰라. 그 무서운 눈동자가 떠올라 얼른 말을 재촉해 앞으로 걸어나간다. 그런 미친자라면 이 빗속을 미끄러지던 넘어지던 달려올것만 같다. 손이 떨리고 몸의 체온이 내려간다. 머리가 어질어질해 이상하다 생각한다. 그러고보니 오늘 먹은게 없네. 이럴줄 알았으면 뭐좀 먹고 나올걸 그랬나. 그것도 농담이라고 하는지 자신이 미워져서 피식 웃는다. 정말로 미역줄기처럼 몸에 축늘어져 미끈거리는 것같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긴다. 자신도 비 때문에 눈을 뜰수없는데 말탄 자가 재촉한다고 허우적거리면서 앞으로 나가는 말이 대견해 목을 쓰다듬는다. 그 목이 참 따뜻해서 몸을 말의 목에 기댄다. 정말로 오걸매는 미쳤구나. 정신이 들었을때는 처음 본 것은 오걸매의 가슴이였다. 처음엔 도무지 그것이 뭔지 몰라 눈을 깜박이며 초점을 맞추려 애를 썼지만 곧 그 지독한 담배 냄새덕에 그것이 오걸매의 몸인 것을 알고 인상을 찌푸렸다. 일어나려고 노력했지만 이틀사이에 당할수 있는 험한 꼴을 다 당해본 육체는 주인의 말을 듣지 않고 꼼짝을 하지 않았다. 눈을 힐끔돌려 다리를 보니 부어있는 꼴이 보기 싫은게 걷는 것이 무리라는 것을 알아 도망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해버린다. 적어도 이 욱한 냄새에 벗어나고 싶어 고개를 자꾸만 틀어 낸다. 하지만 그것도 만만하지 않다. 머리카락이 오걸매의 등뒤에 깔린 듯 걸려 벗어나지 못한다. 이 놈의 머리 자르고 만다. 애꿋은 머리에 화풀이를 해댄다. 머리카락이 흔들리는게 간지러웠는지 오걸매가 번쩍 눈을 뜬다. 자례도 깜짝 놀라 얼른 자는 척을 한다. 그는 일어나 주위를 두리번거리고는 침대를 확인한다. 조금 떨어져 있는 자례를 보고는 팔을 뻗어 가슴안으로 쓸어안는다. 그리고 다시 눈을 감는다. 억소리도 못지르고 꼼짝도 하지 못하면서 그렇게 얼마간을 보낸 자례는 도저히 못참아 다시 눈을 뜨고 고개를 돌린다. 눈을 돌리자 자신을 구속한 굵은 팔이 눈앞에 보인다. 어라. 장군패네. 힐긋 목을 길게 늘여 팔의 윗부분을 보니 장군패가 어깨에 칭칭 동여매어있다. 왜 패를 저런곳에 묶어 두었는지 의아해하다가 이자의 성격으로 보아서는 저것이 당연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인다. 새벽의 희미한 불빛속에서 읽어낸 것에 어느정도는 놀라고 어느정도는 짜증나 눈을 감아버린다. 대장군 오걸매잖아. 미치겠네. 하필 여진인이야. 게다가 황족이야? 짜증을 부리다보니 몸도 진저리쳤는지 다시 오걸매가 일어난다. 고개를 흔들며 잠을 깬 그는 자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어깨를 잡고 흔든다. 일어나지 않으려고 자는척했던 자례도 잠을 깨운다기 보다는 온몸이 사정없이 흔드는 고통에 결국 눈을 뜨고만다. “왜?” 아무말 없이 몸위로 올라타는 오걸매를 보고 자례는 한숨을 쉰다. “그럴 것 같았어.” 다시 눈을 떴을땐 방안은 비어있었다. 마침 들어온 점원에 기회를 타 여기까지 도망왔다. 하지만 이런 쓰린 비를 맞을 생각은 안했었는데. 아니 무엇보다 이런 것은 내 머릿속엔 전혀 없었는데. 왕씨, 정말로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일어나 절 힘들게 하는군요. 황궁안으로 다시 들어간다면 비서랑으로써 구석에 앉아 모본만 만들어야지. 황제가 죽을때까지 성각헌 그늘에서 숨어 지낼테다. 아니지, 많이 다쳤으니까 그만 쉬라고 하지 않을까. 그랬으면 좋겠네. 찍 소리 말고 얼른 나올테다. 만사가 귀찮고 어지럽다.물이 쏟아져 내리는 소리가 요란하다. 귀가 얼얼할하다. 갑자기 말이 걸음을 멈춘다. 힘들게 몸을 일으켜 앞을 본다. 여전한 물안개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크아아악!” 때아닌 괴성에 놀라 흠칫 몸을 떤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심하게 떨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해 두리번 거린다. 아직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말을 돌려가며 이리저리 좌우를 살핀다. 손으로 눈가의 빗물을 훔치며 시야를 확보한다. 그자가 따라왔어. 어디선가 말굽소리와 첨벙이는 물소리가 들린다. 분명 들리기는 한데 어느 방향인지 몰라 불안에 떤다. 말을 재촉해도 말은 뭔가에 눌린 듯 움직이지 못한다. “어...어쩌면 좋지. 나 싫은데...” 스스로도 웃길정도로 얼도당치 않는 말이 튀어나온다. 내가 싫다고 해서 되는 일이라면 일이 이렇게 되지도 않았겠지. 등위에서 나는 작은 소리에 고통을 참으면서도 몸을 돌린다. 빗물이 땅을 튀기는 시끄러운 소리가 요란해 주위를 자꾸 두리번 거리나 딱히 보이진 않는다. 마치 환영처럼. 공포에 눌려 울기만 하는 어린아이처럼. 어릴적부터 기다려야했던 그 누구도 막을수 없고 그 누구도 이길수 없는 죽음이란 공포처럼. 홀로 떨며 그것이 무엇일지 상상해야 했던 기억처럼. “내게 다가오지마!” 허공에 대고 소리지른다. 헉헉대며 숨을 몰아쉬던 자례는 그 어딘가에 있을 오걸매에게 소리친다. “남쪽으로 안가고 북쪽으로 온 것을 보면 당신 머리는 있잖아! 내 말을 알아듣는 거잖아! 모르는 척하지 말고 내게 다가오지마! 싫단 말이야! 당신이 날 만지는게 싫다고! 딴사람을 찾으란 말이야! 천하의 반이 여자요 반이 남자인데 왜 하필 나야! 듣고 있어?! 다가오지마!” 속을 비우는 듯한 목소리를 외치고 숨을 몰아쉰다. 점원에게는 남쪽으로 갔다고 말하라고 했다. 그런데 북쪽으로 와 따라잡은 것을 보면 미친것뿐이지 바보는 아니라는 이야기다. 말을 못한다해서 못알아듣는 것은 아니니까. 고개를 들어 다시 소리치려다가 앞에 보이는 사람의 그림자에 흠칫 놀라 뒤로 말을 끈다. 말도 놀랬는지 뒤로 몇걸음 물러난다. 입술을 꽉 물고 그자가 누구인지 확인하기 위해 그곳을 노려본다. 이 세찬 비속에서도 풍기는 피비린내와 담배냄새에 머리가 아프다. 심장이 터질것같이 두근거린다. 빗속에서 오걸매가 자례를 들여다보고 다시 한번 괴성을 지러 분노를 표현한다. 막상 눈 앞에 공포의 근원이 뚜렷하게 보이자 차라리 아까보다 덜 공포스럽다. 천천히 오걸매가 고개를 들어 자례를 노려본다. “흥. 어쩌라고?!” 고개를 들어 오걸매를 내려본다. “다가오지 마. 나 당신이 너무 싫어.” “거...거짓...말.” “거짓말이 아냐! 나 당신이 너무 싫어! 싫다구! 증오해! 미워! 당신을 죽이고 싶어! 앞으로 보지 않았으면 해! 더 이상 뭘바래! 당신은 미쳤어! 미친 늙은이 같으니라구!” 하지만 오걸매는 듣지 않는다. 아니면 이해하지 못하는 걸까. 창을 들어 자례가 타고 있는 말의 배를 찌른다. 말의 몸안으로 칼이 들어가는 느낌이 그 위에 타고 있는 자신에게 전해져와 소름에 입을 막는다. 가죽을 뚫는 소리. 뼈가 나가는 소리. 내장이 터지는 느낌이 너무나 생생하다. 말이 쓰러지지자 땅에 떨어져 심한 고통을 느낀다. 이상하게도 몸이 아플수록 빗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물에 빠진듯한 몽롱한 소리가 귀를 울릴뿐. 두 팔로 피를 흘리는 말에서 멀어진다. 고개를 올려 하늘을 바라본다. 폭포처럼 쏟아지는 비가 이젠 아무렇지도 않다. 오걸매가 말에서 내려 다가와 그 머리를 잡아 고개올리게한 후 창을 돌려 목에 겨눈다. 붕대를 감은 목에서는 피가 다시 배어나온다. 오걸매는 이해할수 없다는 듯 중얼거린다. “도망...왜...” “... 헛 소리마 미친 할아비야. 말할려면 제대로 말하려든지.” 빗물이 출렁인다. 물끄러미 흟탕물을 바라보던 자례는 눈을 감으며 비통하게 패배해버린다. 형. 나 이 자에게 죽을 것 같아요. 뭔가를 각오해버리자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래. 사람은 죽는거지. 그게 빠르고 늦는게 다를 뿐이야. 결국은 죽어. 그러니 억울할 것은 없는거야. 몸에 힘이 풀리고 표정이 처연해진다. 억울할 것은 없다. 결국은 다 죽으니까.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있다. “후...후후후, 하하하! 다시 만나진 못하겠네...” 피가 배어나오도록 스스로의 어깨를 꽉 부여잡는다. 천애비여린. 다시 만나자. 미안해요. 하고 싶은 말이 정말 정말 많았는데. “죽여버려.” “...” “죽이라고. 어차피 난 또 도망갈테니까.” 아니 사실은 형 앞에서면 아무말도 못할것이 뻔하니까 결국 난 안타까울 것도 없어. “그냥 속편하게 죽여.” 그는 창을 버리고 눈을 강제로 뜨게한다. 욕심을 내는 눈동자에 자례는 피식 웃고 만다. “이 눈이 가지고 싶어? 그럼 가져가. 내가 빼어줄까.” 손을 들어 눈으로 가져간다. 하지만 오걸매가 그 손을 꽉 잡아버린다. “왜? 가지기 싫어졌어?” “마...맛없어.” “뭐?” “예...날엔 맛있...는데.” “...하늘도 정말 무심하시지.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 당신하고 이렇게 되었을까.” 등이 차갑다. 귓속으로 물이 찬다. 딱딱한 대지라도 하늘이 눈물을 흘리면 부드러워지는걸까. 이 모래밭인 초지라도 이런 슬픔엔 눈물바다가 되어버리는 걸까. 비로 들어찬 풀이 가득한 바다로 눕힌다. 차가운 빗물속에 급격하게 차가워지는 몸은 파랗게 질려간다. 오걸매가 몸을 겹처오자 그 고통보다는 몸의 따뜻함을 먼저 느낀다. 반쯤 잠긴 손가락에 휘감기는 풀이 마치 물고기같아 간지럽다. “예...날엔 맛있는...데.” “...아파.” 고개를 들고 하늘을 보며 열락을 향해 달려가는 오걸매의 몸이 무거운지, 왜 하늘이 무너지는 것인지 자신이 흔들리는지, 빗물이 눈에 들어오는것인지 자신이 울고 있는것인지, 너무 고통스러운건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건지. 아무것도 모르겠는 자신도 바보와 다를바가 없다. 붕대와 몸에서 배어나오는 붉은 핏물이 근처를 물들여간다. 눈가로 보이는 그 색이 참 예쁘다고 생각된다. 얼마나 지났는지 몸이 따뜻해져 눈을 뜬다. 자신의 몸위로 엎드려 숨을 몰아쉬는 오걸매의 체온을 느껴 가만히 팔을 올려 그 어깨에 올려 자신에게 당긴다. “당신은.... 따뜻하지만 너무 아파.” 괴로워. 터진 입술에서 피가 흘러 물에 번저간다. 희미하게 퇴색되어버리는 핏물은 그 고통까지 사라지게 해주진 못한다. 하지만 하늘이 흘리는 눈물은 고통의 흔적을 지워나간다. 그 모든 것이 꿈인 듯 몸에 남는 것은 그저 사라진 온기와 찾아오는 한기일뿐. “좋...다. 좋...” 괴로워요 형. 빗물이 눈에 들어오는것인지 자신이 울고 있는것인지 도무지 알수가 없다. 185 “앗. 이런 이런.” 자휼은 화분을 기울여 물을 조금 따라낸다. 싹이 조금 더 움튼게 귀엽고 사랑스럽다. 그 옆에서 책을 뒤적이며 시간을 보낸다. 밖으로 나갈수가 없으니 할수 없는 일이다. 사실 밖으로 나갈수 있다 하더라도 안에서 이렇게 있었을것이다. “왜 물을 따라내느냐?” “아, 후소님. 그냥 물을 좀 많이 준 것 같아서요.” “흠뻑 젖었네. 이렇게 비가 올때는 물을 주면 썩지 않을까?” “불길한 소리 하지 마시라구요.” 더 이상 빗물이 튕기지 못하도록 탁자에 올려놓은 자휼은 후소에게 차를 건낸다. “오늘은 5왕자가 기주로 들어오는 날입니다. 서신을 받았습니다.” “응. 그래. 그건 나도 알고 있다. 지금 거의 도착했을거다.” 후소는 잠시 망설인다. 후소의 그런 표정을 보는 것은 처음이라 자휼은 늘어진 몸을 당겨 긴장한다. 혹시 무슨 일이 있는걸까. 중요한 일이겠지. 후소님이 저런 표정을 짓는 정도라면. “황성에 있을때 선인 마기를 만나본적이 있느냐? “아니오. 제가 알고있는 선인은 을노뿐입니다.” “뭇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설객이니 백로니 하지만 마기만은 늑대와 같았다. 송나라의 장군들은 그를 설랑(雪狼)이라 불렸다. 그 얼마나 강하고 살벌했는지 함께 수련했던 나조차도 그에게 말을 걸려면 속이 떨리곤 했지.” “설마요.” 자휼이 슬쩍 웃는다. 하지만 후소는 웃지 않는다. “그야말로 눈내리는 초지를 사냥다니는 늑대와 같았지. 뭐, 지금은 갓 태어난 강아지보다 온순하지만 말이야.” “예?” “부인을 얻었거든.”“좋은 일이군요.” “잘 모르겠다. 난.” 무표정한 후소는 앞에 놓인 화분의 싹을 바라본다. 장난스럽게 적어논 이름이 자꾸만 눈에 거슬린다. “인연을 얻는 것은 좋은일이 아닙니까.” “그 인연이 진실될때 그런 것이 아닐까?” “...거짓이란 말입니까?” “송나라엔 선비인주제에 대부호인 관부선정이라는 늙인이가 있었다. 그야말로 그 부함이 엄청나 황제도 눕지 못하는 금강석으로 만든 침상을 가졌다고했지. 그때 우리는 그 자금이 필요했지만 송나라는 거란족의 것, 거란족인 관부선정이 순순히 돈을 내놓을 리가 없지.” “그래서?” “관부선정에게는 외동딸이 하나 있었다. 부인과는 일찍 사별하고 고아로 자수 성가한 그자에겐 딸외에는 가족이란 없었다.” “그럼 선인 마기의 부인이 그 여인이군요?” “거짓으로 만든 인연, 자신의 장인의 목을 잘라 죽이고 그 재산까지 이어받았다.” 뭔가 엄청난 것을 들어버린듯한 느낌에 자휼은 인상을 찡그린다. 그게 과연 인연일까. 그건 단지 음모가 아닌가. 후소가 그 마음을 읽은건지 부드러운 목소리로 웃는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지. 단지 모략에 불과했던 일인데 그녀가 저 설랑을 저렇게 온순하게 만들어 놓다니 말이야. 이것도 인연이라면 실로 괴이한 것이 아닐수 없겠지.” “...그렇군요.” “인연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지?” 자휼은 화분을 들어 손으로감싼다. 잠시 생각에 잠기지만 곧 고개를 들어 후소를 똑바로 바라본다. “그렇습니다. 그건 인연이라 할수 없습니다.” “그럼 인연이란 무엇인가?” “그건...하늘이 주는 천명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거스를수 없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운명처럼 인연도 그렇게 오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검과 검집처럼 서로 조금의 어긋남 없이 딱 떨어지는 완벽한 무엇처럼 말입니다.” “그럼 사랑해서는 안될 사람을 사랑하게되는 것은 무엇이라 보느냐?” -왜 사람은 사랑해선 안될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것인가요. 잔을 든 손에 힘이 들어간다. 또인가. “진정한 사랑이란 사랑하면 안되는 이를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까.” “...진심이냐?” “당연합니다.” “그럼 너는...” “예?” 후소는 눈을 내리깔고 화분을 노려본다. 그 냉냉한 시선에 싹이 움츠러 들것 같아 손으로 감싼다. 그렇게 침묵이 흐른다. 후소는 미간에 주름을 만들며 생각을 정리한다. 사람의 운명이란 그 행복으로만 향하지 못하는가. 사랑해선 안될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잔혹한 일이 아니던가.왜 일부는 영원토록 행복해지는데 다른 일부는 처절함에 몸부림쳐야하는가. 그 두길은 어떤 이유로 나뉘는가. 그것이 신의 안배인가. 왜 사랑하면 안되는 자를 사랑하게 되는가. 왜 사랑하지 않는자와 인연을 맺게 되는가. 정말로 이 철없는 놈의 말처럼 사랑이란 사랑하면 안되는 이를 상대로는 못하는 것인가.애초에 인연이라 그리 되는건가. 사랑하지 못한다는 사실마져 자신의 오만인가. 그렇다면 절대로 사랑해서 안되는 사람을 향한 마음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거짓인가. 시련인가. 업보인가. 애통, 비련, 미움, 질투와 슬픔으로 인해 자신을 붕괴하려는 함정에 불과한가. 왜 사람은 사랑을 구하는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느냐?” “...예? 아...아뇨. 아직은.” “계주 성주에게는 조카딸이 하나 있다. 낭성태수의 손녀지.” “...?” “그 아이와 인연을 맺어라.” “예?!” 탁자에서 벌떡 일어난다. 그 바람에 화분이 나동그라져 흙이 흩뿌려진다. 자휼은 뭐라 말하려다가 말고 허겁지겁 흙은 다시 주워모은다. 화분을 다시 정돈한 자휼은 고개를 흔든다. “싫습니다!” “싫든 말든. 사랑하는 사람도 없으니 뭐가 문제냐.” 자휼은 욱한 얼굴로 후소를 노려본다. 뭔가 말하고 싶지만 차마 꺼내지 못한다. 후소는 고개를 비스틈히 눕히며 뭐든지 말해보라는 눈을 한다. 하지만 절대 말할수 없다. 왜 말할수 없는 걸까. 왜. 어째서. “바보놈.” 후소는 피식 웃고는 창문으로 훌쩍 뛰어나간다. 자휼은 그 자리에 못밖힌 듯 씩씩거리며 서 있는다. 마치 망부석같이. 조금의 미동도 못한다. 부들 부들 손이 떨린다. 바보놈. 머릿속에 후소의 말이 맴돈다. 바보놈, 바보놈, 바보놈. 후소는 알고 있었던 걸까. 내가 말하지 못할것이라는 걸 미리 알고 있었던 걸까. 그래서 바보라고 하는걸까. 어째서 말하지 못했던 것일까. 내 아이를 사랑해 다른 자와 인연을 맺고 싶지 않다고 말하지 못했단 말인가. 아이를 사랑하지만 그에따른 책망은 싫다는 건가. 왜 책망 받아야 하는가. 그것은 그 아이와 어미아비를 같이 나누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절대로 사랑이란 인연이 될 수 없다. -진정한 사랑이란 사랑하면 안되는 이를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까. 사랑하면 안되는 이를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이 사랑이다. 그런데 어째서 나는 내 아이를 사랑하는 거지? 내 아이를 내가 왜 사랑하는가.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닌가. 양육의 정을 착각하는 것인가? 그건 아니야. “그건 정말로 아니야...” 사랑해. 사랑한다. 사랑하고 있다. 앞으로도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 마음은 변하지 못할것이다. 이것이 하늘이 내게 준 인연이라 생각한다. 그러니까 사랑해도 되지 않는가? 나는 잘못하는게 없어. 누가 비난하던 그것이 내 인연인데 어찌하겠는가? 사랑하기 때문에 어쩔수 없는거야. 내 아이라서 사랑하는게 아냐. 그냥 사랑하는거야.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시는가 고개를 숙였을때 눈가에 보이는 제비꽃마냥 그렇게 눈이 녹아 대지에 스며들듯 사랑해 버린거야. 저기 병사들을 지휘하며 눈을 치켜뜨는 아이를 사랑하는게 아냐. 겨울내내 침대에 뒹굴거리며 밖으로 나가고 싶어 발을 구르는 아이를 사랑하는게 아냐. 무표정한 얼굴로 피를 토하는 아이를 사랑하는게 아냐. 날 마주보는 것이 두려워 기둥뒤로 숨어 훔쳐보던 아이를 사랑하는게 아냐. 누군가를 사랑했더니 그게 내 아이인거야. 내가 잡은 이 손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 그 순간 잡고 있던 그 작은 손이 내 아이의 손이였을 뿐이야. 단지 그뿐이야. 난 절대로 사랑하면 안되는 사람을 사랑한게 아냐. -왜 사람은 사랑해선 안될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것인가요. 그런게 아냐. 사랑을 했던 것 뿐이야. 기다리던 운명의 인연이 단지 내 아이였을뿐이야. 내게 정해진 인연이 우연하게 내 아이였을뿐이야. 바보놈, 바보놈, 바보놈. 누군가 방문을 두드린다. 그리고 잠시 기다리다 문을 연다. “안내려와서 방이 비어있었을줄 알았습니다. 수해. 아니 창출이라고 해야하나. 방금 도착했습니다. 전하를 뵈어야죠.” 등을 돌린 수해는 아무런 대답이 없다. 마고는 이상하다 여기며 자휼에게 다가간다. 멍하니 화분을 노려보는 자휼은 자신이 보이지 않는 듯 하다. 손을 들어 그 눈을 가렸다 땐다. 그리고 다시 묻는다. “수해?” “나...” “예?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내...아이를 사랑한다.” “예?” 갑자기 마고를 밀치고 열린 창문으로 떨어질 듯 몸을 내민다. 그리고 미친 듯 소리친다. “사랑합니다! 내 아이를 사랑한다구요! 빌어먹을! 듣고 있는거 다 알아요! 정말로 사랑한단 말입니다! 들었어요?! 사랑한다구요! 사랑한다구요!” 바보놈, 바보놈, 바보놈. 그렇습니다. 제가 사랑해선 안될 사람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왜 안되는가요? 그럼 안되는건가요? 어째서요? 단지 내가 사랑하면 안되는 혈육이라서요? 그게 다입니까? 그게 내 아이를 사랑하면 안되는 이유입니까? “하지만 사랑합니다.” 창틀에 몸을 기댄 자휼은 고개를 숙인다. 어쩔수 없습니다. 사랑해 버렸는걸요. 186 “그랬지. 이런 시골 사람이라고 하긴 너무 뛰어나. 내 진작 네 놈 속을 들여다 봤어야 하는데.” 노란색 비단옷을 입은 늙은 선비는 중얼거린다. 눈을 들어 자신의 앞에 서있는 자를 본다. 달의 역광에 그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 사위 얼굴이 보이지 않소.” 그말에 문 그림자에서 검은 비단에 푸른 구름무늬의 옷을 입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분위기의 아름다운 사내가 한발 걸어나온다. 늙은이는 그를 가만히 올려보고는 미소짓는다. “내 딸 사랑스럽지?” 그와 동시에 무표정한 그는 늙은이의 목을 따버린다. 화트득하고 뜨거운 피가 검은 옷에 튀긴다. 피가 흘러 푸른 구름문앙을 가린다. 털썩하고 늙은이의 시체가 땅에 누워버린다. 사내는 가만히 그 모습을 들여다보다가 들고 있는 머리를 두손으로 받쳐들고는 조심스럽게 피가 튀어나오는 목에 맟추어 놓는다. 그리고 검을 내려놓고 이미 죽어버린 장인을 향해 큰절을 한다. 두손을 가지런히 모은 부부는 눈을 내려감고 죽어버린 고인에 대한 명복을 빈다. 딱딱딱하고 중이 든 목탁이 두사람을 돕는다. 한동안 그렇게 그림처럼 앉아있던 부부는 당을 내려나와 절의 마당으로 내려선다.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는 남편을 보고 부인이 그 어깨에 손을 올린다. “무엇을 그렇게 깊히 생각하시나요?” “음. 그냥.” 마기는 멋쩍게 웃고는 소용의 손을 잡아 절의 화원을 감상한다. “봄이 빨리 가는군요. 빨리 지는 꽃들은 벌써 모습을 감추었으니 말입니다.” “후후. 하지만 낭군이 있으시니 꽃이 없어도 꽃을 보는 마냥 행복합니다.” 얼굵을 붉힌 소용은 부끄럽게 고개를 돌리며 말한다. 마기는 그 모습을 보고 미소짓는다. “제가 못나서 부인을 행복하게 해드리지 못하는군요. 어느새 봄은 가버리는데 꽃구경 한번 못가보고 말입니다.” “어머나, 소용은 꽃구경을 안해도 좋아요. 꽃이야 집안에도 가득 피어있는걸요. 하지만 낭군과 함께 보는 꽃은 각별하죠. 밥한끼라도 당신과 함께라면 전 모래가 가득한 밥이라도 좋아요.” 마기는 쓴웃음 짓는다. 말없이 소용의 손을 잡고 산책할 뿐이다. 절에 올라왔던 몇몇 도성 아가씨들이 마기를 발견하고 얼굴을 수줍게 붉히면서 눈웃음친다. 휴가중인 황성내의 병사들이 장군을 알아보고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하나같이 마기와 소용이 지나가면 소용의 외모에 대해 말이 많다. 소곤거려도 자신을 폄하하는 소리는 귀에 들어오기 마련이라 소용은 점차 우울해진다. “신경쓸 것 없어요.” “예?” “신경쓸 것 없다고했습니다. 모처럼 둘이서 장인의 기일을 보내려 왔는데 우울한 당신의 모습을 그분께 보여드리고 싶지 않아요.” “여보...” 마기는 다시 하늘을 올려보고는 쓴웃음짓는다. “장인어른이 당신이 그렇게 찡그린 것을 보면 절 가만히 두지 않을테니까요.” “당신도 참.” “행복하게 해드리고 싶습니다. 소용.” “전 충분히 행복해요.” 소용은 허리를 숙여 마기의 어깨에 얼굴을 부비댄다. 간지러운 듯 마기가 낮게 웃는다. 그 웃음소리가 매우 맑아 산책로를 쓸던 스님들은 모두 고개를 들어 그들을 본다. “사실 걱정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부인께서 걱정이라니 무엇인가요?” “...낭군이 절 떠나가는 꿈을 꾸었어요.” 마기가 걸음을 멈춘다. 잠시 그대로 서있던 그는 조용히 묻는다. “어떤 꿈이였는데요?” “싫어요. 안말할래요.” 소용은 낼름 혀를 내민다. “그리고 당신이 절 떠나는 일은 절대 없을테니까요. 그렇죠?네?” “...” “아이, 떠나도 곧 돌아오실거잖아요. 그렇죠?” 대답을 재촉하는 소용의 흔듬에 마기는 고개를 끄덕인다. 소용은 뚱한 표정으로 마기의 어깨를 잡고 마구 흔든다. “대답이 뭐 그래요. 크게 말해봐요. 설마 당신 나말고 다른 여자 있어요?” “설마요. 전혀요.” “그럼 절 버리지 않을거죠?” “나는 장수이니...어느때는.” “호호, 출장정도는 괜찮아요. 그건 꼭 돌아오기 마련이니까요.” “그렇군요.” 소용은 고개를 갸웃하고는 마기를 재촉해 다시 걸어간다. “저기 말이죠.” “예.” “꼭...멀리 가야한다면 소용도 데리고 가야해요.” “...길이 험해도요? 연약한 부인이 갈곳이 못되는 장소는 여전히 많아요.” “그래도 괜찮아요!” 활짝 웃는 소용은 앞에 보이는 약수터에 마기를 끌고 간다. 워낙에 체격차이가 커서 마기는 쉽사리 질질끌려간다. “전 어디까지라도 따라갈수 있어요. 소용은 강하답니다.” 가슴을 탕탕쳐보인 소용은 호기있게 장담한다. 표주박에 물을 떠 한모금 먹고는 감탄한다. “물이 시원하네요. 이제 여름이 오려나봐요.” “그렇군요.” 표주박을 내민 소용은 부끄럽게 중얼거린다. “절 버리지 않으시겠다면 이걸 마셔주세요.” “...?” “아이참, 기억 안나요? 우리 환합주를 마실 때 제가 했던 말이잖아요!. 그거 참 용기낸거란 말이에요! 당신은 이런거 기억하는 법이 없다니까요.” “아아... 그렇지요. 어쩐지 들어본 말이라.” 마기는 소용에게서 박을 받아든다. “당신이 날 따라오신다면. 언제든지 당신의 손을 잡고 놓지 않겠습니다.” “저는 죽는 날까지 당신만을 따라가겠어요.” 소용은 진지한 표정으로 마기에게 대답하고 두근거리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본다. 마기는 소용의 얼굴을 한번 보고는 고개를 숙여 물을 마신다. 물이 참 차다. 문득 표주박 안의 찰랑거리는 물에 소용이 비친다. 그리고 그 뒤에 있는 노란 옷의 목없는 시체도. 깨끗한 약숫물이 찐득한 붉은 피로 변해 몹시 비려 속을 자극한다. 그 피 비린내에 정신이 아찔하다. 뱉어내고, 게워내고 싶어 미간이 구겨진다. 핏덩이속에서 구더기가 기어나와 표주박 밖으로 넘친다. 표주박안에서 생겨나는 듯 계속 손안으로 바닥으로 계속 떨어져 꿈틀거린다. 입으로 넘기는 핏덩이가 꿈틀거린다. 못마시겠어. “여보? 왜그래요?” 소용이 이상하게 자신을 바라본다. 그 우락부락한 얼굴과 몸에서 풍기는 자상하고 천녀같은 배려의 눈동자가 자신을 걱정스래 바라본다. 꿀꺽. 목넘어로 넘어가는 것은 깨끗하고 시원한 약숫물이다. 약간 벙한 표정으로 표주박안의 깨끗한 약숫물을 바라본다. 곧 표정을 지우고 소용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는다. 소용이 부끄럽게 표주박을 받는다. “정말이에요.” “예?” “정말 당신을 따라갈꺼에요.” “아아, 저도 부인을 데리고 가고 싶습니다.” 폭하고 마기를 안은 소용은 그를 꽉 껴안는다. “그 어디라도 함께 가는거에요.” “...기꺼이” 마기는 소용의 큰 어깨를 감싸 안는다. 마기는 방문을 열고 성에 가까운 집안을 내려보았다. 천명에 달하는 식객과 시종들이 울며 이리저리 배회한다. 마기가 일어나 나온 것을 안 시종들 그에게 달려가 울며 고한다. “주인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왜?” “한족 식객하나가 주인님의 목을 베고 자살...흑!” 말을 끝맺지 못하고 서러워 우는 종을 내려본 마기의 표정은 변하지 않는다. 잠시 하늘을 올려다 본 마기는 뭔가 생각난 듯 마기에게 묻는다. “소용은?” “아가씨는 기절하셨어요. 지금 후당에 누워계십니다.” 다시 마기는 하늘을 올려다 본다. 하늘이 참 파랗다. 점점 더 높아져 파랗게 변해 뜨거운 해를 그 안에 담아 식히는 계절이 온다. 하얀 구름이 지나가고 제비가 높이 날아 이리저리 배회한다. 제비를 따라 눈을 돌리던 마기의 표정은 담담하다. 여전히 집안은 울부짖는 사람으로 가득하다. 시끄러움, 분주함. 이 모든 슬픔이 한대 어우러져 하늘에 올라간다. 하늘에 올라간 그것들은 드넓은 그곳에서 자유를 찾아 저 멀리 날아간다. 그래서 사람은 슬픔을 잊어버리는것이다. 곧 새로운 슬픔이 생겨나고 그것은 눈물을 통해 다시 하늘로 날아오른다. 단지 그것뿐이다. 이런 처절함도 얼마 가지 못한다. 죽은 사람은 잊혀지고 산 사람은 새 즐거움을 찾는다. 결국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가슴안에서 계속 그것을 키운다면 결국 슬픔이란 커다란새가 몸안에서 몸부림쳐 죽게되는것이다. 단지 남는 사람은 쌓아지는 슬픔을 잘 키워 자유롭게 올려보내기만 될뿐. 그렇게 한참을 하늘을 보던 마기는 문득 자신의 손이 떨리는게 느껴져 의아해한다. 마기는 자신앞에 엎어져 울고 있는 시종에게 다시 묻는다. “소용은?” “예? 아...아가씨는 후당에...” “후당 어디?” 시종은 그 수려한 젊은 새 주인이 인상을 쓰는 것을 보고 놀란다. 저 무쇠같던 자도 저런 표정을 지을수 있구나하는 생각에 얼른 후당으로 안내한다. 천천한 걸음으로 후당으로 들어간 마기의 점점 걸음이 빨라진다. 후당의 여섯 번째 문을 연 마기는 검은 옷자락을 펄럭이며 소용을 부른다. “소용! 소용!” 수많은 문중에서 하나가 크게 열리며 소용이 뛰어나온다. 마기가 헉헉거리며 소용을 향해 팔을 벌린다. “이리와.”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그래.” 문앞에 꿇어앉은 소용을 감싸안은 마기는 아직 올리지 않은 소용의 머리카락 속으로 얼굴을 묻는다. 씩씩거리며 통곡하는 소용의 목소리가 귀를 괴롭게한다. “아버지를 죽이다니! 용서하지 않을꺼야! 용서하지 않을꺼야! 나쁜 놈같으니라구! 자살을 해버렸어요! 복수도 못해요!” “응.” “아버지가...!” 엉엉 울며 매달리는 소용을 안은 마기는 문득 소용의 그림자속에서 목이 없는 사내의 그림자를 본다. 게슴츠레 뜬 눈으로 목없는 사내의 그림자를 따라 움직인다. 소용이 마기를 어깨를 잡고 흔든다. “당신은, 당신은 날 떠나면 안되요! 약속해줘요! 당신은 날 떠나면 안되요! 소용은 그럼 죽어요!” “응.” 마기는 목없는 사내의 그림자에 눈을 때지 못한다. 울부짓는 소용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아버지를!..용서하지 못해! 용서하지 않아!” “그래. 용서하지마.” 눈을 감아버린다. “그래도 사랑해.” 187 지켜주지 못한 것은 한순간이지만 상처는 평생 남아. 지키지 못한 사람이나 지킴받지 못한 사람이나 마찬가지지. 눈살을 찌푸린 을노는 내리쬐는 태양을 피해 말그늘로 몸을 숨긴다. 금실로 장식한 허리띠의 금꽃 장식과 푸른 옥이 짤랑인다. 고개를 숙여 금꽃사이에 숨겨진 잉어를 하나 추려낸다. 어눌한 솜씨로 만든 잉어 모양의 장식. 피식 웃으며 그것을 들여다본다. 천천히 돌려 들여다보고는 쓴 인상을 짓는다. “장군. 오걸매가 십삼일전에 황성에 도착했었답니다.” “어, 그래? 그럼 시간이 좀 남았네.” 얼른 일어나 손을 턴다. 부관은 아직 가슴이 아픈지 팍인상을 쓰고는 을노는 따라 걸어간다. 처지는 부관에게 을노가 웃으며 말한다. “가서 쉬라고. 어차피 열흘후정도에 오걸매가 오면 누우려해도 못하게 할테니까.” “실은 호북의 마나님이 오셨습니다.” “응? 아아, 그 산적을 마중나왔나. 내가 만나보지.” “함께 갑시다.” “됐다.” “뭐, 시간이 많이 남으니 선인 혼자 내버려두기 뭐해서 말입니다.” “뭐냐, 저 감히 선인을 인도하려는게야? 하하하!” 밝게 웃은 을노는 빠른 걸음으로 병사들 사이로 숨어들어간다. 부관은 한숨을 쉬고는 막사로 돌아간다. 빠른 걸음으로 병사들 사이로 들어갔던을노는 곧 그를 알아보는 병사들에게 둘러싸인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선인.” “좋은 하루 되십시오.” “오늘은 기분 좋아보이시군요.” 웃음으로 그들에게 대답을 대신한 을노는 점점 병사들에게 떨어져 경계선으로 다가가 금나라의 진영을 바라본다. 지금은 쥐죽은 듯 조용하고 무력해 얼추 5진영이나 빼앗았지만 이제 곧 오걸매가 들어와 4진영쯤은 되찾아 갈것이다. 머리를 긁적인다. 끝나지 않는 싸움이 조금은 지긋지긋하다. “선인! 선인!” “무슨 일이냐?” 병사하나가 헐래벌떡 뛰어온다. “호북진영에서 사람이 건너옵니다!” “응? 적병이 들어오는 건가?” “아뇨,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호라.” 피식 웃은 을노는 서둘러 전방진영을 향해 달려간다. 이미 무장을 한 장수들과 병사들이 대기중이다. 장수 하나가 을노에게 말한다. “악가군이 그를 마중나갔습니다.” “역시 마나님이로세. 귀한 손주안전하게 모시고 싶다는 건가.” 그대로 팔짱을끼고 그 소란스러움과 난동에 귀를 귀울인다. 여기서는 저 먼곳에서 먼지만 폴폴 날리는 모습뿐, 어찌된것인지 모르지만 서너시간이 지나자 그 먼지속에서 십여명정도 되는 말탄 무리들이 뛰어나온다. “나오는거냐?” 인상을 쓰고 그것들을 노려본다. “흠. 저기 나오는군. 다행이구만.” “마나님?!” 때아닌 여인의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옆에 서있는 조그만 키의 늙은 여인이 싱긋 웃는다. “역시 미친놈의 군은 대단한가보군. 돌아오는 것은 열셋인가.” “몇명이나 보내셨습니까?” “삼백을 보냈네.” “저런.” 하지만 속으로는 한명 구하기 위해 삼백을 죽이냐는 실소가 나온다. 하긴 자기 손주이니 그럴만도 하지. “지금 내가 무리해서 내 손자를 구한다고 생각했지?” “뭐, 속이지 않겠습니다. 삼백이나 죽여가며 한명을 구하느니 차라리...” “그 한명이 자신의 혈육이라는게 중요한거야. 그 한명이 선인의 형제라면 어찌하겠는가.” 그말에 멈칫한 을노는 마나님을 노려본다. “그런식이라면 그 한명을 위해 죽어간 이백구십여명의 가족은 어찌된단 말입니까.” “그런식으로 날 보지 말게. 왜 이런식으로 사람을 구해야 하는지 선인을 겪어봐서 알지 않는가.” 마나님은 주름이 가득한 이마를 문지른다. “난 저 아이가 죽은 삼백명이 못할일을 대신해주리라 믿네. 자네들이 성을 하나 날리면서 단 한명의 아이를 구해낸 것처럼 말이야.” “...대단한 자신감이시군요, 과연 산적놀음을 하던 저 망나니 도련님이 삼백명의 꿈을 이루어줄지 기대됩니다.” “응? 저놈 산적놀음했나?” 그말에 마나님이 입을 가리며 이마에 힘줄을 세운다. “저놈 나한데 있을때도 애들 모아 산적놀이 하더니. 이리 오기만 해봐라!” 화를 내며 중얼거리는 마나님의 옆에서 을노는 눈을 내리감는다. -그 한명이 자신의 혈육이라는게 중요한거야. 그 한명이 선인의 형제라면 어찌하겠는가. 당연이 구해내지. 그건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같은 목숨이라도 피를 나눈 것은 그 의미가 다를 수밖에 없는거야. 같은 목숨이라도 내가 기른것과 남이 기른 것이 다른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죽어가는 자들에게도 그런 것은 마찬가지겠지. 결국 전장에서는 스스로 강해살아남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이 안되는 자를 구하고 싶다면 구하고 싶은자가 지키지 않으면 안되는거야. 저런식의 목숨을 바치라는 의미는 결국 죽이는 것과 뭐가 다를까. 아니 사실은 잘 모르겠다. “선인, 선인?” “응?” “그들이 옵니다.” 말을 타고 헐래벌떡 뛰어온 먼지투성이에 상처가 가득한 악운이 흩트러진 머리를 올리며 환하게 웃는다. “다시 만나뵈어 영광입니다. 장군.” “이놈아!” 딱 소리가 나며 마나님이 악운의 귀를 잡아 당긴다. “네 눈에 보이는건 저 선인뿐이냐? 몇 년 떨어져 있었다고 이 할미의 얼굴도 잊은게야?!” “아이고, 할머니! 어쩐지 마중나온 사람들이 송나라인이라더니!” “이놈! 네 산적놀이 하고 지냈다며!” “아앗! 할머니! 나 지금 막 살아왔는데 다시 죽일셈?” 악운이 얼른 일어나 병사들 사이로 도망친다. 마나님이 팔뚝을 드러내고 종종걸음으로 쫓아간다. 모여든 병사들이 모두 웃는다. 을노도 따라 웃다 쓸쓸함을 느낀다. 그러고보니 백라 아저씨가 보고 싶네. 나원. 그 꼬장꼬장한 아저씨도 가족이라 그런지 보고싶구만. 하늘을 보며 한숨을 쉰다. 여전히 도망다니는 악운과 따라 매질하는 마나님은 힘이 넘친다. 등불이 흔들리자 그림자도 따라 춤춘다. 마나님은 헛기침을 하고 난후 악운을 노려본다. “그런 신세를 졌었군. 이 노녀 몹시 창피하오. 다음부터는 그런일이 절대 없을것이외다.” “별로. 무사히 후계자가 돌아오셔서 축하드릴뿐입니다.” “어우. 정말로요?” 방실 웃은 악운은 부담드럽게 을노에게 다가가 얼굴을 들이민다. “자례에게 들었습니다. 을노장군님 여동생이 제 약혼녀죠?” “누가 그래!” 마나님이 조용히하라고 눈치를 주기도 전에 을노가 꽥 소리치며 일어난다. 얼굴이 파랗게 질린체로 씩씩거린다. “말해두지만, 을야에게는 약혼자가 없었어. 내 동생은 고작 10살이였고 아버지도 어머니도 내게 그런 말을 하지 않으셨으니까!” “헤에. 을야입니까? 이름 참 곱군요” “너랑 인연이 아니래두!” “얼굴은 어떻게 생겼었나요? 역시 혈육이니 을노처럼 갸름한 얼굴에 둥근 눈을 가졌겠군요? 그거 경국지색의 미인이로다!” 쾅창하는 소리와 함께 탁자가 뒤로 넘어간다. 깜짝 놀란 마나님이 허둥지둥 뒤로 물러난다. 캬르릉 소리가 들릴정도로 을노가 화를 내며 악운의 목을 잡고 탈탈 흔들며 외친다. “아니라니까! 난 네놈 따위 모른다니까! 을야를 네놈같이 별볼일없고 속비린 웃음을 짓는 너 따위 한량에게 넘겨줄 것 같아! “그거 말이 너무 심하지 않소! 운(雲)은 우리 악가의 후계자란 말이오!” “히야, 머리는 검었겠지요. 그야말로 오발선빈에 운계무환?! 크, 안타갑도다, 그림이라도 남은 것이 없으신가요?!” “우린 피발전통이야! 무슨 운계무환의 헛소리야! 이 재수없는 기생오래비같은 놈!” “그러니까 선인! 말이 심하다 하지 않소!” “아무튼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우린 가족이 아닙니까!” “너 따위랑 혈연맺기 싫다니까!” “악가가 어때서!” 을노의 막사가 소란스럽자 병사들은 힐끔힐끔 그쪽을 바라본다. 뭔가 깨지는 소리와 소리치는 소리가 울려온다. 한참후에 셋다 엉망이된 옷과 얼굴로 막사를 나온다. 마나님이 머리를 정리하며 흥소리를 낸다. “아무튼! 앞으로도 잘 부탁하오.” “그럼요. 형님. 내일 놀러올께요.” “오지마!” 마나님 일행이 등뒤를 바라보고 웃는 악운을 끌고 자신들의 영지로 돌아가자 을노는 엄청난 소리로 비명을 지른다. 선인의 괴성에 모두들 깜짝 놀라 하던 일을 멈추고 을노를 본다. 부관역시 때아닌 을노의 비명에 아픈몸을 이끌고 막사를 나온다. “무슨, 무슨 일입니까? 어디 다치신겁니까?!” “이, 천년동안 재수없는 놈!” 을노는 악운이 사라진 방향을 향해 손가락질을 해댄다. 그것은 그날 밤이 되어 을노가 깊게 잠들때까지 계속되었다. 아침이 되어 을노가 일어나 정황을 묻자 을노의 막사앞에서 보초를 선 병사는 을노가 잠꼬대로도 악운의 욕을 했다며 웃었다. 창피한 표정으로 을노는 헛기침을 하고 진영을 나와 순시를 할 준비를 한다. “선인.” “왜 그러지?” “저기, 누가 오는데요?” “오걸매냐? 예상보다 빠른데?” 을노가 급히 자신의 쌍검을 들고 앞으로 뛰어나가 아침 안개속에서 달려오는 누군가를 노려본다. 뒤따른 부관의 지시에 명궁인 몇몇의 장수들이 활을 재어 명령을 기다린다. 천천히 그 모습이 들어나기도 전에 방정맞은 목소리가 먼저 울려온다. “형님! 운이가 왔어요!” “쏴버려!” 을노는 절망적으로 악운을 가리키며 외치고 만다. 때아닌 아침부터 선인의 복장이 터지고 만다. 손을 내민 을야는 새촘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한다. 뭔가 칭찬해달라는 표정에 을노는 그것을 받아들고 유심히 바라보다가 결국 포기하고 묻는다. “이게 뭐냐?” 딱 소리가 나며 을야가 눈높이를 맟추기 위해 쪼그려 앉은 을노의 머리에 꿀밤을 먹인다. “아앗! 왜 때리는데, 을야!?” “잉어다. 잉어.” “어? 아하, 그럼 이 보자기처럼 나온 것이 꼬리구나? 그럼 이 뿔같은게 수염이냐? 그럼 이 우물같은 게 눈인가?” 따악거리는 소리가 더 울린다. 을노가 눈물이 핑도는 것을 참으며 얼른 일어나 을야의 손을 피한다. 바둥바둥 거리며 을노의 다리를 치던 을야는 얼굴이 빨게진 체로 울먹울먹거린다. 흠칫한 을노는 재빠르게 을야를 달래지만 이미 터진 울음은 어쩔수 없다. “아빠! 엄마! 으아앙! ” “앗! 을야, 오래비가 잘못했다!” 지붕을 들썩이는 울음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와 인상을 쓴다. “왜 동생을 울리는거냐 을노.” “앗, 아니에요. 아버지, 그냥 말하고 있었을뿐이에요! 정말이에요! 단지, 정말로 말을 하고 있었을 뿐이라구요!” 허겁지겁 변명하는 을노를 노려본 을야는 손을 벌린 어머니의 품에 안긴다. 피곤한 눈을 비빈 아버지는 을노가 들고 있는 금조각을 보고 아는 척을 한다. “호. 그거 허리 장식이구나. 을야가 어제 파고 있던게 그거냐? 이리줘봐라.” 아버지는 그것을 돌려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을야가 이젠 이런것도 할줄 알고. 잉어구나. 잘 만들었어. 기특하네. 이거 아빠 주려고?” “아냐!” 을야의 외침에 머슥해진 아버지는 헛웃음지으며 어깨를 으쓱한다. 품으로 들어가 숨어버리는 을야의 머리를 쓰다듬은 어머니는 미소짓는다. “그럼 엄마 주려고?” “아니란 말이에요.” 웅얼웅얼거린 을야는 힐끔 을노를 쳐다본다. 을노는 을야의 부어 붉어진 눈에 흠칫 놀라 뒤로 물러난다. 어머니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을야는 아무도 알아들을수 없는 소리를 웅얼거린다. “오빠 생일선물이야.” 웅얼거리는 목소리와는 달리 너무 똑똑히 알아버려 을노는 눈을 크게 뜬다. 어머니가 을야를 달래 안방으로 들어가버리자 을노는 잽싸게 아버지의 손에서 금장식을 낚아챈다. “히야.” 도대체 뭔지 알수 없는 금쪼가리가 힘찬 물살을 가르는 잉어로 보인다. 흐뭇해하는 을노를 보며 아버지는 단지 미소짓는다. 단지 미소일뿐. 188 춤을 추는 여인들의 모습은 아름답고 황홀한데 유독 황제만은 눈살을 찌푸리며 화를 낸다. 얼른 여행에 따라온 환관이 손을 내저어 여인들을 내쫓는다. 조용한 가운데 술잔을 기울이는 소리만 울린다. 조용히 지내고 싶어하는 황제의 뜻에 따라 두 형제만이 참가한 연회는 일찍 파한다. “황제가 춤을 싫어한다는 것은 유명한 것이 아닌가. 하긴 황성에서 떨어져 그런 것을 모를지도 모르지.” “군자가 즐기는 것은 학문뿐이라고 말할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경락공.” “그런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조언이다. 황제의 마음에 들고 싶으면 검무나 만들어 놓는게 좋을꺼야.” 두 왕자는 긴 복도를 걸어 나온다. 문득 궁금증을 이기지 못했다는 표정의 태천이 묻는다. “어째서?” “뭐가?” “어째서 저 풍류객이 춤을 싫어합니까? 지금뿐만이 아니라 황제가 오시는 매년마다 궁금했던 일인데.” “황제는 춤을 잘춘다.” “...보시기라도 했다는 말입니까? 상상이 안되는군요.” “죽은 1왕자가 내게 말해주었었지.” 다시 말없이 한참을 걸어간다. “왜?” “야울연희.” “야울연희? 요나라의 마지막 황제아닙니까. 서쪽 땅끝에서 아직도 황제 행세를 하고 있다고 하던데. 그들은 그를 천조제라 하더군요.” “요나라놈들이 끈질긴 것은 사실이지. 황제는 그자를 죽이기 전까지는 춤을 추지 않을걸.” “...?” 체이첸은 의미있는 웃음만 지을뿐이다. “걱정마라.” “무슨?” “내가 곧 춤추게 만들어 줄테니까.” 주는 고개를 돌려 창문을 바라보고 머리를 긁적이며 생각에 잠긴다. 곧 태천이 헛기침을 하자 몸을 돌리고 웃는다. “저 역시 그 일에 대해서는 풍문으로만 들어본것이라 자세히는 모릅니다. 주공.” “그거라도 말해봐라. 체이첸놈 잘난척 하는 꼴은 더 이상 보기 싫다.” “여진족이 요의 거란에게 지배를 받고 살적, 그 행패가 매우 심했다는 것을 알고 계시지요.” “그래.” “게다가 천조제는 성격이 꼬인 자 아닙니까.” “그래서?” “심심했던지 어느날 거란의 수장들을 모아 연회를 베풀었답니다. 그들의 노고를 치하한다는 것이였지만 사실 자신의 밑에서 굴복당한 자들의 떠는 꼴을 보고 싶었던 것이죠.” “그거와 황제가 춤을 싫어하는 것은 무슨 상관이지?” “사방에 무장을 한 군대로 포위한 살벌한 분위기에서 천조제가 그들에게 춤을 추라 명령했습니다. 모든 수장들이 두려움에 춤을 추는데 단 한명만이 춤을 추지 않고 천조제를 노려보았답니다.” “흠.” “분노한 천조제는 그의 목을 베라 명령하나 그의 박력에 지고 말아 호북쪽으로 멀리 추방시킵니다.” 태천이 고개를 들어 주를 바라본다. 주는 단오하게, 강하게 말한다. “그자가 지금의 황제입니다.” 믿을수 없다는 듯 침묵으로 있던 태천이 표정을 관리하며 웃는다. “호오. 저 주색만 아는 줄 알았던 황제께서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인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셨습니까? 보통 새 황제가 옹립하면 전 황제는 어지간한 힘이 남아있지 않은 이상 정체를 숨기고 살아가는 것이 보통인데 재기할 힘 따위 전혀 없는 천조제는 아직도 자신을 황제라 칭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지. 아무튼 그래서 황제가 춤을 잘하면서도 싫어하는건가 ...” “늙은이들의 자존심 싸움이지요. 결국은.” 주는 머리를 긁적인다. 생각에 잠기면 나오는 특유의 버릇이다. “그보다 2왕자가 한말이 더 마음에 걸립니다.” “왜?” “말한대로요. 황제가 다시 춤을 즐기려면 요의 천조제가 없어져야 할텐데, 즉 2왕자의 말은 천조제를 없애주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제가 알기론 2왕자에겐 군을 출범시킬 권한이 없지 않습니까.게다가 지금 사황은 천조제를 치러 가는 것조차 불가능해요.” “왜?” “일단은 잔존하는 요나라의 세력을 칠만한 사령관입니다. 알고 계시지요? 황제는 황제가 쳐야합니다. 황제를 일반 군신이 친다는 것은 반역이며 역모에 해당합니다. 게다가 아직 금나라에 대한 요나라의 반대 세력이 있으니 더더욱 대의명분을 생각한다면 일반 장수에게 요나라를 치게 할 수는 없습니다. 훗날 사관들이 금나라를 반역으로 세운 나라라 매도할테니.” 다시 머리를 긁적인 주는 계속 말한다. “결국 황제 스스로 일어나 요나라를 쳐야한다는 이야기인데 지금, 후계자도 정해지지 않는 이 상황에 황제가 사령관이 된다는 것은 그야말로 도박입니다.” “왜?” “만약 황제가 전쟁에 진다면 금나라는 왕자들의 황위 다툼으로 어지러워질테고 그 틈을 노린 천조체가 군을 일으켜 금나라를 다시 정복해버릴테니까요. 게다가 지지 않더라도 황제의 나이가 나이니만큼 언제 급살할지 모르는 일이고.” “결국 태자자리가 정해져야 뭐든지 움직인다는 이야긴가.” “결론적으론 2왕자가 한 이야기는 자신이 황자가 되어주겠다는 거지만...이상하게 저에겐 그 말이 걸리는군요.” “또 왜?” “2왕자는 헛말할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시 머리를 긁적인 주는 창문을 열고 밤공기를 즐긴다. “이곳은 여전히 좋군요. 지금쯤 참가자들 대부분이 기주로 들어갔겠습니다.”“그래.” “5왕자도 들어왔겠죠?” “그렇다.” “그 사람 건드리지 마십시오.” 태천은 인상을 찡그린다. “왜?” “2왕자에겐 4왕자가 있지만 우리에겐 14왕자가 없지 않습니까.” “...” “대신 5왕자라도 써먹어야지요.” “황궁 생활은 즐길만 하나?” “뭐. 그럭저럭합니다. 망을 쳐두었는데 누가 물고기를 건저 가버려서 화딱지가 좀 생겼을뿐.” 낮게 웃는 주의 표정은 딱딱하다. “그나저나 체이첸이 이곳에 오래 머물수록 주공께 불리하니 뭔가 약점을 잡아야 겠군요.”그럴것이 있나“ “털어서 먼지 안나오는 자가 어디있습니까.” 반색하는 태천에게 주가 머리를 긁적여 보인다. 체이첸은 기주로 출발할 수행원들을 나누었다. 가신중 한명이 다가와 작게 속삭인다. “흠. 작은 균열에도 무너질 것은 무너지기 마련이지. 가는 길에 헤치워라.” “어떤식으로 할까요?” “도망친거로 해놔. 시체도 못찾게.” 그가 고개를 숙이고 물러나자 레이첸은 기주로 가는 수행원들을 떠나보낸다. 방으로 돌아온지 얼마 안되어 기다렸다는 듯 태천이 방문한다. “방금 경락공의 수행원들이 기주로 떠나더군요. 경락공은 같이 안가십니까?” “나는 황제를 모시고 갈것이네. ” “괜찮을까요? 저렇게 수행원만 보내서야, 이 근방에 화적무리가 어느날 소멸되어 상황이 어지럽다는 것을 경락공이 모르실리는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저렇게만 보내십니까?” “괜찮아. 황제의 말도 같이 떠나보냈거든.” 태연하게 말한 체이첸은 탁자에 앉는다. “어떤 간부은 놈이 황제의 말에게 활을 쏘겠나? 안그런가?” “5왕자가 기주로 도착했다는군요.” 말을 돌린 태천은 체이첸의 앞에 앉는다. “올해도 가장 유력한 우승후보일지 모르지요.” “그런데 이상하게 올해는 축제에 참가하는 자들이 유난히 적단 말이야? 자네 뭐 아는 것은 없나? 자네 관할이잖아?” 입꼬리를 올리며 웃는 체이첸을 본 태천은 여유있게 미소짓는다. “제가 아는 것은 그동안 말을 대고 있던 지방성중 하나가 사라저버리는 바람에 좋은 말을 구하기 어려워 포기하는 자들이 많이 생기고 있다는 것뿐입니다.” “...아아. 그런가?” “왜 아실 것 같은데 말입니다. 목래라고 하더군요. 생존하던 영웅이 관할하던 작은 성인데 한혈마로 유명했던 곳이랍니다.” “이야기를 들어본일이 있지.” “근데 말입니다 경락공.” 몸을 당겨 체이첸을 본 태천은 정말 이해할수 없다는 얼굴을 한다. “황성에 그 영웅이 들락거린다는 소문 들으셨습니까? 게다가 그 영웅은 정안인이라 하더이다!” “...” 냉냉하게 식어버린 체이첸은 가만히 태천을 노려본다. 한동안 그렇게 서로를 노려보던 두 사람중 체이첸이 먼저 시선을 푼다. “황성에서 멀리 떨어진곳에 있으면서 내부사정에 대해 잘 알고 있군. 천리안이라도 있는건가?” “설마요. 단지 소문일뿐입니다.” “그런데 그자가 죽었다는 것도 아나?” 이번엔 체이첸이 태천의 목을 끌어당겨 그 눈을 노려본다. “누군진 몰라도 참으로 굉장한 놈이 아니던가. 꼭 한번 만나보고 싶었지.” “그러신가요?” 터덜거리며 웃은 체이첸은 손을 저은다. “나도 내일 기주로 출발하겠네.” “왜, 더 머물지 않으시고요?” “4왕자놈이 슬슬 기주로 도착했을때야. 5왕자 놈과 싸우기 전에 잘 타일러야 할것이 아닌가.” “원하시는 대로.” 태천이 나가자 체이첸은 방문을 노려보며 화를 참다가 실소한다. 태천의 호위대와 말을 달리던 주는 이상하다는 듯 귀를 귀울인다. 뒤따르던 사복차림의 장수들이 그에게 묻는다. “무슨 일이십니까 군사님?” “잘 들어봐.” 주가 손가락으로 조용하라는 신호를 보낸다. “말이 달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나? 열이 맞춰지는 소리가 군마같은데?” 그말에 한 장수가 말에서 내려 땅에 귀를 댄다. 그리고 얼마후에 일어나 얼른 말을 탄다. “군마가 달려옵니다. 어서 피하시는게 좋겠습니다.” “흥. 2왕자를 너무 우습게 봤나.” “어서!” “재촉하지마. 이곳처럼 허허 벌판인데서 어떻게 숨어?” 머리를 긁적이며 생각에 잠기던 주가 묻는다. “싸우면 이길것 같아?” 그말에 장수들은 서로의 눈치만 본다. 아직 누가 뒤따르는 지도 모르는 상황에 승패를 장담할정도로 어리석은 장수들은 아니였다. 주는 그들을 보고 한숨을 쉰다. “별수 없군. 전속력으로 줄헹랑쳐서 목숨을 부지하자고.” 그리고 부리나케 말을 달리기 시작한다. 189 친첸은 신경질적으로 금발을 흩트렀다. 씩씩거리며 좁은 궁안을 뛰어다니다 병사들의 눈이 뜸해진 것을 타 자신의 궁전을 나간다. 사방으로 갈라진 돌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중 하나를 정해 달려간다. 답답한 자신의 작은 궁전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발을 재촉한다. 얼마나 달려갔는지 처음보는 궁전들이 높고 낮게 서있다. 양옆으로 궁녀들이 부지런하게 물건들을 나르고 음식도 들여간다. 배회하듯 새로운 이곳을 헤메던 금발의 왕자는 문이 열린 한 궁문으로 들어간다. 붉은색 나무로 깔린 길을 헤멘다. 얼마나 걸었는지 힘들어 쉬고 싶어진다. 저 멀리 나무가 한그루 보인다. 나무를 키울수 있다니 이 궁안 주인은 꽤 높은 배분인듯하다. 다가가자 누군가 한그루 덜렁 남은 나무밑에서 앉아 눈을 내리깔고 있는 것을 본다. 감은 눈동자의 눈썹이 얼마나 단아한지 그림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가까이 다가가도 그녀는 눈을 뜨지 않는다. 그 조그만 얼굴에 손을 내밀어본다. 막 닿을 것 같은데 그녀의 감은 눈 사이로 눈물이 흐른다. 투명하게 흐르는 그것은 볼을 지나 턱에 맺혀 나무 밑으로 스며들어간다. “왜 우는 거지?” 용기내어 말을 걸지만 그녀는 눈을 뜨지 않는다. 손으로 눈물을 닦아준다. 그래도 그녀는 눈을 뜨지 않는다. 혹시 잠들은 것이 아닌가 싶어 어깨를 잡고 흔든다. 아직 작은 자신의 손에 그녀의 어깨가 들어온다. 매우 마른 어깨. 손을 가린 옷자락을 들어보니 잔 상처가 가득하다. 자세히 보니 목안쪽에도, 팔안쪽에도 바늘 자국이나 할퀸자국 등의 매질의 흔적이 보인다. “아픈거야? 누가 때렸어?” 여전히 여인은 대답이 없다. 그 파란 안색이 안좋아보여 갑자기 겁이 덜컹난다. 서둘러 그녀에게서 등을 돌린다. 이곳에서 얼른 도망쳐야 겠다는 생각이 들뿐이다. 다시 붉은색 나무로 깔린 길을 되달린다. 푹하고 누군가의 치마가 앞을 가린다. 고개를 올려 들어보니 한 중년 여인이다. “누구지?” 그녀는 고개를 숙이자 궁녀들이 친첸을 바로 세운다. 친첸이 입은 옷을 보고 그녀는 고개를 갸웃한다. “왕자중 한분이시군. 하지만 이쪽 궁에서는 보지 못한 분인데. 어디서 오신겁니까 전하? 배분이 어찌 되십니까?” “비켜!” 그녀를 뒤로 밀친다. 뒤로 밀려넘어진 그녀는 균형을 잡기 위해 손으로 땅을 집는다. 그녀가 손에 든 것에서 울음소리가 들린다. 어린아이의 울음소리에 친첸은 크게 비명을 지르고 만다. 모든게 답답하고 암울하다. 어째서 난 이곳에서 지내야하는건지, 왜 남들이 생각할수 없는 것을 생각해야하는건지. 왜 날 낳은 여자도, 남자도 자신을 미워하는 건지 모르겠다. 크게 울부짓는 친첸을 보고 당황한 중년 여인은 서둘러 안쪽으로 들어가버린다. 남은 궁녀들이 친첸을 달래기 시작한다. 멍하니 하늘을 보는 마고에게 친첸이 다가간다. “창출과 있을줄 알았는데.” “혼자 있고 싶어하더군요.” “그래서 여기 혼자 청승떠는거냐?” 마고의 옆에 친첸이 앉는다. 모시는 사람과 나란히 배석하는 일은 예의에 어긋나지만 여전히 친첸은 그런 것 따위 신경쓰지 않고 자신도 익숙해졌다. “표정 풀어라. 여름이 오다 도망가겠다.” “...” “왜? 창출의 입에서 너 아닌 다른자의 이름이 오르니 기분나쁘냐?” “...엿들으셨군요?” 기분 나쁘다는 어투로 말한 마고는 자리를 피하려고 한다. 하지만 친첸이 재빠르게 그 옷자락을 잡고 다시 앉게한다. “일부러 들으려고 한게 아냐. 그렇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는데 밑층에 있던 내가 안들릴턱이 있나. 그래, 내 아이라니. 수해에게 형제가 있었나?” “...동생이 있다는군요.” “과연. 그 아이가 너와 닮았다는건가?” “아뇨. 하나도 닮지 않았습니다.” “봤구나?” “예.” 무심한 표정으로 마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황제의 축일날 본 파란 옷의 아이는 자신과는 전혀 달랐다. 작은 키에 병약해보이는 피부에 여린표정의 얼굴, 새까만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 “어떤자인데?” “그냥 선비였습니다.” 행동하는 하나하나가 꿀림이 없고 자신만만하고 도도하다. 그렇겠지. 저런 형의 밑에서 좋은 부모님의 아래에 막내로써 사랑받고 자랐으니 뭐가 두려울까 싶다. 힘든것도 어려운것도 형이나 다른 사람들이 도와주며 자란 곱상한 도련님이니 그럴만도 하지 싶다. 자휼이 걱정하는 것처럼 자신은 아무것도 못하니 남이 와서 해주기 바라는, 그것이 당연하다고 믿는 온실속의 화초처럼. 배고파본적 없고 추워본적도 없는 것 같은, 이질감이 든다.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잘났다는 표정이 그의 얼굴이 자꾸만 떠오른다. -내...아이를 사랑한다. 자신을 밀치고 외치던 그 말이 자꾸만 울린다. -사랑합니다. 내 아이를 사랑한다구요. 빌어먹을 듣고 있는거 다 알아요. 정말로 사랑한단 말입니다. 들었어요? 사랑한다구요. 사랑한다구요. “흐음. 창출의 동생이라면 장수일줄 알았는데. 선비라니. 그거 참. “사랑이라...” “응?” 어째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체 사랑받을수 있는거지? 마치 선택받은 자처럼, 애초에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는 건가? 이해할수 없는 울분과 짜증이 가슴을 답답하게 한다. 친첸은 물끄러미 마고를 바라본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그가 풍기는 분위기에서 그다지 좋은 것이 아님을 짐작한다. “마고. 그만해라.” “예?” “답답한 것 같구나. 어때? 사냥이라도 나갈까?” “하지만...말을 살펴봐야하고.” “우승안해도 좋다. 어차피 황제를 이길만한 간큰놈은 없으니까.” 친첸을 손을 내밀어 마고의 손을 잡아 일으킨다. “그리고 말보다는 너와 노는게 더 재미있지.” “...말입니까?” “뭐?” “아닙니다.” 친첸은 먼저 등을 돌려 밖으로 나간다. 마고도 따라 나가려는데 품안에서 뭔가가 떨어진다. 붉은 부채다. 그것을 주어들고 펼쳐 그 안의 글자를 읽는다. 천애여비린. 곰곰이 생각하다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다가간다. 이층으로 올라가 수해의 방문을 열고 부채를 건내며 한마디 하면 되겠지. 이거, 기산에서 산것인데 아마도 수해의 동생이 보낸 것 같다고, 장사치가 그렇게 말하더라고. 나는 글을 본김에 수해생각이 나서 대신 사왔다고 하면 되겠지. 내가 왜 그렇게까지 해야하는데? 부채를 든 손에 힘이 들어간다. 얄미운 막내 도련님을 위해서 내가 왜 그렇게까지 해야하는데? 왜 내가 그들사이에 껴서 바둥거려야 하는거지? 자신이 왜 이 부채를 샀는지 이해가지 않는다. 멀리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다. 마고는 계단을 잠시 노려보다 고개를 돌려 밖으로 뛰어나간다. 품안에 다시 부채를 넣어버린다. 어둠이 깊게 깔린 황궁의 높은 지붕에서 황성을 내려다보고 있던 백발의 사내는 슬픈 표정을 짓는다. 하늘의 별은 너무나 선명하게 그 빛을 내려주는데 사내의 표정에 드리워진 그림자는 너무도 어둡다. 얼마전 비가 내려서인지 바람이 무척이나 청명하다. 저 멀리어디선가 풍경이 우는 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돌리자 황궁의 가장 안쪽에 있는 건곤궁의 높은 건물이 보인다. 그 푸른 지붕에 인상을 쓴 사내는 일어나 지붕을 타고 움직인다. 날렵하게 지붕과 지붕을 건너 뛰어 땅으로 내려와 성각헌의 마당으로 뛰어내린다. 이미 밤이 깊어진 이곳의 모든 불은 꺼져있다. 조용히 걸어 자신의 방으로 향한다. 으르렁 거리는 낮은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커다란 호랑이가 자신을 노려본다. 사내도 호랑이를 노려본다. 한참을 그렇게 눈싸움하던 둘은 호랑이가 고개를 숙이고 사내의 다리에 머리를 부비비는 것으로 끝난다. 거칠게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던 익은 낮게 웃는다. “녀석이 돌아와서 널 보면 더 이상 한방에서 자고 싶지 않아할걸.” 하지만 호랑이는 낮게 가르릉거리며 기분좋은 표정을 지을뿐이다. “사람도 너무 빨리 변해 못알아보는데 너는 더욱 그렇구나. 품에 안기던 놈이 벌써 집채만해졌다니...”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익은 몸을 숨긴다. 하지만 바람소리였던지 아무도 나타나지 않는다. 익은 손짓으로 호랑이를 부른다. “오늘은 내방에서 재워주마. 하지만 새벽이 되면 밖으로 나가야한다.” 복도를 올라 걸어 자신의 방문을 연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지만 호랑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설마하며 구석을 돌아 자례의 방문앞을 바라보니 여전히 그림처럼 그 앞에서 옆으로 누워 팔에 얼굴을 올려놓은 호랑이가 보인다. “이리와.” 하지만 고개를 들어 잠시 익을 볼뿐 일어나지는 않는다. 익은 한숨을 쉬며 호랑이에게 다가가 그 등을 기대고 복도에 앉는다. 구름사이에서 달이 나오자 파란 달빛이 사방을 밝힌다. 달을 올려다보는 호랑이의 눈에도 달빛이 들어간다. 말못하는 짐승이라고는 하나 그 눈에 들어있는 감정이 달빛에 호소해 익은 미소짓는다. “여길 나가서 달리고 싶지?” 한숨을 쉰 익은 자신도 달빛에 호소한다. 이곳에서는 살수 없습니다. 아무리 큰 우리라고는 하나 어찌 이곳에서 살수 있단 말입니까. “하지만 그놈은 돌아올꺼야. 그런 놈이니까. 너도 이렇게 기다리니까 말이다. 사실 너도 그 아이의 몸에서 초지의 향이 그리운거지? 신기하단 말이야. 사람한테서 쓰면서도 단 초지의 자유의 냄새가 풍기잖아. 마치...동물처럼 말이야.” 맞다는 듯 호랑이가 크릉거린다. 미소지은 익은 다시 달을 바라본다. 달님, 달님. 우리는 이곳에서 살수 없습니다. + 천조제와 아골태의 이야기가 진짜인지 궁금해 하시더군요.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요나라의 야휼연희, 천조제는 거란인이다. 어느날 천조제는 송화강 지류에서 낚시를 즐기고 있었다. 그 소식을 들은 요나라의 수장과 관리들이 문안과 하례를 드리기 위해 멀리서 달려왔다. 마침 근처의 여진족의 축제일이여서 천조체는 연회를 열게하였다. 천조제는 각 지방의 수장들에게 차례대로 일어나 춤을 추어 자신을 기쁘게 할 것을 명하였다. 하지만 건장한 한 수장은 고개를 저으며 춤을 출 것을 거부하였다. 분노한 천조제는 재삼명령했으나 수장은 완강히 거부하여 꼼짝도 하지 않았다. 천조제는 분노하여 수장을 죽이려고 했으나 추방으로 대신한다. 그 수장이 바로 금나라의 태조 완안아골타이다. 그는 이미 그 강직함과 용감성으로 여진족의 큰 옹호를 얻고 있는 뛰어난 수장이였다. 당시 거란족은 여진족을 다스리는 제도로 생여직(生女直:요국에 이주하여 국적부여.)과 숙여직(熟女直:원래 거주지에서 국적만 부여)으로 나누어 다스렸는데 아골타는 생여직의 수장으로 그 세력이 강대했다. 천조제가 아골타를 죽이지 않고 놓아준 까닭은 당시 요나라의 여진에 대한 핍박이 심했기 때문에 수장의 죽임으로써 요에 대한 방항심이 커질까 두려워 했던 것으로 볼수 있다. 하지만 이때 살려준 아골타는 이후 각부를 통일하고 세력을 키워 요나라 동북변을 공략하기 시작한다. 이때 천조제는 이일을 기역하고 친히 정벌에 나섰으나 대패하고 남은 거란인들을 모아 서쪽으로 도망처 서요를 세워 항거한다. 약 11년간 항거하지만 1125년 금군에게 잡혀 만주에서 죽는 것으로 요나라는 끝난다. 결론은 진짜라는 이야깁니다.요즘 바빠서 역주를 달고 있지 않습니다. 궁금해서 잠이 안온다하시는 분만 메일을 보내세요. ^_^; 190 교소는 머리를 올려 몪고는 방문을 연다. 마당에서 화단을 감상하는 왕형이 보인다. 가까이 다가가지만 왕형은 눈치재지 못한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는다. 바람이 불어 교소의 치맛자락이 왕형의 등을 치자 그제야 뒤를 돌아본다. “언제부터 와있었나 교소?” “아까부터요. 무슨 생각을 하고 계셨던 겁니까?” “흐음. 예전에 만났던 그 검은 옷을 입은 사내.” “아아...” “도대체 누구였을까?” “한족이 아닐까요?” “머리를 풀러내린 것을 보아 한족은 아닌것같았어. 피발은 우리네 전통이잖아. 오히려...정안인이 아닐까 하는데. 고려로 망명해왔던 고구려 유민들과 꽤나 흡싸한 면이 있어.” 교소는 고개를 끄덕여 수긍한다. 왕형은 가만히 꽃을 바라보며 웃는다. “굉장했지?” “예?” “짜증나더군. 내말에는 꼼작도 하지 않던 사람들이 신원도 정체도 알수 없이 불쑥 튀어나온 그자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다니 말이야. 난 그 마을에서 일주일이나 있었는데.” “...” “내가 매력이 없었나. 정말로 지휘력이 떨어지는지도 모르지. 그거 영 어렵네.” “도련님은 귀하신 분입니다.” “뭐, 형이 대단하지 내가 대단한가.” 왕형은 손을 털며 일어난다. 그 검은 눈동자. 부드러운 미소속에 숨겨진 호랑이같은 이면과 처음보는 자들을 통솔하는 매력. 걸음걸이의 당당함과 단지 서 있는 모습에서 풍기는 고귀함이 자신을 압박한다. “뭔가 그냥 돈있는 풍류객은 아닌 것 같던데. 그 느낌은 뭐랄까...” 지배자라고 할까. “흠. 뭔가 내가 많이 지고 들어가는 느낌인데.” “무슨 말입니까 도련님?” “아무것도. 아참 교소.” “예?” “그자 옆에 있던 회색옷의 여인봤나?” “예.” “참 미인이더군.” 왕형은 다시금 반복한다. “참 미인이더란 말이야.” 여관은 긴머리를 풀어 다시 빗는다. 천천히 손가락으로 머리사이를 정리하는 모습이 사뭇 아름다워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 시선을 느꼈는지 여관은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짓는다. 하류사가 그 눈을 피하지 않자 여관은 일어나 그 앞으로 다가와 앉는다. 조심스럽게 서로 마주본다. 하류사가 손을 내밀자 여관이 눈을 감는다.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그 뺨에 손을 올려 쓰다듬는다. 입을 맞추고 어깨를 어루만진다. 옷자락사이로 손을 넣어 피부의 따뜻함을 느껴보고 향을 맡는다. 여관의 손이 하류사의 허리띠를 푼다. 거칠게 올라타는 것은 여관이다. 배에 오른 여관은 하류사의 가슴을 지긋이 누르고 그 검은 눈매를 바라본다. 눈물이 눈에 고여 하류사의 가슴위로 뚝뚝떨어진다. 손을 올려 여관의 머리를 가슴으로 당기는 왕씨의 표정은 무표정하다. 여관이 몸을 휘고는 하류사의 목으로 입을 가져온다. 그리고 힘껏 물어뜯는다. 찣겨나간 목에서 피가 흘러 단상위를 내려 흐른다. 방안이 피로 가득찬다. 점점 피가 고여 하류사의 몸이 피에 잠겨 사라진다. 입에 피가 맺힌 살점을 물고는 여관은 식어가는 왕씨의 몸에서 소리없이 눈물흘린다. 툭.드드륵. 하고 식어비린 왕씨의 손에서 나무 공이 떨어져 방안 저쪽으로 굴러간다. “왕씨?” 드드륵거리며 문이 열린다. 회색옷의 여관이 방안을 둘러본다. 방안은 텅 비어있다. 고개를 갸웃하는 여관에게 맞은편 방의 한 장수가 알린다. “마마님께선 오늘 아침에 강가로 나가셨습니다.” “저에게 아무런 말씀도 없었는데?” “여관께서 특별히 찾지 않으시면 말씀하지 말라하셨습니다.” “그런가.” 여관은 다시 방문을 닫는다. 그리고 서둘러 강가로 나간다. 낮은 물이 청명하게 흐르는 버드나무 밑에서 땅에 끌릴듯한 치렁한 검은 머리를 가진 사내가 커다란 바위위에서 바람을 즐긴다. 풀린 머리카락이 검은비단의 장막처럼 바람에 따라 춤춘다. 눈을 감은 사내의 모습에서는 조금의 움직임도 보이지 않아 전설에서 나오는 신선같다. 강가로 나와 님을 보고자 했던 아가씨들이 얼굴을 붉히며 그림같이 아름다운 사내의 얼굴을 훔쳐본다. 하지만 몸에서 풍기는 이질적인 느낌에 섯불리 다가서는 아가씨들은 없다. 등을 흘러 바위를 타고 내려와 물위에서 흔들리는 머리카락이 유혹적이다. 사내들도 멈추어서서 이 정체를 알수 없는 자의 모습을 감상한다. 회색비단옷을 입은 여인이 그에게 다가간다. 사뿐히 걷는 여인의 모습에, 주저하지 않고 다가서는 모습에 두 사람의 사이를 짐작시켜 모두들 한숨을 내쉰다. 여관은 신을 벗고 바위근처로 다가간다. 올려잡은 치맛자락아래로 보이는 하얀 발에 이번엔 다른 시선으로 사람들이 주목한다. 물에 흘러가는 머리카락을 모아 들고 바위위로 올라간다. 하류사의 뒤에 앉아 그의 머리의 물을 털어낸다. 바위위에 잘 널어놓고는 부른다. “왕씨, 언제부터 이곳에 계셨습니까?” “아침부터요.” “찾았습니다.” 그말에 하류사가 눈을 뜬다. 천천히 허리의 긴장을 풀고는 고개를 돌려 여관을 바라본다. “오걸매 일이라면 알고 있습니다.” “도와주지 않아도 될까요?” “...” 아무말없이 하류사는 멀리 강건너의 산을 바라본다. 여관은 조용히 그의 다음말을 기다린다. 문득 여관은 길이가 틀린 머리카락을 보고는 묻는다. “여기를 자르셨군요.” “아. 조금. 그림자가 필요해서 말입니다.” “...?” “호북은 영원히 봄이 오지 않는 곳이지요. 이일로 후끈한 여름이 올지도 모르지만.” 하류사는 그저 웃는다. 여관은 그가 생각하는 것을 알아내기 위해 곰곰이 생각에 잠긴다. “여관.” “예.” “나는 백성들을 위하는 명군이 될 수 있을까요?” “왕씨...” “아니라면 내 욕심에 취해 백성을 괴롭히는 폭군이 되어버릴까요?” 여관은 단호한 표정을 짓는다. “현군이 되실겁니다.”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내가 하는 일은 폭군과 다를바가 없군요. 그것이 아무리 날위해 목숨을 내놓은 자들이라 하더라도.” “사람은 결국은 죽습니다. 그 죽음을 왕씨께서 값지게 해주신다면 누구라도 웃으면서 가게 되겠지요.” “...값진 죽음이라.” 여관조차도 알아낼수 없는 표정을 지은 하류사는 그만 일어나 여관의 손을 잡는다. “돌아가십시다.” “무슨 걱정을 하고 계시는지요?” “아무것도.” 두 사람은 천천히 화원으로 향한다. “가끔은 내가 너무 나쁜놈 같아 스스로가 미워질때가 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시다니 다시 어려지시는 건가요.” 살웃음을 지은 여관은 잡은 하류사의 손에 힘을 준다. “이제 악몽은 어떠하십니까?” “아아. 이젠 더 이상 그것을 볼일은 없을겁니다.” “예?” “서로 잘 지내겠지요.” 여전히 이해할수 없는 말을 한 하류사는 차분하게 걸어갈뿐이다. 여전히 그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은채. 191 불안한 표정으로 좌우를 돌아보던 마유에게 후소가 따금하게 한마디 한다. "그만 뒤. 정신 사납다." "하지만, 하지만 상대가 상대인지라 불안한 것을 어찌합니까." "잘 될 것이다. 유번님은 만만하지 않아." 채연한 답변에 마유는 어쩔수 업다는 듯 자리에 않지만 표정은 역시 초조하다. 차를 어섯잔이나 마시고 나서 주전자가 빈 것을 흔들어보고는 또 다시 일어나서 불안하게 군다. "잘 될까요? 황제는 만만하지 않을 겁니다. 행여라도잘못된다면.. 너무 오래걸리지 않습니까?" "황제를 만나기 위해선 여섯번이 넘는 방을 거처가며 몸수색을 당해야 하니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잘못되진 않았을거야. 잘못되엇다면 지금 유번님을 기다리는 우리부터 무사하지 못했을꺼니까." "그렇긴 하지만.." 여전히 불안해 하는 마유의 귓가에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리낟. 벌떡 일어나 문을 열어 마중하니 약간은 놀란 표정의 유번이 흰색의 예복을 입은 모습으로 들어온다. 후ㅗ가 기대었던 창틀에서 몸을 세운다. "수고하셨습니다." "잘 되었나요?" "그래." 유번은 무거운 백관을 풀고는 두팔을 벌린다. "앞으로는 날 계주태수라 부르게." "성공하셨군요!" "호들갑은 어차피 성공할수 있도록 되어있던 것을세. 걱정할 필요는 없었어." "하지만 유견님이 유번님께 부슨 일이 생기면 절 가마두지 않으시겠다 하겼는걸요." 마유의 울상된 표정에 모두들 낮게 웃는다. 후소가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그럼 조만간 큰 선물을 들고 이리고 달려오겠습니다." "벌써 가려나." "곧 올텐데요. 뭐, 참 다시 오면 이쪽도 복잡해지겠습니다? 그놈의 상대를 보긴하셨습니까?" "아아, 성혼말인가? 자휼놈이 궁금해 하던가?" "뭐,그럭저럭." 말꼬리를 피하는 후소를 보고 마유가 고개를 갸웃한다. "성혼이라면 죽은 낭성태수의 손텨딸과 자휼을 말하는 것이지요? 이곳으로 올라오기 전에 만났던 부인말입니다." "그래." "이야, 걱정했습니다." 다행이란 표정으로 마유는 씨익 웃는다. 무슨 말이냐는 듯 후소와 유번이 어깨를 우쓱인다. "사실 전 자휼이 거부할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다 제 노파심이였나 보지요, 다행이군요." "...왜 거부할거라 생각했는데?" 날카롭게 후소가 고개를 돌리며 반응한다. 후소의 반응에 약간 놀란 마유는 멈칫하고 자신이 말 실수를 한것가 싶어 유번을 바라본다. 하지만 유번 역시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볼뿐이다. "뭐..그냥요.아, 그러니까 별것은 아닙니다. 그냥..자휼의 나이도 있고 하니 누군가 한명정도는 마음에 품은 인연이 있을지 모를까 하는 생각이였을 뿐입니다. 품고 있는 인연이 있는자에게 생각지 못한 인연을 강요한다는 것은..몹쓸일이 아닙니까." "그러고 보니 그렇군." 유번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후소를 바라본다. 멀뚱하니 유번과 마유의 시선을 받던 후소누ㅡㄴ 피식 웃어버리고 만다. "아무말 없는 것으로 보아 없나보지요." "그거 다행이네요." "말할수 없는게 아니라?" 하얀색 예복을 벗으려 등을 돌린 유번이 중얼거린다. 그말에 후소가 인상을 쓴다. "무슨 뜻입니까?" "그냥, 예전에 알던 어떤 놈과 비슷한 눈을 하고 있던 놈이라서 말이다." ".. 자휼을 만나보신 적이있으십니까?" "외팔에 얼굴이 흉진놈 말하는 것이 아닌가. 이 일이 시작되기 전에 곡양으로 달려왔던 적이있지. 자례가 어디 있는지 아느냐고 얼굴이 새파랗게 변해서 말이야. 그때 한번 스쳐봤을 뿐이네." "한번 본 것으로 사람의 심중을 알기는 어렵지요." "두번째로 보면 다를지도 모르지 않나." 후소가 그 부드런운 얼굴에서 표정을 지우고 유번으 등을 노려본다. 옷을 벗어든 유번도 인상을 쓰며 그를 노려본다. "어찌되었건 자휼의 이번 성혼은 꼭 필요하니 더이상 말을 사지 않겠네. 하지만 자네가 이번 일로 인해 그 냉철함이 흔들리지 않길 바랄뿐이야." "그런일은 없습니다." 단호하게 고개를 흔든 후소는 다시 특유의 실웃음을 짓는다. "자휼의 상대는 어떤 여인입니까?" "늙은이가 말해서는 상대가 되나. 마유가 마라해주게." 뻘쭘하게 들의 신경전을 보고 있던 아유가 그 말에 어깨를 으쓱한다. "올해 29되는 전형적인 한족여인입니다." "아이는?" "15살되는 맏딸과 10,8살된 두 아들이 있습니다. 근처의 호족에게 조혼을 했다가 사내가 화적에게 죽은 모양입니다." "친척들은?" "이미 이혼한 상태니 시가쪽은 신경쓰지 않아도 되고, 친가로는 남아있던 자가 낭성 태수였는데 그는 이미 죽었으니 전 기주 태수님과 현 기주태수가 되셨다 함은 전 계주태수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말에 유번은 어깨를 으쓱한다. "낭성으로 갈 것 같더군." "낭성은 14앙자가 이미 들어갔지 않습니까?" "태수나 관리가 아닌 호족으로 들어갈 생각인 것 같다. 히긴 노후를 보내기엔 좋은 곳이 아니던가." "왕씨께서 특별한 말이 없으셨나요?" "아직까지는." "그럼 가보겠습니다." 벌떡 일어나는 후소는 고개를 꾸벅이고는 창밖으로 훌쩍 나가버린다. 그가 사라지고 한참 지나서야 마유는 인상을 쓰며 중얼거린다. "아까 무슨 말슴을 하신 건지..원래 사이가 좋으신 두 분이 아니셨습니까." "아아. 그야 저놈에게 글을 가르친 것이 나니까 내가 미워할 리가 있나." "하지만.." "자네는 몰라도 되는 일이네. 개인적인 일이니 말하고 싶지 않군." 딱 잘라버린 유번은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방문을 연다. "자, 유린 계주로 돌아가자. 내가 계주의 주인이 된 이상 화적과의 다툼은 이제 끝이야." 아골타는 턱을 쓰다듬고는 고개를 갸웃한다. 너무나 아귀가 맞아 떨어져 으ㅟ심스럽지만 추긍할만한 허점은 나오지 않는다. 계주에다 황족을 넣으면 황권에 힘이 되는 것은 정설이나 아직까지는 그곳을 인수할만한 왕자는 없다. 그렇다면 실력있는 호족에게 맡기는 것이 현명한 판단이다. 계주는 레이첸 놈이 분주할때 생각해 보려고 했는데. 하지만 곧 생각을 지운다. 그러고보니 야인성으로 오지 몇일이 지났지만 레이첸의 소식이 전혀 들려오지 않는다. 평소의 축제라면 자신이 양인성으로 오기도 전에 기주에 도착해 말들을 밸불리 먹인다하며 근처의 농가에 피해를 입혀 기주태수가 매번 상소를 올리곤 했었다. 듣자하니 14왕자놈하고 4왕자가 친하다고 하던데. 이번에 낭성쪽으로 부주한 놈이 14왕자였다. 기주와 가까운 낭성이 레이첸놈이 낭성쪽에 들어가 꼼짝을 하지 않는건가. 팔다리를 쭉 뻗는다. 양인성은 예전과 다를바가 없다. 적오도 자신이 보기에는 그렇다. 좀더 번화하고 시끄러운듯하지만 그것은 성이 좀더 커가는 과정일뿐이다. 힘을 기르기 위해 군량이나 무기를 사들이는 못브은 살펴볼 수 없다. 결국 3왕자는 포기한건가. 피식 웃음이나온다. 그럴리가 없다. 아마도스스로 자중하고 있을것이다. 자신이 죽여버려 대사를 도모할 그날을 말이다. 체이첸과 테천의 신경전을 자신이 모를리가 없다. 그리고 아직까지는 확실히 체이첸이 유리하다. 하지만 한족의 피를 받은 태천은 그 속을 알수가 없을때가 있어 불안하기도 한다. 차기 후계를 위해선 친첸과 태천은 살려 두어선 안된다. 가만히 눈을 내리깐 황제는 또다시 생각에 잠긴다. 일을 만들어야 한다. 1왕자때처럼 나 자신을 자극해 울화로 죽이는 것도 한계각 있다. 정정당당하게 놈들을 없애버릴만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무료할 정도로 천하는 평이하다. 예전같으면 화적땓, 소수 민족들의 반란도, 송나라의 고역도 있었을테지만 무슨일인지 화적때는 어느날 절반이상이 사라졌고 소수 민족들도 조용한제다가 송나라는 오걸매놈이 잘 막고 있다. 꿍한데가 있다면 저쪽에서 아직도 황제라고 우기는 애휼연회가 문제인데 그것은 반드시 자신이 이루어야 할 일이다. 누구에게 위임하고 싶지 않다. 어서 빨리 후계를 정하고 내힘이 쇠퇴하기 전에 그 빌어먹을 늙은이를 죽여야 한다. 두손을 꾹 쥐어보인 황제는 인상을 쓴다. 몸이 예전깥지 않다. 물론 나이를 먹었으니 예전과 같은 힘은 나오지 않는게 당연하겠지만 이상하게 피곤하고 온몸이 저리고 나른한 것이 나날이 심해진다. 권력이 높아지면서 몸이 비대해지면서 자신은 점덤 장수의 그것에서 멀어져만 간다. 늙으면 순해진다는 건가. 약간은 서글퍼진다. 사람은 어쩔수 없이 죽는다. 죽기 싫어 발버둥쳤던 진나라의 시황제도 결국 죽었다. 그가 죽기전까지했던 그 추함은 글을 사라이라면 다 안다. 그 이후로 나라가 어떻게 망조가 들었는지도 자신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렇게 죽기는 싫다. 나는 절대로 그렇게 된진 않을것이다. 힘을 준 두손이 하얗게 변해버린다. 죽음이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육체의 죽음이란 사람을 겁먹게 한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그보다 더한 두려움이 있다. 사람은 정말로 죽어 혼이 되는가. 그리고 결국 다시 만나는가. 육체가 썩어 문드런진다 하더라도 이생에서 한 일의 업보를 이고서 또 다시 만나야 하는가. 그렇다면 그를 다시 만나는건가. 내 욕심으로 내가 죽인 그를 다시 만나는가. 내치기로 내가 죽인 그 많은 설객들을 다시 만나는가. 내가 잘라 천장에 매단 그 어린 소녀의 머리는 과연 몸에 붙어 있을까. 그는 아직도 건호의 찬 물이 떨어지는 읜 옷을 입고 있는가. 풀어헤친 검은 머리에 파랗게 질린 입술로 날 그렇게 원망어린 눈으로 바라볼텐가. 똑...똑... 동굴속을 거닐고 있느것과 같이 귓가를 울리는 물방울소리가 들린다. 누을 꼭 감았다 다시 드면 그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진시황제가 자신의 능에 그 많은 군대를 넣은 것은 바로 이것이 두려워서 였던가. 192 흐릿한 잔상에 눈썹을 치켜뜨지만 나아지지 않는다. 몇 번더 인상을 쓰던 레이첸은 화를 내며 탁자를 밀쳐버리려고 하나 손이 비켜갈 뿐이다. "그만두시오. 추하오." "뭐야!" 레이첸의 분노에 태진은 눈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태연하게 팔짱을 끼고 병색이 완연한 레이첸에게 충고한다. "목숨을 건진것만으로도 천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저 요양만 잘해서 더 이상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이 최선이 아니겠습니까? 화를 낸다 한들 뽑혀나간 눈이 다시 돌아와준답니까? 얌전히 누워서 배의 상처가 좋아진 후에 외눈에 적응하는 방법이 최선입니다." "빌어먹을!" "그럼 황제가 양인성에 들어간지 벌써 일주일이 되어가는데 슬슬 인사차 찾아가야지요." "싫어." "그럼 선물과 함께 서신을 보낼까요?" "됐어." "말을 모아두었우니 기주로 먼저 출발하세겠습니까?" "싫어." 무슨 말이냐는 듯 잠시 말을 멈추고 레이첸을 보던 태진이 조금은 신경질적으로 보고 있던 장부를 덮어버린다. "경마축제에 참가는 하실겁니까?" "이꼬로 나가라고?! 미쳤냐?!" 화를 버럭 낸 레이첸은 배의 통증에 몸을 잠시 웅크린다.